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에서 동학한다는 것은
정선원 (계룡중학교 교사/공주동학기념사업회 이사)
동학을 한다는 것은 동학 정신을 계승하는 것으로, 동학 정신을 가슴에 모시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동학 정신을 항상 생활에서 실천한다는 것이리라. 종교인로서 동학에 접근하지 않더라도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영향력은 우리 근대 역사에서 인간 평등 사상, 반외세 민족 자주 정신 그리고 생명운동, 환경 운동에까지 미치고 있다.
공주는 내가 고향 여수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공주사범대학으로 진학하면서 만난 제2의 고향이다. 1979년 유신 말기에 공주사범대학 역사교육과에 입학할 때 공주에는 막연하게나마 동학혁명의 격전지인 우금티(고개 우금치를 공주에서는 우금티로 부른다)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입시 지옥에서 해방되어 대학에 가면 무엇인가 희망찬 세상을 볼 줄 알았는데, 대학에 입학해도 무엇인가 답답하여 우금티의 농민혁명군들을 비유하면서 공주대학 신문사에 투고를 하기도 했었다.
대학 1학년 때, 여기저기 대학교를 다니다가 삼수해서 공주사대에 들어온 동급생 선배가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1학기 때 수십 명이 모였던 독서 모임이 2학기 들어 정치적 토론도 하게 되면서 많은 친구들이 떨어져 나갔다. 그즈음 ‘김영삼 총재 가처분 사건’, 신민당사에서 ‘YH노조 김경숙 사망 사건’이 생기자 교내에 사복 경찰이 좍 깔리기 시작했다. 이때 그 선배가 한 건 할 것을 제의했다. 네 명이 한밤에 공주사대 곳곳에 “유신철폐”, “정보원 물러가라”는 빨간색 벽서를 감행했다. 그날이 10월 13일이었다. 며칠 뒤 강의실에서 경찰에 잡혀갔고, 경찰서 유치장 테레비에서 부산·마산 항쟁을 보았다. 그리고 부모님들에게 한 사람씩 인계되어 석방되었다.
이 건으로 나는 대학에서 무기정학 처분을 받아 집으로 가야 했는데, 고향에서 오신 어머니가 멀미가 있어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자취방에서 하룻밤 자고 고향 여수로 가기로 하였다. 새벽에 라디오를 트는데(당시 자취방에 티비는 아주 귀했다) 장송곡이 울려 나오면서 ‘박정희 암살 사건’(10.26)을 보도하였다. 그렇게 물러가라고 한 독재자가 암살로 물러나는 경우도 있구나 하면서 역사의 여러 다양성을 생각했었다.
박정희 암살로 무기정학이 풀려 다음해 3월부터 등교를 했고, 대학가는 박정희 체제 18년 및 유신체제의 독재적 과거를 청산하기 위한 어용 교수 퇴진 등 민주화 운동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하였다. 개학 후 ‘유신철폐 벽서파’ 우리들은 독서 모임을 다시 시작했다. 군부 재집권 반대 시위로 전국 대학이 들썩였는데 ‘5.17 계엄확대조치’로 전두환 군사 정부가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회 과학 공부 독서 모임에 지도 교수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우리의 독서 모임은 자연스레 비밀 독서 모임이 되었다.
박정희 군사 정권의 죄악상 그리고 광주학살사건의 진상을 하나둘 접하면서 이러한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독서 모임은 당시 우리에게는 하나의 숨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군사 정권에 대한 분노 때문에 모인 친구들이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금강회”라는 단체 이름도 만들고, 노래도 만들었다. “금강회”는 군사 정권과 싸울만한 능력이 있었던 조직이 아니라 분노에 갈팡질팡했던 수준 낮은 모임이었다. 그 노래 가사에는 “우금치 얼 이어받은 금강의 소명, 금강의 흐름은 역사의 생명”이 있었다. 공주에서의 민주화 운동은 당연히 우금치 정신을 잇는 것이었다. 그해 겨울에는 회원들이 모여 공주 남쪽에서 동학농민군의 진격로를 상상하며 탄천에서 이인 그리고 우금티 위령탑까지 15km를 걸어 위령탑에 참배하기도 하였다.
81년 3학년 여름이 되면서 “금강회” 회원들에 대한 구속이 시작되었다. 전국적인 학생 운동 및 사회 운동 탄압의 하나이어서 “학림”, “부림”, “아람회” 등의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을 교도소에서 만날 수 있었다.
2년 가까이 구속되었다가 석방되면서 나는 나에게 학생 운동을 가르쳐준 공주에서 살기로 결정했다. 공주에서 사회 과학 서점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85년 전두환 정권하의 제적생들이 중심이 되어 ‘선도투’를 하겠다고 결성한 “충남민주운동청년연합”(약칭 충남민청)의 임원이 되어 활동했다. 충남민청은 그 첫 대외 사업으로 4.19 기념 마라톤을 공주대에서 시작하여 우금티 위령탑까지 하기로 하였다.
1985년은 전두환 정권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였다. 충남대, 목원대, 공주사대 학생 운동권 100여 명이 모여 마라톤을 했고, 그리고 사전에 예정한 대로 우금티 위령탑 비문의 역사 왜곡 바로잡기 행사를 진행하였다. 유신 직후인 1973년 공주 우금티에 세워진 위령탑 비문에는 ‘동학혁명’이 ‘5.16 군사혁명’, ‘10월 유신’으로 계승되고 있다고 씌여 있었다. 또한 위령탑의 몸에 새겨진 “동학혁명군위령탑”의 글씨는 박정희가 써서 내려 준 것이다. 공주의 위령탑을 볼 때마다 군사 정권의 역사 왜곡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는 것은 위령탑을 찾는 모든 양심 있는 인사들의 공통된 심정이었다.
박정희의 동학 역사 왜곡에 대한 비판은 바로 전두환 군사 정권 비판이었다. “충남민주운동청년연합” 의장 오원진 형은 구속을 각오하고 이 행사를 주관했다. 오원진형은 우금티 위령탑의 역사 왜곡의 비문을 파손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구속은 되지 않았다. 공주에서 행사 실무 준비를 맡았던 나는 철물점에서 산 쇠망치를 찾을 수가 없어서 주위에서 큰 돌멩이를 주워 오원진 형께 교도소 먼저 잘 가시라고 드렸던 기억이 새롭다. 오원진 형은 유신 때 충남대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유신반대투쟁’으로 제적과 강제 징집되었고, 1980년에 복학하여 총학생회장을 역임하였으나 전두환 정권 반대 투쟁으로 제적, 구속되었다. 그 뒤 충남에서 여러 사회 활동을 하다 92년 젊은 나이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위령탑을 볼 때마다 오원진 형을 생각하게 된다.
“동학혁명 100주년”이 되는 1990년 들어 학계에서부터 동학혁명 기념행사들이 열렸다. 공주에서는 93년에 우금티 위령탑 근처에 주유소를 세운다고 하였다. 주유소 반대 운동을 하면서 공주에 “동학기념사업단체”가 결성되었다. 94년 들어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행사가 서울, 정읍, 전주, 그리고 공주에서 거행되었다. 공주에서 1억 5천만 원의 국가 지원비로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시청에서 간부들과 동학기념사업단체 임원들이 회의를 하는데 시청 간부가 ‘동학은 역적인데 왜 기념 사업을 하느냐?’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러한 공주의 동학농민혁명 반대 분위기 때문에 공주에서는 93년 이후 동학 기념 사업을 하면서 한동안 동학농민혁명이 무엇인지 공주 시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일을 위주로 하였다.
공주에서 시민들과 함께 동학 사업을 시도한 일로는 거리 예술제가 있다. 공주 중심 시가지의 사거리 한쪽을 2시간 정도 ‘차 없는 거리’로 만들고 많은 시민 단체와 함께 거리 예술제와 먹거리 나누기 행사 등을 95년부터 2000년까지 5년 동안 시행했었다. 예술제 현장 한쪽에서는 몇 단체가 나누어 맡아 즉석에서 부침개를 붙여 행사 참가자 및 시장 상인들과 나누어 먹었다. 부침개를 담당한 단체는 재료를 준비하고 거리에서 부치고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도, 동학 행사는 그렇게 나눠야 되는 것으로 알고 진행했다. 그런데 부침개를 먹던 시장 상인 말씀이 “동아생명에서 부침개 나눠준데!”라고 하신다. 플래카드와 포스터 그리고 방송으로 동학 기념행사라고 홍보를 했어도 지역 주민들에게는 “동아생명”으로 들렸던 모양이었다.
94년 10월 29일과 30일에 전국적 규모로 공주에서 동학 기념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직후인 11월 23일에 공주의 이인면 초봉리 검바위에 “유림의병정란사적비(儒林義兵靖亂事蹟碑)”가 공주노인회, 공주유도회 명의로 세워졌다. 공주의 보수층을 대표하는 몇몇 분들이 94년 6월부터 공주에서 동학혁명 기념 사업 반대 입장의 홍보물을 학교 등에 배포했고 또한 “국가 사적지 지정 취소 촉구서”를 관련 기관에 보냈다고 했다. 위의 비에는 정통성을 가진 조선 왕조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동학군을 공주에서 관군 측 유림 의병이 동학군을 패퇴시킨 것을 기념한다고 새겨져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기념 사업이 전국에서 행해질 때 전국에서 두 군데 즉 공주와 경상도 어느 지역에선가 반대 기념비가 세워졌다고 했다. 이러한 민심 때문에 공주에서는 94년 동학 기념행사 뒤 마을 노인회관 곳곳에 기념행사 자료집을 보냈다. 그 뒤로 사무실에 어르신 한 분이 사탕 한 봉지를 들고 찾아와 고생했다고 격려한 일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아울러 전한다.
공주시는 99년 7월에 2차선의 우금티를 깊게 파서(고개를 낮춰서) 4차선으로 만들겠다고 설명회를 개최하였다. 공주의 동학기념사업단체는 터널 방식으로 하여 우금티 국가 사적지의 원상을 유지하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이미 터널 방식으로 공주터널을 개통하기도 했는데, 왜 우금티는 터널 방식을 고려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그 후 우금티 고개를 두고 전국의 동학기념사업단체와 함께 성명전을 거듭하였는데 3년 반 정도 지나 결국 문화재청이 우리 단체의 편을 들어 터널로 결정되었다.
공주시청에서 동학 기념 사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첫 사건은, 2000년 공주시 체육대회 입장식에서 사적지 우금티가 있는 금학동의 유치원생들이 위령탑의 모형을 앞세우고 죽창과 괭이 모형을 들고 입장했을 때이다. 당시 금학동 동장님이 여성이었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2004년에는 동학군이 일본군·관군 연합군과 격전을 벌였던 공주산줄기(공주에서 공주대간이라고 부른다)를 문화관광과 과장과 직원 분들과 함께 답사하였다. 그쯤에서야 공주의 동학혁명을 공주시에서 지역의 역사 자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2005년에 원광대학교 박맹수 교수님, 일본인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님 등 몇 분이 방문하여 공주 회원들과 간담회를 한 적이 있다. 그분들은 2018년에도 ‘한일시민과 함께 하는 동학기행’으로 공주를 방문하여 공주기념사업회와 교류를 하기도 했다. 박맹수 교수님은 평생을, 동학 연구에만 그치고 않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한살림운동, 생평평화모임 등을 이끌어 오셨다.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님은 일본인이지만 역사 연구를 통해 일본에서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일본군에 의한 조선인 학살 규명, 침략 전쟁 반대의 입장을 명확히 하고 한일의 양심적인 시민의 교류를 추진해 온 분이다. ‘한일시민과 함께 하는 동학기행’은 2006년부터 시작하여 작년에 13회째를 마쳤다. 동학기념사업을 한국·일본의 진보적 시민운동이 연대하는 국제 교류 사업으로 침략 전쟁 반대와 동아시아 평화를 모색하는 역할로까지 확대한 것이다.
공주의 우금티 전투가 전라도 농민군이 공주에 와서 일본군·관군 연합군에 학살된 전투라는 인식이 한동안 공주에 널리 퍼져있었다. 공주에서 아직 동학이 불온시될 때, 공주의 구상회, 조재훈 선생님이 동학에 관심을 가지고 구전 조사와 학술 연구를 해 오신 일은 꼭 기억했으면 하는 일이다. 공주동학기념사업을 계기로 ‘공주 사람들은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어떻게 활동했을까?’ ‘얼마나 주체적으로 참여했을까’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공주 지역 구전 조사를 시작했다. 공주 토박이 어른인 구상회 선생님은 이미 구전 조사를 시작하여 많은 자료를 가지고 계셨다. 나는 기회가 되는대로 구상회 선생님을 모시고 공주의 리 단위까지 샅샅이 방문하였다.
그리하여 공주에서도 싸움터 우금티뿐만 아니라 금강 이남과 이북 그리고 많은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이야기를 찾아내었다. 열 분을 동학 참여자로 국가 기관에 등록시켰으며, 2005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공주와 동학농민혁명”(박맹수, 정선원 공저)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2007년에는 지역 신문에 스물한 분의 공주 동학 참여자를 소개하며 관심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박맹수 교수 등 연구자의 연구로 공주에서 동학은 1881년부터 공주 사람 윤상오가 동학에 입도해서 충청도 서부와 전라도에 포교한 것이 밝혀졌고, 최시형 선생은 공주에 비밀리에 다섯 차례 이상 잠입하여 활동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공주는 1892년 교조신원운동의 첫 출발지이며 1894년에는 3월부터 공주의 동학군이 활동한 사실이 밝혀졌다. 1894년의 동학혁명이 전국적 상황이었듯이 공주에서도 우금티만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많은 주민들이 함께한 운동이었던 것이다. 또한 동학혁명의 계기가 된 인물인 조병갑 집안의 세거지가 공주 신풍면 평소리로 공주와 동학은 매우 깊이 얽혀 있는 곳이었다.
공주에서도 ‘박근혜대통령탄핵촛불운동’ 시작인 2016년 11월부터 2017년 4월까지 매주 1회 이상 꼬박꼬박 집회를 가졌다. 공주에서는 동학기념사업단체 회원들을 포함해 시민 단체 회원들이 주도적으로 집회를 조직하고 참여했다. ‘세월호진상규명촛불’에도 함께 했고, 2008년 ‘광우병촛불시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94년의 동학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현실의 부정부패와 불의한 정권에도 항거하는 것이었다.
우금티에는 장승들이 서있다. 1994년 동학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면서 공주의 우성 어천리 주민들이 참여해 민족의 아픔을 함께 하는 장승을 우금티에 세웠다. 그 자리에 세웠던 장승은 세월과 함께 쓰러졌지만 지금까지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공주 지역 시민 사회 단체들이 모여 각 단체의 이름으로 장승을 세우고 새해 인사를 함께 나누어 왔다. 2017년에는 ‘촛불민심’을 몸에 새긴 장승을 세웠는데 어느 땐가 ‘촛불민심’ 등 장승 몇 개의 몸이 토치램프로 글씨를 알아 볼 수 없게 그을려 있었다. 역사의 진보와 함께하는 문화 행사에 대한 폭력적인 대응에 대해 우리들은 새로운 장승을 계속 세우는 것으로 대처하기로 했다.
1894년 동학혁명의 격전지 우금티가 있는 공주에서 동학한다는 것, 동학기념사업을 한다는 것은 우금티의 동학 정신을 가슴에 지니고 지역의 보수적 민심을 넘어서 인간의 자유로운 해방, 지역의 시민운동, 민주주의 그리고 통일 운동에도 함께하는 것이다. 매년 공주 지역에서는 정월 보름날 우금티에 모여 새로운 장승을 세우며 민족의 비원을 넘어서는 통일을 갈망하며 새해 새 결의를 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