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3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나무위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나무위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최근 수정 시각: 2018-08-30



분류

로마제국 황제

고대 로마/인물

121년 출생

180년 사망







로마의 역대 황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15대 안토니누스 피우스







16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7대 콤모두스





16대 루키우스 베루스









5현제 목록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Marcus Aurelius Antoninus)





한자명



안돈(安敦)[1]





출생지



로마 제국 라누비오





생몰 년도



121년 4월 26일 ~ 180년 3월 17일





재위 기간



161년 3월 7일 ~ 180년 3월 17일











신격화된 피우스가 죽은 뒤 원로원에 의해 국정을 떠맡게 된 마르쿠스는 동생에게 루키우스 아우엘리우스 베루스 콤모두스라는 이름을 주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수여하여 제국의 공동 통치자로 했다. 그들은 동등한 위치에서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제국을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통치하면서 로마 제국은 처음으로 두 명의 황제를 갖게 되었다.



ㅡ 로마황제열전 ㅡ









내가 안토니우스 가의 한 사람인 한에서는 내 도시와 내 나라는 로마이지만, 내가 인간인 한에서는 내 조국은 세계이다.







1. 개요

2. 재위기간

2.1. 고난의 연속

2.1.1. 시오노 나나미의 비판과 반박

2.2. 후계자 문제

2.3. 열렬한 그리스 문학자이면서 철저한 생활인이라는 이중적 면모

3. 기마상을 남긴 황제

4. 미디어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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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흔히 철인 황제(哲人皇帝)로 많이 불리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다섯 번째 황제이자 로마 제국 제16대 황제. 스토아학파의 대표적 철학자.[2]



철인 황제이자 선정(善政)을 베푼 현제(賢帝)로서 동시대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세 사가들에게까지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와 더불어 훌륭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는 명군.



2. 재위기간[편집]



2.1. 고난의 연속[편집]













어린 시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3]







재위기 동안 힘든 삶을 보내야 했는데, 일단 철학을 논하고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재위기간 내내 이민족과의 전쟁에 시달렸고 황제가 된 이후 계속해서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게다가 당시 로마 제국에는 유행병이 퍼져서 제국은 혼돈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가장 치열한 전장이었던 도나우 강 방어선에서 그 유행병으로 병사하며 삶을 마감했다. 황제의 무거운 책임을 조금이라도 나눠볼까 하여 친구이자 하드리아누스의 첫번째 후계자 케이오니우스의 아들인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황제로 삼았지만 루키우스는 향락에만 젖어 있다가 일찍 죽어버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본인은 득본 건 하나도 없고 의동생 덕에 골머리만 더 앓았지만, 이런 선례가 있어 후기 로마 제국은 황제를 여럿 두어서 산적한 난제에 유기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현제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추위에 덜덜 떨며 쿨럭거리면서도 최전선에 항상 나갔으며, 틈틈이 로마로 돌아와서 국정을 돌보고, 전장에서도 사무처리를 하는 등 성실하면서도 근면한 태도를 유지하였고, 학문에 파묻힌 서생이었고 건강 때문에 전술지휘능력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의외로 전략적 식견으로는 군사 분야에서조차 유능했다. 그래서 그가 죽기 직전의 로마군은 도나우 강을 건너서 보헤미아 지역을 평정하고 있을 정도였다.



여기에 더해서 전임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절에 태평성대가 지속됨에 따라 약해진 로마군의 체질을 다시 개선하였다. 워낙 위기가 많아서 그런지 최전선으로 많이 달려나갔기 때문에 이루어진 듯 하나, 이런 개혁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죽고 무능하고 해악한 콤모두스가 즉위해서 나라를 개판 5분 전으로 만들어도 국경선은 튼튼했고 외적의 침입도 거의 없었으며, 국경선을 지키는 장군들은 다 제자리를 지켰다.[4] 대규모 내란이 일어난 것은 콤모두스가 측근에게 암살당한 뒤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아들 그 자체를 빼놓고는 나름대로 자신의 사후를 대비한 황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어떤 황제도 시도하지 않았던 노예해방을 지시한 황제이기도 했다. 다음 노예해방은 서로마 말기의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장군이 병력을 증강하기 위해 시행한 고육지책이었다.



파르티아 전쟁에서 돌아온 군사들은 파르티아의 전리품과 함께 전염병을 가져왔는데 이 전염병은 유행처럼 번져 167년에는 주요 거주지인 로마가 특히 전염병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종류의 전염병은 몇 세기 만에 처음 발발한 것이였고, 콤모두스의 치세 중에도 빈번히 발생했으며, 10년 후까지도 창궐했다. 그를 죽인 이 유행병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즉 이 항목의 주인공)가 그 병으로 죽었다고 해서 안토니누스의 역병이라고 불렸는데, 이 병의 정체는 천연두 혹은 홍역으로 추정되며, 총 사망자 수는 400만 명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부터 로마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국방력이 약화된 주요 이유 중 하나로 이 '안토니누스의 역병'을 꼽는 사람들도 있다.



2.1.1. 시오노 나나미의 비판과 반박[편집]





시오노 나나미가 카이사르형 리더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나치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박한 평가를 한 면이 여기서 불거지는데, 당연히 이 부분은 문제가 있다. 단순히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 당시 병사들을 다루던 태도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그것이 다르다고 문제 있다고 하는 게 아니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카이사르는 쉽게 다루었던 게르만 전역에서 카이사르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 걸, 그의 시대에는 카이사르만한 명장이 없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역량이 그 정도도 아니라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볼 수 있는 의견을 내는데 있다. 군사적 역량만보면 좀 떨어질 수도 있지, 물론 어디까지나 군사적 역량만보면 메시보다 못한다고 축구선수 다 까려나보다.



당시에는 게르만족 사회의 전투력과 동원력 그리고 전략적 안목이 성장해 있었다. 일례로 카이사르만 못지 않을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던 콘스탄티누스조차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래로 대 게르만족 격퇴에 여러 황제의 손을 거치며 백수십 년 동안이나 개편을 거친 로마군 갖고도, 확고한 우위로 통제할 수 있었을 망정 영구히 복속시키진 못했다.



로마 문화와 자신의 정략에 대한 절대적인 우월감을 바탕으로 일을 진행하던 카이사르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괴로워하며 책무를 수행한 마르쿠스를 서로 비교하기 위한 측면이 있다고 해도, 이런 부분은 카이사르 시대의 게르만족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기의 게르만족 자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르쿠스 당시와 트라야누스 당시에는 차이가 또 있기에 트라야누스와 비교해보는 시각도 대단히 문제가 크며, 카이사르의 전쟁 수행 이야기는 전대 황제들의 게르만 정책들을 논하는 연장선상에서 하는 얘기라면 앞서의 이유로 더욱 무리한 서술이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게르만족들에 대해 빌빌댄 것을 그의 군사적 경험 부족으로만 보는 것은, 게르만족 사회의 변화와 로마 체제의 변화에 대해 거의 무지한, 시오노 나나미의 사심만이 반영된 부당한 평가라고밖에는 볼 수가 없다.



물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시대에 등장한 지휘관 중에서도 벨리사리우스와 같이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수의 병력으로 이미 전술적, 무장수준으로 비등할 다수의 적을 격파한 뒤 정복을 이루어낸 장군이 등장하기 때문에, 단순히 게르만족의 기량 상승 때문에 어떤 이가 와도 정복의 지지부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당대에 로마가 보인 물량과 자원, 시간 투입을 본다면 전선의 교착상태는 황제가 일개 소대도 지휘해본 적 없는 상태로 대규모 전선을 맡아 군대를 지휘한 반면, 적 게르만족의 사령관은 군사 경험이 풍부하였기에 일어난 일이라 볼 수 있다. 일례로 시간이 지나면서 황제의 지휘 기량이 능숙해지면서 승전을 거듭해 갔으며, 전쟁말년엔 죽음으로 인해 이루지 못했을 뿐 정복을 거의 확실시 할 수 있는 상태로 바꾸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당대 게르만족 사회 및 그 군대의 동원 능력, 무장도, 편제, 예비대 운용 등을 비롯한 군사적 운용 능력의 향상 등을 마냥 도외시하고, 황제의 기량에만 모든 원인을 귀속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예로 든 벨리사리우스의 경우에도, 벨리사리우스 시대의 로마군은 다름아닌 훈족 및 사산조 페르시아군을 대상으로 철저하게 벤치마킹했던데다, 당대 로마 제국의 군사학은 여전해서, 적에게 맞는 여러 맞춤형 전술이 가능해졌기에 그런 전과도 낼 수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카이사르나 트라야누스와 같은 사령관이 부임했더라면 반드시 제패가 가능했을 거란 가정은 그들이라도 결코 불가능했을 거란 가정 못지 않게 IF의 영역에 불과하다.



물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부족한 군사 경험과, 이를 초래한 안토니누스의 황제 수업에 의구심을 보이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시오노 나나미가 창안한 개인의 주관적 견해가 아닌 그의 일생을 다룬 서구의 다양한 서적과 문헌에서 많은 저자들이 비슷한 입장을 보이는 건 사실이다. 단, 그들은 시오노 나나미처럼 이런 부분에서 구태여 "카이사르"를 들먹이진 않는다. 즉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을 쉽게 박살냈는데 마르쿠스는 못했으니 무능하단 소리는 안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했을 뿐이지 게르마니아를 정복한게 아니다. 카이사르가 정복한건 수에비족 일부와 우비족 일부 뿐이다. 게다가 전투를 벌여 승리한 수에비족 조차도 그들을 정복 한게 아니라 전투 몇번 승리하고 그들의 분파들 중 하나를 흡수했을 뿐이었으며 우비족은 카이사르와 전투를 벌여 정복을 당한게 아니라 처음부터 우호적이던 부족 이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과 전면전을 하지도 않았다. 스스로 갈리아 전쟁기에서도 밝혔듯이 전쟁을 회전으로 일거에 끝맺기 어려운 숲속에서 사는데다 순순히 로마화될 가망도 없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는커녕 갈리아조차 정복하는데 실패할 뻔하지 않았던가? 카이사르는 갈리아에서 철수하려던 것을 베르킨게토릭스의 전략적 실책 덕분에 갈리아 정복을 완수할 수 있었다. 보다시피 원래 정복이란 것이 실력이나 국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정복하기 어려운 지형은 굳이 정복할 필요가 없고, 해봤자 딱히 도움이 되지 않는 과제에 불과하다.



문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는 방위전략상 그런 무리한 전면전을 할 강력한 필요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카이사르도 단념한 게르만족을 상대로 현지에서 그만큼 했으면 상당히 선방한 거라고 봐야 한다. 당장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무리하게 게르마니아 정벌을 추진하여 군단을 날려먹은 것과 비교하면 오히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장할 지경이다.



2.2. 후계자 문제[편집]





자질 있는 자를 양자로 삼아 자리를 물려준 선대 오현제들과는 달리 아우렐리우스는 무능력하고 불초한 친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는 점이 자주 비판받는다. 그리하여 아우렐리우스 시대를 끝으로 오현제 시대가 막을 내리고 그의 아들인 콤모두스 시대부터 로마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른 황제들은 친아들이 없었기에 양자에게 물려준 것이지 일부러 다른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었고, 이런 이유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다 잘했는데 그것만 못했다'는 식으로 씹은 세베루스 황제도 결국 제위는 친아들에게 물려줬다. 제위를 물려받지 못한 친아들의 존재가 로마의 정치 구조를 어디까지 파탄으로 몰고갈 수 있는 지는 다름아닌 디오클레티아누스 은퇴 후의 일이 증명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런 이유로 비난 받는 건 콤모두스가 대단히 책임감이 박약하고 무능했던 황제여서이고, 이러한 문제는 세습을 통해 정국을 안정시킨다는 제정(帝政), 그리고 전제군주제라는 시스템 그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이런 걸로 그를 비판하는 학자는 적어도 오늘날에는 없다.

다만, 자식의 부족함을 꿰뚫어보지 못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는 비판도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아우렐리우스가 알면서도 아버지로서의 정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는 변호도 있다.



하지만 콤모두스에 대한 평가의 실수라는 비판도 따지고 보면 결과론적인 관점이다. 콤모두스가 황제 자리에 오를 당시 그는 십대 소년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을 당시 불과 만 19세에 불과했다. 당시만 해도 큰 말썽은 피우지 않고 단지 놀기 좋아하는 청년에 불과했던 콤모두스가 아버지가 죽고 나서 그렇게까지 막장을 달릴거라고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콤모두스가 본격적으로 일탈하기 시작한 때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단독황제가 된지 2년 후인 182년에 암살 위협을 겪고나서부터다.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극소수의 인물(알렉산더 대왕 등)을 제외하면 어떤 인물의 19세까지의 시절만 보고 이 인물이 위대해질지, 형편없어지는 걸 감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어린 시절에는 막장이었다가 뒤늦게 정신 차려서 재능을 꽃피운 인물도 역사속에서 흔해 빠질 정도이다. 따라서 콤모두스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고 아버지를 탓하는건 지나치게 가혹한 기준이다. 게다가 걸핏하면 전선에서 골골대던 아버지와 달리, 콤모두스는 체격이 건장하고 건강했으며 무술 또한 뛰어났기 때문에 어쩌면 아버지보다 더 군무에 적합한 인물로 보였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재능으로 검투사 짓이나 했다는 거지만, 그것까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파악하리라고 기대하는 건 지나치다.



게다가 백번 양보해서 '자식의 부족함을 꿰뚫어봤다'고 쳐도, 이미 친자식이 있다는 점에서 아우렐리우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멀쩡한 자식을 놔두고 다른 사람에게 제위를 양보한다? 그날부터 그 자식은 다른 야심가들의 유용한 쿠데타 도구와 명분이 될 것이다. 거기다 설령 다른 유능한 인재를 고른다고 해도 정통성에서 훨씬 앞서는 친자식이 있는 마당에 과연 제대로 황제 노릇을 할 수 있을까? 군주제 국가에서 친자식이 있는데, 그를 제치고 다른 사람을 제위에 앉히려면, 그리고 그것을 만인에게 인정받으려면 딱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에게 그랬듯이 그 자식이 장성할 때까지 징검다리 역할로 선포해버리는 것, 둘째는 영조처럼 그 자식을 죽여 없애는 것이다. 아우렐리우스는 당시 그런 선택을 할 상황도 아니었고, 콤모두스가 그 정도로 결함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기 떄문에 그런 극약처방을 택할 이유 자체가 없었다.



즉 당시 정세를 봤을 때 정국안정을 위한 친자세습은 불가피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영화 글래디에이터처럼 유능하고 충성심강한 장군에게 승계하는 형태는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정복전쟁은 해야 하는데 명목상 최고 사령관인 황제가 전장에 직접 못나가면 결국 전술지휘를 대행하는 장군들의 영향력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신망있는 장군일 수록 당시 유권자 즉 로마시민이기도 했던 휘하 군단병들의 지지도 모이고, 당시 로마군에 이런 장군들이 한 둘이 아니었만큼 장군들 중 누구 하나가 후계자로 지목된다고 해서 나머지 장군들과 군단병들이 그대로 승복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는 것은 로마제국의 내전사, 특히 삼황제시대만 봐도 증명이 된다. 콤모두스가 아무리 무능했다 해도 그 훌륭하고 존경받아 마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아들이 제위에 오른 것 만으로도 장군들의 준동을 억제할 수있었던 걸 보면 콤모두스 자체는 무능하고 나쁜 인물이었다 해도 그에게 제위를 세습시킨 자체는 제국의 평화를 어느정도 연장하는 효과는 있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2.3. 열렬한 그리스 문학자이면서 철저한 생활인이라는 이중적 면모[편집]





상술했다시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어려서부터 그리스, 특히 학문 분야에 빠져있었다. 그는 유모의 보살핌을 받는 나이가 지나자마자 뛰어난 교사들에게 보내져 그리스 철학을 터득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의 저작이자 훌륭한 철학서라고 인정받는 《명상록》은 사실 전쟁터에서 그리스어로 쓴 것으로 그의 개인 '덕질'의 정점이다.[5] 현대에 와서 이 명상록은 자기 개발서적인 명언집으로 잘 팔려나간다.



그리스에 가서, 이왕이면 아테네나 로도스 섬에서 서늘한 지중해 여름밤바람을 쐬며 동무들과 철학적 담론을 나누거나 그리스 비극을 감상하기만 바라는 사람이, 현실에선 맨날 비가 주룩주룩 오는 게르마니아 야만족 깡촌의 최전선에서 전쟁하느라 추위와 감기에 시달리며 칼 맞아 죽어 진창 위에서 썩어가는 야만족 시체 냄새나 맡고 살아야 했으니 짜증이 안 날 턱이 없다.[6]



차라리 역시 열렬한 그리스 추종자였던 네로처럼 시원하게 한판 했으면 또 모르겠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일단 그런 건 모조리 뒤로 제쳐두고 황제로서 해야 하는 일부터 모두 철저하게 했다. 국가 재정이 부족하면 황실 창고를 열어서 재정을 보강했고 몸이 건강한 편이 아니었음에도 필요하다면 게르마니아까지 가서 전쟁을 진두지휘했으며 심지어 전장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죽었다. 특히나 그 바쁜 와중에도 최고 재판장으로서 제국 시민들의 민사/형사 최종 재판도 심리하여 이런저런 현명한 판결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 시오노 나나미도 몇몇 판결을 인용하며 과연 상식적이라고 평했을 정도.



더군다나 스토아 철학에서는 '공동체의 선'(스토아 철학은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므로 공공에 대한 개인의 헌신을 강조하지는 않았다.)을 중시하였으며 이는 로마의 지도층을 이끌어가며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지탱해온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7] 《명상록》의 주된 내용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에서오는 짜증,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극복과 같은 개인적인 내용도 있지만 공공에 대한 헌신 또한 굉장히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이상적인 황제로 여겨지고 후세에도 유명하며 당대에도 많은 황제들이 그의 정치를 이어 받겠다고 한것도 그가 로마 제국을 지탱해온 '스토아 철학'의 완벽한 구현자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신은 철학적인 두뇌에 허약한 육체를 타고났음에도 자신에게 맡겨진 황제라는 직책에 맞게 공공을 위해 허약한 몸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 수많은 전투를 지휘했으니까.



이런건 누군가가 말하는 "단순한 이미지 관리"가 아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당대에도 덕(德)으로 유명했고, 심지어 그에게 반란을 선포한 자도 그가 덕이 있는 황제라는 것은 부인하지 못했으며, 고작 내세운 명분이 그가 눈이 어두워서 간신을 써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라고 할 정도였다. 일반 백성들의 이미지도 산사태처럼 쏟아진 위기를 연약한 몸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다 해결하고 하얗게 다 타서 쓰러진 황제일 정도였으니...후대의 군인 황제들이 즉위할 때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를 본받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이상적인 황제상으로 여겨졌다.



3. 기마상을 남긴 황제[편집]







그의 생전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는 마르코만니 전쟁을 기둥에 묘사한 부조화[8]와 청동 기마상이 남아있는데, 이교도 문화 척결로 수많은 황제들의 청동상이 파괴되었으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은 교회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마상인줄 알아서[9] 라테라노 대성당 옆에 있었음에도 녹이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로마 캄피돌리오 언덕을 정비할 때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을 캄피돌리오 광장 가운데에 갖다 놓았고, 그 후로 수백 년 동안 광장을 지키던 기마상은 현대의 대기오염으로 인한 부식을 피하기 위해 진품은 인근의 카피톨리니 박물관으로 옮기고 복제품으로 교체했다. 그런데 아우렐리우스도 잘 알려지지 않은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중 한명인데 정작 기독교인들 덕분에 기마상이 보존된 아이러니... 콘스탄티누스: 이게 다 제 덕 입니다 선배님.



4. 미디어믹스[편집]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등장하는 늙은 로마 황제가 바로 이 인물이다. 로마 공화정의 전통 부활을 논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명상록에서 그의 공화주의적인 성향이 일부 드러나기는 하지만, 공화정 부활을 꾀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영화의 설정이다. 제정 시기에도 공공연히 공화정 복고를 주장하는 회고주의자들은 꽤 있었지만, 시대착오적이고 현실감각이 없는 바보들 취급을 면하지 못했기 때문에 건전한 상식을 가진 철인 황제가 그런 황당하고 반동적인 주장에 전면 동의했을 개연성은 매우 희박하다. 영화에서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의 관객들이 제정이 가진 독재적 요소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이용해 제정을 악의 체제로 설정해놓은 것 뿐, 실제 역사에서 제정을 그런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볼 수는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영화에서 콤모두스가 사망한 후에 로마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지를 받들어(...) 과거 좋았던 시절의 공화정으로 되돌아간 것도 실제 역사가 아니다. 사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다른 역사영화들에서도 과거 인물의 관점에서 현대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듯한 묘사가 많다. 로빈 후드라던가, 킹덤 오브 헤븐이라던가.. 이 감독이 만든 광고도 민주주의 만세로 점철된 영상물이다



만화 테르마이 로마이에서는 소년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도 인정할 정도로 매우 현명한 인재로 등장하며, 본래는 황제 자리를 물려줄 생각까지 했으나 아직 나이가 어려서 세습은 포기하고 대신 중신으로 기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실제로는 황제 자리까지 올라가지만. 만화에선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즉위하는 장면까지 나오는 관계로 그 이상은 나오지 않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Roman Empire Reign of Blood에서 등장. 아들을 다들 보는데 앞에서 훈련시키고 정치적 문제로 아내를 죽이는 냉혈한 모습을 보인다.





[1] 후한 환제 재위기였던 서기 166년에 ''서방 대진국 왕 안돈이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단 로마 쪽에서는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은커녕 중국에 로마와 맞먹는 한나라라는 대국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정황이 많다. 따라서 로마 상인이 교역을 요청한 것을 한나라에서 조공 사신으로 이해한 것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2] 허나 그의 치세 동안의 행적을 본다면 정말 강철 같은 인생을 살다 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3] 그리스 철학자처럼 헌옷을 입고 마룻바닥에서 잠을 자는 것을 좋아해서 어머니의 골머리를 썩혔는데, 그리스 문화 애호가로 유명한 하드리아누스는 오히려 좋아라 했다고 한다.[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치기간 동안 지겹게도 게르만족과 싸운 탓에 게르만족 또한 전력 소모가 심하긴 했다.[5] 당시 로마 상류층은 사무용 그리스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했지만, 그걸 철학서를 쓸 정도로 마스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6] 명상록에 "당신은 잘려 나간 사람의 팔과 다리를 본 적이 있는가?"라는 식으로 암시되어 있는 내용이다.[7]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제국의 지도층이 공공건축 등에 심취한것도 스토아 철학의 영향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람들의 성취욕이라고 주장했지만 공공건축, 공공에 대한 봉사등이 성취할만한 위업이 된것 또한 당연히 스토아 철학의 영향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간혹 스토아 철학이 로마의 지도층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틈만 나면 강조하는 것과, 필요한 언급을 안 하는 건 전혀 상관없는 얘기다.[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둥. 현재는 키지 궁전 앞 콜론나 광장에 위치.[9]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수염을 기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