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31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Sejin Pak
30 August 2016
[퀘이커] 함석헌과 퀘이커 - 사상보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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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커주의와 함석헌의 위치
김 성 수 (2005)
1. 머리말
2. 사상사적 입장에서 본 퀘이커주의
3. 함석헌과 퀘이커주의
4. 맺음말 - 한국기독교사에서 퀘이
커주의와 함석헌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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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왜 퀘이커가 되었나?
서구 퀘이커들은 이런 절박한 상황에 있는 함석헌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기꺼이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퀘이커 주의와 극도로 가깝게 된 동기는 퀘이커 사상에 어떤 큰 동감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가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 때 퀘이커들이 다정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점차적으로 퀘이커들과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함석헌은 또한 사상적으로도 퀘이커주의에 많은 공감을 느꼈다. 함석헌이 기존 교회조직이나 제도에 대하여 상당히 회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또 다른 종교조직, 퀘이커교도가 되기로 결심한 배후에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다.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주요 관심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보다는 지금 이 세상에서의 세계평화와 사회정의에 집중된 것에 공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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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서구 퀘이커에 대한 관심은 그만의 짝사랑이 아니었다. 서구 퀘이커들도 흰 수염, 흰 두루마기, 흰 고무신을 신은 ‘신비한 동양의 현인’ 같은 함석헌의 모습에 깊이 끌려들었다. 그들은 아마도 6·25전쟁 후 누더기가 되다시피 한 나라에서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를 만나며 무더운 사막 한 가운데서 시원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환희를 느꼈을 것이다. 함석헌은 서구 퀘이커주의가 얼마나 동양적인 종교인가를 재삼 강조한 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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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람에게서 나온 종교 중에서 동양사람에게 제일 가까운 사상이 바로 퀘이커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하워드 브린톤이 [퀘이커주의를] 서양에서 난 종교 중에서 가장 동양적인 것을 가진 종교다 그랬는데……하여간 비슷하게 동양적인 그런 게 있는 것은 사실이오. 신비를 인정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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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마도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주의와 동양 고전사상 사이에 많은 일치성을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함석헌과 서구의 퀘이커리들이 왜 그리도 급속한 ‘열애’에 빠졌는지를 이해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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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열애’에 불붙은 미국 퀘이커들은 필라델피아 펜들힐 퀘이커연구소로 10개월간 함석헌을 초대했다. 다음해인 1963년 봄, 영국 퀘이커들도 그를 버밍험 우드브룩 퀘이커 연구소로 초대했다.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1990년 봄, 필자는 우드브룩에 3개월간 머물며 함석헌이 그곳에 남긴 발자취를 되밟아보았다. 1963년 우드브룩에 머물면서 함석헌은 영국 퀘이커들에게 한번 한국사에 대한 강의를 영어로 했는데 그는 그의 영어발음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영국 퀘이커들에게 충분한 감동을 준 것으로 보였다. 그때 한 영국 퀘이커는 함석헌의 영어강의가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감동을 전했다’고 술회했다. 1990년에 우드부룩에서 필자가 만난 나이가 지긋한 한 영국퀘이커는 필자에게 “함석헌의 영어발음이 당신의 영어발음 보다 좋았었던 것 같던데요”라고 일침을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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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펜들힐과 우드브룩에서 함석헌은 퀘이커주의를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구미 퀘이커연구소에서의 생활을 통해서 그도 퀘이커들의 자율적 원칙에 깊이 매료되고 많은 공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많은 사상적 공감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그는 특별하게 퀘이커 회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1953년「대선언」 이후 함석헌이 어떤 특정종교 조직에 가입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조직 기피증’은 퀘이커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 함석헌은 그 자신을 외딴 들판의 고독한 방랑자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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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속된 집이 없는 승려처럼, 밤에는 시원한 뽕나무 아래서 한숨 자고, 다음날 아침 길을 계속 가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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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967년 그는 태평양 퀘이커 연회 초청으로 미국 북캐롤라이나의 세계퀘이커대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함석헌은 비로소 퀘이커회의의 공식회원이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럼 무엇이 '종파기피증'에 있었던 함석헌을 퀘이커회의 공식회원이 되도록 만들었을까? 그는 당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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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퀘이커들의 우의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나 자신으로 하면 새삼 교파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회원이 되고 아니 된 것을 따라 다름이 조금도 있을 것 없이 나는 나지만 그들이 나를 대해주기를 아주 두텁게 대해주는데 내가 언제까지나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 있는 것은 너무도 의리상 용납될 수 없는 일, 너무도 무책임하고 잔혹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퀘이커주의는 신비파운동에서 일어났지만 다른 모든 신비파들이 빠지는 극단의 주관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모든 큰 교파들이 하는 것처럼 권위주의에 되돌아가지도 않습니다.……퀘이커가 완전한 종교란 말은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종교란 말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나가는 방향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다음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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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불확실하지만, 열린 태도로 함석헌은 퀘이커회의 공식회원이 되었다. 퀘이커주의는 신비주의적 신앙체계를 지니고 있으나 신비주의가 간과하기 쉬운 사회·윤리적 실천을 중시하므로 퀘이커주의를 ‘윤리적이고 상식적 신비주의’의 양상을 강하게 띠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퀘이커주의의 이러한 면에 함석헌은 매료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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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 퀘이커의 사상보다 서구의 퀘이커의 사람들에 끌렸다. 너무 잘 해주었다.
- 서구의 퀘이커 들도 함석헌에 끌렸다.
- 서로 좋아하는사람들의 뒤에는 사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사상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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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이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