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4

이토 진사이 - 위키백과, 伊藤 仁斎

이토 진사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토 진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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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진사이/호리카와 문인에 의한 초상

이토 진사이(일본어伊藤 仁斎), 간에이(寛永かんえい) 4년 음력 7월 20일(서기 1627년 8월 30일) ~ 칸에이(寛永かんえい) 2년 음력 3월 12일(서기 1705년 4월 5일)〕은 에도 시대 전기에 활약한 유학자, 사상가로서 교토에서 목재상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상생활 가운데 있는 윤리와 인간 모습을 탐구해 제시했다.

이름은, 어려서는 유정(維貞), 커서는 유정(維禎)이다. 가명 통칭은, 원길(源吉), 원좌(源佐), 원칠(源七)이다.

옥호(屋号)는 쓰루야 시치에몬(鶴屋 七右衛門つるや しちうえもん)이다. 진사이(仁斎)는 호고 시호는 고카쿠 선생(古學先生こかくせんせい).

  • 옥호: 에도 시대에는 가게 이름이 가게 주인 이름과 같았다. 이것을 '야고(屋号やごう)'라고 한다.

생애[편집]

간에이(寛永かんえい) 4년 7월 20일 (서기 1627년 8월 30일) 교토에서 태어나서 1662년 교토의 호리카와(堀川ほりかわ)에 고기도(古義堂こぎどう)를 연다.

간에이(寛永かんえい) 2년 3월 12일 (서기 1705년 4월 5일) 죽었다.

가정[편집]

40세를 지나고 나서 혼인해 1남 2녀를 두었지만, 52세 때에 첫 번째 아내가 앞서가고 그 수년 후에 두 번째 아내와 재혼하여 4남 1녀를 더 낳았다.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いとう- じんさい) 나이 68세 때 막내동이로 5남의 란구(蘭嵎らんぐう)가 태어난다.

아들 5인은 모두, 뛰어난 유학자가 되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이토 도가이〔伊藤 東涯いとう-とうがい[겐조(原蔵げんぞう)]〕, 이토 바이우〔伊藤 梅宇いとう- ばいう[주조(重蔵じゅうぞう)]〕, 이토 가이데이〔伊藤 介亭いとう- かいてい[쇼조(正蔵しょうぞう)]〕, 이토 지쿠리〔伊藤 竹里いとう- ちくり[헤이조(平蔵へい ぞう)]〕, 이토 란그〔伊藤 蘭嵎いとう-ら んぐう[사이조(才蔵さいぞう)]〕로, 세상에서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いとう- じんさい)의 고조(五蔵ごぞう)로 불린다.

학설과 사상[편집]

주요 저서로서 『논어고의(論語古義)』,『맹자고의(孟子古義)』,『어맹자의(語孟字義)』,『중용발휘(中庸発揮)』,『동자문(童子問)』,『고학선생문집(古學先生文集)』등을 들 수 있지만, 생전에 강의와 저술을 정리하고 퇴고하는 데 전력을 경주했기 때문에 직접 발간한 저작은 없다.

도덕과 존재가 생겨나는 본바탕이 되는 이치나 법칙으로서 이(理)를 공자도 맹자도 일절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그 탐구를 허황되었다고 부정하고 그 탐구를 해결하는 단서를 갖다 주어 이바지하는 예기(禮記)나 예기에서 독립하여 존재하게 된 대학(大學), 중용(中庸) 등을 후대에 불교나 노장사상이 혼합된 완전하지 아니한 텍스트로 치부하여 그 위신과 영향력을 부정하는, 배짱이 두둑하면서도 사소한 부분까지 아주 분명한 방법과 수단을 이용하여 변하지 않는 기준으로서 자신이 세운 준거인, 공자와 맹자의 언행에서 이탈하는 해석을 용인하지 않는, 코기가꾸(古義学こぎ‐がく)을 제창하고 견지하였다.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いとう- じんさい)는 당시 주동이 되어 이끌었던 주자학의 논리로 경전을 해석하는 방식을 버리고 텍스트를 직접 검토하는 방법으로 학문하였다.

주자학은 학문 체계로서는 과거의 선진 유학보다는 이론이나 이치에 매우 합당한 체계를 갖추고는 있었지만, 그 성립하는 과정에 유입된 불교의 선학(禪學)이나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고 하는 유교에 관계되지 않은 사상에 영향받았으므로 경서를 약간 편향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いとう- じんさい)는 그러한 요소[부분]를 유학의 온전성이 불순한 물건처럼 더럽혀졌다고 간주하여 모든 한계나 표준을 뛰어넘어 있는 대상이나 현상의 범위 전부나 자연 따위가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정신이나 인식의 목적이 개념이나 언어에 기초하여 된 표상을 향한 감각이나 지각 작용에 의거하여 깨닫게 되는 내용에 근거하지 않고 순수하게 논리에 부합하는 사고만으로 현실이나 사물을 인식하려는 일이나 판단이나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 파악하는 인식이나 지식에 토대한 직관을 배격하고 관찰이나 실험으로써 검증 가능한 지식만을 인정하려는 방법을 이용한다.

이런 경향은 동시대 유학 연구에서 공통으로 볼 수 있다.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いとう- じんさい)는 주자학 사상인 “리(理)”에 반하고 “정(精)”을 바람직하게 평가했다.

만물과 무한한 시간을 포함하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의 근원을 이루는 물질이 아닌 실재나 인식의 목적이 개념이나 언어에 근거하여 된 표상이나 본질의 외면에 나타나는 상의 모든 범위와 의식이나 경험의 대상인 현상 전체가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냉정한 도리보다는 조금 더 인간답고 혈액이 통하는 인간의 감정[심정]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 사상인 사단(四端)의 심(心)이나 성선설(性善説)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이토 진사이(伊藤 仁斎いとう- じんさい)는 공자와 맹자의 사상과 주자학의 괴리를 깨닫고 주자학의 왜곡에서 탈피하여 공자와 맹자 사상의 순수화를 실현시키고자 여생을 모두 바쳤다.

공자와 맹자는 근엄한 얼굴과 정숙한 모습으로 존재와 도덕이 생겨나는 본바탕이 되는 원리, 즉 이(理)를 찾아 이 세상 너머의 신비나 형이상학을 좇는 주자학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처럼 꾸미는 불손한 견강부회요, 결국 논의만을 분분하게 하여 실제로 필요한 덕행을 소홀히 하게 하는 위선의 실마리요, 나의 형이상학에 기초한 믿음을 남에게 강요하여 결국 분쟁을 야기하기 쉬운 신앙의 강제이며, 수준 높은 식자 능력을 갖추기 어려운 보통 사람들을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서 소외시키는 차별의 합리화에 불과하다.

그런데 공자와 맹자의 철학은 사람들이 보통 알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이면서도 실제로 행하기에는 말이나 생각처럼 쉽지 않은 사랑의 실천, 그것도 중단하지 말고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이에 따라 군주에서 문맹인 하층민까지 도덕과 학문, 사회와 정치의 주인이 될 수 있으며 되게 해야 한다.[1]

저작[편집]

  • 『논어고의(論語古義)』(세키 기이치로우편 「일본 명가 사서 주석 전서」논어부일, 동양 도서, 1922년 4월)
    • 최경열 역, 그린비 2016
    • 장원철 역, 소명출판 2013
  • 『맹자고의(孟子古義)』(세키 기이치로우편 「일본 명가 사서 주석 전서」맹자부일, 동양 도서, 1924년 10월)
    • 최경열 역, 그린비 2016
  • 어맹자의
    • 최경열 역, 그린비 2017
  • 『동자문(童子問)』시미즈 시게루 교주 이와나미 문고, 1970년 외 ISBN 978-4-00-330091-6
    • 최경열, 『동자문』- 이토 진사이 선집 1, 그린비, 2013년 1월 2일, ISBN 9788976823984
  • 대학정본 / 중용발휘
    • 최경열 역, 그린비 2017
  • 키무라 에이이치 편집·해설 「이토진사이집 일본의 사상 11」(지쿠마 서점) 1970년
  • 카이즈카 시게키 편집·해설 「이토진사이 일본의 명저 13」중앙공론사 1977년 1983년
  • 요시카와 고지로, 시미즈 시게루 교주 「이토진사이 이토토가이」 <일본 사상 대계 33>이와나미 서점, 1971년
  • 아사야마 요시로, 엄명교주 「이토진사이」<일본한시인선집 4>연문출판, 2000년, ISBN 978-487636-190-8
  • 우에타니 겐 교주 『인재일찰(仁斎日札)』<신일본고전문학대계99>이와나미 서점, 2000년 3월
  • 이토 린후 「이토진사이,부-이토토가이」<총서·일본의 사상가 10>덕성 출판사, 1983년 3월
  • 미야케 마사히코 편집·해설 「고학선생님 시와 글집」<근세 유가 문집 집성 제 1권>리카응사, 1985년

연구서[편집]

  • 이또오 진사이 / 이기동 저
  • 비토우 마사히데 「이토진사이에 있어서의 학문과 실천」, 「사상」 제524호, 1968년 2월
  • 요시카와 고지로 「진사이,소라이,노리나가」,이와나미서점,1975년6월,복간2000년외,ISBN 978-4-00-000959-1
  • 와타나베 히로시 「이토진사이·이토토가이-송학 비판과 「고의학(古義学)」
    • 사가라 도루·마츠모토3지개·원 료원편 「에도의 사상가들」상권, 연구사 출판, 1979년 11월
  • 고야스 노부쿠니 「이토진사이 인륜적 세계의 사상」, 도쿄대학 출판회, 1982년 5월
  • 증보판 「이토진사이의 세계」리카응사, 2004년 ISBN 978-4-8315-1060-0
  • 이시다 가즈요시 「이토진사이」<인물 총서> 요시카와 히로후미관, 1989년 ISBN 978-4-642-05176-7
  • 사가라 도루 「이토진사이」리카응사, 1998년 ISBN 978-48315-0827-0
  • 마루야 코이치 「이토 히토시재의 「정」적 도덕 실천론의 구조」, 「사상」 제820호, 1992년 10월
  • 다니자와 에이이치 「일본인의 논어 「동자문」을 읽는다」 PHP 신서상·아래, 2002년, ISBN 4-569-62224-0·ISBN 978-4-569-62271-2
  • 「일본 유교의 정신 주자학·진사이학·소라이학」시냇물사 1998년 8월

각주[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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伊藤仁斎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伊藤仁斎、堀川門人による肖像

伊藤 仁斎(いとう じんさい、寛永4年7月20日1627年8月30日) - 宝永2年3月12日1705年4月5日))は、江戸時代の前期に活躍した儒学者思想家京都の生まれ。日常生活のなかからあるべき倫理人間像を探求して提示した。

は、はじめ維貞、のち維禎。仮名 (通称)は、源吉、源佐、源七。屋号は、鶴屋七右衛門。仁斎はであり、号は古学先生。『論語』を「最上至極宇宙第一の書」と尊重した。 初めは朱子学者であったが、後に反朱子学となり、孔子・孟子の原義に立ち返る「古義」を標榜した。

生涯[編集]

  • 寛永4年7月20日(1627年8月30日) 京都で誕生。
  • 1662年 京都の堀川に古義堂(堀川学校)を開く。堀川を隔てた対岸に、山崎闇斎の闇斎塾があった。
  • 宝永2年3月12日(1705年4月5日) 死没。

家庭[編集]

  • 40歳を過ぎてから結婚し1男2女をもうけたが、52歳のときに妻に先立たれ、その数年後に再婚し、更に4男1女をもうけた。末子で五男の蘭嵎(らんぐう)が生まれたのは仁斎68歳の時である。5人の男子は皆、優れた儒学者となった。東涯(原蔵)・梅宇(重蔵)・介亭(正蔵)・竹里(平蔵)・蘭嵎(才蔵)で、世上「伊藤の五蔵」と称された。

学説と思想[編集]

論語』を「最上至極宇宙第一の書」と称した。

古義学(古学)を提唱し、主著に『論語古義』『孟子古義』『語孟字義』『中庸発揮』『童子問』『古学先生文集』などが挙げられるが、生前は講義と著述の整理・推敲に尽力し、著作を公刊することはなかった。

仁斎の学問手法は、当時支配的だった朱子学経典解釈を廃し、直接テクストを検討するというものである。朱子学は学問体系としては非常に整ってはいたが、その成立過程に流入した禅学や老荘思想といった非儒教的な思想のために経書の解釈において偏りがあった。仁斎はそのような要素を儒学にとって不純なものとみなし、いわば実証主義的な方法を用いた。このような傾向は同時代の儒学研究に共通にみられるものである。仁斎は朱子学の「理」の思想に反して、「情」を極的に価値づけした。客観的でよそよそしい理屈よりも人間的で血液の通った心情を信頼している。四端の心や性善説を唱えた。

校注著作[編集]

参考文献[編集]

解説書[編集]

脚注[編集]

  1. ^ 元版は「日本古典文学大系97 近世思想家文集」岩波書店。原文も収録
  2. ^ 「論語古義」の現代語訳(2段組み表記)を収録

関連項目[編集]

外部リンク[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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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닌사이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이토 닌사이, 호리카와 문인의 초상

이토 히사이 (이토 진사이, 히로 나가 4년 7월 20일 ( 1627년 8월 30일 ) - 호에이 2년 3월 12일 ( 1705년 4월 5일 ))는 에도 시대 의 전기에 활약한 유학자 · 사상가 . 교토 의 태생. 일상생활 속에서 있어야 할 윤리 와 인간상 을 탐구하고 제시했다.

는, 처음에 유정, 후유 유. 가명(통칭) 은 겐지치, 겐사, 겐지치. 야호 는 쓰루야 시치오에몬. 닌사이는  이며, 사호 는 고학 선생님. '논어'를 '최상지극우주 제일서'라고 존중했다. 처음에는 주자 학자였지만, 후에 반주자학이 되어 공자·맹자의 원의로 돌아오는 '고의'를 표방했다.

평생 편집 ]

  • 히로나가 4년 7월 20일(1627년 8월 30일) 교토에서 탄생.
  • 1662년 교토의 호리카와에 고의당 (호리카와학교)을 연다. 호리카와를 가로지르는 건너편에 야마자키 암사이의 어둠사이 학원이 있었다.
  • 다카나가 2년 3월 12일(1705년 4월 5일) 사망.

가정 편집 ]

  • 40세를 지나고 나서 결혼해 1남 2여자를 벌었지만, 52세 때 아내에 앞서 그 몇 년 후에 재혼하고 4남 1여자를 벌었다. 막내에서 오남의 란구가 태어난 것은 인사 68세 때이다. 5명의 남자는 모두 뛰어난 유학자가 되었다. 동평 (원장)· 우메우 (중장)·개정 (정장)· 다케리 ( 평장)· 란후라 (재장)로, 세상 “이토의 오조”라고 불렸다.

학설과 사상 편집 ]

논어』를 「최상지극우주제일의 서」라고 칭했다.

고의학( 고학 )을 제창하고, 주저하게 『논어 고의』 『孟子古義』 『어 孟字義』 『中庸発휘』『童子問』『古学先生文集』 등을 들 수 있지만, 생전 은 강의 와 저술의 정리· 추억 에 진력해, 저작을 공간하는 것은 없었다.

인사이의 학문 수법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주자 학적 경전 해석을 폐지하고 직접 텍스트를 검토한다는 것이다. 주자학은 학문 체계로서는 매우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 성립 과정에 유입된 선학이나 노장 사상이라고 하는 비유교적인 사상 때문에 경서의 해석  있어서 편향 이 있었다 . 닌사이는 이러한 요소를 유학에 있어서 불순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른바 실증주의 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이러한 경향은 동시대의 유학연구에 공통으로 보이는 것이다. 닌사이는 주자학의 '리'의 사상에 반해 '정'을 극적으로 가치있게 했다. 객관적이고 약한 이굴보다 인간적이고 혈액이 다니는 심정을 신뢰하고 있다. 사단의 마음과 성선설을 주창했다.

주석이 달린 작품 편집 ]

참고 문헌 편집 ]

해설서 편집 ]

각주 편집 ]

  1.  원판은 「일본 고전 문학대계 97 근세 사상가 문집」이와나미 서점. 원문도 수록
  2.  「논어 고의」의 현대 어역(2단조 표기)을 수록

관련 항목 편집 ]

외부 링크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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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ō Jins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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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ō Jinsai drawn by his student

Itō Jinsai (伊藤 仁斎, August 30, 1627, Kyoto, Japan – April 5, 1705, Kyoto), who also went by the pen name Keisai, was a Japanese Confucian philosopher. He is considered to be one of the most influential Confucian scholars of seventeenth century Japan, and the Tokugawa period (1600–1868) generally, his teachings flourishing especially in Kyoto and the Kansai area through the final years of the Tokugawa shogunate.

Jinsai's school, known as the Kogigaku, criticized the teachings of Song dynasty Chinese philosopher Zhu Xi 朱熹 (1130–1200) and instead advocated a philosophical vision based on an understanding of the meanings of key terms in the Analects and the Mencius. His school has been considered part of a larger movement, Kogaku ("ancient learning'), including earlier scholars such as Yamaga Sokō 山鹿素行 (1622–1685), and later thinkers such as Ogyū Sorai 荻生徂徠 (1666–1728). However, Jinsai never mentions Sokō or his ideas, and Jinsai's own statements of philosophical meaning were strongly and systematically criticized by Sorai. Rather than as a thinker aligned with the so-called Kogaku movement, Jinsai's ideas are best understood on their own terms. Jinsai is widely known for his outspoken affirmation of the validity of human emotions, and his articulation of a metaphysics highlighting the pervasiveness and infinite creative potential of a "unitary generative force" (Jpn: ichigenki). Indicative of his renown in the larger world of East Asian philosophy, Jinsai's writings have frequently been compared to those of the Qing dynasty scholar Dai Zhen 戴震 (1724–1777), whose key work, Mengzi ziyi shuzheng (The Meanings of Philosophical Terms in the Mencius) is very similar in theme and method to Jinsai's opus, the Gomō jigi (The Meanings of Philosophical Terms in the Analects and Mencius).

Life[edit]

Jinsai was born the eldest son of a Kyoto merchant, Itō Ryōshitsu. It is not clear exactly what merchant activities the family was engaged in, however. He began studying Chinese from an early age and devoted himself to Zhu Xi's expression of Song dynasty Neo-Confucianism. He continued to study Confucianism throughout his teens, going over old books his uncle had left his father.[1]

By the age of ten, he was studying under his uncle, a noted physician who had once treated the emperor Go-Yōzei. He also likely studied with Matsunaga Sekigo, a Kyoto-based Neo-Confucian scholar who had in turn studied with Fujiwara Seika. Given the distinctively Kyoto lineage of Jinsai's learning, there are good reasons for interpreting it as an expression of the philosophical world of the ancient imperial capital.[2]

Itō suffered from an unidentified illness when he was twenty-eight and left the family business to his younger brother. Afterwards he became a recluse, studying Buddhism and Daoism. During this time he began to have his first doubts over Zhu Xi's philosophy, even changing his pen name which showed his commitment to humaneness (jin).[3]

He later established a private school, the Kogidō, in Kyoto in 1662. Following Jinsai's death in 1705, leadership at the Kogidō was assumed by his son, Tōgai (1670–1736). The Kogidō was located on the east bank of the Horikawa River, directly across from the school of Yamazaki Ansai. During his lifetime, Ansai became a major proponent of Zhu Xi's version of Song Neo-Confucian thought. Jinsai's school, in contrast, offered a sustained critique of Zhu Xi's ideas. Especially in Kyoto, Jinsai's school met with great success, attracting three thousand students from many different classes and professions.[4]

Teachings[edit]

Jinsai formed his own understanding of Confucian philosophy after coming to realize that Zhu Xi's speculative philosophy of was not practical in everyday ethics. Instead, he felt one could learn the way of the sages through an understanding of the meanings of words in the Analects and the Mencius, two of the Four Books that Zhu Xi's philosophy had elevated to nearly canonical status within the broad field of East Asian Confucianism. The other two of the Four Books, The Doctrine of the Mean and the Great Learning, were originally chapters from the Book of Rites (Chinese: Liji), that had been treated as separate volumes, with significant emendations, by Cheng Yi and Zhu Xi. It was largely on the basis of the latter two writings that Zhu Xi in particular had articulated some of his most distinctive Neo-Confucian ideas. In response to Zhu Xi's textual alterations, Jinsai argued, in a very distinctive manner, that "the Great Learning was not a surviving work of the Confucian School", not simply rejecting Zhu Xi's claims on particular points, but in an across the board manner dismissing the text as "not Confucian" in any significant respect. Instead of the Great Learning, Jinsai's approach was to focus on an explanation of the meanings of philosophical terms as discussed in the Analects and the Mencius. Jinsai's approach to Confucian scholarship is today known as kogigaku or "study of ancient meanings". This approach was taken up by later Confucian scholars, particularly Ogyū Sorai.[4]

In significant respects, Jinsai can be seen as advancing the Neo-Confucian project that Zhu Xi, his chief philosophical adversary, had otherwise so effectively and persuasively championed. For example, Jinsai's most comprehensive philosophical text, the Gomō jigi (The Meanings of Philosophical Terms in the Analects and Mencius), was first recorded as Jinsai was giving a series of lectures on Chen Beixi's 陳北溪 (1156–1223) Xingli ziyi 性理字義 (The Meanings of Neo-Confucian Philosophical Terms). Much of the philosophical structure of Jinsai's Gomō jigi as well as its methodology of conceptual clarification and analysis clearly derive from Beixi's work. The two texts even share common elements in their titles, jigi and ziyi 字義 (Jpn: jigi) being written with the same characters, referring to the meanings of words. In both cases, however, the words that were discussed and defined were distinctively philosophical terms such as tendō (the way of heaven), tenmei (the decree of heaven), michi (the way), sei (human nature), kokoro (the mind and heart), kotowari (principle), kishin (ghosts and spirits), and many others.

Jinsai is often described as an apolitical philosopher. However, the Gomō jigi can easily be seen as an inherently political text, one which defines the very philosophical foundations of an ideal political order. In the Analects, 13/3, Confucius, when asked by a disciple what he would do if given political authority, replied that he would "rectify terms" (zheng ming). When his disciple responded with bewilderment, Confucius explained that if words were not used correctly, then in effect there could be little hope for order in a state. For that reason, Confucius added, the prince is always careful in his use of words. Jinsai's project of defining philosophical terms rightly is very much a later day expression of Confucius' view that in order to govern effectively, one must ensure that words are understood and used correctly. If that is not done, then all will be lost.

Jinsai had several fundamental philosophical disagreements with Zhu Xi, the premier interpreter of Confucian thought since the late-Song dynasty. For one, Zhu Xi had claimed that human nature is inherently good. Jinsai disagreed and instead argued it had the potential to become good, but only through daily practice and deeds can this potential be realized. Additionally, he rejected the dualism of rational principal (li) and material force (qi) proposed by Song Confucianism, believing it was material force alone that led to the creation of life and all things.

Furthermore, Zhu Xi connected the way of heaven (tendō) with the human way (jindō) through rational principal. Jinsai on the other hand saw the way (michi) as being embedded in the common and everyday, and not ensconced on some elevated plane as Zhu had suggested. To Jinsai, the central question was how one should conduct oneself in everyday life. Zhu Xi affirmed that all humans are born with an "original human nature" (sei), which is naturally good. Jinsai, however, rejected this.

Rather than the essential goodness of human nature, Jinsai stressed natural human emotions (ninjō), which he found in everyday life. Extending from this came the importance that was placed on poetry which allowed for the expression of human emotions. This, he believed, provided a needed release of emotions and desires. Song Confucianism he felt too much advocated seriousness and a restraint of human nature.[3] His support for literature even led to the Kogidō attracting some students more interested in Chinese poetry than his Confucian teachings.[4]

Although often grouped with the Edo Confucian scholar, Ogyū Sorai, as a proponent of the ancient learning movement, Jinsai's singlemost harsh critic was none other than Sorai. In a letter written to Jinsai, Sorai early on expressed admiration for the Kyoto philosopher and an interest in his philosophy, having read a pirated edition of Jinsai's Gomō jigi published long before Jinsai was ready for it to be released in its final form. Jinsai never responded to Sorai, apparently wounding his pride deeply. Whatever Sorai might have made of Jinsai's silence, it is clear that in Sorai's later writings, in the Bendō and Benmei (1728) in particular, Sorai takes issue with Jinsai on nearly every count, often criticizing him harshly as in effect no different in philosophical doctrine than the thinker he supposedly was criticizing, Zhu Xi.

In the later writings of the Kaitokudō, a merchant academy based in Osaka, Jinsai found a succession of defenders who returned Sorai's critiques with a series of harsh responses to Sorai's own philosophical statements.

Works[edit]

  • Gomō jigi 1705 (The Meaning of Words in the Analects and Mencius).
  • Dōjimon 1705 (Questions From Children).
  • Daigaku teihon 1705 (The Established Text of the Great Learning).
  • Hakushimonjū 1704 (Postscripts to the Collected Works of Bo Juyi).

Notes[edit]

  1. ^ Yamashita, Samuel Hideo. (1983). "The Early Life and Thought of Ito Jinsai", in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43:2, pp. 455-457.
  2. ^ Tucker, John Allen. (1998). Itō Jinsai's Gomō jigi and the Philosophical Definition of Early Modern Japan. pp. 29-52
  3. Jump up to:a b De Bary, William et al. (2005).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Volume 2, 1600 to 2000, pp. 206-207.
  4. Jump up to:a b c Shirane, Haruo. (2006).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An Anthology, 1600-1900. p. 362.

References[edit]

  • Chan, Wing-tsit, translator. Neo-Confucian Terms Explained: The Pei-his tzu-i by Ch'en Ch'un, 1159–1223.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6. ISBN 978-0-231-06384-5
  • De Bary, William Theodore, Arthur E. Tiedemann and Carol Gluck. (2005). Sources of Japanese Tradition: 1600 to 2000.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ISBN 0-231-12984-X
  • Najita, Tetsuo. (1987). Visions of Virtue in Tokugawa Japan: The Kaitokudō Merchant Academy of Osaka.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 Shirane, Haruo. (2006). Early Modern Japanese Literatur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0-231-10990-3
  • Spae, Joseph John. (1967). Itō Jinsai: A Philosopher, Educator and Sinologist of the Tokugawa Period. Peiping: Catholic University of Peking, 1948. New York, Paragon Book Reprint Corp., 1967.
  • Tucker, John Allen (1998). Itō Jinsai's Gomō jigi and the Philosophical Definition of Early Modern Japan. Leiden: E. J. Brill, 1998. ISBN 978-90-04-10992-6
  • Tucker, John A. (2006). Ogyū Sorai's Philosophical Masterworks: The Bendō and Benmei.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ISBN 978-0-8248-2951-3
  • Yamashita, Samuel Hideo (1983). "The Early Life and Thought of Itō Jinsai", in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43(2): 4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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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을 잘 신앙해서 반드시 성공하라 :: 증산도 월간개벽

상제님을 잘 신앙해서 반드시 성공하라 :: 증산도 월간개벽

상생의 도 • 태상종도사님 말씀 • 2023.06
상제님을 잘 신앙해서 반드시 성공하라
[태상종도사님 말씀]
도기道紀 135년 6월 4일(토), 청소년포교회 교육 도훈



상제님을 잘 신앙해서 반드시 성공하라


천지의 대운을 만났다

내가 우리 대학생 신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세상 속에서 사람은 시운時運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백 년 전 사람도, 오백 년 전, 천 년 전 사람도 한 세상을 왔다 갔는데, 시운을 만나야 한다. 때 시時 자, 운이라는 운運 자, 때와 운을 만나야 된단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 사람이 시운을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경천위지經天緯地, 하늘을 쓰고 도리질하는 인물이라도 자기 인격을 발휘할 수가 없다. 자기 지식, 재능을 활용할 수가 없단 말이다. 그냥 초목과 더불어 썩고 만다.

왜 그러냐? 알아듣기 쉽게 국초국말國初國末, 한 나라가 망하고 한 나라가 들어서는 그런 때는 시운을 만나 영웅도 될 수 있고, 재사才士도 될 수 있고, 자기 능력에 따라서 공신록功臣錄에 이름을 크게 한 번 올릴 수도 있다. 자기 가문을 빛내고 수백 대에 걸쳐 명문 집안을 만들 수가 있다. 하지만 때를 못 만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 인격을 발휘할 데가 없단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세상 속에서 때와 운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제 인격은 둘째다. 때와 운을 만나지 못했는데 제 인격을 어디에다 발휘할 수가 있나? 그걸 불우시不遇時, 때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운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증산도 학생 신도들은 과연 참 좋은 운, 좋은 때를 맞이했다. 이것은 한 국가가 망하고 흥하는 운도 아니고, 천지의 질서가 바뀌는 시운이다. 12만 9천6백 년, 대우주 천체권이 한 바퀴 도는데 천지가 틀어지는 바로 그 시점, 다시 말해 천지의 큰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하추교역夏秋交易, 금화교역金火交易하는 때를 맞이했다. 천지가 틀어지는 이때는 사람이 천지를 대신해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상제님 진리로 한마디 묶어서 전하면 “천존天尊과 지존地尊보다 인존人尊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人尊時代다.”(도전道典 2:22:1)라는 것이다.

지금은 인존 시대다. 천지를 대신해서 사람이 모든 문제를 매듭짓는다. 천지에서 사람 농사를 지어서 사람 씨알을 추리는 개벽을 할 때 사람이 천지 대역자代役者 노릇을 한다. 천지에서 개벽을 하지만 사람이 천지를 대신해서 추수秋收를 한다.

가을철 통일 문화가 열린다

사람은 천지를 상징해서 세상에 났기 때문에 누구나 창조적인 동향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창조의 동물이다. A보다 B가 더 좋은 것을 연구하고, B보다 C가 더 좋은 것을 연구하려고 한다. 어제보다 오늘 더 새로워지려 하고, 오늘보다 내일 더 새로운 것을 개발하려고 한다.

인류 문화는 창조의 경쟁 속에서 이렇게 발전했다. 역사라는 것은 창조를 거듭한 것이다. 오늘날 물질문명도 종극終極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극치의 문명을 이뤘다. 역사와 더불어 창조를 자꾸 거듭해서 인간 문화가 극을 달리고 있다. 사람만 개벽하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문화도 개벽을 한다.

가을철에는 열매가 여물잖은가. 가을은 결실하는 계절이다. 알기 쉽게 말해서 지구년에 봄에 물건 내서 여름철에 길러서 가을철에는 봄여름에 내서 기른 진액을 전부 뽑아 모아서 결실 즉 열매, 알맹이를 맺는다. 통일을 한다. 하나로 묶는단 말이다.

오늘날 문명은 다만 물질문명일 뿐이다. 우선 하나 예를 들면 이 지구상에서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단추 하나 누르면 세상만사를 나름대로 다 알 수가 있다. 또 단추를 누르면 저 호주, 뉴질랜드, 지구 끝 어디에 있어도 다 통화를 할 수가 있다. 그런 극치의 문명이다. 그러나 알고서 보면 그건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문명이다. 물질문화가 있는가 하면 반면에 정신문화가 있다. 물질문명은 유형 문화, 정신문화는 무형 문화다. 무형 문화라 하는 것은 가을바람을 타고서 그때에 오는 것이다. 물질문화와 정신문화가 하나로 묶일 때 그것을 총체적으로 완성된 문화라 할 수가 있다.

오늘날 물질문화라 하는 것은 다만 50프로밖에 안 되는 미완성 문화다. 유형 문화가 50프로, 무형 문화가 50프로다. 유형⋅무형이 합해져야 총체적인 100프로 문화라고 할 수가 있다.

우주정신, 천지는 그런 알맹이를 여물기 위해서 사람 농사를 지어 왔다. 이번에는 천지에서 좋은 핏줄, 바른 사람들만 추수한다. 그렇게 해서 인간 열매를 매듭짓는 것이다.

사람은 천지를 상징해서 생겨났기 때문에 인류에게는 문화가 수반된다. 유형 문화, 무형 문화가 총체적으로 하나로 묶일 때 통일 문화가 나온다. 결실 문화 즉 유형 문화와 무형 문화가 하나로 합치된 알맹이 문화가 나온다. 천지에서 사람 농사를 지은 목적은 그걸 이루려는 것이다. 그것을 이룰 사람들이 바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상제님 진리가 그렇게 돼 있다.

천지 이법을 집행하는 천하사 일꾼

우리 상제님은 참 하나님으로서 본래 하늘나라에서도 우주의 주재자이시다. 천지의 사령탑 위치에서 이 세상 모든 가지를 ‘그렇게 해라.’ 하고 명령하시고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쓰신다. 상제님은 천계天界와 지계地界와 인계人界를 다스리시는 절대자이시다.

이번에는 추수를 하셔야 되니까 친히 사람으로 임어臨御하셔서 신명과 사람을 천지공사天地公事로써 널리 구원을 하셨다. 그렇게 둥글어 가도록 프로그램, 시간표, 이정표를 짜셨다. ‘요 모양 그대로만 둥글어 가라.’ 하고 틀을 짜 놓으신 것이다. 이 세상은 참 하나님, 옥황상제, 증산 상제님이 당신의 대이상향에 맞도록 프로그램을 만든 그대로 둥글어 간다.

다시 말해서 상제님은 천리天理를 집행하셨다. 그러니 상제님의 진리는 자연 섭리요, 자연 섭리가 상제님의 진리다. 천리는 누가 좌지우지左之右之할 수 없다. 그것은 타협도 되지 않고, 어떤 특정인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본래 정해진 대로, 천지 이법 그대로 둥글어 가는 것이다.

여기 앉은 사람들, 우리 신도들은 천지의 이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다. 그저 묶어서 그렇게 말하면 더도 덜도 없다. 참 위대한지고. 그런 좋은 시운을 만난 사람들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길을 한참 찾다가 ‘뭐 좋은 것이 없나? 세상살이를 하는데 무엇이 내 입에 맞겠나?’ 하다가 여기에 들어왔다. 알고 들어왔건 모르고 들어왔건, 조상의 음덕으로 우연히 이런 좋은 데를 만난 것이다.

상제님 진리는 자연 섭리이기에 아주 당연한 것이다. 윤리관으로 볼 때 사람으로서 자기 조상을 뿌리로 모신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비롯해서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윗대 조상이 나의 뿌리다. 그것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그렇게 알아진다.

상제님 진리는 그런 바른 진리다. 사람은 바른 진리가 들어가면 그 정신이 삿된 것으로 바뀔 수가 없다. 절대로 바꿔지지 않는 것이다.

우주정신, 천지의 이치라 하는 것은 아주 공명정대公明正大하다. 그래서 공명정대한 정신 속에서 생장하고, 그 진리를 체질화한 사람 앞에서는 비뚤어진 것이 붙을 수가 없다. 사불범정邪不犯正, 삿된 것은 바른 것을 범할 수 없는 것이다. 타협도 안 되고 말이다.

성공하는 일꾼 신앙의 길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각자가 분업적 작용을 한다.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전부를 바치고 혼을 바쳐서, 발분망식發憤忘食,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면서 일을 한다. 한참 일에 열중하다 보면 배가 고프다. ‘아이쿠나, 점심을 안 먹었구나.’ 밥 굶는 줄도 모르고 일을 한다. 자기 하는 바에 그렇게 일심으로, 다 바쳐서 집중해야 그런대로 성공도 하고 하나라도 이룰 수가 있다.

헌데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은 더군다나 천지 사업이다. 천지의 일을 우리가 대역자代役者로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천지의 대역자이기에 조금이라도 개인주의, 이기주의, 이런 소인배 속성을 가지고 사사로운 생각을 갖고서 일하면 성공할 수가 없다. 남을 미워하고, 질투하고, 세상 말로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고, 내가 앞질러 가야 되고, 내가 명령을 해야 되고, 세상 사람은 나를 도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때, 어느 시대고 설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은 겸허해야 한다. 세상 사람을 나보다 낫다고, 고마운 사람으로 여겨야 나를 상대하고 단골도 되고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상대했다가 손해가 났다면 누가 그 사람을 상대하겠는가? 사람은 같이 살게 돼 있는 것이다. 공생공영共生共榮, 같이 살고 같이 번영한다. 저 사람에게 이로워야 나도 얻는 게 있다. 나도 남을 위해야 남한테 대접을 받는단 말이다.

성공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저 불가에서도 3천 년을 내려오는데 ‘태산절정泰山絶頂에 갱진일보更進一步라’는 문구가 있다. 태산의 맨 꼭대기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디딘다는 것이다. 태산 그 높은 데서 한 걸음을 더 내디디면, 떨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잖은가. 그러니 죽음을 무릅쓰고, 생사를 맡기고 다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공은 바로 거기에 있다.

유가에서도 이런 말이 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갱진일보更進一步라’, 백 자나 되는 장대의 끄트머리에서 다시 한 걸음을 나간다. 그 끄트머리에서 한 걸음 나가면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하라는 것이다.

내가 우리 신도들을 교육하는 데 이런 문구를 많이 쓴다. ‘이재만궁지간利在挽弓之間이라.’ 이로울 이利 자, 있을 재在 자, 활을 걸어 시위를 당긴다는 만挽 자, 활 궁弓 자, 갈 지之 자, 사이 간間 자. 뜻을 풀어 보면 이로운 것은, 다시 말해 성공을 하는 것은, 열매기에 결실하는 것은 활을 걸어 당기는 그 사이에 있다는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활을 쏘는 사람이 과녁을 향해서 냅다 활시위를 잡아당기는데 그 과녁을 관중貫中, 꼭 맞혀야 하니 정신을 집중한단 말이다. 과녁을 향해 시위를 잡아당기는 것을 한번 가만히 연상해 봐라. 그 자세가 어떻게 되겠는가? 그 과녁을 꿰뚫어 맞히려고 손과 발과 육신 전부를 총체적으로 과녁에 집중하고, 온 정신을 집중해서 잡아당긴단 말이다. 유형과 무형, 정신과 육체가 거기에 100프로 집중돼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화살촉이 과녁을 관중할 수가 없다. 세상만사 성공을 하는 것은 활 쏘는 사람이 과녁을 상대해서 시위를 잡아당기는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성공을 한다는 말이다. 신앙도 역시 그렇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헛신앙을 하고 만다.

봉사하는 일꾼의 자세

가을에 열매를 맺지만, 남이 그것을 맺어 주지는 못한다. 알기 쉽게 말하면 부모와 자식도, 내외간도 몸뚱이가 각각이기 때문에 호흡도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해야 된다. 자신이 스스로 호흡해야 되는 것이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호흡을 대신해 주고, 밥을 대신 먹어 주는가?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사람은 몸뚱이가 각각이기 때문에, 생명체가 각각이기 때문에 자기가 제 생명을 유지해야 되지, 절대로 남이 대신해 주지 못한다. 잠도 자기가 자야 되지 남이 대신 자 주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천지를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을 천부적으로 타고 났다. 그렇건만 기가 죽고 무능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생존 경쟁에서 패배당할 수밖에 없다. 제군들은 우승열패優勝劣敗, 약육강식弱肉强食을 너무도 잘 알 것 아닌가. 지나간 세상 역사 과정이라는 게 그랬다. 아무리 상제님 진리가 상생相生의 도道라 하더라도 자기가 제 일을 해야 된다. 제 능력으로써 세상에 도움을 준단 말이다.

우리는 봉사 정신을 갖고 일해야 한다. 지나간 역사 과정에서도 봉사 정신이 없는 사람, 세상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는 사람은 현인군자賢人君子가 되지 못했다. 남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공도公道에 따라 봉사하면 또 그 대가가 반드시 온다. 공도에 따른 대가, 그건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것이다.

종국적인 천지 목적, 군사부 문화

이번에 우리는 좋은 시운을 만났다. 이런 좋은 시운이 어디에 있나? 이건 12만 9천6백 년 만에 오직 한 번 있는 일이다. 일 년 농사를 지으면 매듭, 알맹이를 맺는 때는 한 번밖에 더 있는가? 대우주 천체권이 한 바퀴 돌아갈 때 오직 한 번 있는 일이다. 이것은 천지의 알맹이를 맺는 그런 천지의 시운을 만나는 아주 큰 일이다. 그래서 내가 “증산도는 천지를 담는 그런 그릇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결론을 말하면,
천지 정신의 종국적인 목적은 군사부君師父라는 열매를 맺는 것
이다. 군사부 열매라는 것이 뭐냐? 다음 세상은 상제님 진리로써 도성덕립道成德立이 된다. 상제님 진리로써 상극의 역사를 매듭짓고 상생의 문화, 새 세상을 연단 말이다. 그러면 상제님 진리로써 통치를 하니 상제님이 군君이 되는 것이다.

또 죽는 세상에 상제님 진리로써 사니 상제님이 부모父母도 되신다. 생아자生我者도 부모요, 양아자養我者도 부모라. 나를 낳은 분도 부모지만, 죽을 세상에 나를 살려 주셨으니 부모도 되는 것이다.

아울러 후천 5만 년 세상을 상제님 진리 속에서 전 인류가 살아 나가니 상제님이 말할 것도 없이 스승 아닌가? 그러니 상제님이 군君도 되고, 부父도 되고, 스승[師]도 되는 것이다. 대자연의 섭리, 틀이 군사부인 것이다. 군사부라는 틀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억지로 만든 것이 아니다. 천지 이법이 그렇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런 천지의 열매를 군사부라 부르는 수밖에 없다. 천지 열매의 명칭이 군사부요, 군사부가 바로 천지의 알맹이다.

새 역사를 여는 마지막 성공

상제님 진리는 거짓이 없다. 0.1프로도 절대 거짓이 없다. 앞으로는 다 자기 닦은 바에 따라서 도통도 한다.

상제님이 신명 세계, 조화정부造化政府에서 틀을 짜 놓으셨다. 조화정부에서 짜 놓은 시간표, 이정표, 프로그램에 의해서 이 세상이 둥글어 간다. 헌데 그 신명계의 틀과 상제님 진리 속에 조직된 인간 세상의 틀이 장차 하나로 합치된다. 신인神人이 합일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앞 세상에, 사람은 신명을 만나야 사람 노릇을 하고, 신명은 사람을 만나야 신명 노릇을 한다. 가을 운은 그렇게 돼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게 바로 알맹이를 맺는 것이고, 유형과 무형이 통일을 하는 것이다. 앞 세상에 이뤄질 총체적인 그 구성체를 내가 이렇게 조금 맛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앞으로 꽃 피고 열매 맺은 그 알맹이를 여기 있는 사람들이 추수한다. 한마디로 묶어서 말하면 집행을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두겁조상이 된다. 다시 말해서 크게는 역사의 창시자가 되고, 작게는 자기 혈통의 창시자가 되는 것이다.

또 후천 세상에는 무병장수 문화가 나온다. 태모님이 “상수上壽는 천2백 살이요, 중수中壽는 9백 살이요, 아주 조금 사는 하수下壽도 7백 살은 살 것이다.”라고 하셨다. 실제 잘 살면 몇천 년을 살 수가 있다. 앞으로 가을 세상에는 진짜로 그렇게 된다.

사람은 가치관價値觀에 따라 살아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편안해서 뭣 하는가? 거기서 무엇이 나오겠는가? 우리는 세상 사람을 살리는 포교를 많이 해야 된다. 우리는 사람이다. 냉혈 동물이 아니라 온혈 동물이다. 상제님이 각자 육임任을 짜라고 하셨다. 하지만 사나이가 어떻게 육임만 짜겠는가?

나는 스물네 살에 8.15를 만나서 상제님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내 정력으로써, 척진 사람에게는 그 척신을 제거시켰다. ‘저 땅끝까지 최후의 한 사람이라도 능력이 허락하는 한계 내에서 다 건질 게다.’ 하고 달라붙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백절불굴百折不屈의 정신으로 상제님 일을 하고 있다. 백 번 자빠져도 다시 털고 또 일어난다. 심혈心血이 경주傾注되는, 마음과 피가 함께 기울어지는 열정, 정열을 가지고 있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피와 용기를 뒀다가 어디다 쓰려는가? 능력을 바쳐서, 유형과 무형을 다 바쳐서 상제님 신앙을 해야 한다. 자기 개인 사정이나 무슨 욕심과는 관계가 없다. 천지 공도는 그렇게 엄격하게 돼 있다. 상제님을 잘 신앙해서 유종有終의 미를 거두어라, 반드시 성공을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저 지구 끝까지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살려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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