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1

“제주 함덕 모래밭에 제 무덤 파라 하더니…총으로 펑펑” : 네이버 뉴스



“제주 함덕 모래밭에 제 무덤 파라 하더니…총으로 펑펑” : 네이버 뉴스

“제주 함덕 모래밭에 제 무덤 파라 하더니…총으로 펑펑”
기사입력 2018-03-18 09:20 최종수정 2018-03-18 12:00 기사원문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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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르포

오사카 재일동포 1세대들의 ‘4·3 70년’

▶올해는 제주도 4·3사건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4·3사건 이후 많은 제주도민이 학살과 경제적 궁핍을 피해서 일본 오사카로 떠났습니다. 재일동포 1세대들은 그때의 참혹했던 기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10일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 코리아타운 가게 앞에 돌하르방이 보인다. 오사카는 제주도 출신 동포들이 많이 사는 곳이며, 특히 이쿠노구 쓰루하시역 주변에 많이 모여 산다. 이쿠노구 코리아타운은 원래 ‘조센이치바’(조선시장)로 불리던 곳으로 길이 500m 거리에 한국 관련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17~18살 때쯤이었던 것 같아. 육지에서 2연대인가 군대가 오고 섬을 에워쌌어. 전신주에 죽은 사람 머리를 매달아 놓았던 게 기억이 나.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는데, 여자는 머리카락이 길잖아. 마치 유령 같았어.”

지난 9일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에 있는 재일동포 고령자 돌봄 시설 ‘사랑방’에서 만난 송복기(87) 할머니는 제주4·3사건을 직접 경험한 1세대다. 서귀포 출신의 송 할머니는 지금도 제주도에 가면 고향 마을에 들르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제주도에 들르더라도 4·3사건을 입에 올리는 일은 별로 없다. “말해봐도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란다. 군인들은 전신주에 걸어놓은 주검의 머리 입과 코에 담배를 꽂기도 했다고 그는 말했다. “담배에 불을 붙여서 입에 꽂곤 했어. 반쯤은 재미로 그랬던 것 같아.”

9일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에 있는 재일동포 고령자 돌봄 시설 ‘사랑방’에서 재일동포 1세대 송복기 할머니가 4·3사건 당시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주4·3사건은 좌우 이념 대립과 일제시대 경찰들이 광복 뒤에도 미군정 경찰로 활동하는 등 한반도의 모순이 중첩되어 일어난 참극이었다. 4·3사건이란 명칭은 광복 3년 뒤인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된 데서 유래하지만, 시기적으로는 1947년 3월1일 도민과 기마경찰 충돌 사건에서부터 1954년 한라산 금족(禁足) 지역이 전면 개방되기까지 7년에 이르는 시간대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일컫는다.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출생신고도 되지 않은 아기들까지 희생된 사례도 있어 정확한 인명피해 상황을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4·3사건에 대한 송 할머니의 기억은 7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섬을 감시하기 위해 낮게 날던 비행기와 불타버린 집들과 불탄 집터에 생긴 공터,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과 같은 참혹한 모습들로 얼룩져 있다.

“아침 8시와 저녁 5시에는 군대 소속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작은 비행기가 섬을 감시했어. 머리 바로 위를 지나간다고 느낄 만큼 낮게 날았는데, 3명이 탄 비행기였어. 기관총을 빈 땅에다 갈기고는 했는데, 위협 용도였던 것 같아. 산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이 그걸 보고 산 위로 다시 도망가곤 했어.”

김옥광 할머니는 오사카에서 태어났으나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어머니의 고향인 제주도 함덕으로 이사갔다가 4·3 현장을 몸소 체험했다.

당시 4~5살가량이던 조카는 군인들이 몰던 트럭에 치여 숨졌다. “여자아이였는데 뭘 주우려고 뛰어가던 중에 치였어. 그때는 섬 여기저기를 군인들 트럭이 질주하고 다녔거든. 트럭에서 내린 사람이 흰 천 하나 덮어주고 갔어. 그걸로 끝이었지. 지금 생각하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야.” 산에 들어갔던 사람들 중에는 송씨 성을 쓰는 친척들도 있었는데 그중 한명은 부인과 함께 바다에 내던져졌다고 했다. “물고기 밥이 됐겠지.” 송 할머니는 탄식하듯 짧게 내뱉었다.

“폭도 집안” 낙인에 사람 피해 지내기도

송 할머니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몇달 전 밀항선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4·3사건으로 인해 참혹한 모습으로 변한 고향이 싫었고 일본에는 언니 2명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0명쯤 탄 작은 배는 파도가 치면 곧 뒤집어질 듯 위태로웠다. 원래는 잠깐 일본에 머물다가 고향에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일본에 건너온 지 얼마 안 돼 터진 한국전쟁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결국 일본 오사카에 정착해 새 삶을 시작했다. 일제 때 다닌 국민학교에서 일본어로만 교육을 받았기에 일본에서 언어 장벽은 그리 높지 않았다. 송 할머니는 한국어도 거의 잊어버렸다며 일본어로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내내 “혼마야”(정말로) 같은 오사카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오사카시 이쿠노구 코리아타운에 있는 장승의 모습.

오사카에 머무는 재일동포 고령자 가운데는 송 할머니 외에도 4·3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 많다. 사랑방에서 만난 김옥광(80) 할머니도 그런 경우다. 김 할머니는 오사카에서 태어났으나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어머니 친정이 있는 제주도 함덕으로 돌아갔다”고 회상했다. 4·3사건으로 인명피해가 가장 극심했을 1948~49년에 그는 10~11살이었다. 어머니는 낮에는 국군의 밥을 해주고 밤에는 허벅(제주도 여인들이 물을 긷는 데 사용하는 물동이)을 지고 산에 올라갔다. 어머니의 동생들이 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작은외삼촌이 군인들에게 붙잡혀 온 모습도 또렷하게 기억했다. “다리미 같은 걸로 팔을 지진 흔적이 보였어.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군인들이) 우리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안 들으면 죽을 수 있다고 말했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20명을 붙잡아놓고, 함덕 모래밭에서 자기 무덤 구덩이를 파라고 시켰어. 담배 한가락씩 피우라고 하더니 그다음에 총으로 펑펑 했지. 죽기 전에 ‘아이고 어멍아’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고 ‘대한 독립 만세’라고 소리친 사람도 있었어.” 마을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을 묻어줬다. 김 할머니의 아버지는 4·3사건을 피해서 일본으로 갔다. 3살 위인 오빠는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 군인들에게 뺨을 맞은 뒤, 고모를 따라서 일본으로 갔다. 김 할머니도 39살 때 일본으로 옮겨왔다.

10일 오사카시립대 우메다 새털라이트 캠퍼스 홀에서 열린 4·3사건 7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오광현 재일본 제주4·3희생자 유족회 회장(맨 왼쪽)이 발언하고 있다.

오사카 이쿠노구에서 ‘오코노미야키’ 가게를 운영하는 고춘자(77) 할머니는 “우리는 폭도의 가족이었으니까요”라는 말로 4·3을 기억했다. 4·3사건 70년이 지난 지금도 고 할머니 입에서는 “폭도”라는 말이 자주 나왔다. 고 할머니의 가족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였던 1945년에 제주도로 돌아왔다. 일본 패전 직전 연합국의 공습이 심했기 때문에 공습을 피해 고향에 돌아온 것. 하지만 조국이 해방되고 3년 뒤인 1948년 가족의 비극이 시작됐다. 당시 8살이었던 고 할머니는 어머니의 고향인 삼양1동에 살았다. 1948년의 불안한 공기를 할머니는 아직 기억한다. “어느날 밤에 횃불이 보였어요. 여기도 보이고 저기도 보이니까 어머니가 벌벌 떠면서 숨으라고 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횃불이 보이고 마을의 집들이 타는 게 보였어요. 돼지우리가 불탔는지 돼지가 죽어가는 소리도 들렸어요.” 4월3일 고 할머니의 어머니는 딸을 업고 12살이던 오빠의 손을 잡고 동네 빨래터에 숨었다. 빨래터에는 다른 사람들도 숨어 있었고, 어디선가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고 할머니의 어머니는 남매를 껴안고 떨었다. 고 할머니의 어머니는 집에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삼양과 신촌 사이 바닷가 절벽 근처에 고 할머니와 오빠를 피신시켰다. 어머니가 가끔 마을에 가서 고구마 같은 먹을 것을 가지고 왔다. 그렇게 며칠을 피난살이했다. 며칠 뒤 집에 돌아가보니 이 집 저 집에서 사람들이 붙잡혀 갔다는 소리가 들렸다. 고 할머니 어머니의 남동생 2명은 산에 올라간 상태였다. 할머니네 집은 “폭도 집안”이 됐고, 고 할머니의 어머니는 마을 사람들 시선을 피해 다녔다.

학살과 가난 탓에 오사카 정착한
재일동포 1세대들의 4·3 증언
70년 지난 오늘에도 기억 또렷

“시체 입과 코에 담뱃불 꽂아놓고
4살 조카는 군대 트럭에 치여 숨져”
“횃불 보이더니 돼지 죽어가는 소리
어머니는 조국행을 너무도 후회했다”

“어느날 큰외삼촌이 붙잡혀서 어머니가 불려갔어요. 큰외삼촌은 어머니에게 할머니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는데, 어머니는 ‘응응’ 울기만 하고 대답도 못했어요. 큰외삼촌은 육지로 끌려갔고 그날 만난 게 마지막이었어요.” 큰외삼촌과 만난 지 얼마 안 돼 작은외삼촌도 죽었다는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제주시에 가보니 주검이 널려 있었는데, 훼손이 심해서 누가 누군지 구별이 어려웠다. 어머니는 고 할머니에게 “작은외삼촌이 (산에 있는 동안) 야위어서 허리띠를 돌로 잘라서 사용했는데, 허리띠 잘린 모습을 보고 작은외삼촌 주검을 찾아왔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 할머니의 어머니는 동생들을 일본에서 데려온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고 할머니의 어머니는 큰외삼촌이 부탁한 외할머니도 지킬 수 없었다. 당시 60대였던 외할머니는 아들 둘이 좌익활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한동안 아는 사람들 집에 숨어 지냈다. ‘폭도 가족’을 숨겨준 사람도 처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외할머니는 나중에는 바닷가로 도망갔다. 그러나 경찰에 협력하는 청년단에 붙잡혀 경찰서로 끌려갔다. “어머니는 외할머니가 지서에 끌려간 것을 먼발치에 봤다고 해요. 외할머니는 지서에서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요.” 고 할머니의 어머니는 경찰서에서 자신의 어머니의 주검을 눈물을 참으며 수습했다고 한다. 이웃들이 할머니네 가족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기에 숨죽이며 살 수밖에 없었다. 따가운 시선이 그나마 옅어진 것은 한국전쟁 혼란기 즈음부터였다고 고 할머니는 회상했다.

고춘자 할머니가 보여준 젊은 시절 자신의 어머니 사진. 사진이 실린 책은 재일코리안청년연합이 만든 책 <재일코리안의 역사를 걷다>.

끝까지 경찰 경력 숨긴 아버지

4·3사건의 상처와 궁핍한 경제 여건을 벗어나기 위해서 많은 제주도민이 일본, 특히 오사카에 건너와 정착했다. 일제강점기였던 1922년부터 1945년까지 제주도와 오사카 사이엔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라는 이름의 배가 운항했다. 1924년 기준으로 오사카에 사는 조선인의 60%가 제주도 출신이었다는 조사가 있을 정도로, 오사카에는 제주도인이 많았다. 이후 4·3사건을 피해 일본에 간 제주도민은 5천~1만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상당수가 제주도인 커뮤니티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오사카에 정착했다. 해방 뒤 미군정은 한반도 출신자의 일본 도항을 엄격히 금지했기 때문에 제주도 사람들 상당수는 밀항으로 일본에 갈 수밖에 없었다. 김 할머니와 고 할머니처럼 4·3사건이 나고 한참 뒤 결국 생계 때문에 일본에 건너온 경우도 많다. 조경희 성공회대 교수는 10일 오사카 우메다에서 열린 ‘제주도 4·3사건 7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 전반까지의 밀항자들 중에는 4·3항쟁과 한국전쟁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일본으로 피난을 간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런 이동 패턴은 기본적으로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며 “근현대를 관통하는 조선인들의 밀항의 역사는 미완의 탈식민화와 동아시아 냉전질서가 중첩되는 중요한 지점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4·3사건 70주년 오사카 심포지엄은 10~11일 이틀에 걸쳐 열렸는데, 오사카와 도쿄의 재일동포 그리고 한국 제주도 4·3 연구자와 활동가, 대만의 활동가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오사카 이쿠노구 코리아타운의 모습.

4·3사건은 재일동포들에게도 오랫동안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금기어였다. 재일동포 2세이며 4·3사건 기념사업을 20년 넘게 진행해온 오광현(61) 재일본 제주4·3희생자 유족회 회장은 10일 열린 오사카 심포지엄에서 고등학생 때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의 소설 <까마귀의 죽음>을 읽고 처음 4·3에 대해 알게 됐다고 말했다. 제주도 중문 출신 아버지에게 4·3사건에 대해 묻자 아버지는 “누가 알려줬냐”고 화를 내며 오씨를 때렸다고 한다. 오씨는 1982년 제주도에 가서 4·3사건 때 친척 중에도 희생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사카에서 만난 55살 재일동포 2세 남성은 “2000년대 초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친척들에게 아버지가 제주도에서 경찰이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4·3사건 전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일본에 건너오셨는데 생전에는 제주에서의 경찰 경력을 이야기하신 적이 한번도 없었다. 4·3사건은 양쪽 모두에게 큰 상처였다”고 말했다. 재일동포들이 4·3사건 기념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에 민주화 바람이 분 이후의 일이다.

9일 일본 오사카 이쿠노구에 있는 오코노미야키 가게에서 고춘자 할머니가 4·3사건 당시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 할머니는 자신이 체험한 내용을 야간중학교 재학 시절에 작문으로 제출한 적이 있다. 앞에 놓인 책에 그의 글이 실려 있다.

“4·3은 법적으로 국가범죄”

1948년 4·3사건 발생 뒤 70년이 지났음에도 4·3은 한국 사회에 아직도 ‘과제’로 남아 있다.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 회복을 목적으로 4·3 특별법이 2000년 공포되었지만, ‘사건’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4·3을 어떤 성격으로 규정하느냐는 아직 논쟁 중이다.

오사카 심포지엄에 참석한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이재승 교수는 “(4·3사건은) 법적으로 국가범죄”에 해당한다며 “(피해자와 유족에게) 보상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미군정의 점령 정책이 민족자결권을 침해한 게 4·3사건의 원인”이라며 “4·3사건은 민족자결권 침해에 대한 저항운동이다. 진압작전은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국가범죄였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최근 4·3사건 당시 좌익운동 주도자와, 좌익운동과 상관이 없는데도 희생된 도민을 구별하려는 최근의 움직임에 대해 지나친 반공주의라는 견해를 드러냈다. “한국전쟁 이후에 (한국 정부의 정책으로) 확립된 반공주의를 좌우 모두 의견을 낼 수 있었던 해방 직후 시간대까지 소급해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오사카/글·사진 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