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3

알라딘: [전자책]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알라딘: [전자책]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epub 
백낙청 (지은이)창비2020-07-14 

책소개

문학평론가이자 영문학자, 분단체제극복에 헌신해온 이론가·운동가로 우리 지성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백낙청이 1972년 하바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래 반세기 가까이 이어온 로런스 연구를 결산하고 그와 더불어 연마해온 독창적 사상을 집약한 책.

20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D. H. 로런스가 추구한 서양정신사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한반도 개벽사상과 회통시킴으로써 문학뿐 아니라 정치 및 사회사상적으로 우리 시대 문명대전환의 길을 모색한 노작이다. 1960년대 이래로 우리 지성계에 큰 뿌리를 내린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 근대 이중과제론과 문명대전환론 등 50여년에 걸친 백낙청 사유의 심화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
목차
책머리에
서장 소설가/개벽사상가 로런스

제1부
제1장 『무지개』와 근대의 이중과제
제2장 『연애하는 여인들』과 기술시대
제3장 『연애하는 여인들』의 전형성 재론
제4장 『쓴트모어』의 사유모험과 소설적 성취
제5장 『날개 돋친 뱀』에 관한 단상

제2부
제6장 ‘다른 어떤 율동적 형식’과 리얼리즘
제7장 재현과 (가상)현실
제8장 『무의식의 환상곡』과 프로이트, 그리고 니체
제9장 미국의 꿈과 미국문학의 짐: 『미국고전문학 연구』
제10장 로런스의 민주주의론
제11장 「죽음의 배」: 동서양의 만남을 향해
D. H. 로런스 연보|인용 원문|참고문헌|추천의 말|찾아보기

책속에서
첫문장
'개벽(開闢)'은 영어를 포함한 서양 언어에 없는 단어다.
저자 및 역자소개
백낙청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문학평론가, 영문학자, 편집인. 1938년 출생하고 경기고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브라운대와 하바드대에서 수학했다. 박사과정 중에 1964년 서울대 영문학과 전임강사가 되었으며 나중에 다시 미국으로 가서 1972년 하바드대에서 D. H. 로런스 연구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6년 계간 『창작과비평』을 창간하고 2015년까지 편집인을 지냈으며, 서울대 영문과 교수,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시민방송 RTV 이사장,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대표, 한반도평화포럼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이래 민족문학론을 전개하고 분단체제론을 통해 한반도 문제의 체계적 인식과 실천적 극복에 매진해왔으며, 근대에 대한 탐구를 통해 새로운 문명전환의 사상을 연마하고 있다.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계간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한반도평화포럼 명예이사장으로 있다.
저서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합본개정판)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2』 『민족문학의 새 단계: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3』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4』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5』 등의 문학평론집과 연구비평서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D. H. 로런스의 현대문명관』을 냈고,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흔들리는 분단체제』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2013년체제 만들기』 등의 사회평론서와 『백낙청 회화록』(전7권), 『변화의 시대를 공부하다』 『문명의 대전환을 공부하다』 등 다수의 공저서 및 편저서가 있다. 제2회 심산상, 제1회 대산문학상(평론부문), 제14회 요산문학상, 제5회 만해상 실천상, 제11회 늦봄문익환통일상, 제11회 한겨레통일문화상, 제3회 후광김대중학술상 등을 수상했다. 접기
수상 : 1997년 요산김정한문학상
최근작 : <A Study of The Rainbow and Women in Love as Expressions of D. H. Lawrence's Thinkingon Modern Civilization>,<한국어, 그 파란의 역사와 생명력>,<D. H. 로런스의 현대문명관> … 총 6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백낙청 50년 공부의 결정체!
서양정신사의 극복에 도전한 D. H. 로런스를 이끌어,
한반도 개벽사상과 문명대전환의 새 길을 연다

문학평론가이자 영문학자, 분단체제극복에 헌신해온 이론가·운동가로 우리 지성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백낙청이 1972년 하바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래 반세기 가까이 이어온 로런스 연구를 결산하고 그와 더불어 연마해온 독창적 사상을 집약한 책. 20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D. H. 로런스가 추구한 서양정신사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한반도 개벽사상과 회통시킴으로써 문학뿐 아니라 정치 및 사회사상적으로 우리 시대 문명대전환의 길을 모색한 노작이다. 1960년대 이래로 우리 지성계에 큰 뿌리를 내린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 근대 이중과제론과 문명대전환론 등 50여년에 걸친 백낙청 사유의 심화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 그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영문 박사논문도 『D. H. 로런스의 현대문명관』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 번역되어 함께 출간된다.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가 다루는 주제는 문학이론적 비평에 한정되지 않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니체와 맑스, 루카치와 하이데거, 프로이트 융 라깡 들뢰즈 데리다 랑씨에르 바디우 등 서양사상에 더해 남·북방불교와 유가적 사유, 동학, 증산도, 원불교까지 포괄한다. 2천년 서양정신사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로런스의 시도에 동양의 전통사상 및 한반도 고유의 개벽사상과 접점을 만들어내며 자본주의적 근대의 한계를 벗어나 문명대전환의 큰 시야를 여는 저자의 사유는 전무후무하리만큼 독보적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일찍이 주체적 영문학 연구를 제창하고 한반도 현실에 실천적으로 개입해온 저자의 50여년 수행의 결실이다. 그러나 이 책이 큰 시야의 이론적 논의만을 전개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로런스 작품을 대목대목 섬세하고 정밀하게 읽고 분석하는 문장들은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통찰력을 제시하는 좋은 문학평론을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철학·미학·사회학, 역사와 정치, 종교까지 다양한 분야를 거침없이 넘나드는 걸출한 지성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고, 더 인간적이고 진정한 새 세상을 향한 사유가 설득력 있게 전개되는 책이다.

우리 시대, 왜 로런스인가
서장은 ‘서양’의 문학가 D. H. 로런스를 왜 ‘개벽사상가’라는 일견 모순적인 용어로 지칭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룬다. D. H. 로런스(1885~1930)는 짧은 생애에 시, 소설, 평론, 희곡, 에세이 등 전 장르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긴 20세기 영문학의 거장이다. 저자 백낙청이 가장 주목하는 로런스의 성과는 동시대인의 상식뿐 아니라 서양의 전통적 사고방식 자체를 뛰어넘으려는 끈질긴 시도를 했고 또 그것에서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그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음양론을 방불케 하는 우주론과 진리관을 제시하고, 물질적 존재의 영역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실존(existence)과 전혀 다른 차원을 달성하는 사건으로서의 being(~이다+있다)이란 개념을 주장했다. 저자가 보기에 이런 발상은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을 지배해온 이데아와 현상세계의 이분법과 형이상학적 사유를 근본적으로 넘어선 획기적인 돌파이며, 이런 획기성은 그 앞세대의 변혁사상가로 꼽히는 맑스나 니체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이로써 불교와 노장사상, 후천개벽사상 등 동아시아 사상과의 회통 가능성을 훌륭하게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저자는 로런스를 ‘서양의 개벽사상가’로 이름붙인다. 로런스는 이러한 가능성을 주로 장편소설을 통해 열었다. 그의 장편 『무지개』(1915)와 『연애하는 여인들』(1920)은 자연주의적 재현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삶,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핍진한 경지인 ‘진정한 리얼리즘’을 성취한 작품들이다. 근대 장편소설이 엄연히 근대의 산물이되 탁월한 작품일수록 근대극복의 비전을 내장한다는 점에서, 두 장편은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에 대한 고전적 서사랄 수 있다. 또한 로런스는 거대한 생명체로 존재하는 우주에서 인간이 그 생명과 얼마나 합일하느냐에 따라 인류사회의 운명이 결정되며, 그런 점에서 태양을 잃고 우주를 등진 근대문명은 몰락과 대전환을 앞두고 있다는 우주관과 생명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사회적 실천과 연결하려 했다는 점에서도 동아시아 후천개벽사상과의 친화성을 지닌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본문의 2부 11장의 글을 통해 로런스의 주요한 작품들을 분석하는 가운데 그의 사유를 총괄적으로 종합하고 저자 자신의 문제의식을 더해 새로운 사상적 기초를 구축해간다.

‘진정한 리얼리즘’과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
제1~3장은 저자가 로런스의 최고작으로 꼽는 『무지개』와 『연애하는 여인들』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두 작품은 브랭귄 일가 3세대에 걸친 인물들이 전통 농경사회의 삶에서 벗어나 근대 산업문명을 맞닥뜨리고, 그에 적응하며 한편으로 그 안에서 ‘당당한 창조적 개인’이 되기 위한 분투를 그리고 있다. 각 세대가 처한 환경의 차이, 작중인물들이 서로 간에 그리고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분투의 결과로서 개개인의 성공 혹은 좌절은 곧 서구 근대문명의 전개와 그것에의 적응 및 극복 가능성에 대한 탐색의 과정이기도 하다.
브랭귄 일가 1세대와 2세대를 중점적으로 그린 󰡔무지개󰡕는 영국 전통사회의 삶에 대한 생생하고 애정어린 기록인 동시에, 그 한계를 직시하고 공동체의 친밀한 유대관계를 벗어나 근대사회의 떳떳한 일원이 되고자 하는 개인들의 노력을 그려낸다. 『무지개』에서 작가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러한 개인들이 진정으로 삶다운 삶을 성취했는가, 본원적인 being의 차원에 도달했는가를 밝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리얼리즘 소설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현실을 반영, 재현하는 재래식 리얼리즘뿐 아니라 전통적 서양철학이 외면해온 본질적 차원의 ‘존재’를 규명하고 전달하는 것이 우선적 과제가 된다.
이어지는 『연애하는 여인들』은 당대 영국사회의 여러 국면을 󰡔무지개󰡕보다 훨씬 폭넓고 대담하게 다루면서, 장차 전지구를 휩쓸 과학기술의 본질에 대한 물음, 여기서 비롯해 전통적 서양철학을 극복할 역사적 요구에 대한 각성으로까지 나아간다. 현대의 기술은 진리가 드러나며 이룩되는 한 형태이자 역사적 운명인데, 이를 망각하고 인간 스스로 자신의 가장 근원적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것이야말로 현대문명이 처한 위험 그 자체다. 󰡔연애하는 여인들󰡕에서 ‘산업계의 거물’로 지칭된 인물이 과학기술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더 본원적인 삶을 찾으려는 의지의 실패로 죽는다는 사실은 기술시대의 그와 같은 본질적 위험을 반영한다. 『무지개』와 『연애하는 여인들』은 우리가 적응하면서 넘어서야 할 근대의 참모습을 보기 드물게 진실되고 집약적으로 드러냄으로써 당대에 도착하지 않은 미래현실의 중요한 특징까지도 함축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특히 『연애하는 여인들』에서 현대의 예술가상을 놓고 벌이는 작중인물들의 논쟁에는 예술이 산업과 결합해야 한다는 예술관이 등장하는데, 이는 훗날 포스트모더니즘론자들이 20세기초 모더니즘의 엘리트주의·예술주의와 대비하여 탈현대주의 예술이 좀더 대중적이고 민주적이라고 내세우는 주장을 예견하듯 포착해낸다. 로런스는 20세기초 모더니즘의 체험을 적잖이 공유하면서도 자본이 주도하는 기술지배의 세계에 대한 명백히 다른 길의 가능성을 『연애하는 여인들』 속 인물들을 통해 그려낸 것이다.

새 세상을 향한 철학적·정치적 비전
제4~5장은 로런스의 또다른 문제작 『쓴트모어』(1925)와 『날개 돋친 뱀』(1926)에서 나타난 현대문명 비판과 유럽적 의식형태의 패권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조명한다. 『쓴트모어』는 현대문명의 정신적 황폐성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삶에 대한 냉소와 더불어 당시 사회 전반의 풍조와 병폐를 깊이있게 짚어낸다. 로런스는 사회주의와 ‘근대 민주주의’를 동일 범주에 넣고 부정한 바 있으며, ‘행복의 추구’를 비판의 표적으로 삼았다. 물론 인간의 행복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본질적 모험을 수행하고 그에 걸맞은 성취를 이룩한 결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지상목표로서 추구하는 삶을 반대하는 것이다. 로런스는 대서양을 건너 뉴멕시코 산중에서 은거하며 현대문명과 대결하는 인물을 통해 그 고장의 ‘기운’ 또는 ‘영(靈)’과 일치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사회를 탐구한다. 이 탐구가 본격화된 것이 『날개 돋친 뱀』이다. 로런스는 1920년대 멕시코를 여행하며 사회주의혁명이나 전통문화의 부활에 그치지 않고 ‘후천개벽’에 값할 새 세상 건설을 꿈꿨다.
『날개 돋친 뱀』은 그 꿈을 개연성 있는 소설적 현실로 제시하는 도전을 수행하며 종교가 어떻게 현실 속에 자리잡고 대중적 영향력을 갖게 되는지, 나아가 정치와 종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본질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멕시코의 다신교 신앙을 부활시키려는 새 종교를 대통령이 국교로 선포한다는 작품의 결말은 종교성 자체를 외면하는 근대인의 무신론이나 서구 유일신교에 대한 의미있는 도전이지만 소설작품으로서는 한계를 갖는 것 또한 명백하다. 이는 로런스적 사유모험의 엄밀함에서 결함을 드러낸 것이자 종교에 대한 로런스의 깊은 신념의 표현에도 미달한 것이다. 『날개 돋친 뱀』이 제시한 질문과 관련해 한반도의 후천개벽운동에서는 정교동심(政敎同心), 곧 정치와 종교가 한몸은 아니되 한마음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원칙을 개념화한 바 있다. 새로운 종교운동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에는 힌두교와 고대 그리스적 요소를 간직한 불교 전통, 수운 최제우의 동학을 시발점으로 해월(최시형)과 증산(강일순)을 거쳐 소태산(박중빈)으로 진화한 한반도의 후천개벽운동이 훌륭한 참고가 된다.

전통적 인간관·세계관의 일대 전환
제6~8장에서는 1부(제1~5장)에서 논한 로런스 소설의 리얼리즘 탐구를 루카치와 하이데거, 데리다 등의 이론가들과 비교 고찰하고 최근의 가상현실 논의에 비추어 그의 예술관·세계관이 지닌 선도성을 평가한다. 또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대한 로런스의 비판을 통해 과학주의에 갇히지 않는 인간본성에 대한 참다운 이해를 제시한다.
루카치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맑스와 니체가 시작하고 하이데거에 의해 새로운 돌파가 이루어지는 ‘형이상학의 극복’ 노력을 루카치가 오해하고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이상학에 머물렀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로런스가 추구하는 예술작품에서의 ‘다른 어떤 율동적 형식’(some other rhythmic form)은 루카치의 리얼리즘론이 미처 탈피하지 못한 전통적 인간관·세계관의 일대 전환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로런스의 예술관·진리관은 고흐의 그림에 대한 언급에서 드러나는데, 해바라기를 그릴 때 그의 그림은 해바라기 자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해바라기로서의 해바라기의 생생한 관계를 시간 속의 살아 있는 순간에 드러낸다/성취한다는 것이다. 로런스는 소설에서 사실주의적 재현의 풍성함과 충실성이 그런 ‘순수한 관계’를 성취하는 데 불가결한 요소라고 보았다. 현대과학마저도 ‘가상현실’과 ‘진짜 현실’을 판별할 근거를 제공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오직 진정한 예술과 인간의 창조적 행위를 통한 ‘생생한 관계’의 드러냄/이룩함을 통해서만 가상과 실재의 구별이 가능해진다. 평단의 오해를 사온 성(性)에 관한 로런스의 관심은 바로 이러한 ‘육신으로 살고 있음’(또는 그러지 못함)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로런스의 프로이트 비판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우주의 진정한 관계와 창조적 삶에 대한 탐구 속에서 로런스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충동’ ‘본능’ ‘무의식’ 개념을 비판한다. 진정한 창조적 에너지는 성적 에너지의 억압이 아니라 그 충족에서 나오며, 하나의 세계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의 열정적 일치와 다수 인간들의 진정한 어울림은, 비록 성적 충동과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지만 그 본질이 전혀 다르다는 입장이다. 또한 로런스는 근대의 이상주의와 근대인의 실상에 대한 니체의 비판을 공유하면서도 인간 누구에게나 내재하는 균형과 조화, 행복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인간관은 근대세계의 남녀관계에 대한 진단으로 이어지는데, 현대사회에서 남성 고유의 위치나 가모장제(家母長制) 제안 같은 논의는 지금의 성평등 논쟁에도 흥미로운 참조점을 제공한다.

후천개벽 시대, 문명대전환의 길
제9~10장에서는 로런스가 『미국고전문학 연구』(1923)에서 밝혀낸 ‘낡은 의식의 와해’와 ‘새로운 의식의 형성’이라는 흐름이 월트 휘트먼에 이르러 비로소 인류역사의 ‘열린 길’을 이루었고, 그것이 근대 민주주의 비판과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구상으로 나아가는 점에 주목한다. 『미국고전문학 연구』는 17세기초 청교도들이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대륙으로 갔다는 통설부터가 미국문학의 진실된 ‘이야기’를 덮어버리는 미국인들 자신의 거짓말이라고 단정한다. 그들의 신대륙 이주는 유럽의 낡은 권위 일체에 대한 반발이면서 한편 인본주의·자유주의에 대한 반발이었기에, 원래 유럽의 이상인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것이란 그야말로 자기회피요 자기망각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정신사는 벤자민 프랭클린부터 페니모어 쿠퍼, 에드거 앨런 포, 내서니얼 호손을 거쳐 허먼 멜빌에 와서 그 허위의식의 마지막 붕괴를 보여주고, 이후 월트 휘트먼이 육신과 분리된 영혼을 명백히 부정하고 ‘사랑’이 아닌 ‘공감’의 원리를 내세우면서 미국 민주주의 이념이 결정적인 도약을 이룬다는 것이 로런스의 진단이다. 로런스는 근대 민주주의의 근본 문제가 평등주의와 관념화된 개인 개념에 있다고 보았다. ‘평균적인 것’의 다른 이름인 ‘동일성’을 진정한 ‘정체성’으로 오해하고, ‘살아 있는 개인’이 아니라 ‘관념화된 단위로서의 개인’에 머무는 것에서 온갖 혼란과 불행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에는 영혼의 위대성에 따른 위계질서, 그리고 각자의 지혜 또는 진리의 역량에 따른 차등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에 필요한 사회체계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못했는데, 저자는 여기에 유교의 예치(禮治)나 원불교의 지자본위(智者本位) 같은 동아시아의 사유의 합리적 핵심이 결합할 때 비로소 후천개벽에 값하는 대전환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피력한다.
마지막 제11장에서는 로런스의 시에 나타난 죽음과 재생 모티프와 불교사상의 친화성을 분석한다. 로런스 자신의 불교에 대한 이해와는 별개로 그의 사유는 기독교적 관념을 넘어서는 한편 데까르뜨적 자아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해체의 선구자로 부각된다. 여기서 저자가 불교와 로런스의 결정적 일치점으로 꼽는 것이 형이상학적 사유에 대한 극복으로서 현상세계에 대한 역설적이지만 강력한 긍정이다(이때의 불교는 로런스 당대의 유럽 지식인들이 익숙했던 남방불교가 아닌 북방불교이다). 이는 근대적 지식과 우주론 전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나아갈 근거로, 더 진전되면 불교와의 생산적인 대화도 가능하게 할 being에 대한 비형이상학적 사유를 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런스적 사유에 구현된 동아시아 불교사상과의 상통성은 단순한 지식의 전파나 ‘영향관계’의 교환을 넘어선 동서양의 참된 만남의 드문 사례다. 저자는 진정한 동서의 만남이란 각자 전인미답의 영역에서 참된 사유의 모험을 진행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수렴현상이며, 이런 수준의 상응관계에 대한 탐색은 당연히 쌍방향의 탐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끝맺는다. 접기

전체 (2)
공감순 
     
시대를 읽지 못하는 이가 D.H.로런스의 사유를 빌어 다른 세계를 모색한들 무슨 소용일까? 지식인이라는 사람의 행보가 아주 실망스러워서 참고하고 싶지 않은 서적.

알료샤님 백낙청씨의 여정을 면밀히 검토했으니 실망한 마음을 표현했겠죠? 비난을 하려거든 제대로 파악하고 하시길. 
대기만성 2020-07-15 공감 (2) 댓글 (0)
Thanks to
 
공감
     
[서양의 개벽 사상가 D.H 로런스]와 박사학위 논문 번역본은, 백선생의 로런스 연구의 출발과 마무리이면서, 한 서양문학연구가가 어떻게 우리의 주체적 학문의 빼어난 경지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인 셈이어서, 가슴 두근두근한 기대를 갖게 한다.

삶에 대한 예의 2020-07-08 공감 (2) 댓글 (0)
Thanks to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 새창으로 보기


우리 시대, 왜 로런스인가?
우리가 진리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 경험에서는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결합이 완성되는 삶의 순간적 상태이다.

 <채털리부인의사랑>이라는 소설로 알려진 <D.H 로런스 1885-1930>는 영국의 작가입니다. 문학작품을 외설인가, 명작인가로 많이 평가되는 작품이기도 한걸 보니 작품이 1928년에 세상에 나왔으니 시대를 많이 앞서간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외에는 로런스에 아는 것이 없어 이번 창비에서 나온 문학평론가 백낙청교수의 <서양의 개벽사상가 D.H 로런스>비평서로 읽어보았습니다. 책의 형식은 문학비평이지만 그 내용은 동서양 문명과 사상 내용이고 대표작으로 꼽는 <무지개>와 <연애하는여인들>과 같은 작품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정점에 개벽사상이 열린다고 말합니다. 로런스가 ‘개벽사상가’로 인정될 수 있는지 여부는 그의 작품을 읽고 독자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나는 내가 영혼이라거나 몸뚱이라거나 지성이라거나 지능이라거나 두뇌라거나 신경체계라거나 한 무더기의 분비선이라거나 이런 나의 조각들 중 어떤 하나임을 결단코 단호히 부정한다. 전체는 부분보다 위대하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인간인 나는 나의 영혼, 정신, 신체, 두뇌, 의식, 또는 나의일부에 불과한 다른 그 무엇보다 위대하다. 나는 인단이요 살아있다. 나는 살아 있는 인간이며 내 힘닿는 한 살아 있는 인간으로 남으려 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소설가다. ---p35

- 접기
류북 2020-09-01 공감(0) 댓글(0)
Thanks to
 
공감
마이페이퍼
전체 (1)
페이퍼 쓰기
좋아요순 

“원불교 가르침 개방적, 서양문명과 잘 통할 것”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원불교 가르침 개방적, 서양문명과 잘 통할 것”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원불교 가르침 개방적, 서양문명과 잘 통할 것”

등록 :2006-09-26 18:24수정 :2006-09-26 18:28

프린트


교전 영어 번역 이끈
백낙청 서울대 명예 교수/



한국 자생 종교의 대표격인 원불교의 교전이 10년의 작업 끝에 영어로 번역됐다. 인쇄만 남겨둔 (원불교 교전)이다. 미국 뉴욕 인근의 50만평 부지에 미주총부를 건립중인 원불교로선 원기(탄생) 91년 만에 좀 더 큰 바다로 나아갈 소프트웨어까지 마련한 셈이다.



이 교전 영역엔 만만치않은 인사들이 참여했다. 세계적인 불교학자인 로버트 버스웰(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와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 과학과 원불교 교리에 동시에 탁월한 식견을 갖춘 최영돈(고려대 기계공학과) 교수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미주선학대교수인 박성기 교무와 버스웰의 부인인 크리스티나 리 버스웰도 함께 했다. 백 교수는 1970년대 초 송광사 방장이던 구산 스님에게 출가했던 승려 출신 버스웰 교수를 이 작업에 참여시켜 영역본의 산파 구실을 했다. 버스웰 교수가 1971년과 1988년에 간행된 바 있던 교전 영역본을 기초로 초역을 하면 이를 기초로 정역위원들이 서울과 로스앤젤레스 등에 모여 2박3일 가량 합숙을 하며 정리했다.

<창작과 비평> 대표, 영문학 교수, <시민방송> 이사장 등으로 촌음도 쪼개서 살아가며 10년 간 이 작업을 해온 백 교수(68)를 25일 만났다.

지금까지 백 교수가 불교에 조예가 깊은 것은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와 원불교의 관계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다. 그는 자신의 글에 대해 “원불교를 아는 사람들이 보면 1970년대부터 원불교 교전을 읽은 흔적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부인 덕에 교전 접하고 깊은 감명… 10년간 촌음 쪼개 공동작업
번역은 포교 차원보다 한국사상 세계 알리기 의미

특별인터뷰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 우리시대코드 < 일반기획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특별인터뷰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 우리시대코드 < 일반기획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특별인터뷰 /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기자명 나세윤 기자
입력 2016.01.01
호수 1783

온전한 '조선''한국'만드는 자체가 정신개벽
▲ 백낙청 교수는 남북화해사업에 교단의 열성이 예전만 못하다고 안타까움을 표하며 한반도의 통합 작업에 교단이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병신년(丙申年) 원숭이해를 맞아 특별인터뷰를 준비했다. 계간 <창작과비평>을 창간하고 오랫동안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문학중심 지식인 운동을 이끌었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나 〈정산종사법어〉 영역작업을 비롯 최근 창비의 표절시비 등 현안에 대해 질의했다.

- 새해 〈원불교신문〉 독자들에게 덕담 한 말씀 해주시죠.

원불교100주년기념대회를 원기101년에 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외국의 선교사나 선교자금의 도움이 없이 순전히 자력으로 이만큼 성장한 것은 참으로 자랑할 일입니다.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지금은 세상과 나라가 두루 어지럽고 교단도 매사가 잘되는 것만은 아닐 터인데 올해를 새로운 도약의 계기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 〈창작과비평〉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문학중심 지식인 운동이었고, 한국사회 민주주의가 어려울 때 중심 추(錘)역할을 해왔습니다. 군부에 의해 폐간을 당하는 큰 시련도 있었는데요. 쉬지 않고 한국사회의 담론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궁금합니다.

직접적으로는 수많은 독자들이 읽어주고 믿어준 덕분이고, 더 크게 본다면 한반도의 어변성룡(魚變成龍)하는 기운을 탔다고 말해야겠지요. 새해가 창간 50주년인데, 저는 편집인에서 퇴임하는 대신 제 공부에 더 열중해서 창비와 한국사회의 변화에 한층 슬기롭게 공헌하는 길을 찾고자 합니다.

- 그런데 지난해 한동안은 백 교수님과 창비가 이른바 표절시비와 관련해서 많은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지요. 그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지요.

예. 표절시비가 걸린 작가 본인은 물론 저와 창비도 그를 두둔한다 해서 돈에 눈이 어두운 문학권력으로 비난을 받았지요. 지금은 거의 잠잠해졌는데 저는 두가지 이유로 이번 사태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첫째 논란 자체가 창비의 어리석은 초기대응으로 확대되었다는 점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다른 여러 부족함도 함께 되돌아볼 계기가 되었기에 고마운 일이고, 둘째로는 창비가 온갖 비난에 시달리면서도 작가에 대한 과도하고 일방적인 단죄 여론에 끝까지 합류하지 않고 버텨냄으로써 향후 지속적인 발전에 필요한 도덕성을 확보했다고 믿어서 감사하는 거지요.

- 백 교수님은 이론가이자 문학평론가, 영문학자로서 살아오셨고, 한국 문학에 분단체제론이라는 사회과학적 이론을 세우셨습니다. 분단체제의 여정은 언제 끝이 날까요.

우리가 하기 나름이지 날씨예보 하듯이 언제 끝날 거라고 예측할 성질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근년에 남북관계가 악화되니까 흔들리던 분단체제가 다시 고착되었다고 판단하는 분들이 계신데 지금은 말기국면의 혼란상이요 더욱 위험해진 국면이지 분단체제가 안정을 되찾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참고로 덧붙이면 분단체제론은 사회분석의 도구이긴 하지만 기존 사회과학의 패러다임을 뒤엎는 새로운 인문학이기도 합니다.

1945년의 광복과 동시에 분단된 우리 민족은 6·25전쟁의 참극을 겪고 무력통일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이후, 전쟁이 아닐 뿐 온전한 평화도 될 수 없는 정전협정 아래에서 분단이 일종의 '체제'로 굳어졌습니다. 이런 체제를 제대로 알아서 더 나은 한반도체제로 바꾸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인식능력이 필요하고 개개인의 마음공부를 포함하는 전면적인 전환이 요청됨을 강조하는 것이 분단체제론입니다.

- 민중문학론에서 근대성 담론으로, 다시 분단체제론으로 나간 지적 모험이 경이롭습니다. 연세대학교 김호기 교수는 교수님을 "영문학자라기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아우른 '르네상스적 사상가'였다"고 말했는데요. 이 말에 동의하시는지요.

말씀하신 근대성 담론은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라는 가설일 텐데 분단체제론보다 늦게 제출됐고 근년에 와서야 동아시아 지역을 넘어 서양의 담론계에서도 조금씩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김호기 교수의 평가는 저로서는 면구스러워요. 참다운 인문학은 마땅히 사회과학을 아우르는 것이므로 그걸 추구했다고 르네상스적 운운할 건 아니고요. 게다가 우리나라의 전통적 선비들만 해도 학문과 정치적·사회적 실천을 병행하면서 시(詩)·서(書)·화(畵)에 두루 능했는데 그 기준으로 봐도 저는 무척 초라하지요.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께서 물질적 가난말고도 여러가지 가난이 있고 그런 걸 기꺼이 견디는 것이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하셨으니 그 가르침을 따라 즐겁게 살고자 합니다.

- 〈원불교신문〉도 그렇지만, 〈창작과비평〉도 젊은 독자층 확보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짧고 격정적인 스낵 컬처가 유행입니다. 이런 세태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문화(문학 포함)적 전망을 하신다면.

지난날의 너무 엄숙한 문학이나 논설이 다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더라도 일부 젊은 세대의 풍조 역시 무조건 지지해줄 수는 없습니다. 선천시대가 후천시대로 바뀌는 세상의 혼란에 우리 모두가 휩싸여 있거든요. 어떤 묘책으로 단방에 해결될 사태는 아닙니다. 남녀노소가 서로 이해하고 소통하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각기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적공하는 길밖에 없겠지요.

- 〈정전〉, 〈대종경〉 영역작업에 참여하셨습니다. 창교 100년을 맞은 원불교가 어떤 혁신과 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전>, <대종경>에 이어 올해는 <정산종사법어> 번역을 마무리 짓게 돼서 큰 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교전과 교서는 읽을수록 한국사회뿐 아니라 인류를 위한 소중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특히 불교 등 아시아의 전통에 생소한 나라와 대중들에게 가장 맞춤한 현대의 교법이 아닌가 해요. 원불교의 재가출가 여러분이 이 교법을 연마하고 실행만 한다면 무엇을 혁신하고 변화시킬지 저절로 분명해지리라 믿습니다. 교단의 규모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커지기를 바랍니다만, 일원대도와 삼동윤리를 몸에 익힌 교도가 일정 수만 되면 원불교보다 훨씬 큰 종교나 세속의 운동들에 대해서도 능히 정신적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교단 통일운동에 대한 조언이 있다면 전해주시죠.

요즘 남북화해사업에 대한 교단의 열성이 예전만 못한 것 같습니다. 시국과 정부당국이 그렇게 만든 면도 있겠지만 아무튼 아쉬운 일이지요. 그런데 남북의 화해와 협력, 나아가 한반도의 통합 작업에 교단이 직접 참여하는 일이 얼마나 많으냐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대종사께서 '조선이 다시 조선이 된다(朝鮮更朝鮮)'고 하셨을 때의 '조선'은 반도의 절반인 '남한'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기억해야 하고 온전한 '조선', 온전한 '한국'을 만들어가는 공부와 사업 자체가 정신개벽의 일환이며 '물고기가 용이 되는' 과정임을 더 많은 분들이 공감했으면 합니다.


☞ 백낙청 교수는

ㆍ하버드대학교 철학박사
ㆍ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ㆍ〈창작과비평〉 편집인 겸 발행인
ㆍ시민방송RTV 명예이사장
ㆍ제2회 심산상 / 제1회 대산문학상
ㆍ제14회 요산문학상
ㆍ제5회 만해상 실천상
ㆍ제11회 늦봄통일상
ㆍ제11회 한겨레통일문화상
ㆍ제3회 김대중학술상
ㆍ저술 〈흔들리는 분단체제〉 외 다수

나세윤 기자 nsy@wonnews.co.kr

「원불교 교전」영역 완료 < 교화 < 뉴스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원불교 교전」영역 완료 < 교화 < 뉴스 < 기사본문 - 원불교신문

「원불교 교전」영역 완료
기자명 원불교신문   입력 1971.07.15 
---

7월 16일 인쇄 착수 해외 포교에 활기
<사진설명: 감수진이 영역본 교전을 감수하고 있다.>
반백년 기념사업회의 하나로 추진돼 온 「원불교교전」의 영역이 전팔근 교수(원광대· 해외포교연구소장)에 의해, 착수한 지 1년 2개월만에 완료되었다.
전교수는 영역이 완료된 교전을 지난 6월말 교서 편수 기관인 정화사에 넘겼고, 정화사에서 감수위원회에 회부, 지난 7일 감수를 마침으로써 이제 출판의 과정만 남아있게 됐다.
지난 7월 2일부터 7일까지 서울수도원에서 가진 영역본 「교전」감수에는 박광전(원광대학장) 박장식(서울사무소장) 이공주(서울수도원장) 이운권(교정원장) 법사 등 감수위원 전원과 정화사 사무장인 이공전씨, 원광대학 원불교학과 주임 교수인 송천은씨, 그리고 책임 번역자인 전팔근씨가 참석했다.
일반 출판물과는 달리 종교의 경전을 번역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도, 더구나 처음으로 손을 댄 「원불교교전」 번역은 참고 재료가 없어 애로가 많았고 감수하는 데도 그만큼 고충을 겪었다고 감수진들은 말하였다.
이공전 사무장은 『원불교 영어, 어휘에 대한 뚜렷한 해석(개념규정)이 시급함을 느꼈다』고 소감을 말했다.
한편 책임 번역한 전교수는 『원문에 충실하려고 하니까 종교적인 심오한 진리를 서술하는 데 있어서 형이상학적으로 표현하기가 까다로웠고 독특한 원불교용어가 많이 나오는데 앞뒤 문장에 따라 약간 다르게 표현할 때가 있어서 어휘사용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영역의 애로를 털어놓았다.
영역본 「교전」은 7월 16일 서울 「교학사」에서 초판 3천부를 인쇄하게 된다. 국판 4백 50 「페이지」정도.
영역본 「교전」이 간행되면 침체된 해외포교에 한층 활기를 띄게 될 것 같다.


 원불교신문 webmaster@wonnews.co.kr
 

백낙청 - 나무위키

백낙청 - 나무위키

백낙청

최근 수정 시각: 


external/www.sis...
白樂晴

1938년 1월 10일 ~ (83세)

소개 웹사이트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4. 비판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 정치 평론가.

출판사 창작과비평사의 발간인으로 유명하다. 1962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한국 문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순수문학을 비판하고, 민족문학, 참여문학을 주창하며, 이에 대한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고, 나아가 이를 세력화하여 대한민국 문학계의 주류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가 제시한 민족 문학론, 분단 문학론은 대한민국 문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반독재, 반미 운동 등 사회 운동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직접 작품을 쓰는 문학가가 아닌 문학 평론가에 불과하지만 현 대한민국 문학계에서 '원로', '정신적 지주' 대우를 받으며 '문화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또한 정치 평론, 논쟁 등에 참여하고 선거 때 후보 단일화를 주도하는 등 정치권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 생애[편집]

친가는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었지만, 1938년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친일 관료 백붕제였다. 아버지가 고위 친일 공직자였기 때문에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다.

1955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브라운 대학교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어학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 고등학교 때 이미 영어독일어프랑스어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경기고 재학 중 '뉴욕 헤럴드 트리뷴'이 주최하는 세계 고교생 토론 대회에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참가한 바 있다.

해당 영상은 1954년 당시 방송에 출연한 모습을 담고 있다.



브라운 대학교 졸업 당시 전체 졸업생을 대표하여 졸업 연설을 하였고,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영문과에 진학했다. 석사를 마친 후 일시 귀국하여 군 복무를 마쳤는데, 친일 명문가 자손,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남다른 배경 외에도 자진 입대한 것 때문에 지식인 사회에서 주목을 받았다. 유학이 합법적 군 기피 수단이었던 시절에 입대를 위해 귀국한 그의 사연은 1960년 한 일간지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후일 인터뷰에서 사실은 귀국하면 입대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미국 생활이 싫증나서 귀국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군 복무를 마친 후 다시 하버드 대학교로 가 박사 과정을 밟던 중 서울대에 교수 자리가 나자[1] 귀국하여 1963년 25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 영문과에 전임강사[2]로 부임했다. 1972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 1월 당시 27세로 서울대 전임 강사이던 때에 공평동 태을다방 옆 문우 출판사 한 켠을 빌어 창작과비평 1호를 펴냈다. 130여쪽에 불과한 얇은 잡지에서 그는 순수문학을 “지배 계급의 오락과 실리에 이바지”하는 도구라고 폄훼, 비판하면서, 분단 현실을 극복하고 서민의 고통을 대변하며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는 것이 문학과 지식인의 소명임을 선언했다. 그는 문인을 시대를 이끄는 지식인으로, 문학을 민중의 현실을 보듬는 손길이라고 주창했다.

그 후 '창작과비평' 편집인으로서 진보적 평론 활동으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창비는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 정황과 맞물려 민주화를 열망하던 지식인 사회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아르놀트 하우저가 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완역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 진보 문학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1974년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해직되었다가 1980년 복직되었다.

1974년 11월 고은과 함께 진보 문인 단체인 '자유 실천 문인 협의회' 결성을 주도했다. 자유 실천 문인 협의회는 우리나라 진보, 참여 문학계를 대표하는 단체로 자리잡았으며, 1987년 '민족 문학 작가 회의'로 확대 개편되었고 2007년 '한국 작가 회의'로 또다시 명칭을 바꾸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백낙청은 꾸준히 참여하면서 이사장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백낙청은 자신이 발행하는 창비와 작가회의 활동을 통해서 참여문학, 민중 문학계의 대표주자로 고은을 띄워주기 시작한다. 백낙청은 당시 성추문으로 얼룩져 있던 고은의 과오를 철저히 묻어둔 채 고은을 '우리 문학사의 우뚝한 존재, 미당 서정주를 쉽게 넘어선다.'고 찬양하여 고은을 한국 문학계를 대표하는 문학가로 만들었다.[3]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창비가 고수해온 민중ㆍ민족문학 기조는 거의 무너졌다고 보는 게 대체적 시각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선거 때마다 진보 지식인 사회를 대표하여 민주 개혁 진영 후보단일화를 주문한 것에 대해서도, 민주 개혁 진영이 보수 성향의 국민들로부터 오히려 외면을 받게 만든 것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일부 정치인들은 "선출되지도 않은 권력인 이른바 '진보 원로'가 왜 민주적 정당성도 없이 뒤에서 정치인들을 배후 조종하느냐"란 이의 제기를 하기도 하였다. 특히나 부친과 백부가 납북된 처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 보수로부터 받는 비판보다 진보로부터 받는 비판이 더 크다. 후보 단일화로 진보 진영을 민주당계의 '민주 개혁' 세력의 종속물로 만들고, 계급적 좌파 정치 세력보다 우파 정치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2002년 국내유일의 시청자 참여방송인 재단법인 시민방송 RTV의 이사장역할을 맡았다.(2007년까지)

2003년 교수직을 정년 퇴임하였고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정년 퇴임 이후에도 민족 문학론의 관점에서 통일운동 등의 일선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그는 '연방제 통일론'을 적극적으로 설파하여 '연방제 전도사'라고 불린다.[4]

2005년 6.15 공동 선언실천 남측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6년에는 북핵문제에 관해서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안전 보장을 해주면 핵을 포기하겠다.'는 북한의 주장을 미국이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06년 노무현 정부 말기에 진보 계열에서 조차도 노무현 정부가 실패라는 비판이 이어지자, 노무현 개인의 스타일 때문이라는 투로 이야기했다. 그는 "참여정부에 모든 책임 있는건 아니다. 책임은 참여 정부에도 분명히 있고, 진보개혁세력에도 있고 보수적인 거대 야당이나 거대 언론에도 골고루 있다. 참여 정부의 책임 중에서도 정부의 정책 실패와 대통령 통치 스타일에 관한 부분 등을 구별해야 한다. (국민 지지도 하락에) 정부의 정책 실패도 있고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 국민의 지지를 잃게 한 면도 분명히 있다"라고 말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때 범여권 후보 단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0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 진영의 후보 단일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곽노현 후보로 단일화를 이끌었다.

2010년 천안함이 폭침하자 적극적으로 나서서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는 지금까지 나온 정부 발표는 모두 엉터리라고 주장했다. 또 정부가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천안함의 침몰은 북한의 어뢰 공격 때문이 아니라 남북 대결 상태를 원하는 어떤 세력들이 침몰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정일이 지시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그러한 정치적 결정을 내렸을 리가 없다며 일축했다. 천안함 사건 민군 합동 조사 결과 북한의 소행으로 결론이 나고 이명박 대통령의 담화가 발표되자 “이번 대통령 담화는 거의 초법적인 조치였다. (중략)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내놓은 7·7 선언 이래 남북 관계 22년의 성과를 단번에 없애버리는 것이다. 동시에 남북 관계의 발전과 맞물려 진행되어온 한국 민주주의를 다 뒤엎을 수 있는 엄청난 행위다. (중략) 박정희는 말하자면 일시불로 정변을 일으켰고, 전두환은 12.12와 5.17의 2회 할부로 헌정 질서를 뒤집었다. 이번 정권은 군사 쿠데타를 안하는 대신 5년 장기 할부제로 야금야금 대한민국의 헌정 질서를 변질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라면서 일종의 쿠데타에 비유하며 극렬히 반발했다. 백낙청은 이후 각종 강연과 인터뷰에서 지속적으로 천안함 폭침의 진실 규명을 촉구했다.

특히 2015년에는 신경숙의 표절 사건과 관련하여 많은 문인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표절인데도 '의도적 표절로 볼 수 없다.'며 무리하게 실드를 쳐주다가 역풍을 맞은 것.[5]

2015년 11월 25일 창비 편집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아직도 창비 지분 31.1%를 보유한 최대 주주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데다 새 발행인, 주간, 부주간을 맡게 될 차세대 인사의 상당수가 그와 사제 관계 등으로 엮여 있기 때문에, 아직도 창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수렴청정. #

그 후 공적인 자리에 등장하지 않았다 2020년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자살하자 시민대표로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3. 가족 관계[편집]

백부가 백병원으로 유명한 의사양반 백인제이다. 형은 인제대학교를 설립한 백낙환[6]이다.

먼 친척으론 시인 백석[7]과 백선엽백종원이 있다.

원불교 여성회 초대 회장 및 사단 법인 한울안 운동의 대표를 맡은 한지현 前 광운대 교수가 부인이다. [8]

백영경[9]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교수가 백낙청의 딸인데, 창비 편집 위원직도 맡고 있다.

장남 백웅재[10]는 미식 평론가 및 전통주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4. 비판[편집]

군사정권의 서슬퍼런 칼날 속에서 저항한 공이 있으나 그런 그에게도 과가 존재한다. 가장 큰 과는 성추행을 일삼기로 악명이 자자했음에도 거짓말로 일관한 고은 시인을 한국 문단의 원로 위치에 올리고 과감하게 내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어떤 연유로 고은의 성폭행 문제를 고발하지 않고 묵인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권력이 없었더라면 일개 파계승 시인에 지나지 않을 고은을 한국 문단이 미투 운동이 시작될 때까지 고발하지 못하게 한 것은 최종적으로 그가 묵인했기 때문이다. 고은의 성폭행 논란은 성범죄를 시작한 고은이 뒤늦게 정당한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흐지부지되었으나 백낙청에 의해 뒤틀린 한국 문단의 구조를 청렴하게 개편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 순수문학계의 주 창작층이자 주 수요층인 페미니즘 진영의 경우 고은 시인의 만행에 뒤늦게라도 미투 운동으로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였으나 이를 묵인한 백낙청에게 직접적으로 비판한 적이 없다. 결국 어떤 이유라도 페미니즘 진영과 한국 진보 및 좌파는 백낙청의 오점을 공론화하길 거부하듯 고은의 논란 당시부터 2년 넘게 침묵하고 있다. 당장 트페미여쭉메워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 및 레진코믹스 작가 부당 대우 논란 및 소녀전선 K7 업데이트 연기 논란 당시 페미 지지 작가진, 페미니즘 진영을 지지하는 한국 문단, 여성가족부와 대한민국의 여성인권단체가 남성 성폭력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무색하게도 어느 누구도 한국 문단의 원로인 백낙청의 묵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탄원하지 않았다.

또한 북한에 대해 지나치게 미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비판 대상이다. 북한이 (주로 안보 문제로) 논란과 사건사고를 일으킬 때마다 주로 다른 세력이 북한에 악영향을 준 것이라는 논점일탈을 고집하기만 하였다.

또한 한국 순문학계에서 주변 문인들이 도서정가제를 강력히 추진할 동안, 백낙청은 도서정가제를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입장을 표한 적이 없어 독자들의 도서정가제가 악법이라는 호소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생겼다.
[1] 1963년 2월 4일 영문과의 이양하 교수가 타계함.[2] 현재는 없어진 제도이나 사실상 정교수가 보장된 자리[3] 결국 이문열처럼 고은을 비판한 작가는 그로 인해 문인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었고 한국 문단에 백낙청과 고은을 중신으로 한 악성 파벌이 형성되어 2017년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나서야 백낙청과 고은의 오점이 재조명되었다.[4] 하지만 연방제 통일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 통일반대론 참고.[5] 이때 백낙청과 창비에 대한 비판의 선봉에 선 사람이 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 권성우 교수이다. #[6] 194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이과 을류(의예과에 해당)에 입학하여 1951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7] 항렬로는 백석이 백낙청의 할아버지 뻘이다.[8] 백낙청 교수는 원불교 영어교전 번역을 주도하는 등 부인과 함께 원불교 내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다. 공식적으로는 무교지만 원불교의 가르침에 매우 호의적이다.[9] 서울대 서양 사학과 졸업. 미 존스 홉킨스대 문화 인류학 박사.[10] 서울대 중어 중문학과 졸업

[도올김용옥] 동경대전 02 20세기 우리 사상계는 지독한 공백기 - 지식은 사람을 점점 좁게 만든다 - 지식인...

[도올김용옥] 동경대전 02 20세기 우리 사상계는 지독한 공백기 - 지식은 사람을 점점 좁게 만든다 - 지식인...

내가 본 함석헌





내가 본 함석헌 책읽기

2006. 5. 13. 21:14



https://blog.naver.com/stupa84/100024304420
번역하기




『내가 본 함석헌』

조우석 |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또 한 권의 믿음직한 함석헌 평전으로 우리 곁에 다가온 읽을거리 『내가 본 함석헌』을 이번 호를 포함해 두 차례로 나눠 리뷰한다. 실은 "한 10여 회라도 썼으면…" 싶은 마음이다. 『내가 본 함석헌』은 험했던 우리 시대에 흔치않은 두 인격인 함석헌과 김용준의 만남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평전 이상의 평전으로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중 세월이 좋아지면 수십 권의 함석헌 평전이 나오겠지만, 그 어느 책도 이 텍스트를 비껴갈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도 든다.

그만큼 소중한 증언자인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는 정말 내게 각별한 분으로 남아 있다. 게으른 탓에 그 어른을 직접 뵌 적은 없으나 여러 계기로 내게 다가왔다. 이를테면 그가 관여했던 1980년대 신과학운동 관련서를 보며"중진 화학자의 이런 탄력적인 과학관이라니…" 하며 그를 단단히 입력했다. 당시 학계 지원사업이 활발했던 핵심 공간이 대우빌딩 뒤 대우재단빌딩. 그때 그곳은 문화부 기자의 주요 출입처 가운데 하나였다.

그곳에 간혹 들릴라치면 그곳의 간판스타인 국제정치학자이자 미술사학자인 동주 이용희 선생과 함께 김용준, 그분의 손길이 느껴졌다. 젊은 내가 지적 자극을 일정하게 받았음은 물론이다. 당시 막 뜨던 도올 김용옥의 맏형이 그 어른이고, 거의 깝친다는 수준이었던 도올의 스타 기질이란 알고 보면 '장형 콤플렉스'라는 점, 어렸을 때 엄한 장형으로부터 숱하게 종아리를 맞았다는 일화도 재단 후배로부터 전해 듣고 웃었던 기억이 선하다.

김용준과 김용옥이 동향인 천안 출신이라서 친근감을 가졌으나, 김용준의 사람됨에 관한 일화 역시 우연치 않게도 천안 분으로부터 들었다. 그분은 신문기자 대선배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의 이계익 전 문화일보 부사장. 연세와 상관없이 가장 유연하고 탄력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그분은 김영삼 정부 시절에 장관을 역임했지만, 내가 알기에는 한국전쟁과 관련한 그중 리얼하고 잘 쓰인 논픽션의 저자다.

거의 30년 전인 1978년에 선보인 『소양강 뱃사공』(정우사)이라는 매력적인 책. 그 많은 편집국 후배들 중 당신께서는 내게 그 책을 서명해주는 친절을 베푸셨다. 예의 삼아 읽어야 했던 그 책은 험한 현대사의 복판을 걸어야 했던 바로 앞 세대의 삶에 관한 너무도 많은 정보가 담긴 보물단지로 다가왔다. 지금의 나는 그 책을 한국전쟁 시기의 중요한 기록 중 하나로 꼽는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 거의 백미에 속하는 당시 전쟁상황의 일상사를 다룬 표현이다.

명문 배재중 1년생인 소년 이계익은 창졸지간에 잃은 아버지 유해를 천안여중 옆의 둑방에 가매장을 한 뒤 인근 시골 광덕에 내려간다. 그게 개전 바로 한 달 전후. "새우젓독 같은 시커먼 폭탄을 주르르 쏟"(19쪽)는 B29폭격기의 공습을 일상으로 여기며 마을 우물가에서 잡아들인 갯붕어의 배를 따던 그는 2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 인민의용군을 마주친다. 놀라와라. 장총 한 자루씩을 등에 맨 채 "괴뢰와 더불어 싸워 죽은/ 우리들의 죽음을…" 하는 군가를 부르고 남진을 하던 그들은 배재의 이웃 이화여중 출신 패거리였다.

"'너, 나 모르겠니? 기억 없어?' 이웃한 여중의 5학년 간부였다면서 반갑다는 기색이었지만,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모두 자원한 의용군이라고 했다. 쑥물을 들인 후줄근한 무명군복이 땀과 먼지에 찌들어 궁상스러웠다. 가슴, 어깨, 등에 얽힌 위장망에는 시든 풀잎이 몇 개씩 늘어져있었다. 장총을 짚고 선 계집애, 따발총을 거꾸로 둘러맨 계집애, 그것도 없는 애는 약통을 걸쳐메고 있었다."(23쪽)

전쟁의 일상에 관한 디테일로 이만한 글을 나는 본 일이 드물다. 중요한 것은 저자다. 개전 초기에 아버지를 잃었고, 막내 동생마저 굶어죽는 모습을 지켜 봐야 했던 그는 10대 시절 '전쟁 마당의 들개'로 추락한다. 마을 공회당 구호양곡을 팔아먹는 것 따위야 여반장이었다. 급기야 천안 한 교회의 책을 훔치다가 붙잡히고 만다. 그때 운명처럼 만나게 된 '이계익의 밀리에르 신부'가 다름 아닌 청년 김용준이었으니!

"'이 세상에 악인은 따로 없습니다.…' … 딱히 무슨 뜻인지 짚이지 않는 대목도 많았으나 계속되는 그 이야기는 서서히 뜨거운 강물이 되어 나의 발끝에서부터 차 올라오는 것이었다. 드디어 가슴 어깨 그리고 머리까지 물 속에 잠기는 듯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 젊은 분은 나의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뜨거운 전기가 흐르고 있었다.… '내일 천안중학교로 와서 나를 찾으세요. 화학을 가르치는 김용준입니다.' '…' '아니면 저녁시간에 교회로 오세요. 영어 공부들을 하고 있으니까…'"(84-85쪽)

김용준이라는 인격을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할까. 또 사람 사이의 인연이라는 것이 이토록 우연이면서도 절묘할 수 있을까. 전쟁 직후의 그런 사정은 『내가 본 함석헌』에도 내비치고 있다. 즉 1951년부터 3년간 김용준은 천안에서 화학, 독일어, 영어를 가르쳤다. 그때 김용준은 "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23쪽)을 만난다. 함석헌이 강연차 그 학교에 내려왔던 것이다. 당시 함석헌을 처음 뵐 때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33쪽)고 털어놓았던 김용준은 지금 천안중앙장로교회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김용준이 무교회주의자 함석헌 추종자라는 이유로 이단으로 찍혀 교회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이다. 그게 1950년대 시절의 얘기다. 이러저런 이유로 『내가 본 함석헌』은 앞의 내 판단대로 인격과 인격이 만난 '두 겹의 평전'이다. 다음 호에는 그렇게 교직되는 인연 속에서 바라본 함석헌의 모습을 리뷰하겠지만, 다소 인용이 길었던 이번 호의 잠정적인 주제는 간단하다. 우선, 만날 사람은 만나게 돼 있다는 점이다. 사람살이란 때론 그토록 오묘하다.

또 교육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평균적이고 산술적인 실력 끌어올리기가 아니다. 상대의 그릇을 발견하는 행위일 뿐이다. 또 그걸 재확인해주는 보증작업이다. 이계익을 김용준이 발견하고, 그 김용준을 함석헌이 재확인해주고…. 그러면 함석헌은 누구인가. 여러 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나는 20세기 인물 한 사람을 꼽으라면 그를 꼽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내가 본 함석헌』은 그 모습이 그런대로 입체적으로 담겨 있다.



2



『내가 본 함석헌』

조우석 |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halfguy@hanmail.net





『소양강 뱃사공』의 저자인 10대 이계익이 운명처럼 '이계익의 밀리에르 신부'에 다름 아닌 20대 청년 김용준을 마주치고, 그 김용준은 함석헌이라는 문제적 인물과 조우를 하고….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돼 있다고 나는 지난 주 이 지면에서 말했다. 그 점에서 『내가 본 함석헌』은 사람과 사람, 인격과 인격이 만난 '두 겹의 평전'이었다. 교육이라는 것도 상대의 그릇을 발견하는 마주침의 행위일 뿐이라는 비약 아닌 비약까지 내친 김에 해봤다.

『내가 본 함석헌』 역시 그런 만남으로 가득 차 있다. 함석헌이 함석헌인 이유는 세상이 다 알듯 다석 유영모와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설립했던 오산학교에 함석헌은 3학년으로 편입했고, 그때 두루마기에 고무신 차림의 교장인 다석을 마주친 것이다. "전 생애를 통해서 크게 한 번 도약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게 함석헌의 회고인데, 그 말의 무게를 거듭 음미해볼 만하다. 그건 쌍방향이다. 다음 다석의 말도 기억해두자.

""내가 이번에 오산에 왔던 것은 함 자네 한 사람 만나기 위해서였던 가 봐." 함 선생님은 류 선생님의 이 한 마디 말씀을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살아왔다고 류영모 선생님의 1주기를 기념하여 모인 자리에서 고백하였다."(92쪽)

우리의 20세기 지성사에서 다석과 함석헌이 없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나는 종종 한다. 다소 거칠게 말하면 20세기란 서구 근대학문의 이식사에 다름 아니고, 그것은 대학이라는 제도를 통해 지식권력의 자리를 차지해왔다. 피할 수 없었던 과정이었지만, 그것이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식민성이야말로 우리를 괴롭히는 핵심 요소다. 다석과 함석헌은 우리의 부끄러움 내지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씻어주는 위안이다.

그 점에서 구한말 민족종교 이후 다석-함석헌으로 이어지는 족보야말로 '20세기의 장외場外 사상사'의 줄기로, 장차 거듭 연구되어야 할 대상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퀘이커교도였던 두 분이 어떤 형태로든 기독교라고 하는 수입 종교와 얽혀있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 바로 그런 근대성의 측면 때문에 민족종교가 갖고 있는 한국 사상의 원형은 근대적 변용과정을 거칠 수 있었고, 이후 20세기로 이어진다는 게 내 판단이다.

어쨌거나 『내가 본 함석헌』에서 유심히 들여다 본 대목은 함석헌의 인간적 약점에 대한 서술이었다. 다석 역시 함석헌에 대해 실망을 안는 계기가 되었던 한 여성과의 스캔들 말이다. 혹시 그 여자문제를 마치 없던 일처럼 처리했다면, 이 평전은 '우러러보기도 힘든 함석헌'의 이미지만을 강조하면서, 국내 평전들이 저지르는 우상화 함정에 빠질 뻔했다. 그러나 있었다. "아내 아닌 다른 여인을 범하였다"(123쪽)는 구체적인 서술을 포함해 3개 절節에 걸친 서술은 인간 함석헌의 모습을 보여준다.

상대가 오모 여인이라는 것, 그 여성은 천안 씨알농장에서 함석헌의 취사를 돕던 사람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일 것이다. 정권의 사주를 받은 함석헌의 조카뻘 되는 조순명이라는 사람이 『거짓 예언자』라는 책을 써서 재야세력의 핵심인 함석헌을 무너뜨리려 했다. 그는 90년대 말 필자가 근무했던 신문사까지 찾아와서 함석헌이 얼마나 호색한인가를 내게 강조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 당시에는 당혹스러웠고, 근거 없는 호색한의 이미지를 잠시 주입시켰음을 고백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할 수 없고, 한마디로만 들어주십시오. 여성문제에서 잘못한 것입니다. 놀라고 슬퍼하실 줄 압니다마는 사실입니다. 친구들 다 소식 끊어졌고 류(영모) 선생도 매우 섭섭하게 여기시는 중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우선 형이 나를 친구로 계속해 대해주겠느냐 하는 데 있습니다. 나로서는 그럴 염치 없고, 형의 넓은 생각에 달렸습니다. …하지만 내 혼이 상처를 입었습니다(1960년 9월 30일자)."(127쪽)
그 편지는 함석헌이 독일에서 유학중이던 신학자 안병무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그때 함석헌은 환갑 나이였고, 단 한 번 외도로 그런 고통을 겪었다. 그의 나이 열일곱에 결혼했던 부인이 일생을 문맹으로 마쳤다는(133쪽) 점도 나는 이 평전에서 처음 알았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함석헌을 종교적 성인 반열에 올려놓고, 그의 윤리를 재려 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런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옳다. 내 경우 이 평전을 통해 비로소 사람 함석헌이 친근하게 느껴졌음을 고백한다.

그런 함석헌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저자는 "나는 함석헌을 서슴없이 '정신적 낭만주의자(Spiritual Romantist)'라고 부른다"(39쪽)고 말한다. 포괄적인 규정으로는 공감할 수 있다. "워즈워스뿐만 아니라 셸리, 바이런, 브라우닝 등 19세기의 낭만주의 시인들을 즐겨 읽었다는 이야기와 또 "나는 낭만주의자이지, 별 수 없어."라는 그 자신의 고백"(34쪽)에 대한 인용도 그걸 뒷받침한다. 흥미롭다. 저자는 그 말을 주로 멘탈리티에 대한 규정으로 끌고 간다.

하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함석헌의 공적 생애가 만개한 1960년대,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 역시 현실정치에 대한 인식에 앞섰던 낭만주의 멘탈리티가 아닐까 싶은 나의 생각을 조심스럽게 개진하고 싶다. 그러나 함석헌은 동시에 1인 저널리스트이자, 노장사상과 인도사상에 대한 해석자이기도 했으며, '고난의 역사론'이라는 독자적인 사론을 가졌던 재야 한국사 연구자다. 무엇보다 그는 걸출한 시인이기도 했다. 다음 인용문에서 보듯 우리는 함석헌 연구의 첫 발을 뗀 것뿐이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 그것은 내 천분도 그렇겠고, 나 자신 삶에 참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우리 역사가 그런 역사다. 한 사람의 다윗도 예레미야도 난 일이 없고, 단테도 밀턴도 난 일이 없다. 그 좋은 자연에 워즈워드가 못 났고, 그 도발적인 타고르가 못 났다. … 나도 영원을 지향하는 충동을 품고 고난의 역사의 짐을 지는 한 개 심정인 이상 시가 왜 없으리오만, 그것은 품어주는 날개 없는 알같이 다 곪아버릴 수밖에 없었다."(함석헌의 시집 『수평선 넘어』 머리말 재인용, 6쪽)






http://www.kpm21.co.kr


[출처] 내가 본 함석헌|작성자 stupa84

김시천 제14강 함석헌 노장 해석의 특징

 김시천 교수의 함석헌과 『노자』



제1강 『노자』제대로 읽기
제2강 『노자』에 관하여
제3강 『노자』와 무위 1
제4강 『노자』와 무위 2
제5강 『노자』와 페미니즘 1
제6강 『노자』와 페미니즘 2
제7강 『노자』의 소국과민
제8강 『노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
제9강 상상력과 과학
제10강 『노자』와 자연
제11강 『노자』와 성인 1
제12강 『노자』와 성인 2
제13강 함석헌과 『노자』
제14강 함석헌 노장 해석의 특징
=======================


====

제14강 함석헌 노장 해석의 특징

◆ 새로운 방식의 노자 읽기


▲ 새로운 방식의 무위 개념

그럼 몇 가지 사례를 통해서 함석헌 선생님의 독특성이라기 보다는, 노자를 그 시대 전체의 자리에서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따져보는 시간을 가져야 겠죠.

7쪽에 있는 내용. 재밌는 내용 “Let them leave it untouched”는 예전에 말씀드렸죠. 그래서 이걸 말로 넘어가셨지만 도올 선생은 Let it be를 부르는 걸로 방송에서 연출도 하셨죠. 엔터테인먼트도 갖고 계신 훌륭한 분이시니까. 그건 놀라운 재주예요, 진짜. 저도 그런 재주가 있었으면. 자, 그 다음에 그걸 이어서 도올 선생이 해석했던, 8쪽을 보시면, 박스에 있죠.

[노자는 그 컵을 채우려는 인간의 행위유위라고 부른다. 유위란 곧 존재에 있어서 허의 상실이다]

동아시아 개념자체가 들어갑니다. 허는 본래, ‘비어있다’ 그래서 무 자와 비슷한 것처럼 쓰는데 원래 허자의 고형, 허 자가 나무가 드문드문, 풀이 드문드문 나 있는 허허벌판을 뜻합니다. 그런 용례도 있어요. 존재론적 무 개념이 아니라는 거죠.

비어있다, 비우다. 그건 자연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기의 무한한 가능성은 그대로 있다는 거예요. 허의 상실은 기의 상실을 얘기합니다. 기가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 열역학적으로 말하면 엔트로피의 증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 반대 방향의 행위, 즉 빔을 極大化하는 방향의 인간의 행위를 바로 무위라고 부르는 것이다] 생태와 노자와 만나서 새로운 방식의 무위개념이 탄생하게 됩니다.

[노자에게 있어서는 마음을 채우는 방향의 우리의 심적 작용이 곧 유위요, 마음을 비우는 방향의 심적 작용이 곧 무위인 것이다.”(『노자와 21세기』, 189-90쪽)]

이런 식의 표현들은 고전적인 용례에도 있었던 것이죠. 허정이라고 했어요. 그런 용어의 의미가.

그런데 이 속에서 우리는, 빝에 세 번째 줄을 보세요. “이러한 도올의 해석은 이미 함석헌의 ‘이야기’ 속에 간명하게 나타나 있다.” 앞에는 이야기로 나옵니다. 옛날에 민둥산 돼가지고 거길 어떻게 조림할 것인지가 필요해서 외국 조림 전문가를 불렀더니 “냅둬유” 라고 이야기로 합니다.

그런데 도올 선생은 개념적으로 얘기하는 거죠. 오른 쪽은 철학이고 왼 쪽은 철학이 아니냐? 저는 과감하게 ‘철학에서 이야기로’라는 용어를 만들어본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해석적 틀을 먼저 보여주고 있었던 게 함석헌 선생의 해석방식이었단 겁니다.


▲ 도가와 아나키즘

『노자』는 기본적으로 유위보다 무위를 중시하고, 문명보다 자연을 중시하고, 간섭보다 아나키를 중시하는 것처럼 얘기해요. 특히 도가하면 아나키즘으로 해석하는데.

얼마전에도 제가 도가사상과 아나키즘이라고 하는 논문을 읽다보니까, 그 속에 이와 같은 것은 당연한 전제처럼 얘기해요.

저는 그런 전체자체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죠. 이런 도식자체가 고대중국에서 이미 형성하는 과정에 있었는데, 그 형식을 전제한 다음에 도가와 아나키즘이 된다.

일단 아나키즘이란 사상 속에는, 그 분은 그런 글을 썼어요, 도가는 인간의 자유를 중시하는 사상이기 때문에 자유를 최고로 실현하고자 하는 아나키즘과 통할 수 있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 아나키즘 속에는,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거의 대개가 강력한 개인주의를 전제로 합니다. 완벽한 개인들을 전제로 해요.

그런데 도가에는 개인에 관련한 얘기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개인은 딱 한 사람, 제왕밖에 없어요. 나머지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아닌 제왕의 만물일 뿐이거든요.

그럼 그것이 어떻게 아나키즘과 동일한 방식의 사유라고 말할 수 있는가. 참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얘기죠. 노자를 이야기하면서 아나키즘과 가까이 갈 수 있는 부분은 다 장자에서 끌어와 노자에게 얘기해버리거든요.

하필이면 그런 혐의는 있어요. 소국과민 부분을 같이 읽었었죠. 그런데 그 부분이 장자에서 인용돼요. 굉장히 전원적인 부분을 쫙 이야기하면서 인용되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노자 자체는 어떤 주석서, 어떤 시대에 놓고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했었죠. 어떻게 본다면 함석헌 선생의 얘기가 전통과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러나 우리가 주로 보는 노자와 장자와 관련한 텍스트들은 다 위진시대 것들이 대부분이에요. 그 앞의 것도 안 보고 그 뒤의 것도 안 봅니다.

하지만 함석헌 선생은 송대의 모음집을 봤기 때문에, 그게 바로 노장전통에 있는 겁니다. 그런 주석서들을 봤기 때문에 우리가 보기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함석헌 선생님 입장에서는 고전에서 끌고 온 것이거든요.

그래서 9쪽을 보면, 맨 밑에 새롭게 시작되는 부분. 이건 기본적인 함석헌 선생의 전제입니다.

[그래서 함석헌은 공자의 도(道)가 목적에 이르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라면 노자·장자의 도는 길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한없이 크고 넓은 것이고 삶의 근본, 있음의 밑바닥이라고 말한다.]

노장을 일단 높이 올려놔요. 올려놓는 까닭이 뭐냐. 실현의 방법이지만 실현하기 위한 내용 그 외침의 목소리가 어디에 있냐면, 있음의 밑바닥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즉, 현실의 기저에 해당된다는 뜻이겠죠.

[“『장자』는 그저 단순히 시원한 문학만이 아니다. 이것은 피눈물이 결정된 저항의 문학이요, 삶의 부르짖음이다... 그렇게 볼 때 평화주의란 결코 평안에서 오는 한가한 말이 아니요, 뼛속에서 우러나오는 비폭력의 부르짖음임을 알 수 있다.”(, 34쪽)]

“뼛속에서 우러나오는 비폭력의 부르짖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말하지 않아도 늘 갖고 있어요. 그리고 이 속에는 뭘 갖고 있냐면.

[“이제 역사는 크게 변하려 하고 있다. 물질주의, 지식주의, 권력주의, 적극주의의 서구문명이 차차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사람들은 그 산업 방법, 그 학문, 그 종교를 근본에서 고쳐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때를 당했다.”(, 34쪽)]

지금에 와서 이런 얘기를 워낙 많이 했기 때문에, 뒤늦은 얘기 아니냐, 내용 없는 얘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부터 2,30년 전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동양학을 학문이 아니다, 봉건시대의 유물이라는 게 지배적이었던 시대에 이와 같은 주장을 한다는 것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죠.


▲ 새로운 방식의 노자 읽기

그 다음 페이지를 보면, 그 동안 우리 논의에서 하상공 식의 노자 읽기가 얼마나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다른지 그리고 얼마나 회남자와 닮았는지. 그런 방식의 것들은 이미 다 확인했죠.

자, 그런데 그와 같은 권모술수적인 내용을 담은 것마저도 함석헌 선생님의 해석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바뀝니다. 비교를 한번 해보죠. 11쪽 보시면, 전에도 읽었던 부분인데.

[“모으려 할 때는 반드시 흩으는 법이요, 약하게 만들려 할 때는 반드시 세게 만드는 법이요, 무너뜨리려 할 때는 반드시 일으키는 법이요, 뺏으려 할 때는 반드시 주는 법이니, 이것이 이른바 숨은 밝음이다. 부드러움이 굳음을 이기고, 약한 것이 센 것을 이기나니, 고기가 깊은 소에서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이요, 나라의 날 선 그릇을 남에게 보일 수 없는 것이니라.”(將欲翕之, 必故張之; 將欲弱之, 必故强之; 將欲之, 必固興之; 將欲奪之, 必固與之. 是謂微明. 柔勝剛, 弱勝强. 魚不可脫於淵, 國有利器, 不可示人. , 44쪽)]

이 부분을 바로 어진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이 부분을 개인의 제심탈정, 즉 자기 마음을 잘 컨트롤하고 정욕에서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얘기합니다.

이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 권모술수적인 성격, 그렇게 해석되는 미명이라는 단어는 좋은 게 아니라 음흉한 거예요. 달리 말하면, 뒷통수 치는 행동방식을 얘기하는 겁니다. 하상공 이 주석을 이 부분을 아주 쉽게 해석합니다.

[“먼저 열어주고 펴주어라”는 것은 그들이 사치와 음란을 끝까지 다하게 해 주려는 것이다. “먼저 강하고 크게 해 주어라”는 것은 재앙과 환란을 만나게 하려는 것이다]

자, 이런 식의 말들의 의미가 뭔가가, 우리 입장에서는 이게 권모술수일 수도 있지만 정치가들은 일부 이런 테크닉을 가져야 합니다. 청렴결백 강직하기만 한 정치가는 끝까지 갈 수 없잖습니까.

하지만 그가 의로운 일, 의로운 말, 의로운 선택만을 통해서 그럴 수 있느냐. 그걸 지키기 위해서 조절할 필요는 있는데, 이 속의 얘기는 그런 게 아니죠. 훨씬 더 강하죠.

[ “먼저 일으켜 세워주라”는 것은 그들이 교만하고 위태롭게 하려는 것이다] 잘 보세요. 교만, 위태 등등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가지면 가질수록 고꾸라지기 쉬운 덕목들이에요. 그런 것들을 하게 부추기라는 말이죠.

[“먼저 주어라”고 한 것은 그들이 탐욕스런 마음을 다 부르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게 지금 우리들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될 거예요. 왜 그러냐. 과거에는 어떤 사람이 세져요. 그가 나의 재산을 원해요. 그럼 다 주면 됩니다. 하지만 고꾸러진다. 걔 꺼 다 갖고 오면 돼요.

회남자에 뭐라고 나오느냐면, “자꾸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려고 하지마라. 천하의 창고가 다 너의 것인데, 황실 창고에 두나, 백성들 창고 곳곳에 풀어두나 뭐가 다르냐” 는 거예요.

이것도 발상의 전환으로부터 비롯되는 겁니다. 천하의 황제가, 제왕이 천하를 통치하는 방식은 자꾸 그런 자리옮김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필요할 때 가져다 쓸 수 있잖아요. 그들은 그렇게 했고.

그런데 그런 방식의 논리가 이미 전제돼 있기 때문에 이런 얘기가 가능한 겁니다. 달라 그러면 다 줘요. 하지만 니꺼 내가 뺏어갔으니까 가져온다, 그런데 그때 이만큼 뺏겼으니까 이만큼 가져오겠죠. 이게 좋은 이야기라고 할 수 없죠.

[이 네 가지 일은 그 방법이 보이지 않으며, 그 효과는 아주 좋다] 번역이 끝내 줍니다. 그 효과가 밝다가 아니라 효과가 아주 좋다고 하니까, 함석헌 선생의 번역을 보면 무릎을 딱
치게 만드는 번역어들이 툭툭 튀어 나와요.

그 다음 단락을 보죠. 박스에 든 글이요.

  • [“그러나 보통 밝다면 환한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모를 사람이 없지만, 
  • 그러나 이 천하만물을 살리는 참빛은 빛 아닌 빛이다. 
  • 그러므로 이(夷)요, 희(希)요, 미(微)라고 한다. 
  • 숨은 빛, 가리워진 빛이다. 
  • 예수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왜 숨겨져 있고 가리워져 있나? 
  • 물건이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물건이나 일은 힘의 표현이다. 
  • 힘은 강하지만 강하기 때문에 약하다.”

(, 45-46쪽)]

여기서 말하는 빛은 이런 겁니다. 신문을 보니까 여섯 살짜리 아이가 인터뷰에 등장해요. “여기 왜 나왔니?” 그랬더니 “내가 여섯 살인데 십년 후에 내 머리 빵꾸나서 죽기 싫어요.”하고 경향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했더라고요. 그래서 경향신문에서 읽은 건지, 프레시안에서 읽은 건지 혼란스러운데.

그때 아기의 말 자체는 명시적인 거잖습니까. 말을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공감을 하고 초를 들고 나가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안전하다 꼬마야”라고 말하고 있어요. 뭘 모르고 있는 걸까요.

그렇게 말하는 아기의 마음을 모르고 있는 거고, 그런 아기를 기르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죠.

여기서 말하는 숨겨져 있다는 뜻은 그런 겁니다. 본다고 해서 다 보는 게 아니라는 거죠. 즉 안다고 해서 다 아는 게 아니고. 이게 바로 견문의 뜻이라고 했죠.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 동아시아 전통 감각이론에서는, 감각적 오류는 없습니다. 모든 게 다르나 있어요.

다만 제대로 보지 못 하도록 무언가 장애가 있거나 방해가 있거나 부족하기 때문에 못 보는 것일 뿐이에요. 동아시아 전제는 그렇습니다. 그게 일원론이라는 거죠.

되게 희한해요. 어떤 사람들은 말을 하면 저 말의 의미는 뭐라고 간파해내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정치일선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뚝심, 흔들리지 않는 부분을 경제에 갖다 놓으면 뭔가 좋은 일이 있지 않으랴 하는 믿음이 있었는데, 그 뚝심을 엄하게 백성들과 겨루는데 발휘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거죠. 이렇게 된 김에 좋은데다 뚝심을 잘 발휘하시길 간절히 비옵니다.

13쪽을 다시 보면, 이러한 미명 사상을 참된 빛으로까지 나아가서 이야기하고, 이걸 또한 유의 체험이라면서 간디의 비폭력 사상과도 연결시킵니다. 이분이.

여기서 앞에 얘기하는 ‘가리워진 빛’ ‘어린아이들’ 그 다음에 주체가 누구를 염두해 둔 거냐면, 치자와 피치자를 염두하고서 발언을 하시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건, 힘없는 민초 씨알들이 커다란 독재정권을 이겨낼 수 있다고 그 당시에 이야기한 거죠.

[“모든 있음은 있음 아닌 데서 나온다.(이게 왕필의 형이상학에서 나온 건데) 하나님은 이름이 없다. 모세가 당신이 누구십니까 했을 때 온 대답이 ‘네가 왜 내 이름을 묻느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했다. 천지 만물은 자기 주장을 아니 하는 이, 자기를 무한히 내 주는 이, 스스로 희생하는 이가 있어야만 있을 수 있다]

이런 부분들이 바로 의미 있는 부분입니다. 이게 기독교적인 해석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이때 “있음은 있음 아닌 데서 나온다”고 할 때 “있음아님”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이 분은 나름대로 체감하고 계신 거예요.

즉,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는 개념적인 방식으로 가는 게 아니라, 속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내어주기 때문에 계속 비어있는 뜻이 된다는 거죠.

달리 말하면, 신이 인간에게 무한히 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있음과 없음의 관계는 도치됩니다. 실제로 없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고 상대방에게 내어주기 때문에. 굉장히 친숙하고 쉬운 방식입니다.

[세상에 악이 있고 불의가 있는 것처럼, 그 악과 불의가 있으면서도 세계가 서가는 것은 진리가 있고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일은 없다. 노자는 이래서 도를 유(柔)한 것 약한 것으로 체험했다.(, 46쪽)]

굉장히 형이상학적인, 유생허무라는 구절. “있음은 없음에서 나온다” 이걸 서양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었냐면 Being originated from Non-being. 유생허무를 이렇게 번역해놓으니까 국내의 몇몇 필자들이, 존재는 비존재로부터 나온다고 해석했어요.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피현이잖아요. 그렇죠?

그거 하나만 가지고 토론한다면 며칠이 걸릴 겁니다. 더군다나 Being만큼 어려운 말이 없잖아요. 동양인들에게는.

그런데 이 말도 어려운데 Non-being은 또 뭡니까. 존재도 이해가 안 되는데 비존재라니. 끔찍하게 어려운 말이에요, 동아시아 사람들에게는.

그런데, 보세요. “있음은 있음 아닌데서 온다.” 그것참 재미난 표현이에요. 하지만 이거 나름대로 근거 있는 해석이거든요. 이 말 때문에 서양의 사상가들이 뒤집어 졌어요. 노자는 이것 때문에 유명해진 겁니다. 이것과 첫 번째 구절.

당시에 왜 그랬느냐. 당시에 비슷한 말했던 철학자가 있잖습니까. 비트겐슈타인. 즉 미국과 같은 지형도에서 노장 철학의 첫 번째 장이 엄청나게 히트를 쳤던 주요한 요인 중 하나가 그런 걸 흡수할 수 있는 나름의 철학적 지평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비트겐슈타인의 경우가 그 당시에 활동했던 경우고, 초창기 노장 번역서가 물밀 듯이 들어갈 때. 그런 부분은 당연히 염두하고서 읽어야 하는 거죠.

다른 한편으로, 존재론을 연구하는 서양철학자들에게는 한마디로 뒷통수치는 이야기였고, 비트겐슈타인처럼 뒷통수치게 만든 구절이 여러 개 들어 있는 거예요.

여기서 “니가 왜 내 이름을 묻느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라는 부분은 도올 선생의 노자와 21세기 에서도 굉장히 재밌게 한달 동안 이야기하시죠. 오히려 나중에 신학체계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했다는 얘기까지 나오는데.

이번에 보니까 “큐경전”을 번역하셨더라고요. 엊그저께 보니까. 대단하세요. 어떻게 그리 널리할 수 있는지 쉬운 일이 아닌데.

---

http://artnstudy.com/PLecture/scKim02/lecture/14_02.htm

◆ 함석헌 노장 해석의 화해의 철학


▲ 노장 사상을 대하는 삼국의 태도

제가 이 부분을, 상식의 창조라는 관점에서 봐야하고 독특함이 있다는 부분을 강조하면 아무리 해도 이해가 안 되실 거예요. 14쪽을 보시면, 도가나 노장 같은 사상을 대하는 삼국의 태도가 굉장히 다릅니다.

겉으로 보기에, 일본의 번역서나 중국의 번역서가 비슷해 보일 것 같죠. 하지만 20세기 전반기에 도가나 도교, 노장을 연구하는 태도는 삼국이 굉장히 달랐어요.

중국은 어떠냐. 중국은 크게 얘길 많이 하죠. “도교는 유(儒), 불(彿), 도(道) 삼교(三敎)의 하나로서 가장 중국적인 ‘민족 종교’” 이게 바로 도교의 가장 중요한 얘기 중 하나입니다.

이게 지금 중국 사회에서 티벳 등등의 문제 때문에 나름대로 민족주의를 활성화하려는 공작을 상당히 많이 했죠. 그러다보니까 그것이 요즘은 애국주의로 빠져서 문제가 분출되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올림픽 성화 봉송할 때 한국에서 중국 유학생이 보여준 모습은 보기 흉했죠. 우리가 마치 황우석 사태 때 모습과 비슷한 분위기였는데, 저는 이번에 촛불집회를 보면서 한국사회에서는 그런 문제점에서 많이 벗어나는 게 아닌가. 적어도 이번 경우만 봐도 보는 자체가 흥겹습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은 위험한 수위까지 가는 게 아닌가. 더구나 중국은 문맹률이나 교육의 보급 부분에서 사회의 기본적 인프라가 많이 안 돼 있고, 시민사회도 더딘 편이고, 그런 사회적 조건 속에서 애국주의가 만연한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처지잖습니까. 그런데 참 안타까워요. 도교하면 민족종교예요.

유는 종교라고 잘 안 해요. 오히려 미국이나 싱가포르에서 활동했던 현대 신유가에 의해서 도덕종교라는 표현을 쓰는데, 대륙본토에 있던 사람들은 유학을 종교적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합리적으로 접근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걸 아셔야 하는데, 대만이나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수사가 화려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은 대륙중국에서 활동하는 유학이 논리적으로 훨씬 조야해보일 수도 있지만, 실지로 힘 있는 중국철학에 가까운 것은 대륙 쪽이라고 봐요.
그리고 외국에 나와서 활동하는 사람 가운데 오히려 철학하는 사람보다는 사상사를 한 분이 훨씬 수준이 높고 철학적인 발언의 수준이 훨씬 건전하고 좋습니다.

만약 보실 기회가 된다면, 여영식 (여영시Ying-Shih Yü)이라는 학자가 있어요. 굉장히 제가 존경하는 학자 가운데 하나이고 70년대부터 쓴 논문 하나하나가 끝내줍니다. 새로운 눈을 열게 만드는. 제가 처음에 봤던 논문이 짧은 글인데, a soul comes back이라고 하는 중국인의 영혼을 다룬 글이에요. ["O Soul, Come Back!" A Study in The Changing Conceptions of The Soul and Afterlife in Pre-Buddhist China]

그걸 보면서 고대 중국에는 육신과 영혼의 분리라는 관념이 없었다, 사기라고 말해요. 중국적 사유라는 천인일체, 자연과 문명 자체가 사실은 서구를 염두해 두고 반대로 규정하다보니까 만들어진 20세기 이데올로기가 무지 많아요. 허황된 동양학을 하고 있다는 거죠.

90년대부터 그런 부분이 많이 극복되긴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게 상식화돼 있다 보니까 대화가 안 돼요. 제가 그런 얘길 하면, 제가 마치 중국 철학이 아니라 서양 철학을 공부해서 서양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생각을 하는데 그건 참 저도 받기 싫은 오핸데. 원전에 준해서 얘길 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안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그래서 답답할 때가 많이 있어요.

그 다음에 민족종교로서의 도교는, 불교가 기독교가 들어오기 이전 유일한 종교가 도교기 때문에 그래요. 도교는 중국 역사 내부에서도 회한이 있는 종교이기도 한데, 가장 민간적이지만 가장 정치적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 사기도 많이 쳤고.

그리고 긍정적으로 기획된 부분도 상당하죠. 예를 들면 중국에서 혁명운동의 상당수가 도교전통과 관련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중국학자들이 이야기하는 도교는 불교의 외래성에 대해서 토착성을 강조합니다. 자생성을 강조하고. 그 다음에 국제적으로 이걸 지지받고 있어요. 그 지지하는 사람이 중국인이 많거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도교 쪽을 신봉하는 연구하는 상당 분들이 민족주의적인 정서를 갖는 분들이 꽤 있단 말이죠. 사실 은 도교와 관계있으니까요. 도교라고 딱 말하기 어려운 삼교혼합적인 성격도 있지만. 중국에서는 도교하면 민족종교가 책마다 다 나와요. 이게 대체 뭐냐는 걸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은 어떠냐. 일본은 도교학을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교토대학 출신이 많아요. 우리가 읽었던 초창기 책들이. 교토대학은 왜 만들었느냐. 중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학술장려책으로 만든 게 교토대학이에요. 정책적으로 만든 대학이라는 거죠.

그래서 중국사를 거기서 엄청나게 연구를 했고 도교를 연구했습니다. 그건 중국을 식민통치하기 위해서는 중국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중국보다 먼저 일본에서 중국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게 일본학자들이 대단히 뛰어나고 위대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나라에서 시키니까 하는 거예요. 장려해주니까. 그래서 일본은 영국의 인도학 연구와 마찬가지로 중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제국주의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중국 지배를 위한 정치적 요구에서 연구가 본격화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뭐냐면, 중국은 자꾸 끌어가요.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이겁니다. 새로운 뭔가가 발견되잖아요. 예를 들어 중국 사람들은 불교를 얘기할 때 채용론 많이 이야기합니다.

일본학자들이, “너네 그거 없던 거야. 너네 불교에서 배운 거잖아.” 그러니까 일부학자들은 채용론이 “왕필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다음에 그게 장자로 간다.”해서 나름대로 형이상학사를 구축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걸 사기라고 보죠.

불교로부터 배웠건 안 배웠건 간에 고대 중국에서는 나중에 말하는 채용론과 같은 방식의 명확한 사유방식의 흔적을 보지 못 했어요. 오히려 다른 방식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이 훨씬 분명하다는 거죠.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왕필을 채용론자로 보는 한 때의 기조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게 왕필은 본말론자입니다. 본말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노자를 해석하거든요. 그럼 본말론자예요.

그래서 왕필은 굉장히 유가적인 사람이에요. 그 다음에 또 한 가지 문헌이 나오면, 그런 식으로 중국적 정신, 자존심에 흠집 내기 방식의 연구가 많았다는 겁니다.

어떤 문헌이 나오는데 이 얽힌 고사를 보니까 불교서랑 비슷해, 이거 기원전 몇 년 것이 아니라 기원후 600년 것이야, 이런 얘기를 많이 하죠.

그러면서 그 책이 한참 뒤에 만들어진 거라고 끌어내려요. 중국 사람은 막 올라가요. 그럼 미국사람이 양 쪽을 다 본 다음에, 중간입니다.

요번에 신문을 보니까, 광화문에 나온 사람 집계가 경찰에서는 지난 10일 날에도 8만, 나중에는 12만, 바뀌더라고요 숫자가. 그리고 주최측에서는 당연히 더 늘이고 싶겠죠.

그래서 기자들 사이에서는 농담 삼아, 두 개를 딱 더해서 반만 절충해서 하면 된다고 얘길 하는데,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중국학자와 일본학자들이 줄다리기 하는 걸 보면 맞는 것 같아요. 대개 저는 그런 식으로 하는데.

나중에 대부분 그런 식의 정리를 하는 사람의 논의가 설득력이 있습니다. 양 극단을 피하는 식의 논의다보니까.

세 번째는 서양의 경우인데, 서양에서는 이른바 종교적 도교연구가 강합니다. 타오이즘이라는 말은 그 전에도 쓰였지만, 이건 제임스 레게라고 하는 사람이 노자와 장자를 번역하면서 타오이즘이라는 용어를 적용시켰고 그래서 노자와 장자로부터 비롯되는 중국의 종교전통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제임스 레게가 이 용어를 정착시킨 거예요.

그 다음번에 바통을 이어 연구했던 사람이 프랑스 출신의 사회학자들. 이 사람들은 두 가지를 결합했다고 말씀드렸죠. 하나는 대만과 같은 실증연구, 그 다음에 운남성엘 가서 고문헌과 운남성에 있는 장족, 묘죡 같은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드워크가 결합됐어요.

이 사람들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타오이즘은 신비주의입니다. 이게 우리나라에 몇 권 소개돼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신비주의로 해석해요.

달리 말하면, 종교라고 하는 거죠. 그럼 왜 종교로 볼 수밖에 없느냐. 종교를 전파해야 하는데, 그렇잖습니까. 제임스 레게가 유가 경전들을 그렇게 번역한 이유는, 그들의 종교적 풍토를 이해해야지만 기독교를 설파하는 데 효율적이니까 그런 겁니다.

인도에 관한 풍부한 문헌이 영국에서 성립될 수 있었던 것, 특히 막스 윌러 같은 사람이 종교학 전집을 만들면서, 중국과 관련된 텍스트는 다 레게 것이 들어가서 출판됐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선교를 위한 전략방침과 더불어 본격화되었고, 이건 과거 카톨릭에서 파견되었던 선교사들은 위로부터 아래로예요. 즉 위를 개종시킴으로써 백성들을 개종시키는 방향의 국가적, 정치적 차원의 방식으로 접근했다면.

개신교는 노방전도를 하죠. 그런 대표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가 영국엘 가면 목사님들도 다 담배를 피는데 한국의 목사님들은 담배 안 피시잖아요. 근거가 없는 얘기라고 하잖습니까.

그런데 노방전도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차별화하는 전통을 만들다보니까 굳어진 거잖아요. 다 알고 있어요. 목사님들 다 알면서도 지금 담배 피는 목사님 없어요.

전통의 구성력이라고 하는 것, 그 차별화만큼 한국 사회에서 옛날에 한국 사람들 진짜 술 먹고 담배 펴서 많이 괴롭혔던 것 같아요, 사람들을.

그런데 요즘에는 국가가 담배 피는 사람들을 막 사회 전반적으로 괴롭혀가지고, 저도 아주 피곤한데. 이제 끊긴 끊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다음에 이런 마스페로(Maspero)같은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현지조사연구"가 결합하는 민족지적 성격도 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오리엔탈리즘이라고 싸잡아서 비난할 수 있느냐? 사람들이 새롭게 보도록 만든 부분도 상당히 있거든요.


▲ 한국에서 탄생한 함석헌의 노장 해석

이렇게 본다면 함석헌 선생님이 갖는 노장 해석의 특징, 즉 함석헌 선생의 텍스트를 가지고 다른 텍스트와 비교하면 굉장히 다릅니다. 물론 옛날에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고 해서 우화 비슷하게 책을 나온 적도 있죠.

그런 방식의 책들은 중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에도 많습니다. 하지만 사상적인 깊이를 갖고 있으면서 나름대로 자기의 사상체계 속에 녹아드는 방식으로 해낸 건 함석헌 선생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겠죠.

저는 더 나아가서, 15쪽을 보시면. 물론 노자가 권모술수적인 면도 있기 때문에 바람직한 철학만은 아니라고 저는 과거에 생각을 해서 떠나려고 했는데, 함석헌 선생님의 책을 읽고 다시 생각하면서, 화해적인 방식의 텍스트 독해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에 화해적 방식은 이런 거예요. 특히 학자들이 잘못 생각하는 게, 예를 들면 기독교와 유교가 만날 수 있다고 하면, 기독교와 유교의 개념이 어떤 방식으로 다른가, 같은가를 비교하는 거였어요.

즉 같고 다름의 방식을 이야기하는 거죠. 그런데 정작 중요한 건, 그런 식으로 접근하다 보니까 원전중심주의로 흘러갈 수밖에 없어요. 같고 다름을 판정하는 것밖에 안 되거든요.

기본 적으로 다른데 다른 것이 만나야 해요. 아버지는 절 다니고 자식은 교회 다녀요. 그렇죠? 한국 사회의 독특한 풍조입니다. 90년대 들어오면서 많이 바뀌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한 집에 살고 있다는. 외국에서는 그렇게 못 산다는 거 아시죠. 한국에서 그랬다가는 풍지박산 나고. 대한민국사가 독특해요. 우리나라에만 있는 외국에는 정말 보기 힘든 제도 가운데 하나가, 대통령이 종교 지도자와 오찬을 하는데, 가톨릭, 개신교, 불교, 천도교. 희한한 일이라고 해요.

그건 함석헌 선생님처럼 도가 로고스요, 도가 진리의 빛이요 라고 하는 언설은 당연히 개념적으로 문제가 많을 수 있죠. 이건 도, 하고 나서 전세계 유명한 종교지도자와 철학자가 이야기했던 가장 상위개념이 다 나열됐어요.

학문적으로 무가치하냐? 저는 과거에는 그런 것들이 의미가 황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이런 방식의 언설들이 바로 들음을 낳고 상식을 만들 때 불교신자와 기독교신자와 가톨릭신자가 한집에서 같이 싸우지 않고 사는 현상을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달라서라고 할 순 없죠. 더군다나 특히 한국사회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흑백논리적이고 이념적인 색깔론에 많이 공격을 당했기 때문에 색깔논쟁에 있어서는 한국만큼 강한 데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저런 종교적 관용이 있을 수가 있느냐. 달리 말하면 한국사회 종교지도자들이 상당히 관용적이고 화해적인 분위기를 이루어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기독교도 그런 부분에서는 다시 봐야 해요. 기독교가 이단의식이 가장 강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독교가 갖는 모양새도 그 관용적인 분위기에 적응돼 있거나 그걸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거죠.

바로 이러한 현상의 배후 속에서 함석헌 선생님이 의미가 있는 거고 류영모 선생님이 의미가 있는 거예요. 이 얘기를 왜 꺼냈냐면, 함석헌 선생님과 류연모 선생이 노자 철학에서 얼마나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 그걸 밝힐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건 학자들끼리 하면 됩니다.

한국 땅에서 그 시대 전체의 자리에서 읽겠다는 분이니까, 그 시대 전체의 자리에서 평가를 해줘야 하는 거죠. 노자 철학과 상관없이 오히려 종교 다원주의를 가능하게 했던 중요한 하나의 원천으로 우린 해석할 수 있고, 그건 그야말로 노자 철학을 획기적으로 채용해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를 낸 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겁니다.

노자에 대한 해설서, 주석서니까 노자 철학서들끼리 평가한다는 방식은 상당히 편협한 방식이라면, 넓게 봐야 한다는 거죠. 그 시대의 공간 속에서 그가 의도 했던 자리에서.

15페이지를 보시면, 이게 조선조에서도 이단이 있었지만 가장 먼저 도덕경과 관련한 주석서를 낸 율곡 이이 선생이 이런 말을 합니다.

[“이단이 유학에 어긋나는 것은 그 잘못됨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되지 않은 것은 진실로 취할 만한 것이 없지 않으니, 잘못된 것을 제거하면 순수해진다. 고명한 선비가 이단에 빠져들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순수한 것만 보고 순수하지 못한 것을 잊었기 때문이다.” (1750년 정월, 『율곡 이이의 노자』, 126쪽)]

보지도 못하는 책, 보지도 말라는 책을, 좋은 것만 골라 읽으면 못 읽을 이유가 왜 있느냐고 말합니다. 박세당 것은 지난 번에 얘길 했었죠.

16쪽을 보면, 한원진의 『장자변해』 상당히 드문 주석서입니다. 중간에 보면 이렇게 얘길 합니다. 다 읽죠. 본 김에.

[“내 생각에 장주는 육경의 요지에 대해 논하여 “『詩經』은 情性을 말하였고, 『書經』은 政事를 말하였고, 『禮記』는 행실에 대해 말하였고, 『樂經』은 조화를 말하였고, 『易經』은 음양을 말하였고, 『春秋』는 명분을 말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정자(정이천,정명도 형제를 말합니다)와 주자가 아직 나오기 전이었는데도 이렇게 한 마디 말로 그 핵심을 끄집어내어 논할 수가 있었으니, 이와 같이 분명하고 의미를 다한 것은 없었다. 그런즉 장주의 학문이 깊지 않다고는 할 수 없으며, 그가 성인의 뜻이 대해서도 또한 알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가 없다. 다만 그는 本源上達의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이르지 못하여 방자하게 말을 한 것이다. 따라서 그 폐단이 마침내는 이단을 말하고 도를 훼손하는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배움이란 본원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다시 이와 같은 말을 덧붙여 둔다.” (한원진의 『장자변해』)]

본원 등등 이단 등등에 관한 말들은 생략하시면 됩니다. 왜. 그런 말들을 붙이지 않으면 쓸 수가 없어요. 말하자면, 과거 북한에서 책을 쓸 때, 어버이에게 감사하는 말을 쓰고, 그 다음에 중국에서 책을 쓸 때마다 마오의 한마디를 다 배달하면서, 맑스레닌주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사하듯이 하는 말처럼 생각하시면 돼요.

성리학 사회에서 이런 말없이 쓸 수 없거든요. 하지만 중간에 문장, “장주의 학문이 깊지 않다고는 할 수 없으며, 그가 성인의 뜻이 대해서도 또한 알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가 없다.”고 하는 말은 엄청난 격찬이에요.

공자를 알았다고 말하는 건 대단한 칭찬이거든요. 달리 말하면, 많은 분들이 마치 20세기의 이단에 대해서 경원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조선시대의 학자들이 이단의식이 있었다면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한문학 하시는 분들은 허심탄회하게 말해요. 읽으면 읽을수록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자백가에 달통했던 사람들이다. 특히 여기 고미숙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 소설의 양식이나 표현은 다 장자 패러디한 것들이거든요. 표현양식이.

그렇게 장자를 인용했지만, 장자에 관한 책을 쓰지는 않았죠. 그러니까 박지원 같은 지식인들의 기본적인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치 이단에 관한 걸 안 읽었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오히려 현대의 우리들이 더 이단에 대해서 더 편협한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한원진 선생은, 자기가 한 때 관심이 있어서 볼 만한 책은 다 봤대요. 장자에 관한 주석서는 다 봤대요. 무지무지하게 많았거든요.

그런데 다 장자를 제대로 말한 것 같지 않아서 쫙 쓰는데 이것이 또 굉장히 치밀해요. 논리적이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저도 번역하고 싶은 책이기도 한데.

우리는 오히려 이단의식이라는 게 이단을 배척하는데 있지만 사실 동아시아에서 이단정신이라고 하는 건 함께 어울려 사는 논리를 만드는 데 그 목표가 있어요. 배척하고 소외시키고 왕따 시키는 데 목표가 있는 게 아닙니다.

“너희는 이단이다”라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우리와 섞여 살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을 보강해라.”고 하는데 이단의식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이단의식과 다르죠. 그와 같은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왜냐하면 사회동포주의를 갖는 것이 바로 유가입니다.
그가 우리와 같은 문화, 우리와 같은 삶을 공유하는 인간인 한 다 유학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에요.

그런데 이단이니까 “너 나가”가 아니라 “이 선을 넘어 들어올 때는 이것만 지켜라.” 그래서 도교, 불교에 대해서 그런 걸 약속했습니다. 특히 선불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와 같은 계율로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참선하는 걸 실천하면서 그게 살아남는데 일조했다고 합니다.

유학의 포섭정책은 놀라울 정도죠. 사상적으로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자, 함석헌 선생도 분명히, 저는 기독교 종교인으로서 출발한 부분도 있지만 이와 같은 조선 지식인의 정신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하필이면 그가 읽었던 노자, 장자에 관한 책이 이 노장전통에 속하는 집회본이었어요.

따라서 그러고 보니까 상당히 포용적이고 화해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그가 그런 방식으로 화해적인 독해를 시도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과연 이단을 배척하는데 굉장히 주요한 논리를,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쉽게 정하고 있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 그렇게 포용적인 방식의 태도를 갖는다는 건 사실상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가줄 수 있다는 정신적 진원지는 아마도 종교 다원주의적인 한국의 분위기. 이건 우리가 의식하고 있지 못 하는 사이 흐르는 것 가운데 하나일텐데.


▲ 함석헌 노장 해석의 화해의 철학

그래서 저는 함석헌 선생의 화해의 철학, 사실은 독재를 비판했던 철학이지만 궁극저긴 내면은 화해의 철학에 있었고 이런 부분이 우리에게 의미있는 게 아닌가.

제가 처음 출발할 때, 노자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지형을 읽는 코드로 이야기를 시작했었던 것 같은데. 그와 동일합니다.

그러한 코드 가운데 가장 커다란 코드가 있었다면 바로, 함석헌 선생과 같은 코드가 지금 우리에게도 의미 있고 앞으로도 가치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으로 그간 진행해왔던 노자와 관련한 강의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