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2

Webzine 새길이야기 :: 최성무 -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

다석 류영모의 생각과 믿음
Webzine 새길이야기 ::
3호 한국의 종교개혁자들 / 생각하다


2017.11.29 17:15








최성무

다석학회




다석 류영모(1890~1981)의 삶



다석 류영모는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에 두루 능통했던 대석학이자 평생 동안 진리를 좇아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이다. 그는 성경·불경·노자·장자·공자와 맹자를 두루 탐구하였으며 기독교를 줄기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을 세웠다.



류영모는 1910년 20세에 남강 이승훈의 초청을 받아 평안북도 정주에서 2년간 오산학교 교사를 지냈다. 1921년에 조만식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 교장이 돼 1년간 봉직하였다. 그때 함석헌이 졸업반 학생이었다. 1928년부터 종로 YMCA에서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맡아 1963년까지 강의하였다. 51세에 삼각산에서 하늘과 땅과 몸이 하나로 꿰뚫리는 깨달음의 체험을 하였다. 이때부터 하루 한 끼만 먹고 하루를 일생으로 여기며 살았다. 세 끼를 합쳐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이라 하였다. 일생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무명이나 베로 지은 거친 옷을 걸치고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생전에는 함석헌과 김흥호 같은 20세기 한국 기독교를 이끈 지도자들의 스승으로 알려졌다. 1981년 세상을 떠난 후에야 독창적인 종교 사상의 체계를 세운 철학자로서 조명받기 시작했다.



그의 제자 박영호(유일하게 마침보람을 받은 이)의 많은 저서에 의해 그의 사상이 알려지게 되었다. 2005년에 ‘다석학회’가 만들어졌으며 2008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세계철학자대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독창적인 사상가로 소개되었다. 2016년 ‘다석 아카데미’가 설립되어 여의도 ‘성천문화재단’에서 매주 ‘다석사상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35년 동안 이어진 연경반 강의에서 다석은 스스로 지은 시조와 한시뿐만 아니라, 유교경전, 성경, 불경의 경구를 직접 모조지에 써서 칠판에 붙여놓고 강의하였다. 다석의 강의는 예수와 붓다와 공자, 삶과 죽음, 절대세계와 상대세계, 민주주의 인권을 넘나들었다. 방대한 지식과 독창적인 생각이 어우러지는 지혜의 향연이었다. 영감이 샘솟아 신명이 나면 자작한 시조나 한시에 가락을 붙여서 노래처럼 읊었고 때로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도 하였다.



류영모의 생각



오늘날 이 사회는 도덕, 윤리의식의 파탄이라 할 수 있는 아노미(Anomie) 증상을 보인다. 이는 한마디로 진리인 하나님의 성령 결핍증이다. 이 나라는 여러 종교가 번창한 종교의 나라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성령결핍증이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나라 종교집단은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니 진리의 성령(불성)과는 거리가 멀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닭이 울면 일어나 알뜰히도 착한 일을 하면 순(舜) 같은 사람들이고, 닭 울면 일어나 살뜰히도 잇속을 챙기면 도적 같은 사람들이다.”(「맹자」 진심 편)라고 하였다. 착한 일을 하는 순(舜) 같은 이는 드물고 잇속을 챙기는 도적 같은 이들만 많다.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은 예수는 팔레스타인 유혹의 돌산이 있는 광야에서 40일 동안이나 금식하며 기도를 하였다. 그때 예수는 밥을 먹어야 사는 요셉과 마리가 낳은 몸의 나가 참나(眞我)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성령)으로 사는 얼의 나가 참나인 것을 깨달았다. 얼의 나는 하나님의 생명이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자아(自我)의 의식(意識)을 점령하여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자율성이다. 그래서 예수가 이르기를 “물처럼 붓는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몸으로 난 것은 몸이요 얼로 난 것은 얼이니 내가 네게 얼로 나야 한다는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요한 3:5~7)고 하였다. 이것은 석가가 부다가야에서 진리를 깨달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류영모(柳永模)도 말하기를 “나도 예수, 석가가 마음으로 경험한 것을 체험하였다.”고 하였다. 류영모 자신도 얼나로 솟났다는 말이다. 우리도 얼나로 거듭난 사람의 언행을 보고 들어서 얼나로 거듭나야 한다.



사람을 신격화해서 하나님처럼 받들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얼과 참으로 예배드릴 분은 하나님뿐이다. 신비한 일 가운데 신비한 것은 이 우주 속에 내가 있다는 점이다. 우주가 있는 것이지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주와 나는 하나이다. 우주의 탄생이 나의 탄생이다. 나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우주의 죽음이다. 우주의 탄생에서 나의 탄생이 이어졌듯이 나의 죽음이 우주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의 죽음이 뇌관의 폭발이 되어 남산 외인 아파트가 허물어지듯 우주가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때 우주가 가리고 있던 참나의 모습이 문득 드러났다. 문득 깨달음(頓悟)이다. 그리하여 비롯도 없고 마침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한 영생의 존재가 나타났다.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신령(神靈)의 존재가 밝았다. 이 절대존재가 참나인 하나님이시다. 예수가 말하기를 “나타내려 하지 않으면서 숨은 것이 없고 드러내려 하지 않으면서 감춘 것이 없다.”(마가 4:22)고 하였다. 이것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류영모가 말하기를 “이 우주는 거짓이다. 이 생명은 가짜다. 이것은 있다가 없어지기 때문에 거짓이요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영원한 참생명을 찾아야 한다. 참나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거짓 존재는 없어져야 하고 가짜 생명은 죽어야 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죽을 몸뚱이를 위해서 애를 쓴다. 그리하여 이제는 평균수명이 여든 한 살로 늘었다. 일이십년 더 살게 된 것이 큰 복이라도 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늙고 병든 몸으로 가족과 사회의 푸대접을 받으면서 서럽게 사는 것이 어찌 복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몸뚱이를 위해 바치는 정성을 영원한 생명을 위해 바쳐야 한다. 예수는 영원한 생명인 얼의 나를 위해 맘과 뜻과 힘을 다하라고 하였다. 우리가 류영모에게 배우고자 하는 것은 멸망의 몸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영생할 얼나를 위해 사는 것이다. 얼나를 위해 살면 멸망의 몸나도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영광을 입고 보람을 얻게 된다.



우주와 나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를 나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류가 70억에 이르러도 주관으로 나뿐이다. 이 나란 누구인가? 나만은 나를 알아야 할 터인데 아는 것 같아도 사실은 모른다. 기껏 안다는 것이 어느 나라 어느 곳에 사는 누구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나를 알았다고 할 수 없다. 나란 우주적 소산(所産)이다. 이 우주가 없으면 나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를 낳은 우주를 모르고는 나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이 우주의 주체인 실재(實在)와 나와의 관계가 밝혀져야 나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생각을 학문화 시킨 것을 우리는 종교라 한다. 종교의 경전 맨 처음에 반드시 우주론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종교란 우리들 각자의 의식에 눈뜨는 장(場)인 우주현상의 배후 내지 그것을 초월한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뜻한다.”(아놀드 토인비, 「회고록」)



“이성(理性)은 사람으로 하여금 우주와 사람과의 관계를 정립하도록 하는 능력이다. 이제 모든 사람의 우주에 대한 관계는 동일하기에 이 관계를 설정하는 종교는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한다. 사람들이 하나 되는 것은 사람들에게 다다를 수 있는 육체 정신의 최고의 행복을 준다. 종교란 인간과 무한(無限)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톨스토이 「종교론」) 그 우주론이 얕고 깊고는 둘째 문제이다. 우주와 나와의 관계를 정립하려는 우주인으로서의 자각이 중요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을 펴셨으며 그가 목소리로 말하신 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사람마다 우둔하고 무식하도다.”(예레미야 10:12~13)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우주인의 관념을 가진다면 주소가 어디에 있겠는가. 어디에 사느냐고 물으면 우주에 산다고 하면 그뿐이다. 도대체 어디에 사느냐고 묻는 것이 우스운 것이다. 우주공간에 태어난 것으로 알면 어디에서도 잘 수 있고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있다. 적어도 태극천하(太極天下) 그 어디에 갖다놓아도 ‘나는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우주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 우주를 삼킬 듯이 돌아다녀야지 집 없다 걱정, 방 없다 걱정, 병 난다 걱정, 자리 없다 걱정, 그저 걱정하다가 판을 끝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우주여행가가 되어 훨훨 돌아다닌다고 꼭 우주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의 불꽃이 문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문제이다. 어떤 이(칸트)는 일생동안 고향에서 사십 리 밖을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생각의 불꽃이 우주의 주인이 되면 그것으로써 우주인으로 사는 것이 된다.”(류영모, 「다석 어록」)



그런데 오늘의 종교는 어떤가. 기독교·불교·유교 할 것 없이 모든 종교가 우주와 나와의 관계를 알아보려고도 않는다. 천문학자와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 같은 우주물리학자들에게만 우주를 맡기려 한다. 그들은 우주의 일부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데 애쓰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우주 전체와 나와의 관계를 정립할 생각조차 못한다. 우주 전체와 나와의 올바른 관계 정립을 밝힌 이가 예수·석가·공자·노자 같은 성현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스승들의 가르침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다. 종교 본연의 의미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엉뚱한 복(福) 타령만 한다. 화복(禍福)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복을 사고팔기에 여념이 없다.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화에는 복이 붙어 있고 복에 화가 엎드려 있다(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노자」 58장)고 하였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아무런 신앙도 없이 살고 있다. 일부 교양 있고 부유한 소수인은 교회의 암시(暗示)에서 풀려나서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대개의 경우 모든 신앙을 어리석은 짓으로 보거나 또는 대중 위에서 권세를 휘두르는데 유리한 무기로 본다. 이와는 달리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신앙하는 소수를 제외하면 거의가 교회의 최면에 걸려 신앙의 형태로 암시되는 것을 맹종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에게 우주에 있어서 사람의 좌표를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더욱 아리송하게 한다. 이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무엇도 믿지 않으면서 믿는 척하고 있는 소수와 교회의 최면술에 걸려 있는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두 부류의 상호관계로 오늘의 소위 종교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다.”(톨스토이, 「종교론」)



우주의 실재(實在)와 나와의 관계를 밝히는데 있어서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밖으로 멀리멀리 나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안으로 깊이깊이 들어가는 길이다. 밖 길은 태양계를 벗어나, 은하우주를 벗어나 무한우주로 광속(光速)보다 몇 만 배 더 빠른 심속(心速)으로 우주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태양계가 속한 은하우주에만도 1천억 개 이상의 별들이 구름덩어리를 이루고 있어 성운(星雲)이라 한다. 은하우주와 같은 우주가 1천억 개 이상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그러므로 별의 수는 그야말로 천문학적이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 대우주의 태극계에는 약 1백50억 년 전에 우주란(宇宙卵)이란 덩어리(樸)가 터져서 우주 개벽이 이루어졌다고 짐작하고 있다. 이를 대폭발(Big Bang)이라 이른다. 노자의 「도덕경」에 등걸이 흩어져서 그릇이 되었다(樸散則爲器)고 하였는데 박산위성(樸散爲星)이 된 것이다. 우주란이란 박(樸)이 터져서 별이 되는 그 광경을 상상해보라. 불꽃놀이처럼 별구름꽃이 화려하고 장엄하게 펼쳐졌을 것이다. 이 별 불꽃놀이에 비하면 사람들이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란 소꿉장난도 못 된다. 대우주의 별구름 불꽃놀이는 1백50억 년을 이어져오고 있다. 블랙 홀(black hole)이니 화이트 홀(white hole)이니 하는 것이 바로 이 불꽃놀이의 연속이요 준비다. 이것이 불경에서 말하는 수많은 꽃으로 장엄하다는 화엄(華嚴)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성운단(星雲團)의 대우주가 장엄하지만 그 성운단들을 포용하는 허공(虛空)이야말로 무한광대(無限廣大)의 신비가 아니겠는가!



밖 길로 가서 이르는 곳은 무한의 허공이 마지막이다. 불경에서 허공을, 노장(老莊)에서 무(無)를 그렇게 중요하게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의 근원은 허공이요 무(無)이기 때문이다. 공(空)과 무(無)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다. 류영모는 허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아주 빈 절대공(絶對空)을 사모한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야말로 참이 될 수 있다. 무서운 것은 허공이다. 이 허공이 참이다. 이것이 하느님이다. 허공 없이 진실이고 실존이고 어디 있는가. 우주가 허공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빈탕한데, 허공이다. 백간짜리 집이라도 고루고루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허공인 하느님아버지의 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류영모, 「다석어록」)또한 타고르는 「인간의 종교」에서 “진리는 형이상학에 의해 탐구된 무한이다.”라고 하였다.



이제 나란 무엇인가를 살필 수 있다. 무한허공에서는 먼지 한 알만한 은하우주이고 은하우주에서는 먼지 한 알만한 지구이고 지구에서는 먼지 한 알만한 것이 나이다. 그러니 어떻게 되는가. 나란 있다고 하기가 쑥스럽고 부끄럽다. 차라리 없다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나란 위이무(位而無)이다. 이게 나다.



“땅 위의 인간이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이란 벌레가 이 우주 안에 없다고 해서 어떻다는 것인가. 지구도 달과 같이 생물이 없이 빤빤하게 있다고 해서 무슨 서운한 것이 있는가. 우주조차도 마침내 다 타버린다는 사상이 있다. 우리가 옷에 묻어 있는 먼지 하나를 털어버린다고 해서 누가 눈 하나 깜짝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지구에서 인류를 털어버린다고 해서 무엇이 서운하겠는가. 똥벌레 같은 인류지만 생각함으로써 사상을 내놓아 여느 동물과 다르다고 하는데 이 사상(思想)이 문제다.”(류영모, 「다석어록」)



석가·노자·장자·류영모는 무극(無極)인 허공에서 우주의 실상(實相)을 보았다. 모든 유(有)는 허상(虛像)에 지나지 않는다. 불생불멸의 허공이 사람의 본성이라면 생멸(生滅)의 유물(有物)은 사람의 가성(假性)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有)를 낳는 무(無)를 그리며 무와 하나 되려고 하여야 한다.



다음에는 안길이 있다. 태극우주의 궁극적인 실재(實在)를 찾기 위해서는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예수도 “하늘나라가 너희 속에 있다.”(누가 17:21)고 말하였다. 류영모는 말하기를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자기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지성(至誠)을 다하고 정성(精誠)을 다하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서 자기의 속알(德)이 밝아지고 자기의 정신이 깨면 아무리 캄캄한 밤중 같은 세상을 걸어갈지라도 길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류영모, 「다석어록」)



맘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나를 생각한다는 말이다. 나로는 우선 몸이 있다. 이 몸이 참나인가. “몸사람으로는 호기심과 살맛(肉味)을 찾아다니는 짐승이다. 그래서 몸의 근본은 악과 친하려고 한다. 우리의 몸은 어찌 보면 원수요 감옥이다. 그런데 몸이 성하지 않으면 이중(二重)으로 갇힌다. 우리의 혈육(血肉)이란 이런 것이다. 이건 짐승이다. 몸을 쓰고 있는 한은 별수 없이 이런 것이다. 이 몸은 며칠 전에 어쩌다가 부모님의 정혈(精血)로 내가 시작되었으며 실없이 시작했으니 조만간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으로 사람이란 우스운 것이다. 잘 먹고 빨래를 잘 내놓는다. 그러면 제가 잘 살거니 한다. 이게 다 꿈지럭거리며 벌레노릇 하는 거다. 나는 몸의 일은 부정이다. 모든 것을 몸을 위해 일하다가 죽어 그만두게 된다면 정말 서운한 일일 거다. 나는 이를 부정한다. 그거 남 먹는 것 남 입는 것에 빠지지 않겠다는 게 살살이(肉體生活)다. 요새 사람들은 모두 육체의 건강, 수명의 연장에만 신경을 쓴다.”(류영모, 「다석어록」) 이제 내 살(肉)을 뚫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다음에 만나는 것이 맘이다. 맘이 맘을 심판한다. 이것이 반성이다.



“맘은 덧없는 거다. 심무상(心無常)이다. 나는 예수 믿소 하고는 그 다음에 하는 말이 흔히 ‘맘 하나만 잘 쓰면 되지’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맘이 덧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도 하지만 맘이 모든 죄악의 괴수라고도 했다. ‘네가 맘의 스승이 되어야지 맘을 너의 스승으로 하지 말라’(「열반경」)고 하였다. 맘에 따라가서는 안 된다. 우리 맘속에는 더러운 게 많이 들어 있다. 그런데 우리 속을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했다. 이것은 모순 중의 모순이다. 이게 우리의 착각인 것 같다. 하느님의 성전은 저 위의 나라인데 이 속에 반영(反映)되어서 그렇지 우리 속에 정말 있는 게 아닐 것이다. 반영을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다. 맘은 생사(生死)의 제한을 받는다.”(류영모, 「다석어록」)



몸의 나도 참나가 아니고 맘의 나도 참나가 아니다. 몸과 맘의 나가 참나가 아니라고 하는 나만 남는다. 그것은 하느님이 보내시는 성령 곧 얼나다. “사람은 몸으로는 분명히 짐승인데 짐승의 생각을 하지 않고 거룩한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 얼사람으로 솟나는 우리의 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란 태어나서 다른 것을 직접·간접으로 잡아먹고 살지만 얼이 있어 맘속을 밝혀 위로 한없이 솟아나려 함이 인생길이다.”(류영모, 「다석어록」) 이것이 맘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예수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 7:13~14)라고 하였다. 제나(自我, ego)의 종족보존으로 사는 것은 넓은 길로 가는 것이고 얼나의 진리보존으로 사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맘속으로 들어가서 궁극으로 만난 것은 위로부터 온 성령의 나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 보았다. 보내신 그리스도란 영원한 생명이다. 우리에게 산소가 공급되듯이 성령이 공급되는 것이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줄곧 오는 영원한 생명이다.”(류영모, 「다석어록」) 성령의 나로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이는 아버지시고 성령의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우주의 실재와 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안으로 들어가는 데는 반드시 몸과 맘으로 된 제나가 참나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제나가 참나거니 하고 있으면 참나인 성령은 만나지 못한다. 제나가 거짓나임을 알 때 성령이 온다. 이를 회개(悔改)라 회심(回心)이라 견성(見性)이라 자각(自覺)이라 한다. 그러면 이제까지 제나가 지닌 탐진치(貪瞋痴)에 좇아 살던 제나가 나라는 주권을 성령인 얼나에게 바친다. 그러면 얼나가 제나를 다스리며 부리게 된다. “종교는 우리가 깨달은 진리에 동물적인 수성(獸性)을 종속시킴으로써 갈등을 조화시키는 데 그 생명이 있다.”(타고르, 「인간의 종교」) “동물적 개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인간이 생존하는 모든 조건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며 또 불필요하기도 하다. 동물적 개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 개체의 행복을 부정하고 동물적 개체를 인생으로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하여 동물적 개체를 이성적 의식에 종속시켜야 한다.”(톨스토이, 「인생론」)



밖으로는 허공이라는 절대, 안으로는 성령이란 절대가 이 우주의 실재다. 허공과 성령은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절대다. 허공처럼 없이 계시는 성령의 님이 하느님이시다. 사람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닫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이는 사람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삶의 절대목적이다. 이것을 못하면 실패의 삶이다. 예수·석가·공자·노자의 일치된 생각이다. 불생불멸의 영원한 생명을 예수는 영의 나, 석가는 법의 나, 공자는 덕의 나, 노자는 도(道)의 나라고 하였다.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몸으로 난 것은 몸이요 얼로 난 것은 얼이니 내가 네게 위로부터 나야 한다는 말을 기이하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한 3:5~8)



구경(究竟)에서는 예수·석가·공자·노자의 생각이 일치하기 때문에 종교 간에 갈등이나 대립할 까닭이 없다. 종교 사이에 갈등하고 대립한다면 아직 그들이 받드는 스승이 가르친 구경의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어떠한 종교에 속하느냐가 아니라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하겠다. 자기의 종교와 신앙만이 옳다고 하는 것은 유치하다. 인간성이 다양한 것을 찬양하고 신앙의 형태가 다양한 것을 찬미하고 싶다. 나는 자기들만의 종교와 신앙이 옳다고 하는 특정 종교의 교도가 아닌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어떤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더 고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정신의 고귀성과 자유가 결여된 교회가 자만에 빠져서 다른 종교와 교회를 무시하는 것에 실망한다.”(헤르만 헤세, 「종교에 대하여」)



일원다교(一元多敎)



나는 종교근본주의자도 다원주의(多元主義)자도 아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범신론적 유일신을 믿는 평범한 신앙인이다. 범신론이라 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에는 그 분의 영(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고 유일신이란 오직 한분 계시고 그 분을 믿는 사상을 유일신관이라 한다.



일원다교란 한분 하나님께 가는 길이 한길만이 아니라는 뜻이고 여러 길(多敎)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 길들은 기독교, 불교, 유교 등 어느 종교로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얼마 전 미국 시카고에서 세계종교학자들이 모여 종교 대회를 하였는데 거기서 나온 결론은 모든 종교의 내용과 성격이 약 80%가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랑과 평화를 강조하는 종교가 역사를 살펴보면 80%이상이 종교로 인한 전쟁이었고 제일 비참한 전쟁이 종교전쟁이었던 것이다.(십자군 전쟁, 중동전쟁 등)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기독교 속에는 예수의 사상이 없고 불교에는 석가의 명상이 사라지고 유교는 공자의 하늘 가르침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각 종교의 공통점을 살펴보자.



첫째, 호칭만 다르지 한분의 절대자가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만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열반(니르바나)이 있다. 극락세계나 하늘나라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유교의 천제(天帝)도 하나님의 다른 이름이다. “하늘의 덕이 나를 낳았다.”라고 한 공자의 말은 하늘의 성령이 나를(德, 참나, 얼나)낳았다는 말이다.



둘째, 기독교의 성령, 불교의 불성(다르마), 유교의 덕성, 노자의 도까지도 글자만 다를 뿐 다 같은 뜻의 동의어다.



셋째, 인간 죄의 근원을 예수는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누가 12:15)” “화내지 말라(마태5:22)” “음욕을 품지 말라”(마태 5:27)라고 했고 석가도 열반경에 보면 삼독(三毒)이라 하여 탐진치 곧 탐욕(貪欲) 진에(瞋恚) 치정(痴情)을 끊어야 한다고 설법하였다. 공자도 삼계(三戒)라 하여 여색을 경계하고 얻음을 경계하라고 하였다. 모두가 같은 내용이다. 예수 석가 공자의 내용이 일치한다. 그 혜안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밖에도 많이 있다. 진리는 꿰뚫어보아야지 관념으로는 찾을 수 없다. 다른 데로 같음을 발견하는 지혜가 필요할 때다. 조화란 모든 것이 섞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독특함을 간직한 채 서로 어울리는 것이다. 나와 다르기에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내가 뚜렷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마치 빛은 어둠이 있기에 그 빛이 뚜렷하게 빛나는 것처럼,.. 예수가 말한 것처럼 “세상 끝 날에는 하늘의 영(성령)을 만인에게 부어줄 것이다.” 여기서 세상 끝이란 지구가 끝나는 종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자아(自我, ego)의 세계가 성령을 받은 참나(얼나, 성령의 나)로 인하여 종말을 고하고 하늘의 영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말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예수의 주기도문의 “하늘나라를 이 땅에 저희들이 나타나 뵈오리다.” 이것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의 소명이 아니겠는가.



다(多) ᄋᆞᆯ(All) 사상



‘ · ’자는 언제부터인가 사라졌지만 하늘을 뜻한다. 우리 말 한글의 원초 모음인 천( · ) 지(ㅡ) 인(ㅣ)에서 하늘을 뜻한다. 발음으로 ‘ · ’은 상황에 따라 ‘어’, ‘오’, ‘우’로 소리를 낸다. 그래서 다ᄋᆞᆯ은 ‘다얼’, ‘다올’, ‘다울’의 세 가지 뜻을 지녔다.



먼저 ‘다얼’에 대해서 말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에는 그분의 영(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에는 그분의 얼(영)이 있다고 본다. 우리가 자연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내가 생각하는 원수에게도 하나님의 영(얼)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얼을 강조했다. ‘한 민족의 얼’이라든가, 어른(얼이 온 분), 얼래(신기할 때), 얼빠진 놈, 얼이 섞인 놈 등등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요즘 농가에서 동물이나 식물에게 음악을 듣게 해서 키워 잘 자라게 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추상적인 하나님의 믿음에서 실제적인 믿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막연히 사랑하는 것에서 확실한 사랑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제자들에게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하신 뜻을 살펴야 할 것이다.



들에 핀 이름 없는 꽃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물며 사람에게서야,...... 그래서“이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메말라가는 풀에게 물 한 컵 주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내가 지금 만나는 사람들에게 미소 짓는 것, 이것이 말로 외치는 사랑보다 더 크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세계를 창조했다고 하면서 지으신 작품은 미워하고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위선이다.



다음은 ‘다올(옳)’이다. 다 옳다. 옳고 틀림은 주관적인 경우가 많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상대방에서 보면 틀릴 수도 있다. 또 상황에 따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옳고 그름이 바뀌기도 한다. 성경에서도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라 하였다.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영원한 옳음(참, 진리)은 없다. 때문에 그냥 옳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아량이 필요하다. 분쟁과 싸움을 방지하는 지혜이다. 여기에서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싹튼다.



끝으로 ‘다울’(우리, 울타리)이다. ‘울’은 우리라는 뜻과 한 울타리라는 뜻이다. 나 혼자는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 우리 속에 나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대기권을 울타리로 한 지구마을의 공동체이다. 지구가 사라지면 모두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지구어머니 뱃속에 있는70억의 쌍둥이 형제, 자매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와(땅에서 마치고) 하늘로 가는 것이 죽음이라지만 하늘에서 보면 탄생일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 가면 지구 어머니 형제, 자매로 만날 것이다. 구약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이삭의 아들 야곱이지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아버지, 야곱의 하나님 아버지라고 했지 야곱의 하나님 할아버지라 하지 아니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아버지로 한 형제, 자매임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어려움, 고통, 즐거움을 같이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