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0

"여성의 자국어 기록문학 '한글 제문'...제사 남성 통념 깨" < 오케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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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자국어 기록문학 '한글 제문'...제사 남성 통념 깨"
기자명 전정희 문화전문 기자
입력 202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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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신간 '이승과 저승을 소통하는 한글 제문' 저자 이복규
ㆍ18~20세기 작성된 한글 제문 발굴해 40여 편으로 정리
ㆍ여성이 장례 참여해 '한글 제문' 낭독…자국어의 힘 '눈물바다'

‘아 애통하며 애통합니다. 
우리 어머니는 순후하신 덕행과 자상하신 성품을 지니셨지요…
운명은 어이 그리도 기구하셨으며…사람이라면 누군들 한이 없겠습니까만…
골수에 맺힐 원한, 잊지 못할 그일. 
임자년에 우리 아버지가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어느 날 표연히 떠나 버렸지요. 
그 후로 소식이 뚝 끊어졌으니 살았는지 돌아가셨는지 그 누가 안단 말입니까. …
덧없는 여자의 일생을 독수공방하며…이래 저래 병이 되어 골수에 깊이 들었던가요. …
갑술 년 시월에 천만 뜻 밖에도 어머니 상을 당했습니다. 
꿈인가요 생시인가요. 천지가 무너지고 해와 달이 빛을 잃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딸의 피토하는 제문이다. 부친이 바람처럼(?) 떠나버리고 독수공방하며 남편을 기다리며 딸 아들 장하게 키운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것이다. 딸은 친정에 돌아와 이같은 ‘한글 제문’으로 영전에 낭독했다.

위 내용은 최근 출간된 ‘이승과 저승을 소통하는 한글제문’(책봄 펴냄)에 수록된 40여 편 중 하나이다. 이복규 교수(서경대 명예)가 그의 제자 정재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와 편저했다. 
가부장적 조선 사회에서 여성이 제사에 참여하고, 제문을 읽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이승과 저승을 소통하는 한글 제문'의 편저자 이복규 교수(서경대 명예)가 18~20세기 작성된 한글 제문 40여 편을 모아 분석했다. '한글 제문'을 통해 여성이 장례 및 제례 참여가 활발했음을 알리고 있다. 사진=전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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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이복규 교수를 지난 10일 경기도 화성의 한 갤러리에서 만났다. 이 교수는 “전북 순창에 ‘설공찬전’과 관련한 공무원 대상 콘텐츠 강의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설공찬전’은 순창을 배경으로 한 조선 초기 고전 소설이다.

이 교수가 1997년 ‘묵재일기’ 속에서 ‘설공찬전’ 한글 번역본을 발견함으로서 구전을 사실로 입증했다. ‘설공찬전’ 한문 원본이 불교의 윤회화복설을 담고 있었다. 중종이 백성을 혹세무민한다하여 왕명으로 소각을 명령, 전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시집 간 딸이 아버지 기일에 적어 낭독한 한글 제문(1897년 12월 16일).

 '하나같이 기르실 때 매 한 대 안때리며 꾸중 한 번 안하셨어요'라는 문장도 있다. 8남매를 키운 친정 아버지이다.



- ‘설공찬전’ 발굴이 국문학계 및 한국학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번 편저도 우리 역사의 고정 관념을 뒤집은 저작물입니다. 그간 제문은 한자가 전부인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 보통 ‘유세차’로 시작되는….

“제문은 고인의 영전에서 낭독된 추도문입니다. 말씀처럼 한문 제문만 있었지요. 그런데 한글 창제 후 18~19세기 한글 제문이 등장합니다. 이러한 한글 제문이 널리 퍼진 것은 1900년대예요. 가깝게는 1970년대까지 집에서 장례를 치르면서 어찌 보면 보편화했다 할 정도였지요. 장례식장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으면서 사라졌다고 보면 됩니다.”



- 40여 편 가운데 여성이 제례에 참여해 한글 제문을 읽는 것이 놀랍습니다.

“발견된 한글 제문을 분석해 보면 여성이 남성과 거의 같은 비중이에요. 여성의 한글 제문은 주로 경북 안동·예천 지역에서 발견됩니다. 이른바 ‘영남 내방가사’ 지역이라 유교적 교양과 가풍을 자랑하는 집안이 많았고 그 지역에선 양반집 여성만이 아니라 양민 여성도 한글 제문으로 참여하는 문화가 형성된 거죠.”



- 남녀 차별이 심했던 전통 사회에서 이 정도의 여성 참여는 기존 통념을 깨는 현상 같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 같은 시기(18~20세기)에 여성이 남성과 대등하게 고인을 추도하는 자국어 기록문학을 창작해 낭독한 현상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세계 각국의 지역 문학 전공자들한테 두루 탐문해 봤어요. 한데 아직 어디서도 이와 같은 사례가 없습니다. 안동·예천의 경우 소상과 대상 때 여성 모두가 한글 제문을 낭독할 수 있었어요.”



- 한문 제문과 달리 한글 제문이 갖는 특징이 있을까요.

“우리말로 적은 겁니다. 그러니 모두가 듣고 반응할 수가 있어요. 한문 제문은 어순이 다른 외국어예요. 문어죠. 우리가 살아오면서 제사 때 겪으며 살았잖아요. 한문 제문을 낭송하면 이해를 못했었잖아요. 그런데 한글 제문을 읽으면 빈소에 있던 사람 모두 눈물바다가 됩니다. 생활 정감이라고 해야 하나요.”


- 예를 들자면요.

“한 한글 제문에 작성자가 평소 고인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걸 자책하면서 ‘우풍우풍 마귀년’ ‘야속하다 하나님, 아 무심하다 저 귀신아’ ‘완나완나(왔구나 왔구나)하시며 반기시고…겨우 하룻밤 자고(가려고) 갈나 하이(하니)…’ 등 생활 감정이 여과 없이 나오지요.”



- 한글 제문 대상은 꼭 부모이며 제문 작성자는 모두 여성입니까.

“아뇨. 언니, 올케, 고모 등 아주 다양합니다. 또 남성도 아내, 형수, 며느리, 자형 등이 나타나고 있어요. 신기한 건 장모에 대한 제문은 있으나 시어머니에 대한 제문은 찾아보기 어려워요. 시집살이 용어가 존재하는 한국 상황의 반영 아닌가 싶습니다.



- 그간 한글 제문이 공개되거나 연구되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이번 책이 600쪽의 두터운 분량인데….

“개인 소장의 경우가 많았어요. 그걸 취합해 체계적으로 연구하기까진 힘이 못 미쳤던 같습니다. 40여 편도 소장자들이 제공해 주셔서 한데 모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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