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8

알라딘: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 지금은 기본으로 돌아갈 때다!



알라딘: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 지금은 기본으로 돌아갈 때다!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 지금은 기본으로 돌아갈 때다!
손봉호 (지은이)도서출판CUP(씨유피)2018-08-10










































종이책 페이지수 332쪽

책소개
저자는 기독교의 휘청거림의 원인을 발견케 하며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기를 촉구한다. 이 책은 정치, 경제, 사회, 정의, 교육, 학문, 가정, 가치관을 망라하는 압축되고 정련된 고농축 엑기스와 같은 견실한 67편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시대와 삶에 대한 기독교적 사명에 일찍이 눈뜨고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물길을 연 선구자와 같은 역할을 했다. 공명 선거, 경제 정의 등 사회정의와 윤리 운동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뿌리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했으며, 신앙과 삶, 신앙과 학문을 통합하는 여러 노력들은 이원론적인 기독교에 균형잡힌 안목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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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저자 서문
프롤로그_ 세상이 아주 잘못되고 있다.

01 어지러운 세상
과도기의 서러운 시대
언어는 세계관 그릇
Media is Message
수치도 죄의식도 사라지는 세상
한국인의 거짓말
경쟁심과 연합
경쟁에 찌든 한국 교육
한국 교육, 실패한 종교
한국 대학생의 고민

02 우상으로 등극한 돈
비판적 소비
티끌 모아 태산
탐심이 우상숭배
한국 교회를 타락시킨 돈
돈이란 우상
탐심은 마음 건강의 적

03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모르고는 이길 수 없다
한국 교회의 부패와 기독교적 세계관
기독교는 무식한 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마음과 소통
법 없이도 사는 사람

04 위대한 유산
책의 종교
세계관과 상대주의
상대주의가 아닌 다원주의
기독교적 역사관과 창조적 상상
역사의 무게
인간 생명의 존엄성
인간 생명은 왜 존엄한가?
인권 존중, 기독교의 유산
동성애는 하나의 가시
동성애 반대도 과유불급
학문을 제자리에 놓기
공부해서 남 주자
순수하고 정직한 아름다움
그리스도인과 전쟁
통일의 기독교적 명분

05 급변하는 시대
4차 산업혁명, 경계하며 지켜보자
사이버 공간과 신독
정보의 홍수와 미숙한 인격
과학적 지식은 잠정적
상대적인 과학, 절대적인 성경
기술 개발 모라토리엄이 필요하다
인간은 과학보다 크다

06 인류문명을 바꾼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매체 사건이었다
종교개혁을 기념할 자격
종교개혁과 인간 교육
종교개혁과 경제 정의
종교개혁 시대의 예술
종교개혁과 이웃 사랑
종교개혁과 학문의 발전

07 정의로운 사회
약자와 윤리
약자 보호가 정의
비판적 정치 참여
시민사회와 윤리
정의의 요구가 만족되어야
로잔 언약과 사회적 책임
의사와 구주
경제민주주의, 왜 필요한가?
지도자의 도덕성
정의와 세계관

08 소중한 가정
가정의 주권과 교육
세계관과 어머니
부부간의 사랑
엄숙하고 소박한 결혼 문화
가정이 건강해지려면
아버지와 권위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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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00 최근 한국 기독교계의 부패가 심각하다.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이 금전적, 성적 스캔들을 일으키고 한국 개신교를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돈 선거로 회장을 뽑아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불신자들보다 더 비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지 의심이 생긴다. 그들이 과연 그리스도인인가?
_ “한국 교회의 부패와 기독교적 세계관” 중에서 접기
P. 104~105 바울 사도는 헬라인이 찾는 지혜는 십자가의 도에 비해서 어리석은 것이며(고전 1:22~25), 당대의 학문을 대변한 철학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속임수나 다름없는 것으로 취급하였다(골 2:8). 2세기 때 교수 터툴리아누스는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라고 하면서 “(철학의 도시) 아테네와 (믿음의 도시)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물음으로써 믿음의 세계에는 지식이 설 자리가 없다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알기 위해서 믿어라”(crede, ut intelligas)고 했고, 안셀무스도 “알기 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고 했다. 모두 믿음이 지식에 우선하고 믿음이 있어야 올바른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지 지식의 종교가 아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주장을 펼친 바울과 터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가 모두 당대의 뛰어난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는 기독교 신학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철학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되고, 칼뱅은 23세 때 쓴 〈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에서 라틴 저자만 해도 55명을 인용했다. 그들 외에도 기독교는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 카이퍼, 바르트(K. Barth), 틸리히(P. Tillich), 니버, 도여베르트, 루이스 등 위대한 신학자들과 지식인들을 수없이 배출했다. 만약 그들이 없었더라면 그 후 역사에서 기독교가 누렸던 위상이 과연 가능했겠으며 심지어 믿음과 지식의 관계에 대해서 바로 알 수 있었겠는가? 거대한 세속 문화의 흐름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
오늘날 한국 교회는 만신창이의 처참한 상황에 처해 있다. 모든 고등종교 중에 가장 불신을 가장 많이 받고 있고, 세상의 조롱과 조소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 원인 가운데 하나가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 자란 반지식적이고 반지성적인 경향이다.
_ “기독교는 무식한 종교가 아니다” 중에서 접기
P. 154 성경을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의 세계에서 당면한 가장 난처한 문제 중 하나가 동성애가 아닌가 한다. 구약 성경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도 분명히 동성애를 큰 죄악으로 보고 있다. 거기다가 비그리스도인들 상당수도 동성애는 미풍양속에 어긋나며 자연스럽지 못하고, 순수하고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고, 동성애자가 늘어나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가정이 생겨날 것이라 하여 반대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동성애자들을 비도덕적으로 보지 않을 뿐 아니라 마땅히 보호해야 할 소수자로 보고, 그들을 차별대우하는 것은 장애인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 못지않게 정의에 어긋나고 시대착오적이라고 비난한다.
거기다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은 기독교 안에서도 동성애를 인정하는 교단과 신학자들이 있고 동성 간의 결혼을 허용할 뿐 아니라 동성 결혼식을 주례하며 심지어 동성 간 결혼한 사람들이 성직을 갖는 것도 허용하는 교단이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살인을 정죄하고 금지하듯 기독교 교파나 신학자들이 모두 동성애를 반대한다면 그나마 입장 설정이 쉬울 텐데 그렇지 않으니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처신이 더욱 난감해지는 것이다.
_ “동성애는 하나의 가시” 중에서 접기
P. 189~190 루터의 종교개혁은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란 주장이 있다. 면죄부의 오류를 지적한 루터의 95개 조항은 당시에 막 개발된 인쇄술 때문에 빠른 시일 안에 전국으로 확산되고, 천주교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개혁의 추진력을 얻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도 인쇄술이 없었다면 그처럼 많이 제작되고 빨리 확산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쇄술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났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인쇄술이 없었더라면 종교개혁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란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물론 단순히 그 때문에 개혁교회가 새로운 기술에 호의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 모든 지적 활동의 자유를 제한했던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무너진 것이 과학과 과학기술을 포함한 모든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신장하는 데 크게 공헌한 것은 사실이다. 오늘의 자연과학과 과학기술은 종교개혁 덕에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소명(Beruf)’이란 루터의 주장과 노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칼뱅의 가르침, 그리고 칼뱅이 빌린 돈에 대해서 이자를 허용한 것은 상업 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거기다가 칼뱅은 절제를 강조한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 제네바 시에서 보석 매매를 금지하여 보석공들이 시계 제작으로 직업을 바꾼 것이 오늘날 스위스 시계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어쨌든 종교개혁이 과학기술과 산업 발전에 엄청나게 큰 공헌을 한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_ “4차 산업혁명, 경계하며 지켜보자” 중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손봉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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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경북 포항 출생. 고신대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나눔국민운동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이사장,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세계밀알연합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서울영동교회, 한영교회, 다니엘새시대교회 협동 설교자로,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순수하며 서로 믿을 수 있는 사회, 윤리적인 사람이 되어야 함을 전하는 특별한 사역자이며 철학자이자 윤리학자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사회철학과 사회윤리학을 가르쳤다. 한성대학교 이사장, 동덕여자대학교 제6대 총장을 지냈다.
저서로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 《오늘을 위한 철학》, 《기독교적 관점에서》, 《꼬집어 본 세상》, 《윗물은 더러워도》, 《별수 없는 인간》, 《고통받는 인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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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나는 누구인가>,<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 총 5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시대를 꿰뚫는 철학자의 시선
시대를 분별하는 안목과 관점을 배울 수 있는 책!
지금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우리나라 초창기의 기독교는 문화와 시대를 앞서가며, 시대를 주도했다. 나라와 민족의 주춧돌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는 그 중심축을 잃고 심하게 휘청거리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그 휘청거림의 원인을 발견케 하며 기초부터 다시 시작하기를 촉구한다. 이 책은 정치, 경제, 사회, 정의, 교육, 학문, 가정, 가치관을 망라하는 압축되고 정련된 고농축 엑기스와 같은 견실한 67편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시대와 삶에 대한 기독교적 사명에 일찍이 눈뜨고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물길을 연 선구자와 같은 역할을 했다. 공명 선거, 경제 정의 등 사회정의와 윤리 운동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뿌리를 공고히 하는 데 일조했으며, 신앙과 삶, 신앙과 학문을 통합하는 여러 노력들은 이원론적인 기독교에 균형잡힌 안목을 제공했다.

광대한 공적 영역에도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한때 삶의 중심부에 있었던 종교는 주변으로 밀려나 사적인 공간에서 쉬는 시간에나 관심을 쓰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기독교의 쇠락은 결코 불가피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교회와 신학이 좀 더 심각하고 철저하게 문화의 변화와 씨름했더라면 오늘날의 이런 결과는 피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공공영역을 주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삶의 주변으로 물러난 기독교는 오직 영혼의 구원과 개인적 경건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인간의 삶을 가장 크게 지배하고 사람들이 관심과 시간 대부분을 쏟아 붓는 공공영역은 내팽개치고 말았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은 오직 사적인 공간과 휴식 시간만 지배할 뿐 광대한 공적 공간과 시간에는 무력한 것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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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플 bookple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기독교 지성인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분들이 몇 분 계신다.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분 중에는 이어령 교수, 김형석 교수, 손봉호 교수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손봉호 교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저서를 통해 많은 영향을 받은 분이다.



이번에는 손봉호 교수님이 쓴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라는 책을 읽었다.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오늘날 기독교가 가진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제목에 씁쓸한 기분이 들면서도 우리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제목이다. 과연 이 시대의 기독교를 저자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본 것일까?



저자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오늘날의 상황과 사건들을 바라보고 이를 대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토대로 <월드뷰> “대표주간 칼럼”에 기고한 글들을 추려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다고 한다.



프롤로그부터 강렬한 질타로 시작한다. 세상이 아주 잘못되고 있다는 한 마디로.



저자는 세상이 잘못된 이유가 돈과 기술을 우상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독교인의 입장이 아니라도 충분히 공감할만한 주장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돈이면 다 된다는 물질 만능주의와 기술로 인간이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헛된 욕망이 인간 세상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시대이다.



저자의 따끔한 일침이 이제부터 시작이다. 끝없는 경쟁에 빠져버린 한국 사회, 참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하지 못한 수많은 기독교인들, 과학적 발전으로 인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현대인들 등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가, 인류가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를 저자는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은 어디일까? 저자의 말처럼 사적인 영역을 넘어서 공적인 영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던 기독교의 모습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일까? 아니면 수동적으로 보일지라도 신앙이라는 측면에 더 깊이 매진해야 하는 걸까?



사람마다 각자 생각이 다르겠지만 분명한 건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만물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는 것이다. 이 진리 위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기독교인의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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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tato4 2018-02-13 공감(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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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요즘 과학적 사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롱을 받고 있고,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현대 문명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실패했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 ... 기독교 신학은 이런 결과를 예측할 수 있어야 했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어야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유주의 신학은 너무 빨리 과학적 사고에 아첨해 버렸고, 보수신학은 너무 강하게 과학적 사고와 담을 쌓았다. ... 결국 정치, 경제, 기술, 학문 등이 공공영역을 주도하고,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은 거기서 무의미하게 되고 말았다. 삶의 주변으로 물러난 기독교는 오직 영혼의 구원과 개인적 경건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인간의 삶을 가장 크게 지배하고 사람들이 관심과 시간 대부분을 쏟아붓는 공공영역은 내팽개치고 말았다. ... 이런 이원론 때문에 기도와 전도에 열정을 쏟는 그리스도인조차 정치계나 기업계에 들어가면 불신자와 다름없이 행동한다"(92).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는 기독교 지성의 힘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여기에 수록된 글은 모두 <월드뷰> '대표주간 칼럼'에 기고한 것들을 모은 것"(6)이라고 하는데, 설교의 설교처럼, 어쩌면 (전형적인) 설교보다 더 강하게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따끔하게, 심각하게, 놀랍게 흔들어 깨우는 시대적인 통찰을 보여줍니다.

한국 교회의 타락상을 날카롭게 분석하며 손봉호 교수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이 타락했을 때를 보면 항상 주위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을 때라는 점을 환기시킵니다. 돈이 가장 매력적인 우상으로 부상하게 된 오늘날, 모든 욕망이 '돈'이라는 대상으로 집약되면서 그리스도인조차도 돈을 섬기고 있는 세태를 매섭게 지적합니다. 세상을 향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을 일깨워야 할 그리스도인이 돈을 사랑하다는 데 앞장서는 현실은 이 시대의 종교개혁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는 기독교가 공적인 영역으로 관심을 돌려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며, 그리스도인들의 시대적 사명을 일깨우는 책이기도 합니다. 교회와 신학이 좀 더 심각하고 철저하게 문화의 변화와 씨름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요즘 사회와 교회에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동성애가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에 따라 우리의 반응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동성애 문제'도 매우 조심스럽게 그러나 과감하게 손봉호 교수님의 입장을 피력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열린 토론도 활발히 일어나야겠지만 "성경에는 동성애에 대한 경고보다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정의롭게 행동하라는 가르침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도 한국과 미국의 보수 교회는 후자는 무시하고 전자에만 열정을 보인다"(92-93)는 지적도 많은 반성을 하게 해줍니다.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는 읽는 재미가 있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시대를 바라보는 성경적인 시각과 그리스도인들의 시대적인 사명을 일깨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기독교 지성이 있다는 것이 큰 복으로 느껴집니다. 이 책과 같은 좋은 유산을 많이 남겨주시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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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딸 2018-02-1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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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우리 나라는 일제치하시절 믿음을 지키기위해서 주기철목사님의 일사각오의 믿음과 안이숙사모님의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책을 읽고 들으면서 우리 베이비부머세대들은 어릴적 먹을것이 없었고 놀이가 없어 그 당시에 주일학교에서 간식을 준다고하여 먹고 싶고 놀고 싶어 놀이터를 찾다보니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에 다니다보면 친구도 사귈수가 있었고 어릴적의 신앙교육을 받아서인지 다시한번 어릴적 신앙교육을 받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6.25를 거치면서 우리 나라 국민들은 어렵고 힘들어 국가를 위해서 위정자를 위해서 먹을 양식을 위해 힘들고 어렵더라도 믿음으로 버티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말씀과 인도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는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불교국가이지만 해방되기전 선교사님의 전도와 포교로 어려운 경제살림에 도움을 주었고 학교와 건물을 세워주어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로 급성장을 하게 된 것도 그 배후에 기독교의 영향이 크게 기여 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는 우리 나라 국민 세명중 한명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성도가 지금은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움의 자식 가나안성도가 되는 현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이제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입니다.

저자가 말씀하신것처럼 광대한 공적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해야하고 현재 우리는 삶의 중심부에 있었던 삶의기본이 되었던 종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에서 종교는 주변으로 밀려나 사적인 공간에서 쉬는 시간에나 관심을 쓰는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중심에서 말씀으로 살아가야하는 기독교의 신앙이 필요할 때만 사용하는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 기됵교계의 부패가 심각하여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자식들에게 세습을 하고 있고 금전적, 성적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한국 개신교 한국 기됵교 총연합회가 돈 선거로 회장을 뽑아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고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이 불신자들보다 더 못한 행동을 하고 있어 참다운 그리스도인을 찾아 볼수 있는가하는 것에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부족하지만 저 자신도 주님이 좋아서 주님을 위해 살고자 신학을 전공하였고 목회자의 아내가 되겠다고 서원을 하고 그 길로 가고자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라는 사람이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며 교단의 총회장님이하 같은 동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뻔히 보이는 데도 결과가 있는데도 거짓말을 하는 가운데 고소를 하고 싶고 결과를 보고 싶었지만 주님께서 갚아주시리라 믿고 조용히 나왔습니다.

내가 목회자라면 나의 조건을 거짓없이 말을 하고 나를 따라올수 있는가하고 질문을 해야지 그 당시 당신이 필요하다고 하여 미사여구로 말을 하고 거짓혀로 말을 하여 결과를 얻은 다음에는 자기마음대로 일을 하는 데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주님이 하실일 앞의 예를 들은 것처럼 목회자도 그런 가운데 성도들은 사람앞에서는 거룩하고 교회안에서는 감투를 쓰고 대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경우 너무나 많이 보고 있습니다.

또한 감투를 쓰기위해 대접을 받기위해 사람앞에서는 잘하고 그들앞에서는 자기를 높이면서 행동하는 그 사람들을 볼 때는 하나님을 믿는 한 사람으로 참으로 부끄럽고 챙피한 심정입니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목회자의 한 사람을 보면서 저는 명예와 감투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앞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가 잘 하였도다 너는 나와 같이 잔치상세서 축제를 즐기자하고 주님께서 인정을 해주고 받는 것이 진정한 축복이고 진정한 기독교인 즉 성도가 아닐까 사려됩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안에서도 집사권사 장로직분이 문제가 아니라 성도라도 하나님과 내 자신이 얼마나 열매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가 문제일 것이라 생각하면서 조용히 기도하고 조용히 예배를 드리고 성실히 평상시에 빛과 소금의 역활을 해야하는 것이 기됵인 성도의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많고 외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보니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점점더 교회를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안믿는 사람보다 더 못한 경우도 있어 전도하기에 너무나 힘이 든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현제처엄 하루가 다르게 변화와 혁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때 하나님이 어디있는가하면서 떠드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다시한번 제2의 종교혁명 사랑하고 섬기고 대접을 하고 살아가는 진정한 성도의 삶 높아지려고하는 것이 아닌 낮아지려는 삶을 살면서 진정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기됵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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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감자 2018-02-1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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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는 손봉호교수님의 한 잡지에 기고한 칼럼 모음집니다.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라는 제목은 이 칼럼들 중 하나로 아마도 교수님이 이 칼럼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책의 제목으로 정한 것 같다. 교수님이 하고픈 이야기의 핵심은 결국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내용이라 생각된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와 고민이 전혀 없다. 기독교는 삶의 한 부분, 곧 종교라는 영역에만 국한되어 있고, 신앙과 나머지 삶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살아가는 모습만 보면 그 사람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다. 기독교가 주변으로 밀려났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뜻이다. 기독교는 삶의 전 영역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종교라는 한정적인 영역에서만 영향력을 끼치고 만다. 그러나 성경은 삶과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아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으며, 그 시각에서 볼 때, 세상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과 전혀 다르게 보이게 될 것이다. 정치, 경제, 과학, 학문, 직장에 대한 관점이 전혀 달라질 것이고 요즘 화두가 되는 페미니즘과 북핵 문제 같은 것들을 성경적인 시각에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도 사람들과 똑같이 이데올로기나 실용주의 혹은 시대 사조에 따라서 밖에 볼 줄 모른다. 교수님이 한국 교회에 안타까워하는 부분이 바로 이런 것들이라 생각된다.



이 책은 어떻게 기독교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지,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문제와 사회 현상들을 어떻게 성경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지에 대한 좋은 표본이 된다. 이 책이 제시 제시한 내용이 반드시 정답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문제든지 성경적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다.



짧은 글의 모음집이기에 틈틈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모든 성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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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한포기 2018-02-16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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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책 제목부터 기독교가 처한 오늘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듯하다.



한때 기독교가 우리나라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우리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긍정적인 역할을 덮어버릴정도로 지금은 기독교가 우리 삶의 주변으로 밀려나있는듯하다.



예전에는 기독교가 우리 사회를 걱정했는데 이제는 우리사회가 기독교를 걱정하고 있다는 말이



결코 들린 말이 아닌듯하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기독교의 다른말은 '사랑'이라고 하는데 왜 사랑이 없는 기독교가 되어 버린것일까?



손봉호 교수님은 이책을 통해서 기독교의 사랑을 회복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기독교가 이렇게 된것은 '돈'이라는 물질을 우상숭배하고 교회의 부패된것에 원인을 찾고 있다.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하고 성폭행을 자행한 목사가 아무런 제지를 받지않고 버젓이 목회를 하고 있고



교회 사이즈만 커지고 성도수만 많아지면 성공한 목사가 되는 현실과



기복신앙을 바탕으로 예수믿으면 복을 받고 부자가 된다는 요상한 논리를 퍼트리며



성도 모으기에 급급한 일부 교회들로 인해 정작 우리 기독교의 '사랑'은 뒷방신세로 전락해버린것이다.



그럼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를 우리 사회의 중심부로 오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는지는



어떻게 보면 아주 쉬울수가 있다. 누구나 정답은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잘못된 부분을 거꾸로 행하면 되지 않을까?



예수님이 권력자의 집안을 통해 세상에 오신것이 아니라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의미를 깨닫고



이땅의 약자릉 위한 사랑을 실천할때, 잘못된 관행과 제도와 사회에 대해서 올바른 목소리를 낼때



기독교는 우리 삶의 중심부로 다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법무부 국장이 강대상에서 울며 회개하는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찾아가 무릎꿇고 사죄할때 회개가 시작되고



성폭력 목사가 '잘못이 있다면 하나님이 천벌을 내릴꺼라'고 떠들게 아니라 당사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할때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한것을 스스로 반성하고 회개할때



그때야 비로소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가 우리 사회의 중심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면에서 손봉호 교수님의 짧은글들은 우리 기독교인에게 쓰디쓴 비판의 글이지만



또한 기독교를 다시 살릴수 있는 올바른 길을 제시한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목: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저자: 손봉호



출판사: CUP



출판일: 2017년 12월 25일 1쇄 발행

'뭣이 중헌지' 몰라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 복음과상황



'뭣이 중헌지' 몰라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 복음과상황



'뭣이 중헌지' 몰라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독자서평〕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 손봉호 지음 / CUP 펴냄


[0호] 2018년 05월 08일 (화) 10:59:21 노해일 @




한국 기독교, 뭣이 중헌디? 누군가는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영화를 스포츠, 섹스와 더불어 대중을 현혹하고 세뇌하는 미디어라고 말하지만, 우리가 즐겨보는 드라마나 영화 중 몇몇은 ‘바보를 만드는 상자’이거나 대중을 현혹시키는 대상치고는 꽤나 그럴듯하고 머리나 가슴에 오래 잔향을 남기곤 한다. 2016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5월의 중순 개봉한 한국영화 〈곡성〉이 그러한 잔향을 남겼던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 배우 곽도원이 분한 전종구뿐 아니라 영화를 보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라는 일갈은 꽤나 서늘한 잔향을 남겨주었다.

▲ 부제는 '지금은 기본으로 돌아갈 때다'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서 저자 손봉호는 이와 같은 서늘한 잔향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러나 어쩌면, 앞으로 서술할 것이지만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듣고 생각해봐야 할 가까이 두어야 할 잔향이다. 저자는 본 책에서 요즘 과학적 사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조롱을 받고 있고, 과학 기술이 주도하는 현대 문명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실패했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다고 현재의 흐름을 진단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은 이런 결과를 예측할 수 있어야 했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어야 했다고 꼼꼼하게 기독교의 역할에 대해 지적한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자유주의 신학은 너무 빨리 과학적 사고에 아첨해 버렸고, 보수신학은 너무 강하게 과학적 사고와 담을 쌓았다. 결국 정치, 경제, 기술, 학문 들이 공공영역을 주도하고,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은 거기서 무의미해지고 말았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저자는 기독교가 우리 삶의 주변으로 밀려나버렸음을 말한다.

삶의 주변으로 물러난 기독교는 오직 영혼의 구원과 개인적 경건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인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공공영역에 대한 관심은 내팽개치고 말았다. 저자는 이런 치우침 때문에 기도와 전도에 열정을 쏟는 그리스도인조차 정치계나 기업계에 들어가면 불신자와 같이 행동한다고 현재 기독교의 문제점을 꼬집는다. 물론 기독교는 성화를 말하고 거룩을 강조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성화와 경건, 거룩이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렀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미 잘 알 것이다. 그것이 개인에만 머무는 이상, 기독교는 여전히 주변에 머물러 있는 ‘쩌리’로서의 위치를 모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건은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거룩함과 진리를 품고 있는 기독교만이 사회적 차원의 경건을 이룰 수 있고 또한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 기독교가 놓쳤으며, 반드시 다시 붙잡아야 할 ‘중헌 것’ 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 기도의 내용에 집중해야 한다. ‘하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모든 뜻, 즉 하나님의 뜻인 우리의 거룩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 믿는 자들이 다시 ‘중헌 것’을 잡아야 한다. 더 늦기 전에라도 우리는 사회적 경건을 회복해야 한다. 다시 중심으로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존재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여호와 앞에 바로서야 한다. 중심을 회복하고 거룩을, 경건을 사회적 측면에서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한국 기독교가 잡아야 할 ‘중헌 것’ 이다.

손봉호 "교회가 회개할 두 가지, '돈'과 '우리 교회' 우상"



손봉호 "교회가 회개할 두 가지, '돈'과 '우리 교회' 우상"




손봉호 "교회가 회개할 두 가지, '돈'과 '우리 교회' 우상"
[서평]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CUP)

강동석 기자 (kads2009@newsnjoy.or.kr)
승인 2018.03.15 12:11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 지금은 기본으로 다시 돌아갈 때다!> / 손봉호 지음 / CUP 펴냄 / 332쪽 / 1만 5000원. 뉴스앤조이 강동석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명성교회 세습을 판가름할 김하나 목사 청빙 결의 무효 소송 판결이 4월로 미뤄졌다. 많은 이가 지적하듯, 개별 교회의 세습 문제는 공교회성과 결부된다. 개별 교회가 결국 전체를 비추는 상像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공교회성을 실추하고 공공 영역에서 지탄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던 지난해 12월 출간한 손봉호 교수(고신대 석좌)의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CUP)는 공공성을 잃어버린 한국교회의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이를 회복하기 위해 나아갈 길은 무엇인지 살핀다.


"정치, 경제, 기술, 학문 등이 공공 영역을 주도하고,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은 거기서 무의미하게(irrelevant) 되고 말았다. 삶의 주변으로 물러난 기독교는 오직 영혼의 구원과 개인적 경건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인간의 삶을 가장 크게 지배하고 사람들이 관심과 시간 대부분을 쏟아붓는 공공 영역을 내팽개치고 말았다." (92쪽)



사적 공간에 칩거한 한국교회
명성교회 세습, 신사참배보다 심각
"인권 신장, 환경 보존, 사회정의" 주목해야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라는 제목은 문화의 변화에 씨름하며 공공 영역을 주도했던 과거와 다른 입장에 놓인 현재 한국 개신교 모습을 조명한다. 저자 손봉호 교수는 사적 공간에 칩거한 한국교회가 편협한 집단 이익 추구와 정체성 유지에 급급하다고 지적하며,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 대한 이원론이 정치·기업계에서 개신교인이 비신자와 다름없게 행동하도록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이명박', '최태원' 등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성경의 가르침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만큼 무시되는 것도 없지 않다"(110쪽)는 손 교수는, 개혁을 위해 한국교회에서 반드시 제거하고 회개해야 하는 두 가지를 "돈과 '우리 교회' 우상"(74쪽)이라고 지적한다. 명성교회 세습에도 돈과 '우리 교회' 우상 문제가 다 결부돼 있다. 지난해 11월 24일 세습 반대 릴레이 시위에 참여한 그는 "명성교회 세습은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큰 스캔들"이라고 일침을 놓으며, 이를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보다 더 심각한 사안으로 봤다. '부의 대물림'도 세습 반대 이유로 들었다.


"'우리 교회 우상'은 '집단 이기주의'의 발로다. 그리고 집단 이기주의는 개인의 탐심을 좀 더 세련되고 음흉하게 표현하는 전략적 산물이다. '우리 교회'와 '하나님의 교회'를 동일시함으로 집단적 탐심을 '하나님의 이익'으로 위장할 수 있고, 개인들의 노골적인 탐심이 일으킬 수 있는 비판과 양심의 가책을 무마할 수 있다." (74쪽)

"총회장이나 단체장이 되기 위해 뇌물을 쓰는 것, 회계 부정 때문에 교회 재정 상황을 공개하지 않는 것 등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중시하는 행위다. (중략) 지금 한국교회는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모습으로 타락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돈을 무시하기 전에는 결코 개혁될 수 없다." (78쪽)



지난해 11월 24일, 손봉호 교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 회관 앞에서 피켓 시위를 했다. 뉴스앤조이 이용필




'고통' 탐구에 천착한 기독교 철학자답게, 저자는 "인권 신장, 환경 보존, 사회정의 등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이런 행동에 누구보다 더 적극적이 되어야 한다"(93~94쪽)고 말한다. 이런 태도가 곧 공정 영역에 관심을 갖는 일로 이어지고, 교회의 위상과 도덕적 권위를 높여 복음을 전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특히 "고아, 과부, 이방인,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등 '약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정의'를 만족시킨다고 지적하며, 故 이근삼 전 고신대 총장 말을 빌려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끈질긴 편애'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단언한다(171쪽). 따라서 모든 이웃에게 이익을 더하는 것보다 고통당하는 연약한 이웃에게 고통을 더하는 악을 배제하는 것에 우선해야 하며, 개인적으로는 공정하게 행동하고 사회적으로는 정의로운 구조를 세우는 일을 지향해 달라고 요청한다(241쪽).



사회문제,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아가페적 질서가 대안"




이 책은 저자 손봉호 교수가 월간지 <월드뷰> 창간호부터 '대표주간 칼럼'으로 기고한 글들을 엮은 것이다. 이 글들은, 그가 서문에 밝히듯 삶에 영향을 주는 각 분야 상황과 사건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기독교적 관점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쓴 것이다.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는 8개 장으로 구성돼 있다. 
△어지러운 세상 
△우상으로 등극한 돈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위대한 유산 
△급변하는 시대 
△인류 문명을 바꾼 종교개혁 
△정의로운 사회 
△소중한 가정. 

한국 교육을 어떻게 볼 것인지, 종교개혁과 이 시대 이슈들(교육·경제·예술 등)이 어떻게 엮이는지, 4차 산업혁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부부간 사랑이나 가정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등 교회와 사회 전반에 걸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각 장 제목이 전체 내용을 압축 요약해 제시하는데, 개별 글을 보면 다소 주제나 내용에 있어서 겹치는 면이 없지 않다. 장기간 기고한 67개 글을 모아 놓은 것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하겠다. 온건한 보수 개신교인 관점에서 성경과 사회를 바라보는데, 각 사안에 대한 신중하고 진지한 접근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이를테면, 동성애 문제를 다룰 때 성경에 동성애에 대한 경고보다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가르침이 더 많은데 교회가 전자에만 열정을 보인다는 말(92~93쪽)이나, 보수적 입장이지만 동성애가 선천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대목(155쪽)이 그렇다. 과학계의 새로운 발견과 성경 구절 간 갈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언급하는 대목에서도 그의 신중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갈등이 생기면 ①그 성경 구절을 우리가 올바로 이해했는지, ②그것이 잘못이란 과학의 주장이 과연 절대적인지를 물어보아야 하고 ③과학의 주장이 의심할 수 없이 참이라면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우리의 성경 해석도 잘못된 것으로 판명될 수 있고 과학의 주장도 잘못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은 거짓이라는 성급한 결론은 위험하다." (209쪽)

스스로 목숨 끊는 65세 이상 노인들 숫자부터 국민 행복지수까지의 다양한 통계 인용과, 스위스 철학자 테비나스(P. Thévenaz)부터 국제대학생선교회(CCC) 창립자 빌 브라이트(Bill Bright)까지의 광범위한 인물 인용에서는 저자의 부지런한 성찰이 돋보인다.



손 교수는,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에서 이 시대 제반 문제의 대안으로 '아가페적 사랑'을 이야기했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교회 개혁과 사회변혁, 약자를 향한 개인적 정의와 부부간 사랑 등 다양한 사안을 다루면서 저자가 궁극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가페적 사랑'이다. 아가페에 대한 신학자 네일(S. Neil)의 "'사람의 의지가 타인의 영원한 행복(well-being)을 꾸준하게 추구하는 것"(171쪽)이라는 정의와, 다드(C.H. Dodd)의 '감정이나 애정'(emotion or affection)보다 '능동적인 의지의 결단'(active determination of the will)이 주가 되는 사랑(315쪽)이라는 정의를 빌려 오는데, 결국 아가페적 질서가 "인류가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 대안"(11쪽)이라고 주창한다.


"아가페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이익'이나 '의'가 아니라 '이웃의 번영'이 목적이다. 에로스 질서는 현실이지만, 아가페 질서는 이상이며 당위다. 아가페는 얼핏 보면 매우 비현실적인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현실적이다." (11쪽)

[김기석 칼럼] 희망은 변방에서 움터 나온다


[김기석 칼럼] 희망은 변방에서 움터 나온다
김기석·청파감리교회 담임목사
입력 Jun 25, 2019 10:02 AM KST



(Photo : ⓒ베리타스 DB)
▲청파감리교회 김기석 목사

퇴락한 예배당 수리하는 일에 마음을 보태달라는 청을 듣고 강원도의 어느 마을에 다녀왔다. 하천변에 있는 예배당에 들어가 앉아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몇 년 전 교인이 한 명 밖에 없던 이 교회에 부임하자 마을 사람들은 '언제 떠날 거냐?'고 물었다. 그 질문은 당신들에게 마음을 열 생각이 없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그래서 목사 부부는 속으로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그 마을에 머물기로 작정했다. 반기거나 말거나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자 지싯지싯 다가오는 그들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던지 사람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해발 1,300미터 되는 곳에서 거의 30년 째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며 사는 할아버지는 그들이 인사를 드리자 막대기를 휘두르며 다가오지 말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씩 할아버지를 꾸준히 찾아갔고, 마침내 그분의 절통한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목사 내외는 너무도 열악한 환경 속에 있는 그 할아버지를 마을에 방을 얻어 모셨다. 사람들을 꺼리던 분인지라 다른 이들과의 관계맺음에 서툴렀고 집 주인과 다툼이 잦았다. 그래서 지금 목사 부부는 그 할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콘테이너형 주택을 마련하는 중이다.

지금 그 교회는 주일이면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지만 찬송가도 열심히 부르고,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도 바친다. 그 교회에서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한 개체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다. 어느 한 사람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목사 부부의 진심을 알아차린 지역 주민들은 그들에게 '죽을 때까지 우리와 함께 살자'고 떼 아닌 떼를 쓰고 있다고 한다.

교회가 세상의 추문거리로 전락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세상은 진보하고 있는데 교회는 그 진보의 방향과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더딜망정 사회에서 작동되고 있는 자기 정화 시스템이 교회 안에서는 작동되지 않고 있다. 대중들에게 많이 노출되고 있는 목회자들 가운데는 종교적 특권 뒤에 숨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높이 쌓아올린 문화적, 종교적, 인종적 차별의 장벽을 당신의 몸으로 철폐하셨지만, 그들은 장벽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를 배신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믿는 이들의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직면할 때마다 과연 '교회에 희망이 있는가?' 묻곤 했다. 원론적인 대답은 희망의 뿌리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일렁이는 절망감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1:10). 오죽하면 이런 말씀을 하실까. 오늘의 한국교회를 향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실 것 같다. 그러나 궁벽진 산골에서, 해체되고 있는 농촌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 곁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서 애쓰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교회라는 나무의 실뿌리가 아니겠는가? 희망은 중앙이 아닌 변방에서 움터 나온다.

※ 이 글은 청파김리교회 홈페이지의 칼럼란에 게재된 글임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