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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26

변혁적 중도주의와 불교 / 백낙청 < 권두언 - 불교평론

[권두논단] 변혁적 중도주의와 불교 / 백낙청 < 권두언 < 기사본문 - 불교평론



[권두논단] 변혁적 중도주의와 불교 / 백낙청
기자명 백낙청
입력 2026.03.28 

― 붓다의 중도론에서 현대 한국의 변혁적 중도주의로

20여 년 전 ‘변혁적 중도주의’ 개념을 처음 제시했을 때만 해도 나는 불교적 의미의 ‘중도’와의 연관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가능성이 약간 부담스러웠다. 좌와 우를 적당히 절충한 중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불교의 중도에 부합하기는 하지만 그 점을 더 천착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 사회에서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공유하는 광범위한 중도 세력의 결집이 변혁적 중도주의의 취지였고,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대한민국에 필요한 참된 진보 노선이다”라고 주장하는 데 그쳤다. ※註 주 1) 졸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창비, 2006), 〈6·15 시대의 대한민국〉 31면. ‘변혁’과 ‘중도’라는 얼핏 보기에 상충하는 두 낱말이 논리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것은 ‘변혁’은 한반도 차원에 적용되고 ‘중도’는 분단체제 변혁의 목표에 동조하는 남한 내 광범위한 세력의 규합을 뜻하기 때문이다.(졸저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창비 2009, 〈변혁과 중도를 다시 생각할 때〉 178~179면).

이후 나는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의 개벽사상과 변혁적 중도주의의 친연성에 주목했고※註 사회변혁 운동에서 수행과 정신개벽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키워 갔으나 붓다까지 끌어대는 일은 여전히 언감생심이었다. 주 2)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변혁적 중도주의와 소태산의 개벽사상〉. 이 글은 졸저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창비, 2025)에 제4장으로 재수록됐다.

그러던 중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창비, 2025)라는 나의 신간을 접한 《불교평론》 측으로부터 불교와 연관시켜 변혁적 중도주의를 정리하는 글을 써 보라는 제의를 받았다. 차제에 불교 공부를 더 해 보려는 욕심도 없지 않은 데다 마감날이 한참 남았다는 사실만 믿고 덜컥 응했는데, 결국은 불교에 대한 엄청난 무지를 치유하지 못한 채 집필을 서둘러야 할 처지에 몰리고 말았다.



붓다의 중도론에 관한 단상

붓다의 ‘중도’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고행도 쾌락도 아니고 그 둘을 적당히 섞어 놓은 것도 아닌 올바른 가운뎃길을 뜻한다고 한다. 이를 출가 이전의 향락 생활도 아니오, 출가 후의 고행도 아닌 중도로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쾌락은 수행의 과정에서 맛보는 쾌락을 뜻하며 “몸으로 완성하는 수행과 감각을 멈추어 얻는 삼매는 절대로 최상의 깨달음으로 연결되지 않기에, 붓다는 고행이나 삼매를 떠난 중도(中道)를 설한 것이다.”※註 라는 해석이 옳은 것 같다. 주 3) 고광 《고광스님의 불교 도장 깨기》(불광출판사, 2025), 50면. 저자의 부연 설명도 함께 인용한다. “선정 삼매(三昧)의 즐거움은 감각적인 쾌락보다 훨씬 강렬하며, 실제로 삼매에 들어가면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한 편안함과 강렬한 희열이 느껴진다. ……싯다르타도 ‘이 즐거움이 지속되면 열반이 될 것이라는 견해’에 빠졌다가 ‘열반으로 이어질 수 없는 삿된 견해’ 즉 사견(邪見)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버린 것이다.”(82면).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세속의 노선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붓다의 중도론이 갖는 매력은 세계의 큰 종교 중 거의 유일하게, 입증이 안 되는 특정 명제들―우주의 시원과 종말이라든가 교조의 이적 등―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 점이다.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은 조리 정연한” 말로 “합리적 이성에 호소”※ 하는 것이 불교의 전도 방법이다. ※註 주 4) 홍사성 권두언 〈지령 100호, 전도선언을 다시 읽는다〉 《불교평론》 2024년 겨울호, 5면.

종교에 대한 거부감으로 탈종교를 지향하면서도 인간의 종교적 욕구도 충족하기를 원하는 현대인들에게 딱 맞는 ‘탈종교적 종교’의 면모이기도 하다. ※註 주 5) 불교와 더불어 한반도인의 정신생활을 오랫동안 주도해 온 유교도 ‘탈종교적 종교’랄 수 있다. 다만 불평등한 사회제도들과 너무나 밀접히 합체된 역사로 인해 현대인이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 동학이나 원불교가 이룬 일대 전환이 필요한 처지로, 힌두교 사회의 전통들과 과감히 결별하면서 처음부터 평등주의를 지향한 불교와 다른 점이다.

실제로 붓다가 깨달은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 십이연기(十二緣起)는 모두 이치를 따져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며, 근대 과학의 입장에서도 거부감을 느낄 일이 적다. 물론 물리적 우주라는 실체가 ‘있다’는 전제 아래 그것에 대한 알음알이의 축적에 골몰하는 과학은 붓다의 깨달음에 위배되는 ‘사견(邪見)’이지만, 현대 과학이 발달할수록 인간이 감각하는 대상이 연기작용으로 구성된 가상현실이라는 붓다의 견해에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곧, “과학 자체는 ‘가상현실’과 ‘진짜 현실’을 판별할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며―비록 그 ‘가상현실’의 정도나 종류에 대해서는 어느 때보다 다양한 대상에 관해 더없이 풍부한 수학적 계산을 동원하여 판별해 주지만―엄밀히 말하면 실제로 신체의 접촉이 일어나는 경우에도 그것이 고도로 세련된 ‘싸이버 쎅스’와 진정한 결합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판별해 줄 ‘과학적 근거’는 없다는 뜻이 된다.” ※註 주 6) 졸저 《서양의 개벽사상가 D. H. 로런스》(창비, 2020) 제7장 ‘재현과 (가상)현실’, 342~343면. 물론 과학이 말하는 가상현실은 여전히 유(有)의 세계에 속하고 붓다가 설한 ‘가유(假有)’와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으며,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진정한 결합’도 연기작용에 따른 허상이다. 그러나 허상 중에도 ‘진정한 결합’이라 부를 만한 허상이 있는 것이며, ‘공(空)’과 ‘유(有)’가 둘이 아니라는 대승불교에 오면 ‘진정한 결합’에 대한 대중의 선호는 곧 부처의 마음일 수도 있는 것이 된다.

중생이 가상 내지 허상을 실체로 간주함에서 오는 괴로움[苦]을 없애는 길인 팔정도(여덟 개의 길들이라기보다 여덟 겹의 한 가지 길이라는 뜻으로 팔지성도(八支聖道)라고도 함) 역시 지극히 합리적인 처방으로 들린다. 삿된 견해를 버리고 정견(正見)을 취하여 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을 하라는 가르침에는 이치에 어긋나는 무엇을 믿으라는 요구가 전혀 없다. 물론 그 하나하나의 뜻을 새기면 모두가 간단치 않아서 나로서는 우리말로 번역하기조차 꺼려진다. 여덟 가지의 배열도 음미할 만한데, 나는 ‘바른 삼매[正定]’로 끝나는 것이 불교의 정적주의적 면모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싯다르타가 삼매의 쾌락 역시 중도가 아니라고 그에 전념하는 수행법을 버렸다고 하면, ‘바른 삼매’는 무언가 질적으로 다른 것일 터이다. 곧, “붓다가 가르친 선정(禪定)에서 입정(入定)은 있지만 출정(出定)은 있을 수 없다.” ※註 주 7) 고광, 앞의 책, 222면.

이것이야말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일행삼매(一行三昧) 또는 원불교의 무시선(無時禪)·무처선(無處禪)과 다름없으며, 현대인이 선호하는 생활불교로 통하는 길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변혁적 중도주의 기획에서도 한번 도전해 봄 직한 목표이다.



소태산: 후천개벽 사상과 불교의 융합

한반도의 후천개벽 사상은 19세기 중엽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동학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수운 선생은 유교의 민본사상을 계승하되 유교 사회의 신분 차별·남녀 차별·적서 차별을 일거에 타파하는 새로운 가르침을 펼쳐 대중의 엄청난 호응을 얻었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수운은 유교뿐 아니라 유·불·선 삼교의 결합을 추구했는데, 실제로 불교가 미친 교리상의 영향이 큰 것 같지는 않다. ※註 주 8) 박맹수 〈동학과 한말 불교의 교섭〉 《개벽의 꿈》(모시는사람들, 2004), 그리고 조극훈 〈동학사상에 끼친 불교의 영향〉 《불교평론》 2024년 가을호 등을 보아도 당대 불교 스님들이 수운에게 제공한 정신적·물질적 도움을 주로 부각시키고 있다. 사상 면에서 불교적 요소가 두드러지는 것은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의 〈무체법경(无體法經〉일 것이다(《천도교경전》(11판, 2020) 〈의암성사법설(義庵聖師法說〉). 그러나 의암이 수운·해월의 동학을 얼마나 충실히 계승했는지는 논란의 대상이다(백낙청 외 《개벽사상과 종교 공부》, 창비 2024, 제2장 백낙청·정지창·김용휘 좌담 〈동학의 확장, 개벽의 운동〉 113~118면 참조).

후천개벽 운동의 또 다른 중요 인물인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도 삼교 결합을 지향했지만, 선도(仙道)의 요소가 가장 두드러졌고 불교의 영향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천개벽의 흐름을 이어받으면서 불법을 주체로 회상을 만들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는 소태산이다. 그의 개벽사상가적 면모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 표어나 《정전(正典)》 첫머리 ‘개교의 동기’(총서편 1장)에 뚜렷한데, 불교에 없는 개념과 시대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붓다도 당대의 현실에 깊이 영향을 받았겠지만, 시국에 대한 판단을 경전에 남긴 바 없으며 더구나 당시가 ‘물질 개벽의 시대’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소태산은 《정전》 총서편 제2장 ‘교법의 총설’에서 “불교는 무상대도(無上大道)”라 못 박았고, 그의 언행록인 《대종경(大宗經)》에서는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도를 얻었으나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본다면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淵源)을 부처님에게 정하노라”고 명언했고, “장차 회상(會上)을 열 때도 불법을 주체로 삼아 완전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고 다짐했다(《원불교전서》(초판 27쇄), 서품 2장, 95면).

그런데 정작 그의 대각 일성(서품 1장)을 보면 붓다가 깨달은 내용과 반드시 일치하는지는 검토해 볼 여지가 있다.

원기(圓紀) 원년 사월 이십팔일[음 3월 26일]에 대종사(大宗師) 대각(大覺)을 이루시고 말씀하시기를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道)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

— 《원불교전서》 95면

사성제와 팔정도에 대한 언급이 없음은 물론, “만유가 한 체성”이라는 명제는 만유가 십이연기에 따라 조성되는 허상 내지 가유(假有)라는 붓다의 깨달음과 모순되지 않는가? 그 답은 ‘체성(體性)’의 의미에 따라 달라질 터인데, 원불교 경전에 드물지만 비중 있게 나타나는 이 단어는 과연 무슨 뜻일까? ‘체’를 ‘체(體)·상(相)·용(用)’ 삼대(三大) 중 본체 내지 본질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이해하고 넘길 수도 있지만, 소태산이 대각 당시에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그 용어를 알았는지는 의문이며, 원불교 경전에서도 드물게 〈일원상서원문(一圓相誓願文)〉과 《대종경》 서품 1장에만 나온다. 아무튼 이 표현이 만유의 실체적 존재를 전제하는 표현은 아닐 것인데, 이 판단은 성품 자리를 뜻하는 ‘성’에 한정한다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일원상서원문〉에 “일원의 체성”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만큼 어떤 물리적 또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나타내려고 ‘체성’을 말한 것이 아님을 수긍할 수 있지만, 왜 굳이 ‘성품 성’ 자와 ‘몸 체’ 자를 함께 썼는지는 음미해 볼 일이다. ※註 주 9) 백낙청 외 《세계적 K사상을 위하여》, 제3장 백낙청·전도연 대담 〈K사상의 세계화를 모색하는 원불교〉에서 나는 나름의 가설을 던져 보았다. “그냥 성품 자리라고 하면 자칫 우리의 감각적 세계나 현실적인 삶을 초월한 그런 성품 자리를 생각할 수 있거든요. 특히 서양의 이원론적 사고, 플라톤식으로 초감각적인 영원불변의 세계를 생각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체성은, 이 성품 자리가 몸이기도 한 것 아니에요? 그 점에서는 서양식 표현을 쓴다면 굉장히 유물론적인 사유를 하고 계신 거죠.”(185면).

‘체성’과 마찬가지로 ‘생멸 없는 도’ 역시, 만일 그것이 영원불변의 초감각적 세계 속에 실존하는 어떤 법칙이나 원리라면 붓다가 배척한 ‘사견(邪見)’의 하나임을 피할 수 없다. ‘인과 보응’도 실재하는 주체와 주체, 또는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라면 정견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런 해석은 ‘일원상의 진리’에 대한 소태산의 진술(《정전》 교의편 1장 1절 ‘일원상의 진리’)과도 양립하기 힘든 성격이다.

어쨌든 소태산의 대각 일성과 붓다의 사성제 사이에는 적어도 어떤 ‘온도차’가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석가모니도 대각의 순간에 깨달음의 환희를 맛보았고 제자들도 그의 가르침대로 수행하면 정정(正定)의 희열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쳤지만,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는 소태산의 말에서 느껴지는 기쁨과 경이감을 직접 표현하지는 않은 것 같다. ※註 주 10) 《초전법륜경》에는 깨달음이 전파되는 순간 천신들이 소리치고 세계가 요동치고 광명이 비추고 제자들이 환희하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이 또한 깨달음을 얻은 환희이지 ‘만유의 체성’을 관조한 희열과는 차이가 있다.

단순한 표현상의 차이를 확대 해석하는 것일 수 있지만, 붓다가 깨달은 진리를 소태산이 다시 깨달을 때까지 2천5백 년 동안 누적된 대승불교와 유교, 도교, 전통 무교(巫敎) 등의 현세 긍정적 사유가 스며든 흔적일 수도 있다. 소태산이 고(苦)보다 은(恩)을 중심사상으로 삼은 것도 그런 역사적 맥락에서 일어난 불법의 새로운 전환이지 싶다.

소태산이 제시한 해탈과 여래위(如來位)에 오르는 공부법 역시 불교의 계(戒)·정(定)·혜(慧) 삼학을 계승하면서도 현실 속에서의 실천을 지계의 국한을 넘은 삼학의 ‘열매’로 간주하고 ‘정당한 알음알이’를 강조하는 등 붓다의 팔정도와 차이를 보인다. ※註 주 11) 그 차이를 더 분명하게 설한 것은 정산(鼎山) 송규(宋奎) 종사다. “과거에도 삼학이 있었으나 계정혜와 우리 삼학은 그 범위가 다르나니, 계는 계문을 주로 하여 개인의 지계에 치중하셨지마는 취지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모든 작업에 빠짐없이 취사[作業取捨]케 하는 요긴한 공부며, 혜도 자성에서 발하는 혜에 치중하여 말씀하셨지마는 연구[事理硏究]는 모두 일 모든 이치에 두루 알음알이를 얻는 공부며, 정도 선정에 치중하여 말씀하셨지마는 수양[精神修養]은 동정 간에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는 일심 공부라, 만사의 성공에 이 삼학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니 이 위에 더 원만한 공부 길은 없나니라.”(《정산종사법어》 경의편 13장, 《원불교전서》 842~843면).

다만 삼학이든 팔조든 또는 인생의 요도라고 하는 사은 사요든, 불합리한 어떤 명제에 대한 신앙을 요구함이 없이 조곤조곤 이치를 따져 수행자를 설득하는 방식도 붓다의 선례를 그대로 닮았다 할 것이다. ※註 주 12) 삼학 팔조에 관한 상세한 논의로 백낙청 외 《개벽사상과 종교 공부》(창비, 2024), 제3장 백낙청·방길튼·허석 좌담 〈원불교, 자본주의 시대의 절실하고 원만한 공부법〉 참조.



‘세계적 주교’가 될 불교

소태산은 대각 후 처음부터 불교의 진리를 가르치지는 않았다. 청중의 수준도 있거니와 불교를 천시해 온 조선시대의 풍조를 의식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서 그는 작심하고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우리가 배울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요, 후진을 가르칠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니, 그대들은 먼저 이 불법의 대의를 연구해서 그 진리를 깨치는 데에 노력하라. [중략] 이제 그 근본적 진리를 발견하고 참다운 공부를 성취하여 일체중생의 혜(慧)·복(福) 두 길로 인도하기로 하면 이 불법으로 주체를 삼아야 할 것이며, 뿐만 아니라 불교는 장차 세계적 주교가 될 것이니라. 그러나 미래의 불법은 재래와 같은 제도의 불법이 아니라 사·농·공·상을 여의지 아니하고, 또는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공부하는 불법이 될 것이며, 부처를 숭배하는 것도 한갓 국한된 불상에만 귀의하지 않고, 우주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로 알게 되므로 일과 공부가 따로 있지 아니하고, 세상일을 잘하면 그것이 곧 불법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요, 불법 공부를 잘하면 세상일을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또는 불공하는 법도 불공할 처소와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공하는 이의 일과 원을 따라 그 불공하는 처소와 부처가 있게 되나니, 이리 된다면 법당과 부처가 없는 곳이 없게 되며, 부처의 은혜가 화피초목(化被草木) 뇌급만방(賴及萬方)하여 상상하지 못할 이상의 불국토가 되리라.

— 《대종경》 서품 15장, 《원불교전서》 103면

원불교의 교도가 이 말씀을 듣고 여기 언급된 새로운 불교 곧 원불교가 장차 세계 최대의 종단이 되어 ‘세계적 주교’의 자리에 오르리라고 해석하는 이가 있다면―그 심경이 이해가 가기는 해도― 그것은 너무도 편협한 분파주의일 것이다. 그보다는 불교를 포함한 세계의 많은 종교와 비종교 세력이 ‘부처님’의 도덕에 귀의하고 ‘중정(中正)’의 정신을 터득하여 ‘삼동윤리(三同倫理)’의 규정대로 ‘동척사업(同拓事業)’의 동업자로 나서는 세상을 지향하는 것이 옳다. ※註 주 13) 소태산의 일원대도를 부연하여 그 실천 강령을 세 가지 윤리로 요약한 정산 종사의 삼동윤리에 관해서는 《정산종사법어》 도운편 34~37장(《원불교전서》 988~991면) 참조. 그중 동척사업 대목의 일부를 인용한다. “삼동윤리의 셋째 강령은 동척사업이니 곧 모든 사업과 주장이 다 같이 세상을 개척하는 데에 힘이 되는 것을 알아서, 서로 대동화합하자는 것이니라. [중략] 그러므로, 모든 사업이 그 대체에 있어서는 본래 동업인 것이며, 천하의 사업가들이 다 같이 이 관계를 깨달아 서로 이해하고 크게 화합하는 때에는 세계의 모든 사업이 다 한 살림을 이루어 서로 편달하고 병진하다가 마침내 중정(中正)의 길로 귀일하게 될 것이니, 우리는 먼저 이 중정의 정신을 투철히 체득하여 우리의 마음 가운데 모든 사업을 하나로 보는 큰 정신을 확립하며, 나아가서는 이 정신으로써 세계의 모든 사업을 중정으로 통일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니라.”(37장).

한국불교 내부에서도 쇄신 노력이 다각적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안다. 그중에는 소태산과 원불교를 연상시키는 예도 적지 않다. 가령 10년 전에 나온 글이지만, 금강 스님의 〈한국불교의 새 길 찾기〉는 ‘실천과 참여의 불교로 의식 전환’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수행과 포교로의 전환’ ‘실천하는 생활 규범과 청규로 전환’ 등 크게 세 항목에 걸쳐 상세한 혁신 방안을 제시했는데, 모두 붓다의 본뜻에 충실하려는 노력인 동시에 상당 부분은 원불교의 실행과 합치하는 성격이다. 특히 그가 주장하는 ‘생활의 전환’은 ‘불법시생활(佛法是生活) 생활시불법(生活是佛法)’이라는 원불교의 표어를 연상시킨다.

여하튼 한 개인과 사회와 세계가 만나 삶을 만들어 가는 ‘생활’은 고통[苦]의 현장이다. [중략] 이 생활을 어떻게 구성하느냐,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고통의 해소와 행복 증진이라는 불교의 가치 구현이자 존재 목적의 핵심이다.

[중략]

한국불교의 현실에서 보면 생활의 전환은 의식의 전환보다 어려운 공덕이다. 그동안에는 재가불자들이 따르는 불교의 생활양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불교와 사회가 분리되었듯, 불교와 생활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동안 재가불자들은 생활의 측면에서 일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교도로서 지향하는 가치가 삶을 통해 드러나지 않았다. ※註 주 14) 금강 〈한국불교의 새 길 찾기〉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편 《종교·생명의 대전환과 큰 적공》 모시는사람들, 2016, 136면.

《불교평론》 지령 100호 특별기획 ‘한국불교 미래 100년의 비전’에 기고한 성태용 교수도 〈불청지우의 보살행에 나서자〉에서 생활 불교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삶의 현장이 바로 수행의 도량이어야 한다는 말이 한갓 구호에 그치지 않고 참으로 불자들의 올바른 수행 지침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불자들이 힘 있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삶을 통해 불국토를 건설하는 존재로 올바로 설 수 있다. 지금의 불자와 불교는 이런 이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불자들은 기복적인 데 매달리거나 ‘깨달음 병’ ‘수행 병’에 걸려, 힘 있는 실천을 통해 보다 나은 오늘을 건설하는 존재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불교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바꾸어 나가 바로 여기에 불국토를 건설하는 종교가 되지 못하고, 이 사회가 대량생산하는 괴로움과 소외에 지친 이들을 수용하는 피난처에 그치고 있다. ※註 주 15) 《불교평론》 2024년 겨울호, 60면.

아쉬운 점은 한국불교의 개혁을 추구하는 뜻있는 인사들이 비슷한 교리와 실행을 이미 보여 주고 있는 원불교와의 허심탄회한 소통에 임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물론 원불교 측에서 그러한 소통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설지, 그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자기 점검과 반성을 얼마나 진지하게 수행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스님이 선창한 ‘조선불교유신’의 상당 부분이 《조선불교혁신론》(1935)을 저술한 소태산 박중빈의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에서 실행에 옮겨졌고 ‘생활이 곧 불법’이라는 표어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교단이 불교 종단에 비해 규모가 미미하다고 해서 진지한 소통의 대상으로 대접받지 못한다면, 그 어느 쪽에도 이득이 될 게 없을 것이다.



불자의 마음으로 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시대적 현실을 직시하고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려면 이 세상을 올바로 파악하고 대응해야 한다. 소태산의 말대로 세상만사를 ‘산 경전’ ※註 으로, 다시 말해 불자(佛子)의 마음으로 읽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주 16) “세상은 일과 이치를 그대로 펴 놓은 경전이라. …이것이 산 경전이 아니고 무엇이리요. 그러므로, 나는 그대들에게 많고 번거한 모든 경전을 읽기 전에 먼저 이 현실로 나타나 있는 큰 경전을 잘 읽도록 부탁하노라.”(《대종경》 수행품 23장).

그런데 지금이 자본주의 세상임을 빼고 말한다면 팔정도에 충실한 불자일 수 있을까. 붓다의 시대는 자본주의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불경에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수운만 하더라도 한반도가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타율적으로) 편입되기 전에 살았으므로 서양 제국주의의 침탈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규탄했으나, 그것을 자본주의라는 틀 속에서 보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당대의 말세적 풍조로 지적한 각자위심(各自爲心)이 자본주의 근대의 기본 특성을 포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세기 이후, 일본의 식민지가 되고 근대 문물이 정신없이 유입되던 현실에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 표어를 만들어 낸 소태산은 자본주의 인식에서 확실히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런데 ‘물질 개벽’이 자본주의 시대를 규정하기에 얼마나 정확하고 포괄적인 개념인가? 이는 많은 연마가 필요한 물음으로서 나는 ‘물질 개벽’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어야 옳다고 믿는다. 자본주의가 이룩한 물질세계와 이른바 정신적 가치들의 엄청난 변화,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모든 단단한 것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상황은 ‘물질 개벽’이라는 표현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며, 더욱이 인간이 시작한 변화가 이제는 인간 없이도 진행되면서 가속화될 전망이 열리는 인공지능(AI)의 시대에 이르러 그 표현이 한층 적중하고 있는 느낌이다.

특히 기후 위기 등 생태계의 대대적 변화가 자본주의라는 말만으로 표현하기 충분치 않다고 믿는 이들은 지질학적 용어를 빗대어 ‘인류세’니 ‘자본세’ 같은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나 자신은 굳이 지질학을 끌어넣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 편이다. ‘자본세’는 ‘자본주의 시대’와 동어반복이나 다름없고, 인류의 등장 자체를 ‘인류세’의 시작으로 본다면 이는 충적세(沖積世, Holocene) 훨씬 전에 시작한 거대 기간이 된다. 나는 자본주의의 핵심적 중요성을 인식하면서도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를 뛰어넘는 큰 시운(時運)을 함축하는 표현이 한반도에서 이미 창출되었다는 입장이다. “한반도는 조선조 말기의 대혼란과 동학혁명의 패배, 국권 상실 등의 고난을 통과하면서 드디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간명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명제를 산출했다. 이는 단순한 표어의 발명이 아니라 새 불교를 표방하는 자생종교에 동학 이래의 후천개벽 사상이 합류하는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註 주 17) 졸저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28면.

불자의 마음으로 자본주의를 읽을 때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각자위심’에서 한 발 더 나간 것임이 드러난다. ‘각자위심’과 ‘탐·진·치’로 움직이지 않는 인간을 처벌하고 주변화하는 데 전대미문의 위력을 발휘하는 체제이다. 그래서 나는 현대의 세계체제가 “탐(貪)·진(瞋)·치(癡) 삼독(三毒)의 힘으로 작동하는 체제”로 규정한 바 있다. ※註 주 18) 졸저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통일시대·마음공부·삼동윤리〉 294면. 이하 296면까지 이 주장에 대한 부연 설명이 나온다.

다시 말해 불자의 마음이 용납할 수 없는 체제인 것이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체제라는 것이 한번 성립되면 그것은 몇 사람의 결단으로 허물 수 없는 지구력을 지닌다. 더구나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대략 16세기 서구의 한 모퉁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이해되지만, 일단 성립된 후로는 승승장구하여 20세기에는 전 지구를 덮을 만큼 확장되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생산력의 증대뿐 아니라 기념비적 지식과 문화의 생산을 이루어냈다. 근대의 극복이 본질적인 목표라 해도 그 목표의 추구와 달성을 위해 근대에 적응하며 활동하는 ‘이중 과제’가 요구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21세기 초에 이르러 이 체제가 말기 국면의 대혼란을 맞이했고 중생의 고통이 날로 가중되고 있으며, 자칫 지구 전체의 유정·무정 존재들의 존속이 불가능해질 위기에 처했다. 불자라면 당연히 자본주의에 대한 연마와 더불어 그 대안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정치·사회 연구의 영역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가장 흔히 거론되는 것이 ‘사회주의’인데 이것 또한 불자의 마음으로 볼 필요가 절실하다.

500년의 역사를 지녔고 지금도 작동 중인 자본주의와 달리, 사회주의는 한 번도 전 세계를 장악한 적이 없고 세계의 한 지역에서나마 제대로 작동한 적이 있는지도 분명치 않다. 따라서 어떤 사회주의를 대안 체제로 상정하고 있는지부터 논의할 필요가 있다. 참고할 역사적 사례로는 아무래도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 이래 2차대전 이후 한동안 동유럽 여러 나라들까지 지배했던 ‘공산권’ 내지 ‘현실사회주의권’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마련이다. 불자의 관점으로 볼 때 이 역사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수행(修行)’ 개념의 부재다. 물론 초기 공산주의자들 가운데는 자기희생과 헌신이 뛰어난 인격들이 많았지만, 탐·진·치를 작동 원리로 삼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데 팔정도 같은 수행이 필수적이라는 개념은 애당초 없었다. 자본주의 진영의 포위 공격 속에 그런 수행이 얼마나 가능했을지도 의문이지만, 어쨌든 1990년대 초 소련·동구권의 몰락으로 이 역사적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밖의 크고 작은 실험들과 현실 속의 실험 기회를 얻지 못한 운동 및 사상들에 대해서도 많은 연구가 필요함은 물론이다. 한국불교에서도 여러 단체와 인사들이 불교와 사회주의, 더 나아가 불교와 마르크스의 결합을 시도해 온 것으로 안다. 그런데 내가 (불교나 다른 어느 종교의 교도가 아니면서도) 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불자의 마음’이다. 예컨대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세간의 연구와 평가를 충분히 감안하되 그의 학설 또한 붓다의 가르침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묻는 일을 생략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세속의 학설이 아닌 ‘불자의 마음’으로 접근할 때, 당대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붓다가 설한 정견(正見)의 개념조차 없었던 마르크스를 새 시대의 주세불로 숭앙하는 것은 중생구제의 정도(正道)가 아님이 분명해지지만, 동시에 마르크스의 이론과 실천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보살행에 얼마나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도 허심한 판단이 가능해질 것이다.

아무튼 불자의 마음으로 용인할 수 없는 체제가 자본주의인 이상, 그 대안으로서 새로운 사회주의적 사상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불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아니, 구체적인 사회주의 이론이나 실행에 가담하기에 앞서, 자본주의가 아닌 것에 대한 소망은 인간 본연의 마음임을 깨달아 ‘빨갱이’ 운운에 지레 겁먹고 탐구를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런 자세로 붓다와 마르크스의 만남을 구상할 때 한국의 민중불교운동은 한국 특유의 불교사회주의를 ‘새로운 사회주의적 사상’을 위한 하나의 생산적 의제로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는가

현대 한국의 변혁적 중도주의는 한반도 분단체제의 변혁을 목표로 폭넓은 세력을 확보하려는 중도주의이다. 이때 ‘분단체제 변혁’을 분단체제의 극복이 아닌 단순한 분단 극복(다시 말해 통일)과 동일시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그러나 대대적인 동족상잔의 참화를 겪은 뒤에도 남북분단이 전쟁도 평화도 아닌 휴전 상태로 오래 지속됨으로써 일종의 ‘체제’를 형성한 결과, 분단과 직접 관련이 없는 듯 보이는 삶의 구석구석까지 분단체제의 일부가 되었고 따라서 통일이든 다른 어떤 방법으로든 일거에 바꾸거나 무너뜨릴 수 없는 현실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분단체제론이다. 단일형 민족국가로서의 통일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형국에서, 분단체제 극복은 국내의 총체적인 개혁과 더불어 남북 두 국가의 느슨한 연합으로 시작되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이며 창의적인 재통합이라는 한결 복잡한 과제로 대두한 것이다.

이러한 분단체제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산물이며 그것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국지적 현상이라는 것이 분단체제론의 또 다른 논지이다. 그렇다고 분단체제 극복이 반드시 세계체제의 종말과 동시에 와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며, 오히려 한국에서 변혁적 중도주의가 정착하면서 세계체제의 변혁에도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믿음이다.

변혁적 중도의 때가 이 땅에 드디어 왔다고 나는 2025년 신년 칼럼에서 선언했다. ※註 주 19) 졸저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 제1장.

이것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 선언인가? ‘변혁적 중도’가 여전히 대중에 낯선 구호이고 주류 언론과 지식사회의 호응도 미미한 마당에 어떤 의미로 ‘때가 왔다’는 주장이 성립할 수 있는가?

수운 선생은 “시호시호(時乎時乎) 이내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時乎)로다/ 만세일지(萬世一之) 장부(丈夫)로서 오만년지(五萬年之) 시호(時乎)로다” ※註 라며 다시 못 올 때가 왔다고 노래했는데, 이는 ‘무극대도’를 얻은 기쁨을 표현했을 뿐 당신 스스로 얼마 안 가 처형될 운명이었고 이후 동학도들에 대한 탄압과 살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주 20) 《천도교경전》 〈용담유사〉 부록 ‘검결’ 237면.

뒤이은 국권 상실과 의병 활동, 3·1혁명에 대한 탄압과 일제강점기 내내 지속된 민중의 고난은 분단 시대에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이런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4·19와 5·18, 1987년의 6월항쟁 등을 통해 민주주의가 성장해 왔고, 2016~2017년의 촛불 대항쟁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시민혁명으로 독재정권을 탄핵 퇴치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때’가 온 것은 아니어서, 문재인 정부가 윤석열 일당에게 정권을 내주는, 결코 정상적인 정권교체가 아닌 ‘변칙적 사태’가 연출되었다. 이에 촛불 시민·빛의 시민이 다시 궐기하여 친위 쿠데타를 진압하고 또 한 번 대통령 파면과 정권교체를 이룩한 것이다. 그렇게 출범한 새 시대는 87년체제의 역사적 의미를 훌쩍 뛰어넘는 2025년 체제라 불러도 좋을 터이다.

‘때’가 왔다는 실감은 누구나 할 수 있더라도 그것이 ‘변혁적 중도’의 때인지는 연마가 필요하다. 거듭 말하지만, 변혁적 중도주의는 분단체제론이 전제될 때만 제대로 파악하고 실행할 수 있는 노선이며, 분단체제론은 또 세계체제론을 전제한 담론인 것이다. 첩첩산중의 공부 길인 느낌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볼 여지도 있다. 동학 이래의 오랜 노력이 사회의 발본적 쇄신과 인심의 개벽을 동시에 추구해 온 역사이며 그 과정에서 충분히 변혁적이지 않거나 ‘중도’를 벗어난 단순 해법들이 번번이 실패했고, 촛불혁명·빛의 혁명에 나선 군중들이 비록 ‘변혁적 중도’의 깃발을 들지는 않았지만 그에 상충하는 구호나 논리를 내세운 연설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따라서 ‘변혁적 중도의 때가 왔다’는 말은 무슨 난삽한 학문적 작업이기보다 이미 생성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을 요구할 따름이다. 이 능력 자체가 간단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붓다의 ‘중도’를 되돌아보고, 그것이 한반도 자생의 새 불교를 표방하면서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 표어를 낳은 역사를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백낙청 paiknc@snu.ac.kr
1938년생. 서울대 영문과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명예 편집인. 근년의 저서로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 《서양의 개벽사상가 D.H. 로런스》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 만들기》 《변혁과 중도의 때가 왔다》 등이 있고, 공저자로 《백낙청 회화록》(전 8권), 좌담집 《개벽사상과 종교 공부》 《세계적인 K사상을 위하여》 등을 간행했음.

Posted by Sejin at April 26,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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