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 하나님 ㅡ 함석헌
1. 하나님
기독교 교리에서 본 세계관이라는 제목 아래 4회에 걸쳐 여러분 앞에서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목과는 좀 틀리는 말을 하겠습니다. 본래 이 강좌를 주무하시는 이와 약속을 할 때는 단순히 기독교 교리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기독교의 개론 비슷한 것이라도 이야기해보나 하는 생각으로 왔는데, 지금 와보니 위와 같은 제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 기대와는 좀 틀리는 말이 될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틀리고 맞고가 없는 것입니다. 강좌를 개최한다, 강의를 하마 약속한다 하면서, 그와 같이 제목에 이동이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제목이란 있다면 한 제목이 있을 뿐이지, 무슨 여러 가지 제목이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억만고(億萬古) 억만 인(人)을 통해 말은 한 말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말이 하나를 말하는 것이지, 딴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틀린 말을 해도 결국 그 말일 것입니다.
기독교의 개론 비슷한 것을 말하려 한다 했지만, 그것도 안된 말입니다. 기독교에 개론이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개론이란 학문적인 말인데 기독교는 학문은 아닙니다. 기독교를 학문탐구의 태도로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종교입니다. 종교는 신앙적 태도로 임하는 것이지 지식탐구의 태도로 대할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 개론이란 무용한 빈말입니다. 신앙은 구체적 생활이요, 특수적 경험입니다. 적어도 나는 기독교의 개론을 말할 자격도 없고 할 심산도 없습니다. 개론을 말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대체 기독교를 말할 수조차 없습니다. 첫째로 ‘기독교’라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종교는 내가 말하기에는 너무도 큽니다. 기독교 자체를 나는 다 모릅니다. 옛 사람 말에 “새가 나무에 깃들여 잠에 한 가지면 족하고, 쥐가 바다에서 마심에 배가 차면 그만일 뿐”이라고, 나는 내가 거기서 마셔서 내 영의 갈함을 멈추고, 거기에 깃들여서 내 맘의 평안을 얻었음을 알 뿐이지. 기독교란 그 나무는 이만하더라, 그 진리의 바다는 이런 것이다 하고, 그 자체를 안 것처럼 소개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종교에 객관적 신앙이라는 것은 없는 법입니다. 모두 다 각각 자기의 산 경험이 있을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설명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은 다 빠져버린 종교의 잔해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부득이 기독교의 개론 비슷한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여러분께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따뜻한 심정을 가지고 임해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학문연구가 아닙니다. 수단이나 방법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주인생에 대해 적극적인 열심을 가지고, 성의를 가지고 대하자는 말입니다. 구도심을 가지란 말입니다. 여름철이면 반드시 유행하는 수양회기분으로 오지 말고 진실한 맘으로 오란 말입니다. 더위를 피해 시원한데 가서 해수욕도 하고, 약물도 마시고, 레코드도 틀어놓고, 기분좋게 지내면서 일변으로 명사의 유익한 말도 듣자는 것이 소위 수양회지만, 그런 것으론 아무것도 참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구도라니, 종교문제는 길을 잃은 사람이 길을 찾는 심리로 대하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생사의 문제입니다. 알면 살고 모르면 죽는 것입니다. 얻으면 구원이고 못 얻으면 멸망입니다. 그래 따뜻한 심정을 가지고 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앞의 강연에서 불교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불교사상(佛敎史上)에
혜가단비(慧可斷臂)라는 사실이 있습니다. 혜가란
불교의 큰 종파의 하나인 천태종(天台宗)의 제 2세
교조의 이름인데, 그가 젊어서 그의 선생
달마대사(達磨大師)에게서 도를 배우려 할 때
선생이 그 도를 구하는 데 얼마나한 열심이 있느냐
물으매 스스로 자기 팔을 끊어 바쳐서 그 성의를 보였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도를 깨닫고자 하면 그러한 열심이 있지 않고는 아니 됩니다.
혜가단비(慧可斷臂)라는 사실이 있습니다. 혜가란
불교의 큰 종파의 하나인 천태종(天台宗)의 제 2세
교조의 이름인데, 그가 젊어서 그의 선생
달마대사(達磨大師)에게서 도를 배우려 할 때
선생이 그 도를 구하는 데 얼마나한 열심이 있느냐
물으매 스스로 자기 팔을 끊어 바쳐서 그 성의를 보였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도를 깨닫고자 하면 그러한 열심이 있지 않고는 아니 됩니다.
그럼 그 말은 그만 하고 이제 본론에 들어갑시다. 제목이 없는 이상 서론 본론이 따로 있으리만, 기독교라 했고 세계관이라 이미 이름을 붙였으니 나 자신이 살고자 노력하는 동안에 성경을 통해 체험한바 중요하다 생각하는 한두 가지를 이야기해보자는 것입니다. 참말 단순한 한 개 이야기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말해야 할 것은 유일신(唯一神)
신앙입니다. 성경은 신은 오직 하나라 가르치고, 그를 믿으라 명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하면, 흔히 하나님 있는 증거가 무어냐, 그것을 보여주면 믿는다, 증명이 되지 않는 것을 믿으면 미신이 아니냐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있는 증거를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증명을 요할 것 없이 있는 것으로 스스로 인정하고 그에 대해 인생이 어떻게 대할 것을 가르칩니다. 마치 수학의 공리, 정리 같아서 설명을 기다리지 않고 그런 줄로 인정하고 그것을 근거로 모든 사물 모든 현상을 설명합니다.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무엇인지 하나가 왜 하나인지, 하나에 하나를 가하면 왜 둘이 되는지, 수학으로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수가 있어서 수학이 생긴 것이요, 수학이 있어서 수를 지어낸 것이 아닌 것처럼, 신이 있어서 종교가 생겼지, 종교가 있어서 신을 만들어낸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종교로 신의 존재를 증명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종교로써 못한다면 그 밖의 것으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신앙입니다. 성경은 신은 오직 하나라 가르치고, 그를 믿으라 명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하면, 흔히 하나님 있는 증거가 무어냐, 그것을 보여주면 믿는다, 증명이 되지 않는 것을 믿으면 미신이 아니냐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있는 증거를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증명을 요할 것 없이 있는 것으로 스스로 인정하고 그에 대해 인생이 어떻게 대할 것을 가르칩니다. 마치 수학의 공리, 정리 같아서 설명을 기다리지 않고 그런 줄로 인정하고 그것을 근거로 모든 사물 모든 현상을 설명합니다.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것은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가 무엇인지 하나가 왜 하나인지, 하나에 하나를 가하면 왜 둘이 되는지, 수학으로 그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수가 있어서 수학이 생긴 것이요, 수학이 있어서 수를 지어낸 것이 아닌 것처럼, 신이 있어서 종교가 생겼지, 종교가 있어서 신을 만들어낸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종교로 신의 존재를 증명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종교로써 못한다면 그 밖의 것으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이성의 일입니다. 이성은 이 상대세계 즉 유(有)의 세계를 처리하기 위한 기구지 절대세계에 대해서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생명이란 절대와 상대의 두 세계에 걸쳐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생명은 다 상대적인 유한한 존재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이성이 생명의 근본을 찾아내지는 못합니다. 또 상대계에 만족하고 있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생명의 근본 바탈은 절대에 지향하는 데 있습니다. 생명의 최고 현상인 정신활동에서 보면, 그 추구하는 것은 진선미인데, 진선미는 상대계에는 없습니다. 정신적 인격이 실현하는 모든 진이란 진, 모든 선이란 선, 모든 미란 미가 다 상대적인 것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인 생명이 본질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결코 그런 유한한 진이나, 선이나, 미가 아닙니다. 절대적인 것입니다. 유의 세계엔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찾습니다. 그 자리가 곧 하나님입니다. 이성이 제 힘껏 말한 것이 진선미지만, 진선미라해서 그 궁극의 자리가 표시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진이 되고 선이 되고 미가 되는 자리는 모든 표시를 지나친 자리, 이름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신관에도 학문적으로 말하면 다신(多神)이니, 범신(汎神)이니, 유일신이니 하는 분류가
있지만 그 역시 상대적인 설명이지 신이라면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란 하나니, 둘이니, 여럿이니 하는 하나가 아닙니다. 수로써 표시할 수 없는 절대라는 의미의 하나입니다. 여럿 있는 것은 신은 아닙니다. 신에 대한 한 개 설명입니다.
없는 것을 찾습니다. 그 자리가 곧 하나님입니다. 이성이 제 힘껏 말한 것이 진선미지만, 진선미라해서 그 궁극의 자리가 표시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진이 되고 선이 되고 미가 되는 자리는 모든 표시를 지나친 자리, 이름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신관에도 학문적으로 말하면 다신(多神)이니, 범신(汎神)이니, 유일신이니 하는 분류가
있지만 그 역시 상대적인 설명이지 신이라면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란 하나니, 둘이니, 여럿이니 하는 하나가 아닙니다. 수로써 표시할 수 없는 절대라는 의미의 하나입니다. 여럿 있는 것은 신은 아닙니다. 신에 대한 한 개 설명입니다.
인간이란 그러한 신을 찾는 것입니다. 왜 찾느냐 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라는 것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경우에 하는 말입니다. 종교는 있는 것이지, 존재하는 종교지, 이성으로 선택을 자유로 할것이 아닙니다. 종교는 필연적인 것입니다.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필연적입니다. 하나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필연입니다. 사람은 종교를 가지거나 아니 가지거나 종교적입니다. 종교를 믿을 것이냐 아니냐, 신이 있느냐 없느냐, 토론하고 회의하고 거부까지 하리만큼 저는 종교적인 것입니다. 그만큼 저는 절대를 지향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지가 지성을 다하여 막다른 골목에 들어갈 때 신앙은 시작됩니다. 고로 신의 존재를 증명해주어야 믿겠다는 말은 실증주의로 인하여 잘못된 이성적 요구에서 나오는 모순입니다. 증명을 얻은 후에 믿는 것이 아니고 믿은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못 견디는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이지가 지성을 다하여 막다른 골목에 들어갈 때 신앙은 시작됩니다. 고로 신의 존재를 증명해주어야 믿겠다는 말은 실증주의로 인하여 잘못된 이성적 요구에서 나오는 모순입니다. 증명을 얻은 후에 믿는 것이 아니고 믿은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인격신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존재하는 이요, 따라서 인격적으로 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자라 하더라도 그 절대적인 것을 우리가 관념으로 파악할 때는 도리니 원리니 하는 형식으로 할 수도 있습니다. 범신관이니, 우주정신이니, 제일원리니 하는 말은 다 그러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신은 인격적인 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이 아마 이성을 존중하는 현대인에게 제일 시인하기 어려운 문제일 것입니다. 물론 인격신이라 해서 소박한 옛날 사람이 생각했던 모양으로 저 푸른 하늘 위에 수염이 허연 노인이 위엄의 보좌 위에 앉아 있는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열심 있는 정통을 자랑하는 광신자가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 주장해도 벌써 이 인간의 맘에서 다 지나갔습니다. 어렸을 때 뇌성이라면 하늘 위에서 맷돌을 갈아서 나는 소리라고 믿던 그림이 장성한 후는 다시 올 수 없이 지나가버린 것처럼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깊고 높은 의미에서 하나님은 인격적인 이입니다.
먼저 신관(神觀)은 변천 발달해왔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불변하다는 것과 신관은 발달한다는 것을 섞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야 영원불변이지, 변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하나님의 모습은 부단히 변해왔고 또 변해야 옳을 것입니다. 생명은 산 것입니다. 우리 정신이란 자라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의 지혜와 행동도 자라는 것입니다. 종교란 우리가 영원불변하는 그 하나님을 점점 더 가까이 나가며 알고, 교섭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라갈수록 신관은 변할 것입니다. 그보다도 하나님이 자기를 점점 보다 더 자세히 보다 더 참스럽게 우리게 드러내 보여주시므로 우리가 자랍니다. 신앙은 자라야 신앙입니다. 고정 경화된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불변하다는 것과 신관은 발달한다는 것을 섞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야 영원불변이지, 변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하나님의 모습은 부단히 변해왔고 또 변해야 옳을 것입니다. 생명은 산 것입니다. 우리 정신이란 자라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의 지혜와 행동도 자라는 것입니다. 종교란 우리가 영원불변하는 그 하나님을 점점 더 가까이 나가며 알고, 교섭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라갈수록 신관은 변할 것입니다. 그보다도 하나님이 자기를 점점 보다 더 자세히 보다 더 참스럽게 우리게 드러내 보여주시므로 우리가 자랍니다. 신앙은 자라야 신앙입니다. 고정 경화된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신관의 발달을 두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적 정신발달의 면에서이고, 하나는 역사적 사회진화의 면에서입니다. 사람의 정신발달 과정을 보면 소박 단순하게 구체적 현실적인 것에 붙은 데서부터 점점 추상적 정신적인 것으로 자라나갑니다. 거기 따라 사물을 이해하고 교섭하는 정도가 점점 높고 넓어갑니다. 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 편으로 하면, 부족함이 없이 단번에 다 이미 계시한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라는 인간의 정신은 점진적으로 계단적으로 발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원시적인 시대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보아도 주로 공포와 호기심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가 어린아이들에게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 그때는 물령숭배니 생령숭배니 하는 것으로 될 수밖에 없었고, 마법적으로 그 능력을 주시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마침내 정신적 인격 자각에까지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인제 저의 최고 활동은 인격 활동입니다. 그는 인격이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가장 높고 깊은 인식에 이를 수 있고 가장 완전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의미에서 인간이 가장 깊이 가장 완전히 하나님을 안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적으로 하면 이법적인 신을 생각하는 것이 최고일는지 모르나
, 철학은 철학에만 멈출 수 없습니다. 모든 위대한
철학은 다 종교적인 것에 통하고야 말았습니다. 맘을 다하는 자는 하늘을 아는 데까지 가고야 맙니다.
, 철학은 철학에만 멈출 수 없습니다. 모든 위대한
철학은 다 종교적인 것에 통하고야 말았습니다. 맘을 다하는 자는 하늘을 아는 데까지 가고야 맙니다.
사회의 역사적 발달을 보면 거기서도 마지막에는 인격적 자각에 이르고야 말았습니다. 원시사회는 부족적 씨족적이어서 개인적 자각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점점 더 자각이라는 데 이르렀습니다. 상하만고(上下萬古)를
통하여 아메바 같은 단세포에서부터 문화인이라는 오늘에 이르는 동안의 역사의 나가는 방향을 보면 정신적 인격의 완성이라는데로 놓여 있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세한 부분을 보면 부침 곡절이 많았고 금후도 허다하게 많을 것이지만, 그 대체의 방향이 정신적인 인격을 완성하자는 것은 변할 줄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가설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이 전제 아니고는 모든 역사적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면에서 보아도 절대자를 가장 분명히 보았다면 필연적으로 인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격신을 믿는 것이 현대인에게 어렵다는 것은 신을 초월적으로 볼 것이냐, 내재적으로 볼 것이냐 하는 의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성인인 현대인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즉 모든 것을 인과율에 비추어 파악하려 하기 때문에 자연 초월신보다는 내재적인 신을 보려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확실히 많은 우상적인 미신에서 건졌습니다. 그러나 내재만을 주장하는 사상은 우리를 과거의 모든
소우상(小偶像에서 건지면서 알지 못하는 동안에
보다 큰 모든 우상의 근본 본존(本尊)이 되는 대우상의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아’라는 우상입니다.
통하여 아메바 같은 단세포에서부터 문화인이라는 오늘에 이르는 동안의 역사의 나가는 방향을 보면 정신적 인격의 완성이라는데로 놓여 있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세한 부분을 보면 부침 곡절이 많았고 금후도 허다하게 많을 것이지만, 그 대체의 방향이 정신적인 인격을 완성하자는 것은 변할 줄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가설이 아니고 사실입니다. 이 전제 아니고는 모든 역사적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면에서 보아도 절대자를 가장 분명히 보았다면 필연적으로 인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격신을 믿는 것이 현대인에게 어렵다는 것은 신을 초월적으로 볼 것이냐, 내재적으로 볼 것이냐 하는 의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성인인 현대인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즉 모든 것을 인과율에 비추어 파악하려 하기 때문에 자연 초월신보다는 내재적인 신을 보려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확실히 많은 우상적인 미신에서 건졌습니다. 그러나 내재만을 주장하는 사상은 우리를 과거의 모든
소우상(小偶像에서 건지면서 알지 못하는 동안에
보다 큰 모든 우상의 근본 본존(本尊)이 되는 대우상의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아’라는 우상입니다.
성경은 본래부터 인간의 깊은 속에 들어 있어 생명의 본원인 하나님에 대항을 하여 혼란을 일으킨 것이 이 자아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에덴동산의 인류타락이란 곧 이것입니다. 자아는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아닙니다. 피조물이란 것, 상대성이란 것이 저가 아무리 발달해도 벗을 수 없는 본질적인 한계입니다. 고로 신이 되잔 것이 인간의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저는 그것을 주장하는 찰나 곧 사탄으로 우상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이 의미에서 이 피조물성 때문에, 내재적 신관은 철학적으로 가장 이성을 만족시키면서도 신앙적으로 거부당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인 이상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일 것입니다. 내재만이라 해도 모른 것이고 초월만이라 해도 안된 말입니다. 고로 이것은 이론적으로 밝힐 수는 없고 시적으로 비유적으로 표현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믿는 신앙입니다. 아버지는 나를 초월하시면서 내 안에 있습니다. ‘나’에 대해 ‘너’면서 또 동시에 ‘나’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이신 이입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독일무이(獨一無二)하기 때문에 거룩합니다. 참입니다.
거룩과 참은 절대자의 자기주장입니다. 히브리인이
얻어들은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 곧 ‘있어서 있는 자’입니다. 하나이신 이의 이름이 있을 리 없지만,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절대자를 찾는 안타까운 인간에게 가(假)로 부득이해 일러준 이름이 그것입니다. 스스로 한계가 있으면서 한없는 것을 찾는 이성에게 할 말이 그 이상 더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절대를 찾는 인간도 그 혼속에 자아 주장을 가졌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뚫으려 영악을 부리면 부릴수록 그는 절대의 벽에 부딪쳐 자기의 더러움, 자기의 거짓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 근본 모순이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그는 자기를 가장 더럽고 가장 거짓된 것으로 자인할 때 거룩과 참에 참여합니다.
거룩과 참은 절대자의 자기주장입니다. 히브리인이
얻어들은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 곧 ‘있어서 있는 자’입니다. 하나이신 이의 이름이 있을 리 없지만,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절대자를 찾는 안타까운 인간에게 가(假)로 부득이해 일러준 이름이 그것입니다. 스스로 한계가 있으면서 한없는 것을 찾는 이성에게 할 말이 그 이상 더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절대를 찾는 인간도 그 혼속에 자아 주장을 가졌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뚫으려 영악을 부리면 부릴수록 그는 절대의 벽에 부딪쳐 자기의 더러움, 자기의 거짓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 근본 모순이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그는 자기를 가장 더럽고 가장 거짓된 것으로 자인할 때 거룩과 참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은 산 인격입니다. 산 인격이기 때문에 영원합니다. 영입니다. 영원이기 때문에 모든 유한적인 존재를 낳을 수 있습니다. 영적이기 때문에, 정신적이기 때문에 모든 육적인 것의 원본이 될 수 있고 또 그 궁극의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형질을 쓴 인간도 영원을 바라고 영화하기를 꿈꿉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는 이 유한과 이 물질을 못 떠납니다. 그리하여 지상천국을 그립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영원의 바퀴에 찍히고 영의 날개에 부딪쳐 미진으로 되어 어둠 속에 가라앉는 자기를 발견합니다. 여기 근본 모순이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그는 자기를 가장 하잘것없는 것으로 가장 어둔 것으로 자각할 때 영원한 영으로 화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입니다. 인간이 발견한 최고의 비유가 이것입니다. 만물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만물의 벌어진 관계도 사랑입니다. 만물의 돌아가 닿을 곳도 사랑입니다. 그는 ‘나’속에 한없는 ‘너’를 두시는 이요, 무한한 ‘너’ 속에 ‘나’를 보시는 이입니다. ‘나’면서 ‘남’입니다. ‘남’이면서 ‘나’입니다. 인간은 죽음같이 텅 빈 듯한 하늘을 향해 ‘아버지’ 하고 부를 때 자기 모세관 속에 우주의 맥박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