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율 스님이 얻은 것과 잃은 것 / 조성택 | |||||||||
조성택 (본지 주간 / 고려대 철학과 교수) | |||||||||
| |||||||||
지율 스님의 ‘도롱뇽 살리기’는 새만금을 살리기 위한 수경 스님의 ‘삼보일배’와 함께 한국 근현대사에서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한국불교의 부정적 이미지를 새롭게 바꾼 사건이다.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또 그 동안 주요 국책 사업에서 형식적으로 진행되었던 환경영향 평가의 엄밀성과 구체성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지율 스님의 노력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면이 있다. 지율 스님의 행동은 이러한 긍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환경 운동 방향과 환경 운동에서의 종교인의 역할과 관련하여 많은 우려를 낳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지율 스님의 행동의 한계는 곧 한국에서의 환경 운동의 한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 책임은 지율 스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불교인을 포함한 한국 사회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래의 바람직한 환경 운동의 방향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지율 스님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대해 먼저, 지율 스님에 대한 세간의 몇몇 비난들이 과연 정당한 비난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지율 스님을 변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몇몇 잘못된 비난의 논거들이 이번 사태에 대한 문제의 본질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 측과의 합의로 지율 스님이 단식을 중단한 이후 스님에게 쏟아진 많은 비난들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공사 중단으로 인해 2조 5천 억에 달하는 국고의 손실이 생겼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단식이 수행자답지 못한 극단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일부 대중 언론 매체들과 네티즌들이 이 두 가지를 근거로 지율 스님을 비판하고 있으나, 이는 정당하지 못한 비난일 뿐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호도할 위험이 있다. 우선, 중단된 공사로 인한 국가 재원의 손실을 지율 스님에게 책임지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먼저 실시된 환경영향 평가가 철저하고 공정하게 실시되었다면, 그래서 그 결과에 대해 실질적이며 도덕적인 정당성을 정부가 자신할 수 있었다면, 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지율 스님의 단식에 굴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는 공사 전에 실시된 제1차 환경영향평가가 행정 절차상 요식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보다 공정하고 철저한 환경영향 평가를 해야 한다는 스님의 주장을 반박할 아무런 실질적이며 도덕적인 명분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공사 시작 전에 당연히 했어야 할 환경영향 조사를 철저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국가 재원의 낭비는 마땅히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 정부 측과 지율 스님이 합의한 대로 제2차 환경영향 평가에서 환경에 영향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더라도, 소위 ‘2조 5천 억’의 책임을 지율 스님에게 묻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아직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재조사를 위한 공사 중단과 그것으로 인한 국고의 손실의 책임을 지율 스님에게 묻는다는 것은 부당하며, 그것은 정부의 잘못을 한 개인에게 전가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세간에서 ‘단식은 수행자답지 못한 극단적 행동’이라고 지율 스님을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정당하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 단식은 극단적이다. 더구나 ‘시위’용이나 ‘협박’용이 아니라 정말로 주장의 관철을 위해 목숨을 담보로 한 단식이라면 극단적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종교 수행자만이 할 수 있는 선택이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던지겠다고 하는 것은 수행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고, 대승불교의 핵심인 보살행의 실천이다. 그래서 보살행을 실천하고자 한 지율 스님의 행동을 ‘단식’은 극단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하는 것은 수행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얘기라고 본다. 보살의 이타행이 레토릭이거나 헛된 구호 정도인 오늘날 한국불교의 현실을 생각하면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고자 한 지율 스님의 ‘단식’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불교인들의 마음을 숙연케 하는 보살행의 실천인 것이다. 물론 환경 보호라는 대전제는 옳은 일이지만, 반드시 지율 스님의 생각대로 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이 있을 수 있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환경 보호를 최우선시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지율 스님과 일부 환경 단체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 점에서 지율 스님을 비판할 수는 있지만, 중생 구제라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한 ‘단식’ 그 자체를 두고 수행자답지 못한 행동이라 비난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가릴 뿐 아니라 온당치 못하다고 본다. 한편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지율 스님이 단식이라는 극단적 행동을 했다는 비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역사적으로 단식은 ‘정치적 행위’이며, 정치적 약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한 유효한 방법이었다. 한국의 경우 나라를 잃었을 때,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단식이라는 저항 수단을 택했고, 일정한 성과를 얻었다. 지율 스님이 2003년 2월부터 2005년 2월까지 만 3년 간 네 차례의 단식을 하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스님에게는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부와 정치인들의 계속되는 실언과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약속 파기에 항의하는 유일한 수단은 어쩌면 단식 이외에는 없었던 것 같다. 왜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지율 스님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단식은 그 방법 중의 하나고, 이전에 했던 일에 비해 극단적인 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처음부터 무작정 단식을 했던 것도 아니고 농성과 항의 그리고 법정 투쟁 등 제도권 내에서, 그리고 법치라는 테두리 내에서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권력의 막강한 힘과 정치인들의 빈말에 대한 좌절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법정의 재판 결과에 승복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것은 환경 보호에 관한 한국 법률 구조의 후진성을 모르는 이야기이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책임하에 환경 평가를 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형식적이며 허술한지 몰라서 하는 얘기다. 민주화 과정에서 단식 투쟁이 법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자연법적 상식과 일반 대중의 여론에 호소한 것처럼, 지율 스님은 막강한 공권력과 환경 보호에 관한 법률의 허술한 구조에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한 방법으로 단식이라는 투쟁 수단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단식에 이르는 일련의 진행과정을 살펴보지 않고, 만약 단식의 극단성만을 일방적으로 비난한다면 환경 보호에 관한 허술한 제도적·법률적 환경 그리고 정치인들의 빈말의 남발이 허용되는 한국 정치문화의 고질병을 간과하게 되어 사태의 본질을 외면하게 되는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국고 낭비’ 그리고 ‘단식’ 그 자체가 지율 스님을 비판하는 논거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보다 바람직한 환경 운동의 미래를 전망할 때, 지율 스님의 행동은 몇 가지 잘못된 점이 있으며 그 잘못된 점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우선, 중생을 구하고자 한 수행자의 순수한 동기를 생각할 때 단식 그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한 동기의 순수함만으로 단식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생떼를 쓰는 단식도 있고, 민주적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단식도 있듯이 단식의 정당성은 그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의 정당성에 있다. 환경 보호는 공익적인 것이다. 따라서 환경 보호를 위한 단식은 얼마든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천성산의 자연 환경을 지키는 방법에 있어 지율 스님의 주장이 반드시 옳으냐의 문제이다. 환경론자라고 해서 무조건 개발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개발론자라고 해서 환경 파괴에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 우선 순위를 두느냐에 따라 환경론자인지 개발론자인지의 구분이 이루어질 뿐이라고 본다. 그런데 ‘환경’과 ‘개발’이 상호 충돌하는 것은 어느 쪽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행복을 주느냐 하는 공리적인 사실 판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당장 불편해도 미래를 위해 ‘환경’을 택한다든지 아니면 당장 많은 사람에게 구체적 혜택이 돌아가는 ‘개발’을 선호한다든지 하는 ‘가치 판단’의 문제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경 운동은 일방적 주장으로 일관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의 작업이 요청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가치에 근거한 두 주장이 합의점을 찾기란 무척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환경 운동이 제대로 정착된 미국이나 독일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대화와 설득, 계몽, 교육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합의를 이끌어 가는 것이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지율 스님의 경우를 보면 그러한 설득과 사회적 합의를 끌어가는 과정이 생략되었거나 아니면 있다 하더라도 부족했다. 지율 스님의 한계는 여기에 있다. 또한 그 한계는 한국 환경 운동의 한계이며 한국 사회의 한계이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지율 스님과 환경 운동가 혹은 환경 단체가 천성산 개발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처럼 비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독재와 민주, 공권력의 남용과 그에 대한 민중적인 저항과 같은 이분법적인 구도로 환경과 개발을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환경 담론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지율 스님은 천성산 터널공사의 무모함에만 항의할 것이 아니라, 환경과 개발을 대립적인 것으로만 보고 일방적인 자기 주장 때문에 충분한 사회적 합의를 끌어 가지 못하는 환경 운동의 현실에 대해서도 항의를 했어야만 했다. 지율 스님의 행위가 종교 근본주의적으로 비춰지고 산승의 순진한 무모함으로 비추어진 것은 환경에 관한 스님의 입장이 중도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지상주의의 흑백의 논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분권화된 현대 사회에서 환경 운동이 운동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어떤 편향성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종교인의 행위는 세속의 사회 운동 단체와 달라야 할 것을 기대한다. 그것은 한 집단의 정체성이나 특정 입장을 넘어서는 초월성이다. 그렇지만 환경과 개발을 상호 대립적인 것으로만 보고 있는 현재의 환경 담론의 한계를 지율 스님은 뛰어넘지 못했다. 더구나 불교의 입장은 중도가 아닌가? 중도가 어정쩡한 중도 봉합이 아님은 물론이다. 불교적 중도는 흑백의 이분법적 논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환경을 지키자면 개발을 포기하는 것이고, 개발을 하자면 환경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지금의 환경 담론의 해독을 극복할 있는 것이 바로 불교의 중도이다. 또 스님은 자신의 극단적 희생을 강조한 나머지 환경 운동이 대중적이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가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명망가라든지, 자기희생을 전제로 하는 엘리트주의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문제를 더 악화시킨 측면이 있다. 더구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장기간의 단식은 문제의 본질을 가리고 오히려 대중들의 천박한 호기심만 자극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물론 사태가 그 지경으로 간 것에는 스님의 책임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황색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언론의 책임이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론의 그러한 행태는 어제 오늘의 문제만이 아니고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환경 운동과 같은 중요한 사회 운동에 있어 한 사람의 희생이라든지 영웅적 행위를 경계하는 것이고, 지율 스님에게보다 신중한 처신을 부탁하는 것이다. 중생 구제를 위해 수행하는 승려의 경우 한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까운 것일 수는 없고 당연히 칭송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사안에 따른 방편적 지혜가 요청되는 것으로,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또 다른 근본주의자의 순진한 무모함이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이 있다. 스님이 단식을 풀면서 “저의 미숙함으로”라고 말한 것은 그러한 방편적 지혜의 부족함을 참회한 것이라 이해하고 싶다. 수행자는 앞서 가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는 장수가 되기보다는 다소 방향이 틀리고 속도가 늦더라도, 무리에 어울려 함께 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것은 자연 환경만이 아니다. 자연 환경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사회 환경이다. 사회 환경이란 일방적 주장과 흑백의 논리가 아니라 대화와 설득으로 합의점을 찾아가는 절차적 과정을 말한다. 보다 바람직한 삶을 보장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자연 환경 못지 않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바로 사회 환경이다. 우리는 자연 환경을 보호하고자 사회 환경을 해치는 일은 없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지율 스님은 사회 현안에 못지 않게 자신이 몸 담고 있는 불교계 내부에 대한 비판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불교 사찰이 무분별한 증축과 개축으로 자연 경관과 환경을 훼손하는 일이 많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종교계의 일이라 세간의 언론이나 일반 여론은 비판을 조심하고 삼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우리 불교인들은 알아야 한다.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집안’ 일에 대한 자성과 비판을 게을리할 때, ‘바깥’ 일에 대한 비판의 도덕적 정당성은 적을 수밖에 없으며 그 비판에 대한 공감 또한 적을 수밖에 없다. ‘삼보일배’ 그리고 지율 스님의 ‘단식’으로 불교계는 한국 사회의 환경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제 불교계 바깥만이 아니라 우리 ‘집안’ 일에 대한 냉엄한 비판과 자성에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중생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한’ 불교 본래의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사족이지만 꼭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그것은 지율 스님의 단식을 폄하하는 조갑제에 대한 불교계의 논평에 관해서이다. ‘불교언론대책위원회’의 명의로 나온 이 성명서는 그 내용이 참으로 비불교적일 뿐 아니라 그 표현이나 언사 또한 막말과 욕설이 오가는 시정잡배의 싸움질 수준이다. 조갑제의 글 자체는 불교계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기 충분하고, 또 비판을 받아 마땅한 글이다. 그렇다고 “창자가 없는 인간” “오장육부가 비틀린 인간” “인간이기를 포기한 정신 이상자”라는 감정적이며 막말 수준의 성명서는 도저히 중생의 정신적 스승임을 자임하는 종교계에서 나올 수준이 아니다. 일천제에게도 불성이 있다는 보편적 불성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 무한히 참고 베푸는 보시와 인욕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근본이 아닌가? 잘못을 지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따끔하게 지적하되 그 근본에는 관용과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번 불교언론대책위원회의 성명서에는 그러한 불교 본래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글의 형식적 요건도 중요하다. 한 개인의 푸념이 아니라 불교계를 대표해서 나가는 글이라면 명문(名文)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문법에 맞는 글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교계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 2005년 봄 |
2019/03/26
불교평론
불교평론
Labels:
조성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