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자서전>
내 인생책 중 한 권인 그리스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에 이런 내용이 있다.
아테네에서 대학을 마친 카잔차키스는 친구와 함께 몇 달 동안 그리스의 수도원들을 순례한다. 독신 서약을 한 수도사들이 파란 바다까지 뻗어 나간 높은 산의 수도원과 동굴 속에서 일생 동안 수도 생활을 하고 있다. 행복한 수도사도 있고 아직 확신을 갖지 못한 수도사도 있다.
순례의 마지막에 두 사람은 아토스산으로 발길을 향한다. 에게해에 면한 아토스산은 10세기 경부터 시작된 동방정교 수도원들이 흩어져 있는 곳으로, 현재도 수천 명의 수도사들이 철저한 금욕 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
물질적인 세계에 대한 애착과 영혼이 기억하는 더 근원적인 세계에 대한 갈구 사이에서 갈등을 겪던 두 청년은 수도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해답을 찾고 싶었다. 잎사귀 넓은 월계수 숲을 올라 오래된 수도원에 도착한 카잔차키스와 친구는 수도사들이 잠든 뒤에도 손님방에서 매일 밤늦게까지 얘기를 나눴다. 대화의 주제는 인간이 겪는 괴로움과 신에 도달하는 여러 길들, 그리고 구원이란 정말로 존재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나아가 두 사람은 종교를 거치면서 추상적이고 상투적인 존재가 된 신이라는 이름에 좀 더 신선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날 밤, 자정 넘도록 두 사람이 논쟁에 가까운 토론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어두운 구석에서 감정이 격해져 숨차 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여기 앉아서 그대들이 하는 얘기를 영원히 들었으면 좋겠소. 난 다른 천국은 원하지 않소."
"여기 앉아서 그대들이 하는 얘기를 영원히 들었으면 좋겠소. 난 다른 천국은 원하지 않소."
그 수도사는 어두컴컴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두 사람의 얘기를 며칠 밤 내내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의 대화를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얘기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신'과 '사랑'이라는 말에, 그리고 두 사람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열정과 진지한 어조에 감동했다. 수도사 자신도 젊은 시절에는 신과 진리에 대한 추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열정이 식고 일상적인 수도 생활에 젖어 살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고 가슴 저린 통증을 느꼈던 것이다.
그 수도사는 두 젊은이와 친구가 되었다. 그날 밤 이후로 그는 항상 자리를 같이 하면서, 말은 하지 않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열심히 귀 기울여 듣기만 했다. 수도사들끼리 나누는 판에 박힌 얘기가 아닌, 신과 진리에 정면으로 맞서는 격정적인 대화에 굶주려 있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거대한 바다로 흘러가던, 지금은 말라 버린 강을 되살리고자 했다. 아니면 힘찬 날개로 자신을 다시 들어올려 아토스산 정상으로 향하고 싶었다.
하필이면 대학 졸업식 전날 『영혼의 자서전』을 읽고 너무 감동한 나머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은 것이 실수였다. 밤을 꼬박 새워 읽고 아침에 깜박 잠들었다가 일어나 세수도 못 한 채 학교로 올라가니 졸업식은 이미 막을 내린 후였다. 부러진 꽃다발들과 신문지 조각들만 어질러져 있었다. 그나마 학과 사무실로 가니 졸업생들이 입었다가 벗어 놓고 간 졸업 가운과 사각모자들이 쌓여 있어서 그중 하나를 걸치고(모자가 작아서 머리에 맞지 않았다) 문리대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는데 찍어 준 사람과 사진의 행방은 지금 알 길이 없다.
하루라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졸업 가운을 벗음과 동시에 학생의 굴레에서 탈피했고, 어느새 내 영혼의 스승으로 자리 잡은 카잔차키스를 본받아 생각이 같은 친구와 함께 전국 사찰 순례 여행을 떠났다. 아직 겨울이라서 강원도는 발목까지 눈 속에 푹푹 빠졌다. 눈밭에 어지러이 찍힌 새 발자국과 노루 발자국들 때문에도 우리가 걷는 방향이 맞는지 분간이 안 갔다. 카잔차키스는 '스스로 야수인 줄 모르는 야수, 그것이 젊음'이라고 했다. 그래서 도중에 들른 절들에서 세 번이나 문전박대를 당하고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고 오히려 절 입구에서 신나게 욕을 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의 번뇌가 사라졌다). 당시 우리의 모습은 추위로 얼굴이 빨갛고 긴 머리카락에 고드름이 언 야수의 행색 그대로였으니 수상쩍게 보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충청도의 큰 절에서는 출가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승려가 자신의 방에 우리를 재워 주었다. 오랜만에 밥다운 밥을 눈치껏 퍼먹고, 우리는 기분이 좋아져서 세 사람의 무릎이 맞닿을 정도의 손바닥만 한 방에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깨달음이 무엇이며, 그것에 이르는 길에 대해, 그리고 그 무렵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한 인도의 영적 스승들에 관한 얘기가 한창 고조될 무렵, 얇게 칸막이한 벽을 타고 옆방에서 고함 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떠드는 소리에 잠을 방해받아 몹시 화가 난 노승이 선문답인지 욕설인지 모를 일갈로 우리의 대화를 침묵하게 만들었다. 젊은 수좌나 우리는 그 험악한 목소리에 대항할 아무 힘이 없어 차갑게 식은 방바닥에 몸을 눕힐 수밖에 없었다.
전라도의 고찰에서는 무조건 출가하라고 우리를 종용했다. 사실 절들마다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얼굴이 여지없는 승려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차피 승려가 될 운명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절에 들어오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내가 운명을 어찌 알았겠는가? 어느 쪽이 옳은 길인지 모르는데 어떻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위투성이 길을 오르느라 발목을 삐끗해 바로 앞의 길조차 절뚝거리며 걷는데.
나에게 선동되어 충동적으로 따라나선 친구는 차츰 우리가 하고 있는 여행의 과정과 의미에 대해 회의를 느꼈다. 그럴 때마다 친구보다 몇 걸음 앞장서서 걷던 나는 저 눈부시게 파란 소나무를 보라는 둥, 떡갈나무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직박구리새도 전생에 수도승이었다는 둥 계속 세뇌를 시켰지만 나의 상상력은 아직 한 인간을 완전히 설득시키기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우리는 뒤엉킨 실타래를 풀려다가 그것이 토막 난 실들의 뭉치임을 안 사람처럼 허탈하게 순례를 마감했다. 그로부터 불과 2년 후 그 친구는 정말로 출가를 해서 내 가슴을 찡하게 했다. 그리고 나는 인도로 향했다. 손이 닿지 않는 것을 잡으라고 한 카잔차키스의 말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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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얼마나 오랜 세월이 지났는가? 나는 그때의 열정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가? 해답을 얻었다고 자만하지 않고, 가슴은 의문으로 넘치며, 손이 닿지 않는 것을 잡으려고 여전히 까치발을 하는가? 미남이고 순진하기만 했던 그 친구는 삭발한 머리로 어느 산모퉁이를 돌고 있는가? 실패한 곳으로 돌아가고 성공한 곳은 떠나라는 카잔차키스의 말을 새기며. 가장 많은 바다와 가장 많은 대륙을 본 사람은 행복하므로.
거룩한 산을 40일 동안 여행한 카잔차키스와 친구는 순례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기적이 그들을 맞이한다. 한겨울이었는데도 어느 작은 과수원에서 아몬드나무가 꽃을 피운 것이다!
친구의 팔을 잡고 카잔차키스는 말한다.
"앙겔로스, 순례를 하는 동안 우리 마음은 줄곧 수많은 의문으로 괴로웠어. 그런데 이제 답을 얻었어."
친구의 팔을 잡고 카잔차키스는 말한다.
"앙겔로스, 순례를 하는 동안 우리 마음은 줄곧 수많은 의문으로 괴로웠어. 그런데 이제 답을 얻었어."
art credit_Bev Doolitt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