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온 보수, 금성에서 온 진보(펌)|자료실
남곡|조회 349|추천 0|2015.03.08. 09:41http://cafe.daum.net/nshumanschool/SJEp/41
[인터뷰] 화성에서 온 보수, 금성에서 온 진보
전병근 기자
입력 : 2015.03.07 08:00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보수와 진보는 저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격렬히 충돌한다. 어떤 면에서는 어쩔 수 없다. 인류가 그렇게 진화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우리 모두가 독선적인 위선자라는 사실에 눈을 뜨는 것이다. 그런 자각 위에서 서로 대화를 통해 진실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갈 수 있다.”
미남의 이 중년 학자는 답변도 깎은 듯 매끈했다. 우수 강의 교수로 대학에서 상을 받았다든가, TED 강연 동영상이 수백만 조회를 기록했다는 전언이 틀림없는 사실 같았다. 미국에서 각광받는 진화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52) 뉴욕대 스턴 경영대학원 교수. 하지만 국내 독자들에게는 얼마간 설명이 필요한 학자다.
우리 귀엔 훨씬 더 유명한 마이클 샌델 교수에서부터 소개를 시작하면 어떨까. 샌델이 2009년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어, 2012년 후속작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로 시선을 사로잡을 무렵이었다. 미국에서는 또 다른 교수가 도덕에 관한 화제작으로 청중을 끌어모으고 있었으니 그가 하이트다. (맥주 브랜드 ‘Hite’가 아닌 ‘Haidt’라고 쓴다.)
사람들은 왜 저마다 내가 옳다고 우기나? 보수와 진보는 왜 맨날 저렇게 싸우나? 보수/진보 성향은 날 때부터 결정이 되나? 왜 어느 쪽이 됐건 뭉칠수록 비이성적이 되나?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 정당에 투표하는 건 또 뭔가? 종교는 망상일 뿐인가? ….
누구나 한번쯤은 품어 봤을 법한 의문들이 그의 책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웅진지식하우스 번역출간)’에는 보란 듯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런 불편한 질문들에 대해 저자는 조금도 피해가지 않고 조목조목 답을 댄다.
[인터뷰] 화성에서 온 보수, 금성에서 온 진보 그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책이 나오기도 훨씬 전이었다. 2008년. ‘진보와 보수의 도덕적 뿌리’라는 제목의 18분짜리 TED 강연이 입소문을 타더니 유튜브에 오르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조회수 202만)
이후 ‘종교, 진화와 자기 초월의 행복’(95만)에 이어 ‘공동의 위협이 어떻게 공통의 정치적 합의를 만들어내는가’(53만)까지 후속 강연도 연달아 화제였다. 세 동영상의 조회 수는 합쳐서 350만 회가 넘는다.
2012년 미국 국제시사잡지 ‘포린 폴리시’가 그를 ‘세계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꼽은 데 이어, 영국 정치평론지 ‘프로스펙트’도 2013년 ‘세계의 사상가’ 반열에 포함시켰다.
올해 안식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 그를 따로 만나 궁금한 것들을 물어봤다. 그는 아내가 한국계 미국인이다. 아빠와 엄마를 섞어 닮은 여덟 살 아들, 다섯 살 딸과 함께 가족 동반 여행을 왔다고 했다.
조너선 하이트와 그의 가족들 ▲ 조너선 하이트와 그의 가족들-한국은 처음인가?
그렇다. 안식년을 맞아 3개월 동안 동아시아 쪽을 돌아보는 여정 중이다. 미국 대학은 6~7년마다 1년씩 강의 부담 없이 큰 주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다. 이번 기회에 한국과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나라들이 어떤지 보고 싶었다. 그 전에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인도는 가봤는데 동아시아는 처음이다.
-한국어판 서문에 아내가 한국계라고 소개했던데.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이다. 장인 내외가 1950-6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왔다고 들었다. 장인은 부친을 일찍 잃었지만 자립심이 굉장히 강했다고 한다. 혼자서 영어를 배워 미군 부대에서 통역으로 일했고, 그때 네트워크를 통해 미국 대학에 장학생으로 유학 왔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이었다. 버지니아주의 작은 기독교 대학에 들어갔는데, 나중에 경제학 박사 학위까지 따서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교수가 됐다.
-국내에 번역된 책의 원제목이 ‘The Righteous Mind’다. 무슨 뜻인가?
도덕(성)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유독 내 관심을 끈 게 있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언제나 뭔가를 내세운다는 사실이다. 늘 남을 판단한다. 어떤 기대를 하고 거기에 부응하는지 여부를 평가한다. 또한 남이 나를 판단한다는 사실도 의식한다. 그럴 때면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판단(단죄)한다. 그처럼 도덕적으로 옳은 체하고 비판과 판단도 잘하는 성향이 ‘옳다는 마음’이다.
이것은 좋지 못한 심성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함께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기초 벽돌이 되기도 한다. 인간만의 핵심적인 특성이다. 지구상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보여주는 미스터리 중 하나는 혈연 관계가 아닌 타인과의 협력에 아주 뛰어나다는 사실이다. 지금 당신과 나만 해도 처음 만나지만 서로 믿고 협력할 수 있다. 그런 점들을 다 제목에 담고 싶었다.
-‘righteous(옳다는)’라는 단어는 ‘right(옳은)’와는 어떻게 다른가?
‘옳고 그름(right or wrong)’은 인간의 언어에서 아주 근본적인 토대가 되는 범주다. 그에 비해 ‘옳다는(righteous)’은 그보다 더 미묘한 개념이다. 한국어로는 어떻게 번역되는지 모르겠지만, 영어에서는 ‘self-righteous(자기가 옳다고 믿는·독선적인)’의 뉘앙스를 갖고 있다.
-그게 왜 문제가 되나?
‘옳다는 마음’은 혈연이 아닌 타인들과의 협력을 가능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집단 내 갈등을 낳기도 한다. 서로 옳다는 도덕적 성향이 상호 충돌을 야기한다. 그래서 에티켓 책자 같은 데서도 가급적 도덕과 정치, 종교에 관한 대화는 피하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치나 종교는 모두 우리 심성 근저에 자리잡은 ‘옳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그런 도덕적 심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한다면 서로 협력하고 건설적으로 결집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도덕과 정치, 종교적 대립에서 일어나는 편 가르기와 과열, 분노를 좀 가라앉히고, 대신 그 자리에 경외심, 놀라움, 호기심으로 채우는 것이 내 목표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샌델 교수는 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로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당신의 접근법은 샌델 교수와는 어떻게 다른가?
시장의 논리가 삶의 다른 영역까지 점점 잠식해 들어가면서 우리의 기본적인 도덕적 직관도 도전받고 있다. 샌델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도덕적으로 이상하거나 추한 상황을 따져보게 한다. 가령 교도소 수감자가 돈을 주면 더 편한 감방에서 지낼 수 있게 하는 것을 허용할지를 두고 쟁점을 따진다. 그에 반해 나는 사람들이 저마다 옳다고 믿는 도덕적 직관이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탐구한다.
어떤 도덕적 사안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 책을 통해 인간의 도덕 심리를 이해하면 도덕적인 사안에 대한 서로간의 논의가 한층 수월해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가령 샌델이 제기한 많은 질문들에 대해 좌우파는 서로 답이 나뉘면서 강하게 대립한다. 왜 그렇게까지 충돌할까. 내 책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쟁점이 무엇이든간에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는 그 근저에는 언제나 똑같은 도덕 심리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샌델 교수는 도덕철학자인 반면 당신 전공은 사회심리학, 진화심리학이다. 도덕에 대한 접근법이 전통적인 윤리학이나 도덕철학과는 어떻게 다른가?
사회 심리학은 아주 넓은 분야다. 그 중에서 나는 문화 심리학, 진화 심리학, 긍정 심리학, 도덕 심리학을 연구한다. 도덕철학이나 전통 윤리학과는 아주 다르다. 인간 행동의 도덕적 측면에 관심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철학자는 주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에 관심을 갖는 반면 심리학자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 또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내가 보기에, 인간의 심리를 모르고 도덕적 질문을 논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잘못된 가정 위에서 논의를 진행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이 도덕적 의무에 대해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있다고 믿는 가정 같은 것이 그렇다. 어떤 개인도 완전히 ‘객관적’일 수는 없다.
-전통적으로 도덕률은 이성을 따르는 것이었다. 칸트는 ‘실천이성 비판’에서 도덕률을 이성 위에 세웠고, 공자를 비롯한 동양 사상가들도 인륜을 이성과 결부시켰다. 당신은 다른 입장인 것 같다.
도덕의 기반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도 경험적 사실을 근거로 따져봐야 한다. 관련 증거들을 검토해 보면, 도덕적 판단이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이성보다는 직관이나 감성이 훨씬 더 강력하게 작용한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철학자들은 인간 본성이나 심리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다 보니 종종 비현실적이거나 비인간적인 이론을 내놓게 된다.
가령, 칸트의 유명한 도덕적 정언명령에 따르면,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나치가 문을 두드리며 유대인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이건 터무니없는 요구다. 나는 그런 도덕적 명제는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이성주의자의 착각(rationalist delusion)’이란 표현까지 썼는데.
인간의 도덕적 성향은 사람들을 결속(bind)시키지만 눈을 멀게도(blind) 한다. 종교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종교적 열정은 집단을 하나로 묶는다. 신앙을 중심으로 뭉쳐서 적에 맞서 싸우게 한다.
그래서 오늘날 리처드 도킨스 같은 급진적인 ‘신 무신론자(New Atheist)’들은 종교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아주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문제는 이들도 종교를 대적해서 싸우는 과정에서 또다른 신을 섬기고 있다는 거다. 이들의 ‘신’이 바로 이성이다.
무엇이든 하나의 운동이 되면 뭉치는 동시에 눈이 멀게 된다. 이성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된다. 진실을 찾는 대신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는 데만 골몰하게 된다. ‘이성적’ 사고에도 숱한 결함이 있는데도 이성을 완벽하다고 믿는다. 착각이다.
물론 인류는 이성적일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 차원에서 가능한 게 아니라, 제도를 아주 잘 구축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과학이 단연 좋은 예다. 과학이 이성적으로 전진하는 것은 과학자 개인들이 대단히 이성적이어서가 아니다. 실제로는 안 그렇다. 과학자들도 자기 이론을 너무 좋아한다. 자기 이론은 반박하려 들기보다 확증하려고 애를 쓸 뿐이다.
하지만 과학 제도 전체로 보면 다르다. 다른 과학자들이 동료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박하려고 노력한다.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려면 동료 리뷰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통해 합리성이 발현된다. 따라서 사회가 이성적이 된다는 것은 개인을 이성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다. 상호 토론과 검증을 통해서 보다 이성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흔히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이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뒤집어서 직관(감정을 포함)과이성을 각각 코끼리와 기수 관계에 비유했다.
인간의 마음은 여러 부분으로 구성돼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코끼리(자동적 인지 과정)의 등 위에 기수(통제된 인지 과정)가 올라타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기수에 해당하는 이성은 코끼리와 같은 직관의 시중을 들어주도록 진화했다.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해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먼저 ‘직감’하고, 그 느낌을 사수하기 위해 이성적으로 애써 사후정당화의 근거를 만들어낸다.
내 연애 시절을 예로 들겠다. 친구에게 고민을 상담 받는데, 헤어지라고 했다. 그는 “이성에 귀를 기울이고 어리석게 굴지 마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조언하기는 쉽지만 막상 따르기는 어렵다. 그 무렵 나는 불교 서적을 읽고 있었다. 부처의 어록 중에 “기수가 코끼리를 길들이듯 마음을 길들여라”라는 말이 있었다. 이미 부처는 충동적인 마음의 엄청난 위력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려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의 수련이 필요하다고 한 것이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도덕은 근본적으로 정치적”이라고 했다. 또 “우리 모두는 직관적으로 정치인”이라고도 했다. 왜 그런가?
정치는 기본적으로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결속을 맺는 것이다. 속마음은 어떻든 간에 서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도덕도 마찬가지다. 도덕은 서로가 어떤 원칙 위에서 행동하기로 결속하는 것이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서로 어떻게 보이느냐에 신경을 쓴다.
플라톤의 ‘국가’를 보면 글라우콘이 이런 주장을 한다. 자기 모습이 안 보이게 하는 반지(기게스의 요술 반지)가 있다면 사람들은 다들 마음대로 행동할 것이라고. 나는 그이 말이 맞을 것이라고 본다. 사람들이 도덕률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평판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도덕이란 사회 관계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진화해온 심리 기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도덕의 핵심은 정치적이다. 인류는 수백만 년 진화 과정에서 소규모 집단에 속해 생활해 오면서, 다른 구성원들의 신뢰를 얻느냐 여부가 생존을 좌우했다. 지금도 우리는 인간 관계의 파트너로서 서로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끊임없이 평가하고 평가받는다. 그점에서 우리는 도덕철학자라기보다 표를 의식하는 정치인에 가깝다는 뜻이다.
-편 가르기 현상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속한 팀을 지지하는 것이라면 거의 모든 것을 믿을 수 있다”고 썼는데.
무슨 일이든 우리는 맨처음에 어떤 (직관에서 나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 다음 그것을 뒷받침해 줄 증거들을 찾는다. 우리 인지 심리가 작동하는 과정이 그렇게 돼 있다. 판단을 먼저 내리고 모호한 부분에 대해 증거를 메워나가는 식이다.
미국에서 아직도 오바마의 출생지를 인도네시아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믿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든 그런 증거를 찾아낸다. 더욱이 오늘날 인터넷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지지 증거를 찾아준다. 믿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믿을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당신은 도덕 원리에 있어서 다원주의자라고 했다. 보편타당한 하나의 도덕률은 믿지 않는다는 얘긴가? 그런 입장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허무주의나 ‘보편타당한 절대 기준은 없다’는 상대주의와는 어떻게 다른가?
내가 말하는 다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나는 하나의 단일한 보편적 도덕 원리를 믿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어떤 도덕 원리도 믿지 않는다는 입장은 아니다. 인간이 집단을 이뤄 지내는 이상, 도덕적 원칙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도덕 없는 사회나 언어 없는 사회는 있을 수 없다.
다만 모든 사회가 하나의 도덕 원리를 갖는지, 다양한 원리를 갖는지는 경험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문제다. 대체로 어느 사회를 보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도덕적 가치가 있다. 공정성, 충성심, 신성함, 자유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나는 이런 도덕 원리가 무엇이며, 우리 본성에 무엇이 내재하는지에 관한 이론은 보편적인 것이라고 본다. 모든 사회가 도덕 원리를 쌓기 위해 사용하는 기초 벽돌(인간의 기본심리)이 무엇인지에 관한 이론은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도덕 원리 중 어느 하나만 옳고 다른 것은 틀렸다는 입장에는 반대한다.
-도덕적인 성향을 입맛에 비유했다. 세계 여러 문화권의 도덕률을 6가지 범주로 나눴는데.
도덕성은 여러 면에서 미각과 비슷하다. 맹자도 도덕을 맛에 비유한 적이 있다. “도덕과 의리가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동물의 고기가 우리 입을 기쁘게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각 문화권마다 전승돼온 도덕적 기호도 진화의 산물이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오랜 시간 위협과 기회를 맞아 적응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도덕적 미각 수용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도덕적 미각의 매트릭스는 대체로 여섯 가지 범주로 나눠볼 수 있다. 배려/피해, 공정/부정, 자유/압제, 충성심/배신, 권위/전복, 고귀함/추함이다. 여기서 보수적인 사람은 공정, 자유, 충성심, 권위, 고귀함의 측면을 다 중시하는데 비해, 진보적인 사람은 배려, 공정의 실현에 유독 적극적이다.
같은 공정성에 관심을 갖더라도 보수(우파)는 비례의 원칙으로 이해하는 반면 진보(좌파)는 평등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대중의 도덕적 취향에 대한 호소력에 있어서는 보수주의자들이 진보주의자들보다 낫다고 썼다. 왜 그런가?
앞에서 말했듯이 진보주의자들의 도덕 매트릭스는 배려/피해, 자유/압제, 공정/부정 같은 몇 가지 기반에 강하게 좌우되는 반면, 보수주의자들은 다섯 가지 기반을 모두 활용하는 경향이 있다.
좌파의 도덕성은 한두 개의 미각 수용체를 활성화하는 반면, 우파는 충성심, 권위, 고귀함까지 아우르며 더 폭넓게 미각 체계를 자각하는 셈이다. 결국 보수파가 다수 유권자들의 도덕적 취향과도 연결될 여지가 더 많다는 얘기가 된다.
한 사회의 부가 증가하고 교육 수준 및 도시 밀도가 높아지면 전통이나 권위, 종교적 가치에 대한 존중감은 떨어진다. 이런 경향은 진보 쪽에서 두드러진다. 하지만 사회의 다른 다수 시민은 아직도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진보주의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다수는 여전히 전통이나 충성심, 연장자 우대, 신성성, 순결 같은 가치를 중시한다는 사실을 소홀히 한다.
미국의 예를 들면, 1990년대에 좌파(진보)는 동성애 권리와 결혼을 주장했다. 당시 좌파의 주장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그런 주장이 당시 국민 다수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해서는 이해가 부족했다. 나아가 좌파는 종종 국가 전체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싸잡아 비판하는 경향이 있었다. 미국을 ‘억압적인 국가’라거나 ‘너무 상업적’이라거나 심지어 ‘식민주의적’이라고 했다.
이런 주장이 보수적인 사람들을 얼마나 격분시키는지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좌파의 그런 주장이 우파 입장에서는 ‘반역’처럼 들렸다. 이런 류의 실수를 좌파들은 자주 범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보수와 진보적 성향은 태어날 때부터 나뉘나? 인간 본성에 대해 흔히 ‘천성(nature)’이냐 ‘양육(nurture)’이냐를 두고 대립하는데.
인간의 도덕성은 선천적(natural)이면서 또한 양육된다(nurtured). 인류도 동물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면에서 다른 영장류와 유사하다. 하지만 10만~80만년 전 사이 어느 시점부터 우리는 문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생겼고, 그것을 통해 문화 생활을 영위하게 됐다.
문화도 그 자체는 생물학적인 적응의 산물이다. 하지만 한번 생겨난 후에는 문화 자체의 논리를 갖고 진화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오늘날 사회과학자들은 인간을 연구할 때 본성뿐만 아니라 문화에 대해서도 함께 관찰해야 한다.
더구나 문화는 유전자보다 훨씬 빠르게 변한다. 아주 역동적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서로 유전적으로는 비슷해도 문화가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 본성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개인의 도덕/정치 성향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한다면?
출생과 성장 과정을 보면 된다. 우선 유전자가 뇌를 만들고, 뇌는 특정한 기질을 만든다. 기질에 따라 어린 시절 주변에서 접하는 사람과 경험의 내용이 달라진다. 그때 알게 된 사람과 경험들이 아이의 특정 경험을 더 심화시키고, 10대 후반이 되면 정치·사회 이슈에 눈을 뜨면서 정치적 정체성을 만들어가게 된다.
초기에는 부모들 영향이 아주 크다. 하지만 점차 진학하면서 정체성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는 가운데 그 중 어떤 것을 의식적으로 택하고 수용하게 된다.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겪는 어떤 경험이 기존 생각을 강화하기도 하지만 도전받기도 한다.
사람의 정치적 정체성은 대단히 안정적이지만 간혹 변하기도 한다. 가령 내가 그렇다. 좌파에서 무당파로 옮겨갔다. 또 비즈니스를 하면 보수적이기 쉽지만 해외 출장을 많이 하고 세상의 다른 것을 많이 접하다 보면 점차 진보적이 된다. 요컨대 유전자와 환경, 그 속의 역할, 자신이 택하고 받아들이는 정치적 서사(narrative)가 주 요인이 되겠다.
-“인류는90%가 침팬지, 10%가 꿀벌”이라고 썼다. 무슨 뜻인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은 침팬지와 아주 유사하다. 오늘날 우리가 알게 된 침팬지의 성향을 보면 순전히 이기적이지만은 않다. 공감력과 상호성이 있고 위계 질서가 있다. 그러니까 인간처럼 도덕을 구성하는 벽돌에 해당하는 심성을 갖고 있다.
집단 내 개인과 개인이 경쟁하는 과정에서 서로 간의 어떤 관계도 형성되고 도덕성이 생긴다. 그런 사회 관계에 유능한 개인이 번성한다. 우리가 90% 침팬지라고 하는 것은 그 뜻이다. 우리의 도덕성은 침팬지의 도덕성과 똑같이 설명될 수 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인간 본성에는 좀 더 최근에 생겨난 외피로서 집단성도 자리잡고 있다. 심성의 10%는 꿀벌 같은 군집성을 띠고 있다. 어떤 종이든지 집단과 집단이 경쟁할 경우 개체가 집단을 우선하는 선택 압력이 작용한다. 이른바 집단 선택의 원리다.
인간 본성도 엄청난 집단주의 성향을 보인다. ‘원 포 올, 올 포 원(One for All, All for One)’을 지향하게 된다. 집단 선택 이론은 현재 사회과학에서 큰 쟁점 중 하나지만, 이런 집단성은 개인 수준의 선택 이론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특정 조건 하에서 집단 선택의 압력이 실제로 작용하며, 인간도 그런 환경 속에 있다고 본다. 그 특수 환경 중 하나가 종교다. 인간 사회에서 종교는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동시에 도덕 질서를 유지한다. 또한 무임승차자의 출현을 막고 집단에 이로운 행동을 권장하는 역할을 한다.
-인간의 마음에 ‘군집 스위치(hive switch)’가 있다고 한 말이 그것과 관계가 있나?
그렇다. 인간에게는 나(개별적인 자아)를 잊고 거대한 무엇에 빠져들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군집 스위치라는 것은 인간이 개인으로 사는 데도 아주 능하지만, 동시에 한시적으로 자기보다 더 큰 무엇의 일원이 되려고 한다는 점에서, 양쪽을 순간적으로 오갈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이런 성향을 보이는 것은 진화 과정에서 소규모 친밀 집단을 이뤄 지내 왔고 오랫동안 그 방향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은 집단에 속했을 때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그 후, 특히 산업혁명 이후 거대한 부가 축적되면서 개인적인 삶이 일반화됐다. 현대인 대다수는 혼자 살려고 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혼자서는 뭔가 아쉬움을 느낀다. 그래서 많은 돈과 시간을 어떤 집단의 일원이 되는 데 쓴다. 스포츠에 대한 열광도 그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팀의 일원이 되어 경기를 관전하고 응원하는 데 열광한다.
-종교를 ‘팀 스포츠’라고 한 것도 그런 맥락인가? 종교인들이반발하진 않을까?
글쎄, 어떤 맥락으로 이해하느냐에 달렸다. 미국 종교계 저자들도 대체로 내 책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무신론자이기는 해도, 종교의 존재 의의나 의미까지 부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 결론은 종교를 어떤 바이러스나 어리석음, 근절해야 할 해악에 비유하는 학자들(앞에서 말한 신 무신론자들)과는 달랐다. 즉, 우리는 종교적인 방향으로 진화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종교가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입장이다. 적어도 미국 사회에서는 종교가 사람들에게 아주 긍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했다는 결론을 얻었다.
나는 유대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지만 무신론자다. 더 젊었을 때는 나도 종교를 혐오했다. 하지만 인간의 도덕 심리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종교가 인류 역사에서 사회에 아주 긍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게 됐다. 물론 아주 부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신은 믿지 않고 종교도 없지만, 종교적이라는 얘긴가?
종교적인 느낌(feeling)은 갖고 있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무슨 뜻인가?
살다 보면 이따금 모든 것이 연결돼 있고, 아름다우며,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전개되는 걸 느낄 때가 있다. 그와 같은 경외(awe)의 순간에 이끌린다. 그런 느낌은 중독성이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붕 위에 올라가는 걸 좋아했다. 지붕이나 높은 건물 위, 혹은 깊은 숲 속을 가거나 폭포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느낌을 종교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이런 것은 내 안의 자신을 끄집어내는 느낌이지만, 고독한 체험이기 때문에 ‘군집 스위치’라고는 할 수 없다. 어떤 점에서 오히려 나 자신을 차단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종교는 어떤 면에서 우리 자신의 일부를 깎아내리는 문화적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적잖은 현대인들이 그런 느낌을 이야기한다. 알랭 드 보통은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를 말하기도 한다.
그게 바로 뉴에이지 정신주의자들인데. 내가 두 번째 TED 강연 무대에 섰을 때 청중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자신이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3-4명밖에 없었다. TED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아주 세속적인(=비종교적인) 사람들이다.
그 다음에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영적(spiritual)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더니 아주 많은 사람들 손이 올라갔다. 본래 사람들이 그렇다. 영적인 본성은 수십만 년 이상 오래된 거다.
반면에 조직화된 종교는 기껏해야 4000-5000년 전에 생겼다. 우리에게는 본래 영적인 군집성이 있었고, 모닥불 주변에서 춤추고 하던 데서 점차 (제도적인) 종교를 갖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됐다. 그러다 이제는 도시화와 세속화가 진행되면서 현대인들은 점차 종교를 넘어서게 된 거다. 어떤 면에서 이제 우리는 다시 (제도 종교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는 거다. 특정 종교는 없이 영성을 가진 사람들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인류의 진보에 큰 기여를 했다고 썼는데?
인류가 집단을 이뤄 협력을 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종교 덕분에 공동의 목표를 위해 역할을 분담하고 협력을 끌어낼 수 있었다. 종교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이런 근사한 호텔 로비에서 인터뷰를 하는 일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문명을 쌓아 올릴 수 없었을 거라는 얘기다.
-당신은 책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진보주의자였지만 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나는 책을 쓸 당시만 해도 좌파(liberal)에서 출발했다. 점차 중간으로 옮겨가서 결국 지금은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비당파(non-partisan)’가 됐다. 어느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다. 마음과 기질은 중도좌파에 가깝지만, 좋은 사회를 위한 운영 원리로 보자면 중도우파라고 할 수 있다.
-버지니아대학에 있다가 지금은 뉴욕대 경영대학원으로 옮겨서 경영 윤리를 가르친다. 경영 분야로 옮겨 간 특별한 이유가 있나?
학교를 옮긴 것은 우연이었다. 책을 한창 쓰고 있을 때 아내가 둘째를 가졌다. 집필 작업이 아주 더뎌졌다. 물론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했지만 일정이 많이 늦은 상태였다. 2012년 대선 이전에는 책이 나와야 했다. 결국 직장인 버지니아대에 무급휴직을 신청했다.
그러고는 뉴욕시로 갔다. 출간에 맞춰 미디어 인터뷰가 이어졌는데, 어린 아이들이 있어서 버지니아에서 뉴욕을 왔다갔다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뉴욕대 경영대학원의 누군가가 내게 “이곳으로 와서 비즈니스 윤리 과목을 가르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때마침 내가 학교를 옮기고 나서 3개월 후 월가 점령 시위가 터졌다. 나로서는 아주 흥미로웠다. 경영대학원 내 사람들은 비즈니스에 대해 너무들 좋게 이야기했다. 비즈니스가 가치를 창출하고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를 풀 기회를 제공한다고들 했다.
반면, 월가 점령 시위대의 목소리는 달랐다. 내가 직접 자전거를 타고 현장에 가봤다. 거기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악이며 거대한 흡혈 문어, 인간성을 말살한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악이라고 했다.
도덕 심리학자로서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현상이었다. 같은 실체를 두고 상반된 스토리를 접하게 된 거다. 비즈니스와 자본에 대해 극명하게 대립되는 서사. 나는 자본주의가 왜 그토록 논쟁거리인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 주제에 관해 다음 책을 쓰기로 했다. 세계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두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옳다는 도덕적 오만은 제외하고 서로 건설적인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자본주의에 대한 상이한 두 서사가 극명하게 대립하는 이유는 뭘까?
이 역시 도덕적 성향과 관련이 있다. 대체로 좌파는 취약한 집단을 희생시키는 데 대해 대단히 민감하다. 특히 어린이나 동물, 이민자들 같은 취약자 보호 문제에서 두드러진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볼 경우에는 비즈니스 종사자나 부자, 자본가들을 압제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들 눈에 다른 노동자나 소비자는 희생자로 보인다. 취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위해 정부에 대해 더 많은 규제와 통제를 바라게 된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본다.
반면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이들이 갖고 있는 도덕의 초점은 희생자에 있지 않고 개인의 자유에 있다.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선택에 있어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정부가 개인의 생활이나 거래에 간섭하고 과세하면 강하게 반발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자유시장이 인류 역사에서 위대한 발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본주의와 자유 시장이 과거 종교나 정부의 구속으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고 자유를 주었다고 본다. 이들은 잘 해야 최소 정부가 최선이라고 믿는다.
-자본주의에 관한 세 번째 이야기가 다음 책 주제라고 했는데, 미리 소개한다면?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앞의 상반된 두 이야기를 절반씩 절충한 것은 아니다. 두 이야기가 동등하게 옳다는 입장도 아니다. 나는 그 동안 연구 결과, 두 번째 이야기가 사실에 좀 더 가깝다고 보게 됐다.
자본주의는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념화하기 시작하면, 자유 시장을 (신처럼) 언제나 완벽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눈이 멀게 된다. 시장의 실패라든가 끊임없는 다양한 착취를 보지 못하게 된다.
대략적인 세 번째 이야기는 이렇다. 20세기는 악몽이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대립하면서 모든 논쟁이 도덕화(이념화)했다. 이제 공산주의는 사망했다. 북한만 빼고. 모두가 자본주의를 채택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제 어떤 자본주의를 원하는지 제대로 고민해 볼 수 있게 됐다. 그런 점에서 악몽에서 깨어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우리가 선입견 없이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역동성 속에서 번영과 전진을 끌어온 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둘러보라. 지구상의 가치 있는 것들은 그냥 기도만으로, 혹은 사람들이 그냥 착하게 행동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생물학적 세계에서 진화가 행한 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비즈니스가 인류 역사에서 발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다. 따라서 좌파의 비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빈부 양극화의 문제가 있고 이것은 대단히 예측가능하다는 지적 말이다. 어떤 계획이나 조직적인 대응 없이는 풀 수 없는 문제라는 지적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 대응은 종종 정부에서 나와야 하지만 민간 부분에서 마련될 수도 있다.
요컨대 자본주의에 관한 세번째 이야기는 역동성(dynamism)과 관대함(decency)을 결합한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식으로 결합할지는 각 사회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미국은 역동성에, 유럽은 관대함에 더 기울어 있다. 어느 게 옳고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어떤 사회든지 사실 관계에 대해서는 분명히 인식하고 그 토대 위에서 접근해야 한다. 어떤 도덕적 운동이나 집단적인 포퓰리즘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논의나 상황을 그르칠 수 있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한국 사회도 보수-진보 간 갈등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불가피한 걸까?
각국 자료를 보면 유사한 경향이 나타난다. 기성세대의 우선 가치는 안전과 번영이었다. 사회가 부유해지고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개인주의적이 된다. 자기 표현과 가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또한 건국 세대는 외적에 맞서 싸운 경험이 있기 때문에 국가 이익에 충성스런 경향을 보인다. 반면 그런 경험이 없는 세대는 내부 투쟁에 더 골몰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이 그렇다. 2차 대전 때 참전해 싸운 경험이 있는 세대는 공화당과 민주당원도 협력적인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지금 주도층인 베이비부머 세대는 성장 과정에서 외부 적과 싸워본 적은 없이 안으로 싸우면서 커온 세대다. 둘 사이에서 극명한 세대차를 보인다.
한국 상황은 잘 모르니까 구체적인 조언을 하기는 어렵다. 다만 대체적인 경향과 일반 원칙에 근거해 말하자면, 국가가 당면한 위급 사안에 대해 우선 서로 인정하고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싶다.
정치 제도적으로 온건한 목소리가 더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선거법이나 정책을 통해 극단주의의 영향력을 줄이고 온건파를 강화해야 한다. 중도적인 유권자들은 대개 투표율이 낮은데 이걸 어떻게 끌어올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양극으로 갈라진 보수와 진보 진영 간에 접촉과 친교를 늘릴 필요도 있다. 그저 한곳에 모아 논쟁을 벌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민주주의는 차이를 없애는 게 아니라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생 공영하는 것이다. 모든 분파의 지도자들이 견해차를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느 한 편을 ‘악마’로 내모는 태도에 대해서는 다같이 반대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미국에서 누구 입에서라도 인종주의 발언만 나오면 정파를 막론하고 배격하는 것처럼, 어떤 극단주의에 대해서는 금지선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 사회의 갈등 해소나 완화에 당신 책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나?
빠른 경제 성장에 급속한 도시화를 겪은 사회가 보이는 결과는 공통적이다. 새로운 빈부 격차에 따른 좌우 갈등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런 갈등을 완화하는 데 내 책이 도움되기를 기대한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사회가 갈라진 상태에서 대화할 때는 저마다 ‘옳다는 마음’이 작동한다. 이것은 진실과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아주 해롭다. 한국 사회도 분열이 심할수록 똑똑한 사람들이 이해보다는 전투 태세에 돌입한다. ‘옳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도덕적인 겸양의 태도를 갖게 되면 상대 진영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경제 기적에 힘입어 새롭게 바뀐 생활 방식으로 살게 됐다. 빠른 변화로 인한 사회적 해체나 균열, 갈등을 겪고 있다. 그전까지 성공에 필요했던 수완이나 덕목은 앞으로 전진하는 데 필요한 수완이나 덕목과는 다르다. 그 전환에 필요한 반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 책이 그런 반성에 도움이 됐으면 한다. 첫 책은 정치 상황에 대한 책이었고, 다음 책은 경제 상황에 대한 책이다.
-한국계인 아내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 어떻게 만났나?
버지니아대 조교수 시절이었다. 바빠서 여자 만날 시간도 없어서 친구에게 투덜댔더니 소개를 해줬다. 그 친구가 파티에 아내와 나를 함께 초대했는데 맘에 들어서 결혼까지 하게 됐다.
-둘 사이에는 도덕적으로 의견 충돌이 없었나?(웃음)
나는 뉴욕 유대인 집안 출신이다. 한국계인 아내와 가치 차이는 크지 않았는데 사회적인 행동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유대인과 한국인은 교육과 근면, 성공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같다.
하지만 한국인과 달리 유대인은 논쟁을 좋아한다. 심지어 식탁에서 토론하다가 아들이 아버지 면전에 대고 “그건 터무니 없는 얘기”라고 서슴없이 반박할 수 있다. 아주 직설적이다. 그런 내 모습에 대해 아내는 경악했다.
-자녀의 도덕 교육을 걱정하는 부모를 위해 조언한다면?
양육 과정에서 두 가지를 함께 신경 써야 한다. 한편으로는 일관된 사랑과 따뜻함을 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체계와 규율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사랑 받는다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행동에는 언제나 (책임질) 결과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듀르켕의 통찰에 따르면, 좌파 사람들은 양육할 때 따뜻함에만 초점을 맞추고, 우파는 조직의 규율과 처벌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내 생각엔 사랑과 규율 두 가지 다가 아이의 도덕 형성에 필수적이다.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 조너선 하이트/고운호 객원기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
뉴욕대 스턴 경영대학원 교수. 1985년 예일대를 졸업한 후 1992년 펜실베이니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후 과정을 시카고대에서 하면서 인도 오리사에서 연구했다. 1995년부터 버지니아대에서 교수로 있다가 2011년 뉴욕대 경영대학원 교수진에 합류했다.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도덕성 기반 이론’을 세우고 웹사이트 ‘YourMorals.org’를 공동 개발했다. 시민정치를 증진하기 위한 웹사이트 ‘CivilPolitics.org’도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