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8

Namgok Lee | 에릭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 읽기

(3) Namgok Lee | Facebook


둘째 아들이 신청해서 보내준 책이다.
'리얼 유토피아'라는 책은 둘째가 보기에 내 취향과 맞을 것 같다고 권한 책이고,

'전라디언의 굴레'는 내가 호남인이어서(15세까지는 고향인 전남 함평에서 60세부터는 장수에서 18년 그리고 지금은 익산)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지금의 꽉막힌 정치지형을 이해하고 풀어가기 위해서 일독을 권하는 것 같다.

'조봉암 기록'은 옛 주소로 와서 늦게 전달 받았다.
노년에도 책을 권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을 읽고 싶은 내가 있으니, 다른 복은 몰라도 책 복은 있는 것 같다. ㅎㅎ

시력(視力)을 생각해서 하루 한 장 씩 읽고 있다.
주로 광주(光州) 권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고, 내가 전라도에 돌아온 것은 60의 나이에 전북 장수였기 때문에 실감이 좀 다른 것은 있지만, 지금 전라도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데 실사구시하려는 점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이견(異見)이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젊은 학자의 분석이 발전적인 담론을 창조하는 활발하고 생산적인 대화와 토론의 한 장(場)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 읽은 2장(章)의 주제는 ⌈‘산업화 열차의 꼬리칸’이라는 문제⌉다.
짧은 감상이다.
‘산업화 열차‘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과거다.
이제 원튼 원하지 않든 ‘대전환’의 시대다.
문명의 대전환과 그것을 위한 사상(가치체계)ㆍ 정치 ㆍ 경제의 전환이 이제 출발하는 열차다.
‘산업화 열차에서는 꼬리칸’이었지만, ‘새로운 전환의 열차에서는 선두칸’이 될 수 없을까?
상생과 호혜의 문명을 위해서는 이미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에 걸쳐 많은 전통이 응축된 곳이다.
내가 모악산이 보이는 익산의 주거지에서 느끼는 심정이다.
비록 실패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저류에는 맥맥히 흐르고 있는 정신이 있다.
이것을 현대적 조건에 맞게 살린다면 ‘이 새로운 열차에는 선두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지금까지와 같은 경쟁과 갈등의 구조에서의 선두가 아니다.
아들이 이 책과 함께 보내준 책이 ‘리얼 유토피아’인데,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선두칸에 대한 암시인 것 같다. ㅎㅎ

에릭 올린 라이트 저 ‘리얼 유토피아’를 읽기 시작했다.

오늘은 ‘민주평등주의적 가치에 근거한 리얼 유토피아 구상’이라는 서문과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참을 수 없는 불확실성의 미래’라는 서문을 읽었다.
서문을 읽으면서 우선 들었던 생각은 한국에서는 왜 이런 학문적 작업을 시도한 학자나 사상이론가들이 출현하지 못했을까에 대한 아쉬움이다.

특히 사상 때문에 전쟁까지 치룬 나라에서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들이 좌파에게서 나오지 않고, 오히려 증오와 적대의 정서 속에서 정체하거나 퇴영적이어서 결국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따라서 진보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상실하게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는가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두 번째는 그 목차를 보면서 내가 학문적인 글을 읽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잘 읽어낼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도 되지만, 서문들을 통해 그 접근 방식에 동감하는 바가 커서 이번 기회에 이런 학문적인 글을 읽는 연습을 해보고 싶다는 열정(?)이 생기기도 한다.
18개국의 나라에서 50회 이상 강연을 한 것으로 소개되는데, 한국이 빠져 있는 것도 눈에 띈다.
한국에서 실사구시적인 태도를 취했던 좌파이론가들이 이른바 좌파 진영에서 배척되었던 그런 풍토에서 벗어나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이상주의’가 동서양의 이론과 정신들을 회통하면서 출현하기를 고대하게 된다.
이제 그런 때가 되었다고 본다.
이 책을 소개하고 보내준 아들에게 감사한다.

얼음은 거의 없다.
날씨는 쾌청한 것 같지만, 내게는 그 맑음을 측량하는 척도가 생겼다.
모악산이 모습을 보이는 정도다. ㅎㅎ
요즘 새벽 독서는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를 보고 있다.
스스로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잇는 학자라고 자기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학자의 글이라 한번에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책의 부제에 있는 것처럼 '좋은 사회를 향한 진지한 대화'에 어울리는 내용이다.
즐겁게 읽고 있다.
나보다 두 살 연하인데, 2019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번 만날 기회가 있을까하는 기대도 있었는데...

Namgok Lee
183 F2ebr0utatar7y ato 190g6:2i434d  · 
한국의 좌와 우, 보수와 진보는 연합정치의 상대로 서로 될만한 정당으로 진화해야 한다.
내가 오래전부터 일관되게 제안하는 것이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는 듯했다.
그러나 역사는 대단히 다이내믹해서 예상치못한 상황들(어찌보면 우연인 것 같지만, 내재된 모순의 나타남이라는 점에서는 필연인)로  그 방향으로 다가서는 것 같다.
내가 반전과 변혁의 기미를 본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다.
대선 이후 최대의 과제는 사회통합과 연합정치다.
내가 연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낡고 퇴영적인 편가름(진영)을 바탕으로 비슷한 정당(정치세력)끼리의 '소연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으로는 국내외의 산적한 도전과 인류적 위기에 대응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진영(좌우, 보혁)  간에 이루어지는 '좌우 대연정'을 말한다.
그것은 권력을 향한 정치공학 때문이 아니라, 나라의 발전단계가 그것을 요구하고, 더욱 긴박해진 인류적 위기에 나라와 국민의 힘과 지혜를 집중하기  위해서 절실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
낡은 진영논리나 특히 정서에 바탕한 낡은 진영이 허물어지는 것이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인데, 역대 최악의 선거라는 외형을 통해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역설적으로  나라의 운이며 국민의 복이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반전과 변혁의 기미를 본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전쟁 중이라 이런 말들이 잘 귀에 들어오지 않겠지만, 전쟁이 끝난 후 우리 역사에서 일찌기 없었던 반전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것을 위해 배려하고 준비해가는 정치세력이 커지기를 바란다. 
우리 역사의 오랜 비원이다.

Namgok Lee
193 F2ebr0utatar7y ato 190g9:5i438d  · 

올린 라이트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열한 가지 비판을 한다.
1.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는 제거 가능한 인간 고통을 영구화한다.
2. 자본주의는 확장적 인간번영의 조건들이 보편화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3.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자율에 있어 제거 가능한 결함들을 영구화한다.
4. 자본주의는 사회정의의 자유주의적 평등주의 원칙들을 위반한다.
5. 자본주의는 어떤 결정적인 측면들에서 비효율적이다.
6. 자본주의는 체계적인 소비자주의 편향을 가지고 있다.
7. 자본주의는 환경파괴적이다.
8. 자본주의의 상품화는 사람들이 널리 지닌 중요한 가치들을 위협한다.
9. 자본주의는 국민국가의 세계에서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부추긴다.
10. 자본주의는 공동체를 침식한다.
11.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제한한다.
나는 청년시절 마르크스주의를 세계변혁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가 거기서 떠난 사람이다.
올린 라이트는 자본주의를 지양(止揚)하는 것이 자유롭고 해방된 사회를 향한 길이라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잇고 있지만, 덜 단정(斷定)적이고 덜 단절(斷絶)적이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고 이상의 명제들을 설명하고 있다.
마르크스 이후의 세계사의 진행과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여러 이론 사상들과 진지한 대화를 모색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예상은 실제의 세계사에서는 빗나간 것이 많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계급투쟁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지금의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인류가 봉착한 여러 핵심 과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열한 가지 명제를 설명하면서 올린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다음 장(章)으로 연결 시킨다.
“가만히 놓아두면 자본주의가 이 모든 해악들을 머지 않아 다 치유할 것임을 논증함으로써 이 명제들이 모두 거짓임을 보일 수 있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해방적 대안의 매개 변수들을 명확히 밝히려는 마음은 현저히 꺾일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내재적 속성과 동학에 관한 현재의 지식 상태를 고려해볼 때,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판단이 올바르다면, 이 해악들을 완화시키려는 모든 진지한 노력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그 자체와 대결해야 한다.
이것은 두 가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인가? 이 해악들을 실제로 감소시킬 실행 가능한 대안들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자본주의 그 자체에 도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둘째, 우리는 이 대안을 창조하기 위해 현존하는 사회의 권력관계와 제도들에 어떻게 도전해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서 저기로 가야하는가?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이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아직 뒷 부분은 안 본 상태이지만, 이런 생각들(이른바 마르크스 주의의 전통)에 동의하는 사람이나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나 진지한 자기 안의 대화를 위해서도 한번쯤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특히 새로운 문명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단체들, 협동운동이나 공동체운동 마을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단체가 이 책을 소재로 토론이나 연찬을 해보는 것은 충분히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Namgok Lee
20 Februamctr10lyf a8tn s08g9r3g8:1id5  · 
총론(總論)이 비슷하더라도 각론(各論)은 다를 수 있고, 어쩌면 다른 것이 당연(자연스럽다)하다고 생각한다.
각론의 다름이 총론을 다시 살펴보게 되고, 총론을 더욱 풍부하고 튼튼하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다름을 서로 인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적대적으로 배제하려고 한다면, 총론이 매우 허약하거나 허위의식이 많을 때라고 생각한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데, 서로 상대방을 배제하려고 하는 현상들이 유독 심하게 진행되는 현실을 지금  만나고 있다.
나는 정명(正名)이 총론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See more

‘리얼 유토피아’ 독서 중.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잇는다는 입장의 저자는 마르크스의 이론과 예측에 대해서는 마르크스 이후 세계의 변화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 그리고 자본주의의 변화 등을 실사구시하여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옹호한 쪽에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대안을 모색하는 입장에서 하는 비판이고, 사회과학자가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어서 특히 마르크스의 분석틀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토론과 연찬의 테마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오늘 읽은 것 가운데 마르크스를 비판한 간단한 언급을 소개한다.
“이 이론은 결국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의 조합에 의지한다. 즉, 노동자들은 그들의 집단적 정치조직을 통해 권력을 강화시킬 것이며, 이 새로운 제도들을 구축하는 실제과정은 창조적 시행착오적 민주적 실험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사실상 자본주의 종말에 대해서는 아주 결정론적인 이론을, 그 대안의 구축에 대해서는 비교적 주의주의(主意主義)적인 이론을 제공했던 셈이다.”
그리고 5장 ‘사회주의 나침판’에서 자신이 창안한 이론들을 소개한다.
오늘 읽은 대목을 한 구절 소개한다.
“현재의 문맥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권력 형태를 구분할 수 있다. 경제적 자원에 대한 통제력에 기초한 ‘경제권력’, 규칙제정에 대한 통제력과 영토에 대한 규칙집행능력에 기초한 ‘국가권력’,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자발적 집합행위를 위해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한 ‘사회권력’이 그것이다.
슬로건을 사용해서 말한다면, 사람들에게 일을 하게 만드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당신은 그들을 ‘매수’할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을 ‘강제’할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을 ’납득‘ 시킬 수 있다. 이것은 각각 경제권력의 행사, 국가권력의 행사, 사회권력의 행사에 상응한다. 그리고 앞으로 보겠지만, 이들은 자본주의, 국가주의, 사회주의의 구분과 밀접히 연결되고 있다“
여기까지 읽었다.
여기서 국가주의는 주로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의 현실 사회주의를 이렇게 표현하고,
거기에 대비되는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요한 주체와 동력을 ‘사회권력’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도 그 방향에서 생각을 많이 했던 사람으로 이른바 ‘납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그의 설명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참고로 2500년 전 공자는 '(매수나 강제로) 따르게 하기는 쉬워도, 납득하게 하기는 어렵다'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상황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또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궁금하다.

에릭 올린 라이트는 2018년 4월초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그가 추진하던 책을 출간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리고 2019년 1월 13일, 열달 동안 병에 맞써 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낙관주의자이자 현실적인 유토피아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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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아들이 보내주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보고 이어서 볼 생각이다.
그의 영혼이 심금을 울린다.
이 책을 보면서 어떻게 보면 ‘안될 줄 알면서도 헛되이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공자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 자신이 걸어온 사상과 실천의 맥락에서 볼 때, 같은 시대에 태어나 나라와 사회의 조건이 다름에도 그 바탕의 상통함이 많이 느껴져서 그의 영혼의 숨결을 느끼며 책을 읽고 있다.
물론 다른 점들도 있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다음에 그런 점들은 살펴보기로 한다.
오늘 읽은 내용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협동조합 바람이 불고 사회적 경제나 마을 운동들에 관한 관심과 참여가 높아졌던 근래의 사례들을 반추해 보는데 참고가 될 것 같아서 이 내용을 옮겨본다.
“우리는 리얼 유토피아 설계와 제안을 탐구하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채택할 것이다. 첫 번째 것은 경험적인 전략으로, 제 5장에서 정교화된 사회권력 강화의 원칙들을 상이한 방식으로 구현하는 세계 각지의 구체적 사례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경험적 사례들을 제대로 분석하려면 많은 과제들을 수행하여야 한다.
첫째, 그 사례가 정말 사회권력 강화과정을 구현한다는 것을 확증해야 한다.
둘째, 문제의 제도적 설계가 실제로 정확히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가능한 한 세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셋째, 보다 추상적인 제도적 설계의 여러 요소들을 구성하는 몇 가지 일반 원리들을 그 사례로부터 추출해내야 한다.
넷째, 그 사례를 가능하게 한 촉진 조건들을 탐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리얼 유토피아 설계가 직면하는 모순, 한계, 딜레마를 들어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분석에서 결정적인 위험은 이와 같은 실례들에 대한 연구가 선전적(宣傳的) 응원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급진적인 자본주의 비판자들이 그들의 포부를 구현하는 경험적 모델에 필사적이 되면, 소망적 사고가 냉정한 평가를 압도할 수 있다. 이에 상응하는 위험은 물론 냉소주의이다.
지식인들은 순진한 열정을 폭로하는데 큰 찬사를 보낸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경험적 사례들에 대한 설명이 순진하지도 냉소적이지도 않으면서, 사회권력 강화를 위한 실천적 노력의 진정한 잠재력 뿐만 아니라 복잡성과 딜레마들까지 완전히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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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중.
오늘 아침 '리얼 유토피아'를 읽다가 그 내용 가운데 생각된 것을 걸으면서 되새겨본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보완책으로 무작위선출(추첨방식)로 구성하는 '시민의회'를 제안하고 있다.

일종의 양원제인 셈인데, 선거방식의 '시의회'와 추첨방식의 '시민회의'를 병립하여 대의제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물론 필요하고 가능한 분야에서 출발한다.
이것을 지역을 단위로 실험해보는 것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상당히 선구적이고 창조적 실험이 될 것이다.
물론 여러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하겠지만, 지역당 설립이 가능해진다면, 먼저 가능한 지역에서 실험해볼 수 있다.
어차피 이번 대선 이후, 중앙 정치의 대변혁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것과 병행하여 지역정치도 중앙정치의 종속에서 벗어나는 혁신이 일어나야 한다.
영남과 호남 등의 지역갈등이 아니라, 실제는 중앙과 지역의 불균형이 문제다.
기업이나 기관을 분산하는 것으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역이 스스로 매력 있는 곳으로 변하는 것이 더 근원적이다,
나라의 전반적인 정치 후진성을 극복하는 길의 하나로 어떤 방면에서는
지역 정치(정당)가 물꼬를 틀 수 없을까?
호남의 지역정당과 영남의 지역정당이 손을 잡고 중앙과 지역의 균형을 위한 정책이나 입법을 공동제안하는 모습도 그려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본다면, 국경을 넘어 지역당들의 연대를 통해 문명전환을 향한 세계정치의 진화를 위해 틈새확장 방략이 될 수 있다.
지역의 특성과 자산(물적ㆍ정신적)을 살리는 창조적 지역정치의 성공적모델 들이 나오는 것이 그 출발점으로 될 수 있을 것이다.
전국 단위로 어려운 창조적 실험들을 지역 단위로 할 수 있는 것도 많을 것이다,
역동적인 정치변혁의 하나의 목표 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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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경제’에 대한 여러 정의(定義)들이 있다.
사회적 경제 분야에서 일하거나 사회적 경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에릭 올린 라이트의 정의를 소개한다.
(내가 좀 더 정독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나는 사회적 경제를 아주 넓게 정의해, 일정한 형태의 사회권력 행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조직되고 통제되는 경제활동으로 정의한다. 사회권력은 시민사회의 자발적 결사체에 근거한 권력이며, 다양한 종류의 집합행위를 위해 사람들을 조직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해 있다. 사회적 경제에서는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분배-경제활동-가 이러한 사회권력의 행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조직된다.
이 정의는 ‘비영리부문’의 모든 조직이나 기업이 사회적 경제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비영리조직들은 시민사회에서 형성된 자발적 결사체라기보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기업이나 국가의 일익이다. 또 어떤 비영리 조직들은 대규모 자본 기부금을 받아 생산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공급 받으며, 위계적 기업의 방식으로 지휘된다. 따라서 경제활동에 대한 그들의 통제는 사회권력(즉, 시민사회의 집합적 결사체에 근거한 권력)의 동원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 그들의 기부금에서 나오는 경제권력의 행사에 기초해 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많은 조직들은 혼합적 혹은 하이브리드적 성격을 가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시민사회의 결사체적 삶에 근거한다면, 그들은 사회적 경제활동의 예이다.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분배에 종사하는 그들의 권력이 국가권력이나 경제권력에 기초한다면, 그들은 국가주의적 조직이나 자본주의적 조직이다.“
아마 저자는 넓게 정의한다고 말하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는 저자의 이상주의적 생각과 전망에 기초해 아주 협소하게 정의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저자의 태도가 자본주의를 지양하려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 위에 서 있으면서도,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기조 위에서 대안을 모색하는데서 일어나는 일종의 제한과 불가피하게 진행되는 논란의 과정에 있음을 반영한다고 생각된다.

☆ 산책하면서 들었던 생각.
지금 반 정도 읽었는데,
그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낙관적 이상주의자라는 것은 알겠는데, 왜 굳이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잇는 것을 자기정체성으로 하는지, 그것이 잘들어오지 않는다.

다 읽어보면 판단이 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공상과 달리 계급 및 생산관계 생산력 국가 등에 대해 과학적인 분석의 전통을 잇는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른바 그 '과학적 분석'을 통해 기존의 마르크스 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자본주의 붕괴에 대해서는 결정론적 시각을 나타내는데, 그 너머의 사회의건설에 대해서는 주의(관념적 이상)주의를 넘어서지 못함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결정론 자체가 과학에 배치되는 것만큼이나,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체적 비전은 관념 수준에 머무는 것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리얼 유토피아'는 이런 양 측면을 넘어서려는 연구로 보인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 전통' 자체가 하나의 틀로 작용하지 않을까?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과학적'시도를 계승하고, 마르크스의 관념에 그친 새 사회 건설의 설계를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 경험과 자본주의 변천 과정을 통해서 '과학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을 이른바 '전통'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전통' 자체가 일정한 사고의 틀로 제약하는 면이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이 나라에서도 상당히 실사구시하려는 사람들이 그 틀 속에 머묾으로서 그 창조적 능력이 제약되는 것을 본 바가 있어서, 과학=마르크스주의 전통이라는 것을 넘어설 수 없을까 생각한다.
저자가 경제권력, 국가권력, 사회권력으로 구분하고, 그것을 자본주의, 국가주의, 사회주의로 대응시키면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을 각각 '매수' '강제' '납득'으로 이야기한다.
이렇게보면 '납득'이야말로 리얼 유토피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애와 협동, 관용과 양보'라는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정신(의식ㆍ문화)이 이상을 환상이나 공상을 넘어 리얼로 만드는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전에 잠간 언급했지만, 나는 실패한 경험이 어른거리는 사회주의라는 용어보다 다른 용어를 창조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하나의 언어가 만들어져 보편화되는 어려움이 얼마나 큰가는 알고 있지만.
산책하면서 반 쯤 읽은 독후감을 써본다.
끝까지 보고 나서 지금 쓴 것을 다시 쓰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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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l2016 F9ebtr9uaory at0a 0e9:20l0 · ‘리얼 유토피아’ 독서 중.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잇는다는 입장의 저자는 마르크스의 이론과 예측에 대해서는 마르크스 이후 세계의 변화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 그리고 자본주의의 변화 등을 실사구시하여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옹호한 쪽에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대안을 모색하는 입장에서 하는 비판이고, 사회과학자가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어서 특히 마르크스의 분석틀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토론과 연찬의 테마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오늘 읽은 것 가운데 마르크스를 비판한 간단한 언급을 소개한다. “이 이론은 결국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의 조합에 의지한다. 즉, 노동자들은 그들의 집단적 정치조직을 통해 권력을 강화시킬 것이며, 이 새로운 제도들을 구축하는 실제과정은 창조적 시행착오적 민주적 실험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사실상 자본주의 종말에 대해서는 아주 결정론적인 이론을, 그 대안의 구축에 대해서는 비교적 주의주의(主意主義)적인 이론을 제공했던 셈이다.” 그리고 5장 ‘사회주의 나침판’에서 자신이 창안한 이론들을 소개한다. 오늘 읽은 대목을 한 구절 소개한다. “현재의 문맥에서 우리는 세 가지 중요한 권력 형태를 구분할 수 있다. 경제적 자원에 대한 통제력에 기초한 ‘경제권력’, 규칙제정에 대한 통제력과 영토에 대한 규칙집행능력에 기초한 ‘국가권력’,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자발적 집합행위를 위해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에 기초한 ‘사회권력’이 그것이다. 슬로건을 사용해서 말한다면, 사람들에게 일을 하게 만드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당신은 그들을 ‘매수’할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을 ‘강제’할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을 ’납득‘ 시킬 수 있다. 이것은 각각 경제권력의 행사, 국가권력의 행사, 사회권력의 행사에 상응한다. 그리고 앞으로 보겠지만, 이들은 자본주의, 국가주의, 사회주의의 구분과 밀접히 연결되고 있다“ 여기까지 읽었다. 여기서 국가주의는 주로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의 현실 사회주의를 이렇게 표현하고, 거기에 대비되는 사회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요한 주체와 동력을 ‘사회권력’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도 그 방향에서 생각을 많이 했던 사람으로 이른바 ‘납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그의 설명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참고로 2500년 전 공자는 '(매수나 강제로) 따르게 하기는 쉬워도, 납득하게 하기는 어렵다'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런 상황이 얼마나 바뀌었을까 또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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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리얼 유토피아’의 저자는 ‘사회적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그 구체적 사례로 캐나다 퀘백주의 ‘퀘백노동연합연대기금’을 소개하고 있다.
창립 2년후인 1985년, 기금은 1,430만 캐나다 달러, 5,000명이 약간 넘는 회원 주주, 그리고 네 개의 동반자 회사들에 대한 투자를 가지고 있었다. 2007년 이것은 72억 캐나다 달러의 자산, 574,794명의 회원 그리고 1,696개 회사들에 대한 투자로 성장해, 중소기업들에게 자본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주자가 되었고, 퀘백에 있는 모든 모험 자본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자의 소개다.
“이 기금들은 사회적 자본주의가 사회권력 강화 경로임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예들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자체에는 도전하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자가 소유하는 협동조합에 지분투자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대개 일반 자본주의 기업들에 투자한다. 그들의 투자 전략은 퀘백 자본주의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퀘백 경제 안에서 기업들이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며, 계급 적대를 심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보다 협력적인 관계를 촉진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여전히 본질적 요소인 하이브리드 형태이다. 그러나 이 하이브리드는 노동운동이 기금을 운용하고 우선 순위를 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사회권력이 보통의 자본주의 구조에서보다 더 큰 무게를 가지는 하이브리드다”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어떤 지역이나 어떤 분야에서 ‘후발 선진국’에서 나올 수 있는 새로운 모델들이 만들어져서 뜨거운 잇슈로 떠오르는 것을 상상해 본다.
이제 노동운동을 비롯한 한국의 진보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성공시킴으로서 세계 진보에 대한 선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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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0h2t35Su8p9ooufaa8fetmhg · ‘몬드라곤’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과정에 관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에릭 올린 라이트가 몬드라곤을 사회적 자본주의의 한 중요한 사례로 예시하면서, 실제로 몬드라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것들에 깊은 관심이 간다. 나는 근래의 몬드라곤을 모른다.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것은 해외에 자(子)회사를 거느린 큰 규모의 경제 주체로 발전하였다는 것과 다른 한편 몬드라곤과 같은 협동기업이 다른 나라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예는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 예에 속한다. 몬드라곤에 대한 저자의 언급을 일부 발췌해본다. “이 통치구조는 주권적 조직 단위들의 연맹 내에서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가 혼합된 모습을 보인다.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이 구조는 모순과 긴장으로 가득차 있다. 밑으로부터의 민주적 책임성과 경영 자율성 사이에, 탈중앙집권적인 의사결정과 중앙집권적인 조정 사이에, 전체 협동조합들의 연대 원칙과 개별 협동조합들의 경제적 이익 사이에, 주변 지역사회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광범위한 사회적 연대에 대한 헌신과 협동조합 내부 회원들의 기업적 복지 사이에, 몬드라곤에 대한 좌파 비판가들은 이 이율배반의 모든 항목에 있어 MCC(몬드라곤 협동조합 기업)는 점점 더 일반 자본주의 기업처럼 되어간다고 주장한다. MCC 옹호자들은, 이 긴장에도 불구하고 협동조합의 노동자 소유자들은 개별 기업들과 전체 기업의 광범위한 전략에 대해 의미 있는 민주적 통제력을 지니고 있으며, 이 점에서 자본주의 기업들과 아주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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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남곡 - 화합하되 다름을 존중하며, 두루 어울리되 편을 가르지 않고, 당당하되 다투지 않는다.

오피니언 > 칼럼 > 629호 화합하되 다름을 존중하며, 두루 어울리되 편을 가르지 않고, 당당하되 다투지 않는다.

화합하되 다름을 존중하며, 두루 어울리되 편을 가르지 않고, 당당하되 다투지 않는다.
이남곡 (인문운동가)


①“군자는 화합하되 같게 하려 아니하고, 소인은 같게 하려 하되 화합하지 못한다.” 君子 和
而不同 小人 同而不和(13-23)

화이부동(和而不同)은 요즘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말의 하나이다.
세뇌나 무지나 악성 편가름 때문에 다른 사람이나 특정 집단에게 뇌동(雷同)하는 것은 자주
성을 원천적으로 빼앗기는 것이어서 진정한 사이좋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르다. 성격, 욕망, 취향, 사회적 조건 등이 모두 다르다. 따
라서 이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특성을 존중할 때 진정으로 화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자기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상대를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양식에 일치시키려고 한다.
자기와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한다.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을 말하면 자기를 반대하는 것으
로 생각하고 미워한다.
 이 오래된 습성에서 벗어날 것을 공자는 권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평생을 일이관지(一以貫之)했다는 서(恕)의 실천이 바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인 것이
다.
이 부동(不同) 즉 다름을 존중하는 것은 인간의 숭고지향성이라는 바탕에서 서로 같아지려
고 하는 노력이 다른 한편에 있을 때 진정한 조화를 이룬다. 즉 사람의 덕성(德性)이나 현명
(賢明)함이나 선(善)함에 있어서는 같아지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진실한 모습이다.
불선(不善)이나 불인(不仁) 조차 용인하는 것이 화이부동이나 구동존이가 아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불인(不仁)이나 불선(不善)을 보면, 자신에게 그런 것이 없는
가를 먼저 살피는 태도다. 그럴 때라야 상대를 비판하고 비난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내로남불’과 ‘네거티브’로 우리 정치를 악성 편가름의 질곡과 혼탁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
는 현실을 보면서  다음 구절들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다른 사람의 현(賢)을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불현(不賢)을 보면 그것이 내 자신
에게는 없는지 나 자신을 먼저 살핀다”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4-17)
“오직 인자(仁者)만이 능히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도 있다” 惟仁者 能好
人 能惡人 (4-3)

② “군자는 긍지를 가지면서도 다투지 아니하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편을 가르지 않
는다.” 君子 矜而不爭 群而不黨(15-21)   
                  
아집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의 사회성을 잘 나타내주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군자의 긍지는 아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투지 않는다.
소인의 자만은 아집에서 나온다. 그래서 아집과 아집이 만나면 다투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당당함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옳다’라는 고정된 견해가 없이 ‘무엇이 진리인가’를 끝까지 구명하려
는 태도이기 때문에 비록 다투는 듯한 외형이 있는 경우라도 자신의 내면에 평정을 유지한
다.
실제로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어렵다는 것은 우리들의 실태가 아집이 많은 인간이라는
것이지 그것이 불가능한 허황된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적어도 이런 인간상을 그려보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집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편을 가르지 않는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아니면 파당을 만든다.
끊임없이 자기 본위로 생각하고 그렇게 살기 때문에 어울리지 못하거나, 어울리면 편을 가
르려고 한다.
지금은 같은 편이지만 상대편이 사라지면 같은 편 안에서 다시 편이 갈라진다.
이것이 아집의 특성이다.
작게는 개별적 삶에서 크게는 국가나 세계의 삶에 이르기까지 이런 삶이 반복되어 왔다.
끊임없이 편을 가르고 끊임없이 다투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 아
닐까.
그러면서도 실제로 자신은 그 길과는 반대로 가는 경우가 너무 많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조건이나 환경 탓을 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그런 면도 없지 않지만, 그런
상태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일까에 대해 공자의 이 말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자신이 먼저 긍이부쟁(矜而不爭) 군이부당(群而不黨)하는 사람으로 되어 편가르기와 끊임없
는 다툼을 넘어서 진정으로 자유롭고 사이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지금의 위기를 넘
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가장 탄탄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③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 君子 不器(2-12)
“군자는 보편적이되 편벽하지 않고, 소인은 편벽하여 보편적이지 않다.” 君子 周而不比 小人
比而不周(2-14)
그릇(器)은 고정되어 있어서 용도가 제한되어 있다. 사람이 어떤 한가지로 고정되어 교조적
이거나 편협한 인간으로 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만일 어떤 정치가나 혁명가 또는 어떤 정치 집단이 이런 인간이나 집단이 된다면 그 폐해는
엄청날 것이다.


알라딘: 반反종차별주의

알라딘: 반反종차별주의

반反종차별주의 - 인간, 동물, 자연의 새로운 관계 맺기 
에므리크 카롱 (지은이),류은소라 (옮긴이)열린책들2022-02-20원제 : Antispéciste: Réconcilier l'humain, l'animal, la nature (2016년)

전자책
14,400원 

456쪽

책소개

동물권의 열렬한 수호자인 기자 출신 지식인 에므리크 카롱이 쓴 동물 권리에 관한 인문 에세이다. 2016년 프랑스에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책은 동물권과 관련된 유명 인사들을 공개 토론에 불러 모으며 반종차별주의를 대대적으로 공론화하는 역할을 했다. 반종차별주의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고통받는 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외침이 아니다. 카롱은 이 책에서 반종차별주의를 인간이 누리는 권리를 다른 생물 종으로 확장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으로 제시한다. 동시에 인간 종을 넘어서 종 평등을 위한 사회적 투쟁으로서 반종차별주의에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이제 동물 해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 동물, 자연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 논의를 시작해 보자.


목차
머리말
에베레스트

1장 동물인 나는 고로
오늘 밤 사자가 죽었다│종차별주의란 무엇인가│동물
원 줌 아웃│작은 거인들│모두 동일하게 이루어졌다: 세포, 분자, 원자│동물회의론자│첨부 자료: 의식에 관한 케임브리지 선언│육화의 우연

2장 살해된 동물
미디어 속 동물 농장│첨부 자료: 2016년 L214의 비강 도살장 조사│사육동물들 #지옥같은삶│대학살│분열증 │오그르

3장 동물 착취의 종식을 위해
모두의 책임, 모두의 잘못│윤리라는 이름의 전차│동물 윤리학│네가 원치 않는 바를 돼지에게 행하지 말라│살기 그리고 살도록 내버려 두기│폐지론자│동물에게 어떤 권리가 있나│극단적 비건이 종차별주의적인 이유│내 침대

4장 반종차별주의는 새로운 휴머니즘이다
신 코페르니쿠스 혁명 인간 대 동물?│도덕적 고려의 범위를 확장하기│반종차별주의자는 의식 있는 자다│반종차별주의자와 아미스타드│돈 문제│사육자들의 이익을 위한 사육 폐지

5장 초인으로서의 반종차별주의자
불평등에 대한 동의│사기꾼에 대한 보상│돈은 완벽한 속임수다│경쟁보다 이로운 상호부조│웃음과 망각의 통로│필과 슬라이, 성공의 슬픔│행복은 살 수 있는 게 아니다│저항하기│보이콧│절대적 초인

6장 근본생태학
생태학의 진정한 목표가 인간을 자연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있는 이유│모두가 생태주의자│생태학은 과거에 대
한 향수인가│덜 생산하기, 덜 낳기, 더 잘 행동하기│동물의 고통을 거부하는 데는 정치적 구분이 없다│반종차별주의는 21세기 이데올로기 혁명이다│심층생태학과 근본생태학

7장 생태 민주주의를 위해
생명체 공화국 구상하기│진정한 민주주의 구축하기│정치적 시간, 다시 생각하기│국회, 자연 의회│생명체 공화국의 우선순위

맺음말
감사의 말
참고 문헌 및 출처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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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나는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다.
P. 9 모든 동물이 인간과 똑같다고 선언하자는 게 아니다.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인간과 다른 동물 종과의 차이로 인해 동물들에게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 어떤 권리인가? 앞으로 논의해 나가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는 네 가지 기본 권리가 필요하다. 인간은 더 이상 동물을 먹거나, 가두거나, 고문하거나, 상업화해서는 안 된다.  접기
P. 29 첫째, 감각 능력을 지닌 살아 있는 존재를 단순히 〈자원〉으로 여길 권리가 여전히 인간에게 있는가? 둘째, 인간이 특정 동물의 운명에 대해 다른 동물보다 더 격앙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소, 돼지 심지어 닭, 토끼, 양 그리고 수많은 동물은 인간이 그들에게 가하는 대로 고통당해야 하는가?
P. 29~30 즉, 당신은 종차별주의자이거나 반종차별주의자다. 여기에는 중립항이 없다. 둘 중 어디에 속할지는 우리의 행동에 달렸다. 서구 사회는 대부분 종차별주의적이지만, 그 안에서도 종차별주의의 도그마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지만 점차 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를 〈반종차별주의자〉라 칭한다. 이 책의 제목 또한 조금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나는 반종차별주의자다.
스페시즘, 즉 종차별주의는 자신이 어떤 종에 속한다는 이유로 다른 동물에게 차별을 가하는 일체의 행위를 가리킨다. 종차별주의는 두 가지 차원으로 나타난다. 첫째, 종차별주의자는 인간이 아닌 동물의 고통은 인간의 고통보다 덜 중요하다고 단정한다. 둘째, 종차별주의자는 근거 없는 범주를 만들어 반려동물, 식육 동물, 취미 동물, 야생동물, 해로운 동물, 보호 동물, 혐오 동물 등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위의 차이에 따라 동물 종을 스스럼없이 차별적으로 대한다. 모두가 똑같이 인식 능력, 생리적 욕구, 고통과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지니는데도 말이다.  접기
P. 82 아무리 절세미인이라도, 자신의 미모에 대해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된다. 그녀가 공들여 자신의 몸을 가꾼다고 해도, 아름다운 외모는 자신의 공으로 얻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동물을 어리석거나 못생겼다고 평가하며 무시하고 학대할 때,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약한 존재에 대해 최대한의 관대함을 지녀야 한다.  접기
P. 91 고기 광고는 동물 사육에 대한 가공된 이미지를 담고 있다. 보통 광고 속 닭, 돼지, 소 들은 마음껏 자연을 누비는 믿기 힘들 정도로 행복한 존재다. 이들은 오직 우리의 접시에 얼른 놓이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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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이 책은 우리의 관점을 전환시키며 지구에서 인간의 위치를 재고하도록 한다. - 르 푸엥 (프랑스) 
거대 양당 구도의 대안 없는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 인간 중심의 근대 문명을 넘어서는 생명 공동체를 꿈꾼다. 그 시작은 비거니즘에 입각한 생태주의다. 고기 먹는 환경 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나는 동물권과 녹색 정치가 어떻게 만나 대안을 낳을지 끙끙 고민했다. 영미권에 치중된 한국 담론은 상상력이 부족하다. 에므리크 카롱은 다분히 유럽적인 사유로 새로운 지평을 연다. 플루타르코스와 몽테뉴에서 생명 사상의 뿌리를 찾고 크로포트킨과 아르네 네스를 거쳐 근본생태학에 이른다. 그는 종차별 철폐야말로 새로운 휴머니즘이며, 초인이 되는 길이라고 선언한다. 도덕론에서 유래한 비거니즘을 존재론으로 확장한다. 인수공통감염병과 기후생태위기의 시대, 인간-동물-자연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하려는 우리에게 절실한 성찰이다. 생명체 공화국을 구상하는 담대한 시도에서 나는 21세기 프랑스 혁명을 읽었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점쳤다. 지구 살림과 생명 살림의 기본은 <반종차별주의>다.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종 평등한 생태 민주주의를 외치는 이 책은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가보지 않은 세상, 다른 100년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의 필독서다. - 전범선 
강력하고 유용하며 논증적인 선언문이다. - 프란츠 올리비에 지에스베르 (프랑스 기자 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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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22년 2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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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에므리크 카롱 (Aymeric Caron) (지은이) 

진중한 주제를 논리력과 솔직함으로 과감하게 풀어내는 프랑스 방송 기자이자, 작가. 1971년 불로뉴쉬르메르에서 태어났으며, 1995년 에콜 쉬페뢰르 드 저널리즘을 졸업한 뒤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기자 및 평론가로 일했다. 동물권의 열렬한 수호자인 그는 1990년대에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2013년 『노 스테이크 No Steak』를 출간해 프랑스에서 3만 부 이상의 판매를 기록하며 화제가 되었다. 2014년 그는 모든 고기와 우유, 달걀 등 동물성 식품은 물론, 가죽이나 모피와 같은 동물 유래 제품을 거부하는 완전 채식주의자인 비건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동물권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방송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는, 2015년 동물권리보호기구 L214가 주최한 강연에 『동물 해방』으로 전 세계에 반향을 일으킨 스탠퍼드 대학교 피터 싱어 교수, 네팔에 거주하는 프랑스 작가이자 승려인 마티외 리카르, 기자 겸 작가 프란츠 올리비에 지에스베르와 함께 참여한 바 있다. 2018년에는 〈지구와 모든 시민에 대한 존중〉을 목표로 활동하는 〈살아 있는 생태학자들의 모임REV〉을 만들었으며, 학교 급식에서의 채식 메뉴 제공, 사냥과 투우 금지 등을 위해 적극 발언하고 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올라 반종차별주의를 대대적으로 공론화하는 역할을 했다. 그 외 지은 책으로 『옳지 않음Incorrect』 (2014), 『유토피아 XXIUtopia XXI』 (2018), 『살아 있는 것Vivant』 (2018), 『자연의 복수Le revanche de la nature』 (2020) 등 다수 있다. 접기
최근작 : <반反종차별주의> … 총 4종 (모두보기)


류은소라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학사 및 석사 과정을 마치고 프랑스 파리 8대학에서 롤랑바르트의 후기 저작 연구로 2012년 M2 학위를 받기까지, 프랑스 구조주의 및 후기구조주의에 몰두했다. 2011~2015년 파리 몽마르트의 그림 갤러리에서 일하며, 그림을 매개로 전 세계인들과 소통했다. 2016년 남편과 함께 우핑woofing을 시작하여 영국 남부 지방 10여 개 농장을 돌며, 영속농업permaculture 이론과 실무를 배우고 심층생태학을 접했다. 철학, 미술, 종교, 심리, 교육 등 인문학 전반에 걸쳐 번역 작업을 하고 있고, 타자, 몸, 기후, 생태 관련 주제에 관심이 높다. 옮긴 책으로 『페미니스트, 마초를 말하다』(2016), 『풍경의 감각』(2017), 『요가, 몸으로 신화를 그리다』(2020)가 있다. 접기


출판사 소개

최근작 : <상페의 스케치북>,<계속 버텨!>,<반反종차별주의>등 총 814종
대표분야 : 과학소설(SF) 1위 (브랜드 지수 792,600점), 고전 2위 (브랜드 지수 1,007,562점), 추리/미스터리소설 9위 (브랜드 지수 283,735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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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나는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을 존중할 뿐이다.

반종차별주의는 새로운 휴머니즘이다

인간은 진화의 역사에서 뒤늦게 동물 공동체에 합류한 생물 종일 뿐이다. 우리는 인간 종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동물을 자원 취급해도 되는 걸까? 닭, 돼지, 소를 개, 고양이와 차별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반反종차별주의Antispeciste』는 동물권의 열렬한 수호자인 기자 출신 지식인 에므리크 카롱이 쓴 동물 권리에 관한 인문 에세이다. 2016년 프랑스에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책은 동물권과 관련된 유명 인사들을 공개 토론에 불러 모으며 반종차별주의를 대대적으로 공론화하는 역할을 했다. 반종차별주의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고통받는 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외침이 아니다. 카롱은 이 책에서 반종차별주의를 인간이 누리는 권리를 다른 생물 종으로 확장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으로 제시한다. 동시에 인간 종을 넘어서 종 평등을 위한 사회적 투쟁으로서 반종차별주의에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이제 동물 해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 동물, 자연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 논의를 시작해 보자.

* 반종차별주의Antispecisme: 인간 종에 속한다는 이유로 다른 동물을 죽이거나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일체의 가학 행위에 반대하는 개념.

『동물 해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21세기 동물 권리 선언

“나는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을 존중할 뿐이다.”
― 「머리말」 중에서

〈종차별주의〉라는 용어는 1970년 영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라이더Richard Ryder가 만들었으며, 1975년 호주의 철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가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에서 이 용어를 가져다 쓰면서 널리 알려졌다. 에므리크 카롱은 『반종차별주의』에서 사회에 만연한 〈종차별주의〉 도그마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 〈반종차별주의〉라는 용어를 개념화하고 사회적 투쟁으로 발전시킨다. 그가 말하는 반종차별주의란 인간 종에 속한다는 이유로 다른 동물을 죽이거나 학대하거나 착취하는 일체의 가학 행위에 반대하는 입장을 말한다.
싱어의 〈동물 해방〉은 동물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는 것이 확실할 경우 사육이나 도살, 동물실험도 용납될 수 있다. 카롱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동물이 고통받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생명은 존재 그 자체로 귀하게 여기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을 착취할 권한을 부여받지 않았다. 과학은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하나의 생물 종이며 비인간 동물도 나름의 탁월한 지능·감각·의식·의사소통 능력·공감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일깨워 준다. 카롱은 동물에게 비인간 인격체로서의 지위를 부여할 것을 주장하며, 네 가지 기본 권리, 즉 죽임을 당하지 않을 권리, 고문당하지 않을 권리, 상업의 대상이 되지 않을 권리, 감금당하지 않을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인간과 동물, 자연의 화해를 위한 21세기 동물권 선언이다. 고통받는 동물에 대한 연민을 넘어서 우리가 동물 권리를 진지하게 다뤄야 하는 논리적이고 합당한 근거를 마련한다. 이 책을 통해 인간, 동물, 자연이 어떤 관계로 나아가야 할지, 반종차별주의의 시각으로 동물 권리의 방향을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동물, 자연의 상생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은 종차별주의자이거나 반종차별주의자다.
여기에는 중립항이 없다.”
― 「1장 동물인 나는 고로」 중에서

동물을 반려동물, 식육 동물, 취미 동물, 야생동물, 해로운 동물, 보호 동물, 혐오 동물로 구분하는 기준은 다분히 인간의 편익과 관련 있다. 개와 고양이는 애지중지하면서 닭, 돼지, 소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것도 마찬가지다. 카롱은 이 책에서 과학적 관점, 윤리적 쟁점, 언론의 영향, 경제 논리, 철학적 태도, 법률과 정치 등 동물 권리와 연관된 문제를 속속들이 끄집어내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의 허점과 부당함을 드러내며, 인간이 누리는 권리를 동물에게로 확장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을 제시한다.
2016년 프랑스에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오른 이 책은 용어의 생소함에도 불구하고 반종차별주의를 대대적으로 공론화했다. 이 책은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하나의 생물 종에 불과하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한 논의를 생태 민주주의로까지 확장한다. 생태 민주주의는 모든 생명체는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존재로서 존중받아야 하며, 이에 대한 최소한의 권리를 정치 체제에서 보장받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가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맞서 투쟁해 왔듯, 반종차별주의는 약자와 평화를 위한 〈사회적 투쟁〉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규정한다.
동물권 증진을 가로막는 이유는 돈 문제, 고용 문제 등 정치·경제적 문제와 연관돼 있다. 카롱은 사육·육류 산업의 경제적 이득, 기업의 압력에 휘둘리는 언론, 〈스타〉 지식인의 무관심, 생태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정치인, 인간에게 이로운 환경법 등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가끔씩 육류를 섭취하는 플렉시테리언flexitarian(일주일에 며칠간 채식을 하는 채식주의자. 가끔 육류를 섭취함)부터 완전 채식주의자인 비건vegan까지 다양한 방식의 채식을 인정하고 독려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다양한 채식 요리를 성장시키는 동시에, 보이콧 등 개개인의 실천으로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정치적 힘을 발휘할 것을 설득한다.
〈인간은 광활한 우주 한복판에 놓인 외딴 동물원의 나이 어린 방문자에 불과하다.〉(36면) 인간을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구성원으로서 바라본다면, 오늘날 다른 생물에 대한 인간의 행위는 약자에 대한 강자의 착취와 폭력, 종 간 불평등 조장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종차별주의자로 남을 것인가, 반종차별주의자가 될 것인가? 이 책은 인간과 다른 종의 관계를 협력과 상생의 관계로 새롭게 세우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접기

알라딘: 본생경 1

알라딘: 본생경 1
본생경 1  | 민족사 불교경전 19
불전간행회 (엮은이)민족사199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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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양장본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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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01. 가짜 궁사의 자만심 
002. 왕게의 집게발 
003. 후림새 자고 
004. 구루국의 지계 
005. 시비왕의 보시 
006. 상카의 보시 
007. 삼브라의 사랑 
008. 불 속에 핀 연꽃 
009. 쥐가 갉아먹은 옷 
010. 칼라카의 간계 
011. 수행자의 소망 
012. 비둘기와 까마귀 
013. 아기 코끼리의 죽음 
014. 어린 메추라기의 기도 
015. 황금빛 공작 
016. 네 그릇의 죽 
017. 왕과 뱃사공 
018. 시어머니와 며느리 
019. 오백번째의 참수 
020. 앵무새의 숲 
021. 새끼 돼지의 설법 
022. 고운소리, 거슬리는 소리 
023. 애욕에 사로잡힌 물고기

저자 및 역자소개
불전간행회 (엮은이) 
<능엄경>
최근작 : <유마경>,<밀린다왕문경 2>,<화엄경> … 총 22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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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도표로 읽는 부처님 생애>,<지욱 선사의 논어 해석>,<도표로 읽는 천수경 입문>등 총 265종
대표분야 : 불교 4위 (브랜드 지수 164,625점) 

카테고리

     
부처의 이야기가 인도판 설화가 된 책.
인도에 가면 불교까지도 온갖 차별이 난무하는 연옥이 되는 모양
정착 1편엔 부처의 전생 얘기는 별로 없음.  구매
AKASA의 라이프스토리 2021-11-17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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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구매
cssho 2020-04-0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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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7

술이부작 - 위키낱말사전

술이부작 - 위키낱말사전
술이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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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IPA/sʰuɽibud̟͡ʑa̠k̚/
발음[수리부작]
국어의 로마자 표기
Revised Romanization suribujak
매큔-라이샤워 표기
McCune-Reischauer suribujak
예일 표기
Yale Romanization swul.ipucak
명사
어원: 한자 述而不作
있는 그대로 기술할 뿐 새로 지어내지 않는다는 뜻으로, 학자의 겸손한 자세와 객관적 태도를 강조하여 이르는 말.
조선 후기 사상사 전공인 OOO 교수는 “청대
==
술이부작
최근 수정 시각: 2022-01-24 20:20:20


분류 한자성어
고사성어
펼 술
말 이을 이
아닐 불
지을 작

1. 소개
2. 조선시대 일화

1. 소개[편집]
기술(述: 記述)하되(而: 접속사) 지어내지(作) 않았다(不)는 말.

논어 술이(述而)편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자신의 저술이 옛일을 따라 기록했을 뿐 스스로 창작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 말이다. '술이'라는 편명 자체가 이 술이부작에서 나왔다. 이 말을 겸사로 보는 의견도 있으나, 공자는 자신이 옛 문화를 계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공자 문서의 '후계자' 항목 참고.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서들은 "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과 술이부작(述而不作)"에 입각해 제작되었다. 다만 사기나 삼국사기에서도 민족의 자긍심 고취 등을 이유로 기록이 존재하지 않던 고대사나 국가 창설 설화 등은 그대로 기입해놨다. 삼국사기의 경우 삼국사기 초반부에 김부식이 "중국도 탄생설화가 기이한데 우리라고 없으란 법 있냐!"라며 주몽, 박혁거세등의 탄생 설화를 상세히 기록하기는 했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곤 원칙에 충실히 작성되었다.[1]
2. 조선시대 일화[편집]
이후 대부분 저자가 겸양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때로 이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여 상대방을 공격하는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송시열의 제자인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사망하였을 때, 죽은 친부에 대한 묘비문을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다. 송시열이 자신의 스승이며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만큼 이런 부탁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윤선거는 생전 행적에, 당시 기준으로는 흠이 될만한 일이 있었다.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 부친 윤황은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 포위되었고, 윤증과 어머니, 부인은 강화도에 피신해 있었다. 거기서 일가족은 모두 자결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그의 부인은 실제로 자결했다. 그러나 윤선거는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 아버지와 임금이 있는 남한산성에서 최후를 맞이하기로 결정하였고, 어머니와 함께 강화도를 나왔다. 그러나 청군이 겹겹이 포위하고 있는 남한산성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결국 자결도 포기한 채 숨어 살아남았다.

윤선거는 평생 이 일을 부끄러워하여, 이후 다시 출사하지 않고 향리에서 후학 양성에만 힘썼다. 송시열은 윤선거의 위와 같은 행적을 좋게 보지 않았다. 그런 데다 윤선거는 예송 논쟁을 놓고 송시열이 남인을 배척할 때도 동조하지 않았다. 남인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지목한 송시열의 태도를 비판했기 때문에 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진 것이다. 두 사람은 윤휴 및 남인에 대한 태도를 놓고 여러 번 논쟁했다.

어쨌든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송시열은 분명 윤선거를 좋게 생각하지 않음에도 묘비문을 지어주는 것을 허락했다. 망자의 묘비문에는 좋은 말만 써주는 것이 관례였다. 좋지 않은 말을 쓸 정도로 사이가 안 좋거나 망자를 나쁘게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묘비문 짓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송시열은 이를 수락하고서, 박세채가 쓴 윤선거의 행장을 인용했다. 문제는 여기서 술이부작이란 말을 썼다는 것이다.

망자를 추모하며 쓰는 묘비문의 경우, 다른 사람의 평을 인용할 수는 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더 좋은 평을 인용함으로써 추모와 함께 저자의 겸손을 드러내는, 말 그대로 술이부작의 정신을 드러내는 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망자의 묘비문에 다른 사람의 망자를 찬양하는 아름다운 글을 인용해 놓고, 술이부작이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

이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면 이렇다. 송시열이 인용한 것이 박세채가 쓴 윤선거의 행장인데, 송시열이 그것을 인용하면서 술이부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는 "박세채가 윤선거를 찬양함이 참 아름답다. 하지만 난 그것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그래도 망자의 묘비문이고, 박세채의 글도 참 좋아서 인용하기는 하겠는데(述而) 내가 쓴 글이 아니다(不作). 하여 나도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라는 뜻이 된다. 생전에 있었던 갈등의 원망을 묘비문에 표현한 것이다.

아버지의 묘비문에 이런 표현이 들어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윤증은 이후 몇 번이고 송시열에게 묘비문을 고쳐줄 것을 요청했다. 지은 사람만이 수정도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송시열은 결국 이를 수정해주지 않았다. 이는 송시열과 윤증의 사이가 틀어지는 이유가 되었고, 회니논쟁의 단초가 되었으며, 장차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계기를 제공했다.

[1] 하지만 작가의 창작이 아니라 당대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되어온 설화를 글로 옮겨적은 것이라면 술이부작을 어겼다고 보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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