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4

자비명상 개발해 상처 난 마음 찾아가는 ‘힐링멘토’ 마가 스님:매일종교신문

자비명상 개발해 상처 난 마음 찾아가는 ‘힐링멘토’ 마가 스님:매일종교신문


자비명상 개발해 상처 난 마음 찾아가는 ‘힐링멘토’ 마가 스님
오늘 내가 뿌린 씨앗이 미래의 열매…자비명상은 ‘善業 쌓는 법’ 깨닫는 수행”

기사입력: 2020/02/06

문윤홍 대기자

오늘 내가 뿌린 씨앗이 미래의 열매…자비명상은 ‘善業 쌓는 법’ 깨닫는 수행”

스무 살의 청년은 1년간 모은 수면제를 열 알, 스무 알씩 입안에 털어 넣었다. 오대산의 아름다운 설경(雪景)이 가물가물해지며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내가 자살하면 아버지가 평생 후회하면서 살겠지’하고 아버지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하기 위해 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죽어가는 청년을 발견해 월정사로 옮긴 한 스님이 3일 만에 깨어난 그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자네는 부처님 가피로 다시 태어났으니, 여생은 부처님에게 바치게나.”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지금, 고단한 삶에 지친 대중이 그를 찾는다. 그가 쓴 『알고 보면 괜찮은』이라는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가 중앙대에서 강의한 ‘내 마음 바로보기’(3학점)는 ‘1초 마감’으로도 유명하다. 수강 신청 시작과 함께 곧바로 마감되기 때문이다. 그가 설파하는 ‘자비 명상’은 미움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하나의 힐링(healing) 창구로 자리매김했다. 마가 스님에 관한 이야기다.



‘국민 힐링멘토’로 통하는 마가 스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석가모니 부처님의 첫 설법의 말씀대로 우리는 각자 존귀한 존재이다. 그 존귀한 각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을 안고 육도를 건너야 하는 고단한 존재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그 고단한 삶 속에 살고 있다. 그나마 우리에겐 부처님이 일러주신 ‘길’이 있어 ‘지금 이 순간’을 또 맞이한다.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이 지금 이 순간의 인연을 짓는 것으로, 마음 하나하나가 서로 무관하지 않다. 그 연기(緣起)에 일찍이 눈뜨고 대중의 마음을 살펴온 이가 있다. 시대의 화두가 되어버린, 아니 이제는 화두라고 할 것도 아닌 ‘힐링’을 일찍이 부처님의 글자로 시작한 사람이다. ‘자비명상’이라는 수행법으로 대중의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고, 그 마음에 불법(佛法)을 심고 있는 (사)자비명상 대표 마가 스님이다. 마가 스님은 혜민·법륜 스님 등과 함께 이 시대의 힐링멘토로 꼽힌다.


‘자비명상’의 탄생



2005년 7월1일, 장맛비가 내리는 충남 공주 마곡사에 28명의 대중이 모였다. 모두 아픈 사람들이다. 마음이 아픈 이들이다.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부처님을 찾았다. 그들을 맞은 이는 당시 마곡사 포교국장 마가 스님이었다. 그들의 마음은 이제 마가 스님에게 달렸다.



연화당에 모여 앉은 참가자들에게 마가 스님은 각자의 이름을 새로 지어보라고 했다. ‘물망초’, ‘무념무상’, ‘허공’ 등 참가자들은 새로 지은 이름으로 이름표를 고쳐 달았다. 그 이름 속에는 많은 사연들이 담겨있었다.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온 사람들이다. 스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었고, 이름 하나로 그들은 새롭게 태어났다.



저녁 예불을 마친 뒤에 스님은 법당에 마주 앉은 참가자들을 두 줄로 눕힌 후 ‘김밥말기’를 제안한다. 적막이 흐른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의 몸 위를 구르는 것이다. 스님의 재촉에 참가자들은 서로의 몸 위를 구르기 시작한다. ‘상처 없는’ 상처를 안고 온 이들, 서로의 상처 위를 구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참가자들의 눈빛은 분명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깔리자 스님은 참가자들을 절 밖으로 내보낸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절 근처를 걷게 했다. 한 사람은 눈을 감고 상대방의 손에 의지해 걸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마가 스님의 ‘이심(以心)’은 무엇이고, 길을 걷는 참가자들의 ‘전심(傳心)’은 무엇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 짤막한 길이 결코 짧지 않은 길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지난날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것, 1초 1초가 가볍지 않은 일이다. 산책을 끝으로 첫째 날의 일정인 ‘마음 열기’가 마무리됐다.



새벽 3시, 새벽예불이다. 그리고 108배(拜)를 한다. 참가자들은 잠이 채 가시지 않은 몸으로 예불을 올리고, 집전하는 스님의 죽비에 맞춰 절을 시작했다. 누구를 위한 절이며 무엇을 위한 절인가. 아직 가야 할 길은 멀다. 1배 또 1배, 문 밖 어둠처럼 1배, 1배는 그저 어둠일 뿐이다. 하지만 잠시 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쁜 숨과 숨 사이에 ‘나’가 서서히 들어서기 시작한다. 상처와 관련된 시간들이 거친 호흡을 타고 들락거린다. 이제 절은 각자의 몫이다. 참회의 시간, 용서의 시간, 성찰의 시간이다. 미움, 원망, 그리움, 안타까움 등 번뇌들이 몰려온다.



아침 식사 후 ‘가족 긍정 명상’이 이어진다. 가족을 생각하는 시간이다. 역시 시간이 흐르자 참가자들은 많은 감정들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미움과 용서, 원망과 사랑이 교차한다. 마침내 눈물이 터져 나온다. 참가자들은 맨발로 젖은 산길을 걷는다. 상처가 각자의 몫이듯 길은 각자의 것이다. 치유를 향해 걷고 있다.



저녁 공양 후 참가자들은 노래에 맞춰 온갖 몸짓으로 망가진다. 마음껏 망가진 ‘나’를 통해 ‘상처’는 또 한 번 출렁인다. 그 출렁임으로 각자는 어딘가에 가 닿고 있는 듯했다.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난 후 이제 ‘유서’를 쓰는 시간이다. 20분 후에 죽는다는 가정 아래 참가자들은 유서를 써야 한다. 그동안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상처’는 얼마나 큰 것이었던가. 얼마나 단단한 것이었던가. 하지만 죽음 앞에서 마주한 그 상처들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유서를 써내려가던 참가자들은 하나 둘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눈물 속엔 용서와 화해, 믿음과 사랑, 참회와 새로운 서원이 들어있었다. ‘물망초’ ‘무념무상’ ‘허공’ 그들은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마지막 셋째 날 일정은 ‘다시 일상으로’이다. 지금의 생(生)은 지나온 생의 인과(因果)에서 온 것이며, 다음 생 역시 지금의 인과에서 비롯될 것이다. 어제 죽음을 체험함으로써 참가자들은 지난 생을 기억할 수 있고, 지난 생을 기억할 수 있는 덕택에 새로운 오늘과 내일을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보게 된 참가자들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존재인 ‘나’를 깨닫는다. 각자는 존귀하고, 내가 존귀한 만큼 모두가 존귀함을 깨닫는다. 이제 모두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은 참가자들은 서로에게 3배를 올린다. 그리고 존경과 자비의 마음으로 서로를 안아준다. 2005년 마곡사에서 진행된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 템플스테이’ 장면들이다.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


출가, 그리고 願力…마곡사 인연으로 ‘자비명상’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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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 스님은 스무 살 때 평창 월정사로 출가했다. 스무 살의 청년은 삶에 미련이 없었다. 그 뿌리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었다. 스님은 일찍부터 아버지와 멀었다. 힘겹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아를 가지기 시작한 청년은 삶보다는 죽음 쪽으로 기울었다. 스님은 고향인 전남 고흥에서 제일 먼 곳이라고 생각한 강원도 오대산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삶을 버렸다. 하지만 청년은 삶을 떠나지 못했다. 약을 먹고 쓰러져 있는 청년을 월정사 노(老)스님이 발견해 살렸다. 청년은 바로 그 자리에서 출가했다.



청년은 월정사를 나와 합천 해인사, 부산 범어사를 거쳐 서울 도선사에 바랑을 풀었다. 그리고 현성 스님을 은사로 모셨다. 군복무를 마치고 도선사로 돌아와 계(戒)를 받은 마가 스님은 속리산 복천암을 시작으로 문경 봉암사, 부산 해운정사, 예산 수덕사, 정혜사 등에서 다섯 철을 난다. 하지만 특별한 ‘소식’은 없었다.



선방생활에 지친 스님은 도반들과 함께 인도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출가한 지 10년째였다. 성지순례는 원만하지 못했다. 서로 뜻이 맞지 않은 도반들은 각자 순례의 길을 나서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에 홀로 남은 마가 스님은 일주일 동안 게스트하우스 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스님은 일주일 동안 홀로 있으면서 자신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는 “내 가슴 깊은 곳에서 살고 싶어 발버둥치는 ‘나’를 보았다. 그 순간 환해지더라”고 했다. 스님은 다섯 철 안거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공부를 일주일 동안 인도의 게스트하우스 작은 방에서 경험했다. 작은 ‘소식’이었을까. 가슴이 뛰었다. 출가자로서 처음으로 무언가와 만난 스님은 점검과 지도를 위해 스승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귀국한 스님은 제방의 어른스님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곡성 태안사에서 청화 스님(1924~2003, 이 시대 대표적 수행승)을 만났다. “자네는 출가 전에 어떻게 살았나?”



그 순간 스님은 숨이 탁 막혔다. 큰스님의 물음에는 큰 가르침이 들어있었다. 스님은 큰스님의 질문을 받자마자 출가전의 삶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다시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그 안에는 다시 ‘아버지’가 있었다. 이름과 옷만 바뀌었지 아직도 지난날을 끝내지 못한 것이다.



어느 날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 고맙습니다. 청화 스님 고맙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라고 가슴 속에서 말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일주일을 울었다.



스님이 청화 스님 곁에서 머문 지 한 달 반이 지났을 때였다. 스님은 마음속에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을 걷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청화 스님은 “이제 자네는 됐네. 그 마음으로 세상에 나가서 원 없이 보살행을 하게”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마가 스님은 세상에서 대중과 나눌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못난 놈을 부처님이 받아주시고, 많은 시주은혜들이 있어 이 자리까지 왔다. 그 은혜 다 갚지 못하고 간다면 큰 벌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생에 밥값 다하고 가겠다”고 발원했다.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은 본인의 삶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경험한 아픔과 그 아픔에서 벗어난 경험이 녹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수행은 이론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의 응어리를 푸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사)자비명상 대표 마가 스님





자비명상’의 태동… 중앙대 교양과목으로 채택


2002년 마가 스님은 어머니의 병환 소식을 듣고 어머니를 찾는다. 노모는 불편한 몸으로 머리를 깎고 찾아온 아들을 위해 밥을 짓는다. 밥상을 받은 아들의 눈에서는 끝없이 눈물이 흐른다. 스님은 출가하고 난 후 처음으로 ‘주지’에 대한 생각을 품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곡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소임 대중이 필요했던 마곡사가 구인(求人)공고를 냈다. 2년 동안 소임을 맡아주면 사찰을 주겠다는 조건도 있었다. 스님은 마곡사로 달려갔다.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은 스님이 마곡사 대중이 되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일과가 너무 무료했다. 그래서 법공양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마곡사를 찾은 대중에게 법구경(法句經)의 한 구절씩을 적어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자비명상의 시작은 바로 그 법구경에서 시작됐다고도 할 수 있다. 법구경 한 구절에서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마곡사를 찾았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데리고 오고,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은 ‘무리’가 되었고, ‘자리’가 필요해졌다. 그래서 처음엔 차(茶)자리를 만들어 함께 했고 새벽예불체험, 범종타종체험 등 작은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졌다. 자비명상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스님은 모여드는 사람들을 모아서 템플스테이를 시작했다. 찾아오고 머물다보니 템플스테이가 된 것이다. 스님은 그때부터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살아온 삶으로 대중의 마음을 읽기 시작했다.



‘이혼자를 위한 템플스테이’, ‘실직자를 위한 템플스테이’, ‘60대를 위한 템플스테이’ 등 마가 스님의 템플스테이는 하루하루 진화했다. 바로 그때였다. 2004년 마가 스님의 이름이 산문(山門) 밖으로 알려지게 됐다. 중앙대학교 관계자가 마가 스님의 템플스테이를 보고 교양 선택과목으로 채택한 것이다. 종립대학도 아닌 일반대학에서 3학점짜리 정규과목으로 채택한 것이다. 교과제목은 ‘내 마음 바로 보기’이다. 자비명상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은 자비명상으로 하고 싶었지만 학교 측에서 종교적이라는 의견 때문에 이름을 바꾸었다. 만약 학교 측에서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면 자비명상의 탄생은 좀 더 앞당겨졌을 것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정원 150명의 수강신청이 10분 만에 마감됐다. 지원자가 많아 야간 강좌까지 개설됐다. 정원 150명으로 시작된 강의는 9년 후에 1500명으로 늘어났다. 스님 7명이 투입됐다. 9년 째 강의를 마지막으로 강의는 종료됐다. 그동안 스님의 강의를 들은 학생은 약 2만 명에 달한다.



쉼 없는 프로그램 개발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은 자신에 대한 자비심을 바탕으로 모든 존재에게 자비심을 확장시켜 이타적이고 평온한 마음에 이르게 한다. 또 명상과 상담의 장점을 살려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개발한 명상법이다. 삶과 어우러지며 소중한 나를 찾아가는 마음치유 명상이다. 마음을 열고, 알고, 나누는 명상으로, 화와 불안을 다스리고 건강하게 터트리는 방법과 자기 안에 깊숙이 내재된 긍정심과 자신을 사랑하는 법,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심을 기르는 법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한다.



자비명상은 이 순간 선업공덕(善業功德)을 짓고 있는지, 불선업을 짓고 있는지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 역할과 인과법을 바르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인과를 모르고 살기 때문에 세상이 복잡해진다. 부처님의 인과법을 안다면 좀 더 조심스럽게 살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스님은 “연기법의 핵심은 계를 잘 지키는 것, 그리고 수행은 지금 이 순간 선업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했다.


마가 스님은 언제부턴가 이 시대의 ‘힐링 멘토’로 불리우고 있다. 2013년부터 매일 아침 인연지인들에게 ‘오늘의 명상’을 발송하고 있고, 2015년부터는 ‘53선지식을 찾아 떠나는 선재동자의 명상여행’을 이끌고 있으며, 2016년부터는 문화관광부가 인증한 ‘청소년을 위한 EGG 깨뜨림’, 2018년부터는 ‘나를 바꾸는 100일’ 수행 법회를 현성정사에서 매주 목요일마다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2018년 1월 상처입고 지친 청춘들에게 직접 다가가기 위해 서울 노량진에서 고시와 공무원 시험을 등을 준비하는 청년들의 쉽터 ‘마음충전소’를 열었다.



취업난 등으로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이 시대 청년들의 마음을 치유하기 위한 공간이다. 단 하나뿐인 자신을 소중히 하고 사랑하는 방법, 자신을 아껴주는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 그리고 이를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의 마음을 베푸는 방법을 널리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이다. 그렇게 쉼 없이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마가 스님은 또 하나의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마음카드’다. 49장의 그림 카드로 구성된 ‘마음 카드’는 상담자와 내담자의 중간 역할로서 자신의 내면 통찰에 대한 도움을 주기 위한 도구이다. 더불어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의 조화로운 관계 형성을 위해 지혜를 주는 수단으로 제작되었다. 스님은 그밖에도 다수의 방송프로그램과 저서를 통해 힐링 멘토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 마가 스님의 베스트셀러 저서 『알고보면 괜찮은』
●내 마음을 제3자의 시선으로 보라…참으면 병이 되고, 터트리면 죄가 된다



마가 스님에게 가장 큰 아픔은 가족이었다. 스님의 아버지는 그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이웃집 아주머니와 바람이 나서 도회지에서 살림을 차렸다. 아들 없이 며느리와 살아야 했던 그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 남편에게 버림받아 괴로우면서도 4남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 스님의 형제들은 우울한 집안 분위기를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가 나고 자란 전남 고흥은 동네 초등학교 소풍날이 되면 온 가족이 따라 나섰던 곳이다. 스님은 소풍날, 곱게 한복을 차려입고 도시락을 준비해 놓은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마을 뒷산으로 내달렸다. 주워든 소나무 가지를 들고 쭈그려 앉아 땅바닥을 헤집으며 눈물을 한 바가지씩 쏟았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자라면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에게 전이됐고, 그는 어린 시절에 아무런 이유 없이 종종 친구들을 때렸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시절 도회지에서 교육을 시키고자, 그를 광주광역시에 사는 아버지 집으로 보냈다. 그의 방황은 극으로 치달았다. 가족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미움에, 어머니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는 새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말썽을 부리기 일쑤였다. 그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노란 브리지 머리를 한 누나의 뒤를 쫓아가 다니기 시작한 교회였다. 마가 스님은 목회자의 길을 가기로 결정했고, 아버지가 이에 반대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의 가슴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겠다는 생각 외에는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런 그가 승려가 되어서 과거 자신의 모습과 같이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힐링 멘토가 되었다. 스님은 포교하면서 만난 사람들 중에 자기 내면의 문제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한국인은 체면을 중시하고 인내하고 사는지라, 무언가를 마음속에 켜켜이 쌓아둔다. 썩고 곪은 것이 한계에 다다라서 아플 때가 되어서야 그 마음을 보게 된다. 토해내야 하는데 제대로 토하는 법을 모른다. 그러다보니 엉뚱하게 다른 이에게 불똥이 튀어 ‘묻지마 범죄’가 생긴다. 참으면 병이 되고, 터트리면 죄가 된다. 이런 모든 것을 알고 나면 사라진다. 대체로 막힌 가슴을 뚫기는커녕, 무엇이 가슴을 막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괴롭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후에도 아버지를 증오했다.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는 정체 모를 화 때문에 수행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만 잘라냈지 마음속의 화를 자르지 못한 것이다. 가슴을 옥죄는 정체인 ‘아버지’를 인정하고, 토해낸 다음에야 자비로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스님의 말에 따르면, 지금 내가 있고, 내 마음속에는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마음이 있다. 그 마음은 ‘나를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고 ‘누구는 틀리다, 누구는 맞다’고 한다. 그런 내 마음을 제3자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명상이다. 내 마음을 나와 동일시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한편으로는 재미있다. 나는 여기에 그대로 있는데, 그 마음이라는 녀석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혼자서 난리가 난다. 그런 내 마음을 한참 바라보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명상은 지금 이 순간, 깨어 있는 채로 내가 나를 바라보는 일이다. 예를 들면, 김연아 선수가 경기장에 들어서면 아나운서가 중계를 한다. “김연아 선수, 노란색 옷을 입고요. 첫 번째 점프를 성공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런 식으로 나의 내면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 내가 말을 하네”, “화를 내고 있네”, “걷고 있네”라고 속으로 말하면서 그렇게 자꾸 하다 보면 지금 내가 화를 내는 것인지, 내 마음속의 무언가가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보인다. 더 나아가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마가 스님의 화법은 여느 스님과 많이 다르다. 어려운 불경의 구절을 인용하지도, 선문답(禪問答)을 하지도 않는다. 머리를 깎지 않고 회색 법복을 두르지 않았다면, 그저 인생살이 선배와의 대화쯤으로 여겼을 터다. 그가 젊은이들의 ‘힐링멘토’가 된 것은 격식 없음이 한몫했을 것 같다. 마가 스님의 ‘마음속 응어리 풀기’를 진심으로 느끼려면 잠시 그의 인생을 엿봐야 한다. 스님은 “내가 겪어봤기 때문에 누구보다 사람들 마음속의 응어리를 잘 안다”고 했다.



▲ 마가 스님은 불교계의 최고 인기 힐링강사 중 하나다. 사진은 2013년 11월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한 인도 쿠쉬나가르에서 불교성지순례자들을 명상으로 이끄는 마가 스님.





증오했던 아버지 용서하면서 세상이 자비롭게 보여





마가 스님의 명상은 ‘자비명상’이다. 마음의 상흔(傷痕)을 바로 보고, 이를 풀고, 그리고 타인에게 이를 베푸는 명상이다. 그런데 마가 스님은 승려가 된 뒤 10여 년 가까이 내면의 나를 찾지 못해 방황했다. 전남 곡성 태안사에서 아버지를 마음의 감옥에서 탈출시켜달라고 명상한 어느 날, 저녁 예불을 마치고 석양이 물든 경내에서 스님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스님의 입에서 이 한마디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 말을 내뱉고 나니 그간 스님을 억누르고 있던 앙금이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시야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세상이 한없이 자비롭게 보였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내게는 선지식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 살아있다는 것이 진실로 행복했다. 이는 “큰 스님(청화 스님)이 제게 보내준 따뜻한 자비의 마음 덕분이었다. 산에서 불경만 욀 것이 아니라 죽기 전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다 알려주고 줘버리고 가자는 생각에 세상으로 내려왔다”고 고백한다. 마가 스님의 믿음 중 하나는 내 안에 사랑과 자비가 가득하면 그 사랑이 넘쳐 상대에게 흘려간다는 것이다.



마가 스님이 개발한 자비명상은 템플스테이가 태동하기 전인 지난 2002년 공주 마곡사에서 ‘자비명상 템플스테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했다. 스님이 개발한 자비명상은 청문회, 유서 쓰기, 걷기 명상 등 여러 가지로 행해진다. 청문회는 일종의 역할극인데, 참가자들이 서로 궁금한 것들을 묻고 답하면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요소들과 화해를 한다. 참가자들에게 유서를 쓰게 하는 이유는 죽음이 바로 자기 곁에 있다는 사실, 또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걷기 명상은 맨발로 하는데,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고 ‘지금 이 순간 깨어있자’는 취지에서 만들었다. 스님은 “자비명상 템플스테이를 마치고 팔짱을 끼고 사찰을 내려가는 가족의 모습을 지켜볼 때 가슴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마가 스님의 자비명상이 우리 사회에 급속도로 전파되면서, 중앙대에서 ‘내 마음 바로 보기’ 강의를 요청했다. 지난 2003년 첫해에 150여 명이었던 수강생이 지난 2011년에는 1500명까지 늘어 스님 다섯 명이 수업을 나눠서 진행해야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수업 중에 강조한 것은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대학생은 예비 직장인이다. 오래지 않아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당사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이 청정한 자아(自我)를 찾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임제 스님의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했다.



●명상을 통해 흩어진 마음 다잡아야



그러면 구체적으로 명상은 어떻게 해야 할까. 스님은 명상하는 자세 등에 관해 자세히 알려준다. 먼저 힘을 빼고 목과 어깨, 팔다리를 가볍게 흔들어준다. 온몸의 힘을 빼고 자리에 앉아서 허리를 곧게 세우고 가슴을 편다. 편하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내쉰다. 두 번째 숨을 쉴 때에는 눈을 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느껴본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애들이 떠들면 칠판을 두드리면서 ‘주목~’이라고 말하지 않나. 그렇게 내 마음에 ‘주목~’을 외쳐보라. 숨을 마시고 내쉴 때마다 외국에 가고, 100년 후의 미래로 향하던 마음을 붙잡아보라. 돌아다니는 그 다심(多心)을 일심(一心)으로 만드는 것이 명상의 요체다. 그렇게 명상을 하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라. 아나운서가 경기를 중계하듯이, 이 순간 내가 깨어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곧 자기를 보는 것이고, 생각의 노예에서 나를 벗어나게 한다. 명상을 통해 내재돼 있는 DNA가 드러난다. 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내 안의 응어리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된다. 밥을 먹는 순간 밥을 먹음에 깨어 있고, 공부하는 순간 공부하는 것에 깨어 있으면 삶이 달라진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참된 나임을 느낄 수 있다. 명상을 통해 내 마음을 객관적으로 봤다면, 이제는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정말 내 인생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도 마가 스님은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고 싶어 한다. 불행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불교에서는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을 중시한다. 지금 이 순간의 행동, 말, 생각이 과연 행복을 추구하는 목표와 맞닿아 있는가를 살펴보라. 행복한 결과를 원한다면, 그 결과만 추구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의 근간이 되는 행동과 말, 생각을 바꾸고 이를 따를 때 결과가 바뀐다”고 말했다.



부처님 말씀에 과거에 뿌린 씨앗은 현재의 나이고, 오늘 내가 뿌린 씨앗은 미래의 열매가 된다고 했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가 바뀐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막연히 미래에 행복하고 싶다는 것은 안 된다. 그래서 스님은 “불교는 삼업을 닦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저도 그것을 끝낸 뒤에야 비로소 편해졌다”고 했다.



●종교 때문에 힘들다면 그 종교를 내려놓아야



마가 스님의 법명은 다소 생소하다. 한 번 들으면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그가 미얀마 선원에서 받은 산스크리트어 법명 마가(Magga)는 ‘걸림 없이 길을 가는 자’라는 뜻이다. 거침없는 그의 성격과 꼭 닮았다. 스님은 “이름을 말하면 기독교 신자들이 ‘마가복음’이 연상된다며 좋아한다”고 했다. 불가와 인연을 맺기 전에는 기독교 목회자를 꿈꾸었다고 하니, 그는 종교인으로 살 운명이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교회를 다녔다.



스님은 요즘도 교회에서 배웠던 노래를 법회에 응용하고 있다. 교회에 음악이 없었다면 한국 사회에서 이 정도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불교도 하루 빨리 기독교의 음악을 벤치마킹해서 활용해야 한다고 본다. 노래를 같이 부르고, 손뼉을 치는 과정에서 속에 맺힌 응어리가 많이 풀어진다는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는 공생(共生)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데 그는 종교 때문에 갈등하거나, 힘든 이들이 있다면 어떤 말을 해줄까. 스님은 “어떤 사람이 여행 중 힘든 상황에서 큰 강을 만났다. 그 강을 혼자 건너려고 하는데 마침 뗏목이 보인다. 그 뗏목에 의지해 무사히 강을 건넜다. 지혜로운 사람은 뗏목을 강가에 내려놓고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에 갈 길을 간다. 그러나 우매한 사람은 뗏목이 정말 고마웠기 때문에 지고 간다. 어깨에 지고 가면서 ‘감사합니다’를 연발하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은 잊게 된다. 종교는 뗏목과 같은 역할을 한다. 종교를 가져서 힘들다면 종교를 갖기 이전으로 돌아가면 된다. 종교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내면에는 불성(佛性)이 있다고 믿는다. 종교에 너무 심취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마가 스님의 말에 따르면 종교에 심취한 광신도들을 보면 그중 90%는 자기 안의 갈등, 집안에 불만스러운 경우가 많다. 본인의 불만족스러운 상태를 종교를 통해서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현재의 불만스런 자신의 처지에서 탈출하고자 종교에 몰입하고, 그걸 통해서 힐링을 하려고 한다. 그래선 안된다. 이런 걸 보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꼭 맞는 말이다. 그릇된 인간 행동의 원인을 찾아가면 거기엔 온전치 못한 가정이 있다. 부자로 살고 싶으면 먼저 아버지와의 관계를 풀어야 한다. 그래서 스님은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원만히 하고 싶으면 어머니와의 관계를 풀고,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배우자와의 관계를 먼저 풀어라. 상처를 마음속에 단단히 가두면 응어리를 풀 수가 없다. 제가 광신도 얘기를 언급했으니 본인이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은 화가 치밀 것이다. 제게 따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꼭 말하고 싶다. 그렇게 말하는 제게 옳다 그르다 하지 말고, 화가 나는 본질이 무엇인지 쳐다보라”고 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 진리다



마가 스님은 가족 간의 관계, 특히 아버지와의 오랜 불화로 극단적 선택까지 했다. 하지만 그걸 승화해서 이제 불제자로서 중생 구제에 힘쓰면서 상처 난 많은 사람들의 힐링멘토가 됐다. 그는 결국 가족 간의 화목. 즉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야말로 진리라고 역설한다.



스님은 이런 비유도 했다. 개 중에도 간이 작은 치와와는 바람만 불어도 짖는다. 그러나 불도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정 불안하면 물어버리면 되니까. 내면의 힘은 그런 것이다. 껍질이 두꺼운 나무일수록 속살이 부드럽다. 적의 침투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껍질로 에워싼 것이다. 어떤 일에서 떠드는 사람은 실제로 약하기 때문에 강한 척하는 것이다. 혹시 주변에서 권위주의에 뒤덮여서, 무작정 자기 목소리 내기에 열을 내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렇게 생각하라. ‘저 사람 안에 부드러운 내면이 있을 것이다’라고. 그러면 그 사람과 소통이 될 것이다. 항상 현재 내 주변의 관계를 먼저 편하게 풀도록 하라. 증오로 30여 년을 살았던 스님이 홀가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의 관계를 풀면서 부터였다고 한다.



그러면 가족 간에 화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가 스님은 아버지와 화해하는 과정에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부모의 은혜가 크고 깊음을 설명하는 불교경전)의 구절을 가슴 깊이 담았다. ‘어떤 사람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메고 히말라야를 백 번, 천 번 돌아 살갗이 터지고 뼈가 부서진다 할지라도 부모의 은혜에는 미칠 수 없다’는 구절이다. 결국 아버지와의 화해를 통해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닌 스님 자신이었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집중하지 말라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 가까운, 내 가족과의 관계를 제대로 바로 세우는 것이다. 『숫타니파타』(불교의 경전집)는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아끼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내라’고 했다. 마가 스님은 “제 어머니는 ‘스님’이라고 저를 부르면서도 마치 초등학생 아기를 보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세상에 자비를 베풀면 된다. 결국 어머니는 부처님”라고 말했다.



그러면 마가 스님은 정말 화가 안 나고 행복할까. 그는 “한없이 행복하다.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매일 매일이 보너스”라고 강조했다.



▲ 자비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매일 매일이 보너스라고 말하는 마가 스님





신학대학에서 공부한 마가 스님 마가 스님은 기독교계 신학대학인 한신대학교에서 기독교를 공부했다. 길희성(吉熙星) 서강대 명예교수와 얘기를 하다가 무릎을 탁 치고 결정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길 교수는 평생 대학 강단에서 불교를 가르쳤다.



어느 날 문득 길희성 교수가 “목사들은 불교 공부를 많이 하는데 왜 스님들은 기독교 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서양 2000년의 문화는 기독교 문화가 아닌가. ‘왜 스님들이 동양에만 심취해 있어야 하나’ 싶어서 신학교 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에게 쉽사리 문을 열어주는 신학대는 없었다. 세례 교인에 한해 신학과에 입학할 수 있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서다. 결국 스님은 문턱이 없는 한신대 종교문화과에서 공부했다. 마가 스님은 “신학 공부하기를 참 잘한 것 같다. 내 말년을 아름답게 만드는 초석을 다졌다”고 말했다.



스님은 오래전부터 친교를 맺어온 최일도 목사, 김영택 신부 등 이웃 종교 성직자들과 만나 함께 교도소와 고아원 등 불우시설을 방문하는 일도 이어오고 있다. 몇 년 전에는 이들과 함께 KTV에 출연해 ‘멘토링 토크쇼 시대공감 Q’를 진행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서로 틀리다고 하면 싸움밖에 일어날 것이 없고, 다른 점을 인정하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스님의 생각이다.



힐링 멘토도 아프다



‘국민 힐링멘토’로 불리는 마가 스님이지만 스님 역시 천상천하의 ‘유아독존(唯我獨尊)’이다. 스님도 아플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부처님 전에 무릎 꿇고 앉는다. 그리고 “부처님, 이럴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하고 묻는다고 한다. 스님은 “그렇게 묻는 것이 저의 위로이다. 출가자로서의 힐링은 그것뿐이다. 부처님께 묻는 것”이라고 했다.



결국 마가 스님의 힐링멘토는 부처님이다. 결국 부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제가 하는 모든 노력들은 이미 부처님이 주신 것들이다. 종교가 양적인 팽창만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기 수행이 철저해야 다른 사람을 제도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쉬운 진리”라고 말했다.



스님은 자기 수행을 ‘너무나 쉬운 진리’라고 강조했다. 일주일 동안 눈물을 쏟아내고 난 후 가슴 속의 모든 것을 비워낸 힘겨운 시간이 있었기에 마가 스님은 대중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점점 마음을 쓸 수 없는 세상이다. 함께 사는 길이 내가 사는 길이다.



마가 스님이 전하는 화를 풀어주는 1분 명상법



1. 명상에 들어가기 전 2~3분 동안 선 자세로 힘을 빼고 목과 어깨, 팔다리를 가볍게 흔들어준다.

2. 온몸의 힘을 빼고 자리에 앉는다. 허리를 곧게 펴고 가부좌나 반가부좌로 바닥에 앉거나, 등받이에서 등을 살짝 떼고 곧은 자세로 의자에 앉는다. 눈을 지그시 감는다.

3.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느낀다. 숨이 쉬어지는 대로 가만 두고서 그저 느끼기만 한다.

4. 마음이 방황하더라도 자기를 비난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숨으로 마음을 부드럽게 돌린다.

5. 가슴 한가운데에 마음을 둔다. 마침내 마음이 조용한 연못처럼 고요해질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초조해하지 말고 숨에 조용히 마음을 모은다.

6. 1분이 지나면 눈을 뜨고서 눈에 들어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틈틈이 혹은 삶의 문턱을 만났을 때 이렇게 1분을 보낸다. 이 1분이 흔들리는 삶을 잡아주는 닻이 되어줄 것이다.



마가 스님은

1961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광주 금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9년 중앙승가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2014년 한신대학교 종교문화학과 석사를 마쳤고, 중앙승가대학교 실천승가학 박사과정도 마쳤다. 1981년 월정사에서 출가했으며, 1982년 현성 스님을 은사로 도선사에서 정진했다. 법주사 복천암 등에서 5안거를 성만했다.

2002~2005년 마곡사 포교국장 재임 시 ‘자비명상 템플스테이’를 개발·운영했으며, 이를 현대자동차, 삼성, 우미건설, 신한은행 등에서도 진행했다. 2003년부터 2011년까지 중앙대 겸임교수를 역임했고, 2013~2015 동국대 정각원 교법사를 지냈다. BBS불교라디오 ‘마가 스님과 함께하는 자비명상’을 비롯한 다수의 방송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알고 보면 괜찮은』, 『내 마음 바로보기』, 『내 안에서 찾는 붓다』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