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31

Hojae Lee - 평신도는 눈치보지 말고 자기 가슴에 '말씀의 불'을 붙이자 (1) 1. 대부분의 인간은 일상이...



(1) Hojae Lee - 평신도는 눈치보지 말고 자기 가슴에 '말씀의 불'을 붙이자 (1) 1. 대부분의 인간은 일상이...






Hojae Lee
23 July at 06:08 ·



평신도는 눈치보지 말고 자기 가슴에 '말씀의 불'을 붙이자 (1)

1. 대부분의 인간은 일상이 습관이고 관습이 되어 관례에 따라 윤회의 틀에 박혀 살아간다. 이를 타파시키는 것이 신앙이요, 말씀이 담긴 경전이다. 경전 속에 있는 글자는 나의 가슴을 박동치게 하는 살아있는 불이다. 살아있는 말씀의 불이 성도들의 잠자는 가슴에 불이 활활 타올라야 한다. 불을 붙여주어야 할 직업종교인은 오히려 '교리의 말', '탐욕의 말', '기복숭배의 말'로 둔갑시켜 붙으려는 불마저 꺼 주체적 신앙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안타까운 현실이 목격된다. 그래도 자기는 바른 신앙을 가진 줄 안다. 딱한 일이다.

2. 각 개인은 살면서 한 평생 자신의 마음을 고동치게 하는 말이 있어야 한다. 만일 너에게 그 말이 있냐는 실존적 질문에도 '배운 데로 답한다' 그것이 교리의 신앙고백이고, 교학체계이다. 예수가 지금 우리 면전에서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입니다'라고 할 것인가! 그건 베드로의 신앙고백이지 나의 실존적 신앙고백이 아니다. 절대존재와의 만남을 통한 실존적 고백은 한평생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자신의 편지내용에 있다. 그 편지내용이 '자기 십자가'이며, '화두(話頭)'이자 '노자가 말하는 '언유종(言有宗: 우두머리 말)'이다.그 편지내용은 개개인마다 다 다르다.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편지내용을 가슴에 담고 경전을 읽으며 하나님을 역사적 지평에서 우리가 만나야 할, 아니 주체적 나가 만나야 할 하나님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편지는 펼쳐보지도 아니하고 늘 남의 편지보며 그 길을 뒤따라 가다가 죽는다. 자기의 편지내용마저도 남에게 물어본다. 내 편지속에 무슨 내용이 있어요? 웃기는 일 아닌가. 즉 신앙마저도 주체적으로 하지 못하고 건물성전에 가서 대리인 신앙을 하는, 무기력하게 남의 편지대로 살아가는 신앙의 실상이 한국 종교의 현상이다. 마치 자기의 밥은 놔두고 남이 씹어놓은 밥을 맛있게 먹는 형국이라 할까? 영양분은 벌써 남들이 다 먹고 밥의 형체만 남았는데도 말이다. 영양가 없는 '신앙'의 결정체가 한국 교회와 사찰에 누룩처럼 번져있는 것이 아닌가? 자문해 보라!

3. 자기의 가슴과 하나님의 맥박이 조율되고, 자기의 손발이 예수그리스도의 지시대로 신율되어, 성령의 춤을 추는 것이 크리스챤이다. 이는 크리스챤만이 아니고 종교적 신앙을 갖는 모든 종교인은 신앙대상 혹은 인간의 완성을 향해 끝없이 고동치는 가슴을 안고 역사광야의 지평을 내달려야 한다. 말씀의 불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그 얼굴이 빛난다. 빛난 얼굴은 하늘의 태양처럼 연소하며 세상을 밝힌다.
* 이 글을 보고 바로 거울보며 내 얼굴이 빛나나 볼 마음이 들면 아직 말씀의 불이 안 붙은 거다.
* 모세도 빛난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지 않았는가? 예수도 빛으로 빛난 발광체였지만, 아무도 모르게 부활하지 않았는가! 오직 아무도 모르게 씨알과 더불어 살 뿐이다. 어느 직업종교인처럼 과대광고하면 안된다.

4. 그런데 작금의 실상은 어떠한가? 어느 경전을 보아도 '무소유하라'고 가르치지, 탐진치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특히 종교적 신앙인은 무소유하며 세상의 부정과 부패를 방지하며 사회적 약자에게 빛나는 조명탄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사찰에 가면 금불상앞에서 간절히 절하는 불자들이 득실대고, 교회에 가면 크리스챤이 거룩한(?) 표정으로 하나님께 기복신앙을 한다. 생각해 보라! 사찰에서 금신불에 절하는 그 대상이 앉아야 할 자리는 바로 절하는 자기 자신이다. 불교의 요체는 '모든 사람이 깨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깨달아서 자기가 부처가 된다는 위대한 사상을 팽개치고 중들은 만날 자기는 각자의 자리에 불자는 중생의 자리에 두고 한 평생 설법이나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2천년의 불교전통에서 한국이 제기한 세계적인 불교담론이 있기나 하였는가? 이것이 바로 식민불교의 현주소이다.

6. 이는 기독교계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 예수의 생애와 초기 제자의 사역과 바울서신에 나타난 일관된 사상은 죽은 인간을 살리는 부활 역사와 세상에 살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율법의 완성으로 압축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경전에 그렇게 말하는데도 자기 십자가(편지)는 지지않고 '예수는 주'요라면서 뒤를 쫄래쫄래 따른다. 마치 신랑/신부을 맞이하는데 '등불도 준비하지 않은 어리석은 신부/신랑여자처럼'!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져야지 누가 대신져 주지 않는다. 자기 십자가는 지지 않고, 하나님이 너희가 무얼 구하는 지 이미 알고, 머리털 갯수까지 안다는데 무슨 기복신앙, 믿음만능신앙, 은총신앙, 자기도 모르는 중얼중얼 방언을 성령받은 표지로 여기는 무당신앙. 그리고 건물교회에 가서 헌금액수대로 주어지는 집사,권사, 장로 등등등 세속적인 위계 자리에 도취되어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실상이 아닌가? 타락한 인간의 한계를 타파하기 위해 막힌 죽음의 담벼락을 예수가 부활의 통로를 열어놓았으니, 이제 너희는 그 길을 따라 오라고 하지 않는가. 걷는 것 마저 그저 '믿음과 은총과 은혜로' '아멘 할렐루야' 하면 다 끝나는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 8:24)
예수가 말했다. '너희가 내 말대로 살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어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 8:31-32)

부처가 말했다.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 : 스스로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법의 등불을 밝히며 살라"

건물성전과 교리와 교학체계속에 진리는 없다. 오직 하늘로 부터 받은 자신의 편지를 읽고, 그 편지내용을 삶과 역사에서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

크리스챤이여! 은총으로 받은 예수 믿는 하늘의 복을 받았으면, 그 설레이는 은혜받은 복으로 주체적 신앙을 하시라.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지 하나님께 물어보고, 바로 '그 자기 십자가'를 지시라! 남의 십자가 지지 마시라.

불자여! 자신의 마음의 불을 밝혀 세상을 빛나게 하라! 그래서 지구역사의 큰 각자로 태어나시라.

자기 가슴을 고동치게 하는 '말씀'이 없는 신앙인은 죽은 목숨을 사는 것이다.




148박걸, 이찬수 and 14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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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I Illhwa 좋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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