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3

탈성장론, 불평등 해소와 노동전환 담론 담아야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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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성장론, 불평등 해소와 노동전환 담론 담아야

박태주
60+기후행동 운영위원

입력 2024.06.01


[박태주 칼럼] 유정길 위원의 반론에 붙여

박태주 60+기후행동 운영위원

유정길 운영위원(60+ 기후행동)이 「민들레」에 기고한 글을 잘 읽었다. 내가 “지금 여기가 빠진 생태적 순환사회의 공허함”이라고 말했더니 그 말을 맞받았다. ‘현실의 과잉과 이상의 결핍’. 맞는 진단이다. 

유 위원이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상상’에 비중을 뒀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서의 대응’에 관심이 크다. 현실과 이상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서로를 규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톱니바퀴의 피치 직경이나 폭이 아직은 서로에게 맞춰져 있지 않다는 느낌이다.

토론은 공감을 바탕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가령 뚱뚱한 것도 마른 것도 모두 질병이라는, 다시 말해 남한의 과잉성장이나 북한의 과소성장 모두 문제가 있다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다만 남북에서 각각 벌어지는 현상과 존재에 대한 비판을 넘어 ‘공동의, 차별적 책임의 원칙’을 바탕으로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가 더욱 중요하다는 말은 지난 번에 한 적이 있다.


알래스카 멘델홀 빙하와 그 정면에 위치한 멘델홀 호수에 부빙이 떠 있는 장면(2022년 5월 30일). 2023년 1월 5일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0.2~0.3도 기온상승만으로도 21세기 말이면 전세계 21만 5000개 빙하 가운데 절반이 없어질 것이라고 한다. 지구온난화가 지금 추세로 진행될 경우 빙하의 숫자는 3분의 2로, 빙하의 양은 3분의 1로 줄어들면서 해수면이 4.5인치 상승할 것으로 예측된다.
 AP 자료사진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에 대해서도 유정길 위원은 “경제와 더불어 생태환경과 사회문화 발전을 동시에 고려한 발전”이라는 브룬트란트 보고서(1987)를 인용하며 그 말이 지속적인 성장 욕망을 표현하는 말로 오염됐다고 진단한다. 탈성장이 지속가능발전을 넘어선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생태정의를 위한 투쟁이나 사회정의·경제정의를 위한 투쟁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탈성장은 성장이 멈춘 지점에서 대중의 삶의 질을 높이는 문제와 함께 사회적으로 불평등을 해소하는 문제와 떨어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탈성장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문명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기후위기의 해결책을 성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자본주의에서 찾는다면 자칫 ‘지금 여기’가 소거될 수 있다. 더욱이 탈성장론이, 그리고 유정길 위원이, 기후위기 대응이 초래할 차별과 불평등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와 연관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의로운 전환을 어떻게 실현할지를 말하지 않는다면 탈성장론은 엘리트들의 사고 실험에 머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탈성장은 생태정의와 경제정의, 그리고 사회정의를 한꺼번에 껴안는 개념이고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결코 과잉일 수 없는 기후위기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

유정길 위원은 사회발전, 문명전환을 이야기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미래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지구의 열대화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린 것만 같고, 전환이라는 말보다는 붕괴라는 말이 더 와닿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이미 늦어버린 게 아닐까”라는 불안이 그것이다. 이 불안의 이면에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기후위기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의 결핍이 자리를 잡고 있다. 유 위원은 현실의 과잉이라고 말하지만 현실의 기후위기를 감안한다면 그 대응이 모자랄지언정 과잉일 수는 없다.

지난 5월 초, 영국의 가디언(Guardian)지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소속 과학자들 대상으로 지구온도가 얼마까지 오를 것인지를 물은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843명 가운데 380명이 응답한 이 조사에서 77%는 지구온도가 산업화 이전 시기에 비해 2.5°C 이상, 절반 가량은 3.0°C 이상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절망적이고 끝장났다’(hopeless and broken)라거나 세미 디스토피아(semi-dystopia)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미 발생한 것보다 훨씬 더 강도와 빈도가 높은 폭염, 산불, 홍수, 폭풍으로 인해 기근, 분쟁, 대량 이주가 발생하는 미래”.

이 설문조사 결과가 아니더라도 IPCC는 제6차 보고서(2023.3)를 통해 우리가 ‘단기적으로’ ‘시급하게’ 온실가스를 줄이지 않으면 2021년부터 2040년 사이에 지구온도는 1.5°C까지 오를 수 있다고 내다본다. 2100년에는 4.4°C에 달할 수도 있다는 ‘과학’은 차라리 SF 재난영화에 가깝다. 하지만 현실은 걸핏하면 과학자의 예측조차 배신한다. 한국은 기후위기 대응의 지체로 인해 더 큰 비용을 치를 것이라는 예측도 새삼스럽지 않다.


21일 오후 전남 무안군 무안읍 한 양파밭에서 전남 농민단체가 농업 특별재난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24.5.21. 연합뉴스

기후위기를 해결하는 방향은 단순하리만치 간단하다. 온실가스의 배출을 빠르게, 획기적으로 줄이면 된다. 과학계에선 99.9%의 합의를 보고 있는 사안이다. 성장률을 끌어내리는 게 아니라 화석연료의 생산과 소비를 줄이고 에너지의 효율을 높이는 게 급선무다. 성장율이 낮아진다고 탄소배출이 반드시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폴린(R. Pollin, 2021)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방향이 간단하다고 디테일까지 간단한 것은 아니다. 가령 “전기요금을 자유화할 것인가, 정상화할 것인가” “석탄화력발전소를 2050년에 퇴출한다는 건 너무 늦지 않을까” “공공이 주도하는 재생에너지가 중요하다면 해외자본이 주도하는 해상풍력사업을 지원해도 될까?” “원자력 전력과 석탄화력 전력을 수송하는 송전망 건설은 필요할까?”라는 질문들은 하나같이 복잡하고 어렵다. 에너지전환 부문을 넘어 산업 부문과 교통, 건물 부문에서, 농업과 목축 부문에서, 그리고 우리의 소비생활에서 탄소를 줄여가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탈성장론이 이런 질문을 외면한 채 미래 전망을 말한다면 그것은 버스가 지나간 뒤에 손을 드는 거랑 진배없다.

불평등 해소 빠진 탈성장론은 사회적 약자 차별이 될 수도

현실의 결핍만이 아니다. 이것 못지않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유정길 위원이 탈성장론을 말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 나아가 불평등의 해소와 관련한 대안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이 지점을 구색 맞추듯 이야기하고 지나가는 경향은 탈성장론의 일반적인 한계에 속한다). 그러다 보니 탈성장 전략의 실현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를 중심으로 기후연대를 형성하는 전략을 제시하지 못한다. 대중에 대한 공감의 결핍이 연대의 결핍으로 이어진다.

경기가 침체를 넘어 역성장으로 가면 산업의 급격한 구조전환은 물론 무역환경의 변화(규제의 강화. 무역 규모의 축소, 신냉전과 지정학적 갈등, 공급망의 불안 등)를 가져오고 그것이 초래하는 실업과 물가상승은 사회 혼란과 양극화를 심화시킬 것이다. 세수의 부족은 친환경 투자와 공공서비스(교통, 교육, 주거, 의료 등)의 축소를 가져오고 사회안전망의 유지조차 어렵게 만들 것이다. 기업들은 살기 위해 해외로 나가고, 공공주도의 재생에너지와 송전계통의 구축이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하지만 곳간이 빈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해외자본에 의존하는 것뿐이다. 이 과정에서 불로소득 자본주의가 득세하고 불확실성이 늘어가는 에너지 시장에서 에너지 공급과 에너지 주권의 확보조차 장담할 수 없는 처지로 몰릴 수 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소속 과학자들의 지구온난화 예상도. 왼쪽은 지구 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1.5°C 오를 경우, 오른쪽은 2.0°C 오를 경우 예상되는 더운 날씨의 수이다. 가장 적은 베이지색의 10부터 가장 많은 고동색의 70까지를 표시했다. 글로벌 사우스라고 불리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개도국들에 피해가 집중됨을 알 수 있다. IPCC 누리집

기후위기가 가져올 재난의 그림자에서 더욱 무서운 것은 그것이 사회의 약자에게 더 가혹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에게 기후위기는 멀리 있지 않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옥고’(반지하, 옥탑방, 고시원)나 쪽방촌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이고 전환의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고 생계수단을 상실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미래 세대도 사회적 약자이기는 마찬가지다. 2050년에 탄소중립을 달성한다고 하지만 “2050년 이후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현대사에서 화석연료로부터 자유로운 첫 세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차라리 조롱으로 들릴 정도다.

유정길 위원이 꿈꾸는 생태적 녹색대안사회에서 사회적 약자의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언급은 없다(이는 지면이 좁다고 생략할 주제가 아니다). 한 발 나아가 ‘생산’ 중심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한다. 사실 나는 이 말이 두렵다. “이 말은 결국 전환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에 몰두하는 노동자를 배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계속 일하고 싶다”라며 파업을 준비 중인 발전 비정규노동자들에게 유 위원은 뭐라고 말할까. 자본주의적 성장에 헌신하지 말고 노동을 거부하고 노동에서 벗어나라고 말할까?

탈성장 사회에서, 또 거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노동은 어떻게 자리매김될까. 노동자는 투명인간처럼 사라져야 할 계급일까. ‘노동과 기후 사이의 갈등’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책임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연대는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공통의 목표를 위해 힘을 합치는 과정이고 그러면서 대중을 주체로 세우는 과정이다. 탈성장론이 도대체 누구를 전환의 주체로 세우려는지 내가 궁금해하는 이유다.


사이먼 스틸 유엔 기후변화협약 사무총장이 20일 이집트 홍해 휴양지 샤름 엘 셰이크에서 열린 COP27 기후정상회의 폐회 총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2.11.20. 로이터연합뉴스

탈성장론, 대중 주체를 놓치면 게으른 기후 담론이 될 수도

미래전망을 실현하는 전략 못지않게 현실적인 주체 형성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내가 탈성장론을 게으른 담론으로 보는 이유의 하나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 벽을 치자는 말은 아니다. 이상이 현실에서 출발하지 못하고 현실과 연결되는 고리도 찾지 못하면 그것은 선지자의 예언에 그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정부를 욕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는 쉽다. 하지만 대안을 세우는 일은, 그리고 그 대안을 실현하기 위해 대중연대를 구축하는 일이야말로 탈성장론이 사회과학 담론으로 자리를 잡는 요체다.

성장이 느려진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팍팍해질 삶을 먼저 걱정하는 사람을 성장중독에 걸렸다고 비난하면서 대중 주체를 찾기는 어렵다. 일자리의 상실을 우려하는 노동자를 향해 체제전환에 동참하라고 요구한다면 엘리트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있다. 국민의 대부분은 노동자이거나 노동자의 임금으로 살아가는 노동자 가족이다. 노동자는 생산을 담당하는 데다 소비에서도 큰 손이다. 대중 주체라고 말하면 그 중심에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 특히 기후단체와 노동조합 사이의 연대가 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운동이 대중을 소외시키면 운동은 대중으로부터 소외된다. 기후운동이 풀뿌리 없는 풀뿌리 운동, 자기들만의 리그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약자, 특히 노동자와의 연대는 중요하다.

장기적으로 탈성장으로 갈 수밖에 없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유정길 위원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내가 떠올리는 것은 “장기적으로 우리 모두는 죽는다”라는 케인즈(J. Keynes)의 말이다. 그는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정책수단이 없는 것을 ‘장기적’이라는 단어로 에둘러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 말을 썼다. 유정길 위원은 칼럼에서 ‘거꾸로 든 망원경’이란 비유를 든다. 그렇다. 망원경을 거꾸로 들어 현실을, 그리고 현실을 살아가는 대중의 삶을 크게 볼 일이다. 그 렌즈에는 기후위기에 대한 현실적인 대응과 함께 불평등을 해소하고 전환 주체를 형성하는 전략이 비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