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31

박석 2010 | ‘和光同塵’으로 보는 老子와 孔子의 삶과 깨달음 - 이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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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光同塵’으로 보는 老子와 孔子의 삶과 깨달음

이남곡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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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박석 교수가 보내주신 논문을 옮긴 것입니다.



1. 들어가는 말

공자와 노자는 西周時代 초기에 확립된 봉건질서가 와해되면서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던 과도기이자 혼돈기였던 春秋時代 말기의 사상가들로서, 그들로부터 나온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은 春秋戰國時代에 성행하였던 여러 사상들을 누르고 후대 중국 사상의 양대 축이 되었다. 유가와 도가는 서로 대립적인 측면도 있지만 상호보완적인 측면도 있어서 오랜 세월에 걸쳐 교류하면서 중국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위대한 두 명의 사상가는 생전에 서로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공자가 노자보다 연하이고 또한 배우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당시 현자로 소문이 난 노자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하였다고 한다. 주로 도가계열의 저서에서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한 우화들이 많이 보이고 있지만 유가계열의 전적에도 공자가 노자에게 禮를 물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노자에 관한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인 『史記』의 「老莊申韓列傳」에서도 노자와 공자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다.

공자의 생애에 대한 자료는 풍부하고 믿을만하기 때문에 삶의 흐름과 사상적 변화를 비교적 상세하게 그려낼 수 있지만 노자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자료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고 그나마 신빙성이 부족하여 역대이래로 제가의 설이 분분하다. 「老莊申韓列傳」에 수록된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고, 심지어 노자라는 인물 자체의 실존성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老莊申韓列傳」에 나타난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한 기록은 그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서 노자와 공자의 삶의 태도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노자가 공자에게 준 가르침의 핵심 내용은 필자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는 ‘和光同塵’ 사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和光同塵’은 ‘和其光, 同其塵’의 줄임말로서 『老子』의 4장1)과 56장2)에 등장하는 구절이다.3) ‘화광동진’의 의미에 대해서는 역대로 다양한 설이 있지만 대체로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과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서 수도를 통하여 얻어진 깨달음의 빛 내지 덕성의 빛을 안으로 감추고 겉으로는 평범한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화광동진’이라는 자구는 도덕경에 두 차례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노자 수양론의 핵심 가운데 하나로서 노자의 삶과 깨달음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다.4)

필자의 관점에서는 노자의 삶 자체가 ‘화광동진’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그는 깊은 수도를 통하여 우주만물의 근원인 도를 체득하는 경지에 올랐고 아울러 문명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깨달음과 지혜를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안으로 감추고 은자의 길을 택하여 문명 밖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떠나기 전에 남겨놓은 5000여자의 책 한 권과 후대에 전해진 모호한 전설을 통해서만 그의 삶과 깨달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공자는 노자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사상가이다. 그러나 ‘화광동진’의 의미를 곱씹어온 필자의 관점에서는 흥미롭게도 공자의 삶과 깨달음에도 ‘화광동진’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화광동진’의 의미를 좀 더 심층적으로 재해석해볼 때 공자가 노자보다 더 철저하게 ‘화광동진’을 삶 속에서 구현하였다고 본다.

노자와 공자의 만남이 역사적 사실인지, 또한 공자가 정말 노자로부터 ‘화광동진’의 가르침을 수용하였는지는 규명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화광동진’을 매개로 해서 두 위대한 사상적 거인의 삶과 깨달음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2. 老子와 孔子의 만남

공자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는 고사는 『史記』의 「孔子世家」, 「老莊申韓列傳」, 「仲尼弟子列傳」에 나타나고 있고, 『莊子』중에 8조목의 관련 자료가 있고, 『呂氏春秋』의 「當染」편에도 나타나고 있고, 『禮記』의 「曾子問」편에도 4측의 자료가 나타나고 있고, 이와 비슷한 시기의 유가의 저서인 『韓詩外傳』과 『孔子家語』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 중 사료로서의 신빙성이 가장 높은 것은 『史記』의 「老莊申韓列傳」이다.

「老莊申韓列傳」에 의하면 노자는 楚나라 苦縣에서 태어났으며, 성은 ‘李氏’이고, 이름은 ‘耳’이고, 자는 ‘聃’이다. 주나라의 守藏室의 관리를 지냈는데 일찍이 공자의 방문을 받고 그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만년에 주나라가 쇠퇴하자 關을 떠나 은둔하려고 하였는데 關令 尹喜의 부탁으로 道와 德에 관련된 글 5000여자를 남기고 사라졌다. 사마천은 이어서 공자와 동시대 사람인 老萊子라는 사람이 있음을 밝히고 있고 공자보다 훨씬 후대의 사람인 太史儋 또한 노자일지도 모른다는 설을 부가하고 있다. 그런데 『사기』외의 대부분의 문헌에서는 李耳 대신에 老聃이 주로 등장하고 있다. 이로 인해 후대 노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많은 혼동이 있었다.

이미 위진시대부터 노자의 설에 대한 이설이 등장하였고 고증학이 유행한 청대에 이르러서는 엄밀한 문헌고증을 통해서 노자와 노자의 저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며, 특히 20세기 초 희의주의적 학풍이 유행하였을 때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사기』의 설을 부정하였다. 많은 학자들이 노자는 공자와 동시대 사람이 아니라 전국시대 후기의 사람이라고 주장하였고 『노자』라는 책도 전국시대 중기 내지는 후기, 심지어 한대 초에 지어졌다고 주장하였다.5) 만약 노자가 공자보다 후대에 생존하였던 사람이라면 노자와 공자의 만남은 성립 가능성 자체가 없어진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에 들어 西漢 초기의 고분인 馬王堆에서 帛書本 『노자』가 출토되고 특히 90년대에 郭店에서 전국시대 초나라 고분에서 竹簡本 『노자』가 출토되면서 노자에 대한 담론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고증에 의하면 竹簡本의 성립 시기는 전국시대 중기인데 당시 서적의 유통속도를 고려해 보면 『노자』가 널리 유행하여 副葬品으로 쓰이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아 노자의 생존연대와 『노자』의 성립시기의 하한선은 더욱 올라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최근에는 『노자』가 춘추시대 말기의 저서라는 설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6) 근래에 나온 노자에 대한 주요한 저서들은 대개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는 추세이다. 다만 사마천의 사기의 기록에서 노자를 李耳라고 한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고증에 의해 老聃이 와전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7) 이에 따라 노자와 공자의 만남이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도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이 논문의 목적은 엄밀한 고증을 통해 노자와 공자의 만남이 역사적 사실임을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노자와 공자와의 만남에 대한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서 사상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많은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유가와 도가는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지만 상호보완적인 측면도 있고 실제로 오랜 역사를 통해서 많은 교류를 하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노자와 공자의 만남은 문화적 상징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필자는 특히「老莊申韓列傳」에 기록된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그 속에서 제기된 ‘화광동진’의 사상이 노자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전문을 보도록 하자.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에 대하여 물었다. 노자는 말하였다.

“그대가 하는 말은 그 말을 하였던 사람과 뼈는 이미 썩었고 그 말만 남아 있는 것이오. 게다가 군자는 때를 얻으면 수레를 타고 때를 얻지 못하면 남루한 모습으로 다니는 법이오. 내가 듣기에 좋은 장사치는 깊게 감추어 마치 텅 빈 듯이 하고 군자는 큰 덕을 갖추고 있으나 용모는 마치 어리석은 듯이 해야 하오. 그대의 교만한 기운과 많은 욕심, 태를 내려는 기색과 넘쳐흐르는 뜻을 버리시오. 이들은 모두 그대 자신에게 무익할 뿐이오. 내가 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오.”

공자는 물러나서 제자에게 말하였다.

“새라면 나는 그것이 능히 날 수 있음을 알고, 물고기라면 헤엄칠 수 있음을 알고, 들짐승이라면 그것이 달릴 수 있음을 안다. 달리는 놈은 올가미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놈은 낚시로 잡을 수 있고, 나는 놈은 주살로 잡을 수 있다. 용에 대해서는 나는 그것이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마치 용과 같구나.”8)




먼저 공자가 노자에게 질문한 것은 ‘禮’였다. 천하가 혼란해진 근본원인을 예의 붕괴로 보았고 주공이 세웠던 예를 회복함으로써 천하를 구하고자 하였던 공자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노자는 공자가 말하는 예를 이야기한 사람은 벌써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恒常의 도가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비추어보면 이미 죽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 경전은 더욱 항상의 도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미 죽어버린 사람들이 이야기하였던 예, 실체는 알 수 없고 껍질만 남아 있는 예, 그래서 항상의 도가 될 수 없는 예로써는 지금 사회의 폐단을 구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에 노자는 군자는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잘 알아서 처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때를 얻으면 세상에 나아가 벼슬을 하고 때를 얻지 못하면 포의로 살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노자의 생각으로는 당시는 천하의 도가 무너지는 시기로서 이러한 시기에는 마땅히 물러나 포의지사로서 은둔의 길을 가야 함을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노자는 벼슬에서 물러나 은둔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공자는 그 시기야말로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구제하기에 앞장서야 할 시기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노나라에서 정치를 펼치려고 노력하였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받아줄 군주를 찾아 천하를 주유하였다.

이렇게 공자는 나아감과 물러남의 시기 판단에 대해서는 노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지만 나아감과 물러남의 기본 관점에 대해서는 수용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만년에는 정치적 포부를 버리고 조용히 제자들의 양성에만 힘을 썼던 것이다. 그러한 관점은 맹자에게 이어져 “궁할 때는 혼자 자신이라도 선하게 해야 하고 영달할 때는 천하를 두루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9)라는 말을 낳았던 것이다. 진퇴의 처세 부분은 유가와 도가가 서로 만날 수 있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후대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의 지식인들 가운데는 양자를 융합한 삶의 모형을 취한 사람들이 많다.

노자는 이어서 훌륭한 장사치가 천하의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은근히 감추어 그 가치를 더 높이듯이 군자는 위대한 덕을 품고 있어도 겉으로는 어리석은 듯이 보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노자의 ‘화광동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어떤 이는 이 구절이 노자의 “大成若缺, 大盈若沖, 大巧若拙.” 구절의 뜻과 서로 부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10) 이미 필자의 여러 논문에서 밝혔듯이 ‘대교약졸’은 ‘화광동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마지막으로 공자의 세상에 대한 의욕과 야망이 지나침을 경계하였다. 공자가 노자에게 가르침을 청한 시기에 대해서는 17, 18세, 31세, 34세, 42세, 46세, 51세 등의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노자가 공자더러 의욕이 과다하고 기색이 너무 밖으로 뻗친다고 충고를 준 것으로 볼 때 아마도 30대 전후로 보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11) ‘無爲淸靜’과 ‘少私寡欲’의 수양을 주장하는 노자의 입장에서는 인생의 선배로서 어지러운 천하를 구하겠다는 의지와 신념에 찬 젊은 공자의 모습을 보고 우려가 되는 마음에서 진지한 충고를 하였을 것이다.

노자의 가르침을 받고 돌아온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노자를 용이라고 칭하였는데 이것은 물론 공자 자신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공자에 대한 노자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도가계열의 후인들이 지어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공자가 노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고사 자체가 도가계열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도 많다. 그렇지만 일단 본고에서는 겸손한 공자가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노자에 대해 경의를 표한 것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노자가 공자에게 준 가르침은 예에 대한 답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처세와 수양에 관련된 내용이다. 필자의 관점에서는 노자 수양의 핵심은 ‘화광동진’에 있고 공자와의 대화에서도 그것이 잘 드러나고 있다. 중간 단락의 “덕을 감추고 어리석은 듯이 보인다.”는 부분도 그렇지만 앞부분의 “때를 얻지 못하면 남루한 모습으로 다녀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지혜와 재주를 안으로 감추고 살아가라는 이야기로서 결국 빛을 안으로 감추고 먼지와 더불어 살아가라는 뜻이다. 뒷부분의 교만한 기운과 욕심, 태를 내려는 기색과 뜻이 지나치게 넘치는 것을 버리라는 말은 양생과 수심에 관련된 것인데 그 지향점 또한 ‘화광동진’에 있다. 그러면 ‘화광동진’에 대해서 좀 더 심층적으로 풀이해보고 그를 바탕으로 그들의 삶과 깨달음에서 ‘화광동진’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3. ‘和光同塵’에 대한 새로운 해석

‘和光同塵’은 4장에서는 ‘挫其銳, 解其紛’과 더불어 나오고 56장에서는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紛’과 더불어 나오고 있다. 이 모두는 수양과 관련이 있는 구절들이다. ‘塞兌閉門’은 많은 주석가들이 감각적 쾌락을 막고 욕망을 끊는 것으로 주해하고 있고 ‘挫銳解紛’은 마음의 날카롭고 얽힌 부분을 정리하는 것으로 주해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이자 가장 높은 경지인12) ‘화광동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지만 지혜의 빛을 안으로 거두고 다시 범속함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견해이다.

河上公本에는 각각의 구에 대해 “비록 홀로 보는 밝음이 있어도 마땅히 어두운 듯이 하고 빛으로써 사람들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된다. 무리와 함께 하고 먼지와 같이 해야지 스스로 특별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12)라고 하고 있다. ‘和其光’을 지혜의 빛을 감추는 것으로 보고 있고 ‘同其塵’은 범인과 동화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宋代의 蘇轍은 보다 깊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사람이 도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 없으나 성인이 능히 그것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 그 날카로움을 꺾는 것은 망령됨에 빠질 것을 두려워함이다. 얽힘을 푸는 것은 외물에 얽히게 될까봐 두려워함이다. 망령됨에 빠지지 않고 외물에 얽히지 않게 되면 외부의 근심은 이미 사라지고 빛이 생길 것이다. 그런 뒤에 그것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외물과 차별이 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빛은 지극히 순결한 것이고 먼지는 지극히 잡된 것이다. 비록 먼지라 할지라도 동화하지 않음이 없는 것은 만물을 버릴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人莫不有道也, 而聖人能全之. 挫其銳, 恐其流於妄也. 解其紛, 恐其與物搆也. 不流於妄, 不搆於物, 外患已去, 而光生焉. 又從而和之, 恐其與物異也. 光至潔也. 塵至雜也. 雖塵無所不同, 恐其弃萬物也.)13)




소철의 관점에서는 빛이란 단순한 지혜의 빛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으나 성인만이 온전하게 밝힐 수 있는 깨달음의 빛이요 성스러움의 빛이다. 범인들이 그 깨달음의 빛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망령됨에 빠져 있거나 외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제거하면 내면의 빛은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다시 그 빛을 부드럽게 하는 것은 외물과 차별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지극히 순결한 깨달음의 빛을 감추고 잡된 티끌과 동화가 되는 것은 만물을 버릴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화광동진’에는 회귀의 논리가 숨겨져 있다. 수양의 과정에 들어가기 전의 처음의 상태는 범속함이다. 이것은 아직 내면의 깨달음의 빛을 자각하지 못한 단계이다. 수양을 거쳐서 내면의 깨달음의 빛을 자각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이렇게 될 때 일반적인 범속함과는 전혀 다른 성스러움의 빛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빛을 부드럽게 하여 감추고 속세와 하나가 되는 ‘和其光 同其塵’의 과정을 통하여 다시 원래의 범속함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회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회귀는 아니다. ‘화광동진’ 이후의 범속함은 당연히 처음의 범속함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표면적으로는 범속해보지만 속으로는 깨달음의 빛이 감추어져있는 것이다. 그것은 순환을 하면서도 한 단계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간 나선형적 회귀라고 할 수 있다.

‘화광동진’에서 나선형적 회귀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일차적 의미는 감추기이다. 얕은 성스러움을 넘어서 더 깊은 성스러움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성스러움을 감출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다시 범속함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감추기가 노자의 수양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도덕경 곳곳에서 이 감추기를 다른 말로 풀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자주 등장한다. “밝고 환하게 사방에 통달하고도 무지할 수 있는가?”14), “수컷을 알고 암컷을 지킨다.”15) 등의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사방에 통달하는 큰 지혜를 얻고 수컷의 강건함을 얻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한 지혜와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감추고 무지한 듯이 보이고 유약한 듯이 보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오랫동안의 修道와 修德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는 ‘화광동진’의 나선형적 회귀가 단순히 감추기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대립되는 양극성을 통합한다는 의미도 있다.

소철의 주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빛과 티끌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다. 하나는 지극한 성스러움과 고결함의 상징이고, 하나는 지극한 범속함과 잡됨의 상징이다. 또한 빛은 본체의 세계 내지는 초월의 세계를 지칭하는 것이고, 먼지는 현상의 세계 내지는 범속한 일상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둘은 서로 철저하게 대립된다.

범인들은 대부분 범속한 일상의 세계에서 잡된 욕망의 포로가 되어 허우적거리며 살아가기 십상이다. 이에 비해 수도자들은 성스러운 초월의 세계에 심취하여 일상의 현실을 무시하기가 쉽다. 수도의 과정으로 볼 때 성스러움과 고결함을 추구하는 것은 범속함과 잡됨에 머물러 있는 것에 비해서는 분명 발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 또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다. 대립적인 양자를 통합하는 것이 더욱 깊고 원숙한 성스러움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관점으로는 노자가 성스러움과 고결함을 알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다시 범속함과 잡됨과 동화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은 결국 성스러움과 속됨의 대립적 요소를 하나로 통합하여 더 깊은 성스러움으로 나아가려고 했던 것이라고 보고 싶다.

감추기와 통합은 하나의 과정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사실 ‘화광동진’이라는 자구만 찬찬히 뜯어보아도 그것이 감추기와 통합의 두 단계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화광’이라는 말은 성스러움의 빛을 부드럽게 하여 감추는 것이므로 당연히 감추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비해 ‘동진’은 성스러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범속한 세계와 동화되는 것이므로 성과 속의 통합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스러움과 범속함을 통합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스러움을 감추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성스러움의 빛이 밖으로 강하게 발산되면 범속함에 머물러있는 사람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숭배하거나 경계심을 가지고 멀리할 수밖에 없다. 성스러움의 빛을 감출 수 있을 때 비로소 범속함과도 동화될 수가 있다.

그러나 ‘화광’을 잘 한다고 해서 반드시 ‘동진’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사실 ‘동진’의 정의와 관련이 있다. 만약 동진을 단순히 겉으로 깨달음의 티를 내지 않고 속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으로만 정의한다면 ‘화광’과 ‘동진’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다. 빛을 감추는 것 자체가 바로 먼지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에서는 그것은 진정한 ‘동진’이 아니라고 본다. 진정한 ‘동진’이 이루어지려면 단순히 깨달음의 티를 내지 않고 범인과 어울리는 단계를 넘어서 진정으로 범인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단계로 나아가야한다. 소통과 교류가 없는 것을 어찌 ‘同化’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소통과 교류라는 요소를 고려하여 ‘동진’을 정의하는 경우 ‘화광’과 ‘동진’은 동의어가 아니다. 성스러움의 빛을 감추고 범인들 속에 살고 있지만 그들과 전혀 소통하지 않고 교류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필자는 ‘화광동진’을 ‘화광’의 단계와 ‘동진’의 단계 둘로 나누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기 단계는 깨달음의 빛을 감추는 ‘화광’에 중심을 두고 있는 단계이다. ‘화광’에 초점을 맞춘 대표적인 유형은 바로 은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은자는 그냥 현실에 불만을 품고 은둔해서 지내고 있는 보통의 은자가 아니라 속으로 깊은 지혜와 성스러움을 가지고 있되 그것을 감추고 살아가는 은자를 말한다. 노자 당시에 이미 덕과 지혜를 갖춘 은자들이 많이 있었고 『논어』에도 공자에게 충고하는 은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은자들 중에서도 감추기에 더욱 급급하여 아예 인간세상을 떠나 깊은 산중에서 은거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세상 사람들 속에 묻혀 범인처럼 지내는 사람도 있다.

‘화광’의 단계에 이르면 자신의 성스러움과 지혜를 밖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는 극복할 수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범인들 속에서 어울려서 티를 내지 않고 살 수 있다. 그러나 내면에서 성과 속의 진정한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범속함을 수용할 뿐 여전히 성스러움과 초월의 세계에 머무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급급하거나 내면의 심원한 세계에 도취하여 범인들과는 깊게 소통하거나 교류하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서도 심리적 거리를 두고 동정을 할 뿐 더불어 진정으로 그 아픔을 공감하며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이런 상태에서는 육신이 산속에 있든 저자거리에 있든지 간에 마음은 여전히 홀로 고원한 성스러움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동진’의 단계에 이르러야 몸만 범속한 세상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고 마음 또한 범속한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고 교류하려고 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깨달은 자로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물론 자신의 성스러움을 과시하거나 우월자의 관점에서 동정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진심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말없는 가운데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자연스럽게 그들의 삶의 차원을 한 단계 높여주게 된다.

그런데 ‘동진’이 더욱 무르익게 되면 개인적인 차원에서 범속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들과 아픔을 함께 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적 차원에서 현실의 모순과 질곡을 직시하며 이를 변혁하려고 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개개인의 범속한 일상의 삶은 그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모두 그 사회의 구조와 문명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회가 모순에 빠지고 문명이 왜곡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보통 사람의 일상성은 망가지고 피폐해진다. 진정으로 성과 속을 통합하려고 한다면 표피의 일상에서 심층의 일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이다. 그러므로 범속한 일상성의 심층구조를 이루고 있는 사회적 구조와 문명의 성격을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회와 문명과의 소통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주변의 몇몇 사람의 고통을 해결하는 차원에서 사회와 문명의 문제점을 직시하면서 현실 개혁의 대안을 모색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동진’이 더욱 확장된 규모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4. ‘和光同塵’으로 보는 老子와 孔子

노자와 공자가 살았던 시기는 서주 초기에 확립된 봉건질서와 예악제도가 와해되어가던 시기였다. 노자와 공자는 모두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던 사상가로서 비록 생애의 노정과 사상적 성향은 달랐지만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 대안을 내놓았다는 면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먼저 노자의 삶과 깨달음을 보도록 하자.

사실 사마천의 노자의 생평에 대한 기록은 워낙 소략하기 전체의 모습을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주나라의 수장실의 관리를 지냈다는 것이다. 수장실의 관리를 지내면서 책을 가까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금의 역사와 문물제도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었던 것도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그러나 주나라가 쇠퇴함에 따라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어떤 이는 대략 50대 중반 정도로 추정되는 나이에 주나라 왕실에서 일어났던 정변으로 인해 왕실 도서관 관직에서 물러나 은둔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데16),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노자 당시에는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지배계층에서 물러나서 초야에 머물면서 현실세계에 대한 비판을 하였던 은자의 무리들이 많이 있었다. 『논어』「微子」편에 등장하는 接與, 長沮, 桀溺, 荷蓧丈人 등이 그러한 무리들이다. 이러한 은자들의 무리가 후대 도가학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고 은자들 중에서 가장 심오한 사상을 펼칠 수 있었던 노자가 그들의 중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노자』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사상은 단순히 현실비판의 은둔자의 사상이라고만 할 수가 없다. 그 속에는 우주본체에 대한 언급에서부터 천하를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다룬 정치사상,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양생을 하면서 살아갈 것인가를 다룬 수양과 처세론, 그리고 당시 현실에 대한 비판까지 총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갈래가 있지만 ‘화광동진’의 관점에서 보면 훨씬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그는 분명히 정신적 수양을 통하여 심오한 내적 체험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虛靜의 극치 속에서 감각과 개념의 세계를 넘어서는 본체의 세계에 다가갔던 것으로 보인다.17)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화광’의 지혜를 체득하며 현실의 세계로 돌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진’을 심화시켜 당시의 현실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였다. 노자의 글 속에서 현실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이 상당히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문명비판에 대한 글이 많은 것은 물론 노자 자신이 수장실의 관리를 지낸 최고의 지식인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가 초월적 세계, 본체의 세계에만 경도되었다면 현실에 대해 그렇게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노자의 계승자라고 불리는 莊子만 해도 노자만큼 현실세계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관심은 구만리 상공을 나는 大鵬과 같이 현실을 멀리 초월해서 物外의 세계에서 逍遙遊를 즐기는 데에 있다. 물론 『장자』 속에서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과 혼탁한 세상을 구제하기 위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주류가 아니다. 장자 사상의 주류는 역시 초월적 대자유에 있다.

불교 중에서 ‘화광동진’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선종의 선사들 또한 초월의 세계에 경도되기보다는 일상의 중요성을 더 많이 강조하면서 성속 양자를 통합하려고 하였다.18) 그러나 선사들이 강조한 일상성이란 주로 밥 먹고 차 마시고 물 깃고 장작 패는 일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매우 중요한 일상성임에는 틀림없지만 표피적이고 피상적이다. 우리의 일상성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정치사회구조와 문명이 깔려 있다. 정치사회 구조의 문제와 문명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그냥 밥 먹고 차 마시는 표피적인 일상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과의 소통이 단절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선사들의 ‘화광동진’은 아직 감추기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사회에 대해 비판하면서 문명적 대안을 제시하였다는 측면에서 노자의 ‘화광동진’은 이후에 노자를 추종하였던 도가계열의 사상가나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불교의 토착화를 추구하였던 선사들보다 훨씬 높은 단계에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현실문명에 대한 그의 주장들이 현실 속에서의 실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식인의 관념에서 도출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관념상으로는 분명히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통합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통합보다는 감추기에 치우쳐 있었다. 그래서 현실 속으로 뛰어들기보다는 은자의 삶에 머물렀고 만년에는 결국 문명 세계를 등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사마천은 노자의 학문을 간략하게 총평하면서 “노자는 도와 덕을 닦았는데 그 학문은 스스로 감추고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일로 삼았다.”19)라고 언급하였는데 정확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감추기에 지나치게 치중하였기에 노자의 생애는 이미 사마천 당시에도 모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대에 가서는 여러 가지 전설과 범벅이 되어 신선으로 추앙되고 심지어는 신의 대열에 들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제시한 현실문명에 대한 처방 또한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정치사상은 법가가 극성을 부린 뒤 휴식기를 필요로 하였던 한대 초에 잠시 받아들여졌고 유가사상이 관학이 된 뒤부터는 현실정치에서 별로 활용될 수가 없었다. 주로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 사이에서 환영받았을 뿐이다. 이것은 바로 노자가 관념적으로는 ‘동진’의 규모를 크게 확장시키는 단계까지 나갔지만 실제 현실의 삶에 있어서는 ‘화광’에 머무름으로 인해 나타난 한계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노자의 ‘화광동진’은 미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공자를 살펴보자. 우선 공자 또한 노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도의 경지와 덕성을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안으로 감추기를 좋아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논어』의 다음 구절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叔孫武叔이 조정에서 대부들에게 “子貢이 공자보다 현명합니다.”라고 말하였다. 子服景伯이 자공에게 알려주자 자공이 말하였다. “궁궐의 담에 비유하자면 저의 담은 어깨 높이여서 방과 집이 좋음을 다 엿볼 수 있지만 선생님의 담은 몇 길이나 되어서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부유함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사실 그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적기 때문에 손숙무숙의 이야기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20)




당시 일반 사람들 중에는 공자의 도와 덕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보다는 공자의 제자였던 자공을 더 높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대해 자공은 황송해하며 스승을 변론하였다. 선생님의 담은 몇 길이나 되어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부유함을 볼 수 없다는 말 속에서 공자 또한 ‘화광’을 잘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일반인들은 공자의 덕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오랫동안 공자를 접하고 그에게서 배워본 제자들만이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더 가까운 제자일수록 공자의 도와 덕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회는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러러 볼수록 더욱 높고, 뚫고 들어갈수록 더욱 견고하다. 앞에 있는 것을 본 것 같은데 어느 새 뒤에 있다.”21)라고 하면서 공자의 도와 덕의 경지에 대해 극찬을 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위대한 점은 감추기에만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스러움과 범속함의 통합, 초월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통합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즉, ‘동진’을 제대로 실천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 부분은 공자가 노자에게서 직접적으로 배웠다기보다는 스스로 터득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공자는 어렸을 때부터 도와 학문에 뜻을 두고 열심히 정진하여 사십이 되었을 때는 그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어지러운 시대를 바로 잡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공자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도가 계통의 은자들 가운데서는 세상을 구제하겠다고 버둥거리는 공자를 비웃고 공자더러 명리를 버리고 조용히 살아가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논어』「미자」편의 인물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동진’의 진정한 의미를 체득한 공자는 어지러운 난세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을 두고 혼자 편안하게 은둔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자는 “새나 짐승과 무리지어 함께 살 수 없으니, 내가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누구와 함께 하겠는가? 천하에 올바른 도리가 행해지고 있다면 나는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22)라는 말을 하였다. 실제로 그는 한 평생 세상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의 문명적 대안은 노자처럼 현실과 괴리된 주관적 직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현실과 결합된 실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하였지만 후대 중국문명의 주류가 될 수 있었다.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동진’의 극치라고 보고 싶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화광동진’이란 먼저 내면의 빛을 체득한 뒤에 그 빛을 안으로 감추고 다시 속세로 돌아오는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그런 내면의 빛을 체득하지 못하였다면 세상 속에서 아무리 치열하게 살아도 ‘화광동진’이라고 할 수 없다. 과연 공자는 깨달음을 지니고 있으면서 현실로 돌아온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러한 깊은 깨달음 없이 그저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현실개혁에 급급한 사람이었을까?

전통적으로 도가나 불가에서는 공자의 깨달음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가르침에는 구도와 종교의 세계에서 추구하는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세계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일상의 정치사회적인 윤리나 사람으로서의 도리에 관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초월성을 추구하는 사람들 눈에는 공자의 가르침이 눈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장자』 속의 공자에 대한 우화를 보아도 대부분 공자를 폄하하고 있고 불교의 승려 가운데서도 공자를 폄하한 사람이 많다. 晩唐五代의 雲門禪師는 일찍이 “고인도 오히려 아침에 도를 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우리 사문에게 있어서이랴! 아침저녁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크게 노력하고 진중하기를 노력하시오.”23)고 말하기도 하였다. 공자를 일개 출가자보다 못한 속인으로 폄하한 말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도가나 불가에서 공자의 도를 폄하한 것은 그들의 도에 대한 기준 자체가 지나치게 초월적인 측면에 경도되어 공자 속에 있는 초월성과 일상성의 통합을 볼 수 없었던 데서 기인한 것이다. 좀 더 깊게 바라보면 공자의 깨달음과 삶 속에는 분명 초월적 성스러움의 요소가 있다. 다만 감추어져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Fingarette은 공자의 가르침은 모세, 예수, 부처, 노자, 혹은 우파니샤드 교사들의 그것과는 달리 신비적 요소가 거의 없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무미건조한 도덕주의적 가르침 같지만 자세히 보면 주술적 힘(magic power)에 대한 신뢰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하고, 공자는 의례를 통하여 인간존재의 본질인 성스러움을 고양시키려고 했다고 주장하였다.24) 일리가 있는 학설이다. 그러나 필자에 관점에서는 공자의 성스러움은 단순히 의례를 통해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치열한 구도의 과정과 깨달음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는 자기 스스로를 ‘生而知之’가 아니라 ‘學而知之’라고 하였다. ‘생이지지’란 태어나면서 안다는 뜻으로 타고난 천재 내지는 성인을 가리키고, ‘학이지지’란 배움을 통한 꾸준한 노력으로 성스러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얼마나 배움을 좋아하였는가는 『논어』의 첫머리가 “배우고 때로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25)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곳곳에서 ‘好學’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공자의 배움은 단순한 지식습득이 아니었다. 『논어』에 나오는 ‘好學’을 살펴보면 주로 인격도야에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단순한 인격도야라기보다는 바로 구도의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눈을 감기 얼마 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나는 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고, 삼십에 바로 서고 사십에 불혹하고 오십에 천명을 알고 육십에 귀가 순통하고 칠십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26)라고 말했다.

철이 막 들기 시작한 열다섯 살부터 눈을 감기 직전까지 그의 삶은 치열한 구도의 삶이었다. 그는 실로 아침에 도를 들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도를 구하였다. 비록 점진적인 구도의 연속이었지만 대략적으로 보았을 때 하늘의 명을 알게 되었다는 오십대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하늘이란 초월적인 존재, 우주의 주재가가 거하는 곳으로 여겨졌고 종교적 신앙의 대상 내지는 구도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중국문명의 발전과정을 보면 殷代 이전에는 巫俗的 성격이 강한 神本主義에서 周初에 이르러서 점차 人文化의 길로 나아간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신본주의 문명에서 인문적 성격의 문명으로 전환하게 되는 것은 역시 춘추시대 말기라고 볼 수 있고 공자는 그 전환기에서 인문화로 나아가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던 인물이다. 공자 당시에는 하늘에 대한 관념도 점차 인문화 되기는 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하늘이라는 말 속에는 단순한 윤리 도덕적 차원을 넘어서는 신성함이 남아있었고 공자의 하늘에 대한 여러 언급들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27)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천명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 도덕적 수양만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도를 통한 깨달음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근래 학자 李冬君도 공자의 성스러움의 의미에 대해 체계적으로 기술하면서 ‘불혹’까지는 군자의 단계이고 ‘지천명’이후부터 성인의 단계에 들었다고 보고 있다.28)

공자는 천하를 주유하다 宋나라에서 桓魋에 의해 생명의 위험에 처하였는데 그때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는데 환퇴와 같은 자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29)”라고 말했고, 匡 지방에서 생명의 위협에 처하였을 때도 “하늘이 이 예악제도를 없애고자 한다면 뒤에 태어난 내가 이 예악제도에 관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늘이 이 예악제도를 없애려고 하지 않는데 광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하겠는가?”30)라고 말했다. 생명의 위협에 처하였을 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이 자신에게 내린 천명을 확실히 자각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자는 육십에는 ‘耳順’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순’이라는 말은 실로 모호한 말이어서 제설이 분분하였는데 대체로 역대의 주요한 주석가들은 말을 듣고 그 뜻을 깊게 이해한다는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31) 아마도 ‘지천명’하고 난 다음에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들으면 다 이해하게 되는 경지로 나아갈 것이라고 이해한 것 같다. 李冬君도 ‘이순’은 ‘지천명’을 체화하는 과정으로서 말없이 천명에 따르고 동화되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32)

‘이순’에 대해서는 대부분 ‘지천명’의 결과 내지는 심화로 바라보고 있는데 필자는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順’이라는 말은 따른다는 뜻이다. 그것은 듣는 대로 다 이해하게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다시 겸허하게 다른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따르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천명을 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천명을 알게 되면 내면에서 엄청나게 강한 확신이 밀려오기 때문에 외부의 소리는 귀에 잘 들려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면의 신념에 도취되어 세상과의 소통이 막혀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면 다시 타인의 비판과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과 제대로 소통을 할 수 있고 문명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순’은 자신의 깨달음의 빛을 감추고 다시 세상과 소통을 하기 위해서 귀를 열어 놓는 경지로서 ‘화광동진’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다음에 칠십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내와 외의 조화를 가리킨다. 여기서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란 내면의 욕구, 신념, 의지 나아가 깨달음을 총칭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 내면의 깨달음은 외면의 현실세계와 충돌한다. 노자의 경우만 해도 결국 내면의 깨달음이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세상을 등진 은자의 길을 택하였다. 공자는 깨달음 이후에도 세상과의 소통을 원하였고 만년에 눈을 감기 전에는 내면의 깨달음과 외면의 현실을 서로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화광동진’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볼 때 공자의 가르침 속에 내면의 성스러움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본인 스스로의 체득마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필자의 관점에서는 후대 공자의 가르침에서 본원적 성스러움이나 초월적 세계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었던 것은 바로 공자 자신이 ‘화광’을 통하여 그것을 감추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싶다. 그래서 제자들은 “선생님이 예악제도와 문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가히 들을 수 있지만 선생님이 타고난 본성이나 하늘의 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가 없다.”33)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의 빛은 말없는 가운데 삶에 묻어나왔을 것이고 제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만약 공자가 깊은 깨달음 없이 단순히 정치사상이나 윤리 도덕만을 가르쳤다면 제자들로부터 그렇게 성인으로까지 추앙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공자는 구도의 새로운 차원, 성스러움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초기에는 소수의 제자들 외에는 수용되지 않았지만 헌신적인 계승자들에 의해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차 확산되었고 마침내 중국 문명의 주류가 되었다. 李冬君은 중국 문명의 긴 흐름을 夏殷周의 ‘神化’, 殷周之際에서 시작되어 공자에 이르러 완성되어 19세기말까지 계속된 ‘聖化’, 그리고 20세기 이후의 ‘公民化’, 삼 단계로 나누고 있다. 그는 ‘성화’란 성인이 주체가 되는 문화라는 뜻으로 공자는 ‘下學上達’로써 성화의 모델을 제시하고 실천하였으며 공자의 성화는 이후 계승자들의 부단한 노력에 의해 결국 중국문명의 주류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34) 일리가 있는 설이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화광동진’의 가르침은 실로 근대서구의 문명이 침투하기 전까지 중국문명권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위진남북조시대에 들어서는 사회의 혼란을 틈타 유교는 점차 쇠퇴하고 도교와 불교가 크게 흥성하였다. 특히 인도에서 수입된 불교는 중국인들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종교적 성스러움을 체험하게 해주었다. 이에 수많은 지식인들은 인도적 성스러움의 강렬한 빛에 깊게 심취하였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흘러갈수록 ‘화광동진’의 영향으로 깨달음의 빛을 안으로 감추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강조하는 선종이 득세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대를 지나 송대에 와서는 유교가 다시 사상계의 주류를 찾게 되었다. 일상적 범속함에서 초월적 성스러움으로 갔다가 다시 일상적 범속함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물론 송명대의 신유학이 단순히 범속함만을 내세웠던 것은 아니다. 신유학은 불교로부터는 심성론과 수양론을 대폭적으로 수용하였고, 도교로부터는 우주론을 보완하여 천근한 일상사에서 심원한 본체의 세계, 본성의 세계에 이르는 종합적인 학문체계를 건립하였다. 범과 성의 새로운 통합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성스러움을 안으로 감추고 표면적으로는 ‘日用之間’을 적극 제창하였다. 결국 최후의 승리는 ‘화광동진’을 터득한 유교 측으로 돌아갔다. 중국사상사의 거대한 흐름 자체가 ‘화광동진’의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5. 맺는 말

‘화광동진’은 노자의 수양론 중의 한 부분이다. 물론 『노자』의 많은 구절이 그러하듯이 이 또한 노자 자신의 독창적인 언어라기보다는 전승되어오던 금언이나 격언들을 옮긴 것인지도 모른다. 내용으로 볼 때 아마도 은둔 사상가들 사이에 내려오던 금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자가 그것을 기록하였고 또한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였기 때문에 노자 사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화광동진’의 일차적 의미는 성스러움의 빛을 감추는 것이다. 그러나 ‘화광동진’의 의미에 대해서 오랫동안 천착해온 필자의 관점에서는 ‘화광동진’ 속에는 성스러움의 감추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움과 범속함을 통합하는 의미도 있다고 본다. 필자의 관점에서는 후자가 더욱 심화된 단계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노자는 분명히 ‘화광동진’을 중시하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려고 하였지만 궁극의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하였다. 그것은 미완의 ‘화광동진’이었다. 오히려 공자가 ‘화광동진’의 심층적 의미를 체득하고 삶 속에서 그것을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노자와 공자의 만남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설이 많다. 그리고 노자라는 인물의 실재성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분명 공자 당시에 죽간본 『노자』를 쓴 은둔 사상가 내지는 그와 비슷한 부류의 은둔 사상가들은 존재하였을 것이고 배우기를 좋아하였던 공자가 그들로부터 ‘화광동진’의 사상에 대해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가르침을 받았을 개연성을 완전히 배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공자의 삶과 깨달음 속에도 ‘화광동진’의 사상이 묻어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화광동진’의 관점에서 노자와 공자의 삶과 깨달음을 바라보는 것은 그들의 사상을 새로운 각도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자의 사상이 우주만물의 근원인 도를 강조하면서도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나 공자의 사상이 초월적인 세계보다는 일상의 세계에 더욱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들은 모두 ‘화광동진’과 많은 관계가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초월적인 성스러움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사상이 만개하였던 인도나 유럽 내지 아랍문명권과는 달리 중국문명권에서는 현실적 실용성을 강조한 정치사상이 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 또한 ‘화광동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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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주환, 『공자-그 신화를 밝힌다』, 서울: 솔,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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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즈카 시케기, 박연호 역, 『공자의 생애와 사상』, 서울: 서광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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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 「大巧若拙 사상과 송대 문화」 중국어문학연구회 『중국어문학논총』 22집, 2003.2.

박석, 「노자 수양의 삼 단계」, 중국문화학회, 『중국학논총』18집, 2004.12.




<中文提要>

孔子和老子是春秋末期的偉大的思想家. 西漢初的史家司馬遷在<老子列傳>中記載了孔子曾向老子問禮的故事. 歷代以來很多學者對司馬遷的記錄表示懷疑, 其實對老子其人和其書的問題至今未能達到一致的見解. 但最近不少學者依據馬王堆帛書本和郭店楚簡本的發掘主張司馬遷的記錄是可靠的. 不論孔子向老子問禮的故事是否史實, 這個故事給我們很多啓發.

我認爲老子對孔子的忠告的主旨就在於作爲老子修養論的樞紐的‘和光同塵’, 因而擬以‘和光同塵’的觀點比較一下他們的生平和悟境. ‘和光同塵’的意思是把修道以後發露的神聖的光芒隱藏起來, 與那些塵俗的人和世界相同. 其基本意義在於聖俗的調和. 我認爲同塵有兩個層次. 第一個是表面上的同塵. 雖然講究跟塵俗的人和世界相同, 可是沒有溝通和交流. 第二個深層的同塵是能够跟塵俗的人和世界進行溝通和交流的階段, 這才可以說是達到聖俗的調和.

從『老子』裏面的許多句子我們可以推測老子體會到作爲宇宙本體的道, 可是他沒有離開塵世, 對於當時的社會情況表示了較大的關心, 提出了救濟混世的方法, 這說明他推究聖俗的調和. 從這方面來看, 老子與力求逍遙遊於物外世界的莊子截然不同. 可惜的是他不能達到現實生活中的實踐, 究竟以隱者留了名. 孔子則不一樣. 從『論語․子張』中的“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來看, 我們可以知道孔子也能够把修道以後發露的光芒隱藏起來, 因此除了他的弟子以外當時一般人不能推測孔子的悟境有多深. 但是他的特點不在於‘和光’, 而在於‘同塵’. 他不但提出救濟混世的方法, 而且在現實生活中不斷地努力實踐他的理想. 這可以說是眞正的‘和光同塵’.




주제어 : ‘和光同塵’, 修養論, 悟境, 神聖, 塵俗, 聖俗的調和

1) “道盅, 而用之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2) “知者不言, 言者不知.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是謂玄同. 故不可得而親, 不可得而疏, 不可得而利, 不可得而害, 不可得而貴, 不可得而賤, 故爲天下貴.”




3) 『老子』는 판본에 따라 자구의 차이가 많고 특히 근래에 발굴된 帛書本은 通行本과 순서가 다르고 竹簡本은 내용의 편차도 심하다. 여기서는 통행본 가운데서 河上公本을 저본으로 한다.




4) 이에 대해서는 박석, 「老子 修養의 삼 단계」(韓國中國文化學會, 『中國學論叢』18집) 참조.




5) 노자와 『노자』의 연대에 대한 다양한 주장에 대해서는 熊鐵基 등,『中國老學史』, 福州: 福建人民出版社, 1995, 1-20쪽 참조.




6) 熊鐵基 등, 『二十世紀中國老學』, 福州: 福建人民出版社, 2003, 512-3쪽; 陳鼓應 白奚, 『老子評傳』, 南京: 南京大學出版社, 2001, 9-10쪽 참조.




7) 熊鐵基 등,『中國老學史』(福州: 福建人民出版社, 1995); 張智彦,『老子與中國文化』(貴州: 貴州人民出版社, 1996); 陳鼓應 白奚, 『老子評傳』(南京: 南京大學出版社, 2001); 熊鐵基 등,『二十世紀中國老學』( 福州: 福建人民出版社, 2003) 등의 저서에서 모두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다. 郭沂, 郭店竹簡與先秦學術思想』(上海: 上海敎育出版社, 2002)에서도 공자가 만났던 노자는 바로 老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다만 특이한 것은 죽간본 『老子』의 저자와 백서본 『老子』의 저자가 서로 다른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전자의 저자가 老聃이고 후자의 저자는 太史儋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8) “予所言者, 其人與骨皆已朽矣, 獨其言在耳. 且君子得其時則駕, 不得其時則蓬累而行. 吾聞之, 良賈深藏若虛, 君子盛德容貌若愚. 去子之驕氣與多欲, 態色與淫志, 是皆無益于子之身. 吾所以告子, 若是而已. 孔子去, 謂弟子曰, 鳥吾知其能飛, 魚吾知其能游, 獸吾知其能走, 走者可以爲網, 游者可以爲綸, 飛者可以爲矰, 至於龍, 吾不能知其乘風雲而上天. 吾今日見老子, 其猶龍也.” 司馬遷, 『史記․列傳』卷63 「老子韓非列傳」 北京: 中華書局, 1985




9)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孟子』, 「盡心下」




10) 郭沂, 『郭店竹簡與先秦學術思想』, 上海: 上海敎育出版社, 2002, 519쪽 참조.




11) 차주환, 『공자-그 신화를 밝힌다』, 서울: 솔출판사, 1998, 79-89쪽에서는 노자와 공자의 만남을 대략 34세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13) 帛書本이나 竹簡本에 의하면 通行本과는 달리 56장에서는 ‘和光同塵’이 挫銳解紛 앞에 나온다. 대신 4장에서는 통행본과 마찬가지로 ‘和光同塵’이 挫銳解紛의 뒤에 위치한다. 죽간본은 4장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다. 수양론의 관점에서 볼 때 순서에 상관없이 ‘和光同塵’이 보다 높은 경지라고 할 수 있다. 박석, 「老子 修養의 삼단계」, 中國文化學會, 『中國學論叢』, 제18집, 379-401쪽 참조.




12) “言雖有獨見之明, 當如闇昧, 不當以曜亂人也. 當與衆庶同坵塵, 不當自別殊.” 王卡, 『老子道德經河上公章句』, 14쪽




13) 焦竑, 『老子翼』, 『四部要籍注疏叢刊․老子』, 北京: 中華書局, 1998, 1229쪽




14) “明白四達, 能無知乎.” 『老子』10장.




15) “知其雄, 守其雌” 『老子』28장.




16) 張智彦,『老子與中國文化』, 貴州: 貴州人民出版社, 1996, 54-5쪽 참조.




17) 『老子』의 1장, 14장, 16장, 25장 등에서 이를 알 수 있다.




18) 박석, 「‘和光同塵’이 선종 깨달음에 미친 영향」, 상명대 어문학연구소, 『어문학연구』8집, 1999 참조.




19) “老子脩道德, 其學以自隱無名爲務.”『史記』권63 「老莊申韓列傳」




20) “叔孫武叔語大夫於朝曰, 子貢賢於仲尼. 子服景伯以告子貢.子貢曰, 譬之宮牆, 賜之牆也及肩, 窺見室家之好. 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 百官之富. 得其門者或寡矣, 夫子之云 ,不亦宜乎.” 『論語』「子張」




21)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論語』「子罕」




22) “鳥獸不可與同群, 吾非斯人之徒與而誰與, 天下有道, 丘不與易也.” 『論語』, 「微子」




23) “古人尙道朝聞道夕死可矣, 況我沙門. 日夕合履踐個什麽事, 大須努力, 努力珍重.” 道原,『景德傳燈錄』卷19, 中國電子佛典協會, 『大正新脩大藏經』51冊.




24) Herbert Fingarette, 노인숙 역, 『공자입니다 성스러운 속인』, 서울: 일선기획, 1990, 21-41쪽 참조.




25)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論語』, 「學而」




26)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論語』, 「爲政」




27) 林存光, 『歷史上的孔子形象』, 濟南: 齊魯書社, 2004, 12-29쪽 참조.




28) 李冬君, 『孔子聖化與儒者革命』, 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04, 49-51쪽 참조.




29) “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 『論語』「述而」




30) “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論語』「子罕」




31)『論語正義』에서는 鄭玄의 말을 인용하여 “聞其言而知其微旨”라고 풀이하였고 朱熹는 『四書集註』에서 “聲入心通, 無所違逆, 知之之至, 不思而得也.”라고 풀이하고 있다.




32) 李冬君, 위의 책, 50쪽.




33)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論語』 「公冶長」




34) 李冬君, 『孔子聖化與儒者革命』, 北京: 中國人民大學出版社, 200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