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3

박성용 서클에서 스토리를 되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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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



서클에서 스토리를 되찾기



결핍에 휩쓸려서 우리는 누군가의 His story/Her story에 의해 이야기의 굶주림을 채우려 하지만 더욱 갈증을 느낀다. 수많은 영웅, 악당들의 그들 이야기에 의해 자신을 채우나 목마름은 여전할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샘이라는 자신의 스토리, 우리의 스토리 그리고 우주의 스토리 없이는 질서지음, 의미의 맥락을 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클이 중요한 것은 내 중심의 스토리를 재발견하게 하고 그를 통해 '진정성의 직조(weaving)'를 통해 길(Way)을 터주기 때문일 것이다. Circle's Way(서클의 힘의 원래 책제목)는 스토리들에 의해 길을 찾고 힘을 얻고 방향감각을 가게 하면서 위로와 은총을 다시 불러들인다. 스토리로 인해서 나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알게 되고 스토리에 의해서 눈이 떠져서 원래 있었던 '우리됨'과 '하나됨'을 드러내게 하기 때문이다.



스토리에 의해 우리는 치유되어 온전성(wholeness)에 대한 감각을 부여받는다. 모든 존재는 스토리를 품고 태어난다. 존재 자체가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각자는 삶의 주인공으로서 연기를 하는 대본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삶은 목격자로서 관객이 된다. 그래서 내 삶으로 증언을 하는 무대에로 우리는 모두 초대되었다. 자신은 스토리텔러로서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가는 진실의 척도를 –어떤 진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 감각을- 나타낼 것이다.



스토리텔러로서 그리고 연기자로서 무대에 같이 서 있는 동료들로 하여금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공간을 허용하는가도 물론 중요하다. 어떤 이야기 종류에 귀 기울여 듣게 하는가?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이야기에 목말라 하고 있는가? 이는 개인적인 것이면서 공적인 이슈이다. 이 사회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소중히 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가? 스토리는 그 사회를 평가할 수 있는 눈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단역배우로 처리되며, 누가 관객이고 누가 연기자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어떤 이야기가 중요해지고, 어떤 이야기는 제외되며, 어떤 이야기가 공공영역에 잔존하고, 어떤 이야기는 커피숍이나 안방의 사적 이야기로 밀려나는지, 그리고 어떤 무대 세팅이 설정되고 어떤 것은 가치 없는지를 정렬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스토리를 말하고 또한 스토리를 들으면서 연기자로서 한 가지는 놓치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 모든 스토리는 가슴을 열고 감동을 위한 것이지 논쟁이나 평가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우리는 연기자로 있지만 무대와 배역 그리고 각본이 어떻게 주어지든 간에 그것과 상관없이 본래의 나의 정체성은 그것들과 무관하게 있다는 점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이야기의 무대에서 진지하게 몰입해서 나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거기에서의 성취와 상실, 희망과 좌절, 만남과 이별, 흥분된 스릴과 절망의 나락 모두가 진지한 경험이기는 하지만, 그 진지한 경험의 내용이나 나의 그 어떠한 배역도 연기자에게 주어진 옷과 역할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우리는 삶의 배역에 대한 연기자로 자기에게 맞던지 억지춘향의 연기이든지, 고통스럽든지, 무거워하는 연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던지 간에 그 연기 경험에서 인생의 교훈, 즉 성장과 배움을 위한 ‘진정성의 실’을 뽑아내어 맨몸에 걸치는 옷을 얻기 위해 진지하거나, 여전히 낯설어하거나, 주저하거나, 버거워하거나, 미워하거나, 기억의 짐에 허덕일 수 있다. 혹은 누구는 단역을 혹은 다역을,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충실을 혹은 여러 이야기에 대한 스토리텔러로서 역할이 부여될 수도 있다.



어떤 역할을 하기로 초대받았다고 느끼는지는 각자의 선택에 따르지만 몇 가지를 확실히 하면 이 연기와 스토리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 그 때 주어진 스토리와 배역에 피할 수 없다면 환대하고 그것을 경험하며 누린다. 어떤 실패의 스토리이든 절망의 것이든 그 스토리와 배역에 충실히 경험한다. 경험한다는 것은 느낌, 생각, 감각, 희망, 절망, 필요, 목표 등을 목격자(witness)로서 그것을 살아본다는 뜻이다.



- 그러나 자각해야 하는 것은 연기자로서 스토리, 배역, 무대소품, 관객, 동료연기자는 운명이 아니라 주어진 스토리의 각본(script)에 의한 것임을 아는 것이다. 언제나 필요에 따라 재설치, 다른 각본, 배역에로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다른 이야기와 연기의 선택은 ‘두려움’이나 ‘결핍’에 의해서라기 보다 당신의 내면에서 ‘소중한 그 무엇’의 이끌림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이야기와 연기가 주어지면 관객에 대한 의식으로 거기에 빠져서 몰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상하거나 답답하거나 지루하거나 안 맞는다는 그 어떤 의심이 들 때, 관객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의 내면의 목소리이다. 그리고 스토리라는 대본에 ‘당신의 심장이 뛰는가’를 체크한다. 심장이 뛸 수 있는 순간은 그 스토리에 그 무언가에 당신만이 스토리텔링을 통해 들려줄 수 있는 ‘진실’이 담겨있을 때이다. 당신의 심장이 뛰지 않는다면 다른 스토리를 찾아야 합니다. 당신에게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  모두가 이를테면 콜라텍이나 무도회장에서 자기 이야기라는 의상과 각자의 춤이라는 배역을 하고 있다면, 스토리와 배역을 선택하거나 바꾸거나 잠시 관찰하기 위해 쉬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경이로운 반전을 가져올 수 있다. 항상 그것을 고집하지 않고 내려놓거나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덫을 내려놓고 해방/눈뜸/자유의 순간을 허용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스토리나 연기이든 그것은 본래의 나에 주어진 ‘조건’이지 ‘본질’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미래는 언제나 풍성히 열려있다. 실재는 그렇게 풍성하며 자비로운 호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삶이 무대이고 나는 내 경험을 통해 말해야 할 진실의 조각이 있다면 그래서 당신의 스토리가 가슴을 채우고 있다면, 이제 당신은 증언자로서 초대되고 있다는 신호이다. 스토리를 통해 기여하도록 우리는 삶이라는 무대에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삶이 당신에게 어떤 스토리를 증언하게 하도록 하는지 스피커가 되어 가슴이 울려지는 대로 말할 때이다. 왜냐하면 가슴이 울리는 것은 그대의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공의 것이기 때문이다.



- 한 가지 더, 스토리가 없다면 그것도 괜찮은 것이다. 누군가의 스토리텔링에 연결하여 ‘기꺼이’ 기쁘게 축하해 줄 수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는 다른 누군가의 들어줌으로 인해서 그 목적은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들어주는 인간으로 ‘경청 동반자’로 삶을 살겠다는 자세도 기적을 일으키는 태도가 된다. 진정으로 스토리는 그렇게 온전히 주목하여 들어주는 자를 필요로 한다. 그러한 경청자로 있을 때 불현 듯 자신도 스토리텔러가 어느 새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내 내면, 너의 심장 그리고 우주의 심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면서 저절로 이야기꾼이 되어있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대의 궁핍은 스토리의 궁핍을 나타낸다. ‘그것들’이라는 자료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나’와 ‘그대’의 스토리를 찾는 것은 영혼을 불러내고, 생명을 부여받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스토리의 되찾음은 세상을 구원하는 행위가 된다. 서클에서 그러한 스토리의 회복을 통해 ‘길(Way)’이 찾아진다면 서클의 공간은 그 자체로 해방의 실천을 하는 곳으로 출현한다.  이 해방의 사역자로 우리 각자가 서클진행자로 부름(calling)을 받고 있다는 것은 놀랍고도 진정으로 해볼 만한 연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어떤 스토리를 품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스토리에 대한 갈망으로 살고 있는가? 더 나아가 어떤 스토리에 대해 집중해서 들어주는 경청자로 있는가? 우리의 심장을 촉촉하게 만들고 함께 하고 있는 공간을 빛나게 하는 스토리로 인해 우리는 세상이 무엇에 굶주려 있고 내 영혼이 무엇에 기뻐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발견으로 인해 우리는 길을 다시 걸어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아아, 촉촉하고도 빛나는 스토리가 내 가슴을 후비며 들어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