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31

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과 무위(無爲) - 『노자』와 『장자』, 함곡관(函谷關)에서 종로(鐘路)까지 - 대학지성 In&Out

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과 무위(無爲) - 『노자』와 『장자』, 함곡관(函谷關)에서 종로(鐘路)까지 - 대학지성 In&Out


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과 무위(無爲) - 『노자』와 『장자』, 함곡관(函谷關)에서 종로(鐘路)까지

대학지성 In & Out 기자
승인 2020.08.02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9강>_ 김시천 상지대학교 교수의 「<노자> <장자> - 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과 무위(無爲)」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9강 김시천 교수(상지대 교양대학) 강연의 주요 대목을 발췌해 소개한다.

정리 편집국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시천 교수는 노자(老子)가 지었다는 책, 『도덕경(道德經)』 혹은 그의 이름을 딴 『노자』와 그리고 『장자(莊子)』라는 “두 텍스트에 들어 있는 어떤 철학이나 사상을 소개”하는 대신, 주(周)나라 시절 함곡관(函谷關)에서의 『노자』와 20세기 한국 종로에서 강연을 통해 확산된 『노자』 사이 “차이와 간극을 보여주려” 한다고 이야기한다. “달리 말해 『노자』라는 위대한 ‘전통’의 기원이나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논리적 비약과 시대의 초월을 통해 우리의 ‘상식’과 그것이 터 잡고 있는 ‘현실’의 기반 위”에서, “한국에서 ‘노장(老莊)’ 읽기가 갖는 독특성과 현주소를 ‘무위(無爲)’를 중심으로 조망”해보고자 한다고 말한다.
▲ 지난 7월 4일, 김시천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9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노자』와 『장자』, 함곡관에서 종로까지

공자(孔子)가 살아 있던 시절의 어느 날, 주(周)의 수장실(守藏室) 사관인 노자(老子)는 함곡관(函谷關)을 나서 서쪽의 변경으로 길을 떠난다. 관문을 지키던 관리가 노자가 기이한 인물임을 알아보고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노자는 ‘도(道)’와 ‘덕(德)’에 관한 두 편으로 된 5000여 글자를 남기고 훌훌 떠났다고 한다. 이것이 한(漢)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기록한 ‘노자’와 그가 지었다는 책, 『도덕경(道德經)』 혹은 그의 이름을 딴 『노자(老子)』에 얽힌 전설이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한국의 종로, 1970년 4월 19일 『씨알의 소리』를 창간한 씨알 함석헌은 1971년 7월부터 1988년 5월까지 『노자』와 『장자』를 주제로 공부 모임과 공개강좌를 진행했다. 이 강좌에서 함석헌은 “박정희가 유교의 충효를 강조한 데 반해 노장(老莊)의 자유 정신과 초월 사상을 강조했다.” 특히 『도덕경』은 씨알의 삶에 최소한의 간섭만을 하는 최상의 통치자의 모습으로 ‘무위(無爲)’를 주장하는데, 이는 곧 함석헌이 보기에 최소의 정부가 최선이며 소외된 소수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원칙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에게 『노자』의 ‘무위’는 무정부주의적인 정치의 모범이자 씨알의 사회 정치적 참여를 가능케 하는 것인 동시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넘어서서 서구 문명의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동양적’ 대안으로 보였다. ‘무위’가 무엇보다 치자들의 씨알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이자 씨알 저항의 토대였던 것이다. 사실상 이런 저항적 의미의 ‘무위’는 『노자』가 아닌, 오로지 『장자(莊子)』에게서 찾을 수 있는 이념이자 실천 논리였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노장 전통(老莊 傳統, the Lao-Chuang tradition)’을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된다.

과연 함곡관을 떠나며 남겼다는 그 책이, 1970년대 종로 YMCA에서 함석헌이 강론한 책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문제가 많은 태도’이자 어쩌면 황당한 판타지 소설에 가까울지 모른다. 한자로 된 ‘원문(原文)’을 읽는 것이 곧 그 텍스트가 가진 ‘원(原, original)’ 사상 자체를 이해할 수 있다는 몰역사적인 시각 또한 한몫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노자』와 『장자』라는 두 텍스트에 들어 있는 어떤 철학이나 사상을 소개하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관심은 함곡관의 『노자』와 종로의 『노자』의 차이와 간극을 보여주려는 데에 있다. 달리 말해 『노자』라는 위대한 ‘전통’의 기원이나 역사가 아니라, 수많은 논리적 비약과 시대의 초월을 통해 우리의 ‘상식’과 그것이 터 잡고 있는 ‘현실’의 기반 위에서, 21세기 한국에서 ‘노장’ 읽기가 갖는 독특성과 현주소를 ‘무위’를 중심으로 조망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2. 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을 찾아서

20세기 『노자』와 『장자』 이해를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새로운 문헌의 발굴 덕분이었다. 특히 1973년 마왕퇴(馬王堆) 백서(帛書) 『덕도경(德道經)』의 발굴은 『노자』에 대한 해석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변화는 『노자』에 대해 ‘도(道)’ 중심의 해석에서 ‘덕(德)’ 중심의 해석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도’가 고대 그리스의 ‘로고스(logos)’에 비견되면서 우주론, 인식론 등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 유사한 것으로 해석되던 경향은, 1980년대 이래 보다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해석과 사상사적 접근으로 전환되었다. 아마도 그 가운데 한국에서 가장 크게 주목받았던 것은 ‘황로학(黃老學)’에 대한 관심과 위진(魏晉) 현학(玄學) 논쟁이라 할 수 있다.

김용옥이 한의학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면서 한(漢) 초(初)의 종합적 사상 경향으로 황로학에 주목할 것을 촉구한 것과 더불어, ‘현학 논쟁’은 1990년대 한국의 도가철학회를 중심으로 ‘노장(老莊)’을 역사적으로 접근하게 해주었다. 특히 ‘유무(有無)’를 논하는 고원한 형이상학 담론으로 여겨지던 위진 시대의 현학 논쟁이 실질적으로는 제도와 본성을 둘러싼 논쟁이었다는 점을 환기시켜주었다. 그 이후 한국의 ‘도가’ 연구자들은 20세기 초반 중국의 철학사가들이 만들어낸 ‘철학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주석사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다.

백서 『덕도경』의 발굴이 가져온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는 『노자』와 『장자』를 별개의 텍스트로 분리해 보는 시각이 체계화되었다는 점이다. 『노자』가 황로학 계열의 문헌이라는 인식은, ‘도’ 중심의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관심에서 벗어나 ‘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사상적 텍스트로 이해하게 되면서, 나아가 ‘도’와 ‘법(法)’의 친연성을 눈여겨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용어인 ‘도가(道家)’ 대신 ‘도법가(道法家)’라고 부르는 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노자』는 이제 『장자』보다 『한비자(韓非子)』, 『회남자(淮南子)』 혹은 『손자(孫子)』와 같은 병가(兵家)와도 함께 해석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이러한 연구 경향의 반영이 이른바 ‘노학(老學)’ 또는 ‘장학(莊學)’으로 표현되었다면, 한국의 경우 주석사를 통해 『노자』와 『장자』를 구분하여 접근하는 새로운 흐름을 형성함으로써 ‘노장 전통’을 보다 객관적인 시야에서 조망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20세기 한국의 ‘노장 전통’을 말하는 데 있어 기존의 논의에서 소홀히 취급되었던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그 하나가 조선 유학자들에 의한 『노자』와 『장자』 주석 전통이라면, 다른 하나는 20세기 기독교 계열 —유영모, 함석헌은 물론 오강남, 이현주 등 다수의 저서나 역서 그리고 대중적 독자층이 있는— 사상가들에 의한 『노자』와 『장자』 해석 전통이다. 내가 보기에 함곡관을 나서서 역사를 가로질러 서울의 종로에 이르는 『노자』로 이어지는 과정은, 논리적 방법으로 이해되거나 텍스트 연구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한국에서 여전히 ‘상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노장 전통’은 중국 철학사와 한국 철학사의 연속적 서술을 통해 해명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베이징의 『노자』와 서울의 『노자』는 물리적 거리를 넘어서는 역사의 거리, 20세기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밴 살아 있는 역사의 산물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여기’ 삶의 자리에 터 잡고 있는 ‘노장 전통’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치 물리학의 퀀텀 점프처럼 해석학적 초월(the hermeneutical quantum jump)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3. 무위(無爲)의 기원과 『노자』 전승

20세기 한국인에게 『노자』 하면 가장 친숙한 표현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등재된 ‘무위자연’은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또는 그런 이상적인 경지”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리고 포털사이트에서 ‘무위자연’을 검색하면 언제나 ‘도가’ 또는 노자와 함께 검색어로 추천된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처음 등장한 ‘무위’는 노자가 아닌 공자가 최초의 발화자이며, 사전적 정의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의미는 『노자』와는 상관이 없고, 『장자』와 결합되면서—즉, ‘노장’ 전통— 등장하는 전혀 새로운 의미이다.

역사상 ‘무위’를 가장 처음 언급한 것은 공자의 『논어(論語)』이다. 공자는 “무위하면서 다스렸던 분은 아마도 순(舜)일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것인가?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남쪽을 바라보았을 뿐이다.”(『논어』 「위령공(衛靈公)」)라고 말한다. 이는 「위정(爲政)」에서 덕치(德治)—더불어 군주가 덕으로 다스릴 때 모든 신하가 자신에게 주어진 적절한 예(禮)를 행함으로써 전체적인 조화가 이루어지는 예치(禮治)가 구현된 상태—를, 마치 가만히 있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뭇 별이 공전하듯이 도는 모습에 비유한 것과 연결되어 이상적인 통치를 묘사하는 말로 해석되곤 한다. 그런데 공자의 이 비유는 유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제자백가 공통의 유산이기도 했다.

가장 앞서 ‘무위’가 고대 중국의 역사 과정과 어떤 연관을 갖는가를 잘 보여준 것은 크릴(H. G. Creel)이다. 크릴은 『노자』의 무위의 기원을 소급하면서 공자를 언급하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은 신불해(申不害)로부터 기원하는 통치 행정과 관련된 기술로 이해한다. 달리 말해 고대 중국의 중앙집권화된 국가의 출현과 그에 따른 관료제의 발전의 근거를 ‘무위’와 연관 지어 이해한 것이다. 즉 신하의 유위(有爲)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국가 행정과, 이에 대해 인사권, 감찰권, 상벌권을 운용하면서 이루어지는 군주의 무위는 『노자』의 “무위를 행하면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3장: 爲無爲則無不治)”라는 문장을 깔끔하게 이해시켜준다.

하지만 크릴의 설명은 고대 중국에서 관료제적 통치 체제로서의 ‘무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생, 발전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잘 해명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도가적 무위’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숙제로 남기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노장사상’이 등장하는 배경이자 맥락이 된다. ‘노장사상’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 충분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나는 ‘노장사상’에 대한 정확한 의미 규정은 “유학자들이 『장자』를 통해 해석하는 『노자』 전승”이라고 보고 싶다.

4. 『장자』의 ‘무위’와 ‘노장 전통’

『노자』 계열의 문헌군에서는 ‘노장 전통’의 싹을 찾아볼 수 없다. ‘노자 전승’이란 『노자』라는 ‘텍스트’와 다양한 고사가 엮이는 과정이며, 다른 한편 한 초의 공자 전승과 노자 전승이 대립하는 정치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하지만 『노자』의 무위와 『장자』의 무위는 본래부터 전혀 상이한 의미와 맥락을 지닌 것이었다. 오늘날 『노자』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 된 첫 문장 “도를 도라 말하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에 대해 「도응훈」은 수레바퀴 깎는 장인인 윤편(輪扁)과 제(齊) 환공(桓公)의 고사를 인용해 설명한다.

성인의 글을 읽고 있던 환공에게 윤편이, 알맹이는 성인이 가슴에 품고 죽었으니 다만 찌꺼기만 남았을 것이라 조소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노자를 운운하며 “도를 도라 말하면 그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다”를 인용한다. 이는 ‘존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언어철학보다는 노하우(know-how)를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지적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도응훈」이 보여주는 『노자』 이해는 매우 실제적이고 명쾌하며, 지극히 정치적이다.

사실 이러한 해석의 기조는 『노자』의 ‘무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우리에게 오늘날 친숙한 ‘무위자연’의 개념이 『노자』에는 없다. 『노자』에서 ‘무위’의 주체가 성인 혹은 후왕(侯王)이라면 ‘자연’의 주체는 만물이다. 즉 일반적인 구조는 “주체인 성인의 무위를 원인으로 객체인 만물의 자생성(자발성)이 결과로서 도출된다는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형성된 ‘무위’는 모두 통치 행위와 관련되지만 유일하게 이에 대한 저항적 혹은 비판적 의미의 ‘무위’가 등장하는데 이는 『장자』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사상이다. 이 무위는 『장자』의 ‘소요(逍遙)’와 짝을 이루는 개념으로서 일종의 자유 혹은 불간섭의 상태와 같은 맥락을 보여준다. 『장자』 「소요유(逍遙遊)」의 마지막 이야기에 나오는 혜시와의 대화에서, 혜시(惠施)가 장자의 말은 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다며 박에 비유하고 나무에 비유하며 조롱하자 장자는 이렇게 답한다.

장자가 이에 대해 말하였다. “그대로 살쾡이를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몸을 바짝 낮추고 엎드려서 나와 노는 작은 짐승들을 노리고 또 먹이를 찾아 동으로 서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는다. 그러다가 덫에 걸리기도 하고 그물에 걸려 죽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저 이우(斄)는 그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으니 이 소는 크기는 하지만 쥐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 이제 그대에게 큰 나무가 있으면서도 그 나무의 쓸모없음이 걱정이 된다면 그것을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고을, 끝없이 펼쳐진 광원막대한 들판에 심어놓고 그 옆에서 자유롭게 거닐면서 아무 하는 일 없이 지내고 그 아래에서 유유자적하면서 낮잠이라도 자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彷徨乎無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 이 큰 나무는 도끼에 잘릴 염려도 없고 아무도 해칠 자가 없을 것이니 세속적인 쓸모가 없긴 하지만 괴롭게 여길 것 하나도 없다.”(『장자』 「소요유」)


장자의 무위는 여기서 앞서 등장했던 군주의 통치 행위와 전혀 상이한 맥락으로 바뀌어 있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림[無爲]”은 ‘방황(彷徨)’과 짝하고, “누워서 잠자기[寢臥]”는 소요(逍遙)와 짝하며 서술된다. 실상 여기서 묘사하는 ‘방황’과 ‘소요’는 현대의 해석자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절대 자유의 경지와는 무관하다. 그것은 오히려 “아무도 해칠 자가 없는 상태”에서 오는 여유로움, 즉 전쟁으로 점철된 시대에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고 농사짓는 농사꾼이 한낮에 가질 수 있는 잠시의 빈둥거림처럼 보인다.

이러한 전란(戰亂)과 정치적 갈등으로부터 오는 부정적 심리는 장자에게서 인간에 대한 무정한 태도를 촉발한다. 혜시가 장자에게 ‘무정’의 의미를 따지자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자네의 말은 내가 말하는 ‘정’이 아니라네. 내가 ‘무정하다’고 하는 말은, 사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정으로 안으로 자신을 해치지 않고, 늘 자연을 따라 ‘타고난 생명[生]’에 무언가를 더 보태려 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라네.”(『장자』 「덕충부(德充符)」)

『장자』의 후학들에게서 염담(恬惔), 적막(寂漠), 허무(虛無), 무위(無爲) 등으로 표현되는 정신적 태도는 자유에 대한 갈구 이전에 상처받지 않고자 하는 본능이며, 자신을 복속시키려는 외부의 강력한 힘을 통제하지 못할 때 스스로의 내면으로 침잠하여 스스로의 감정만이라도 다스리고자 하는 일종의 자기 치유였다. “마음의 죽음[心死]”(「전자방(田子方)」)이라도 모면하고자 하는 처절한 외침이다.

이런 ‘무정’과 ‘무위’는 군주에서 개체로, 정치에서 삶으로 그 축을 뒤흔들어 놓는 주체의 변화를 가져온다. 전국에서 한 초의 혼란기에 저술된 『장자』의 편들은 하나로 묶이긴 했지만, 오랫동안 서가에 잠든 채 읽히지 않다가 진퇴(進退)의 고뇌를 다시 겪어야 했던 위진(魏晉) 사대부(士大夫) 사이에 유행하게 되면서 『장자』가 널리 읽히고, 오히려 『노자』를 『장자』를 통해 해석하며 새로운 흐름으로서 ‘노장 전통’을 세우게 된다.

5. ‘도화원기(桃花園記)’와 조선조 『노자』의 ‘도’

사실 ‘노장 전통’을 보다 잘 보여주는 것은 철학보다는 문학과 예술이다. 진(晉) 태원 연간의 전란기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귀거래(歸去來)’를 읊은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가 이런 정조를 잘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노장 전통’이라 부르는 일종의 문화적 감수성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이르러 완성된다. ‘노장 전통’은 단지 『노자』와 『장자』라는 텍스트 속의 관념으로 이루어진 사상 체계가 아니라, 정치와 전쟁이라는 험난한 삶의 체험이 갈마들고, 조(朝)와 야(野)를 넘나드는 진퇴(進退)의 부침 속에서 피어난 일종의 심태(心態)이자 문학과 예술로 표현되는 내면의 풍경이기도 하다.

이는 송유(宋儒)에 의해 왕필(王弼)의 『노자』가 재발견되고,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면서 유사한 체험을 지닌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공동의 유산이 되었다. 비록 이단(異端)으로 치부되었음에도 널리 읽혔던 『노자』와 『장자』는 조선에서 5종의 주석서를 남기는데, 그런 조선조 ‘노장 전통’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계기는 ‘도’가 ‘리(理)’가 되고, 둘 다 ‘자연(自然)’으로 수렴된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한국인들이 지닌 『노자』에 대한 이해에 가장 가까운 저서는 실상 홍석주의 『노자』이다.

도(道)란 저절로 그런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것을 도로 여겨야 한다고 하면 인위적인 것으로 헤아린 것이니, 내가 말한 저절로 그런 도가 아니다. 도는 하늘서 나왔고, 이름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왔다. 그러나 실질적인 것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있게 되었다면 또한 저절로 그런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이것을 이름으로 여겨야 한다고 하면 이름과 실질이 나뉘고 지(知)와 교묘함이 일어나니, 또 내가 말한 저절로 그런 이름이 아니다.

상(常)이란 저절로 그런 것을 말한다. 사람의 힘으로 작위하는 것은 반드시 오래갈 수 없다. 오래가도 변하지 않는 것이 오직 저절로 그런 도이니, 이를테면 하늘이 높고 땅이 두텁고 해와 달이 빛나고 산악이 우뚝 솟아 있고 강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것들이며, 사람에게는 아버지와 아들, 임금과 신하, 지아비와 지어미 사이의 윤리가 만고에 구하여 변할 수 없는 것들이니, 모두 저절로 그런 것일 뿐이다. 이것이 이른바 항상된 것이다.(『정노(訂老)』, 김학목 역, 2001: 33-34)

홍석주의 『노자』 이해에서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와 소당연지칙(所當然之則)의 원리는 『노자』의 도에서 하나가 되고, 그것은 다시 리(理)로서 일종의 섭리처럼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섭리의 대명사로 ‘자연’은 최고 상위의 원리처럼 이해되어 나간다. 이제 이러한 ‘도’ 혹은 ‘자연’은 하나가 되어 20세기 한국의 『노자』 이해의 기반이 되고, 모든 인위에 대립하면서 궁극의 지위 혹은 신의 섭리와 같은 위상으로 올려지게 된다.


6. 함석헌과 ‘노장 전통’: 성인의 무위, 씨알의 무위

『노자』 60장에 보면 “치대국(治大國), 약팽소선(若烹小鮮)”, 즉 “큰 나라 다스림이 작은 생선 지짐 같다”는 말이 있다. 사실 이 말은 있는 그대로 보면 정치의 신중함을 조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70년대 종로 YMCA회관에서 씨알 함석헌이 들려주는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생선을 지지는 법인즉 건드리면 못쓴다. 건드리면 다 부스러져 그 맛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작은 생선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작은 생선을 지지는 사람은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나라는 큰 것이지만, 잘못하면 상하기 쉬운 것이 작은 생선 같으니, 정치하는 사람이 특별히 마음을 써서 국민을 절대로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 그러니 정치하는 사람은 이 점을 깊이 생각해서 재주보다 원리 원칙을 믿어야 하고, 국민은 또 이것을 알아 설혹 정치가 건드리고 못살게 굴더라도 절대 건드림을 받지 않는 정신을 길러야 할 것이다. 즉 스스로를 작은 생선으로 알고 지켜야 한다. 그 작다는 데 깊은 진리가 있다.”(함석헌)

오늘날 우리가 ‘노장’ 해석에서 상식적으로 강조하는 자연주의, 평화주의, 불간섭주의의 지향과 그 보편적 의의를 강조하는 태도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볼 때 역사적ㆍ현재적 해석 갈래와 차별화되는 함석헌의 ‘노장 이야기’의 특징이다. 따라서 2000여 년에 걸친 역사상의 수많은 노장 해석의 갈래에서 보면 함석헌의 노장 이야기는 독창적이지만, 우리에게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함석헌의 이야기를 들을 때 너무나 자연스러운 『노자』 해석으로 받아들인다. 함석헌에게 ‘건드리지 말라’는 것은 권위주의적 정부가 씨알을 간섭하는 것, 인위적 개입[有爲]으로 자연성을 파괴하는 것, 모두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논의이다. 이러한 함석헌의 이야기는 198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 붐을 타고 일어난 ‘노장’의 생태주의ㆍ환경철학적 해석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20세기가 저물어갈 때 도올 김용옥은 이를 ‘허(虛)의 무위론’으로 발전시킨다.

노자는 그 컵을 채우려는 인간의 행위를 유위라고 부른다. 유위란 곧 존재에 있어서 허의 상실이다. 그러니까 그 반대 방향의 행위, 즉 빔을 극대화(極大化)하는 방향의 인간의 행위를 바로 무위라고 부르는 것이다. (…) 노자에게 있어서는 마음을 채우는 방향의 우리의 심적 작용이 곧 유위요, 마음을 비우는 방향의 심적 작용이 곧 무위인 것이다.(김용옥)

도올의 해석에 따르면, 『노자』는 “빔(emptiness)=가능태(potentiality)”의 철학을 천명한 동양 자연주의의 중요한 한 전형이며, 전통 동아시아 사상의 핵을 이루는 중요한 고전이다. 이러한 도올의 해석은 이미 함석헌의 ‘이야기’ 속에 간명하게 나타나 있다. 일반적으로 『노자』는 유위 : 무위, 문명 : 자연, 간섭 : 아나키, 사회적ㆍ규범적 가치 : 자연적ㆍ소박한 사회 모형에서 후자를 주창했으며, 정신의 자유를 주창한 철학 전통이라고 이해된다.

이와 같은 함석헌의 이야기는 『노자』 해석의 전통에서 볼 때 연속적이기보다는 불연속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노장 전통’은 하나의 선형적인 주석 전통이 아니라, 『노자』는 『장자』를 통해 재해석의 과정을 거치고 역사와 삶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해석학적 초월’을 함으로써 오늘의 ‘노장 전통’에 이른 것이다.

적어도 함석헌의 노장 이야기는 서구 과학과의 화해를 긍정하였고, 또한 ‘근대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관점에서 『노자』를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화의 정도에 비례하여 함석헌의 노장 이야기는 전통과 불연속적이며,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삶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의 노장 이야기는 “눈으로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의 자리에서” 읽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노자』에는 인권, 민주주의, 권리와 같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노자』를 읽던 제왕과 그 측근들의 손에서 벗어나 『장자』를 통해 읽어온 사람들이 사대부, 씨알로 변천하면서 형성된 ‘노장 전통’은 오늘 지금 여기 씨알의 자리까지 와 있다. 거기서 우리는 대자연의 섭리이든 신의 명령이든 “건드리지 말라”로 압축되는 일종의 비판철학에 마주하고 있다.

‘무위자연’은 애초부터 하나의 말이 아니었으나, 이제 한국의 현실에서 ‘무위자연’은 정치와 평화, 생태와 환경, 더 나아가 삶의 안정과 정신적 내면 상태를 호위하는 강력한 무기로 호명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베이징의 『노자』와 서울의 『노자』가 다른 지점일 수 있고, 우리에게 펼쳐질 미래를 결정할 커다란 힘이 될 수도 있다. 그 의미가 어떻게 규정되는가는 바로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실천에 달린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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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지성 In & Out 기자

도(道)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道)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道)


불교개념용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마땅히 지켜야 하는 이치를 가리키는 종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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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불교유형개념용어
정의
인간답게 살기 위해 마땅히 지켜야 하는 이치를 가리키는 종교용어.

개설
원래는 ‘인생의 여로’라는 길의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거기에 추상적인 의미가 첨가되어 인간의 행위에 꼭 따라야 할 기준과 원칙 등의 의미로 변질되어 갔다. 특히, 동양의 여러 종교에서는 이 도를 매우 중요한 가치기준으로 여겼기 때문에 철학·문학·사상·예술·문화 등 동양의 여러 정신적·물질적인 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이 도는 시대와 장소, 그리고 인물에 따라 각각 상이하게 설명되어 왔다.
유교에서는 특히 도의 도덕적 면을 강조하여 일종의 생활규범, 인간의 가치기준 등의 핵심 규범으로 이해하였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중심으로 하는 원시유교에서부터 주자학(朱子學)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항상 이 도의 기준은 윤리적 측면에서 논구(論究)되어 왔다.
노장사상(老莊思想)에서의 도는 종교의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어, 우주만유의 본체이면서 형태 지을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실재(實在)로서의 도를 주창하였다. 인생의 모든 행위와 자연계의 섭리는 모두 도 아님이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은 얼마나 그 도에 가까우냐로 됨됨이를 따져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불교의 경우 진리(Dharma) 자체를 도라고 보았다. 특히, 사제(四諦)·팔정도(八正道) 등에서 설명하는 도(道, Marg)는 ‘올바름’·‘당위(當爲)’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들 세 종교에서 도는 각각 다른 면을 강조하지만, 공통되는 점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도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다. 즉, 사람이 이 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현실의 피상적인 차별이나 변화를 떠나서 절대불변의 입장에서 참다운 자유를 얻게 된다고 본 점이다.
따라서, 동양문화의 바탕은 이 도를 시발과 종착역으로 삼았고, 인위적인 기교보다는 자연 섭리에 따르는 무위자연적(無爲自然的)인 삶을 존경했으며, 그와 같은 삶의 여로를 통한 진리 증득(證得)이 값진 일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동양종교와 도

1. 도교
도가(道家)의 철학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노장적 철학(老莊的哲學) 위에 신선사상(神仙思想)과 통속적 민간신앙까지 첨가시켜 종교로서 등장하는 것은 송나라 때의 일이다. 수나라와 당나라 때는 특히 큰 세력을 얻어 유교·불교 등과 함께 동양의 정신적 지주로 등장하였다.
도교에서의 도는 다분히 유신론적(有神論的)인 종교사상에 기반을 둔다. 도는 우주와 만유일체의 근원이며, 피상적인 언설(言說)이나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 뜻에서 도는 무(無)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유(有)를 창조하기 때문에 허무로서의 무는 아니다. 도는 하나[一]를 생성한다. 그 하나에서 다시 둘[二]이 생기고, 둘은 셋[三]을 만든다. 이 셋에서부터 만물이 생성된다고 설명한다.
도교에서의 삼은 삼원(三元)→삼기(三氣)→삼재(三才)로 변하여 만물을 만든다고 본다. 이 삼은 나중에 천상삼계(天上三界)라고 하여 도교의 신앙대상이 되었다.
삼계의 첫째는 태상노군천사태청경(太上老君天師太淸境), 둘째는 구선상청경(九仙上淸境), 셋째는 구진옥청경(九眞玉淸境) 등이며, 이 세 하늘에 각각 신선이 산다고 설명한다. 이 세 하늘의 주신(主神)은 삼청(三淸)이다. 첫번째의 태상노군천사태청경은 빈곤과 죽음이 없는 영원의 이상세계이고, 두번째의 구선상청경은 현실 지상계로서 색욕(色欲)과 빈곤, 죽음 등이 뒤따르는 고통의 현실세계이고, 세번째의 구진옥청경은 즐거움이 없는 암흑과 괴로움의 지하세계를 상징한다.
따라서, 도교의 목적은 천상의 세계에 태어나서 안락(安樂)을 얻는 것이다. 천상세계에 태어나는 첩경이 바로 도를 깨달아서 도로 되돌아가는 길이다. 인간은 원래 도에서 비롯된 존재이지만 후천적인 나약과 인위적인 행위 때문에 도에서 점차 멀어지게 된 존재이다. 따라서, 무위청정(無爲淸淨)한 삶을 영위함으로써 도에 귀일(歸一)할 수 있고, 그렇게 될 때 천지와 더불어 장생(長生)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요컨대, 도교의 도는 만유의 근원이다. 그러나 형체 지을 수 없고 인격화할 수 없는 ‘무엇’이다. 도를 회복하여 가진 삶은 가장 이상적인 삶이며, 어떠한 인위적 가치덕목도 도를 방해하는 유위(有爲)의 작용일 따름이다. 그 도교의 수도자들을 도사(道士)라고 부르며, 도를 얻기 위한 비술(祕術)을 신선술이라고 부른다.
2. 유교
공자는 천도(天道)에 대해서 강력한 주장을 편 바 있다. 즉, 인도(人道)는 천명(天命)에 따르는 것이며, 천도는 인도를 이끄는 진리라고 보았다. 그러나 『논어』에서는 그 인도를 다시 세분하여 왕의 길(王之道), 군자의 길(君子之道), 아버지의 길(父之道) 등으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그와 같은 여러 도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인(仁)이었다. 인이란 개인적으로 보면 자아의 완성이지만, 외면적으로 말하면 사회 구제이다. 공자가 말한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뜻도 바로 그것으로서, 모든 인간은 도를 회복함으로써 인생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지켜야 할 이상적인 도의 방법은 덕(德)의 실천이다. 덕이란 도의 현현체(顯現體)일 뿐 아니라, 가장 두드러진 작용의 하나이다. 이 덕은 소극적으로 해석하면 인륜(人倫)의 실천 또는 불륜(不倫)을 극복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과 도움을 가져다 주는 실천행이 될 수 있으며, 앞서 말한 인격도야와 사회 구제가 가능해질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덕은 도의 수단임을 알 수 있다. 즉, 도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실재적으로 확립시키고 있으며, 도의 개념과 여러 덕목의 본질적 의미가 일치되고 있다. 그러므로 유교의 도는 윤리적 표현이 된다. 모든 인간본성을 뒷받침하는 근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인간답다고 하는 의미는 곧 도를 얼마나 실천하느냐 하는 점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가 비록 현실적 현현체라고는 하나, 그 구체적 방법수단이 되는 덕목은 사람과 시대에 따라 각각 특수성을 가지고 제창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후대의 유가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타당성이 있는 근본원리인 도와 특수성에 대한 자각과 실천적 노력으로 그 교리체계를 확립시켰다.
『논어』에서 말한 예·충·효·인·신·성(誠) 등의 덕목은 바로 도의 행동화일 뿐 아니라 도의 실천방법이기도 하다. 요컨대, 유교에서는 천명이요 인간의 본성인 선과 인의(仁義) 등의 덕목을 실천하는 길이 바로 도의 실현이라고 파악하였다. 따라서, 인간도덕으로서의 인도를 밟고 행하는 것이 그대로 천도의 실현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유교의 도는 바로 인간본질의 실현이면서 윤리규범이요 요체가 될 수 있다는 기준이 마련된다.
바로 이 점에서 유교와 도교의 도에 대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노장에서는 오히려 인륜의 입장을 버리고, 현상의 밑바닥에 잠재되어 있는 자연의 도와 합일(合一)하는 것을 이상으로 내세운다. 세계의 진리는 이곳에 있고, 현상은 이 도의 발현으로써만 의의를 찾게 된다고 본 것이다. 그런 뜻에서 유교의 도는 도교의 그것보다 좀더 인격적이며 실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불교
불교에서는 여덟 가지의 도를 말한다. 즉, 인간고(人間苦)를 소멸하는 길을 팔정도라고 설명하였다. 그 여덟 가지의 도는 올바른 생각[正見], 올바른 사유[正思],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업[正業], 올바른 생활수단[正命], 올바른 신념[正念],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마음가짐[正定]이다. 이 여덟 가지의 도에 의해서만 인간은 열반(涅槃)이라는 이상적 경지를 체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여덟 가지의 도는 종교적 행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실천의 의미도 가진다.
이 여덟 가지를 요약해서 계(戒)·정(定)·혜(慧)라고 한다. 이것을 근본불교에서는 삼학(三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초기불교에서 가장 근원적인 실천수행의 방편이었다. 즉, 인간고를 내면적인 원인으로 파악하여 탐(貪)·진(瞋)·치(癡)의 삼독(三毒)이라고 부르고, 그 고의 소멸은 삼학의 수행으로서만 가능하다고 석가모니는 역설하였다.
삼학 중 계는 윤리적 생활태도를 가리킨다. 산 목숨을 죽임, 도둑질·이성관계·거짓말·음주 등의 다섯 가지 나쁜 일을 범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말한다. 정이란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수련방법을 가리킨다. 즉, 외부지향적인 번뇌의 고삐를 잡아 궁극적 자아의 실현을 도모하는 공부방법이다. 혜는 구체적으로 반야지(般若智)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물의 현상 속에 감추어진 진실, 세계와 인생의 실상(實相)을 바로보는 안목이다.
이 삼학의 수련이야말로 삼독을 파기하고 열반을 얻게 하는 첩경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도는 진리 자체라는 뜻과 함께 도덕적 행위규범이 되기도 한다.
서양의 종교학자 루돌프(Rudolf,O.)는 이 불교의 도는 성스러움이라는 종교적 신성에 대한 불교적 표현이라고 설명하였다. 즉, 불교의 도는 올바름으로 나타나며, 그 올바름이 인간행위의 주체여야 한다는 불교적 주장이 동양사상의 형성에 지대하게 공헌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요컨대, 불교의 도는 인생의 당위이자 수행의 핵심적 덕목이다. 특히, 선불교(禪佛敎)에서는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 열반이라는 궁극적 경지를 도로써 설명하기도 하였다.
「증도가 證道歌」와 같은 선시(禪詩)는 그 대표적 실례로서, 열반을 얻은 부처의 경지를 도인(道人)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도인의 경지를 ‘배움이 끊어지고 함이 없는(絶學無爲)’ 등으로 묘사하여 다분히 노장적 분위기를 나타내기도 한다. 즉, 동양의 세 종교에서는 이와 같이 각각 다른 입장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서로 혼융(混融)되어 이 도의 사상을 실천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삼교융합의로서의 도
도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걸어야 할 길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타당한 가치이기 때문에 삶의 방식은 또한 도 아님이 없다. 따라서, 도에는 ‘간다[行]’, ‘행한다’라는 본질적 의미가 내포된다. 이러한 면에서 도는 삼교융합의 특성을 지닌다. 유가의 도는 규범·인륜 등의 뜻이 있고, 도가의 경우 우주만물의 근원, 즉 절대성을 지닌 개념이며, 불교의 경우 올바른 삶의 길로서 제시되었다.
삼교에서 공통되는 원리는 인간이 무엇을 행하기 위한 기술방법이 되는 도리라는 뜻이다. 표현방법은 세 종교가 각각 다르지만, 인간의 도리라는 관점에서 이 세 종교는 그 궤도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도리는 물론 진실성 있는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다. 각자가 서로의 입장을 고수하는 태도가 아니라 타협과 여지가 있는 공간이 바로 도리이다. 유교에서는 ‘선한 본성’이 되며, 도교에서는 ‘무위자연’이 된다.
이들은 각각 도를 자신의 입장에서 발전시켜 나가지만, 사상으로는 도가 동양정신의 중핵(中核)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인간사의 모든 현상을 이 도에 걸맞는지 아닌지의 여부로 판별한다. 바둑을 두는 일은 기도(碁道)가 되고 차를 마시는 일은 다도(茶道)가 된다. 심지어는 상대를 베는 검술을 검도(劍道)라고 한다. 즉, 인간의 도리를 따르는 모든 행위의 원천을 도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 나라와 같이 시대별 종교성향이 뚜렷한 경우 도의 본질적 작용이 삼교융합의 예로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단군신화(檀君神話)라든지 화랑(花郎) 등의 기본 범주는 바로 이 도라는 개념의 실천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나라의 도사상

1. 전개
1.1. 홍익인간과 도:단군조선의 시조였던 환웅(桓雄)의 개국이념은 홍익인간이다. 그때의 홍익은 ‘널리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길’로서 이것이 한국적 도의 효시가 된다. 이념적으로 보면 홍익인간은 화합과 번영의 이상적 실천덕목이다. 즉, 모든 인간의 생명이 존중되고 모든 이익이 균형 있게 분배될 때 사람들은 다투어 상경상애(相敬相愛)·상부상조(相扶相助)의 일체감을 가지고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홍익인간의 이념은 이타행(利他行)이며 상대주의적 인간관이다. 어떤 타율적인 인과율(因果律)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 남을 사랑하고 남을 위하여 희생한다는 숭고한 이념적 이상의 제시이다. 단군신화가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점은 논의에서 제외된다. 왜냐하면, 홍익인간의 이상은 신화의 상징을 대변하는 민족정신의 구심점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홍익인간은 한국적 도의 출발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도덕생활과 인륜생활의 규범이 펼쳐지는 근원이다.
1.2. 한울님의 도: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경천(敬天)과 조상숭배의 습속을 지니고 있었다. 또, 그것이 인간의 도라고 설명되었다. 또, 불교나 유교와 같은 철학적 종교가 들어 오기 이전부터 내세에 대한 소박한 관념을 품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기대는 현세의 유덕(有德)한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 되고, 지하의 음계(陰界)에 대한 두려움은 악의 유혹을 물리치는 이념의 근거가 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 ‘한울님’을 인격화하기보다는 초월적 내재자(內在者)로서 이해하였다. 단군신화에 나타나는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이 그 실증이 된다. 한울님에 대한 외경(畏敬)은 곧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며 그것은 동시에 모든 인간을 향한 끝없는 자비의 실천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하늘에 대한 관념은 바로 이 한울님과 그에 관한 도로서 나타난 것이다.
1.3. 화랑과 도: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은 화랑의 연원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시사를 주고 있다. 그 첫머리는 “우리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國有玄妙之道)…….”라고 시작하고 있다. 이어서 최치원은 그 도는 유교와 도교, 그리고 불교를 융합한 도로서 신라의 화랑이 있다고 서술하였다.
최치원에 의하면 화랑은 충효를 윤리근본으로 삼았는데 이것은 유교의 영향이며, 또 무위자연을 섭생(攝生)의 도로 삼았는데 그것은 도교의 영향이며, 모든 선을 받드는 일을 미덕으로 삼았는데 그것은 불교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였다. 화랑도를 도로서 파악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원광(圓光)에 의하여 제시된 세속오계(世俗五戒)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곧 유·불·도 삼교 융합의 도, 인간 당위의 도가 제시된다. 그때의 도는 바로 화랑의 정신적 지주이자 신라사회의 윤리적 근거였다고 볼 수 있다.
1.4. 가족의 도:우리 나라 고대사회의 기본조직은 혈연 집단이었다.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고대 한국인은 부계(父系)의 통솔 아래 집약적 농경생활을 영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족의 구성원은 부모를 정점으로 형제자매의 혈연으로 유지된다. 그때 부부·부자·형제·자매 관계 등의 인간관계가 문제된다. 물론, 후대의 가족도(家族道)는 철저히 유교적으로 윤색되었지만, 초기에는 단순한 평형관계로 유지되었다고 짐작된다.
『위지 魏志』에는 마한의 풍속을 말하면서, “모든 식구가 한지붕 밑에 모여 살며, 장유남녀의 구별이 없다(其戶在上擧家其在中 無長幼男女之別).”고 하였다. 이것은 한국의 가족도가 우애의 인륜으로 뭉쳐 있음을 시사한다.
1.5. 조상숭배의 도:조상을 숭배하는 습속은 애가심(愛家心)과 효순심(孝順心)에서 비롯된다. 즉, 선조에게서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그 유업을 계승하여 가문의 번영과 자손의 안태(安泰)를 비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도이다. 이와 같은 사고 경향은 영혼불멸설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선조들의 영혼은 멸하지 않고 자손들을 명호(冥護)한다는 소박한 감정의 표출이 바로 제사의례이다.
『위지』에는 동옥저인들이 부조(父祖)가 좋아하던 식미(食米)를 질그릇에 담아 항상 공양을 드렸다고 하였다. 즉, 부모를 공양하는 것은 살아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일 뿐더러 선조의 노여움을 사지 않고, 후손들에게 사복(賜福)하는 첩경임을 믿는 반증이 된다. 특히, 삼국시대 초기부터 이 조상숭배는 인륜의 으뜸가는 도로서 제시되었다.
고구려 시조 동명왕은(기원전 24) 그의 친어머니인 부여의 유화(柳花)를 위하여 신묘(神廟)를 세웠으며,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기원전 18) 친아버지를 위하여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으며, 신라 제2대왕인 남해차차웅은(기원 6) 신라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시조묘를 세웠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조상숭배는 이미 삼국시대 초기부터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영혼불멸설이나 애니미즘적(animism的) 원시종교의 영향을 받아 가장 주목받을 만한 한국적 도의 하나로서 이어져 오게 된다.
1.6. 효의 도:효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지켜야 할 도덕률(道德律)이다. 공자는 『예기 禮記』에서 고대 한국인들의 효의 덕행에 대하여 “동이인(東夷人)인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은 거상(居喪)을 잘하여 3일을 불태(不怠)하고, 3개월을 불해(不懈)하고 3년간이나 부모의 죽음을 애도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적어도 3세기 이전에 이미 삼국에서는 다투어 이 효행의 미덕을 표창하기까지 하였다. 더구나, 4세기 이후 불교와 유교가 도입되면서 이 효의 윤리는 지배적 인간의 도로서 우리 조상들의 삶을 지배하였다.
1.7. 충의 도:삼국시대 이전의 충의 개념은 후대에서 말하는 번쇄적 특징은 갖추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즉, 사회정치체제 자체가 절대적 군주체제가 아니었으니만큼 서로간의 인의와 상층구조에 대한 외경심리로 상징되었을 것이다. 그때의 충은 경(敬)이며, 마음을 다함이다.
가정에서는 웃어른을 공경하고, 촌락이나 부족의 일에 온 정성을 다하고, 사회적으로는 웃어른을 잘 섬기고 받드는 일이었다. 군장(君長)에게 절대 복종을 강조하는 충효관은 역시 중앙집권의 틀을 갖추는 삼국시대 중기 이후라고 보아야 한다. 삼국이 정립되면서 군신 간에는 현격한 계층질서가 생겨나게 된다. 한편, 중국에서 충군존왕사상(忠君尊王思想)이 도입되면서, 삼국에서는 충군의 윤리가 성립된다.
지리적으로 보아 가장 빨리 충의 개념을 정립한 나라는 고구려였다. 그러나 신라는 뒤늦게 받아 들인 충효관을 사회질서 정립의 기치로서 확립시킨 특이한 예이다. 원광의 세속오계 가운데 ‘사군이충(事君以忠)’이라는 덕목이 제일 먼저 열거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즉, 고대 전제왕권의 확립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기준을 이 충의 도에서 찾은 신라적 전개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특징
우리 나라에 도교의 경전이 최초로 수입된 것은 삼국시대 초기의 일이다. 고구려에서는 624년(영류왕 7) 당나라 고조(高祖)가 보낸 도사(道士)가 노자를 강론하였고, 643년(보장왕 2) 노자의 『도덕경』이 전래되었다. 또, 신라의 화랑 김인문(金仁問)의 본전(本傳)에서는 그가 젊었을 때 노장(老莊)의 전적들을 섭렵하였다고 하였다. 즉, 삼국시대 이래 도가사상은 지도자의 인격함양과 학인들의 덕성을 도야하는 소임의 한 부분을 맡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이후 고려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도가사상은 비록 사상의 주류로서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지배적 종교이건 그 근저에 깔린 사상으로서 맥을 이어왔다. 도가사상이 끈질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가장 근본 원인은 고대 한국인들이 도교수용에 적합한 토착적인 문화현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고유의 산악숭배신앙, 신선설(神仙說) 및 그것과 연관이 있는 각종 방술(方術)이 민간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청학집 靑鶴集』 등 우리 나라의 선가서(仙家書)에 의하면, 단군왕검의 할아버지 환인은 동방 선파(仙派)의 조종(祖宗)이었다. 그 도맥은 환웅-단군-문박씨(文朴氏)-영랑(永郎) 등으로 계승, 유지되었다고 하였다. 또, 그 책에서는 환인을 진인(眞人)이라고 하였다. 그가 명유(明由)에게서 수업을 받았고, 명유는 또 광성자(廣成子)에게서 수업을 받았다고 하여, 우리 나라의 도맥을 중국과 연결시키고 있다.
중국의 도서(道書)에 따르면 황제(黃帝)는 광성자에게서 수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세의 가필일 가능성이 높으나, 요컨대 한국 선도파가 당시의 문화관념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실증이 된다.
또 하나 특징은 삼국시대에 자주 언급되는, 천지와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습속이다. 이것을 도교에서는 재초(齋醮)라고 한다. 삼신산(三神山)은 진시황(秦始皇)을 현혹시키려 하였던 방사(方士)의 혹설이라고 이해되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 태백산(太白山)이 곧 삼신산이다. 즉, 환인·환웅·왕검은 삼신 또는 삼성(三聖)이라고 불리는데, 이 삼신으로 말미암아 건립된 신시(神市)가 바로 태백산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이 설은 태백산 외에 금강산·지리산·한라산이 바로 그것이라는 주장에까지 이르게 된다. 또, 삼신산과 관련된 설화로는 우리 나라의 남부에 중국의 방사가 왔다는 기록이다. 즉, 진시황이 해중(海中)의 삼신산을 찾아서 방사 서복(徐福)·한종(韓終) 등을 파견하였는데, 그들은 불로초(不老草)를 끝내 구하지 못하고 도망쳐 버린다. 서복은 일본으로 갔고, 한종은 우리 나라의 남부지방에 들어와 마한을 세우고 그 임금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몇몇 기사는 역사적 사실의 진위여부보다는 한국적 도가사상의 전개라는 관점에서 흥미롭다. 이능화(李能和)는 진시황 때의 방사 노생(盧生)과 창해역사(滄海力士)를 시켜 진시황을 쫓은 장량(張良) 등은 모두 우리 나라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장량 또한 방사였다면, 그가 우리 나라와 관련이 없는 한 그 역사(力士)를 벗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고 반문하였다.
장량은 한나라 고조가 육국(六國)을 세우려 할 때 젓가락을 빌려서 성패의 수를 점치고, 곧 그 일을 말린다. 그런데 점을 치는 행위는 곧 방사의 술수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장량이 처음 황석공(黃石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뒤에는 선인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가기를 원하였다 하였는데, 그것은 곧 신선방술을 다루는 일이며, 그 연원이 바로 우리 나라에서 비롯되었으리라는 주장이다.
또한, 진시황 때 방사였던 노생이 바다에 갔다가 진시황에게 괴이한 지도를 바쳤는데, 그 뒤에는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호이다(亡秦者胡也).”라고 쓰여 있었다. 진시황은 이를 두려워하여 북으로는 만리장성을 쌓아서 호족의 침입을 막고, 맏아들 부소(扶蘇)를 시켜 북방에서 몽군(蒙軍)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부소가 자살하자 할 수 없이 호해(胡亥)를 태자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제2대 황제였다. 그의 이름 때문에 앞의 예언이 적중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고선(古仙)의 굴택(窟宅)일 뿐 아니라 도참(圖讖)이나 점성(占星)도 매우 일찍부터 발달하였고, 예(濊)나라에서는 별자리를 보고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예지하였으며, 그 소문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는 것이다. 즉, 도참이나 점성은 선가의 부대적인 학문으로서 노생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그 방술을 배워 진나라의 멸망을 미리 알린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전설과 우화를 이능화는 한국관과 관련시켜 해석하고 이해하였다. 즉, 도교에서 신선으로 숭앙되는 황제가 우리 나라 땅에서 수도하였다는 고증을 시도하였다. 『장자』 재유편(在宥篇)에 황제가 공동산(空同山)에 가서 광성자에게 도를 물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를 그대로 인용한 「음부경삼황옥결서 陰符經三皇玉訣序」에도 역시 같은 내용이 부연되어 있다. 이능화는 이 공동산이 우리 나라 땅에 있다는 것을 논증한 바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노력들은 실증적으로 명백하게 제시될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여러 산들과 결부시켜 이 신선방술이 나왔다는 점은 우리 나라가 이 도가사상의 연원이었으리라는 점을 충분히 시사해 주는 일이다. 요컨대, 우리 나라의 도가사상은 철저히 신선사상·산악숭배신앙 등과 맥락을 같이하면서 발전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3. 단학(丹學)과 도
교리의 연구와 득도장생(得道長生)을 위한 수련 중심의 도교는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신봉되어 내려왔다. 흔히, 사서(史書)에서 도류(道流)라고 부르는 이들은 도교의식을 집행하는 등의 책무에만 충실하였다. 그들은 불교나 유교처럼 종교집단을 형성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민간의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에는 전혀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다.
즉, 우리 나라에서는 교단적인 도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에 민간인, 특히 수련을 통한 선인(仙人)의 경지에 대한 존경이 싹트게 되었다. 수련 중심의 도교가 우리 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신라 때로, 당시의 당나라 유학생들 가운데 장생의 비결을 공부한 이들이 있었고, 이들의 귀국이 바로 우리 나라에 전래된 효시가 되었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권43 「원효의상변증설 元曉義湘辨證說」에 인용된 『해동전도록 海東傳道錄』에 따르면 몇몇의 신라인들이 수련에 성공하여 단(丹)을 이룩하였다고 한다. 곧 최승우(崔承祐)·김가기(金可紀)와 뒷날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된 자혜(慈惠) 등이 당나라에 유학하였을 때 종이권(鍾離權)에게서 도서와 구결(口訣)을 전수받아 그것을 배워 수련에 성공하여 단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신라로 돌아와서 두루 도요(道要)를 전하였고, 수련을 위주로 하는 도교의 도맥을 세우게 되었다. 그 다음 세대에서 확실하게 도맥을 이은 인물은 최치원이었다. 그도 또한 당나라에 유학하여 수련법인 환반지학(還反之學)을 배웠다. 따라서, 그는 해동단학(海東丹學)의 비조(鼻祖)로 추앙을 받게 되었다.
또, 그의 모형(母兄)이었던 승려 현준(玄俊)이 당나라에 가서 도교 시해파(尸解派)의 비법을 배웠다고 한다. 현준은 『보사유인지술 步捨游引之術』이라는 도가수련법의 밀의(密義)를 담은 저술을 남겼으며, 역시 그 법을 최치원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그 뒤 신라와 고려의 단학은 뚜렷한 인물이 알려지지 않은 채 엄밀히 전승되었다.
조선 초기 김시습(金時習)에 이르러서 다시 뚜렷하게 그 도맥이 이어진다. 최치원에서 김시습에까지 이르는 약 600년 동안의 승계자 중 이름이 알려져 있는 사람은 이청(李淸)·명법(明法)·권청(權淸)·원설현(元偰賢) 등이다. 김시습 이후 비교적 많은 인물들이 도맥을 전하는데, 그들의 계보는 다음 [그림]과 같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 나라의 도파(道派)는 독자적인 도맥을 계승하였으면서도 그 연원은 종이권이라는 가공의 인물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이것은 중국의 경우, 역시 그로부터 전래하는 전진교(全眞敎)와 같은 연원임을 입증하는 일이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자료로 보아 이와 같은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우리 나라의 수련파들은 대략 초기의 전진교 교의와 같은 수련방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의 근원적 일치점은 바로 금단(金丹)을 직접 만들고 수련을 닦는다는 점이다. 예로부터 도가에서는 금단이라는 선약(仙藥)의 효용을 믿었다. 또, 자신의 수련을 통하여 공행(功行)을 쌓아가면서 자기 몸에 단을 이룩하여 본성적인 금단도를 고취하는 점이다.
일반적으로는 이것을 단학이라고 한다. 본성에 연결시킨 단학의 기본이론은 김시습의 용호(龍虎)에 관한 해석에 잘 설명되어 있다. 즉, 솥에 연(鉛)과 수은(水銀)을 넣고 불을 지펴 두 가지가 불비부주(不飛不走)하여 하나로 합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금단을 만드는 방법이다. 이것을 상징적인 방법으로 풀어서 인체에 적용하는 방법을 가리킨다.
솥은 사람의 몸이다. 그런데 머리는 건(乾), 배는 곤(坤)이 되고 배꼽 아래 1치3푼의 단전(丹田)이 그 중심이 된다. 따라서, 단전을 기준으로 하여 몸을 안정시킨다. 연과 수은은 용호에 비견되는데 그것은 인체의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이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법을 통해서 원기(元氣)를 훔쳐 단을 이룩한다.
지피는 불은 복이(服餌), 즉 양생(養生)을 얻기 위한 음식물이다. 그 음식물로 복호항룡(伏虎降龍)하여 드디어 하나가 되는 조절방법을 완성한다. 따라서, 단학의 궁극은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신선이 되는 것이며, 자연히 그에 따라 황당무계한 설화가 만들어지고 유포되는 것이다.
4. 도교와 의학
도교는 앞서 살핀 대로 신선들이 중심이 되면서 불로장생이라는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아 왔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벽곡(辟穀)·복이·조식(調息)·도인(導引)·방중(房中) 등의 갖가지 양생술(養生術)이 다루어져 왔다. 그뿐 아니라 금단의 제조를 비롯한 허다한 장수약과 각종 질병에 대비한 처방이 생겨났으며, 질병의 예방 내지는 치료를 위한 부록(符籙)·부수(符水)·주축(呪祝) 등의 방법이 쓰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행위는 주술적 종교의례의 범주에 들기도 하지만, 더 직접적으로는 도교의 의술에 해당하는 행위들이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의술을 표방한다. 즉, 병든 마음을 구제한다는 정신 작용과 함께 육신의 질고(疾苦)를 치료하는 의학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도교의 경우 그 정신적인 면보다 오히려 육신의 병고를 쫓는 의학적인 면이 더욱 발달하였다.
정렴(鄭Ꜿ)의 『용호비결 龍虎祕訣』에는 수단지도(修丹之道)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풍사(風邪)의 질병은 혈맥(血脈) 속에 숨어 있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돌아다니므로 그것이 몸을 죽이는 독기임을 알지 못한다. 오래되어 경로(經路)에 옮겨가고, 고황(膏肓) 속에 깊이 들어간 연후에 의사를 찾아 약을 쓴다 하여도 이미 늦는다. 정기(正氣)와 풍사는 빙탄(氷炭)처럼 서로 용납하지 않으므로 정기가 있으면 풍사가 달아난다. ······조금만 정진하면 반드시 수명을 연장시켜 죽는 날을 뒤로 물리치게 되리라.”
이것은 일종의 건강법이요 양생법이다. 따라서, 도가의 의학은 본질적으로 질병의 예방에 역점을 두고 발달해 간다. 이 도교의 의술을 폭넓게 수용한 의서는 『동의보감』이다. 이 책은 도교의 철리(哲理)로 의학의 본의(本義)를 해명하려 하였으며 일반 의술은 오히려 종속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동의보감』 가운데서도 내경편(內景篇)은 도교의 색채가 가장 짙고 또한 역점을 두고 있는 장(章)이다. 내경편에는 몸의 형태와 정(精)·기(氣)·신(神) 등을 도서(道書)에서 인용하였으며, 의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들을 보호, 치리(治理)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뿐 아니라 『동의보감』에는 도교의 부적(符籍)이나 방위법(方位法)도 소개되고 있다.
한가지 예를 들면, 잡병편(雜病篇) 10권에 안산실(安産室)의 시설이 설명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안산방위도(安産方位圖)와 최생부(催生符)가 함께 제시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나온 의학서적 가운데 도교적 색채가 짙은 저술이 많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이종준(李宗準)의 『신선태을자금단방 神仙太乙紫金丹方』, 박운(朴雲)의 『위생방 衛生方』, 최규서(崔奎瑞)의 『강기요결 降氣要訣』 등이 있다.
즉, 조선시대는 의료시설이 충분하지 못하였고, 또 일반적으로는 유교적인 의미의 효경적(孝敬的)인 분위기가 팽배하여 있던 시대였다. 따라서, 스승이나 어버이에 대한 양로(養老)의 열성이 매우 컸기 때문에 당시의 지식인들은 양생론이나 의술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물론, 전문적인 지식이나 논리성이 결여되어 있기는 하지만, 다분히 체험적이고 비망기적(備忘記的)인 양생설이나 의학서적들이 다수 출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앞서 언급한 출산의 안산도나 부적 등의 예도 반드시 미신일 수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산고를 완화시킨다든지 난산(難産)을 수습하는 첩경의 심리적 치료요법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의학은 이와 같이 많은 부분이 도교 색채를 가지고 이어져 왔고, 특히 치료와 예방에 역점을 둔 치료방법이 강구되었다. 그것은 양생이라는 도교의 궁극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의 의미였고, 세속의 교화 방편은 그에 수반되는 보조적인 긍정기능이었다.
도에 이르는 길
도교사상이 학문 체제를 가지게 되는 것은 남송(南宋) 때부터였다. 즉, 유신론적 형이상학의 체계와 함께 그 실천행인 양생이 강조된다. 그러나 교단으로서의 확고한 위치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교의 수행방법은 민간에서 주도되고 전승될 수밖에 없었다. 후대에는 도를 닦는 수양파(修養派)와 기도를 위주로 하는 부록파(符籙派) 등으로 분열되었다. 이들이 주장하는 장생귀도(長生歸道)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벽곡법:곡식과 불에 익힌 음식을 먹지 않는다.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만든 약을 먹으며, 절대 과식을 삼간다. ② 복이법:복약(服藥) 또는 식양생(食養生)이라고도 하는데 약 가운데서 최상의 약은 금단이다. ③ 조식:태식(胎息)이라고도 하는데 일종의 심호흡법이다. ④ 도인법:조신(調身)의 수련인데 요가와 같은 체위(體位)와 마사지 등의 요법이다.
⑤ 성교(性交)의 금기:성교 때 사정을 절제하는 등의 방법으로 기(氣)를 양생하는 법이다. ⑥ 평생 음덕(陰德)을 쌓는 일:몸과 행동과 마음 속으로 남을 해치려는 생각 등을 품지 않는 자비행을 실천한다. ⑦ 주술(呪術):재난을 피하고 장수하기 위한 여러 가지 주술을 사용한다. ⑧ 부적:복을 들어오게 하고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 마귀를 쫓는 부적을 사용한다. ⑨ 기도:푸닥거리나 기도를 올리는 의식 등이다.
도교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는 다분히 서민대중의 감정에 뿌리박혀서 갖가지 세시풍속 속에 잠재되어 왔다. 유교의 경우 더욱 현실적이고 윤리적이다. 원시 유가에서는 사단칠정(四端七情) 가운데 인·의·예·지를 인간의 본성으로 보고, 칠정을 그 감정의 표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주자학에서는 이것을 이기(理氣)로 양분하여 설명하였다.
즉, 이(理)를 본성, 기(氣)는 그 에너지의 작용으로 보아 그 둘의 양생을 구체적 도의 길로 보았다. 이황(李滉)은 그것을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독특한 이론을 확립하였다. 이황은 그 구체적 실현의 도를 ‘성(誠)’이라고 하였다. 요컨대, 유교의 도는 실천궁행(實踐躬行)이다. 자신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는 길로서 ‘성’과 ‘경(敬)’을 그 요체로 파악한 것이다.
불교의 경우 도에 이르는 방법이 다양하게 설명된다. 크게 나누어 소승적 수행(小乘的修行)과 대승적 수행(大乘的修行)으로 나눌 수 있다. 소승의 길은 삼업(三業:身·口·意의 세 가지로 짓는 업장)의 청정이다. 몸과 말과 뜻으로 5계를 범하지 않고, 새로운 업(業)을 막는 길이다. 그렇게 될 때 윤회는 단절되고 열반은 증득된다고 본다. 따라서, 소승의 길은 출가수행이 권장된다. 즉, 업의 소멸은 세대의 단절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대승의 수행은 ‘마음의 증득’에 있다. 그 마음을 대승에서는 여래장(如來藏)·불성(佛性)·본각(本覺) 등으로 부르는데, 요컨대 자신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는 수련을 권장한다. 그때의 이상적 인간상이 보살(菩薩)이다. 보살에게는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上求菩提],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下化衆生] 이상적 삶이 제시된다.
그러나 이때의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는 결코 별개의 실천덕목이 아니다. 즉, 자리가 이타이며, 이타가 곧 자리가 된다. 따라서, 대승의 수련은 적극적 봉사의 개념이 앞선다. 보살의 실천덕목으로 열거되는 사섭(四攝)·사무량심(四無量心)·육바라밀(六波羅蜜) 등은 모두 그와 같은 정신의 구현이다.
요컨대, 도교의 경우 도에 이르는 방법이 주술의 의례로 나타나며, 유교의 경우 윤리적인 면, 그리고 불교의 경우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삶 속의 도

1. 종교의례 속의 도
도교에 연원을 두는 행사와 습속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도교적인 행사나 종교의례는 다시 고유의 민속, 불교의 법회의식 등과 혼용되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실제적으로 우리 나라 불교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도교의 영향은 매우 크다. 비교적 도교의 색채가 강한 몇몇 종교의례는 다음과 같다.
1.1. 수경신(守庚申): 『고려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국속(國俗)에 경신일이 되면 도가설(道家說)에 따라 반드시 잠을 자지 않고 밤새워 술을 마셨다. 그것을 수경신이라고 한다.” 이 의식은 도교의 장생법과 깊은 연관이 있다.
도교의 전설에 따르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몸 안에 형체가 없는 삼시충(三尸蟲)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늘 어느 사람의 행위를 지켜보다가 경신일에 그 사람이 깊은 잠에 빠지면 체 내에서 빠져 나온다. 그래서 천계(天界)에 올라가 그 사람이 저지른 악행을 낱낱이 고한다. 천제(天帝)는 악행의 정도에 따라 그 비례대로 정해진 수명을 빼앗는다고 한다.
도교에 따르면 인간의 정해진 수명은 120세이다. 그러나 나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또 삼시충의 체내이탈을 막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 정해진 수명을 채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경신일에 자지 않는 의례는 상제에게 악행을 고해 바치지 못하도록 고안한 민간의례인 셈이다. 이 수경신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오다가 영조 때 폐지되었다.
1.2. 직성기양(直星祈禳):『동국세시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남녀의 나이가 나후직성(羅睺直星)에 들면 추령(芻靈)을 만든다. 방언으로는 처용(處容)이라고 한다. 그 머리 속에 동전을 넣어 둔다. 정월 열나흗날인 상원(上元) 전야의 초저녁에 그것을 길에다 버려 액을 막는다. 어린아이들이 다른 집을 찾아다니면서 처용을 부르는데, 얻으면 곧 머리를 터뜨려서 다투어 돈을 꺼내어 길에다 팽개친다. 이것을 타추희(打芻戱)라고 한다.”
직성이란 연령을 별과의 관련으로 풀어서 보는 법이다. 남자는 열살부터, 여자는 열한살부터 직성에 들게 되는데, 직성기양은 그 재액을 방지하는 습속이다. 별 가운데 도교에서 가장 존숭되는 별은 북두(北斗)이다. 왜냐하면, 이 별은 위로는 군왕에서부터 아래로는 백성 대중에 이르기까지 수록빈부(壽祿貧富)와 생사화복(生死禍福)을 비롯한 모든 인간사를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믿어지기 때문이다.
『옥추경 玉樞經』에서는 특히, “천존(天尊)이 말하기를 세상사람으로 삼재구횡(三災九橫)의 액을 면하려면 조용한 밤에 북신(北辰)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려야 하리라.”고 하여 북극성을 경배할 것이 강조된다. 이와 같은 까닭에 북쪽을 향해서 소변을 보지 않는 관습, 또 우리 나라의 각종 야담에 북극성을 경배하는 기인(奇人)의 설화 등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1.3. 벽사문(辟邪文):『경도잡지 京都雜志』 단오조(端午條)에는 다음과 같은 부적의 사례가 적혀 있다. “관상감(觀象監)에서는 주사(硃砂)로 벽사문을 찍어 내는데 민간에서는 그것을 대문에 붙인다.” 즉, 병의 예방을 위하여 일종의 부적으로서 민간에 전승되어 오는 것이다. 벽사문의 내용은 사귀(邪鬼)에 대한 경고와 엄포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즉, 의학적 상식이 발달되기 이전의 일종의 심리적 예방법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여겨진다.
2. 예술 속의 도
유교의 가치도덕과 도교의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유가는 다분히 주지주의적인 가치판단으로 인간규범을 제시한 가르침이었다. 따라서, 유교의 예술은 언제나 군자(君子)의 담백성·기개 등을 주제로 발전해 간다. 그러나 도교의 경우 다분히 존재론의 본체관념으로서 도와 덕의 이론을 제시하였다. 도가의 도덕은 인위조작하지 않으면서도 어김없이 전개되는 무위자연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인생론에서도 무욕(無欲)과 현실부정 등, 허무와 부정적 견해를 통하여 자연대도(自然大道)에 순응하는 삶을 가장 이상적으로 제시하였다. 따라서, 예술면에서 도교는 시비(是非)의 어느 쪽도 고집하지 않는 상대주의와 반지성의 경향을 띠게 된다. 그와 같은 경향은 물론 부정과 허무를 종국으로 삼는 예술적 태도는 아니다. 허무의 극복이라는 일종의 변증법적 경향이며, 추구하는 예술의 궁극은 바로 절대자유·절대평등이다.
따라서, 우리의 예술 속에는 이 도가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다만, 여기까지가 도교요, 여기에서부터는 아니라는 식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 대체로, 우리 회화에서 자아의식을 극소화시키는 몰개성의 특징이 강조된다든지, 산수화의 은은한 남화적(南畫的)인 특징 등은 모두 도가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또, 조각이나 건축의 기법에서 직선적 주체를 가지기보다는 곡선적 기법이 즐겨 원용되는 것도 같은 연유에서이다. 즉,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라는 도가의 원리를 그대로 형상화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복식문화·가정의례·일반습속 등에는 이와 같은 도교적 영향이 상존하고 있다.
3. 기타
한국인의 생활 속에 남아 있는 도가의 가장 뚜렷한 영향은 맹인점술가이다. 우리 나라의 맹인판수(점치는 소령)는 주로 매복독경(賣卜讀經)을 통하여 민간의 여러 가지 일을 해결하고 있다. 그때의 맹인판수는 도교의 잡술(雜術)을 시행하는 중매자이고, 토속신앙과의 습합현상도 두드러진다. 그런데 맹인이 점복(占卜)을 담당하는 사례는 우리 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현상의 하나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명통사변증설 明通寺辨證說」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황해도에 지함(地陷)이 있기 때문에 그곳 봉산(鳳山) 일대는 맹인이 많이 생겼다. 그러나 호구(糊口)할 길이 없어 할 수 없이 점술을 배우고, 경문(經文)이나 주문 등의 독송을 익혀 그로 말미암아 생업을 삼게 되었다고 한다.
맹인들 사이에서는 사제(師弟)의 구분이 극히 엄정하였는데, 명통사가 한때는 총본산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존비(尊卑)의 계층이 뚜렷하고, 독경축수 등의 행사가 정연해서 마치 관가를 방불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판수’라는 명칭도 ‘판사(判事)’라는 관직의 이름에서 유래하였고, 조정의 대관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폄칭을 쓰지 못하고, 다만 중인(中人)에게 대하듯 ‘하게’를 썼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는 고대 이후 도교의 교단이나 도사가 없는 대신, 맹인들이 주로 민간을 상대로 그 잡술을 베풀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도사가 담당해야 할 도가의 술수를 맹인들이 집행하는 일종의 대행적 소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오주연문장전산고


『조선도교사』(이능화,동국대학교,1959)


「도교와 한국사회」(차주환,『한국민족사상사대계』 1,아세아학술연구회,1971)


『한국고대도덕의 연구』(김득황,대지문화사,1978)


「도가와 도교」(赤塚忠,『東洋思想』 3,1967)


「조선의 도교의학」(三木榮,『朝鮮學報』 16,1960)


「한국불교의 신관」(정병조,『불교와 사회』,이기영교수 고희기념 논총,1990)
집필자

집필 (1997년)
정병조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道))]

마음을 내려놓고 비워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긴다 : 의료·건강 : 사회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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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내려놓고 비워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긴다

등록 :2017-08-09 06:10수정 :2017-08-09 11:39
이길우 기자 사진
이길우 기자

무위 태극권 고수 민웅기씨

도교 제1 경전 노자도덕경에 뿌리
나와 우주 하나 되는 권법·양생법




늘 허약해 30년째 위장병 달고 살았다

장폐색과 복막염 수술도 했다



사회변혁운동 몰두하다 건강 악화돼

절에 머물기도 하고 귀농했다




한 스님 만나 제자 돼 중국까지 가

토굴 수련하고 도덕경 달달 외워



3년만에 돌아와 수련원 세우고

대학교에서 노자 도덕경 강의



피아니스트인 제자 만나 반려자로

무등산 자락에서 수련도 반려



“자연이 너무 고마운 스승

태극춤 한바탕 추고 나면 환희 충만”





민웅기,황수정 부부가 무등산 계곡에서 무위태극권의 하세자세를 취하고 있다. 자세를 낮추니 마음도 낮아지고, 도가 잘 보인다고 한다. 하체가 강화되는 것은 덤이다.



조용히 서 있다. 발은 땅에 깊이 박힌 듯하고, 손은 자연스럽게 내려져 있다. 허리를 바로 세우고, 아랫배를 안으로 빨아들인다. 두 무릎 사이를 붙이고 턱을 당긴다.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 호흡에 몸을 맡긴다. 미소가 가득하다. 긴장감이 없다. 고요다. 무언가 시작될 듯하다. 기운의 탄생이다. 곧 비움으로 이어진다. 번뇌와 욕망을 내려놓는다. 나의 생각과 기운을 다 내려놓고, 하늘과 땅에 나를 맡긴다. 내가 한 점 바람이 되고, 한 가락 물소리와 새소리가 된다. 노자는 말했다. “비움이 지극함에 이르고, 고요함을 굳세게 지켜라.”(치허극 수정독: 致虛極 守靜篤, <노자> 16장)



민웅기씨 부부가 무등산 계곡에서 무위태극권을 수련하고 있다.



부부는 나란히 태극권을 시작했다. 무등산의 깊은 계곡. 숲이 우거져 햇빛도 비껴간다. 흐르는 물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도 때로는 우렁차게, 때로는 가냘프게 물소리와 화합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의 기운이 정수리 백회혈에 차갑게 내리꽂힌다. 땅에서는 따뜻한 기운이 발바닥 용천혈을 통해 스멀스멀 올라온다. 두 기운은 아랫배의 하단전에서 만난다. 서로 얼싸안으며 회오리바람이 일어난다. 회오리바람은 점점 커져 온몸을 휘감았다가, 점차 사그라든다. 온몸의 모공이 열린다. 그 모공으로 풀 냄새가 스며든다. 머리는 마치 텅 빈 호박 속같이 청량하다. 관절 마디마디가 윤활유가 흐르는 듯 부드럽고 오장육부는 조화롭게 제자리를 잡는다. 노자는 말했다.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가 되고, 고요함은 움직임의 주인이 된다.”(중위경근 정위조군: 重爲輕根 靜爲躁君, <노자> 26장)

중국 아미산에서 태극권 원형 배워



남편 민웅기(57)씨는 부인 황수정(49)씨의 태극권 사부였다. 둘은 태극권을 하며 부부가 됐다. 부부는 무등산 자락에 집을 짓고, 함께 태극권을 한다. 집 앞의 잔디밭에서, 계곡의 바위 위에서 부부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태극권에 몸을 맡긴다.

민씨는 허약했다. 30년간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장폐색과 복막염 수술도 받았다. 체중이 50㎏을 밑돌았다. 전남 해남이 고향인 그는 전남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여수와 순천의 와이엠시에이(YMCA) 사무총장을 맡아 학창 시절 못다 이룬 사회변혁 운동에 몰두했다. 나빠진 건강이 그를 힘들게 했다. 30대 중반 사회활동을 중단했다. 요가와 명상에 몰두했다. 절에서 100일간 머물기도 했다. 귀농을 해서 토종닭도 키우고 염소도 키웠다.

우연히 태극권을 하는 스님을 만났다. 제자가 됐다. 그 스승을 따라 태극권 본토인 중국에 갔다. 중국 서안(시안)의 종남산(중난산) 자연토굴과 정업사 토굴에서 수련했다. 종남산은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10년간 수련했다는 곳이다. 토굴 수련은 힘들었다. 새벽 3시에 기상해서 2시간 명상과 요가를 했다. 참장공을 1시간씩 하루 세 번 했다. 참장공은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발끝을 11자로 나란히 하고서 양 무릎을 약간 굽힌 자세로 두 팔을 앞으로 내민 채 부동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태극권 투로(품새·동작)를 배우고, 노장사상을 배웠다. 노자가 쓴 <도덕경> 5천자를 모두 외웠다. 수련 장소를 사천성(쓰촨성) 아미산(어메이산)으로 옮겼다. 아미산은 중국 도교의 집성지였다. 티베트고원의 끝자락인 아미산에서 양씨 태극권의 원형(108식)을 배웠다. 대중이 쉽게 배우도록 만든 간화 태극권의 원래 형태이다.





민웅기씨 부부가 무등산 계곡에서 참선을 하고 있다.





민웅기씨 부부가 무등산 계곡에서 참선을 하고 있다.



“노자는 2500년 전에 살았던 최고 학문의 경지에 오른 학자이자 수련을 성취한 도인입니다. 태극권은 도교의 제1 경전인 노자도덕경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노자의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함이 없음으로 하지 못함이 없다) 사상은 태극권의 기본 사상입니다.” 그는 “태극권은 내 안의 태극 일기(一氣)가 우주 태극의 일기와 하나가 되는 권법이자 양생법”이라며, 무위태극권은 ‘무위의 자리에서 무불위한 공능을 행한다’는 사상에 바탕을 둔 수련법”이라고 설명한다.

3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민씨는 무등산 기슭에 태극권 수련을 위한 송계선원을 세웠다. 그리고 노자의 사상과 태극권을 연결한 <태극권과 노자>를 쓰고, 송계선원에 무등산인문학당을 만들어 고전을 강의하고 있다. 곧 <춤추는 노자>, <다시 꿈꾸는 장자>도 낸다.





민웅기씨가 무등산 계곡에서 무위태극권을 수련하고 있다.



인체 에너지의 중심은 하체 부인 황씨는 피아니스트였다. 광주에서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던 황씨는 민씨에게 태극권을 배우며 잃었던 건강도 되찾고, 평생의 반려자도 찾았다. 화순문화원에서 태극권도 지도한다. “음악을 하니 소리에 예민해요. 자연 속에서 태극권을 하면 땅에 기어다니는 개미의 사각거림도 들려요. 스스로의 숨소리도 자세히 들려요. 자연과 하나 됨이 느껴져요. (남편과) 함께 태극권을 하면 환희심과 함께 편안함이 몰려와요.”

부부는 나란히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다. 자세를 낮춘다. 한쪽 다리를 굽히고, 다른 쪽 다리를 뻗는다. 한 손은 어깨와 수평하게 뻗어 손가락을 모아 쥔다. 다른 손은 하단전을 거쳐 허벅지선을 지나 부드럽게 내민다. 하세(下勢)이다. 꼬리뼈가 바위에 닿을 듯싶게 상체를 반듯하게 유지한 채 낮춘다. 하세는 골반을 풀어주고 허리를 유연하게 만들고 하체를 튼튼하게 한다. 인체 에너지의 중심은 하체에 있다. 하체를 단련하는 일은 건강을 지키는 일이다.



민웅기씨가 송계산원에서 무위태극권을 수련하고 있다.





민웅기씨가 송계선원에서 무위태극권을 수련하고 있다.



하세는 하심(下心)에서 나온다. 마음을 놓아야 한다. 마음을 놓으니 무심하게 된다. 무의 자리를 알게 된다. 무의 자리에서 보니 세상의 도가 강물처럼, 바다처럼 넘쳐나는 것을 경험한다. 황씨가 땀을 닦으며 말한다. “자연이 너무 고마운 스승입니다. 하늘과 땅, 눈과 비, 나무와 꽃들의 숨결과 호흡하며 그들의 차별 없는 기운 속에 태극의 춤을 한바탕 추고 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충만함이 가득 차오릅니다. 그 밝고 환한 기운의 흐름을 타고 살아갑니다. 태극권이 태극선이 된 거죠.”





황수정씨가 무등산 계곡에서 도인호흡법을 시범보이고 있다.





민웅기씨가 송계선원에서 무위태극권을 수련하고 있다.





화순/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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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society/health/806088.html#csidxc574d0acc3c1a28bf06aaa9841ab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