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2

14] 【지구교육학】세계시민에서 지구시민으로-지구위험시대에 따른 교육의 방향전환- 이우진*

 14] 【지구교육학】세계시민에서 지구시민으로-지구위험시대에 따른 교육의 방향전환- 이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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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문   세계시민교육은 현존하는 지구촌의 문제들을 더 이상 단일국가 시민성에 기초한 근대적 시민

교육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아래 주창된 교육이다. 이 세계시민교육은 ‘세계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정체성과 책임감’ 즉 ‘세계시민주의’을 양성을 목표로 하며, 그 이념은 세계주의(Cosmopolitanism)나 세 계시민성(Cosmopolitan citizenship)의 관념에 바탕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주의나 세계시민성의 이념에는 그것 을 주창했던 스토아학파(Stoics)나 칸트(Kant), 페인(Paine) 등과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입장에서 볼 수 있듯, 서구유럽중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유에 기반하고 있다는 그 한계점에 대해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

다. 세계시민성의 이상은 비서구 세계를 서구의 문명 세계로 인도하는 유럽인들의 역사적 사명의 확장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국의 확장을 정당화하는 스토아학파의 세계시민주의가 이후 칸트(Kant), 페인(Paine) 등과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입장에 의해 보완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유럽식 민족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분파주의적 이념(sectarian ideology)에 불과한 것이다. 다음으로, 세계시민주의는 인간중심주의에 함몰 하여 비인간적 존재들을 포섭하지 못하고 있다는 약점이 있다. 인간과 만물이 하나 의 공동체를 지향해야하 는 이 지구위험시대에 있어서 명백한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이제 교육은 서구유럽중심적 이고 인간중심적인 세계시민주의를 넘어 인간과 만물이 하나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지구시민주의를 향해야 할 것이다. 인간을 넘어 다른 존재들에 대한 도덕적·정치적 의무를 다하는 지구시민주의의 교육이 이루어 질 때, 인간 자신의 생존도 보장될 수 있음을 유념하면서 말이다.

차 례

Ⅰ. 머리말

Ⅱ. 고귀하지만 결함이 있는 세계시민교육

Ⅲ. 지구시민교육

Ⅳ. 맺음말

 

* 공주교육대학교 교수

Ⅰ. 머리말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코로나 19(Covid-19)의 세계적 대유형과 이상기후는 진정 ‘나비효과(Butt erfly Effect)’를 체감할 수 있게 해주는 사건들이었다. ‘나비효과’는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 (Edward Lorenz)가 1972년에 개최된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예측가능성: 브라질에서 벌어진 나비의 날개짓 한 번이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일으키는가?”라는 글에서 기원된 용어이다. 그는 이 발표에 서 다음의 두 가지 가설을 내세웠다. 

1. 만약 나비의 날개짓 한 번이 토네이도의 생생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또한 그 이전과 이후의 날개짓도 토네이도의 발생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수백만 마리의 나비들의 날개 짓은 물론이고, 우리 인간을 포함하여 수많은 생명체들이 일으키는 나비의 날개짓보다 강한 활동들 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2. 만약 나비의 날개짓 한 번이 토네이도 생성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똑같이 토네이도 예 방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1)

물론 로렌츠는 ‘나비효과’라는 용어를 통해 기상변화의 측면에서 카오스이론에 대해 이야기하 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용어는 지구생태계(ecological system)의 특성을 고스란히 설명해주 고 있다. 즉, ‘지구라는 거대 체계에서 모든 존재들은 비록 표면화되지는 않더라도 차후 엄청난 결과를 발생시킬 수도 있을만큼 긴밀한 상호연결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로렌츠는 첫 번 째 가설에서 ‘나비의 날개짓이라는 미세한 활동도 토네이도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인데, 그보다 강한 인간의 활동들은 지구에 토네이도에 비할 수 없는 더 엄청난 결과들을 가져올 수 있음’을 논의하고 있다. 

그의 이 첫 번째 가설은 곧장 “더 이상 홀로세(Holocene, 現世)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 우리 는 더 이상 홀로세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에 살고 있다”2)는 파 울 크루첸(Paul J. Crutzen)의 단언을 떠올리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인류세는 ‘인간을 의미하는 A nthropos’와 ‘새로움의 의미하는 Cene’이라는 두 그리스의 결합어로, 인류의 활동이 지구 환경 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시점부터 현재까지의 새로운 지질시대’를 의미한다. 이전까지 각 지질시 대를 구분하게 만든 근원적 동력은 자연이었으나, 인류세라는 지질시대는 인류가 지질학적 흔적의 주 창조자인 것이다. 하지만 이 인류세를 맞이하여 인간은 지구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주 동력이 되었으나, 역설적으로 자기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1) Edward N.Lorenz, The Essenc of Chaos(EBook edition), the Taylor & Francis e-Library, 2005, p.179. (*강조는 인용자가 표시, 이하 동일)

2) Christian Schwägerl,  The anthropocene:the human era and how it shapes our planet, Synergetic Press, 2014, p.9.

 

현재의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은 그러한 인류세의 전형적인 사태이다. 총, 균, 쇠의 저자 제 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가 지적했듯이, 과거에는 각자의 확동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던 바 이러스가 인간의 활동으로 생태계의 각 영역이 붕괴됨에 따라 기존의 경계를 넘어 인간 자신을 위 협하게 된 것이었다. 바로 코로나 19는 인수공통감염병(人獸共通感染病, zoonosis)으로 천연두, 인플 루엔자, 결핵, 말라리아, 페스트, 홍역, 콜레라, 에이즈와 마찬가지로 동물에게서 인간으로 확대된 바이러스 질병이다. ) 여기서 다이아몬드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코로나19보다 기후변화가 더욱 심각한 문제라면서, 환경 파괴가 심각해질수록 코로나와 같은 질병의 확산에 더 커다란 영향을 줄 것이고 대기질, 가뭄과 홍수, 농업 등과 같은 여러 부분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 다시 말해, 코로나19 사태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이례적인 사건인 블랙스완(Black Swan)이 아니라, 인류세 있어서 자주 접하게 될 뉴노멀(new normal)이요, 앞으로 맞이하게 될 더 커다란 기후위기의 리허설(rehearsal)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인류세의 위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그 답의 실마리는 ‘나비효과’

의 두 번째 가설에 나와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뻔한 말이겠지만, ‘나비의 날개짓이 그 원인이지만 똑같이 예방이 도움이 될 수 있듯이’, 인류세의 사태는 인간 자신에게서 그 예방을 찾아야만 한 다. 다이아몬드의 조언처럼 “코로나 19로 전 세계인 한 배에 탔으며, 같이 살든 같이 죽든 한 몸 이며, 지구적 차원의 협력”5)을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인류 문명이 만들어낸 위험 앞에서 그가 요 청하는 ‘지구적 차원의 협력’은,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지적한 것처럼 당위적 상황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인류의 실존적 상황’이다. 벡은 ‘근대성의 사회 체계가 위험을 생산했음에도 그 위험성을 계산하지 못하는 위험천만한 산물로 인해 의도치 않게 세계시민주의에 의존하는 상황이 도래한다’고 주장하였다. ) 그의 말대로 인류는 전 지구적 위험이 닥쳐서야 비로 소 반사적으로 성찰하여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에 의존하여 지역적 경계를 넘어서는 세계시민성을 요청하게 되었으며, 교육 또한 ‘세계시민교육(global citizenship Education)’으로의 전환(pivot)을 요청하게 되었다.

유네스코는 세계시민교육을 “학습자들이 보다 정의롭고 평화적이며 포용적이고 안전하며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든 데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식, 기능, 가치관, 태도를 길러주고자 하는 교육 패러다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세계시민교육은 학습자에게 세계시 민성(global citizenship)을 길러주는 교육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다. 분명 이와 같은 세계시민교육 의 가치와 이상은 분명히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세계시민교육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지구위험의 시대에 명확한 한계를 지니 고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이 글의 문제의식은 바로 그 지점이다. 세계시민교육은 사실상 세계시 민주의와 세계시민성에 바탕하고 있다. 하지만 그 교육은 세계시민주의와 세계시민성이 내포하고 있는 본질적 속성으로 인해 이 지구위험시대’에는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2장에서는 그러한 세계시민주의와 세계시민성의 속성과 한계에 대해 논의하도록 하겠다. 다음 3장에서는 지 구생태계의 파괴로 인해 인류 자신의 종말을 향해가는 지구위험시대를 맞이하여, 세계시민교육의 

대안으로서 ‘지구시민교육(Earth/Planetary citizenship Education)’을 제안하고자 한다. 3장에서 살 펴보겠지만, 지구시민교육이란 ‘지구인(earthling)으로서의 책임과 역량을 길러주고자 하는 생태학 적 시민교육 패러다임’을 말한다. 마지막 4장 결론에서는 앞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고 남은 문 제를 짚어보도록 하겠다. 

Ⅱ. 고귀하지만 결함이 있는 세계시민교육 

세계시민교육이 교육의 주요담론으로서 부각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2012년 9 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주도하는 ‘세계교육우선구상(Global Education First Initiative)’ 선

언과 함께 이루어졌다. ‘교육이 우선’이라는 세계교육우선구상은 ‘모든 어린이의 취학, 교육의 질 제고’와 더불어 ‘세계시민성 함양’을 3대 목표로 하고 있었다. 더불어 세계교육우선구상은 ‘세계시민성 함양’을 ‘사회에 환원하는 공통체 의식과 적극적인 소속감을 기르는 것’이자 ‘남녀 불평등, 따돌림, 폭력, 외국인 혐오, 착취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차별이 학교에서 사라지도 록 하는 것’으로서 규정하였다. ) 이와 같은 세계시민성의 함양은  2015년 5월에 개최된 유네스코 ‘세계교육포럼(World Education Forum)’의 핵심주제로 선정되고, 같은 해 9월 유엔 세계정상회의 에서 채택한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가운데 하나로 선정됨에 따 라, 세계시민교육이 주요한 교육담론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바로 세계시민교육은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공통된 문제들을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발전 이 이루어지는 미래사회를 모색하기 위해, 학습자에게 ‘세계시민성’을 함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 는 교육이다. 유네스코는 이 세계시민교육이 ‘맥락과 지역 및 공동체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방식 으로 적용될 수 있겠지만, 세계시민성의 함양을 위해서 학습자들에게 다음의 5가지 공통 역량들을 길러내야 할 것’을 요청하였다. 

○ 다면적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개인의 문화,, 종교, 인종 및 기타의 차이를 초월하는 ‘집단적 정 체성’의 잠재력에 기초하는 태도

○ 세계적 문제와 정의, 평등, 존엄, 존중과 같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깊은 지식

○ 서로 다른 차원과 관점 및 각도에서 문제를 인지하는 다중접근방식을 채택하여 사고하는 것을 비롯하여, 비판적, 체계적,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인지적 기능

○ 서로 다른 배경, 출신, 문화 및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상호하기 위한 공감과 갈등 해결과 같은 사회적 의사소통 기능과 태도를 포함하는 비인지적 기능

○ 세계적 과제에 대한 세계적 해결 방안을 찾고 공동의 선을 추구하고자 협력하고 책임감 있게 행 동하는 행동 역량9)

여기에서 보다시피, 세계시민교육은 학습자에게 국민국가의 시민의식에서 벗어나 ‘인류공동 체’에 속해있다는 소속감과 책임감을 길러주고, 이를 바탕으로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 한 기능과 역량을 발달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시민’의 의미를 배타적이고 편협한 ‘국민 국가수준의 정체성’을 벗어나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세계적 수준으로 확대한 것이다. 하지만 세 계시민교육이 키워야 할 역량으로서 ‘지구상에 있는 비인간존재들과의 공존’을 명시적으로 말하 지 않는다. 바로 세계시민교육은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 근본적으로 바탕하고 있다. 예컨대, 세계시민에서 요청하는 ‘정의, 평등, 존엄, 존중과 같은 보편적 가치’도 인간의 관계증진을 위한 가치인 것이지, 인간을 제외한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증진을 위한 가치는 아니다. 그 점에서 세계시 민교육은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지구위험시대에 분명한 한계를 내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이 지구 위험시대는 세계시민교육이 토대하고 있는 ‘인간중심주의가 파생시킨 생태적 위험시대’이기 때 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나 존재들을 인간의 번영을 위한 도구적 가치에 불 과하다’는 그 불미스러운 ‘서구유럽의 사유방식’에서 지금의 지구위험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 다.  

세계시민교육이 서구 유럽의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일 수 없는 것은 ‘그 교육이 세계시민주의’

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은 “철저히 인간중심주의적이며, 전형적으로 존엄성의 핵심을 도덕적 추론능력과 선택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두고” 있다고 평가 한다.10) 물론 그녀는 “세계시민주의 전통이 수많은 현대의 윤리적 주장이 다가가고 있는 결론들 에 보다 깊이 있고 원칙에 입각한 명분을 제공”한다는 우수성을 지님을 인정한다.11) 하지만 그녀 는 세계시민주의 전통이라는 자신의 저서 부제목을 ‘고귀하지만 결함있는 이상’이라고 할 만 큼, 세계시민주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녀는 세계시민주의의 가장 심각한 잘못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9) UNESCO(2014), Ibid., 9 

10) 마사 C. 누스바움(2020), 강동혁 옮김, 세계시민주의 전통: 고귀하지만 결함 있는 이상, 뿌리와 이파리, 

297쪽.

11) 마사 C. 누스바움(2020), 281쪽.

아마  세계시민주의의 가장 심각한 잘못은 다른 종과 자연 환경에 대해 우리가 지고 있는 도덕적· 정치적 의무를 숙고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이 지구를 다른 감정이 있는 존재 들, 살아가며 번영할 자격이 있는 그런 존재들과 공유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12)

곧 세계시민주의는 ‘이성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만을 존엄하고 가치롭게 여길 뿐, 그러한 

능력을 지니지 못한 ‘비인간 동물과 자연계에 대한 경멸적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녀가 주장하고 있듯이, 세계시민주의의 전통은 ‘짐승’에 대한 경멸적 대조를 통해 인간의 가치 를 옹호하여 왔던 것이다. ) 곧 ‘인간과 동물(자연계)의 대립적 인식’과 ‘인간우월주의’가 이 세계시민주의의 토대인 것이다. 그 점에서 ‘인류 전체를 넘어 자연계와의 공생과 공존 의식’이 요청하는 이 지구위험시대에, 과연 세계시민교육이 적절한 교육으로 자리할 수 있는지 의문을 지 니게 한다. 아니 세계시민교육은 ‘인간과 자연계와의 공생과 공존 의식’은 커녕 ‘인간 자신들 만의 공동체 의식’을 기르기에도 적절하지 못한 교육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시민주의는 그 기 원에서부터 제국주의적이고 분파주의적인 이념(sectarian ideology)으로서 자리해왔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세계시민주의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견유학파(Cynicism)와 스토아학파(stoicism)에서 

찾는다. 주지하다시피 견유학파의 창시자인 디오게네스(Diogenes)자신을 ‘도시도 없고(a-polis), 집 도 없는(a-oikos) 우주의 시민(kosmopolites)’으로 선언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리스의 스토아학파 는 정부(politeia)는 특정 도시 국가에 국한되기보다는 ‘모든 이가 거주하는 세계(oikoumene)’ 또 는 ‘전체 우주(kosmos)’와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 세계시민주의자들 은 모든 이들이 인종, 종교, 출신에 관계없이 단일한 형제 구성원으로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러 한 고대 그리스의 세계시민주의적 전통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키케로(Cicero) 등과 같은 로마의 스토아학파의 인물들에게 이어졌다. ) 

로마의 스토아학파는 ‘사람은 두 개의 공화국, 즉 폴리스(polis)와 코스모폴리스(cosmopolis)의 시 민으로 태어나는데, 이 둘 가운데 충성심의 갈등이 발생할 때 도시국가로서의 폴리스보다는 세계 도시국가인 코스모폴리스에 대한 시민의 의무가 언제나 앞선다’고 보았다. ) 하지만 로마의 스토 아학파는 폴리스의 시민과 코스모폴리스의 시민은 동일한 일을 한다면서, 하지만 시민들에게 자신 이 속한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세계시민성을 합일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보편적 이성을 지닌 인 간이라면 인종, 종교, 출신에 관계없이 누구나 평등하다’고 주장하였다. 바로 시민권을 이성을 가 진 온 인류로 확장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스토아학파가 강조한 세계시민주의의 입장은 그 본래의 의미와 상관없이 ‘로마 제일주의의 이념’ 앞에서 변질되었다.16) 곧 세계시민주의는 ‘강 력한   세계도시국가로서의 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과 ‘그 제국의 세계적 확장’에 비호하는 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변질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로마에 대한 의무를 명시적 으로 인정한 키케로나 세네카(Seneca)의 이론과 저작은 로마인들에게 로마제국과 코스모폴리스 자 체를 동일시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로마시대의 스토아학파의 논의는 로마제국의 패권주 의를 강화시킨 이념적 기반으로 작동하였던 것이었다.17)

이후 세계시민주의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와 애덤 스미스(Adam Smith)와 같은 계몽주 의 사상가들에게 다시 주목받게 된다. 그들은 모두 국가를 넘어서는 ‘세계적인 보편적 공동체’ 를 구상하였다. ) 먼저, 스미스는 ‘세계사회(World Society)’라는 보편적 공동체의 이상을 표출하 였다. 그는 특히 ‘시장(market)’이라는 장치를 통해 국가와 국경에 무관하게 개인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을 강화시킴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이익을 동시에 발전시키고자 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헤겔 (Friedrich Hegel)은 스미스의 ‘시장을 시민사회로 재해석하게 된다. 곧 스미스의 시장이론은 헤겔 을 거쳐 ‘개인의 보편성을 근거로 형성된 세계사회(World Society)’라는 보편적 시민 공동체를 기획에서 출현한 것이었다. ) 

다음으로, 칸트는 ‘국제사회(International Society)’라는 ‘세계적인 보편적 공동체’를 구상하 였다. 이 ‘국제사회’는 개인들의 연합체인 스미스의 세계사회와 달리 단일한 주권국가를 구성으 로 한다. 특히 칸트는 ‘국제사회’는 인간들 사이에 자연적으로 조성되는 전쟁상태 바로 그 자체 를 통해 인간을 평화로운 법적 상태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한다고 주장하였다. ) 지속적 인 전쟁으로 인한 피로와 무기력으로 인해 개별 국가들로 하여 어쩔 수 없이 세계시민적 법체제를 만들게 한다는 것이었다. 곧 ‘국가들 사이의 합법적인 대외 관계’를 마련하는 ‘국제법의 제 정’을 통해 ‘국제사회’를 구축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영구적인 평화상태를 수립’할 수 있다 고 전망한 것이었다. ) 실제로 20세기에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 s)’과 ‘국제연합(United Nations)’의 수립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칸트와 스미스의 ‘세계적인 보편적 공동체’는 현대 사회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 다. 하지만 그 한계는 분명하다. ‘국제사회’를 대표하는 유엔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합법 적인 대외 관계’를 보장하는 조직이기보다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흔들리는 경우’가 허다하 다. 또 현대판 ‘세계사회’인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경우 국가들간의 상호의존성을 강화시킴 으로써 각 국가와 전 세계의 이익을 동시에 발전시키기 보다는,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 저발전지역 의 희생과 배제만을 강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꿈꾸었던 ‘세계적인 보편적 공동체’의 현실판은 이토록 강대국 중심 주의의 조직으로 자리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이론과 현실의 괴리때문이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 만 ‘세계적인 보편적 공동체’라는 칸트와 스미스의 이상 자체가 ‘서구 패권주의에 경도된 세계 시민주의’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더 적절한 답이라 할 수 있다. 분명 세계시민주의에는 식민지 국가들을 문명화한다는 사명감이 반영되어있으며, 제국주의적 팽창 의도를 은폐하는 이데 올로기로서 알게 모르게 작동되어왔다. ) 구체적으로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기반한 ‘세계적인 보편적 공동체(국제사회)’의 이상은, ‘식민지 국가들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유럽중심적 사명 감이 흠뻑 담겨져 있다. 곧 그의 세계시민주의적 계몽사상은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이자 분파 주의적 이데올로기’인 것이었다. ) 

이러한 면모는 칸트의 「영구평화론」(1795)과 이에 앞서 작성한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 (1784)라는 글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그는 이 두 글에서 ‘야만과 문명의 이분법’과 함께 ‘유 럽인과 비유럽인의 인종주의적 구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간의 최고의 완전성은 백인종에 게서 발견되며, 황인종인 인도인들은 보다 적은 능력을 소유하고, 흑인들은 훨씬 못미쳐,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가장 지체되어있다”는 식의 인종주의적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인종주의적 편 견은 문명화된 유럽 백인이 비유럽지역의 야만인(유색인종)을 계몽(문명화)해야 한다는 이념을 내 포하고 있었다. 바로 계몽이라는 미명아래 식민지배를 추구하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 칸트는 또한 “유럽인들에 의해 인식되지 않은 민족의 역사는 미지의 영역”이라면서 유럽중심적인 사유에 함몰되어 있었으며, 유럽중심주의적인 진보사관을 설 파하고자 중국의 후진성을 강조하였다. 바로 서구유럽 중심으로 설정한 보편사적인 위계질서의 그 첨단에 유럽인을 놓고 말단에 비유럽인을 위치시켰던 것이다.  )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세계시민주의는 서구(유럽)중심적인 기준을 보편성의 토대로 설정함으로

써 지역적 특수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또한 앞에서 세계시민주의는 ‘인간과 동물(자연계)의 대립적 인식’과 ‘인간우월주의’라는 치명적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 한 점에서 이러한 세계시민주의에 기반한 세계시민교육은 ‘인류 전체를 넘어 자연계와의 공생과 공존 의식’을 길러 이 지구위험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적절한 교육으로 자리하기 어렵다. 그렇 다면 어떠한 교육을 말해야 하는가? 이 글은 세계시민교육이 아닌 지구시민교육(Earth/Planetary cit izenship Education)을 요청하고자 한다.

Ⅲ. 지구시민교육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지구위기의 시대에 있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민교육이 요청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교육이 되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롤스톤(Holmes Rolst on)은 이전의 교육이 ‘국가적/국제적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이라면, 지금의 교육은 ‘생태적 역 량을 지닌 지구인(earthling)을 길러내는 교육’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 였다. 

교육받은 사람의 특징으로 오늘날 점점 더 ‘교육받은 시민’ 이상이 되기를 요청한다. 좋은 ‘시 민’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국제적인’ 시민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 면 두 용어 모두 충분한 ‘자연(nature)’과 충분한 ‘지구성(earthiness)’을 지니지 않고 있기 때 문이다. ‘시민’은 단지 절반의 진실일 뿐이고, 나머지 절반은 우리가 대지(landscapes)의 ‘주 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인(earthling)이다. 지구는 우리의 거주지이다. 이 점에서 생태적 역 량이 없다면 시민적 역량도 없는 것이다.27)

지구적 환경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현 지구위기의 시대에는 생태적 역량이 시민적 역량의 첫 번

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곧 지금의 교육은 학습자를 세계시민이 아닌 지구시민으로 길러내야 한다. 인간과의 관계증진을 넘어서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증진을 추구하고 노력하는 시민을 양 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돕슨(Andrew Dobson)은 전통적 형태의 시민성은 그 한계가 분명하다고 지적한 다. 그는 시민성의 개념을 확장하여 전통적인 ‘자유주의 시민성(liberal citizenship)’과 ‘시민공화 주의 시민성(civic republican citizenship)’과는 다른 새로운 ‘후기 세계시민주의 시민성(post-cosm opolitan citizenship)’을 요청한다. 이 세 시민성의 특징은 다음의 표와 같다.

 

27) Holmes Rolston(1996), “Earth Ethics: A Challenge to Liberal Education”, J. Baird Callicott and Fernando 

José R. da Rocha, eds., Earth Summit Ethics: Toward a Reconstructive Postmodern Philosophy of 

Environmental Education,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p.186

<세 가지 시민성 형식>28)

1. 자유주의 시민성 2. 시민 공화주의  시민성 3. 후기 세계시민주의  시민성

권리/권리부여 (계약적) 의무/책임 (계약적) 의무/책임 (비계약적)

공적 영역 공적 영역 공적 및 사적 영역

덕성 중립 남성적 덕성 여성적 덕성

영토성 (차별적) 영토성 (차별적) 비영토성 (비-차별적)

돕슨은 ‘세계시민주의의 시민성(cosmopolitan citizenship)’과 ‘후기세계주의의 시민성’은 여 러 차이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보편적 인간성이라는 ‘얇은(thin)’ 공동체와 ‘역사

적 의무(historical obligation)’라는 ‘두꺼운(thick)’ 공동체간의 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시민주의가 국가, 국제, 지구, 세계 등을 은유적 정치공간으로 삼는다면 후기 세계시민주의 시 민성은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이라는 실재적 개념을 정치공간으로 삼는 차이라고 규정한 다.29) 돕슨은 후기 세계시민주의의 시민성의 한 예로서 생태시민성(Ecological Citizenship)을 제시한 다. 

첫째 생태시민성은 비영토성을 갖는다. 이는 지구온난화 오존층 파괴와 같은 환경문제들이 국가

단위를 벗어난 전세계적인 문제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결국 이러한 비영토성은 나의 행동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을 하게한다. 여기서의 비영토성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에도 적용된다. 현세대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것 이다. 돕슨은 이러한 비영토성을 지닌 생태시민성의 특징을 생태 발자국개념을 끌어와 설명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자연자원과 서비스에 대한 인류의 수요를 추산한 것으로, 자연자원과 서비스 의 공급을 추산한 생태용량과 함께, 우리 인류가 지속가능한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지표이 다. 곧 개개인마다 시·공간적으로 서로 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생태 발자국은 시민 개 개인의 일상적 삶을 통해서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이방인이나 환경에 대해 가해지는 영향이라 고 할 수 있고 시민 개개인들이 일상적인 삶을 영위해 나갈 때 인간과 비-인간의 자연환경 사이의 대사적(metabolistic) 관계에 의해 형성된다. 즉, 생태 발자국은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발시킨다. 생태시민의 공간은 자연환경과 개개인들이나 집단 활동의 대사적이거나 물질 적 관계를 통하여 생산되는 것으로 국민국가나 EU와 같은 초국가적 기구의 경계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생태시민의 활동 공간의 범위는 이미 결정된 크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둘째, 생태시민성은 지구시민(Earth citizen)으로서 권리보다 책임과 의무를 강조한다. 여기서의 

책임과 의무는 비계약적이고 비호혜적이다. 즉 계약에 따라 타인과 공평하게 주고 받는 것이 아니

 

28) Andrew Dobson(2003), Citizenship and the Environment, Oxford University Press, p.39.

29) Andrew Dobson(2003), p.99

며 보상과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이 책임과 의무의 범위 역시 비영토적이며 따라 서 그 대상은 공동체의 구성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공간에 있는 모든 존재 현세대 뿐 아 니라 미래 세대도 포함한다.

셋째, 생태시민성은 덕성에 기반한다. 즉 생태시민이 다른 공간과 시간에 있는 생명에 대한 책임 과 의무를 갖는 것은 내부적 동기인 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첫 번째 덕성은 정의

다. 이는 생태적 자리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의미를 담는다. 두 번째는 동정 배려 연민이다. 이는 정의를 효과적으로 적용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넷째, 생태시민성은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적 영역을 중요시한다. 사적 영역에서의 행동이 공

적 영역에 연결되면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가정에서 재활용을 하고 소비를 줄이며 정원에 퇴비를 주는 등의 모든 사적 ‘녹색행동’은 동시에 공적인 행동이 된다. 따라서 생태시민 성은 일상의 삶이 생태적이 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Ⅳ. 맺음말

우리는 생태계를 넘어서서, 한 단계 더, 지구적 수준(the global level)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환경 윤리는 우리가 지구윤리를 가질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미래 세대들, 동물, 식물, 종, 생태계는 여 전히 친숙하지 않은 윤리적 영역이며, 지구를 위한 윤리(ethic for Earth) 그 자체는 가장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모두가 건강한 환경을 원하기에, 아마도 윤리는 우리의 첫 번째 초점인 인간에 머물 러 있을 수 있다. 건강한 지구 환경은 건강한 인간에게 필수적이다. 이것은 그들의 권리이다. 곧장 우리는 인간의 복지와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환경 보건에 관심이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의 삶의 비전은 우리 영토의 변명이 아니라 거대한 자원으로서 지구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의 삶의 비전은 우리 영토의 방어가 아 니라 거대한 재산 자원으로서 지구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공동체에서 가치를 지닌 거주지로서의 지구이다.

 


 


13] 【지구수양학】개인의 완성과 지구적 연대의 통합적 실천 이주연*

 13] 【지구수양학】개인의 완성과 지구적 연대의 통합적 실천 이주연*


요약문   

인류세에 대한 논의를 기점으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이 일어나고 있다. 바이러스와 기후 온난화 문제, 소외와 혐오 등 지구적 차원의 위험현상들은 그간의 인간중심주의를 지양하며, 전 지구적 존 재들의 상생과 조화를 추구하는 지구인문학적 사유를 필요로 한다. 그 중 지구수양학은 개인의 마음을 닦는 행위와 지구적 연대를 통합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사상 및 방법론을 다루는 학문이다. 한국 신종교 사상들은 한국인이 근본적으로 추구해온 종교적 심성, 즉 만물 간의 조화로운 공존을 추구한다. 그런데 이들은 담론 제시에 그치지 않고 개인의 마음바탕을 수양하는 일에 있어서도 개인의 인격성장만이 아닌 전 지구적 존재 와 덕을 나누는 방식을 추구하기 때문에 지구인문학적인 수양학, 즉 ‘지구수양학’으로서의 특성을 보인 다. 비대면 생활이 일상화됨으로 인해 개인주의가 더해졌고, 탈종교 현상과 아울러 종교 본연의 역할에 대 한 회의와 반성이 일어난다. 이러한 급변의 시대에 종교는, 하비 콕스가 강조했듯, 교리적 지식이나 도덕주 의를 중심에 두지 않고 유기체적으로 모든 생명의 연대성을 강조해야 한다. 본 연구에서는 이 점에 주목하 여 한국의 신종교 사상들에 담긴 지구수양학으로서의 사상, 그리고 이들 사상을 반영한 지구적 수양법, 즉 개인의 완성과 아울러 지구공동체의 연대를 함께 추구해가는 방식을 탐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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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Ⅰ. 머리말 

Ⅱ 지구위험시대의 수양학

Ⅲ. 지구수양학의 윤리와 방법론

Ⅳ. 맺음말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Ⅰ. 머리말

종교학자 류병덕은 “한국인의 종교혼은 자연을 지배 대상으로 보지 않고 생명의 근원, 무한 생 성력, 고맙기만 한 자연으로 받아들였다”고 말한다.1) 이 연구는 한국의 동학과 천도교, 그리고 원불교가 제시한 지구중심적 사유와 실천법에 주목하여, ‘은(恩)적 네트워크’ 기반의 ‘공경과 불 공의 윤리’, 나아가 수양법을 종교적 이념에 국한시키지 않고 지구위험시대를 극복할 실천적·보 편적 담론으로 사회화하기 위한 시론적 연구이다.

동양의 수양학은 마음을 닦는 일과 존재의 근원적인 진리에 관심을 두었으며, 이 관심을 바탕으로 인격의 완성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인의 마음 닦는 일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삶에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는 자연 본연의 생명성이나 당시 사회문제들을 함께 궁구함으로써 개인 의 단독적 진화가 아닌 주변과의 공진화(共進化)를 실천하려 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지금 시대의 수양학, 즉 지구위험을 극복하려는 수양학으로서 ‘지구수양학’은 그 명맥을 이어 인간중심주의 에 대한 성찰적 사유를 바탕으로 개인의 심성 도야와 지구적 공경을 함께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동학·천도교, 원불교가 제시했던 지구수양학적 특성에 주목한다. 이들 종교의 공공성 은 외세의 침입과 불안정한 시국, 신분차별로 고통 받던 근대 한국에 요청되던 ‘민중적 공공성’ 이었다. 근대에 필요했던 이 공공성은 지금의 지구위험시대에 이르러 ‘지구적 공공성’으로 새롭 게 적용될 필요가 있다. 

지구적 공공성은 전 지구적 존재들로 구성되는 ‘은(恩)적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발현된다. 은 (恩)적 네트워크는 인간과 비인간, 사사물물 등 모든 존재들이 긴밀한 은(恩)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전제한다. 은(恩)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이들 종교는 ‘지구에 대한 공경과 불공의 윤리’를 제시 한다. 그리고 수양방법들은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해체하는 방식을 따른다. 이들 수양법이 지구 수양학의 방법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개인의 심성을 도야하는 과정이 지구 구성원들에 대한 공경 및 불공과 통합적으로 실천되기 때문이다. 이 통합적 실천으로 물질과 정신, 인간과 비인간, 땅과 하늘, 문명과 자연, 남성과 여성의 이원화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지구수양학, 즉 은(恩)적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공경과 불 공의 윤리, 수양 방법론에 대해 논의한다. 지구수양학은 곧 개인의 심성 도야와 지구적 공경·불공 을 통합적으로 실천하는데 필요한 윤리와 방법론, 나아가 지구공동체를 위한 수양학의 사회화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인류의 실질적 변화를 필요로 하는 지구위험시대에 유의미한 연구가 될 것이 다.

1) 류병덕, 근·현대 한국 종교사상 연구, 서울: 마당기획, 2000, 18쪽.

Ⅱ. 지구위험시대의 수양학

1. 시대에의 응답 최근 들어 지구를 향한 시선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2008년 에콰도르는 신헌법에 ‘자연권’ 을 명시했고, 2010년에 볼리비아는 ‘어머니 지구법’을 채택했다. 이밖에도 2017년 왕거누이강(Wanganui)에 법인격을 부여한 뉴질랜드의 움직임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한국에서도 2020년에 지구 를 위한 법학이 출간되는 등, 인간중심적이던 법적주체를 지구중심적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일 어나고 있다. 그밖에 의학 및 생태 분야에서도 ‘원 헬스(One Health)’, 즉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 의 긴밀한 상호의존성에 주목하는 접근방식이 등장했다. 원 헬스는 ‘인간-동물-환경을 아우르는 건강(health)은 하나(one)’라는 믿음 아래 인간 중심의 건강 관점에서 탈피하여 동물뿐만 아니라 생태계 전체의 균형 잡힌 건강과 안녕(well-being) 확보를 목적한다. ) 이러한 변화들은 신종 감염병 과 기후문제 등 전 지구에 닥친 위험들에 대한 대응책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지구의 권리, 인간과 지구의 관계성에 주안점을 두는 이 시도들은 지구인문학적 사유에서 비롯 된다고 볼 수 있다. 지구인문학은 그간의 인간중심주의를 반성하고 ‘지구’를 사유의 중심에 두 고자 하는 인문학을 말한다. 지구인문학적 관점을 지닌 대표적 지구신학자로 토마스 베리(Thomas Berry)는 ‘지구공동체’로의 전환이 필요함을 역설하며, 땅·생물·인간이 지구의 구성원으로서 가족 같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지구인문학은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던 관점을 해체함으로써 그간의 위계적 사고로 인한 타자화와 폭력을 지양한 다.4)

지구인문학으로서 지구수양학에 대한 선행 연구는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이 연구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근대 한국 신종교 사상의 지구인문학적 요소에 대한 논의는 2020년부터 있어왔다. 지구인문학 연구들은 이들 사상가들이 제시하는 인간관과 우주론을 지구 구성원의 상호 의존관계나 지구중심주의에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어디까지나 지구인문학 이라는 상위 범주를 구축하는 논의이기 때문에, 수양학적 관점으로 이들 종교에 접근하거나 지구 수양학적 윤리와 방법론을 세부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다. 

한편 근대 한국 신종교의 생태담론에 관련해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들은 이들 종교에 담긴 생태

적 요소가 이원론적 사유를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추구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생태담론을 담은 사상적 특이성을 다루고 있어도 실제 수양과의 연계를 시도하는 경우는 미미하 다. 또한 근대 한국 신종교 사상을 수양학적 측면에서 논의해온 결과물은 다수가 있다. 그러나 지 구위험에 대한 인식 아래 직접적인 실천을 요하는 수양학적 논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보편적 방법론으로 재탄생시키려는 시도는 과제로 남겨져 있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지구 위험시대에 적용하기 위한 수양학으로서 지구수양학의 윤리와 방법론을 새롭게 모색하고자 한다.  

2. 지구수양학의 방향성 수양(修養)은 몸과 마음을 갈고닦아 품성이나 지식, 도덕 따위를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다. ) 동양의 학문은 사물의 이치에 대한 탐구 못지않게 실천의 문제를 중시  )해왔고, 그래서 이성 중심의 서구에서와 달리 수양은 주된 과제로 자리매김해 왔다. 수양은 인간에게 실재하는 ‘경 험’으로부터 비롯된다. 인간은 사유 이전에 실재하는 경험이란 것을 일회적인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하니, 이것이 바로 수양이다.  ) 

수양에 대한 논의를 주로 많이 다루어 온 유학에서는 마음의 구조를 이해하고 마음을 닦는 것을 수양의 기본으로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유학이 개인의 인격 수양만을 주장하진 않았다. 군자의 과업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통합을 강조했다는 장점을 가 진다. 개인적 수양과 사회적 실천을 함께 추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이러한 ‘수신제가치국 평천하’의 사상은 사실 유학적 전유물이 아니며, 중국 제자백가의 학설 중에도 ‘수신’과 ‘치 국’, ‘평천하’ 중 하나라도 부정한 경우는 없었다. 

노자의 수양론도 도덕허무주의가 아닌 현실사회를 최종 지향점으로 하며, 무욕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여 사회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 그리고 노자철학을 이은 장자 또한 허정(虛靜)의 수양을 통한 무위(無爲)의 통치론을 제시, 개인의 자유를 위한 수양론을 사회적·정치적으로 구성 하였다.10)

불교의 ‘상구보리 하화중생’은 위로는 깨달음을 얻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라는 뜻이며, 존 재 간의 연결 관계에 주목하는 연기론은 사회 갈등은 물론 생태적 공공성을 살릴 수 있는 개념이

다. 이런 이념적 기반을 바탕으로 불교에서도 수양은 사회적, 대중적 성격을 병행해 왔다. 근대기 우리나라 불교잡지들을 검토한 결과 1919년 3.1운동 전후로 불교계의 혁신과 개혁운동을 지향하는 대중운동이 활성화 되면서 불교교화를 위한 대중의 수양론이 등장했었다는 연구 보고 )도 있다. 어쨌든 동양의 수양학이 근본적으로 수양의 주 대상으로 삼은 것은 마음이며, 이에 따라 수양인

은 수심(修心)을 하고자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 존재론이나 인식론에 중점을 둔 서구적 사유법 과 달리 동양의 수양학은 마음을 닦는 일과 존재의 근원적인 도달점에 관심을 두었으며, 이 관심 을 바탕으로 인격의 완성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개인의 마음 닦는 일에 멈추지 않고, 인간의 삶 에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는 자연 본연의 생명성이나 당시 사회문제들을 함께 궁구함으로써 개인의 단독적 진화가 아닌 주변과의 공진화(共進化)를 실천하려 했다.

개인 내적인 완성과 더불어 사회 참여를 지향했던 학문으로서 수양학은 정치·경제·인간관계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가치관과 방향성을 제시해오고 있다. 그리고 이들 수양학을 혁신적으로 계 승한 근대한국 신종교들은 동양과 서양의 문명이 부딪히는 가운데 민중의 주체성을 보존할 수 있 는 수양학을 제시해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구의 위험이라는 새로운 테제를 마주하게 되었다. 동양의 수양학의 명맥을 이어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버전의 수양학으로서 그 역할 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근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와 과학문명의 발달 속에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지구적 위험, 그리고 차별과 소외, 혐오 등이 발생해왔다. 이러한 지구위험의 주된 요인인 ‘인류세’에 대한 논의와 성찰이 활발해짐에 따라 요즘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지구중심주의를 추구하는 지구인문학으로서의 수양학, 즉 지구수양학은 개 인의 내적 완성과 더불어 지구적 연대를 지향하게 된다. 이때 지구적 연대는 인간과 비인간, 자연 과 사물을 포괄하는 전 지구적 존재들 간의 연대를 의미한다. 그간 동양의 수양학이 개인의 완성 과 더불어 사회적 실천을 병행해 왔다면, 지구의 위험을 기점으로 출발하는 이 지구수양학은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성찰적 사유를 바탕으로 개인적 심성 도야를 통한 내적 완성 및 지구적 연대를 함께 추구한다. 

지구수양학은 전 지구적 존재들이 지구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긴밀한 상호의존관계에 있으

며, 따라서 수양을 통한 개인의 완성도 단독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지구공동체의 조화로운 운용과 더불어 진행된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한다. 본 연구에서 다루려는 두 종교 외에도 근대한국 의 신종교 사상은 이와 같은 지구수양학적 윤리와 방법론을 담지하고 있다. 동학·천도교에서 ‘천지부모는 일체’라 하여 지구가 곧 모든 존재들의 부모이자 포태임을 강조했던 점, 정역이 ‘十五一言’과 ‘十一一言’을 통해 하늘과 땅과 사람의 조화가 필요함을 주장했던 점, 대종교의 ‘삼일(三一)사상’, 그 중에서도 ‘사물사상’에서 사물이 내재한 신성을 드러냈던 점, 원불교의 삼동윤리 등은 지구수양학적 해석이 가능한 부분들이다. 

따라서 한국의 신종교를 단순히 민족, 민중 운동의 틀 안에 매몰시킬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

적 종교심성을 바탕으로 한 보편적 종교운동으로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 종교적 이념이라는 틀 내에서가 아닌, 근대에 등장한 한국의 자생적 담론으로서 ‘지구위험에 대응하는 한국 發 윤리와 방법론’으로 조명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새로운 종교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는 신영성운동14)에서 도  인간과 자연의 친화를 강조하며 비인간 존재들과의 연대를 언급하고 있다. ) 한국의 신영성운 동 단체들의 경우 기수련을 통한 명상과 함께 타자, 나아가 전 지구를 배려하고 연대하고자 한다 는 점에서 지구인문학적 사유에 근접해 있다. 그럼에도 일부 신영성운동을 가리켜 ‘인류의 보편 적인 가치나 윤리 덕목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이 개인의 육체적·정신적인 건강과 안녕, 그리고 심리적 평화만을 강조’ )한다는 비판은 외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비판을 받는 것은 신영성운동의 핵심이자 실천적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수련 체계가 개인의 내적 자아완성에 방점을 찍음으로 인해 지구공동체를 향한 이타적 사랑의 강조는 단지 ‘도덕적 강령’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더하여 세션스(Sessions)는 신영성운동이 근본 생태론과 정반대라 고 지적한다. 신영성운동가들은 인간을 지구 진화 과정의 정점에 있는 존재로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 이는 비인간 존재와의 연대를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한편에서는 인간의 위치를 위계 중심적으로 설정함으로 인해, 결국 ‘인간중심적인 지구중심주의’라는 오류 로 환원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지구화시대의 위험에 관련하여 지구적 차원의 바이러스나 환경문제, 소외와 차별, 혐오문제,  인

간중심주의나 자본주의로 인한 양극화 현상 등이 존재한다. ‘지구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아닌 ‘지구의 중심에 위치한 존재’로 인간을 위계화 하는 방법으로는 지금의 패턴을 벗어나 전 지구 적 존재들의 연대를 이룰 수 있을지는 재고해 볼 문제다. 지금의 지구위험시대에 필요한 수양학은 개인의 심성도야, 그리고 이러한 이원론적 사유의 해체를 함께 실천하는 방법론을 필요로 한다.

Ⅲ. 지구수양학의 윤리와 방법론

1. ‘은(恩)적 네트워크’ 기반 공경의 윤리

 

 1) 은(恩)적 네트워크 동학의 교조 수운은 1860년 음력 4월 5일에 도를 이루었고, 그로부터 1년 후에 「포덕문(布德文)」

을 냈다. 「포덕문」에는 그의 득도 과정과 함께 ‘잘못되어 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도탄에서 헤매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 계책이 장차 어디에서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우려가 담겨 있다. 그가 구도에 몰입했던 것은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였고, 그래서 득도 후 제시한 21자 주문,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과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는 누구나 이 주문으로 천인합일을 이룰 수 있게끔 하는 대중적 수련법이다. 수양의 출 발점은 백성과 함께 하는 데 있었다.

원불교 수양학의 특징도 시대상황과 맞물려 나타난다. 대산은 마음공부를 가리켜 ‘마음공부로 도덕을 살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근본을 삼아야’ )한다고 하여, 개인의 내적 수양력이 외부로 확 산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렇듯 원불교의 수양학이 대사회적 성격을 띠는 이유는, 「물질이 개벽되 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개교표어에서도 알 수 있듯 외세의 침략과 분단의 아픔, 그리고 도탄에 빠진 창생, 개화라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정신개벽’이라는 변혁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 이다. 

동학·천도교, 그리고 원불교의 공공성은 ‘개벽(開闢)’이라는 기치 아래 ‘민중 스스로의 공공 성’ )으로 발동되었으며, 이에 따라 각 수양법도 민중적 공공성을 기반으로 한다. 동학과 천도교 에서 매일매일, 매 끼니 매 순간을 모두 의례의 연속이라고 보아 이를 역행하는 제천의례를 중시 하지 않는다거나 ), 원불교 ‘무시선법(無時禪法)’이 ‘괭이를 든 농부도 선을 할 수 있고, 마치를 든 공장(工匠)도 선을 할 수 있다’22)고 하여 누구나 실천 가능한 방법을 제시한 점을 보면 확인되 는 부분이다.

이러한 공공성은 당시 시대상에 요청되던 사회적 공공성으로 설명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동학·천도교, 원불교 모두 ‘지구’라는 공동체의 공공성을 지향한다. ‘시천주’는 인간뿐 아니 라 모든 존재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음을 뜻하고, ‘일원상의 진리’에서도 ‘일원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라 하여 사사물물에 전부 일원의 진리가 갊아 있음을 의미한다. 전 지구적 존재 모두가 곧 진리의 실상이라 본다는 점에서 공공성의 영역을 사회를 확장한 지구로 설정할 수 있고, 따라 서 민중적 공공성을 지구적 차원의 공공성으로 확대하여 실천할 필요가 있다.

베리가 말한 지구공동체는 지구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가이아 가설’을 전제한다. 지구는, 그리고 지구의 존재들은 인간을 위한 도구적 존재가 아니며 각자의 권리를 가진다. 반면 인간은 그간 지구를 약탈해 왔다는 게 그의 견해다. 마찬가지로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도 인간이 자 연과 사회를 이원화함으로 인해 부주의하게 하이브리드를 양산해왔고, 이로부터 지구의 손상이 발 생했다고 본다. 베리와 라투르의 이 견해들을 통해 지구적 공공성의 발현 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 바로 유기체로서의 지구와 개별 구성원으로서의 전 지구적 존재들이 일방적 ‘약탈’이 아닌 ‘상 호작용’을 해나갈 때, 지구적 차원의 공공성이 실현된다고 볼 수 있다.

전 지구적 존재들의 상호의존성에 대해서는 현대 서구 이론가들도 다양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 다. 특히 라투르는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을 통해 인간과 사물이 어 떻게 동맹을 맺을 수 있는지 밝힌다. 그에게 ANT는 ‘이질적 존재자들의 연합의 전개를 묘사하는 방법’ ), 즉 인간과 비인간을 막론한 ‘행위소’들이 하이브리드 공간인 연결망에서 서로 ‘관 계’를 형성한다는 관계론이다. ANT 이론은 모든 존재들이 이 연결망에서 서로에 의해 규정된다 고 보기 때문에 자연과 사회 중 특정한 무언가가 우선시 될 수 없게 된다. 라투르와 같은 신유물 론자의 견해는 인간이나 비인간 내지는 사물이 지니는 상호의존성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지구공동체 구성원들의 이 연관성은 일찍이 동학의 2대 교주 해월의 사상에서 다뤄진 바 

있다. 그는 ‘천지부모는 일체’, ‘천지는 만물의 아버지요 어머니’ )라고 말하여, 지구는 곧 모 든 존재들의 부모와 같은 ‘포태’임을 강조한다. 나아가 ‘천지가 아니면 나를 화생함이 없고 부 모가 아니면 나를 양육함이 없을 것이니, 천지부모가 복육하는 은혜가 어찌 조금인들 사이가 있겠 는가.’ )라고 하여, 지구와 개별 존재간의 관계를 ‘은혜’로 표현한다. 

소태산의 ‘사은(四恩)’에서도 이 관계성을 천지은·부모은·동포은·법률은의 네 가지 은혜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하늘의 공기, 땅의 바탕, 일월의 밝음, 풍운우로의 혜택, 금수초목 등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도 나에게는 은혜로운 존재이며, 이들과 주체의 관계를 가리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한다. ) 또한 정산이 언급했던 ‘삼동윤리’의 ‘동기연계(同氣連契)’ 강령에서는 인류뿐 아니라 금수 곤충까지 다 같은 한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이니 대동화합해야 함을 주장한다. 전 지구적 존재들 간의 긴밀한 상호의존성, 나아가 ‘은혜로운 관계’라고 설명되 고 있는 이 관계성, 집약하여 표현하건대 ‘은(恩)적 네트워크’는 지구수양학이 추구하는 윤리의 기반이라 할 수 있다.

동학·천도교, 그리고 원불교가 지구의 ‘은(恩)적 네트워크’에 중심을 두었다면, 라투르와 같은 이론가들은 –비유적으로 표현하건대- ‘연합 네트워크’에 중심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은(恩)적 네트워크 중심의 관점은 이 지구를 모든 존재를 키워주는 부모 같은 존재임을, 그리고 전 지구적 존재들 각자가 서로를 먹이고 받쳐주는 형제 같은 존재임을 전제하는 데 반해, 연합 네트워크 중 심의 관점은 각 존재들이 부모나 형제가 아닌 ‘행위자’로 작용한다고 본다. 지구 구성원 간의 관계 구조를 사유하는 데 있어 어떤 부분에 무게를 두느냐의 차이라 여겨진다.

2) 공경과 불공의 윤리 수운이 여종을 수양딸과 며느리로 삼았던 일화, 그리고 해월이 베 짜는 며느리를 한울님이라 이 름 했던, 또는 소태산이 어느 노부부에게 불효하는 며느리를 부처님 공경하듯 위해주도록 권유했 던 일화가 있다. 이 일화들은 공경 또는 불공의 키워드로 요약된다. 해월의 ‘삼경(三敬)’ 사상은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세 가지를 말한다. 삼경사상은 그의 ‘우주적 연 대성에 대한 공감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타자의 개체적 존재를 절대적으로 긍정하고 본질적 화(和)의 관계를 정립한다. ) 해월신사법설에는 공경의 윤리에 대한 언급이 상당수 보인다. 해월 은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라 하거나, ‘사람을 대할 때 언제나 어린아 이 같이 하라’거나, ‘물건을 공경하면 덕이 만방에 미친다.’고 말한다. 특히 「내수도문」에서는 밥을 하거나 방아를 찧을 때, 식사하거나 다른 집을 왕래하는 등 일상생활을 영위할 때 공경의 윤 리를 실천하는 법을 설명하고 있다. 

원불교의 경우 곳곳에 위치한 모든 존재를 부처로 정의하고 일마다 불공할 것을 권장하는 소태 산의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事事佛供)’ 사상을 기반으로 ‘불공하는 법’을 제시하고 있 다. 정전 「불공하는 법」에서는 ‘우주 만유는 곧 법신불의 응화신(應化身)이니, 당하는 곳마다 부 처님(處處佛像)이요, 일일이 불공 법(事事佛供)’이라고 하여, 전 지구적 존재들이 전부 법신불이라 는 궁극적 실재의 응화신이므로 등상불이 아닌 각 실재에 사실적인 불공을 할 것을 강조한다.

동학·천도교의 공경과 원불교의 불공은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까지 그 대상으로 삼고 있 다는 점에서 ‘지구에 대한 공경과 불공의 윤리’를 제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토마 스 베리 외에 래리 라스무쎈(Larry L. Rasmussen)도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을, 마찬가지로 신 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는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윤리로 책임과 연민 )을 제 시한 바 있다. 이로부터 한국의 신종교뿐 아니라 신학에 있어서도 지구중심주의적 공경의 윤리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지구의 모든 존재들을 공경하거나 불공하는 건 타자를 ‘한울님’, ‘부처님’으로 여길 때 그 

극치를 이룬다. 천도교 사상가인 이돈화는 ‘한울은 범신관적(汎神觀的)이며 만유신관(萬有神觀)으 로 해석’ )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김용준은 이돈화의 이 견해를 가리켜 ‘범신론적 일신관’으로 정의했다. 수운이 신비체험 때 신과 대화한 것은 일신론의 근거이고, 이돈화는 ‘물물천사사천(物物天事事天)’등의 구절은 범신론의 뜻을 가진 것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는 ‘반대일치’의 원 리를 써서 일신론과 범신론을 조화하고 통합하려 했다고 본다. ) 궁극적 실재를 초월적인 존재로 만, 또는 내재적인 존재로만 보는 것이 아니며, 초월성과 내재성을 모두 담지한 존재로 보고 있다. 원불교 신앙의 대상인 ‘법신불 사은’에 대해 노권용은 ‘범재불론적 내지 범재은론적 성격’

을 띤다는 의견이다. 그는 ‘법신불’이 절대유일의 총상 또는 총덕이며 ‘사은’은 그 구체적 별 상 또는 별덕이라고 해석한다.  ) 전체를 총괄하는 유일무이의 궁극적 실재인 ‘법신불’, 그리고 이 법신불의 개별적인 나타남으로서 ‘사은’은 하나로 통합되는 동시에 구분될 수도 있는 ‘일이 이(一而二)’의 방식으로 구성된다는 견해다. 이찬수도 유사한 견해를 보인다. 그는 정산의 ‘동기 연계’에서 ‘동기성(同氣性)’이 범재신론의 기초가 된다고 설명한다. ‘동기’ 자체가 만유를 살 리고 포섭하는 선행적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은사상도 범재신론적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 다.33)

이와 같이 동학·천도교, 원불교는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따라서 공경 또는 불공의 대상을 내 앞에 현현하는 존재로 설정할 수 있다. 개별 존재 각각이 궁극적 실재인 동시에 전 지구적 존재들을 품어 안는 법신불에, 한울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이들 사상이 범신 (불)론적 관점에 국한되었다면, 법신불이나 한울과 동일한 위격의 궁극적 실재가 수 없이 많이 등 장했을 것이다. 그리 된다면 개별 신들을 숭배하는 샤머니즘적 신앙 체계를 갖추게 될지언정, 지구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을 한 기운으로 연결된 형제, 즉 상호의존적 관계의 존재들로 인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동학·천도교, 원불교가 사사물물을 공경과 불공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개별자들을 각각 한울님, 부처님으로 봄과 동시에 서로간의 긴밀한 연결 관계도 함께 고려함을 의미한다. 이는 주체가 ‘자신이 곧 부처’라는 진리 아래 단독적으로 자신의 인격 완성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 완 성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공동체 구성원들과의 관계, ‘은(恩)적 네트워크’에서라 야 완성을 이룰 수 있음을 시사한다. 동학·천도교, 원불교의 지구수양학이 개인의 완성만을 추구 하지 않고 전 지구적 연대를 함께 지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자기완성과 지구적 연대의 통합적 실천 동학과 천도교의 수양이 지향하는 방향성은 수심정기(守心正氣), 즉 마음을 잘 보존하여 기운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 이는 마음과 기운을 함께 다루고자 함으로, 수심(守心), 즉 마음을 보존하는 것과 정기(正氣), 즉 기운을 바르게 하는 것이 밀접하다는 걸 의미한다. 수심정기를 지향한다는 것 은 ‘마음과 기운’을 지닌 자라면 누구나 수양을 할 수 있다는 뜻을 가진다. 그래서 지식의 유무 나 계급의 높고 낮음을 가릴 것 없이 수심정기를 추구할 수 있다. 성리학의 수양법이 ‘독서행위 에 기초한 학습행위’로 변질되고, 이에 고급관료가 되기 위한 교과과정으로 고착화된 것에 대한 수운의 대응이 이렇게 수심정기 수양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 

원불교의 수양도 누구나 실천 가능한 방법을 지향한다. 원불교 개교표어인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물질과 정신을 병행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의지를 그대로 반 영한 수양법들을 제시한다. 원불교 표어, 즉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 ‘무시선 (無時禪) 무처선(無處禪)’, ‘동정일여(動靜一如)’, ‘영육쌍전(靈肉雙全)’, ‘불법시생활(佛法是生活) 생활시불법(生活是佛法)’은 심성의 도야를 통해 실제 삶을 바르게 운용하고, 삶을 바르게 운용 하는 일이 곧 심성 도야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남성, 고용인, 부유층, 지식인들만이 아 닌 여성, 피고용인, 지식이 적은 사람도 수양을 할 수 있도록 하며, 이를 위해 ‘일상수행의 요 법’과 ‘일기법’을 비롯한 생활 속 수양법들이 존재한다.

동학·천도교, 원불교의 수양은 이와 같이 민중 누구나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구성되는데, 이는 개벽종교로서의 경향 자체가 모든 존재들의 평등성을 지향하기 때문이기도 하거 니와, 정신적 영역뿐 아니라 물질적·신체적 부분을 함께 가꾸어 간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식의 물 질과 정신 이원론을 지양하고 있다고도 해석 가능하다. 

원불교는 창립 초기에 방언공사 외에도 작농과 양잠, 축산, 원예 등 산업과 더불어 황무지를 개 간하거나 과원을 경영했는데, 이러한 과정들을 단지 종교 산업만이 아닌 영육쌍전, 이사병행(理事並行), 동정일여(動靜一如)의 수양으로 보았다. 소태산은 ‘도학과 과학이 병진하여 참 문명 세계가 열리게 하며, 동(動)과 정(靜)이 골라 맞아서 공부와 사업이 병진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물 질과 정신의 이원론적 구분을 지양함으로써 도학과 과학, 이치와 일, 동과 정을 구분하는 것을 반 대한 것이자, ‘인격의 완성을 위하여 수련을 쌓는 생활과정이 세간을 떠난 데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고 본 것이다. 이와 같이 물질과 정신에 대한 이원론적 접근을 지양함으로써 일상 속에서 심성을 도야하게 하는 대중적 수양을 추구한 것은 곧 ‘개인적 심성 도야와 공경·불공의 통합’ 이라고 정리된다. 

동학과 천도교의 주문 수련이 어떻게 해서 개인적 수양에 한정되지 않고 지구 구성원들을 향한 

공경의 실천과 통합이 가능한지는 다음의 견해로부터 좀 더 구체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주문 수련을 열심히 한 결과 내 안에 한울님을 확실히 모시게 되면,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은 존재 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한울님처럼 모실 수 있는 것(事人如天)이다. 다른 사람을 한울 님처럼 모시면 그 사람 또한 감응하여 나를 한울님처럼 모시게 된다. 그래서 나를 중심으로 사람들 이 모이고 기화(氣化)가 상통하므로, 하는 일도 원만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관계를 사람들에 게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들에게도 실천하면 세상 만물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게 된다.38)

원불교의 경우 지구공동체의 은혜에 주목하는 사은(四恩) 사상을 ‘일상수행의 요법’을 통해 직 접 실천하도록 한다. ‘일상수행의 요법’ 중 다섯 번째 조목인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

자.’는 사은에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도 이것이 곧 내 마음을 요란하게 하는 ‘경계(境界)’임을 알아차려 즉시 이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환시키자는 실천법이다. 정산은 이러한 ‘일상수행의 요 법’을 가리켜 ‘자성 반조의 공부’로서 ‘천만 경계에 항시 자성의 계정혜를 찾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 즉 개인이 일상 속에서 원망할 일이 생길 때 본래 성품을 회복함으로써 원망심을 버리고 감사심을 얻는 수양법으로, 후일 대산이 설명했듯 ‘전 생령이 구원을 받는 방법, 세계 평 화의 근본, 온 인류가 서로 잘 사는 묘방’ ), 개인의 마음을 닦는 수양이 곧 ‘전 생령의 구원’ 과 통합되도록 하는 방법론이다.

이와 같이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지양하는 방식 아래 개인의 심성을 도야하는 수양, 그리고 지구공동체 구성원을 향한 공경과 불공의 실천이 통합되는데, 이로부터 인간과 비인간, 땅과 하늘, 문명과 자연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는 관점 또한 수양을 통해 해체할 수 있게 된다.  해월의 ‘이 심치심(以心治心)’은 자신이 지닌 한울의 마음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면 ‘화가 바뀌어 복이 되고 재앙이 변하여 경사롭고 길하게’ ) 됨을 강조한다. 지극한 수양으로 한울을 모시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면 실제로 복이 넘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복’이라는 가시적인 결과물을 얻 게 된다. 

이는 ‘날짐승 삼천도 각각 그 종류가 있고 털벌레 삼천도 각각 그 목숨이 있으니, 물건을 공경

하면 덕이 만방에 미친다’고 한 해월의 설명과 연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수양으로 내게 한울의 마음이 자리를 잡으면 사사물물이 전부 시천주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날짐승이건 털벌레건 모 두 공경하게 되고, 이는 곧 지구적 공공성의 실천으로 이어져 그 ‘복’이 나에게로 돌아오게 된 다. 

이렇게 물질과 정신의 이원화를 지양할 뿐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의 이원론적 구분을 해체하게 

되는데, 지구수양학이 가지는 이러한 성격은 하나의 특이성이자 시사점을 지닌다. 바로 지구 구성 원들과 궁극적 실재 간의 수직적이던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전환시킨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환은 ‘지금껏 하등하다고 여겨진 생명체나 기계를 향한 성찰’ )에서 시작된 탈인간중심주의에 하나의 시사점을 제공한다. 제인 베넷(Jane Bennett)이 강조한 ‘정치생태학’ )은 비인간 존재들의 권리 에 주목하여 그들을 민주주의의 주체로 등장시키고, 그래서 인간과 비인간의 수평적 관계를 확립 하려 한다.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소중한 타자성’ ) 또한 인간과 비인간의 위계화를 거부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반려종이 될 수 있는 수평적 관계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동학·천도교, 원불교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이 수평적 관계의 대상을 한울 또는 법 신불까지로 확장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수운에게 한울은 절대자이자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러면 서도 ‘내 마음이 곧 네 마음(吾心卽汝心)’임을 깨달아 각자가 궁극적 실재를 모시고 있음을 밝혔 다. 초월성과 내재성을 함께 인정했던 한편으로 초월성보다는 내재성을, 믿음보다는 깨달음이 강조 되는 방향으로 한울에 대한 함의가 더욱 풍부해졌고 깊어졌다. ) 해월의 ‘베 짜는 한울’ 이야기 는 이러한 수평적 관계를 반영하며, 궁극적 실재의 영역을 수직적으로 한정하지 않고 수평적으로 확장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소태산은 진리의 실상인 ‘일원상의 진리’를 ‘제불 제성의 심인’이자 ‘일체 중생의 본 성’으로 믿는 것이 곧 신앙임을 말하여, ‘일원상의 진리’는 모든 존재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되 는 것임을 천명하였다. 어느 노부부에게 ‘그대들의 집에 있는 며느리가 곧 산 부처’라고 했던 소태산의 설득은 ‘하늘만 높이던 사상을 땅까지 숭배하게’ ) 한다는 대산의 설명과 더불어, 궁 극적 실재와 지구 구성원들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보는 동시에 수평적으로 구축함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지구수양학은 전 지구적 존재들의 수평적인 관계를 궁극적 실재와의 관계로까지 확장

한다. 그래서 탈인간중심주의가 그 동안 하등하다고 여겼던 비인간 존재들과의 관계를 수평적인 것으로 전환했다면, 지구수양학은 이들 존재를 평등한 동시에 ‘공경과 불공을 받아 마땅한 존 재’로 정의한다는 특징을 가진다. 즉 비인간의 주체성과 상호작용에 중점을 두는 탈인간중심주의 에 지구수양학이 공경과 불공이라는 실천성을 보완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과 비인간의 수평적 관 계를 인간·비인간·궁극적 실재의 수평적 관계로 확장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동학·천도교와 원불교가 지닌 지구수양학적 특성은 개인적인 수양이 지구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공경과 불공과 통합된다는 점이다. 개인의 심성을 도야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가 는 과정이 다른 존재를 향한 공경과 불공을 실천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는 동학·천도교와 원 불교가 인식하듯 지구 존재들 간의 관계가 ‘은(恩)적 네트워크’, 즉 긴밀한 상호의존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공경과 불공을 실천함으로써 이 네트워크를 더욱 원활하게 운용할 수 있음을, 이로부터 연대를 실천할 수 있음을 함의한다. 

연대는 다른 존재와 함께 더불어 하는 것을 주된 요소로 삼는다. 강수택은 자유, 평등, 박애 같

은 관념들이 연대의 전제가 된다고 말한다. 즉 연대 자체가 수평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 수평적 관계에서 구성원들의 집합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견해다. ) 그리고 김용해는 연대에 대해 인류를 위한 상호책임을 지는 것, 재난재해 같은 위험을 줄여나가는 예비적 상호보험으로 볼 수 있다고 본다. ) 전 지구적 존재들을 향한 공경과 불공, 이를 통한 ‘은(恩)적 네트워크’의 활성 화는 지구위험에 대비하는 상호보험, 수평적·집합적인 노력으로서 지구적 연대를 위한 하나의 실 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수양과 통합되는 공경과 불공’은 자유, 평등, 박애와 더불어 지구 위험시대 연대의 새로운 전제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Ⅳ. 맺음말

이 연구는 지구위험시대에 대응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출발한 지구인문학적 사유와 그 맥을 함께 

한다. 특히 자연을 도구화하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해체하고 비인간 존재들을 공경과 불공의 대상 으로 삼는 것이 결국 인간 스스로의 내적 도야와도 분리되지 않는 일임을 논의하고자 했다. 또한 그만큼 모든 존재가 빠짐없이 긴밀한 상호의존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개인이 단독으로 심성 을 도야하여 그 결실을 맺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따라서 관계 속에서 타자를 위한 공경과 불 공을 실천하는 행위가 곧 자신의 심성을 도야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 이 점은 지 구위험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지구위험을 기점으로, 우리는 전 지구를 대상으로 개인의 수양과 지구적 윤리 실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동학·천도교, 원불교가 지닌 지구수양학적 요소들은 후일 서구적 사유에서 제시하지 않은 관점 들을 이미 담지하고 있었다. 이는 지구위험시대에 부응하는‘한국적 독창성’이라고 명명할 수 있

다. 금수초목과 공기를 비롯한 물질들에 이르는 비인간 존재들까지 주체적 존재, 긴밀한 관계성의 존재로 본다는 점은 서구에서 출발한 신유물론이나 포스트휴머니즘과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 하지 만 이들 서구적 사조에서 중점을 두지 않는 윤리와 방법론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바로‘은(恩) 적 네트워크’, 공경과 불공의 윤리, 개인적 수양과 이 윤리 실천의 통합에 따른 한국적 독창성이

다. 이 독창성은 지구위험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생활 속에서 쉽게 수양을 실천할 수 있을 때 구현될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종교적 이념의 울타리 내에서가 아닌 보편적, 대중적 성격의 윤리와 방법론으로 보완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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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베리, 위대한 과업, 이영숙 역, 서울: 대화문화아카데미, 2009.

3. 홈페이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stdict.korean.go.kr/main/main.do 수선재 공식 홈페이지, https://www.suseonjae.org/.


12] 【지구살림학】인류세시대의 한국철학* -‘님’을 노래한 시인 이규보 - 조성환**

 12] 【지구살림학】인류세시대의 한국철학* -‘님’을 노래한 시인 이규보 - 조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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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문   오늘날 인류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 지구의 운명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류세’의 시대

를 살고 있다. 19세기의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의 용어로 말하면 “천인상여(天人相與)”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것은 지구와 만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함을 의미한다. 즉 종래와 같이 인 간 이외의 존재들(non-human beings)을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적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본질적 가치를 지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최시형은 이러한 태도의 전환을 “인심개벽”이 라고 하였다. 이것은 최근에 서양에서 대두되고 있는 ‘대지윤리(land ethics)’ 또는 ‘지구윤리’(Earth eth ics)와 상통한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은 ‘지구적 위험’이라는 공통의 문제상황에 직면하여 조금씩 그 시각 이 좁혀지고 있는 추세이다. 본 발표에서는 이러한 철학적 유사점에 주목하여, 인류세 시대를 살아가는 인 류가 지구와 만물을 과연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한국철학사에 나타난 ‘응물론’의 흐름을 추적함으로써 고찰하고자 한다. 

차 례

Ⅰ. 머리말 : 인류세와 지구학

Ⅱ. 동아시아의 응물론(應物論) 전통

Ⅲ. 이규보의 인물상의(人物相衣) 사상

Ⅳ. ‘물론(物論)’에서 ‘님론’으로

Ⅰ. 머리말 : 인류세와 지구학

 

* 이 글은 지난 1년 동안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진행했던 <지구인문학연구회>에서 스터디한 내용과 원불교 사상연구원의 허남진 연구교수와의 대화에서 많은 계발을 받았음을 밝힌다. **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일부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현 시대는 ‘인류세’(anthropocene)오 분류된다고 한다. 인류세란 “인간

이 지구시스템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시대”라는 의미이다. 예전에는 지구시스템에 따라 살던 인류가 그 힘이 점점 강성해짐에 따라 지구시스템 자체를 변화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문제는 이 변화가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기후변화이다. 이상기후로 인해 고온이나 폭우는 물론이고 산불도 빈번해지고 있다고 한다. 불길도 거세져서 소방관들이 통제하지 못할 정도인데, 그 원인은 기후변화에 있다는 것이다. 산불은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최근의 화재는 인류 세의 징후라는 것이다. ) ‘인류세’라는 말이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사태에 이르게 된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이 다

른 생명체들을 약탈한 데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자신의 일시적인 편의를 위해 다른 생명들을 대량으로 희생시킨 결과인 것이다. 마치 전통시대에 귀족이 노비의 노동력을 빌려서 호사를 누렸듯이 말이다. 이

러한 관계를 설명해 주는 개념이 ‘biopiracy’이다. ‘biopiracy’는 1993년에 팻 무니(Pat Mooney)에 의해 처음 고안되었고, 이후 인도의 환경운동가 반다나 시바에 의해 널리 알려진 개념이다. 이 개념은 약초나 씨앗과 같은 제3세계의 유전(genetic) 자원과 전통 지식을 지적 재산권이라는 이름 하에 아무런 허가도 받지 않고 ‘약탈’하는 행위를 말한다. ) 

그런데 무니나 시바가 말하는 biopiracy가 국가와 국가 간의 해적행위라고 한다면,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지구위기는 인간과 지구 사이의 해적행위이다. 인간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지구의 자원을 ‘약 탈’(plunder)한 결과가 오늘의 기후위기이자 생물다양성의 감소이기 때문이다.3)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의 인류는 지구상의 생명체들을 ‘학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초의 학살이 제국주 의에 의해 인간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제노사이드였다면, 오늘날의 학살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제노 사이드인 셈이다. 이처럼 ‘지구학’은 문제의 원인과 진단을 ‘지구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학문을 말 한다.

지구학은 편의상 두세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지구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고 자연과학적으로 연구하 는 ‘지구자연학’과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철학이나 종교학적으로 연구하는 ‘지구인문학’이 다. 이 외에도 지구정치학이나 지구경제학과 같은 분야를 ‘지구사회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

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지구인문학은 지구인문학과 지구사회학을 아우르는 방편적인 개념이다. 

서양의 지구인문학은, 철학과 종교 분야에 한정해서 말하면, 크게 두 가지 주제가 대두되고 있다. 하 나는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지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려는 작업으로, 토마스 베리의 지구 의 꿈이나 래리 라스무쎈의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등이 대표적이다. 주로 신학자나 종교학자들에 의 해 논의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인간과 사물(동식물 포함)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작업으로, 제인 베넷의 신유물론이나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 등을 들 수 있다. 이 논의는 주로 철학이나 인류학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래서 지구인문학은 지구와 사물, 전통적 개념으로 말하면 천지와 만물에 대한 인식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롭게 이해하려는 인문학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시도는 150여년 전에 이미 한국에서도 시작되고 있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한반도에서 탄생한 개벽종교가 그것이다. 이들은 서구적 근대화가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인간과 인간, 국가와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 지구적 차원에서 생명과 평화의 문제를 고민하였다. 특히 동학의 지도자 해월 최시형(1827~1898)은 천지와 만물에 대한 인식을 생태적 관점에서 새롭게 함으로써 훗날 ‘한살림 운동’이 탄생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서양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지구와 사물에 대한 인식과도 많은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개벽종교와 지구인문학의 철학적 유사점에 대해서는 최근에 지구인문학연구회 멤버들을 중심으로 몇 

차례 논문으로 발표된 바가 있다. ) 그래서 이 글에서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개벽종교 이전의 한국 사상에서의 사물인식, 그 중에서도 특히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9∼1241)의 물론 (物論)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후의 개벽종교와 어떤 유사점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런 시도는 장차 한국사상 안에서, 더 넓게는 동아시아사상사 안에서 지구인문학적 요소를 발굴하여, 그것을 자원으로 삼아 “동아시아적 지구인문학”을 모색하는데 기초작업이 되리라 생각한다. 

여러 한국사상가들 중에서도 특히 이규보에 주목한 이유는, 박희병의 선구적인 연구에도 소개되어 있

듯이, 그의 물론(物論)이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서 인간과 만물의 동류성(同類性)을 주장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개벽종교는 물론이고, 지구인문학과도 상통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먼저 동 아시아사상사에서 ‘물론’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형태로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 는 것으로 본론을 시작하고자 한다.

 

Ⅱ. 동아시아의 응물론(應物論) 전통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의 사물에 관한 논의는, 서양과는 달리, 사물에 대한 인식보다는 ‘태도’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사물에 대한 태도는 장자(莊子)적인 개념을 빌리면 ‘응물(應物)’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응물’이란 말 그대로 “사물에 응한다”는 뜻으로, 비슷한 개념으 로는 접물(接物)이나 대물(對物) 등을 들 수 있다. 가령 동경대전의 「탄도유심급(歎道儒心急)」에는 “心兮本虛(심혜본허), 應物無迹(응물무적)”이라는 표현이 보이고, 최시형의 해월신사법설에는 「대인 접물(待人接物)」이라는 제목의 챕터가 있다. 여기에서 “心兮本虛(심혜본허), 應物無迹(응물무적)”은 “마음은 본래 텅 비어 있어서 외물에 응해도 흔적이 없다”는 뜻으로, 그 사상적 기원은 장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장자는 “虛而待物(허이대물)=텅 빈 마음 상태에서 외물이 오기를 기다린다)이나 “應而不藏(응이부장)=외물에 반응할 뿐 담아두지는 않는다)는 응물론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사 마천은 “應物變化(응물변화)”, 즉 “외물에 응해서 변화한다”고 소개하였고(사기(史記)), 3세기의  장자 주석가 곽상은 “허심으로 응물한다”(虛心以應物)는 표현으로 정식화하였다. 이후 허심(虛心)과 응물(應物) 개념은 동아시아사상사에서 폭넓게 사용되었는데  ), 최제우의 “심허-응물”도 이런 전통을 따르고 있다.6)

그런데 “외물에 대한 대응”은 ‘물(物)’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가령 유

학에서는 그 대상이 군주냐 부모냐, 선생이나 친지냐에 따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그래서 이 대응 방식의 차이를 행위규범으로 규정한 것이 ‘예(禮)’이다. 반면에 성리학의 경우에는, 흔히 “만물일체 의 인(仁)”이라고 알려져 있듯이, 만물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물론(物論)을 말하고 있다. 한편 장자는, 

「제물론(齊物論)」이라는 챕터 이름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사물을 고르게 인식하는 논의”를 전개하였

다. “사물을 고르게 인식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래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장자는 사물에 대해서 “제물(齊物)이라는 인식론을 바탕으로 응물(應物)이라는 태도론”을 전개하였 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중기의 사상가 김시습은 「애물의(愛物義)」라는 제목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만물을 사랑하라

는 ‘애물(愛物)’의 태도를 강조하였고, 조선후기의 실학자 홍대용은 인간과 비인간의 존재론적 차등을 부정하는 ‘인물균(人物均)’ 사상을 설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조선말기의 기학자 최한기는, 야규 마코토의 연구에 의하면 ), 외물과의 ‘통(通)’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김시습이 애물(愛物)이라면, 홍대 용은 균물(均物), 최한기는 통물(通物)로, 각 사상가의 응물론을 거칠게 정리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응물론 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것은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의 ‘여물론(與物論)’이다. 그 이유는 개벽 사상과 지구인문학과의 깊은 연관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박희병의 선구적인 연구에 힘입어, 이규보의 여물론(與物論)을 개벽학과 비교하는 형식으로 고찰해보고, 거기에 담긴 지구학적 의미를 생각 해 보고자 한다.  

Ⅲ. 이규보의 인물상의(人物相依) 사상

박희병은 1999년에 출간된 한국의 생태사상(돌베개)에서 이규보의 사상을 생태철학적 측면에서 고

찰하면서 그의 ‘물론(物論)’을 같이 논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이규보는 사물에 대해 두 가지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만물인류(萬物一類)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여물(與物)의식이다. 여기에서 ‘만물 인류사상’이란 “만물을 일류(一類)로 보네”(萬物視一類, 「北山雜題」)라는 이규보의 시구에서 따온 표 현으로 ), 흔히 말하는 ‘만물일체사상’과 유사하다. 그래서 박희병은 이것을 장자의 제물(齊物)사상의 영향으로 보는데, 다만 단순한 수용은 아니고 이규보가 나름대로 ‘자기화’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12 0쪽). 그 이유는 이규보의 만물일류사상은 장자의 제물사상에 ‘측은지심’과 ‘자비’가 결합된 형태 라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다 같이 살기 위해 하는 짓이니 어찌 너(=쥐)만 나무라겠니 - 「쥐를 놓아주다(放鼠)」 어찌 화롯불 없으리요만 (이를) 땅에 내려놓는 건 자비심 때문 - 「이를 잡다」 (파리가) 술에 빠져 죽으려 하니 맘이 아프네. 살려주는 은근한 이 마음 잊지 말아라. 

- 「술에 빠진 파리를 건져주다」

여기에는 이규보가 쥐, 이, 파리와 같은 미물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는 마음이 표현되어 있다. 그런

데 박희병에 의하면 이것은 단순한 애물사상의 발로가 아니라, 만물일류사상이 가미된 애물사상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조선중기의 김시습의 애물사상보다는 중국의 장횡거나 왕양명에 더 가깝다고 평 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김시습의 애물사상이 인간중심적인 차등적 물관(物觀)을 견지하고 있는데 반해, 장횡거와 왕양명은 민포물여(民胞物與) )와 만물일체의 인(仁)과 같이 우주적 스케일을 갖고 있기 때문이 다. 아울러 이규보의 사상적 연원에 대해서는 장횡거나 왕양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 신의 사유를 전개하여 만물일류사상에 도달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121-122쪽).     

이러한 관점에서 박희병은 만물일류사상에서 우러나온 애물(愛物)의 태도를, 인간중심적인 애물(愛物) 과 비교하여, ‘여물(與物)’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여물’이란 비인간 존재까지도 이웃으로 생각한다 는 의미이다. 박희병이 들고 있는 이규보의 ‘여물’ 의식의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날아오는 한 쌍의 저 제비, 옛집을 잊지 않고 있었구나. 애써 나의 집 찾아 주니, 의당 친구로 대우하리(當以故人待). ) 

이 문장은 「옛 제비가 찾아오니(舊燕來)」라는 시의 첫머리인데, 여기에서 이규보는 옛 집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제비를 “친구로 대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 이외의 존재까지도 ‘친구’의 범위에 넣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비록 ‘여물’이라는 표현은 나오고 있지 않지만, 동물까지도 친구로 대하고 있 다는 의미에서 박희병은 ‘여물’ 의식의 발로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규보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무생물에 대해서도 여물(與物)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최시형이 최제우의 ‘하늘’의 범위를 인간에서 만물로 확장하여, “만물이 하늘이다”라고 선언한 것을 연상시킨다(萬物莫非侍天主). 이규보는 자신이 사용하 던 벼루를 향해 다음과 같이 명세하였다(123쪽).

나는 비록 키가 6척이나 되지만(吾雖六尺長) 사업이 너를 빌어 이루어진다(事業借汝遂). 벼루여! 나는 너와 함께 돌아가겠다(與汝同歸). 살아도 너로 말미암고 죽어도 너로 말미암겠다(生由是, 死由是) - 「소연명(小硯銘)」 

여기에서 ‘與汝(여녀)’는 ‘與物(여물)’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與(함께)’의 

범위가 생물에서 무생물로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같은 ‘여물’ 이라고 해도 앞에 나온 파리나 쥐의 사례와는 유형이 다르다는 점이다. 물(物)에 대한 감정이 연민이나 자비보다는 ‘고마움’이나 ‘동지애’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희병은 이 구절에 대해 다 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글은 (…) 일촌밖에 안 되는 벼루라고 해서 6척의 ‘나’에게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 ‘나’는 물(物)인 벼루에 의지함으로써만 나를 실현할 수가 있다는 것, 그 고마움을 생각하면 ‘너’와 ‘나’ 두 존재 사이에 어떤 연대감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생사를 함께하고자 한다는 것, 이런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123쪽, 강조는 인용자의 것)

여기에서는 연민이나 자비보다는 의존, 감사, 연대의 정서가 느껴지고 있다. 그것은 나와 벼루가 서로 

의존관계에 있다는 자각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과 연대감이다. 이 경우에는 ‘여물’의 ‘與(여)’가 단 순한 ‘이웃’이나 ‘친구’의 의미를 넘어 ‘동지’나 ‘파트너’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즉 서로 협력 하고 연대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여(與)’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가 「續折足几銘(속절족궤명)」이다. 이 시는 다리가 부러진 책상을 고친 후에 쓴 글로, 

박희병에 의하면 사람과 사물은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는 이규보의 생각을 잘 보여 주고 있다(124 쪽). 

  나의 고달픔을 부축해 준 자는 너요, 너가 절름발이 된 것을 고쳐준 자는 나다.   같이 병들어 서로 구제하니(同病相救), 어느 한쪽이 공(功)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사물에 대한 의존관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과 사물의 상생관계

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병상구(同病相救)”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자신은 책상의 위로를 받았고, 책상은 자신에 의해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책상은 단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 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도와주는 은혜로운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박희병도 이런 점에 주목하 여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규보는) 物我相救(물아상구)라고 요약할 수 있는 깨달음에 이르고 있다. (…) 장자의 제물사상 에서 출발한 이규보가 장자를 자기화함으로써 존재의 근원적 연대성을 깊이 투시하는 데까지 이르 렀음을 잘 보여준다.”(124쪽)

여기에서 박희병은 이규보의 동병상구(同病相救)를 물아상구(物我相救)라고 바꿔 표현하면서, 이규보 가 “장자를 자기화”하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자기화한 것일까? 여기에서 ‘자기화’ 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구체적으로 장자의 제물사상에 ‘무엇’이 추가되어 이규보적인 여물(與物) 사상이 되었다는 것일까? 앞서 소개한 생물들의 사례에서 자기화의 요소는, 박희병에 의하 면, 자비와 애물이다. 그런데 이곳의 무생물의 사례에서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자비나 애물보다는 감 사나 연대의 감정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생물에 대한 감사와 연대의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인간과 사물이 서로 의존하고 서로 살려주는 상의(相依)와 상생(相生)의 관계

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달리 말하면 人物相依(인물상의)와 人物相生(인물상생) 관계에 대한 자각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장자의 제물사상이나 중국의 만물일체사상과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한다. 제물이나 만물일체는 ‘일체성’을 강조하지만, 상의나 상생은 ‘상호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렇 게 해석하면, 앞에서 살펴본 자비와 연민의 사례도 상호성의 측면에서 새롭게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 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하늘이 낳은 물(物)을 도둑질하고(人盜天生物), 너는 사람이 도둑질한 걸 도둑질하누나(爾盜人所盜). 똑같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이니(均爲口腹謀), 어찌 너만 나무라겠니!(何獨於汝討) - 「쥐를 놓아주다(放鼠)」

  

여기에서 하늘과 사람 그리고 쥐는 각각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늘이 생성한 것을 사람이 훔치고, 사람이 훔친 것을 다시 쥐가 훔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생성 하지 않으면 사람은 먹을 것이 없게 되고, 사람이 훔치지 않으면 쥐도 먹을 것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똑같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이다”는 말은 전후맥락상 단지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의미하기보다는 상호연결성의 함축을 담고 있는 셈이다. “내가 살고 싶으니까 쥐도 살고 싶겠지”라고 하는 “살고 싶 은 욕망”에 대한 공감([均])이 “내가 하늘에 의존해 있듯이 쥐도 나에게 의존해 있다”는 의존관계에 대한 공감과 동시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기생하고 있듯이 쥐도 기생하고 있으 니까, 내가 하늘로부터 도둑질 하듯이 쥐도 나로부터 도둑질 하는 것이 이해된다는 것이다. 이규보가 쥐를 살려준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 즉 자기와 ‘동일한’ 의존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공감했기 때문이 었다. 그 동일함과 공감을 나타낸 개념이 ‘균(均)’이다.  

Ⅳ. ‘물론(物論)’에서 ‘님론’으로 

이규보가 제비나 쥐와 같은 생물은 물론이고, 벼루나 책상과 같은 무생물에게까지 연민과 공감의 정 서를 느낀 것은 조선후기에 유씨부인(兪氏婦人)이 썼다고 하는 「조침문(弔針文)」을 연상시킨다. 가령 「 조침문」에서 바늘이 특별한 재주를 지녔다고 절찬하는 대목은 ) 이규보가 벼루에 대해서 “사업이너를 빌어이루어졌다”(「小硯銘」)고 평가한 구절과 상통한다. 장자적으로 말하면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에게 도 ‘덕(德)=탁월함’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울러 유씨부인이 부러진 바늘에 대해서 “후세(後世)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지정(同居之情)을 다시 이어, 백년고락(百年苦樂)과 일시생사(一時生死)를 한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라고 고백하는 대목은 이규보가 벼루에 대해서 “생사를 함께 하고자 한다”고 맹세했던 구절과 흡사하다. 마치 현대인들이 ‘반려동물’을 가족이나 벗으로 여기고 있듯이, 유씨부인이나 이규보는 바늘이나 벼 루를 ‘반려사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반려’의 범위를 생물에서 무생물로 확 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정서를 표현한 한국말이 ‘님’이라고 생각한다. ‘님’은 상대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이

고 존경과 연민의 정서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이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도 ‘하늘님’이라고 한 것도 사물에게 ‘님’의 정서를 느꼈기 때문이리라. ‘하늘’을 노래한 시인 윤동 주가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한 것도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님’의 정서 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최시형 식으로 말하면 “하늘(=생명)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느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규보의 ‘물론(物論)’은 ‘님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소연명(小硯銘)」이나 「續折足几銘(속절족궤명)」는 “님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 있고, 유씨부인의 「조침문」은 “님을 그리워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규보가 「소연명(小硯銘)」에서 “너를 빌어 사업을 이룬다”고 표현한 것은 최시형이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천인상여(天人相與)”, 즉 “하늘과 사람이 함께 한다”고 한 말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서 하늘은 만물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을 말한다. 최시형에 의하면, 사람은 만물 속의 하늘을 먹고 살 아가고, 하늘은 사람의 힘을 빌려서 자신의 생명력을 표현하는데, 그런 점에서 양자는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해월신사법설「천지부모」). 이것을 표현한 말이 ‘천인상여’이다. 이 표현을 빌리면, 이 규보가 생각한 인간과 사물의 관계는 “人物相與(인물상여)”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사물이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물(物)’을 ‘하늘님’으로 표현한 것이 최시형의 동학사상이

다. 따라서 이규보와 최시형은, 적어도 물론(物論)의 측면에서는, 서로 연속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규보에게서도 ‘물(物)’을 ‘님’으로 대하는 태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규보가 인간은 사물에 의존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한 것은, 원

불교의 은(恩)사상과 상통한다. 원불교의 핵심교리 중의 하나는 사은(四恩)인데, 여기에서 ‘은(恩)’은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관계를 말한다. 원불교에서는 그 은혜의 관계를 “천지·만물·동포·부모” 라는 네 가지로 범주화시켜서 사은(四恩)이라고 하였다. 

한편 최시형은 “천지가 부모이다”는 천지부모사상을 주창하였는데, 여기에서 ‘천지’는 넓게는 우

주 전체를, 좁게는 지구를 의미한다. 그래서 “천지가 부모이다”는 “지구를 부모와 같은 ‘님’으로 대하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지구님이 부모님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물에 대한 이규보 의 인식과 태도는 훗날의 개벽종교와 유사한 점을 많이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이 사물 을 도구적으로 대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의 지구위기를 극복 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처방은 “만물을 님으로 대하라”는 이규보와 최시형의 ‘님론’을 실제 삶 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1] 【지구유학】조선유학에서 지구유학으로 - 통(通)과 균(均)을 중심으로 - 김봉곤*

 11] 【지구유학】조선유학에서 지구유학으로 - 통(通)과 균(均)을 중심으로 - 김봉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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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문  본고는 조선유학의 핵심주제였던 통(通)과 균(均)의 개념과 가치체계를 검토하여 오늘날과 같은 지구화와 민주주의 시대에 유학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켜 나아가야 하는지를 검토해 본 것이다. 유학에서 통(通)은 천지나 인간, 만물과 같이 서로 다른 존재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인(仁)이며, 균(均)은 인간(人間) 이나 물질 상호간의 균평, 즉 의(義)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통과 균은 천지와 인간, 만물간의 합일 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과 만물간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화평한 질서로 유지하기 위한 가치체계로 기능해 왔 다. 공자나 맹자, 송대의 주돈이, 장재, 정호, 정이, 주자 모두 통과 균의 조화를 모색해왔다. 조선에서는 율 곡 이이가 이통기국(理通氣局)을 말하여 기국의 관점에서 사회개혁을 부르짖었고, 노사 기정진은 리통설을 주장하여 리통 속에서 분수의 완전한 실현을 촉구하였다. 조선조 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인간의 자유 와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로의 전환과 가치체계의 변화 속에서 1928년 충청도 홍성의 유교부식회(儒敎扶植會)에서는 유교가 전제주의와 계급주의를 타파하는 새로운 유교로 탈바꿈할 것을 선언하였고,  동시대에 원 불교에서는 일원상과 사은사요를 주장하여 통과 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우주적 질서와 사회관계를 주장하 였다. 이러한 전제주의와 계급주의를 타파하려고 하였던 유교부식회나 사은사요의 추구를 통해서 천지 만물 과 합일되고 공정한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던 원불교의 정신은 오늘날과 같은 지구적 위기 속에서 유학을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오늘날 지구위험시대를 맞이하여 유학이 민주주의 시대의 가치실현과 우주자연 만물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네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다. 1) 탈중국화가 이루어져야 하며, 2)보편적인 자유와 평등을 실현 하는 세계시민적 유학으로 거듭나야 하며, 3) 인간와 자연의 공생을 도모해야 하며, 4) 생명, 평화를 고취하 는 유학으로 거듭나야 함을 역설하였다. 

차 례

Ⅰ. 머리말

Ⅱ. 유학에서의 통과 균

Ⅲ. 조선유학에서의 통과 균

Ⅳ. 지구화 시대의 유학

Ⅴ. 맺음말 

 

*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연구교수

Ⅰ. 머리말 

지구는 미증유의 대재난을 겪고 있다. 인류의 과학과 기술이 진보하여 생활은 편리해지고 인간 의 수명은 늘어나게 되었으나, 무분별한 자원개발과 생산력의 발전으로 수십 억 년 동안 유지, 보 존되어왔던 지구환경이 파괴되어 인간이 더 이상 지구에서 생활하기 대재난이 초래된 것이다. 국 가마다 공장을 세우고 도로를 개통하여 각종 생산품을 쏟아내고, 자동차가 폭증하여 도로를 가득 메꾸고 있어서, 이로 인한 대기오염과 환경파괴, 지구온난화와 같은 무서운 재난이 발행하여 오늘 날 인류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가 파멸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삼림과 토지는 줄어들고, 이산화탄소 나 메탄가스 배출로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되어 극지방과 고산지대의 빙하지대가 녹아내리고 있고, 토양과 대기는 농약과 방사선 유해 물질 등으로 오염되어 있고, 대기는 유해물질이 섞인 미세먼지 가 가득 차 있다. 이러한 각종 재난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인류가 멸종되고 모든 생명이 사라지는 현상이 올 것이라고 많은 과학자들이 예측하고 있다. 이에 인간과 인간,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모색해왔던 유학 역시 더 이상 기존의 유학체계에서는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상황에 이르 게 된 것이다. 

유학은 춘추전국시대에 공맹의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약육강식과 패도정치가 행해지는 속에 

인간 존재의 소중함과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주장해왔고, 중국 송대(宋代)에는 사대부의 인간이 천 지와 하나가 되는 우주적 질서를 모색하였으며, 오늘날에는 사회주의를 보완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계층이나 도농(都農)간의 조화로운 세상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에 유학이 들어온 이래 시대적 사명을 다해 왔다. 조선은 성리학을 국 시(國是)로 삼아서, 정치와 사회, 경제, 문화를 이끄는 지도이념으로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질 서를 모색해왔다. 율곡 이이는 이러한 유학의 지도이념을 이통기국으로 설정하여 기국의 관점에서 당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였고 기정진의 경우 리통설을 제기하여 사회에서의 리통의 실현을 촉구 하였다. 

본고에서는 이처럼 통과 균을 통해 인간과 자연, 만물간의 조화와 균평한 질서를 추구해왔던 조 선 유학의 개념이 오늘날과 같은 지구위험시대에 어떻게 지구유학으로 발전해야 하는가를 그 가능 성과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Ⅱ. 유학에서의 통과 균 

유학은 춘추전국 시대에 마련된 공맹의 仁義와 성선설을 바탕으로 시대에 적합한 이념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왔는데, 그 핵심 사상은 통과 균이라고 할 수 있다. 통(通)은 천지나 인간, 만물과 같이 서로 다른 존재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인(仁)이며, 균(均)은 인간(人間)이나 물질 상호간의 균평, 즉 의(義)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통과 균은 천지와 인간, 만물간의 합일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과 만물간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화평한 질서로 유지하기 위한 가치체계로 기능해 왔다. 

역경(易經)에서는 자연 만물과 인간의 변화, 불변의 도리를 태극(太極)과 음양(陰陽), 팔괘(八卦) 의 원리를 통해 64괘로 조합하고, 다시 계사전(繫辭傳) 문언전(文言傳) 등 10익(翼)을 통해 천지와 일월, 귀신과 사시(四時)와 하나가 되는 통(通)의 길을 제시하였다.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송대의 주염계(周濂溪) 역시 「태극도설(太極圖說)」과 통서(通書)를 지어 사람이 천지와  일체가 되는 것 과 성인(聖人)이 되는 길을 제시하였다. 태극도설에서는 무극-태극-음양-오행-만물로 전개되는 우주생성 속에서 이성, 선악, 오상 등으로 전개되는 인간의 도덕에 대해서 설명하였고,  통서에 서는 중용에서 말하는 성(誠)이 천도일 뿐만 아니라 인도의 근본임을 설파하여 궁극적으로 인도와 천도를 일치시키고 있다. 중용에서는 지극히 성실한 사람은 천도와 인도를 관통할 수 있다고 하였 기 때문이다.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誠)한 분이라야 그 성(性)을 다할 수 있다. 그 성(性)을 다하면 사람의 성(性) 을 다할 수 있고, 사람의 성(性)을 다하면 사물의 성(性)을 다할 수 있고, 사물의 성(性)을 다하면 천 지(天地)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고,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을 도우면 천지(天地)와 함께 나란히 설 수 있게 된다.1)

지극히 성실한 사람은 자신이나 타인, 만물의 성을 다할 수 있으므로,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

어서 천지와 함께 나란히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통의 질서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인물은 북송의 장재(張載, 장횡거)라고 할 수 있다. 장

재는 「서명(西銘)」에서 천지와 인간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하늘을 아버지라 부르고, 땅을 어머니라고 부른다. 나의 이 조그만 몸은 그 가운데 뒤섞여  있다. 그러므로 천지 사이에 가득 찬 것은 나의 형체가 되었고, 천지를 이끄는 것은 나의 본성이 되었다. 백성은 나의 동포요, 사물은 나와 함께 사는 무리이다. 천자(天子)는 나의 부모의 종자요 대신(大臣) 은 종자의 가상(家相)이다. 나이 많은 이를 높이는 것은 천지의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는 것이요, 외롭고 약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천지의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하는 것이다. 성인은 천지와 덕 을 합한 사람이요, 현인은 빼어난 사람이다. 천하의 파리하고 병든 사람, 고아와 자식없는 노인, 홀 아비와 과부는 모두 내 형제  가운데 어려움을 당하여 호소할 데 없는 자이다. 이에 하늘의 뜻을 지 킨다는 것은 자식의 공경이요, 즐거워 근심하지 않음은 효에 순수한 자이다. 인을 어기는 것을 패덕 (悖德)이라 이르고, 인을 해침을 賊이라고 한다. 악을 이루는 자는 부재(不才)요, 그 형체를 실현하 는(踐形) 자는 그 어버이를 닮은 자이다. 조화(造化)를 알면 하늘의 일을 잘 이어받고 신묘(神妙)함 을 궁구하면 하늘의 뜻을 잘 이어 받든다. 방구석에서 부끄럽지 않은 것이 부모를 욕되게 하는 않

 

1) “惟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中庸 22章 1節.  

는 것이요,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기르는 것은 하늘을 섬김에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다. 맛난 술 을 싫어한 것은 우(禹)가 어버이(崇伯子)를 돌보는 행동(顧養)이요, 영재를 기르는 것은 영고숙이 효 성스런 무리를 잇게 하는 것이다. 괴로워도 공경을 게을리 하지 않아 어버이를 기쁘게 한 것은 순 의 공적이요, 도망가지 아니하고 끓는 가마솥에서 죽을 것은 기다린 것은 신생의 공순함이다. 부귀 와 복택은 나의 삶을 두터이 할 것이요, 빈천과 우척(憂戚)은 너를 옥성(玉成)시킬 것이다. 주신 몸 을 받아 온전하게 돌아간 사람은 증삼이요, 용감하게 부모의뜻에 따르고 명령에 순종한 사람은 백 기이다. 살아 있는 동안 나는 순종하여 섬기고 죽을 때는 편안히 돌아가리라. ) 

천지는 나의 부모로서 천지에 가득한 기운은 나의 몸이 되었고, 천지를 이끄는 이치는 나의 본 성이라는 우주관, 모든 사람은 나의 형제이며, 만물은 나와 동류라는 관점에서 유가적 윤리를 제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이(鄭頤, 정이천)은 “천하의 리(理)는 하나이다. 비록 사물이 천차만별이기 는 하지만, 모두 다 하나로써 그것을 統御하면 어긋나지 않는다.” )라고 하여 리일분수(理一分殊) 로서의 리통을 말하였다. 이후 남송의 주희(朱熹)는 정이천의 이일분수를 받아들여 「서명」을 다음 과 같이 풀이하였다. 

 

 (朱子)가 말하기를, “정자(程子)는 서명이 ‘이일분수(理一分殊)’를 밝힌 것이라고 하였다. 무릇 건으로 아버지를 삼고 곤으로 어머니를 삼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그러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른바 ‘이일(理一)’이다. 사람과 만물이 태어남에 있어 혈맥을 지닌 무리는 각각 그 어버이를 어 버이로 하고 그 자식을 자식으로 하니, 분수가 어찌 다르지 않겠는가. 하나로 통합되었으면서도 만 가지로 다르니 천하가 한 집이고 중국이 한 사람과 같다 하더라도 겸애(兼愛)하는 폐단에 흐르지 않 고, 만 가지가 다른데도 하나로 관통하였으니 친근하고 소원(疎遠)한 정(情)이 다르고 귀하고 천한 등급이 다르다 하더라도 자기만을 위하는 사사로움에 국한되지 않으니, 이것이 서명의 대강의 뜻이 다. 어버이를 친근하게 여기는 두터운 정을 미루어서 무아(無我)의 공심[公]을 기르고, 어버이를 섬 기는 정성으로 하늘을 섬기는 도를 밝힌 것을 보면, 어디를 가도 이른바 분수가 서 있고 ‘이일’ 을 유추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또 그는 말하기를, “서명의 앞부분은 바둑판과 같고 뒷부분은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생명이 건곤을 부모로 삼지 않은 것이 없으니 리일(理一)이고, 사람과 만물이 각각의 부모

와 자식이 있으니 분수(分殊)이므로, 만 가지를 하나로 관통하면서도 겸애의 폐단에 흐르지 않고, 친소가 다르더라도 자기만을 위하는 사사로움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퇴계 이황 역시 주희의 뜻에 따라 정복심(程復心, 1279-1368)이 그린 서명도(西銘圖)를 취하여  성학십도(聖學十圖)가운데 제2도에 수록하였다. 이황은 정복심의 서명도가 상도(上圖)와 하도(下圖) 로 구분되는데, 상도는 이일분수(理一分殊)를 밝힌 것이고, ) 하도는 어버이를 섬기는(事親) 성심으 로 하늘을 섬기는(事天) 도를 밝힌 것이라고 하였다. ) 

이처럼 장재의 「서명」은 정이천과 주희에 의해서 이일분수(理一分殊)로 해석되었고, 우리나라에 서는 퇴계 이황이 수용함으로써 조선유학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일분수가 어떻게 현실 에서 실현되는가가 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리는 모두가 보편적으로 갖추고 있는 천덕이므로 논 란의 여지가 없지만, 천차만별인 분수가 어떻게 생겨나고 실현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조선후기 내내 논란이 일어났으므로 장을 바꾸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유학에서는 균(均)에 대해서도 중시하였는데, 일찍이 공자는 제자인 염구(冉求, 자는 자유(子有)) 가 노나라 계씨(季氏)의 신하가 되어 전유(顓臾) 땅을 치려하자, 다음과 같이 그 부당함을 설파하였 다.  

내가 듣기로는, 나라를 소유하고 집안을 소유한 자는 백성이 적은 것을 근심하지 않고 빈부가 고르 지 못한 것을 근심하며, 백성이 가난한 것을 근심하지 않고 백성이 편안하지 못한 것을 근심한다고 한다. 대체로 균등하면 백성이 가난할 리 없고, 화목하면 백성이 적을 리 없으며, 편안하면 나라가 기울 리가 없다. 이와 같기 때문에 먼 데 사는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文德을 닦아서 귀의해 오 게 하고, 오게 했으면 편안하게 해줘야 하는 것이다. ) 

집안이나 국가에서는 균(均) 즉 빈부가 고르지 못하고 가난한 것을 근심하고 편안하지 못함을 근 심해야 하는데, 균등하면 백성이 가난하지 않고, 화목하면 백성이 적어지지 않으며, 편안하면 나라 가 기울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자 역시 집안이나 국가에서 일차적으로 중시한 것은 균등한 분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자의 균(均)에 대한 강조에 이어 대학(大學)에서 백성들에게 재물을 균평하게 나누어

서 백성들을 모으는 인정(仁政)의 중요성을 말하였다. 

덕이라는 것은 근본이고 재물이라는 것은 말단인데, 근본을 도외시하고 말단을 중시하게 되면 백성 들을 다투게 만들고 빼앗는 풍조를 조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임금의 창고에 재물이 모이 면 민심은 흩어지고 재물을 흩어 나누어 주면 민심이 모이게 되는 것이다. ) 

인정을 실천하는 덕이 근본이고, 토지와 같은 재물이 말단인데, 지도층이 말단인 재물을 축적하

면 민심이 흩어지고, 재물을 고루 나누어주면 민심이 모인다는 것이다. 맹자(孟子)는 이러한 인정의 실현의 기초는 정전법에 있으며, 정전의 기초는 경계를 바르게 하는데 있다고 역설하였다.   

 등문공이 필전을 시켜 맹자에게 가서 정전법(井田法)을 묻게 하였는데,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자 네의 군주가 장차 인정(仁政)을 행하기 위해 신하 중에 자네를 선택하여 실무를 주관하게 하였으니, 자네는 반드시 힘써야 할 것이다. 무릇 인정(仁政)은 반드시 토지의 경계를 정하는 데에서부터 시작 되는데, 경계를 정하는 것이 바르지 않으면 정전(井田)이 균등하지 않고 녹봉이 공평하지 않게 된 다. 그러므로 포악한 임금과 탐관오리들은 반드시 경계를 정하는 일을 태만히 하게 되어 있다. 경계 를 정하는 일이 바르게 되면 토지를 나누어주고 녹봉을 정하는 일은 가만히 앉아서도 정해질 수 있 는 것이다.” ) 

인정(仁政)의 기초는 토지의 경계(經界)를 고르게 하는데 있다는 것으로서, 경계를 바르게 하여야 

정전이 균등하고 관리들의 녹봉이 공평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전은 사방 1리(里)가 1정(井)으로 1정 은 900묘다. 그 한가운데에 공전(公田)이 위치하고 여덟 집은 모두 사묘(私田) 100묘씩을 받는다. 이들이 공전을 공동 경작하는데, 공전의 일을 마친 뒤에 감히 사전의 일을 다스리도록 한다는 것 이다. ) 이러한 정전법은 농민들에게 고루 토지를 나누어주어서 균등한 생활을 보장하고,  중앙의 공전을 우선적으로 경작함으로써 국가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가 주장한 정전은 진나라 상앙에 의해서 폐기가 된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씨족 공동체(氏族共同體)가 해체되고, 철기와 우경(牛耕)의 보급으로 인한 농업생산력의 증대, 그리고 대 규모 토지 개간 등으로 사적 소유에 대한 발전을 자극하여 정전제를 폐지하고 사적 소유제도로 바 뀌게 된 것이다.10) 이러한 사적 소유제도의 발전은 토지 소유에서 점차 불균등을 초래하여 부자는 들판 길을 연이었으나, 가난한 자는 송곳 세울 땅도 없을 정도로 불평등이 심화되어갔다. ) 

이러한 토지 소유의 불균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한(漢) 대에는 동중서(董仲舒) 등에 의해서 대토 지 겸병을 제한하는 한전론(限田論)이 제기되기도 하였고, 신(新)을 건국한 왕망(王莽)에 의해서 정 전제를 본 딴 왕전제(王田制)가 시행되기도 하였다. 이후 북위에 이르러 15세에서 70세까지의 성인 에게 일정한 넓이의 토지를 지급하고, 70세가 되거나 사망하면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는 균전제(均田制)가 시행된 이후 균전제는 북제(北齊)⋅북주(北周)⋅수(隋)⋅당(唐)까지 약 300년간 시행된 토지 제도의 근간을 이루었다.  ) 

「서명(西銘)」을 지어 천하 백성이 나의 동포임을 강조한  「서명(西銘)」을 지은 장재(張載) 역시 정전(井田)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장재는 삼대의 정치에 뜻을 두어서, 시골에 땅을 사서 정전(井田) 을 구획하고자 하였다. 그는 맹자가 주장한 것처럼, 공전(公田)에서는 조세를 바치게 하고, 사전(私田)에서는 소득을 갖게 한 다음, 학교에서 교육을 시키고, 예속을 일어나게 하고, 상부상조하게 하 였던 것이다. ) 

 

Ⅲ. 조선유학에서의 통과 균

전술하였듯이 조선은 장재의 서명과 정이천, 주희로 이어지는 이일분수의 전통을 계승하였는데, 그 이일분수의 실현방식에 대해서는 율곡 이이가 이통기국(理通氣局)을 말함으로서 구체화되었다. 리는 기를 타고 유행하여 천태만상으로 고르지 않으나 그 본연의 묘리가 없는 데가 없으므로 리통 이라고 하며, )  만물은 기(氣)가 승강하여 천태만상의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본말과 선후가 있고 각각 국한되어 있으므로 기국(氣局)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즉 사물에 내재하는 이의 보편성과 차 별성을 각각 '이통'과 '기국'에 의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으로서, 리의 본연은 만물에 보편적인 것이 나, 구체적 형체를 갖춘 기와 결합하여 차별적이고 개별적인 리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이 의 이통기국의 견해는 ‘리통’으로서 선의 본체가 어디에나 존재하여 변함이 없음을 밝히고, ‘기국’으로서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불완전함은 기의 특성임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 러한 기의 불완전함은 인간은 수양을 통해 기의 본연을 회복할 수 있는 것으로서, 기질을 다스려 본연의 선을 확충하면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16) 이이의 이통기국에 관한 논의는 통해 보민(保民), 이민(利民), 안민(安民)을 위한 구체적인 시책이 나 제도는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므로 자연히 시의에 맞는 갱장이 필요하게 되어 사회의 묵은 폐 단을 고치는 제도개혁을 주장하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다만, 이러한 이이의 이통기국에 관한 견해 는 기국에 의해 성이 규정된 것으로 볼 것인지, 리일로서 성을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을 초래하게 되어, 기호지방에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이 발생하게 된 배경이 된다. 

이이의 이통기국에 의해서 촉발된 다양한 견해를 통합시키기 위해 제시된 것이 노사 기정진의 리통설(理通說)이다. 기정진이 말하는 리통(理通) 역시 만물에는 동정, 다과, 생사가 있으나, ) 리의 묘는 간격이나 피차, 다과, 생사가 없어서 동속에 정이 있고 정속에 동이 있으며, 일(一)속에 만(萬) 이 갖추어져 있고 만 속에 일이 갖추어져 있으며, 다과나 생사가 서로 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다. ) 이러한 논리는 기를 타고 일리, 만리가 생성되거나 기를 타고 리가 통한다고 하는 율곡의 이 통기국의 전통을 잇는 기존의 견해와 다르다. ) 기정진은 이러한 이통설의 논리를 발전시켜 태극 - 음양 - 오행 - 만물로 전개되는 리일분수가 리일을 말할 때에 이미 분(分)이 담겨져 있고, 분수 를 말할 때에 이미 일(一)이 있게 된다고 본다. ) 즉 분수 밖에 리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태극도 분수 가운데에 있게 되므로, 결국 리는 일(一)이 곧 만(萬)이니 다를수록 같아지고, 일이면 서 분이니 다를수록 같아지게 된다. ) 

이러한 리통(理通)에 대한 기정진의 견해는 태극과 천명(理)를 최고의 실재요, 궁극적인 원인으로 

보는 것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순수법상(Form)이나 스피노자의 제1원인, 라이프니쯔의 엔틸레히 (Entelechie)나 모나드(Monad)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 기정진이 주장한 리는 실제로 움직이지 않 지만 움직이는 것으로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기를 격동시켜서 그것을 실현하도록 부리는 것이 다. 리는 일자이자 만수로서 모든 것의 추동력이 되는 것으로서, 결국 중용 1장의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을 완벽하게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천과 리에 의한 통의 질서를 부르짖은 기정진의 주장은 분수의 리일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기국 자체도 리통의 질서에서 실현되므로, 하나의 통합 적인 국가질서 원리하에 훨씬 적합한 이론이다. 

이러한 조선유학에서의 리통에 대한 강조는 조선조 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가치체계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4장에서 후술하는 바이 다.  

다음에는 조선에서 ‘균(均)’의 실현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 저 조선은 고려 말 토지제도의 문란을 망국의 원인으로 보고 있다. 정도전은 고려말 극심한 토지 제도의 문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제도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게 되면서는, 세력가들이 서로 토지를 겸병하였으므로 한 사람이 경 작하는 토지에는 그 주인이 더러는 7~8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고, 전조를 바칠 때에는 인마(人馬) 의 접대며, 청을 들어 강제로 사는 물건이며, 노자로 쓰이는 돈이며, 조운(漕運)에 드는 비용들이 또 한 조세의 수효보다 배, 또는 5배 이상이나 되었다. 상하가 서로 이익을 다투어 일어나서 힘을 겨루 어 빼앗으니, 화란이 이에 따라 일어나고 마침내는 나라가 망하고야 말았다.23)

이처럼, 고려 말 사전(私田)의 폐단이 극심하여 토지겸병이 만연하고, 조세수납의 부정이 극심하 게 되어, 결국 과전법을 실시하여 사전(私田)을 혁파하게 된다. 즉 1391년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 여 경내의 토지를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인구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누어 주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서도 농법의 개량으로 농업생산력이 증대하고, 토지 개간, 공신전 지급 등으로 사 적 소유가 늘어나면서, 토지매매가 허락되었다. 이에 따라 과전법 체제가 차츰 무너지고, 조선 후 기에는 토지매매가 일반화됨으로써 빈부 격차가 극심해진다. 백성들이 토지를 갖지 못하게 되면 생계유지도 어렵고, 유교적인 윤리마저 실현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이이는 “백성은 먹는 것에 의 존하고, 나라는 백성에 의존하므로 먹을 것이 없으면 백성이 없고, 백성이 없으면 나라도 없는 것 이 필연의 이치24)“라고 하여 부모와 자식, 형제간의 예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삶을 풍 족하게 하고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한다고 양민(養民)과 보민(保民)의 방책을 마련할 것을 역설하였 다.25)    

조선후기에는 조선 전기의 폐단이 더욱 극심해져갔고, 토지 소유의 불균등과 빈부 격차가 심화 됨에 따라 사회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토지제도 개혁이 등장하였다. 유형원의 균전제, 이익 의 한전제, 정약용의 여전제 역시 토지소유의 불균등과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하여 제도 개혁을 주장한 것이다. 전술하였던 기정진 역시 가난한 지식인으로서 빈궁한 생활을 영위하기도 어려웠는 데, 그는 이러한 빈궁한 원인이 국가의 정책과 경제운영에 있음을 직시하였다. 

저의 수십 식구의 생계수단이 농사에 달려 있는데 항상 5월에 새 곡식을 먹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농사를 지어도 그 속에 배고픔이 있다고 하는 성인의 말씀이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26)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봄이 되면 항상  배고픈 생활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기정진의 경우 자신 의 만성적인 빈궁 상태가 국가의 잘못된 정책이나 경제 운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파악하게 되었 였다. 즉 사대부들이 예의염치를 잃고 이욕(利慾)을 추구하기 때문에, 토지소유의 분균형을 초래하 고, 조세제도가 문란하여 생활이 곤란하다는 것이다. 중앙이나 지방관들이 중간에 조세를 가로채어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지고, 백성들의 산업이 파산되어 자식을 팔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 인륜 질서를 회복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기정진은 당의 조용조 체제를 본떠서 균전제를 실시하

 

23)“嗚呼 其弊有不勝言者 及其法壞之益甚 勢力之家 互相兼幷 一人所耕之田 其主或至於七八 而當輸租之時人馬之供億 求請抑買之物 行脚之錢 漕運之價 固亦不啻倍蓰於其租之數 上下交征 起而鬪力以爭奪之 而禍亂隨以興 卒至亡國而後已.”, 三峰集, 朝鮮經國典, 經理. 

24)“伏以民依於食 國依於民 無食則無民 無民則無國 此必然之理也.”, 栗谷全書卷4, 疏箚2, 「擬陳時弊疏」 

25) 이재석, 「율곡이이의 현실인식과  경세사상」, 동양문화연구33집, 영산대 동양문화연구원, 2020, 22-23 쪽. 

26) “鄙人年間數十口計活 寄在耒耜間 而常未免五月食新 耕也餒在其中 聖人眞不我欺也.”, 蘆沙集 卷5, 「答金濟宅」  

여 백성들이 토지를 갖고, 토지를 갖는 농민을 정병으로 만들어 국방을 튼튼히 하고, 환곡 대신 상 평창을 실시하여 조세부정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 

이처럼 조선시대는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해질 때마다 백성들도 고루 균등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균의 정치이념이 강조되었다. 백성들에게 항산(恒産)을 보장해주어야 인륜도덕과 같은 항심(恒心)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Ⅳ. 지구화 시대의 유학 

 조선조 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점차 인간의 자유와 평등이 중시되고, 오늘날에는 민주주 의  실현과 극심한 환경파괴 속에서 자연과 공생하는 새로운 유학이 필요하게 되었다. 조선은 동 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 이후 신분평등의 시대가 왔다. 이어 한말에는 독립신문 등의 영향으로 미 국식 자유주의나 입헌군주제의 정치체제가 들어왔다, 또한 선교사들의 활동에 의해 유교 가치관이 크게 흔들리게 된다. 전통적인 체제를 고수했던 유학자들은 위정척사운동으로 맞섰지만, 민중들의 정서에 맞지 않았고, 점차 유교는 시대적 조류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김창숙과 같은 개신유학자들이 중국중심의 사대주의적 유학을 폐기할 것을 제창하였으나, 대부분 의 경우 조선유학의 틀에 머물렀다. 이 때문에 유학은 여전히 특권층의 이익에 봉사하는 봉건사회 의 계급질서나 과학이나 이성의 발달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학문사상 정도로 간주되고 있는 실정 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유학의 근본정신은 성선설의 바탕에서 통과 균을 통해 인간 뿐만 아니라 우주만물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해왔다. 이에 기후, 환경, 생태 환경의 파괴 로 인간생존 조건이 중대한 위기에 지구와 우주만물을 살리는 유학으로 전개될 필요가 있으며, 충 분한 가능성이 있다. 

  조선조 말에는 신분제 폐지와 서구식 민주주의가 도입되면서 점차 차별이 아닌 평등하고 주체 적인 인간사회가 요구되었다. 사회에서는 개인의 정치적 참여와 부의 성취, 문화적 향수에서 중시 되는 균(均)의 유학이념이  중시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점차 오늘날 민주주의 시대에 걸맞는 유학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음이 주목된다. 예컨대  일제강점기인 1928년 충청도 홍성의 유교부식 회(儒敎扶植會)에서는 유교가 전제주의와 계급주의를 타파하고 새로운 유교로 탈바꿈할 것을 선언 하였다. 이들은 율곡 이이가 말한 학교모범의 4대 강령 즉 “천지를 위하여 마음을 세우고(爲天地立心), 생민을 위하여 도를 세우며(爲生民立道), 옛 성인을 계승하고 끊어진 학문을 잇는다(爲往聖繼絶學),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열어준다(爲萬歲開太平)‘을 계승하여 쇠퇴해가는 유교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새시대의 대동세계와 지구유학을 주장한 것이다. 원래 성선자체는 도덕적 평등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평등을 함축하고 있다. 다만 성선이 신분제 사회와 결합하면서 도덕적 평등을 긍정 하고 정치 사회적 불평등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에 오늘날은 더 이상 신분제 사회가 아니므로 유교부식회처럼  성선에 대해서 정치, 사회적 평등으로 확대해석하면  분명 인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근거를 확립할 수 있는 것이다.28)

 또한 일제강점기에 태동한 원불교 역시 새로운 유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

다.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은 일원상과 사은사요를 주장하여 통과 균에 바탕을 둔 새로운 우주적 질서와 사회관계를 주장하였다. 일원상의 인격은 인간과 만물의 통질서 속에 의사소통과 공론의 형성을 가능하게 정신적 원리이며, 사은사요는 은혜와 생명력이 가득한 대자유의 세상과 인간평등, 지식평등, 교육평등, 생활평등의 대평등의 세상을 실현하는 시민적 덕성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사 요의 실천은 보은하고 감사하는 사은을 떠날 수 없다.29) 즉 천지은은 공도 헌신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것이며, 부모은은 무자력자 보호법이며, 동포은은 자력을 양성하여야 자리이타가 가능하며, 법률은은 지자본위라야 민주주의 시대에 알맞게 실천할 수 있다. 지은보은(知恩報恩)의 감사 생활 속에 원만한 사회를 건설하는 개혁의식이 잠재해 있으며, 사요의 개혁의식 가운데에도 보은감사의 은에 대한 사상을 떠날 수 없다. 이를 유교적으로 말한다면  사은은 인(仁)이며, 사요는 의(義)이니, 인과 의가 쌍전해야 완전한 대도라고 할 수 있다.30)   

  결국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천지와 생민을 위해서 마음과 도를 세우고 전제주의와 계급주의 를 타파하려고 하였던 유교부식회나 사은사요의 추구를 통해서 천지 만물과 합일되고 공정한 가치 를 실현하고자 하였던 원불교의 정신은 오늘날과 같은 지구적 위기 속에서 유학을 어떻게 계승하 고 발전시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무분별한 자원개발과 환경 오염, 생태 파괴로 인간과 자연 모두 공멸의 위기 상황에서, 인간의 탐욕과 폭력에서 벗어나서, 더 이상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린다는 생각이 아니라, 지구에서 함께 존재하고 함께 살리는 존재로 대우하는 유학으로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공맹 이래 유학의 가치인 성선의 본연의 마음을 되찾아서, 통과 균의 질서를 중시해온 유학의 전통, 중 용과 장재의 「서명」에서 말한 천지와 인간이 일체가 되어 합일되는 우주적 공동체를 형성할 필요 가 있는 것이다. 지구를 구성하는 동물이나 식물, 자연물까지를 아울러 하나의 공생하는 질서, 통 의 이념과 균등한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인간 뿐만 아니라 천지와 합일되고 만물과 동반하는 지구 유학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8) 신정근, 「현대유학의 길, 탈중국화와 인권유학」, 동양철학40, 한국동양철학회, 2014, 424쪽.  

29) 김봉곤, 「원불교의 政敎同心과 시민적 덕성」,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84,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20, 52-59쪽. 

30) 李亨基, 方山文集, 153-154쪽. 

Ⅴ. 맺음말 

지금까지 조선유학에서 지구유학으로의 전환을 위한 시도로서 통과 균의 개념을 검토하였다. 통

은 천지, 자연만물, 인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며, 균은 상호 대등한 입장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게를 추구하는 것이다. 공맹의 사상은 성선설에 바탕을 둔 것으로 충분히 시대 적 사명을 다할 수 있으나, 유학의 인간중심적인 관점과 자연에 대한 차별적 시작으로 여전히 넘 어야 할 산이 많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서 유학은 동아시아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신장의 동력으로 재평가 되

고 있고, 개인과 개인, 국가와 국가를 넘어설 수 있는 인권유학의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다. ) 정치체제가 군주중심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바뀌었고, 경제, 사회제도의 변혁으로 인해 권 위주의적이고 불평등한 관계가 더 이상 용납되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교육의 의무화와 한글전용 정책으로 국민의식이 일체감을 회복하였다. 이러한 오늘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변화는 유학 에서도 지구유학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지구유학이 성립하기 위해서 몇 가지 제안을 함으로써 글을 맺고자 한다.  

첫째, 탈중국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종래의 유학은 중화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이러한 유학은 민

족자결주의 이후 더 이상 용납되기 어렵다. 대등한 국가간의 관계 속에서 국가와 민족의 주체성을 실현하는 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 

둘째, 유학은 개인의 보편적인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는 세계시민적 유학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

미 1860년대 출현한 동학이나 1920년대의 원불교 등에서 대중유학이 발전된 형태로 새로운 근대 종교가 태동하였다. 유학 역시 종래의 사농공상의 명분론이나 계급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서, 자유와 평등, 공론을 중시하는 세계시민적 유학으로 거듭나야 함을 시대적으로 요청하는 것이다. 셋째,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도모해야 한다. 동물이나 식물, 기타 자연물도 지구 구성원이 며, 공생관계이다. 사람이나 동물의 똥은 식물의 자원이며, 식물에 배출하는 산소는 지구공기를 정 화한다. 무분별한 자원 개발과 환경오염으로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를 멈추어야 한다. 유학에서는  대학에서는 자기를 척도로 삼아 남을 생각하고 살펴서 바른길로 향하는 혈구지도(絜矩之道)를 말 하고 있다. 이러한 혈구지도는 천하를 태평케하는 요소로서,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자연 물 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도리가 될 것이다. 넷째, 생명, 평화를 고취하는 유학으로 거듭나야 한다. 오늘날 개인주의와 이기심의 만연으로 타인의 생명을 경시하고, 국가간의 대결로 평화를 헤치는 경우가 많다. 공자는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의 생명을 중시하는 인(仁)의 도리를 중시하였고, 맹자는 다른 사람이나 동물의 고통이나 불행을 차마 어찌하지 못하는 마음인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강 조하였다. 이러한 성선을 강조한 공맹의 도리는 생명, 평화를 고취하는 유학으로 충분히 거듭날 자 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제안은 유학에서 중시해온 통과 균의 개념을 확대하여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제반 방면에서 다양한 방안이 모색될 수 있다. 본고는 일차적으로 그 러한 시도를 위한 시안으로 작성된 것이며,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서는 추후 검토를 하고자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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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지구정치학】지구정치학을 향하여 - 개인·국가·세계 너머의 시선과 사유 -김석근*

 10] 【지구정치학】지구정치학을 향하여 - 개인·국가·세계 너머의 시선과 사유 -김석근*

요약문   새로운 사유 흐름/운동으로서의 지구인문학적인 관점에서 구상해보게 되는 ‘지구정치학’은 

19세기 후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사회과학(Social Science)의 한 부문으로서의 정치학(Political 

Science), 그 중에서도 특히 국제정치(International Politics), 국제관계(International Relations), 세계정치(World 

Politics)와는 그 지향점과 뉘앙스를 달리한다. 지금까지의 정치학, 국제정치, 세계정치가 ‘개인’(Individual) 과 ‘국가’(State)[특히 민족, 국민국가(Nation State)], 그리고 ‘세계’(World)[국민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토대로 구축되어 있다면, 지구정치학은 그동안 배제/소외되었거나 주목받지 못했던 일차적으로 ‘그들 사이 와 너머’에 주목하고자 한다. 아울러 그들 모두를 감싸안는 전체(혹은 전지구적 규모)로서의 ‘지구(地球)’ 차원에서 ‘정치적인 것’들을, 나아가서는 ‘비정치적인 것’들까지 재음미해보려는 것이다. ‘비정 치적인 것들이 갖는 정치성’까지 읽어가자는 것이다. 이미 정치학 분야와 인접 관련 분야에서 기후변화(온 난화), 환경, 대기오염, 생태계 등에 주목하면서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 환경정치(학), 생태정치(학) 등 으로 범주화하려는 지적인 노력이 이루어져 왔다. 선구적인 작업들에 당연히(!) 경의를 표하면서도, 대체로 

그 논의는 ‘the Politics of *******’(예컨대 Climate Change, Environment, Ecology, etc.)라는 형태로 진행 되고 있다. 이 발표가 나아가고자 하는 바를 굳이 표현해본다면 ‘the Politics of Politics’라 할 수도 있겠

다. 비유하자면 예술(의) 철학, 음악(의) 철학 등에 대응해서 마치 ‘철학(의) 철학’을 제기하려는 것과도 같다. 요컨대 정치의 본질적인 핵심과 관련된 것이다. 역시 ‘지구’(地球)[Earth, Globe, Planet]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방법으로는 ‘안과 밖, 그리고 경계’에 주목하면서, 마치 우주인(宇宙人)처럼, 자유롭게 떠 다니면서 스케치해보고자 한다. 안으로는 익숙한 것들을 새삼 낯설게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마치 바깥에 서 있는 것처럼 무심하게 물음을 던져보고 싶기도 하다[예를 들자면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과 수많은 국제기구의 ‘지구성’(地球性) 정도 여하, 코로나19 바이러스와 WHO(World Health Organization)의 실제 역 할 같은 것들]. 이런 비행(飛行)을 통해서 지구인(地球人), 지구시민(地球市民)의 환기(喚起)와 더불어 가능하 다면 지구‘중생’(地球衆生) 나아가서는 ‘일체중생’(一切衆生)[뭇삶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하나라 는 인식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 보고자 한다. 

차 례

Ⅰ. 지구인문학과 새로운 사유 

Ⅱ. 지구와 인간 그리고 Anthropocene[人類世]

Ⅲ. 지구정치, 지구정치학, 지구공동체  

Ⅳ. AD TERRA POLITIKA: ‘지구정치학’을 향하여

“가까운 미래, 희망과 갈등이 공존하는 이 시대의 인류는 지적 생명체와 진보의 꿈을 찾아 태양계로 진출했다.”1) 

“우리가 지구를 잘 돌보지 못했소”2)

“정말 전쟁을 일으켰군. 이 미친놈들, 결국 지구를 날렸어! 저주한다! 모두 지옥

으로 꺼져!”3) 

Ⅰ. 지구인문학과 새로운 사유 

바야흐로 ‘지구인문학’(地球人文學)이 떠오르고 있다. 관심과 더불어 유행하고 있다고 해도 좋

겠다. ‘지구인문학 연구회’의 결성과 활발한 연구, 그리고 「경계를 넘는 지구학의 모색」이라는 부제를 가지고서 개최되는 「지구화 시대의 인문학」 학술대회가 일단의 증거가 된다고 하겠다. 영 어로는 ‘Globalogy, The Humanities in the Age of Globalization’으로 표기하고 있다. 

지구인문학과 더불어 새로운 용어/ 개념들 역시 출현하고 있다. 새로운 사유는 새로운 말들(용어)

을 필요로 하므로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 핵심을 이루는 단어는 역시 

(‘지구’와) ‘Globe’라 해야 할 것이다.4) 형태상으로 보자면 globe에서 global, globality, globalis m, globalization, globalogy 등이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한 단어의 생성 과정을 넘어서 있다. 논자에 따라서 같은 용어를 쓰고 있더라도 거기에 담기는 내용과 함의가 다르기는 

 

* 역사정치학자

1) 영화 「애드 애스트라(AD ASTRA)」[‘To The Star’(2019)].

2) “들리는가?” 북극에 혼자 남은 천문학자 어거스틴. 그는 지구로 귀환 중인 우주 비행사들과 교신하려 애쓴다. 그들에게 알려야 한다. 인류의 미래는 이제 지구에 없다고. 영화「미드나이트 스카이」[‘The 

Midnight Sky’(2020)]

3)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행성을 탈출하려던 테일러가 무너져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고는 분노하 면서 내뱉은 말[자유의 여신상 장면. 영화 「혹성탈출」[‘Planet of the Apes’(1968)]. 

   http://image.cine21.com/resize/cine21/still/2011/0623/M0020011_special__1[W680-].jpg]

4) 그런데 Globe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예를 들자면 ①)세계, ②지구, ③글로브, ④구(球), ⑤세상 등이다. https://en.dict.naver.com/#/search?range=all&query=globe

하지만 점차로 일종의 ‘개념’으로 자리잡아가는 것이다. 

어떤 자리에서 지구인문학 얘기를 했더니 불쑥 이런 질문이 나왔다. “그거 ‘지구과학’의 반 대말이냐?” 아무래도 익숙한 지구과학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지구과학’(Earth Science, 地球科

學)이란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온 것이며, 1955년부터 정규 고등학교의 교과목이기도 하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지구과학은 “지구를 중심으로 그 주변의 자연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 “종합적인 자연과학의 체계를 다루는 것으로서 이에는 지질학·기상학·천문학이 포함되며, 해양 학·지구물리학도 함께 취급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지학’(地學)으로 불리다가 1976년 지구과 학으로 바뀌게 되었다.  ) 지구인문학 전문가는 아니지만 한 발 들여놓고 있는 필자는 웃으면서 말 했다. 딱히 반대말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런대로 좋은 대비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공통분모로서 의 지구를 잠시 소거(消去)한다면 ‘과학’과 ‘인문학’의 대비 정도가 되는 셈이다.6)

지구과학이 다루는 범위가 아주 넓듯이[지구과학에는 지질학·기상학·천문학이 포함되며, 해양 학·지구물리학도 함께 취급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지구인문학의 범위 역시 다양하다고 하지 않 을 수 없다. 이번 학술대회에서도 실로 다양한 분야를 만날 수가 있다. ) 기존의 학문분과 이름 앞 에 ‘지구’를 붙인 경우도 있지만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분야도 있다. 

각 분야별로 지구**학이 안겨주는 신선함과 충격이 한결같을 수는 없겠다. 그 분야 사정에 따라 서 조금씩 다를 것이다. 그러면 정치학(Political Science) 분야에서 ‘지구정치학’은 어떨까. 아마 도 많은 정치학자들은 그게 뭐 그리 새로운 것이냐 하는 다소 시큰등한 반응을 보일는지도 모르겠 다. 왜냐하면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정치학은 19세기 후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사회 과학(Social Science)의 주요한 한 부문으로 존재해왔으며, 더욱이 현재 정치학 분야에는 국제정치

(國際政治, International Politics), 국제관계(國際關係, International Relations), 세계정치(世界政治, W orld Politics), 외교(外交, diplomacy) 분야, 그리고 관련된 과목들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UN, 국제 기구, 국제법, 국제사법재판소 등을 감안한다면야 … 이들 분야는 세계화 내지 지구화 시대의 도래 와 더불어 가장 활기를 띠고 있는 분야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 그와 더불어 다루는 소재에서도 새로운 요소를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기후, 오염, 환경, 생태, 핵, 에너지, 정보, 과학기 술 등. 

따라서 관건은, 지구인문학이란 관점에서 말하고자 하는 지구정치학이 이들 국제정치 등의 제 

분야와 어떤 점에서, 그리고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다. 차별성의 문제라 해도 좋겠다. 나아가서 는 새로운 사유로서의 지구정치학이 기존의 정치학에 비해서 갖는 새로움과 그 존재 의의는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효율적인 논의를 위해서 미리 조금 말해두자면 이러하다. 지금까지의 정치학, 국제정치, 세계정 치가 ‘개인’(Individual)과 ‘국가’(State)[특히 민족, 국민국가(Nation State)], 그리고 ‘세계’(Wo

rld)[국민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토대로 구축되어 있다면, 지구정치학은 그동안 배제/소외되었거나 주목받지 못했던 일차적으로 ‘그들 사이와 너머’에 주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들 모 두를 감싸 안는 전체(혹은 전지구적 규모)로서의 ‘지구(地球)’ 차원에서 ‘정치적인 것’들을, 나 아가서는 ‘비정치적인 것’들까지 재음미해보려는 것이다. ‘비정치적인 것들이 갖는 정치성’까 지 읽어가자는 것이다. 

Ⅱ. 지구와 인간 그리고 Anthropocene[人類世]

한자어로서의 지구(地球), 그 지구라는 단어를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무엇보다 지구라는 말에는 

무엇보다 ‘땅은 둥글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것은 동아시아의 오래된 인식 내지 세계관, ‘천 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로 되어 다”라는 명제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있 다. ) 그 점이 중요하다. 지구라는 말 자체는 오랫동안 이어져온 전통적인 천지관(天地觀: 천지코스 몰로지)과는 분명한 단절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래된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세례 없이는 불가 능한 인식이라 해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중국에 와서 서양의 과학

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전해진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이었다. 그러니까 16세기 이후에나 사용하게 된 말이다. 그가 편찬한건곤체의(乾坤體儀)(1605)에 “日球大於地球, 地球大於月球”[해(일구)는 지구보다 크고, 지구는 달(월구)보다 크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분명하게 ‘地球, 日球, 月球’라는 용어를 구사하고 있다. 이미 공처럼 둥근 존재로서의 지구, 그리고 그 지구는 해(일구)와 달(월구) 과 병칭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천체(天體) 내지 우주(宇宙) 안에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구의 안과 밖 그리고 경계가 동시적으로 상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 점은 전통적인 세 계관, 우주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좋겠다.

‘지구가 둥글다’[地圓]는 인식은 ) 자연스레 지구가 움직이며 그것도 스스로 돈다[地轉]는 주 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지전설(地轉說)은 김석문(金錫文, 1658~1735)과 홍대용(洪大容, 173

1~1783)에 이르러 명제가 되기에 이르렀다.11) 이에 대해서는 새삼 말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리고 특별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최한기(崔漢綺, 1803~1877)의지구전요(地球典要)(1857년)라 하겠다.12) 책 제목에 지구라는 단어를 분명하게 내세웠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지구를 태양의 둘레를 공전 하는 하나의 ‘행성’(行星, planet)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 글에서 구상하는 ‘지구정치학’과 관련해서 1)오랜 전통을 가진 천원지방(天圓地方)적인 인식에 대한 단절이 있었다는 것, 그 연장선 위에서 2)1857년에 간행된 최한기의 지구전 요(地球典要)를 하나의 의미 있는 시대적인 포인트(지표)로 삼고자 한다. 이 말은 동아시아의 전통 적인 사유 혹은 그 전환기에 등장했던 복합적인 사유에로의 단순한 회귀 혹은 무비판적인 미화(美化)를 경계하고자하기 때문이다.     

‘지구’ 자체를 하나의 단위로 바라보게 되면, 그와 더불어 그 경계와 바깥 역시 설정되지 않 을 수 없다. 우주에서 바라보면 지구는 ‘하나의 푸른색 대리석’(A Blue Marble)처럼 보인다고 한

다. 언제 우리는 지구를 느낄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은 웹툰, 영화, SF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스토리, 예컨대 우주 바깥세계(外界)에서 날렵한 우주선을 타고 무자비하게 지구를 침략해 오는 행위에 대해서 맞서는 ‘지구방어사령부’, 혹은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낯선 외계의 생명체를 

만나게 될 때[예컨대 오래 전에 제작된 영화 ‘E.T. - The Extra Terrestrial’ (1982) 같은 것]가 아

닐까 싶다.13) 개인적으로 SF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발표를 준비하면서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AD ASTRA’(2019)14), 죠지 클루니가 감독으로 주연까지 맡았던 영화 ‘The Midnig ht Sky’(2020)15) 등을 흥미롭게 보았다. 

영화 ‘The Midnight Sky’에서는 지구는 이미 재앙으로 종말을 맞게 되었으며 더 이상 지구에 서는 미래가 없다는 설정이다. 지구위험시대를 끝까지 밀고 나갔다고 해도 좋겠다. 북극에 마지막

 

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井蛙夏蟲之見’(우물안의 개구리나 여름 벌레와 같은 소견)이라 했다.

11) 김석문은 역학도해(易學圖解)(1697년)에서 지구가 구형이며 움직인다는 것을 주장했으며,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의산문답(毉山問答)(1766년)지구가 둥글 뿐만 아니라, 스스로 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12) 중국에서 전해진 해국도지 海國圖志·영환지략 瀛寰志略 등을 기초로 편집했다. 우주계의 천체와 기 상, 지구상의 자연 및 인문지리를 다루었다. 1719년(숙종 45)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신유한(申維翰)의 해 유록 海遊錄도 참조했다. 13권 7책. 필사본. 본문 12권과 지도 1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범례·목차에 이 어 천문·지구·조석, 대륙별 총설 및 국가별 지지, 해론(海論), 중서동이(中西同異), 전후기년(前後紀年), 양회교문변(洋回敎文辨), 역상도(曆象圖)와 제국도(諸國圖)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13)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에 강원도 4개 지역에서 미확인물체(UFO)가 나타났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 다.

14) 라틴어 ‘AD ASTRA’는 ‘To the Star’(별을 향하여)라는 뜻이다. 로이 맥브라이드 소령(브래드 피트)는 20년 전에 해왕성으로 생명체를 찾아 떠난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하기 위해 우주로, 해왕성 으로 떠난다. 아버지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목성, 토성을 지나 해왕성으로 가면서 그는 많은 생각 을 한다. 특히 아내 이브에 대해서. 아버지는 살아서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다. 같이 돌아가자는 권유에도 아버지는 생명줄을 끊고 우주 속 심연으로 사라진다. 영화가 전해주는 핵심 메시지는 별들은 아름답고 섬 세하지만 아직은 인류 이외의 지적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구로 돌아온 로이는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위해 살 것이라는 다짐을 한다. 그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떠났던 아내 이브를 다시 만난다.

15) 영화의 토대가 된 원본의 제목은 Good Morning, Midnight. 브룩스돌턴(Lily Brooks-Dalton)/이수영 역, 굿모 닝 미드나이트, 시공사, 2019년.

으로 남은 천문학자 오거스틴은 우주로 갔던 사람들의 지구 귀환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우 주선에 탄 사람들은, 그럼에도 굳이 지구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고, 지구의 식민지별[K-23, 목성] 로 떠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지구과학에 천문학이 포함되었던 것처럼, 지구인문학에도 천체와 우주 가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구인문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주인문학’이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는 우주 혹은 천체의 한 부분으로서의 지구라는 행성을 실제로 하나의 단위 혹은 전 체로 볼 수 있는가, 보고 있는가? 그리고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지구의식’

(地球意識, global consciousness), ‘지구성’(globality) 라는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다. (뒤에서 말하

겠지만) UN이나 수많은 국제기구들이 그 같은 지구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또 지구성을 구현해내고 있는가 식의 물음을 던져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지구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인식, 다시 말해서 ‘지구의 울부짖음’ )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구위험시대’  )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지구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인식(혹은 상상력)을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또 필요한 작업이 기도 하다. 

그런 작업 역시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①지구를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 즉 ‘Living Eart h’(살아있는 지구)로 보려는 시도 ), ②지구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지구공동체’]로 보아야 한다 는 주장 ), ③지구를 ‘성스러운 공동체’  ), 나아가서는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까지 말하게 되었다. 

필자로서는 지구를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보려는 시각에 대해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본다면, 즉각적으로 그 공동체의 구성원과 그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나아가 성스러운 공동체 내지 공경하는 신앙이라면 과 연 누가 그렇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제일 먼저 ‘인간’(Human Beings)을 떠올리면서 ‘지구인’(地球人), ‘지구시민’(地球市民), ‘행성시민’(行星市民)을 말할 수 있겠다. ) 그러면 같은 지구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 이외의 존재’(non-Human Beings)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 가, 인간과의 관계 설정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 ) 그들은 평등한가. 그렇다, 모든 만물을 평등 한가, 萬物平等? 그들 두 범주 사이에, 일부 학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인간들만의 그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지구 민주주의’(Global Democracy)가 가능할 것인가.  

이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다시 논의할 자리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그와 관련해서 나름대로 참고

가 될 만한 두 가지 측면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첫째는 the Anthropocene(the Age of Humanity), 즉 인류세(人類世) 또는 인신세(人新世)에 대한 논의라 하겠다.24) 인류세(人類世)는 인류가 지구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 시점 이후를 별개로 분리 한 비공식적인 지질 시대를 가리킨다. 2만 년 전부터 흔히 ‘홀로세’(Holocene)라 하지만, 그 시대 를 비공식적으로 다시 구분한 것이다.25) 최근 들어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인 만큼 아직 정설(定說) 은 없는 듯하지만,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하다고 하겠다.26) 요컨대 인간이라는 한 종이 지구 상의 다른 종들을 압도해서 지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는 점에서는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의미 있는 논의라 하겠다.27) 

덧붙여둔다면 ‘인류세’라는 새로운 시대가 이미 시작했음을 자각하고 지구 환경을 오래토록 지속시키기 위해서, 데이비드 그린스푼(David Grinspoon)은 ‘Terra Sapience’라는 용어/ 개념을 고안해내기도 했다. 말의 구조로 본다면 ‘Homo Sapience’에 대비되는 듯하기도 하다. 말 그대로 한다면 ‘현명한 지구’(Wise Earth)28) 정도가 되겠다. 거기에 걸맞는 인간으로의 변신(?)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고 해도 좋겠다.29) 

둘째로, ‘인간’(Human Beings)과 ‘인간 이외의 존재’(non-Human Beings) 사이의 관계 여하 와 관련해서, 필자가 떠올렸던 영화는 다름 아닌 ‘혹성탈출(惑星脫出)’[Planet of the Apes, 1968] 이었다.30) 프랑스 작가 피에르 불(Pierre Boulle, 1912~1994)의 SF 소설 La Planète des Singes(1963)

을 토대로 만든 것이다. 이후 1970년대에 이른바 혹성탈출 시리즈 영화가 만들어졌으며31), TV에서 

 

생’(一切衆生)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24) 인류세의 개념은 노벨 화학상 수상사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대중화시켰다. 그 기원을 산업혁명에서 찾기도 하고, 핵실험이 처음 실시된 1945년을 시작점으로 보기도 한다. 방사능 물질, 대기 중의 이산화탄 소, 플라스틱, 콘크리트 등이 대표적인 물질로 꼽힌다. 한 해 600억 마리가 소비되는 닭고기, 그 닭뼈를 인류세의 최대 지질학적 특징으로 꼽기도 한다. 

25) The Anthropocene is a proposed geological epoch dating from the commencement of significant human impact on Earth's geology and ecosystems, including, but not limited to, anthropogenic climate change.[https://en.wikipedia.org/wiki/Anthropocene] 

26) Steve Bradshaw, Anthropocene: The Human Epoch(2015) [다큐멘타리]  www.anthropocenethemovie.com; EBS 다큐 프라임에서 방영한 「인류세」(2019); 클라이브 해밀턴, 인류세(Anthropocene): 거대한 전환 앞에 선 인간과 지구 시스템, 정서진 옮김, 서울: 이상북스, 2018.

27) '인류세 ANTHROPOCENE_Save Our Planet', 이는 (재)대구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범어아트스트리트에서 2021 년 첫 기획 전시로 내세운 타이틀 이기도 하다. 2월 16일부터 4월 11일까지 개최. 내외뉴스통신

(http://www.nbnnews.co.kr) 

28) Terra는 흙, 땅, 대지 등의 뜻을 갖는다. 어원은 라틴어 terra(지구, 땅, 육지). SF에서 지구인을 뜻하는 Terra는 거기서 파생되었다. 

29) David Grinspoon, “Welcome to Terra Sapiens,” [Excerpted from the book Earth in Human Hands by David Grinspoon. Copyright © 2016 by David Grinspoon.] 그는 ‘mature Anthropocene’라는 표현도 쓰 고 있다. https://aeon.co/essays/enter-the-sapiezoic-a-new-aeon-of-self-aware-global-change 30) ‘행성탈출’이 바른 번역이라 한다. 일본에서는 ‘猿の惑星(원숭이의 혹성)’으로 번역되었다.

방영되기도 했다(1974년 등). 그러다 2001년 리메이크되었으며[Planet of the Apes(2001)], 2011년부 터 리부트(reboot)되어 인기를 끌었다.32) 

시리즈 전체를 통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역시 1968년 첫 작품이었다. 인간의 퇴화와 유인 원(원숭이)의 진화, 그리고 말을 하면서 인간을 지배하는 유인원의 위상 등은 아주 낯설고 흥미로 웠다. 1960년대 처음 등장한 ‘핵 공포’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게다가 마지막 장 면, 그 정체불명의 혹성(행성)이 알고 보니 다름아닌 지구였다는 설정은 충격적인 반전이었다. 테일 러는 무너진 ‘자유의 여신상’을 발견하고는 거침없이 분노를 내뱉는다. 디스토피아적인 극한 상 황을 통해서 지구를, 지구의 미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Ⅲ. 지구정치, 지구정치학, 지구공동체  

효율적인 논의를 위해서 우선 지구정치, 지구정치학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나온 사항들을 간략하

게 검토하고, 이어 그들을 토대로 이 글에서 구상하는 지구정치학에 대해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1) 지난 2002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가 편찬한 21세기 정치학대사전(Encyclopedia of politica l science)(서울: 아카데미아리서치, 2002)에는 ‘지구정치[global politics, 地球政治]’라는 항목이 나온다. 이 글의 관심사와 관련된 주요 부분만 살펴보기로 한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정치라고 하면 주권 국가 단위의 정치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였다. 전쟁 은 국가 간의 전쟁이며, 경제발전은 저개발국에서 선진공업국으로 라는 국가 단위의 발전이며, 민 주주의는 국가 내의 민주주의였다. 정치학은 따라서 국내정치를 축으로 구성되었다. … 지방정치는 국내정치의 하부 단위이며, 국제정치는 국내정치의 파생물로서의 상부 단위였다. 모두 국내정치를 기본으로 정치학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21세기가 됨에 따라 지구정치가 보다 중요한 단위로서 정치학을 구성하게 되었다. 몇 가지 의 요인이 그것에 공헌하였다. 군사기술 수준의 진보로 국가 안전보장에 이어 국제 안전보장, 지구 적 안전 보장, 공통 안전보장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졌다. … 경제가 1국 단위의 국민경제에서 국가 간의 국제경제 더 나아가 세계시장을 단위로 한 세계경제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국내정치를 축으로 한 견해에 이어 지구정치를 축으로 한 견해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 정치의 조직 원리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완만한 넓은 정의에 기초한 것이라고 해도 과반수의 국가에 있어서 공통가치, 공통규범이 일정의 현실이 된 것이다. 여기에 지구정치의 중요성이 증가하게 되었다. 지 구적 민주주의가 국가 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국경을 초월하여 비정부기구나 비정부 개입을 구성 원 소로 함으로써 지구정치로의 계기는 더욱 강화된다.”(강조는 인용자, 이하 마찬가지)

 

31) Planet of the Apes(1968), Beneath the Planet of the Apes(1970), Escape from the Planet of the Apes(1971), Conquest of the Planet of the Apes(1972), Battle for the Planet of the Apes(1973). 

32)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2011)], 「혹성탈출: 반격의 시작」[Dawn of the 

Planet of the Apes(2014)], 「혹성탈출: 종의 전쟁」[War for the Planet of the Apes(2017)]

종래 정치는 ‘주권 국가’ 단위의 정치가 핵심에 있었으며, 그것을 중심으로 그 하위 단계에 

있는 지방정치, 그리고 그 연장선 위에 있는 국제정치가 포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에 접어들면서 ‘지구정치’가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주요한 요인으로는 군사기술의 진보 로 인해 “국제 안전보장, 지구적 안전 보장, 공통 안전보장”이 부각되었다. ) 그런데 그것은 경 제적인 측면, 즉 국가경제를 넘어서는 세계경제가 두드러진 것에서도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국 경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혹은 넘어서는 ‘자본’의 실체와 움직임을 떠올리면 크게 틀리지 않을 듯 하다. 

“지구정치가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하다. 안전보장에 대해서는 국가 안전보장이 계 속 기본이라고 생각되었으며 지구 규모의 공통 안전보장을 구상하는 시점 그리고 지구상, 특히 많 은 제3세계 제국의 파탄국가라고 불리는 현상 등 무정부 또는 지속적인 혼란이 예상되는 시점이 있

다. 첫째는 웨스트팔리아적 시점에서 국가주권이 축이 되고 있다. 둘째는 필라델피아적 시점에서 국민주권이 축이 되고 있다.  국가는 없고 오히려 국민 개개인에게 주권이 있다는 생각으로 민주주 의국가는 그 원초적인 형태가 된다. 궁극적으로는 지구 민주주의로서 지구 단위의 개개인을 축으로 한 민주주의를 구상하는 시점이다. 셋째는 글로벌리제이션에 억제된 형태로 파탄국가, 파탄사회가 생성된다는 시점에서 주권이 국가에 대해서도 국민에 대해서도 상실된 것이라고 한다. 때로 반유토 피아적 시점이라고 한다. 그 귀결로서 지구상에 항상 무정부, 무조직 상태가 나타난다는 견해이다. … 통치에 대해서는 국가 단위의 민주주의, 권위주의, 기타의 통치형태가 공존하고 민족주의가 계 속 중요하다는 시점, 지구 시민을 궁극적으로 생각하는 시점 그리고 혼란과 분쟁이 항상 존재하는 속에서 종교, 인종, 언어 등의 대립이 극대화한다고 생각하는 시점이 있다.”(21세기 정치학대사전

)

사전에서는 국제정치와 지구정치라는 용어를 같이 구사하고 있다. 하지만 지구정치 논의를 보면 ‘국가주권’, ‘국민주권’, 그리고 ‘글로벌리제이션’으로 인해 주권이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것 등을 보면 역시 ‘국민국가’가 근간에 강하게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지구민 주주의’와 ‘지구시민’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다. 아무튼 여기서 말하는 지구정치는 국제정치와는 구별될는지 모르지만, 이 항목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세계정치’(World Politics)와 거의 겹쳐지는 듯 하다. 다시 말해서 인용문에서 ‘지구정치’를 ‘세계정치’로 바꾸어 놓더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해도 좋겠다.          

(2) 지구정치와 지구정치학에 대해서 정치학 분야에서, 그리고 한국의 국제정치학계에서도 주목 하고 해왔다고 하겠다. 그 흐름을 다 다룰 수는 없는 만큼, 구체적인 사례를 두엇 살펴보고자 한 다. 

①한국의 대표적인 국제정치학자 하영선 교수  )는 이미 ‘지구정치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바 있다. 21세기를 앞둔 세계의 정치, 경제, 과학 기술 등을 면밀하게 논의한 글들을 모아 탈근대 지 구정치학(나남, 1993)이라는 단독저서를 내놓았다. 그는 기존의 국제질서, 세계질서에 대응해서 ‘신국제질서’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나아가 그의 관심은 지구적 민족주의, 지구 민주주의, 탈근 대 지구문화, 지구환경, 페미니즘적 국제관계론 등에 미치고 있다. 1993년이란 시점에서 이미 ‘지 구정치학’이란 용어와 함께 경제, 과학, 기술, 환경, 페미니즘 등에 주목한 선구적인 업적이라 해 야 할 것이다.35)

국제정치학자로서 인문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국제정세 관련 칼럼 등을 통해서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그는 그 후에도 많은 책들을 내놓았지만, 거기에 ‘지구정치학’이란 용어를 다시 쓰지는 않는 듯하다. 반면 ‘세계정치’는 계속해서 쓰고 있다. 그가 공편(共編)한복합세계정치론: 전략과 원리 그리고 새로운 질서(한울아카데미, 2012), 그의 세계정치 강의 압축판이라 할 수 있는사랑의 세계정치: 전쟁과 평화(한울아카데미, 2019) 등이 나름 물증이 된다고 하겠다. 세계정치 강의에서 그는 ‘복합세계정치학’ ‘꿈의 세계정치학’ 등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다. 

② 독일의 학자 바이체크(Ernst Ulrich von Weizsäcker), 그는 1989년 내놓은 저서에 Erdpolitik[Wi 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라는 제목을 붙였다.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정치학자는 아니지만, 정치학자 보다 더 정치적, 정치학적인 감각을 지녔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그 제목을 영어로 번역하자면 ‘Earth Politics’가 되며, 실제로 그렇게 번역되었다(1994). 그런데 그 책에서 그는 앞 으로 다가올 세기는 ‘환경의 세기’(Jahrhundert der Umwelt)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 경제활동을 떠받쳐주고 있는 자연자원의 수탈이 머지 않아 바닥을 드러낼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환경독 재와 같은 강제적인 수단이 아니라 시장 메카니즘을 통한 ‘효율혁명’(Effizienzrevolution)을 제시 하고 있다. 전지구적인 차원에서의 환경 문제 제기와 해결책에 대한 사색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었는데, 흥미롭게도 그 제목을 ‘지구환경정치학’이라 붙였다. ) 우리말 번역자는 ‘환경’이란 단어를 넣어서, 그 초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정치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Richard von Weizsacker, 1920~2015)의 조카이기도 한 그는 독일 의 범국민적 환경보호 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구자원에 대한 광범위한 생태학적인 조 사와 분석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이다. 21세기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국민 모두가 환경의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는 인간과 지구의 정치학이라 해도 좋겠다. 그에 힘입어 독일에서는 ‘지구정치학’이 환경보호와 보존 운동의 일환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라 하겠다. ) ③ 영국과 미국,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공부하고 가르친 정치학자 드라이제크(John S. Dryz ek)는 1997년 옥스퍼드대학 출판부에서 The Politics Of The Earth: Environmental Discourses(Oxfor d Univ. Press, 1997)를 간행했다[2012년 제3판]. 직역하자면 ‘지구(의)정치학: 환경담론’ 정도가 될 것이다. 그 책 역시 우리말로 번역되었는데, 번역자는 ‘지구환경정치학 담론’이라는 제목을 붙였다.38) 다루고 있는 내용을 보면 주요한 환경 담론들의 기본 구조와 그 담론들의 역사, 논쟁점, 그리고 변화하는 모습들을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지구의 한계상황을 지적하면서 환경 문제 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논의를 전개해간다. 그리고는 지속가능성과 생태 근대화, 그리고 녹 색주의와 생태민주주의까지 언급하고 있다. 잘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드라이체크의 책과 바이체크의 책 번역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하겠다. 모두 ‘지구정치학’으로 직역하기 보다는 ‘환경정치학’이라는 측면에 더 비중을 두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시점에서 한국에서는 지구정치학은 아직은 낯설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면 깊은 곳에는 정치의 본질이라기보다는 환경에 대한 담론 분석과 비판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고 하겠다.    

④ 최근에 소개된 프랑스 사회학자,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저작 역시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하겠다.39) 이 책의 프랑스 원제는 Où atterrir?  직역하자면 ‘어디에 착륙할 것인가?’ 이다[그가 쓴 다른 책 제목은  Où suis-je?( ‘나는 어디에 있는가?’)] 짧지만 함축적이다. 그런데 영어 번역판의 경우 ‘Down to Earth: Politics in the New Climatic Regime’라는 제목을 붙였다.40) ‘the New Climatic Regime’이라는 구절이 시선을 끈다.41) 우리말 번역에서는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신기후체제의 정치’라는 제목을 붙였다.42) 역시 기후, 환경에 일차적인 초점 을 맞추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3) 이렇듯이 이미 정치학 분야와 인접 관련 분야에서 기후변화(온난화), 환경, 대기오염, 생태계 

 

맡아오면서 실용적인 생태학적 정책의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그 연구소를 막강한 시민단체로 키워냈다. 

38) 존 S. 드라이제크, 지구환경정치학 담론, 정승진 옮김 서울: 에코리브르, 2005. 

39) 브뤼노 라투르, 지구와 충돌하지 않고 착륙하는 방법: 신기후체제의 정치, 박범순 옮김, 서울: 이음, 

2021. 

40) Bruno Latour, Down to Earth: Politics in the New Climatic Regime, Polity Press, 2018. 

41)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역시 비슷한 인식을 보여준 바 있다. 앤서니 기든스, 기후변화의 정치학, 홍욱 희 옮김, 서울: 에코리브르, 2009. 원서 제목은 Politics of Climate Change. 

42) 그가 말하는 ‘신기후체제’(New Climatic Regime)는 기후 위기뿐만 아니라 점점 더 심화되는 불평등, 대 규모의 규제 완화, 악몽이 되어가는 세계화로 인해 지구에 각종 위기가 엄습하는 시대를 가리킨다. 따라 서 그에 걸맞는 정치적 도전이 필요하다고 한다. 세계나 국가를 향한 정치가 아니라 지구를 향하는 정치 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구는 더 이상 인간의 활동을 위해 무한한 자원을 공급하는 자원의 보고가 아니 다. 오히려 그 행성의 운명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행위자 중 하나라고 한다. “세계나 국가를 향한 정치 가 아니라 지구를 향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동의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개인’까지 포함해서 논의하고자 했다.

등에 주목하면서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 환경정치(학), 생태정치(학) 등으로 범주화하려는 지 적인 노력이 이루어져 왔다. ) 그같은 선구적인 작업들에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 그럼에도 불 구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서 비판적인 논평을 가해본다면 대부분의 논의들은 ‘the Politics of 

*******’(예컨대 Climate Change, Environment, Ecology, etc.)라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이 글에서 나아가고자 하는 바를 굳이 표현해본다면 ‘the Politics of Politics’라 할 수도 있겠 다. 비유하자면 예술(의) 철학, 음악(의) 철학, 정치(의) 철학 등에 대응해서 마치 ‘철학(의) 철학’ 을 제기하려는 것과도 같다. 요컨대 정치의 본질적인 핵심과 관련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구정 치학’이라는 용어는 같을지 모르지만 거기에 담기는 내용까지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19세기 이후 지금까지의 정치학, 국제정치, 세계정치가 ①‘개인’(Individual)과 ②‘국 가’(State)[특히 민족, 국민국가(Nation State)], 그리고 ③‘세계’(World)[국민국가들 사이의 관계] 를 토대로 구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말하는 지구정치학은 그동안 배제/소 외되었거나 주목받지 못했던 일차적으로 ‘그들 사이와 너머’에 주목하고자 한다. 아울러 그들 모두를 감싸 안는 전체(혹은 전지구적 규모)로서의 ‘지구(地球)’ 차원에서 ‘정치적인 것’들을, 나아가서는 ‘비정치적인 것’들까지 재음미해보려는 것이다. ‘비정치적인 것들이 갖는 정치성’ 까지 충분히 읽어가자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압축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국제화 → 세계화 → 지구화’ 순으로 등장했

지만, 그리고 지구인문학을 말하는 이 시점에서도 강력 강력한 단위는 역시 ②‘국가’라 해야 할 것이다. 그 국가는 기원을 따져보자면 서구 유럽정치사에서 일정한 단계에서 등장한 ‘국민국가’ (Nation State, 國民國家)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 그것은 ‘주권, 영토, 국민’을 요소로 하는 근 대국가이기도 했다. 서구 세계의 팽창과 더불어, 넓어진 근대세계시스템(the Modern World System) 안에서 국민국가는 ‘표준’이 되었으며 ), 그것은 비슷한 국민국가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 즉 

‘국제관계,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 그러니까 inter-states, inter-nations(i nternatrional)을 가르키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국가의 성립에는 ‘폭력’(violence)이 수반되 는 것이 보통이었다. ) 또한 그와 관련된 국가들 사이의 행위는 Diplomacy로 불리기도 했다. 국제 사회에서 국가 멤버십을 획득하지 못할 경우, 아무리 훌륭한 정치체제를 가졌다 할지라도 강력한 무력을 앞세운 서구의 식민지, 반식민지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출발점에서 이미 ‘서구 중 심주의’가 깔려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동아시아 사회에서 그런 국가, 국제사회 관념을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는 어려웠다. 세계관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19세기말 등장한 말들이 國家間交際 → 國際, 外國交際 → 外交 등이었다.49) 시기적으로 ‘국제’ 보다 늦게 등장한 ③‘세계’(世界, 

World)는 그런 국가들 전체(혹은 그 일부)를 가리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50) 단적으로 제2차 대전 이후에 등장한 ‘제3세계’라는 말도 그렇다. 흔히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제1, 2차 세계대전(World War), 국제연맹(國際聯盟), 국제연합(國際聯合), 을 들 수 있겠다. 지금도 국제법, 세계기구 운운 하 지만 결국은 개별 국가로 환원되어버리는 것이 단적으로 그렇다. 이는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에서 도 확인되고 있다. 단적으로 지구 전체를 커버하는 ‘지구의식’(Global Consciousness)이나 ‘지구 성’(Globality)이란 측면에서는 역시 미흡하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여기서 말하는 ‘지구’(地球, globe)는 그런 세계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풍긴다. 특히 방편으로 지구 바깥에서, 우주에서 바라보는 것을 통해서 하나의 ‘행성’(planet)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정치에서 지구 정치에로의 이행’이라 해도 좋겠다. 

    

그러면 ① ‘개인’(Individual)은 어떠한가. 흔히 간과하기 쉽지만 ‘개인’은 근대국가, 국민국 가의 출발점에 자리잡고 있다. 근대의 기원설화라 할 수 있는 ‘사회계약설’(Social Contract Theo ry)의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개인은 (현실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근대국가의 정치질서 를 창출해낸 작위(作爲)의 주체라는 것, 요컨대 국가의 ‘주권’(主權, Sovereignty)은 그로부터 창 출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고 선언한 나는 이미 한 사람(一人), 자 신(己)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그 때의 개인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간, 이 른바 ‘절대 개인’을 상정한다. 그들끼리 계약을 맺어 사회를, 국가를 만들어냈다는 식으로 이해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 정치사에서 갖는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51)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두운 부분도 분명히 따라붙고 있었다. 그것은 지극한 ‘개인 중심주의’, 그리고 ‘인간 중심주의’로 이어졌다. 인간의 ‘오만’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 교회, 공동체로 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상정된 것이다. 욕망의 긍정과 이기적인 인간, 유대를 모르는 인간, 전통과 

 

‘Ainu Mosir’(2020)도 재미있게 보았다. 

49) 그 후에 등장한 비슷한 구조를 갖는 말로는 interdisciplinary의 번역어로 자리 잡은 學際間을 들 수 있겠

다. 19세기말 식으로 말하자면 學問間交際를 줄인 말 정도가 될 것이다.

50) 물론 ‘世界’라는 한자어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三千大千世界’가 좋은 사례라 하겠 다.

51) 이에 대해서는 김석근, 「근대 한국의 ‘개인’ 개념 수용」, 하영선외,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9; 김석근, 「근대적 ‘개인’의 탄생과 그 주변: 독립신문을 통해서 본 ‘주 체’와 ‘작위’의 문제」, 한국정치학회․한국정치평론학회 연례학술대회 발표논문, 2004년 12월 3일 참조. 

신성함을 잃어버린 인간, 인간 이외의 존재들은 자기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 비쳐지기 시 작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 구상하는 ‘지구정치학’은 종래의 근대 정치학, 국제정치학의 요소들[개인, 국가, 세

계]의 의미를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엮어온 그물망에서 벗어난 측면들에 주목하면서, 미시적으로는 ‘정치’ (따라서 인간) 개념의 근본적인 재검토를 지향하고자 한다. 동시에 거시적 으로는 ‘지구’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와 지평을 확보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근대 이 후 지금까지 군림해온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고자 한다. 

그 대안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 현단계에서는 챠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가 말하는 ‘생명중심적(Zoecentric, non-anthropocentrism)’인 사고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 인간중심주의를 상대화시키는 Non-anthropocentr ism! 그리고 ‘전체로서의 지구’라는 차원에서는 역시 ‘지구의식’과 ‘지구성’을 갖춘 ‘지구 공동체’라는 인식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성스러운 공동체로서의 지구, 신앙 대상으로서의 지구 는 더 멀리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인간’과 어떤 ‘비인간 존재’가 지구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을까. 지구중생(地球衆生), 과연 그들은 서로 평등한가, 그리고 그들 사이의 민주 주의는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 앞으로 더 생각해가야 할 과제라 하겠다.   

      

Ⅳ. AD TERRA POLITIKA: ‘지구정치학’을 향하여

지금까지 논의해오는 과정에서 필자가 구상하는 ‘지구정치학’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지향하는가 하는 점은 대략 드러났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 조금 더 분명하게 정리해가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구상하는 ‘지구정치학’은, 적어도 한국에서의 지구정치학은 우선 ‘지구’라는 관 념, 다시 말해서 천원지방(天圓地方) 세계관을 넘어선 지구, 그리고 스스로 구르는[自轉] 지구라는 생각 위에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16세기 이후, 그리고 하나의 방편으로 최한기의 지구전요를 준거 지점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하다. 둘째 서구 유럽에 의해 주도된 근대세계, 그 리고 주요한 정치단위로서의 개인, 국가, 세계에 초점을 맞추는 근대적인 학문으로서의 정치학과 국제정치학의 의미와 성과를 결코 부인하지 않는다. 특히 국제정치학 분야의 경우 국가와 세계(국 가간 체계)로 포착되지 않는 새로운 현상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셋째 글로벌라이 제이션과 더불어 지구 전체를 감싸 안으려는 지적인 시도, 그리고 우주 내지 태양계라는 시야에서 바라보는 하나의 ‘행성’(Planet)이라는 시각과 움직임에 충분히 공감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

서 Terra Sapiens[Wise Earth]를 지향하고자 하며, 그런 거시적인 틀 안에서의 Terra Politika[Earth Politics]라 할 수도 있겠다. 그와 더불어 지구인, 지구시민, 행성시민, 지구중생, 나아가서는 일체중 생 등의 개념이 성립하게 된다.    

때문에 우리가 지구(地球)라고 할 경우, 크게 세 가지 차원을 설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Plane t, Globe, Earth. 논자에 따라서 지칭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어떤 차원에서 말하는 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실은 지구라는 용어는 그들 세 차원이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논의를 위한 방편으로 갈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1) Planet 차원, 이는 지구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선이라 해도 좋겠다. 우주 내지 태양계에 속 하는 하나의 행성으로 바라본다는 것. 해와 달, 수많은 별들과 대비되는 차원이다. 당연히 전지구 적 규모와 관점이 하나로 응집되어야 하겠지만, 아직은 미흡하기만 하다. 어느 별에선가 알 수 없 는 에일리언(Alien: 가공의 외계생명체)들이 지구를 쳐들어온다거나 하는 사태는, 아직까지는 닥쳐 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럴 경우, 태양계에서 지구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기구 혹은 존재가 있는

가. 과연 현재의 UN(United Nations)이나 국제기구, 국제법 등이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곧 ‘지구의식’(地球意識, Global Consciousness) ‘지구성’(地球性, Globality) 문제라 해도 좋겠다. 미지의 세계인 만큼 지적인 상상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 요컨대 지구를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Global Governance가 요망된다고 하겠다.  

(2) Globe 차원, 이는 전지구적 규모, 다시 말해서 지구 전체를 감싸안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Globalization을 하자는 것, 안으로 진정한 의미의 ‘지구성’(地球性, globality)을 확보해가는 것이 다. 그동안 소외/배제된 것들에 대한 섬세한 음미와 포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이유

로 주목받지 못한 지식(Knowledge), 정보(Information), 지혜(Wisdom)를 모으고 응집시켜갈 수 있을 때 비로소 Wise Earth[Terra Sapiens]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한다. 정치학적인 관점에서 말해본다면 개인, 국가, 세계라는 근대 정치학의 주요 단위들의 ‘사이와 너머’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본다면,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서구 중심주의’ ― 오 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그 뒷면이라 할 수 있겠다 ― 에서 벗어나 서구 이외의 지역에서 전해지 고 있는 지적인 유산과 자원에 대해서 열려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컨대 최근에 활발하게 논의되 고 있는 ‘인류세’(Anthropocene) 논의를 듣다보면 문득 전통시대 동아시아 사유체계를 환기(喚起)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구 유럽이 자신을 확장해서 세계의 ‘표 준’이 되면서 밀려나고 잊혀져온 동아시아, 이슬람권, 아프리카 등지의 오랫동안 축적된 지적인 사유와 세계관을 지구의 미래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열어가는 지적인 자원, 내지 참고자료로 삼아 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다음으로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한 걸음 물러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들, 즉 천지만물(天地萬物)을 한 번쯤은 상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들의 이기심과 욕망을 새삼 되돌아보아야 한 다는 것이다. 인간(Human Beings)은 생각하는 존재, 이성적인 인간이라는 근대 사회의 믿음은 그 이외의 나머지 생명체들(non-Human Beings)에 대해서 오로지 도구적인 존재, 다시 말해 인간을 위 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하겠다. 그로 인해 동물, 식물, 사물을 어떻게 이용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문제는 지구 공동체의 구성원, 그리고 그 구성원들 사이의 일체감 내지 공감대는 과연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큰 문제는 잠시 제쳐두기로 하자. 하지만 바야흐로 지구라는 같은 행 성 안에서 구성원의 일부로 살아가는 생명체[‘지구중생’(地球衆生)]라는 사실, 때로는 놀라운 것 으로 밝혀지는 그들의 지혜[예컨대 개미, 벌 등]도 우리 인간이 적절하게 참조한다면 Wise Earth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더 밀고 나가면 ‘일체중생’(一切衆生)[뭇삶들, 살아있는 모 든 생명체들]이란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 한다. ) 

(3) Earth 차원은 그야말로 종래 지구과학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거기서, 아니 더 정확하게는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이상 기후, 지구 온난화,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것, 해일 등,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른바 지구 위험시대가 온 것이다. EBS 다큐 프라임에서 방영한 「인류세」(2019) 를 한 번 보는 것만으로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닭들의 행성’ ‘플라스틱 화석’ 등은 실로 끔찍하기만 하다.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두고 싶은 것은 Heaven(하늘)에 대비되는 Earth(땅)이라는 측면이다. 풀어서 말한다면 하늘[천국]과 땅 혹은 이 세상[세속], 그리고 위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 보는 하늘 [천국]의 존재를 되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과 자유, 그리고 계약이라는 사유가, 인간이 지구 에 존재한 이후 꾸준히 이어져온 Spirituality(靈性), Holyness(神聖), Dignity(莊嚴) 같은 숭고한 정신 적인 가치를 밀어내버렸다. ) 그 빈자리를 민주주의(democracy)가 차지하게 되었고, 마침내 20세기 의 신화(神話)가 되었다. 민주주의가 갖는 의미와 가치를 결코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일 종의 레토릭으로 지나치게 남발, 남용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 

바야흐로 ‘정치’ 개념에 대해서 근본적인 전환을 담아내는 새로운 정치학, 지구정치학이 필요

한 시점이라 하겠다.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정치학에서는 인간을 ‘Zoon Politikon’(정치적 동물, Political Animal)로 간주해왔다. 인간은 폴리스(Polis)를, 정치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말 이기도 했다. 그 말 자체가 인간을 가리켰으며, 또한 인간이 아닌 존재와 구별해 주는 특징으로 여 겨졌다. 그렇다, 지금도 인간은 여전히 정치적 동물이다. 변함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또 ‘Te rra Zoon’[Terrestrial Animal]이기도 하다는 것을 덧붙여야 할 듯 하다. ‘지구[땅] 위에서 살아가 는 동물’이기도 하다는 것, 조금 더 부연하면 ‘지구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나아가야 하 는 동물’이기도 한 것이다. ) 진정한 의미의 지구정치학은, 그리고 지구정치학자는 종래의 국제정 치, 세계정치 연구 성과를 기꺼이 참조해가면서도 전지구적인 규모로서의 ‘지구’(地球) 차원에서 

‘정치적인 것’들을, 나아가서 ‘비정치적인 것들이 갖는 정치성’까지 섬세하게 읽어가야 할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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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https://doi.log/10.1111/dial.12375

 


9] 【지구인류학】지구위험 시대의 인류학적 사고 - 포스트휴먼의 재주술화와 생명의 기호학 -차은정*

 9] 【지구인류학】지구위험 시대의 인류학적 사고 - 포스트휴먼의 재주술화와 생명의 기호학 -차은정*

29)

요약문   이 발표문에서는 21세기 이후 인류학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사상적 흐름인 ‘존재론

적 전회(Ontological Turn)’의 연구사적 계보를 개략하고, 존재론적 전회의 주요 논제 중 하나인 애니미즘의 탈근대적 회복을 재주술화(reenchantment)의 관점에서 논한다. 이 관점은 생명을 유기체의 물질적 활동으로 환원하고 정신을 그것과 대립하는 인간사고로 규정해온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서,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생명 활동을 기호작용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호작용은 정신과 물질을 횡단하며 ‘살아있음’의 경계를 생물학적으로 구획하지 않는다. 

차 례

Ⅰ. ‘존재론적 전회’의 연구사적 계보 

Ⅱ.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

Ⅲ. 재주술화와 기호의 실재성

Ⅳ. 제언 및 과제

Ⅰ. ‘존재론적 전회’의 연구사적 계보 

21세기 들어 인류는 지구적인 위기상황을 더욱 노골적으로 목도하고 있다. ‘국익’을 명분으로 한 국지전쟁의 영속화,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와 대량실업 사태, 북극의 이상기온 현상과 북극곰의 멸종위기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환경파괴와 지구의 자정 능력 상실, 이민자, 난민, 성소수자, 여성 등의 약자들에 대한 혐오의 일상화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이 인간은 물론 지구상의 모

 

*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든 생명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이러한 문제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이제는 지엽적인 자구책으로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음을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으며, 근 대의 사고방식 자체에까지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인류학에서 서구중심의 근대사상에 대한 비판은 레비스트로스 이래로 핵심적인 논제로 자리 잡

아 왔다. 일찍이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분야를 개척한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근대유럽의 지식 및 제도가 과학기술의 보편성을 선취함으로써 “서양인들에게만 독점적 으로 자연에의 접근법을 부여하고” 자기 이외의 “타자들은 오로지 과학적 사고를 하거나 근대적 혹은 서구적이 되어야만” ) 대상화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 생태 인 류학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필리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는 서구가 정신과 물질, 마음과 신 체, 문화와 자연, 주체와 객체 등으로 사고의 영역을 이원화하고 자연을 객체화함으로써 인식론적 인 특권을 누려왔음을 논증한다. 그는 “서양 문화에 보증된 인식론적인 특권, 즉 자신이 규정한 자연으로부터 다른 모든 문화를 측정하는 암묵적인 기준이 제시되는 유일한 문화라는 특권”이 다 양한 곳에서 “환경의 특징과 그 환경에 대한 실천적인 관여의 특정 형식” )을 단지 인식의 문제 로 제한해왔다고 말한다. 이들에 따르면, 근대 지식이 서구중심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구 자신이 자연이라는 관념을 만들었으면서도 ‘절대적인 소여’로 간주하고 자연에 대한 접근방법론 으로서 과학에 우위를 두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을 주체와 객체로 분절하고 그사이의 관계와 실 천을 주체에 의한 인식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인식의 주체, 곧 서구에 지식의 패권적 지위를 보 증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금의 지구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과제가 인식 의 문제에서 관계와 실천의 문제로 되돌아가야 하며, 바로 인류학에서는 ‘존재론적 전회’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전환을 기획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존재론적 전회란 서구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 을 지양하고 미래 인류의 대안적인 철학을 모색하는 학문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학문 운동이 인류학계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유는 무엇보다 인류학이 지난 20세기 서구중

심의 사고방식에 끊임없이 저항해왔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구 출신의 학자가 비서구를 서구의 시선으로 그려낸다’라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인류학은 그 어느 학문분과보다도 서 구중심주의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1980년대를 전후하여 인류학계에 유입되어 크게 유행한 포스 트모더니즘─대표적으로 조지 마커스의 ‘문화비평으로서의 인류학’을 들 수 있다.─과 포스트콜 로니얼리즘─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피식민자의 양가성으로 발전시킨 분과학문도 인류학이었다.─에 대해서도 서 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그리하여 에두아르도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Eduardo Viveiros de Castro)는 2014년 메릴린 스트 래선(Marilyn Strathern) 연례강연에 헌정한 논문(「누가 존재론적 늑대를 두려워하는가?(Who is Afra id of the Ontological Wolf?)」)에서 존재론적 전회의 연구사적 계기를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정리한

다. 첫 번째가 표상의 위기이다. 카스트루는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민족지학에서 주체(subject)와 객체(object)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한편으로는 사람과 사물(혹은 인간과 비인 간) 사이에,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와 실재(혹은 개념과 대상) 사이에 전제된 인식론적 틀이 허물어 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당시 인류학계가 처한 이론적 곤경에서 빠져나와 사고의 

도약을 이뤄낸 것이 스트래선의 증여의 젠더 The Gender of the Gift(1988)라고 말한다. 카스트 루에 따르면, 스트래선은 이 책에서 사회과학의 개념용어들(생산, 젠더, 권력, 부 등)을 사용하지 않 고서도 멜라네시아의 증여론을 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즉 멜라네시아에서 교환은 ‘객체적 인’ 경제적 상호작용이 아닌 ‘주체적인’ 퍼스펙티브의 전환이며, 외부자인 인류학자의 민족지 적 연구란 그러한 퍼스펙티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이 ‘퍼스펙티브의 상호전환’이라는 주 제는 그로부터 3년 후에 출간된 부분적인 연결 Partial Connection(1991)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 며 존재론적 전회의 이론적 발판을 마련한다.

다음으로 두 번째 계기는 과학기술학의 발흥이다. 브뤼노 라투르의 ‘실험실 민족지’는 1977년 부터 2년간 ‘실험실’이라는 근대과학의 현장을 ‘오지’로 간주하고 그 안에서 이뤄지는 연구자 들의 행위를 ‘원주민’의 낯선 문화를 대하듯이 관찰했다. ) 그 결과 그는 과학의 탈정치적 중립 성이 근대의 정치적 기획임을 밝혀내었다. 다시 말해 근대가 조장한 과학과 비과학의 대립은 과학 이라는 근대성에 포섭되지 않는 비서구의 타자들을 근대 바깥으로 밀어내는 ‘모델’에 다름 아니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자연)과 정치(사회) 간의 구획은 또 다른 더 큰 구획, 즉 ‘우리’와 ‘그들’, 서구와 비서구, 인간과 비인간 간의 구획으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라투르는 과학과 비과 학의 구획을 폐기하기보다 그러한 구획에 의한 무수한 실천들을 다중화하고 대칭화한다. 이로써 비서구의 타자들은 자연을 잘못 표상하는 비과학적인 문화의 운반자가 아닐뿐더러 그 대안이기를 주장할 필요도 없다. 마지막 계기는 21세기 인류가 당면한 지구적 위기상황이 만든 ‘시대정신(Zeitgeist)’과 공명한 다. 그것은 생태적 위기와 그와 변증법적으로 얽혀있는 경제적 위기를 넘어서려는 실천에 호응한

다. 인간중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세계를 종말로 이끄는지 모른다는 우려가 학문적인 가 능성으로 검토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례로 인간에 의한 환경파괴가 지구 행성에 돌이킬 수 없는 기후 지질학적 변형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지구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지질시대에 접어들 날 도 머지않았다는 의미에서 현세를 충적세 등과 같은 개념 수준의 ‘인류세(anthropocene)’로 칭해 야 한다는 논의가 지리학계를 중심으로 확산하였다. 또 프랑스의 사변적 실재론자인 퀑탱 메이야 수(Quentin Meillassoux)는 ‘선조이전성(l’ancestralit)’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반칸트주의의 가능성 을 탐색했다. ) 

이 의미에서 존재론적 전회는 일종의 ‘인류 재난의 경보장치’이다. 카스트루가 아메리카 원주 민의 존재론을 이론화한 ‘다자연주의(multinaturalism)’와 ‘퍼스펙티브주의(perspectivism)’는 생 태적 파국에 대응하는 사고장치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는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The Inconstan

cy of the Indian Soul(1992년)에서 16세기에 이미 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재론이 유럽의 사고방식에 내재한 세계종말의 위험성을 간파했음을 당시 유럽 선교사와 아마존 원주민의 만남의 순간을 통해 밝혀내었다. 요컨대 존재론적 전회는 “현상을 사물 그 자체와 분리하는 중대한 노모스의 소진, 자 연과학들과 문화과학들 간의 노동의 위계적인 구분의 파열, 나아가 (이론적인) 순수이성과 (도덕적

인) 실천이성 간의 균열.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단 하나의) 근대적인 존재론―17세기의 과학 혁명이 만든 존재론―이 20세기 초의 과학 혁명에 의해 쓸모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 비 참한 결과로 끝날 것임” )을 자각하게 하는 인류학적 기획이다. 

이 기획은 마틴 홀브라드(Martin Holbraad)를 위시한 영국 사회인류학의 케임브리지 소장학파에 

의해 명시화된다. 홀브라드와 그의 동료들은 카스트루와의 협업의 성과물로서 2006년 사물을 통 해 생각하기 Thinking Through Things를 출간하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존재론적 전회를 21세기 인 류학의 핵심적인 아젠다로 선언한다. 인류학계에서 ‘존재론(ontology)’이라는 용어는 어빙 할로웰

(Irving Hallowell)의 1960년 논문 「오지브와 존재론, 행위, 그리고 세계관(Ojibwa Ontology, Behavior, and World View)」에서 중요하게 언급했고, 그 외 과학기술학 관련 논문에서 종종 사용되어왔다. 그 러나 홀브라드 등이 말했듯이, 1980대와 90년대에 존재론을 둘러싼 연구작업들이 당시 포스트모던 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영미 인류학계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8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사회인류학 분과에서 진행한 카스트루의 <아메리카 원주민의 코스몰로지(Amerindian Cosmo logy)>라는 특별연속강연에 참여한 학생들이 후에 괄목할만한 연구자로 성장하여 연구그룹을 형성 하면서 존재론적 전회의 진지를 구축하고 비로소 인류학의 지분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 그룹은 지

금까지도 ‘조용한 혁명(A quiet revolution)’의 중심에서 그 흐름을 이끌고 있다. ) 

이제 서구와 비서구를 분절하고 비서구를 통해 서구 자신을 기술해온 20세기 인류학은 21세기에 

이르러 완전히 새로운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21세기 인류학에서는 ‘서구와 비서구’라는 관계항 이 더 이상 이론적으로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서구중심의 근대적인 사고방 식이 수명을 다했음을 보여주는 시대적인 징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의 모든 지역을 두루 섭 렵한 인류학의 학문적 역량이 ‘탈-비서구’라는 새로운 지식의 장에 들어섰음을 시사한다. 카스 트루에 따르면, 이러한 ‘탈-비서구’는 ‘안티나르시시즘’과 ‘사고의 탈식민화’를 경유한다. ) (비서구의) ‘타자’는 (서구의) ‘자아’의 표상―인식론적인 대상―이 아니다. ‘타자’는 생성되 는 것이며, 그렇게 생성되는 존재는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동물들, 죽은 자들, 영들, 사물들까지도 저마다의 보편적인 세계―자연―속에서 누군가의 ‘타자’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타자의 학문’이란 단 하나의 갇힌 세계에 그러한 존재들을 표상으로 얽어매는 것이 아 니라 무한히 열려 있는 세계들―자연들―에 제각기 살아가는 존재들의 퍼스펙티브를 횡단하는 길 을 모색하는 것이다. 

 

Ⅱ.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타자의 지위에서 본격적으로 탐색한 민족지적 연구로는 에두아르도 콘(Ed

uardo Kohn)의 숲은 생각한다를 들 수 있다. 콘은 2013년 이 책을 출간하기 전까지 인류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2002년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이 책이 나오기까 지 10여 년간 단 네 편의 논문만을 제출했는데, 그중 2007년 논문 「개는 어떻게 꿈꾸는가(How Dog s Dream?: Amazonian Natures and the Politics of Transspecies Engagement)」외에는 주목받지 못했 다. 그런데 그의 첫 단독저서인 숲은 생각한다로 그는 존재론적 전회의 또 다른 축으로 급부상 하게 된다. 

실은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의 남다른 이력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아마존 숲에서 1,100개 이상의 

식물표본과 그 외에 400개 이상의 무척추동물표본, 90개 이상의 파충류 표본, 60여 개의 포유류 표 본을 수집해서 에콰도르의 국립식물원과 동물학박물관에 기증할 정도로 다종다양한 생물종의 생태 에 누구보다도 박식한 전문가이기도 하다. 이처럼 아마존에 대한 그의 민족지적 관심은 인간에만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생태학적 전문지식과 연구 활동이 존재론적 전회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할 만큼의 

힘을 발휘하게 한 이론적 토대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아마존의 생태계를 살아있는 기호들 의 장으로 구축하게 한 찰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의 기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찰스 퍼스는 반데카르트주의자로서 데카르트에 기초한 근대철학의 사상적 전제와 문 제설정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사고란 ‘내적인 관념의 지각’이 아니라 ‘기호 혹은 언어를 연쇄 적으로 창출하는 끝없는 추론 과정에의 참여’로 규정함으로써 실천―‘프라그마(pragma)’―에 의한 진리추구의 방법론으로서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을 수립했다. 퍼스는 인간의 사고란 무한 히 이어지는 기호의 연쇄 과정이며 이 과정은 감각에 매개되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세계와 단절된 코기토로서의 ‘나’에 이르는 보편적 회의주의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에 불과하다고 말한 다. ) 콘은 이러한 퍼스의 비이원론적 기호학을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의 ‘사고’에까지 확대 적 용한다. 퍼스의 기호학이 ‘해석체(interpretant)’를 인간에 한정한 것은 아니지만 숲은 생각한다 에서만큼 비인간의 풍부한 사례들로 논증하지는 않았다.

콘은 에콰도르 동부에 위치한 아마존의 아빌라 숲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부류의 생명체들의 기호

과정을 ‘자기들의 생태계(ecology of selves)’로 엮어놓는다. 여기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생명체까지 끊임없이 기호를 주고받는 ‘자기들(selves)’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혹은 정말 로 그렇다는 것을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콘은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 선 기호를 인간적인 것 너머로 확장한다. 퍼스가 기호를 아이콘(icon), 인덱스(index), 상징(symbol) 의 세 부류로 나누고 규약 혹은 관습에 의한 인간의 언어를 상징으로 정의했듯이 언어는 기호의 한 부분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언어만이 기호가 아니고, 기호는 모든 생명체와 함께한다. 가령 닮 음의 기호인 아이콘은 비인간 생명체의 기호이기도 하다. 아마존의 대벌레가 주변 식물과 구별되 지 않을 정도로 보호색을 띠는 것은 아이콘의 일종이다. 또 진드기에게 사슴이든 인간이든 낙산(bu tyric acid)을 풍기는 것이라면 다 같은 항온동물로 표상되는 것은 아이콘의 기호작용에 의해서다. 지시기호인 인덱스의 경우, 아마존의 흰털원숭이가 자신이 올라앉은 나무의 흔들림을 그다음에 일 어날 어떤 위험의 신호로 해석한다면 나무의 흔들림은 원숭이에게 위험을 가리키는 인덱스가 된 다. 이렇듯 대벌레, 진드기, 흰털원숭이 또한 기호의 해석체가 될 수 있다.

주의할 점은 이 모든 부류의 기호가 ‘부재(absence)’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아이콘은 직관적으

로는 닮음의 기호이지만, 그것의 기호작용은 닮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닮지 않음의 부재에 의한 것이다. 진드기에게 사슴이 인간의 아이콘인 것은 사슴과 인간의 차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인덱 스가 현재 부재하는 미래의 사태 혹은 사건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인덱스의 기호작용 또한 부재를 포함한다. 흰털원숭이에게 나무의 흔들림은 그 후에 일어날 포식자의 공격이 현재 부재하기에 위 험의 인덱스일 수 있다. 자의적인 상징 표상인 언어 또한 부재로부터 그 의미가 만들어진다. 수많 은 음운의 부재 덕분에 발화되는 음운들에 의해, 대상의 물리적인 부재에 의해, 현재 부재한 미래 까지도 표상한다는 것에 의해 비로소 언어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부재는 생명 활동에 필 수적이다. 가령 대벌레가 아마존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주변 식물과 덜 구별되어 잡아먹힌 자 신의 조상들 덕분이다. 즉 주변 식물과 구별되지 않는 대벌레의 보호색이라는 기호가 조상들의 부 재를 표상하기에 대벌레는 살아남았고, 흰털원숭이는 나무의 흔들림을 위험의 인덱스로 해석할 수 있었기에 살아남았다.

이에 따라 ‘자기들’의 생명 활동은 생리작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든 비인간이 든 단수의 개체이든 복수의 집합체이든 “무언가를 어떤 측면이나 능력에서 대신해 누군가에게 무 언가를 나타내는”(CP 2.228) 기호의 네트워크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아마존의 가 위개미들은 일 년에 한 번 교미를 위해 각자 개미집을 떠나 일제히 이합집산한다. 이때 개미를 잡 아먹으려는 박쥐와 새는 개미가 날아오르기를 기다리고, 개미는 박쥐와 새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밤과 낮의 틈새에서 날아오를 적당한 타이밍을 노린다. 아마존의 원주민 또한 개미를 잡아먹 기 위해 날아오르는 개미들을 향해 ‘엄마의 부름’으로 들리도록 휘파람을 불어 개미들이 자기 쪽으로 모여들게 한다. 개미, 박쥐, 새, 인간 모두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서로의 기호를 알아듣고자 애쓰고 또 서로에게 기호를 전달하고자 애쓴다. 이처럼 자기들의 생태계란 농밀하게 직조되는 기 호의 네트워크 그 자체이며, 이 속에서 생명은 기호적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자기가 또 다른 자기 의 기호를 알아듣지 못하면 곧 죽음에 이른다. 자기는 또 다른 자기의 기호를 알아듣기 위해 또 다른 자기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아마존에서 인간이 재규어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재규어 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봐야 하는 것처럼, 기호적인 생명 활동은 때로 종의 경계를 넘어 기호의 수신자와 발신자를 반전시킨다. 이것이 아마존 숲에서 인간-재규어와 같은 변신(transmutation)이 넘쳐나는 이유이다.

이러한 자기들의 생태학에서 ‘다자연주의(multinaturalism)’는 기호적으로 전향한다. 다자연주의 를 맨 먼저 제기한 카스트루는 모든 존재가 각각의 보편적인 자연─“육체에 각인된 기질의 산 물”─속에서 ‘나’의 퍼스펙티브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그것들은 “자기 음식을 인 간의 음식처럼 지각하고(재규어는 피를 마니옥 술로 보고, 검은 독수리는 부패한 고기에 들끓는 구 더기를 구운 물고기로 본다), 신체적인 특성들(가죽, 날개, 발톱, 주둥이 등)을 장신구나 문화적인 도구로 본다. 그것들의 사회시스템은 인간적인 제도에 따르는 방식(추장, 샤먼, 반족, 의례 등)으로 조직된다.” ) 여기서 ‘나’의 퍼스펙티브는 또 다른 ‘나’에게 부분적으로만 ‘타자’로 생성될 뿐이며, ‘타자’는 ‘나’의 퍼스펙티브로 파악되지 못한 나머지다. 

그런데 콘은 ‘나’의 퍼스펙티브가 신체로 환원되지 않을뿐더러 기호작용을 통해 또 다른 ‘나’의 퍼스펙티브와 교차 가능하다고 말한다. 허수아비가 옥수수밭을 해치는 흰눈잉꼬를 내쫓 기 위해서는 그것이 인간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와 상관없이 흰눈잉꼬에게 맹수로 보여야 한다. 실 제로 인간은 그렇게 허수아비를 제작해왔다. 흰눈잉꼬와 다른 신체를 가진 인간이 흰눈잉꼬의 퍼 스펙티브를 알 수 있는 것은 기호의 네트워크에서 생명 활동을 전개해왔기 때문이다. 

콘의 숲은 생각한다는 아마존 숲에서 펼쳐지는 종들 사이의 의사소통 방식을 세밀하게 묘사하

면서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자기들의 생명 활동을 기호적으로 구성함으로써 비인간도 사고하는 존재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었다. 이를 통해 근대를 떠받쳐온 인간 개념의 독점성 및 특권 성을 해체하고 비인간을 인간과 동등한 인류학적 지위로 격상했다. 콘은 ‘타자’로서 충분한 자 격이 있는 비인간이 어떻게 인간과 상호 횡단하는지를 논파했다. 그런데 생명체의 기호작용은 또 다른 차원에서 인류학적인 의의를 갖는다. 그것은 근대에 의해 초자연의 영역으로 밀려난 주술화 의 세계를 복원한다는 것이다.

Ⅲ. 재주술화와 기호의 실재성

19세기 이후 과학적 합리주의의 효과로서 전개된 “세계의 탈주술화”(Max Weber 1917)는 근대

의 지식 및 믿음체계에서 토테미즘,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의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향력을 제거하 였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프레데릭 켁(Frédéric Keck)에 의하면, 이것은 20세기 근대학문의 어떤 난 제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곧 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간의 모순을 불러일으킨 것인데, 이 모순 은 오귀스트 콩트에서 에밀 뒤르켐, 그리고 마르크 블로크의 아날학파에 이르기까지 20세기 프랑 스 사회철학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논제로 표출되었다. 즉 프랑스의 사회철학자들은 ‘심성’이 어 떻게 사회적 실천에서 유효하면서도 그것과 모순적인 긴장 관계에 놓이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켁은 이 논제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이데올로기로서 주제화되었고 미셸 푸코에 이르러서는 감 시 장치의 역사로 이행하면서 점차 주체성에 대한 고찰로 향해갔다고 말한다. 그런데 켁에 의하면, 푸코조차도 감시 장치의 내부로 이동하는 ‘심성’의 방식과 그 구조적 효과로서 주체의 형태를 해명하지는 못했다. 

켁은 여기서 레비-브륄의 논의를 끌어와 감시 장치와 ‘심성’의 관계방식을 규명하고자 한다. ‘감시’는 전쟁이나 재해와 같은 외부의 위협에 대한 일종의 반응으로서 ‘관리사회’라고 하는 세계와의 관계방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감시’를 둘러싸고 표출되는 심적 상 태는 레비-브뢸이 논한 ‘원시심성’의 ‘초자연적인 것의 지각’에 상응한다. ‘감시’라는 훈육 장치는 매우 근대적인 시스템의 일부이지만, 그것의 작동방식은 천재지변처럼 뜻하지 않은 위협에 대한 전근대적인 지각양식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위협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 를 지배한다는 본래적인 두려움을 유발시키며 그에 대처하는 ‘원시심성’을 발동시킨다. )  

레비-브뢸은 보이지 않는 초자연의 영역을 자연적인 인과성으로 포섭하는 과정으로서 ‘원시

인’의 신화와 제의를 논했다. 여기서 신화와 제의는 신비적이고 직접적이면서도 심적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그러한 심적 일관성은 신화와 제의의 논리를 발휘시키는 ‘참여’에 의해 보증된다. )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들로 가시화하는 레비-브뢸의 ‘참여의 원리(principe de participatio n)’는 레비스트로스에 이르러 토테미즘의 ‘야생의 사고’로 변증법적으로 발전된다. ) 레비스트 로스는 ‘야생의 사고’가 “레비브뢸의 견해와는 반대로 감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 성적 판단에 의해서 움직이며 혼동과 참여에 의해서가 아니라 변별과 대립의 도움으로 기능하는 것”이라며 “양화된 사고(pensée quantifie)”임을 주장한다.13) 레비브뢸이 신화와 제의에의 ‘참 여’를 통해 가시화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영역을 ‘원시심성’으로서 제기했다면, 레비스트로 스는 그것을 ‘차가운’ 이성의 논리로 개념화했다. 

콘은 자기들의 삶 속에서 이 보이지 않는 영역이 보이는 영역과 교차됨을 보이고 그 교차의 논 리를 ‘형식’(form)으로 개념 규정한다. 앞서 논한 퍼스의 기호학을 다시금 상기해보면, 아이콘으 로부터 인덱스가 창발하고 인덱스로부터 상징이 창발하며 그와 더불어 기호의 일반성 또한 창발한 다. 콘은 이 창발되는 기호의 일반성에서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이 기호적으로 교차한다 고 주장한다. 일상에서 단속적으로 나타나는 몽상이나 망상 속에서 숲의 영적인 주재자와 살아있 는 인간이 교차하고, 죽은 자와 산 자가 교차하며, 역사와 신화가 교차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호의 일반성에 의해서다. 그리고 기호가 실재한다면, 기호를 배치하는 가능성의 제약(보이는 영역과 보 이지 않는 영역의 기호적인 교차)으로서의 형식 또한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 자체 는 숨을 쉬지 않지만, 환경 세계의 자기-조직화의 계층적인 논리를 발생시키며 일정한 자기-조직 화의 패턴화를 창출한다. 

이 형식의 자기-조직화는 인간의 세계와 비인간의 세계를 총괄적으로 관통한다. 형식은 생명을 

넘어 창발하며 계층적으로 무한히 증폭된다. 물론 이 형식의 계층적 확산은 인간세계의 도덕적 가 치와 무관하다. 형식은 인간적인 영역에서는 역사의 우연한 산물인 것처럼 나타나지만 그 너머에 서는 신체들과 역사들의 우연성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죽은 자 와 숲의 영까지도 모든 부류의 기호적인 존재들은 도덕적으로 위계화되지 않으며 무도덕적인 형식 으로 수렴된다. 이를테면 아마존의 샤먼이 상류에서 하류로 아마존의 강 길을 따라 수련 여행을 떠나는 것은 “다양하게 중첩된 형식들을 통합하는” ) 계층적 논리를 밟아감으로써 더 높은 수준 의 창발적인 영역─숲의 영적인 주재자들이 속하는 영역─에 이르기 위한 것이지 인간적인 도덕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숲의 영적인 주재자의 영역에서 역사의 시간은 형식에 의해 동결된다. ‘언제나 이 미’라는 무시간적인 영역의 내부에서는 인간적인 역사의 선형적 인과관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 다. 이 영역의 내부에서 신체의 생물학적인 죽음을 투과한 죽은 자들 또한 숲의 영들과 함께 영원 히 살아갈 수 있다. 죽은 자들과 영들은 선형적인 역사의 ‘지금 이 순간’ 부재하기에 ‘우리’ 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기호적인 실재에서 그들은 살아있다. 인간과 비인간이 어우러져 살아 가는 자기들의 생태계, 죽은 자들과 영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숲의 보이지 않는 세계, 강과 땅, 경 제와 정치 등의 다양한 영역들은 기호의 세계에서 실재한다. 

 

Ⅳ. 제언 및 과제

지금까지 존재론적 전회의 연구사적 배경과 주요 문제의식 그리고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 한다를 중심으로 생명 활동을 기호작용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생명-기호론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

다. 그것은 21세기 인류학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형이상학의 출현과 보이지 않는 주술화의 영역의 도래로 특징지을 수 있다. 20세기 서구중심의 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밀려난 주술의 세계 는 근대 너머로 확장되는 우주론(cosmology) 속에서 재구축되고 있다. 이러한 탈인간주의는 최근 1 0년간 세계적으로 여러 분과학문을 횡단하며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한국 인류학계 또한 이 과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다. 20세기 인류학의 지난 개념과 용어, 이를테면 문화 개념이나 타자 개념의 재고, 자문화와 타문 화라는 인식론적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민족지적 방법론의 개발, ‘우리’의 퍼스펙티브에 대한 안티나르시시즘적 접근의 고안, 20세기 한국 인류학의 사상사적 재평가 등등 이제까지 서구이론에 기대어 안주했던 한국 인류학을 통렬하게 자기비판하고 지금이라도 ‘우리’의 인류학을 모색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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