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3

유동식, ‘한국문화와 기독교 2009

유동식, ‘한국문화와 기독교’ 

유동식 교수님의 <한국문화와 기독교>는 2009년 봄, "연세신학 시민강좌"의 강의 내용 중 결론
부분을 정리한 것으로 어쩌면 한 평생 계속해 온 연구의 결론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유
교수님은 학문적인 신학강의라기 보다는 신앙고백적인 신학수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흰돌
출판사 간, <한국문화와 기독교>) 감리교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를 역임한 유동
식 교수의 주요 저서로는 
  • <한국종교와 가독교> 1965, 
  • <한국무교의 역사와 구조> 1975, 
  • <한국신학의 광맥> 1982,
  •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1997, 
  • <풍류도와 예술신학> 2006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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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식 교수의 ‘한국문화와 기독교’

차례
1. 가나안 복지와 금수강산
2. 풍류도와 한국문화
3. 한 멋진 삶의 복음
a) 한의 성취로서의 하나님
b) 멋의 성취로서의 복음
c) 하늘나라와 영원한 지금

1. 가나안 복지와 금수강산

그 옛날 하나님께서는 유대민족을 택하시고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창세기 12:7, 출애 3:8). 이에 따라 이
스라엘 족속은 그들이 살던 중동지역을 떠나 서방으로 이동해 팔레스틴까지 갔으
나 기근으로 인해 다시 남방으로 이동하여 애급에서 오랜 세월을 노예로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그들을 해방케 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이끌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자유인으로서 지키고 살아가야 할 율법을 주시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다시 죽음의 세력에
노예가 되는 역사의 길을 걸었다. 이에 사랑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인 그리스도
로 하여금 제2의 해방을 감행하게 했다. 이것이 그의 십자가의 부활로 성취하신 구
원의 복음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누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되고 하나님
의 자녀된 특권을 누릴 수 있게 하셨다. 곧 영적으로 온누리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
나안 본지에서 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선민으로서의 유대민족의 사명은 이것으로
써 끝났다.
==
우리는 유대민족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사 역시 천지를 창조하
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보게 하신 것이 선민인 이스라엘의
역사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유대민족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섭리의
빛에 비추어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사를 보아야 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스라엘과는 달리 중앙아시아로부터 해 뜨는 동방을 향하여 이
동해 온 맥(貊)족이었다. 이들은 수렵과 목축을 생계로 하는 유목민족들이요, 말을
타고 다니는 북방계의 거칠은 기마민족이었다.
이들이 만주 벌판에서 만난 족속은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로부터 강을 따라 남하한
예(濊)족이다. 그들은 채집과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는 온순한 족속이었다. 따
라서 맥족이 이들을 지배했다. 그 후 이들을 예맥(濊貊)족이라 불렀다.
이들은 차츰 화북(華北)지방에서 들어온 농경문화를 수용하면서 만주에 정착했다.
그리고 부족 연합국가를 형성한 것이 부여와 고구려이다. 그리고 백두산과 압록강
및 두만강을 중심으로 예, 옥조 등이 형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무대는 점차
한반도로 남하하여, 백제와 신라 등 문화국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종교는 태양으로 상징되는 하느님 부르칸(Burkhan, 불, 밝, 한)을 신봉했으
며, 항상 10월에는 온 족속이 하느님에게 제사지냈다. 영고, 동맹, 무천 소도 등이
그것이다.(삼국지><위지>동이전>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은 각박한 만주벌판이 아니라 “멋과 바람
(영)이 흐르는풍류의 땅” 한반도였다. 오랫동안 백두산을 중심으로 살아왔지만 ,
종국에는 삼천리금수강산 한반도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하나님게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멋과 바람(영)이 흐르는 금수강산”이다. 유대인들은 젖과 꿀을 위해 투쟁해야만
했지만, 우리 한인들은 “한 멋진 삶”을 위해 싸워야만 했다.
유대민족은 애급에서의 정치, 경제, 사회적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했다. 그
러나 우리 민족은 이와는 달리 종교, 정신적 노예생활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했다.
우리 조상들이 하느님을 신봉해 오기는 했지만 이것은 소박한 무교(巫敎)적 차원
의 신앙이었다. 그것은 생존의 가치(의, 식, 주, 에 기초한 부귀와 정수 등) 를 충족
시킬 수는 있어도 자기 부정을 통한 영적 인격형성은 초래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
여전히 자기라는 감옥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는 모세가 아니라 석가여래였다. 그는 철
저하게 자기와 이 세상에 집착한 ‘자아’라는 애급의 노예로부터 탈출하는 길을 가
르쳤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정신적 출애급은 1,000년의 불교사를 통해 진행되어
왔다.
하나님께서는 해방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주심으로써 인륜도덕을 중심한 문화를
발전시켜나가게 하셨다. 이제 불교를 통해 자아의 노예로부터 해방케 하신 하나님
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공자님의 가르침을 주심으로써, 우리의 윤리문화를 발전시
켜 나가게 하시었다.조선왕조 500년의 유교문화를 갖게 하신 것이다.
유대민족을 출애급의 은사를 받았고 율법적 삶의 지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역
사는 약속 받은 가나안 복지를 현실화하는 데에 실패했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그리
스도의 복음을 통해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신 것이다..
한국의 역사 역시 같은 섭리 하에 진행되어왔다. 불교와 유교만으로 약속하신 “멋
과 바람(영)이 흐르는 금수강산”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땅에 퍼지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해방과 율법의 역사적 차원의 종교를 넘어선 예술과 신비차
원의 창조적 생명운동이다. 복음이 초래하는 새로운 존재 곧 신천지가 우리에게는
“멋과 영이 흐르는 금수강산”이 되는 것이다.
2. 풍류도와 한국문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은 “멋과 바람이 흐르는 금수강산”이다. 그리고 이것
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종교의식 곧 우리의 영성이 풍류도이다. 이 풍류
도를 통해 전개된 우리의 문화사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인간의 심성을 감성과 이성과 영성으로 나누어 본다. 영성이란 종교적 심성이다.
영성이 있어 종교가 형성되고, 또한 외래종교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문화란 가치형성 활동과 그 결과의 전체를 말한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가치를 제
사하는 것이 종교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형상이라고
도 한다.
민족공동체는 그들의 꿈을 담은 가치를 추구하는 문화공동체이다. 그리고 그들의
오랜 생활문화를 통해 형성된 집단무의식이 보편적 영성에 침전됨으로써 민족적
특성을 가진 영성이 형성된다. 보편적 영성이란 불교적으로는 ‘한 마음’(一心)이며,
기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신라의 석학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9세기)은 한인의 영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나라에는 깊고 오묘한 도가 있다. 이것을 풍류라고 한다. . . . 이는 실로 유,
불, 선 삼교를 포함한 것이요, 뭇사람들에게 접해서는 그들을 사람 되게 만든
다.”(삼국사기)
여기에서 사용된 풍류(風流)라는 한자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있다. 하나는 동양인
에게 공통된 이상경에 대한 미적 개념이다. 일반적으로는 인생과 예술과 자연이 혼
연일체가 된 경지를 뜻한다.
또 하나는 풍류라는 한자가 우리말의 ;부루’(부르칸, 불, 한, 하늘)을 이두식으로
포기한 것으로 이해된다. 곧 고대 제천의례에서 보듯 풍류도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적 개념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포함삼교한다고 했다. 모든 종교의 궁극적 관
심은 예술적 풍류도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풍류도를 지닐 때 인간을 참 사람이 된다고 했다. 실로 풍류도는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주신 영성이며 영적 도리이다.
풍류도는 풍류가 뜻하듯이 예술적 영성이며, 그 양상은 유, 불, 선 삼교의 종지를
포함한 종교적 포월성이며, 그 작용은 사람으로 하여금 멋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인간화에 있다. 나는 이것을 각각 ‘멋’과 ‘한’과 ‘삶’ 으로써 표현한다. ‘멋’ 이란 미
의식이요, ‘한’ 이란 하나이면서 전체를 뜻하는 포월성이요, ‘삶’이란 생활하는 사
람의 준말이다. 따라서 풍류도를 풀이하면 “멋진 한 삶”의 영성이다.

이러한 풍류도가 기초가 되어 외래종교들을 수용하면서 한국문화를 전개해왔다.
곧 고대와 중세에는 불교문화가 전개되었고, 근래에는 유교문화가 전개되었으며,
현대에 와서는 서구문명을 동반한 기독교문화가 전개되어 가고 있다.
우리의 얼인 풍류도의 눈에서 볼 때 불교 특히 화엄사상을 주류로 하고 있는 한국
불교문화는 포월적인 ‘한’ 사상을 전개해 왔으며 유교는 인륜도덕을 기초로 한 인
간화의 ‘삶’을 훈련해 왔다. 이제 한국 기독교가 전개해야 할 종교문화적 사명은 불
교적 한과 유고적 삶을 수렴한 예술적 멋의 전개에 있다. 따라서 한국기독교는 불
교와 유교경전을 우리의 외경(外經)으로 수렴함으로써 보다 풍부한 하나님의 말씀
을 듣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 종교로 구성된 한국의 종교. 문화사는 풍류도 안에서 연속성을 갖는 것
이며, 상호 유기적 관계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체적인 지향점은 우리의 꿈인
“한 멋진 삶” 의 실현에 있다.
3. 한 멋진 삶의 복음

a) 한의 성취로서의 하나님

성서 세계의 주인공은 셋이다.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아버지 하나
님과,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 힘입어 그리스
도를 믿음으로써 영생을 누리게 되는 인간이 그것이다. 한국인의 이상을 담고 있는
우리들의 영성은 세 요소로써 구성되어 있다. 곧 유, 불 선의 종지를 내포하고 있는
포월적 ‘한’(포함삼교)과, 영적인 영원과 시간-공간적 현실인 통전된 예술적
‘멋’(풍류도), 그리고 이러한 한과 멋을 수렴한 아름다운 ‘삶’(접화군생)이 그것이
다. 이것을 우리는 통틀어 ‘풍류도’ 라고 했다. 우리의 문화사는 이 풍류도의 전개
의 역사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이러한 인생 곧 한 멋진 삶은 성서적 삼위
일체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비로소 완전히 성취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우리가 상호
내재하는 삼태극 관계에 이르게 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삼태극이 풍류도의 한과
멋과 삶을 완성한다. 곧 ‘한’은 하나님 안에서. ‘멋’은 그리스도 안에서, ‘삶’은 성령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을 차례대로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는 예로부터 통전적 하나를 즐겨 추구해 왔다. 하나를 소유함으로써 전 우주를
소유할 수 있는 그 ‘하나’를 추구해왔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영성인 풍류도가 지
닌 ‘한’의 이념이다.
일찍이 신라시대로부터 이에 응답하고 나선 것이 불교의 화엄사상이었다.
우리가 법계연기(法界緣起)를 깨닫는다면, 하나가 곧 일체요, 다양한 것이 곧 하나
임을 알게 된다. 이 진리를 안다면, 한 티끌 안에 우주가 들어 있고, 한 순간이 영원
임을 또한 알 수 있다.(의상의 <화엄법계도>)

여기에 ‘하나’란 곧 여래장이요 불심이요 “한 마음”(一心)이다. “일심의 근원은 있
고 없음을 떠나 홀로 청정하고, 삼공(三空, 나와 법과 일체의 공)의 바다는 진(眞)
과 속(俗)을 원융하여 넉넉하고 고요하다. 잠연(潛然)함으로 둘을 융합하였으나 하
나가 아니요, 홀로 청정함으로 양극을 떠났으나 중간에 집착하지도 않는다”(원효,
<금강삼매경>대의)
한 마음(一心)은 한의 마음이다. 일체를 초월하고, 일체의 존재의 근거가 되며, 또
한 일체를 포용한 포월적 마음이다. 이것이 만인 속에 있는 불성이요, 법신이다. 기
독교적으로는 “하나님의 형상” 또는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이다.
풍류도인이었던 원효의 근본사상은 이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데 있었다.(歸一
心之源). 그때에 인간은 자유자재하며, 평화와 자비의 아름다운 인생 곧 “한 멋진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일심의 근원인 하나님에 대해 바울은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유의 아버지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
를 통해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에배소서 4:6)
그러므로 유. 불. 선 삼교가 추구하는 평화와 자비는 이 하나님 안에서 성취되는 것
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 안에 있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는 자신의 십
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요한 14:20)

b) 멋진 성취로서의 복음

한국인의 꿈은 멋진 한 삶에 있었다. 우리의 영성을 풍류도라 한 것은 멋이 한국인
의 얼이라는 뜻이다. 멋이 없는 사람은 얼빠진 한국인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먼저 포함삼교(包含三敎)하는 ‘한’을 추구한 것은 멋을 성취하기 위해서였
다.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한 멋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의 근원 원리는 자기를 극복하고 천성으로 돌아가는데 있다. 이때에 사람
은 자기와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 하는 것이며, 이때에 비로소 풍류의 멋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이 경지를 노래한 대표적인 선의 한 분이 이율곡일 것이다. 그는 원효와
함께 유불선 삼교에 통달한 대표적인 도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오도시(悟道詩) 한 편을 들어 본다.

도를 배움은 곧 집착 없으매라.
인연 따라 이른 곳에 노닐 뿐이네.
잠시 청학동을 사직하고,
백구주에 와서 구경하노라.
내 신세는 천리 구름 속에 있고,
천지는 바다 한 모퉁이에 있네.
초당에 하룻밤 묵어가는데
매화에 걸린 달 이것이 풍류로다.

도를 터득하면 곧 집착이 없어진다. 율곡은 포함삼교하는 ‘한’의 자리에 서있다. 다
만 인연 따라 불도를 닦기도 하고, 노자 도덕경을 재편하면서 주석을 달기도 했다.
그가 평생을 몸담았던 유교에도 실은 거기에 매이지 않고, 초연한 입장에서 진리를
탐구했다. 종교라는 벽에 걸림이 없이 인연 따라 진리를 탐구하며 살아왔던 것이
다.
율곡은 진리를 나르는 구름처럼 자유 하는 존재였다. 그의 눈에는 천지가 바닷가에
놓인 한 개의 조약돌로 보였다. 인생이란 하룻밤 묵어가는 나그네인데, 새 봄을 눈
트게 하는 매화나무에 진여의 달이 걸려 있으니 이것이 과연 풍류가 아니겠는가?
매화란 죽음의 엄동설한을 뚫고 맨 먼저 꽃으로써 부활의 봄을 재촉하는 꽃나무이
다. 여기에 진여(眞如)의 달이 걸려있는 것이다. 풍류의 멋이란 생동감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영원한 진여와 현실이 조화를 이루는 데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이
다.
아름다움이란 미적 이념인 참 알(眞實)이 여실(如實)하게 나타났음을 뜻한다. 참
알이란 ‘로고스’요, 그가 여실히 나타난 이가 예수님이다. 이 “로고스-예수”가 아름
다움이며, 이 아름다움이 구세주 그리스도시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다. (요한 14:6). 우리가 추구해 온 멋의 아름다움은 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c) 하늘나라와 영원한 지금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는 유월절이었다. 유월절이란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
여금 유대민족을 애굽으로부터 해방하게 하신 정치적 해방을 기념하는 유대인들의
명절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제2의 해방을 초래한 사건이다. 그것은 한 민족의 정치
적 해방이 아니라, 온 인류의 영적인 해방을 초래한 사건이다.
십자가를 눈앞에 두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셨다. 그때에 그
는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하시
고 다시 포도주 잔을 들고 “이것은 내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
들을 위하여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누가 22:19f.)라고 하셨다.
유월절을 기념하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이 먹고 마신 떡과 포도주는 십자가에
달리실 그리스도의 살과 피였다. 그러므로 이로써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실존적으
로 자신 안에 모시고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을 오늘날 재현하는 것이 성찬식이다. 하
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심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누
리게 된다. 곧 자유와 평화와 사랑의 기쁨이다.
먹고 마신다는 것은 사람이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일상적인 것이다. 그리스
도인의 일상생활은 그것 자체가 성례전화 되어야 하며, 예술화 되어야 한다. 그리
스도인에게 식사 때의 감사기도는 성례전적 의미를 갖게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를 자신 안에 모시게 될 때 거기에 하나님의 하늘나라가 전개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다.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놀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C.F. 버틀러)

우리 민족의 꿈인 한 멋진 삶은 언제 실현되는가? 곧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 지배하
는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어데서 어떻게 성취되는가?
그것은 먼 미래에 일어날 희망사항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다. 지금(只今)
이 종말론적 지금(至今)인 것이다. 지금(只今)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미래의 종말
론적 사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
스도를 모시고 살게 된 지금이며, 이 세상에서 이미 실현된 하늘나라다. 이것을 요
한은 영생이라고 했다.

요한이 기록한 예수의 말씀은 이러하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심판
에 이르지 아니하고,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이미 생명의 세계로 옮겨진 것이
다.”(요한 5:2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나,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 11:25)

끝으로 나의 신앙고백 한편을 적어 본다.

“고향을 그리며
바람 따라 흐르다가
아버지를 만났으니
여기가 고향이라.
하늘 저편 가더라도
거기 또한 여기거늘,
새 봄을 노래하며
사랑 안에 살으리라.”
(2010.3.13. 웹진 늘푸른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