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4

埋葬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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埋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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埋葬(まいそう)とは死者の中に埋めることである。
墓地、埋葬等に関する法律においては「死体を土中に葬ること」として、いわゆる土葬を指す言葉として定義されているが、慣用的な用法としては火葬後の遺骨墓地納骨堂などに収納することを指す場合もある。

埋葬の歴史[編集]

原始人類の化石や遺跡は、時代が古くなるほど発見例が少なく、また破損や撹乱により原形を保っていない事も多く、彼らが埋葬行為を行なっていたかどうかの判定は困難であるが、わずかな証拠から、猿人・原人段階では埋葬はなかったと考えられる。北京原人ホモ=エレクトゥス)は食人を行なっていた可能性が指摘されているが、埋葬をした形跡は認められない。
埋葬という行為が成立するためには、死を理解する事。また死者のや来世を考えるといった抽象的な思考力の発達が不可欠で、アウストラロピテクスやホモ=エレクトゥス・ホモ=エルガステルの段階ではまだ知的能力がそこまで発達していなかったと考えられる。
最も古い埋葬の例はネアンデルタール人のものがよく知られており、埋葬の起源はおよそ10万年前にさかのぼる。発見されるネアンデルタール人類の化石は、事故や遭難のため埋葬される事なく遺棄されたと思われるものも少なくないが、洞窟内など特定の場所から何体もの骨格化石が副葬品と共に発見される場合も多く、彼らが死者を葬っていた証拠とされる。ただし、遺体を狙う食肉獣の接近を恐れて単に遺体を埋めて隠したに過ぎないとする反対意見もあり、彼らが本当に埋葬と呼べる行為を行なったかどうか、まだ意見の一致を見るに至っていない。
尚、ネアンデルタール人とほぼ同時期に既にアフリカや西アジアではホモ・サピエンスが出現しており、彼らも埋葬行為を行なっていた事は確かで、最古のネアンデルタール人に近い時代と考えられるジェベル=カフゼー人で埋葬が見られるが、これらのホモ=サピエンスは絶対年代がはっきりしないものや、石器などの文化遺物だけで人骨は発見されない場合も多く、確実な事はわかっていない。

日本の埋葬の歴史[編集]

日本では旧石器時代北海道美利河1遺跡湯の里遺跡の土抗など墓の可能性ある遺構が数例発見されている。
つづく縄文時代から埋葬行為が確認されている。集落内や貝塚などに墓域が設けられ、死者は土坑墓土器棺墓[1]石棺墓など土葬により埋葬されるのが一般的で、火葬や再葬が行われている例も確認されている。遺体の手足を折り曲げる屈葬と手足を伸ばした伸展葬の二形態があり、この時代では屈葬が主流であった。また、住居の内外に見られる深鉢形土器を埋納した特殊な施設である埋甕乳幼児の墓(または胞衣壺)である可能性も考えられている。縄文後期・晩期の東日本では、伸展葬や配石墓[2]、再葬[3]など多くの変化見られるようになる。また、環状列石などの配石遺構に造られた墓や周堤墓[4]などがある[5]
弥生時代に入ると、北九州を中心に甕棺と呼ばれる大きな甕に埋葬する例が確認できるほか、再葬墓と呼ばれる、いったん死者を地下に埋葬した後、白骨化した後に骨壺に収める例が確認されている。古墳時代にはいると、権力者は古墳と呼ばれる大型の墳墓に埋葬されるようになるが、庶民の埋葬については不明である。
奈良時代になると、仏教の影響から火葬墓が増えるが、庶民は絵巻物などの記述から、河原や道端に遺棄されたと見られる。
古代から中世にかけては、穢れの思想が強く、貴人の墓地管理も疎かであった。近世になると、庶民も墓を設け、先祖の供養をする。現在はほとんどの死者は火葬され、一族や家族の墓地に葬られる。一方で墓友という語や、都市部に於いてはロッカー式の墓地なども出現している。

西洋の埋葬の歴史[編集]

西洋諸国では現在も火葬より土葬が主である。死者はエンバーミングを施され、体を洗われて服を着せられ、棺に入れられる。その後参列者の前で墓地に掘られた穴に棺ごと埋められる。キリスト教の国々では棺は東西方向に埋められ、その際頭は西側に向けて埋められる。

埋葬する理由[編集]

  • 死者に敬意を表し、死後の世界で再生、往生、復活できるように願う。
  • それらを葬儀時のみならず継続的に行うならば、墓が残る埋葬は便利である。
  • 遺体が道端に転がっていると、見栄えが悪いので隠すという意味がある。
  • 遺体をそのまま放置しておくのは、衛生上もよくない。
  • 遺体の復活を恐れ、宗教的な措置をすると同時に物理的に脱出を困難にする。

埋葬する場所[編集]

  • 人里離れた場所に墓地が設けられ、埋葬されることが多い。
  • 日本では墓地埋葬法により、墓地以外の自宅の裏庭などに埋葬することはできない。違反すると死体遺棄罪として罰せられることもある。

埋葬後の遺骨[編集]

納骨堂に納める場合は半永久的に遺骨は残されるが、埋葬すると遺骨の殆どは風化し土に還ると言われている。土壌等によって左右されるが基本的に埋葬後30年経過後は遺骨は土に還される傾向にあり、何かの理由で埋葬地を掘り返したとしても遺骨が見つかる例は少なく、見つかったとしても埋葬時に比べ小さくなっている例が多い。一般的に墓地に遺骨を埋葬した場合においても、骨壺に入れた状態と墓の下の土壌部分に埋めるとでは遺骨の風化も大きな差が生まれ、骨壺に入れたままは骨の風化は殆ど起きない[6]が土壌部分に埋めると年数経過後には風化し遺骨とは判別できない例が多い[7]

関連項目[編集]

脚注[編集]

  1. ^ 小児用
  2. ^ 地上に石組みをもつ
  3. ^ 遺体を外の場所で骨にし、その後埋葬する。
  4. ^ 北海道に特有で、土手で墓域を囲んでおり、記念物的な性格を併せ持つ墓。例としてキウス周堤墓群
  5. ^ 中村大「埋葬」 小林達雄編『考古学ハンドブック』新書館 2007年1月 85-86ページ
  6. ^ 但し雨水が浸入し骨が水と反応し溶けて跡形も残らなくなる例はある
  7. ^ 酸性土壌ではそれが顕著ではある

参考文献[編集]

묘지 문화에 대하여

묘지 문화에 대하여



묘지 문화에 대하여
우리나라는 엣날부터 지금까지 부모에 대하여는 효도를하고 부모 공경을 하는데는 세계에서 일등이다. 그러한 전통이 참 자랑스럽고 후세들에게 영구히 계승이 되길 바라고 있다.
효도하고 존경하는 그 부모는 또헌 반드시 죽어 주어야(Mortal) 되는 것이다.
효심이 지극한 자식이 죽은 부모를 땅에 묻고 그 죽음에 대하여 영역 표시를 하는것이 묘지인데 그 묘지도 사회직위와 빈부의 차이로 그 외관이 많이 다르고
돈많은 자식이 돈을 많이 처바르면 묘지가 좀 번드리리하고 돈없는 자식은 그저 화장으로 불살라 버리든지 초라하게 묘지를 맹그러 놓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가 사람이 되지고 나도 표시
가 난다.
경주에 함 가보면 신라시대의 왕이 죽어면 그 묘지를 큰 산등성이 모양으로 엄청나게 크게 지어저 있다. 그 부근에는 일반 서민들의 묘지를 보면 밥사발 하나를 엎어 놓은것 처름 초라하
고 애석하다. 용인자연 농원안에 이병철이 묘나 하남시의 정주영 묘도 보면 더럽게 호화판으로 돈자랑을 하고 있다. 땅 속에 되저 자빠저 있는 놈이 자기 배위에 무슨 짓을 해놓았는지
얼마나 돈을 처 발라 놓았는지 우째 알낀데..  저녘에 게속
큰 묘지나 작은 묘지앞에는 비석이 있는데 나같이 무식한 사람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글인지를 쉬운 우리나라 말도 아니고 중국의 어려운 한자를 쓰 놓는다.
비석의 글은 남자의 묘에는 자기 아버지의 묘에는 한자는 어려워서 못쓰서지만 " 현고 학생 부군신위"  라고 또 자기 할배묘에는 "현 조고 학생부군신위"라고 쓰는것 같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도 못배워서 죽어서라도 어려운 한자를 묘지비석에다 쓰 놓어면 못배운 한을 풀어보자는 것이겠지.
그르나 가끔 묘지의 비석에 " 아버님의 묘, 1909년, 2월 13 일에 돌아 가심. 아들 홍길동, 아들 홍말동,  딸 홍말순." 이라고 쓰여진것을 보았다.
부산 영락 공원에는 비석에 " 어머님, 그리운 어머님, 아들 만식이.큰딸 희선이, 작은딸 정선이" 라고 쓰여저 있는것을 보았다.
얼마나 좋은 글이냐, 이렇게 한글로 간결하고 함축성있게 적어 놓으면 땅속에 묻혀 있는 사람도 마음이 편할것이고  죽어 땅속에 묻혀 있는
시체나 살아 있는 자식들도 모두 모르는 어려운 한자를 비석에 쓰놓고  누가 일거 보라는 듯이 세워두면 어려운 한자를 알아야 읽고 해석을 하지.
무식한 사람들이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여 죽어서 라도 어려운 한자를 묘지의 비석에 새겨두라고 했겠지..
현재 우리나라의 장사 지내는 것은 매장이 30 % 화장이 70 %로 선진국과 같이 이제는 화장으로 장례를 치루는 경향인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자기 부모를 불에 구워 남은 재를 납골묘에
안치를 하든 물송장을 땅에 파묻든지 간에 100 % 매장에서 이제는 화장하는 경우가 70 % 까지 이르고 있다니 화장을 하여 빼가지를 납골당에 안치를 하는것이 좀 나은것도 같다.
화장한 뼈가루를 납골당에 보관을 한다는 것도 자식들에게 짐이되고 납골당이 무슨 뼈가루 전시장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양평군 용문면 이라는데 가보면 자연장이라는 것이 있는데 자연장 중에서 정원장이라는 것인데 수천평의 잔디밭에 아름다운 정원수 진달래, 백일홍. 할미꽃,소나무,빨간 작약등
수백 수십가지의 들꽃을 심어놓고 그 정원속으로 오솔길을 만들어 놓고 그 오솔길에서 1 미터 떨어진 곳에 그 잔디밭 땅 밑 약 20 센찌에다 뼈가루를 묻어 두더라.그리고 뼈를 묻고나서
그 자리에는 손바닥 만큼 크기의 번호가 적힌 동판에 " 아버님, 다음에 또 오겠음니다"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 자연 정원이 너무 아름답고 잘 관리를 하여 내가 죽어도 그곳에 묻혀서면 아무런 걱정도 안하겠더라.진짜로 편안한 지상 낙원이더라.
누구든지 장지 사업을 할려면 양평같은 자연 정원묘지를 만들어서 가로 세로 60 센치 를 분양하면 큰 돈을 벌수 있겠더라. 나는 물송장 매장을 하는것보다 화장을 하여 자연 정원장을 하
는것을 권하고 싶다. -- 아리랑 -- 

호주도 묘지부족 심각, 매장기간 강제 지정



호주도 묘지부족 심각, 매장기간 강제 지정




호주도 묘지부족 심각, 매장기간 강제 지정

김동원 기자 infois@naver.com
등록 2018.08.02 15:19:19

시드니를 주도로 하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가 사후 매장기간을 25년으로 제한하는 묘지이용법을 제정했다. 인구증가로 장차 매장장소가 없어질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기한이 만료되면 유해를 파내게 된다. 광대한 땅을 가진 호주에서 유해를 파낸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는 시민도 많아 묘지난 해소효과를 의문시하는 목소리도 나오는 것으로 전해졌다.



▲ 호주의 대표적묘지 '룩우드'모습뉴사우스웨일스주는 6월 말 기존 묘지·화장장법에 매장지를 영구이용할 수 있는 권리 외에 25년부터 99년까지 기간을 정해 한시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조항을 추가했다고 아사히(朝日)신문이 지난달 30일 보도했다. 기간이 짧을수록 사용료를 싸게 할 것으로 보인다.


유족이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 기한을 연장하지 않으면 무덤을 파헤쳐 다른 사람의 매장지로 사용한다. 파낸 유해는 처리 후 납골당 등으로 옮기게 된다. 뉴사우스웨일스주 최대 도시 시드니의 인구는 2011년 429만에서 2036년에는 642만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주 당국은 인구증가 결과로 앞으로 사망자가 늘어 이대로 가면 2050년대에는 시내 매장장소가 소진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뉴사우스웨일스주에서는 연간 5만명 정도가 사망하지만 화장은 66% 정도고 나머지 34%는 매장되고 있다.


유대교와 이슬람교 신자들은 화장이 일반적이지만 기독교도 중에는 화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매장 공간이 더 필요한 셈이다. 다만 기한부 매장이 널리 받아들여질지는 의문이다. 1867년 이래 300㏊의 부지에 약 100만명이 매장된 주내 최대인 시드니 서쪽 '룩크우드 묘지' 운영회사 최고경영자인 조지 심슨은 "희망하는 유족에게 기한부 매장권리를 제공하겠지만 현재로서는 수요가 없다"고 밝혔다. 그는 "묘지난 대책으로 6층 짜리 '매장 빌딩' 건설도 검토중"이라고 덧붙였다. [출처 :연합뉴스]

“자식에게 부담 주기 싫다”…‘묘지 친구’ 찾는 일본인들 : 일본 : 국제 : 뉴스 : 한겨레



“자식에게 부담 주기 싫다”…‘묘지 친구’ 찾는 일본인들 : 일본 : 국제 : 뉴스 : 한겨레




“자식에게 부담 주기 싫다”…‘묘지 친구’ 찾는 일본인들

등록 :2019-04-26 18:17수정 :2019-04-26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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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조기원의 100세 시대 일본

⑤ 변화하는 장례문화




도쿄 도심 LED조명 꾸민 납골당

“참배 와도 즐거운 기분 들도록”

자손 없어도 관리해주는 ‘영대공양’

이제 보편적인 방식으로 자리잡아

죽음 매개로 교류하는 ‘엔딩센터’

여성 전용 묘지도 인기 끌어

지난 18일 도쿄 도심인 신주쿠구에 있는 절 고코쿠지에 있는 납골당 ‘루리덴’에서 작은 불상들이 엘이디(LED) 조명을 내뿜으며 반짝이고 있다. 조기원 특파원

지난 18일 도쿄 도심인 신주쿠구에 있는 절 고코쿠지에 있는 납골당 ‘루리덴’에서 작은 불상들이 엘이디(LED) 조명을 내뿜으며 반짝이고 있다. 조기원 특파원

그곳은 마치 현대 미술 전시장 같았다. 지난 18일 일본 도쿄 도심인 신주쿠구에 있는 절 고코쿠지(幸國寺). 입구 오른쪽에 있는 건물에 들어가니, 2046개의 작은 불상이 파란색과 노란색, 녹색, 분홍색 등의 엘이디(LED) 조명을 내뿜으며 반짝이고 있었다. ‘루리덴’이라는 이름의 이 건물은 납골당이다. 유족이 입구에 있는 장치에서 망자 이름을 입력하면, 망자의 유골함 앞에 있는 불상에 하얀색 조명이 들어온다. 불상들 뒤에는 보통 납골당처럼 유골함들이 있다. 불상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어서 유골함이 보이지 않을 뿐이다.




고코쿠지 부주직(한국 절의 부주지에 해당)인 야지마 타이유는 “10년 전 일본의 사계절을 테마로 불상이 빛나는 방식으로 루리덴을 만들었다”며 “옛날 납골당과는 달리 쓸쓸한 기분이 들지 않게 했다. 참배를 와도 즐거운 곳을 만들자는 게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또 “스승인 주지가 처음 만들었는데 예전부터 불빛을 활용하자는 생각이 있었다고 했다. 빛은 부처님의 지혜를 의미한다. 조명 기술의 발전으로 이런 형태의 납골당이 가능해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이 들어갈 납골당을 직접 계약하는 경우가 절반 정도”라며 “높이로 치면 가운데 불상 부분이 주요한 부분인데 그 부분은 거의 채워졌다”고 말했다.

생전 계약을 하러 주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도쿄에서 자란 사람들이 많다. 도쿄에 묻히고 싶지만 도쿄에 따로 개인 무덤을 만들기는 비용도 부담되고 이후 관리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루리덴에 유골을 모시는 비용은 보통 75만엔(약 750만원)이다. 생전에 본인이 계약할 경우 연간 9000엔의 연회비를 내야 하며, 사망한 시점부터는 받지 않는다. 유골 보관 기간은 33년이다. 보관한 지 33년이 지나면 루리덴 지하에 유골을 묻힌다.

대세가 된 ‘영대공양’

루리덴은 특이한 겉모습을 제외하면 최근 일본에서 유행하는 납골당의 여러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우선, 도심지에 있어 접근이 편리하다. 지하철역과는 200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망자를 챙길 수 있는 자손이 없어도 절이 유골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이른바 ‘영대공양’(永代供養)을 표방한다는 점이다. 영대공양은 30여년 전부터 생겨나 유행한 말이다. 일본에서는 사람이 사망하면 화장한 뒤 절에 묘를 만들고, 대를 잇는 큰아들이 절에 묘 관리와 공양을 위한 비용을 내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불교의 영향으로 전통적으로 일본에서는 매장보다는 화장이 주류였다.

일본의 전통적 장례문화 특징은 절과 ‘이에’(家) 제도였다. 일본에서는 사실상 절이 장례 관련 여러 의식을 독점하고 있다. 에도막부(1603~1867년)가 기독교 금지 정책의 하나로 모든 주민은 절에 등록해 기독교 신자가 아님을 증명하게 강제했기 때문이다. 또 남성 가부장이 호주로서 가족을 이끌고 대를 잇는 ‘이에’(家) 제도도 전통적 장례문화의 기반이었다. 그러나,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더는 가부장적 질서에 기반을 둔 장례문화는 존속하기 어렵게 됐다. 아들이 있다 하더라도 자손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강해지면서, 영대공양은 급속히 퍼졌다. 야지마 부주직은 “생전 계약자 중 절반 정도는 의외로 자손이 있는 분들”이라고 말했다.

니가타현에 있는 절, 묘코지(妙光寺)는 1989년 선구적으로 영대공양을 표방한 ‘안온묘’를 만든 것으로 유명한 절이다. 당시 독신자나 전통적 가족관계에 얽매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1990년부터는 해마다 여름에 생전 계약을 한 사람들이 묘지와 죽음을 주제로 축제도 열고 있다. 혈연으로 얽히지 않은 사람들이 묘지를 매개로 새로운 인연을 맺는 방식으로 주목을 받았다. 영대공양을 내세운 납골당 광고는 이제 도쿄 지하철에서 흔하게 눈에 띌 정도로, 영대공양은 넓게 퍼졌다.

“가족 아닌 사람들 서로 의지”

22일 신주쿠에서 만난 이노우에 하루요(69) 도요대학 교수는 ‘묘지 친구’(墓友)를 만드는 활동을 한다고 말했다. 이노우에는 일종의 수목장 묘지인 ‘벚꽃장’의 기획과 회원 운영을 하는 비영리법인(NPO) ‘엔딩센터’ 이사장이다. 도쿄도 마치다시에 있는 벚꽃장 묘지는 벚나무를 중심으로 만든 정원 형태 묘지다. 여러 사람의 유골이 함께 묻혀있는 공동묘지다. 자손이 따로 관리하지 않는 ‘비계승 묘지’를 표방한다. 생전에 교류해 친구가 된 이들이 같이 묻히는 것을 지향한다.

도쿄도 마치다시에 있는 벚꽃장 묘지에서 해마다 벚꽃이 피는 봄에 하는 합동 제사의 모습. 엔딩센터 제공

도쿄도 마치다시에 있는 벚꽃장 묘지에서 해마다 벚꽃이 피는 봄에 하는 합동 제사의 모습. 엔딩센터 제공

엔딩센터는 벚꽃장 묘지에 들어갈 사람들을 회원으로 받아서 각종 강좌와 교류 행사를 한다. 대표적인 예는 마치다시 건물에 마련한 ‘또하나의 우리집’이라는 공간이다. ‘또하나의 우리집’은 회원들이 서로 모여 밥을 같이 해먹고 수다도 떠는 곳이다. 흔한 사랑방 같은 곳이지만 다른 점은 죽음과 묘지를 매개로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교류한다는 점이다. 이노우에는 “회원들이 다른 곳에서는 하기 어려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는 의견이 많다”고 말했다. 엔딩센터 전체 회원은 약 3700명에 이른다. ‘또하나의 우리집’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회원은 60여명 정도다.

이노우에는 “일본 가족 중 가장 많은 형태가 ‘단독 세대’(1인 가구)다. 예전처럼 가족이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해서 절에 모시는 일련의 의식을 하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 돕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15년 일본 총무성 발표에 따르면 일본 일반세대(시설 생활 세대 제외) 5333만여 세대 중 34.6%인 약 1841만 세대가 세대원이 1명뿐인 단독 세대였다.

사회학자인 이노우에가 묘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어머니의 죽음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1981년 62살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우리 집은 딸만 둘이었고 모두 결혼을 한 상태였다. 어머니의 유골을 절에 일단 모실 수는 있지만, 딸은 대를 이을 수 없으니 절에 모신 유골도 언젠가는 유지가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가부장적 질서가 전제된 장례 문화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고, 1990년대에 ‘21세기의 결연과 장례를 생각하는 모임’이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었다. ‘결연’은 가족이 아닌 사람들끼리 장례를 매개로 인연을 맺는다는 의미에서 넣었다.

도쿄도 마치다시에 있는 ‘또하나의 우리집’에서 엔딩센터 회원들이 식사하고 이야기 나누며 교류하는 모습. 엔딩센터 제공

도쿄도 마치다시에 있는 ‘또하나의 우리집’에서 엔딩센터 회원들이 식사하고 이야기 나누며 교류하는 모습. 엔딩센터 제공

최근 일본에서는 여성 전용 묘지도 인기를 끌고 있다. 비영리법인 스노도롭이 2014년 사이타마현에 있는 절 안에 여성 전용 공동묘지 ‘나데시코’(패랭이꽃. 일본인들이 여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도 사용)를 마련해 주목을 받았다. 유리에 패랭이꽃을 조각한 비석으로 여성스러움을 강조하고 주변엔 꽃을 심어 장식했다. 자손이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여성 전용 묘지의 인기는 남성 중심 질서에 대한 반발과 장례업 종사자의 새로운 수요 창출 목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지난해 출간된 <요즘의 납골당>(이노우에 리쓰코 저)이라는 책에는 도쿄도 후추시에 있는 여성 전용 묘지인 ‘후추 후레아이파크’에 묻히기로 생전 계약을 한 62살 여성의 사례가 나온다. 프리랜서인 이 여성은 “나는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독신’이지만 옛날식으로는 ‘시집 못 가고 나이 든 여성’이다. 지금까지 자유롭게 살았으니 무덤도 자유롭게 골라도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책에 실려있다.

이노우에 엔딩센터 이사장은 한국은 일본 사례를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한국의 지난해 합계출산율 0.98명이라고 들었다. 지금은 한국이 일본보다 인구 고령 비율이 10% 포인트 이상 낮다. 그러나 저출산으로 시간이 지나면 고령 인구 비율이 늘어날 것이다. 결국 일본처럼 가족이 아닌 사람들이 서로 의지해서 무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한국도 찾게 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 일본 특파원. 지난해 기준 일본은 총인구 1억2652만9천명 중 65살 이상이 28%(3547만1천명)인 초고령화사회입니다. 일본 사회를 취재하다보면 뉴스 대부분의 배경에 고령화 현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도 머지 않아 겪게 될 현실이기도 합니다. 초고령화사회 일본에서 보고 느낀 소소하지만 의미있는 삶의 이야기들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garden@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891697.html#csidx1efba235dbf3f0397da3c0132d1196c

종합뉴스 > 화장장 > 일본의 장례·묘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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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장례·묘지 문화



글쓴이 : 한국장례신…







한국을 여행하는 일본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 중에 하나는 '한국에는 왜 산이나 밭에 묘지가 많으냐'는 것이다. 반대로 일본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은 주택가나 학교 앞 뒤에도 공동묘지가 있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두 나라 모두 유교 문화가 비교적 뿌리 깊게 남아 있는 나라여서 서로 비슷하겠거니 생각하겠지만 전혀 다르다.

먼저 장례문화를 보면 사람이 죽으면 한국처럼 빈소를 만든다. 조문객이 조문하러 온다. 일본에는 '오쯔야'라고 하는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묵념하는 시간이 있다.

보통 그 시간은 1시간 정도다. 주로 스님이 주재한다. 남자는 검은 옷에 검은 넥타이를 착용하고 여성도 검은색 정장이다. 한국처럼 시간제한 없이 조문객이 오지 않는다. 부고장에 오쯔야 시간을 알려준다.

보통 오후 6~8시다. 음식 제공도 없다. 간단한 선물 정도다. 그 다음 날은 장례식이다.

장례식에서 우리와 다른 점은 시신을 공개하는 점이다. 참석한 조문객들이 모두 줄을 서서 차례로 죽은 이의 몸 위에 꽃을 바친다. 어떤 이는 얼굴을 만지면서 마지막 이별을 슬퍼한다.

장례식장은 동네마다 있다. 반면, 병원에는 장례식장이 없다. 입원환자들의 감정을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장례식장 입구에는 고인의 생전 행적을 전시하는 경우도 있다. 그 분이 살아온 모습을 조문객들이 꼼꼼이 살펴보면서 유족과 조용히 담소하는 것도 볼 수 있다. 한국처럼 소리 내어 우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화장장으로 향한다. 일본은 매장을 하지 않는다. 화장을 해서 비교적 집에서 가까운 공동묘지에 유골을 모신다. 일본은 동네마다 거의 공동묘지가 있다. 1인당 면적도 아주 좁다. 비석 하나와 작은 제단 하나 면적이다. 마치 이웃집에 가듯 묘지에 가서 꽃을 바치고 기도하는 모습이 일상화되어 있다.

일본의 산이나 밭에는 무덤이 없다. 있다면 옛날의 고분이다. 그래서 일본의 자연은 잘 보존되고, 생수가 깨끗하다는 말도 있다.

한국의 좁은 땅에 늘어나는 무덤을 보면서 일본의 묘지문화를 우리나라에서도 생각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시아에 녹색당 ‘큰 깃발’ 꽂다 - 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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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매장이냐, 화장이냐” 장례 문화의 현주소

 蘇成玟 기자 () 승인 1998.10.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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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장례 문화·묘자리 덕 보기 의식 여전…“나는 화장” 증가 추세

지난 9월 쌍용그룹 사보 〈쌍용〉은 그룹내 과장급 이하 30대 사원 1백50명을 대상으로 이색적인 설문 조사를 했다. SK그룹 최종현 전 회장의 시신 화장을 계기로 사내 직원들이 사망자의 시신 처리 방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보려는 여론 조사였다.

자신의 시신을 처리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매장(14%)보다 화장(78%)이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그런데 부모의 시신 처리에 대한 응답에서는 화장(26%)보다 매장(66%)이 두드러져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 조사 결과는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하는 한국 장례 문화의 현주소를 반영한다. 나날이 잠식되어 가는 좁은 국토 때문에 언제까지 매장만 고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막상 사랑하는 가족을 화장하자면 꺼려지는 현실. 응답자들은 한국인이 아니면 쉽게 납득하기 힘든 이중적 의식 구조를 드러냈다.



엄밀히 따지자면 응답자들이 자기 시신에 대한 처리 방식에서도 화장을 선호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응답자의 78%가 화장을 원한 것으로 공개되었지만, 질문 내용을 들여다보면 ‘화장하기로 결정했다’는 항목에 답한 경우는 27%에 그쳤다. 나머지 51%는 ‘화장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는 항목에 점을 찍었을 따름이다.

한국인들이 화장이라는 장례 방식에 거부감을 쉽게 떨치지 못하는 이유로는 우선 인체의 중요성을 유독 강조하는 유교적 사고 방식을 들 수 있다. 어린이들의 수신서인 〈소학〉에 나오는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몸을 함부로 다치게 하는 것은 불효라는 인식이 오랜 세월 전해져 왔다.



그러나 화장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시각은 다르다. 화장을 정식 장례법으로 택하고 있는 불교 교리에 따르면, 육신은 흙·물·불·바람 4대 원소로 구성되어 있어 영혼이 떠난 육신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순리이다. 곧 불교에서 화장이란 육신을 태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본래 모습으로 되돌리는 행위일 따름이다. 불교의 근본 사상은 무아(無我), 즉 나라는 존재가 본시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육신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



이런 불교 가르침과 전통 때문에 화장은 특히 불교식 장례 방법으로 인식되어 왔다. 중국에 처음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 중국인들이 불교를 ‘부도(浮屠; 고승의 사리나 유골을 넣고 쌓은 둥근 돌탑)’라고 불렀을 정도로, 화장은 시신을 매장하던 사람들의 눈에 특이한 장례법이었다.



인도는 석가모니가 출생하기 이전부터 오늘날까지 전통적으로 화장법을 택해 왔다. 무더운 지방이어서 시신이 쉽게 부패할 뿐만 아니라 매장할 경우 전염병이 생길 우려가 있어서 인도에서는 신분의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 화장한다. 화장이라는 장례 방법은 이처럼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생겨났다.



현재 전국의 화장장 시설은 44곳. 한보광 교수(동국대 불교대학)는 지금처럼 유족이 보는 앞에서 시신을 시뻘건 화구에 밀어넣는 식의 ‘정나미 떨어지는’ 화장 시설로는 화장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가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인들은 왜 오랜 불교 역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유독 매장을 선호해 왔을까. 최 아무개씨(30·회사원)의 경험담을 들어 보면 매장 문화가 한국인의 삶에서 차지해 온 비중을 엿볼 수 있다. 최씨의 고향은 경남 고성군 마암면이다. 4대를 모셔야 할 종손으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명절 때만 되면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마을 선산을 돌아다녔다. 보학(譜學)에 능통했던 조부인지라 직계 조상들의 이력쯤은 훤히 꿰고 있었다. 증조부와 고조부 무덤 옆에 서서 최씨는 선조들의 생애는 물론, 고향 선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4대조 이상 조상 이야기까지 조부로부터 전해 들었다.



최씨가 고교에 다닐 때 할아버지는 별세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 깊숙한 곳에는 이미 ‘뿌리’를 소중히 여기는 의식이 배어 있었다. 그에게 조상들의 묘소는 괴기 드라마에서 흔히 묘사되듯이 으스스한 기운이 감도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길에도 할아버지 등처럼 기대어 쉬었다 갈 수 있는 포근한 안식처였다. 명절 때면 고향 선산에서 조상들의 산소에 절한 뒤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최씨는 자신의 눈길에 할아버지의 시선이 겹치는 듯한, 섬뜩할 정도로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힌 적도 많다.



장례 방식에 대해서는 최씨 역시 “묘지 문제의 심각성 때문에 나의 주검도 화장할 것을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부모를 화장하는 데에는 반대한다”라고 말했다. 우리 정서로는 부모가 스스로 화장해 달라고 유언하지 않는 한 자손이 먼저 부모에게 화장을 권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최씨가 성장하면서 겪은 체험은 이제 더 이상 보편적인 것이 못된다. 도시화·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촌락과 선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친족간 유대와 조상 숭배 사상은 점점 엷어지고 있다. ‘매장’이라는 풍속만 남아 있을 뿐, ‘뿌리’라는 의식은 약해져 현실적인 괴리감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장현섭 교수(그리스도신학대학·사회복지학)는 그같은 현실적 괴리감이 극명하게 표출되기 시작한 예로 95년 추석 연휴를 꼽는다. 당시 전국적으로 2천8백만명이 이동했는데, 이 가운데 연휴를 즐기려는 인파가 절반 가까운 것으로 추산되었다. 90년대 들어서 임협이나 농협 등을 통해 묘지 관리를 대행하는 사업자들이 생긴 점도 조상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졌음을 드러낸다.



장교수는 〈죽음의 질 개선 방안〉이라는 소론에서 ‘현대 한국의 묘지는 전통 사회처럼 효 사상을 이어 주거나 가족 및 친족 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기능을 하기보다는 조상에게서 복을 구하려는 미신적 요소를 띠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 시대에 묘지 제도를 장려했던 근본 목적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장소를 통해 유교 이데올로기인 효 사상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풍수지리설(82쪽 상자 기사 참조)에 내포된 기복적 속성에서 이미 후세 장례 문화의 난맥상이 예고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현대에 이르러 묘지 제도의 이데올로기는 약해지고 조상의 묘자리를 잘 써서 후손들의 안녕을 도모하려는 이기주의적 발상만 살아 남았다. 이는 전통적 매장 풍습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이를 쉽게 개선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국립 묘지, 대통령 80평·장병 1평 ‘차별’



하지만 묘지가 후손에게 주는 정서적 위안과 가족간 통합 능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필도 책임연구원이 ‘한국형 가족묘’를 확대 보급하자고 주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형 가족묘는 대개 납골함을 모아 한데 보관하는 방식이지만 ‘매장식 납골묘’를 이용하면 화장에 대한 거부감을 크게 줄이면서도 묘지가 차지하는 공간을 최소화할 수 있다. 매장식 납골묘는 석관 2개 위에 직사각형으로 봉분을 쌓고 그 옆에 납골함 16개를 나란히 설치할 수 있게 한 분묘 양식이다.



이씨는 화장 비율이 높아지는 만큼 후손들의 삶의 질이 똑같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6·25 전쟁 후 폐허를 딛고 일어난 한국 민족의 저력에 조상 숭배 사상이 기여한 부분도 크다고 평가한다. 그는 “문제는 ‘체면과 과시’의 거품을 제거하는 일이다. 우리는 평소 그렇지 않다가도 혼례와 장례 같은 특정 행사 때에는 과용하는 풍습이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처럼 국토가 좁은데도 매장만 고집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다(화장률은 전체 시신 처리의 20%). 일본·홍콩·네덜란드·영국 등은 화장을 주된 장례 방식으로 택한다(화장률 70∼98%). 대만·프랑스·미국 등 매장을 선호하는 나라도 있지만 한국과는 실정이 다르다. 일정 시한이 경과하면 납골하도록 하는 시한부 매장제를 의무화하고 있는 데다(미국 제외), 묘지 1기가 차지하는 면적이 2.5∼4㎡에 그쳐 법정 허용 기준조차 30∼80㎡에 달하는 한국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작다.



적어도 무덤에 관한 한 그들에게 신분의 격차는 허용되지 않는다. 부산의 유엔 묘지에 안장된 외국인 전몰 장병의 묘소를 보면 장군과 사병이 똑같은 면적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우리는 천여 평짜리 묘지가 있을 정도로 불법 조성된 개인 호화 분묘들은 제쳐 놓더라도 국립 묘지 같은 국가적 기념 묘역에서부터 신분 차별을 당연시한다. 국립 묘지의 경우, 대통령의 묘자리는 80평, 장군은 8평인데 일반 장병은 1평이다.



기득권 세력부터 솔선하여 장례 문화를 개선하는 데 앞장서지 못한다면 한국인들이 앓고 있는 이중적 의식 구조의 딜레마는 해결책을 찾기가 힘들 것이다.

대한민국은 묘지천국, "장례문화 혁신 시급하다" - 데일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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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묘지천국, "장례문화 혁신 시급하다"

<김원섭 칼럼>  |  webmaster@dail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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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07  15: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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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섭 칼럼]올 추석에도 조상의 묘소를 찾아 절을 하고 묘를 살피는 성묘의 전통 풍속이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조상의 묘소를 중요하게 여겨 봄·가을에 묘를 손질하는 풍속이 전한다. 율곡 이이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한식과 추석에는 가례에 의해 묘제를 지내고, 정초와 단오에는 간단히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고 있다.



오늘날은 가족들이 한 곳에 함께 살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 설과 추석 등의 명절이 아니면 전체가 모이기가 힘들다. 때문에 설과 추석에 자손들이 모여 조상에 대한 차례를 지내고 조상의 묘소를 찾아 성묘를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는 조상을 모시는 지극정성으로 묘지문화가 발달하면서 묘지가 차지하는 면적이 기하급수식으로 늘어나고 있다. 우리 나라 전국토에서 묘지 면적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1%. 이는 주거 지역의 1/2배, 공업 지역의 약 2배에 해당하는 면적으로 매년 약 9㎢(여의도 면적의 1.3배)씩 잠식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한반도는 ‘묘지 천국’이다. 



이미 ‘묘지 포화’ 상태다. 전국 산천 곳곳에 자리 잡은 분묘는 대략 1435만여 기로 추정된다.



이 중에서 연고가 없는 ‘무연고 분묘’가 224만여 기(15.6%)다. 



이같은 묘지문화가 이어지는 것은 바로 조상을 잘 모시면 성공한다는 관례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이나 대선후보, 재벌들은 법을 어겨가며 왕릉처럼 묘지를 조성하고 있다.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묘소가 있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일대도 자리가 좋은 편이다. 실제 ‘사거용인(死居龍仁ㆍ죽어서는 용인이 최고)’이라고 할 만큼 이 일대엔 명당이 많다. 정몽주ㆍ채제공 등 역사적 인물의 묘는 물론,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모도 용인에 안장돼 있다.



그러나 일부 지관들은 이병철 창업주의 묘 자리가 좋지 않아 (묘를 쓴 뒤) 20년 후 삼성의 몰락이 시작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삼성은 위기에 몰렸다.



“선친묘만 바꿔도 대통령 난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장을 한후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소문이 들리자 김종필 총재와 이회창 총재도 이장을 했다. 그러나 천하의 명당이라는 곳으로 이장을 한 후 모두 정계를 떠났다. 이는 地氣를 보지 않고 관산법으로 명당을 골랐기 때문이다” 김대중 후보한테 패한 이회창 후보는 2002년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덕을 본 선친묘 이장을 추진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특히 조상숭배에 대한 잘못된 관습으로 국민간 위화감을 불러일으킨다.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운 분묘설치가 마치 조상에 대한 효의 실천으로 여기는 소수의 계층이 건전한 대다수 국민들의 삶의 공간을 빼앗아 가고 있다.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과 훼손을 막기 위해서도 장묘문화의 획기적인 변화가 요구됐다.



그러나 위정자들과 재벌들의 장례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기대하기는 요원하다.



그래서 서울 동작동에 자리잡은 국립현충원부터 헐고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알링턴국립묘지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포토맥 강을 사이에 두고 워싱턴 D. C.와 마주보고 있다. 알링턴은 1864년 육군 장관의 명령에 따라 군사묘지가 되었다. 1864년 남군 포로가 처음으로 이곳에 묻힌 이후 독립전쟁 때 죽은 몇몇 장교들을 비롯해, 미국이 참전한 모든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이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존 J.퍼싱 장군, 리처드 E.버드 제독,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로버트 E.피어리, 조너선 웨인라이트 장군, 조지 C.마셜 장군, 로버트 토드 링컨, 피에르 샤를 랑팡 소령,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존 F.케네디, 로버트 F. 케네디 등이 이곳에 묻혀 있다. 현재 16만 3,000명 이상의 병사가 묻혀 있는 묘역에는 1872년부터 전국의 국립묘지에 사용되기 시작한 단순한 묘비들이 끝없이 줄지어져 있다.



그리고 알링턴 국립묘지는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추모공원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웃 중국도 위정자들의 획기적인 장례문화로 묘지의 면적을 줄이고 있다. 주은래(周恩來) 전 수상 역시 화장과 산골을 택했다. 1976년 죽기 전 주은래는 “유골을 조국의 산하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에 따라 그가 학생시절을 보낸 천진시(天津市)와 황하 유역 등 세 곳에 나누어 공중에서 유회를 뿌렸다. 16년 후에 사망한 그의 부인 역시 그 뒤를 따라 남편과 만났던 추억의 장소였던 천진시의 한 냇가에 유회를 뿌리게 했다.



1997년 사망한 20세기 마지막 중국 최고지도자였던 등소평(鄧小平)의 유회가 북경에서 비행기에 실려 유족과 공산당 간부들의 손에 의해 바다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지금 중국이 자랑하는 1백% 가까운 화장률은 이 같은 정치지도자들의 솔선수범에 의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웃 일본의 경우도 우리나라보다 화장률과 납골묘, 납골당 이용률이 월등히 높다. 또 장묘관련시설이 생활공간과 가까워 관광명소로 홍보될 만큼 우리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재벌중 유일하게 화장을 택해 납골당을 지어 사회에 환원한 최종현 전 SK그룹회장의 장례문화의 영향탓인 전통적인 매장방식이 점점 사라지고 화장, 수목장의 다양한 장례문화가 도입되고 있다.



덩치가 커진 봉안시설 역시 묘지와 마찬가지로 자연 훼손과 함께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저해한다는 비판이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친환경적 장묘가 점차 주목받는 모습이다. 



대표적인 친환경 장묘는 자연장이다. 현재 정부에서도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 중인 자연장 방식은 △잔디형 자연장(잔디장) △화초형 자연장(화초장) △수목형 자연장(수목장) 등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잔디장은 화장한 유골의 골분(뼛가루)을 잔디 밑이나 주변에 묻는 것을 뜻하며 화초장은 골분을 화초 밑이나 주변에 묻는 방식이다. 수목장은 골분을 나무 밑이나 주변에 묻는 방식으로, 이러한 수목으로 이뤄진 산림을 수목장림이라고 한다.



골분을 묻는 방법은 세 개의 자연장 모두 동일하다. 지면으로부터 30cm 이상의 깊이에 화장 골분을 묻으면 된다. 용기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흙과 섞어 묻어야 한다. 용기에 담아 묻을 때는 사용하는 용기가 생화학적으로 분해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자연장은 다양한 장점을 갖고 있다. 우선 자연 친화적이기 때문에 묘지가 주던 혐오감을 전혀 주지 않는다. 또한 면적을 적게 차지하기 때문에 국토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자연환경을 보존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또한 대부분의 자연 장지가 공원 같은 편안한 느낌으로 조성됐다.



현재 전국의 자연 장지는 지난해 기준으로 2021곳이다. 공설 52곳, 사설(법인·종교단체) 54곳, 개인·가족 1025곳, 종중·문중 881곳이다. 



개인·가족, 종중·문중 자연 장지는 직계가족 또는 종중·문중 구성원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자연 장지다. 특히 개인·가족 자연 장지가 많은 것은 정부가 2013년부터 주거·상업·공업 지역에서 자연 장지 조성을 허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택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앞마당에 나무 한 그루를 심고 그 아래 유골을 묻어 모실 수 있다.



2004년 9월 김장수 고려대 명예교수의 장례식이 경기도 양평의 고려대 연습림에서 수목장으로 치러진 것을 계기로 사회적인 주목을 받았다. 평생을 나무와 함께 산 김 교수는 그의 유언대로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갔다. 



지금 죽은 사람들을 묻는 ‘묘지’가 ‘공원’이라는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 납골당이나 납골묘가 있는 묘지는 실제 ‘공원화’가 이뤄지고 있다. 떠나는 이에게는 편안하고 영원한 안식을, 보내는 이들에게는 고인을 마음껏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며 인공 폭포와 분수대, 조각공원 등을 설치하고 있다.



모든 생명은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우주의 원리다. 따라서 좁은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화장을 획기적으로 늘리고 봉분을 하지 않는 시한제 묘지, 지정된 곳에 산골하는 방법 등 현대적 장묘문화에 대한 국민모두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국토는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았듯이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삶의 공간을 위해서 묘지를 공원화해 돌아가신 조상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장례문화의 혁신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위정자들의 묘부터 공원화로 만들어라!.<김원섭 언론인>



<프로필> <1960년6월13일 (만56세), 경기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데일리메일 편집인, 편집국장 / 대국엔터테인먼트 대표 / 고려대학교 교우회 이사 / 경력=1997~1999 미디어오늘 편집장 / 1989~1997 국제신문 차장 / 2006~2009 CNB뉴스 편집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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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의 묘지문화(墓地文化) : 네이버 블로그

서양에서의 묘지문화(墓地文化) : 네이버 블로그

素朴한 日常



이재욱

2013. 9. 8. 12:34

이웃추가 본

1 댓글 5

블로그 카 대한민국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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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의 묘지문화(墓地文化)





그 특징을 몇 마디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마을단위나 도시단위의 공동묘지를 운영한다(과거에는 성당의 뒷뜰을 묘지로 함께 활용

하였다)

2.마을 앞 공동묘지나 도시공원묘역의 전체적인 면적은 더 늘어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

면서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3.죽은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반드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나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공동묘지에 안장하도록 법으로 강제되어 있다.



요즘은 우리나라에서 화장장례문화가 거의 70% 선에 이른다고 하는데 서양에서는 기본

적으로 화장장례문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묘지면적이 해마다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근본적 이유를 가

지고 있는데 어떻게 서양에서는 수백년이 흘러도

예나 지금이나 같은 크기의 묘지터를 유지하며 운영할 수가 있는 것일까?

 

나는 2차례에 걸쳐 약 10년간 유럽국가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 그들의 삶 깊숙한 곳

까지 파고 들면서 우리 국가나 국민들이 그네들로 부터 한 수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

을 얻어 오기 위해 개인적으로 정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려 왔던 것이 사실이다.

사회제도나 교육제도 등도 죄다 마찬가지다.

 

궁극적인 목표는 대한민국을 EU국가나 사회처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안정되고 평화로

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길은 우리나라가 선진국 문턱으로 진입하기 위해선 반드시 갖추어야할 요건이기도 한

것이다.

 

흘러가는 세월에 역사발전을 맡겨둘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역사발전의 시간을 단축시키

기 위하여 개혁도 필요한 것이다.

비록 그 큰 뜻은 나 자신이 직접 이루지는 못했지만 지난 7년 가까이 산골에 묻혀 살면서

도 우리나라나 사회가 그런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들을 찾아 해왔던 것이 사실인데 개인적으로는 천국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지옥에 떨어져 엄청 힘들게 살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람들조차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되어 버린 세상.

 

EU국가들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들이 이 땅에서는 아무런 꺼리낌없이 자행되고 일

상다반사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국토종주자전거여행을 다녀왔던 것도 4대강 사업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생생한 현장목소

리를 직접 듣고 민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것이 1차 목적이었지 국토종주인증서나

메달을 받기 위하여 다녀온 것은 아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두물머리(양수리)에 인접한 지역으로 조선시대 때 영의정이나 정의

정을 지냈던 아홉 정승들이 묻혀 있는 곳이라 해서 옛날에는 "정승골"이라고 불리우던 곳

인데 인근에는 최진실이가 묻혀 있는 갑산공원과 함께 2개의 공원묘역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을 오다니다 보면 지속적으로 묘지면적이 늘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제 고향에 벌초를 다녀오면서 해마다 늘어나는 묘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

록 유럽국가들의 사례를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요즘은 친지들도 한 자리에 모이기도 쉽지 않은 것인데 이 산 저 산에 흩어져 있는 조상들

의 묘를 찾아 벌초한다고 하루해를 다 보내다 보니 정작 얼굴을 맞대며 안부조차 물어

볼 여유도 갖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기가 바쁜 것이다.

서양의 가족묘지구조를 들여다보면 직4각형의 이태리 대리석 봉분(일종의 묘지 뚜껑 역

할)을 가지고 있고 묘지 내부를 들여다 보면 지하에 몇 개의 층으로 되어 있는 석실을 만

들어 여러 세대 가족들이 함께 묻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석실내부의 층들은 완전하게 밀폐된 형식이 아니어서 여러 층을 눈으로 쉽게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마을묘지에 조상대대로 부터 물려온 가족묘가 없는 경우 등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하면 그

때는 다른 장소에 가족묘가 새로 만들어 지게 되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이미 육신이 부패

한 오래된 선조의 뼈를 수거하여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화장터에서 뼈를 화

장한 다음  뼈가루는 공동묘지에 입석형태로 만들어진 작은 공간의 납골당에 보관하는 형

식으로 가족묘지의 빈공간을 만들어 최근에 죽은 자를 가족묘에 안장하게 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수백년이 흘러도 마을어귀나 도시인근 공원묘지의 터를 일정하게 유지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묘지터는 세멘트 담벼락이나 울타리가 처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묘지는 매일같이 다니는 마을어귀에 위치하고 있으니 주말이면 소풍을 가듯

이 조상들이 묻혀 있는 가족묘를 찾게 되고 늘 촛불이나 꽃들이 놓여져 있어 아름다운 묘

지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와는 달리 공동묘지에 대한 선입관이나 두려움 따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

다.

 

특히,우리나라의 최대명절 추석과 비슷한 시점에 "죽은 자의 날"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데 이는 죽은 조상들을 기리는 날이라 우리나라의 추석제사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어 마

을묘지에 전체 주민들이 모여서 야외미사형태의 공동행사를 진행한다.

1년 중에서 가장 많은 가족친지들이 묘지를 찾아 촛불과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를 해서 공

동묘지가 하나의 볼거리 구경거리가 될 정도라 밤에 일부러 공동묘지에 구경을 하러 가는

것이 관습처럼 되어 있다.

우리 집안에서는 조상들의 유골을 죄다 수습해 화장한 다음 자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

는 도로변의 밭에다가 집안묘지를 새로 조성해 유지관리하는 방안을 논의 中에 있다.

 

친인척들 모두가 동의해서 뜻은 모아져 있는 것인데 실행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

다.

[특집]묘지문화가 바뀌고 있다 - 주간경향



[특집]묘지문화가 바뀌고 있다 - 주간경향



[특집]묘지문화가 바뀌고 있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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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률 증가하면서 새로운 장묘 등장… 선조합동묘·납골평장에서 수림장까지

장묘시설이 삶의 공간으로 들어오고 있다. 산자와 죽은자가 공유하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징후를 보이는 것이다. 장묘문화가 매장에서 화장으로 급속히 변화하면서 생긴 일이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1997년에 23.2%이던 화장률이 2004년에는 50%를 상회했다. 일부 장묘시설이 도심으로 들어오면서 집단화·소형화 추세도 보인다. ‘품위 있는 주검’의 관리가 곧 생활 속 장묘문화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친환경적인 장묘방법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와 국민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장묘문화 변화의 핵심적 원인은 가족해체 현상과 공공화장시설의 부족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묘지 및 장묘시설의 부족이라는 현상을 타개하려는 게 장묘문화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장묘문화적 관점에서 변화의 동력이 부족한 이유다. 박복순 한국장묘문화개혁범국민협의회(약칭 장개협) 사무총장은 “장묘시설조차 유행이나 추세를 따라서는 안 된다”면서 “‘죽음의 복지’도 책임지는 나라의 바탕에는 국민의 다양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제도와 정책이 선결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양한 공공시설을 중심으로 장묘문화가 자리잡아야 전통적 미풍양속의 훼손없이 우리의 문화로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인 셈이다.



최근 들어 작지만 의미있는 장묘문화의 변화 조짐들로 주목받고 있는 몇몇 사례를 소개한다.

선조합동묘 광주 장등동 장등마을. 나지막하지만 대지를 향해 힘차게 달리는 산자락 끝에 작은 하천이 산 어귀를 감아돌고 있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 왕릉처럼 커다란 묘지가 하나 있다.

지난해 12월 단장한 이 묘지는 교육공무원 출신의 풍수학자인 윤갑원씨(정통풍수지리연구학회 이사장)가 조성한 파평윤씨 ‘선조합동묘’다. 이 묘지는 파평윤씨 시조인 태사공 23대 후손부터 29대 후손까지 7대에 걸친 23위를 모신 합동묘다. 그러나 이 무덤은 흩어져 있던 선대의 무덤을 한 곳에 모아서 합장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다. 우리 현실에 맞는 새로운 매장문화를 창조하여 이를 정착시키고 국토를 합리적으로 활용하려는 연구의 결실이다. 윤갑원씨는 “어렸을 때 선산에서 벌초할 때마다 선조묘가 물기에 젖어 있는 것을 보았고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죄책감을 금할 수 없었다”면서 “적지(適地:부드럽고 습기가 없는 땅)로 이장하겠다는 생각에 5년여 동안 풍수학적 탐색, 문헌 및 선례 연구 끝에 얻은 결론”이라고 말했다.

‘선조합동묘’란 신위를 모시는 소목법(중국의 장법)과 한국의 암장법을 원용해서 5대조 이상의 선조를 한 곳에 모신 장묘법으로 유골을 추려 나무 상자에 넣어 작은 웅덩이를 파고 그대로 안장하던 옛날의 암장법을 응용했다. 이런 장법으로 활용한 묘지는 납골당처럼 소요 면적이 작다.

그는 “5대 이상의 세월이 흐르면 시신의 원형체는 사라진다”면서 “오직 유골을 적지에 안전하고 정중하게 봉안하여 자손의 도리를 다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윤갑원씨는 “지면은 납골당처럼 작은 면적만 소요돼 국토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국가정책에 어긋나지 않고 묘는 후손들이 선조의 성묘나 제사 등으로 효심을 표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고 말하고 “나도 죽으면 결국 이 묘에 합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선조합동묘의 설치는 간단하다. 크기는 가로 28㎝, 세로 38㎝가 적당하다. 또 간격은 부부간은 15㎝, 세대간은 20㎝ 정도로 파면 한 봉분에 40~50구를 매안(埋安)할 수 있다. 매안 순서는 신위를 모시는 소목법과 사후 남우여좌(男右女左)의 예법을 따른다.
이 선조합동묘가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이 묘지를 찾아온다. 석비 아래에 비닐로 싼 방명록이 있는데 참관자 일련번호가 200번을 넘었다. 윤갑원씨는 “멀리 경상도에서 왔다는 한 사람은 ‘왜 이 방법을 미리 생각지 못했을까’라고 눈물지으며 ‘지난 해에 가족납골묘를 만든 것이 후회된다’고 말했다”고 전하면서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필도 서울보건대학 교수(장례지도과)는 “이런 시한부 매장방법이 국민의 정서나 우리의 문화에도 어울리는 바람직한 형태의 장묘”라고 전제하면서 “특히 공공장묘시설이 부족한 현실에 좋은 아이디어로 보인다”고 말했다.

납골평장(平葬) 화장과 매장을 혼합한 형태의 장묘법인 납골평장도 새로운 장묘 형태로 기대를 모은다. 납골평장은 화장한 유골을 나무함에 담아 봉분없이 묻고 와비(臥碑)를 설치하는 방식이다. 부산에 있는 UN묘지와 같은 매장법이다. 남해군이 지난해 10월 고현면 갈화리에 640평 규모로 묘역을 조성, 일반분양에 들어갔다. 납골평장은 지방자치단체가 도입한 첫 사례다. 사실상 실험적 장묘법인 셈이다.

640평 공원 가운데 300평이 묘역이다. 총1200기의 유골을 안치할 수 있다. 묘역 주변에는 나무와 꽃 등을 심어 공원 개념의 휴식공간으로도 활용 가능하다. 장명정 사회복지과 노인청소년계장은 “문중 단위로 9곳의 시범묘지를 둬 흩어져 있는 선조묘를 가족묘로 개장(改葬)하게 홍보하고 있다”면서 “남해군의 대성인 연안 차씨도 가족묘를 만드는 등 지역주민의 호응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장묘문화에 일대 혁신을 일으킬 수 있는 방식”이라면서 “‘장묘법’이 개정되어 공원묘지 조성이 수월해지면 마을 어귀 등에 쌈지공원 형태로 공원묘지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장묘사업 담당자인 김재실 주사보는 “유골이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가려면 15년 정도가 걸릴 것”이라며 자연회귀성을 강조하고 “만일 15년 매장시한의 연장을 원하면 두 차례 연장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시신을 매장해서 봉분을 세우면 한 봉분에 3~5평이 필요하다. 지역주민에게 분양되는 납골평장 시범묘역은 1기에 가로 세로 90㎝, 0.25평으로 가로 40㎝, 세로 30㎝. 묘역당 1개의 와비를 설치할 수 있다. 1기 안치 비용은 15년에 4만9500원, 부지사용료는 1만2000원, 그리고 묘비와 설치재료비 8만8000원 등 1기 안치비용은 모두 15만9500원이다. 이는 남해군내 기존 매장묘역을 분양받았을 때 소요되는 묘역면적 2.5평, 사용료 49만5000원, 관리비 12만원의 10분의 1이다. 박복순 사무총장은 “세계 어디에 개인이 마음대로 장묘시설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있느냐”고 반문하면서 “결국 지방자치단체가 주도하는 공공 장묘시설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어렵지만 공공시설에서 희망을 찾을 수밖에 없다”면서 “특히 남해군은 ‘우리 시설만이라도 법대로 시행하자’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며 납골평장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수림장 묘지난 해소와 산림보호라는 이중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수림장도 자연회귀형 장묘법이다. 수림장은 사람이 죽으면 화장한 다음 유골을 나무 밑에 묻거나 뿌리는 것이다. 나무와 숲과 함께 영생하도록 한다는 자연친화적 장묘형태다. 스위스·독일·영국 등에서 수림장은 대중적인 장묘문화다. 이 방법이 한국에서 관심을 끌게 된 계기는 지난해 가을 임학계의 거목인 김장수 고려대 교수의 장례식이다. 김 교수가 “나의 유골을 나무 밑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영천 은해사가 사찰 주변 소나무 군락지 5000평을 수림장으로 개방했다. 주지 법타스님이 김 교수의 얘기를 듣고 불교의 윤회설과 접목시킬 수 있는 수림장을 개장한 것. 지난 1월 개장 이후 18구의 유골이 나무 밑에 안치됐다. 수림장된 나무에는 고인의 이름과 출생·사망일자 등을 적은 명패를 가지에 매어둔다. 비석 등 일체의 조형물은 설치할 수 없다. 은해사 윤광스님은 “장례문화를 바꾸는 의미가 있고 무엇보다 산림관리까지 체계적으로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면서 “하루에 3~4건의 문의가 오는 등 비교적 호응이 좋다”고 말했다. 법타스님을 돕는 전진우씨도 “국내에 모델이 없어 시작하기까지 많은 고생을 했다”면서 “이른 시일내 대중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물론 수림장이 김장수 교수 장례식 때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 이전부터 문중이나 개인적으로 선산 등에 수림장 형태의 장례를 치른 사례가 적지 않다.
경북 상주시 내서면 북장리에 있는 진주 강씨 집의공파의 가족묘원도 수림장이다. 200여평의 부지엔 모두 49명의 골분이 묻혀 있다. 앞으로도 70여명이 더 안치될 수 있다. 이 골분은 인근 야산과 제주도 등에 흩어져 있던 유골을 화장처리한 것. 그 골분을 땅에 묻고 그 위에 70×80㎝ 정도의 좌대와 검은 표석을 하고 고인의 이름을 새겼다.



묘 터는 항렬에 따라 28칸의 자리를 잡고 부부는 합장했다. 제단도 하나다. 강신해씨가 앞장서 이 가족공원을 조성했다. 강씨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묘지로 덮인 수많은 산을 비행기에서 본 뒤다. 강씨는 “금수강산이 묘지산으로 변해가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면서 “앞으로 공동묘지나 무연고 묘지 재개발 때 상당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북 영천시 고경면 오룡리에 있는 ‘인덕원’도 2002년 경주 최씨 진사공파가 세운 산골 방식의 가족묘원이다. 500여 평의 부지에 마련된 인덕원에선 흙과 유골을 1대1 비율로 섞어 잔디 밑에 묻고 아무런 표시도 하지 않는다. 고인의 표식은 입구에 50여명의 이름을 새겨 놓은 돌(名單石) 위에 ‘몇년 졸(卒)’이라는 글자를 추가로 새겨 넣는 것으로 끝이다. 문중회장인 최봉진씨는 “우리 매장 문화는 죽은 뒤에 효도한다는 허례허식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한다”며 “대대로 골분을 공원 내에 모실 수 있고 장례 치르는 일도 아주 간편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와 같은 장묘법이 알려지면서 일각에선 수림장을 빙자한 상업주의의 침투를 우려한다. 서울보건대학 이필도 교수는 “벌써 몰지각한 산림업자나 산림조합이 나무장사를 할 궁리를 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장례시설에 상업주의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비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도심 속의 납골당 서울 시청앞 덕수궁과 영국대사관 사이에 있는 성공회 서울교구주교좌성당에 납골당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본관 지하에 500여기의 유골을 모신 납골당이 있다. 정길섭 신부는 “당초 원스톱 장례시스템를 갖추려 했으나 신자들의 정서를 고려해서 1997년 성당을 증축하면서 납골당만 만들었다”면서 “4대문 안의 유일한 납골 시설”이라고 말했다.

이곳의 이름은 ‘안식의 집’. 25평 규모의 지하 납골당에 들어서자 아늑할 뿐 혐오시설이라는 느낌은 전혀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방에는 다른 성당 부속실과 달린 어떤 표식도 없었다. 정길섭 신부는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전제하면서도 “이름표를 붙이면 그 순간부터 혐오시설이 된다”고 말했다. 이준 신자회장도 “서울교구주교좌성당에 어린이 참관객들이 오면 꼭 납골시설을 둘러보게 한다”면서 “이런 시설을 견학함으로써 주검은 두려운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지 않게 한다”고 말했다.

유골을 모시는 납골장을 봉합하지 않고 보관하는 게 이곳의 특징. 한 젊은 망자의 납골장 속에는 향초, 조화, 작은 액자, 고인의 유품 등 추모의 뜻이 담긴 소품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안식의 집’에 안내한 이승철 성당사무장은 “다른 납골장에선 납골장의 액자만 보는 데 유골함이라도 만져보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의정부 신곡2동 성당도 2002년에 5000기를 안치할 수 있는 납골당 시설을 완비했다. 현재 300기 유골이 보관되어 있다. 신곡2동 성당이 있는 곳은 의정부 제2청사, 상가, 주택가 등이 혼재하는 지역. 이 성당 납골시설에 대해 자문을 했다는 박복순 사무총장은 “혐오시설로 치부되는 납골시설이 들어선 것은 지역주민들의 이해가 따랐기 때문”이라면서 주민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물놀이를 하던 한 어린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몸을 던져 그 아이를 구하고는 힘이 빠져 끝내 목숨은 잃은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이 납골당 시설 증축의 간접적인 계기가 됐다”는 것이었다. 이 성당 관계자는 “그런 일은 잘 모르겠다”면서도 “아직 납골당 시설을 못마땅해 하는 지역주민과 마찰을 없애기 위해 성당 안으로 영구차를 못들어오게 하는 등 여러 가지 논의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흑석동 성당, 절두산 성당 등도 납골시설을 갖추었다.

서울 태릉성당은 지역주민의 반대로 계획하고 있던 납골당을 건립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3200기 정도 유골을 모실 수 있는 납골시설 허가를 받기 위해 노원구청에 신고를 했으나 노원구청측이 주민반대를 이유로 사업신고서를 받아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www.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10546&code=115#csidx3fbac8186d6e79ba6fe88d7bd49ae5c

“집을 떠나서야 나를 사랑하게 됐다” K-딸들의 이야기 - 민중의소리



“집을 떠나서야 나를 사랑하게 됐다” K-딸들의 이야기 - 민중의소리

“집을 떠나서야 나를 사랑하게 됐다” K-딸들의 이야기


강석영 기자 getout@vop.co.kr
발행 202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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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불을 지를까?’ 조제 씨는 집이 싫었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인 그는 집을 안식처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가족들은 가해자이자 방관자였다. 30여 년 만에 집을 떠난 조제 씨에게 사람들은 말했다. ‘그래도 가족인데…’ 폭력을 경험한 그의 존재는 지워졌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족을 우선하는 가족주의 사회에서,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정상 가족’만이 존재했다.

구타하고, 차별하는 ‘그런 가족은 필요 없다’(2018년 한국여성의전화 캠페인)라며 집을 떠난 딸들이 있다. 한국여성의전화는 최근 ‘딸이 집을 떠나기까지’ 캠페인을 통해 가장 안전해야 할 집에서 딸들이 어떤 폭력을 경험했는지 드러냈다. 아내폭력, 아동학대보다 비교적 덜 알려진 성인 딸들의 피해에 주목하자는 취지였다. <민중의소리>가 만난 다섯 딸은 “집을 떠나서야 나를 사랑하게 됐다”라며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비판했다.


내겐 가해자였는데, 엄마에겐 아들이었다

어린 시절 조제 씨는 마루에 발소리가 들리면 잠에서 깼다. 누군가 자신을 해칠까 봐 무서웠다. 문을 잠그고 문고리를 꼭 잡았다. 발소리가 멀어지기만 빌었다. 작은 오빠는 9살인 조제 씨가 14살이 될 때까지 성폭력을 저질렀다. “끔찍한 괴물이었어요” 아무도 그를 보호하지 않았다. 아빠는 알코올중독자였다. 엄마는 생계부양자였고 우울증 환자였다. 큰 오빠는 자기 일로 바빴다. 사랑과 돌봄은 없었다. 아프면 혼났고, 울어도 혼났다. 폭력, 방치, 학대만 있었다. “가족이라는 말 자체가 싫었어요”

엄마에 대한 죄책감이 조제 씨를 붙잡았다. ‘나 때문에 이혼 못 한 거야. 늦둥이로 나를 안 낳았다면…’ 엄마가 불쌍했다. 26살이 돼서야 엄마에게 성폭력 피해를 말한 이유다. ‘오빤데 어떡해’. 마구 때려줄 줄 알았는데, 엄마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조제 씨에게 가해자였는데, 엄마에겐 아들이었다. “그때 엄마를 엄마로 생각하지 않게 됐어요” 엄마가 당해봤냐고 악을 썼다. 그날 엄마는 처음 털어놨다. 자신도 친족 성폭력 피해자라고. “엄말 이해는 했지만, 용서하고 사랑할 순 없었어요”

‘나라도 살자’는 마음에 조제 씨는 집을 나왔다. 그는 엄마를 조현병 걸린 작은 오빠와 둘이 살게 할 수 없어 30대까지 떠나지 못했다. 조제 씨는 그날 밤이 생생하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작은방에 이불도 없었어요. 그런데 너무 조용하고 아무도 저를 괴롭히지 않는 게 생소하면서 행복했어요. 내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족들이 눈에 안 보이니 살 것 같았다. 항상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숨만 쉬어도 나가는 월세 걱정에 외로움까지 더해졌다. “사람들은 돈 없고 외로우면 가족에게 간다는데, 저는 절벽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었어요”

혼란을 뚫고 나가자!

그래도 ‘집 밖’은 조제 씨가 숨 쉬고 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는 동화와 소설, 수필을 쓰고 있다.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시작한 글쓰기였는데, 위로받았다는 댓글이 이어졌다. “제 이야기를 하는 게 힘들지 않아요. 제 잘못도 아니고 제가 부끄러운 일도 아니잖아요. 제 아픔을 형상화해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에게 힘이 되고 싶어요” 조제 씨는 특히 아이들을 돕기 위해 동화를 선택했다. “우리 집만 이런가 해서 어린 시절이 너무 외로웠어요” 그는 자신이 쓴 <엄마아빠재판소>를 읽은 아이들이 작가를 꿈꾼다며 메시지를 보낼 때 기쁘다고 했다.

‘가족한테 어떻게 그래?’ 조제 씨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가족을 욕하면 자기 얼굴에 침 뱉기라고 하잖아요. 그거 아니거든요. 가족이랑 나랑은 별개예요. 가족에 대해 욕할 만큼 해야 좀 나아져요” 그의 발목을 붙들던 엄마에 대한 죄책감과 의무감은 ‘세뇌’ 때문이라고 조제 씨는 말했다. “부모님의 은혜, 효도란 말은 폐기돼야 해요. 저는 낳음 당했어요” 조제 씨는 집을 떠날 준비를 하는 딸들에게 밖에서 어떻게 살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겁 때문에 나오는 걸 망설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사랑’이 아니다

김민희(가명·28) 씨 가족은 완벽했다. 수도권 자가 주택과 차 한 대 이상 보유한 중산층 4인 가족, 조건만 보면 말이다. 어린 시절 김 씨는 하루도 안 맞는 날이 없었다. 완벽주의자였던 엄마의 요구는 과도했다. 기대만큼 따라오지 않는 김 씨를 무차별적으로 때렸다. 김 씨는 엄마와 밥만 먹으면 체했다. 언제 날아들지 모를 폭언과 폭행에 늘 긴장 상태였다. 그에게 집은 안식처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환경이란 생각이 강했어요” 장기간 폭력에 노출된 김 씨는 깊은 우울증에 빠져 완전히 무기력해졌다.

우울과 불안, 망할 놈의 이중주

엄마는 ‘사랑’이라고 했다. 자신을 돌본다는 생각으로 김 씨를 키웠다고 했다. “엄마는 저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한 것 같아요. 육아 중 빠지기 쉬운 오류라고 하더라고요” 전업주부로 김 씨와 동생만 바라보며 살았던 엄마다. 아빠만 보고 상경했는데, 아빠는 잦은 출장으로 집에 없는 시간이 많았다. “아빠는 방관자로서 아무것도 안 했죠. 엄마는 의지할 사람 없이 저희만 키우다 보니 더 뒤틀렸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 씨가 자기객관화를 한 건 독립 이후다. “맥락에 대한 이해와 별개로 폭력 자체는 잘못이에요”

20살이 되길 간절히 기다렸다. 아무도 김 씨의 권리를 대행할 수 없는 나이였다. 취업해서 독립할 때까지 거리 두기를 해왔다. ‘이 사람들은 날 낳아줬지만 내 가족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 가족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라고. 대학 생활 내내 온갖 핑계로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주변에 비슷한 ‘딸’들이 많았다. “가정폭력은 슬픈 이야기지만, 한국 사회에서 너무 흔한 비극이었던 거죠.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독립을 꿈꿀 수 있었어요. 전 운 좋게 좋은 공동체를 만났지만, 그렇지 않은 딸들을 더 많이 봤어요”

직업인으로 홀로 살던 여자 선생님은 김 씨의 롤 모델이었다. 청소년기 그는 결혼해야만 집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자 혼자 사는 건 상상도 못 했다. “선생님을 보고 ‘여자도 독립할 수 있구나, 무서운 일이 아니구나’ 알게 됐어요” 아빠-엄마-자녀의 화목한 가족만 강요하는 사회는 다른 형태의 가족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정상에 부합하기 위해 가족 내 얼마나 폭력이 있는지 사회는 알려고 하지 않아요. 다양한 가정폭력이 개인사라는 문제로 덮여 사라지고 있어요”

오늘 하루의 잠깐

혼자 살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는 김 씨다. 20년 동안 엄마의 감정과 취향에 맞춰 살았다. 자신의 취향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던 어린이였지만, 한편으로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엄마의 말에 수긍했다. 살이 쪘네, 가슴이 쳐졌네, 끊임없는 외모 지적에도 시달렸다. “혼자 지내며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어떤 걸 하면 즐거운지, 화가 나는지, 슬픈지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어요. 이젠 거울을 보며 ‘좀 귀여운데? 괜찮은데?’ 이런 생각도 들어요 하하”

배고프고 추워도 집만 아니라면

박서린(16) 씨는 ‘집 밖’ 생활 7개월 차다. 새아빠의 폭력을 피해 지난 10월 집을 나왔다. 경찰에 신고했을 때 격리된 건 박 씨였다. 새아빠는 상담받고 집에 돌아갔다. 일해야 하는 가장이라는 이유였다. “나가야 할 사람은 아빠잖아요. 자존심 상하고 기분 나빠서 더는 신고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픈 엄마를 보며 참아도 봤다. 엄마는 아이를 5명 낳아 몸이 안 좋다. 새아빠의 폭력으로 마음에도 병이 왔다. 엄마도 주물러줘야 하고 4살짜리 막내도 돌봐야 하는데, 무작정 나가라는 새아빠의 엄포에 떠밀려 나왔다.

거리는 청소년들에게 더욱 혹독했다. 돈이 가장 문제였다. 돈 벌 방법이 없었다. 아르바이트는 주로 성인 대상이었다. 집 나왔냐며 색안경부터 끼기도 했다. 청소년지원기관보다 성매매 알선자의 손길이 더 빨랐다. 박 씨는 단칼에 거절했지만, 가끔 후회도 됐다. 당장 잘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찜질방, PC방은 밤 10시 이후 청소년 출입 금지다. 거리에서 잔 적도 많다. 박 씨는 일주일간 잠을 안 자기도 했다. ‘죽데리아’(죽친다+24시 롯데리아)에 있거나 친구들 따라 놀러 다녔다. 신고를 주저하는 거리 청소년들에게 폭력과 강간의 위험은 잦았다.

추운 도시의 밤거리를 헤매다

박 씨의 몸은 두 달 만에 망가졌다. 배부르게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컵라면과 삼각김밥 살 돈도 없을 땐 시청에서 물배를 채웠다. 그런데도 박 씨는 살이 20kg 넘게 쪘다. 먹을 게 생기면 새벽이라도 일단 먹었다. 생활 패턴이 바뀌면서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불렀다. 잠을 자도 계속 잠이 왔다. 생리가 불규칙해졌다.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다. 하지만 박 씨는 돌아가지 않았다. “새아빠가 눈앞에서만 사라져도 마음이 놓여요. 밖이 집보다 더 힘들었다면 돌아갔을 거예요”

마음의 상처도 깊어졌다. 아는 사람들의 집을 떠돌며 박 씨는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잘 지내다가도 마음이 바뀌면 나가라고 했다. 서울 방방곡곡을 뱅글뱅글 돌았다. 거리 청소년을 위한 쉼터에선 적응이 쉽지 않았다. 통제도 심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한방에서 지내는 게 불편했다. “처음 본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고, 경계 대상이에요. 섣불리 다가갔다가 이용만 당하고 상처받아요” 거리에서 배운 사회였다. 박 씨는 월세 내고, 눈치 보고, 밥도 해야 했지만, 아는 사람 집을 선택했다.

“제가 행복하면 그게 가족이고 집이죠” 조부모 가정, 한 부모 가정, 재혼 가정 등 다양한 가족을 경험한 박 씨는 가족의 의미를 일찍 깨달았다. 그의 목표는 검정고시 합격이다. “저를 아껴주는 사람들을 위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물질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게 적으니 마음으로라도 보여줄 거예요” 박 씨는 거리 청소년에게 낙인을 찍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배경은 모르고 집 나온 행동만 보고 안 좋게 생각해요. 집이 힘들어서 나왔는데 사회에 나오니 낙인이 더 큰 장벽으로 느껴져요”

생동감

가정폭력과 빈곤 그리고 성 노동

왹비(활동명·24) 씨는 성 노동자다. 가정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몰래 돈을 모아야 했다. 가해자는 돈으로 왹비 씨를 협박하고 통제하려 했다. 통장으로 월급이 들어오는 아르바이트는 불가능했다. 기초 생활수급에 반영돼 가해자에게 들키기 때문이다. 자금원이 불분명한 성 노동이 적합하다고 왹비 씨는 생각했다. 룸메이트에겐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잘 안 꾸미던 그가 화장하자 애인이 생겼냐고 물었다. 왹비 씨는 화장품과 홀복을 챙겨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일할 준비를 했다.

가해자는 엄마였다. 왹비 씨는 할머니와 엄마랑 셋이 살았다. 욕설과 폭력은 일상이었다. 엄마는 냄비를 집어던졌다. 칼을 들고 그의 손을 자르겠다고 협박했다. 월세는 밀렸는데 돈 나올 구석이 없던 어느 날 엄마는 같이 죽자며 동반자살을 권유했다. “엄마가 악마라서 그런 건 아니에요” 생계부양자이자 돌봄 노동자였던 엄마는 왹비 씨와 치매에 시각장애를 앓는 할머니를 돌봤다. 엄마는 가정폭력 피해자기도 했다. “스무 살이 되자 혼자 생활한 엄마에게 폭력은 습관처럼 베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가해를 정당화할 순 없죠”

상처받은 마음들

첫 번째 탈출은 20살의 고시원이었다.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직업을 가지면 탈 가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4년 동안 그가 입시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다. “헛된 희망이었죠” 그는 우울증과 함께 고시원을 나왔다. 두 번째 탈출은 23살의 고시원이었다. 엄마가 폭력을 저지르던 날 충동적으로 나왔다. ‘이런 곳에선 못 산다’라는 친구의 손에 이끌려 고시원에서 벗어났다. 친구의 집은 깨끗이 정돈돼 있었다. 소리 지르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평생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걸 저 친구는 처음부터 얻었구나’, 슬픈 평화였다.

독립한 왹비 씨는 전입신고를 하지 않았다. 엄마가 찾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한 세대일 경우 주민등록표를 열람하면 언제든 새 주소를 알 수 있다. 안전한 공간을 위해 왹비 씨는 세입자 권리를 포기해야 했다. 현재 그는 자신을 존중하고 아껴주는 애인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안정감이다. 모든 문제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자책하는 일도 줄었다. 자기혐오를 줄여 정신적 건강을 되찾았다. “탈 가정 이후 저란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됐어요. 해낼 수 있다는 확신도 생겼죠”

왹비 씨는 폴리아모리(다자 간 사랑) 공동체를 꿈꾼다. “다양한 주거공동체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살고 싶어요. 정상 가족에서 벗어나도 서로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잖아요” 퀴어인 그는 탈 가정을 ‘도전’이라고 말했다. “소수자들에게 집은 가장 위험한 공간이에요. 소수자들이 삶의 주체성을 되찾는 도전으로 자립을 시도하길 바라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시도 자체가 용기를 주고 많은 변화를 가져올 거예요. 너무 이것저것 재지 말고 일단 지르면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어요”

회복

정상성에서 벗어나자 밀려온 자유와 해방감

은영(활동명·28) 씨는 동물권 운동을 통해 ‘정상 가족’에서 해방됐다. 남존여비는 은영 씨 집의 질서였다. “폭력적인 부계는 저란 존재 자체를 싫어했어요” 아빠는 은영 씨를 보면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없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했다. 살금살금 걸었고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한숨 소리가 더 커지면 물소리가 날까 봐 씻지 못하고 잠들어야 했다. 친구 집에서 씻고 집에 들어가는 날이 늘었다. 그는 먹고, 씻고, 자는 일에도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 남동생은 방문을 활짝 열고 큰 소리로 욕설하며 게임하느라 바빴다.

집 밖에서 은영 씨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았다. “부계의 폭언으로 절 규정할 수 없었어요. 제 존재는 집이 아니라 사회에서 구성된다고 생각했죠” 집 밖으로 눈을 돌리니 ‘집은 가장 안전한 공간’이라는 사회적 정의가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행복한 척 역할놀이라도 하라는 명령이잖아요. 분명히 존재하는 고통을 지워버렸어요” 그는 자신이 겪은 폭력과 사회에서 발생하는 폭력이 매우 맞닿아있다는 걸 느꼈다. “근본적으로 폭력적인 명령이 있는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마음속의 수많은 나

은영 씨는 물리적인 탈출에 열을 올렸다. 집에서 쏟는 에너지가 소모적으로 느껴졌다. 졸업, 취업 준비에 매달렸다. 하지만 ‘나는 왜 집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계속됐다. 은영 씨는 동물권 활동의 한 장면에서 답을 찾았다. 집채만 한 도살장 트럭에 돼지들이 비참한 모습으로 갇혀 있었고, 한 활동가는 이를 막고 서있었다. “분명히 고통스러워하는 돼지가 있는데,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겨진다는 점에서 저와 비슷하다는 강한 연결감을 느꼈어요. 트럭을 가로막은 활동가는 사회의 정상성에 온몸으로 맞선 거죠”

그를 옥죄고 있었던 건 정상성이었다. “정상 가족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정상성을 쫓고 있었던 거죠. 사회가 요구하는 자격을 갖춰서 독립하려고만 했어요. 사회의 기본 토대라는 가족에서 박탈당한 제가 사회의 정상성에 맞춰 산다면, 집에서 나온다고 해도 폭력적인 구조에 가담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어요” 은영 씨는 폭력적인 구조에서 버티기보다 그 구조가 틀렸다고 말하는 운동에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그는 단숨에 집을 떠났다. 독립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박탈감은 과장된 것이었다. “권리 운동으로 느낀 자유와 해방감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어요” 자신과 비슷한 ‘딸’들에게 은영 씨는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전했다. “커다란 사회에서 내팽개쳐져 외롭다는 생각이 들 텐데, 가진 게 없어도 다른 삶을 상상해볼 수 있어요. 정상성 앞에 두려워 마세요. 아무것도 없이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사회 전체를 보면 작은 부분이겠지만, 티끌 같은 부분이 지난 삶을 단숨에 소생시키는 힘이 될 수 있어요”

가슴속에 휘몰아치는 나의 에너지

“사회 중심을 가족에서 개인으로 바꾸자”

집을 떠난 딸들은 경제적인 문제가 가장 어렵다며 지원정책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정샘 한국여성의전화 기획조직국장은 “가정폭력 피해자들은 범죄 때문에 급하게 집을 나와서 스스로 경제적 기반을 꾸릴 여유가 없다. 생애 주기에 따라 쉼터 입소도 쉽지 않다. 가해자에게 노출될 위험이 있어 피해자들의 경제활동,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사용 등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을 경험한 성인 자녀들의 집담회에서도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컸다”라고 말했다.

지원정책 대다수가 가족 단위다. 최근 전 국민 대상이라던 긴급재난지원금은 세대주에게 지급됐다. 모든 가족이 정상 가족이라는 전제 아래 시행된 정책이다. 가족에서 이탈한 이들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가정폭력 피해자 등을 대상으로 이의신청을 받기도 했으나, 세대주가 속한 주민센터로 돌아가야 하는 등 어려움은 여전했다. 정샘 국장은 “신체적·정서적 폭력이 있는 가정에서 경제적 폭력 비율도 높다. 집을 나오지 않은 딸이라도 가정폭력 가해자에게 지원금을 분배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지적했다.

가족 중심 지원정책이 딸들을 가족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든다고 정샘 국장은 비판했다. 그는 “청년 지원정책에서도 부모 재산이 함께 고려된다. 청년들은 실제로 가진 소득이나 누릴 재산과 별개로 지원을 못 받는 경우가 많다”라며 “현재 구조는 폭력을 감내하는 게 더 이득인 상황이다. 사회의 중심 단위를 가족에서 개인으로 바꿔야 한다. 가정폭력처벌법에서 가족 구성원의 인권보다 가정 유지가 우선되는 목적 조항부터 개정돼야 한다. 이것이 가족 단위 정책에 대한 기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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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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