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0

김현진 [나의 공동체운동 이야기 17] - 브루더호프 공동체 탐방 [1-17]

(1) Facebook


평택대학교 신학부 교수 at 태안 사귐의 공동체 원장

Studied 선교학 (Ph. D.) at 남아공 North-West University 신학부

Studied 박사과정 수료 at 네덜란드 Utrecht University 신학부

Studied Missionary Training at 미국 Bethany College of Missions

Studied (M. div., Th. M.) at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Studied 영문학 at 계명대학교

Went to 대건고등학교

Lives in Taean

김현진

ndoprSeost8f64h1253i517h7l031ig12t24ggi53t3i3207u7tg51011212 ·


[나의 공동체운동 이야기 17]
- 브루더호프 공동체 탐방

1991년도에 탐방한 또 하나의 중요한 기독교 공동체는 브루더호프이다. 이 공동체는 필자가 한국에서 최초로 방문하여 한국교회에 소개 함으로써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992년 필자가「빛과 소금」지에 브루더호프 를 소개한 이후에 한국에서 약 10만명 이상이 방문했다.

에버하르트 아놀드
브루더호프(Bruderhof, “형제들의 처소” 란 의미) 공동체는 독일의 저명한 강사이자 작가인 에버하르트 아놀드(Eberhard Arnold, 1883-1935)에 의해 1920년 독일에서 시작됐으며 재세례파 공동체인 후터라이트 (Hutterite)의 영향을 받았다. 공동체는 1930년대 말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과 남미의 파라과이를 거쳐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15개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전원 지역에 위치한 각 공동체에는 100-350명 이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 방식에 따라 일체의 사유재산 없이 사랑의 가족을 이뤄 살아간다. 공동체 안에는 공동 숙소, 학교, 공장, 공동 식당, 예배당 등 모든 시설이 갖춰져 있다.

사랑의 영성
브루더호프의 영적 기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사랑은 브루더호프에서 가장 중추적인 것이다. 그들은 “공동체 그 자체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이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재산 공유, 공동 작업, 공동 식사는 다만 사랑의 열매일 뿐이다”고 말한다. 험담은 공동체를 쉽게 깨지게 만들기 때문에 말할 때에도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직접 솔직하게 말하도록 한다(straight talking in love).
그들은 모든 노동을 사랑의 표현으로 본다. “노동은 사랑을 가시적으로 만든다. 공동 세탁소에서 옷을 세탁하거나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공동체의 병원에서 아기의 체중을 달거나 혹은 수도관을 고치든지 우리는 공동노동을 서로를 향한 사랑의 실제적인 표현으로 본다.”
그러므로 사랑은 공동체 생활을 말할 때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브루더호프에서 형제적 사랑은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에서 실제로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브루더호프 회원인 밥 부처(Bob Boucher)는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바를 입증해야 하는 장소인 공동체 즉 전쟁터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한다. 브루더호프의 회원에게 노동은 진정한 영성의 여과 과정이다.
그들은 종교에 흥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주일간 지체들과 함께 일하며 기쁨과 좌절, 웃음과 눈물을 함께 나누는 보다 깊은 교제에 관심이 있다. 브루더호프는 공동체의 진정한 척도인 ‘서로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매일 일상의 삶 가운데 증명되지 않으면 예배와 같이 영적인 활동을 위해 모이는 것은 진정한 의미가 없다고 본다. 일을 처리할 때는 항상 ‘공정하고 겸손하게 사랑으로 했는지’ 아니면 ‘나를 위해 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들은 “오직 사랑과 용서만이 우리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물질의 공유
브루더호프 지체들은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개인 재산을 소유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산다. 모든 사업을 통한 소득은 한데 모아서 전 회원들을 돌보고 외부의 각종 사역을 하는 데 사용된다. 유무상통의 공동체는 성령 강림의 역사로 이뤄진 결과다. 모든 것을 공유하는 삶은 자신들이 소유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적으로 속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실제적인 삶의 방식이다. 그들은 개인의 소유를 포기함으로써 불필요한 경쟁과 세속적 가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현재적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에는 천당이라고 지칭하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와 오늘 여기서 이루어야 할 현재적 하나님 나라가 있다. 브루더호프는 공동체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한 통로로 간주한다. 그들은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 천국을 완전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스개 소리로 브루더호프의 별명을 '구백구십당'이라고 한다. 즉 천당에서 하나를 뺀 것이다. 사실 브루더호프를 방문해보면 그곳에 임한 천국의 실재를 감지해 볼 수 있다.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가 많은데, 사랑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 속성의 핵심적 진술이다.
물론 그들의 삶에도 여전히 문제가 있고 갈등이 존재하지만, 그들의 공동체 생활 자체가 이 땅에 구현된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 실증이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사역이 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브루더호프를 방문 하여 깊은 감명과 통찰을 받았으며 이들의 삶은 전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공동체 선교
브루더호프에는 매년 다양한 교단 배경을 가진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 각국의 수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온다. 방문객들을 살펴보면 영적 구도자들, 인생의 파국을 맞은 사람들, 브루더호프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 기자들, 여러 교파의 사람들, 상당수의 비신자들이 포함돼 있다.
이렇게 수많은 방문객이 브루더호프를 찾는 이유는 브루더호프의 공동체 삶이 복음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의 리더였던 하인리히 아놀드(Heinrich Arnold)는 “만약 우리가 지체로서 화평하게 서로 온전히 신뢰하고 사랑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복음인가?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온전한 삶의 방식을 말로만 아니라 진실한 행함으로 살아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언급하였다.
1991년 브루더호프를 방문했을 때 멤버가 내게 해준 이야기이다. 당시 두 한국인 여대생이 여행을 하면서 우연히 현지 브루더호프를 방문하게 됐다. 그들은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지체들이 서로 사랑하며 일치된 삶을 사는 것을 보고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브루더호프가 믿는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궁금하게 됐다.
그래서 비록 여행 중이지만 그들의 부모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한글 성경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이렇게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건가요? 성경을 읽어보고 예수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요.”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삶 자체가 선교의 장이다.

선교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사랑의 공동체 삶을 통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끌어들이는 구심적 선교(centripetal mission)와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타문화권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원심적 선교(centrifugal mission)다. 그동안 현대 선교의 문제는 복음대로 사는 방식보다 가서 말로 복음을 외치는 원심적 선교에 너무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브루더호프는 구심적 선교를 자신들의 선교 방식으로 삼는다. 사랑의 공동체 삶은 선교의 근본이다.
오늘의 기독교는 개인주의, 이기주의의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교회를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로 새롭게 형성하는 것이다.
<계속>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한복음 13:34-35)
#브루더호프 공동체 #에바하르트 아놀드 #후터라이트 #재세례파 #공동식사 #공동작업











This photo is from a post.
View Post

김현진

eodrsoStnp3725f1256304h0820cc8c2516aht65mu74u128606t517iail9 ·

브루더호프에서 아내와 함께


==
김현진
·
[나의 공동체운동 이야기 16]
- 미국 코이노니아 동역회 탐방
1991년 1월 두 번째로 방문한 공동체는 미국 조지아 주의 코이노니아 동역회(Koinonia Partners)이다. 이 공동체는 1942년 클래런스 조단(Clarence Jordan)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1930년 대에 미국 남침례교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였다. 그는 당시 남침례교 신학교가 흑인을 신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비성경적인 처사라고 생각하여 신학교 당국에 흑인들을 받아들이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신학교 당국은 조단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신학교 배후에 있는 남침례교단의 방침이 흑인 신학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총회에 가서 만약에 흑인들을 신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교수직을 사임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자신의 교수직를 걸고 성경적 진리를 실천하려고 하였지만 교단 총회는 조단의 요청을 끝내 거부하였다.
그래서 조단은 교수직을 사임하고 흑인들만이 사는 농촌 지역인 조지아 주의 섬터 카운티 (Sumter County)를 택하여 그의 동료들과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초창기에 그가 세운 목적은 두 가지로서, 인종차별 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것과 농촌의 가난한 흑인들을 돕는 것이었다.
흑백인이 함께 사는 공동체
처음에는 4백 에이커의 땅을 사서 흑인들과 함께 살고 예배하며 일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시작하였고 “코이노니아 농장”(Koinonia Farm)이라고 불렀다. "코이노니아"는 헬라어로 교제, 사귐, 나눔, 공동체란 뜻을 가진 성경의 용어이다. 초창기에는 그들과 뜻을 같이하여 땅콩 농장에서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 코이노니아 농장에 대한 많은 오해들로 인해 주위로부터 여러 차례의 핍박이 있었다. 그것은 인종 차별에 반대하여 흑인들과 함께 사는 것과 평화를 위해 전쟁을 반대하는 코이노니아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검둥이를 사랑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집단’이라고 코이노니아 농장을 비난하는 백인 우월주의자 들의 단체인 KKK (Kyu Klax Klan)단과 지역 주민들로부터 여러 차례 방화와 물리적 공격을 받기도 했다. 당시 조단목사의 아들은 그 충격으로 정신병에 들기도 했다.
방화와 테러
1960년대에 들어와서 이러한 여러 가지 오해와 심리적, 물질적 핍박으로 인해 코이노니아 농장의 회원들이 점차로 농장을 떠나게 되었으며, 코이노니아 농장은 결국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때에 남은 회원은 두 가족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뜻을 같이하는 동역자들의 격려와 재정적 후원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1968년 사이 회원들은 공동체의 새로운 방향을 함께 모색하여 "코이노니아 동역회"(Koinonia Partners)라고 개명하고 "자선을 베푸는 삶" (compassionate living)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대안적 공동체 삶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
고통당하는 이웃을 섬기는 공동체
공동체의 주 소득은 주로 1500에이커에 달하는 농장 경영을 통해 들어온다. 주 소득 작물로는 땅콩, 호도, 콩 등이 있다. 코이노니아 동역회는 농장 경영을 통하여 나오는 모든 소득을 공유하며, 공동체 식구들의 생활비와 기본 운영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다음과 같은 사역에 사용한다.
1.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 사역, 2. 인근 흑인 주민을 위한 고용 사역, 3. 흑인 아동 탁아소인 어린이 양육 센터, 4. 청소년을 위한 방과 후 학교, 5 중남미 난민을 위한 사역, 6. 죄수들을 돌보는 사역, 7. 주민 상담 등 다양한 지역 봉사 프로그램 등이다.
밀라드 풀러
1968년 코이노니아 농장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을 때 밀라드 풀러(Millard Fuller) 라는 사람이 코이노니아 농장에 와서 살게 되었다. 그는 변호사로서 택배사업을 하여 백만장자가 되었지만 돈 버는 일에만 집착하다가 신앙도 잃어버리고 가정도 깨질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때 친구들의 권유로 코이노니아 농장을 방문하여 가난한 흑인을 섬기는 공동체 삶에 크게 감명을 받고, 자신의 전 재산을 흑인대학에 기증하고 코이노니아 농장에 공동체 멤버로 들어와 살면서 자신의 신앙과 가정이 회복될 수 있었다.
그 당시 코이노니아 동역회는 자선 기금을 만들어 인근의 가난한 흑인들에게 집을 지어 주는 사역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밀라드 풀러는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공급 사역에 동참하면서 자신의 평생의 사명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주택 사역을 코이노니아 동역회 주위에만 아니라 주변 마을인 아메리쿠스(Americus)의 빈곤층을 비롯하여 미국 전역에 확대하는 비전이었다.
국제 헤비타트 운동
그는 1976년 코이노니아 동역회에서 나와서 별도로 “인류애를 위한 거처”(Habitat for Humanity, 이하 헤비타트로 표기)’라는 표어를 내걸고 빈곤층을 위한 주택 공급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사역은 1980년대에 들어서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80년대 후반에는 전 세계로 확산되어 국제 헤비타트 협회(Habitat International)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1992년에 고왕인 박사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우리 나라에서는 현재 “사랑의 집짓기 운동” 이란 이름으로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사실 헤비타트 운동은 코이노니아 농장에서 나온 것이다. 클래런스 조단은 1969년에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죽었다. 신학 박사였던 그가 약 30여 년 동안 공동체의 기초를 닦느라 겪은 온갖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열매를 보기도 전에 죽은 것이다. 1991년에 코이노니아 동역회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의 헌신적인 삶에 너무나 감동받아서 “주님, 저도 평생에 그러한 삶을 살겠습니다”고 울음을 터뜨리며 기도드렸었다.
그가 코이노니아 농장을 통하여 시작한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 사역은 오늘날 헤비타트 사역으로 발전되어 전 세계로 확장되었으며, 나도 한국 헤비타트 사역 초창기에 홍보간사로 사역하였다. 나는 코이노니아 동역회를 방문하고서야 헤비타트 사역이 코이노니아 공동체에서 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알의 밀알
조단 목사가 고통당하는 흑인을 섬기기 위한 희생과 헌신의 삶은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통하여 전 세계적으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코이노니아 농장이라는 작은 공동체는 전 세계의 수많은 가난한 무주택자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지구촌 공동체로 확대된 것이었다. <계속>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클라렌스조단 #코이노니아농장 #코이노니아동역회 #흑백인공동체 #밀라드풀러 #국제헤비타트운동 #사랑의집짓기운동 #고왕인박사==

==
[나의 공동체운동 이야기 16] 
- 미국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 탐방
1990년 전국신학교 공동체모임 연합회 (전신공연) 사역으로 통해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공동체 운동은 11개의 신학교를 통하여 더욱 조직적으로 전개되었고, 전국 교회에서 요청해오는 공동체 강연 초청은 더욱 증가하였다.
1991년에 들어서는 보다 다양한 세계의 기독교 공동체들을 탐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 공동체(Christian communal living)란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만 아니라 물질도 함께 공유하면서 실제적인 사랑의 공동체로 사는 것이다. 
1989년에 내가 처음으로 탐방한 기독교 공동체들이 주로 독신자들로 구성된 수도적 공동체와 전원 지역에 위치한 공동체들이었다. 나는 교회의 본질인 기독교 공동체가 수도적 형태로서만 그리고 전원 지역에서만 가능 하다면 그러한 공동체는 보편적인 공동체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는 도시에도 기독교 공동체들이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이러한 질문을 품고 당시 신학교 3학년 재학중이던 1991년 1월에는 더욱 다양한 기독교 공동체들을 탐방하였다. 오늘은 그중에 미국 시카고의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를 소개하고자 한다.    
도시 공동체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Reba Place Fellowship)은 칼 바르트(Karl Barth) 지도로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은 메노나이트 교회 목사인 존 밀러(John Miller)에 의해 1957년에 시작되었다. 밀러 목사와 일단의 젊은이들은 예수님의 산상 수훈을 통한 철저한 제자도 (radical discipleship)와 교회의 본질을 추구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교회사 연구를 통하여 제자도를 진정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대개 공동체로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의미의 사랑의 공동체는 고독과 소외의식이 만연한 대도시의 한 가운데 세워져야 된다고 생각하였다. 
1957년 시카고 북부 에반스톤 레바 플레이스 727번지의 집을 구입해서 존 밀러 목사님을 포함한 두 가족과 한 독신 남성이 한 집에서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가 탄생되었다. “레바 플레이스”(Reba Place)는 그 동내 이름이었다. 그들은 모두 주중에는 직장 생활을 하였으며 모든 수입을 완전히 공유하였다. 또한 그 수입의 절반은 생활비로 사용하고 나머지 절반은 주위의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구제비로 사용하였다. 
확대 가족
이 공동체의 목적은 복음을 말로서만 아니라 "삶으로 증거"(witness by life)하는 것이었다. 1962년부터 공동체는 점점 많은 사람들을 끌기 시작했다. 전성기인 60년대부터 70년대 초반까지는 적어도 250여명이 공동생활을 하였다. 
이들의 공동생활은 “확대가족” (extended family households)이라고 하는 생활로서 한 집에 보통 10~20여명이 함께 사는데 가족과 독신자, 젊은이들이 함께 생활하였다. 그 당시 그러한 확대가족의 소공동체들이 서로 가까이 퍼져나가면서 12개나 되었다. 이러한 공동체의 유형을 “도시 공동체”라고 한다.
이들의 생활은 많은 이들에게 도전을 주어 TV와 신문으로 소개되기도 했는데 그 후로 더욱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왔으며 그 중 상당수가 공동체 멤버가 되었다. 80년대 부터는 재산을 공유하는 공동체로 살지는 않으나 공동체를 흠모하여 주위에 이사 와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레바 플레이스 교회(Reba Place Church)를 세워 그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는 공동체 개념을 확대하여 공동재산제에 참여하는 회원 (communal membership)과 공동 재산제에 참여하지 않는 일반 교인 (non-communal membership)을 모두 포함하는 두 종류의 멤버십을 갖게 되었다. 두 가족이 시작한 이 공동체는 공동체 멤버가 80여명, 일반 교인은 200여명으로 총 280명 정도의 재적을 갖고 있다. 
주위의 필요를 채우는 사역 
지난 주에 소개한 미국의 베다니 공동체가 타문화권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를 목적으로 하였다면,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는 “구제”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구제는 바로 “선교적 사역”이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주위의 이웃을 섬기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다양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1. 지역사회의 가난한 다인종 어린이들을 돌보는 레바 플레이스 탁아소(Reba Place Day Nursery)   2. 도시의 노숙자들을 위한 에반스톤 노숙자 숙소 (Evanston Shelter for the Homeless)   3. 무주택자들을 돕는 레바 플레이스 아파트 사역 (Reba Place Apartment)   4. 중남미의 정치적 난민을 돕는 기구 (Overground Railroad for Central American Refugees)    5. 캄보디아 이주민들을 돕는 사역(Cambodian Ministry) 6. 그 외의 이웃을 섬기는 다양한 사역들 (Neighborhood Ministries).
총체적인 영성, 총체적 복음   
이 공동체의 장점은 큰 땅이나 건물 등의 제한 요소가 없다는 점이다. 일반사회 속에 도시공동체로 살면서 삶을 통해 복음을 증거할 때, 사람들이 그들 곁으로 이사해 오면서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확장되었고 공동체가 그 지역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소위 사회 정의를 몸소 추구 하지만 결코 큰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삶 속에서 실천한다. 공동체 지체들 중에 60%가 성령 체험을 하였고 방언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능력, 공동체, 사회 정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잡힌 총체적 영성을 추구하며 말과 삶으로 복음을 총체적으로 증거한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와서 우리 가운데 있는 예수의 삶을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예수의 삶을 사십시다.”(Come and see the life of Jesus among us, and come and live the life of Jesus with us.) 이렇게 공동체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공동체 선교“(community mission) 라고 한다.  
레바 플레이스 공동체를 둘러보고는 나는 한국교회의 모델은 시카고 근처에 있는 대형교회인 윌로우 클릭 교회가 아니라 바로 이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 공동체의 대표인 버질 보트(Virgil Vogt) 목사님을 1991년 8월에 열렸던 제2회 공동체 세미나의 주강사로 초청하였다. <계속>
#레바플레이스공동체  #도시공동체  #확대가족  #버질복트목사 #공동체세미나 #공동체선교

==

[나의 공동체운동 이야기 15]  
- 전국신학교 공동체모임 연합회 결성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공동체에 대한 집회를 한 이래로 다른 신학교에서도 공동체 강의 요청이 들어 와서 타 신학교에서도 공동체 집회를 하면서 이러한 코이노니아 모임이 그 다음 학기 부터는 장로회 신학대학원과 서울신학 대학교 에서도 시작되었다. 나중에는 침례교 신학대학교, 감리교신학대학교, 성결대학교 등 11개 신학교에서 공동체모임이 만들어졌다. 
전국신학교 공동체모임 연합회
그래서 각 신학교의 공동체 서클을 모아서 1990년 3월 1일 “신학교와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이란 기치 하에 ‘전국신학교 공동체모임 연합회’(전신공연)을 결성하였고 내가 초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전신공연 결성의 필요성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한국의 문제는 한국교회의 문제이며, 한국교회의 문제는 신학교의 문제이다. 신학교의 문제는 신학은 가르치지만 서로 사랑하며 한 몸을 이루어 내는 공동체성의 부족함이다. 우리는 한국의 신학교 내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한국교회와 사회를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변혁시키고자 한다.” 
당시 한국 헤비타트(사랑의 집짓기 운동)를 설립했던 고왕인 박사님이 서울 을지로에 있는  자신의 고려빌딩 사무실을 내주셔서 전신공연 본부로 긴요하게 사용하였고 아로써 전국적인 공동체 사역을  잘 전개할 수 있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공동체 세미나
나는 전국의 교회에 초청되어 순회 집회를 가지면서 수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의 초대교회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하여 성령께서 이 시대에 공동체의 필요성을 말씀하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번 집회에 나가면 한 시간 정도의 집회를 하는데 이렇게 전국의 개 교회들에서 일일이 집회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뜻을 가진 분들을 다 모아서 함께 공동체 세미나를 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서울에 연고도 없고 사역하는 교회도 없는 터라 추진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1990년 5월 녹번동에 있는 베데스다 기도원에 가서 3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공동체 세미나를 여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알기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 결과 주님이 이를 기뻐하신다고 응답이 왔으며 공동체 세미나를 여는 모든 일에 함께 하시겠다고 응답하셨다. 그래서 1990년 8월 22-24일에 서울 온누리 교회에서 제1회 "전국 신학생을 위한 공동체 세미나" 를 열게 되었다. 
성공적인 결과
제1회 공동체 세미나 주강사로는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와 그 외에 무실출판사 고왕인 박사, 사랑방교회 정태일 목사, 떼제 공동체 한국지부 형제들, 총신대원의 심창섭 교수, 나용화 교수, 그리고 내가 강사로 나섰다. 첫 공동체 세미나를 위해서 전신공연 지체들이 연합하여 기도하며 열심히 준비하였다. 첫 공동체 세미나는 가난한 신학생들이 모여 모든 것이 부족한 여건 가운데 있었으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당시 제1회 공동체 세미나 운영 재정 중 300만원이 모자라서 준비위원들인 신학생들이 모여서 재정을 채워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는데 저녁 주강사 대천덕 신부의 강의 테이프가 불티 나게 팔려 재정이 다 채워지는 역사가 일어났다. 당시 장신대 주선애 교수님도 참석하여 미화 50달라 지폐를 내 손에 쥐어주시면서 "한국교회를 위해서 소중한 일을 해주어서 고맙다"고 격려해 주셨다. 
그렇게 하여 제1회 공동체 세미나는 한국교회 안에 공동체 운동을 공식적으로 전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금식기도로 준비하여 성령의 음성을 듣고 치른 행사는 역시 달랐다. <계속>
#전국신학교공동체모임연합회  #전신공연   #제1회공동체세미나   #대천덕신부  #고왕인장로  #온누리교회

=
[나의 공동체운동 이야기 14] 
- 전국 순회강사 사역
감격스러운 세계 기독교 공동체 탐방을 마친 후 6년간 봉직했던 교사 사표를 내고, 1989년 3월 드디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한 달 동안의 신학교 생활에 실망한 나머지 나는 3월 말에 신학교를 자퇴하려고 결심 했었다. 당시 학교는 경기도 양지에 있었다.
그런데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학우들에게 자연히 세계 기독교 공동체 탐방을 다녀온 경험을 나누게 되자 학우들이 매우 감동을 받았다. 그들은 현대에도 초대교회의 공동체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만 아니라 신대원 학생 모두가 염원하는 주제이기에, 공고를 내어서 집회를 공개적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기독교 공동체 공개 강연
그 제안을 받아들여 4월 초에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공개집회를 학교 내에서 하게 되었다. 첫 집회는 수요일 저녁 예배 후 9시 경에 시작 했는데 55명의 학생들이 참석했다. 신학교 입학 전에 탐방한 세계의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환등기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교회의 본질이 사랑의 공동체라는 것과 세계의 기독교공동체의 사례를 통하여 지금도 초대교회가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교회의 공동체성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내용을 전하였 더니 신대원생들은 열화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11시에 집회를 마친 후 공동체 더 관심 있는 학우는 내 방 기숙사 B동 308호로 오라고 광고했더니 17명이 찾아왔다.
그들과 새벽 3시까지 2부 모임을 가졌다. 참석자들을 대부분 “내가 생각했던 본질적 교회의 모습은 바로 저러한 공동체였는데 오늘에야 확인할 수 있었다” 며 그날 집회를 통하여 받은 감동을 토로하였다. 그날 밤 17명이 그러한 공동체 삶을 사는 훈련을 기숙사에서 하자며 결의했고 그 멤버를 중심 으로 하여 “총신 코이노니아“ 라는 서클이 결성되었다.
첫 공동체 집회가 끝나고 그 집회에 대한 소문이 학교에 퍼지면서 공동체 집회를 6회를 더 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당시 초대교회사를 가르치 셨던 심창섭 교수님이 공동체는 초대 교회의 증거라면서 자신의 수업 시간 중에 나를 불러 세계의 기독교공동체 현장을 보여 주며 특강을 하게 하셨다. 그러자 거의 모든 학우들이 내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 후 교내 에서 한달 동안 계속 공동체 집회를 가졌다.
공동체 순회 강사
이렇게 되자 학기 초에 신학교에 실망하여 자퇴하려던 마음이 누그러졌다. 5월 달이 되자 여러 교회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 왔다. 각종 선교단체에서도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 거의 매주 강연을 나가야 했다. 그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었고 집회 홍보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집회 요청이 쇄도 하였다.
여름방학이 되니 각 교회의 여름수련회 특강 강사로 초청받았다. 왜냐하면 총신대원에서 내 강의를 들었던 학우들이 각기 자신들이 사역 하고 있던 교회의 여름 수련회 강사로 초청 하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내 별명은 "공동체 전도사"가 되었다.
그러한 순회강의는 연말까지 민통선부터 제주도까지 전국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그러한 강의 사역은 총신 신대원에 입학한지 5년 동안 거의 매주 이루어졌다. 그때 비로소 왜 하나님께서 나를 신학교에 오게 하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아, 이 공동체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예정하셨구나!”
이후 전국에서 오는 공동체 집회 초청 현상은 온전히 “성령의 역사하심”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고교 교사로서 직장 생활을 그만 둔 뒤 신학생으로서 생활이 어려웠으나 집회 강사료만으로 5년 동안 살 수 있었다.
그중에서 서울 온누리 교회가 가장 나를 많이 초청하여 집회를 가졌다. 1990년 어느 주일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님은 나를 초청하여 오후 예배시간에 당시 신학생 전도사를 강사로 세워 공동체에 대해서 두 시간 동안 전교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마음껏 증거하라고 독려해 주셨다.
총신 코이노니아 모임
신학교의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학(學)’은 있지만 ‘삶’이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한국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신학은 교수들에게 배우지만 서로 사랑하며 한 몸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삶은 신학교에서 거의 배울 수 없었다. 그래서 총신 코이노니아 서클 지체들은 공동체 생활훈련을 스스로 하기로 하였다.
신학교 기숙사 방 3개를 연이어 얻어서 멤버들 12명이 한방에 4명씩 나누어 함께 공동체로 살았다. 하루의 일과는 다음과 같이 진행 되었다. 신학교 새벽기도 후에 멤버들은 공동체 방에 모여 경건의 시간(Q.T.)을 가지고 아침 식사 후 학교 수업을 했다. 
수업을 마친 후 저녁 식사 시간을 반 쪼개어 매일 30분 동안 신학교 와 한국 교회와 세계 선교를 위한 중보 기도를 함께 드렸다. 저녁에는 학과 스터디와 공동체 스터디를 함께 하였다. 그리고 밤 11시부터 새벽 5시 까지는 대침묵 시간으로 지켰다.
그리고 가난한 신학생들이었으나 각자의 재정을 공동으로 나누어 점심을 굶는 신학생들에게 식권을 제공하였고 마을의 가난한 소년가장을 도왔다. 이렇게 1989년 4월부터 신학교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 공동체생활 훈련을 하였다. <계속>
#공동체운동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총신코이노니아  #전국순회강사

==

[나의 공동체 운동 이야기 13]  
- 미국 베다니 공동체 탐방 
영국 포스트 그린 공동체 탐방을 마치고 마지막 여정으로 간 곳은 미국 베다니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는 필자가 예수원에서 훈련 받던 받았을 때 대천덕 신부님이 소개해준 공동체였다. 그래서 꼭 한번 방문하고 싶었던 공동체였다.  
2천 년 교회사의 흐름 속에서 초대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였다. 초대교회는 폭발적인 능력 전도와 기사와 표적, 모든 소유를 공유하는 공동체였다(행 2:23-45, 4:32-37). 문제는 그러한 초대교회의 공동체가 과연 지금도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베다니 공동체 (Bethany Fellowship)는 사도행전 2장의 초대 교회의 이상에 충실하고자 하여 물질을 완전히 공유하며 권능 있는 선교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베다니 공동체는 1940년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Minneapolis)에 있는 ‘성 누가 교회’에 다니던 다섯 명의 집사들이 가정에서 자발적인 성경공부 모임을 가지면서 시작 되었다. 그들이 모임 가운데서 받은 비전은 ‘선교’였다. 그들의 자신들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베다니 공동체는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과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의 답을 찾아나가는 가운데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임이다. 아직도 세계의 반 정도만 복음화 되었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선교인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 일의 시급함을 깨닫고 우리는 우리의 소유를 모두 팔아서 보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고자 공동체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선교사 후보생을 모집하여 훈련을 시켰다. 
우리의 공동체는 사도행전 2:43-47과 4:32-37에 나오는 초대 교회를 이 시대에 회복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우리의 자발적인 믿음의 표현이다. 이 일이 단지 시작에 불과하지만 주께서 시작하신 것을 그가 완성하실 줄 우리는 믿는다.”    
세계선교의 비전을 위한 공동체
베다니 공동체의 하루는 아침 6시 아침 기도로 시작된다. 아침 7시부터 7시 40분까지 식사 시간에 이어 8시부터는 선교 신학생들의 오전 수업이 12시까지 이어진다. 일반 멤버들은 각자의 일터로 향한다. 베다니 공동체는 자비량선교를 실행하기에 작업에 성실히 임한다. 오후 작업은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아침에는 각자의 아파트에서 따로 식사를 할 수 있으며, 점심과 저녁은 반드시 다함께 공동 식당에서 해야 한다. 가족 회원의 경우 주 1회 가족끼리 식사를 한다. 선교신학교 학생들은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일반 공동체 회원들은 7개 동의 아파트에서 생활 한다. 매주 월요일 저녁에는 정회원 모임이 있고, 수요일에는 수요 예배, 주일에는 11시 대예배와 저녁 7시 찬양 예배가 있다.
이 공동체는 웬만한 단과대학 캠퍼스 넓이의 면적에 선교 신학교를 비롯하여 학생 기숙사, 회원들의 아파트, 공동 식당, 체육관, 대규모 인쇄소, 1천여 명을 수용하는 교회 등 완벽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 안에 공동체 가족 160여 명과 선교 신학교 학생 150여 명을 합해 모두 3백여 명이 더불어 함께 사는 상당히 규모가 큰 공동체이다. 
베다니 선교 신학교
이 공동체 안에는 선교 훈련원에서 발전된 선교 신학교(Bethany College of Missions)가 있다. 학생들은 오전 네 시간 동안 신학과 선교학을 공부하며, 오후 네 시간은 노동을 하는데 노동은 노동 학점으로 가산된다. 또한 학생들은 공동체 안에서 출판, 건축, 자동차 정비, 환경 정리 등의 일을 한다.
이 선교 신학교는 4학년 과정으로 되어 있는데, 2학년을 마치면 3학년 때에는 1년간의 인턴십 (Internship)으로 선교실습 과정을 가진다. 이때 학생들은 베다니 선교회에서 파송한 세계의 선교 지부나 베다니 선교회와 연결된 선교 단체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선교 현장 실습 훈련을 받는다. 베다니 선교신학교는 함께 공부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예배 드리는, 기쁨이 가득 차 있고, 능력 있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삶과 신학 교육의 병존이 가능한 삶의 배움터이다. 
이곳 공동체의 삶은 단순히 모여 사는 것이 아니라 세계 선교를 위해 힘을 기르고 훈련하는 강력한 전진 기지로서, 선교를 위한 선교 공동체 인 것이다.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 부부는 60년대 말에 베다니 공동체를 방문하여 큰 감동을 받았고 베다니 공동체는 예수원 설립의 중요한 모델 중 하나가 되었다. 베다니 공동체는 1970년대 초에 한국에도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선교의 통로 - 공동체
베다니 공동체의 전 대표인 알렉 브룩스(Alec Brooks) 목사는 “우리는 남에게 어떤 모델이 되기 위하여, 공동체를 위한 공동체를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에게 주신 세계 선교의 비전을 성취하게 하는 효과적인 통로 역할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베다니 공동체는 1996년 당시 공동체 회원 160여 명에 3백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데, 이것은 공동체 멤버 2명당 선교사 3명을 보내는 셈이다. 이로써 베다니 선교회는 세계에서 단일 교회당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교회가 되었다. 그 비결은 바로 공동체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베다니 출판사를 경영하여 그 수익으로 선교사를 후원한다. 
베다니 공동체는 폭발적인 능력 전도, 표적과 기사, 유무상통의 공동체가 초대교회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와 참된 헌신을 통하여 오늘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초대교회 공동체와 권능 있는 선교는 그때만 아니라 지금도 가능하다. 우리도 해낼 수 있다!
#베다니공동체  #세계선교   #베다니선교신학교  #초대교회  #유무상통  #미니에폴리스
==

[나의 공동체 운동 이야기 12] 
- 영국 포스트그린 공동체 탐방
1989년 프랑스 떼제 공동체를 방문한 후 다음 탐방의 여정은 영국의 포스트 그린 공동체(Post Green Community)로서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공동체이다. 대천덕 신부님이 친히 추천 편지를 써주셔서 방문할 수 있었다. 
런던에서 밤 버스를 타고 영국 남서부의 도시 풀(Poole)에 도착한 것은 저녁 9시가 넘어서였다. 밤늦게 도착하였지만 포스트 그린 공동체의 정회원인 하워드 클락(Howard Clark) 형제님이 추운 겨울에도 불구하고 정류장에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손님들이 오면 대개 회원들의 각 가정으로 배치되는데 필자는 클락 형제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여독에 쌓여 이내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기상하여 창밖을 살펴보니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집 주위는 온통 푸른 잔디가 물결치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식구들과 아침 식사를 하면서 안 주인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조디 페이지(Jodi Page Clark) 라는 자매님은 필자의 방문을 몹시 기다렸다고 한다. 그 이유는 내가 포스트 그린을 방문한 최초의 한국인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1950년 대에 찬양선교단의 일원으로서 한국을 방문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필자의 방문을 기념하여 ‘A Song for Mr. Kim’ 이란 제목으로 노래를 작곡하여 나와 함께 부르면서 즐거운 교제를 나누었다.
이 집엔 하워드 형제님 부부와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한 장기 수련생 자매님이 함께 살고 있다. 매우 명랑하고 귀여운 아이들이라 금방 친한 사이가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이들은 모두 각각 다른 가정에서 입양된 아이들이었다. 조디 자매님은 만혼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어서 아이들을 입양했다지만 다섯 명씩이나 기른다는 것은 여간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다. 
그녀는 “공동체는 자체 식구들만의 바벨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는 구성원의 1/5의 범위를 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고통당하는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합니다.” 라고 하면서 “정신지체 장애인들에게 가장 좋은 치유책은 그들을 정당한 가족 관계 속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사랑과 돌봄의 공동체
1984년부터 시작된 포스트 그린 공동체는 15가정의 규모로 출발되었다. 이 공동체의 목적은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해주고 돌보아 주는(loving and caring) 데 두고 있다. 즉 믿음과 사랑의 환경을 조성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들 자신들을 충분히 알도록 하여 치유와 온전한 인성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공동체 설립자인 페이스 리즈(Faith Lees)는 공동체 지체들이 사역에 임하는 자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월한 위치에서 사람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 지를 제시하면서 최고의 답을 안다거나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태도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그들의 곁에 서주고 그들의 입장에서 더욱 섬겨주는 것입니다.”
포스트 그린의 공동체 사역
본부 건물 격인 포스트 그린 하우스는 리즈 부부의 거처이면서 목양센터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양육과 훈련·치유·상담 등의 사역이 이뤄지고 있으며, 매년 몇 차례의 큰 집회를 가진다. 나머지 회원들의 집은 그 주위 가까운 마을 안에 퍼져 있다. 각 회원 집은 모두 방문객의 숙소로 활용되며 손님 접대를 중요 사역으로 여겨 최선을 다해 섬긴다. 
원래 공동체는 그 성격상 공동식사·공동예배· 공동작업·공동재산 등을 기본으로 하는데, 이들은 확대가족으로 각 집에 살면서 공동체를 이루는 일종의 도시공동체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 저녁과 목요일 저녁 주 2회의 공식모임을 갖는다. 
월요일 저녁은 예배 중심의 영적인 모임을 가지며 목요일 저녁에는 행정적인 모임을 가진다. 월요 모임은 찬양·말씀·애찬 성격의 성찬과 세계를 위한 중보기도 등의 매우 간단한 형식의 예배시간을 가진다. 
공동체의 재정운용을 위해서는 목양센터를 맡은 회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직장에 나가는데, 교사·농부·점원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수입의 70%를 공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그 나머지는 각 가정의 생활비로 충당한다. 공동체에 위탁된 재정은 포스트 그린의 주요 사역을 추진하는 기금으로 사용된다. 
포스트 그린 가족들은 다양한 지역 사회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마을에서의 노동 봉사와 지역 주민의 상담역을 맡고 있으며, AIDS 환자를 위한 사역도 감당하고 있다. 또한 포스트 그린 공동체 식구들은 자체적으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역량이 있지만 모두 지역 교회에 출석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공동체
포스트 그린 공동체를 보면서 호감이 가는 것은 학적으로 뛰어나다거나 거대한 영성, 혹은 대단위의 사역 프로젝트 같은 특징은 없지만 낮은 울타리를 가지고서 누구에게나 항상 열려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조그마한 공동체라는 것이다. 항상 가까이에 있으면서 함께 고민하고 쉴 수 있는 포근한 둥지이다.
평신도로서 일반적인 사회 속에서 살면서 사랑과 치유의 둥지의 역할을 감당하며, 고통당하는 이웃을 섬기는 작은 공동체는 우리에게 좋은 귀감과 도전이 되고 있다. 
이 공동체는 기독교 마리아자매회나 떼제 공동체 같은 독신자들의 수도공동체가 아니지만, 일반 사회 속에서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시도할 수 있는 그러한 기독교 공동체이다. 우리 교회와 사회에도 정말로 포스트 그린과 같은 작은 공동체들이 많이 생겨나야 하겠다! <계속>
#포스트그린공동체 #도시공동체 #사랑과돌봄
==
[나의 공동체운동 이야기 11]   
- 프랑스 떼제 공동체 탐방
독일 기독교 마리아자매회에서 황홀한 공동체 경험을 한 후 다음 일정인 프랑스 떼제 공동체 (Taize community)로 향했다. 1989년 2월, 다름슈타트에서 약 8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떼제에 도착한 필자는 젊은 지원 수련생들의 환영을 받았다. 원장인 로제 형제(Brother Roger)도 한국에서 찾아온 젊은 순례자를 기꺼이 맞아 주어서 환담할 수 있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하나 된 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가톨릭과 수많은 개신교 교파로 갈라져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분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과 상처를 지니고 있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한 몸이라고 역설하지만, 과연 모든 교파가 현실적으로 하나 될 수 있을까? 떼제 공동체는 이러한 의문을 배경으로 하여 시작되었다.
설립자 로제
떼제 공동체의 창시자 로제 슈츠(Roger Shutz, 1915-2005)는 프랑스 프로방스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스위스 사람으로 칼빈주의 전통에 충실한 개혁교회 목사였고, 어머니는 프랑스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 가정도 같은 목사 집안이었다. 로제 형제는 아버지의 고향인 스위스에서 자라났다.
어린 로제는 개신교 목사이면서 가톨릭과 그리스도 안의 한 형제로서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온 아버지의 태도에 영향을 받았다. 뼈대 있는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부터 지체없이 화해를 실천하기 위해 어려운 처지에 있던 가톨릭 교도들을 받아 주곤 하였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스위스 로잔의 개신교 신학교를 졸업한 후 젊은 로제는 앞으로 일반 기성 교회에서의 목회와 보다 본질적인 복음의 사역을 두고 어떠한 사역을 할 것인가에 대하여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일치와 화해를 위해 헌신 하는 공동체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전쟁과 고통으로 얼룩진 프랑스로 가서 브로고뉴 지역의 떼제라는 작은 마을에 공동체를 세웠다. 로제 형제는 공동체 초창기에는 독일 경찰에게 쫒기는 유대인들을, 전후에는 연합군에 쫓기는 독일 병사들을 공동체에 집에 숨겨 주었다.
현재 90여 명의 떼제 형제 중 20여 명은 세계 여러 나라에 파송되어 있으며, 나머지 70여 명은 프랑스 떼제 공동체 안에서 산다. 이들의 일과는 매일의 삶의 중심이 되는 하루 세 번의 예배(기도), 노동, 방문객 지도 및 상담 등이다. 떼제 공동체는 철저한 공동소유와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다양성 속의 화해와 일치
이 공동체의 시작 때부터 ‘화해와 일치 (reconciliation and unity)’는 떼제의 중심 되는 서약이었고, 형제들은 갈라진 그리스도인들의 화해를 통해서 지상의 인간 가족의 화해를 도모해 왔다. 초창기 멤버들은 모두 칼빈주의자들 이었으나 나중에는 성공회,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회원들을 모두 받아들여 일치를 모색하고 있다.
떼제의 일치는 떼제라는 어떤 고유한 틀 안에서 통일된 규격품이 되어 하나 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특정한 종파를 형성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출신 교파 신자로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를 모색한다. 즉 떼제의 화해와 일치는 신앙 노선을 인정하면서 있는 그대로를 포용하는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unity in diversity)’인 것이다.
떼제의 일치는 제도적인 교회의 통합이 아니라 복음과 성령 안에서 하나를 이루어 세계의 모든 교파와 그리스도인이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는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실제로 떼제 공동체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떼제 언덕을 찾아오는 젊은이들
떼제의 아름다운 영성을 사모하여 전 세계에서 방문객이 몰려온다. 여름에는 매주 5천여 명, 그 외에는 5백 명에서 1천여 명 정도의 인원이 북적된다. 방문객들을 위해서는 일주일간의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는데, 매일 세 차례의 공동기도(예배)와 함께 오전에는 성경공부, 오후에는 찬양연습과 노동을 한다.
떼제 공동체는 예배시간에 유명한 ‘떼제의 찬양’ 을 부른다. 떼제의 찬양은 신앙의 핵심적인 내용이 몇 안 되는 짧은 가사에 담겨 있어 금세 배우고 이해할 수 있으며, 거듭 반복해 부름으로써 그 뜻이 인간 영혼의 모든 존재 안으로 스며들도록 되어 있다. 비록 서로 교파가 다르고 언어와 피부색이 다르더라도 떼제의 노래를 부르면 곧 일체감을 느끼면서 함께 그리스도께로 나아간다.
떼제 공동체의 방문객의 상당수는 불신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은 자신만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사는데 비해, 떼제 공동체는 어떻게 하여 서로 섬기고 사랑하며 살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여 공동체로 끌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공동체는 그 자체가 흡인력 있는 선교의 장이다. 지금까지의 선교는 나가서 전하는 것에 치중 하다보니 사랑의 공동체를 통하여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구심적 선교에 취약 했었다.
떼제 공동체는 1979년에 한국에도 그 지부를 설립하여 서울 화곡동에서 작은 공동체로 살고 있다. 이외에도 브라질, 방글라데시, 세네갈에 공동체 지부가 설립되어 고통당하는 이웃을 섬기는 사역을 하면서 작은 공동체로 살고 있다. 일종의 타문화권 공동체 선교사역이다.
일치의 비유
필자뿐 아니라 떼제를 찾는 지구촌의 가족은 누구나, 아니 떼제의 형제들조차도 도대체 떼제가 무엇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매료 시키는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떼제 공동체의 로제 원장도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일치의 비유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그분의 교회의 독특한 일치의 한 소박한 반영이다. 이 일치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인류 가족 안에서 누룩이 된다. 우리는 공동체 생활 안에서 오로지 매일의 용서와 신뢰하는 마음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 주려는 노력을 통하여 사랑의 기적을 새로이 발견하고자 한다.”
떼제 공동체가 세계성을 발산하는 본질은 바로 ‘공동체성’에 있다. 그 공동체는 개신교, 가톨릭, 빈부 귀천, 언어,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이들이 모여 이루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한 몸이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몸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온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 된 교회를 보기 위해서 떼제의 언덕으로 모이는 것이다.
화해와 일치의 산 누룩인 떼제 공동체를 방문한 것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공동체를 통해서 이렇게까지 하나 됨을 이루어낼 수 있다면, 진정 교회와 선교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녕 아름다운 희망이었고 내적 확신에서 오는 힘이었다. <계속>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떼제공동체  #로제슈츠 #화해와일치 #하나됨 #떼제찬양 #구심적선교



==[나의 공동체운동 이야기 10] 
- 독일 기독교 마리아자매회 탐방
아내가 장유착증이라는 질병에서 치유된 후 6년동안 사역했던 교사로서의 마지막 해를 보냈다. 예수원에서 공동체훈련 받을 때, 대천덕 신부님께서 세계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 들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현재에도 초대교회와 같은 삶을 사는 “기독교 공동체”(Christian community)들이 있다는 이야기에 매우 호기심이 나서 나도 언젠가 꼭 한번 방문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드디어 1989년 1-2월 겨울방학 기간을 활용하여 그렇게 가고 싶었던 세계의 기독교 공동체 탐방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지금은 인터넷도 있고 공동체에 대한 자료도 많이 있어서 쉽게 정보를 찾을 수 있지만, 1980년대 후반에는 인터넷 검색도 안 되어서 직접 발로 뛰어 다니면서 필요한 정보를 얻고 또한 해외에 편지를 써서 방문신청 허가를 받아야 했다. 약 석 달 전부터 작업을 해서 마침내 방문이 성사되었다.
최초의 해외 기독교공동체 탐방
그때 처음으로 방문한 기독교 공동체들은 독일의 기독교마리아자매회(Evangelical Sisterhood of Mary),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 (Taize Community), 영국의 포스트 그린 공동체(Post Green Community), 미국의 베다니 공동체 (Bethany Fellowship) 등 4곳이었다.
이 기독교공동체 탐방은 나의 첫 해외 공동체 탐방이었고 동시에 한국에서 최초로 시도된 체계적인 세계의 기독교공동체 탐방이었기에 큰 의미가 있었다. 그 후 공동체 탐방이 계속 이어져 나는 총 15개 공동체를 탐방하게 되었다. 그 탐방 기사는 1992-93년 동안 두란노서원의 「빛과 소금」 지에 연재가 되어 당시 한국 교회에 상당한 영적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독일 기독교마리아자매회
이중 제일 먼저 방문한 공동체는 독일의 기독교 마리아자매회였다. 당시 서울에 있던 마리아 자매회 지부를 찾아가서 독일 본부공동체 방문 요청을 하여 이루어졌다. 이 공동체는 독일 남부의 다름슈타트 (Darmstadt) 라는 도시 서쪽 외곽에 위치해 있다. 공동체 입구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하여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님의 도우심만으로 지어진 교회”라고 적혀있다.
독일 기독교 마리아자매회는 바실레아 슐링크 (M. Basilea Schlink, 1904~2001)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1939년 함부르크대학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녀는 1947년 믿음의 동역자 에리카 마다우스와 함께 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철저한 회개와 기도를 통해 독일 다름슈타트에 개신교 독신여성 공동체인 기독교 마리아자매회(Evangelical Sisterhood of Mary)를 설립하였다.
바실레아 슐링크
기독교마리아자매회는 이 시대에 대한 선지자적 경고와 복음전파 사역, 믿음의 공동체 사역, 이스라엘 선교 사역, 다시 오실 주님을 맞기 위하여 그 길을 예비하며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회개와 사랑을 촉구하는 사역을 통해 수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을 전하고 있다.
바실레아 슐링크가 저술한 『천국의 향취』를 비롯한 100여 권의 책은 현재 약 60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기독교 마리아자매회에는 19개국에서 온 자매들이 믿음의 공동체 삶을 살고 있고 이스라엘 등 12개국에 지부가 설립 되어 있다. 이들의 사명은 무엇보다도 정결한 신부로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데 있다고 고백한다.
한국에는 1981년도에 한국지부 자매회가 설립되어 세바스티아나 자매와 파쇼나타 자매 두 분이 8년간 사역하다가 1989년 3월에 본부로 철수했으며, 한국인으로서는 진인숙 (Ambrosia) 자매와 이금순(Tusa) 자매가 마리아자매회 본부에서 정회원으로 사역하고 있다.
마리아자매회는 그동안 주님의 친히 공급 하심을 체험하는 기적을 역사를 이어왔다. 바실레아 슐링크의 다락방에서 시작된 자매 공동체는 어떤 재정적 후원이 전혀 없었다. 이들은 재정 문제를 하나님께서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는 “믿음의 선교방식”(faith mission) 으로 해결해나갔다.
바실레아 슐링크는 “회개는 기쁨이 충만한 삶의 원천이며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통로”라고 강조하였다. 마리아자매회는 초창기 20년 동안 회개를 통해 숱한 기적들을 체험했으며, 약 25에이커에 이르는 넓은 땅을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허락받아서 그곳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작은 땅”(Little Land of Canaan) 으로 조성하였다.
이 땅에 있는 작은 천국
마리아자매회에서 머무는 동안 그 땅을 감싸고 있는 깊은 영성, 25에이커의 넓은 땅위에 자매들의 정결한 마음씨로 빚어낸 너무나 아름다운 환경, 무엇보다도 손님 접대를 위해서 철저한 준비와 최고의 정성을 쏟는 그들의 태도, 초대교회와 같이 기쁨과 생명력이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방문객의 취향을 고려하여 매일의 일정표를 세심하게 짜서 섬기는 자매들의 환대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나는 그때 그러한 환대를 처음 경험했었다. 그토록 지극히 섬기는 모습에서 그들이 진정으로 천국의 기쁨을 여기서 누리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역사하신다.
마리아자매회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임재하심과 천국의 아름다움을 미리 맛보는 듯한 느낌을 강력히 받았다. 약 70년을 통하여 그들이 흘린 대속적인 회개의 눈물과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서 그들의 철저한 헌신의 삶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땅을 천국의 향취가 서린 가나안 땅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자매회는 사랑의 공동체를 통하여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God lives and works today.)을 선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독일에서의 첫 공동체 방문을 통하여 겪은 황홀한 경험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설레는 가슴을 안고 두 번째 공동체 탐방지인 프랑스로 향했다. <계속>
#독일기독교마리아자매회 #바실레아슐링크 #회개 #예수선포예배당


==
[나의 공동체운동 이야기 9] 
- 아내의 중병
1987년 5월에 결혼하여 단란한 신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해 1월에 아내가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을 사 먹으면 낳으려니 했는데 약을 먹어도 계속 배가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동내 병원과 한약방에서 한 달 동안 치료해도 병명도 알 수 없었다. 
음식을 먹으면 다 토해내고 물도 마실 수 없었다. 이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다른 병원으로 옮겨 치료 받아도 여전히 병명을 알 수 없었다. 아내는 피골이 상접하여 다 죽어가고 있었다.
아내는 내게 “여보, 죽더라고 큰 병원에 가서 진찰을 제대로 받아보고 싶다”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아내를 급히 업고 종합병원인 대구 동산병원으로 갔다. 오후 6시경, 대부분의 직원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병원 로비에 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면서 주님께 도와 달라고 화살기도를 드렸다. 
바로 그때 대학 시절 한국대학생선교회 (CCC)에서 함께 헌신했던 최영택 형제가 퇴근하려고 병원 1층 로비로 막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찬양곡인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의 작곡자 로서 당시 동산병원에서 정신과 의사로 근무 하고 있었다. “영택아, 너 잘 만났다. 지금 아내가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날 좀 도와다오.” 
한밤의 긴급 수술
나의 간청을 들고 그 친구는  퇴근한 5명의 동료 의사들을 다시 병원에 오도록 연락하여 아내를 종합 진찰하게 조치하였다. 각각 전문 분야가 다른 5명의 의사들이 함께 진찰한 결과 “장 유착증”이라는 병명이 나왔다. 즉 창자가 서로 달라붙어서 장기능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는 증세이다. 
그러니 아무리 음식과 약을 먹어도 흡수할 수 없어서 모두 토해 내고 아내는 영양실조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 밤 10시에 급히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 조건은 장 유착이 너무 심한 상태여서 수술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조건을 수용하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조건을 수용하여 수술 서류에 도장을 찍고 드디어 수술이 시작되었다. 아내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상황이 되니 기도가 더욱 간절해졌다. 기도하던 중에 어릴 때 우리 아버지가 내가 목사가 되도록 하나님께 바쳤다는 서원이 생각이 났었다. 그러나 나는 어릴 때 개척 교회에서 고생한 것이 너무 싫어서 목회자 되는 것을 늘 회피하고 있었다. 그때 이런 기도가 튀어 나왔다: “주님, 아내를 살려 주신다면 제가 신학교 가겠습니다.”            
서원 기도
아내의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처고모님이 밤중에 오셔서 나와 함께 기도해주셨다. 처고모님은 예언과 치유의 은사가 있는 분이셨다. 간절히 기도를 하시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수술을 하는 의사들 손 위에 천사들의 손이 함께하는 환상을 보여주셨다.”라고 하면서 수술이 잘 되어 병이 속히 나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정말로 아내는 수술한 그 다음 날부터 바로 장 운동을 위해 병실 복도에 걸어 다닐 정도로 상태가 양호했고, 치료 받은 지 삼주 만에 완치가 되어 퇴원하였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였다.     
하나님은 위급한 상황에서 친구 최영택을 만나게 하셔서 아내가 치료받을 수 있게 해주셨다. 그는 지금 경북 김천에서 개업하여 최영택 신경정신과 의원 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또한 대구 내일교회 장로, 의료 선교사 로서 각종 선교 사역에 귀하게 쓰임 받고 있다. 대학 시절 대학생 복음화를 위해서 함께 헌신한 관계로 어려울 때에 소중한 도움을 받았다. 친구야~ 고맙다!  
하나님의 쓰리 쿠션
하나님은 정말 지혜로우신 분이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질병으로 치셨으면 내가 정면으로 반발했을 터인데, 사랑하는 아내를 치시니 그 앞에 꼼짝 없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쓰리 쿠션은 정말 절묘했다.
하나님은 나를 대학시절에는 찬양선교사로, 군에서는 군선교사로, 학교에서는 학원 선교사로 사역하게 하신 후에, 전문사역자의 길로 가도록 계획하셨던 것이다. 아내의 중병을 계기로 나는 마침내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내가 수술하던 날이 바로 그 해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이 입학시험을 치는 날이었다는 사실이다. 신학교 입학시험 치는 날 아내의 중병으로 목회자가 되겠다고 결심을 하고 그 다음 해에 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된 것이다. 1988년에 마지막으로 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면서 신학교 입시를 준비하였다. <계속>
#장유착증 #최영택장로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

[나의 공동체운동 이야기 8]  
- 결혼 이야기
경북여상에서 근무하던 중 1986년부터는 같은 재단 내의 학교인 경일여고로 발령이 났다. 여기에도 주님의 오묘한 인도하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상업고등학교에서 대학진학 중심인 인문계 학교로 옮겨와 근무해보니 정규 수업과 보충수업 이외에도 오후 10시까지의 야간 자율학습 지도 등으로 훨씬 힘들었다.
그러한 가운데서 매주 수요일 저녁에 학교 근처에 있는 대구 동심교회에서 크로스웨이 성경공부 코스가 있어서 동료 교사와 참석했었다. 이 성경공부 코스는 성경을 전체적인 관점으로 공부할 수 있는 탁월한 코스였다. 경일여고에서 첫 학기 근무가 마칠 즈음에 동심교회에서 성가대 지휘자로 사역하는 동료 음악교사가 자기 교회에 좋은 아가씨 두 사람이 있는데 소개해 주겠다면서 한 사람을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그 둘 중에 한 아가씨는 크로스웨이 성경공부에 참석한 자매였기에 누군지 알고 있었다. 다른  아가씨는 그 교회 피아노 반주자로서 음악을 전공한 자매였다. 두 사람 다 훌륭한 자매님들 이었다. 나 개인적으로는 음악을 좋아 하기에 피아노 반주를 하는 자매님에게 더 마음이 끌리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은 직장보다 더 중요한 문제이기에 육신적인 안목으로 선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기도해보고 누구와 선을 볼 것인지 알려 주겠노라고 하였다.
배우자 선택
마침 내가 청년부장으로 있던 원일교회 청년부 여름수련회가 대구 주암산 기도원에서 나흘 동안 있었기 때문에 수련회시 말씀도 전하면서 결혼 문제를 놓고 집중적으로 기도하였다: “주님, 제 개인적으로는 피아노 반주하는 자매님이 좋지만, 제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알게 해 주옵소서.” 삼일 째 되는 새벽기도 시간에 주님께서 “반주자가 아니라, 크로스웨이 성경 공부에 참여하는 자매이다.”라고 너무나 선명하게 말씀해 해주셨다. 
주님의 응답을 받고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자매님과 선을 보고 교제를 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자매님은 선을 본 날로부터 100일 동안 매일 아침 금식기도를 하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었고, 또한 결혼 상대자인 나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주님으로부터 분명한 인도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대천덕 신부님의 안수기도
그해 말에 교제하던 자매님과 함께 강원도 예수원을 방문하였다. 나의 인생에 공동체 비전을 준 예수원의 가치를 함께 나누고 또 대천덕 신부님도 뵙고 자매님을 소개드릴 겸해서 간 것이었다. 대신부님에게 자매님을 소개드리고 티타임을 가지면서 교제를 마칠 즈음에, 갑자기 대천덕 신부님이 일어나셔서 우리 두 사람에게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주여, 이 형제와 자매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한 쌍이 되게 축복해 주옵소서.” 
그 기도를 받고 자매님은 너무 놀랐다. 왜냐하면 그날이 바로 결혼 문제를 놓고 주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 아침 금식기도 하던 100일째 되는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자매님에게는 가을 내내 나와 교제하면서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며, 금식기도 마지막 날 아침까지도 나와 결혼해야한다는 주님의 분명한 말씀이 없었는데, 예정에 없던 대천덕 신부님의 안수 기도를 통해서 응답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의 결혼은 그렇게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결정되었다. 
결혼식 해프닝
마침내 1987년 5월 5일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식에는 일종의 해프닝이 있었다.  결혼 주례는 평소에 존경하는 대천덕 신부님으로 하고자 하여 대신부님의 허락을 받고 결혼식을 진행하고자 했는데, 문제는 우리 아버지였다.
정통 장로교 합동교단의 목사로서 아들 결혼식에 성공회 신부가 결혼식 집례를 하면 아버지가 교단에서 치리(징계)를 당하니 그렇게 하면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장로교 합동과 성공회는 교류가 금지되어 있었다. 맏아들 결혼식에 아버지가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앞으로 공동체로 살아가고자 하여 존경하는 대천덕 신부님의 주례를 꼭 받고 싶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불참한 가운데 결혼식을 진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지혜를 주셨다.
그것은 결혼식 사회는 신부측 교회 목사님 (장로교 통합측), 설교는 대천덕 신부님 (성공회), 축도는 신랑측 교단 노회장님 (장로교 합동측)이 맡도록 하는 안이었다. 이 안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리니 그제서야 겨우 찬성하셨다.
결혼부흥회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결혼식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장로교 합동과 장로교 통합과 성공회와 예수전도단(축하찬양)이 일치를 이루는 축제분위기 가운데서 ''결혼부흥회“ (Marriage Revival Meeting)가 되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의 놀라운 지혜였다. 결혼식 날 저녁 시간에는 예수전도단 대구 지부에서 대천덕 신부님을 강사로 모시고 특별 집회를 갖게 되었으니... 성령 충만한 집회가 되었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공동체적 일치의 세리머니로 시작된 우리의 결혼은 지금도 태안에서 사귐의 공동체 삶으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 지난 30여년 동안 공동체 비전을 계속 이루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첫 번 째는 주님의 은혜요, 두 번 째는 아내 덕분이다. 아내는 정말 공동체 삶에 필요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진실로 현숙한 여인은 주께로 말미암는 것이다! <계속>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잠언 31:32)


==

[나의 공동체운동 이야기 7] 
- 학원 선교사로 사역 했던 고교 교사 시절
안동 영문고등학교에서 제안한 고교 교사 자리를 마다하고 강원도 태백에서 너무나 귀한 예수원 공동체 생활훈련을 잘 받았다. 예수원 훈련을 마치고 다시 근처에 있는 갈전 기도원에 가서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 인도받기 위하여 3일 금식 기도를 드렸다. 예수원에서 1년 수련을 더 받을 것인지, 신학교에 입학할 것 인지, 교사로 복직할 것인지 세 갈래의 방향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드렸다: “주님께서 저를 군대에서 군종으로 놀랍게 사역하게 하셨고, 예수원에서도 너무나 귀한 훈련을 받게 하셔서 감사드립니다. 이제 앞으로 주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 말씀해 주시옵소서.” 그 결과 교사로 사역하라는 인도를 받고서 1983년 4월 20일에 대구로 돌아왔다. 
시골 중학교 교사
그러나 백수의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4월 말에는 교사로 취업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약 2주간을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5월 초순에 참외로 유명한 경북 성주의 성광중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영어교사 자리가 났는데 오겠느냐는 것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바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어떻게 5월 달에 교사 자리가 날 수 있는지 의아했었다. 남자 중학생들에게 두 달 동안 영어를 가르치면서 복음도 전하고, 개구쟁이 녀석들과 즐겁게 직장 생활을 했다. 
당시 대구에서 성주까지 통근 버스를 타고 출근했었는데 매일 출퇴근 시간이 4시간 걸렸다. 그때 나는 군대에서 군종사역을 마치고 예수원에서 받은 공동체 훈련으로 성령이 충만한 청년이었다. 찬양선교단 사역, 출판사역 등 주님의 일을 너무나 하고 싶었지만 매일 출퇴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어서 도저히 사역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주님, 사역을 너무나 하고 싶은데 출퇴근이 너무 길어서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면 주님만 손해 아닙니까? 대구 시내로 교사 발령을 내 주십시요!”      
시내 여고 교사로 발령
여름 방학이 지나고 1983년 8월 30일에 대구의 경북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교사 자리가 났으니 응모하라는 것이었다. 면접을 하고 채용이 되었다. 그 다음 날인 9월 1일부터 대구에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어떻게 5월 달에 중학학교 교사 자리가 날 수가 있고, 어떻게 2학기 개학하기 하루 전 날에 대구 시내로 발령이 날 수 있었는지 의아해 했었다.     
그때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이 생각났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넉 달 전에 교사 제안을 거절하고 1년을 바치는 마음으로 예수원 공동체훈련을 3개월 받았더니, 하나님께서 한 치의 손해도 나지 않도록 놀랍게 보상해주신 것이었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했을 때,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적으로 응답해 주셨다.  
이제는 여고에서 5년 반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경북여상에서 2년 반, 경일여고에서 3년간 교사로 근무하였다. 경북여상에서는 기존에 있던 기독학생반을 맡아서 성경공부를 실시하여 제자 삼는 사역과 학생 전도 사역을 주로 하였다. 
학생 전도 사역
경일여고에서는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에 음악실에서 찬양집회를 열었다. 당시 여학생 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총각 선생이 기타를 들고 찬양한다고 하니, 매주 학생들이 구름 때처럼 모였다. 30분 찬양을 한 후에 5분 메시지로 복음을 전하였고, 찬양 집회에 참석한 학생 중 희망자에 한하여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성경공부를 진행하였다. 
20명 정도의 학생들을 헌신된 예수님의 제자로 훈련 시켜 나갔다. 이 학생들을 중심으로 기독 학생회를 만들었고 방학이 되면 3박 4일간 수련회를 통해서 학생들 모두가 성령의 세례를 받아 체험적인 신앙을 갖도록 하였다. 
예수 제자 훈련
이렇게 말씀과 성령으로 훈련받은 학생들은 충성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이렇게 훈련된  한 학생은 자기 반 학생 60명중 40명을 전도 하여 매주 토요일 수업 후 반 예배를 드렸다. 헌신된 한 학생이 일당백의 사역을 해나갔다. 헌신된 학생들이 벌집 쑤시듯이 다니면서 학교 전체를 전도의 장으로 만들었다. 
매년 10월에는 “예수 축제”를 열어 전교생을 대상으로 하는 전도 집회를 열었다. 찬양, 드라마, 댄스 등의 순서를 통하여 학생들이 마음 문을 열도록 하였고, 마지막 순서로 내가 복음 메시지를 전하여 학생들이 예수님을 영접 하도록 하였다. 당시 수많은 학생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풍성한 결실이 있었다.
학원 선교사
내게 학교는 정말 너무나 효과적인 선교의 장이었다. 수업 시간에는 영어 단어 풀이하면서 복음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과외 활동을 통해서는 학생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훈련하여 학교 전체를 상대로 조직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나는 그 때 한 사람의 헌신된 교사가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기독 교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나는 그 때 학교에서 정식으로 월급 받고 사역하는 “학원선교사”로서 마음껏 전도 사역을 할 수 있었다. 
대학생 때에는 선교합창단을 설립하여 "찬양선교사", 군대에서는 군종으로서 "군선교사", 학교에서는 교사로서 "학원선교사" 로 사역하게 되었다. 할렐루야~! 이처럼 주님의 은혜는 계속하여 나타났었다. <계속>
#학원선교사 #성주성광중학교 #경북여상 #경일여고 #경북여상기독학생반


==
[나의 공동체운동 이야기 6] 
- 대천덕 신부가 한국교회에 준 영적 유산
대천덕(R. A. Torrey III, 1918-2002) 신부는 나의 공동체 사역에서 이정표가 되었던 분이다. 나는 예수원 공동체를 통해서 “교회란 말로만 하는 개념적 공동체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랑의 공동체이다” 라는 오랫동안 갈구했던 해답을 선명하게 얻을 수 있었다. 그가 한국교회에 남긴 영적 유산이 무엇인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코이노니아의 신학
예수원에서 노동하며 공동체 생활을 직접 경험하면서 공동체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비현실적인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바쳐 우리로 하여금 한 몸이 되게 하셨던 교회 바로 ‘그리스도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원 공동체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의문(儀文), 즉 상투적인 단어가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그 진정한 뜻을 그의 공동체 삶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대천덕 성공회 신부가 한국 교회에 준 귀중한 선물은 ‘코이노니아 신학’이다. 신학적으로 교회의 본질은 “성도의 교제”(communio sanctorum) 즉 그리스도인들이 교제하는 공동체다. 여기서 교회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은 ‘코이노니아’(교제, 사귐, 나눔)이다.
그의 성령론은 신자들이 중생과 함께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며 방언, 예언, 신유와 같은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역설함과 동시에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강조한다. 종래 한국 교회의 성령론이 성령의 능력 체험에 치중하는 “개인적 성령론”이었다면, 그의 성령론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지체를 세워 가는 “공동체적 성령론”이다.
공동체적 성령론
그는 오순절 성령의 능력과 함께 ‘코이노니아’를 강조한다. 성령세례, 성령의 능력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인 교제와 인간과 인간의 수평적인 교제를 의미하는 코이노니아임을 말한다. 코이노니아가 교회의 공동체 됨의 기본이다. 그는 한국에서 성령의 코이노니아 신학을 소개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신약교회는 성령이 오셔서 이루어진 성령의 공동체이며 그 원리는 코이노니아이다.
성령의 코이노니아에는 수직적, 수평적, 대 사회적 코이노니아가 있다. 수직적 코이노니아는 성령세례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다. 수평적 코이노니아는 지체들 간의 영적·정신적·물질적 교제를 통해 실제적인 공동체 삶을 사는 것이다. 대사회적 코이노니아는 교회 주위의 고통당하는 이웃과 함께 하는 삶으로서 희년의 실천과 해비타트 운동을 포함한다.
예수님이 제자도의 핵심 내용으로 제시한 산상수훈은 ‘철저한 제자도’ (radical discipleship)의 내용이며 이를 이루는 삶의 방식이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이다. 공동체 생활 방식은 세속적 사고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삶이다.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삶이다.
공동체적 교회 갱신의 진원지 - 예수원
대천덕 신부는 고향 중국 산동성 제남 근처에 있던 “예수 가정” (Jesus Family)이라는 공동체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평양에서 고등학교 시절 주한 외국인 선교사들의 교제하는 삶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가장 깊은 영향은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나오는 초대 교회 공동체 생활이었다.
그는 공동체 생활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이라고 말했다. 공동체 형태는 공동 생활, 도시 공동체, 공동체 교회, 셀 교회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의 실제적인 코이노니아를 이루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가르침과 삶은 한국 교회가 공동체성을 회복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공동체 삶 혹은 공동체 교회를 실천하려는 목회자와 교회들에게 예수원은 공동체의 진원지 역할을 해 왔다.
그의 모든 가르침과 사상은 “코이노니아의 신학”에 귀결된다. 만약 그가 성령론이나 희년 문제를 학자나 신학교 교수로서 거론했다면 다른 학자들과 별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학을 예수원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설립, 직접 삶으로서 코이노니아를 생활에서 실천했기에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원에서 공동체 생활은 대천덕 신부에게 십자가이기도 했다. 그는 “성령과 토지에 대한 강의는 재미있지만, 공동체 생활은 자신이 희생하고 죽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삶이다”고 술회하였다. 공동체는 그가 육화(肉化)되고 성령의 능력을 검증 받으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장이고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빚어지는 고난의 틀이었다.
공동체 선교
대천덕 신부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 사역한 선교사였다. 한국에 온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60대가 되면 고국으로 떠난다. 그러나 대천덕 신부는 85세로 죽을 때까지 선교사역을 하였다. 그 비결은 공동체로 사역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는 갔지만 그의 공동체는 남아서 지금도 계속 사역하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공동체 선교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살아 있고 만질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보기 위해 예수원 공동체로 간다.
그의 삶을 보며 한 교회나 단체의 생명이 조직이나 건물에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의 삶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주었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아직도 그의 분신인 예수원을 통해 말하고 있다. “당신도 이와 같이 사십시오.” <계속>
#대천덕신부  #예수원  #공동체  #코이노니아의신학  #공동체적성령론



==
[나의 공동체 운동 이야기 5]  
- 대천덕 신부와의 만남과 
   예수원 공동체 생활 훈련
군대를 제대한 후에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제일 먼저 간 곳이 예수원이었다. 그래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첫 방문 3일을 지냈다. 장로교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성공회식 조도(아침기도회), 정오 중보기도회, 공동식사 등은 신선한 충격 이었으며, 공동체 건물 또한 영감어린 일종의 예술적 작품이었다. 교회가 이러한 공동체로 가능하고 또한 현대에서 그러한 초대교회와 같은 형태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충격적 이었다. 
1년 바치는 마음으로
이러한 공동체에 끌려 나는 공동체에 함께 살고 싶어서 문의해보니 3개월 수련과정이 있었는데 내가 방문한 바로 그 전 주간에 4기 수련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주간 늦었지만 수련생으로 받아줄 수 있겠느냐고 신청하니 단호하게 안 된다는 것이었다. 훈련을 받으려면 내년(1983년) 1월 20일에 시작하는 5기 수련생으로 지원하라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제대하길 기다린 끝에 예수원에 온 나로서 그것은 상당히 야박한 거절이었다. 
군 입대 전에 나는 고등학교 교사로 있었기에, 1982년 10월 제대한 후 그 다음해 3월에 시작하는 새 학기부터 복직을 하려고 계획했었다. 예수원에서 10월 20일부터 1983년 1월 10일까지의 공동체생활 훈련을 하고 복직하면 안성마춤이었다. 
그러나 예수원에서  83년 1월 20일 - 4월 20일간 진행되는 5기 수련생으로 지원하라는 말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3개월 수련을 받고 싶으나 수련을 받으면 4월 20일에 끝나는데 4월 말에 어떻게 고등학교 교사로 복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어떤 직장도 3개월 휴가를 주는 직장이 없다고 생각하니, 그 때 원하는 훈련을 받지 않으면 영원히 못 받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이전에 예수원에서 세운 공동체 분원이었던 갈전 기도원에 가서 3일 금식하면서 기도 드렸다. “주님, 군 입대 전에 1주일 금식 기도하여 군종으로서 너무나 축복된 군대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저의 인생을 주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던지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그 결과 예수원에서 훈련을 받으라는 응답이 왔다. 그때 나는 주님께 말씀드렸다. “주님, 4월 20일 훈련이 끝나면 저는 백수가 됩니다. 1년 바치는 마음으로 3개월 훈련을 받겠습니다. 그 다음은 주님께서 책임져 주십시요.” 나는 그렇게 3일 금식기도로 준비하고 1년을 바치는 마음으로 3달 후인 1983년 1월 20일부터 제 5기 수련생으로 예수원에서 공동체 훈련을 받게 되었다.
영감 넘치는 공동체생활 훈련
당시 예수원은 창립된 지 17년째 되던 해였고 60대 초반이셨던 대천덕(R. A. Torrey III) 성공회 신부님은 매우 건강하셔서 수련생 강의, 개인상담, 각종 집회 등 공동체 모든 사역에 매우 의욕적으로 임하셨다. 매일 삼종 기도회인 조도(아침기도), 대도(정오 중보기도), 만도(저녁기도 및 집회) 외에도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에는 수련생을 위한 대신부님의 강의가 있었다. 수련생을 위한 강의와 주일 설교말씀, 아침기도회의 성경 해석, 수요 특강 등 각 집회 시에 하시는 말씀은 모두 주옥같은 말씀이었다. 
이전에 장로교회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내용들, 즉 중보기도, 성령세례, 코이노니아, 공동체, 희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과 재세례파 공동체들, 중국의 예수가정, 미국 베다니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들은 귀가 번쩍 열리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나는 그때 대신부님의 말씀들이 너무 신선하고 귀중해서 두꺼운 대학노트에 일일이 다 받아 적었는데 약 3권 정도의 분량이 되었다. 나중에 이 내용은 나의 저서 『공동체 신학』 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한 가르침들은 매우 균형 잡힌 온전한 복음에 대한 내용이었다. 또한 대신부님이 들려주시는 세계의 기독교 공동체 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나도 언젠가 꼭 한번 탐방해 보리라고 마음 먹었으며 실제로 5년 뒤 세계 기독교공동체 탐방을 하게 되었다. 
평생의 사명과 비전  
예수원 공동체 훈련을 받고 있는 동안, 군 입대 전에 근무했던 안동 영문고등학교에서 예수원 으로 장거리 전화가 왔다. 3월 달부터 교사로 복직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영어와 음악 
두 과목을 다 가르칠 수 있는 자리였다. 당시 고교 교사 자리를 얻기가 어려웠던 때에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교사로 복직하면 4월 20에 끝나는 공동체 훈련을 받을 수 없었기에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이렇게 20세기의 성자라고 불리는 대신부님과 함께 한 예수원에서의 공동체 훈련은 신학교 에서 3년 배운 것 보다 더 많이 배웠다고 생각 한다. 그러한 공동체 생활훈련은 일종의 살아 있는 신학교였다. 1년 바치는 마음으로 3개월 훈련을 받았지만 내가 평생 추구해야할 사명인 “사랑의 공동체 비전”을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그 비전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 
그때 3개월을 아니 1년과 교사 자리를 바쳐서 받은 훈련을 통하여, 나는 평생 동안 누릴 수 있는 영적 자양분을 받게 되었으니 이 또한 귀한 은혜와 축복이 아닌가? <계속> 
#공동체운동 #대천덕신부 #예수원 #공동체생활 #초대교회



==
[나의 공동체운동 이야기 4] 
-군 선교사역과 예수원과의 만남
1기갑여단 군종부에서 맡은 일은 많았다. 군인 교회의 예배 피아노 반주, 군종부 행정업무, 8개 대대 군종업무 지원 및 관리, 군종 성경 공부인도, 미군 통역, 예배당 청소, 화단 관리 등 모든 잡무를 담당했다. 
또한 따뜻한 커피를 준비하여 야간에 보초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기도 해주기, 내무반 예배인도, 취침기도 방송, 신병 상담 등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여타 병사들과 내무반 생활과 보초 업무도 정식으로 하면서 군종업무를 감당했으니 더더욱 바쁜 일과를 보냈다.  
완벽한 선교의 장     
그러나 바쁜 가운데서도 감사한 것은 군대 내에서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군대 감방, 군 병원, 훈련장, 내무반, 그 소우주는 완벽한 선교의 장이었다. 나는 그 당시 신학교도 입학하지 않았지만 목회자처럼 생명력 있게 복음을 전하는 군 선교사였다. 
전도 사역에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단순한 복음이지만 수많은 병사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야말로 황금어장이었다. 사고를 내어 군 감방에 갇혀 있던 한 병사가 나의 복음 증거를 받아들이고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해 하던 그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군대는 내 생애에 있어서 전도를 가장 많이 한 곳이었다.  
공동체 운동의 동역자들
육군에서 군종은 대게 대대에만 정규 보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필자가 여단 군종으로 있는 동안 전체 여단의 중대 단위에서도 군종을 활동하도록 추진하였다. 그 당시 기갑여단에서 군종을 하던 대부분의 지체들이 나중에 목회자가 되었다.
필자가 후일에 신학교에 다니면서 공동체 운동을 할 때, 기갑여단 출신 군종들이 신학생이 되어 공동체 운동의 동역자들이 되어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나는 군 제대하는 날까지 군종부 업무를 하였고, 제대 후에도 부대를 위해서 기도하였다. 그만큼 부대를 사랑했다. 그것은 군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이 금식 기도의 응답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수원과의 만남
나의 공동체 운동은 사실 군대에서 군종으로 사역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당시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신앙계” 잡지 과월호를  우리 부대에 보내주었다. 그 잡지를 예하 대대에 발송하는 작업을 하면서 내용을 읽어보았는데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대천덕 신부가 쓴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였다. 매달 연재하는 기사가 상당히 보수적인 주제들을 다루는데 내용은 매우 신선하였다. 성령세례, 코이노니아, 공동체, 희년 등과 같은 주제는 일반교회에서 거의 듣지 못한 내용이었다. 
참된 교회란 무엇인가?
매달 그 글을 읽으면서, "대천덕"이란 특이한 이름을 가진 이분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강원도 태백 산골짜기에서 예수원이라는 믿음의 “공동체”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상당한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예수원 공동체를 한 번 방문해 보기로 하였다. 휴가 때 방문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군에서 제대한 직후 1982년 10월에 예수원을 처음 방문하였다.      
나는 모태 신앙으로 교회에서 자랐지만 교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갈등하며 분열하는 성숙하지 못한 교회의 모습을 접하면서 "예수님이 세우시려고 의도하신 참된 교회란 무엇일까?" 라는 근원적인 질문이 어릴 때부터 내 마음에 항상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매우 심오한 신학적 질문이었다.  
실제적 공동체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 생활을 해보았으나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학교 때 선교단체 활동을 하면서 본질적 교회에 대한 답을 얻는 것 같았으나, 뭔가 2% 모자라는 것 같았다. 당시 예수원을 방문했을 때 약 50여 명이 공동체로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처음 예수원 공동체를 대하는 순간, “아! 바로 이것이구나. 교회란 말로만 하는 개념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실제적인 사랑의 공동체이다.” 라는 오랫동안 갈구했던 질문의 해답을 선명하게 얻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추구하던 질문의 답을 마침내 찾은 것이었다. 
그 순간은 마치 존 번연이 지은 “천로역정” 의 주인공 기독도(Christian)가 오랫동안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가다가, 갈보리 십자가 앞에 이르러서 그 무거운 짐이 자동적으로 풀려나는 것과 같았다. <계속>
#군선교 #1기갑여단 #대천덕 #예수원 #공동체



==
[나의 공동체운동 이야기 3]  
- 금식 기도의 응답
선교합창단 사역을 열심히 하던 중 훌쩍 대학 졸업반이 되었다. 4학년 여름 방학 때 믿음의 친구들과 함께 당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자 오산리 금식기도원에 갔었다. 70년대 말에는 군복무 중 다치거나 죽는 경우가 많았기에 나는 개인적으로 대학 졸업 후 군대 문제와 그리고 방언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 집중 기도하였다. 처음 하는 1주일 금식기도라서 좀 힘들었지만 친구들 7명과 함께 서로 격려하면서 금식기도를 잘 마칠 수 있었다. 
오산리 금식 기도
금식 기도의 응답은 천천히 나타났다. 그해 1979년 11월 금요철야 중에 방언의 은사를 받아 더욱 능력있게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1980년 3월에는 군대 입대를 해야 하는데 영장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안동에 있는 사촌 형님의 권유로 3월 9일 안동 영문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첫 직장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한 주간이 지난 3월 9일에 교사 자리가 날 리가 없는데, 전임자가 학원 강사로 급작스럽게 이직하면서 난 자리였다. 그날부터 7월까지 다섯 달을 근무하고 7월 26일 여름 방학이 시작할 때 입대 영장이 나왔다.  
고교 교사
교사로 처음 근무하면서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대부분 농촌출신의 학생들이어서 매우 가난했다. 보충수업 교재를 살 수 없는 학생들 에게는 교재를 직접 사주고 정규 학습시간 외에 시간을 따로 내어서 영어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또한 그 학교에 없었던 기독학생회를 처음으로 조직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런 노력 때문이었는지 제대 후에 다시 그 학교에서 근무해 달라고 요청이 오기도 했다.       
사실 1979년 11월에 우리 교회 (대구 원일교회) 에서 예배당 건축을 위한 부흥회를 하였다. 부흥회 마지막 날 설교 후 건축 헌금을 작정하는 시간에 나도 모르게 백만 원을 작정하였다. 그 금액은 지금의 천만 원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당시 학생이었던 나는 군대 갔다 와서 취직하여 헌금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교사로 근무 하면서 부모님 용돈도 드리고 매달 20만씩 헌금하여 다섯 달 만에 작정헌금을 다 드릴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2월말에 군 입대를 하였는데 내게 5개월 후에 영장이 나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군대 입대
드디어 1980년 7월 26일 의정부 101보충대로 입대하여 경기도 포천의 8사단 16연대에서 두 달 동안 기관총 사수로 훈련을 받았다. 훈련 후 자대 배치는 보병부대가 아니라 이상하게도 운천의 제1기갑여단에 되었다. 군기가 엄청 쌘 탱크 부대였다. 
배치 받은 첫 날 나는 군종부로 불려갔다. 인사장교와 군목이 나를 군인교회로 데려가 찬송가를 주면서 피아노를 쳐보라고 하였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악보를 보지 않고 바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연주하였더니, 뒤에서 “됐어”라는 소리가 들렀다. 그리고 그날부터 제대할 때까지 여단 군종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여단 군종사병 
사실 기갑여단의 군인교회에서 피아노 반주하던 군종이 제대하여 되어서, 피아노 반주할 수 있는 군종을 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1년 전부터 3군사령부에 부탁을 하여 피아노 반주할 수 있는 병력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내가 입대 시 병력카드에 피아노 연주가 취미라고 써 놓았었는데, 그것이 여단 군종으로 가게 된 연유가 되었다. 
모두가 가기를 원하는 여단 군종은 8개 대대의 군종을 총괄하는 중요한 지위여서 신학생 출신들이 맡아야 하는데, 신학교도 나오지 않은 내가 군종을 한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돌아보니 바로 1년 전 오산리 금식기도원에서 1주간 군 문제를 위해서 했던 금식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기도의 능력이 크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미군 통역병
더 놀라운 것은 1기갑여단이 이전에 미군 포병사령부가 있던 미군부대 자리였다. 그래서 매년 오키나와에 있는 미 해병대 병력 8천명이 10월부터 2월까지 5개월 동안 돌아가면서 동계훈련을 우리 부대에서 실시하였다. 이들이 동계훈련을 오면 주일에는 군인교회에서 한국 병사들과 함께 연합예배를 드렸다. 이 때 동계훈련에 온 미 해병대 군목 8명이 격주로 돌아가면서 설교하였다. 
그 당시에는 미군목의 설교를 통역할 만한 장교가 우리 부대에는 없었기에 자연히 영어교사를 하다가 온 내가 이등병 때부터 통역설교를 하게 되었다. 주일이 되면 참모장과 장교들이 갓 입대한 이등병의 통역 설교를 듣고 있었다. 동시에 참모장의 통역병 역할도 하게 되었으니 끗발이 대단하였다. 
군에서 이보다 더 좋은 근무 환경이 있을 수 있을까? 1년에 거의 반을 미군들과 함께 지내며 실제적인 영어공부를 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1년 전 군대 문제를 위하여 금식기도를 한 응답의 내용이었다. 하나님은 정말 놀랍게 역사하셨다! <계속>
#오산리금식기도 #안동영문고등학교 #제1기갑여단 #군종사병 #오끼나와미해병대



==
[나의 공동체운동 이야기 2]  
- 대학 합창단을 통한 선교 사역
대학생선교회 여름수련회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1977년부터 학교 CCC 총순장으로 사역하길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로 인도 하셨다. 내가 공부하던 대구의 계명대학교는 안두화(Edward Adams) 선교사가 세운 미션 스클로서 매주 채플을 드렸다. 
채플 성가대
1977년 4월 중 교내 채플 때에 예배를 시작 하려던 즈음에, 평소 반주를 맡았던 피아노과 학생이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교목이신 최성찬 목사님께서 예배시 반주할 사람을 급히 찾으시기에 내가 나가서 피아노 반주를 하게 되었다. 예배를 마치자 목사님께서 영문과에 인재가 많으니 채플 성가대를 만들어 봉사해 달라는 간곡한 권유를 받아 성가대를 조직하여 지휘하였다. 첫 모임에 약 80명 정도의 학생 들이 모여 채플 성가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두 번째 연습시 부터 대원이 매주 20여명씩 줄더니 4주차 되니 10여명 정도만 남게되었다. 시작한 지 한 달만에  이렇게 힘든 채플 성가대 운영을 과연 계속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당시 영문과 장학생으로서 공부할 것도 많았는데. 주 2회 연습을 하는 성가대는 나 자신에게도 무거운 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학교 채플 성가대 지휘는 내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맡은 리더였기 때문에 운영을 성공적으로 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었다. 
선교합창단 - 글리 클럽 
어떻해야할 지 계속 고민하는 가운데 이 문제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기로 했다.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이 합창단을 그냥 교내 채플 성가대 수준이 아니라 찬양으로 선교하는 ‘선교 합창단’ 으로 만들라고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주님, 주님의 생각이 그렇다면 주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선교합창단의 운영과 그 미래를 책임져 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렸더니, 주님께서 “그래, 내가 이 선교합창단과 함께 하겠다” 는 내적 확신으로 응답을 주셨다. 그렇게 응답을 받고 나서 나는 ‘계명 글리클럽’(Glee Club) 이라는 이름으로 선교합창단을 새롭게 시작 하게 되었다.
전국대학생 합창경연대회 
그렇게 기도의 응답으로 채플 성가대를 선교 합창단으로 다시 시작하려던 즈음에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함께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1977년 6월 2-3일에 ‘제1회 전국대학생 합창경연대회’ 가 문교부 주최로 열리게 되었는데 교내에서 우리 선교합창단이 선정 되어 참가하게 되었다. 참여 자격은 음악을 전공하지 않는 아마추어 합창단이었다.  
채플 성가대에서 선교 합창단, 글리 클럽으로 새롭게 창단하고자 했을 때 이처럼 주님께서 때를 맞추어 도와주신 것이었다. 한 달 동안 전국대학생 합창경연대회를 위한 연습 덕에 글리 클럽은 자동적으로 결속이 강화되었다. 학교에서 버스 두 대를 대절하여 서울의 여관 에서 전 단원이 숙박하였고, 대회장소인 이화여고 강당인 유관순 기념관에 갔었다. 합창경연대회 덕분에 서울을 처음으로 관광도 하는 호강을 누렸다. 
찬양을 통한 선교 
나는 당시 글리 클럽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글리(Glee)는 ‘기쁨’ 이란 뜻입니다. 여기에 클럽을 합치면 ‘합창단’이란 뜻이 됩니다. 글리 클럽은 주님을 찬양하는 합창을 통해서 ‘참 기쁨’을 얻으며 이 참 기쁨을 전함으로써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 하는데 있습니다.” 즉 선교 합창단의 정신을 글리 클럽이란 이름에 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78년 여름방학 때 안동, 경주, 포항 에서 제1회 "전도 순회연주회" 를 열게 되었고, 78년 9월에 제1회 “정기연주회” 를 성공적으로 가짐으로서 계명 글리클럽의 장래를 위한 초석 을 닦게 되었다. 
동원의 기적
제 1회 정기연주회에 있었던 에피소드 한 가지 를 소개한다. 연주회 마지막 연습을 마치고 내일이면 연주회인데, 모두 열심히 홍보를 했으나 무명 합창단 연주회에 참석할 청중들이 별로 없다는 비관적이 소식이 들려왔다. 
임원들은 모두 당시 연습실 앞 잔디밭에 무릎을 꿇고 울먹이면서 간절히 합심 기도를 드렸다. "주님, 이렇게 힘들게 글리 클럽이 생겨났고, 이제 내일 첫 정기 연주회를 하는데 참석할 사람들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도와 주세요." 
다음 날 연주회 시간 30분 전에 기적이 일어 났다. 학교 강당이 입추의 여지가 없이 청중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나중에 알아보니 당시 중고등학교 중간고사 기간 이었는데 음악 교사 들이 학생들에게 어떤 음악 연주회 던지 참석하면 점수를 준다고 하여 학생들이 대거 몰린 것이었다. 주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눈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이었다. 
축복의 통로
이렇게 주님의 은혜로 제 1회 정기연주회는 감격 가운데 성황리에 마칠 수 있었고, 그렇게 글리 클럽은 계속 자라갈 수 있었다. 나는 그 이유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목적으로 시작되었기에 하나님께서 도우셨다고 확신한다. 당시 글리 클럽은 교회, 학교, 군부대, 회사 등지에 합창공연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후 나는 "캠퍼스 복음화를 위한 연합 성가대" 를 조직하여 대학 4학년때 까지 찬양선교 사역 을 계속하였다. 대학시절 나는 찬양 선교사였다. 이때 같이 활동했던 친구가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작곡자인 최영택 장로였다. 그는 현재 의사로서 의료선교에 헌신하고 있다.
초창기 멤버들은 어느덧 70대가 되었고, 합창단 출신 중 많은 목회자와 장로님, 권사님들이 배출되었다. 지난 2017년에는 창립 40주년 행사도 가지고, 헨델의 '할렐루야' 합창을 전동문 들이 함께 감격적으로 찬양했다.
나는 글리 클럽을 맡은 2년 동안 이 합창단이 또 사라질까 노심초사하여 학업도 뒷전이었고, ROTC 장교도 포기하고 이끌었다. 지금 생각 하면 학점도 돈도 되지 않는 합창단을 왜 그렇게 열심히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찬양을 통한 선교” 라는 소명감 때문에 그렇게 헌신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학창시절의 열정적인 찬양 선교는 그후 나의 인생에서 많은 축복의 통로가 되었다. 내게 이 선교합창단은 일종의 공동체 사역이었다. <계속> #계명글리클럽  #선교합창단



==
지난 40년간 펼쳐온 공동체운동 이야기를 다시
나누고자 합니다. 위축되어가고 있는 한국 교회가 공동체로서의 교회 본질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 바랍니다!         ~~~~~~~~~~~~~~~~~~~~~
[나의 공동체 운동 이야기 1] 
-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의 아들 
나는 1956년 장로교 목회자(고 김성규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상주 제일교회 사택에서 생활하면서 교회와 함께 자랐으니 그야말로 한국교회 모태신앙의 전형이었다.
어린 시절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경북 상주에서 자랄 때는 부족함 없이 유복하고 즐거운 환경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님께서 대구로 교회 개척(원일교회)을 위해 이사하시면서 나의 교회 생활은 생각하기도 싫은 우울한 그림으로 바뀌고 말았다. 
다 찌그러져가는 2층을 빌린 다락방 교회, 7명의 가족이 한 방에 살아야 하던 비좁은 세방 생활, 삭막한 도시 인심, 아름다운 자연의 은혜를 누리던 시골과 비교할 수 없는 잿빛의 시멘트 문화, 모든 것이 절망적인 환경 이었다. 
언제 번듯한 교회가 건축 되고, 넓고 내 방이 있는 집다운 집에서 살 수 있을 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 빈궁하고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나의 신앙과 인격은 비뚤어지고 교회에 대해 반감이 일 수 밖에 없었다. 
아침만 되면 이른 새벽부터 목사 아들이 새벽기도 가야 한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를 다그치는 아버지의 성화, 목사 아들이라고 모범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 등 모든 생활이 어린 동심에게는 스트레스 투성이였다. 
그러니 자연히 교회 생활과 신앙에 반감이 가게 되었다. 이러한 거부감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고등부 때에는 교회 고등부 임원도 했었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적인 산 신앙은 없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결정적인 계기는 대학교 시절 한국대학생선교회 (C.C.C) 활동에 참여하면서 이루어졌다. 구태의연한 교회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에 대학생 선교회 활동은 나에게 체념적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를 갱신시켜 주었다. 
1977년 충북 심천면 미류나무섬에서 열렸던 C.C.C 여름 수련회시 김준곤 목사님의 구원의 초청 메시지는 나의 가슴을 마구 두들겼었다. 나는 그때까지 교회는 다니고 예수님을 알기는 알았지만 그를 진정으로 믿지는 못했던 것이다. 나는 정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싶었고 그분을 만나고 싶었다. 
저녁 집회가 끝난 뒤 나는 미류나무 숲으로 들어가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예수님, 당신이 살아 계시다면 오늘 이 밤에 저에게 나타나시어 저를 만나 주시고 저를 위해 죽으신 주님이심을 확실히 믿게해 주소서!” 소나무 뿌리를 뽑는 한이 있더라도 주님을 만나는 체험이 없이는 더 이상 목사 아들로서, 아니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갈 수 없었다. 
밤이 새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내 입에서 갑자기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Amazing Grace)" 찬양이 터져 나오면서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에서 죽으신 사실을 확실히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성령께서 내게 오셔서 예수님을 알 뿐만 아니라, 믿을 수 있게 해주신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밤새도록 울고 회개하며 감사 하면서 밤을 지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나의 대학 생활은 학업과 함께 복음 사역 으로 바뀌었다. 내 생의 모든 목표가 그리스도를 위한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기회만 있으면 사영리를 들고 전도하는 삶은 신앙에 대해 회의적이던 나의 이전 모습과 전혀 다른 것 이었다. 또한 선교 합창단을 조직해서 찬양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계속)
#상주 #대구 #원일교회  #한국대학생선교회 #구원의확신
장진명
목사님~ 회고록 미리 읽어보는것같습니다ㅠㅜ
하나님나라가 확장되는 그 하루하루의 주역으로!!
계속해서 기대가 됩니다… See mor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