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3

Dani's Journey :: 소명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파커. J. 파머]



소명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파커. J. 파머]

소명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파커. J. 파머] | 思/독서 2008.04.30 12:22 Posted by 박경식

소명은 의지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 은 듣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소명이란 성취해야할 어떤 목표가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선물이다.

나 이제 내가 되었네 여러 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네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고 녹아 없어져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네.....

-May Sarton의<나 이제 내가 되었 네>-

나는 교회 안에서 성장한 까닭에 '소명'의 의미에 대해 맨 먼저 배웠다. 하나님 앞에서 겸허 하고 세상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정의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종교적 전통에서 자란 것이 얼 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내가 깨달은 '소명'의 개념은 왜곡된 것이었다. 소명은 자신을 향해 외 부에서부터 들려오는 도덕적인 요구의 목소리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뭔가 지금의 자기 모습보다 더 훌륭하고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상을 그리고 있었다. 소명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자아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시작된다. 죄 많은 자아는 '선'이라는 외부의 강제적 힘을 동원해 바로잡지 않는 한 늘 이기적일수밖에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늘 내 인생을 잘 꾸려 나가기에는 부족한 존재라는 느낌을 가졌다. 내게 기대되는 이상적인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차이 때문에 죄의식을 만들어 내면서 그 격차를 좁히기 위해 몸부림치느라 지쳐갔다. 소명의 발견이란 얻기 힘든 상을 바라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참자 아의 보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본래 타고난 사람이 되어, 태어날 때 하나님이 주신 본연의 자아를 완성하라는 '여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나온다. 토마스 머튼은 이 것을 참자아라고 했고, 퀘이커 공동체에서는 내면의 빛, 또는 각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하 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며, 인문주의자들은 정체성이나 본성이라고 부른다.

갓난아기인 손녀딸의 모습에서 나는 날때부터 아이 내면에 심어져 있는 성향과 기질을 관찰 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에 얼굴을 찡그리고 기분 나빠하는지, 어떻게 몸을 움잊기는지, 어떤 행동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리게 되었 고, 그건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나는 내가 관찰한 내용들을 편지에 적어 놓고 있다. 손녀딸이 스무 살이 될 즈음에 이 편지 를 보낼 것이다. 나는 그 편지에 이런 서문을 함께 적었다. "네가 이 세상에 처음 왔을 때의 모습을 그려 놓은 것이다. 물론 명확한 그림은 아니지. 명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니까. 그래도 너를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그린 그림이란다.어쩌면 이 기록이 할아버지가 훨씬 나중 에서야 해낸 일들을 네가 더 일찍 해낼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바로 네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참자아라는 선물을 되찾는 일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천부의 재능을 타고 이 땅에 태어난다. 그래놓고는 절반을 그 재능을 내어버 리거나 다른 사람들의 말에 미혹되어 잊어버리고 산다.

젊은 시절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 과는 별 상관 없는 기대들에 둘러싸인 다. 우리의 자아를 알아주기보다는 어 떤 틀 안에 끼워 맞추려는 사람들의 기 대 말이다. 가정, 학교, 직장, 종교단체에서 우리 는 자신을 버리고 사회적인 기준에 맞 추어 살아가도록 교육 받는다. 인종차 별주의, 성차별주의와 간은 사회적 압 력에 짓눌려 자기의 본래의 형상은 알 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질 때도 있다. 또한 우리 역시 두려움에 내몰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참자아를 배반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 참자아의 선로를 벗어났을 때, 어떻게 하면 그 흔적을 다시 찾아갈 수 있을까? 한 가 지 방법은 타고난 재능에 좀더 근접하 게 살았던 어렸을 때의 기억에서 실마 리를 찾는 것이다. 세상 만물은 나름의 본성이 있다. 누 구에게나 능력은 물론 한계도 있다. 한 예로, 도자기 만드는 일을 보자. 도 자기를 만드는 일은 단순히 점토에게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점토는 도공의 손놀림에 따라 빚어지지만, 동시에 자기가 할 수 있 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도공에게 얘 기하고 있다. 만약 도공이 점토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면 결과는 깨어진 파편이나 보기 흉 한 물건이 된다. 공학 (工學)이란 그저 재료를 향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 다. 건축기사가 철, 나무, 돌 같은 재료의 본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단순히 보기 싫은 정 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리나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 인간의 자아가 지닌 본성 역시 능력과 한계를 함께 지니고 있다. 자기가 가진 재료에 대한 이해 없이 소명을 구한다면 그 인생은 아름답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비롯한 주위 사람 들의 생명까지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무언가 대단히 가치 있는 일에 몸 바치면서 '꾸며대 기'를 해 봐야 아무 소용 없다. 소명과도 상관 없는 일이다. 그것은 자기 본성을 유린하는 무 지하고 건방진 시도이며 결과는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우리의 가장 깊은 소명은 그것이 우리가 '되고자 하는' 어떤 이미지에 맞든 안 맞든 자기의 진정한 자아를 향해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기쁨을 발견할 뿐 만 아니라 세상에서 진정 우리가 갈 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제 소그룹원들과 함께 나누었다. 사 명, 소명, 비전, 목적...다 같은 말인데 왜 그리들 구분하려하는지. analogia entis. 존재의 유비. 하나님 과 비슷한 무엇인가가 인간에게 남아 있다. 그것을 형상이라고 한다. 영화 감독이나 artist들에게서 볼 수 있는 창조력도 다 그분의 능력의 그림 자일뿐이다. 그러나 그림자를 통해서 그분과 비슷한 무엇을 발견할 수 있 다. 우리 안에 이미 심겨진 것. 박성동 형제님이 그러셨나, 현대 인지 학에서 최근의 화두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무', 백지 상태라고 믿어왔던 가설에서 이제는 뭔가 '스케치(큰 그림)'가 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본래 각 사람의 취 향이, 행동과 언어와 감각이 다 다르다는 것인데, 것은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과 닮아 있는 그 무엇인 것이다. 그래서 각 사람은 본래 스케치 된 상태의 그림을 찾아 살아간다는 것이 다. 기독교인 본래의 소명은 분명하다.(마6:33, 마28:18-20) 이미 주어진 소명. 그렇다면 어 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릴 때의 기억에 잠겨 보면, 그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지도 모른다. 나는 몇가지 힌트를 벌 써 찾았고, 그것이 현재의 나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미래의 나를 인도해주는 중 요한 빛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심어 주신 본질, 내면 안에서부터 출발한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것에 휘둘릴필요가 없다. [내면 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에 도 있듯. 부름받은 사람 세례요한의 삶은 평안과 기쁨이었다. 그것은 내면에서부터 흘러 나 오는 질서와 확신 가운데 영향력 있는 삶을 산 것이다. 사울은 쫒겨다니는 사람의 전형적인 유형이다. 왕위를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는 감정이 다윗 을 죽이려는 살인의 감정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과도한 성취와 팽창, 만족할지 모 르는 욕망들...그의 말로는 비참한 죽음이었다. 나는 부름받은 사람(Called People)인가? 아니면 쫒겨다니는 사람(Driven People)인가? 하나님은 내게 주신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70의 능력을 주셨는데 90을 요구하 지 않으신다. 그러나 30의 능력만 쓰고 있다면 긴장할 일이다. 영화 [말아톤]에서 초원이가 '초원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몸매는 끝내줘요' 했던 그 말. 그는 달릴 때 기쁨을 느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빨리 달리도록 창조하셨으니까. 나는 요즘, 가르칠 때 기쁨을 느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가르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