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5

알라딘: 붓다의 치명적 농담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別記 2011

알라딘: 붓다의 치명적 농담

















 
 
 

붓다의 치명적 농담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別記
한형조 (지은이) 문학동네 2011
-03-09 


8.7
 

관련상품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강의 (총 3권)  
 
붓다의 치명적 농담 + 허접한 꽃들의 축제 - 전2권
절판
 
허접한 꽃들의 축제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소疏
판매가 23,750원
 
붓다의 치명적 농담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別記
판매가 21,850원 

 동양철학을 삶의 문제로 귀환시킨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해설서 두 권이 나왔다. 이번 <붓다의 치명적 농담>에서는 마음과 일상의 차원에서 <금강경>의 기본 정신을 해설한다. 이 책에 붙은 부제인 ‘금강경 별기’란, 곧 <금강경>에 대해 저자가 각별히 따로 쓴 ‘별도의 해설’이란 뜻이다.

<금강경>이 전하고자 하는 근본 ‘정신’을, 다양한 언설 속에 숨은 중심 아이디어를 콕 집어 들려준다. 무엇보다 큰 특징은 풍부한 일화와 변죽에 있다.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일상의 에피소드들이 불교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믿음의 산물이다. 예컨대 만공스님의 음담패설 법문을 통해, 저자는 곁에 두고도 못 깨닫는 중생의 어두운 눈을 일깨우는가 하면, 영화 ‘라쇼몽’을 통해 욕망이 빚어낸 상相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보시를 베풀고 덕을 실현하는 방법을 논하며 아내의 젖은 손을 묘사할 때, 그의 문장은 편편의 에세이처럼 쉽고 편하게 서술된다. 그래서 이 책은 입문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일상의 언어로 흥미롭게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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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가르침이란 본시 내 속에 있던 어떤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시켜주는, 선가의 말을 빌리면 ‘지시指示’일 뿐입니다. 그래서 옛 선지식들이 하나같이 “나는 네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의발을 찾아 천리 먼 길을 쫓아온 혜명에게 육조 혜능 스님은 분명히 일렀습니다. “비밀은 이미 너에게 있다.”
저는 이런 비유를 들곤 합니다. “마음의 소식은 흡사 방 한구석에 먼지 덮여 있는 어릴 때의 장난감 같은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그것을 돌아보지 않게 되었다. 우리의 시선은 세상 사는 일에 고착되어 있어, 한때 순수한 기쁨이었던 그 물건을 더 이상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장난감은 늘 그곳에 있었다. 아련한 향수가 밀려들거나, 누군가가 일깨워줄 때, 그는 거기 그 장난감이 오래전부터 있었음을 새삼 알게 된다. 우리의 불성 또한 그와 같다.”
다시 말하지만,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그 비밀은 우리 자신에게 미리 알려져 있는 것들입니다. 혜능 스님의 권위를 빌리면, “보리반야의 지혜는 본래 세인들에게 갖추어져 있습니다菩提般若之智世人本自有之.” 저는 불교가 노리고 있는 그 지식이, 비록 비밀스럽다고들 말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특별한 오랜 수련을 통해, 그동안 꿈도 꾸어보지 못한 어떤 것들이 비로소 완전히 새롭게 등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깨달음은 우리에게 언제나 알려져 있습니다. 그 깨달음은 마음의 밝음으로서, 욕망과 분노와 무지의 먹구름 틈 사이에서 늘 빛나고 있는 어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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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재보살은 “이제는 자유롭게自在 사물을 볼觀 수 있게 된 분”을 뜻합니다. 자유롭게 보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자유롭게 본다는 것은 전망대 위의 망원경처럼 사방팔방을 이리저리 마음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또 지구 저편의 누드 비치를 엿보는 엉큼한 ‘신통력’이 아니라, 자신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사물을 볼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관견管見’이란 말이 적실히 말해주듯, 우리는 자신의 욕망과 관심이라는 좁은 대롱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기 때문에, 우리는 사태의 다른 측면은 물론이고, 전체를 보기는 더욱 더욱 아득합니다. 그래서 전체를 보는 통찰력, 즉 일체지一切智는 여래와 부처의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중생들에게 세상은 모두 나我의 이미지相로만 존재합니다. 우리는 다만 욕망과 관심이라는 색안경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사람을 만납니다. 불교는 그 좁은 새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창공을 날고, 거기서 독수리처럼 세상을 조견照見하라는 ‘조감鳥瞰의 권고’입니다. 이 조감이 무슨 이득을 주느냐고요. 그 바라봄으로 하여, 오직 그 통찰을 통해서만 인간은 일체의 고통과 번민으로부터 궁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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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에크리르
˝돈오라는 점에서 내가 어디 부처와 다르겠느냐만, 다생多生의 습기習氣가 깊어서……… 바람은 멎었으나 물결은 아직 일렁이고, 진리를알았지만, 상념과 정념이 여전히 침노한다帶同佛, 多生智氣, 風傳波尙게, 理現念猶侵.˝


SIGMADREAM
[…] 이를테면 유시그이 교설은 한역으로 읽기가 매우 까다롭고 애매하다. 현장이 굳이 인도로 떠난 것도 그 때문이고, […] 현장의 신역을 통해 불교를 더욱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SIGMADREAM
혜능이 […]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 “입으로만 경전을 외지 말고 마음으로 믿고, 몸으로 실전하라”는 것이다.



이매지
혜능이 『육조단경』과 『금강경 구결』에서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 '입으로만 경전을 외지 말고 마음으로 믿고, 몸으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성自性을 직접 보고, 그 금강金剛의 반야般若로 생사의 바다를 건너 저 너머 영원한 평화와 안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때가 바로 경전을 '이해'하는 때이고, 불교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후퇴 없이 가지는 때이다. 그때 불교는 구구절절 살아 있는 말씀으로 가슴을 울린다. 아니, 우리 자신이 곧 말씀이 된다. 이와 더불어 불교의 지식은 단순하고 간명하게 정돈되어간다. 복잡성이 줄어들고, 산만한 것이 중심을 얻어 정돈되며, 거기서 깊이가 자라난다. -18쪽

이매지
아마추어가 외람되이 나선 것은 전문가의 불교가 너무 어려워서입니다. 지금 불교가 설정한 목표는 너무 높고 험준해서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듭니다. 그런데다 전문가들의 말은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가 버겁습니다. 이렇게 난해와 모호에 지친 사람들을 향해 이번에는 너무 격이 낮고 곁가지인 지루한 이야기들이 번지고 있습니다.
요컨대 한편에서는 한문 경전의 용어와 어투를 그대로 외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화두선을 중심에 세워 일상의 대화와 상식의 접근을 근본 차단하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한국불교의 가장 큰 문제가 이 소통의 부재입니다. 스님들과 제가 신도들 사이에도 그렇고, 불교학자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23쪽

이매지
제가 불교를 말할 때 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팔만 사천의 법문을 모두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십시오. 불교의 비밀은 여러분이 늘 말하는 그 익숙한 불교 용어와, 늘 독송하는 사구게 속에 있습니다. 그 뻔한 구절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눈에 밟힐 듯 선명하게 다가올 때, 그때 여러분은 불교와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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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한형조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노강서원.화양서원>,<느낌, 축복인가 수렁인가>,<문헌서원.심곡서원.도봉서원> … 총 38종 (모두보기)
동해안의 바닷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산의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불교로 동양학에 입문하여, 일상에서 구원을 모색하는 유학을 공부했다. 다산 정약용의 고전해석학(經學)을 다룬 "주희에서 정약용으로의 철학적 전환"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동안 띠풀로 덮인 동아시아 고전의 옛길을 헤쳐왔다. 고전을 통해 삶의 길을 배우고, 문명의 비평적 전망을 탐색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왜 동양철학인가>(2000), <왜 조선유학인가>(2008)>, <조선유학의 거장들>(2008), <붓다의 치명적 농담>(2011)>, <허접한 꽃들의 축제>(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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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금강경, 그 빛나는 ‘삶의 기술ars vitae’
철학과 종교를 뛰어넘어 인생에 대한 통찰을 열어주는 우리 시대 불교의 의미

왜 사람들은 그토록 수많은 처세서를 읽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인생을 ‘구원’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인가.
‘오늘날’ ‘여기’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부려 동양철학을 삶의 문제로 귀환시킨 한형조 교수의 본격 『금강경』 해설서 두 권이 드디어 출간됐다. 마음과 일상의 차원에서 『금강경』의 기본 정신을 해설한 『붓다의 치명적 농담』, 그리고 반역의 정신으로 『금강경』 원전과 육조 혜능의 목소리를 번역한『허접한 꽃들의 축제』. 이 두 권의 책은 오래된 자기 소외를 벗고,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일러준다.
이 책은 “모던하고, 경쾌하다”. 불교 한문 투에 지친 사람들, 화두라는 일초직입一超直入의 험준에 한숨 쉬던 사람들에게, 가히 가뭄 끝의 단비라 할 만하다.
특히 한형조 교수의 저술은 엽기와 과감을 각오하고 종횡무진, 이 위대한 경전을 자유롭게 풀어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 자유로움은 역설적으로, 그가 모든 원전과 이에서 파생된 다양한 해석을 형형한 눈빛으로 꿰뚫고 있기에 가능했다.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강의’는 ‘종교’가 아니라 ‘인문’으로 불교에 접근한다. 종교적 도그마에 발목 잡히지 않고, 제도 의례의 관습, 집단의 논리를 떠나, ‘불교’ 그것이 알려주는 ‘인간학’에 오로지 집중한다. 그리하여 각자의 종교적·문화적 배경에 상관없이 심금에 닿도록 배려했다. 두 권의 책은 실존의 변화, 작지만 위대한 구원의 불씨를 각자의 가슴에 지펴줄 것이다.

비의의 안개를 헤치고, 벼락처럼 내리치는, ‘다이아몬드의 경전’이 전하는 삶의 기술.
일상의 언어로 풀어 쓴 『금강경』 입문서
무심코 마시는 차 한 잔에도, 어느 날 문득 눈치 챈 아내의 젖은 손에도 여여히 살아 있는 법法을 구하다.

● 우리 모두는 로맨티스트입니다, 지독한……
자기기만이 일상이 되었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과, 실제 삶 사이의 심연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눈앞에 놓인 수많은 의무와 목표를 잠시 내려놓은 채 생각해보자. 이것이 인생인가? 저자는 말한다.
“삶의 목표는 쾌락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속 깊이 이상주의자들입니다. 로맨티스트들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왜 보살님네들이, 남편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아이들도 다 컸으며, 아파트 평수도 남부럽지 않은데, 왜 절을 찾아,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대웅전에 참배하고, 참선에 열중하십니까. 그것은 외면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우리 내면은 여전히 가난하고, 불만족스럽기 때문이 아닐까요.”
불교는 이 근본 곤경을 타파해 구원과 행복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 경전이 ??금강경??이다. 난해한 한적과 독특한 사고의 베일에 가려 있던 그 ‘삶의 기술’을 이제 생생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다.

● 초심자를 위한 ‘별도의 해설別記’
이 책에 붙은 부제인 ‘금강경 별기’란, 곧 『금강경』에 대해 저자가 각별히 따로 쓴 ‘별도의 해설’이란 뜻이다. 『허접한 꽃들의 축제』가 『금강경』 원문과 이에 붙은 다양한 해석을 새로운 번역으로 펼친 책이라면, 『붓다의 치명적 농담』은 『금강경』이 전하고자 하는 근본 ‘정신’을, 다양한 언설 속에 숨은 중심 아이디어를 콕 집어 들려준다.
저자는 ‘깨달음’이 ‘이미’ 여기 와 있다고 말한다! 이 선언은 오랜 수련을 통해 새로운 경험이 신비적 초월적으로 돌파된다는 저간의 통념을 배반하는 새로운 목소리이다.
핵심은 공空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가 사실은 자아의 구성물임을 일깨우는 말이다. 여기가 불교의 주춧돌이다. “인간이 처한 곤경은 자아의 과도한 개입에서 생긴다.” 이 점에서 불교는 그 현란한 발전과 수많은 개성에도 불구하고 같은 곡조를 읊고 있다. 이 책은 자아가 빚어낸 우상이 어떻게 구성되고 강화되며, ‘소외’로 이끄는지를 설파하고, 그것을 타파하기 위한 “붓다의 약상자들”을 구체적 일상의 지평에서 설파하고 있다.
저자는 불교사의 다양한 굴곡을 일이관지一以貫之, 질긴 실 하나로 꿰어나갔다. 소승 아비달마의 분석에서 대승 유식의 정신분석과, 중관의 변증논리, 화엄의 연기적 세계관, 선의 단도직입이 결국은 ‘단 하나의 진실’을 알려주기 위한 장치라고 설한다. 뿐인가, 노장의 세계관과 12세기 삼교통합의 체계인 주자학까지 이 지적 향연에 초대했고, 특별히 한국 불교의 최고봉인 원효의 삶과 사상을 통해 불교의 진면목을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불교는 여럿이지만 하나다!”

● 일상의 언어로 다시 찾은 『금강경』, 그 흥미로운 ‘프리퀄’
이 책의 특장은 역시 풍부한 일화와 변죽에 있다. 아무런 연관이 없어보이는 일상의 에피소드들이 기실 불교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믿음의 산물이다. 예컨대 만공스님의 음담패설 법문을 통해, 저자는 곁에 두고도 못 깨닫는 중생의 어두운 눈을 일깨우는가 하면, 영화 〈라쇼몽〉을 통해 욕망이 빚어낸 상相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보시를 베풀고 덕을 실현하는 방법을 논하며 아내의 젖은 손을 묘사할 때, 그의 문장은 편편의 에세이처럼 쉽고 편하게 서술된다. 그리하여 이 책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금강경』 입문자를 위한 자못 친절한 독송이 되었다.
접구매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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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빠 2016-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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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오의 해석이 재미있네요.갑작스럽게 깨닫다가 아니라 깨달음은 이미 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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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이엉덩이 2018-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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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는 별로.본인 말처럼 사설이 길고 금강경 도입만 얘기하고 있어 나에게 도움이 안된 책.무비스님책이 참 잘되어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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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 201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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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관 때부터 감탄했던 탁월한 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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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기꽃 201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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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감각이 불완전 하기 때문에 내가 보는 것들이 허상일 뿐 실체가 아니며, 욕심을 버리고 집착하지 않도록 붓다에게 배웠습니다. 이름도 그냥 편하게 붙여진 이름일 뿐 실체가 아니지요. 우리는 그런데 그 이름에 많은 집착을 하고 전부라 생각합니다. 내 고집, 편견, 집착을 깨뜨리도록 도와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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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챙이 2011-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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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적 깨달음은 없다. 깨달음의 시, 공간적 의미를 조금 느꼈습니다. 좋아요.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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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 2011-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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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오한 금강경을 이렇게 쉽게 설명해주다니! 한형조 교수는 진정한 불교학자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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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wife 2012-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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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기가 본문 해설보다 더 재미있네요. 무문관 쓸 때보다 구력이 세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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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왕 201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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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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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온 20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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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대체 어디있느냐. 저 사람이 보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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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빤스 2021-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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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히 읽고 있다. 쉽게 풀어내어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 242 페이지 지미(知味)가 언급된 유교 경전은 대학이 아니라 중용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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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nye91 201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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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불교는 우리 생활에서 많이 멀어졌다. 우선 마을에 있던 사찰이 탄압으로 인해 산 속으로 갔고, 산 속에 있음으로 해서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찾아갈 수 있게 됐다.



그렇게 산 속으로 간 불교는 산 속에서 자신들만의 언어로, 자신들만의 수행에 빠져들게 되었고, 그럼으로 인해 더욱더 사람들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다.



신비주의. 산 속에 있는 절을 생각해 보라. 어떻게 이렇게 좋은 곳에 자리잡았는지... 늘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큰 맘 먹어야 갈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산사(山寺)였고, 산사 속에서 스님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살아왔기에 감히 쉽게 만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런 불교는 특히 경전이 더 어렵다. 한글로 번역된 책들을 보아도 이게 뭔 말인지 싶고, 한문은 해석할 능력도 없으니 안 되고, 이 책에서는 영어가 지금 현대인들에게 더 친숙하다고 했는데, 그것도 영어 공부를 한 사람들 얘기지 영어와 거리가 먼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영어는 더욱 더 어렵고, 그렇다고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어를 알 수도 없으니...



이래저래 불경은 더욱 어렵다. 누군가 해설을 해주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고, 해설을 해주어도 뭔 소리야 하기 쉽다.



이렇게 된 데에는 스님들의, 불교를 공부하는 학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자신들의 세계에만 빠져 있지 않기 위해서는 스님들이, 불교학자들이 더 쉬운 언어로 저잣거리의 사람들에게 불교를 알렸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마치 불교 책 중 하나인 십우도를 보면 깨달음을 치열하게 추구하다가 깨닫고 난 뒤에는 다시 저잣거리로 나갔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남에게만 미룰 수는 없는 일. 불교에 관심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찾아보아야 할 일이다. 찾다보면 자신의 성향에 맞는, 수준에 맞는 책들을,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 책은 제목이 재미있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 그래서 제목에 속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제목이 이러니 불교에 관한 우스개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인가 싶어 손에 들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작은 제목은 무섭다.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다. 금경강에 대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쓴 책이라는 뜻일텐데... 농담과 별기라니.



어렵다고 생각하는 불교를 전혀 어렵지 않다고 이야기하기 위해 '농담'이라는 말을 썼을 거라 생각하고, 금강경이라는 불경을 하나하나 주석해 가는 것이 아니라, 금강경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써냈기에 '별기'다.



그래서 이 책은 금강경에 대한 주석서도 아니고, 불교의 일화에 대한 책도 아니다. 불교에 대해서 결코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안내해 주는 책인 것이다.



이런 저런 선지식들의 불교에 대한 해석을 멀리하고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게, 저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해석을 들려주고 있다.



경전에 매달리지 말고 불교 고승들의 말에 매달리지 말고, 불교학자들의 해석에 매달리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지녀라.



이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불교는 결코 멀리 있는 진리를 찾으라고 하지 않는다. 진리는 이미 네 안에 있다. 네 안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다만, 그 깨달음 이후 그것을 실천하는 머나먼 길을 가면 된다.



그러니 시작하자. 자신을 돌아보는 일부터. 자신의 주변을 살피는 일부터. 하나하나 진심을 다해. 이것이 바로 불교의 기본이고 시작이다.



아마도 불교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 책을 읽으면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질 것이다. 그만큼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써내려간 책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금강경의 내용을 풀이하는 책도 내겠다고 했으니, 그 책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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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ulu 2012-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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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각, 틱낫한, 달라이 라마.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로부터 이책의 질문은 시작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국인이 아니면서 한국어를 쓰는 스님들보다 한국에서 더 알려졌고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 하버드대 출신이라서? 프랑스에서 활동하기에? 세계의 지도자라서?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지만 언어가 근본적인 이유라 저자는 말하낟. “그들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유행하는 이유는 이런 배경 탓이 아니다. 비밀은 그들이 쓰는 언어에 있다. 한문고전을 읽혀보면 학생들이 도무지 번역본을 읽을 수 없다고 불평이다. 유교 경전이든 불경이든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일어, 중국어, 영어 번역본을 던져주면 학생들은 영어 번역본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학생들은 영어 번역본을 통해 해당 ‘문장’의 의미를 적어도 애매한 구석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물론 영어권 동양학자들의 실력이 좋긴 하지만 중국은 모르겠지만 일본학자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 그럴까?



“영어가 한문이나 중국어보다 더 우리말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말은 19세기 후반에 근본적 변화를 겪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은 이전의 한자어나 우리 고유어가 아니라 일본이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새로 창안한 번안어들과 거기 걸맞는 어법을 주축으로 한다.” 사실이다. ‘술 권하는 사회’란 단편을 보면 일본유학씩이나 한 남편이 돌아와서는 술주정뱅이가 된 이유를 물으니 사회가 술을 마시게 한다는 말을 듣고 주인공의 아내는 나쁜 놈이라 욕을 한다. 사회란 말을 처음들어본 것이다. “우리는 한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전통 한자가 아닌 근대적 신조어로 말한다. 이런 말들은 거의 의미 손실 없이 서구어로 대체할 수 있다. 이방인 포교사들의 성공신화, 그 비결은 그들이 쓰는 언어의 프리미엄에 있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쓰는 말에 가까운 영어를 쓰고 있고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일상의 체험 위에서 정직하게 설파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작년부터 인기를 끈 코이케 류노스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알기 쉬운 구어로 일상을 통해 불교를 설명한다. 그러나 코이케 류노스케의 책을 불교서적으로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가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불교교리이다. 단지 그것을 쉽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언어로 말할 뿐이다. 그가 말하는 생각버리기(번뇌귾기), 화내지 않기, 침묵 등등은 모두 불교 수행에 언급되는 주제들이다. 그러나 그의 책은 자기계발서로 읽히지 불교서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한국에서 불교는 무슨 의미인가란 질문을 던지게 한다.



우리말이 달라졌다는 것은 그 말을 쓰는 사람의 생각이 달라졌단 말이며 그 생각의 맥락인 사회도 달라졌다는 말이다. 우리는 전통을 버렸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전통은 반 세기 이상을 올라갈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유교나 불교는 무슨 의미인가?



의미를 물으려면 먼저 그것이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그 질문을 불교는 철학이냐 종교냐로 이해한다. 유교도 그렇지만 불교가 철학이냐 종교냐에 대한 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이다. 답이 애매한 것은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불교도 유교도 서양철학과 같은 논리학, 존재론, 인식론의 체계가 없다. 그런 체계는 서구의 전통에서 유의미한 것이고 서구와 다른 문제의식을 가졌던 불교와 유교에게 그런 체계가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물론 풍우란이 처음 중국철학사를 썼을 때 보여주려 했던 것처럼 억지로 끼워맞추려면 또 그런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양철학과 같은 질문을 가지지 않았던 지식체계가 동일한 틀을 갖는가 묻는 것은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그러면 종교인가?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이었을 뿐 종교냐 아니냐를 묻지 않았다. 철학이 필로소피의 번역어로 성립한 것처럼 종교 또한 번역어일 뿐이다.” 종교냐 아니냐의 기준 역시 당연히 그들의 기준이고 그 기준은 유일신을 핵심으로 한다. 그런 신은 당연히 불교엔 없다. 그래서 “불교는 무신론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불교가 기독교와 맞서 스스로를 변호하고 선전한 전략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루돌프 오토의 기준처럼 ‘종교의 핵심을 ‘인간의 궁극적 관심’으로 전향한다면 불교나 유교는 인간의 구원이라는 최종적 관심으로 돌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깊이 종교이다. 또한 인식론의 복잡성이나 논리적 엄밀성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원래 그리스와 로마에서 그랬듯, 삶의 길을 계시하는 지혜에 대한 갈망과 추구로 규정한다면 불교와 유교만큼 철학적인 것 다시 없다.”



“철학과 종교의 새 이름이 등장하면서 유구한 전통의 불교와 유교는 때아니게 정체성을 의심받고 정당성을 도전받았다. 그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물음 앞에서 우리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모든 질문은 권력적이다. 누가 묻는가의 주도권을 서구가 거머쥠으로써 질문에 당황한 불교와 유교는 혹은 부끄러워하고 변명하고 저만큼 피해갔다. 그때 정신을 차리고 이렇게 물을 수 있어야 햇다. ‘너희들 기준으로는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유교도 철학이 아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되는가. 가르침이고 배움이면 족하지 않은가.’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물을 수 있었어야 했다. ‘예수는 과연 깨달은 사람이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해탈을 위한 적절한 지혜인가 아닌가.’”



그렇다면 불교의 구원과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무아론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가 말하는 Good News(복음)가 아니다. “누구도 자신이 모르는 것을 새로이 알 수는 없다. 만일 안다면 그것은 마군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누구도 상대방이 모르는 것을 가르쳐 줄 수 없다. 가르침이란 내속에 있던 어떤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시켜주는, 선가의 말을 빌리면 ‘지시’일 뿐이다. 그래서 옛 선지식들이 하나같이 ‘나는 네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햇다.”



이미 갖고 있는 것이기에 줄 수 없는 것, 그것을 불성이라 햇다. 그렇기에 저자는 불성을 보는 견성, “돈오는 쉬운데 정말 점수가 어렵다”고 한다. 지눌은 “돈오란 다름 아니라 ‘마음의 실상에 대한 지적 이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불교의 이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으되 그 이치를 진정 믿기가 어렵고 그 가르침대로 살기가 어렵다.” “돈교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 너머에, 깨달음이니, 구원이니, 법계니, 정토니가 결코 없다는 사자후이다. 돈교는 지금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이 바로 ‘절대’임을 그토록 간절히 친절하게 일깨워주려 한다. 그래서 입만 열면 ‘깨달을 바도, 얻을 바도, 설할 바도 없다’고 했다. 다만 눈을 들어 ‘쳐다보라’고만 했다.”



쳐다보기만 하면 되는데 보지 못하니 만공은 몰락한 상궁 나인들이 찾아와 법문을 청할 때 이렇게 말했다: “저 산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도 뚫는데 우리집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단순한 비유만은 아니라 저자는 말한다. “불성이란 바로 지금 역력한 ‘생명’의 불가사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쉽게 말하자면 “삶의 목표는 쾌락이 아니다.” 아무리 욕망을 채워도 행복해지지 않는 이유이다. 남부럽지 않게 성공했더라도 그 “내면은 여전히 가난하고 불만족스럽다.” 탐욕은 좋은 것이라며 욕망을 무제한으로 채워도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자기욕구라는 환상’ 속에 있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것이란 생명의 자연적 발현이 아닌 것 모두를 뜻하낟.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 욕구와 충동은 ‘이미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그래서 늘 ‘넘쳐난다’ 이 진단에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러지?’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다. 깨달음이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낡은 것이다. ‘내가 그동안 오염된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것, 그런데 내 이제 그 실상을 투명하게 알겠다’는 발견이 곧 깨달음이다. 그래서 ‘깨달음으로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사람이나 세속적 성취욕이 강한 사람, 그리고 사회적 교제와 정치적 성공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유형들은 불교를 가까이하기 어렵다. ‘나 이렇게 살다 갈래’하면 대책이 없다. 불교는 아무 것도 줄 것이 없다. 오히려 한사코 뺏으려 한다.



무아와 공은 동의어이다. 나는 없다 나는 비었다는 말이다. “공(空)이란 ‘자기 이해와 관심’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려보자.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눈이 있어 보고 귀가 있어 듣는 것이 아니라 보려는 욕망이 눈을 만들었고 들으려는의지가 귀를 만들었다고 한다.보려는 욕망이 없으면 사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의 책 제목처럼 세계는 의지의 표상이며 의지의 산물이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세계는 법(法, 객관적 실제)이 아니라 상(相, 주관적 세계) 즉 오로지 식(唯識)이다. “인간의 욕망은 이 세상을 혼란시키고 비참을 증폭시키는 원흉이다. 언어는 그 첨병이다. 언어는 실재를 드러내기보다 감추며 비추기보다 왜곡한다. 그래서 불교는 언어에 대한 불신을 선명히 드러낸다. 어떤 불교학자는 불교의 이런 인식을 언어혐오증이라 부르기도 한다.”



욕망이 가린 것을 드러내기 위한 한 방편이 아비달마이다. “아비달마는 ‘나’를 ‘타자’로 말하고 적는 기술이다. 이 전략은 나의 개입이나 오염이 배제된 순수객관적 사태들 즉 다르마들(諸法)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가령 ‘나는 오늘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보냈다’를 아비달마는 매우 부정확하고 들뜬 문장이라 생각하여 이렇게 고친다: 1. 두 물체가 있다. 그리고 2. 사랑한다는 감정과 슬프고 아쉬운 감정(受)이 있다. 3. 눈문을 흘리는 한 물체가 다른 손 흔드는 물체를 지각(想)한다. 4. 떠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충동(行)이 있다. 5. 이 사건을 의식(識)하는 과정이 있다. 아비달마의 이 오래된 분석은 무아를 각인하고 그것을 삶 속에 구현하려는 지혜의 방편이다. 나에게 속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남의 것이엇다는 것, 아니 세계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방편이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 것을 자기 비우기라 하며 공이라 한다. 내가 느끼는 감정도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기에 “실제 고승들은 어떤 일의 충격이 잔류하는 기간이 아주 짧고 후유증이 거의 증폭이 안된다고 한다.”



“불교의 지혜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격과 자아를 오온의 객관(法)으로 해체하는 작업에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8정도의 하나인 정념, 위빠사나는 “내 몸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것을 차갑게 주시하고 관찰하는 일이다.” 방법 자체는 쉽다. 그러나 하기는 쉽지 않다. “1분을 제대로 할 수 있으면 반쯤 도통했다는 소리가 나온다. 느닷없이 끼어드는 차에 대고 바로 욕이 튀어나오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것을 회광반조, ‘아하 내가 지금 마음 속에 화의 불길을 일으키고 있구나’하기는 어렵다. 어구나 그것이 일어나고 축적되고 변화하고 사라지는 생주이멸의 과정을 ‘남의 일처럼’ 차갑게 관찰해나가기는 정말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어려운 일은 무아를 들여다보기 위한 기초작업이다. “무아란 ‘네 자아란 없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너무 많은 자아가 있어 어느 것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란 뜻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정념으로 들여다보면 “우리 각자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 그 무상한 변화는 누가 일으키는 것일까. 나는 스스로 정립하는 주체가 아니고 타자에 의해 상황에 의해 세워지는 허수아비요 물거품이다. 그러므로 단 하나의 얼굴로서의 주체 혹은 자아는 없다. 이것이 무아의 뜻이다. 달마와 혜능뿐 아니라 셰익스피어도 이렇게 곤혹스럽게 물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이 왜 문제인가? 상은 법의 굴절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모두 나의 이미지(相)으로만 존재한다. 우리는 다만 욕망과 관심이라는 색안경을 통해서만 사물을 보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사람을 만난다. 불교는 그 좁은 새장을 벗어나 자유롭게 창공을 날고 거기서 독수리처럼 세상을 보라는 조감(鳥瞰)의 권고이다.



우리는 사람과 만난 적이 없다. 비즈니스 상대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가깝다는 가족이나 친구도 까마득히 멀어보인다. ‘안아도 안아도 아드간 아내의 허리’ (고은). 그는 나를 좋아거나 싫어라며 나를 찬양했거나 모욕했고 내가 좋아하는 혹은 싫어하는 스타일에 내가 좋아거나 싫어하는 인상에 습관에 또 내가 존경하는 지식 혹은 내가 경멸하는 지적 수준에… 그런 이미지를 통해서만 상대와 나는 관계를 맺는다. 이것이 우리가 늘 불행한 이유이다. 우리가 염려, 근심 걱정으로 눈멀어 있다면 우리는 황혼의 저녁이나 뜰에 핀 꽃, 아내의 젖은 손이나 남편의 어깨 위에 앉은 비듬을 볼 수 없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근본 조건을 바로 이 염려(sorge)에서 찾았다. 그는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 깔린 이 불안의 중심을 통찰하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ㅣㅇㅆ다면 우리는 진정 인간적 삶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들 이미지들 때문에 우리는 자연과의 생생한 접촉을 잃고 다른 사람과의 의미 있는 만남을 놓치고 만다.”



그것과 무아가 무슨 상관인가? 상관이 있다 그것도 근본적인. 상을 만드는 렌즈가 자아이기 때문이다. 스티브 테일러의 말을 빌리자면 ‘자아폭발’이 불행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자아폭발과 타락 개념에 대해선 해당 리뷰 참고)



“인도 현인들은 타락한 정신이 하는 거짓말을 풀어내고 있었다. 자아가 고립되었으며 자기 이외의 우주는 저기 밖에 있는데 자기만은 머릿속에 갇혀 있으며 그리고 아무 상관도 없는 외계에 살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인식. 그들은 직접적으로 타락한 정신을 해체했다. 그들은 예리해진 자아인식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거짓된 인식을 주는 일종의 가면현상임도 깨달았다. 우리는 오도된 정체성으로 고통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자아들이라고 믿지만 자아들이 사라져야만 우리의 진정한 본성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두가지의 다른 자신들을 갖는다고 우파니샤드는 말한다. 거짓의, 피상적인 자아자신과 우리의 진정한 자신인 아트만이다.” (스티브 테일러)



우파니샤드의 전통에서 요가철학이 태어났다. 붓다가 위빠사나로 정리한 방법과 마찬가지로 요가의 목표는 거짓된 자아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해체해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개발되었다. 붓다가 한 때 수행했던 고행도 마찬가지 목표를 가졌다.



그러나 붓다는 두가지 모두 목표와는 거리가 멀다고 선언했고 자신의 방법을 제시했다. “붓다가 타락한 정신을 초월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이 반항은 훨씬 더 강력해졌다. 우파니샤드는 분석적이라기보다는 서술적이다. 우파니샤드는 ‘이것이 사물의 실체이다. 이것이 세상이 실재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진실된 상태이다’라고 외치는 거대한 모닝콜 같다. 반면에 불교는 완전히 반대이다. 불교는 사물의 궁극적인 사실에 대하여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그런 토론은 시4간과 에너지 낭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붓다는 타락한 정신이 어떻게 고통을 낳았는지에 대해 심오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초월하기 위한 매우 상세하고도 체계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불교는 모든 면에서 타락의 측면에서 보면 완전히 이해된다. 붓다가 말하는 갈망은 자아폭발로 생겨난 권력, 부, 재산, 향락적 쾌락을 추구하는 욕망이다. 분리된 자아인식이 존재하는 한 갈망은 항상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갈망을 극복하는 것은 (세계와) 분리된 자아인식을 극복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해탈에 도달했을 때 정확히 일어나는 것이다.” (스티브 테일러)



붓다가 요가의 방법론을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연했다고 스티브 테일러는 말한다. 요가의 명상법은 자아폭발로 비대해진 자아의식을 죽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기에 도가 역시 독자적으로 비슷한 방법을 개발했다고 그는 말한다. “명상의 전체적인 목적은 자아폭발의 결과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필립 노박은 강력하게 발달한 자아가 어떻게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를 독점하는가-자아는 (사하라시아인들이 등장하기 전 조상들이 그러햇고 지금도 남아있는 수렵채집인들의 의식이 그러하듯이) ‘개방적이고 수용적이며 현재중심적인 인지의 기쁨으로 나타나게’ 될 수 있는 에너지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를 설명할 때, 명상을 수행하는 것이 어떻게 이 과정을 역전하는가도 함께 지적한다. 의식구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려면 지속적으로 주의력이 공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명상할 때처럼 현재에 주의를 집중하면 의식구조는 주의력이라는 자양분을 박탈당하여 약화되기 시작하고 사라져 버린다. 결과적으로 노박의 말대로 ‘마음은 욕망과 걱정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데 (즉 생각하는 데)보다 적은 에어지를 쓴 새로운 습관을 얻게 되고’ 현재의 사실을 인식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명상 수행은 에너지 재분배의 결과를 낳는다. 정확히 하면 타락과 동시에 발생했던 재분배의 역전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자연스럽게 지각하는 데로 돌아간다. 그 결과 당신은 세계 안에 있는 ‘의식의 힘’을 인시할 수 있게 되고 원시인들이 알고 있는 강력한 ‘현존’과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명상이 자아폭발의 효과들을 제거하는 또 다른 방법은 우리가 주위 환경과 분리되었다는 인식을 약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인식은 자아가 만들어내는 생각의 수다로 유지된다. 자아가 조용해지면 그것들의 경계들도 덜 분명해진다. 그리고 자아가 완전히 조용해지면 모든 경계 인식은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우파니샤드가 설명한 우주와의 일체감을 인식하는 체험을 한다.” (스티브 테일러)



붓다의 체험을 예로 들어보자. 붓다는 라마풋다 선인에게 ‘非想非非想處’란 경지를 배웠다. “이 경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로서 가장 높은 차원인 滅盡定의 바로 앞 단계이다. 숫타니파타(874)는 이 경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그릇되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생각을 소멸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이해한 자의 형태는 소멸한다.

아마 거친 의식들은 생각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경지가 어떤 것인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유무의 차별을 넘어선 경지일거라고 상상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카무라 하지메)



좀 더 말로 할 수 있는 예를 들어보자. 신비주의 철학자 스테이스는 명상의 체험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은 하나가 됨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존재의 현시였다. 방안의 모든 사물들을 통하여 한줄기 광채가 빛났다. 모든 문제들이 사라졌다, 아니 그보다는 문제들이 없었다. 죽음도 없었고 나라는 것도 없었다. 그것은 절대적 황홀의 느낌이었다. 내가 차츰 ‘세상 속으로 돌아오자 이것에 이은 도취감이 뒤따랐다. 참으로 커다란 행복이었다.” (스티브 테일러에서 재인용)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다는 붓다의 말은 이것을 말한다. “깨달음의 순간 붓다의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은 생존욕의 중심이 완전히 부수어진 것이다. 자기의 중심을 쳐부순다면 그때까지 고뇌하던 자기는 소멸한다. 자기가 소멸하면 세계는 허구로 이루어졌던 것이므로 괴멸해버린다. 그러면 오직 ‘있는 그대로의 세계’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나카무라 하지메) 항상 차나 한잔 들지라 말했던 조주 선사의 평상심도 이것을 말한다. “도가 무엇입니까?”란 물음에 조주가 ‘차 한 잔 들게(끽다(喫茶去)’라 한 것은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으면 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 쉬운 것 같아 사람들은 이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정말이지 차 한 잔 마시기가 어렵다. 내 분노와 슬픔을 타서 차를 마시지 않을 때가 드물고 내 에고와 권위를 타서 차를 권하지 않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차를 ‘빈 마음’으로 우려 빈 마음으로 권할 때 거기 모든 것이 있다. 공(空)이라, 무심(無心)은 당연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내가 내 마음의 불순물로 탁하게 오염시킨 차를 뻔뻔스럽게 내놓고 있다는 파렴치를 알기만 하면 차 맛은 훨신 좋아진다.” 조주의 평상심은 그런 것이다. 그 평상심이 깨달음의 내용이고 돈오의 내용이다. 도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뜰 앞의 잣나무란 한 것도 평상심으로 잣나무를 보는 것을 말한 것일 뿐이다.



“어느 선사에게 누가 물었다. ‘스님도 도를 닦고 있습니까?’ ‘닦고 있지’ 어떻게 하시는데요?’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에이 그거야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 그들은 밥 먹을 때 밥은 안 먹고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잠잘 때 잠은 안 자고 이런저런 걱정에 시달리지.”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밥을 잘 먹는 것이다. “몸이 음식을 맛볼 수 있도록 나는 ‘마음’을 비워주어야 한다. 마음이 차 있다면 음식 맛을 느낄 수 없다. 김치를 밥이나 ‘대학’에도 그런 경구가 있다. ‘우리 모두 음식을 먹지만 음식 맛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음식 맛을 느낄 수 있으면 도는 멀지 않다. 불교가 노리는 최상승의 경지를 나는 이곳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란 인류의 오랜 환상을 떠나 삶의 실제와 만나는 것”이므로.



밥맛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기에 혜능은 “서방정토가 지금 여기 있으니 내가 지금 보여주랴”고 했고 ‘화엄은 사바와 법계가 둘이 아니며 그래서 벗어나야 할 사바도 없고 들어서야 할 법계도 달리 없다고 말한다. 화엄은 ‘세상이 이미 완전하고 우리가 이룰 것은 더 이상 없다’”고 선언한다. “화엄은 과격하게도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아무 것도 따지지 말고 다만 받아들이라고 권한다. ‘네가 이 세상과 다투는 것을 그치면 세상은 고요해질 것이니 그때 진정 세상이 이미, 우리가 손댈 필요없이 완전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타락한 자아가 “깨어지고 깨어져 나가도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것이다. 시냇물은 흘러가고 창밖에 차소리는 들리며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또 들으며 화를 내고 웃는 이 인간만사의 세상일들이 그대로 여여하게 들리는 것이다.”



“돈오란 깨달음이란 사건이 문득 아주 짧은 시간에 일어난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화엄이 말하듯 깨달음이란 원래 오고감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다. 돈(暾)’깨달음은 이미 여기 와 있다!’는 것, 그러므로 찾거나 이루거나 하는 시간과 점차(漸)로 더듬지 말라는 것을 일깨우는 말이다.선의 실질적 창시자인 혜능은 ‘몸은 보리수도 아니고 마음 또한 거울이 아니다’라 했다. 그리고 ‘그곳은 어디 먼지 앉거나 때가 끼는 곳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것은 이미 완전하기에 우리는 더 이상 닦으 것도 찾을 것도 없다. 그것이 돈오이다. 돈오란 ‘깨달음이 이미 와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은 즉심즉불, ‘네가 곧 부처이니 어디 딴 데서 찾을 생각하지 말라’고 다그친다. 그런데 왜 다시 수행이 필요하지? 이미 깨달아 있으면서… 깨달음에 대한 지적 통찰은 그것을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살아나가는 일에서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 노력을 우리는 점수라 부른다. 돈오는 쉬운데 점수가 어렵다. 돈오를 살아가는 것이 점수이다. 그것은 끝이 없는 심화와 지속의 실천이다.” 그러므로 돈오란 깨달음이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이른바 깨달음이란 것을 얻고 나서는 한바탕 배꼽을 잡으며 ‘소 위에 타고 앉아 소를 찾았다’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한다. 깨달음 이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깨달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불법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실제(實際)를 아무런 두려움이나 공포없이 욕망의 흔적과 조바심 없이 관(觀)할 수 있을 때 그곳이 곧 구원이고 법계이다.. 진리한 피곤하면 눕고 졸리면 자는 것일 뿐, 이 밖에 무슨 특별한 소식은 없다.”



마조는 이렇게 말한다: ‘도는 닦아 익힐 필요가 없다. 다만 오염시키지만 않으면 된다. 무엇을 오염이라 하는가. 생사를 의식하여 조작하고 선택하는 일체가 그것이다. 도와 곧바로 만나고 싶은가.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이니라. 무엇을 일러 평상심이라 하는가. 인위적 조작과 주관적 가치판단이 없고, 의도적 선택이 없는 것, 사물에 대한 고착이나 방기가 없고 진리에 대한 환상도 없는 바로 그곳을 가리킨다. 경전에 말하지 않던가 범부의 행도 아니고 성인의 행도 아닌 것, 그것이 보살행이라고. 다만 이렇게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 상황에 따라 응접해나가는 것이 바로 도이고 그 셰게가 바로 법계이다.”



그러므로 반야심경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리자야 우리는 사물과 세계를 두고 태어난다거나 사라진다고 말할 수 없다. 그곳은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인간적 흔적을 덧붙일 수도 없고 늘어난다거나 줄어든다는 세속적 득실도 운위할 수 없다. 자아의 개입이 근원적으로 차단된 곳이기에 거기 사람과 자연은 구분되지 않으며 주체와 대상 또한 분리될 수 없고 바라보는 시선과 거기 잡히는 풍경도 둘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인간에게는 원초적 무지가 있다는 생뚱맞고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권유도 쓸데없다. 늙고 죽음의 개념도 없으니 그 늙고 죽음을 초월할 수도 없지 않은가. 생로병사가 도무지 없는 판에 붓다가 초월과 해방의 방법으로 가르친 네가지 성스런 진리 또한 뜬금없는 소리이다. 기억하라. 요컨대 깨달음이란 것도 농담이니, 더구나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는 더더욱 황당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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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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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옛 산사를 찾아간다. 딱히 불자여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귀지가 가득해진 것처럼 갑작스레 일상의 갑갑함이 밀려올 때나 도시의 기운에 짓눌려 삭막해진 마음 가눌 길 없을 때, 옛 산사들은 한 생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마음가짐을 좀더 명료하게 가다듬도록, 겹겹이 다가오는 희로애락을 차분히 응대하도록 도와준다.



뿐만 아니라 내게 산사는 자연이 선사하는 감각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온몸으로 지각하게 하는 장소다. 서울 변두리에서 나고 자라 살풍경에 파묻혀 살아왔기에 자연이라는 감각의 대상은 되려 말초적이다. 달달한 봄바람에 잔물결 치는 처마끝 풍경, 한여름 무더위 속 애절하게 피어오른 연꽃들, 가을 절집을 절경으로 만드는 오색의 단풍, 눈꽃으로 병풍을 치고 정적에 휩싸인 겨울의 불당…… 명찰일수록, 어떤 각도의 프레임을 들이대도 자연의 육감적 아름다움을 일부나마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 같다.



그렇게 산사를 찾다보니 실은 조금씩 불심도 자라난 모양이다. 절간을 지나는데 우연히 『반야심경』의 한 구절이 귀에 들어와 앉았다. “(…)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 최상의 깨달음을 얻느니라.”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길 없었으나 웬일인지 무작정 심금에 와 닿았다. 붓다와의 인연이 생겨난 것이리라. 그로부터 불교를 조금이나마 공부해봐야겠다 마음먹게 됐다. 아마 많은 불자들이 나처럼 불교에 입문하게 되는 것 아닐까 싶다. 한형조 선생님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과 만난 것도, 어찌됐든 이렇게 붓다와 나의 인연이 실낱처럼 이어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부제에서 밝히고 있듯이, 『금강경』의 별기別記다. 즉 본격적인 『금강경』 공부에 앞서 “오해와 헛디딤의 위험”을 무릅쓰고 초심자들이 쉽게 불교에 다가갈 수 있도록 힘껏 돕는 책이다. 친절한 안내는 물론이거니와 한형조 선생님의 깊은 공부와 통찰을 절로 느끼게 해주는 은은한 문장은 초심자의 불안을 한결 차분히 가라앉혀준다. 『금강경』을 중심에 두고 불교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다는 것은 전혀 수월한 작업이 아니다. 내공이 깊고 깊어야 겨우 가능한 일일 텐데, 이 책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문장이 하나같이 섬세하게 직조되어 있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 치밀함에 탄복하게 되는데, 인문학의 어떤 경지 같은 게 있다면 한형조 선생님의 문장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책을 다 읽고 덮은 뒤, 희망과 절망을 가르는 내 욕망의 그림자가 깊다 못해 원망 속에서 곤경에 처하게 되어버렸음을 가까스로 조금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 안의 불쾌와 불만족 또한 완전히 해소되기 어려울 것 역시 인정해야 할 것이다. 훌륭한 가르침 덕에, 평안을 얻기는커녕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와 마음이 온통 엉켜버린 것 같다. 초심자들이 거치는 과정이겠거니.




 

우리 각자는 크고 작은 삶의 굴곡을 거치며 때로 절망적 고통과 부당한 악의를 거쳐 나갑니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있지 않을까요. 이런 불리한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인간은 늘 자신의 본래 힘과 존엄을 ‘회복’해나가는 ‘기적’을 연출합니다. 나아가, 시련을 거치면서 그는 오히려 더 깊고 형형한 안목을 지니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공동 운명으로 돌아보게 되지요. 불성이란 다름 아니라, 이렇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수많은 적들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회복’하며, 동시에 ‘성장’하는 그 불가사의한 힘을 단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힘은 우리 모두가, 누구나 예외 없이, 평등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_본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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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2-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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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the ultimate concern... 궁극적 관심을 가지고...

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



금강경을 읽고 구절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소'라고 한다.

금강경 소는 '허접한 꽃들의 축제'라고 해서 쌍둥이 책으로 나와있다.

난 '소'가 먼저인 줄 알고, '별기'를 먼저 읽었더니,

별기가 먼저 쓰여진 책이다. 허허, 이 사람, 나랑 생각이 비슷한 사람일세~ ㅎㅎ



구절구절 설명을 상세히 하고, 금강경에 대한 전체적 설명을 하는 게 순서겠지만,

난 전체적 해설을 어떻게 하는지가 궁금해서 그 별기를 먼저 보게 된 거였다.



그것이 별도로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것이 또 좋은 점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함께 가는 것이 일반 독자들에게는 더 친근하고 편리할지 모르겠다.



내가 읽은 금강경 중, 가장 읽기 편했던 책이,

<선으로 읽는 금강경>이었다.

그 다음이 무비 스님의 <금강경 강의>였고...

이현주 의 금강경과 한형조의 금강경은 비슷한 정도랄까?

이현주와 한형조의 공통점이라면,

금강경을 불교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인문학적 입장에서,

기본 개념과 사상적 기초를 다양한 논리들과 엮어서 읽기 쉽게 풀이하려한 점은 돋보인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금강경이란 기본서를 여러번 접하지 않은 이에게라면,

'소'가 먼저여야 하고, 나처럼 몇 번 읽어본 사람이라도,

소의경전...이 아닌 바에야... 거기 마음을 전적으로 기대고 인생을 사는 삶이 아니라면,

쉽게 잊어버리는 것이므로,

같이 엮어 줬더라면 더 좋았겠다... 이런 생각을 계속 하면서 읽었다.



물론, 별기로 적어야 할 만큼 총체적 접근이 필요한 부분들도 있게 마련이지만,

그것은 어떻게 녹이느냐에 따라 '소'의 '별기'로 붙였어도 좋았을 거란 생각.



암튼, 한형조 선생의 발랄한 목소리로 듣는 금강경 강의는

유홍준을 따라서 걸음을 옮기며 문화유산을 듣고 보는 답사처럼,

마음도 가볍게 배움의 길을 따를 수 있는 길이었다.



별기를 읽고 나니, 본문 풀이인 '소'가 또한 기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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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의일상 2013-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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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붓다의 치명적 농담>과의 인연은 한 문장에서 시작됐습니다.



"내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리라는 기필을 거두십시오. 세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 오만과 야만을 버려야 합니다."



앞만 보고 달려가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세상에서 어쩌면 저만 뒤쳐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맹렬히 달리고 있지 않아서 이 문장에 끌렸을까요.



이 책의 저자 한형조는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 [금강경]을 골라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새로울 게 없다지만, 불교 꽤나 머리가 아픈 분야네요.



인도 북동부 갠지스 강가 반경 200킬로미터 정도에서 출발한 불교는 기원을 전후해서 대승불교로 발전했고, 반야 유식 화엄 천태 정토 선 등의 갈래를 낳았다 합니다. 이런 불교를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팔라어, 산스크리트, 불교한문, 티베트어를 익혀야 하고, 거기에 근대 일본의 방대하고 치밀한 훈고적 성과와 구미의 불교연구까지 습득해야 한다니, 정말 아득하고 막막해지지 않을 수 없군요.



그러나, 불교의 이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낡은 것이라 합니다. 바로 사람이 생물학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아주 적은 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세삼스런 각성이 바로 해방이라 합니다.

각자가 느끼는 세상은 객관적 실제와 상관없이 자신의 중력에 따라 휘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깨끗한 삶'이란 자아에 물든 더러운 삶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뜻으로, 실제 그런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적 세계에는 더럽고 깨끗한 차별이 없다네요.

이렇게 주관적 가치의식이 깨어지고 깨어져나가도,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박노자가 <당신들의 대한민국2>에서 일부 불교계가 사찰 근처의 결식아동이나 최빈층, 무의탁 노인들의 고통에 대해 모른척 하는 것에 대해 비난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것 같습니다. 불교의 교리자체가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라 그런거 같아요.



그러나, 한형조는 '내 탓이오'라는 참회로부터 각성이 이뤄진다 말하고 있어요.

그 이유는 하나는 전체에 연루되어 있고, 전체는 하나 속에 침투하고 있기 때문이라네요. 자신의 행동이 수많은 인연 가운데 결정적 하나로 기여했다는 것을 안다면(緣起法) 자연스레 내 탓임을 알 수 있게 된다네요.

비록 자신의 주관적 세계를 바로 잡아도 객관적 세계와 상관없는 일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으로 삶의 구체적 정황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네요.

그 실천이란, 시련을 거치면서 오히려 더 깊고 형형한 안목을 지니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공동 운명으로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불성이란 다름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수많은 적들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회복'하며, 동시에 '성장'하는 그 불가사의한 힘을 단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라 합니다.



아, 그런데 웬 말입니까!

어느 정도 알 거 같은데, 저자는 초자연적 실재라는 것도 없고, 초월적 깨달음이란 것도 모두 헛소리라네요.

벗어나야 할 사바도 없고, 들어서야 할 법계도 없답니다.

진리란 피곤하면 눕고 졸리면 자는 것일 뿐, 이 밖에 무슨 특별한 것은 없다네요. 오늘 지은 업이 마음의 창고에 아무런 찌꺼기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또 내일 다가올 일을 걱정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부처라 합니다.

우리가 깨달음(돈오)를 오해하는 것은, '돈오'를 깨달음이 한번에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라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돈오란 깨달음이란 원래 오고감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로서 즉, 돈오란 "깨달음은 이미 여기 와 있다!"는 것이라네요.



유명한 문구가 생각나는군요.

카르페 디엠 / Carpe diem /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가 말이에요.



돈오가 깨달음이 이미 와 있다는 뜻이라 해도 깨달음에 대한 지적 통찰은, 그것을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살아나가는 일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합니다.

돈오는 이제 시작이고, 전제일 뿐 우리 중 누구 하나가 빠져도 이 세계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큰 믿음과 자부심을 가지고 이 짧은 한 생 책임지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사는 것, 그것이 불교, 붓다의 위대한 가르침이라 하네요.

장자가 말한 대로, 길은 누구에게나 같은 길이 아니라, '각자 걸으면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니, 각자 스스로의 길을 아이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현재에 충실하며 쉼없이 가는 것, 바로 불교의 가르침 입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세상에서, 저까지 그래야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저만의 속도로 제 길을 만들며 한걸음씩 꾸준히 걸으면, 될 거 같습니다.

역시 저자의 말대로, 깨달음은 이미 와 있으며 삶의 구체적 정황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게, 불교의 가르침.... 가슴 속에 새깁니다.

오늘 지은 업이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가올 일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건....참..... 어렵지만 말입니다.











읽은 날 2012. 5. 13 by 책과의 일상

http://blog.naver.com/cji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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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11-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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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능이 『육조단경』과 『금강경 구결』에서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 "입으로만 경전을 외지 말고 마음으로 믿고, 몸으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성自性을 직접 보고, 그 금강金剛의 반야般若로 생사의 바다를 건너 저 너머 영원한 평화와 안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때가 바로 경전을 '이해'하는 때이고, 불교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후퇴 없이 가지는 때이다. 그때 불교는 구구절절 살아 있는 말씀으로 가슴을 울린다. 아니, 우리 자신이 곧 말씀이 된다. 이와 더불어 불교의 지식은 단순하고 간명하게 정돈되어간다. 복잡성이 줄어들고, 산만한 것이 중심을 얻어 정돈되며, 거기서 깊이가 자라난다. -18쪽
아마추어가 외람되이 나선 것은 전문가의 불교가 너무 어려워서입니다. 지금 불교가 설정한 목표는 너무 높고 험준해서 보통 사람들이 접근하기 힘듭니다. 그런데다 전문가들의 말은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가 버겁습니다. 이렇게 난해와 모호에 지친 사람들을 향해 이번에는 너무 격이 낮고 곁가지인 지루한 이야기들이 번지고 있습니다.
요컨대 한편에서는 한문 경전의 용어와 어투를 그대로 외고 있고, 또 한편에서는 화두선을 중심에 세워 일상의 대화와 상식의 접근을 근본 차단하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는 한국불교의 가장 큰 문제가 이 소통의 부재입니다. 스님들과 제가 신도들 사이에도 그렇고, 불교학자와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23쪽
제가 불교를 말할 때 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팔만 사천의 법문을 모두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십시오. 불교의 비밀은 여러분이 늘 말하는 그 익숙한 불교 용어와, 늘 독송하는 사구게 속에 있습니다. 그 뻔한 구절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눈에 밟힐 듯 선명하게 다가올 때, 그때 여러분은 불교와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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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e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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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치명적 농담이 무엇인지도 모르고서 책을 덮긴 했으나, 지금 읽고 있는 "한마음 요전"

의 '주인공'이라 칭하는 것에 대한 확신을 주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집 나와서 읽은 내가 산만할 수 밖에 없어 책이 눈에 들어올리 없었겠지만, 한형조의 '마음'과

한마음 요전의 '주인공'은 내 보기에 같은 맥락이니, 한마음 요전에서의 '주인공'이라는 것에

의심이 없게 된 것이다. 한마음 선원 '하안거'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있는 나로서는 참 좋은 일

이다.



"왜 자신의 마음을 믿지 않습니까?" 이 책의 요지는 딱 이것으로 보인다.

다른 이들의 이 책에 대한 독후감은 어떠할까 찾아 읽던 중에 "프레시안"이란 닉네임의 독후감

은 정말이지 훌륭하더라. 딱 내 생각이던데 어쩜 그렇게도 일목요연 잘 나타낼 수 있는건지, 상

당히 부럽더라.






*어설픈 야단에 법석은~

*불교를 알기 위해서는 다만 한 가지 조건만이 필요한데, 그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새벽을 열고 밤을 닫을 때~

*무비 스님-금강경오가해

*불성이란 다름 아니라 이렇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수많은 적들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회복하며 동시에 성장하는 그 불가사의한 힘을 단적으로 가리키는 말
입니다. 이 힘은 우리 모두가 누구나 예외없이 평등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무엇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숨겨져 있던 어떤 것을 발견하는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 자신의 운명과 세상의 무상함에 민감한 사람들이 불교를 찾습니다.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한용운 <님의 침묵> 서문)

*생각 하나가 우주의 균형을 바꾸고, 불가사의한 기적을 하루아침에 만들어 줍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몸은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바람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너희들 마음이 흔들린
것일 뿐. (육조 혜능)

*왜 자신의 마음을 믿지 않습니까.

*불교에 접근하는 사람들의 공통 된 병폐가 있으니 그것은 경전에 있는 말씀을 곧이곧대로
아니 듣는 버릇입니다. 말하면 액면 그대로 들어야 하는데 꼭 뒤집어보고 의심하면서 그 뒷
면에 무슨 딴 의도나 비밀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 눈에 보이는 사물을 빈 마음으로
보고, 마주 선 사람을 하나 된 마음으로 껴안는 것, 그것 뿐이라면 정말 쉽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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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MADREAM 201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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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산 속에 위치한 금강경이 시내에 내려온 듯한 분위기의 글이다.




## 2

굉장히 읽기 쉽고, 금강경을 들여다 보기 전에 마음을 진정시켜 줄 책이다.
[…] 이를테면 유시그이 교설은 한역으로 읽기가 매우 까다롭고 애매하다. 현장이 굳이 인도로 떠난 것도 그 때문이고, […] 현장의 신역을 통해 불교를 더욱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혜능이 […]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 "입으로만 경전을 외지 말고 마음으로 믿고, 몸으로 실전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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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낙소리 2011-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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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동안 오염된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것, 그런데 내 이제 그 실상을 투명하게 알겠다!"는 발견이 곧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이 "깨달음으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p103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불교는 나중에 "붓다가 왜 왔는지 모르겠다"거나 "붓다는 40년간 장광설長廣舌을 늘이고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불교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한사코 빼앗으려 합니다. 우리 내부에 있는 오래된 독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말입니다. 이들을 제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고 세상은 평온해질 것입니다. 『상유타 니카야』에서 붓다가 말했습니다. "열반은 탐욕과 증오, 기만의 끝이다." : p109

여기서 '일어났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곤경과 고苦의 현실이 필연적 사태가 아니라, '우연적인 것'임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일어난 것'이라면, '그것은 소멸될 수 있다!'는 말이니까요. 마찬가지로 그것이 '만들어진' 어떤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다시 부술 수 있습니다. 연기법에 대한 오래된 정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게 된다. 이것이 생기기에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멈추면, 저것도 멈춘다." : p114

재산, 명예, 권력뿐만 아니라, 인간은 타자인 인간을 소유하고 지배하려 합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인데, '그들'도 또한 너의 소유를 탐내고 너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 모든 사람들이 '소유'와 '탐욕'의 관점에서,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조정하려 합니다. 이를 통해 세계는박제되고, 사람은 소외됩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타락, 혹은 존재망각, 고향상실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 p128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생판 모르는 도시나 나라인데, 누군가가 거기 있거나 살았다는 기억으로 하여 아주 가깝게 다가오는 그런 경험 말입니다. 역시 세계는 주관적으로 '의미화'되어서만 존재하는 무엇입니다. : p129

세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먼저 있어야 하고, 그 전에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쇼펜하우어의 근본 통찰처럼 세계는 의지의 산물입니다. 세계는 그 의지를 통해 구성된 표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의 책 제목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이를 불교식으로 번역하면 곧 '법法이 아닌 상相으로서의 세계'정도가 되겠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따라, "우리가 아는 세계는 '의식'으로부터 파생되었거나, 그 활동의 결과"라는 것을 알리고자 합니다. : p130

불교가 공空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객관적 세계는 '거기 그렇게如如' 역력하게 존재합니다. 불교는 다만 그것이 '자아의 투사로 물든 주관적 세계'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할 뿐입니다. : p152

"친밀한 마음을 개발해라, 라훌라야, 그렇게 하면, 악의가 점차 줄어들 것이다. 동정심을 개발하라, 그리하면 번뇌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개발하라, 그리하면 혐오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평정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모순들이 점차 줄어들 것이다...... 몸이 부패하고 있는 것을 더욱 뚜렷이 의식하는 마음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정념이 점차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떠서 흘러가는 성질을 뚜렷이 의식하는 마음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자아의 오만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 p176

마음을 비울 때 심신은 가뜬하고, 지각은 더 민감해지며, 지식에 대한 흡수력도 훨씬 증강됩니다. 마음을 비우면, 밖에서 오는 사물의 영향력이 줄어들어 스트레스를 견디기가 훨씬 수월해지며, 지금 만나는 사람들을 훨씬 느긋하게 대할 수 있고, 그로부터 받은 심리적 상처에도 훨씬 관용적이게 되어 인간관계도 좋아집니다.

그런 사람 주변에는 사람이 모이고 따릅니다. 누구나 심리적 여유가 있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승진을 하고 장사를 잘하기 위한 전략으로서라도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이는 역설이지만 진실입니다. 노자가 말했듯이, "진실은 늘 상식과 어긋나 보이는 법"이고, "진정 똑똑한 사람은 어리석어 보이는 법"입니다. : p243

다시 기억하실 것은, 유有와 무無가 정반대의 극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모두 아상의 결과라는 점에서는 서로 다를 바없습니다! 여기가 여러분들이 늘 만나는 불교 언설의 역설과 모순, 모호함과 아이러니의 진원지입니다. 불교는 경전의 언설장구마다, 유와 무가 결국은 같다는 것, 그 둘을 동시에 벗어나야만 우리가 진정 자유를 얻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고구정녕 가르칩니다. : p255

주자학의 과제는 "자신의 숨겨진, 때 묻고 탁해진 본성의 회복"에 있습니다. 이곳을 유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자는 인간의 모든 훈력과 교육의 목표가 자기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고, 다음 다른 사람의 본성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목표이고, 수많은 제도와 법률 또한 이 구원의 목적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 p318

방심放心이란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일종의 '비자각적 상태', 멍한 정신 나간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자학은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이 행동이나 선택 이전에 이미 원초적으로 내면의 자기망각에서 준비된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구방심求放心'은 이런 자기망각 혹은 비자각적 상태를 극복하려는 노력인데, 그와 같은 의식의 혼란을 깨고 생생한 자기의식으로 돌아오기는, 그러나 아주 쉽습니다. 필요한 것은, "아차! 내가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었지?"라는 자각이 전부지요. 그것은 순간적이고 즉각적으로 성취되는 공부입니다.

이 훈련이 득력得力, 힘을 얻으면 운전 연습 때처럼 자각의 지속이 길어지고, 또 밝은 상태가 고양됩니다. 이로써 유전과 경험의 복합으로 하여 구조화되어 있던 자기망각과 그와 연관된 두터운 업장의 장애가 엷어지면서, 동시에 인간 내부에 본래 있던 덕성德性의 빛이 점점 더 크게 밝아진다고 가르칩니다. 이 양상養性, 즉 '덕성의 배양'은 동시에 복기초復其初, 즉 "자기 안에 있던 본래성을 회복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퇴계는 이 점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율공에게, 구방심이 공부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그 끝이라고 가르쳤습니다. : p321

돈頓이란, "깨달음은 이미 여기 와 있다!"는 것, 그러므로 찾거나 이루거나 하는 '시간'과 점차'로 더듬지 말라는 것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 p344

초자연적 실재란 없고, 초월적 깨달음이란 것도 헛소리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실제를 아무런 두려움이나 공포 없이, 욕망의 흔적과 조바심 없이 관觀할 수 있을 때, 그곳이 곧 구원이고 법계입니다. 진리란 피곤하면 눕고 졸리면 자는 것일 뿐, 이 밖에 무슨 특별한 소식은 없습니다. 오늘 지은 업이 마음의 창고에 아무런 찌꺼기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또 내일 다가올 이를 걱정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부처입니다. : p357

눈에 보이는 사물을 빈 마음으로 보고, 마주 선 사람을 하나된 마음으로 껴안는 것, 그것뿐이라면 정말 쉽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할 수 있고, 거기 아무런 준비가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그거나 그것만큼 또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어려움은 그 취지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기가', 그리고 그 바라밀을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일 뿐입니다.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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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시리즈 세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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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시리즈 세트    판매가
출판사 서평 금강경, 그 빛나는 ‘삶의 기술ars vitae’

철학과 종교를 뛰어넘어 인생에 대한 통찰을 열어주는 우리 시대 불교의 의미

왜 사람들은 그토록 수많은 처세서를 읽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인생을 ‘구원’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인가.
‘오늘날’ ‘여기’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부려 동양철학을 삶의 문제로 귀환시킨 한형조 교수의 본격 [금강경] 해설서 두 권이 드디어 출간됐다. 마음과 일상의 차원에서 [금강경]의 기본 정신을 해설한 [붓다의 치명적 농담], 그리고 반역의 정신으로 [금강경] 원전과 육조 혜능의 목소리를 번역한[허접한 꽃들의 축제]. 이 두 권의 책은 오래된 자기 소외를 벗고,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일러준다.
이 책은 “모던하고, 경쾌하다”. 불교 한문 투에 지친 사람들, 화두라는 일초직입一超直入의 험준에 한숨 쉬던 사람들에게, 가히 가뭄 끝의 단비라 할 만하다.
특히 한형조 교수의 저술은 엽기와 과감을 각오하고 종횡무진, 이 위대한 경전을 자유롭게 풀어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 자유로움은 역설적으로, 그가 모든 원전과 이에서 파생된 다양한 해석을 형형한 눈빛으로 꿰뚫고 있기에 가능했다.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강의’는 ‘종교’가 아니라 ‘인문’으로 불교에 접근한다. 종교적 도그마에 발목 잡히지 않고, 제도 의례의 관습, 집단의 논리를 떠나, ‘불교’ 그것이 알려주는 ‘인간학’에 오로지 집중한다. 그리하여 각자의 종교적·문화적 배경에 상관없이 심금에 닿도록 배려했다. 두 권의 책은 실존의 변화, 작지만 위대한 구원의 불씨를 각자의 가슴에 지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