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9

알라딘: 동시대 이후 : 시간-경험-이미지

알라딘: 동시대 이후 : 시간-경험-이미지

동시대 이후 : 시간-경험-이미지 
서동진 (지은이)현실문화A2018-03-31
---
272쪽

책소개

기억의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데 여념이 없는 지금의 시각예술을 다시 살펴보고 기억과 경험을 더욱 정확하게 비판하려는 비평적 시도다. 1990년대 문화운동의 기수였고 현재 시각예술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데 천착하는 서동진 계원예술대 교수는 대중매체와 예술작품들이 과거를 향한 회고에 몰두하는 것을 특유의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한다.

저자는 오늘날의 시각예술을 일컫는 용어로서 ‘동시대 예술’이란 사실상 ‘시간 없는 시간’의 예술이며, 바로 이 ‘시간 없음’을 사유하지 못하는 데 기억과 경험이라는 개념이 작동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하지만 이 책은 기억, 경험, 공감 등을 일방적으로 힐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대립된다고 상정되는 개념들을 더욱 선명하게 대질함으로써 기억의 편이냐 역사의 편이냐 하는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한다.

이 책에 실린 열 편의 비평문은 그 동안 저자가 음악, 영화, 미술, 사진,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차곡차곡 쌓아올린 글들이다. 이들을 한 줄로 꿰어내는 고리는 바로 ‘비판’이다.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온전하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둘 모두를 동시에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평이 갈수록 ‘주례사 비평’으로 간주되고 그 정반대편에서는 별점과 댓글로 작품을 평가하는 시대에 <동시대 이후 : 시간-경험-이미지>는 비평을 다시금 활성화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새롭게 사유하는 촉매가 될 것이다.


목차
서문. 낌새채기로서의 비평

1부. 동시대: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인터내셔널!: 어느 노래에 대한 역사적 반/기억
플래시백의 1990년대: 반기억의 역사와 이미지
보론 1: 차이와 반복 - 한국의 1990년대 미술

2부. 동시대: 의식과 경험 사이에서
목격-경험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자오량의 〈고소〉에 관하여
사진의 궤적 그리고 변증법적 이미지
사진이 사물이 될 때, 사진을 대하는 하나의 자세
반ANTI-비IN-미학AESTHETICS: 랑시에르의 미학주의적 기획의 한계
보론 2: “서정시와 사회”, 어게인

3부. 동시대 이후
참여라는 헛소동
포스트-스펙터클 시대의 미술의 문화적 논리: 금융자본주의 혹은 미술의 금융화

참고문헌
=====
책속에서
P. 26
무엇보다 기억 담론이 충분치 못하다고 따져야 할 이유는 그것이 역사를 비판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외려 역사를 불철저하게 비판했다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 객관적 사실로서의 실증주의적 역사 인식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역사의 객관성을 부정하는 것은 곤란하다. 역사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에는 충분히 수긍할 점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들을 수집하고 검증함으로써 주관적인 기억에 의해 오염되거나 편향되지 않는 사실적 객관성을 통해 역사 서술을 하려던 실증주의적 역사 쓰기(만약 그런 것이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면)를 비판하려는 것이 역사의 객관성 자체를 희생시키는 것으로 비약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기억은 주관주의라는 혐의 앞에서 기억을 통한 역사 쓰기의 비판적 효과를 스스로 단념하고 말아버리기 때문이다.
- 서문: 낌새채기로서의 비평  접기
P. 58
〈인터내셔널가〉가 불렸던 장면들을 돌아볼 때, 그것은 외부로부터 도입된 공식적인 관료기구의 노래로서 불렸을 수도 있으며, 따분한 국가적인 의례나 정치적인 행사에서 식순에 따라 불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터내셔널가〉가 그러한 운명에 갇히는 것이 그 노래에 기재된 역사적 기억을, 새로운 개인이 실천한 노동과 예술의 결합이라는 흔적... 더보기
P. 83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영화들은 1990년대를 통해 기억하기의 미학적 양식을 세공하는 작업을 시도한 것으로 여겨도 좋을지 모를 일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두고 어느 관객이 자신의 블로그에서 ‘봉테일’이라고 지칭하며 1980년대를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고 혀를 내두르며 칭찬할 때, 실은 그가 감탄한 1980년대의 풍부한 재현이란 배역들의 절묘한 80년대 풍의 의상, <수사반장> 등과 같은 당시 TV 드라마의 인용, 무엇보다 그 수사반장에 출연했던 배우들을 영화의 배역으로 기용하는(변희봉의 캐스팅), 말 그대로 혼성모방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기억하기의 심미적인 양식화는 ‘1990년대를 기억하기’라는 작업을 통해 일반화된다. 그리고 이제 기억하기의 주체는 본격적으로 ‘세대화’된다. 제임슨의 말처럼 향수라는 기억하기 방식이 역사적 시대를 유행 변화와 세대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굴절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유행과 세대라는 두 가지 방식, 즉 역사적 시대를 대상화하는 방식(유행으로서의 시간)과 주체화하는 방식(세대로서의 주체) 모두를 똑같이 찾아볼 수 있는 셈이다.
- 플래시백의 1990년대: 반기억의 역사와 이미지  접기
P. 125
〈고소〉는 십수 년의 시간 동안 북경남역 근처에서 집요하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정의를 바로잡기를 원하는 이들을 기록한다. 그러나 〈고소〉가 관객에 전하는 윤리적인 효력은 불의가 자행되었고 고통을 겪은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얻게 되는 비판적 의식에 있지 않다. 그것은 불의 속에 있는 이들을 목격함으로써 비롯되는 충격 그 자체이다. 목격으로서의 경험은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을 무릅쓰며 자신의 정의를 고집하는 이들을 목격하는 데서 비롯되는 놀라움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그런 놀라움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바로 ‘윤리적 충격’일 것이다. 그러나 목격-경험으로서의 다큐멘터리가 경험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인가에 대해 물어보는 일은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십수 년의 시간을 목격-충격의 경험의 연쇄로 구성할 때, 우리는 그것이 역사적 시간을 제거하거나 억압한 채 찰나 혹은 순간의 시간으로 구성하고 있음을 눈치 채지 않을 수 없다.
- 목격-경험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자오량의 〈고소〉에 관하여  접기
P. 147
이때 나는 앞서 인용한 박진영의 다짐을, 사진 본연의 속성에 천착하는 사진, 즉 ‘사진적인 사진’을 찾겠다는 의지를 스스로 실천하고 있음을 확인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는 그것을 ‘기억’이라는 이미지와 행위, 사진적 전략에서 찾고자 하는 듯이 보인다. 기억이란 바로 무엇을 찍을 것인가라는 선택과 상관없기 때문이다. 기억은 재현되어야 할 대상, 그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할 것인가에 대한 숱한 기술적·미학적 고려 등으로부터 사진가를 해방시켜준다(아니 그렇다고 가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기억의 이미지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진의 제재나 주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진, 혹은 사진의 다른 존재방식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박진영의 어법을 빌자면 그는 기억의 이미지를 통해 사진의 ‘길’을 찾는 것이다.
- 사진의 궤적 그리고 변증법적 이미지  접기
=====
서동진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계원대학교 융합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사회학이며, 대표논문으로 「스트롱맨의 척추해부학-신자유주의와 남성성」「사악한 기계들의 윤리학 - 통신과 인륜성」 등이 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태와 문화/예술의 관계에 대하여 관심이 깊다. 최근에는 금융화와 물류혁명이 지각과 경험의 형태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글을 쓰고 있다.
최근작 :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을 향하여>,<서경식 다시 읽기>,<가족의 재의미화 커뮤니티의 도전> … 총 4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동시대라는 시간 없는 시간을 넘어
그 이후를 사유하는 비평적 도전

기억과 역사 모두를 정확하게 비판하기 위하여

1985년 영화감독 클로드 란츠만은 〈쇼아Shoah〉라는 영화를 통해 “홀로코스트는 없었다”는 유의 수정주의적 역사 해석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역사적 기록의 빈틈을 파고들며 대량학살의 역사를 지우려는 반동적 시도에 대해, 란츠만은 강제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을 일일이 카메라에 담으며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관객과 대면시켰다. 〈쇼아〉는 역사에 대항하는 역사, 즉 반역사(대항역사)로서의 기억의 힘을 여실히 증명한 셈이다. 우리는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과 그들의 투쟁을 통해 기억의 힘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정부가 그토록 집요하게 교과서에서 위안부 문제를 삭제하려 할 때, 매주 거르지 않고 진행되는 수요집회에서 터져 나오는 생존자들의 목소리는 과거의 기억이 남아 있는 한 누구도 역사를 왜곡할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한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기억과 경험, 공감을 강조하는 말들이 곳곳에서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객관적인 역사’란 남성의 역사, 백인의 역사, 자본가의 역사였음을 강조하는 이들은 여성의 기억, 아프리칸스의 경험, 노동자의 감각을 내세움으로써 잊히고 지워지고 사라진 소수자의 역사를 복원하려 한다. 현재 한국을 뒤흔들고 있는 미투운동 역시 같은 자장에 놓여 있다. 이를 두고 보았을 때 기억에 대한 강조는 그 자체로 정치적 올바름을 획득한 듯하다. 이제 중요한 것은 기억을 어떻게 아카이빙할 것인가에 달렸다고 강변하는 입장은 지금의 시각예술에서 더욱더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응답하라〉 시리즈와 같이 대중매체와 시각예술에서 과거 재현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는 데서 이를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는 이렇게 기억의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데 여념이 없는 지금의 시각예술을 다시 살펴보고 기억과 경험을 더욱 정확하게 비판하려는 비평적 시도다. 1990년대 문화운동의 기수였고 현재 시각예술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데 천착하는 서동진 계원예술대 교수는 대중매체와 예술작품들이 과거를 향한 회고에 몰두하는 것을 특유의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한다. 저자는 오늘날의 시각예술을 일컫는 용어로서 ‘동시대 예술’이란 사실상 ‘시간 없는 시간’의 예술이며, 바로 이 ‘시간 없음’을 사유하지 못하는 데 기억과 경험이라는 개념이 작동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하지만 이 책은 기억, 경험, 공감 등을 일방적으로 힐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대립된다고 상정되는 개념들을 더욱 선명하게 대질함으로써 기억의 편이냐 역사의 편이냐 하는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한다.
이 책에 실린 열 편의 비평문은 그 동안 저자가 음악, 영화, 미술, 사진,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차곡차곡 쌓아올린 글들이다. 이들을 한 줄로 꿰어내는 고리는 바로 ‘비판’이다.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온전하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둘 모두를 동시에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평이 갈수록 ‘주례사 비평’으로 간주되고 그 정반대편에서는 별점과 댓글로 작품을 평가하는 시대에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는 비평을 다시금 활성화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새롭게 사유하는 촉매가 될 것이다.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허둥대지 않는다는 것

1부 「동시대: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에 실린 세 편의 글은 지금의 대중매체에서 재현되는 역사가 기억의 아카이브에 의지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기억의 아카이브를 넘어 역사를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한 비판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글인 「인터내셔널!: 어느 노래에 대한 역사적 반/기억」은 혁명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인터내셔널가〉를 다양하게 복각하는 시도를 살펴본다. 1920년대에 만들어진 전자악기 테레민으로 〈인터내셔널가〉가 연주될 때 거기서는 ‘좌파 멜랑콜리’라 할 만한 것이 나타난다. 즉 이젠 사라진 혁명을 노래를 통해 상기하면서 거기에 애틋함을 느끼며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내셔널가〉가 단지 향수에 그칠 수 없는 것은 이 노래에 담긴 유토피아적 주장 때문이다. 단결과 연대에 앞서 자유로운 개인을 요청하는 〈인터내셔널가〉는 그 때문에 개인들의 다양한 기억을 촉발한다.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한 필리핀 여성이 투사였던 아버지를 회상하며 그가 불러주던 〈인터내셔널가〉가 브람스의 자장가보다 더 좋았다고 말할 때, 그 노래는 더 이상 구소련의 공식 석상에서 불리는 것과 똑같이 느껴질 수 없다. “공식적인 기억의 서사 속에 수장된 〈인터내셔널가〉보다 더 많은 함량의 역사적 기억을 갖고 있을지(65쪽)” 모르기 때문이다. 대중매체와 예술작업이 과거를 재현하는 데 충실한 지금, 노래는 역사적 총체성을 사유하고 경험하는 데 있어 피난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플래시백의 1990년대: 반기억의 역사와 이미지」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성공이 보여주는 과거 재현의 전략이 1990년대라는 시간대에 치중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적극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시대, 본격적으로 소비문화가 형성된 시대로 기억되는 1990년대는 그 이전의 ‘운동권 문화’가 만개했던 1980년대와는 구분되곤 했다. 1990년대를 향한 향수는 ‘밤과 음악 사이’ 같은 레트로 펍의 등장,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7080 가요’, 과거의 소품을 꼼꼼하게 재현하는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더욱 두드러진다. 저자는 〈응답하라〉 시리즈가 나오기 훨씬 전인 2000년대의 영화들에서 이미 그와 같은 경향이 나타났음을 지적한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1980년대를 1990년대의 전사前事로서 다룬다. 저자는 당시를 연상시키는 소품과 사운드를 통해 재현된 1980년대는 1990년대 이후의 기억을 통해 재구성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1990년대라는 시점으로 바라본 1980년대는 ‘민중’이라는 보편적 주체가 감각적 공동체를 분열시켰던 역사를 흐리게 함으로써만 재현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1990년대는 새로운 감성을 발견한 1980년대의 음화일 뿐이며, 그와 같은 재현 전략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1부의 마지막 글인 「보론 1: 차이와 반복 - 한국의 1990년대 미술」은 1990년대 미술비평을 이끌었던 포럼 A를 돌아보는 작업이다. 1990년대를 ‘한국 동시대 미술’의 시작으로 꼽는 이들은 당시의 작업들을 하나하나 수집하고 분류하면서 ‘동시대 미술’의 상을 구축하고, 그럼으로써 당대를 사회학적 사실로 환원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역사적 분석으로서의 비평은 사라지고 만다. 비평이란 “매체이든 형식이든 전시형태나 제도이든 비평이든 모두 역사에 의해 매개되고 규정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108쪽)” 때에야 가능할 것이다.

의식과 경험 둘 중 하나를
일방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

2부 「동시대: 의식과 경험 사이에서」는 기억에 못지않게 경험에 주목하는 동시대의 예술작품들과 비평들을 살펴보면서 경험에 함몰되지 않는 비평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목격-경험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자오량의 〈고소〉에 관하여」는 중국의 독립 다큐멘터리 〈고소〉를 통해 경험을 재현하는 방식이 처한 윤리적 곤경을 따지고,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가 관찰적 다큐멘터리에서 성찰적 다큐멘터리로 변화했다는 평가가 과연 적절한 것인지 되묻는다. 자오량 감독의 〈고소〉는 중국 중앙정부에 항의하는 고소인들을 비추지만, 이들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감독은 의도하지 않게 고소인들의 삶에 개입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동요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관객 역시 영화에 이입해 윤리적인 선택을 요구받는다. 그러나 저자는 관객이 받는 윤리적 충격에만 주목할 때 “그것이 역사적 시간을 제거하거나 억압한 채 찰나 혹은 순간의 시간으로 구성하고 있음을(125쪽)” 놓칠 수 있음을 지적하며 경험에만 몰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어서 「사진의 궤적 그리고 변증법적 이미지」와 「사진이 사물이 될 때, 사진을 대하는 하나의 자세」는 각각 사진가 박진영과 염중호의 작품들을 살펴본다. 저자는 「사진의 궤적 그리고 변증법적 이미지」에서 사회적 다큐멘터리로서의 사진을 제작했던 박진영이 ‘사진 그 자체’로서의 사진으로 회귀하는 양상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2000년대 초반 파노라마 사진 작업을 통해 당대의 인물과 공간을 사회학적으로 살피던 박진영은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일본을 비추면서는 사진의 물질성 자체에 천착한다.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우연히 발견한 사진을 전시할 때, 재난 현장에서 수집한 사물들을 늘어놓고 사진을 찍을 때, 그때의 사진들은 존재만으로도 특정한 기억을 환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박진영의 작품들은 ‘감각하게 하는 이미지’로서 동시대의 사진이 어떤 경험과 기억을 환기시키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사진이 사물이 될 때, 사진을 대하는 하나의 자세」는 염중호의 〈괴물의 돌〉 전시를 살펴보면서 이미지-사진에서 사물-사진이 되어가는 동시대 사진의 추세를 다시금 확인한다. 저자는 염중호의 작품이 그 같은 추세를 그대로 따라간다기보다 오히려 이를 냉소하고 사진에서 사진 그 자체의 실체를 찾으려는 시도에 대한 농담 같은 것이라고 비평한다.
경험에 몰두하는 경향에 대한 이론적 비판은 「반ANTI-비IN-미학AESTHETICS: 랑시에르의 미학주의적 기획의 한계」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다뤄진다. 저자가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이론가는 자크 랑시에르로, 특히 그의 『해방된 관객』은 ‘비판’이라는 기획 자체를 문제제기한다는 점에서 동시대 미학의 경향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비판에 의지하지 않는 해방의 정치가 가능하다고 믿는 랑시에르에게 있어 비판은 자신이 비판하는 세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무능을 보여줄 뿐이다. 저자에 따르면 랑시에르는 ‘해방을 통한 새로운 감각적 공동체의 노선’을 제안한다. 해방을 통한 새로운 감각적 공동체의 노선이란 정치적인 것과 미적인 것이 전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노동자와 예술가가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랑시에르의 미학주의적 입장에 반해, 저자는 비판을 옹호하기 위해 프레드릭 제임슨의 ‘인지적 지도 그리기의 미학’을 다시금 소환한다. 동시대 예술이 경험에 천착하는 데 반해 인지적 지도 그리기는 인식으로서의 예술을 강조한다. 예술의 목적이 진리를 인식하는 데 있다면 비판은 필연적이다. 개인적 경험과 사회적 구조 사이의 불일치를 인식하고 둘 사이를 매개하는 것이 바로 비판이기 때문이다. 동시대 미술비평의 한가운데에서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있는 랑시에르를 향한 이론적 도전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일 것이다.
1부에 이어 또 다른 보론인 「보론 2: “서정시와 사회”, 어게인」은 ‘세월호 이후의 글쓰기’를 주장하면서 다시금 사회를 이야기하는 듯한 문학저널리즘의 현재를 짚고 그것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한다. 저자는 ‘4.16 이후의 정동-쓰기’를 강조하는 글에 대해 비평하면서 세월호 이후의 글쓰기가 ‘세월호’라는 윤리적 충격에 대한 반응일 수밖에 없음을 수긍한다. 하지만 그처럼 충격에 사로잡힌 글쓰기는 오히려 경험 그 자체를 망각해버릴 위험에 놓인다. 그렇기에 문학은 ‘세월호 이후의 문학’을 강변하며 충격적 경험을 통해 사회를 끌어들이는 데 몰두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경험을 매개할 새로운 형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시간 없는 시간을 넘어
그 이후를 사유한다는 것

3부 「동시대 이후」는 동시대 시각예술에 대한 비평에 머무르지 않고 대중문화 현상과 정치적 주체의 관계를, 또한 예술작품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더욱 명민하게 탐색하고자 한다. 「참여라는 헛소동」은 ‘1000만 관객 영화’의 등장이라는 현상을 ‘영화-이후적 관람양식’의 출현과 긴밀하게 연결해 분석하는 글이다. 극장에 머무르지 않고도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볼 수 있는 지금은 영화-이후적 관람양식이 일반화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000만 관객 영화 시대의 관객은 영화 전문 프로그램을 통해 영화의 내용을 파편적으로 가늠하고 SNS에 도는 별점과 한줄평으로 영화 관람 여부를 결정한다. 동시대의 관객이 파편화된 시각적 충격에 주의를 집중할수록 영화에 관한 정보와 감각적 경험도 더 많이 만들어진다. 또한 이들은 SNS 등을 통해 유사 능동적인 참여에 몰두하고 있다. 극장에서 수동적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이 오히려 그 수동성 때문에 타인의 삶을 인정할 수 있는 계기를 얻는 것과 달리, 동시대의 관객에게 그런 가능성은 훨씬 줄어들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이후적 관람양식을 향유하는 관객은 대표의 위기, 계급정치의 몰락, 우익 포퓰리즘의 성향과 같은 오늘날의 정치적 풍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포스트-스펙터클 시대의 미술의 문화적 논리: 금융자본주의 혹은 미술의 금융화」는 끊임없이 셀러브리티 작가가 배출되고 미술비평가가 일종의 취향제조자로 변신한 동시대 미술을 살펴보면서 그 같은 변화의 한가운데에 ‘미술의 금융화’가 있음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기업가적 도시 혹은 글로벌 시티가 확장되면서 현대의 미술관은 블록버스터 전시를 기획하는 탈근대적인 오락 시설이 되었다. 국제 비엔날레의 활성화와 갤러리의 범람이 포개지면서 기업가적 도시는 이제 세계적인 작가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미술품이 주식이나 펀드, 파생금융상품처럼 그 자체로 가치를 갖고 교환되는 자산으로 표상된다는 데 있다. 미술품을 화폐와 같이 취급하는 ‘미술의 금융화’는 금융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로서 동시대 미술 현장 곳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미술관/갤러리와 백화점/쇼핑몰이 서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해진 도시의 풍경과 작가들의 명사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예술의 내재적 변화와 자본주의의 역동성을 매개하는 비판이 자취를 감춘 동시대 미술에 있어, 예술로부터 어떤 정치적 행위가 가능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다시금 사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논의를 펼치고 있는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는 동시대라는 시대상과 그에 긴밀하게 얽혀 있는 기억, 경험 등의 개념을 아주 구체적인 논의를 통해 분석하는 비평적 시도다. 서로 다른 개념을 손쉽게 절충하거나 어느 한 편에 서서 다른 편을 힐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를 동시에 비판한다는 것. 그것은 변증법적 비판이 사라지다시피 한 오늘날의 비평을 갱신하고, 미학과 정치를 새롭게 매개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접기

평점 분포
    10.0

     
동시대에 대하여 뼈가 있는 질문들  구매
rei55 2018-05-18 공감 (2) 댓글 (0)
Thanks to
 
공감
     
통렬한 ‘동시대‘ 담론 비판!!!  구매
미지 2020-02-22 공감 (0) 댓글 (0)
Thanks to
 
공감
     
동시대 시각문화를 다루는 뛰어난 통찰력과 비판력  구매
김소희 2019-02-16 공감 (0) 댓글 (0)
Thanks to
 
공감
마이리뷰
     
‘동시대‘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이하는 본 저서를 소개하는 팟캐스트의 대본으로 작성된, 일종의 발제문이다. 책을 읽을 때 참고할만한 리뷰가 되면 좋겠다.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

 

오늘 소개해드리려는 책은 서동진 선생의 신간 <동시대 이후: 시간-경험-이미지>인데요, 아시다시피 서동진 선생은 계원예대 융합예술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며, 시각예술과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하고 계십니다.

 

우선 이 책을 선정하게 된 이유를 밝혀야 할 텐데요. 아시다시피 적어도 개념미술 이후의 미술에선 작가가 취하는 레퍼런스의 위상이 점차 중요해져 왔지요. 지식인 혹은 비평가로서의 예술가의 모델은 오늘날 익숙한 것이자 하나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특히 미술이 지성화 되는 이러한 변화는 사실상 꽤나 뜯어볼 점이 많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문제적인 것은 직관에 근거한 작업, 그리고 세속적인 식견과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고 가정되었던, ‘천재’라는 낭만주의적 예술가의 모델이 이제 불가능해졌다는 점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그렇죠. 그러한 경향과 함께, 매체 자체의 범주 또한 무한정으로 다변화되며 ‘이벤트, 관계, 효과’ 등 비물질적 작인들이 작업의 핵심 공정이 되어왔던 변화 역시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들은 지금의 미술에서 외려 공기와도 같은 것이라서, 사실 충분히 결산되지 않았기에 해명되어야 할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전 여기서 모두에게 익숙한 것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헤겔의 말을 떠올려 봅니다.

 

예컨대 당장 작업의 주제가 ‘노동’이라면, 어째서 특정한 노동의 측면을 재현하거나 차용하지 않으며, 실제 노동자들과 무언가 일을 진행하는 것이 ‘미술’로서 호명되는지,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선뜻 설명할 수 있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물론 여기엔 여러 이유가 제시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1. 뒤샹의 레디메이드에서부터 예고되었고, 다다에 의해 심화되었던 여타의 형식 실험들과 저항이 외려 ‘예술’ 자체의 외연을 넓혔기 때문이라는- 예술내적 측면을 강조하는 주장이 있을 수 있겠고, 다음으로 2. 복제 및 전송 기술의 비약적 발전이 예술의 존재론을 점차 비물질적인 것으로 바꾸어 왔다며- 기술적 측면을 강조하는 주장이 있을 것이고, 3. 소비자본주의의 시기에 상품자체가 무엇보다 미적인 것으로 편재하기 시작했을 때, 예술이 스스로 고정된 미적 범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형해화 시켰다는 상품비판의 측면을 강조하는 주장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모두가 일리 있는 설명이라 생각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높은 수준의 설명력을 지닐 수 있는 범주는 경제(생산양식)의 변화와 문화적 변화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제게 오늘날 동시대 예술의 조건은 그 자체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해명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번 팟캐스트에서 함께 나눠보고 싶은 것이, 바로 오늘날 동시대 예술을 지탱하는 시간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서동진 선생의 저서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죠.

 

우선 책 형식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동시대 이후>는 이런저런 지면에 실렸던 글들을 ‘시간-경험-이미지’라는 주제로 엮고, 다듬어낸 저서라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이미 책을 읽었지만 여기서 그의 사유를 지탱하는 논리들이 더 궁금하다 싶으신 분은, 내년 초에 나올 <역사유물론 연습>을 기다려주시면 되겠습니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우선 서문을 제외하면 1부는 “동시대: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2부는 “동시대: 의식과 경험 사이에서” 입니다. 3부의 ‘동시대 이후’는 그 중 책의 제목이 됩니다. 대충 감이 잡히시겠지만, 역사와 기억의 대립, 의식과 경험의 대립은 서동진 선생이 주목하는 동시대의 특징입니다. 매우 거칠게 요약하자면, 기억이 역사를 대체하고, 경험이 의식을 대체하게 된 상태가 오늘날 시간성의 특징인데, 이는 나름의 진리계기를 지님과 동시에 특유의 패착을 답보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를 서동진 선생이 자신의 논증을 통해 해명하게 되는 거지요. 따라서 이 책은 이런 시간성과 필연적으로 조응하게 되는 예술적 실천들과 그 형식의 한계를 논하는 작업이라 봐도 좋을 거 같아요. 물론 우리가 그 내용을 다 소개해드릴 순 없지요. 그 중 일부 아티클에 집중해서, 그러나 공시적으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일단 목차를 한번 읊어드리겠습니다:

서문: 낌새채기로서의 비평

1부. 동시대: 기억과 역사 사이에서

인터네셔널!: 어느 노래에 대한 역사적 반/기억

플래시백의 1990년대: 반기억의 역사와 이미지

보론 1: 차이와 반복: 한국의 1990년대 미술

 

2부. 동시대: 의식과 경험 사이에서

목격-경험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자오량의 <고소>에 관하여

사진의 궤적 그리고 변증법적 이미지

사진이 사물이 될 때, 사진을 대하는 하나의 자세

반anti비in미학aesthetics: 랑시에르의 미학주의적 기획의 한계

보론 2: “서정시와 사회”, 어게인

 

3부. 동시대 이후

참여라는 헛소동

포스트-스펙터클 시대의 미술의 문화적 논리: 금융자본주의 혹은 미술의 금융화.

 

이 중에서 저희가 특히 더 소개해드리려는 것은 서론과 “플래시백의 1990년대: 반기억의 역사와 이미지” 2부의 “반-비-미학: 랑시에르의 미학주의적 기획의 한계”, 3부의 “참여라는 헛소동”입니다. 다른 글들도 좋지만, 이 글들은 특히나 예술에 충실하면서도, 예술을 규정하는 동시에 예술을 초과하는 기류들을 포착하려는 서동진 선생의 시도를 잘 집약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여기서 각 장의 표현들은 직접적으로는 문예론과 관련된 것들이지만,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전체를 지시하는 어떤 알레고리로서 기능합니다.

 

“1990년대”는 단지 <응답하라 19땡땡 시리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대중문화(산업)이 절정을 이룬 시대이자, 소련으로 표상되던 적대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시기를 가리키며, “반-비-미학”은 단지 랑시에르적 미학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미학적 기획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이 이미 인식과, 나아가 세계의 지배질서 및 사회구조와 매개되어 있는 것임을 역설하는 역사유물론적 시각을 암시하죠. “참여”는 수용미학, 관객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관련된 맥락 너머,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능동성과 비의존성에 대한 예찬’과 조응합니다. 알튀세르에 익숙한 독자라면 그가 여기서 보여주는 대상 파악의 방법론이 ‘텍스트가 언표하지 않는 것을 독해하는’ “징후적 독해”라 생각할테고, 헤겔과 루카치에 친숙한 독자라면 그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그려보이려는 변증법적 파악을 시도하고 있음을 볼 것입니다(그리고 제 생각엔 둘 다 맞는 말입니다. 누군가는 유비 불가능한 인물들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데에 불편함을 느끼실지도 모릅니다만, 전 개인적으로 알튀세르 역시 헤겔의 자장 속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좀 더 상술해볼까요?

 

옳게도 헤겔은 ‘본질은 현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썼습니다. 전체의 이념은 곧 부분들을 통해 나타나지 않는다면 공허한 추상적 보편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1860년 경의 마르크스는 ‘자본’을 사회적 관계로 파악하고, 인간을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로서 파악했죠. 자본이 사회적 관계로서 파악되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본은 자본주의의 각 요소를 통해 현상하지만 각 요소들의 실체적 총합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곧 객체이자 주체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튀세르는 ‘구조적 인과성’ 개념을 통해 선험적인 실체로서의 구조가 아니라 대상들의 작용 속에서 나타나는 구조, 즉 자본주의가 각 현상들 속에서 자신의 구조를 드러내 보인다는 점을 적시했습니다. 우리는 위와 같이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여러 계보를 그려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서동진 선생은 전체와 부분의 인과를 사고하는 특유의 전통 위에서 생산양식, 즉 경제와 전적으로 무관해 보이는 이런저런 독립된 대상들의 미적 경향들에서 자본주의의 규정성이 작동하는 방식을 탐구하죠. 그의 서술 방식은 그런 점에서 총체적이며, 구체적 보편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시선 속에선 미시사, 문화사, 일상사, 레트로-빈티지 패키지, 노스텔지어, 아카이브, 무라카미 하루키, 취향, 피해자성, 미학주의, 수평성, 차이, 다양성, 참여, 특수성, 관계미학, 장소특정성, 문화연구, ANT, 동시대, 포트폴리오, 일베, 정동, 재난, 파국, 폐허 등의 수많은 개념들과 심상들은 일순간 자본주의와 특정한 관계 안에 놓여있는 것으로서 드러나며, 탈냉전 이후 가시화 된 ‘이행의 불가능성’으로부터 파생된 효과이자 현재의 시간성을 공고히 하는 각각의 요소로서 조명됩니다. 여기서 각 요인들은 필연적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동시에 부정해야 할 것으로 제시되는데요. 이들이 맺는 관계가 기계적 인과가 아닌, 논리적 조응 관계로서 주목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마치 헤겔에게 본질과 목적이 실체로서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의 시선 속에서 각 대상들은 서로 독립된 만큼이나, 서로 무관하지 않으며 상호적으로 연관을 갖습니다.

 

서론에서 우선적으로 검토되는 것은 동시대적 서사 방식 중 가장 각광받는 아카이빙 및 기억의 위상입니다. 여기서 서동진 선생은 그 속에 이율배반이 도사리고 있음을 지적합니다. 이는 제 식대로 구부려 읽자면, 스스로 사유하기 위해 모든 재현이 허용되어야 함을 강변하는 위베르만 식의 윤리가 각광받는다는 진단이기도 할 것입니다. 즉 생생한 폭력과 날것의 고통을 기꺼이 드러내고, 그것과 대면해야한다는 성토가 있다는 거죠. 그의 주장은 기억과 재현의 정치를 급진화 할까요, 금지된 것을 성급하게 외설로 소비하게 할까요?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모든 것을 기억하길 주문하는 재현의 윤리학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주장, 혹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맞서 승기를 잡았습니다. 동시대에선, 손택 식으로 표현하자면, 서사는 사라지고(‘이미지는 연민하게 하지만 서사는 연대하게 한다’), 이미지가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입니다(‘알기 위해서는 [이미지를 통해] 스스로 상상해야한다’). 서동진 선생은 이어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런 식의 기억이 억압하는 어떤 역사가 있음을 주장합니다. 한 구절 읽어 볼까요.

 

“아카이빙은 무엇이라도 누락되어선 안 된다는 듯이 집요하게 자료와 문서, 이미지, 흔적, 목소리 들을 추적한다.(...) 혹은 더 과격한 이는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상기하면서 재현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과거,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윤리적인 예의이자 준칙으로서 과거의 고통과 외상을 상연하는 부러진 말들, 제대로 끝을 맺지 못하는 말들, 방황하는 이미지들에 높은 윤리적, 정치적 가치를 부여하기까지 한다.”p.14

 

“무엇보다 기억을 애호하는 이들은 개인적, 심리적인 기억으로 환원할 수 없는 역사적인 시간의 자율성과 물질성에 대하여 눈을 감고 만다. 장황하게 덧붙이지 않고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서 시간의 추상성, 경험을 초과하는 특성 등은 기억의 담론에서 빠져나간다.”p.29

 

그에 따르면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한 기억, 식민지 종속 국가에서의 수탈에 관한 기억,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기억 등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지배와 그에 대한 저항은 각각의 인격적 대면의 관계로는 환원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물론 역사는 그러한 부분들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들의 총합이 곧 역사는 아닌 것입니다. 서동진에게 역사란 곧 매개이자 그런 한에서 공통적인 것이고, 부분을 초과하거든요. 이때 역사는 연속적인 시간성과 관련된- 생산양식과 그것의 변화 과정 및 계기들, 구조들에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역사는 사건들의 삽화적 기술로 환원되지 않는, 구조화된 시간성에 대한 사유를 가리키죠. 서동진 선생에게 문제는 구조화되지 않은, 매개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직접성에 대한 호소가 시간성과 관련된 개념에 적용되었을 때, 그 표현은 심리적 개인의 경험을 투명하게 기록할 것으로 여겨지는 ‘기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서동진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시간을 향해 눈짓을 보내는 영화나 영상 작품들 속에서 인물들의 모습 역시 상투화된다. 이들은 대개 ‘피해자’라는 인물형(그것의 다른 이름은 유태인, 디아스포라, 위안부, 성폭력 피해자 등으로 끊임없이 증대된다) 속에 고정된다.”p.17

 

이는 실제로 피해와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왜 우리가 기억하고 상상하는 주체가 항상 끔찍한 폭력을 입은 무력한 피해자로 나타나느냐는 질문이지요. 요컨대 그는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피해자는 언제나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지금 그것은 기꺼이 재현되고 표상될 만한 것이 되었을까요? 피해자라는 주체와 투사라는 주체 사이의 시차, 간극은 무엇으로부터 연원할까요? 그 심연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기억은 여기서 대답이 아니라 문제로서 조명되며 해체의 도마 위에 올려 집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서동진 선생에게 기억은 언제나 특정한 사회체계의 시간적 연속성과 관련됩니다.

 

“기억하기는 ‘전후’前後의 의미체계와 떼어놓을 수 없다. ‘프랑스 혁명 이전과 이후’라든가 ‘광주항쟁 이전과 이후’같은 이전과 이후의 ‘가르기’ 혹은 ‘분할’은, 기억하기의 대상인 역사를 ‘변화’의 원근법 속에 자리하도록 한다.”p.18 그렇다면 사실 기억은 'periodizing', ‘시대구분’의 계기를 이미 주체의 차원에서 지니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서동진 선생에게 기억은 낮은 단계의 역사라고도 부를 수 있겠습니다. 즉 주체의 차원에 기입된 역사를 가리키는 이름이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규정하는 역사, 즉 구조적 매개와 관계하지 않은 것처럼 독자적으로 역사에 맞설 때, 기억은 부당하게 실체화됩니다. 서동진 선생은 이런 상황을 가리켜 ‘선험적으로 주어진 자연(Nature)으로서의 기억’이라 표현합니다.

 

“기억은 주체의 자연인 듯 가정되며 기억의 사회적 성격을 역설한다고 하더라도, 기억의 집합적 구성을 강변한다고 하더라도 기억은 마치 자연인 것처럼 간주된다.”p.19 우리는 여기서 제 2의 본성 혹은 자연으로서의 문화에 대한 헤겔의 논변이 심리적 개인이 지닌 기억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로서 역사 대 기억이라는 구도가 성립하게 됩니다. 이때 그가 대질시키는 역사와 기억의 각 구분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미시사, 문화사, 일상사 등의 방법론적 형식이 제기 된 후 역사학계의 내부비판을 통해 도출된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기억과 역사를 대립시키는 것은 허위적입니다. 그것은 객관에 맞서 주관을 실체화시킴으로써, 주관적인 것이 객관적인 것이고, 객관적인 것이 곧 주관적인 것이라는- 주-객 분할(인간과 자연의 분할, 개인과 공동체, 사회의 분할)의 조건으로부터 다시금 문제로 된 양자의 동일성을 보지 못하며, 따라서 지배적인 사회관계를 올바르게 비판할 수도 없습니다. 지배와 착취, 객관적인 것이 주관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전도가 구조화되어 있음을 파악하기 위해, 오히려 우리는 역사에 우위를 둔 채, 기억을 소홀히 하지 않으며, 양자의 동일성을 헤아려야 합니다. 기억이 실체화된, 경험이 사물화된 조건 속에서 암묵적으로 선언되는 것은 역사의 죽음이고, 객관적 인식 가능성에 대한 포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험을 물화시키는 것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전지구적 수준에서 완성되면서, 외부의 가능성을 살펴볼 수 없게 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대두되는, 그러나 불충분하기에 결국 지양될 몸짓입니다. 대충 감이 잡히시나요? 서문의 내용은 이쯤에서 갈무리하고, 1부의 “플래시백의 1990년대: 반기억의 역사와 이미지”를 훑어봅시다.

 

여기서 서동진 선생은 우선 80년대와 절연한 1990년대의 것으로 돌려진 “감성혁명, 주체의 발견”이 어째서 감성의 불모를 증거하는 지표인지, 차라리 엄격한 의미에서의 감성의 혁명은 외려 1980년대의 정치적 경험에 근거하고 있었음을 논증합니다. 그에게 으레 90년대에 따라붙는 수식들, 예컨대 “개성을 존중하는 적극적 자기표현의 증대, 기율적; 가장적인 권위에 대한 저항”은 실은 소비문화의 심화와 확장의 반영일 따름입니다. 허나 소비의 주체를 둘러싼 감성적인 것은 어떤 가치판단도 개입하지 않는 취향과 조응하는 패션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랑시에르가 옳게도 지적했듯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는 공동체의 분할과 적대라는 차원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동진 선생에게 취향의 주체로서의 개인은 차라리 “자신을 주체화하는데 실패한 주체들을 부르는 다른 이름”인 것이죠. 반면 1980년대는 시, 소설, 미술, 영화, 이런 저런 극들은 취향의 동일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감각적인 것을 쟁점으로 만들었던 시기였습니다. 어쩌면 여기서 우리는 <아방가르드의 이론>의 저자 페터 뷔르거의 논의를 떠올려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에 따르면 유미주의에서 자율화된 예술의 조건은 역사적 아방가르드에 이르러 대자적 수준에서 반성되지요. 그리하여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예술, 감각적인 것 일반을 비판하고 파악하며 삶과 분리된 감각으로서의 예술을 삶으로 되돌려 보내려했던 시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민중문예운동은 로컬의 맥락에서 아방가르드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술이 삶과 분리된 스스로의 존재조건을 반성할 수 있었고, 당대의 예술장에 전례 없는 동요를 가져다주었던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이제 아무리 진부해졌더라도, 민중미술이 맡았던 역사적, 미술사적 역할을 과소평가해선 안 될 것입니다. 아무튼. 제 본심을 말하고 말았네요. 저는 좋았던 옛날이 끔찍한 오늘보다 사랑스럽습니다만, 서동진 선생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서동진 선생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과거가 풍속과 습속의 역사로 나타나는 방식의 표현의 한계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문화적 기억으로 과거를 재현하는 방식의 리얼리즘이 어떤 아포리아를 담지하고 있는가하는 것이죠.

 

<응답하라> 시리즈나 <박하사탕>, <살인의 추억> 등에서 여러 오브제들과 음악 등은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그 시대를 나타낼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정치적 사건들은 오락성을 제공하기 위해 축소됩니다. 여기서 서동진 선생은 제임슨을 참조하여 이러한 과거 재현의 방식엔 과거를 ‘유행의 변화와 세대’라는 특정한 준거로서 드러내는 ‘향수’가 작동함을 지적합니다. 과거에 대한 이러한 기억은 정치의 교착상태 혹은 퇴행을 암시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때 역사는 당시에 유행하던 상품, 노래, 텔런트, 분위기의 총합으로 환원되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공간화’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각 대상들은 “너무나 세부적이지만 그 세밀함은 실은 상투적인 관념으로 대상화된 대상의 세밀함”이고, 따라서 추상적입니다. 사실 우리는 과거에 존재했던 오브제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서도 역사를 인식할 수 있고, 재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서동진 선생은 고진의 하루키론을 언급합니다.

 

고진에게 하루키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주체가 세계를 감지하는 방식은 취미판단 이상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인간이 대상으로서의 세계, 즉 나와 구분된 세계를 가정하고, 외부의 자연을 ‘풍경’으로서 바라 볼 수 있게 된 시점에서, 세계의 모든 객관적인 분할과 구분을 무화시키는- 인식 이전의 칸트식 초월론적 주관과,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일정한 이치추론을 요하는 경험적 주관은 서로 괴리되었고, 이점을 잘 드러낸 것이 바로 근대 문학의 특징이었습니다. 그것은 세계와 함께 있지만 결코 세계와 합일될 수 없는 문제적 개인이 출현한 시기이기도 하죠. 즉 초월론적 주관과 풍경 사이의 괴리에서 화자가 건네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하루키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주체는 어떤 사건에도 관여하지 않으며 허공에 뜬, 부유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사실 초월론적 주관과 풍경의 분리 혹은 대립은 그 자체로 근대문학이 다루어왔던, 그리고 근대문학이 근거했던 조건이었습니다. 근대는 개인과 공동체, 인간과 자연, 인간과 세계의 분리, 소외, 부조리가 전면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활발한 교역과 과학적 세계관이 무르익어가던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회화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풍경을 떠올려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겁니다. 허나 이러한 주관과 객관의 변증법은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적어도 하루키에 이르러 종결됩니다. 하루키의 작품에서 경험적 주관을 규정하는 초월론적 주관과 주인공을 둘러싼 시간들은 어떤 인과나 가치를 설정할 수 없이 자기 충족적인, 대상들과 무관하게 존재합니다. 대상세계의 모든 것들을 취미판단의 범주로 소급하는 하루키의 표현에선 어떤 주장도 불완전한 단견에 불과하며, 갈등과 적대는 미세한 소음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서동진 선생은 이러한 하루키식 진단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주체(개별 자아)로부터 벗어난 초월론적 주체(미적 판단의 주체)는 있을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그에게 주관의 문제는 언제나 공동성 및 집단성에 의해 매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주체가 시간을 감각하는 방식에서 초월론적 주관이 여하의 가치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 또한 어떤 타자 혹은 객체로부터 매개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초월론적 주관을 파생시킨 주요한 계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일 텐데, 그는 여기서 초월론적 주관의 배면에 자본주의의 적대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즉 미적판단으로 환원된 의식을 지니게 된 주체, 시간을 인식론적으로 객체화, 대상화시키지 못한 채, 보다 정확히는 이미 객관화 되어있는 역사를 인식하지 못한 채, 습속과 유행의 변화로 시간을 가늠하게 된 주체의 이면에는 자본주의의 부정성- 자본이 스스로를 완결 짓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과정으로서의 계급투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이데올로기는 자신을 이데올로기라 말하지 않고 자연으로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객체도 인식하지 못하는- 미적판단에만 관계하는 초월론적 주관은 생산양식 속에서 굴절된 효과로서 제시된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유형태, 즉 이데올로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논증에 불편함을 느끼실 분도 계시겠지만. 요컨대 가장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동물적 삶을 영위하는 하루키의 주체는 이미 매개된 것입니다. 이러한 논의를 이어 서동진 선생은 결론적으로 한국의 1990년대의 감성혁명에서 나타난 과거에 대한 재현방식과 감각적인 것을 인식하게 된 주체의 혁명이란 자본주의의 효과이자 진정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정치를 발견했던 1980년대에서 부정성이 제거된 반복이라 규정합니다. 이는 페터 뷔르거가 네오 아방가르드를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무의미한 반복으로 규정하며 네오 아방가르드로부터 클리셰를 식별한 것과 비슷합니다. 즉 유사한 것이 상이한 시간성 속에서 어떻게 그 고유한 급진성을 상실하는지에 대한 얘기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혹자는 서동진 선생의 주장을 뒤집어 할포스터가 뷔르거를 논지를 반대로 가져가며 외려 네오 아방가르드의 반복을 통해 완성에 이르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이념을 제시했듯, 90년대를 80년대의 음화가 아니라 완성으로서 간주할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흥미로운 논변이지요?

 

이제 "반-비-미학:랑시에르의 미학주의적 기획의 한계"로 넘어가죠. 간혹 랑시에르가 감각과 정치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선보여온 성과를 인정하는 것과 무관하게, 이 장 전체는 랑시에르에 대한 집중적인 비판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미 감성은 인식에 매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성적 판단과 비판과 무매개적으로 존재하는 랑시에르의 실체화된 감성론은 모든 비판, 특히 칸트 이후의 비판을 수포로 돌리고자하는 부당한 퇴행이라는 것이 이 글의 요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밤>에서부터 <불화>, <무지한 스승>, <감성의 분할>, <해방된 관객>에 이르기까지 랑시에르의 일관된 기획은 감각적인 것의 평등, 감각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일치, 따라서 예술과 정치의 일치, 마르크스주의적 토대-상부구조론에 대한 비판,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비판 등을 역설하고 논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랑시에르는 90년대에 쓰인 <불화>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와 사회과학에 대해, 정치를 사회 및 경제의 표현으로서 독해하며 정치 자체의 외부에서 우위를 점하는 ‘메타정치’라 비난한 바 있습니다. 서동진 선생은 랑시에르의 논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1. 비판은 대중의 역능을 믿지 못한다. 2. 비판은 숨겨질 것이 없이 적나라한 현실을 기만이라고 우긴다. 3. 비판은 진정한 비판의 자질을 가진 특별한 주체를 배정함으로써 부정의 주체의 이름인 ‘아무나anybody’를 부인한다. 4. 비판은 부정이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을 따로 지정함으로써 즉 부정의 역사적 객관성을 맹신함으로써 부정의 근본적인 우연성, 부정의 시간인 아무 때나anytime를 질식시킨다.” 



이러한 파악 위에서 서동진 선생은 <해방된 관객>의 “비판적 사유의 재난”이라는 장을 검토 합니다. 그에 따르면 그 장에서 랑시에르의 논지는 크게 3가지로 전개됩니다:



우선 첫 번째로, 랑시에르는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가난의 존재론’을 인용하며, 비판하면 할수록 비판 대상과 공모하게 되며, 자신이 상대하는 현실을 보다 공고하게 하게 된다는 역설을 논합니다. 어떤 이미지 혹은 대상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비판하는 순간 비판의 주체는 자신을 진실을 감별할 수 있는 특권적인 위치에 놓으며, 현실을 불가항력적인 필연으로 설정함으로써 해방을 위한 출구를 봉쇄한다는 것이 슬로터타이크의 논지인데요. 그러나 랑시에르에게 비판 전통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여전히 비판 자체의 본질을 묻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에 머물러있는 것입니다. 



‘비판의 내재적 귀결로서의 좌파멜랑콜리’에 대한 이러한 지적 이후, 두 번째로 랑시에르는 뤽 볼탕스키와 이브 시아펠로를 인용하며 ‘사회학주의’를 비판합니다. 뤽 볼탕스키와 이브 시아펠로에 따르면, 사회(학)적 비판은 사회주의 정치의 모태가 되는 인식론으로서, 근대 특유의 문제들에 발본적으로 개입해왔으나 1960년 대 이후엔 미학적 비판에 자신의 자리를 넘겨주게 됩니다. 그리고 미학적 비판은 대략 68 이후 가시화된 새로운 자본주의(경영담론의 갱신과 함께 등장한 이러한 자본주의는 반위계적 노무관리, 노동자의 자율성, 그에 따른 성과급 등을 특징으로 합니다)의 기만적 특징을 형성하는 데에 공모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사회학주의의 특징은 “인간이 사회적 형세나 구조 속에 배당된 위치로부터 비롯된 입장이나 태도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주장”인데요,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와 주체의 문제를 파악할 때 역시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접근이기도 할 것입니다. 자본가를 자본의 인격화이자 대리인이라 표현하거나, 한 개인의 의식은 그가 처해있는 객관적인 물질적 사회관계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할 때의 마르크스 말이죠. 그런 점에서 사회학주의는 사회적 체계에 대한 이론을 일컫는 것이기도 합니다. 허나 랑시에르에게 이러한 사회학주의는 계급과 정체성의 무질서와 균열을 두려워하는 부당한 인식론이자 선험으로서, 대중들이 스스로 알고 있음을 자처하고 정치를 조직했던 68과 같은 사건을 폄하할 수밖에 없는, 따라서 진정한 정치를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랑시에르는 비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비판 이후의 비판에 조응하는 ‘식견 있는 이성의 무능력’의 두 가지 버전으로서 좌파멜랑콜리와 우파의 분노를 제시하며, 이러한 무능력한 상태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비판이 아닌 해방이라 말합니다. 이때 해방이란 ‘점유/업무와 주어진 능력’사이를 끊어내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요컨대 랑시에르가 으레 ‘치안’이라 부르는, 이미 구성된 정치체 내부에서 체계적으로 위상이 부여된 역할에 충실한 상태를 벗어나, 몫 없는 자들이 몫을 가질 수 있는 계쟁의 무대를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따르면 정치는 전문가들에게 주어져 있는 현실정치도 아니고, 전위에 의해 선도되는 의식화 과정도 아니며,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대상으로 하지도 않습니다. 힘의 차이가 구조화된 모든 영역에서 어느덧, 갑자기, 불현 듯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배치의 조정이 바로 정치라는 것이죠. 이러한 랑시에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으로서의 정치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서동진 선생은 여기에 제임슨을 대질시키며 논의를 이어나갑니다. 애초에 비판의 전통과 무관하게 설정된, 따라서 어떠한 인식론적 계기도 지니지 않는 랑시에르의 예술론과 달리, 제임슨은 기꺼이 세계에 대한 ‘인지적 지도’를 그리는 데에 예술의 역할이 있음을 얘기합니다. 요컨대 그에게 미적인 것은 감각적인 것의 문제를 초과하는 것으로서 비판적인 계기, 따라서 인지적 계기를 지닙니다. 알다시피 예술은 관조하는 것, 즐기는 것인 동시에 세계를 완전히 다르게 보이게 하는 것이자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것이기도 하죠. 이런 맥락에서 예술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유하기 위해선, 감각적이면서도 초감각적인 상품, 화폐의 위상을 인정해야하고, 감각적인 것만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예술의 인지적 계기를 인정해야 합니다. 단순히 예술이 감각적인 것의 분할에 머무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어떤 비판의 계기도 지니지 않는다면, 예술이 세계를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서동진 선생은 감각적인 것을 진즉 초과하여 작동하는- 국제적 수준의 분업의 심화와 금융의 심화로 대표되는 초국적 자본주의의 시기에 역설적으로 감각적인 것을 실체화하는 랑시에르의 작업은 필연적인, 그러나 부정적인 징후들 중 하나임을 지적하며 글을 마칩니다.

 

사실 “서정시와 사회, 어게인” 역시 꼭 소개하고 싶은 부분이었습니다. ‘닫혀있는 창문’이라 표현되기도 한 아도르노의 단자론 혹은 모나드론을 통해 ‘재난/충격/전율 이후의 예술/정치/학문’이라는 식의 우리시대에 지배적인 ‘~이후 oo’ 담론을 비판하는 것이거든요. 가볍게라도 말씀을 드리면 좋겠네요. 요컨대 서동진 선생은 여기서 역사화는 객관의 편에 있는 것, 주-객의 변증법 속에 있는 것을 통해 이뤄져야함을 역설하며, 인식 불가능한, 불가해한 충격으로 시대를 셈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개진합니다. 물론 어떤 사건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경험이 되기도 합니다. 허나 재난과 사고에 과도하게 탐닉하는 것은 외부의 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해졌음을 그저 인정하는 몸짓에 머문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물론 논쟁적인데, 이는 그가 세월호를 둘러싼 감상적인 실천들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돌이켜보면 세월호 침몰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필연입니다. 여러 증거들이 이윤동기를 위한 무리한 선적과, 우파 정부의 무관심과 무능 등을 가리키고 있기에 전국민적인 분노가 집중되었고, 그만큼 정치적으로 견인할 이유는 충분한 의제였을 겁니다. 하지만 동시에 세월호 희생자들의 핸드폰 영상 복원 및 생전 메시지를 통해 중계된, 비참한 죽음의 모습은 곧 실천으로 이어지기보다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는, 불가해한 슬픔이었습니다. 적어도 유가족들을 제외하면, 그것을 분노를 통해 생산적이고 공격적인 의제로 다듬어낸 시도는 제가 보기에 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외려 많은 사람들은 무기력증과 답답함, 집단적 트라우마를 호소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다는 먹먹함과 전율. 이는 필연적이지만 명백히 재난의 범주로 소급되어온 세월호 사태 자체에 내재적 귀결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예술은 직접적으로 사회를 참조하며 무매개적인, 정동적인, 따라서 주객 이전 혹은 이후의 것을 간취하려 합니다. 허나 아도르노가 가장 개인적인 형식으로서의 서정시를 언급하며, 그것이 외려 가장 사회의 흔적을 가장 많이 담고 있는 형식임을 역설했을 때, 예술은 이미 그 가장 심층적인 존재론적 토대에서부터 사회에 매개된 것으로서 제시됩니다. 따라서 예술은 직접적으로 사회를 지시하는 기표들을 간취하려는 노력 없이도 사회적인 것이 될 수 있고, 오히려 그렇게 할 때만이 예술 고유의 형식으로 사회를 없애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재난 이후의 문학/미술’이라는 식의 기획을 구상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재난과 파국,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하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미 객관적으로 사회 혹은 생산양식에 매개되어 있는 것이 바로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서동진 선생의 논변 전체의 근간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소개를 자세히 하려다보니 너무 길어진 감이 있어서 끝까지 들어주신 분이 얼마나 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동시대 예술을 둘러싼 자연적인 조건들을 역사화하는 서동진 선생님의 작업은 제가 근래 본 비판 중 가장 정치하고 시의적입니다. 모쪼록 다들 책을 일독해보시면 좋겠고요, 오늘의 얘기가 <동시대 이후>의 주장들을 독해하는 데에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듣느라 고생하셨고요, 저희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접기
정강산 2018-06-20 공감(10) 댓글(0)
Thanks to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