2021/04/03

2001 "한국은 기후난민이 되는 쪽, 멀뚱멀뚱 하는 게 위기" - ::: 글로벌 녹색성장 미디어 - 이투뉴스

[직격인터뷰] "한국은 기후난민이 되는 쪽, 멀뚱멀뚱 하는 게 위기" - ::: 글로벌 녹색성장 미디어 - 이투뉴스


[직격인터뷰] "한국은 기후난민이 되는 쪽, 멀뚱멀뚱 하는 게 위기"

이상복 기자
승인 2020.01.01 08:20
댓글 6


조천호 전 국립기상과학원장 (경희사이버대 특임교수)
서해 관측소서 온실가스 급변 확인 30년간 연구 천착
"기후위기 근본원인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 국가책임"
▲조천호 전 국립기상과학원장

[이투뉴스] “안면도가서 1년쯤 쉬다 와라” 인사권자(기상청장)에 자주 직언(直言)한 대가는 외딴 연구소로의 발령이었다. 2005년 국립기상과학원 안면도기후감시센터. 조천호 당시 기상연구소 과장의 새 근무지는 태안반도 서쪽 끝자락에 들어선 작은 관측소였다. 20여년간 ‘기상판’에서 날씨만 다루다 기후연구를 맡은 것도 처음. 하지만 격지 생활은 인생의 변곡점이 됐다. 예사롭지 않은 온실가스 변화를 직접 확인했다. ‘심상치 않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그에 대해 설명해주는 이도 없었고 스스로 설명하지도 못했다. 이태 전 국립기상과학원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내려올 때까지 기후연구에 천착한 이유다. 지난 21일 서울 통인동 에너지전환포럼 ‘공간 1.5’에서 조 전 원장을 만났다. 그는 ‘번잡하게 흩어진 앎의 조각들을 모으고 연결해(책 서문 中)' 작년 3월 <파란하늘 빨간지구>(동아시아)를 펴냈다. 2016년부터 신문과 웹진 등에 연재한 글을 다듬어 엮은 것이다. 최근 기후변화 대중강연 요청이 쇄도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과학은 물론 역사,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당면한 기후위기를 쉽게 풀어 설명해 줘 반향이 뜨겁다.



-15년 전 안면도에 내려가 확인한 건 무엇인가

“그전까지는 아무생각이 없었다. 왜 그런 시설(기후감시센터)이 있을까, 그냥 연구하는 곳인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예사롭지 않았다. 뭔가 있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됐다. 변화가 확확 보였으니까. 그래서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내 자신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직관적인 느낌과 인식으로 깨닫게 되어 아는 것과 그 차이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다. 지구 평균기온이 조금만 더 오르면 큰일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가을철엔 하루에도 20℃가 변한다. 우리보다 10℃ 낮은 북쪽나라에서도 잘 살고 있고, 반대인 남쪽나라도 살만하다. 그런데 왜 문제라는 걸까.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하나 스스로 굉장히 답답했다.”

- 기후변화와 거리가 먼 분야는 아니잖나

“논문에서 기후변화는 ‘악기상(惡氣象)이 많아진다’, ‘재해성이 많아진다’ 정도로 표현된다. 그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국내외 관련서적과 논문을 모두 찾아봤다. 그러면서 스스로 설명이 안 되는 부분들을 하나씩 채워갔다. 당시만 해도 IPCC(기후변화에관한정부간협의체)가 1990년대에 1차 보고서 낼 때 21세기말이 되면 경제성장을 지속하면서 온실가스를 줄이지 않을 경우 산업혁명 이후 평균기온이 4~5℃ 상승할 것이라고 했다. IPCC 보고서는 5~6년마다 업데이트 되는데, 그 내용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문제는 그게 급변적으로, 굉장히 파국적인 상황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거다. 지난해(2018년) IPCC보고서가 중요한 건 1.5℃ 이상일 때부터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경고한 거다.”

- 재앙으로 달려가는 속도가, 시간이 짧아졌다는 뜻인가?

“속도가 빨라진 게 아니다. 파국이 1.5℃ 이상일 때도 시작될 수 있다는 게 충격적인 내용이다. 과학으로 미래를 예측할 때 항상 불확실성이란 게 있지만, IPCC는 사실 매우 보수적인 곳이다. 전 세계 기후과학자들이 동의하는 내용만 보고서에 담긴다. 그러다보니 설령 합리적이더라도 누구나 인정하기 어렵다거나 검증이 안 되는 건 실지 못한다. 그런 부분을 미래 예측 시뮬레이션에 넣지 못한다. 가령 기후변화로 영구동토층이 녹아내릴 위험이 있다거나, 북극해의 메탄하이드레이트가 끓어오를 수 있다거나 그런 모델을 (시뮬레이션에) 걸 수 없다. 다 빠져 있다. 또 빙하가 녹아내리는 속도 계산 역시 두께가 2~3km에 달하고 폭이 수천km인 것을 표면부터 녹는다고 가정하고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수면이 20cm가 올랐으니까, 앞으로 금세기말까지 90cm가 더 오르는 상황이 시나리오상 극단이다.”

-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사탕을 입안에서 녹이면 천천히 오래간다. 그건 과학으로 온도 등을 측정해 정확이 계산할 수 있다. 빙하가 녹는 것도 그렇다. 문제는 그 빙하가 불안정해져 깨지고 쪼개지는 상황이다. 입안의 사탕을 깨무는 순간 표면이 늘어나 순식간에 녹는다. 그런데 우린 빙하가 언제 어떻게 깨질지 모른다. 그런 건 예측의 범주 안에 없다. 그런 걸 하나도 고려하지 않는 예측모델을 쓰고 있다. 우리의 예측은 운에 맡기는 수준이다. 지금 예측하는 건 가장 기본적인 위험 수준이다. 거기에 더해지는 위험이 있다고 보는 게 맞다. 과학에선 검증도 안되고 불확실한 것은 시뮬레이션에 넣을 순 없으니 다 뺐다. 현재의 위험이란 건 그런 거다.”

- 2018년 인천 IPCC 총회는 어쨌든 1.5℃ 이내로 막아야 한다고 했다.

“불확실성을 고려하지 않은 예측모델로도 1.5℃ 상승에 파국이 온다는 뜻이다. 온도가 조금 더 오르면 폭염이 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네이처>에 실린 논문을 보면 단 0.5℃만 올라도 식량부족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3500만 명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0.5℃가 더 올라 2.0℃가 되면 농업생산량 변화가 크게 일어나 3억6000만 명이 기아에 시달리게 된다. 만약 3.0℃가 오르면 그 수가 18억 명에 달하게 된다. 이건 어떤 한사람 연구결과를 정리한 게 아니다. 여러 연구결과를 모아 정리한 거다. 그런 기아사태가 벌어지면 사회 불안정은 어떻겠나.”

- 0.5℃ 변화가 그렇게나 위험한 건가

“시리아 난민 사태는 2010년 러시아 가뭄으로 밀가루 가격이 몇 달 새 60% 폭등하면서 시작됐다. 이미 2005년부터 가뭄이 들기 시작하는 상황이었는데, 소득의 대부분을 식량구입에 사용하던 가난한 이들이 가격 폭등을 참지 못해 폭동을 일으키고, 그게 내전으로 이어져 IS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내전을 피해 식량을 구하려는 이들이 난민이 됐다. 그들이 유럽으로 밀려가니 유럽연합에선 국가안보의 문제가 됐다. EU국가들이 분산해 수용하자고 했는데, 영국은 난민을 안 받겠다면서 블렉시트를 선택했다. 러시아의 가뭄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새로운 문제로 파생된 거다. 앞으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증폭돼 일어날 거다. 단순하게 0.5℃ 가 올라가는 문제가 아니다. 악기상이 약간 늘어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 불안정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과거 역사로 볼 때 그럴 때 국가나 사회가 아끼고 나누면서 문제를 해결한 적은 없다. 전쟁을 벌였다. 굉장한 사회불안이다. 위기는 그런식으로 온다. 지금보다 단 0.5℃가 오르면 그런 위기가 올 수 있다. 모든 데이터가 그렇다고 말한다.”

- 국부(國富)가 넉넉한 나라는 좀 낫지 않을까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은 25%에 불과하다. 지금이야 반도체나 스마트폰, 중화학공업을 수출해 식량을 수입하면 된다. 러시아도 가뭄이 있기 전 밀을 수출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자급도 어려워지자 수출을 못했고, 전 세계 밀가루 가격이 올라갔다. 물론 현재 식량의 4분의 1은 쓰레기로 버려지는 상황이라 총량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곡물은 투기자본이 매달려 있어 1%만 과잉생산만 해도 가격이 폭락하고 반대의 경우 폭등한다. 생산량에 따른 가격 민감성이 높다. 가난한 나라가 먼저 피해를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전 지구적 수급에 문제가 생긴다면 얘기가 다르다. 지금처럼 우리가 수출을 통해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을까? 0.5℃가 올라갈 때마다 기아자가 3500만명에서 3억6000만명으로, 다시 18억명으로 증가한다. 그 얘긴 이런 일이 아시아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 아시아, 특히 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란 얘긴데

“올초 호주 안보전략가들이 기후보고서를 냈다. 언론에서 잘 다뤄지지 않은 내면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대륙에서 사는 이들은 자기들 머리 위에 사는 35억명을 걱정한다. 인구밀도도 높고 아시아몬순이란 비로 농업생산을 해 먹고 사는데, 본격적인 기후위기로 진입하게 되면 아시아몬순 자체에 문제가 생겨 상당히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기근사태가 일어날 것으로 본다. 강수대 폭이 변하면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있다. 보수적으로 예측한다고 해도 그렇다. 다만 그 숫자가 1억명이냐, 5억명이냐 그런 불확실성은 있다. 호주입장에선 나중에 배나 비행기를 타고 난민들이 이들 지역서 몰려올 수 있다고 걱정하는 거다. 그렇게 됐을 때 어디서부터 차단해야 하나 뭐 그런 걸 걱정하지 않겠나.”

- 한국이 기후문제의 원인자란 생각은 해봤어도 피해 당사자가 될 것이란 생각은 못해 봤다.

“결국은 배고픔의 문제, 식량부족의 문제다. 그렇게 난민이 된다. 이미 미국도 2000년대 초반 그런 대응 시나리오를 만든 적이 있다. 먹을 게 부족하면 사회가 극도로 불안정해지고, 결국 그 땅을 떠나 살만한 곳으로 몰리게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린 (난민)대상이 되는 쪽이다. 과연 억명 단위로 기아사태가 왔을 때도 수출로 식량을 구할 수 있을까. 곡물 수출국이 그 때가 되어도 안정적인 생산‧수출이 가능할지 따져봐야 한다. 그런데 그걸 걱정하는 이들은 따로 있고, 우린 멀뚱멀뚱 하고 있다. 이게 더 위기다. 기후위기가 문제가 아니라 기후위기를 인식 못하는 것, 그것이 진짜 위기다.”


- 우린 온실가스 다배출국가면서도 신규석탄을 건설하고 있다

“서구 투자사들은 석탄화력에서 자본을 모두 뺐다. 국부펀드도 더 이상 투자하지 않겠다고 압박한다. 세상은 그렇게 변하는데 대한민국은 과거 성공방식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 석탄발전소를 새로 건설하고,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가서 건설하도록 융자를 해주고 있다. 세상의 에너지 패러다임이 모두 변하고 있는데 ‘태양광판이 눈부시다’, ‘환경을 파괴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졸속도 있다. 하지만 전환이란 가치를 갖고 어떻게 보완할지를 얘기해야 한다. 태양광 패널은 지난 10년간 가격이 5분의 1이 됐고 배터리 가격도 급락했다. 이렇게 가격혁신이 일어나는 분야가 어디있나. 다른 주요국들이 어마어마한 혁신이라며,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린 과거의 성공만 쥐고 앉아 있다. 태양광을 하기에 국토가 좁다면 옥상이 벽면 등 굉장히 전환적인 준비들을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도 좌초자산이 될 석탄화력만 붙들고 있다. 과거 성공방식에 집착하는 시스템이다. 전환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젠 시장의 논리로도 들어가면 안된다.”

- 유독 한국서 에너지전환 논의가 정쟁화 되고 있다.

“원자력 같은 경우가 그렇고, 재생에너지도 그 수준으로 들어가 힘을 못 쓰고 있다. 원자력은 위험도 위험이지만 이미 시장논리로도 끝났다고 본다. 일본 도시바가 터키와 영국 진출했다가 수조원을 손실보고 나왔다. 우린 일부서 원전을 짓자고 하고, 수출산업화를 운운하지만 그렇게 이익이 남는 사업이라면 왜 그런 경쟁력을 놔두고 해외사업서 정부더러 돈을 대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옛 소비에트가 왜 망했나. 자본주의 논리에 그렇게 철저한 이들이 그럴 때면 소비에트 시스템을 요구한다. 그게 무슨 진짜 경쟁력인가. 원전을 최소 40년 가동한다고 하면 그 기간 다른 에너지는 어마어마한 기술혁신이 될거다. 지금까지의 성공방식이 앞으로도 지속될 거라고 보고 과거에만 집착하고 있다.”

- 한 나라의 사회‧경제 시스템은 관성이 클 수밖에 없지 않을까

“독일은 우리보다 위도가 높은 나라다. 그런데도 재생에너지 비중이 40%가 넘는 지역이 많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재생에너지가 10%를 넘어서면 기저전력이 불안해진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40%를 운영하는 단계다. 논문으론 100%도 가능하다고 한다. 10년 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기술혁신이다. 그간 원전은 기술혁신이 있었나. 이런 변화를 안 따라가고 파산자본이 될 여지가 큰 걸 계속 잡겠다는 거다. 또다른 측면에선 우리가 계속 이대로 가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앞서 말했듯 기후위기가 사회적 불안정성을 갖는 위험체계로 들어가게 됐을 때 전 세계가 화석연료를 보는 관점이 달라질 거다. 그땐 강제적이 될 거다. 그런 면에서 빨리 전환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굉장히 느긋하다. 위기가 2100년대에 일어난다는 가정에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유럽에선 태양광과 풍력이 어마어마하게 확산되고 있고, 미국은 파리협정 탈퇴에도 화석연료를 줄이고 있다. 우리나라만 한손에 원자력, 다른 한손에 석탄화력을 쥐고 있다. 우리 경제구조가 중국이나, 인도, 러시아가 아니잖나. 영토가 크고 인구가 많아 자체로 버틸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시다시피 RE100이나 국경탄소세처럼 우리가 변하지 않더라도 강제로 (변화)당할 상황이다. 유럽시장 하나만 잃어도 파산이 일어날 텐데, 그런 나라가 국경을 탄소가 넘어오도록 허용하겠나.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필연적으로 가야할 길인데, 전환하면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다고 하니 굉장히 느긋한 이야기로 들린다.”

- 빠른 전환을 위해 우리가 감수해야 할 부분은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1.5℃ 이내로 막으려면 엄청난 양의 탄소를 줄여야 한다. 2030년까지 전 세계가 2010년 배출량의 45%로 수준으로 줄여야 하고, 2050년에는 넷제로(순배출량 ‘0’)로 가야한다. 지금 갖고 있는 상식과 관성으론 달성하기 어렵다. 생각조차도 못해 본 수준이다. 지금은 전시상황이다. 줄여야 하는 양으로 따지면 매년 18%씩 감축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1998년 IMF 때 14%가 줄었다. 이젠 전 세계가 한꺼번에 그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 그러니 전시상황이랄 수밖에. 그런데 꼭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미국이 약간 늦게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모든 산업을 군수산업으로 전환하는데 걸린 시간이 불과 1~2년이다. 자동차를 만들다가 탱크를 만들고, 징집된 남성을 대신해 여성이 공장으로 들어가 일했다. 사회적으로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나 2년 만에 모든 산업구조를 그렇게 뒤엎었다. 수십년이 걸리는 일이 아니다.”

- 전시(戰時)라고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거다

“이 기회에 밀어붙여야 한다고 본다. 유발하라리가 쓴 <싸피엔스>엔 '허구를 발명한 인간이 위대하다'는 내용이 있다. 사실 돈이란 게 종이 쪼가리가 아닌가. 그러나 돈에 교환가치가 있고 물질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순간에 가치를 갖게 된다. 법전 역시 종이에 쓰여 있지만 사람들이 이건 지켜야 한다고 하면 우리를 지배하지 않나. 물질적인 것으로만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허구에 믿음을 부여하는 순간, 그래서 우리가 믿고 사람들의 신뢰가 한꺼번에 모아지면 불가능하지 않다. 그렇게 수십년씩 걸릴 일이 아니다. 문명도 그렇게 만들어진 것 아니겠나.”

- 어디서부터 돌파구를 찾아야 할까

“오늘날 기후위기의 근본원인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 탓이다. 현재도 식량의 4분의 1이 쓰레기로 버려진다. 공산품도 생산과잉이다. 그런데도 우린 여러 문제를 이야기 할 때 항상 경제를 성장시켜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경제성장이란 물질의 팽창을 더 시키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문제는 결핍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다. 이런 모순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 모든 일은 어떤 견제와 균형의 작업이 필요하다. 자본과 노동, 기업과 노동자 등 모두 타협점이 필요하다. 어떤 하나의 방향으로 결정할 수 없다. 그런데 유독 성장과 관련해서는 견제나 균형이 없다. 지구는 한계가 있고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 이 상태로 인구가 늘고 소득이 증가하면 당연히 에너지소비도 지금보다 많아지고 식량도 더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2차대전 이후 지구가 견뎌낼 수 없을 만큼 일을 벌리고 있다.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간 필연적으로 붕괴한다. 예를 들어 유리접시 안에 세균 한 마리 풀어놓으면 갑절로 불어나면서 증가해 접시 절반을 차지할 때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절반을 넘어서 한 세대를 넘어가면 모든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절멸한다. 역사적으로 봐도 과거 모든 문명들은 물질적 소비가 최고치에 이른 다음, 도시가 최대로 팽창한 다음, 복잡성이 굉장히 늘어난 상황에서 몇 십년 뒤 훅 하고 무너졌다. 지구는 거의 그 수준에 임박해 있다. 기후뿐만이 아니라 모든 시그널이 그렇다. 더욱이 과거엔 개별 문명이라 어느 한 곳이 무너지면 다른 문명이 일어서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묶여 있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순차적으로 다 같이 무너진다. 더욱이 우린 (붕괴하는)앞쪽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번 문명이 무너진다면, 인류문명의 붕괴가 아닐까 생각한다.”

- 욕망으로 가득찬 인류가 이런 미증유의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사회란 협력하고 연대하고 돌보고, 나누는 것이 최우선 가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싸게 에너지와 자원을 착취하고, 쓰레기를 버릴까 하는 시장논리 뿐이다. 안전하게 숨 쉴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지속가능한 안전보다 더 우위에 있는 가치가 있나? 그래서 유엔은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만이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공학적으로 어느 부분을 손보거나 개별적으로 온실가스를 줄여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분야의 모든 체계를 바꿔야 한다. 경제성장이 가파를수록 빈부격차는 커진다. 이제 뒤집어 생각해 볼 때다. 기후위기란 것 자체도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해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럭저럭 넘길 수 있는 위기라면, 위기인 줄도 모르고 넘어갈 수 있다. 오히려 기후위기 앞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생길 수 있다. 과거 역사를 보면 소빙하기 때 무척 어려웠다. 우리나라도 1700년대 경신대기근 당시 이조실록 보면 비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문명의 맥아가 탄생한 게 다 소빙하기 때다. 자기 땅에서 살만하다면 왜 영토를 개척하러 갔겠나. 지금의 위기라는 것도 또 한 번의 새로운 도약,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 수 있는 여지가 되지 않을까. 나누고 아끼는 그런 가치들이 다시 우선순위가 되는 사회로 만들어가는...”

- 온실가스든, 기후위기든 눈에 보이지 않아 개개인의 각성이 더 어렵다.

“어려운 문제다. 스모그든 수질오염이든 눈앞에서 보이는 어떤 피해가 일어나는 쉽지만. 기후위기는 과학자들이 연구하다보니 인지하게 된 거다. 이걸 전혀 인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는 상황인데, 인간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위험을 인지하고 대응하고 그렇게 진화되지 않았다. 몸은 현대를 살아가지만 아직도 구석기처럼 즉각적인 위험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응한다. 그런 면에서 기후위기는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위기다. 개인적으로도 질문한다. 이걸 어떻게 알리고, 모든 사람들이 깨우치게 할까. 하지만 모든 사람을 설득하는 그런식의 전환은 안 일어난다. 통계물리학자 김범진 교수에 따르면, 항상 3.5%가 완벽히 인식하면 뒤집을 수 있다. 지금은 그 정도 안된다는 얘기다. 국민 100명을 설득해 3.5명만 명확하게 인식시켜주면 해법을 찾아나갈 수 있다는 얘기다. 국가가 책임을 지고 끊임없이 깨우쳐 줘야 한다. 정부가 교육이나 합리적 대안을 통해 대국민 설득에 나서야 한다. 위험하니 이렇게 갈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시키는 작업들을 해야 한다.”

- 정부는 잘하고 있나

“기후위기는 근본적으로 대전환의 문제이기 때문에 전체 시스템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전혀 안한다. 일전에 환경부가 시민단체들을 향해 ‘여러분들이 열심히 활동해서 알려줘야 자기들이 힘을 받는다’고 하더라. 나도 공무원을 했지만 해도해도 너무한다. 올해 환경부 예산이 8조원대에 직원만 2500여명이다. 산하기관만 해도 수천명일텐데 어마어마한 예산과 인력을 갖고 기후변화 인지시키는 노력은 아무것도 안한다. 연구개발과 홍보에 아주 조금 예산을 둔 것 뿐이다. 기후위기 퀴즈를 맞추면 통닭을 보내주는 이벤트나 하고 있다. 기후위기 인식을 전혀 안하고 있다. 실제 공무원을 상대해보면 굉장히 민감해 해야 할 사람들이 일반 시민수준이다.”

- 언제까지 기후위기를 알리는 일을 할 예정인가

“제가 할 수 있는 역할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사실 지친다. 눈앞에 보이는 이 위기는 굉장히 절박한데 세상은 거의 반응이 없다는 것에. 하지만 전 긍정적으로 보려고 한다. 잘 해결만 한다면 더 좋은 사회로 갈 수 있다는 어떤 희망이 있다. 기후위기는 다음세대가 아니라 우리세대의 문제다. 굉장히 눈앞에 다가온 위험이다. 그런데 작년만 해도 지금처럼 얘기하지 못했었다. 작년 10월부터 위기 징후가 명확해 졌고, 앞으로 점점 더 명확해져 갈거다. 2005년부터 이 일을 했왔는데, 단 한번도 미래에 대한 전망이 과도해 본 적이 없다. 위기성이 훨씬 증가되는 양상이다. 급변적인 전망을 고려하지 않은 예측에서도 그런 결과들이 나온다.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 결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굉장히, 굉장히 절박하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조천호(曺千鎬) [He is...] 서울 출생으로 연세대에서 대기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6년 기상연구소에 입사해 지구대기감시관측소장, 지구대기감시센터장, 지구환경시스템연구과장, 예보연구과장, 기후연구과장 등을 지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기상청 국립기상과학원장(고위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 경희사이버대 기후변화 특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변화를 꿈구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SC) 부대표도 맡고 있다. 현직 기상과학원 연구원인 부인 전영신씨와의 슬하에 아들, 딸 자녀 둘을 두고 있다.
Tag#조천호#기후위기
좋아요93훈훈해요2슬퍼요11화나요1후속기사 원해요5
저작권자 © ::: 글로벌 녹색성장 미디어 - 이투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상복 기자다른기사 보기
관련기사[직격인터뷰] “한전 발전사업 허용은 시장 공정성에 대한 문제"[직격인터뷰] “월성원전 감사·수사는 민주주의 부정 행위”

댓글 6댓글입력
최신순추천순
정현옥 2020-02-03 21:39:48

더보기기막힌 글 입니다.
이렇게 명확하고 절실하게 기후변화의 위기에 대해 쓴 글은 접하지 못했습니다...널리 공유합니다.....기사,감사합니다답글쓰기
17 0
자재 2020-02-02 01:15:39
더보기백번 동감합니다
갈수록 급하게 변해가는 자연을 보면
섬찟해집니다
지도 20여년 전부터 일체의 세재를 사용하지 않고
일회용품도 안쓰며,
비환경적인 요소들을 제거해가며 살고있지만 너무 큰
불가항력을 느낍니다답글쓰기
10 0
홍성국 2020-01-29 16:17:58
더보기널리 공유하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쉬운 일 인것 같습니다
공유 합시다! 함께 협력하면 가능합니다!
초일류 무한경쟁교육으로 인간본능적 탐욕을 부추기는 교육제도를 바꿔야 가능합니다
입시제도 폐기하고 국공립 통합 네트워크 공동학위제로 똘똘한 인간교육과 연대와 상호 협력하는 상생교육을 통한. 협력시스템사회로 가야만 합니다답글쓰기
11 0
정선애 2020-01-04 14:40:36
더보기제발좀 정부와 우리모두가 힘을 합쳐 기후위기에 적극적인 대응책을 강구하고 온실가스 감축과 이산화탄소 발생원을 차단헙시다.답글쓰기
28 0
신주호 2020-01-04 11:55:13
더보기국해의원, 철밥통 공무원, 환경선동가들보다 이렇게 할동하는것이 중요합니다.답글쓰기
17 1
신민규 2020-01-03 21:14:49
더보기티비에서도 봣던 분이시네요. 대외활동으로 기후변화 관련해 캠페인을 꾸준히 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여야 믿더군요. 응원합니다.
아..기자님 기후변화와 기상은 유사분야입니다.
 

이인자 한살림광주 동학사상 다시읽기 제6강 원불교의 살림철학

Facebook

이인자
tSp5onhhsoredsh  · 
한살림광주 동학사상 다시읽기
제6강 원불교의 살림철학

원불교의 살림사상
물질을 활용하여 문명을 창조하자

원불교는 나에게 커다란 원이다. 서울에 있는 인사동 거리처럼 광주 시내에도 예술의 거리가 있다. 거기에 원불교당이 자리잡고 있다. 지나갈 때 보게 되는 커다란 원...
하나의 또 다른 종교일 뿐 관심의 대상 밖에 존재했던 원불교.

동아시아의 사상 전통이 원불교에도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4월2일 오늘 들은 것이 내가 원불교에 대해 아는 것의 전부이다. 
나의 공부의 연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불교의 영향이 있긴 하나 차이점(고통의 원인에 접근하는 관점과 해결책이 다르다 한다)이 있고 물질이나 과학을  배척하기보다는 활용하자고 한다(만물을 활용하되 생명평화를 해치는 방향이 아닌 보장하는 방향으로).
원불교의 핵심교리는 
  1. 일원우주(일원의 우주론),
  2. 사은윤리(사은의 윤리론),
  3. 삼학수행(삼학의 수행론).
이 중 다른 개벽종교와의 차이가 
유불도 삼교의 수행론을 집대성하고 현대화하는 데에 가장 역점을 두었다는 것이고 
원불교를 대변하는 키워드가 마음공부라 한다.

앎이 있으되 행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 일원
  • 모든 것이 하나이다.
  • 동기연계(만물은 하나의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다)

원불교가 이 땅에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는 더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한다. 
수행(실천)이 있고 경전(앎/교리-정전)이 있다. 
하나의 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모든 것이 하나이다. 

나의 하나됨은 무엇인가?  어디까지 확장하고 연결해 나갈 것인가? 하나가 된 느낌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자기개벽,사회개벽,천지개벽
어떻게 시작해서 어디로 나아가며 어디서 만날 것인가? 
인간의 영성필요에 의해서 종교가 필요하다면 그 종교는 어떻게 새롭게 인류사에 재등장 할 것인가?

(원불대학교 한복판에 수덕호라는 호수의 둘레에는 예수,공자,붓다,소크라테스 인류의 사대성인이 있다는데 언젠가는 가보리라..

화두를 가지고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모든 답은 내 안에 있다는데 호수에 내 마음을 비춰볼 수 있을까?)
** 우리의 스승(안내자/연결자)은 왜 우리(나)에게 다시 개벽을 이야기 할까요?

................(중략)

이 중심 없는 중심, 또는 모두가 중심이라는 생각을 
동학에서는 하늘로,원불교에서는 일원으로 표현했습니다. 

  • 이로써 이제 주변인에 머물렀던 이들도 당당하게 개벽의 주체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한국 근현대사에 개벽운동이 많았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 개벽적 주체관을 확립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 그 여파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 다만 개벽의 주체라는 기억이 망각되어 있어서 화산처럼 단발적으로 솟아나고 있을 뿐입니다. 
  • 그 기억을 되살렸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21세기의 다시 개벽의 역사의 첫 걸음을 디딜 수 있습니다. 
  • 제가 사상사 복원작업에 힘을 쓰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 벚꽃이 나를 부릅니다.ㅎ
이만 총총...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 [20101115] 김조년 교수의 함석현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정세미)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 [20101115] 김조년 교수의 함석현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정세미)



[20101115] 김조년 교수의 함석현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정세미)정세미 강연 2016. 12. 20. 22:09


2010년 11월 15일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미사(정세미) 강연

대전 관저동 성당



함석헌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

김조년 한남대 교수

(민들레의료생협 이사장, 표주박통신 발행인)









함석헌의 평화사상의 맥락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일단 그의 생애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함석헌에게서 평화는 가능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왜 살아야 하냐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과 같다. 어느 누구도 살 가치가 있다거나, 살아야 할 어떤 당위성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낳았으니까 사는 것이요, 살려 주시는 것이니까 사는 것이지, 어떤 자유의지의 선택에 따라서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물론 살지 않고 죽음을 택할 수는 있는 것이지만, 그 순간 삶과는 일단 떨어진다. 살아 있는 한은 살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생각할 것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다른 질문이 없다. 이것처럼 평화롭게 사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삶이 아니면 죽음이듯이, 평화가 아니면 반평화나 불화가 있을 뿐이다. 즉 평화롭게 살아야 하냐 아니냐의 문제는 평화가 필요한 것이냐, 가능하냐,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를 뛰어 넘는 문제로 설정한다. 여기에는 어떤 논리를 따지는 말의 전개가 필요가 없다. 평화하지 않으면 죽음이다 하는 것에 걸리는 문제기 때문이다.




함석헌에게서 이러한 문제는 태어나면서부터 일생을 따라다닌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난 1901년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한 가운데 있는 시점으로 언제나 전쟁의 기운이 사회에 가득할 때였다. 특히 그가 태어난 평안북도 용천지방은 중국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지점, 압록강 하류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그래서 지리상으로 볼 때 중국과 한반도 사이의 갈등과 긴장과 화해의 분위기를 아주 민감하게 느끼던 곳이다. 더욱이나 조선은 말기현상으로 중앙정부의 권위가 사라지고 지역민 스스로 자신들의 안녕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때와 곳에서 자랐다. 전쟁의 분위기는 어린아이들의 놀이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패를 나누어 놀이를 할 때에도 ‘나는 아라사다, 나는 일본이다’라고 하면서 전쟁놀이를 하는 것이 어린아이들의 일상이었다.




6ㆍ25 때 우리가 전쟁놀이 하면서 자랐고,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과 미군이 싸우는 전쟁놀이를 하고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 것처럼, 언제나 전쟁 상황에서는 아이들이 놀이를 통하여 전쟁을 재생산하고 체화하는 비극을 반복한다. 그러다가 국권을 잃은 때부터 점점 더 사회불안은 심화되었다. 이러한 때 사회분위기는 언제나 나라를 잃고 자기를 상실한 비애감에 휩싸였다. 함석헌의 집안 분위기와 그가 살던 지역의 분위기는 중앙정부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상관은 없었지만, 민족과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한 비감함은 매우 대단하였다. 그러한 것이 그에게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가 일찍이 어린 나이에 접촉한 기독교교육의 효과는 매우 결정적으로 컸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는 것을 그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그가 자랐던 곳에서는 반상의 구별이 별로 없던, 평민들이 주로 살았던 곳이기에 계급갈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안에서의 남녀차별이나 장자우선 관습은 남아 있었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의하여 아주 뼈저린 경험으로 깨지고 깨우쳐진다. 거기에서 그에게는 민주주의 사상의 기초를 배운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 상하가 평등하다는 것을 어머니의 단순한 이야기로 깨달아 그의 일생을 이끌어 나간다.




그 뒤 그는 사립 기독교학교를 다닐 때와 공립학교를 다닐 때의 분위기를 다 경험한다. 사립학교에서는 매우 활발한 자유정신과 독립정신을 경험하였지만, 공립학교에서는 식민지배자의 앞잡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던 중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이 때 그는 평양의 만세운동을 앞장에서 아주 시원하게 전개한다. 그 결과로 학교를 나오게 되고, 다시는 관립학교에 가지 않고, 그의 말대로 하느님의 발길에 채여 오산학교에 간다. 이 때부터 그는 관과는 대립하는 관계를 설정한다. 그것은 바로 그에게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거대한 사건이 된다. 그곳에서 민족주의를 알게 되고, 독립 기독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동양고전과 서양철학의 접목이 어떠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이 독자적으로 깊이 생각하고 파고들어가는 훈련을 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매우 귀한 사람들을 책으로 접촉하게 된다. 가장 귀한 인물이 이승훈과 유영모다.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게 되면서 기독교를 새로 이해하고, 기독교와 애국이라는 관계를 새롭게 정리한다. 특히 예레미야를 공부하면서 망국노의 비애가 무엇인지? 무엇을 통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닫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때 그가 만난 우찌무라 간조는 일생의 좋은 스승으로 남는다. 그에게 배운 것은 독립정신으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뒤 귀국하여 모교 오산학교에서 10년간 교사로 생활한다.




특히 예레미야를 공부하면서 망국노의 비애가 무엇인지?

무엇을 통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탤 수 있는 것인지를 깨닫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때 그의 동료 김교신과 함께 무교회성서집회를 열고,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함께 꾸려나간다. 이 때 그는 오산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데, 역사 교사가 된 것을 무척 후회한다. 아무 것도 학생들에게 영광스럽던 조상들의 역사를 가르칠 건덕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외세의 침략과 패배와 굴종과 식민통치의 쓰라린 경험의 역사만을 반복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 데는 ‘자기를 잃어버린’ 결과라는 것이다. 자기를 잃어버린 뒤에는 어떠한 물질의 영광이나 힘의 강력함도 소용이 없다. 등뼈가 부러진 것이요, 중축이 부러진 것이 되고 만다. 그러한 근본이 못된 다음에는 어떤 처방도 임시처방일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그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쓴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하고, 고난의 의미를 예수의 고난과 한국민족의 고난을 대비하여 본다. 예수의 고난에서 인류구원의 비전을 보듯이 한국역사의 고난의 행진 속에서 세계구원의 비전을 본다. 한국역사는 단순히 한민족의 한 역사로 끝나지는 않는다. 그 한 예가 6ㆍ25전쟁이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잘못 된 것이 함께 몰려든 전쟁이다. 이데올로기와 물질과 과학과 민족들과 헤게모니 쟁탈전이 한반도에서 집중하여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은 세계화의 어두운 면과 긍정의 면을 동시에 경험한 거대한 사건이었다. 이것의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1) 우선 무력과 전쟁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2) 국지적인 문제라 하더라도 그 지역의 독자적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관계 안에서 해결된다는 것, 3) 적과 아, 원수와 형제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인류, 하나의 인간이라는 철학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 4) 그러나 민족의 문제는 외세종속체계에서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앞서야 한다는 것, 5) 고난의 연속으로 경험한 민족의 최대비극을 통하여 세계구원의 원대한 비전을 찾아보라는 것, 6) 적대관계나 상생관계나 어느 한 편이 이기고 다른 편은 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가는 길을 찾으라는 것. 사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현재의 남북문제도 처리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과 모든 인류가 궁극적으로 구원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음미하여 볼 때라고 본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논의하게 될 것이다.

그이의 평화사상: 민족과 민족의 화합, 사람과 하느님의 합일, 사람과 자연의 평화, 순간(지금)과 영원의 통합, 땅과 하늘의 합일, 개인과 전체의 합일을 상정한다.




그는 “씨알은 평화요 평화는 씨알에 있다”는 명제에 따라서 이와 같은 사상을 전개한다. “우리는 모두 세 세계에 살고 있다. 극대(極大)의 나라, 극소(極小)의 나라, 중간 나라. 물질계를 보는 데 눈ㆍ망원경ㆍ현미경의 세 눈이 있듯이, 정신계에도 세 눈이 있어야 한다. 영원ㆍ무한을 내다보는 눈, 마음이 갈피를 찾는 눈,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두루 살피는 눈. 이 여섯 세계를 공통으로 다스리고 있는 원리가 평화다. 화는 곧 조화ㆍ고름인데, 고르게 되지 않고는 세계가 서갈 수 없다. 안ㆍ밖ㆍ생ㆍ무생을 말할 것 없이 복잡한 힘의 얽힘이다. 그 얽혀 작용하는 것이 어느 고른 상태에 이르지 않고는 하나의 세계가 있을 수 없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그래서 있다. 하나의 질서 잡히고 법칙 있는 세계가 된 다음에야 우리가 능히 생각하고 알고 교섭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설혹 상상한대도 혼돈ㆍ어지러움ㆍ허무ㆍ두루뭉수리밖에 없다. 우리가 있을 때, 알 때, 나일 때는 벌써 거기 세계 곧 질서ㆍ코스모스ㆍ대조화ㆍ평화가 있었다. ‘화(和)는 천하지달도(天下之達道)다.’(중용) 그러므로 화는 알파와 오메가다.




영원ㆍ무한을 내다보는 눈, 마음이 갈피를 찾는 눈,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두루 살피는 눈.

이 여섯 세계를 공통으로 다스리고 있는 원리가 평화다.




다른 말로 하면 평화는 구경의 원리인 동시에 또 내재의 원리다. 칸트가 위와 안을 보고 다 같이 놀라고 찬미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의 세계도 알고 보면 놀랍다. 공자가 교육의 대강을 말하는데, 명명덕 친(신)민 지어지선(明明德 親(新)民 止於至善)이라고 했다.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을 말할 때 첫머리에 평천하(平天下)를 내걸었다. 명명덕 어천하(明明德 於天下)라 했다. 예수가 날 때 하늘에서 찬송이 들려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기쁨’이라 했다. 노자의 무위(無爲), 석가의 니르바나도 요컨대 평(平)의 자리다.




예와 이제를 말할 것 없이, 종교 정치를 가를 것 없이, 사람인 다음에는 다 평화를 내세웠다. 전쟁을 직업으로 하여 불쌍한 씨알의 피로 제 살을 찌우고 기름을 짜며 사람 죽임을 재미있는 장난으로까지 하는 소위 영웅이란 것들도 입으로는 평화를 위해 하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내놓고 전쟁을 예찬하는 놈은 미쳤거나 그렇지 않으면 악마의 종자라고 할밖에 없다. 씨알은 말하자면 내재의 평화, 극소세계의 평화다. 본질적인 평화다. 씨알의 바탈이 평화요, 평화의 열매가 씨알이다. 그러므로 씨알의 목적은 평화의 세계 이외에 있을 수 없다. 극소는 극대에 통한다.” 함석헌: ‘세계평화의 길’, 함석헌 저작집 12, 『평화운동을 일으키자』, 한길사 2009, 44-46




결국 그에게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 그것들이 교섭하여 사는 방법은 화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내세우는 평화사상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런데 이것들이 깨지는 데는 몇 가지 사회제도와 그것에 힘을 업은 인간의 집단 심리와 집단행동에서 연유한다. 소유제와 국가지상주의와 계급제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국가지상주의다. 국가주의는 결국엔 국가지상주의, 민족 지상주의로 변하여 나와 다른 민족이나 나와 다른 가문, 또는 내나라 다른 나라, 나와 다른 종교에 대한 전쟁을 때때로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다. 대개 정의로운 전쟁이나 거룩한 전쟁이란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뒷받침하는 철학은 차별에 있다. 나와 너는 다르다는 것, 다른 너는 나의 소유물이나 밥이나 도구가 되어도 좋다는 기본철학을 깔고 있다. 여기에 모든 중심은 ‘나’에 있다. ‘우리’나 ‘서로’가 아니라, ‘나’를 중심에 놓는다. 이 때 나는 언제나 강력하여야 했다. 여기에 복무한 것이 이른바 우승열패, 약육강식 따위의 사회진화론적 차원의 관계철학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힘의 논리를 앞세운 것으로 화쟁의 원칙이 없다. 그러나 상당히 강한 다른 이론, 즉 생물진화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들은 꼭 강자만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이 연합하여 살아남았다는 이론이 매우 강하다. 이것은 러시아의 학자 크로포트킨이 쓴 『상호부조론』에서 주장하는 화쟁과 상생의 논리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상생관계로 돕고, 어떤 것은 상극관계로 돕는다. 그것들은 서로 함께 존재해야 살아나가는 것이지, 어느 것이 사라지면 다른 것 역시 사라진다.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역시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주의 원리다. 원칙이 그러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현실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2. 함석헌의 평화운동과 실천


함석헌의 평화사상이 언제부터 싹트게 되었을까? 가장 가까운 직접 영향은 2차 대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 그는 전선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무모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특히 식민지배체제 아래 살고 있는 조선 청년들이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본다. 그리고 가장 큰 것, 특히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장 큰 이유로 과학기술의 발달과 성숙한 인간이성을 든다. 전쟁무기를 생산하고 운용할 수 있는 과학기술은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을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증명하였다. 핵무기의 개발은 전혀 무력전쟁의 무의미함을 말해준다. 핵무기의 발명과 개발은 그것을 무기로 사용하여 무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할 경우 모두가 멸망하게 될 것이기에 평화롭게 살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무렵 H. G. 웰즈의 『세계문화사대계』를 읽고 그의 세계국가주의와 평화사상을 받아들인다. 세계는 점점 더 하나의 국가로 되어가며, 한 형제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으며, 싸워야 할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나 간디의 삶은 그에게 비폭력적 평화의 삶이 어떠한 효과를 가져오는가를 깨우쳐준다. 더욱이나 인간이성의 성숙으로, 인간은 함께 사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과 그가 꾸리는 사회는 독립이지만, 종속이 나닌 함께 어울려 산다는 것을 생활로 경험한다. 급격하게 문제들이 개별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더욱이나 6ㆍ25를 경험하면서 더 이상 무력을 통한 전쟁으로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런데도 가장 안타까운 것 중 하나는, 누구보다, 어느 나라와 민족보다 더 평화를 사랑하여야 하는 한반도에서 ‘평화’란 말의 정치-사회적 범죄성을 뼈아프게 여긴다. 평화운동이 어디에서보다도 더 먼저 일어나야 할 한반도에서 평화란 말이 위험한 말이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당대의 가장 큰 화두는 평화임을 실감한다. 그 당시 평화는 새 길을 여는 명령이면서 시대를 때리고 깨우는 목탁이었다.




그래서 일차로 주장한 것이 한반도의 중립국가론이다. 이것은 그 당시 이데올로기 대립과 갈등이 심화된 상황에서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어느 한 이데올로기에 속하는 것을 극복하는, 초월하자는 주장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한반도의 남북 양쪽을 통제하고 있는 외세로부터 자유를 선언하고 독립하자는 주장이 된다. 즉 남의 힘을 빌리지 말고,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통일하고 이끌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위스처럼 약한 나라는 중립의 입장이라야 자신을 잃지 않고 종속체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리하고 지배하려는 외세의 입장에서 볼 때와, 그러한 외세의 힘을 빌어 정치를 하려는 세력의 입장으로 볼 때는 매우 불순한 주장이었다. 이러한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나와야 한다. 그것은 철학과 도구와 삶을 통합하는 것이라야 한다. 다음 같은 것들이 그 중 몇 가지다.




평화사상은 그의 폭력에 의한 피해와 그것에 맞서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일제 때 감옥에 두 번 씩 투옥되었고, 해방된 조국에서 소련군에 의하여 투옥되었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글을 쓴 것 때문에 투옥되었다. 그 뒤 감금, 투옥, 재판, 가택연금, 금구령에 버금가는 강연방해, 글 삭제와 게재방해 등을 받았다. 정부의 집권권력의 폭력성을 고스란히 몸으로 체험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몇 가지 그의 평화사상과 운동에 영향을 준 것이 있었다. 동양에서는 제도와 권력을 철저히 부정하는 노장사상, 힌두교의 바가받기타를 몸으로 실천한 간디, 전쟁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맹렬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기독교의 예수와 이사야의 사상, 퀘이커의 평화사상과 평화운동, 그리고 우리 민족의 본래 가지고 있는 평화사랑의 사상을 기본으로 한다.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평화는 그에게는 신조다. 어떤 논리나 실험으로 증명하여서가 아니다. 인간의 본능이 평화라고 보고 싶은 것이다. 평화가 생명의 본연의 길이기에 그것에 저촉되는 것에 대한 저항은 아주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평화는 공존이다. 공존하지 못하면 공멸할 뿐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삶을 가장 극명하게 저해하는 것이 국가주의다. 나라를 뜻하는 한자의 국(國)자에서, 국가는 이미 근본에서부터 무력을 핵심으로 한다. 사람(口)과 땅(一)을 무력인 칼(戈)로 지켜 낼 큰 테두리(口)가 곧 국가다. 그에게 국가는 폭력의 핵심이다. 아직 사람이 크게 깨닫지 못하였을 때는 국가가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지금은 그것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점점 더 국가는 견고한 성으로 자리를 굳힌다. 그러므로 가장 근본 되는 평화주의 운동은 국가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다. 그 한 예를 그는 주민등록증을 만들지 않았다. 성숙한 개인-이성의 진행은 국가 없이 살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확신이다. 전쟁은 언제나 국가를 앞세운 전쟁업자들의 흥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만큼 가장 사치스럽고 낭비스럽고 파괴스런 것이 없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그것에 저항하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비폭력저항이다. 그것의 실예를 간디의 비폭력저항운동에서 보며, 그보다 먼저 살았던 소로우에서 모범을 찾는다. 이 두 사람에게 비폭력은 방법이나 수단이 아니라 삶이었다. 그것을 통하여 일을 성취시키고 이룬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살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간디에게는 폭력을 통하여 인도의 독립을 얻기 보다는, 비폭력으로 영국의 식민지 안에서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할 만큼 비폭력을 철저한 삶의 하나로 본 사람이다. 바로 그 길을 함석헌은 따르기를 바랬고, 실천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비폭력운동과 삶은 철저한 자기훈련과 자기교육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개개인들이나 집단문화가 성숙되어야 하며, 삶을 수련하듯이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폭력을 미워하고, 국가권력을 비판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잠시 동안 수행하고 담당하는 사람들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 사람을 우리와 꼭같은 인격을 가진 존재, 하느님, 부처, 그리스도, 인을 가진 존재로 인정하고 그들까지도 불쌍히 보고, 구원하는 깊은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그들은 역사의 심판을 위하여 대신 짐을 져주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함석헌이 가장 힘들어 했던 부분의 하나는 바로 이 점이었다. 내 속에 공격의 대상인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맘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내가 맘으로 그를 미워하는 것은 이미 그를 죽이는 폭력에 사로잡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비판이나 대항하는 행동은 나와 그를 동시에 구원하는 기도요 구도자의 행위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을 위하여 해체되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 중 하나가 계급이요, 소유제도였다. 계급은 평등에 저해되는 것이며, 지나친 소유제의 신성시는 함께 사는 것을 방해하는 근본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계급해체의 방법으로는 역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 밖에 다른 것은 없었다. 그것은 인간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사회제도에서 온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도 제재하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민주주의의 실현은 그에게는 인간의 권위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것을 거저 되지 않는다. 값비싼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전대로 남이 그것을 대신하거나 집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 우리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하여는 가장 중요한 것이 언론의 자유였다. 그래서 그는 일제 때는 김교신이 주간이었던 《성서조선》을 통하여, 해방된 뒤에는 《영단》아니, 《말씀》을 통하여 영적 진리의 말씀을 펼치다가, 1950년대 중반부터 장준하가 발행하는 《사상계》와 1970년에 그 자신이 발행한 잡지 《씨알의 소리》를 통하여 끊임없이 발언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바로 씨알의 자기교육 도구였다. 무지하거나 무식하여서는 결코 자기를 해방할 수는 없다. 온갖 것으로 씨알을 무식하게 만들고 무지하게 만들려는 제도로부터 벗어나려면 스스로 깨닫는 길밖에는 없다. 그러려면 교육기관이 필요한데, 이제 제도 교육기관이나 언론기관은 모두 다 기본 틀을 유지하고 지키고 더욱 견고히 하는데 봉사할 뿐이다. 여기에는 기본 종교기관들도 마찬가지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바른 언론을 통한 씨알들의 자기교육을 통한 깨달음, 곧 해방뿐이었다.




그 해방운동은 결국 평화운동과 통한다. 왜냐하면 온갖 기본 제도들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데 방해되는 것을 주장하고 이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인간해방운동은 평화운동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사탄은 우리는 서로 싸우는 적대자로 갈라놓고 지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운동을 제창하는 것은 결국 통합운동이다. 사람과 사람을 갈라놓고, 민족과 민족을 갈라놓으며, 나라와 나라를 분리하고,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를 따로 서게 하며, 사람과 하느님을 분리시키고, 자연과 인간을 적대관계로 설정하는 온갖 분열의 철학과 종교와 정치와 문화에 대한 저항운동이다. 그 저항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끊임없이 ‘생각하는 백성’과 ‘행동하는 씨알’을 말하였다. 이들이 모여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함께 살기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화운동의 요체였다.




3. 우리의 평화운동




그렇다면 우리의 평화운동은 어떠하여야 하는 것일까?

기독교인으로서: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구교와 신교를 막론하고 스스로 우리 사람들에 의하여 된 일이다. 여기에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유교가 한국에 들어온 때도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그 때 사정으로 미루어보면 지배자 층을 통하여 들어왔고, 불교도 일부 민간에 들어왔던 것이 있는지 모르나 적어도 공공연히 크게 들어온 것은 정치 세력을 타고 왔다. 그러므로 그 두 종교는 처음부터 사회의 상층으로부터 시작되었고, 후에 민간에 널리 퍼진 때에는 그것은 늘 지배자의 종교, 국교였다. 그런데 이 기독교만은 그와 반대로 지배자가 아니고 불우한 지위에 있는 자를 통하여 왔다. 유교나 불교와 같이 나라 사이의 외교의 한 부분으로 온 것이 아니고 민간의 요구로 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후의 발달에서도 나라의 지배 세력과 늘 사우는 자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도덕면에서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젊은이들을 위한 새편집) 2010, 363




그래서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큰 의미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온전히 세상을 건지고 인생을 건지는 진리로, 연구하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으며, 마침내 이편에서 머리를 숙여 세례를 구하게 되었다는 것은 비단 교회사에서뿐 아니라 일반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위의 책, 364




이 때 우리 사회는 매우 절박하게 새로운 기운이 필요하였다. “한 시대가 새로워지려면 결국 기적이 일어나야만 한다. 기적을 행하는 것은 외물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하는 정신만이다. 그러므로 결국 종교 문제다. 유럽의 신생운동이 종교혁신에 이르러 가지고야 참 신생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의 종교는 어떠하였느냐 하면 불교에서도 유교에서도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이제 깬다는 것은 씨알이 깨는 것이므로 요구되는 것은 씨알의 종교다. 그런데 유교도 불교도 다 씨알의 종교는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완전히 씨을 떠나 특권층의 것이 되어버렸고, 그 특권층과 함께 썩었으므로 도저히 씨알의 가슴을 흔들 힘이 없었다. 씨알이 구하는 것은 곧 새 양심이다. 두 종교가 다 특권층에 붙음으로써 씨알의 양심을 마비시켜버렸다. 그러므로 그 때의 형식으로 굳어진 유교 교리나 고루한 선비의 유교 사상을 가지고는 아무리 뒤집고 고쳐보아도 씨알을 흔드는 새것은 나올 수 없었다.” 위의 책, 357




물론 그 당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던 불교나 유교 역시 그것들이 들어올 때는 언제나 새 기운으로 들어왔다. 단군조선이 세워질 때 하나님을 숭배하는 종교로 됐고, 기자조선이 될 때 유교로 했으며, 삼국이 세워질 때는 불교가 큰 할 일을 하였다. 이것들이 다 썩은 뒤에는 새로운 것이 와야 하는 조건들이 형성된 때였다. 이 때 기독교는 왔다.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찾게 하려는 것이란다.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이 따로 있지 않고, 종이나 주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늙은이나 젊은이가 따로 있지 않고, 지배자나 피지배자가 따로 있지 않다. 모두가 그 앞에서는 평등하며 오로지 하나가 되어 그를 찾음이 인생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가진 종교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몇 가지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었다. 1) 계급주의를 깨뜨리는 일이요, 2) 사대사상을 쓸어버리는 일이요, 3) 숙명론의 미신을 씻어버리는 일이었다. 위의 책, 369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는 천지에 오직 섬길 이는 영이신 하나님 하나밖에 없다는 것, 모든 인류는 다 형제라는 것, 삶의 기본 원리는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진리에 대한 절대순종의 믿음을 주장하는 엄격한 도덕적 종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 사명을 띄고 이 땅에 왔다는 것이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다 인생을 건지자는 것이지, 압박하고 짜먹는데 협력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모든 종교들이 그렇게 됐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그 자체 내에 계급주의, 사대주의, 미신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혁명을 이루지 못하는 종교가 되고 말았다. 순교자를 그렇게 많이 내면서도 사회혁명을 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땅에 온 기독교가 깔끔하고 깨끗하게 들어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위의 책, 370

그것은 서양에서 실패한, 썩은 제도를 그대로 가지고 왔을 뿐,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리지 못한 데서 연유한다. 미신이 흥행한 것은 그 당시 사회가 흉흉하여 살고자 하는 발버둥이었다. 그것을 받아 새로 들어온 기독교는 과학적 탐구를 통한 개혁운동을 주도할 민중교육을 실시하였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때, 구교보다 100여년 늦게 들어온 개신교의 활동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흐름을 타고 들어온 개신교의 활동은 초기의 가톨릭처럼 매우 희망스런 출발을 하였다. 독립사상, 새교육의 흐름과 과학정신이 가득한 것은 새로운 기운을 넣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개신교가 했어야 할 근본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것을 이끌고 나갈 사회적 중산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워낙 강력한 착취 때문에 피폐한 민중 뿐 중산계급이 형성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일제 때 그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으나 기독교의 생생한 정신이 제대로 펴졌다면, 다른 시들어가는 종교들의 정신도 다시 살아나도록 됐어야 한다. 한 종교의 살아남은 다른 종교가 동시에 새롭게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정신으로 나갈 때 사회는 평화가 오며 혁명은 가능하여 진다. 특히 우리 사회는 다원종교사회다. 역사를 관통하여 볼 때나 사회를 횡으로 볼 때 다양한 종교들이 고루 분포해 있다. 여기에서 원수는 없다는 것을 선언해야 한다. 한 종교의 건전한 발전은 다른 종교의 건전한 발전을 이끌어 온다. 반대로 한 종교의 타락은 다른 종교의 타락을 함께 불러 올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그물처럼 얽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의 평화생활의 요체는 이러한 것이리라. 신약성경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1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심으로부터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척 하지 마십시오. 악은 필사적으로 피하십시오. 선은 필사적으로 붙드십시오. 깊이 사랑하는 좋은 친구들이 되십시오. 기꺼이 서로를 위한 조연이 되어 주십시오.(9-10)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늘 힘과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 되십시오. 언제든 기쁘게 주님을 섬길 준비를 갖춘 종이 되십시오. 힘든 시기에도 주저앉지 마십시오.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그리스도인들을 도우십시오. 정성껏 환대하십시오.(11-13) 원수에게도 축복해 주십시오. 결코 악담을 퍼붓거나 하지 마십시오. 친구들이 행복해 할 때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그들이 슬퍼할 때 함께 울어 주십시오. 서로 잘 지내십시오. 혼자 잘난 척 하지 마십시오. 별 볼 일 없는 이들과도 친구가 되십시오. 대단한 사람인 양 굴지 마십시오.(14-16) 되받아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신 누구에게서나 아름다운 점을 찾으십시오. 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이좋게 지내십시오. 받은 대로 갚아 주겠다고 고집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상관할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17-19) 우리의 성경은 원수가 굶주리고 있는 것을 보면 가서 점심을 사 주고 그가 목말라하면 음료수를 대접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관대함을 베풀면 원수는 소스라치게 놀랄 것입니다. 악이 여러분을 이기도록 놔두지 마십시오. 오히려 선을 행함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20-21)” 신약성경, 로마서 12장(유진 페터슨: 메시지, 신약), 복 있는 사람 2010




얼마나 놀라운 소리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의 말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을 실천하는 실행방법이다. 진리를 위하여 죽은, 초기의 순교자들은 모두가 다 타협을 몰랐고, 방편을 쓰지 않았으며, 소박하였고, 목숨을 내걸었고, 직접적이요, 저돌적이었다. 그것이 우리 크리스천의 전범이다. 그런데 지나치게 지금은 국가주의, 자본주의, 정치주의와 타협하여 산다.




일반 시민으로서; 허(虛) 정(靜) 유(柔) 겸(謙)의 수련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하여 일단 ‘나’를 정립해야 한다. 나는 공(公)과 연결되고, 하나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은 국가, 민족, 종교, 단체, 가문 따위를 뛰어 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한 때 우리 인류 역사에서 공은 바로 위에 든 것들이라고 여기게 되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공으로 가는 길목에서 잠간 돌보아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들이다. 지금은 그것을 지나야 하는 때가 되었다. 여기에서 바로 허상을 넘는, 진리와 합일되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를 나 되게 하는 데 방해 되는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 그 속에 그리스도, 하느님, 부처, 인(仁)의 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내면의 빛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것은 적절한 상황만 되면 언제나 움이 트고 잎이 나고 줄기가 생기고 가지를 뻗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것은 언제나 무서운 고난 속에서 피어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모든 좋고 나쁜 환경을 겪어 가면서 때를 기다려서 솟아난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씨는 많고 무성해서가 아니라, 한 알이라도 제대로 여물고 썩으면 된다. ‘나는 한 알의 씨다’ 라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을 선언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요 위로다. 나는 한 알의 씨알이다. 즉 하느님, 그리스도, 부처, 인, 내면의 빛을 가지고 있는 영근 씨알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 그 속에 그리스도,
하느님, 부처, 인(仁)의 씨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내면의 빛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함석헌과 김교신 등이 일제 강점기의 갖은 압제에서 온갖 박해를 겪으면서 만들어 낸 《성서조선》이란 잡지는 독자가 많을 때 200명 정도를 넘지 못하였으며, 그들이 매년 연말과 연시에 가졌던 수련집회에는 20명 이내가 참석하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뿌려진 씨와 그들이 뿌린 씨는 매우 고귀하고 강력하였다. 한 사람에게 뿌려진 씨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 뿌려지는 보편적 씨요, 한 곳에 피어나는 씨는 전체를 뒤덮는 상징이다. 관저동에 개나리가 피면 다른 강산에도 핀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요, 목포에서 움트는 싹이라면 여기에서도 조건이 맞으면 틔어난다는 것을 예시하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여 말하는 것이지만, 동양에서 인(仁)으로 표시하는 씨, 기독교에서 이미지 또는 형상으로 표시하는 하느님의 상은 모든 사람에게 있다. 아니, 내 속에 있다. 이 씨는 알이다. 로 함석헌은 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전체와 개체, 극대와 극소, 영원과 순간, 하늘과 인간을 통합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각각 독립된 개체이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다. 이것이 평화의 근원이다. 아름다움의 근원이다. 이 씨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믿음이 있는 한 우리는 평화할 수밖에 없다.




생명평화운동에서 전개하고 있는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라는 것은 좀 더 적극성을 띈 것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나는 이미 평화의 씨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을 누리는 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평화는 원하고 원하지 않고 할 선택사항이 아니라, 명령으로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평화 한다고 선언하는 것만이 남아 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내가 평화하면 된다. 이미 나는 평화에 들어섰다고 선언하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독립은 선언하므로 시작이 되고, 자유와 평화 역시 선언하므로 되는 것이다. ‘네 병이 고쳐졌느니라’ 선언할 때 이미 병은 사라지는 것이다.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상은 바로 평화로운 세상이다. 단일한, 획일화한 세상이 아니라, 백화가 만발하듯이 서로 다른 독특한 것들이 건전하게 조화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될 때는 각각 자기 소리를 내되 다른 것에 맞출 때 이루어진다. 불협화음도 아름다운 음악이 되는 것은 바로 전체 음악에 따르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그가 만들고 인정한 모든 것 속에 그의 속성이 함께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고 따른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따르고 그렇지 않은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만큼 통이 클 필요가 있단 말이다.




나와 전체;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우리는 몇 가지를 일상생활에서 실현하여 볼 필요가 있다. 평화는 거저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찾아야 하는 것이다. 누가 할까? 내가 평화롭게 살아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천하에 남이란 없다’는 묵자의 말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그래서 폭력과 평화에 대한 공부와 생각을 하되, 혼자서도 하여야 하는 것이지만, 몇 명 씩 짝을 지어 끊임없이 해보는 것이다. 수도원이나 수녀원 같은 함께 살아가는 것을 실험할 필요도 있다. 간디는 그것을 아쉬람에서 실험하여 보았고, 함석헌 역시 실패하긴 하였으나 몇 번 시도하여 보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적대적이라고 하는 것을 서로 방문하여 보는 것도 좋겠다. 우선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짝을 지어 방문하여 보고, 기독교가 연합하여 불교나 원불교나 이슬람을 방문하고, 함께 예배, 미사, 예불을 드려보는 것이 좋겠다. 다른 종교를 적대시하고 자기들 것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배반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평화의 노래를 자주 부르고, 평화의 기도를 부르며, 한 두 가지의 평화운동이나 평화로운 삶에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을 던져보는 것이 좋겠다. 이제는 좌우익의 갈등이나, 진보나 보수의 대립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아우르거나 뛰어넘는 하나로 살아가는 실제 생활을 실험하여 볼 때다. 사실 우리 속에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 다만 제도와 틀이 그것을 가리고 방해할 뿐이다. 성숙된 인간이라면 바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운동을 벌일 때 우리 사회에 평화로운 기운은 싹이 트고 만발할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오늘 가톨릭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퀘이커를 따르는 저를 이곳에 초청하여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자 하는 것 자체가 벌써 통합의 평화운동으로 가는 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남이야 어떠하든 나는 평화 한다는 것, 사회야 어떠하든 나는 평화 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나갈 때 이미 평화의 세계는 뿌려지고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나무가 되며 가지가 돋고, 잎이 피고 꽃이 피며 열매를 맺어 다시 땅에 떨어져 그 평화의 행진을 계속하여 진행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맘과 발걸음 자체가 이미 복일 것이다. 세상은 언젠가는 평화의 세계가 되고야 말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요 예수가 이 땅에 온 뜻일 것임을 믿는다. 그러나 지금 평화롭다는 안일한 생각에 위기의식이 없을 때 이미 평화세계는 깨져버리는 것이 될 것이다.

(2010. 11. 15. 관저동성당에서)



[20101115. 사진] 김조년 교수의 함석헌의 평화주의의 우리의 평화운동


출처: https://www.djpeace.or.kr/177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2021/04/02

3.1정신 > 70년 이전 | 바보새함석헌 독립운동?

3.1정신 > 70년 이전 | 바보새함석헌
70년 이전+ Home > 글(분류) > 70년 이전70년 이전
? | 3.1정신
작성자 바보새
----
3.1정신
 
정신에서 정신으로

3.1운동을 그 밖에 나타난 결과로 하면 한 개 실패한 운동이다. 만세만 부르면, 그리하여 우리가 일본 정치 아래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세계 여러 나라 앞에 표시만 하면 독립이 곧 되는 줄로 믿었는데 그대로 되지 않았으니 그 점에서 본다면 실패다. 그러나 독립만세 부르다가 독립은 되지 않고 많은 희생자를 내고 여러 사람이 감옥살이를 하고, 한때 산천을 뒤흔들던 만세도 총칼 밑에 바람 자듯 자버리고 말았는데, 아무도 그것을 실패라 생각하고 그 한 일을 후회하고 풀이 죽어버린 사람을 하나도 없었다.
이 사실은, 이 독립운동이 실패에 돌아갔는데도 민중이 한 사람도 풀이 죽지 않았다는 이 사실은, 우리가 역사를 말하는 데 있어서 크게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다.
언제나 일의 결과는 육신의 사람에게 그때그때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고 마는 데 그치는 것이요, 그 일이 드러내는 정신은 사람의 정신 속에 길이길이 살아 작용하여 산 역사를 이루어가는 법이다.
3.1운동은 민중의 가슴 속에 정신을 일으켰기 때문에 그것이 물결처럼 휩쓸고 지나간 뒤에도 사회에 낙심,낙망의 기분이 돌지 않고 도리어 머리를 들고 올라가려는 여러 가지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을 일으킨 것은 그 자체가 또 산 정신에서 나온 증거다.
정신은 정신에서만 나온다.
정신은 정신을 일으키고야 만다.
 
우주, 인생을 꿰뚫는 정신

그럼 무슨 정신인가? 무슨 정신이라는 것이 없다. 정신은 그저 하나 산 정신이 있을 뿐이다. 세상에서 흔히 3.1정신이라고 떠드는 소리를 듣지만 3.1정신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있다면 우주 인생을 꿰뚫는 정신이 있을 뿐이지. 해를 낳고, 달을 낳고, 천체를 낳고, 꽃을 웃게 하고, 새를 울게 하며, 사람으로 사람이 되게 하는 그 정신이 3.1운동을 일으켰지, 그밖에 또 무슨 조작이 있을 수 없다.
무슨 특별한 것이 있는 것처럼 민중 앞에서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은 민중이 이미 저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이 정신을 빼앗아 다시 팔아먹으면서 사사로이 이익을 얻으려는 협잡꾼의 하는 소리다.
알고 모르고가 문제 아니다. 가졌나 못 가졌나가 문제다. 그리고 아는 자가 반드시 가지는 것이 아니요, 가진 자가 반드시 아는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에 참으로 가진 자는 도리어 가진 줄 알지도 못하는 법이요, 입으로 공교히 설명을 하는 자는 사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 아노란 말은 모르노란 말이요, 했다는 소리는 아니했다는 소리다. 31정신은 스스로 가진 줄 알지도 못하는 민중의 것이다.
3.1절만 되면 보기 싫은 것은 서로 3.1정신 팔아먹으려 드는 꼴이다. 이 큰 정신의 꿈틀거림이 어느 단체나 몇몇 개인이 꾸며낸 일이나 되는 것처럼 서로 제가 먼저 했다는 거요, 제가 잘 안다는 것이다. 민중이 입이 없다고 업신여기는 이들 협잡꾼을 쓸어버리라 해라! 3.1운동은 어디까지나 민중의 산 정신이 드러난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할 것이 이 운동은 돌발적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터져 나온 것이란 말이다. 전부터 무슨 사상단체나 조직체가 있어서 이 운동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요, 이 운동 후에 또 무슨 일정한 체계의 사상이나 단체가 깉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운동은 백두산이 그런 것처럼, 한라산이 그런 것처럼, 갑자기 혼자서 터져나와 천하를 진동시킨 것이다.
3.1운동의 주인이 될 인물도 단체도 없고, 그 지도 원리와 방법이 되는 사상도 조직도 없다. 이것은 누가 가지고 주인이 되기에는, 누가 그 공로자가 되기에는 너무도 큰 운동이다. 너무도 평범한, 너무도 광범한 정신의 나타남이다. 마치 바람에 주인 없고, 비에 시킨 이 없는 것같이.
 
주인은 민중

다시 말하면, 꾸며낸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일어난 생명의 일이요, 진리의 움직임이라는 말이다. 돌발적으로 터져 나왔다는 것은 사실은 그 힘이 언제나 어디나 준비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지 않고는 돌발할 수가 없다. 화산이 갑자기 터지는 것은 지구 속에 불이 본래 늘 있기 때문이다. 화산을 누가 만들어서 되는 것이라면 그 터질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러면 화산이 아니다. 3.1운동은 민중의 가슴 속에 본래 언제나 있는 정신이 기회를 타 터져 한때 화산처럼 불길을 뿜은 것이다. 화산의 주인이 지구라면 3.1운동의 주인은 민중이다. 화산의 불이 우주 자연의 불이라면 3.1운동의 정신은 우주 본연의 정신이다.
우리도 동경에서 누가 왔다든지, 상해에 누가 연락을 했다든지, 서울에 누구누구가 모였다든지, 33인이 어쨌다든지, 그것을 모르는 것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기회에 그 심부름은 했는지 모르나, 그 정신에 이르러는 아무도 터럭끝 만큼도 이러구저러구 할 것이 못된다. 태극기를 만들고 선언서를 찍어 사람들의 가슴에 안겨줄 때 누구라고 알고, 누구를 골라서 주었던가? 그전에 무슨 조직, 기관이 하나인들 있었던가? 실로 아무것도 없었다. 없었는데 그저 다만 민중을 하나로 보고, 전적으로 믿고 한 것뿐이다. 그들이 민중의 가슴을 들치는 부지깽이는 됐는지 모르느니라. 그러나 불은 민중 그들 자체의 가슴 속에 본래 언제부터 붙고 있던 것이요, 또 언제까지도 붙을 것이었느니라.
 
갑자기 터진 화산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들어갔을 때 안도산, 최린, 여운형의 세 분을 놓고 일본 법관이 묻기를, 나가면 또 다시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 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묻는 속뜻이 독립운동을 계속한다면 죄를 더하여 주고 다시 아니한다면 용서해주마 하자는 심산에서 나온 것임을 누구나 쉬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자연 대답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최린이 먼저 일어나 재주 있는 대답을 했다는 것이요, 여운형은 놀랄만한 웅변을 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산은 그와는 달리 자기 차례가 오자, 허허 하고 웃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하는 말이 “아, 이날껏 내가 선동해서 독립운동 된 줄 아느냐? 우리 민족이 한 것이지, 내가 하라 해서 하고 하지 말라 해서 하지 않을 것이냐?” 하는 의미의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거기가 다른 사람의 따르지 못하는 도산의 도산 된 점이 있는 곳이다. 그것이 어찌 재주로 될 일일까? 참이 아니고는 못 나오는 말이다. 무슨 말을 하여서 이리도 저리도 걸리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벌서 참은 부족한 재주의 사람이요, 참은 생각할 것 없이 있는 대로를 뱉아도 대적의 흉계가 한마디에 부서지고 그 혼담이 서늘한 법이다. 도산은 그 자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도자, 선동자의 심리를 품고 한 것이 아니요, 자신이 민중의 한사람으로 제 할 것을 한다는 정신으로 했기 때문에, 한마디로, 참 정성으로 했기 때문에, 자연 그런 대답이 나온 것이다. 그것은 도산의 대답이 아니라, 민족의 대답이요, 참 자체의 대답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참 애국자, 참 정치가일 수 있었다.
그렇다, 살아도 민중 자체가 사는 것이요, 죽어도 민중 자체가 죽는 것이다. 살려는 민중을 누가 능히 줄일 수도 없고 망하려 드는 민중을 누가 능히 억지로 살릴 수도 없다. 3.1운동은 민중이 우리도 살아야겠다, 살았다 하는 한 외침이었다. 내가 아니면 이 나라를 어떻게 하나, 우리가 아니면 이 민족을 어떻게 하나 하고, 크게 걱정이나 하는 척하는 그런 따위의 협잡꾼을 물리쳐라!
 
국제적인 협동 협화정신

3.1정신은 곧 민족정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옳은 말이다. 물론 민족의 정신이다. 민족의 독립을 부르짖었으니 민족정신 아닌가?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설명이다. 이제는 그것만으로 역사를 설명하려던, 그리하여 그것만으로 역사가 나가는 힘을 삼으려던 시대는 지나갔다. 민족정신이 3.1운동 전엔 없었던가? 물론 있었다. 있었으면 왜 힘을 못 쓰고 이제 와서야 일어났나? 이때에 와서 고종이 돌아간 것으로 민족감정이 올라갔기 때문이라고 혹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운동의 날로 3월 1일을 택한 데는 그 이유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정적인 요소는 못된다. 그렇게 큰 운동이 손에 무기 하나 없이 순전히 비폭력의 평화운동으로 일어나게 되는 결정적인 동기는 그보다 다른데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그때 파리에서 열린 국제연맹에 호소하자는 데 있었다. 윌슨 대통령이 말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의하여 세계 여론에 호소하면 되리라는 것이 그 신념이었다. 이 신념이 아니라면, 고종 같은 이가 열 스물이 돌아갔다 하여도, 민족감정이 아무리 올라갔다 하여도 맨주먹으로 감히 독립만세는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거기는 민족정신 외에 다른 무엇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족주의보다는 차라리 그와는 반대된다고도 할 수 있는, 국제적인 협동, 협화를 믿는 정신이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우리를 도와주려니 믿는 정신이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파리에 모인 몇몇 정치가의 호의를 상대로 한다기보다는, 암암리에, 그 정치가들을 보내놓고 있는 여러 나라의 민중을 믿은 것이다. 이러므로 이것은 민중에게서 민중에게로 건너가는 세계적인 외침이었다. 그러나 각 나라의 제국주의 정치가들은 민중을 속여 이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인간성에 대한 믿음

그러나 한층 더 깊이 들어가 생각하면, 나라와 나라 사이에 협화를 믿고, 민족과 민족 사이에 동정을 믿는 것은 그 밑에는 그보다 먼저 미리 생각하는 무엇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성의 공통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지, 그들도 양심 가진 사람이겠지, 믿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라 사이에 서로 도움을 믿는다. 모순인 듯하지만, 우리가 맨주먹으로 만세를 부를 때는, 국제연맹에 호소하기 전, 누구에게보다도 더 우리 대적이라는 일본 사람에게 그것을 믿는 것이다. 2천만이 돌같이 단결한다 하더라도 일본군이 만일 하려면 한칼로 어려움 없이 무찔러버릴 수 있다 하는 것쯤은 누구나 쉬이 알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일어섰던 것은 저들이 감히 칼을 못 쓸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왜 칼을 두고도 못 쓰나? 세계의 눈이 무서워서라고 하고 싶은 점도 있으나, 그보다는 역시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눈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해관계보다도 인간적인 양심 때문이다. 우리가 폭력 없이 데모를 하고 그들도, 수원, 강서 사건 같은 것이 한둘 없지 않으나, 대체로 그 이상 희생을 내지 않고 만 것은 역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적으로 반항운동을 한 것은 순전히 미운 마음 없이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들을 인간적으로 퍽 대접하고 믿어준 셈이다.
이제 우리는 이 점을 강조해야 한다. 서로 저쪽의 잘못을 과장 선전하며 감정을 일으켜 싸워 이기려던 것은 옛날이야기고, 이 앞의 역사는, 그보다도, 서로 싸우기는 하면서도, 서로서로 사이에 숨어있는, 일을 극단의 참혹한 지경에는 이르지 못하게 하는, 서로 믿고 돕는 그런 정신, 그런 힘을 너와 나 사이에 찾아내어 기르는 것이 우리를 위하여서도 세계를 위하여서도 필요한 일이다.
우리가 3.1운동으로 인하여 얻은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정체를 드러낸 것도 있기는 하지마는, 그보다도 더 뜻있는 것은 일본사람의 인간성을 알게 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일어났다. 그들을 사자나 이리로 알고 반항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믿었기 때문에, 우리의 편이 그들의 가슴 속에도 있을 것을 믿었기 때문에, 반항한 것이었다. 사실 나 자신 그 운동에 참여하여 본 것이지만, 그 당시에 일본사람 미운 생각 실로 없었다. 다만 우리도 살았구나 하는 기쁨에 가슴이 들먹일 뿐이었다.
그러나 인간성을 그저 믿는 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저희도 사람이지 하고 믿을 때는, 그보다 먼저 그 인간성을 다스리고 있는 도덕의 법칙을 믿어야 한다. 사람을 믿음은 결국 하나님을 믿음이다. 사람은 정의의 법칙에 복종하고야 말 것, 곧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대적을 이기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 대적 속에도 있는 정의 그 자체다. 도덕률 그 자체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고 보면 3.1운동을 일으킨 것은 인간 역사를 꿰뚫고 있는 윤리정신 그 자체다.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문천상(文天祥)의 말로 하면 ‘천지정기(天地正氣)’다. 성신이라 해도 좋고, 불성이라 해도 좋고, 자연이라 해도 좋다. 이름이야 뭐라 불렀거나, 하여간 생명의 맨 처음이며 끄트머리요, 역사의 고갱이면서 또 그 살인 그것이다. 물이 잘 흐르면 시내며 강이요, 막혔다 터지면 여울이요 폭포이듯이, 이 정신도 순하게 나가면 인생이며 문화요, 비상하게 나타나면 싸움이요 혁명이다.
밭 갈고 물 길으며, 자녀를 낳고 이웃을 이루며, 처마 밑에는 제비가 새끼를 기르게 두고 뜰 앞에는 화초가 꽃을 피우도록 가꾸는 인간의 가슴 안에는 3.1운동 같은 운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언제나 늘 준비되어 있다. 다만 그 민중을 꾀어 속이지만 말라!
 
비로소 대접 받은 민중

그럼 그렇게 늘 있는 정신이 하필 3.1운동 때에 나타난 것은 웬일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그때 가서야 민중이 비로소 사람으로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역사의 주인이 민중인 것을 분명히 알지만 정치가들이 이것을 깨닫기에는 퍽 힘이 들었다. 원시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정치라면 일부 적은 수의 사람이 특권을 가지고 강제로 하는 것처럼 알아왔다. 다스린다는 말부터 그것 아닌가?
이제 다스리는 정치는 고물이다. 이때까지 정치는 일부 사람이 강제로 하는 것이므로 거기 무슨 잘못이 있어 그것을 바로잡으려 할 때 부득이 음모, 암살, 선동 이런 식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일을 결정하는 힘이 민중에 있는 이상 아무 때에 가서도 민중을 얻지 않고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도 혁명이 여러 번 없었던 것은 아니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 원인은 한결같이 그 일을 민중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갑신정변도 그렇고, 갑오경장도 그렇다. 그런데 3.1운동 때엔 처음부터 민중에 호소했다. 이점이 아주 주의할 만한 점이다. 민중을 믿었고 민중에 매달렸다. 그러므로 됐다. 민중은 언제나 자기를 부르는데 응하지 않는 법 없다. 그리고 민중이 일어설 때 막을 놈이 없다. 칼은 다하는 날이 있어도 민중은 다하는 날이 없다. 물론 언제나 일을 시작하는 것은 지식층이지만 그 지식층이 민중 앞에 겸손하지 않고는 일은 되지 않는다. 아무리 해방운동이라 하더라도 권력층이 민중을 이용하려는 심리를 벗어나지 못해가지고는 일은 될 수 없다.
민중을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3.1운동엔 구한국 시대의 벼슬아치가 주인도 아니요, 지식층의 학생이 주인도 아니요, 자본가가 주인도 아니요, 순전히 전체 민중이 주인이었다. 아무 음모도 없이, 아무 미리한 조직도 없이, 민중을 무조건 믿고 나서서, 하나가 “만세!” 할 때에 2천만이 한 목소리로 “만세!” 했다. 그때 바로 말없는 민중을 임금으로 모신 것이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3⦁1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문제는 없는 것 아닌데, 아무 힘 있는 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일본에게 나라가 망한 후 민족은 셋으로 갈라졌었다. 그전에 지사라던 사람은 외국으로 도망하고, 깉어있던 지식층은 대개 일본에 붙어먹고, 그리고 남은 민중, 무식하고 가난한 민중은 입을 닫고 소처럼 있었다. 지사들의 생각은 꼭같이 무력혁명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애국심은 뜨거우나 그 정치사상은 낡은 것이었다. 나라의 주인인 민중을 무식한 것이라고 업신여기고, 일은 언제나 자기네가 할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3.1운동에는 그 지사나 지식층의 청년이 민중 앞에 겸손히 믿음의 손을 내밀고, 주인으로 모셨다. “우리를 따르라” 하지 않고 “당신들이 해야 됩니다.”했다. 평민은 의리 는 것이요 감격하는 것이다. 자기를 믿어주면 죽을 데라도 들어가는 것이 민중이다. 3.1운동은 이 감격으로 하나 된 민중의 힘으로 되었다. 이때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사들의 낡은 꿈은 깨지고, 일본 군대의 강하기는 세계가 놀라는 것이었다. 길은 자연 어쩔 수 없이 민중의 가슴에 깃들어 있는 우주 본연의 진리에 호소하는 길밖에 없었다. 유일의 길이 참 길이다. 민중의 의기가 그렇듯 나타난즉 이때껏 대적에게 붙어먹던 층도 감격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민족통일은 이루어졌다. 민중을 제자리에 모시면 그들은 언제나 자기 할 일을 한다.
 
이 정신으로 남북통일

지금 우리에게 부닥친 것은 남북통일 문제다. 이것을 해결하는 데는 오직 한 길이 있을 뿐이다. 3.1운동에서 우리 민중의 양심을 동원하여 일본의 양심, 인류의 양심을 때렸고, 그러므로 그 힘을 막을 수 없었듯이, 오늘도 공산당을 이기는 것은 그 양심을 때리는 데 있다. 3.1운동은 실패 아니냐 하는가? 그런 소리 마라. 바다로 가는 냇물이 깊은 발 앞만 보고는 모른다. 3.1운동 아니었더라면 8.15는 없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대적을 도덕적 인간으로 믿고 그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 가장 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도둑의 사회도 성립이 되지 않고, 정의의 법칙을 지키지 않고는 무기조차도 만들 수 없다. 근본 되는 것은 이 우주의 윤리적 질서를 굳게 믿음이다. 人者無敵於天下(인자무적어천하)라, 어진(큰)이는 천하에 맞설 놈이 없다 하거니와, 어짊은 곧 민중의 마음이다. 그것이 큰 것이요 그것이 인(仁)이다. 민중은 언제나 믿는 것이요, 그러므로 평화요, 그러므로 살았다.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민중의 가슴이 흐려 올바른 판단을 잃고 그 본연의 힘을 잃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치업자들이 민중을 그대로 두지 않고 간사하고 음험하고 잔혹한 수단으로 강제하는 때에 그렇게 된다. 3.1운동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그러한 정치로 인하여 가슴 속에 눌려 있던 정신이 한때 화산처럼 내뿜은 것이다.
걱정은 소련에 있는 것도 중공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이해심으로 인한 민족의 분열에 있다. 정치적 갈라짐이 사회적 분열로까지 되어가는 데 있다.

3.1정신이 정말 있다면 38선이 걱정이겠느냐? 칼로 물을 쳐도 물은 또 합한다. 물같이 맑고 부드러우므로 하나 되는 정신 잃어버린 것이 걱정이지 칼이 걱정이냐? 그리고 이 하늘이 준 정신을 민중에게서 빼앗는 자가 누구냐? 정치업자 아니냐? 몇 해 전에 홀딱 벗겨진 우리나라 산림을 구원하기 위하여 영국의 노련한 임업 전문가를 데려다 물은 일이 있었는데, 그가 우리 산천을 다 돌아보고 가면서 마지막에 하는 말이 “건드리지 말고 두어라!” 했다고 한다. 그것을 또 정치에도 옮겨서 쓸 천고의 명언이다. 제발 민중을 건드리지 말라. 그리고 믿어라! 그들의 가슴 속에 언제나 제 일은 제가 하는 정신이 살아 있다. 1959.3.1
 
 
 
 
조선일보 1959년 3월 1일
저작집30; 5-15
전집20; 17-85
 
인간혁명 (1961 일우사)에 재 편집

문창극인가, 문참극인가 - 당당뉴스

문창극인가, 문참극인가 - 당당뉴스

문창극인가, 문참극인가
박창진  |  5016park@paran.com
입력 : 2014년 06월 24일 (화) 17:08:44
--

들어가면서

문창극 총리후보자가 자진사퇴를 했다. 그의 온누리교회 내 강의 내용으로 온 나라가 시끌법적했다. 한쪽에서는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강의 내용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지지를 보냈다. 조선일보에 ‘문창극 후보의 역사관은 신민사관이 아니라 신앙적 민족사관이다’라고 광고를 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복음주의 신학교수와 목사들이 이름을 올렸다. 한쪽에서는 식민사관의 발로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교회를 해친다고, 그것은 참극이기에 문참극이라고 비난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추구한다. 누군가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그 원리에 부합된다면 신자로서 마땅히 지지하여야 할 것이다. 비록 사회에서는 비난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사회의 비난이 두려워서 할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양쪽의 주장을 접하면서 지지하는 입장에서 대해 좀 상세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입장이 정당하다면 문창극의 승으로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문창극의 입장

첫째는 그의 강의의 일부분만을 편집한 내용이 아니라 전부를 듣고 판단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의 전체의 맥락에서 그 말이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를 알고 평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옳다. 그의 강의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고난을 통하여 연단하셨고 지금의 번영을 주셨으며 이제 우리 민족은 일본을 넘어서서 세계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기독교 역사관으로 볼 때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관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시며 그분이 그 뜻을 따라 역사를 진행해 가신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기에 어떤 인간 역사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나 한국동란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예수님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에는 여러 나라들에 대한 흥망성쇠에 대한 기록도 나타나고 있다.

셋째는 일제의 강점 자체가 선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뜻을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판 것은 죄악이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선으로 바꾸어 야곱의 가족을 구원하셨으니 요셉이 깨닫고 감사한 것과 같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잘못에 대해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략으로 징계하셨다.



문참극이라는 입장

문창극의 입장에 대해 평가하여야 한다. 성경적으로 정당하다면 문참극이라고 조롱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일반 사회인들은 그렇게 조롱하더라도 신자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성경적으로 정당한데도 조롱하는 자리에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인 것이다.



1. 강의의 맥락

첫째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옳다. 그렇다면 그의 강의의 맥락은 문제가 없는가? 그의 강의는 철저한 번영신학으로 점철되어 있다. 우리 민족의 번영을 이끌어주시는 분인 하나님이시다. 그렇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한 국가의 번영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조선인에 대해 한마디로 게으르다는 평가와 일제 병합이 연결되고 있다. 후자는 전자에 대한 징계의 차원이라는 것이다. 일제 병합이 근대화를 가지고 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전형적인 식민사관이다.

한국동란이 한국을 떠나는 미국을 붙잡고 한국이 미국에서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역사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형적인 사대주의다.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깨뜨려도 된다거나 깨뜨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이 최선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으며 그렇게 생각하여서도 안 된다.


2. 신학의 문제

핵심은 둘째 부분이다. 신학의 문제이다. 칼뱅은 그의 섭리론에서 우주의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다고 하였다. 앞에 언급한 예수님의 말씀이나 인간 역사에 대해선 성경이 간간히 예정이라고 말씀하는 부분 등이 그 근거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예정을 이루심에 있어서 악한 자를 사용하신다고 하였다. 신학계에서는 허용적 작정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악을 주도하신 것이 아니라 악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나님은 당연히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표현이 너무나 거슬리겠지만 신자에게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역사를 주관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도 함께 필요하다. 직간접적인 개입하심과 내버려두심이라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때에는 전자에 해당된다. 직접적이든지 간접적이든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전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말씀하는 내용들은 모두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것이다. 앞에 언급된 요셉이나 이스라엘이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거나 심판으로 멸망하는 내용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백성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경우이다. 성경에 기록된 여러 나라의 흥망성쇠도 이스라엘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스라엘과 전혀 무관한 나라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중국에 대한 기술이 성경에 없는 것과 같다.

후자는 그 이외의 경우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시 81:1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롬 1:24). 인용한 내용은 개인에 관한 것인데, 역사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직간접적인 개입하심이 없다. 그 일이 생겨나도록 하나님께서 직간접적으로 역사하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전적인 인간의 자유 의지가 발현된 것일 뿐이다.

일제 병합은 내버려두심의 하나님의 역사에 해당된다. 일제가 제국주의의 욕심으로 이웃 나라를 강제로 침략하여 국권을 빼앗은 것이다.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악한 자에 의해 그 일이 발생하였다. http://c.hani.co.kr/hantoma/2514629의 내용에 대해 나는 동의한다. 대한민국 또는 한국교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경고하시고자 그 일이 발생하였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내버려두심이라는 말은 이미 정해진 법칙이 전제되고 그 법칙을 따라 진행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자연법칙과 인간의 자유 의지가 전제된 법칙이다. 그 법칙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에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용하심에 해당된다.

큰 그림으로 보면 내버려두심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포함되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제를 야기한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표현에는 직접적이든지 간접적이든지 개입하심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문 후보자의 강의 내용은 여기에 해당된다.

신학은 성경 해석의 문제이다. 칼뱅의 섭리론은 성경을 잘못 읽은 결과이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것을 미리 정하지 않으셨다. 성경의 예정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연결된 것이다. 일반 역사는 하나님의 허용하심에 속한다. 자연법칙과 자유 의지가 그대로 발현된다.

일제 병합은 일제의 욕심을 따른 만행이었을 뿐이다. 그 만행으로 인해 이 민족이 너무나도 큰 고통을 겪었다. 지금도 그 연정선상에서 대한민국호가 나아가고 있다. 일제부역자들이 아무런 심판을 받지 않고 반공주의자로 변신하여 그 권력을 그대로 휘두르고 있다. 근대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왜곡하고 우민화를 통해 그 권력을 계속적으로 유지해가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친일의 역사를 정확하게 밝히고 심판의 역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 후손들에 대해 직접 책임을 묻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하여야 하겠지만 나는 모든 공직을 빼앗고 재산에 대해서도 국가에 귀속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역사를 바로세우는 기초 작업이다. 그리고 근대사를 재정립하고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이 민주 사회의 깨어있는 시민으로 자라도록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조치이다.

조선의 근대화는 일제 병합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늦어졌을 수도 있다. 아니 일제의 욕심으로 인해 더 늦어졌다. 외국 문물을 더 많이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근대화가 바람직하며 그것이 일제 병합보다 더 시기를 단축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제 병합이 근대화를 가져왔는가에 대해서 의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근대화에 대해 긍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수탈과 많은 연약한 백성들의 억울한 죽음 그리고 전쟁에 내몰리고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되는 등의 악행을 생각하면 결코 하나님의 뜻을 운운할 일이 아닌 것이다.

신앙이 바른 지식을 벗어나면 폭력이 되며 하나님을 망령되게 한다.



3. 표면적인 성경 읽기의 오류

셋째는 표면적인 성경 읽기의 오류이다. 문 후보자나 지지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성경적 근거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나 그 가운에 어떤 한 백성과 관련된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것을 일제 병합이나 한국동란에 그대로 대입해도 되는가? 전혀 아니다. 우리 민족,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나 인도하심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요셉의 경우에는 형들을 만나 자신이 애굽에 오게 된 것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면서 형들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일제 병합에 대입하면 일본을 원망하지 않고 병합에 대한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 이전에 아예 요구조차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어떤 이들은 죽고 어떤 이들은 포로로 잡혀가서 70년 동안 포로로 살았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하박국은 힘든 과정을 거쳐 전적으로 수용하며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되어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즐거워하리라고 고백하였다. 우리 민족은 일제 병합을 구원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여야 하는가? 전혀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이 차고 돌아오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독립 운동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고 그 기한을 임의로 줄이려는 것은 불신앙이다. 일제의 강제점령에서 해방되기 이전에 그 많은 독립 운동들은 잘못된 것인가? 전혀 아니다.

성경을 표면적으로 읽고서 아무 사건에나 대입시키면 이처럼 많은 문제들이 야기된다. 이 일에 대처하는 한국교회의 한쪽 모습을 보면 딱 이 수준이다. 성경을 표면적으로 읽고 과거의 잘못된 주장임에도 그냥 답습하는 상태이다.



현대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칼뱅은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에는 자연히 죄의 문제가 뒤따른다. 죄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냐의 문제이다. 또한 자연재해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냐는 문제도 뒤따른다.

그는 태양열과 시체의 악취를 비유하여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였다. 시체의 악취가 태양 빛 때문이지만 아무도 그 빛으로부터 악취가 나왔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악의 실질과 죄책은 악한 사람들 속에 있으므로 하나님이 자신의 목적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악인들의 사용하신다고 해서 하나님께 어떤 책임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비유와 그 적용은 적절하지 못하다. “~ 때문에”와 “~에도 불구하고”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태양 빛 때문에 시체의 악취가 나는 것이 아니다. 태양 빛에도 불구하고 시체의 악취가 나는 것이다. 생명이 없기에 그 자체의 속성으로 인해 악취가 나는 것이지 빛 때문에 악취가 나는 것이 아니다.

범죄나 불순종은 하나님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있게 된다. 범죄와 불순종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옳지 않다. 범죄와 불순종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지 않기를 원하셨는데, 인간이 자기 욕심에 끌려 범죄하는 것이다.

문창극의 입장에 있는 이들은 앞에 기술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 말하여도 수긍하지 않는다. 우주의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직간접적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칼뱅의 관점을 따라 지금까지의 생각을 고수할 뿐이다.

그들을 보면 예수님 당대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떠오른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비록 율법을 말하지만 그 율법에 대한 조상들의 이해를 더 앞세웠다. 예수님께서 그 문제를 지적하였는데, 전혀 수긍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였다.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는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굳건하게 확신하면서 말이다. 조상들의 전통이 모두 잘못은 아니었다. 옳은 내용도 있었다. 그것을 분별하고 잘못된 것을 버려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칼뱅을 추종하는 이들도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칼뱅의 주장은 옳은 내용과 잘못된 내용이 함께 있다. 분별하여야 한다. 옳은 내용은 더 발전시키고 잘못된 내용은 거부하여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아니다. 칼뱅의 잘못된 주장을 밝히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인 것처럼 반응한다. 이는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나가면서

문창극인가 아니면 문참극인가. 성경을 바르게 읽으면 답은 명백하다. 문참극이다. 이게 한국교회 주류로 이야기되는 이들의 맨얼굴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자랑한다. 참극임에도 참극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알려주어도 들을 귀가 없다. 이제까지 그렇게 들어왔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그냥 따를 뿐이다.

성경을 잘못 읽고서 생긴 잘못된 전통의 문제는 심각하다. 지금과 같은 일이 생겨난다. 사회인들에게 조롱을 받는다. “그런 하나님이라면...”이라는 조롱이다. 물론 모든 조롱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이 경우의 조롱은 옳다. 교회에 대한 거부감이 강화되고 복음의 문이 막히거나 좁혀진다. 문 후보자를 지지하는 목사들은 거기에 기름을 붓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사건은 진지하게 우리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고 그러한 이해의 토대 위에 신자들이 바른 생각을 하도록 섬기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 현실이어서 안타깝지만 말이다.

---
박창진의 다른기사 보기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 오마이뉴스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 오마이뉴스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김우현 감독의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를 읽고서
05.03.13 
l권성권(littlechri)

〈1〉고(故) 최춘선 할아버지는 누구인가.

"일제 치하 암흑기에는 나라의 광복을 위해
광복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과 평화를 꽃피우기 위해
애쓰신 맨발의 전도자 아버님의 그 뜻과 믿음을
저희 자손들이 이어받겠습니다."

이는 대전 현충원에 있는 '제2애국지사묘역906호', 고(故) 최춘선 할아버지의 묘비명에 새겨진 글귀이다.

최춘선 할아버지는 누구인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 낮선 애국지사다. 그는 또 '맨발의 전도자'란 칭호가 붙을 정도로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신실한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인이다.

그런 그가 우리나라를 위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대전 현충원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었으며,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았기에 '맨발의 전도자'란 칭호가 따라 붙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춘선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김구 선생님과 함께 일제 치하에서 광복군 독립투사로 일했고, 광복 후에는 참된 '조선산 기독교'와 '조국 통일'을 위해서, 그리고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의 친구로서 남은 평생을 다 바쳤던 분이다.

그런데 그 분이 광복군 독립투사로서 김구 선생님을 어떻게 도왔는지, 또 어떤 독립운동을 펼쳤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그 시대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한 축을 담당했던 까닭에 지금 현충원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는 것은 분명하리라.

〈2〉김우현 감독의 <맨발천사 최춘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분을 좀더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김우현 감독이 찍고 쓴 <맨발천사 최춘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규장·2005)를 보고 읽으면 된다.

인간극장 〈친구와 하모니카〉로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김우현 감독은 '르포'처럼 전혀 의도하지 않고, 그저 지나가다가 8m 카메라에 그 할아버지를 담았다는데, 그것을 편집하고 다시금 글로 옮겨 쓰다 보니까, 그 할아버지에 관한 작품이 나왔다고 한다.

역시 그 책에도 그 할아버지가 어떤 독립운동을 펼쳤는지에 대해서는 나와있지 않다. 다만 그 책에는 그 할아버지가 광복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에 대해서 상세히 소개돼 있다. 묘비명에도 쓰여 있는 것처럼, 그가 어떻게 '맨발의 전도자'로서 살아 왔는지에 대해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대략적인 내용을 훑어보면 이렇다. 그는 잘 살았던 아버지 덕에 부유하게 자랄 수 있었고, 또 일찍 일본에 유학까지 갈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 '우찌무라 간쪼'와 그의 제자인 '가가와 도요히코' 밑에서 성경과 신앙관을 배우게 된다. 물론 우찌무라 간쪼를 통해 우리나라의 김교신이나 함석헌 선생도 알게 됐고, 그런 분들과 함께 '조선산 기독교'와 '독립'에 대해서 눈뜨게 된다.

그리하여 만주와 상해를 발판삼아 하던 독립 운동 [?]이 끝난 후에는, 대한민국에 들어와서 참다운 조선산 기독교 운동을 펼치게 되는데, 그 분은 그때부터 기독교 종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홀로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이를테면, 지하철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나 빈민구호 단체들을 찾아가서 직접 몸으로 돕기도 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과 탈북자 난민들도 직접 데려다가 씻겨주고 밥도 먹여 준다. 또한 땅이 없는 자에게는 자신이 갖고 있는 땅도 나누어주고, 살아갈 집이 없는 자에게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집도 기꺼이 내어 준다.

그러나 그렇게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데도, 그는 구박과 면박을 받기가 일쑤였다. 그것은 그가 지하철 안에서 그리고 길거리에서 맨발로 복음을 전하기 때문인데, 그를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狂人)로 내몰기도 했고, 어딘가 모자란 사람쯤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그 웃는 얼굴 웃는 안광(眼光), 김구 주석 꼭 닮았어, 축하합니다."
"아주머니는 그 인자한 미소와 자태, 신사임당 꼭 닮았어, 축하합니다."(42쪽)

"미스 코리아 춘향이, 다 좋은 데 그 귀걸이는 너무 비싸."
"다 좋은데 그 모자는 비싼 외제야."
"나라의 군비가 너무 많은데. 농가 부채가 너무 많은데."
"미스터 코리아 민영환, 미스 코리아 춘양이, Why two Korea."(88쪽)

더군다나 그가 사람들에게 전혀 맞지 않는 말, 전혀 해석이 안 되는 선문답 같은 말만 하니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김구 주석처럼 닮았다고, 신사임당 닮았다고 하면 그래도 웃음이 나올 법 한대, 왜 그는 그들을 말하면서 끝머리에 'Why two Korea'를 외치는 것인가.

그것은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유관순과 안중근 같이 나라를 사랑한다면, 그런 분들이 가득하다면, 왜(Why) 두 개의 코리아(two Korea)로, 분단된 조국으로 나뉠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그저 겉만 화려하게 꾸미는 미스, 미스터 코리아가 아니라 신사임당과 김구 선생 같이 나라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리와 자유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던지며 희생할 수 있는 그런 한국인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그는 팔십 평생이 되도록 통일 한국을 염원하면서, 삼십 년 간을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 발로 살아 왔던 것이다. 오로지 통일 하나를 바라는 마음으로….

"통일이 오면 신어요!"(194쪽)

통일이 오면 신발을 신겠다던, 그토록 통일을 바라시던 최춘선 할아버지는 그러나 2001년 7월에 갑작스레 저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3〉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고(故) 최춘선 할아버지가 사셨던 삶을 기독교인들은 가슴 깊이 새기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그 할아버지에게서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사는 것이 그 할아버지처럼 사는 길이겠는가?

그 분은 우찌무라 간쪼에게서 신탁통치와 자본주의가 맞물려 있는 미국식 기독교가 아니라 자주 독립적인 조선산 기독교를 배웠으며, 가가와 도요히코에게는 낮은 곳을 향하는 삶, 가난한 자를 찾아가는 삶, 밑바닥 삶을 사는 자들과 벗으로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배웠다.

그러나 그 분은 그들에게서 배운 것들을 그저 머릿속으로만 깨우치는데 그쳤던 게 아니다.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광복 후 대한민국에 들어온 순간부터 오로지 '조선산 기독교'를 세우는데, '통일'을 맨발바닥으로 바라면서, 가난한 자들과 헐벗고 굶주린 자들의 친구처럼 사는 데 그 온 몸을 던졌다.

그렇기에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도 고(故) 최춘선 할아버지처럼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사치스런 기독교, 자본주의적 기독교, 몸통만 부풀리는 기독교 교회를 세워 나가는데 혈안이 될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둘로 쪼개진 이 나라를 하나로 만들 것인지, 어떻게 하면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의 친구가 될 것인지, 그것을 더 생각하며 온 몸으로 살아내야 할 것이다.

"이미 60년대 초부터 자가용도 여러 대 있었고, 김포에 있는 아버님 소유의 땅에 학교, 교회, 양로원, 고아원, 양계장 등이 다 있었는데, 주님 말씀을 깨닫고 나서 다 나누어야 한다고 내 놓으신 거죠."(241쪽)
============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책 + DVD) - 맨발천사 최춘선,
김우현 지음, 규장(규장문화사)(2004)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16] 【지구평화학】종교평화론을 통한 지구평화의 모색 원영상*

 16] 【지구평화학】종교평화론을 통한 지구평화의 모색 원영상*

37)

요약문   코로나19, 환경 재난, 대규모의 전쟁 등으로 인해 지구는 여명이 얼마 남지 않는 상태가 되었

다. 모든 것은 인간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특히 전쟁은 인간 자신을 파멸시키기도 하지만, 과학, 자본, 이념 등이 총동원되어 자기 파괴로 가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이다. 지구가 멸망한다면 아마도 세계대전이 원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인간 간의 증오에 의한 전쟁을 막는 일이다. 물론 환경재난 등 시시각각으로 밀려오는 지구 붕괴의 위기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이 지구적 컨센서스가 필요하다. 그 럼에도 지구평화학이 시급한 것은 자기 파괴를 스스럼 없이 자행하는 몰인격적 무분별 행위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실존적 인간의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일이 무시간적으로 발생한다. 지구평화학은 모든 위기를 막는 지구적 차원의 지혜를 발산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지구평화학은 현대문명에 필 수적이다. 그리고 그것의 구조는 종교평화학이다. 즉, 폭력이 극대화되는 세계의 아노미 상태를 자기반성을 거친 종교평화학으로 새롭게 길을 놓아야 한다. 코로나19의 고통의 세계화에 대한 긴급한 진단과 처방을 위 해 도덕과 윤리를 소환하는 시점에서 동시에 또한 지구평화학이 요청된다. 이를 위한 종교평화학 구축을 통 해 세계의 분쟁만이 아니라 이성과 이성의 과잉으로 초래된 이 문명에 대해 새로운 처방을 내놓아야 한다. 물론 그 방법은 기존의 인문학적 종교연구, 사회과학적 평화연구를 융합하는 것이다. 서울대를 중심으로 평 화인문학을 개진하고 있기도 하다. 이는 결국 종교의 ‘오래된 새길’에서 모색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 아와 우주가 합일되는 영성을 창구로 하여, 사회와 지구, 나아가 우주로 향하는 열린 인식을 종교 그 자체 의 본질을 기반으로 현실 사회에 대응 가능한 종교평화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지구평화학, 평화인문학의 기반 구축에는 종교평화학이 가장 핵심적 토대가 될 것이다.

차 례

Ⅰ. 머리말

Ⅱ. 지구위기와 종교의 복귀

Ⅲ. 종교평화론에 대한 담론

Ⅳ. 지구평화를 향한 종교평화론

Ⅴ. 맺음말

 

*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Ⅰ. 머리말

지구의 미래는 있는가? 지구 온난화, 코로나19 팬데믹, 끊임없는 전쟁 등 지구는 질서보다도 무 질서가 증가되어 온 것이 현실이다. 욕망에 의해 뒷받침된 자본주의의 세계화는 지구의 한계를 더 욱 명확히 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자정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인간 개개인이 결정하고, 실천해 서 해결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 세계는 공동의 의지로 이 난국을 해결해 나가지 않는 한 결코 누가 구원해 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특히 현실적 삶을 불안으로 몰아넣는 폭력과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

상 무기의 발달로 인해 한 순간에 지구를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익과 감정에 위배되면 상대를 절멸시키고야 말겠다는 야만적 본능은 인간만이 발현되며, 전쟁은 그 과 정이다. 전쟁만큼 인간을 불안으로 몰아넣는 일은 없을 것이다. 21세기는 과학과 자본에 힘입어 본 격적인 대량살상이 이루어졌다. 

1, 2차 세계대전은 물론, 중국 내전, 6·25전쟁, 남북베트남 전쟁,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 미국과 이라크 전쟁 등 이 외에 수없는 국지전은 손으로 헤아리기도 어렵다. 전문가들은 1~2억명이 20세 기 전쟁에서 죽었다고 한다. 강인철은 1999년도의 세계 분쟁 45건이 무력충돌 가운데 24건이 종교 분쟁으로 53.3%에 이른다고 한다. ) 이 외에도 언론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종교분쟁이 아닌 전쟁에 도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쟁과 종교는 유사 이래 서로 불가분 의 관계로 그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2018 세계 군비 지출 동향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 국가의 군비 지출액이 1조 8220억 달러(2,122조)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전세계 1인당 군사비 지출은 평균 239달러에 해당한다. ) 이는 더욱 늘고 있다. 첨단무기는 갈수록 살상성능이 강화된다. 국가와 자본은 결탁하여 전쟁마저도 외주화 하는 일이 일어난다. ) 이처럼 약육강식이 횡행하는 지구는 과 연 희망이 있는 것일까. 이를 비판하고, 이에 저항해야할 논리를 제공해야할 학문마저도 자본의 의 지에 눌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에게는 희망을 걸 수 있을까. 필자를 비롯한 종교인, 학자들은 2015년부터 ‘종교폭력-평화-국가’의 관계를 중심 테마로 하여 토론하는 레페스(REligion and PEace Studies, 종교평 화연구)포럼을 개최해왔다. 그 목표는 ‘종교평화론 구축’이다. 그 토론의 성과를 묶어 종교 안 에서 종교를 넘어: 불교와 그리스도인의 대화(2017), 지속적 폭력과 간헐적 평화(2020)를 출판하 고 종교평화론 담론(가제)을 금년 4월에 출판할 예정이다. 세 번째 공저는 한일 간에 종교인, 학 자들이 양국을 오가며 토론한 내용이다. 금년에는 ‘아시아 종교평화학회(Asian Association For Rel igion and Peace)’를 출범시킬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무기한 연기되었다. 본 연구도 이 선상에 놓여 있다. 지구적 평화의 희망을 결국 다시 종교로부터 찾고자 하는 열망인 것이다. 

Ⅱ. 지구위기와 종교의 복귀

후기마르크스주의적 문학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에서 계몽주의 이래 

신의 죽음을 기획했던 이성은 실패했다고 한다. 그는 신의 임시 대리역할을 했던 모든 지적 현상 이 담당했던 사회적 역할은 종교가 짊어졌던 이념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종교는 세속화의 길을 통해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제 모든 것이 상대화되고, 무의 미해진 포스트모던사회에서 ‘전능한 신’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 하여, 자아의 증 폭과 폭주로 무질서해진 현대에 다시금 종교를 소환시키고 있다. 그는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으로 서의 종교는 여지없이 비판하지만, 종교가 연마해온 실천적 삶, 존재의 혁명을 추종하는 종교의 

‘실천적’가치를 재조명하면서 현대문화에 대한 해독제를 종교에서 발견하고 있다. )  이에 “종교적 믿음이 사회 질서의 실존을 위한 일련의 근거를 제공하는 부담에서 자유로워진다

면, 종교적 믿음은 정치의 비판자로서 진정한 목적을 자유롭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6)라고 보며 종교를 현실로 이끌어 내고 있다. 인간의 주체성에 담긴 오만은 신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예 들 들어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해 점령했을 때, 미국은 자신들의 동맹들과 함께 1991년 1월 이 라크를 공격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전 세계를 향해 전쟁을 선포하는 TV연설에서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개시한다”고 했다. 신은 이 전쟁에 개입하라고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 도 그는 신의 대리자임을 내세워 전쟁에 개입했던 것이다. 

이후 2001년 9·11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라크 침공 등 주권을 가진 국가에 무력으로 침입하여 수많은 백성을 살상으로 몰아넣었다. 물론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나 테러를 일삼은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 알카에다에 일차적 문제가 있다. 그러나 전체적 상황을 분석해보면, 이 러한 국가 간 분쟁이나 테러리스트를 키운 세력은 미국이기도 하다. 현실의 한 면만을 가지고, 힘 센 나라가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며, 전쟁을 전쟁으로 막으려고 하는 악순환을 세계는 눈뜨고 바 라보아야만 한다. 전쟁은 무의미하다. 역사 이래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실 제 희생자들은 전쟁터의 힘없는 군인들, 노약자, 여성, 어린이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생명과 삶의 터전을 이유도 모른채 화염 속에 던져야 했다. 

여기에 새삼스럽게 통계를 제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군대는 인간을 죽이 기 위한 조직이다. 어떤 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그 국가와 전통에 속해 교육을 받고, 적을 인정 하고 유사시 전쟁터에 나간다. 과연 개인의 의지는 있는 것인가. 국가와 자본은 전쟁을 수행하는 양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과 무기를 제공하는 한, 군대는 존속한다. 지구의 현실적 위기는 갈등 과 분열, 폭력과 전쟁이다. 

종교는 여전히 삶의 유용한 요소다. 정진홍은 종교란 “존재론적 차원에 이르는 모든 물음을 수 용하고,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해답을 수렴하면서, 바로 그 존재론적 차원으로부터 표상화 되는 물음과 해답의 상징체계이다” )라고 한다. 과거처럼 종교의 사회적 지배나 역할이 줄어든 현 재에도 종교는 다양한 형태로 삶에 침투해 있다. 정진홍이 말하는 존재론에 대한 물음에 답을 얻 고자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의 개인적 종교를 갖는다. 테리 이글턴 또한 “종교는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낸 가장 강력하고 끈질기며 보편적인 상징형식이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와 개별적 일 상을 그렇게 직접적으로 연결시켜주었던 상징형식이 어디 있었단 말인가” )라고 하며 종교의 복원 을 주장한다. 종교는 상징을 상징으로 해석하지 않고 사실로 해석하기 때문에 수많은 전쟁과 갈등 이 초래되었다 )고 한다.  과거에 집착된 종교를 역사로 보지 않고, 내적 초월의 세계와 일상의 삶 을 잇는 가교로 보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종교는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위기의 시대에 종교가 다

시 복원된다고 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미 종교적 차원에서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물음을 종교는 지속적으로 해왔다. 문제는 이러한 한계상황이 개인적 차원만이 아니라 집단적 차 원, 지구적 차원으로까지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종교는 이 세상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를 구축하는 데에도 기여해 왔다. 윤리나 도덕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인류가 현재 요구하는 것은 이러한 질서의 원천을 종교로부터 다시 얻고자 하는 것이다. 나아가 세계를 통합하 고, 새로운 가치를 주조해냄으로써 불투명한 인류의 미래에 희망을 부여하자는 것이다. 종교가 소 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Ⅲ. 종교평화론에 대한 담론

세계의 많은 지성들은 종교와 평화의 관계에 대한 언설을 내놓고 있다. 특히 평화학의 창시자 

요한 갈퉁은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에서 전쟁과 같은 폭력을 직접적 폭력, 전쟁이 없는 상태 의 간접적 폭력을 구조적 폭력이라고 본다. 전자가 없는 상태가 소극적 평화, 후자가 없는 상태가 적극적 평화이다. 그리고 이 폭력들의 이면에는 문화적 폭력이 존재한다. 이는 “모든 상징적인 것 으로 종교와 사상, 언어와 예술, 과학과 법, 대중 매체와 교육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 다. ) 그 중에서도 종교는 문화적 폭력의 제1순위에 놓여 있다. 

요한 갈퉁은 종교는 초월적 목표에 초점을 두는 강한 측면과 대중의 기본적 욕구 충족과 같은 현세의 문제에 초점을 두는 부드러운 측면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측면이 각각 문화적 폭력과 문화적 평화에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종교의 강한 측면, 즉 형이상학적 세계나 이를 담보로 한 권력적 측면이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어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갈퉁 은 종교의 생명 중시의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 간디 사상 속의 생명의 통합(unity-of-life)과 수단과 목적의 통합(unity-of-means-and-ends)

의 원칙들을 존중한다. 그리고 이 원칙들은 모든 생명의 신성함을 존중하라는 것과 수단과 목적을 소중히 하는 것은 스스로를 소중히 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교훈을 수용하라는 것이라고 한다. ) 갈퉁은 서양의 종교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이처럼 동양 종교들의 가르침 속에서 여러 가지 교훈을 찾아낸다. 이병욱은 문화적 폭력에 대한 처방으로써 불교의 공(空)사상은 모든 이데올로기 의 그물에서 벗어나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불교에 대한 집착마저 벗어 날 때 진리의 눈을 얻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집착하지 않는 유 연함과 개방성이 열리는 것이다”  )고 한다. 수행의 관점에서 평화와 관련한 동양종교의 본질을 꿰뚫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울리히 벡의 언설 또한 이 점에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그는 “종교란 수백 년 동안 거대한 초국적 장벽 쌓기 또는 허물기를 전문적으로 수행한 건설재벌이다”라고 하며, “종교는 서로에 대항하거나 서로 힘을 합쳐 종족, 민족, 아니 대륙을 넘어 장벽을 헐거나 세운다” )라고 비판한 다. 종교적 보편주의들 간의 충돌은 폭력을 양산한다. 이에 민족, 종교, 폭력의 상관성이 19세를 관 통하는 특징이었고, 20세기에는 세계대전을 통해 그 정점에 도달했다. 따라서 현재의 글로벌 위험 사회에서는 “평화가 진리를 얼마나 대신할 수 있는가에 따라 인류의 존속이 결정된다”며, “종 교는 세계정치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 

극한사회에 이른 인류는 신자유주의의 통로를 종교의 보편적 가치로 재포장해야 한다. 폭력이 

극대화되는 세계의 아노미 상태의 타개를 위해 약자나 소수자 문제 등에 종교적-세속적 경계를 넘 어선 협동을 통한 일상적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그 유용성을 찾는다. ) 종교가 지닌 내적 연대, 나 아가 열린 종교의 외적 연대로까지 확장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제도 종교의 문제는 자기중심적 선교, 포교로 인해 갈등을 일으킨다. 밖으로도 배타적 분열을 일 으키는 한편, 안으로도 분리되어 진보와 보수, 전통과 혁신 등의 파벌로 나뉜다. 당연히 폭력이 배 태될 수밖에 없다. 밖으로는 정의의 전쟁론인 성전(聖戰)을 일으키며, 안으로는 권력을 향한 교단주 의가 횡행한다. 여전히 강한 뿌리가 남아 있긴 하지만, 종교의 권력화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실질적 으로 해체되어 가고 있다. 대표적인 것인 해방신학과 참여불교다.

해방신학은 남미에서 1960년대 말부터 정치적 억압과 경제 수탈에 대항해 신학이 사회에 참여하

여 고통을 극복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개진되었다. 60년대 전반에 개최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고 사회구조를 인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정, 위르겐 몰트만 등 신학자 들이 나치 독일과 유대인 대학살을 경험하고 나온 기독교 복음의 사회적 책임 주장, 마르크스주의 적인 경제사상 등이 배경이 되었다. 해방신학에는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정치, 경제적인 폭력에 대 항하는 평화의 논리로써 대화, 비폭력, 중재 등의 평화적 수단이 들어 있다. ) 여전히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에 앞에 해방신학은 더욱 요구된다. 

참여불교 ) 또한 20세기에 일어난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불교계를 말한다. 불법승 삼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사회에 개입한다. 스리랑카 내전에서 불교계의 중재 와 화해의 역할, 일본 내 현대적 재가불교 단체들의 세계평화운동, 원불교와 정토회를 비롯한 한국 현대불교의 평화운동은 등은 매우 적극적이다. 오늘날 해방신학과 참여불교는 종교의 무정부적 차 원의 지평을 기반으로 지구적 차원의 신자유주의 하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폭력적 상황과 그 하부 구조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갈등의 사회구조를 뛰어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Ⅳ. 지구평화를 향한 종교평화론

지구평화를 위한 종교평화론의 역할은 무엇인가. 어떤 측면에서 종교는 지구적 차원의 갈등구조

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종교가 가진 다양한 가치는 지구를 실제로 통합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까. 종교를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 차원으로, 종교적 가치를 사회적 가치로 전환하는 데에 성 공할 수 있을까.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레페스포럼은 이처럼 거시적 문제 해결을 위한 첫 걸음이다. 이러한 담

론이 가능한 것은 한국사회가 다종교 사회이기 때문이다. 독점적 종교가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류 미래에 희망을 선사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노마드(nomad) 사회에서 지구 내에 영향력을 가진 종교들과 한반도 자생 종교들이 때로는 연합하여 사회문제 해결을 시도 하고 있다는 자체가 고무적이다. 최근 환경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한국의 종교환경연대 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한반도가 고통 받는 곳에서는 종교의 일상적인 연대가 일어난다. 그렇다 면 타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이러한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측면인가? 종교의 심층적 차 원의 세계로부터 개인을 둘러싼 사회적 차원, 나아가 세계적 차원으로까지 종교평화론은 확장 가 능할까?

필자는 무엇보다도 종교가 가진 최초의 속성, 예를 들어 세계의 근원과 소통하는 통찰적 예지로

써 인류가 형제·자매라고 하는 하나의 가족, 또는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가르침은 그 어떤 혁명보다도 근원적이며 보편적이다고 판단한다. 현재 평화는 이러 한 종교적 세계관이 실질적으로 투영되고 확장되어 가는 과정이다. 이는 종교가 지구적 차원에서 근본적 평화를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는 증거에 다름이 아니다. 종교가 가진 인간적 연대는 그렇 다면 지구적 평화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까. 다음의 네 가지 측면에서 보고자 한다. 첫째, 정의의 전쟁론에 대한 대응을 위한 종교평화론이다. 

종교에서의 정당한 전쟁론은 동서 양 세계에서 진행되었다. 불교는 정법으로 다스리는 전륜성왕 은 불가피할 경우 전쟁에 참여할 수 있다. ) 그것은 불의와 악에 대항하는 상황에 해당한다. 그러 나 근본적으로 석존이 직접 부여한 불살생계에 의해 살상이 동반되는 전쟁은 허용되지 않는다. 석 존 또한 전쟁을 막기 위해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가톨릭에서는 중세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불가피한 정당한 전쟁론이 주장되었다. 이러한 논리 또한 ‘나를 박해하는 자를 사랑하라’는 예 수의 언설에 비추어 본다면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성전론이 가장 횡행하는 지역은 이슬람권이다. 지하드는 신앙의 원리를 위한 투쟁이었지

만, 이슬람 원리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지하드 또한 이슬람 신자가 정당방위에 해당하는 경우에 전쟁을 치르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성전 혹은 정당한 전쟁론은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역사를 통해 전쟁은 보복을 위한 악순환이 되고 있으며, 실제 큰 피해자는 전쟁 당 사자보다도 대부분 약자들이다. 역사적으로 정당한 전쟁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이는 종 교 근본주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종교적 신념에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집착, 종교교단주의의 내적 구조화, 경전의 몰역사적이고 폐쇄적인 해석 등등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종교평화론의 역 할이 있을 것이다.   둘째, 적극적 평화구현을 위한 감폭력의 종교평화론이다.

이는 종교평화론자 이찬수의 문제 제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평화와 평화들에서 요한 갈퉁 의 ‘적극적 평화’는 이상적 질서의 기독교적 표현인 ‘하느님 나라’, 유학에서 말하는 ‘대동 (大同)’, 한국 신종교들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개벽(開闢) 사상의 구조와도 비슷하다고 한다. ) 하느님 나라나 개벽은 적극적 평화에 대한 종교적인 표현 혹은 번역들이라고 본다. 개벽의 구체적 내용을 적극적 평화라고 해도 된다는 뜻이다. 그는 종교 연구는 평화 연구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평화학에서의 평화는 종교적 이상과 상통한다고 한다. 

이찬수는 평화는 평화적 수단에 의해 이루어지며, 과정으로서의 평화 역시 평화라는 목적에서 

온다는 평화학의 기본 구상은 종교적 혹은 신학적 구조와 상응한다고 본다. 또한 종교적 혹은 신 학적 언어를 세속화 시대에 어울리도록 변형시키면 평화학이 된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규명하고 있다. 평화학은 ‘세속화한 시대의 신학’, 혹은 종교적 세계관의 ‘세속적 변용’이라는 사실을 밝힘고자 하는 것이다. ‘평화는 종교의 본질이고 이상’이라는 근원적 사실을 주장한다. ) 그는 평화학과 종교적 이상 모두에 공통적으로 담겨있는 평화 개념을 중심으로 평화학과 종교가 결국은 평화를 지향하고 구현하려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평화는 폭력 줄이기, 즉 감폭력(減暴力)의 과정’이라는 지론을 통해 종교평화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셋째, 보편윤리 제정에 종교평화론의 역할이다.

세계종교자평화회의(WCRP)는 1970년 함께 사는 세계를 위해 행동해야할 내용을 7개 항으로 정 리했다. 공동의 인간성, 공동의 안전, 상호의존성, 공동의 미래, 공동의 삶, 포괄적 교육, 희망과 헌 신이다. 이 내용은 세계보편윤리를 확립하는 기초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부터 유네스코 철학· 윤리국에서는 보편윤리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1997년 파리에서 ‘보편윤리를 위한 개념적, 철 학적 기초’를, 1999년 한국에서 ‘보편윤리와 아시아 가치’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가졌다. 이러 한 논의는 지구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시급한 과제이다. 또한 지구 전체의 헌법 제정을 위한 토대를 구축하는 일이다. 

이 보편윤리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며, 존중하는 가운데 모두에 게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확립해야 된다. 특히 다양한 문화, 국가, 민족, 종교들의 특수한 가치 를 넘어서 이들 가치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이 보편윤 리는 전체의 공동 이익과 함께 개인의 이익에도 부합하는 경우에 그 당위성이 성립한다. 이를 위 해서는 모두가 공감하면서도 모든 문제를 포용하는 초월적인 가치에 서 있는 종교성에 기반 할 필 요가 있다. 따라서 종교적 가치에 기반한 지구 차원의 평화를 위한 논의가 요구된다. 

넷째, 평화인문학, 녹색평화학과 종교평화론과의 관계 정립이다.

최근 서울대학교 평화인문학단에서는 평화인문학을 주제로 다양한 연구 성과를 도출했다. 지금

까지 사회학의 영역이었던 평화학을 인문학의 영역으로까지 깊숙이 끌어들인 것이다. 홍정호 또한 「한반도 평화인문학의 기초 과제로서의 종교평화학 형성 방안 연구」 )에서 기독교의 신학(선교)적 차원에서 한반도를 필드로 종교평화학을 시도하고 있다. 평화인문학에서는 지구의 실질적 평화구 축을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심층적이고 근원적이며 다차원적인 대응과 치유, 평화형성을 지향 하는 실천성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정책적 차원과 구별되는 삶의 종합적 차원을 고려해야 한

다.” )고 한다. 사실 이러한 차원은 이미 일상의 종교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구조, 제도 이 전에 삶에 깊이 침윤된 종교를 근간으로 평화학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아가 종교평화론의 구체적인 모습인 녹색평화론적 관점이다. 녹색평화는 환경과 평화, 생태적

인 것과 평화의 관계를 설정하고, 탐구해 가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지역과 지역, 환경과 사회의 공존과 화해를 지향하는 것이 동원된다. 이렇게 될 때, 평화론의 실질적인 개방인 동시에 지구 내 모든 존재의 공존이 가능하게 된다. 녹색평화는 생태적 질서에 기초한다.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관계성’의 영역이 바로 녹색평화의 지향점이자 목표이다. 타자를 어떻게 환대할 것인가, 타자가 곧 나임을 확인하는 작업이 녹색평화론의 궁극인 종교평화론의 세계인 셈이다. 종교의 이상이 곧 전 지구적 차원의 모든 존재의 이상이자 현실이 되는 것이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시도되었지만, 현실화되지 않았던 종교평화론은 지구가 한계상황에 이른 지금에야 비 로소 조명받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종교 자체의 집단적 속성이나 현실적 상황으로 인해 경원시되고, 논의의 무용함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종교 스스로도 진화하여 자신의 문제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통해 지구적 차원의 평화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오고 있 다. 이 점을 박충구는 기독교윤리사 시리즈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해방신학이나 퀘이커의 평화주의 등을 통해 그들이 고난 속에 걸어온 평화노선을 보여주고 있

다.23) 이슬람의 영성주의, 불교의 수행담론 등은 이에 못지않은 일상의 평화를 지향하며, 사회와 지구적 차원의 평화 구축을 위한 이론과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다. 탈종교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이를 미처 평가하지 않았을 뿐이다.

종교평화론은 지구의 마지막 남은 평화론이 될 것이다. 양육강식을 강요하는 인간의 무지와 무

명의 한계를 근본으로부터 파헤치고, 현실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유대를 통한 연대가 가능하다면 종교평화론은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교의를 넘어서 종교다원주의가 확립되어야 한다. 이는 종래 논의되었던 것처럼 종교 자신의 입장에서 개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고난, 사회적 모순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다원주의가 하나의 기능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종교신다원주의’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두 번째는 국제정치에 있어 종교의 역할 비중을 높여가야 한다는 점이다. 현재 미얀마 군대의 

쿠데타로 비폭력 저항에 가담한 민중들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UN은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강 대국 중심의 논리는 지구의 평화는 물론 한 국가의 군대에 의한 민중살상을 막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해 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한 선택적 개입에만 신경 쓰고 있다. 종교 개개의 힘은 약하지만, 인권이나 생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연대는 언제든 가능하다. 실질적인 정치의 힘을 종교적 연대 를 통해 발휘할 필요가 있다. 이를 필자는‘생명평화 종교연대’라고 명명하고자 한다. 지구의 한 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종교권도 예외는 아니다. 종교연합(UR, U nited Religions) )창설도 하나의 좋은 방안이다. 특히 종교는 이미 국경을 초월하여 활동하는 실질 적인 평화적 조직이자 집단이다. 인류가 이를 어떻게 적절히 활용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결정될 것 이다.  

참고문헌

大山宗師法語 大薩遮尼乾子所說經(T9)

강인철, 전쟁과 종교, 오산: 한신대학교출판부, 2003.

김명주, 「테리 이글턴의 종교적 전회」, 문학과 종교17권2호, 한국문학과종교학회, 2012.

박충구, 기독교윤리사Ⅲ,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8. 서울대학교 평화인문학연구단 지음, 평화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서울: 아카넷, 2013. 요한 갈퉁 지음,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 강종일 등 옮김, 서울: 들녘, 2000.

울리히 벡, 자기만의 신, 홍찬숙 옮김, 서울: 길, 2013.

이병욱, 「불교의 평화관의 재구성: 요한 갈퉁의 평화개념을 중심으로」, 대동철학51호, 대동철학 회, 2010. 이찬수, 평화와 평화들, 서울: 모시는 사람들, 2016.

천주교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해방신학의 이해, 광주: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1984.

크리스토퍼 퀸 외 지음, 평화와 행복을 위한 불교지성들의 위대한 도전 (아시아의 참여불교), 박 경준 옮김, 서울: 초록마을, 2003.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조은경 옮김, 서울: 알마, 2017.

홍정호, 「한반도 평화인문학의 기초 과제로서의 종교평화학 형성 방안 연구」, 선교신학59호, 한 국선교신학회, 2020.

Terry Eagleton, Reason, Faith, and Revolution : Reflections on the God Debat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9.

<SIPRI Military Expenditure Database>,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https://www.sipri.org) 


15] 【지구윤리학】지구와 인간의 공생을 위한 지구윤리 허남진*

 15] 【지구윤리학】지구와 인간의 공생을 위한 지구윤리 허남진*

30)

요약문   본 연구는 지구위험시대의 새로운 지구윤리(earth ethic) 정립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데 목표가 

있다. 지금의 지구위험시대는 우리의 경제 체제뿐만 아니라 세계관에 의해 초래됐다. 펜데믹, 기후위기를 통 해서 인간은 지금까지 인간의 번영이 지구를 황폐화[지구학살]시키면서 이룩한 결과임을 깨닫게 되었다. 기 존의 윤리체계는 인간중심적이다. 인간의 경우는 개인의 권리나 이익면에서 평등하고 공정한 것이 이상으로 여겨졌으며, 또 개인을 그렇게 대우하는 사회야말로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라고 간주돼왔다. 인류세로 지칭되 는 지구위험시대에 인간이 자연을 조종하고, 억압하는 행위를 전통전인 윤리 개념을 기준으로 비윤리적인 것으로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구적 위험 문제는 인간중심주의로 가득 찬 인문주의 적 윤리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이제는 윤리의 기준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자살, 살인 등과 같은 문제 들은 기존 윤리적 전통으로 풀어낼 수 있지만, 지구의 생명체계가 멸종되는 생명살해와 지구살해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태적 죄’교리 신설을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 다. 이러한 이유에서 레오 폴드는 윤리의 확장을 생태학적 진화의 과정으로 보았고, 토마스 베리 역시 인간 의 윤리학을 생태학적 의무의 파생물로 보고, 포괄적인 공동체의 복리 안에서 인간의 복리를 실현하는 것을 윤리학의 규범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지구행성 전체의 맥락에서의 윤리, 즉 인간과 인간이 아닌 지구를 포함한 다른 구성원들 사이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지구윤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제 인간과 지구가 공생할 수 있도록 인간과 지구를 통합적 공동체[지구공동체]로 전환시킬 수 있는 지구윤리가 마련되어야만 지구를 생존력과 자생력 있는 행성으로 지속시킬 수 있다.

차 례

Ⅰ. 머리말

Ⅱ. 윤리는 진화한다.

Ⅲ. 새로운 윤리의 요청

Ⅳ.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와 지구윤리

Ⅴ. 지구윤리로서 지구헌장

Ⅵ. 맺음말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Ⅰ. 머리말

본 발표는 지구위험시대에 새로운 지구윤리(earth ethic) 정립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데 목적이 있

다. 지금의 지구위험시대는 우리의 경제 체제뿐만 아니라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의해 초래됐다는 것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 펜데믹, 기후위기를 통해서 인간은 지금까지 인간중심의 번영이 지구를 학살시키면서 이룩한 결과임을 깨닫게 되었다. 기존 서양을 중심으로 한 윤리체계는 인간중심적이 었다. 이러한 윤리체계에서 인간 개인의 권리 그리고 평등하고 공정한 것이 이상적으로 여겼으며, 또 개인을 그렇게 대우하는 사회야말로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라고 간주돼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이 자연을 억압하는 지구를 약탈하는 행위를 인문주의적 윤리 개념을 기준으로는 비윤리적인 것으 로 판단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차원의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윤리의 진화가 요청된다. 

인류가 지구 시스템을 교란하게 된 시대가 바로 인류세(Anthropocene)이다. 인류가 지구를 약탈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구시스템의 교란은 지구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하며, 지구가 위험에 놓인 지구위험시대의 도래를 재촉했다. 인류세는 인간과 지구의 어긋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 운 윤리를 요청한다. 

이제 지구위험시대를 대응할 수 있는 윤리로 진화/전환해야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구적 위 험 문제는 인간중심주의로 가득 찬 인문주의적 윤리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윤 리의 기준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본 발표문의 문제의식 출발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본 발표의 주제는 ‘지구와 인간의 공생을 위한 지구윤리’이다. 여기서 ‘지구윤리(earth ethi c)’는 지구, 인간, 만물을 포괄하는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의 윤리를 의미한다. 동아시아 사 상 용어로 표현하자면, 만물동포의 윤리이다. 지구윤리를 인간이 지구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지켜 야 할 도리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Ⅱ. 윤리는 진화한다

레오폴드가 윤리를 생태학적 진화의 결과로 보았듯이, 윤리를 시대에 따라 진화하는 것으로 보

았다. 현대 자본주의 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전환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고 있는 존 캅 주니어(John B. Cobb Jr.)는 ‘새로운 문명을 위한 다섯 가지 토대’ 중 하나를 관습도덕에 대한 ‘반문화적 도덕’에서 찾고 있다. ) 이들의 공통된 관점은 도덕진화론 혹은 윤리진화론에 있

다. 피터 싱어는 “도덕은 진화하고 있는가”라고 반문하면서 2008년 UN총회가 채택한  「세계인권 선언」을 인류의 도덕적 진화의 사례로 보고 있다.2) 피터 싱어에 따르면 윤리는 진화발전하며 발전 과 더불어 도덕적 고려의 대상 역시 점차 확대되는 양상을 나타낸다. 오늘날 도덕적 고려의 대상 이 동물, 식물 그리고 무생물에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도 윤리의 진화의 결과인 것이다.3) 

 존 갑 주니어의 ‘반문화적 도덕’은 한국 개벽사상가 이돈화의 ‘반항도덕’논의와 상통한다. 이돈화는 ‘반항도덕’을 “기성의 윤리 혹은 정치체제[政制] 안에서 그 결합을 알아가지고 감정과 의지로써 그 부자연에 대하여 반항함”으로 정의한다. 이돈화에 의하면, 인류 최초의 반항은 자연 에 대한 반항으로 시작되었고, 자연과학은 반항에서 탄생했다. 자연의 이용은 자연에 대한 반항이 며, 반항이 없는 이용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반항은 인류와 인류 간에서도 전개되 었다. 신시대에 필요한 도덕은 구시대에서 금하는 법으로, 새로운 도덕도 반드시 반항에서 나오는 것이다.4) 인간중심주의적 윤리에 결함이 있다면, 새로운 차원의 위기에 대응할 수 없다면, 기존 윤 리에 대한 반항이 제기되어야 한다. 

인류세 관점에서, 지금까지의 윤리 체계는 수천 년 동안 운영되는 지구 전체의 체계인 홀로세(H olocene)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는 인류가 윤리적 담론을 고안하고 이를 사회생활과 조직행위에 통 합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지구위험시대에 지구는 우리에게 새로운 윤리를 요구한다. 기 존 환경 윤리에는 인간중심주의와 관련되어 있다는 비판이 있어 왔다. 다시 말해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환경’은 주변을 뜻한다. 여기서 주변은 ‘자연’을 의미하며 그 중심에는 ‘인간’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환경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 보호되어야 한다는 인간중심주의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 클라우스 미하엘 마이어 아비히(Klaus Michal Meyer-Abich)는 ‘동료세계’의 윤리를 제안한다. 그는 환경(Umwelt)이라는 용어는 오류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이기 때문에, 인간과 자연과의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동료세계(Mitwelt)’로 대체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그들 둘러싼 자연의 동료세계인 동물, 식물, 땅, 물, 공기는 진화의 역사에서 친척이기 때문 이다.5)

이렇듯 자연은 인간의 환경으로만 인지되었고,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관념이 강했다. 일찍이 

김지하가 ‘환경’이라는 용어의 폐기를 주장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김지하는 생명계과 무 생명계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는 생태 또는 생태학의 근본적 한계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그에게 생 명은 자기 조직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생활형식을 만들어가는 활동을 의미하는 생명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6) 이제 윤리의 지평이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새로

 

2) 피터싱어, 더 나은 세상: 우리 미래를 가치 있게 만드는 83가지 질문, 박세연 옮김,  서울: 예문아카이 브, 2019, 24-27쪽.

3) 김성한, 「도덕에 대한 진화론적 접근과 싱어의 입장」, 인문과학연구 54,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2017, 

91-92쪽.

4) 이돈화, 「개벽 방식과 삼대개벽」, 신인철학, 일신사, 1963. 

5) Klaus Michal Meyer-Abich, Wege zum Frieden mit der Natur: Praktische Naturphilosophie für die Umweltpolitik(München: Carl Hanser Verlag1984),  p. 99.(몰트만, 희망의 윤리, 대한기독교서회, 2017, 

266-267에서 재인용)

운  윤리정립을 위해서 인간은 지구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전지구적 차원 즉 인간과 인간 이 아닌 다른 구성요소들 사이를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Ⅲ. 새로운 윤리의 요청

1992년 ‘의식 있는 과학자 연합(The Union of Concerned Scientists)’은 「인류에 대한 경고(War ning to Humanity)」라는 글을 통해, 더 이상 지구가 파괴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한 바 있 다. 그들은 인간에게 제공할 수 있는 지구의 제한된 능력을 인정해야 하며, 지구에 대한 새로운 태 도전환을 위한 새로운 윤리를 마련할 것을 촉구하였다. ) 토마스 베리(Thomas Berry)도 지구약탈, 지구학살(geocide)의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인간의 윤리학 을 생태학적 의무의 파생물로 보고, 포괄적 공동체의 복리 안에서 인간의 복리를 실현하는 것이 윤리학의 규범으로 자리잡아야 함을 주장한 바 있다. 더불어 지구행성 전체맥락에서의 윤리, 즉 인 간과 인간이 아닌 다른 구성원들 사이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지구윤리’의 필요성을 강 조한 바 있다. 

이들이 새로운 지구윤리를 제창하는 이유는 지금의 지구위험은 새로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의 지구적 위험 문제를 인문주의적 윤리학으로는 비판할 수도 없으며,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살, 살인 등과 같은 문제들은 기존 윤리적 전통으로 풀어낼 수 있다고 해도, 지구의 생명체계가 멸종되는 생명살해와 지구약탈 그리고 지구살해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기반 한 것 이었다.  ) 이처럼 지구의 주요한 생명체계들이 지구 안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임계점에 직면 에서 전통적 윤리에 결함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공기와 땅, 물이 오염되 고, 살림이 대규모로 파괴되는 현상과 그러한 일을 벌이는 행위를 ‘생태학살(ecocide)’로 보고, 이 같은 지구를 파괴하는 행위를 ‘생태적 죄(ecological sin)’로 규정한 이유도 동일한 맥락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태적 죄’는 경(敬)을 우주의  관계도덕으로 보는 천도교의 ‘불경물(不敬物)의 죄’, 원불교의 천지은(天地恩)에 대한 ‘배은’과도 상통한다.9)

종교갈등, 전쟁, 빈곤 등과 같은 전 지구적 문제들은 개인이나 국가 차원에서는 해결할 수 없다 는 문제의식에서 더 넓은 공동체를 포괄하는 세계 윤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한스 큉(Hans Kün g)과 피터 싱어(Peter Singer)를 중심으로 세계윤리(Global Ethic)가 제안되었다. ) 하지만 현재의 펜 데믹, 기후변화 등은 지구위험시대를 드러내는 지표 중 하나다. 인류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위험에 처하고 있다. 지금은 인간뿐만 아니라 지구를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 다시 말해 지 구공동체가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이전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새로운 지구위험시대가 도래했

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는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 지구와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이 공생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적 지평에 근거해야 한다.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인간중심주의와 존재들의 상대적 자율성의 부인, 지구의 지배, 지구 자원의 약탈, 우주의 영성적 깊이에 대한 무시 등 잘못된 윤리적 전제들과 깊은 영성적 공백 위에서 지구와 우리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윤리 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인간적 이익만아 아니라 모든 존재들 사이에서의 연대와 경외를 추구하는 책임의 원리와 연민(compassion)의 원리를 제시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를 착취하지 않고 존중 하고 존경하듯, 지구와의 인격적인 관계만이 우리가 지구를 사랑하게 만든다는 것이다.11) 

이렇듯 인류세로 지칭되는 지구위험시대에 지구-인간-만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태도 의 전환과 새로운 지구윤리의 필요성이 요청되고 있다. 지구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태도전환을 위 한 새로운 윤리의 정립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인류는 지구위험시대를 맞이 하여 모든 존재가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과 함께 지구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자각을 지녀야만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 윤리는 ‘지구와 인간, 그리고 비인간 존재들까지도 포함하는 지구공동체 구성원들과 화해를 모색하는 지구윤리’로서,  ‘지구와 인간 그리고 만물의 공생[상 생]윤리’라 할 수 있다. 

발표자는 그 새로운 윤리를 지구와 인간 그리고 만물을 포괄하는 지구공동체의 윤리 즉 지구윤 리로 지칭하고자 한다. 이후에 자세히 논하겠지만, ‘지구공동체’에는 인간을 넘어서는 만물과 자 연의 영역까지도 포함된다.

Ⅳ. 지구공동체와 지구윤리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에서 지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는 비인간 타자들과의 책임 있는 관계 맺기로 나아가야하며, 인간 중심적 세계화(worlding)가 야기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종들이 서로 얽혀 함께 만들어 가는 다른 세계화를 제기한다. 특히 해러웨이는 고통, 동정과 연민, 책임과 의무를 주체/타자의 문제가 아닌 관계의 문제로, 그리고 상호 연결된 삶의 문제로 옮겨야 한다고 본다.12) 

 

11) 베르나르도 보프, 생태공명: 지구의 울부짖음,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 황종렬 옮김, 대전가톨릭대 출판부, 254-256쪽.

12) 도나 해러에이, 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 옮김, 책세상, 2019.

해러웨이는, 윤리적 책임은 윤리적 명령에 따르는 의무가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응답하 기에 있고, 응답하기는 존중이며 ‘더불어 되기(becoming with) ’의 실천을 통해 가능하다고 지적 한다.13) 해러웨이의 세계화(worlding)는 인간과 비인간 세계 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넘어서 물질이 정동의 방법으로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다.14) 이러한 의미에서 해러웨이가 사 용하는 ‘다른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반지구화 (anti-globalization)가 아닌, 인간과 비인간적 존재 들이 보다 평화로운 ‘ 다른 지구화(other-globalization)’를 의미한다.15)

해러웨이의 다른 세계화 논의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지구화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에 따르면, 글로벌화(globalization)라는 용어에는 글로벌화될 수 있는 것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의미를 전제하고 있다. 로컬에서 글로벌로의 관점 전환은 관점 늘리기, 더욱 많은 변수를 사용하기, 더 많 은 수의 사물, 문화 현상, 생명체, 인간을 고려하기를 의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글로벌화 플 러스(globalization-plus)와 글로벌화-마이너스(globalization-minus)로 구분하면서 지금의 지구화는 이 런 수적 증가와는 정반대의 상황을 의미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해러웨이의 ‘다른 세계화’와 라 투르의 ‘지구화’에 대한 비판은 지구공동체의 논의로 귀결된다. 

20세기 서양에서도 지구와 자연에 대한 윤리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산업사회가 급속도로 진행됨에 따라 지구와 자연이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을 앞세워 자연을 식민지화하고 약탈한 결과이다. 최근에는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간주하면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흐름들을 알도 레오폴드의 ‘대지공동체’, 토마스 베리의 ‘지구공동체’ 그리고 반다나 시바와 김대중의 ‘지구민주주의’ 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레오폴드의 ‘대지공동체’와 ‘대지윤리’

지구공동체 개념은 미국의 생태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알도 레오폴드((A. Leopold)는 그의 저서 모래 군의 열두 달에서 시작된다. 그는 서문에서 오늘날 대지(land)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대지(land)를 우리가 소유한 상품으로 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남용하고 있다. 대지를 우 리가 속한 공동체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사랑(love)과 존중(respect)으로써 이용하게 될 것이다. (중략) 대지가 공동체라는 것은 생태학의 개념이지만 대지가 사랑과 존중을 받아야한다는 것은 윤 리의 확장이다.16)

레오폴드는 자본주의에 물든 현대인들이 대지를 상품화하여 남용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그에 

 

13) 김애령, 「‘다른 세계화’의 가능성: 해러웨이의 「반려종 선언」 읽기」, 코기토 92, 2020, 7-35쪽.

14)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기,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32쪽. 

15) Haraway,D.J.,Staying with the Trouble: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Experimental Futures:Duke University Press, 2016), p. 3 ; 김애령, 앞의 논문, 28쪽.

16) A. 레오폴드, 모래 군의 열두 달, 송명규 옮김, 도서출판 따님, 18쪽.

대한 대안으로 ‘대지공동체(Land Community)’개념과 ‘대지윤리(Land Ethic)를 제창한다. 여기에 서 ‘공동체’란 “긴밀한 상호의존 체계 하에 있는 생물과 무생물로 이루어지는 집합체”를 말한

다. 대지가 공동체인 이유는, 대지는 단지 물리적인 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흙, 식물, 동물의 회로를 통해 흐르는 에너지가 솟아나는 샘이고, 대지 위의 모든 존재는 대지 피라미드의 연결망[생 명의 연결망] 속에서 상호 의존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대지공동체 안에는 지 구에 거주하는 모든 존재, 즉 동물, 식물, 토양, 물 등이 포함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지공동 체’ 개념은 ‘지구공동체’와 상통한다. 

한편 레오폴드는 대지공동체 개념을 바탕으로 새로운 ‘대지윤리’를 도출해 낸다. 원래 서양 

전통에서 ‘대지’는 윤리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윤리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인간과 인간관계 에만 한정되었다. 주지한 바와 같이, 서양의 전통적 윤리체계는 인간중심적이다. 그래서 인간 이외 의 동물이나 식물에는 아무런 도덕적 지위나 권리도 부여해오지 않았다. 레오폴드에게 호모사피엔 스는 대지의 관리자, 정복자가 아니라 대지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과 같이 평범한 구성원이자 시 민(citizens)으로 파악되고 있다. 인간을 대지공동체로 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인간중심적 윤리체계의 반항을 의미한다. 서구의 인간중심적 자연관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윤리적 패러다임의 전환에 이른 것이다.18)

이처럼 레오폴드의 윤리 체계에서는 동물이나 식물, 게다가 흙이나 물까지도 공동체에 포함된다. 테일러가 인간, 동물, 식물이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모든 생명체를 대하 는 태도는 ‘존중’(respect)으로 바뀐다고 주장했듯이, 대지공동체 틀에서는 윤리적 배려의 직접적 대상이 인간 존재에서 자연의 모든 존재에로 확대하게 된다. ) 

레오폴드는 윤리를 상호의존적인 개인 혹은 집단이 협동의 방식을 발전시키는 성향에서 비롯되 는 것으로 보고, 윤리의 확장을 생태학적 진화의 과정으로 보았다. 여기서 협동의 방식은 ‘공생’ 이다. 최초의 윤리는 개인 간의 관계로 시작되었고, 이후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포함되었다. 하지 만 인간과 대지 및 그 위에 살아가는 동식물과의 관계를 다루는 윤리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윤리 가 대지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은 생태학적 필요성이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레오폴드는 진정으로 대지의 모든 존재를 윤리적 관점에서 파악할 것을 강조한다. 레오폴드의 대지윤리는, 인간소외나 전체주의 등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대지공동체들과의 공생을 위한 ‘생태적 전환’의 요구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대지공동체 개념과 대지윤리는 지구윤리의 요소로 자리매김 될 수 있다.  

나는 대지(land)에 대한 우리의 윤리관계가 그것에 대한 사랑(love)과 존중(respect) 그리고 존경

(admiration) 또한  그것의 가치에 대한 높은 평가 없이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내

가  말하는 가치란 단순한 경제적 가치보다 훨씬 광범위한 것이다. 즉, 철학적 의미의 가치이다.20)

위의 구절은 대지로 윤리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대지에 대한 태도의 전환이 바탕이 되어 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은 대지에 대한 태도의 전환이 가능한가? 레오 폴드는 대지에 대한 생태학적 이해에서 찾고 있다. ) 이를 토마스 베리는 ‘생태학’ 대신 지구의 생명에 대한 이해력이라는 의미로 ‘지구 가독력(Earth literacy)’ 용어를 제시한다. 지구가 교육자 라는 것이다. ‘지구 가독력’은 미래 지구 공동체에서 인간이 통합적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인 도하는 학문 영역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한다. ) 

이러한 인식은 한국 개벽사상에서도 발견된다. 이돈화는 자연은 생명의 원천이며, 사람은 이러한 

생명의 원천을 회고(回顧)할 때에 경물(敬物)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이돈 화는 자연의 도덕을 이질적 기화와 동질적 기화로 논하면서 이것이 자연계의 도덕률이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도덕[天道天德]이라 했다. 생태학 혹은 지구 가독력을 통해 윤리의 대상을 인간에서 만 물로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 

2. 토마스 베리의 ‘지구공동체’와 ‘지구윤리’ 토마스 베리는 학문적 정체성은 문화사에 있었지만, 지구에 대한 공경심으로 인해 자신을 "지구 학자(geologian)”라고 지칭했다. 토마스 베리의 출발점은 지구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이것을 바 탕으로 뒤틀린 지구와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있다. 그는 ‘지구생명시스템’이라는 인식을 바 탕으로 인간이 지구와 자연 세계에 대해 친밀하게 대할 것을 요구한다. ) “우주를 객체들의 집합 이 아닌 주체들의 친교”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베리에 의하면, 지구 전체를 착취해야 할 객체 가 아니라 사귀어야 할 주체로의 인식, ‘친밀한 관계(수평적 관계)’ 안에서 인간과 비인간적 존 재들 사이를 철저히 분리하는 정신적 고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 

그는, 레오폴드의 대지공동체 개념과 유사하게, 인간과 만물은 지구의 구성원들이고, 그것을 포 함하는 단 하나의 통합된 지구공동체가 있을 뿐이며, 지구공동체 안에서는 모든 존재가 자신의 역 할, 존엄성, 자생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26) 인간이 지구 공동체의 참여 구성원으로써 지구와 교제하는 시대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그가 제시한 생태대의 기획이다.

 베리는 여기에서 할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지구공동체 논의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인간의 책임의식과 윤리적 판단은 미시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고 비판하면서, 거시적 차원의 윤리학을 제안한다. 여기서 토마스 베리의 지구중심주의적 시각이 드러난다. 베리는 “생태대는 지구가 일차 적이며 인간은 부차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라는 점이다.”라고 밝히고 있듯이, 인간의 모든 활동은 지구중심적 관점, 직역하자면 ‘지구살림’에 따라 재조정되어야 한다. )  그래서 베리의 최대 관 심사는 지구의 건강에 있다. 인간이 거주하는 지구의 안녕이 곧 인간의 안녕을 실현하는 데 필수 적이며, 산업문명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 베리의 지구중심주의는 지구의 안 녕, 즉 인간과 지구의 공생이 가능하도록 지구를 회복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관점에 있다. 에드워드 윌슨의 말처럼, 다른 동물들이 먹이사슬의 균형 속에서 생존해야만 우리 인간도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구의 생명체계에 호혜적인 지원을 하지 않으면 지구도 인간을 지원할 수 없기 때문에 개인, 공동체, 국가의 행동까지 포함하는 지구적 차원의 윤리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구중심적 시간에서 베리는 인간의 윤리학을 생태학적 의무의 파생물로 보고, 포괄적인 공동체의 복리 안에 서 인간의 복리를 실현하는 것을 윤리학의 규범으로 삼을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지구행성 전체의 맥락에서의 윤리, 즉 인간과 인간이 아닌 다른 구성원들 사이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지 구윤리’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 

그가 제시한 생태대는 “인간 공동체가 보다 큰 지구공동체 안에서 상호-증진하는 방식으로 현 존”하는 지질학적 시대를 말한다. 인간의 행복과 지구의 건강이 동시에 구현되는 시기라는 점에 서 그가 제창하고 있는 윤리는 지구와 인간이 공생할 수 있는 지구윤리인 것이다.

3. 반다나 시바와 김대중의 지구민주주의

지구공동체 논의는 과학자이자 ‘에코 페미니즘’의 사상가인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로 이 어진다. 반다나 쉬바는 우리는 지구 공동체의 일원이며, 지구시민으로의 전환을 요청하면서 지구민 주주의(Earth Democracy)를 제창한다.  ) 지구민주주의의 모토는 지구의 모든 존재가 주체이며, 시 민이고, 권리들을 갖고 있으며, 존경과 경외를 받을 자격을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된다.31)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한 지구민주주의는  “Vasudhaiva Kutumkam(바수다 이바 꾸뚬깜, earth family)”라는 인도의 토착사상, 모든 종(species)과 모든 사람에 대한 존중(resp ect) 그리고 만물은 객체가 아니라 주체라는 인식에 근거한다. ) 여기서 지구가족(earth family)이라 는 것은 지구에 의존하는 모든 존재의 공동체 즉 지구공동체를 의미한다.33) 지구민주의의 사상적 토대는 모든 생명이 “지구의 시민”, “지구의 자녀”라는 인식에 기초한 내재적 가치와 만물의 생태적 상호의존성으로서, 모든 생명이 지구의 구성원으로서의 생존을 위해 식량, 물, 건강, 교육, 직업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인식에 있다. 당시 아·태평화재단 이사장이었던 김대중은  For eign Affairs에 기고한 「문화는 숙명인가?」에서 ‘지구민주주의’(global democracy)개념을 제창하 였다.

지구 민주주의는 우리가 서로를 존중해 주는 것이 자연을 존중해 주는 것과 연관된다는 사실을 인 식할 것이며, 후세대의 이익을 위한 정책을 추구해 나갈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동식물에 파괴 의 위기를 가져다주었고 환경의 존속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하늘과 땅과 그 안 에 있는 모든 것들을 참다운 형제애로 감싼다는 의미의 지구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반다나 시바가 인도의 토착사상에 근거한 지구민주주의를 제창했다면, 김대중은 한국의 토착사 상인 동학사상에 바탕 한 지구민주주의를 제안했다. 인간 이외의 존재들까지 주체로 인식하는 지 구공동체의 차원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34) 반다나 시바와 김대중의 지구민주주의는 인간과 국가중심의 민주주의에서 비인간적 존재들까지 포괄하는 민주주의라는 점에서 ‘지구정치(earth politics)’으로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Ⅴ. 지구윤리로서 지구헌장

지구공동체와 지구윤리는 2,000년 유엔총회에서 발표된 「지구헌장」으로 구체화되었다. 싱어가 「 세계인권선언」을 윤리의 진화로 보았듯이, 「지구헌장」은 지구위험시대를 대응하기 위해 진화된 윤 리로 볼 수 있다.

「지구헌장」 최종안은 16개 주 원칙과 61개 보조원칙을 가지고 있으며, 크게 생태적 온전성, 사회 및 경제 정의, 민주주의와 비폭력 그리고 평화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구헌장」은 우리의 보금자리인 지구의 생명력을 지키고, 지속가능한 지구공동체 건설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지구헌 장」 최종안 이전에 작성된 초안은 총 18개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지구는 우리의 집이며 지상 모 든 것의 집이다. 지구는 그 자체로 살아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일 따름이다. 인간은 훌륭한 삶의 형태와 문화를 가진 지구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지구의 아름다움 앞에서 겸손하며 생명성의 가치 를 공유하고 우리자체의 근원을 공유한다”라고 선언했다. 「지구헌장」은 인간과 모든 생명체를 포 괄하는 ‘지구공동체’ 모두의 권리와 의무를 정식화한 문헌이라는 점에서 ‘지구윤리’로서의 의 미가 강하다. 

 

34) 조성환·허남진, 「지구인문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종교 –홍대용의 의산문답과 개벽종교를 중심으로」,  신종교연구 43, 2020, 113-114쪽.

1. 지구와 모든 생명을 존중하자. 지구와 모든 생명체 그리고 인간 존재는 내적인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유용한 가치를 갖고 있는가의 유무에 관계없이 이를 존중해야 한다. 

2. 지구를 보살피고, 지구 생태계의 다양성과 통일성 그리고 아름다움을 지키고 회복시키자. 

7. 비폭력을 옹호하고, 평화는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 이웃과, 다른 형태의 생명과, 지구와 조화롭 고 균형 잡힌 관계를 맺을 때만 달성될 수 있다.

9. 원주민이 ‘어머니 지구’를 보살피고 지키는 데 핵심적인 구실을 하고 있음을 재확인한다.

15. 만물을 공감으로 대하고, 모든 생명체를 폭력과 자의적인 절멸로부터 보호한다.

18. 지구공동체를 지키는 일에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책임을 지고 있다.

위의 인용구절은 「지구헌장」초안의 내용이다. ‘어머지 지구’, ‘지구공동체’, ‘지구와 조 화’등의 문구는 「지구헌장」이 러브록의 가이아론, 토착사상 그리고 레오폴드와 베리의 영향이 강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35) 특히 ‘만물을 공감으로 대하고’라는 문구는 해월의 경물사상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이제 전지구적 차원에서 지구윤리로서 경물사상이 주창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36)  

Ⅵ. 맺음말

또 하나의 지구는 없다! 지구는 단 한번 주어진 선물이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펜데믹과 기후위기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지구 등 어긋난 관계의 결과이다. 이제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지구공동체로의 전환이 필요하며, 지속가능한 지구공동체 건설을 위한 지구윤리의 정립과 실천이 요구된다.

 

35) Ibid, pp. 176-203.

36) 해월 최시형이 시천주의 구체적인 실천 덕목으로 제시한 십무천(十毋天)  역시 지구윤리로서 충분히 의 의가 있다. 십무천은 모두 10개로 구성되어 있는 지구윤리로 재해석될 수 있다. 동학에 따르면 인간뿐만 아니라 천지만물이 고귀한 하늘님으로 인식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경인뿐만 아니라 경물까지 강조하고 있 기 때문이다. 십무천은 사람, 천지만물을 가장 성스럽고 고귀한 존재로 모시고 섬기라는 행동강령이다. 박 맹수, 「동아시아 고유한 생명 사상」, 개벽의 꿈, 동아시아를 깨우다: 동학농민혁명과 제국 일본, 서울: 모시는사람들, 2011, 53-54쪽.

참고문헌

A. 레오폴드, 모래 군의 열두 달, 송명규 옮김, 따님, 2000

J.R. 데자르뎅, 환경윤리-환경윤리의 이론과 쟁점, 김명식 옮김, 자작나무, 1999 김성한, 「도덕에 대한 진화론적 접근과 싱어의 입장」, 인문과학연구 54,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2017

김애령, 「‘다른 세계화’의 가능성: 해러웨이의 「반려종 선언」 읽기」, 코기토 92, 2020 김지하, 생명학 1, 화남출판사, 2003 도나 해러웨이, 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 옮김, 책세상, 2019.

몰트만, 희망의 윤리, 대한기독교서회, 2017 박맹수, 「동아시아 고유한 생명 사상」, 개벽의 꿈, 동아시아를 깨우다: 동학농민혁명과 제국 일본

,  모시는 사람들, 2011

베르나르도 보프, 생태공명: 지구의 울부짖음,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 황종렬 옮김, 대전가톨 릭대출판부, 2018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기, 박범순 옮김, 이음, 2021 이돈화, 신인철학, 일신사, 1963

조성환·허남진, 「지구인문학적 관점에서 본 한국종교 –홍대용의 의산문답과 개벽종교를 중심으

로」, 신종교연구 43, 2020

존 B. 캅 주니어, 지구를 구하는 열 가지 생각, 한윤정 옮김, 지구와사람, 2018 토마스 베리, 위대한 과업, 이영숙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 2009            , 지구의 꿈, 맹영선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 대화출판사, 2013, 

           ·토마스 클락, 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인간과 지구의 화해를 위한 대화, 김준우 옮김, 에코조익, 2020

피터싱어, 더 나은 세상: 우리 미래를 가치 있게 만드는 83가지 질문, 박세연 옮김,  서울: 예문 아카이브, 2019

한스 큉, 세계윤리구상, 안명옥 옮김, 분도출판사, 1992; 피터 싱어, 세계화의 윤리, 아카넷, 2003.

Haraway,D.J.,Staying with the Trouble: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Experimental Futures:Duke University Press, 2016)

Vandana Shiva, Earth Democracy: Justice, Sustainability, and Peace (Cambridge, MA: South End Pr

ess, 2005)

「World Scientists'  Warning to Humanity」,1992

(https://www.ucsusa.org/resources/1992-world-scientists-warning-hum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