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2

연찬문화연구소 | 인(仁)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 Daum 카페

연찬문화연구소 | 인(仁)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 Daum 카페





연찬문화연구소 | 인(仁)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 Daum 카페







인(仁)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자료실

남곡|조회 105|추천 0|2019.10.22. 06:44





인(仁)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고금합작(古今合作)의 길







긴 꼬리를 지닌 혜성이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듯, 인류라고 하는 동선(動線)이 긴 생명체가 대우주의 무대에서 모든 신(神)들의 주목을 받으며 진화의 장정(長征)을 연출하고 있다.



동선이 길다고 하는 것은 원시에서 현대의 이르는 모든 문명의 단계들이 부침(浮沈)과 생장소멸을 거듭하면서도 같은 시대 안에 아직도 공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학기술의 엄청난 발전이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인류의 미래에 획기적 전망을 갖게 하는 반면, 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전쟁과 테러에 의한 살륙(殺戮), 폭정, 기아, 억압, 수탈이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계속되고 있고, 요즘 들어 더욱 심각해진 핵전쟁의 위협과 지구환경의 악화는 인류 존속 자체의 위기로 되고 있는 등, 이 모든 것들이 동시대에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혹자는 말세나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혹자는 이 혼란과 격변의 시기를 인류가 질적 도약을 위해 나아가는 거대한 변혁의 장(場), 거대한 과도기로 보기도 한다. 나는 후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







독일 철학자 야스페르스(Karl Jarspers)는 2500여년 전 현자들이 동서양의 여기저기서 나타난 놀라운 시대를 이른바 ‘축(軸)의 시대(Axial age)’라고 불렀다.



이 시기를 한 단계 높은 인간 정신이 출현한 시기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소수의 선각자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것이 보편화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2500여년이 지난 지금 마침내 인류는 인공지능을 비롯한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놀라운 시대 앞에 서 있다.



이제 보편적 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인간의 행위능력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선각자의 정신이 인류의 보편적 현실과 만나는 시대가 바로 21세기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고금합작(古今合作)의 시대다.



그 선각자의 한 사람이 공자(孔子)이고, 그의 사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책이 논어(論語)다.



공자 사상의 핵심으로 알려진 인(仁)을 중심으로 고금합작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갈 새로운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5회에 걸친 강좌를 마치려고 한다.







인(仁)은 모든 존재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우주 자연계에 가장 신비로운 것은 생명이다.



그 중에서도 ‘인간’이다.



공자의 인(仁)은 바로 이 인간의 생명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관념의 정상화>와 <구체적 실천>을 말한다.



그 동안 가장 오해된 부분이 바로 이 분야 같다.



규범이나 예의범절 제도 등은 이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공자의 시대와 사회에서 제시한 규범 예절 윤리 질서 등이 굳어져서 그것이 공자 사상의 핵심처럼 인식된 것이다.



공자 사상의 알맹이를 싸고 있던 외피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을 알맹이로 잘 못 인식되어 온 것이다.



공자의 반대자들은 물론이지만,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수 없이 왜곡되어 왔고, 특히 권력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면서 심각한 폐해를 나타내기도 했다.



비록 부족하고 나 스스로 공자를 왜곡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무릅쓰고, 현대 인류의 지성의 빛에 비추어서 살펴보려고 한다.







① 안연이 인에 대하여 묻자 공자 말하기를, “극기복례(克己復禮)가 곧 인이니, 하루 극기복례하면 온 천하가 다 인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인을 이룸이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니, 어찌 남에게 연유하는 것이겠는가.”



안연이 그 구체적 조목을 청하자 공자 말하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안연 말하기를,“제가 비록 불민하나 그 말씀대로 실천하겠습니다.”



顔淵 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 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 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







공자의 대표적 사상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아마 초등학생도 인(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인(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공자 스스로도 인(仁)을 정의하듯이 이야기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의 문답을 통해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제자 안회와의 문답이 논어 12편에 나오는데 가장 대표적인 설명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 공자는 ‘극기복례가 곧 인(克己復禮爲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은 많이 귀에 익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 참뜻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극기훈련’을 많이들 한다고 하는데, 잘 참지 못하는 요즘 세대에게는 ‘참는 훈련’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절대빈곤이나 독재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싫어도 참아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가 진척되다 보니 높아진 자유도(自由度)에 반비례해서 참아내는 힘이 너무 없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자식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참아내라’는 충고를 많이 하시는데 젊은이들의 참는 힘이 적은 것도 있지만 그 분들의 관념 속에는 ‘참는다’는 것이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싫다고 생각하는 것도 ‘참고 이겨내는 것’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극기’(克己)를 그저 ‘참고 이겨내는 것’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공자가 말하는 진정한 극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극기는 절사(絶四)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의 네 가지 끊음을 통해 극기란 결국 ‘무아집’으로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참아야만 하는’ 부자유의 세계가 아니라 ‘참을 것이 없는’ 자유의 세계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극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복례(復禮)도 극기와 따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복례를 ‘사람 사이에 지켜야할 바람직한 행위규범에 따라야 한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하고 싶지 않아도 참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행동거지를 사회규범(禮)에 맞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부자유가 있을 수 있다. 즐겁지 않은 것이다.



공자가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예를 즐긴다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가 즐거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딱딱한 규범의 세계가 아니라 ‘아집’을 넘어설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사이좋음’인 것이다. 즉, 극기복례는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지향하는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아집을 넘어선다는 것은 사람이나 일에 대해서 참는 것(忍)으로부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恕)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분노와 증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높아진 자유도에 비추어 볼 때 공자의 ‘극기복례’는 현대에 와서 더욱 인간의 목표로 삼을만한 것이다.







일일극기복례(一日克己復禮) 천하귀인언(天下歸仁焉)이라는 말은 깊은 감동을 준다.



분노와 미움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克己)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의를 바로잡아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復禮). 하루라도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증오와 분노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세상이 진보하는 길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선구자인 것이다.



극기(克己) 즉 아집을 넘어서는 인격의 성숙과 복례(復禮) 즉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 하나인 것이다.







예가 아니면 보지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말도 잘못 읽으면 비례(非禮)에 대해서 오불관하는 식의 소극적 은둔적 사고방식이나 금기(禁忌)나 계율(戒律)로 읽기 쉽지만, 그런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기로부터 비례(非禮)를 범하지 않는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과제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사회의 부조리나 부정을 시정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금기(禁忌)나 계율(戒律)처럼 받아들이기 쉽다. 논어 전체를 관통하는 공자의 태도를 볼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공자의 진의(眞意)를 왜곡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우선 ‘예(禮)’는 밖으로 나타난 질서나 규범이지만, 공자에게는 항상 내면의 마음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으로 흔히 말하는 허례(虛禮)를 가장 경계하고 있다.







극기복례는 금기나 계율의 세계가 아니라 자율과 자각의 세계다. 다만 그 것을 위한 수행과정으로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을 말하고 있다고 나에게는 보인다.







진정한 생명력의 신장이야말로 인(仁)의 핵심 사상이며, 금기나 계율 같은 규범을 확대하는 사회는 결코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힘든 노동에서 해방될 4차 산업혁명의 사회를 생각할 때, 지금의 인간의 욕망을 생각하면 어떤 세상으로 될 것인가?



공자의 말들이 더 급박한 현실로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② 공자 말하기를, “제자는 집에 들어가면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손하며, 삼가고 신의로우며, 널리 대중을 사랑하되, 인(仁)을 가까이할 것이니, 그러고도 남음이 있으면 글을 배우라”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而學文(1-6)







③ 공자 말하기를, “사람이 불인(不仁)하면 예(禮)는 무엇을 할 것이며, 사람이 불인(不仁)하면 악(樂)은 무엇을 할 것인가?”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3-3)







허례 허식을 비판할 때 유교나 공자를 떠올리기 쉽지만 공자께서는 그 해악을 몇 차례 씩 거듭 경계하고 있다. 공자가 중히 여긴 예와 악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외부에 나타난 것이다. 외부로 나타난 형식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본래 성정인 인(仁)이며 측은지심(惻隱之心)인 것이다. 요즘 경조사에 임하는 실태나 혼수(婚需) 준비, 장묘((葬墓), 과시적 소비를 볼 때 더욱 다가오는 바가 있다.











④ 공자 말씀하시기를, “마을의 풍속이 인(仁)해야 사람의 마음도 아름답게 되는 것이니, 인(仁)한 곳을 택하여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 있으리요!”

子曰 里仁 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4-1)











밝은 꿈을 가진 사람들 특히 청년들을 응원한다.





이 밝음은 돈ㆍ출세 등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것과는 질이 다른 밝음이다.

즐거운 일터, 사이좋은 이웃, 자연친화적 삶, 함께 하는 지적ㆍ예술적 활동 등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꿈이다.



객관적인 물질적 수준이나 제도는 이런 노력을 현실화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새로운 사회를 설계하는 운동이 넓혀져 가야한다.



이것은 범인류적인 시대의 요구다.







도시에서도 가능하지만, 농촌지역에서 더 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요즘 이야기되는 6차산업과 협동조합의 결합 같은 것도 생각해봄직하다.





이 새로운 사회운동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준비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된다.



이 준비에는 인문적 자각이 필수적이다.



공자를 제대로 살리는 것은 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서 새로운 유형의 당당한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사이좋고 협동하며 즐거운 삶으로 전환하는 지혜를 서로 키워가는 길에 인문운동가로서 미력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 나의 꿈이기도 하다.





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불인(不仁)한 자는 곤궁한 곳에 오래 처하지 못하고 즐거운 곳에도 길게 처하지 못하지만, 인자(仁者)는 인에 편안해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인을 이롭게 여긴다.



子曰 不仁者 不可爲久處約 不可以長處樂 仁者 安仁 知者 利仁 (4-2)







⑥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인자(仁者)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다”

子曰 惟仁者 能好人 能惡人 (4-3)







⑦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인에 뜻을 둔다면 미워함(惡)이 없다”

子曰 苟志於仁矣 無惡也 (4-4)







인자(仁者)는 어떤 사람일까.

불인(不仁)한 자는 곤궁한 곳에도 오래 처하지 못하지만 즐거운 곳에도 오래 처하지 못한다는 말씀은 깊이 새겨들을 만하다. 그는 어떤 경우든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즐거울 때 조차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부족감을 느끼고 그 즐거움이 사라지지 않을까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다. 인자(仁者)와 지자(知者)를 구분한 것도 사람의 심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느끼게 한다. 인(仁)의 이로움을 아는 것만 해도 좋지만 인(仁) 속에서 편안함을 얻는 것은 더 나아가는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데서부터 몸으로 체득(體得)하는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성숙의 목표가 아닐까.

오직 인자(仁者)만이 호오(好惡)를 능히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말씀일까.

일반적으로 보통의 사람들(小人)은 자기 중심으로 好惡를 선택한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손해가 되면 미워한다.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仁者만이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다.

그 불인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지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4장의 無惡也를 보통 악한 것이 없다고 읽고 해석하는 것 같다. 그러나 3장과 이어서 읽어본다면 惡을 오(미워함)라고 읽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오직 인자만이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더 나아가 ‘아니 진실로 인자라면 미워함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⑧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와 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나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빈과 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나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도 피하지 말아야 한다. 군자가 인을 버린다면 어떻게 이름을 이룰 수 있으리요.

군자는 밥 먹는 동안이라도 인을 어기는 일이 없는 것이니 황급한 때에도 반드시 그것을 지키고 위급한 때에도 반드시 그것을 지켜야 한다"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 違仁 造次 必於是 顚沛 必於是(4-5)











부와 귀를 좋아하고 빈과 천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따라서 일부러 부귀를 멀리하거나 빈천을 선택하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보통의 인간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부귀보다도 더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과정의 정당성이다. 그것을 공자께서는 도(道)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정당하게 얻은 부귀가 아니면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결국은 불행의 원인으로 된다. 이것은 그 동안의 수 많은 개인과 집단의 삶 속에서 예외 없이 증명되어 왔다.

도(道)는 개개인의 덕목일 뿐 아니라 집단(사회)의 덕목이기도 하다. 불의한 사회(도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일수록 과정의 정당성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조금만 길게 보면 한 사람의 생애 안에서 또는 그 자손의 삶 속에서 반드시 증명된다. 항구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행복은 개인과 사회가 도(道)에 부합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지자(知者)이고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인자(仁者)인 것이다.

사람으로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모두가 부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 온 것이 인간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선진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같은 지금의 제도도 이러한 역사의 산물로 나타났고 또 끊임없이 변화해 갈 것이다.

빈과 천이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도 피하지 말아야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운명이나 팔자로 알고 체념하며 받아들이라는 말씀은 아니라고 보고 싶다.

빈과 천에서 벗어나 행복을 추구하는 그 과정에서 무리를 범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이 아닐까.

요즘 말로 하면 개인의 불행이 사회적 모순에 기인한다고 보여질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에의 길일까. 그 동안의 사회 변혁과정을 비롯한 수 많은 개인사 속에서 나타난 현상들을 바탕으로 검토해 갈 테마라고 생각되었다.



인(仁)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또 인(仁)의 실현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밥 먹는 동안이라도 인을 어기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추상적인 목표나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삶 속에 녹아드는 것이 진짜인 것이다.

그렇게 될 때라야 황급하거나 위급한 때라도 인(仁)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장을 읽으면서 입으로는 늘 도(道)나 인(仁)을 이야기하다가도 막상 다급하거나 위기에 처할 때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데 급급한 우리의 실태를 보는 것 같다.











<대화>











- 착하게 살아도 가난을 면할 수 없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장은 가혹한 말씀이 아닌가요. 심하게 말하면 가난이 사회적 모순 때문일 경우에도 그것을 감내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좀 다른 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빈천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너무 당연하지만 그 방법이 도(道)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만약 어떤 사람이 체념한 나머지 자포자기의 삶을 살거나 자주적 인간으로서 긍지를 잃어버리는 것 보다는 그 빈천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당당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은 훌륭한 것이 아닌가요.

빈천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아무리 절박하다 해도 범죄나 비리를 범하려는 유혹에 지고 만다면 결국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말겠지요.

또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도 무리(無理)나 폭력(暴力)을 수반하거나 밥그릇을 서로 빼앗는 싸움으로 되고 만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일까요.











⑨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직까지 진실로 인(仁)을 좋아하는 사람과 진실로 불인(不仁)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느니라. 인(仁)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나, 불인(不仁)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인(仁)을 행함에 있어서 불인(不仁)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몸에 더하도록 하지 않는다. 하루를 능히 인(仁)에 힘쓸 사람이 있는가? 나는 아직 그렇게 하는데 힘이 부족하다고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노라. 그런 사람이 있을 법한데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였노라.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 加乎其身 有能一日 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4-6)











仁을 좋아하는 것과 不仁을 미워하는 것을 구별해서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실태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나오신 것 같다. 정말로 仁을 좋아하는 사람은 不仁을 미워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不仁이 그 자신에게 붙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仁을 진실로 좋아하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남의 不仁을 보고 참지 못하며 그것을 비난하고 또 자신은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한다고 하는데 결과를 보면 자기가 비난하고 싫어하며 고치려고 한 그 것을 닮고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본다.

부모의 성품 가운데 '이것만은 싫어' 하며 닮지 않으려고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닮아 있다던지, 독재에 항거해서 열심히 싸운 사람들 가운데 독재적 성품이 나타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독재를 싫어 한다면 자기 몸에 독재적 성향이 붙지 않아야 진정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싫어' 하고 비난하며 반대하지만 이윤동기는 몸에 붙어 있다면 진정한 것은 아닌 것이다.

목적과 방법이 일관되어야 진실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장은 참으로 음미하고 깊이 새겨야할 교훈이라고 생각된다.

'하루를 능히 인(仁)에 힘쓸 사람이 있는가?'라는 말에서는 어떤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나는 하루 24 시간이 모자라!'라고 말하는 것이 연상된다.

'하루를 仁을 실천하는데 온전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 법한데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술회하는 공자의 심정이 시공을 넘어서 느껴진다.











⑩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느니라."

증자가 말하기를, '예, 그러하옵니다."

공자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의 제자들이 묻기를, "무슨 말씀이신지요?"

증자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입니다."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4-15)



'나의 도(道)는 일관되어 있다'라는 말에서 요즘 특히 생각되는 것은 목적과 방법의 일관됨이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원하면서도(목적으로 하면서도)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이 대립 투쟁의 길이라면 뭔가 일관됨이 아니라 모순이 나타나는 것이다. 억압과 수탈, 차별과 불평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투쟁이 불가피할지는 모르지만 진정으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방법과 과정에 있어서도 일관됨이 있어야한다. 사회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이 상당히 진전된 민주주의 제도에서 공자 이래 꿈꿔 왔던 이 일관됨이 현실적인 테마로 다가온다.

요즘 상생과 화해라는 말이 시대의 화두로 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대단히 진전된 것으로 보인다. 상생과 화해는 목적일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진정한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과 과정에서 일관되게 구현되어야할 원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될 때 일관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선생님의 도(道)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라는 말에서 충(忠)과 서(恕)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견해가 있겠지만 감히 피력해 본다면 이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충(忠)은 자기의 최고를 발현하는 것이다. 그 시점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흔히 군주나 국가에 대해서 충(忠)이라는 말을 써 왔지만 그것은 한 면(가장 중요하게 여긴 관계 속에 구현된)일 뿐이다. 어떤 관계· 어떤 사람·어떤 일에 있어서도 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최고를 발현하는 것'은 경쟁이나 대립에서 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된다. 요즘은 경쟁을 통해야 자기의 최고를 발휘하게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그것은 충(忠)과는 다르다고 본다. 충은 절대적 세계이지 않을까.

서(恕)는 자기와 다른 것을 그대로 받아들임이라고 생각된다. 요즘 자기와의 다름이나 다양성을 인정하는 점에서 많은 진보가 있어 왔는데 이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흔히 자신이 일을 잘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충(忠)과 서(恕)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에고로부터 자유스러운 상태라면 충과 서는 일관되는 것이고 일관될 때 진실한 것이다.

그 일관됨이 자신에게 향하면 충(忠)이고 다른 사람에게 향하면 서(恕)가 아닐까.











⑪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옹(雍)은 인(仁)하기는 하나 말재주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재주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남을 상대로 말로만 넘길 것 같으면 오히려 자주 남의 미움만 사는 것이니, 그가 인(仁)한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말재주가 무슨 소용이 있겠소?"

或曰 雍也 仁而不佞  子曰 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 (5-5)















(가)

맹무백이 묻기를, "자로는 인(仁)한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잘 모르겠소"

맹무백이 다시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유는 천승의 나라에서 군무는 다스릴 수 있으나 그의 인(仁)함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소."







(나)

"구(求)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구는 천 실의 고을과 백승의 집에서 읍장이나 가재(家宰) 일은 맡아서 함 직하나 그의 인(仁)함에 대하여서는 잘 모르겠소"







(다)

"적(赤)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적은 예복을 갖추고 조정에서 빈객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를 논할 만하지만 그의 인(仁)함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소."

孟武伯 問子路 仁乎 子曰 不知也 又問 子曰 由也 千乘之國 可使治其賦也 不知其仁也 求也

何如 子曰 求也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 不知其仁也 赤也 何如 子曰 赤也 束帶立

於朝 可使與賓客言也 不知其仁也 (5-7)







⑬ 자장이 묻기를, “자문은 세 번 벼슬을 하여 영윤이 되었으되 기쁜 빛을 들어내지 않았으며, 세 번 쫓겨났으되 성난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자기가 맡았던 영윤의 정사를 새로운 영윤에게 인계하였는데,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충(忠)이다”



묻기를, “인(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까?”



“알수는 없지만, 어찌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子張 問曰 令尹子文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5-18)











이 장들을 보면서 적재적소(適材適所)라는 말이 떠오른다. 편견이나 사심이 없이 보면 그 사람이 그대로 보여 오는 것이다. 공자에게 제자들이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읽으면 그 정경이 떠올라온다.

실제로 어떤 사람을 사심 없이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나 어떤 재목인가가 보여 오지 않는가.

그런데 사실은 '사심 없이' 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편견이나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지만 않으면 그 사람(자신을 포함해서)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슴은 사슴으로 말은 말로 보이는 것이다.

공자는 제자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도 인(仁)에 대해서는 부지(不知)라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보통은 사람에 대해 '모른다'고 할 때는 부정적인 생각, 비판이나 비난의 마음이 담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그런 마음을 품었을까? 공자 쯤 되시는 분이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모르는 것이다!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 인격의 총체를 인(仁)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사람의 능력이나 적성 같은 것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니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속 마음 즉 심층(深層)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 것이다!

그것을 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사람을 침범하는 것이 되기 쉬운 것이다.

공자의 '不知其仁也'는 그렇게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⑭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회(回)는 그 마음이 석달이 지나도 인(仁)을 어기지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하루에 한 번이나 한달에 한 번 이를 뿐이다”



子曰 回也 其心 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6-5)







⑮ 번지가 지(知)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성의 의(義)를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면 지혜롭다 할 것이다”



인(仁)에 대해 묻자 말씀하시기를, “인(仁)이란 어려운 것은 먼저 하고 얻는 것은 뒤로 미루는 것으로, 그래야 인(仁)이라 할 수 있다”



樊遲問知 子曰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問仁 曰 仁者先難而後獲 可謂仁矣(6-20)











⑯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動)하나 인자는 정(靜)하다. 지자는 즐기고 인자는 오래 간다.



子曰 知者 樂水 仁者 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6-21)







⑰ 자공이 말하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 대중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떻습니까? 인(仁)이라고 하겠습니까?”



공자 말하기를, “어찌 인에서 그치겠느냐? 반드시 성(聖)의 경지다. 요순(堯舜)도 그러지 못할까 근심하였다.



인자(仁者)는 자신이 나서려고 하는 곳에 남을 내세우고, 자신이 이루려고 하는데에 남을 이루게 한다. 가까운 자신을 가지고 남의 처지를 미루어 보는 것이 인(仁)을 행하는 방법이다.”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6-28)







이 구절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이 인(仁)의 최고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주고 받는(give and take) 방식’을 넘어서서 불특정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것에 의해 성립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나는 최고의 이상적인 사회를 ‘줄 수 있는 것이 있고,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 주는 것으로 성립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무소유 사회’다.



줄 수 있는 물질과 주고 싶은 마음이 준비되어야 가능한 사회이지만, 나는 자본주의를 평화적으로 넘어서는 사회는 이런 사회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불자(佛者)들에게 매우 익숙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말도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정신적 바탕이며 실천적 과제라고 생각된다.







사실 과거에는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요즘은 지평선 넘어로 약간은 보이는 듯하다.



‘기본소득제’ 같은 것이 물질적 준비와 의식의 준비가 된다면, 이런 사회를 향한 보편적인 첫 걸음으로 될 것이다.







공자의 논어로 시작했지만, 진정한 고금합작의 길을 우리의 건국 이념에서 찾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의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는 위대한 사상이다.



공자가 최고의 인(仁)으로 말한 박시제중(博施濟衆)은 베푸는 주체와 구제받는 객체가 있지만, 홍익인간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홍익인간을 ‘홍익만유’로 생각하면 생태적 세계관을 그대로 나타낸다.‘인간(人間)’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존재로 보면 된다.

재세이화(在世理化) 또한 ‘우주자연의 리(理)를 이 땅에서 실현한다’는 뜻으로, 불가(佛家)의 ‘상구보리(上求菩提)하화중생(下化衆生)’을 뛰어 넘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는 현대적인 말이다.



민족(民族)의 능력도 뛰어나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평균 IQ가 세계 제1이라는 말도 있다.그런데 왜 이렇게 훌륭한 건국이념과 능력이 빗나가고 있을까?



‘물신에 지배되는 천민(賤民)적이고 이기적인 각자도생’의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세계 7번짼가로 SLBM을 가진 가난하고 시대착오적인 세습왕조. 남북의 현실이다.



이 위대한 정신을 지닌 민족이 곁가지로 빠지지 않고, 그 정도(正道)로, 본류(本流)를 찾아 일변(一變)할 수 있다면, 사상과 문화의 강국으로 되어, 석기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는 지금 세계의 힘(패권)의 질서를 그 근본에서 바꾸는 진원지가 될 수 없을까?

이런 이상에 좌우와 보혁이 동반자가 되는 것은 헛 꿈에 불과한가?

나에게 부여된 기회를 활용하여 이 꿈을 이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의 위대한 집단지성이 깨어나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빈다.







⑱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이 멀리 있겠느냐? 내가 인을 하려고 하면 곧 인이 이르러 오느니라.”



子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 至矣 (7-29)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당장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절대 양보 운전을 해 보면 이 말이 다가 온다. 좌회전 깜박이를 넣고 있는 차를 위해 잠깐 스톱하는 것만으로 그 길 위에 인(仁)이 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그 사람의 심정이 되어 잘 듣는 것 만으로 그 사람과의 사이에 인(仁)이 흐르는 것이다.



알면 그렇게 하면 될 것을!







⑲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싫어함은 난세의 징조요, 사람이 인이 아님을 지나치게 미워함도 난세의 원인이 된다.”



子曰 好勇疾貧 亂也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8-10)







‘好勇疾貧 亂也(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미워하면 난을 일으킨다)’의 구절에서는 진정한 용기와 가난에 대한 태도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勇은 2장의 勇而無禮則亂의 勇을 말하는 것 같다. 조화가 없는 절제되지 않는 용과 가난을 미워함이 결합되면 어떻게 될까.



또 하나는 가난에 대한 태도인데, 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공자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貧이나 富를 최고의 가치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부는 좋은 것이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仁이고 道이고 義인 것이다.



부를 얻을 수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것이다.



貧을 미워하는 것과 無禮한 勇이 결합하는 것은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길이 아니다.



貧을 미워하면 富를 미워하게 된다. 이 미움이 바탕이 되어서 일어나는 亂은 결국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이후 모든 변혁의 역사 속에서 성찰되어야 아주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불인을 너무 미워함도 난세의 원인이다)’는 구절 또한 우리의 일상적 삶이나 그 동안의 여러 변혁 운동들을 생각하게 한다.



잘못된 일이나 사람을 볼 때 그것을 고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된 도리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을 수수방관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 잘못을 고쳐 仁義를 실현하려고 하는 마음과 그 不仁에 대한 미움이 일어나는 것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이것이야 말로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나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나 가장 핵심적인 테마로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이미 오래 전에 미움은 인을 실현하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하셨다.



인류는 오랜 동안의 역사를 통해 점차 이런 이치를 깨달아가고 있다. 증오나 분노가 바탕이 되는 변혁은 결국 그 악순환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뼈아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仁義를 실현하려는 에너지와 분노나 미움의 에너지를 분리할 수 있을 만큼 여러 가지 조건들이 성숙하였다고 생각한다.



절대적 가난, 공공연한 억압과 차별이 존재하던 과거에는 생각하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보통의 사람들이 자유와 행복을 위해 어떤 길을 가야할 지에 대해 과거 성현이 아니면 생각하기 힘들었던 이치를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불인을 미워하는 것 보다는 인을 실현해 가는 것이 중심이 되는 삶, 그런 운동이 새로운 시대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포지티브 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⑳ 공자께서는 이익과 운명과 인(仁)에 관해 말씀하시는 일이 드무셨다.

子罕言利與命與仁 (9-1)







공자께서 운명이나 인(仁)을 이익과 연관시켜 말씀하시는 일이 드물었다.

흔히 운명을 이야기할 때는 개인이나 집단의 화복(禍福)을 떠올리게 된다. 개인의 행(幸)불행(不幸)이 보통의 경우에는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지만,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상태에서는 자신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진정한 행복으로 되지 않는다. 운명이나 천명을 이런 일시적인 행복감(幸福感)으로 그치고 말 이기심과 연관시켜 말씀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부귀공명(富貴功名)을 탐하는 것은 진정한 명(命)과는 다른 세계라고 보신 것이다.

공자에게는 우주의 리(理)가 명(命)이고, 그 우주의 리(理)에 부합하는 인간의 도리가 인(仁)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천명에 따른 삶이란 인(仁)을 실천하는 삶이며 어떤 개인의 외형적인 부귀공명(富貴功名)이나 빈천(貧賤)은 행복의 본질적 요소는 아닌 것이다.

부귀를 좋아하고 빈천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만 그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순리에 따르는 삶인 것이다.

도가 실현되지 않는 곳에서 부귀는 부끄러울 뿐이라는 공자의 말씀은 그의 진정한 행복관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말씀인 것이다.

‘먼저 그 나라의 의(義)를 구하라’라는 성경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행복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게 되는 것이다.

















인(仁)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고금합작(古今合作)의 길







긴 꼬리를 지닌 혜성이 밤하늘을 찬란하게 수놓듯, 인류라고 하는 동선(動線)이 긴 생명체가 대우주의 무대에서 모든 신(神)들의 주목을 받으며 진화의 장정(長征)을 연출하고 있다.



동선이 길다고 하는 것은 원시에서 현대의 이르는 모든 문명의 단계들이 부침(浮沈)과 생장소멸을 거듭하면서도 같은 시대 안에 아직도 공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과학기술의 엄청난 발전이 이른바 4차 산업혁명으로 인류의 미래에 획기적 전망을 갖게 하는 반면, 전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전쟁과 테러에 의한 살륙(殺戮), 폭정, 기아, 억압, 수탈이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계속되고 있고, 요즘 들어 더욱 심각해진 핵전쟁의 위협과 지구환경의 악화는 인류 존속 자체의 위기로 되고 있는 등, 이 모든 것들이 동시대에 함께 어울려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혹자는 말세나 종말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혹자는 이 혼란과 격변의 시기를 인류가 질적 도약을 위해 나아가는 거대한 변혁의 장(場), 거대한 과도기로 보기도 한다. 나는 후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있다.







독일 철학자 야스페르스(Karl Jarspers)는 2500여년 전 현자들이 동서양의 여기저기서 나타난 놀라운 시대를 이른바 ‘축(軸)의 시대(Axial age)’라고 불렀다.



이 시기를 한 단계 높은 인간 정신이 출현한 시기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소수의 선각자에 한정된 것이었다.



그것이 보편화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



2500여년이 지난 지금 마침내 인류는 인공지능을 비롯한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놀라운 시대 앞에 서 있다.



이제 보편적 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인간의 행위능력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선각자의 정신이 인류의 보편적 현실과 만나는 시대가 바로 21세기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고금합작(古今合作)의 시대다.



그 선각자의 한 사람이 공자(孔子)이고, 그의 사상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는 책이 논어(論語)다.



공자 사상의 핵심으로 알려진 인(仁)을 중심으로 고금합작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갈 새로운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5회에 걸친 강좌를 마치려고 한다.







인(仁)은 모든 존재의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동력이다.







우주 자연계에 가장 신비로운 것은 생명이다.



그 중에서도 ‘인간’이다.



공자의 인(仁)은 바로 이 인간의 생명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관념의 정상화>와 <구체적 실천>을 말한다.



그 동안 가장 오해된 부분이 바로 이 분야 같다.



규범이나 예의범절 제도 등은 이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공자의 시대와 사회에서 제시한 규범 예절 윤리 질서 등이 굳어져서 그것이 공자 사상의 핵심처럼 인식된 것이다.



공자 사상의 알맹이를 싸고 있던 외피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을 알맹이로 잘 못 인식되어 온 것이다.



공자의 반대자들은 물론이지만,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수 없이 왜곡되어 왔고, 특히 권력이데올로기로 작용하면서 심각한 폐해를 나타내기도 했다.



비록 부족하고 나 스스로 공자를 왜곡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무릅쓰고, 현대 인류의 지성의 빛에 비추어서 살펴보려고 한다.







① 안연이 인에 대하여 묻자 공자 말하기를, “극기복례(克己復禮)가 곧 인이니, 하루 극기복례하면 온 천하가 다 인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인을 이룸이 자기로 말미암은 것이니, 어찌 남에게 연유하는 것이겠는가.”



안연이 그 구체적 조목을 청하자 공자 말하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안연 말하기를,“제가 비록 불민하나 그 말씀대로 실천하겠습니다.”



顔淵 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顔淵 曰 請問其目 子曰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顔淵 曰 回雖不敏 請事斯語矣 >







공자의 대표적 사상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아마 초등학생도 인(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인(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공자 스스로도 인(仁)을 정의하듯이 이야기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과의 문답을 통해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제자 안회와의 문답이 논어 12편에 나오는데 가장 대표적인 설명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여기서 공자는 ‘극기복례가 곧 인(克己復禮爲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은 많이 귀에 익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 참뜻을 이해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극기훈련’을 많이들 한다고 하는데, 잘 참지 못하는 요즘 세대에게는 ‘참는 훈련’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절대빈곤이나 독재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싫어도 참아내야 할 일이 많았지만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가 진척되다 보니 높아진 자유도(自由度)에 반비례해서 참아내는 힘이 너무 없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자식들에게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참아내라’는 충고를 많이 하시는데 젊은이들의 참는 힘이 적은 것도 있지만 그 분들의 관념 속에는 ‘참는다’는 것이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싫다고 생각하는 것도 ‘참고 이겨내는 것’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극기’(克己)를 그저 ‘참고 이겨내는 것’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공자가 말하는 진정한 극기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극기는 절사(絶四)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무의(毋意), 무필(毋必), 무고(毋固), 무아(毋我)의 네 가지 끊음을 통해 극기란 결국 ‘무아집’으로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참아야만 하는’ 부자유의 세계가 아니라 ‘참을 것이 없는’ 자유의 세계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극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복례(復禮)도 극기와 따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복례를 ‘사람 사이에 지켜야할 바람직한 행위규범에 따라야 한다’라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하고 싶지 않아도 참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행동거지를 사회규범(禮)에 맞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부자유가 있을 수 있다. 즐겁지 않은 것이다.



공자가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예를 즐긴다는 것은 사람과의 관계가 즐거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딱딱한 규범의 세계가 아니라 ‘아집’을 넘어설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사이좋음’인 것이다. 즉, 극기복례는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지향하는 본연의 모습인 것이다!



아집을 넘어선다는 것은 사람이나 일에 대해서 참는 것(忍)으로부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임(恕)으로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분노와 증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높아진 자유도에 비추어 볼 때 공자의 ‘극기복례’는 현대에 와서 더욱 인간의 목표로 삼을만한 것이다.







일일극기복례(一日克己復禮) 천하귀인언(天下歸仁焉)이라는 말은 깊은 감동을 준다.



분노와 미움에 휘둘리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克己)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의를 바로잡아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復禮). 하루라도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증오와 분노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세상이 진보하는 길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진정한 선구자인 것이다.



극기(克己) 즉 아집을 넘어서는 인격의 성숙과 복례(復禮) 즉 정상적이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일이 하나인 것이다.







예가 아니면 보지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말도 잘못 읽으면 비례(非禮)에 대해서 오불관하는 식의 소극적 은둔적 사고방식이나 금기(禁忌)나 계율(戒律)로 읽기 쉽지만, 그런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기로부터 비례(非禮)를 범하지 않는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실천과제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사회의 부조리나 부정을 시정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금기(禁忌)나 계율(戒律)처럼 받아들이기 쉽다. 논어 전체를 관통하는 공자의 태도를 볼 때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공자의 진의(眞意)를 왜곡하기 쉽다고 생각한다.



우선 ‘예(禮)’는 밖으로 나타난 질서나 규범이지만, 공자에게는 항상 내면의 마음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으로 흔히 말하는 허례(虛禮)를 가장 경계하고 있다.







극기복례는 금기나 계율의 세계가 아니라 자율과 자각의 세계다. 다만 그 것을 위한 수행과정으로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을 말하고 있다고 나에게는 보인다.







진정한 생명력의 신장이야말로 인(仁)의 핵심 사상이며, 금기나 계율 같은 규범을 확대하는 사회는 결코 생명력을 신장시키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힘든 노동에서 해방될 4차 산업혁명의 사회를 생각할 때, 지금의 인간의 욕망을 생각하면 어떤 세상으로 될 것인가?



공자의 말들이 더 급박한 현실로 다가온다고 생각한다.







② 공자 말하기를, “제자는 집에 들어가면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손하며, 삼가고 신의로우며, 널리 대중을 사랑하되, 인(仁)을 가까이할 것이니, 그러고도 남음이 있으면 글을 배우라”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而學文(1-6)







③ 공자 말하기를, “사람이 불인(不仁)하면 예(禮)는 무엇을 할 것이며, 사람이 불인(不仁)하면 악(樂)은 무엇을 할 것인가?”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3-3)







허례 허식을 비판할 때 유교나 공자를 떠올리기 쉽지만 공자께서는 그 해악을 몇 차례 씩 거듭 경계하고 있다. 공자가 중히 여긴 예와 악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외부에 나타난 것이다. 외부로 나타난 형식을 결코 무시할 수는 없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인간의 본래 성정인 인(仁)이며 측은지심(惻隱之心)인 것이다. 요즘 경조사에 임하는 실태나 혼수(婚需) 준비, 장묘((葬墓), 과시적 소비를 볼 때 더욱 다가오는 바가 있다.











④ 공자 말씀하시기를, “마을의 풍속이 인(仁)해야 사람의 마음도 아름답게 되는 것이니, 인(仁)한 곳을 택하여 살지 않는다면 어찌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 있으리요!”

子曰 里仁 爲美 擇不處仁 焉得知 (4-1)











밝은 꿈을 가진 사람들 특히 청년들을 응원한다.





이 밝음은 돈ㆍ출세 등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니는 것과는 질이 다른 밝음이다.

즐거운 일터, 사이좋은 이웃, 자연친화적 삶, 함께 하는 지적ㆍ예술적 활동 등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는 꿈이다.



객관적인 물질적 수준이나 제도는 이런 노력을 현실화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새로운 사회를 설계하는 운동이 넓혀져 가야한다.



이것은 범인류적인 시대의 요구다.







도시에서도 가능하지만, 농촌지역에서 더 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다.

나는 잘 모르지만 요즘 이야기되는 6차산업과 협동조합의 결합 같은 것도 생각해봄직하다.





이 새로운 사회운동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준비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된다.



이 준비에는 인문적 자각이 필수적이다.



공자를 제대로 살리는 것은 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서 새로운 유형의 당당한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사이좋고 협동하며 즐거운 삶으로 전환하는 지혜를 서로 키워가는 길에 인문운동가로서 미력이라도 도움이 되는 것이 나의 꿈이기도 하다.





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불인(不仁)한 자는 곤궁한 곳에 오래 처하지 못하고 즐거운 곳에도 길게 처하지 못하지만, 인자(仁者)는 인에 편안해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인을 이롭게 여긴다.



子曰 不仁者 不可爲久處約 不可以長處樂 仁者 安仁 知者 利仁 (4-2)







⑥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인자(仁者)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다”

子曰 惟仁者 能好人 能惡人 (4-3)







⑦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인에 뜻을 둔다면 미워함(惡)이 없다”

子曰 苟志於仁矣 無惡也 (4-4)







인자(仁者)는 어떤 사람일까.

불인(不仁)한 자는 곤궁한 곳에도 오래 처하지 못하지만 즐거운 곳에도 오래 처하지 못한다는 말씀은 깊이 새겨들을 만하다. 그는 어떤 경우든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즐거울 때 조차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부족감을 느끼고 그 즐거움이 사라지지 않을까 불안감을 느끼는 것이다. 인자(仁者)와 지자(知者)를 구분한 것도 사람의 심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느끼게 한다. 인(仁)의 이로움을 아는 것만 해도 좋지만 인(仁) 속에서 편안함을 얻는 것은 더 나아가는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데서부터 몸으로 체득(體得)하는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성숙의 목표가 아닐까.

오직 인자(仁者)만이 호오(好惡)를 능히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말씀일까.

일반적으로 보통의 사람들(小人)은 자기 중심으로 好惡를 선택한다.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좋아하고 손해가 되면 미워한다. 자기중심성을 넘어선 仁者만이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다.

그 불인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지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4장의 無惡也를 보통 악한 것이 없다고 읽고 해석하는 것 같다. 그러나 3장과 이어서 읽어본다면 惡을 오(미워함)라고 읽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된다.

오직 인자만이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더 나아가 ‘아니 진실로 인자라면 미워함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⑧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와 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나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면 거기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빈과 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나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도 피하지 말아야 한다. 군자가 인을 버린다면 어떻게 이름을 이룰 수 있으리요.

군자는 밥 먹는 동안이라도 인을 어기는 일이 없는 것이니 황급한 때에도 반드시 그것을 지키고 위급한 때에도 반드시 그것을 지켜야 한다"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 違仁 造次 必於是 顚沛 必於是(4-5)











부와 귀를 좋아하고 빈과 천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따라서 일부러 부귀를 멀리하거나 빈천을 선택하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보통의 인간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부귀보다도 더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과정의 정당성이다. 그것을 공자께서는 도(道)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정당하게 얻은 부귀가 아니면 그것은 행복의 조건이 아니라 결국은 불행의 원인으로 된다. 이것은 그 동안의 수 많은 개인과 집단의 삶 속에서 예외 없이 증명되어 왔다.

도(道)는 개개인의 덕목일 뿐 아니라 집단(사회)의 덕목이기도 하다. 불의한 사회(도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일수록 과정의 정당성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조금만 길게 보면 한 사람의 생애 안에서 또는 그 자손의 삶 속에서 반드시 증명된다. 항구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행복은 개인과 사회가 도(道)에 부합할 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 지자(知者)이고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인자(仁者)인 것이다.

사람으로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모두가 부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 온 것이 인간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선진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같은 지금의 제도도 이러한 역사의 산물로 나타났고 또 끊임없이 변화해 갈 것이다.

빈과 천이 도로써 얻은 것이 아니라도 피하지 말아야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운명이나 팔자로 알고 체념하며 받아들이라는 말씀은 아니라고 보고 싶다.

빈과 천에서 벗어나 행복을 추구하는 그 과정에서 무리를 범하는 것을 경계하는 말씀이 아닐까.

요즘 말로 하면 개인의 불행이 사회적 모순에 기인한다고 보여질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에의 길일까. 그 동안의 사회 변혁과정을 비롯한 수 많은 개인사 속에서 나타난 현상들을 바탕으로 검토해 갈 테마라고 생각되었다.



인(仁)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또 인(仁)의 실현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밥 먹는 동안이라도 인을 어기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추상적인 목표나 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삶 속에 녹아드는 것이 진짜인 것이다.

그렇게 될 때라야 황급하거나 위급한 때라도 인(仁)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장을 읽으면서 입으로는 늘 도(道)나 인(仁)을 이야기하다가도 막상 다급하거나 위기에 처할 때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데 급급한 우리의 실태를 보는 것 같다.











<대화>











- 착하게 살아도 가난을 면할 수 없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장은 가혹한 말씀이 아닌가요. 심하게 말하면 가난이 사회적 모순 때문일 경우에도 그것을 감내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 그렇게 읽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좀 다른 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빈천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너무 당연하지만 그 방법이 도(道)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만약 어떤 사람이 체념한 나머지 자포자기의 삶을 살거나 자주적 인간으로서 긍지를 잃어버리는 것 보다는 그 빈천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당당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는다면 그것은 훌륭한 것이 아닌가요.

빈천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아무리 절박하다 해도 범죄나 비리를 범하려는 유혹에 지고 만다면 결국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말겠지요.

또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도 무리(無理)나 폭력(暴力)을 수반하거나 밥그릇을 서로 빼앗는 싸움으로 되고 만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일까요.





⑨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직까지 진실로 인(仁)을 좋아하는 사람과 진실로 불인(不仁)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느니라. 인(仁)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으나, 불인(不仁)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인(仁)을 행함에 있어서 불인(不仁)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몸에 더하도록 하지 않는다. 하루를 능히 인(仁)에 힘쓸 사람이 있는가? 나는 아직 그렇게 하는데 힘이 부족하다고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노라. 그런 사람이 있을 법한데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였노라.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 加乎其身 有能一日 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4-6)





仁을 좋아하는 것과 不仁을 미워하는 것을 구별해서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실태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나오신 것 같다. 정말로 仁을 좋아하는 사람은 不仁을 미워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不仁이 그 자신에게 붙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仁을 진실로 좋아하는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남의 不仁을 보고 참지 못하며 그것을 비난하고 또 자신은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한다고 하는데 결과를 보면 자기가 비난하고 싫어하며 고치려고 한 그 것을 닮고 있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본다.

부모의 성품 가운데 '이것만은 싫어' 하며 닮지 않으려고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닮아 있다던지, 독재에 항거해서 열심히 싸운 사람들 가운데 독재적 성품이 나타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독재를 싫어 한다면 자기 몸에 독재적 성향이 붙지 않아야 진정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싫어' 하고 비난하며 반대하지만 이윤동기는 몸에 붙어 있다면 진정한 것은 아닌 것이다.

목적과 방법이 일관되어야 진실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장은 참으로 음미하고 깊이 새겨야할 교훈이라고 생각된다.

'하루를 능히 인(仁)에 힘쓸 사람이 있는가?'라는 말에서는 어떤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나는 하루 24 시간이 모자라!'라고 말하는 것이 연상된다.

'하루를 仁을 실천하는데 온전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 법한데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술회하는 공자의 심정이 시공을 넘어서 느껴진다.











⑩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參)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철되어 있느니라."

증자가 말하기를, '예, 그러하옵니다."

공자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의 제자들이 묻기를, "무슨 말씀이신지요?"

증자가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는 충(忠)과 서(恕)일 뿐입니다."

子曰 參乎 吾道 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 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4-15)



'나의 도(道)는 일관되어 있다'라는 말에서 요즘 특히 생각되는 것은 목적과 방법의 일관됨이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원하면서도(목적으로 하면서도)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이 대립 투쟁의 길이라면 뭔가 일관됨이 아니라 모순이 나타나는 것이다. 억압과 수탈, 차별과 불평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투쟁이 불가피할지는 모르지만 진정으로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방법과 과정에 있어서도 일관됨이 있어야한다. 사회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이 상당히 진전된 민주주의 제도에서 공자 이래 꿈꿔 왔던 이 일관됨이 현실적인 테마로 다가온다.

요즘 상생과 화해라는 말이 시대의 화두로 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대단히 진전된 것으로 보인다. 상생과 화해는 목적일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진정한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과 과정에서 일관되게 구현되어야할 원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될 때 일관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선생님의 도(道)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라는 말에서 충(忠)과 서(恕)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견해가 있겠지만 감히 피력해 본다면 이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충(忠)은 자기의 최고를 발현하는 것이다. 그 시점에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흔히 군주나 국가에 대해서 충(忠)이라는 말을 써 왔지만 그것은 한 면(가장 중요하게 여긴 관계 속에 구현된)일 뿐이다. 어떤 관계· 어떤 사람·어떤 일에 있어서도 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최고를 발현하는 것'은 경쟁이나 대립에서 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된다. 요즘은 경쟁을 통해야 자기의 최고를 발휘하게 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그것은 충(忠)과는 다르다고 본다. 충은 절대적 세계이지 않을까.

서(恕)는 자기와 다른 것을 그대로 받아들임이라고 생각된다. 요즘 자기와의 다름이나 다양성을 인정하는 점에서 많은 진보가 있어 왔는데 이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흔히 자신이 일을 잘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충(忠)과 서(恕)가 서로 모순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에고로부터 자유스러운 상태라면 충과 서는 일관되는 것이고 일관될 때 진실한 것이다.

그 일관됨이 자신에게 향하면 충(忠)이고 다른 사람에게 향하면 서(恕)가 아닐까.











⑪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옹(雍)은 인(仁)하기는 하나 말재주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재주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오? 남을 상대로 말로만 넘길 것 같으면 오히려 자주 남의 미움만 사는 것이니, 그가 인(仁)한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말재주가 무슨 소용이 있겠소?"

或曰 雍也 仁而不佞  子曰 焉用佞  禦人以口給 屢憎於人 不知其仁 焉用佞 (5-5)















(가)

맹무백이 묻기를, "자로는 인(仁)한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잘 모르겠소"

맹무백이 다시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유는 천승의 나라에서 군무는 다스릴 수 있으나 그의 인(仁)함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소."







(나)

"구(求)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구는 천 실의 고을과 백승의 집에서 읍장이나 가재(家宰) 일은 맡아서 함 직하나 그의 인(仁)함에 대하여서는 잘 모르겠소"







(다)

"적(赤)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적은 예복을 갖추고 조정에서 빈객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를 논할 만하지만 그의 인(仁)함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소."

孟武伯 問子路 仁乎 子曰 不知也 又問 子曰 由也 千乘之國 可使治其賦也 不知其仁也 求也

何如 子曰 求也 千室之邑 百乘之家 可使爲之宰也 不知其仁也 赤也 何如 子曰 赤也 束帶立

於朝 可使與賓客言也 不知其仁也 (5-7)







⑬ 자장이 묻기를, “자문은 세 번 벼슬을 하여 영윤이 되었으되 기쁜 빛을 들어내지 않았으며, 세 번 쫓겨났으되 성난 빛을 나타내지 않고 자기가 맡았던 영윤의 정사를 새로운 영윤에게 인계하였는데,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충(忠)이다”



묻기를, “인(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까?”



“알수는 없지만, 어찌 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子張 問曰 令尹子文 三仕爲令尹 無喜色 三已之無慍色 舊令尹之政 必以告新令尹 何如 子曰 忠矣 曰 仁矣乎 曰 未知 焉得仁(5-18)











이 장들을 보면서 적재적소(適材適所)라는 말이 떠오른다. 편견이나 사심이 없이 보면 그 사람이 그대로 보여 오는 것이다. 공자에게 제자들이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가를 생각하며 읽으면 그 정경이 떠올라온다.

실제로 어떤 사람을 사심 없이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나 어떤 재목인가가 보여 오지 않는가.

그런데 사실은 '사심 없이' 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편견이나 자신의 욕망이 투영되지만 않으면 그 사람(자신을 포함해서)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슴은 사슴으로 말은 말로 보이는 것이다.

공자는 제자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도 인(仁)에 대해서는 부지(不知)라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

보통은 사람에 대해 '모른다'고 할 때는 부정적인 생각, 비판이나 비난의 마음이 담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기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그런 마음을 품었을까? 공자 쯤 되시는 분이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모르는 것이다!

공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 인격의 총체를 인(仁)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사람의 능력이나 적성 같은 것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니까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속 마음 즉 심층(深層)의 마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 것이다!

그것을 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 사람을 침범하는 것이 되기 쉬운 것이다.

공자의 '不知其仁也'는 그렇게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⑭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회(回)는 그 마음이 석달이 지나도 인(仁)을 어기지 않는다. 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하루에 한 번이나 한달에 한 번 이를 뿐이다”



子曰 回也 其心 三月不違仁 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6-5)







⑮ 번지가 지(知)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성의 의(義)를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면 지혜롭다 할 것이다”



인(仁)에 대해 묻자 말씀하시기를, “인(仁)이란 어려운 것은 먼저 하고 얻는 것은 뒤로 미루는 것으로, 그래야 인(仁)이라 할 수 있다”



樊遲問知 子曰 務民之義 敬鬼神而遠之 可謂知矣 問仁 曰 仁者先難而後獲 可謂仁矣(6-20)











⑯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動)하나 인자는 정(靜)하다. 지자는 즐기고 인자는 오래 간다.



子曰 知者 樂水 仁者 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6-21)







⑰ 자공이 말하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 대중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떻습니까? 인(仁)이라고 하겠습니까?”



공자 말하기를, “어찌 인에서 그치겠느냐? 반드시 성(聖)의 경지다. 요순(堯舜)도 그러지 못할까 근심하였다.



인자(仁者)는 자신이 나서려고 하는 곳에 남을 내세우고, 자신이 이루려고 하는데에 남을 이루게 한다. 가까운 자신을 가지고 남의 처지를 미루어 보는 것이 인(仁)을 행하는 방법이다.”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6-28)







이 구절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이 인(仁)의 최고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주고 받는(give and take) 방식’을 넘어서서 불특정의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주는 것에 의해 성립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나는 최고의 이상적인 사회를 ‘줄 수 있는 것이 있고, 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 주는 것으로 성립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하자면 ‘무소유 사회’다.



줄 수 있는 물질과 주고 싶은 마음이 준비되어야 가능한 사회이지만, 나는 자본주의를 평화적으로 넘어서는 사회는 이런 사회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불자(佛者)들에게 매우 익숙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말도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정신적 바탕이며 실천적 과제라고 생각된다.







사실 과거에는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요즘은 지평선 넘어로 약간은 보이는 듯하다.



‘기본소득제’ 같은 것이 물질적 준비와 의식의 준비가 된다면, 이런 사회를 향한 보편적인 첫 걸음으로 될 것이다.







공자의 논어로 시작했지만, 진정한 고금합작의 길을 우리의 건국 이념에서 찾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의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는 위대한 사상이다.



공자가 최고의 인(仁)으로 말한 박시제중(博施濟衆)은 베푸는 주체와 구제받는 객체가 있지만, 홍익인간은 그것을 뛰어넘는다. 홍익인간을 ‘홍익만유’로 생각하면 생태적 세계관을 그대로 나타낸다.‘인간(人間)’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모든 존재로 보면 된다.

재세이화(在世理化) 또한 ‘우주자연의 리(理)를 이 땅에서 실현한다’는 뜻으로, 불가(佛家)의 ‘상구보리(上求菩提)하화중생(下化衆生)’을 뛰어 넘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지 않는 현대적인 말이다.



민족(民族)의 능력도 뛰어나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평균 IQ가 세계 제1이라는 말도 있다.그런데 왜 이렇게 훌륭한 건국이념과 능력이 빗나가고 있을까?



‘물신에 지배되는 천민(賤民)적이고 이기적인 각자도생’의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세계 7번짼가로 SLBM을 가진 가난하고 시대착오적인 세습왕조. 남북의 현실이다.



이 위대한 정신을 지닌 민족이 곁가지로 빠지지 않고, 그 정도(正道)로, 본류(本流)를 찾아 일변(一變)할 수 있다면, 사상과 문화의 강국으로 되어, 석기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는 지금 세계의 힘(패권)의 질서를 그 근본에서 바꾸는 진원지가 될 수 없을까?

이런 이상에 좌우와 보혁이 동반자가 되는 것은 헛 꿈에 불과한가?

나에게 부여된 기회를 활용하여 이 꿈을 이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의 위대한 집단지성이 깨어나기를 기도하는 심정으로 빈다.







⑱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이 멀리 있겠느냐? 내가 인을 하려고 하면 곧 인이 이르러 오느니라.”



子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 至矣 (7-29)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당장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절대 양보 운전을 해 보면 이 말이 다가 온다. 좌회전 깜박이를 넣고 있는 차를 위해 잠깐 스톱하는 것만으로 그 길 위에 인(仁)이 이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그 사람의 심정이 되어 잘 듣는 것 만으로 그 사람과의 사이에 인(仁)이 흐르는 것이다.



알면 그렇게 하면 될 것을!







⑲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싫어함은 난세의 징조요, 사람이 인이 아님을 지나치게 미워함도 난세의 원인이 된다.”



子曰 好勇疾貧 亂也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8-10)







‘好勇疾貧 亂也(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미워하면 난을 일으킨다)’의 구절에서는 진정한 용기와 가난에 대한 태도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말하는 勇은 2장의 勇而無禮則亂의 勇을 말하는 것 같다. 조화가 없는 절제되지 않는 용과 가난을 미워함이 결합되면 어떻게 될까.



또 하나는 가난에 대한 태도인데, 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좋아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공자도 이를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貧이나 富를 최고의 가치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부는 좋은 것이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이다. 공자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仁이고 道이고 義인 것이다.



부를 얻을 수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것이다.



貧을 미워하는 것과 無禮한 勇이 결합하는 것은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길이 아니다.



貧을 미워하면 富를 미워하게 된다. 이 미움이 바탕이 되어서 일어나는 亂은 결국은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이후 모든 변혁의 역사 속에서 성찰되어야 아주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人而不仁 疾之已甚 亂也(불인을 너무 미워함도 난세의 원인이다)’는 구절 또한 우리의 일상적 삶이나 그 동안의 여러 변혁 운동들을 생각하게 한다.



잘못된 일이나 사람을 볼 때 그것을 고치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된 도리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을 수수방관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 잘못을 고쳐 仁義를 실현하려고 하는 마음과 그 不仁에 대한 미움이 일어나는 것은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이것이야 말로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나 사회의 행복을 위해서나 가장 핵심적인 테마로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공자는 이미 오래 전에 미움은 인을 실현하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하셨다.



인류는 오랜 동안의 역사를 통해 점차 이런 이치를 깨달아가고 있다. 증오나 분노가 바탕이 되는 변혁은 결국 그 악순환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뼈아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仁義를 실현하려는 에너지와 분노나 미움의 에너지를 분리할 수 있을 만큼 여러 가지 조건들이 성숙하였다고 생각한다.



절대적 가난, 공공연한 억압과 차별이 존재하던 과거에는 생각하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보통의 사람들이 자유와 행복을 위해 어떤 길을 가야할 지에 대해 과거 성현이 아니면 생각하기 힘들었던 이치를 깨달아 가고 있는 것이다.



불인을 미워하는 것 보다는 인을 실현해 가는 것이 중심이 되는 삶, 그런 운동이 새로운 시대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포지티브 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⑳ 공자께서는 이익과 운명과 인(仁)에 관해 말씀하시는 일이 드무셨다.

子罕言利與命與仁 (9-1)







공자께서 운명이나 인(仁)을 이익과 연관시켜 말씀하시는 일이 드물었다.

흔히 운명을 이야기할 때는 개인이나 집단의 화복(禍福)을 떠올리게 된다. 개인의 행(幸)불행(不幸)이 보통의 경우에는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지만,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상태에서는 자신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을 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진정한 행복으로 되지 않는다. 운명이나 천명을 이런 일시적인 행복감(幸福感)으로 그치고 말 이기심과 연관시켜 말씀하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부귀공명(富貴功名)을 탐하는 것은 진정한 명(命)과는 다른 세계라고 보신 것이다.

공자에게는 우주의 리(理)가 명(命)이고, 그 우주의 리(理)에 부합하는 인간의 도리가 인(仁)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천명에 따른 삶이란 인(仁)을 실천하는 삶이며 어떤 개인의 외형적인 부귀공명(富貴功名)이나 빈천(貧賤)은 행복의 본질적 요소는 아닌 것이다.

부귀를 좋아하고 빈천을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만 그 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순리에 따르는 삶인 것이다.

도가 실현되지 않는 곳에서 부귀는 부끄러울 뿐이라는 공자의 말씀은 그의 진정한 행복관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말씀인 것이다.

‘먼저 그 나라의 의(義)를 구하라’라는 성경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행복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