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1

조현 이남곡 인터뷰 2 20251206

조현TV휴심정
2,139 views  Dec 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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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특별한 분을 뵈러 전북 익산에 왔습니다. 저와는 수십년 인연을 맺고 있고, 제가 존경하는 이남곡 선생님을 뵈러왔습니다. 
이남곡선생님이 무려 천페이지에 달하는 ‘논어를 연찬하다’는 책을 냈습니다. 한문만 하시는 분보다, 보다 폭넓은 시각, 현실적인 시각과 인문적 시각을 통섭해 낸 책이어서 저도 논어를 참 좋아하고, 많은 논어를 읽었지만, 백미로 꼽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남곡 선생님은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민주화운동을 하며 옥살이도 하시고, 1970년대엔 농촌지역에서 교사를 하며 교육실천연구회 활동도 하고, 법륜스님이 정토회 가장 초기에 설립한 불교사회연구소 소장도 지냈고, 1994년부터 8년은 경기도 화성 산안마을 야마기시실현지 공동체에서 무소유공동체 실험에 동참하시면서 2004년부터는 전북 장수에 정착해 연찬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서 연찬을 이끌어오고, 그 이후 익산에 머물면서 인문운동가라고 활동하고 계십니다.
 2010년에 세상을 떠나신 부인 서혜란 여사님은 여성민우회 창립을 주도한 여성운동, 생협운동가였지요. 20여년전 저도 야마기시에 어린 딸을 데리로 자주 놀러가곤했는데요. 그 때 이남곡 선생님과 서혜란 여사님이 참 다정하게 반겨주셨지요. 
 이남곡 선생님이 17년전 논어에 대한 첫 책. 즉 이번 책의 원조격인 원고를 제가 보내서 한겨레출판사에서 ‘논어-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었지요. 
 이남곡 선생님께서 우리 시대에 남겨준 정신적 보배인 ‘논어를 연찬하다’를 가지고 연찬의 자세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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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TV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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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2

그나욱 선생님께서 22년 동안 공자와
함께 살았다고 해도 다름이 없는데요.
공자의 사람됨을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어떻습니까?
어,
[박수]
내가 이제 아마 예술 세 살에
처음으로 논어를 보게 돼요.
왜냐하면
뭐 저 조선도 알다시피
내가 그 당시 어떤 사회 피역 운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면 공자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겠느냐 하는 거는
팀자이 가지죠. 예전는 우익의 대부
아 보수 반도반도
사상적 원조 정도로 이제
보고 있었는데
그래서 내가 그 논를 볼 당시에 그
세상에 나왔던 책 중에 하나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이런 책이 나와
나올 정도에 있어요.
그렇죠. 그 100만 불 이상 판 책
논에 대한 책이 또 엄청나게 막 저
기초로 쏟아질 때었었는데
내가 논를 접하게 된 거는 당시 이제
장수로 이사를 해 가지고 저 장수에
정착을 해서
내가 정착하다 보니까 주변에 알고
지내는 사람들 뭐 이제 장석에도
있지만은 전주라든지 뭐 이렇게 좀
가까운
몬이라든지 이런 곳에 있는 사람들이
와서 자연히 이제 그 여러 가지
우리가 같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문제들을 논의하는 자리들이 마련해 말
자연스럽게 됐어요. 예. 사람들이 뭐
모이게 되는데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이게 소통이 안 되는 거야.
이해 관계까지가
다르지 않지 뭐 귀농한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사회 운동하는 사람도 뭐
있는데 그런데도
어 생각이 다르면 이게 소통이 안
돼. 그래서 이게 사실은 하나의 그
단적인 어 그런 현상이죠. 우리 이거
지금 현재 지금이이 뭐 극단적으로
서로 이렇게 적 뭐 적대하고 증화하고
하는 이런 평가름의 이런 퇴성이
나타나고 되는 그
근데 그래서 아이 이렇게 돼서는 좀
서로 소통하기가 힘드니까
무언가 성인급의 사람을 하나 앉혀
놓고
같이 좀 이렇게 이야기 해 보면
어떨까 해서
사람들한테저 우리 한번 성인을 한번
누구 안혀 놓고 한번 이야기 해
보자. 그래서 했더니
어 성인하면 또 오른 사람들
있잖아요.서 이제 석가지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을 안쳐놓더라도
의견이 다를 것 같아.
불교를
저거하는 사람 믿는 사람하고 또
반대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렇죠. 그렇죠.
예수님을 안쳐라도 예수님 마찬가지야.
예수님 안쳐라도 또 이게 제일 만만한
사람을 골라보자. 이건 누가 누가 막
그냥 요구를 하고 뭘 해도 예예.
별로 그 뭐 그 괜찮은 사람 딱
공자야. 그 당시에 왜냐면 공자 이미
막 비난을 많이 받고 있거든다.
그리고
어 우리나라에서도 사대 종교에서도
빠져버렸어.
유결하는 거. 그러니까이
뭐 권력이 없는 거야 이게. 예.
그래서 앉혀 놓고 해서 저도 뭐 큰
기대 안 하고 처음 보니까 사실
이렇게 보다 보는데
어느 순간이다 보니까 점점 공자의 그
진수가 이렇게 나한테 이게 뭐 내
시각이죠. 내 감각이지만 보여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마 내가 주자 승리학에
바탕을 체계적인 학습을 했던
사람이라면 보이지 않았을게 보이는데
그 보이는게 보이게 했던 요소가 내
자신의 경험들이에요. 변역 운동에
대한 경험들 그리고 그 저 어 감옥에
서였던 성찰 그 나와서 어 이게
불교사 연구소에서 같이 탐구하던 거
그리고 하나 더 나가 가지고 실질 해
보고 싶어서 무소위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이거 했던 연찬 이런 부분들에
의해서 공자가 하는데
아마 그런 면이 아마 나중에 이렇게이
이런 책을로 나옵니다만은
어 그중에서도
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내가
뭐 뭔가 어떤 걸 발견했을 때 그런
느낌이 있잖아. 아 그런 느낌이 있던
문장이 하나 있어.
그죠? 어허
그것이 전체 노는 문장 가운데 아마
다른 사람들은 별로 별로 그렇게 흘러
버리는 문장인데에
노노 자한편 이게 9편이죠. 9편
7장에 나오는 문 예
어 말은 간단합니다.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아는 것이 없다.
아하. 아 무지야 무지야.
이게 내가 이제 한 분도 별로 내가
공부해 본 사람이 없지만 내가 논어
보면서 이제 한문도 더듬더듬
문법도 이해하기도 하고 하는데
무지 야야야 야 야라고 하는 거는
상당히 강한 표현이에요.
예. 에 호라고 하는 거는 좀 강한
표현이 아니고 뭐 그거는 뭐 좀 질문
비슷하게
약한 표현인데
야하는 상당히 강한 편현이에요.
무지 무지야 이거
무지하고
그다음에 하는 말이 그런데 그런데라는
건 내가 이제 좀 고친 거고
어 누구라도 와서 물어보면는게
유비부
문어 비부라 하는 거는
별로 볼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요.
아주 저 똑똑한 사람이라든지 뛰어난
사람이 아니고 비부
누구라도 와서 비부 비부가 어떤
비부가 나한테 물어오면 유비부 문어
물어보면
그다음이 재밌어요. 요게 요게요
해석이
아마 일반적인 논의 해석하고는 많이
다를 겁니다.
공공여야란 말이 나와. 공공여야
빌공자가 두 번 공공여야
텅빈서란
말이에요. 음
텅빈돼서 해 가지고 그다음에 나오는게
내가 그 양끝을 두들겨서이
한문으로 말하면 아고기양단
고는 이게 두들긴다는 게
내가 그 양끝을 양단을 두들겨서
갈른이
갈인데
끝까지 끝까지 밝혀 보겠다. 끝까지
밝혀 보겠다.
이게 사실은 평 이게 보통
논어에서는이 문장 논어 자한편
9편 7장 7장에 나온이 문장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요.
그 대수럽지 않게 넘어가는 것 중에
상당한 해석이 어떻게 하는가 하면
무지를 공자는 말이지 스승 중에
스승을 알려 준 사람인데 무지야
했거든. 그니까
겸손한 표현이다.
아, 상당히 그렇게 봐요. 겸손한
표현이다. 겸손한 표현이고 그렇게
보다 보니까 내가 그 양끝을
두들겨서이 한문으로 말하면
아고기양단.
음.
고는 이게 두들긴다는 게
내가 그 양끝을 양단을 두들겨서
갈런
음.이
갈인데 끝까지 끝까지 밝혀 보겠다.
끝까지 밝혀 보겠다.
예. 이게 사실은 평 이게 보통
논어에서는이 문장 논어 자한편
아 9편 7장 7장에 나온이 문장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요.
대수럽지 않게 넘어가는 것 중에
상당한 해석이 어떻게 하는가 하면
무지를 공자는 말이지 스승 중에
스승으로 알려 준 사람인데 무지야
했거든.
겸손한 표현이다.
아 상당히 그렇게 봐요. 겸손한
표현이다. 겸손한 표현이고 그렇게
보다 보니까 무지하고 뒤에 나오는
거는 뭐냐면
간언을 아까 양쪽 끝을 두들겨서
끝까지 밝혀보겠다는 갈 갈을 갈을
어떻게 하면 끝까지 가르치겠다.
이렇게 나와.
그러니까이 이렇게 해석하는 거 자체가
얼마나 모선되는지 자체를 의식을 못
해. 앞에는 무지라고 했는데 뒤에는
가르치겠다. 왜? 공자는 스승 중의
스승인데
스승이 이렇게 무지라고 하는 건
대단히 겸한 표현이야. 아 그러니까
앞에는 무지를 그렇게 해 놓고 뒤에는
가르치겠다.
천만해. 전혀. 그이 나한테는 그게
바로 들어오는 거예요.
왜? 연차이라는 걸 경험했기 때문에.
그까
연천이라는 걸 내가 저 실제로 해
봤기 때문에
공공을 대부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텅 비었다는 걸 앞에 비부를 수식하는
말로 해.
아무리 텅 빈 사람이 와서 물어봐도
이거
아무리 멍청하고 텅 빈 사람이 와서
물어봐도 나는 끝까지 양쪽을 두들겨서
끝까지 가르치겠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죠.이
말이 안 되는 해석을 대부분 그렇게
하고 근데 나한테는
공공이 비을 수식하는게 아니야.
음.
공자를 수식하는 말이요.
내가 텅 빈 상태에서
야방시 전차는 해 보셨잖아.
영위에 선다는 그러니까
영유에 선다 핵심적인 거예.
예. 그거를 어 그렇게 해서 그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아닌 영의 영의
서서 제로
일체 제로 베이스에서
그 말은 뭐냐면 무지를 자각한
상태에서라는 말이야. 예.
그런데 그 말을 또 사람들이 이렇게
잘 해석 못 하면 그럼 내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버리란 말이냐? 버리면
안 돼. 버려 가지고 어떻게
파이칩니까? 버리라는게 아니고
내가 인식하고 있는 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감각일 뿐이고 나의 판단일
뿐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틀림
없다라는 생각이 없는 거예요.
이게 영예요. 그니까 무지를 장악한
상태에서 끝까지 한번 그리고
무지야 해 버리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죠.
불가지론이요.
알 수 없어. 그건 나요. 불가지론
아니면 이런들 어려 저런들 어때리
회의론이 여기에 빠지잖아요. 이게
연찬 정신이거든. 치열하게 탐합니다.
어떤 바탕에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나의 감각이고
판단일 뿐이지만 하는 자각이 있는
상태. 그러니까 내 생각이
틀림없다는게 아니지.
그런 단정이나 고정이 없는 상태에서
끝까지 한번 탐구해 보겠다. 요게
논어 9편 7장이에요.
예. 이것이 나한테 전편을 읽는
키워드가 됩니다. 그러고 보면 다른
부분들이 제대로 이해가 되기
시작해요. 네.
음. 그래서
막 이런 점이에 내가 그 논노하고
이렇게 만나서
그 후 스스로 입문동이라고 하는 거
임문동갈 자체하고서 주로 동반자가
논어했습니다. 왜?
연이 굉장히 중요한데 이걸 야마귀시
연찬을 가지고 이야기하기 힘들어
사람들한테.
이름도 잘생 한 데다가
아 그래도 연천 야마기시 연찬 덕분에
국회에서도 뭐 하면 맨날 요즘에
연한다. 연찬 말은
많이 따오긴 한데 연이 안 돼. 실제
그게 연천이 아니고 그냥 뭐 저
연천회라 말은 많이 해.
근데
어 그거를 내가이
야망의 나오면서 나오는 것도 앞으로
이야기하게 될지 모르겠지만은 지금
세상에서는 어 그런 어 방식 그런
방식은 보편증을 획득하기가
어렵더라고. 음흠. 어
그냥 뜻 맞는 사람끼리 몇 사람은
행복하게 살 나도
어 내가 그게 저 그런 면에서는 저
전혀 야마이 살면서 불편이 없었어요.
나는 왜냐면 그런데 좀
원래 좀 익숙한 사람이야. 목소리
그래서 아근데 이게 운동으로서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나왔어 나왔는데
그 연찬을 이렇게 보편했으면 좋겠는데
야마이 씨가 지금 일본에서도
운동으로선 거의 끝난 상태입니다.
그 일본에서 또 여러 가지 저 뭐 안
좋은 선입관들이 많아서
그 뭐뭐라 일종에
사교 비슷하게 사교 집단 비슷하게
이렇게 보하는 견해도 있고 해서
한국은 뭐 그런 것까지는 아닙니다만은
일본이 이제 본산이니까 한국은 뭐
한국
한 곳에 있잖아요. 한 곳 뭐 어디
거기죠? 향남 바람 바람 산남마인데
어 그래서 내가 그 입문 운동을
하면서 어 야마귀시이라는 이름보다는
공자의 이름을 불려서 사실은 연차의
보편화 운동이랄할까 이게 핵심입니다.
이 핵심이고
그게 그걸 통해서만 지금의 이렇게
심리적 내전에 가까운
우선 지금 저 우리 정치 상황 퇴적인
정치 상황을 넘어설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도 있었고
또 여러 가지 뭐 협동 운동이라든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들이
있잖아요. 이런 운동들이 정말로
뿌리를 데리고 성공할 수 있으려면
그 내부의 소통문화 그리고 어떤
합의에 이르고 실천하는 그런 면에서
어 이런 연이라는게 참 중요하게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예.
공자하고 만나서 공자하고 미올
기간이었지.
네. 네
그 22년 동안 이제 공자와 함께
미를 하셨는데에
공자 이제 사람됨을 물었고 이제
그러니까 공제 핵심을 지금 그 어떻게
보면은 그 무지의 자가 무지의 자가
그러니까 야마귀시 연찬에서도
어 영위에서 모든 것을 제로에서 실제
뭔가
실제는 뭔가 그러니까 선입견을 을
가지고 그것을 합리하기 위해서 논리적
변명거리를 항상 하는게 학문이고
사람들의 논리데 그러니까 100분
토론 하면은 전혀 100분 동안
교집합이 하나도 안 생기고 서로 더
등을 돌리기만 하는데 그러니까
내가이기는게 목적이 아니고 내 논리의
병명거리 합리성을 찾는게 목적이
아니고 진짜는 뭔가
진실은 뭔가 이런 것을 그러니까
자기가 무지의 자각 편견과 고정관념을
놓지 않으면은 는 실제적 진실을
탐구할 수 없기 때문에 공자였던 이런
어 모습을 가장 높게 평가하셨고
그러니까 그 불교소도 승산 스님이
미국가 가지고 어 선불 세계 알려 때
그분은 항상 트레이드 마크가 오직
모를 뿐
오직 모를뿐 그랬는데
그런 것도 어떻게 보면 이제 그
분류가 무하고
그 무상이고 그러니까 무지의 자각하게
더 철저한 것이 불교하지만 한국
선불교의 모습 보면은 굉장히 그
기독교 이상으로 놀랍게 독선적인
모습이 또 강한데 그리고 예를 들면은
일본의 야마귀시도
연찬 정신이 놀라울만큼 야마귀시
미오조라는 사람이 다시 이렇게 무지의
자각을 현실에 맞게 100년 전에
퇴살려냈는데
어떻게 그렇게 연을 예리하게 이렇게
파헤치는 단체가 연찬 정신하고 또 정
반대 대로 또 가버려 가지고
어 또 그게 또 산산 조각이 많이
깨지고서 에존이라는 새로운 곳으로
이렇게 탄생하고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
이제 공자도 그렇게 위대한 무지에
자각을 했음에도 한국에 와서 성리하기
위해서 너무 또 독선적으로 변했듯이
그런 점이 어떤 참 그 삶의
아이런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본질의 근본 바탕을 따져야지 어떤
지금의 또 야마귀시 공동체를 보고
야마귀시 미오조를 오해하면 안 되고
지금 성리학만 보고 또 공자를
오해하면 안 되고 어 또 지금의 어떤
선승들의 모습만 독선적인 모습만 보고
또 붙다야만 되고 하튼 이제 그런
점을 느끼게 입니다. 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잘못된 이유 #이남곡 #야마기시 #논어를 연찬하다


조현 이남곡 인터뷰 1 20251206


조현TV휴심정
11,288 views  Dec 6, 2025  #Studying #Monk #Confuc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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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특별한 분을 뵈러 전북 익산에 왔습니다. 저와는 수십년 인연을 맺고 있고, 제가 존경하는 이남곡 선생님을 뵈러왔습니다. 
이남곡선생님이 무려 천페이지에 달하는 ‘논어를 연찬하다’는 책을 냈습니다. 한문만 하시는 분보다, 보다 폭넓은 시각, 현실적인 시각과 인문적 시각을 통섭해 낸 책이어서 저도 논어를 참 좋아하고, 많은 논어를 읽었지만, 백미로 꼽을 만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남곡 선생님은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민주화운동을 하며 옥살이도 하시고, 1970년대엔 농촌지역에서 교사를 하며 교육실천연구회 활동도 하고, 법륜스님이 정토회 가장 초기에 설립한 불교사회연구소 소장도 지냈고, 1994년부터 8년은 경기도 화성 산안마을 야마기시실현지 공동체에서 무소유공동체 실험에 동참하시면서 2004년부터는 전북 장수에 정착해 연찬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서 연찬을 이끌어오고, 그 이후 익산에 머물면서 인문운동가라고 활동하고 계십니다.
 2010년에 세상을 떠나신 부인 서혜란 여사님은 여성민우회 창립을 주도한 여성운동, 생협운동가였지요. 20여년전 저도 야마기시에 어린 딸을 데리로 자주 놀러가곤했는데요. 그 때 이남곡 선생님과 서혜란 여사님이 참 다정하게 반겨주셨지요. 
 이남곡 선생님이 17년전 논어에 대한 첫 책. 즉 이번 책의 원조격인 원고를 제가 보내서 한겨레출판사에서 ‘논어-사람을 사랑하는 기술’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었지요. 
 이남곡 선생님께서 우리 시대에 남겨준 정신적 보배인 ‘논어를 연찬하다’를 가지고 연찬의 자세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논어를 연찬하다 #법륜스님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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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1


오늘은 특별한 분을 배어 전북 익산에 왔습니다.
저와는 수십년 인연을 맺고 있는 분인데요. 제가 존경하는 분입니다. 이남곡 선생님을 배로왔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 반갑습니다. 예남국 선생님께서 이번에 무려 천페이지에
달하는 논어를 연찬하다이 책을 냈습니다. 아,
너무 두꺼워 가지고이 책 읽느라고 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이렇게 어 제거네이 책 읽는데만 해도 한 열흘 동안 꼬박 읽었는데에
제가 책 내용이 별로면은 읽다가 한
1분 읽다가 그냥 집어 던졌을 거예요. 근데 읽으면 읽을수록 저기 너무나 그 깊이도 있고 또 유연하고
또 굉장히 읽을 만하고 또 삶에도 도움이 될 만하고 그래서 끝까지
완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어 정말이 시대에 꼭 많은 분들이 읽어야 될
필독소로 권유하고 싶어서 어 제가 오늘 익상까지 왔습니다.
그이 책이 굉장히 이제 현실적인 시각, 폭넓은 시각, 또 입문적 시각
이걸 이제 통섭에내는 책이라고 어 느껴지더라고요. 저도 논를 참
좋아하고 많은 논를 읽었지만은 아 논노에 관련된 수백권의 책 중에서
정말 첫번에 꼽을 만한 책이다. 아이 논을 연천하다를 이렇게 추천합니다.
이국 선생님께서는 경기고등학교와 서울 법대를 졸업하시고
어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옥사리도 하시고 1970년 된 농천 지역에서
교사를 하면서 교육실천회 활동도 하시고
법윤수님이 정토해 가장 초기에 설립한 불교사회
연구소에서 불교사회 연구소 소장도 지내셨습니다. 1994년도부터 8년은 경기도 화성
산남마을 야마귀시 시현지 공동체에서 무소위 공동체에
실험도 동참하시면서 이제 그 이후에 2004년부터는 전북
장수에 정착해서 연찬문화 연구소 이사장으로 연찬을
이끌어 오시고 그 이후에는 이곳 익산에 머무시면서 입문 운동가로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아, 이런데 선생님 그 한평 같은
촌에서 태어나셔 가지고 그때 한평에서 수제들은 광주 일을 가도 전부 다
대단하다고 그랬는데 왜 경기국까지 갔어요? 뭘 모르고 갔지?
그때 이제 제 교육을 위해서 어머니 혼자 예. 아, 참 서울에 올라오셔서
그 아들 교육을 시키려고 그렇게 하시고 계셨는데 그때 그러면 어머니하고 두 분 있어서
서울 올라오신 거? 아니요. 그 어머니가 먼저 올라오셨죠. 아, 먼저 교육시키려고. 아, 먼저 올라오셔서 이제
맹자 어머니 저리 가가 많이 아니 그 어, 뭐 여러 가지 이제 구준일 해 가시면서 어, 그렇게
하셨는데 네. 내가 이제 고등학교로 가야 되는데
어머니가 물어보시더라고. 아 어느 학교 원서를 사보낼 거냐고.
그래서 나는 전혀 몰라서 시골학교와 뭐 그 경기도학교가 뭐 얼마나 어 좋은 학교인지 들어가기
어려운 학교인지 모르고 예. 어 그냥 그 어머니한테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예. 그래도 제일 좋은 학교 그니까
어머니도 전혀 모르셔. 어머니도 저보다 더 모르지. 학교를 안 나오신 분이니까.
그게 주 사람들한테 물어본 모양이에요. 제일 좋은 학교냐니까 경기 고등학교로 그래서
그럼 그 학교 사보내신 거예. 그래 그래가지고 얼떨결에 들어갔습니다.을
얼떨결 들어갔는데 예 아마 경기 중학교를 나온 이제 학생들이
420명은 그대로 진학을 하고 아 60명만 이제 예에서 예배 뽑을
텐데 어 내가 생각해도 어떻게 들어가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다만 하나 기억되는
거는 예 수학 아 내가 중학교 때 수학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아. 아,
수학 시험지를 받아봤는데에 이게 수학 시험인지 무슨 저 국어
시험인지 모를 정도로 음, 전체 앞변이 전부 그 방정식 응용 문제야. 그러니까 수식이 나오는게
아니고 주로 그 방정식 응용 문제가 나왔어요. 그리고 뒷면에 약간 인수분해 지금도 기억이 든다니까 그
나오고 전면이 전부 그렇게 그 어 뭐야 그 저 뭐 빽빽한 글자가 쓰 있는 그런
시험지였는데 하필 그 내가 그 운이 좀 있는 거 같아요. 내가 제일 좋아했던게 방정식
긍용 문제예요. 예. 그런 면에서 아마 좀 논리적인 어떤 그런 부분이 좀 있었던 거 같은데. 네.
어 그 나중에 들어가 가지고 수학 시간에 수학 선생이 내 이름을
불러서 이렇게 세우더라고. 그 그거 보니까 내가 수학에서 아마 수학에서 점수를 많이
얼마나 탁월하게 그 이렇게 적어냈으면 선생님이 딱 이렇게 세웠겠어. 아니,
그러니까 그러면은 수학자의 길로 갔으면은 이곡 노벨 수학상 이렇게
딱했 인생 이렇게 안 꼬였을 텐데. 아, 왜 또 수학자의 길을 또 안
가시고 또 괜히 또 민주화 운동을 해 가지고 또 말이야 인생이 권이고. 근데 고등학교 가서는 이제 관심이
조금 수학에서 떨어지더라고. 떨어지면서 아 때 아마 내가 좀 이과 기질보다는
문과 기질이 좀 나타나는데 근데 하여튼 중학교 때까지 수학을 그리고 그거 내가 지금 생각해 봐도
네 어 수학의 어떤 논리 추리 뭐 이런 부분이 내가 좀 그 능력이 좀 그 그런
소질이 좀 있었던 거 같아 그래가지고 어 하여튼 그렇게 돼서 어 어떻게
보면 이게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초기 게 별로 없어요. 아하. 왜냐하면
우선 다 다른 학교에서 지나게 오기도 했지만은 예 아마 그 당시 경기고등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일반적인 어떤 문화 환경 문화라든지 생활환경하고
아주 전혀 다른 그런 생활 했기 때문에 아 그러니까 그때 경기고등학교 뭐 지금도
그러지만은 그 경기고등학교 오늘 애들이 뭐 엄청나게 뭐 재벌집 아들
장차관집 아들들 이런 좀 부유충 자재들이 많았을까? 많았겠죠. 아 말았을 아 나는 모르지
모르 그러니까 뭐 모르고 촌에서 올라가 가지고 친구들은 거의 뭐 엄청난 그
집배 자재들이 많고 그러니까 선생님 뭐 이러선님 그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 친구들 집에 입주해 가지고 친구들 가르키면서 다녔다는 소문이 있던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사실은 이제 그
제가 그 입주 가정 교사를 했습니다. 아 고등 3학년 때 어떤
그러니까 그 뭐 저 초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를 가르치는 가정 교사로
가정 교사는 내가 입주를 해 가지고 그래서 거기서 대학 들어가서 대학
교학년 때까지가 그 그 거기서 생활을 했습니다. 아 참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맙죠.
아, 그러니까 요새처럼 뭐 과를 하는게 아니고 내가이 가정 교사를 하면서
아, 당시엔 그래도 그게 가능했던 거 같은데 요새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거예요. 요새는 그렇게 입주 가위하면서 부잣집은 어떻게 사는가도 처음
아니 그다지 그 집이 그다지 부자이었어요. 부자
나중에 부자 추도 며칠가 봤지. 아, 그렇어.
그러셨구나. 그래 가지고 이제 서울대 법대까지 가시면서도 저 다른 분들은
대부분 다 검사 판사 될 걸로 기대를 했을 텐데
이제 그런 길로 또 못 가시고 그러니까 예전에 이제 사모님이 이제
벌써 지금 15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서열란 선생님 지금 말씀하신 어머니도 또 서열란 어 선생님도 어 우리 인나
선생님이 경기도 화성 산남마을 야마귀시 씨 공동체에 사실 때 저도
그때 이제 과천에 살아 가지고 저희 어린 딸을 데리고 맨날 거기 낙원 거기 낙원촌이고 뭐 낙원촌이 아니어도
주말에 이제 놀로도 자주 가고 그러면은 그 어머니도 그때 같이 거기 사셨거든요. 이제 서한 여사님도
참 따뜻하게 정말 잘해 주시고 맛있는 맛있게 밥도 해 주시고 항상 오면은
또 이제 계란이랑 상추랑도 이렇게게 싸 주시고 그게 지금 그것 때문에
지금 오늘 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계란값 계란값 지금 상추까 말아
그때에 굉장히 따게 품어 주시고 근데 우리
그 서라는 여사님은 여성민 의의 창립 그 생운동에 굉장히 주도하신 여성
운동가 또 생애 운동가 있는데에 그때 그 그 전에는 잘 몰랐는데 그
서열란 여사님 돌아가시고 추모식을 그 장충동에 에 그 어디 불교 어떤 단체
우리 함께 하던 그 단체 거기에서 이제 추모식 할 때가 보니까 그 이와대 동기동창 선우배들이
추모시기꽤 여러 명이 왔더라고요. 그래 가지고 그때 나중에 이와이드
총장했던 이예숙 총장 그분도 예전에 저하고도 같이 이제
그런 이문학 공부모임 멤버로 같이 공부했던 멤버인데 그때 그분도 거기 오셨더라고 그러면서
그 서란사님 친구들이 인나 선생님을 별로 미 미 미워하더라고
우리 혜란 언니가 정말 대단한 언니였는데 남편 잘못 만나가지고 인생 졌다.
그래요가지고 아 그래가지고 얼마나 속으로 웃었는지
아니 여자가 자기가 좋다는데 좋아서 갔다 하는데 뭘 자기들이 예 자기들이 불만이야 그러면서 근데서 여사님이 그
마산에 굉장히 부잣집 따임이셨다고 그러 거창 거창 거창 굉장히 부잣집 따임이었는데
그러니까 별로 사이가 마음에 안 들어 가지고 그 집에서 서 별로 이제
딸 사이 별로 이렇게 예 별로 안 챙기셨다고
어 그건 나 잘 모르겠는데 아니 근데 그렇게 큰 부자는 아니고
그 뭐 시골 뭐 시골 부자죠 시골 부자고 예 어 하여튼 뭐 사람 2년이라는게
묘해요. 그래서 어 지금도 내가 이제 80이
넘었지만은 이게 돌아보면 예 어 그 인연들이 그 어떻게 발전하는지
어떻게 변하는지 하는게 참 미용하다는 걸 느낄 때가 많아요. 우리 저
조선생하고도 그때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잖아요.음 네. 그래서
어 예를 들면 어 대학에 들어가서도
어 처음에 2학년 때는 예 그 내가 이제 가정이 어렵고 어머니가
혼자 오랫동으니까 어떻게든지 어머니를 빨리 좀 좀 이렇게 풍요롭게 해주 그런 생각이
많았죠. 사실 많아서 그때 대학을 아마 3학년인가를
마치면 사법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게 생겼을까? 아 잘 기억이 안 되는데
그걸 더 빨리 하고 싶어서 1학년 때 그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 시험을
봤어요. 어 대학 1학년 때 됐어. 와 뭐 박수 칠이 아니야.
그러니까 아니 그런데 옛날 말이 그 조선 시대 때 15세 장원 급지하면 인생이 부다 그러는데
이미 너무 일찍 그냥 막 그냥 가 나이가만으로 18살 예 우리 저 우리
나이로 하면 19살 때인데 예 그래 가지고 그러다가 그의 겨울에
이게 좀이 그게 인연이에요. 음. 어, 내가 사실 고등학교 때부터도
약간 그런 어떤 사회 어떤 어 뭐라 할까? 사회 변역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 그런 민족주의적인 생각이 강했고 어 그런데
이제 그런 시대하고도 만나지. 내가 대학 1학년 때에에
고등학교 때 저 올라와서 419 만났고 고등학 2학년 때 516을 만났어요.
그리고 이제 대학에 들어와 왔는데 그런 의식도 좀 있는 편이었는데
어 이때 이제 누군가를 만나게 되지. 아 아
이제 운명히 갈리 1학년 1학년 때 1학년 때 갈려 가지고 2학년인 때부터는
완전히 그 그 그런 길하고는 전혀 다른 길 음
그런 다른 길을 걷기 이제 그 길 그렇게 해서 맺어진 인연이 어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이제 여러
차례 변곡 그 변환을 하면서 이어주고 있다 이렇게 봐집니다. 우리 조선생도
그 과정에서 만났고 그렇죠. 그냥 우리 이나우 선생님께
이나우 선생님이 계속 검사 판사만 하셨으면 저를 만날 일이 없었는데 하여튼 그런 삶의 우곡조를 다
거치면서 어 또 어 저도 우리이 선생님 뵐 수 있었고
참 검사 판사가 안 돼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예.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 이나고 선 어머니도 그게 다행이죠. 검사
판사돼 가지고 어떤 그 집에 사이로 대리 사이로 거의 팔려갔으면은 거의
같이 살지 못했을 텐데 그래도 같이 그 돌아가실 때까지 같이 아들을
며느리하고 이렇게 하시고 그 제가 보기에는 복이죠. 복.
근데 어머니 생각이 요새 가끔 해요. 내가 업무 생각하는데
나는 내 세계관이란 내 인생관에 따라서 어떻게 보면
어떤 사람들 때로는 아주 과격하다고 해 나를 근데 실제로 객관 증경을 보면 과격한 때가 있었다고 이렇테면
어떤 사건에 이렇게 관여해서 그 이제 그런 어떤 내가 저 징역사를
했지만은 그 과정도 보면 어 상당히 과격한 면이 있어요.
음. 선생님 그때 징역사를 몇 년 하셨어요? 어 4년. 그니까 5년 형을 받아 가지고
근데 그 징역사리에 계기가 된 사건이 이런바 그 남민 사건이라고 해서
알려진 사건인데 한 석달했어요. 활동을 석달하다 보니까
이제 그 거기 또 전환점이 와요. 음. 평소 내가 그 사회 변역 운동 특히 이제 뭐 솔직히 뭐 요새는
이야기해도 뭐 다 이해가 되겠지만은 사회주의 성향에 어떤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런 어떤데 대해서 여러 가지 마음속에 의문이
있으면서도 의문이 있으면서도 어 그런 길을 이제 걷기로 이제 쭉 걸어왔었는데
네이 그 남민 하고 이렇게 만나면서
예 그런 여러 가지 그 회의할까 그런데 대한 어떤 의문점들이
더 깊어졌어. 아, 그래서 이거는 어, 내가 생각하는 것하고 다르다. 처음엔 그런
생각보다도 어떻든이 단체에 들어가서이 단체
뭐 뭐랄까 표현이 어떨지 몰라도이 단체의 상층부에
어떤 진입을 해서 이걸 좀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좀 바꿔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아하다 보니까 예 아 그게 전혀 이게 잘못된 생각이 착각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 어 석달하고서 그만뒀어요. 그만두고
거기서 비밀 뭐 비밀 지하 조정이니까 거기서 거기서 이렇게 저 그만두는게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그래서 그 그 당시 이제
학교 선생이었는데 학교 선생도 그만두고 집도 이사에서 몇 달 동안 좀 이렇게
다른데 나가 있었습니다. 어 그리고 1년 있다가이 사건이
터져서 내가 이제 그 구속이 됐는데 그러니까 실제 이미 이미 다 떠났는데
그렇죠. 근데 했는데 수사 기관이 알린 것도 아니고 혼자 그만뒀다고
하면 혼자 그만둔 거기 때문에 네 그런게 저게 안 되더라고. 그 저 참
활동이 면책이 안 되는 그렇지 안 되고. 어 그런데도 이게 석달이지만
간부였다는 거야. 그게 1조 2항이야. 국가 보안법 1조 2항 간부야. 간부
간부니까 어 15년을 구영을 하더라고. 근데
그래 가지고 어 선고가 이제 5년 5년 선고가
됐고 선고되고 어 1년 그 뭐 특사로
1년 해서 4년 동안 이제 살았는데 아하 어떻게 보면 그 당시는 상당히
치열하게 산 건 사실이에요. 예. 살아서 어 거기에 대한 어떤 뭐 좀 어떻게
보면 좀 억울한 면도 있지. 그만두기도 했고 몇 달 안 했는데
어 이거 중영을 받았으니까 근데 그런 생각이 없었어요. 억울함이라든지
원망이 없었어요. 어허 억울함이 없고 오히려 어 그니까 내가
치열하다는 건 내 성찰하는게 상당히 치열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여러 가지 그동안의 반성 성찰하는 시간이 이제 저 감옥에서 그걸 하게 돼요.
그것이 사실은 그 그 이후에 감옥을 나와서 내가 이렇게 사상적인 조환도
하고 전환이라 할까 뭐 하도 이런 과정에 어 큰 그 바탕이 됩니다.
예. 그때 어만 사람들이 이제 주로 저
사상적으로는 내가 지금 오래돼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은
어 대아 사르 신부 사르땡 신부 아 그저 데아르신 대사르
그 책으로 만나셨겠나 그죠? 최고로 봐. 책으로 보고 그 하는게 어 인간 자체의 진화에 대해서 오메가
포인트라든지 인간 자체의 진화에 대해서 이런 부분들이 평소 마음속에 이게 감춰져 있던 그런 부분을 좀
읽겨웠어요. 읽겨워서 내가 생각할 때 그런데 좀이 전환하는
어떤 바탕이 있었던 거 같고 사람으로는 거기서 만난 사람이 한 분 있어. 감옥에서. 어
신목 선생이요. 아 신현목 선생을 내가 그 대전 교도소에서 이렇게 만났는데 네
어 이제 다 뭐 기결수니까 아 기결수니까 주로 만나는게 이제 일요일
날 만나게 돼. 아 일요일 날 어떤 시간에 종교 시간이 종교 시간. 다 종교 시간.
아, 그러니까 뭐 종교가 여러 가지잖아요. 여러 가지데 그 종교 시간에에 만나서
그 무슨 뭐 뭐 저 염부를 한다든지 기도하는게 아니고 둘이서 이야기하는
거야. 그게 이제 그걸 아, 한 종교를 선택 안 하고 또 따로 만나도 됐었는 모양이죠. 그렇게
그니까 그렇게 했던 거 같아. 자세한 기억은 없는데 하여튼간에 그 주로 일주일에 한 번씩 그렇게 만나는
시간에 그걸 이제 주로 그 감옥에서 쓰는 말을 하면 통방이라 그러는 통방. 아, 통방 아,
통방으로 좀 활용을 해서 그 지금도 어, 종교에 대해서 감사 아,
종교 농담이고 그런 일이 있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그러니까 그 신국 선생이 들어간 건 남민고
그분은 통역 아니 통당 통역당 사건 통역당 사건이고 남민은
예전에 그 법륜 스님이 형 최한실 선생이랑 그거 다 다 남민 아니에요.
그렇죠. 어 그 뭐 그런 지금 이제 이야기하다 보니까 여러 가지 구체적인 인연들이 떠올라 사람들이. 최한실 씨
이야기하는데 최한실 씨가 나를 남민에 안 내리려 했지.
그러니까 참 이게 다 근데 어 지금 생각해 보면
아 그게 이제 나이가 들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데 어떤 인연이 예 어 이게 악 뭐 악연이나 서연이라고
할할 만한게 아니야. 보면 그것이 다른 인연을 낳는 총매가 되거든.
역할을 해. 그러니까 어떤 사람 만났을 때 그 사람 만나가지고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좀 이렇게 여러 가지 고생을 했다 이렇게 말할게 아니야. 그게 다른 인를 낳는 총미 역할을
하거든. 잘 보면 그렇게 돼요. 그래서 그 어 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게 조금 그다 또 그
형 제한실 선생이 그렇게 이제 감옥에 들어감으로써 법륜 스님도 엄청나게 깨우는 역할을
했죠. 범수님도 형이 아니었으면은 그 불교의 어떤 문제 의식을 못 느끼고
완전히 그걸 깨고 나오면서 하여튼 현실에 대해서 너무 무지한 종교의 세계 현실의 어떤 고통에
대해서 눈을 감아 버린 종교에 대해서 굉장히 눈을 뜨는 어떤 현실을 도시한
종교에 대해서 굉장히 깊이 있게 또 성찰하고 고민하고 고뇌하고 하면서
어떤 식으로 종교가 나가야 될 것인가 아마 그런 걸 고민하는 과정에서 또 불교사의 연구서를 초기에 젊은 때
설립하고 그것을 이나고 선생님 또 소장 맡아서 같이 그 시절은 또 아마 치열한 그 고민의 과정이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게 이제 아마
그 아까 저 최안실 씨 이야기를 했지만은 최한실 씨하고 이어짐이
아 법륜 스님을 만나게 했지. 예. 법륜 스님하고 나하고는 전혀 뭐 그다
그 당시 스님이 아니었고 예. 정토회라고 하는 그런 그
법사야. 법사인데 머리를 그러니까 깎은 상태가 아니고 머리를 길었어요. 머리 하는데
대단한 분이죠. 대단한 분이야. 그 저 한국의 종교인 가운데서
어 참 대단한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보이는데 그 당시 아마
오래돼서 잘 기억을 안 나지만 어 그 당시 불교 운동을
한 과정에서 뭐 새로운 거 그 종전의 어떤 민중
불교라든지 어떤 불교 운동의 어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아마 새로운 모색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근데 나는 남민을 거치면서 사실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지금까지
어떤 운동 방향 변역 운동 자체의 변역 변운동 자체의 변역을
어 내 화도로 삼고 있었을 때입니다. 기존의 사회주의 운동의 어떤 문제식을
절감하고 좀 변화를 가져가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라는 성찰을 이제 하는
와정에 또 이제 법윤 수님하고 만나서 어떻게 우리가 새로운 사회 변역을 가져갈
것인가 그걸 이제 같이 고민하는 어떤 그때 이제 단계였구만요.
참 그래서 그때 아마 그 내가 저 요새
그 옛날 그 불교사 연구소에서 낸 그 회 회지
서원과 연대라 하는 회지를 냈는데예 그 회지 창간호에 내가 그동안 그
불교사 연구소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 그런 뭔제실을 가지고 같이 이야기했던
그런 부분들을 정장 글을 내가 참관에 실었더라고 그 요새 그 현대 문명의 저걸 보고
있는게 그걸 책이 딱 한 권 있는데 그 한 권을 내가 그
요제 그 사상계 새로 나오는 새로 복관한 사상계 어
그 편집인으로 있는 장원 선생 만나서 그 책을 내가 이렇게 저 참고로 이렇게
좀음 드렸어요. 거기에 보면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이라고 하는 걸 분명히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전에는 그게 사실은 내가 이제 변화한 건데
제도 물질과 제도를 바꾸면 예 어 인간이
변화한다. 이런 이런 전제가 상당히 강했다고 그게 소위 뭐 유물론적 사고
방식이기도 하고 예를 들면 아 하부 구조가 바뀌면 상부 구조가
바뀐다는 이런 이제 직인데 예 내가 그 여러 가지를 경험내 이게
수술의 경험이죠. 경험을 하면서 느꼈던게 그렇게 잘 안 돼.
예. 그리고 뭐 이렇게 제도를 바꿔 가지고
사람이 바뀐다고 하는 이런게 이런게 실제로 잘 이루어지지 않더라고. 예. 오히려 왜 그런 말 있잖아요. 어
세수를 세부대. 세수 세부대라고 하는 거는 어떻든 뭔가 틀을 바꾸고 제도를
바꾸면 거기에 이제 세술 할 때는 그렇게 제도를 바꾸고 거기 한다 이렇게
하는데 실제로 아마 아 물론 다른 영역에선 그게 가능할 수도 있겠다 봅니다만는
정치나 사회 변화 부분에서는 세수를 세부되라고 하는 거는 맞지
않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오히려 세수이 이거 사람이 변하지 않았는데
변하지 않았는데 그걸 뭐 체제를 바꾸고 제도를 바고 가지고 거기다가 이렇게 그 적용을 해 보면
오히려 어 새 새 부대에 새술이 들어가는게
아니고 대부분 헌이 들어가는 거 그러니까 인간이 변하지 않으니까
아무리 캐치 플레이를 좋은 걸로 달라와야 예 이름이 더러워지는 뿐이죠. 예.
그래서 그때 생각했던 내 지금 그런 면에서 결국 이게 이런 이런 여러
가지 그게 공자하고 만나게 되는 그 배경이 돼요. 공자 그니까 내가
공자는 예순이 넘어서 봤거든. 예순이 넘어서 본 것도 논를
본 것도 어 또 한 차례 내가 그 좀 과정을 거쳐 그게 바로 아까 이야기했던
야마귀 씨라고 하는 무조의 공동체하고의 만남이야. 단순의 만남이 아니에요. 난 8년 동안을
실제로 살았어요. 살면서 그 핵심이 되고 있는 연이라 하는 걸 내가 실제 그 저 특강도 진행도
한다니까 그 우리 선생님이 진행할 때 저도 연찬에 같이 참석해서 7박 8일 동안 치하게 또
연차 갖추 있죠. 그때 하여튼 저 술을 안 준다고 대모 아니고
내가 진행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때가 우리 조조 선생이 특강할 텐데 그때
12명인가 몇 명이 했는데 그중에 또 조선생 조선생이 직접 앞에 손도뒤에 서진 않았어 괴자가 하나 있었다고
가지고 그 특강장에 안 들어오고 앞에 앉아서 연자를 하는 거야.이 술
죽이지는 못 들어가. 그 술을 안 먹게 되셨거든. 그래가지고 근데
그 야마귀 씨하고 만남이라고 하는 걸 경과한 다음에 공자를 보겠대. 만 이게
그런 과정이 사실 이런 논어를 가능하게 논어 뭐라 할까
논어의 해석이라 할까 논를 다시 보게 되는 그 과정이 돼요. 그러니까
나는 그 내 인생의 과정 처음에 어떤 변역 운동 그다음 변역 운동에 대한
변역 운동 자체의 변역 그리고 어 실제로 한번 나는 근데 이런 건 있어요. 보통
흔히 하는 말로 요새 뭐 좌우란 말도 쓰기 그렇지만 좌파
좌파 운동을 하다가 실망을 하면 이번엔
휙하고 우파로가 버려. 아니 이제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예. 어 그런데
어 그게 너무 심하게가 버려. 예. 음.데 이런 현사은
나는 이금 이게 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거예요. 네. 그까 나는 사실 어떻게 보면
그런 운동을 하다 운동에 어떤 문제를 느끼게 되면 어 그걸 어떻게 하면 넘어설까는
차원에서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중도를 향한 과정이었어요. 그니까 내가 이쪽 극에서 다른 극으로 갔다
왔다 갔다 하는게 아니고 예 거기를 어떻게 하면 이게 중도를 향해서 갈까 하는 그런 과정에서
사실은 만난게 야막귀시이기도 하고 연찬이기도 한데 네
그런 과정에서 보니까에 공자가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바로 그거 길을 간 사람이야.
2500년 전에 예 헌 부대에 세수를 담물고 했던 사람 예
그래서 어느 정도 화학 작용이 충분히 일어날 때 다시 말해서 그 세술이 들어가서 사람이 변해서 그 사람들이
변해서이 이이 부대가이 체제가 안 되겠다 할 때 그때이
체제가 바뀌고이 되는 게 아마 내가 볼 때는 2500년 전 뭐
공자의 전략이었던 거 같은데 그런 점에서 공자도 사실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장소에 가가지고 만나게 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단순한 우연이 아니야. 내 이미
내 안에 내 안에 있던 그런 씨앗이 예 공자를 만나 걸 통해서
그런 식으로 또 새롭게 봐주는 점이 있었지 않느냐. 예. 고마울 뿐이에요. 다들.
그러니까 제가 봤을 때는 보통은 이제 뭐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이런 식으로 극적으로 이렇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은 무슨 뭐
시대의 어떤 변화에 의해서 아픈 대목이기도 하지만은 어떤 개인적으로
이게 내 출세라든가 나를 알리고 내가 뭔가 세상에 어필하는데 이게 유리할까
저게 유리할까 하다가 자기 욕심의 일환으로 어떤 그런 것을 취사
선택하는 경우에 그런 식으로 극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고
그 이제 이남 스님이나 법윤수님 경우처럼 그 머리 좋던 사람들이에
얼마든지 그런 식으로 영악하게 행동할 수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지 않고 그런 분들은 그때 당시 벌써 4, 50년 3, 40년 전에
그 지금으로부터 보면은 한국사 사가 이렇게 변역이 되기 훨씬 전인데
어 그때 치열하게 얼마나 치열하게 그 담론을 갖고 치열하게 고뇌하고 했는지
그때 정토회 같은 경우도 그때 했던 어떤 결과 어 그러니까 내외 명철
안으로서는 어떤 깨달음을 추가 인간 진화를 추가하고 밖으로는 이제 구호라든가 환경이라든가
아 이런 쪽으로 탁 뭔가 틀을 잡아가는 그런이 세상 변화를 위해서
어떤 식으로 우리가 움직여야 될 것인지 그때 벌써 3, 40년 전에
짜내온 틀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지금도 뭐 만일, 2만일, 3만일 뭐
이런 식으로 쭉 이리 관지 견지온 거 보면 참 놀랐고 그런 면에서 우리나욱
선님이 이제 공자를 만나 것도 공자 같은 경우도 그냥 자기의 어떤 이익에 의해서 일이 붙을까 저리 붙을까가
아니고 정말 인간 삶의 근본이 어떤
정말 일의 삶이고 어떤 것이에 진정으로이 삶을이 세상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삶인지 이것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권해하고 추구해 가는
삶이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우리인 선생님도 결국 막바지에 그 우리가
알고 있는 왜곡된 공자가 아니고 그 진심의 공자를 만났기 때문에 아 그것과음 이렇게 우리가 추구해온 삶이
내가 죽였던 삶이 정말에 같구나. 아, 그렇기 때문에 이인나 목사님께서
말년 20여년을 지금 공자와이 노노에 이렇게 깊게 이렇게
전착해서 무려 1천000 페이지 가까운 책을 이렇게 서내지 않았는가 이렇게 싶습니다. 입니다.
서울법대 1학년때 사법고시 예비시험 합격해 출세길 보장된 운명이 달라진 이유 | 수감중 신영복과 매주 단둘이 만나 토론해보니 | 책 '논어를 연찬하다'펴낸 이남곡 인터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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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 이남곡

December 07, 2025

이남곡(1945~)은 
전남 함평 출신의 사회운동가로, 서울대 법대 재학 중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으며,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4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후 농촌운동, 교사운동, 그리고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한 사회운동을 이끌며 '좋은마을' 운동을 펼치고, 『논어』 연구 및 강연 활동을 해오고 있는 인물입니다. 
주요 활동 및 이력
  • 초기 운동: 서울대 법대 재학 중 반독재 운동, 농촌운동, 교사운동에 참여했습니다.
  • 남민전 사건: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며, 이 경험을 계기로 사상적 전환을 겪습니다.
  • 사상적 전환: 옥중에서 불교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무아집·무소유·공자' 사상을 바탕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 이후 활동: 법륜 스님의 정토회와 관련된 불교사회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전북 완주에 '좋은마을'을 일구며 농촌운동과 공동체 운동을 이끌고 있습니다.
  • 저술 및 강연: 『논어를 연찬하다』와 같은 저서를 출간하고, 『논어』를 통한 삶과 사회에 대한 강연을 활발히 하고 있습니다. 
이남곡 씨는 남민전 사건의 투옥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불교와 동양 사상을 접목시켜 사회 운동을 펼쳐온 실천적 사상가로 평가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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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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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깃발
남민전 사건(南民戰事件)은 1979년 대한민국 유신 말기 최대 공안 사건이자 논란은 있지만 일부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된 사건이다. 1978년부터 1979년 4월 동아건설 회장 최원석의 자택 등 서울 강남 일대에서 벌어진 강도·절도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확대됐다.

1976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를 비밀리 조직한다. 1977년 1월,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민중의 소리를 여러 차례 배포하는 등 반유신 투쟁을 전개하고 민청학련을 위시한 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한다.

무장 혁명을 목표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과 연락을 시도하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를 밀반출해 비축하고 폭탄을 사제하던 중 민투위 강도 사건으로 수사당하게 된다. 1979년 10월 4일부터 11월까지 이재문, 이문희, 차성환, 안재구, 이수일, 김남주, 이재오를 비롯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조직원 84명이 구속당하였다. 공안 기관은 이것을 '북한 공산 집단의 대남 전략에 따라 국가 변란을 기도한 사건', '북한과 연계된 간첩단 사건', '무장 도시 게릴라 조직' 등으로 발표하면서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등의 협의로 처벌하였다.

후일 KBS에서 방영되었던 인물현대사에서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늘푸른한국당 대표를 지낸 이재오나 당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관련자들이 한 증언을 보면,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맹목으로 추종하는 조직이었다기보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등한 처지에서 협상하려고 했던 진보성을 띤 민족주의 성향 단체였다고도 한다. 
  •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역할 모델로 삼은 자생한 사회주의자, 진보성을 띤 민족주의자의 조직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맹목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더라도 냉전이 한창이었던 당시로서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들 중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재오 자신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관련자가 아니고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 소속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는데 유신정권이 비슷한 시기에 체포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와 엮었던 것일 뿐이라 주장한다.

2006년 3월, 노무현 정권에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 관련자 중 29명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 남민전 주도자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81년 옥사한 이재문과 1982년 사형당한 신향식은 제외되었다.

홍세화는 이 사건이 알려지기 전 모 기업의 프랑스 파견 직원으로 프랑스에 갔다가 이 사건이 알려진 뒤 프랑스로 정식으로 망명하였다. 홍세화 처지에서 바라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후일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실렸다.


사건
당시 내무부 장관 구자춘은 1979년 10월 9일 건국 후 반국가 활동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74명이 가담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의 총책 이재문(45)을 위시한 20명을 경찰이 검거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잔당 54명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고 하면서 이들이 "북괴의 적화통일 혁명 노선에 따라 폭력으로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종국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위대로서 지하에 반국가단체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학생, 지식인, 긴급조치 위반 수형자 등을 포섭하여 대정부 투쟁을 선도 조종하고 도시게릴라 방법에 의한 납치·강도 행위를 자행, 학원 및 사회의 혼란을 조성하고 민중 봉기에 의한 국가 변란을 획책해 온 자들로서 이들이 사용한 사제폭탄 소총 및 실탄 도검류 통신 문건 공작 장비 등 증거물 1374점을 압수했다."라고 밝혔다.

구체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가 당시 대한민국의 군사독재정권을 전복하려고 점조직으로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10대 강령, 9대 규약, 10대 생활 규범, 4대 임무 , 3대 의무 등을 제정한 후 인공기를 모방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깃발을 만들고 혁명 투사로서 가입할 때 선서하게 했다고 하면서 5명에서 12명을 일당으로 한 혜성대라는 결사 행동대를 조직하고 봉화산작전, 땅벌작전 등 암호를 사용해 서울시 강남구의 재벌 집과 동대문구 휘경동의 G모 사장 집에 침입하여 3회의 강도 행위로 당시 500,000여 원에 상당한 금품을 털고 추적하는 수위를 단도로 찌르기도 하였다.

구성
이재문 1964년 7월 인민혁명당 중앙상위조직부책으로 군사독재정권 전복 획책하다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민청학련 사건을 주모한 여정남을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1976년 2월 이만성(가명), 김병권(가명 김경인) 등과 함께 소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를 결성, 
위원장으로서 취임하여 점조직으로 학생, 교직자 등 74명을 포섭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조직 기구로 중앙위원회와 그 아래에 총무, 조직, 교양선전선동, 출판, 통일전선, 무력, 대외연락, 정보, 재정 등 9부, 검열위원회, 서기, 서울과 경북, 호남 등 3개 지역책을 두고

 중앙위원회 직속 하부 조직으로 민주투쟁국민위원회(한민성 가명)을 설치하여 산하에 청년,농민, 노동, 학생, 연합, 교양 등 6부와 지도요원 및 221개조 편성 암약하며 
김일성에게 "피로써 충성을 맹세"라는 서신을 보냈다.

재판
대법원(주심 이일규)은 남민전 피고인 58명 중에 이재문 등 57명의 상고를 기각하고 신동규에 대해 원심파기 환송하였다. 이에 따라 
신향식과 이재문 사형, 안재구, 최석진, 이해경, 박석률, 임동규 5명에게 무기징역, 
차성환, 이수일, 김병권, 김남주, 박석삼, 황금수, 김종삼에게 징역15년 자격정지15년, 
임규영, 노재창, 김부섭, 김영옥에게 징역10년 자격정지10년, 
이문희, 윤관덕, 김봉권에게 징역7년 자격정지7년, 
이계천, 이재오, 임준열, 심영호, 이학영, 김흥, 최광운, 김명, 백정호, 정만기에게 징역5년 자격정지5년,
 임기묵, 전수진, 최평숙, 권영근, 김정길, 이강, 김재슬, 김특진, 황철식, 최강호, 권오헌에게 징역3년 자격정지3년이 선고되었으며 
남민전 관련 전체 피고인 73명 중에서 김세원 등 6명은 상고를 포기했고 
상고한 67명 중에 김승균 등 9명은 상고이유서를 기한 내에 제출하지 않아 항소심 형량이 확정됐다.

같이 보기
  • 인혁당 사건
  • 민청학련 사건
  • 남민전 강도 사건
  •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
  • 남조선로동당
  • 사회로동당
  •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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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南朝鮮民族解放戰線 事件)
현대사 사건 1976년 반유신 민주화와 민족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비합법 지하 조직.

정의
1976년 반유신 민주화와 민족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비합법 지하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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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남민전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약칭으로 1976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이 결성한 비밀 지하조직이다. 1979년 10월 9일과 16일 그리고 11월 3일 등 3차례에 걸쳐 구자춘 내무장관이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남민전 결성을 주도한 이재문은 경북대를 졸업하고 민족일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사회운동에 가담해왔다.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고 1974년 민청학련과 제2차 인혁당 사건으로 수배자 신분이 된 상황 하에서 남민전을 결성한 것이었다.

남민전은 1977년 1월 반(半)합법 전술조직으로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를 결성하여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및 기관지 ‘민중의 소리’를 8차례에 걸쳐 배포하는 등 반유신투쟁을 전개하는가 하면 청년학생위원회와 함께 민주구국학생연맹, 민주구국교원연맹, 민주구국농민연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주요 활동은 유인물 살포 등과 같은 선전전이었으나 혜성대라는 별동대를 만들어 자금조달을 위한 강탈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이러한 활동이 꼬투리가 되어 1979년 10월 4일 공안기관에 의해 이재문(李在汶), 이문희, 차성환, 이수일, 김남주 등이 체포되고 그해 11월까지 84명의 조직원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재문은 1981년 11월 22일 감옥에서 사망하였고, 신향식은 1982년 10월 8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안재구, 임동규, 이해경, 박석률, 최석진 등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김남주 이수일 등은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관련자들은 형 만기 등으로 1988년까지 모두 석방되었으며 2006년에는 관련자 중 최석진, 박석률, 김남주 등 29명이 반유신 활동을 했다는 점을 근거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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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현대한국 사회운동과 조직』(조희연, 한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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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
제목(Title) :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

Subject :

사건발생일 : 19791009

사건종료일 : 19801223

사건내용 : <사건경과>
1976.2.29 :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하 남민전) 결성
1979.10.9 : 구차춘 내무부 장관, 남민전 사건 1차 발표
1979.10.16 : 구자춘 내무부 장관, 남민전 사건 2차 발표
1979.11.13 : 치안본부, 남민전 사건 3차 발표(이상 편집부 엮음, ??공안사건기록: 1964~1986', 세계, 1986, pp.103-104)
1980.2.4 : 남민전 1차 공판(동아일보 1980.2.2)
1980.2.7 : 남민전 사건 관련, 박현채(징역2년, 집행유예 3년) 등 항소심 선고(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소, ??암흑속의 햇불' 제4권, 1997, p31)
1980.4.14 : 서울형사지법, 이재문 등 8명 사형구형(동아일보 1980.4.14)
1980.5.2 : 서울형사지법, 이재문 등 4명 사형선고(동아일보 1980.5.2)
1980.9.5 : 서울고법, 남민전 항소심서 이재문, 신향식 사형선고(동아일보 1980.9.5)
1980.12.23 : 대법원 남민전 상고심 이재문, 신향식 사형확정(동아일보 1980.12.24)

<사건배경>
<남민전>은 1976년 2월 29일, 당시 반유신저항운동의 통일성과 지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지하저항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이재문, 김병권, 신향식, 안재구 등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조유식, ?이재문과 남민전?, ??말' 1992.8; 신준영, ?남민전 중앙위원 안재구 교수?, ??말' 1991.3; 편집부 엮음, p116). 

즉 <남민전>의 결성은 종속적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제기된 산업화의 ‘심화’기의 경제적 모순과 유신체제의 성립과 강화를 둘러싼 정치적 모순을 구조적 배경요인으로 하고, 이념적 급진화를 경험한 신혁명운동인자가 배출되었으나 독자적으로 혁명조직을 형성 운영할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 조건 속에서 성립하였다(조희연, ??현대 한국 사회운동과 조직', 한울, 1993, p180). 

이들은 당시 ‘현장투신론’과 ‘전위조직건설론’이라는 이분법을 지양하고, 노동자?농민 스스로 조직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고, 선전?선동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기존 대중조직이 있는 경우에는 올바른 변혁운동 방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활동하고, 기존 대중조직이 없는 계층?계급에게는 새로운 대중조직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기로 한다. 

이러한 지향을 가지고 <크리스찬 아카데미>, <가톨릭농민회>, <농업신용협동조합> 등의 성원 중에서 선진분자를 조직원으로 가입시켜 활동하게 했다(최현숙, [이 사람에게 듣는다: 남민전의 안재구], ??우리사상' 창간호, 1991, pp.336-337). 그리고 반파시즘 대중운동이 학생운동을 선두로 하여 일정하게 발전해 감에 따라 그것을 조직적으로 반영하고 지도하려고 하는 외곽방계 부문조직을 분화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검거를 맞게 되었다(조희연, p343).

<사건내용>
검찰은 1980년 4월 14일, 논고를 통해 “이 사건은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전략에 따른 인민민주주의혁명을 기도하면서 그들의 전략을 교과서적 지침으로 활용한 전형적인 반국가 변란기도사건이며 북한공산집단의 남한 혁명단체로서의 정통성을 계승한 비밀지하당 사건일뿐 아니라 북한공산집단과 간접적으로 연관된 간첩단사건”이라고 규정했다(동아일보, 1980.4.14). 이외 내무부 및 치안본부 발표문은 편집부 엮음, ??공안사건기록: 1964~1986', 세계, 1986, pp103-104, 이재문 공소장은 대검찰청 공안부편, ??좌익사건실록' 제12권; 편집부 엮음, ??공안사건기록: 1964~1986', 세계, 1986, pp.129-21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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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마을’대표 이남곡 서혜란 부부
연재  [불교신문 2479호/ 11월26일자]
입력 2008.11.22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나란히 옥살이를 했던 이남곡.서혜란 부부. 당대 최고의 ‘엘리트 부부’로서 사회개혁과 농민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전북 장수의 ‘좋은 마을’에서 ‘둘도 없는 도반’이 되어 자연과 더불어 새로운 꿈을 지피고 있다.

“佛心 버팀목 삼아 행복한 세상 만들 겁니다”

사회 변혁 꿈꾸던 부부, 야마기시즘 실현위해 정진

전북 장수서 새삶…“생명 넘치는 행복공동체 꿈꿔”

때는 1979년 가을 서슬퍼런 유신시절. 6.25 전쟁 이후 최대 규모의 연북지하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이하 남민전)서 활동한 부부는, 생후 6개월 된 갓난 아들을 남겨두고 철창에 갇혔다. 하루아침에 아들과 며느리를 빼앗긴 어머니는 홀로 남은 손자를 업고 무작정 집 근처 사찰을 찾아갔다. 당시 천막법당에 부처님을 모셨던 부천 석왕사는 가난과 공포에 떨고 있는 한 할머니를 따뜻하게 맞아줬다. 이남곡(66) 서혜란(56) 부부의 삶은 여기서 출발한다.

“어머님은 전쟁통에 아버님과 시동생을 잃고 오로지 남은 자식들 먹여 키우기 위해 사셨어요. 그 옛날 제 남편이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하늘을 얻은 듯 좋았고, 서울대 법대 들어가서 사법고시 자격시험에 덜컥 붙었을 때 세상이 다 당신 것인 양 행복하셨대요. 그러면서 ‘그 뒤부터 삐그러졌다’고 말씀해요…” 승승장구할 것만 같은 아들의 삶이 언제부턴가 더디고 굽어지고 있음을 느낀 어머니의 ‘삐그러졌다’는 말뜻을 알 것도 같다.

남편을 만나서 고생을 자초한 건 부인도 마찬가지. 경남 거창의 부잣집 외동딸로 태어나, 여성 엘리트계 산실과도 같은 이화여대서 역사학을 전공한 그녀는, 공동체적 삶, 혁명을 넘어 개벽을 지향하는 남편의 꿈에 자신의 인생을 걸었다.

잠시나마 남민전 활동을 했던 전력으로 남편과 나란히 형무소에 갇혔지만 그 역시 그녀에겐 후회와 고통의 시간만은 아니었다. “6개월만에 남편을 두고 저 혼자 석방됐지요. 어떻게든 먹고 살아야 했기에 아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서 친정집 근처에 양품점을 차렸답니다. ‘여자는 공부 잘해도 소용없다’ ‘저 집 딸 봐라’ 동네사람들이 수군대도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내 삶은 내가 선택했기에 책임지고 또 짊어지고 살아야 하니까요.”

경기고에 합격한 1960년 봄. 처음 서울땅을 밟은 이남곡씨는 당시 4.19를 온몸으로 겪었다. “그 시절엔 4월1일이 입학식이었지요. 학교 들어간 지 얼마지 않아 4.19가 일어나는 바람에 유일하게 알고있던 길(광화문~안국동)이 막혀 그날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나요.” 4.19혁명은 그가 시대에 눈 뜬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훗날 대학에 가서도 사회적 부자유와 불평등을 근원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마르크스의 사상에 심취한 인연이 됐다. 급기야 1964년 한일회담의 반대서열에 앞장서고 지하운동에 가담하기에 이르렀다.

남모르게 혁명을 꿈꿨던 그가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 이유 중 하나는 ‘불교’에 있었다. 당시 서울대 법대불교학생회에 가담해서 종교와 과학을 화두삼아 불교의 진정성을 탐구한 그다. 대학동기 중 출가한 휴암스님과의 인연도 작용했다.


그가 4년(1979~1983)이란 짧지 않은 복역생활을 끝내고 세상의 빛을 본 첫날, 휴암스님이 머물던 영천 은해사의 한 암자에서 사회구조와 더불어 인간의식 전환을 위한 ‘개벽’에 착안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정토회 법륜스님이 이끈 불교사연구소에서 새로운 인간과 사회, 새로운 문명을 고민하고 설계하기도 했다. “20세기가 낡은 집을 허무는 것을 주된 테마로 했다면 21세기는 새로운 집을 짓는 것이 핵심입니다. 억압과 착취, 빈곤의 긴 터널로부터 인류를 해방하는데 큰 획을 그은 지난날을 버팀목 삼아 이제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로 가야합니다.”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로 가기 위해 그는 안간힘을 썼다. 대안은 농촌운동. 교사자격증을 따서 농촌지역 학교에서 신바람나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반공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교사들을 계도했다. 농업근대화연구회, 푸른들신용협동조합 등 여러 농촌운동단체와 손을 맞잡고 농촌변화의 필요성을 외쳤다. 농촌사회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야 총체적인 사회변혁이 실현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 즈음 무아집 무소유 일체의 이념으로 집약되는 ‘야마기시즘’을 만났다. 야마기시즘 특별강습연찬회에 참여한 인연으로 8년여간 경기도 화성에 있는 ‘야마기시(山岸) 실현지’에서 새 삶을 꾸렸다. 소통의 방식(연찬)과 상생(무아집)과 나눔(무소유)이 공존하는 야마기시는 이들 부부와 더불어 두 아들과 고령의 어머니에게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당시 화성의 야마기시 실현지에 살 때, 석왕사 주지 영담스님께서 몸소 찾아주셨어요. 석왕사 유치원을 나온 두 아들은 청년이 다됐지만 어려웠던 시절에 만나셨던 스님과 어머님의 인연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고단했던 삶 속에서 절망과 아픔에 스러져갈 때, 스님께서 우리 가족에 베풀어주신 자비와 사랑은 잊을 수 없지요.”

서혜란씨는 한때 불치병에 걸려 생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갔었다. 이들 부부가 지난 2004년 화성을 떠나 전북 장수에 새 터를 닦아 둥지를 틀었던 이유도 그녀의 요양과 치유를 위한 방편이었다.

웬일인지 장수에 정착한지 얼마지 않아 병마는 기적처럼 사라졌다. 칠흑같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그녀는 정성과 사랑, 감사를 오롯이 담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된장과 고추장, 간장과 장아찌 등 맛깔스런 음식을 빚어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마을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논어를 ‘연찬’하고, 일상을 공유하고 내일의 흐름과 삶의 방향을 점검한다. 평생 한몸이 되어 울고 웃으며 새로운 꿈을 지피며 사는 이남곡 서혜란 부부. 이들과 같은 도반이 세상에 어디 또 있으랴.







이들 부부가 지향하는 공동체





품앗이가 아닌 ‘즐거운 노동’되게 해야



“의기투합해서 어렵게 만들어진 공동체가 왜 깨질까요? 단순해지려고 자연으로 돌아와 서로 내가 더 단순하다고 경쟁합니다. 누가 더 생태적인가 비교하기 시작하면 그 공동체는 무너지기 마련입니다.(이남곡)” 지난 1996년 경기도 화성에서 첫 귀농생활을 한 이들 부부는 8년만에 전북 장수에 새 터를 마련했다.

공동체 이름은 ‘좋은 마을’. 현재 세 가구가 살고 있고 내년에 두 집이 더 늘어난다. “우리가 이 작은 골짜기에서 ‘작은 마을’을 만들어가려는 것은 세상의 큰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고 이웃마을과도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까, 힘과 지혜를 모아 검토하고 실천하는 장입니다.(이남곡)”

첫 조건은 서로 다른 사람을 침범하지 않도록 선을 정하는 것. 적절한 간격이 서로를 존중하고 발전시키는 약이 된다는 설명이다. “독립된 단위세포가 모여야 원만한 생명력을 갖추는 법입니다. 공동체라고 해서 모든 울타리를 걷어내고 알게모르게 희생을 강요하면 생명력 있는 집단으로 승화시키기 어렵지 않을까요?(서혜란)”

마을 성원들이 생활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물질이 보장되는 요건도 중요하다. 거래로서의 품앗이가 아닌, 자유노동에 준한 즐거운 노동의 필요성도 제기했다. 개인의 자율성과 공동체적 협동이 조화를 이루는 마을을 말한다. 이남곡씨는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이후에 도래하는 무소유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수=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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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번암면 '좋은 마을' 이남곡 대표
김은정 웹승인 2011-06-14  전북일보
"제도·물질만으로는 안 되는 시대…의식과 생활 바꿔야"



장수 번암면 '좋은 마을' 에서 만난 이남곡 대표가 최근 자신이 주창한 신인문 운동에 대해 느릿느릿하고 부드러운 화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안봉주(bjahn@jjan.kr)



길을 잘못 들어 고생 꽤나 했다. 시골길이니 금세 찾을 수 있겠거니 했던 생각이 얼마나 당치않았는지는 자동차 겨우 한 대 지날 수 있는 산길을 서툰 운전솜씨로 되돌아 나오면서 절감했다. 세 차례의 통화 끝에 간신히 제 길 찾아 올라간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의 '좋은 마을'은 아름다웠다.



녹음이 짙은 산길을 따라 올라간 그 곳, 낮게 내려 지은 작은 집들이 선하게 모여 있는 마을 입구에 이남곡 좋은 마을 대표(66)가 나와 있었다.





"20세기의 진보가 낡은 것을 허무는 것이었다면 21세기 진보는 새로운 것을 짓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짓는 것과 낡은 것을 허무는 것은 그 주체와 동력과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새로운 인간 없이는 새로운 진보가 실현되기 어렵습니다."느릿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화법. 마치 좋은 강연을 듣는 것 같았던 이 대표와의 인터뷰는 세 시간 가깝게 이어졌지만, 들을 이야기는 아직도 많이 남았다.



-마을이 참 좋습니다. 녹음이 아름다워서 눈을 어디에 주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도 나이 예순에 처음 와본 곳 이예요. 장수는 60년 살면서 지나본 적도 없었는데 묘한 인연이지요. 집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 2004년인데, 그때는 우리 집 달랑 하나만 있었어요."



-지금은 이웃들이 있던데요.



"네 집이 우리 인연 따라 들어왔어요. 여기서 결혼한 부부 덕분에 네 살짜리 아이도 있고, 바로 윗집에는 초중학생도 있어요.'마을에 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한 일이죠."



-어쩌다 장수 이 산골까지 오셨습니까.



"2003년에 수원 야마기시 실현지에서 8년 공동체 생활을 마감하고 나오면서 집사람과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마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도 고립감이 있고 소통이 안 되니 적당히 거리가 있으면서도 작고 독립적인 마을을 만들고 싶었죠. 강원도 횡성부터 전남 해남까지 찾아다니다 만난 곳이 여기입니다. "



-선생님이 생각하시는'좋은 마을'은 어떤 곳인가요.



"공동체 생활은 무소유와 무아집이 중요한데, 관념은 있지만 체화 안 된 사람에게는 피곤한 일이예요. 부자유, 허위의식 이런 것이 발생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것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곳이 좋은 마을이라고 생각했어요. '좋은' 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생산력' '좋은 욕구' '좋은 소비', 이런 것들이죠."



-경험도 없으셨을텐데 곧 바로 회사를 차리셨더군요.



"처음에 항아리 열 댓개 들여놓고 장류사업 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취미 생활 하는 줄 알더군요. 그 뒤 생협과 관계하다 보니, 차츰 커져서 지금은 큰 항아리만 300개 쯤 됩니다. 이제는 제법 꼴을 갖춘 사업장이 되었어요."



-요즈음 강의 때문에 바쁘실텐데 사업은 누가 합니까.



"사장은 집사람, 나는 종업원. 또 직원 한사람이 있었죠. 그런데 작년에 집사람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어요.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고 참 어려웠어요. 큰 아들이 어렵게 결단을 내리고 들어와 사업을 맡으면서 나는 자진 퇴사했어요."



-논어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논어' 강의 활동으로 바쁘신데 언제부터 논어를 공부하셨습니까.
이남곡 대표가 본이니 만든 장류 생산 업체인 '좋은 마을' 에서 장류가 담긴 항아리들을 보여주고 있다. (desk@jjan.kr)

"논어도 예순이 넘어서 만났어요. 사실 내가 젊은 시절 사회운동으로 보낸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 시절엔 논어에 대해 반감이 깊었지요. 공자도 그렇고, 보수적이고 완고한 어떤 견고한 틀의 상징처럼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기 들어와서 사람들하고 소통하다보니 자꾸 얽혀요. 이해관계도 그렇고, 대화의 방식도 그렇고.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옛날분이라도 성현을 모시고 공부를 좀 해보자 했어요. 그때는 마을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을 때니까 장수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왔죠. 공동체 생활 같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죠. 새로 마을을 만들 때 사람들 심층의 의식이나 가치관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그 것 같다고 어설프게 같이 했다가는 크게 후회 하는 경우가 많죠. 심층의 의식이 서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해요. 그 연습의 장으로 한번 해보자 해서 논어를 선택했죠. 2년 동안 매주 했어요."

-논어 읽기의 성과는 있었습니까.

"논어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어요. 공자라는 사람 자체가 대단히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성현이고. 우리는 논어 읽기를 '연찬'이란 말로 씁니다. '연찬'은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하나의 방식이지요. 누가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읽고 서로 생각한 것을 이야기 하는 형식입니다."

-선생님께서 강조하시는 '연찬'은 무엇입니까.

"연찬이란 어떤 것에 대해서도 단정하지 않고 무엇이 진리인가라든지, 지금 시점에서는 어떤 것이 가장 옳은 것인가를 끝까지 함께(선생은 '함께'를 강조했다) 탐구하는 과정이지요. 가장 중요한 연찬 태도는 상대의 말을 그대로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의 말을 잘 듣는 것, 그것 참 쉽지 않은 일 아닙니까.

"맞아요. '잘 듣는 것' 쉽지 않지요. 공자는 이순이라 해서 60에 이르러서야 얻었다고 했어요. 자기 생각과 다르면 보통은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안들리죠. 자기 생각과 다르면 어떻게 저것을 반박할까 생각하느라 듣지 못하거든요."


-논어를 현대인들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열정이 각별하신 것 같습니다.

"논어에서 만난 공자는 무아집의 사람이더군요. 배울수록 완고해지지 않는. 이를테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일관성인데, 배워도 완고해지지 않는 것은 유연함이지요. 아집이 없어서 오는 유연함이 중요해요. 유연한 일관성은 바로 현대에서 필요한 리더십이기도 한데, 내가 보기에는 지금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과 일치해요."

-요즈음 높아지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보십니까.


"나는 우리의 지난 반세기 전체 과정을 혁명으로 봅니다. 실제로 신생독립국가 운동에서 한국만큼 민주화와 산업화, 이 두가지를 반세기에 성공시킨 나라가 없습니다. 그 결실을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물론 민주화에 대한 평가가 다를 수 있지만, 어찌됐든 적어도 절대 빈곤과 독재에서는 벗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만큼 행복해졌냐 하면 그것은 별개의 문제거든요. 오히려 다른 요소들이 있죠. 빈부 양극화나, 환경 파괴 같은···. 그러다보니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어떤 것이 진정한 자유인지, 이것에 대한 물음이 시작된 것이죠. 이런 성찰이 인문학으로 나타난 것이지 않겠어요. 그런데 인문학은 잘못하면 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지적 사치일 수 있어요. 그러니 그것을 진전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의식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차원이어야 하고, 그 중심은 자기를 넘어서는 것이어야해요."


-그것이 선생님께서 최근에 주창하시는 신인문 운동인가요.

"예전 문예부흥은 중세부터 근대로 넘어오는 분수령이 된 사상문화운동입니다. 유물론자들은 그것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역사를 보면 의식이 중시 되지 않는 운동은 다 실패했어요. 사회주의 다 실패했지 않아요? 그리고 결국은 지금 그 과제가 발생했습니다. 전쟁과 환경문제, 빈부 양극화를 해결하는데 이제는 제도와 물질만으로 안 되는 시대가 온 겁니다. 생활과 의식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나는 이것을 신인문운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결국 공동체여야 된다는 뜻인가요.

"'공동체'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그동안 너무 개인주의적인 이기심이 강하게 작동하면서 지나친 행위능력이 발휘되고 그렇다보니 전쟁이나 환경파괴, 빈부 양극화 같은 많은 갈등과 문제가 생겼죠. 그것을 해결하려면 생활혁명운동이 일어야 한다는 겁니다. 단순 소박한 삶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랄까요."



-단순 소박한 삶을 말씀 하셨는데, 귀농하신 분들의 지향이 그것 아닐까요.


"귀농하는 사람들 중에는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죠. 그런데 단순 소박한 삶은 도시에서도 할 수도 있는 일이거든요. 시골에 생태적인 삶을 살겠다고 온 사람들 중에는 누가 더 생태적인가 서로를 비교하며 비난하기도 해요. 이것은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태도가 아니죠. 비교하고 경쟁하고 질투하는 의식을 없애야 합니다. 형태적으로 소박한 삶이란 욕구가 변하면 자연스럽게 옵니다. 정신적 욕구가 커지다보면 물질적 욕구는 자연스럽게 감소하죠. 내핍을 강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녜요."


-귀농한 사람은 많은데 성공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큰 뜻을 품고 농촌에 온 사람일수록 실패하는 예가 많아요. 큰 꿈을 갖고 왔는데 그것이 실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자기 머릿속의 꿈이었을 때는 백번 실패합니다. 내가 〈진보를 연찬하다〉를 펴냈을 때 그것을 비판한 글을 본 적이 있어요. 내가 실태를 강조했더니 자기는 실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에요. 왜냐면 실태, 현실을 인정하면 꿈이 사라지니까. 놀랄 일이죠. 진보를 추구한다는 사람이 현실을 인정하면 꿈이 사라진다고 하니. 그런 꿈은 이상도 아닌 환상일 뿐이에요."



-선생님의 귀농은 성공하신 겁니까.

"내 경우는 귀농이라기보다는 공동체에 들어간 것인데 만족했어요. 나는 사실 도시 생활도 부정하지 않아요. 무엇이든 차별심을 두고 하는 것은 스스로가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자연환경 때문에 시골로 오는 사람이 있어요. 6개월만 살아보세요. 별것 아녜요.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에요. 특히 부부가 뜻을 같이해 세운 삶이라면 그야말로 확실한 로망이랄 수 있는데, 그것은 남진이 이미 불렀잖아요. '저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웃음) 그런 로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부부가 사이좋으면 이웃과도 좋아지고 마을이 화평해져요."



-명문고, 명문대를 나와 보다 성공적인 삶을 사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무소유적 삶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데에는 환경적인 요소도 있지만 타고난 기질도 있는 것 같아요. 나는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살았습니다. 서울대 법대 들어가서 남들이 하는 것처럼 사법고시 예비시험도 보았어요. 그런데 현실을 보니 내가 일신의 출세를 위해 살 때가 아니더군요."



-결국은 남민전에 연루되어 감옥생활을 하셨지요.

"남민전과 관련해서는 3개월 활동했습니다. 주체적이거나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운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나왔어요. 그런데 1년 있다가 사건이 터져서 15년 구형을 받았지요. 그동안 실사구시 하지 않은데서 비롯된 내 삶에 대한 댓가라는 생각으로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5년 선고에 4년 살고 1년은 특사로 풀려났어요."


-그 안에서 무슨 변화를 겪으셨습니까.

"그 전부터 내 사상의 변화가 시작되었었는데 그 안에 있으면서 심화되었어요. 제도만을 변화시켜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는 깨달음, 혁명에서 개벽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개벽은 총체적 변화지요. 제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생활까지 바뀌어야 하는."


-선생님께서는 '역사의 대긍정'을 말씀하시던데요. 수긍하기 어려운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이죠.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태도 중의 하나가 문명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예요. 나는 이것을 매우 위험하고 반지성적이라고 생각합니다.'대긍정'은 이루어진 현실 전체를 (실패한 경험이든 성공한 경험이든) 받아들여 그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나가보자는 그런 의미에서 내놓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 진보라고 하지요. 신자유주의 반대를 열심히 외치던 사람들이 생활에 돌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초자유주의예요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이런 것은 정치적 구호일 뿐이지 생명력이 강하지 못하죠. 사실 우리가 경쟁의 폐단을 이야기 하지만, 경쟁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진보가 해야 할 진정한 '진보의 길'을 찾아야 해요. 그것은 결국 실사구시에 대한 이야기지요. 사회적 실천으로 사회적 진보와 인간 자체의 진보를 이뤄야 해요."


-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한 말씀 전해주십시오.


"기개를 가져야 합니다. 이 시대는 젊은 세대들의 진정한 호연지기를 오히려 꺾고 있어요. 대학 만해도 어떻습니까. 대학은 새로운 문화 새로운 진보의 산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고루한 진보의 장이 되고 있지요. 시대는 순환하는 것이니 대학이 다시 창조의 산실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싶어요. 청년들이 그 안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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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남곡 대표는...

1945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으나 4.19혁명을 계기로 사회의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 사회변혁운동에 나섰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서면서 빈민운동에 참여하고 농촌학교 교사로 일했으며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렀다. 이때 사상에 큰 변화를 얻었으며 출옥 이후 법륜스님과의 인연으로 불교사회연구소에서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명을 연구했다. 이즈음 무아집 무소유로 집약되는 '야마기시' 사상을 만나 1996년부터 8년 동안 경기도 화성의 야마기시 실현지에서 생활했으며 이후 무소유 사회보다는 오늘의 실태에서 출발하는 보편적인 실천을 하고 싶어 장수군 번암면 유정리에 터를 잡고 '좋은 마을'을 만들어가고 있다.


논어를 통해 자기 성찰과 소통의 방식을 나누는 강연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으며 논실마을학교(장수군 번암면) 이사장을 맡아 실상사의 도법스님과 함께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운동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현대적 위기로부터 미래의 밝은 빛을 여는 운동을 의미하는 '신인문 운동'을 주창해 주목 받고 있다. 저서로 〈진보를 연찬하다〉를 펴냈으며 〈논어를 연찬하다(가칭)〉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좋은 마을'은 다섯가구가 사는 마을의 이름이면서 이 대표가 만든 장류 생산업체 이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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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0

논어를 연찬하다 | 이남곡 | 2025

논어를 연찬하다 | 이남곡 | 알라딘

논어를 연찬하다 - 전환과 통합을 위한 지혜의 서(書)
이남곡 (지은이)모시는사람들2025-11-20
































Sales Point : 1,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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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쪽


책소개
『논어』를 단지 해설하거나 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읽고 질문하고 서로의 삶을 비추며 “연찬(硏鑽)”하는 과정을 통해 공자의 사상을 지금-여기, 우리 시대의 언어와 현실 속으로 되살려 내는 책이다.

강의도 주석도 아닌, ‘집단적 사유 실험’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논어 이해의 전통 방식과 다른 길을 연다. 연찬은 ‘앎’의 확장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공부 방식이며, 공자의 가르침을 머리가 아니라 태도·실천·관계 속에서 되살리는 ‘철학하기’이다. 저자는 ‘성리학’이 오손(汚損)한 논어의 본래 면목을 회복함으로써 민주주의와 문명전환의 관점에서 인간을 다시 사유하며, 특히 오늘 한국 사회가 겪는 분열·증오·편가름의 시대에서 “난(亂)이 아니라 혁명(革命), 미움이 아니라 인(仁)”이라는 철학적 전환의 길을 제시한다.

따라서 『논어를 연찬하다』는 고전을 새롭게 읽는 책이 아니라, 고전을 함께 “살아내는” 새로운 배움의 책이며, 동시에 숨어 있던 공자의 본령을 ‘연찬’이라는 방식으로 복권해 현대적 지혜로 확장한 실천적 인문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