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적: 한반도 분단과 정치적 슬픔
적의 계보학 [59]
박선교 박사 (맨체스터대학교 종교와 신학부, 링컨신학연구소)
입력 2026.04.15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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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선교 박사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에 대한 군사적 공격이 지속되는 가운데 이 글을 쓰고 있다. 사순절을 지나며 부활의 소망을 고대하는 이 시점에서, 이러한 폭력의 현실은 더욱 깊은 역설로 다가온다. 이번 공격으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그 피해는 이란이라는 특정 국가에만 국한되지 않고 국제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무법적 현실을 성찰하면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과연 ‘적’은 누구이며, 무엇인가.
적은 일상적 관계에서부터 국제 질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에서 구성된다. 개인과 국가는 관계망 안에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때로는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적’을 형성하게 된다. 이 점에서 적의 형성은 일정 부분 불가피한 측면을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특정한 정치적·사회적 필요에 의해 구성되는 ‘만들어진 적’ 또한 존재한다.
본 글은 실재하는 적이라기보다, 이러한 ‘만들어진 적’의 형성과 작동 방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를 지칭하기 위해 본 글은 “delusion”(망상 혹은 왜곡된 신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는 단순한 오해를 넘어, 잘못된 신념에 기반하여 구성되고 유지되는 적을 의미한다. 이 경우 적으로 규정된 대상은 실제로 적이 아닐 수 있으며, 오히려 강자의 이익과 행위를 정당화하는 담론적 장치로 기능한다.
더 나아가, 강자는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된 정보를 생산하고 이를 확산시키며, 그 결과 또 다른 잘못된 신념이 재생산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본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필자의 연구 주제인 한반도 분단과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적’의 계보학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 글의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왜 한국교회(1)는 한반도 분단 체제 하에서 지속적으로 ‘적’을 만들어 왔는가? 분단과 반공주의를 기반으로 한 ‘적대 구조’는 한국교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는 한국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린 이념적·정치적 갈등의 중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본 글은 한국교회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성찰해야 할 문제를 제기한다.
한반도 분단 이후, 한국교회는 반공주의를 토대로 다양한 ‘적’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왔다. 시기마다 대상은 달라졌지만, 여러 집단이 반복적으로 ‘적’으로 호명되어 왔다. 예컨대 1950년대에는 종전 반대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가 ‘용공’조직으로 규정되었는데, 이는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입장과 긴밀히 맞물려 있었다.(2)
이후에도 ‘용공세력’, ‘종북좌파’, 그리고 ‘종북게이’와 같은 다양한 ‘적들’이 재생산되어 왔다. 이는 한국교회의 신학적 자기모순을 드러낸다. 교회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마 22:39; 레 19:18)는 성서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특정 집단을 ‘적’ 혹은 ‘죄인’으로 규정하고 이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해 왔다. 이러한 자기모순은 결국 교회의 존재론적 정체성과 그 실천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 남북이라는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적의는 단순히 사회 구조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가정 구조도 변화시켰다.그렇다면 왜 한국교회는 성서의 가르침과 괴리된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게 되는가? 본 글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정치적 슬픔’(political grief)이라는 개념을 통해 찾고자 한다. 정치적 슬픔이란 정치적 이유로 인해 개인이나 집단이 경험하는 상실을 의미한다.(3) 이 개념에서 핵심적인 것은 ‘가정세계’(assumptive world)이다. 이는 개인과 집단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기반이 되는 인식의 틀을 가리킨다.
이 틀에는 안전에 대한 인식(how we find safety in the world), 사건의 발생 원인과 작동 방식에 대한 신념(how we believe things work and why events happen), 그리고 자기 자신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위치에 대한 이해(our view of ourselves and how we fit into our social spheres)가 포함된다.(4) 그러나 정치적 사건과 역사적 단절은 이러한 가정세계를 붕괴시킨다. 이로 인해 기존의 인식 틀이 해체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가정세계’(new assumptive world)가 형성된다.
이를 한국교회의 상황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한반도 분단과 이념적 갈등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정치적 슬픔’을 경험하게 했으며, 이는 새로운 가정세계 형성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 과정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분단과 반공주의를 넘어서는 방향이며, 다른 하나는 이를 더욱 부정적으로 강화하는 방향이다. 특히 분단이 초래한 정치적·이념적 상실은 나와 다른 이들을 타자화하며, ‘적’으로 만드는 조건으로 작용해 왔다. 이러한 구조에서 반공주의는 단순한 이념을 넘어, 가정세계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핵심적인 담론적 장치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림1> 한국교회의 새로운 가정세계 형성 과정(5)

이처럼 부정적으로 강화된 가정세계에서는 ‘적’으로 규정된 대상에 대한 차별과 혐오, 그리고 폭력이 정당화된다. 구성신학자 캐서린 켈러(Catherine Keller)는 이를 ‘종말론적 무의식’(apocalyptic unconscious)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 무의식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원형들로 채워진 공간이 아니라, 인종, 성, 탐욕, 권력, 심지어 종교와 같은 문화적으로 억압된 그림자들이 잠재되어 있는 은밀한 공간이다. 그러나 이 무의식은 단순히 억압된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특정한 정치적 공간을 구성한다. 그것은 협상 가능한 경계를 지닌 실제 영토가 아니라,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일종의 공포의 공간이다. 이러한 집단적 무의식의 경계에서 작동하는 폭력은 ‘야만인’, ‘테러리스트’, ‘이교도’, ‘불신자’와 같은 위협을 통해 어떤 잔혹함도 정당화하며, 역사 속에서 은폐된다.(6) (*필자 번역)
이 무의식 공간의 작동 원리는 폭력이다. 이 폭력은 그 잔혹함에도 불구하고 정당화되고 은폐된다. 예컨대 제주 4·3사건과 같은 역사적 비극뿐만 아니라, 오늘날 인종, 종교, 성적 지향의 차이를 이유로 한 혐오와 배제 역시 이러한 작동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이념적·정치적 필요에 의해 ‘적’이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적’에 대한 폭력은 반공주의 이념과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더욱이 비판적 성찰의 부재로 인하여 동일한 이념이나 신앙을 공유하는 집단들 또한 이들을 무비판적으로 ‘적’으로 낙인찍으며 강한 배타성을 보인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 공간이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원형들로 채워진 공간이 아니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해, 폭력에 의해 유지되는 질서일지라도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언제나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필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의 메시지를 다시 성찰하고자 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적’을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으며, 오히려 강자들에 의해 적으로 규정된 타자들까지 포용하고 환대하며, 화해로 나아가게 하는 이웃 사랑의 실천에 있다.
특히 폭력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국제사회에서 이러한 요청은 더욱 절실하다. 따라서 종교와 종교인은 우리 사회에 형성된 ‘가정세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이를 해체하며 재구성해야 할 과제를 지닌다. 이는 ‘정치적 슬픔’을 바탕으로 하는 ‘종말론적 무의식’을 극복하고, ‘적’을 해체하는 실천이며, 궁극적으로 한반도 분단을 넘어 평화를 지향하는 길이다.
미주
(1) 필자의 박사 논문은 한국교회를 보수교회와 진보교회로 구분하고, 각각이 반공주의 담론의 형성과 발전에 어떠한 신학적 기여를 했는지를 분석한다. 보다 상세한 논의는 해당 연구를 참조할 수 있다: Sunkyo Park, “A Critical and Theological Assessment of Protestant Churches’ Contribution to the Political Ideology of Division in South Korea” (Ph.D. Thesis, University of Manchester, 2025). https://research.manchester.ac.uk/en/studentTheses/a-critical-and-theological-assessment-of-protestant-churches-cont
(2) Chŏng-Sin Pak, Protestantism and Politics in Korea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3), 75.
(3) Darcy Harris, “Political Grief,” Illness, Crisis & Loss 30, no. 3 (2022): 578-79, https://doi.org/10.1177/1054137321999793.
(4) 같은 글, 574.
(5) 본 도식은 필자의 논문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원 논문은 한국교회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으나, 이를 한국사회로 확장하여 이해할 수 있다: Sunkyo Park, “Political Grief and the South Korean Church,” Religions 16, no. 5 (2025): 541. https://doi.org/10.3390/rel16050541.
(6) Catherine Keller, God and Power: Counter-apocalyptic Journeys (Minneapolis: Fortress Press, 2005),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