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5

한국사상사 꿰뚫고 흐르는 ‘영성의 힘’ [오구라, 조선사상사]고명섭 2022

한국사상사 꿰뚫고 흐르는 ‘영성의 힘’:
한국사상사 꿰뚫고 흐르는 ‘영성의 힘’

고명섭 한겨레 기자 
2022.03.25. 
 제공: 한겨레

조선사상사: 단군신화부터 21세기 거리의 철학까지
오구라 기조 지음, 이신철 옮김 l 길 l 2만8000원

일본의 한국철학 연구자 오구라 기조(63) 교토대 교수가 쓴 <조선사상사
>는 외부인의 눈에 비친 한국사상사의 풍경을 조감할 수 있는 책이다. 도쿄대에서 독문학을 공부한 지은이는 1988년부터 서울대 대학원에서 8년 동안 한국철학을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 > 는 한국사상사 전체를 아우르는 통사다. 이 책의 제목에 쓰인 ‘조선’은 고조선부터 현대까지 한반도 전체 문명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책에는 전근대 사상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의 사상, 해방 뒤 남북의 사상, 21세기 ‘거리의 철학’까지 등장한다. 더구나 이 책은 사상사의 중심인 종교·철학 사상 말고도 신화·정치·문화 전반에 담긴 사상까지 탐사하는데, 이렇게 조선사상사 전체를 아우르는 책은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도 없을 것이라고 지은이는 자부한다. 이 책은 한국사상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쓴 일종의 입문서다. 그래서 지은이는 학계의 정설을 중심으로 하여 객관적 사실을 서술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면 조선사상사를 보는 지은이의 독특한 관점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그런 관점이 이 책을 찬찬히 읽어볼 만한 것으로 만든다.

지은이의 관점이 가장 분명히 나타난 곳이 제1장 ‘조선사상사 총론’이다. 
  • 여기서 지은이는 조선사상사 전체를 아우르는 열쇳말로 ‘순수성’을 든다. 순수성이야말로 일본사상사나 중국사상사와 다른 조선사상사만의 특징을 이룬다. 
  • 이를테면 일본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상을 브리콜라주(짜깁기) 방식으로 포섭하는 양상이 강한 데 반해, 조선의 경우에는 외부에서 온 사상이 기존 체제를 전면적으로 변혁하는 경향이 강하다. 고려 말기 주자학의 도래나 20세기 서양 사상의 유입을 보면 그런 성격이 분명히 감지된다. 
  • 지은이는 이런 순수성 추구가 지정학적 안전보장 욕구와 연관이 있다고 해석한다. 사상의 순수성을 지킴으로써 중국과 외세에 대항한다는 무의식적 사고가 사상사 바탕에 깔려 있다는 진단이다.

조선사상사의 두 번째 특징은 혼종성(하이브리드성)이다. 
  • 혼종성은 순수성이라는 기본 축에 맞서는 일종의 대항 축이다. 사상의 순수성을 지킨다고 해서 다른 사상이 모두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를테면 주자학이 지배적 사상일 때에도 서학이나 양명학이 대항 축으로 존재했으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이전에는 유·불·도 3교가 공존했다. ‘순수성 속의 불순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조선사상의 특징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 그런데 논의를 사상의 순수성으로 좁히면, 한국사상사에서 이 사상의 순수성은 일정한 사이클을 그린다. 다시 말해, 사상이 순수성 획득을 지향하여 격렬하게 운동할 때에는 사회 전체가 생명력으로 약동하고, 이어 그 사상이 지배적 지위를 획득하면 서서히 정보가 통제되고 사상의 부정적 성격이 강해진다. 마지막에 공동체 전체의 생명력이 소진하면 어느 순간 새로운 사상이 일어나 혁명적 변화로 나아간다.

----

바로 이 대목에서 지은이가 주목하는 것이 ‘영성’이다. 
  • 영성이야말로 순수성의 사이클을 관류하는 조선사상사의 진정한 특징이다. 
  • “순수성을 획득하고자 운동하고 있을 때도,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을 때도, 순수성이 퇴락해가는 과정에서도 조선의 사상은 두드러지게 영성을 띤다.” 

이 영성은 “지성으로도 이성으로도 감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정신 현상”이기에 영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그 영성은 새로운 사상과 함께 거대하게 약동하며 정치사회적 변혁의 힘을 분출한다. 이때 영성은 기존의 모든 사상을 아우르는 어떤 회통의 정신을 가리킨다. 

‘영성의 눈’으로 서로 대립하는 사상의 차이를 넘어 전체를 꿰뚫어보고 통합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런 영성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 경우로 신라 원효의 불교 사상과 조선 퇴계의 성리학 사상 그리고 수운 최제우의 동학 사상을 거론한다.

원효의 사상은 지은이가 말하는 영성의 표본과도 같다. 원효는 <...>

에서 불교의 여러 종파의 다툼을 넘어서는 ‘화쟁’과 ‘회통’의 논리를 설파했다. 이 화쟁과 회통은 ‘유식’과 ‘중론’과 ‘화엄’을 포함한 모든 불교 학설을 아우르고 종합한다. “아마도 이런 종합성과 포월성이야말로 해동 불교의 최고의 영성적 표현이었을 것이다.” 

이런 포월성은 퇴계의 성리학에서도 발견된다. 퇴계의 성리학은 ‘이기호발설’로 압축되는데, 핵심은 만물을 주재하는 원리인 ‘이’(理)가 ‘기’(氣)처럼 능동적으로 움직인다는 데 있다. 지은이는 퇴계가 ‘이’의 능동성을 강조함으로써 영성의 경지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이’가 ‘나’라는 주체를 덮침으로써 일종의 영성적인 힘으로 작용한다고 보는 셈이다
바로 이 영성적인 ‘이’를 통해 퇴계는 ‘표면상 주자학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도가와 불교와 양명학을 포괄한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나아가 지은이는 원효와 퇴계의 영성이 수운 최제우의 동학 사상에서 종합됐다고 본다. 수운의 아버지 최옥은 퇴계 학맥을 이은 경주의 선비였고 그 아버지를 통해 퇴계 사상이 수운으로 흘러들었다. 말하자면 수운은 ‘퇴계 좌파’였다. 또 원효의 회통 정신은 유교·불교·도교에 서학과 샤머니즘까지 아우르는 동학의 포용 정신으로 나타났다. 동시에 동학은 계급 질서를 깨부수고 제국주의의 침탈에 항거한다는 변혁의 방향성을 19세기 다른 어떤 동아시아 사상보다 선명하게 제시했다. 동학의 영성적 힘은 20세기 한국사상사의 저류가 됐다. 지은이는 동학의 영성이 분출한 사건으로 일제의 침략주의·강권주의에 맞서 조선 민중의 뜻을 표출한 1919년의 ‘3·1독립선언서’를 든다. “이 선언문은 감성과 지성과 이성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을 포월하는 영성으로 쓰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의 일본인도 이 ‘독립선언서’의 숭고한 정신을 영성 차원에서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지은이는 이 영성이 21세기 오늘의 한국사상에까지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