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7/31

15 [[문선명, 현대사 격변기에 탁월한 정세인식으로 성공하다 - 오마이뉴스

문선명, 현대사 격변기에 탁월한 정세인식으로 성공하다 - 오마이뉴스

문선명, 현대사 격변기에 탁월한 정세인식으로 성공하다개신교는 이단자로 폄하... 한편에선 국제 평화운동가로 인정하기도
09.03.15
백찬홍(zskmc)

공감29

문선명 총재 자서선 출간으로 기독교계 반발 확산



▲ 지난 10일 김영사가 펴낸 통일교 문선명 총재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표지
ⓒ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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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 문선명 총재가 지난 10일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라는 이름으로 자서전을 출간했다. 국내 유수의 출판사인 김영사가 출간을 맡았는데 출간과 동시에 개신교를 중심으로 반대여론이 들끓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배경으로 하는 <국민일보> 측은 12일 기사 '교계 거부감 확산…출판물 보이콧 움직임'과 13일자 사설 '크리스천들 기대 저버린 김영사' 등을 통해 문총재의 자서전 출간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시했고 교회언론회, 한국기독교통일교대책협의회 등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세계일보>는 14일 '출판자유를 억압하는 건 언론 정도가 아니다'라는 사설을 통해 국민일보측이 문총재의 자서전을 펴낸 김영사를 비난하는 것은 헌법상 기본권인 출판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며 불편부당한 보도원칙에 어긋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세계일보>는 또 <국민일보>의 증오와 분노 일변도의 그 옹졸하고 편협한 자세는 기독교 정신에도 위배된다고 덧붙였다.

한 인물의 자서전을 두고 언론이 공방전을 벌이는 것은 유래가 없는 것으로 문 총재의 삶이 그만큼 굴곡진 삶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문 총재 스스로 자신의 이름 석 자만으로도 세상이 시끄럽다고 밝힐 만큼 그 스스로도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개신교 권에서는 문 총재를 구세주를 참칭한 인물로 주로 이단종파의 교주로 비난하고 있지만 삼자의 눈으로는 볼 때 그는 한국인으로는 드물게 일본, 미국 등 해외에서 성공한 종교인이자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문 총재가 국내활동보다 해외로 눈을 돌린 것은 개신교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이단시비와 당국의 압박 때문이었다. 결정적 계기는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55년 이른바 이대-연대사건 때문이었다. 통일교 신자가 된 교수와 학생 건으로 학내가 시끄럽자 기독교학교였던 연세대와 이화여대는 학교설립정신에 어긋난다며 이들을 파면시키거나 제적시켰고 문 총재는 사법당국에 의해 구속당했다.

당시 통일교를 공격하는데 앞장선 인물은 이화여대 박마리아 부총장으로 그는 1960년 3·15 부정 선거 때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 씨의 부인이었다. 연대-이대사건으로 구속된 문선명 총재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무죄를 선고받았기는 했지만 문 총재는 기독교장로가 대통령인 한국에서 제대로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해외, 우선 가까운 나라인 일본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1958년 일본에 진출한 통일교는 일본당국의 의심과 감시를 피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강력하게 반공적 입장을 표명했다. 1960년대 들어 통일교는 일본에 안착하게 되는데 이 당시 일본은 안보투쟁이 격렬하던 시기였다.

통일교의 강력한 반공·반좌파노선은 일본사회당·전공투(전학공투회의)·총평(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등을 중심으로 한 좌파·반체제 세력의 격렬한 저항에 골몰하고 있었던 일본정부의 감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70년대 미국 주류종교의 견제에도 미국 포교활동 성공

일본에서 성공을 거둔 통일교와 문선명 총재는 1970년대 미국 공략에 나섰다. 
72년 2월 뉴욕 등 7대 도시 1차 순회강연을 시작으로 1974년 말까지 모두 4차에 걸친 전미순회강연을 펼치면서 미국 내 기반을 다져나갔다. 그사이 백악관 앞에서 워터게이터 사건으로 궁지에 빠진 닉슨 대통령을 지지하는 데모와 금식기도를 벌이기도 했다.

문선명 총재가 활약하던 60년 말에서 70년대 초 미국은 민권·여성 등 진보운동이 시들어가고 보수주의가 힘을 얻으면서 정체성이 재정립되던 시기였다. 이때 유사·신흥종교들이 등장했는데 이때 가장 유명한 종파는 짐 존스가 이끄는 인민사원과 통일교였고 뉴에이지도 새로운 정신운동으로 부상했다.

1960년대 중반 출범한 인민사원은 1978년 존스 자신을 비롯한 1천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자살하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했지만 통일교는 막강한 경제력과 로비력을 통해 주류종교나 언론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대응해 살아남았다.

당시 언론들은 자신들이 원조한 국가의 신흥종교가 미국 내에서 인기를 누리는 것이 못마땅하게 생각해 통일교도를 가리켜 문총재의 추종자라는 뜻으로 무니시트(Moonist)라고 비야냥 거렸지만 통일교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소외된 많은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해 상당수의 신자를 확보했다.

그 결과 1976년 9월 워싱턴 광장에 30만에 가까운 인파를 동원해 미국 종교계에 충격을 주었고 이 일로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1976년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문 총재는 미국에서 기반을 다지는 동안 국내에 돌아와 박정희 정권과도 교감을 갖고 1970년대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진행될 때 1975년 6월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구국세계대회'를 개최했다.

70년대 박정희 정권은 북베트남군이 미군을 축출하고 베트남을 통일하자 이를 역이용해 긴급조치 등을 통해 유신체제를 공고히 하던 시기였다. 통일교 주도로 열린 '구국세계대회'는 박정희 정권의 비호아래 60개국 1천여 명의 대표들과 백만에 가까운 인파가 참여해 성황을 이루었다.

이때 문선명 총재는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신앙의 조국인 한국을 수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만일 북한이 대한민국을 무력침략하게 되면 즉각 세계의 모든 통일교인들은 대한민국의 의용군으로 참전해 신앙의 조국인 한국을 지킬 것이라고 선언하며 통일교가 '반공'과 '애국'의 보루라고 역설했다.

1970년대 주류 개신교 역시 반공을 표방하며 박정희 정권 지원을 위해 구국기도회를 개최했던 것을 감안하면 통일교와 개신교는 종교적으로 서로 반목했지만 정치적 노선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적과 적이 반공의 우산 아래 암묵적으로 동맹을 맺은 것이다. '구국세계대회'의 성공으로 이승만 정권 이래 국내에서 활동거점을 찾지 못했던 통일교는 박정희 정권 하에서 합법적으로 국내 포교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과 탈세연루로 큰 타격 받기도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던 문 총재와 통일교는 70년대 말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일대 위기를 맞았다. 1970년대 중반 미국의회가 한국정부의 인권탄압에 대한 청문회(프레이저 청문회) 등을 통해 압박을 가하자 박정희 정권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로비스트 박동선을 내세워 미정가에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다.

이 사건은 1976년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미국 의회와 정부는 청문회를 개최해 관련자들을 소환했다. 당시 소환자 중에는 주미대사관 무관출신이자 문선명 총재의 보좌관이었던 박보희씨도 포함되었다. 2년여에 걸친 의회 조사기간 동안 박보희씨는 모두 4차례 소환되었고, 프레이저 의원은 통일교회와 한국정부간의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박보희씨는 공개증언에서 자신은 애국자이자 통일교인이며 반공주의자로서 행동했을 뿐이며, 자신을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몰아가는 것은 용공주의자들의 음모라고 반박했다. 박씨의 패기만만한 의회 증언은 애국적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당시 수세에 몰렸던 박정희 정권의 대국민 홍보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2007년 4년 외교부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도널드 프레이저 위원장은 전직 주미 대사관 간부의 증언 등을 토대로 박보희씨가 대사관 외교행랑을 이용, 대통령, 외무부장관, 중앙정보부장에게 직접 보고 하는 체계를 갖고 있다고 믿고 청문회를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미국 언론들은 통일교와 한국 정부의 결탁 의혹을 연이어 보도하면서 의회의 조사활동을 거들었다. 특히 <뉴욕타임즈>는 박정희 정권이 월남전 참전대가로 미국정부로부터 얻어낸 M16공장(통일산업)을 건설할 때 박보희씨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사업지원을 협의했으며 통일교 산하기관인 승공연합회가 공무원 교육을 했다고 보도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은 1978년 10월 중순 미국의회가 조사보고서를 내고 3명의 민주당 의원을 징계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언론의 도마에 올랐던 문선명 총재와 통일교는 이번에는 1980년, 제40대 미국 대통령 자리를 노리는 로널드 레이건과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문 총재의 지시를 받은 박보희씨는 대선 기간 중 레이건을 만나 문 총재가 설립한 언론사 <뉴스월드>가 레이건을 지지하고 있다고 밝혔고, 투표 당일 레이건 후보가 350명 이상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압도적'으로 승리를 할 것이라고 과감하게 예측 보도했다.

이 기사는 당시 여론 조사기관이나 선거 전문가, 언론이 카터의 승리를 예상한 것을 뒤엎는 것으로 레이건 진영을 흡족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레이건의 대승으로 끝나자 문선명과 통일교는 레이건의 정책수행을 돕기 위해 1982년 보수우익신문인 <워싱턴 타임즈>를 창간했다. <워싱턴 타임즈>는 유력지인 <워싱턴 포스트>에 비해 영향력은 보잘 것 없었지만 레이건은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워싱턴 포스트>를 견제하는 데 활용했다.

문 총재는 또한 레이건 정권이 남미에서 추진하고 있던 좌파 저지활동을 남미지역 통일교 신자들을 통해 측면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 총재와 통일교의 노력에도 문 총재가 탈세혐의로 수감되면서 통일교는 미국에서 또 한 번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다.

1982년 7월 뉴욕 지방법원은 뉴욕체이스 맨해튼 은행에 예금했던 160만 달러의 자금이 면세에 해당하는 종교단체기금이 아니라 문 총재 개인돈으로 간주해 탈세죄를 적용해 문 총재에게 1년 6개월의 실형선고를 내렸다. 이 일로 그는 북한에서 두번의 수감생활(46년, 48년)한 것을 포함해 모두 여섯 번째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통일교 측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결국 문 총재는 13개월간 수감생활을 한 후 석방되었다. 탈세사건으로 미국 활동이 여의치 않자 문 총재는 1985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후 그가 시작한 일은 전두환 정권에 저항하던 학생운동에 맞불을 놓기 위해 1986년 남북통일학생연합(통학련)을 결성한 일이었다.

1990년대 동구권 붕괴 후 김일성 면담 등 평화운동 참여

1987년에는 '남북통일국민연합'을 창설했고, 1989년에는 <세계일보>, <전교학신문>을 연이어 창간했다. 특히 <전교학신문>은 많은 지면을 전대협을 중심으로 한 진보학생운동을 비판하는 데 할애했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전 세계적으로 이념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자 문 총재는 평화운동의 대변자로 나섰다. 이 당시 노태우 정권도 전향적인 북방정책을 통해 러시아와 수교(1990년)하고 북한과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1991년)를 체결하는 등 평화무드를 조성했다.

1990년 4월 문선명 총재는 모스크바에서 소련 해체의 주역인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을 만나고, 1991년에는 40년간의 반공운동을 청산하면서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면담하기도 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문 총재가 만난 것은 북한 입장에서는 경제난을 해소하기 위해 외부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고, 문 총재는 시대상황에 따라 어떤 기업보다 먼저 북한과 관계를 맺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때 김일성 주석과 문 총재 간에는 금강산 개발 건이 오갔으나 결국 개발권은 강원도 통천이 고향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막대한 물량공세를 펼치면서 획득했다. 금강산 개발권을 놓친 통일교는 북한과 합작회사인 평화자동차를 설립해 자동차를 생산하고, 평양에서 보통강 호텔을 운영하면서 문 총재의 고향인 정주에 평화공원을 세우는 일을 진행했다.

현재 문선명 총재는 지난 2001년 짓기 시작한 약 8백만평의 거대한 통일교 단지를 중심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가평 통일교 단지에는 문 총재가 생활하는 본궁, 실버타운, 국내 최대 규모의 수련시설인 청아캠프, 통일교의 성지로 불리는 천주청평수련원, 청심병원, 청심신학대학원대학교, 청심 국제중·고교 등이 세워져 있다.

문 총재는 지난 1월 30일 천주청평수련원에서 90세 생일잔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1천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했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90년 된 산삼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선명 총재는 자신이 80년대부터 제안한 '한일해저터널'건설에 매진하고 있다. 그의 꿈이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그가 살아온 궤적으로 볼 때 죽는 날까지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 개신교도들에게는 이단자로 공격받지만 추종자들에게는 메시야로 존중받는 인물, 종교인으로는 드물게 굴지의 사업체를 운영하고 박보희, 곽정환 같은 탁월한 참모를 통해 통일교를 국제조직으로 키워낸 그의 리더십은 인정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문 총재와 통일교가 조직보전과 발전을 위해 60~80년대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과 결탁해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용공세력으로 규정해 공격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런 점에서는 기독교 보수 세력과 하등 다를 바 없다. 

문 총재가 평화운동의 대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과거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정치·사회적 변혁기에 교묘한 줄타기로 살아남아 부와 권력위에서 군림하는 그저 그런 종교인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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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통일교 문선명 교주가 남긴 '생식기 교리':크리스찬 투데이

통일교 문선명 교주가 남긴 '생식기 교리':크리스찬 투데이

통일교 문선명 교주가 남긴 '생식기 교리'
새 경전 <천성경>, "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정소"
전정희 기자 | 기사입력 2012/09/05


  
▲ 2006년 6월 13일 '우주 평화의 왕' 대관식 때의 문선명 교주(사진: www.tongil.or.kr)


2012년 9월 3일 하나님이 사망했다. 대한민국의 ‘자칭 재림예수’이자 ‘자칭 하나님’의 원조 통일교 문선명 교주 말이다. 그는 스스로 2001년 1월 13일 ‘하나님 왕권’에, 2006년 6월 13일 ‘우주(천주) 평화의 왕’에 올랐지만, 불과 10년을 못 넘기고 사망해 버렸다.

더구나 지상천국이 완성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2013년 1월 13일 ‘기원절’을 약 4개월 앞두고 사망한 터라 통일교의 모양새가 좀 많이 구겨졌다. 통일교에 의하면 육계가 먼저 천국이 되어야 영계가 천국이 될 수 있으며, 문 교주가 생존해 있을 때 지상천국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본래 하나님은 ‘생사의 주관자’가 아니던가. 그런 하나님이 늙어죽다니…. 스스로 지상(육계)과 천상(영계)을 다스린다고 했던 그는 이로써 자신의 거짓을 증명한 셈이다. 그는 진정 하나님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딱 한 가지만 살펴보자. 그가 남긴 ‘통일교’의 핵심인 소위 ‘생식기 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 <천성경>은 400여 권의 <문선명선생말씀선집>을 16개의 주제별로 핵심정리 한 것이다. 여기에는 1970년대 이후 통일교회 내외의 여러 구체적인 상황을 염두에 둔 문 교주의 직접적인 언급들을 수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지상생활과 영계’, ‘참가정과 가정맹세’, ‘하나님의 조국과 평화유엔’, ‘참부모님 천주승리 선포’ 등의 주제도 포함되어 있어 교주 사후 통일교의 미래에 대한 주제도 포함하고 있다. <원리강론>이 1950년대에 쓰인 통일교의 경전이라면, <천성경>은 2005년에 다듬어진 경전인 것이다.


최근 통일교 신도들이 가장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문선명 교주 어록집 <천성경>을 살펴보면, 성적(性的) 모티브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교리가 더욱 노골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아래 “<천성경> 발췌록” 기사 참고). 남녀의 생식기가 ‘거룩한 궁전’이라며 “거룩 거룩 거룩하다”고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아하면서 만들었겠느냐? 제일 좋아하면서 만들고 제일 정성들여 만든 것이 남자와 여자의 몸뚱이 가운데 어디일 것이냐, 무엇이겠느냐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생식기라는 것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생식기는 거룩한 것입니다. 그거 맞아요, 안 맞아요? 왜 이상한 눈으로 봐요? ‘통일교회 교주가 생식기 얘기를 한다.’ 하는 눈으로 보고 있어요? 목사가 그런 생식기 얘기를 할 수 있어요? 다 침 뱉습니다. 생식기에 대해서 침 뱉는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까? 남자가 여자의 생식기에 침을 뱉고, 여자가 남자의 생식기에 침을 뱉어요? 생식기는 거룩한 것입니다. 거룩, 거룩, 거룩한 생식기입니다. 거룩한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완성한 아담의 자리입니다. 거룩한 장소이며, 거룩한 궁전입니다. 최고의 궁전입니다. 생명의 본성전이 생식기요, 사랑의 본성전이 생식기입니다”(<천성경>, ‘우주의 근본-생식기는 3대 본궁 하늘의 지성소’ 중에서).

통일교는 인간이 두 종류의 타락 즉, 영적인 타락과 육체적인 타락에 빠졌는데 둘 다 성적(性的) 타락이었다고 본다. 화와가 루시퍼와 불륜의 관계를 맺어 영적으로 타락했고, 후에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아담과 또다시 성관계를 맺어 육체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이다.

통일교의 타락론이 이렇게 이원론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구원 또한 이원론적이다. 곧 영적인 구원과 육적인 구원 모두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과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사탄이 승리했으며, 그 결과 예수는 인류의 영적구원만 완성했을 뿐이다. 따라서 재림예수는 인간의 육체적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지상에 육체로 태어나야만 하는데, 자신이 인류를 육체적으로 구원할 세째아담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게 문 교주의 주장이다.

문 교주 사망 이후 후계구도와 그가 남긴 재산에 세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결국 ‘세계종교’ 운운하는 통일교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비성경적 이단집단임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특히 통일그룹 회장 문국진 씨(문교주 4남)는 “통일재단과 통일그룹의 모든 사업은 통일교회를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기관”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바 있다. 즉, 정통교회 성도들은 통일교가 운영하는 각종 기업, 학교, 예술단체 등을 소비하는 것이 곧 이런 신성모독적 통일교 교리를 전파하는 일에 일조하는 것임을 앞으로도 각별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교회와신앙> 제공

14 [[문선명 통일교주의 ‘평화사랑 자서전’, 내 이름은 이단·사이비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문선명 통일교주의 ‘평화사랑 자서전’, 내 이름은 이단·사이비 < 인물 탐방 < 인터뷰 < 기사본문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문선명 통일교주의 ‘평화사랑 자서전’, 내 이름은 이단·사이비
기자명 경제풍월 기자
승인 201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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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으로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사람’ 탄식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및 유병언 전 회장 관련 정정 및 반론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 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및 유병언 전 회장 관련 보도에 대하여 다음의 통합 정정 및 반론보도를 게재합니다.


1.구원파가 오대양사건과 관련 있다는 보도에 대하여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은 1987년과 1989년 그리고 1991년 검경의 3차례 집중적인 수사를 통해 기독교복음침례회 교단 및 유병언 전 회장과 관련이 없음이 밝혀졌으며, 지난 5월 21일 인천지검에서 공문을 통해 관련이 없음을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2. 구원파의 교리 폄하 및 살인집단 연루성 보도에 대하여

일부 언론은 기독교복음침례회 교리를 한번 구원 받으면 무슨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가르치며, 유병언 전 회장의 사업이 하나님의 일이며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이 구원이고 예배라는 교리를 가졌다고 보도하였으나 해당 교단은 그런 교리를 가진 사실이 없다고 밝혀왔습니다.

3. 이준석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이 구원파 신도라는 보도에 대하여

세월호 사고 당시 먼저 퇴선했던 세월호 선장 및 승무원들은 모두 기독교복음침례회 신도가 아니며, 다만 승객을 먼저 대피시키다 사망하여 의사자로 지정된 故정현선 씨와, 승객을 구하다가 의식불명 상태로 구조된 한 분 등, 2명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4. 구원파의 내부 규율 및 각종 팀 관련 왜곡선정 보도에 대하여

일부 언론의 “유병언은 금수원 비밀팀이 살해”, “투명팀이 이탈 감시했다” 등 기독교복음침례회 교단을 살인집단으로 호도하는 보도들과 관련하여 해당 교회는 출입이 자유로운 곳이고 이탈자를 감시하거나 미행하는 팀을 운영하였다는 보도는 사실무근임이 밝혀왔습니다 .

5. 기독교복음침례회에서의 유병언 전 회장 지위 관련 보도에 대하여

기독교복음침례회는 유병언 전 회장이 교주도 총수도 아니며, 유병언 전 회장은 1970년대 극동방송국 선교사들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은 사실은 있으나 목회활동을 한 사실은 없으며 기독교복음침례회는 평신도들의 모임으로 목사가 없음을 밝혀왔습니다.
6. 금수원 관련보도에 대하여

일부 언론은 금수원의 폐쇄성과 반사회적 분위기를 보도하였으나 기독교복음침례회 교인들은 금수원을 자유롭게 출입하고 있으며, 행사 때는 외부인들도 자유롭게 출입 가능하여 폐쇄적인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명백한 오보라고 밝혀왔습니다. 금수원의 땅굴을 비롯해 지하벙커 등 추측성보도 또한 검찰조사 결과 사실무근으로 밝혀진 바 있습니다.

7. 기독교복음침례회 및 유병언 전 회장의 5공화국 유착설 보도에 대하여

일부 언론은 유병언 전 회장이 1980년대 전경환 씨와의 친분 관계와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과의 유착관계를 통해서 유람선 사업 선정 등 세모그룹을 급성장시킬 수 있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병언 전 회장과 기독교복음침례회는 5공화국과 유착관계가 없었으며 지난 5월 21일 인천지검에서 공문을 통해 이를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8. 유병언 전 회장의 50억 골프채 로비설 보도에 대하여

일부 언론은 유병언 전 회장이 사돈을 동원하여 50억 상당의 골프채로 정관계 인사들에게 로비했다고 보도하였으나, 지난 10월 검찰이 해당 로비설은 사실이 아니고 세모도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회생하였음을 확인해 준 바 있습니다. 이에 해당 기사를 바로 잡습니다.

9. 유병언 전 회장 작명 관련 보도에 대하여

일부 언론은 ‘세월호’의 이름이 세상을 초월한다는 의미의 ‘세월(世越)이 아닌 ‘흘러가는 시간’을 뜻하는 세월(歲月)이며, 유병언 전 회장의 작가명인 ‘아해’는 ‘야훼’가 아닌 어린아이를 뜻하며 기업명인 ‘세모’는 삼각형을 뜻하고, 안성의 ‘금수원’은 ‘짐승’을 뜻하는 ‘금수’가 아닌 ‘금수강산’에서 인용하여 ‘비단 금, 수놓을 수’의 뜻임이며 확인되었습니다.

10. 유병언 전 회장의 개인 신상 관련 보도에 대하여

일부 언론에서는 유병언 전 회장과 다수의 여인들과 부적절한 관계인 것으로 보도하였으며, 신도들의 헌금을 착취하는 등의 검증되지 않은 다수 패널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여과 없이 보도하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도 법정 제재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또한 유 전 회장은 해외 망명이나 밀항 시도는 사실 무근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유 전 회장은 세월호 실소유주가 아니며 2400억 재산의 상당부분은 기독교복음침례회 영농조합 소유임을 밝혀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복음침례회는 언론사에 다음과 같은 의견을 보내왔습니다.

“언론은 출연자들의 일방적 주장을 경계하면서 객관적이며 균형 있는 취재보도로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는 한편, 이로 인해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언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 주기 바랍니다. 수사가 진척되고 사실이 밝혀지면서 법의 판단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보도와 선정적인 보도에 집중하며 여론을 호도하여 사건을 여론재판으로 끌어간 세월호 사고 관련 보도 행태를 돌아보고, 법치주의 국가로서 자유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도록 노력해 줄 것과 또한 대형 참사로 온 국민이 비탄에 잠긴 이 시기를 자신들의 입지와 교권확보로 이용하는 세력들을 엄중 경계하는 현명함도 당부 드립니다.”



▲ 통일교 문선명 총재가 2007년 4월23일 열린 ‘ 천주평화 신문명 개벽 선포대회’ 에 참석해 연설하는 모습.


세월호 참사 이후 구원파 교주 유벙언 씨의 도피로 이단과 사이비 종교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다. 유 씨가 종교행위로 위장하여 헌금을 끌어 모아 사욕을 채운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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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신도로 추정되는 서울 관악구에 거주하는 분께서 통일교 창시자인 고 문선명 교주의 자서전을 우송해 왔다. 왜 그랬을까. 이를 읽고 이단과 사이비 비판에 참고해 달라는 뜻으로 믿는다.



세상 시끄러운 ‘문제인물’
내 이름은 이단·사이비
문선명 통일교주의 ‘평화사랑 자서전’
‘욕으로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사람’ 탄식



이단·사이비에 대한 강력반론


경제풍월은 세월호 참사 이후 종교문제연구가 고 탁명환 씨의 유고를 통해 ‘구원파의 정체’를 보도하고 구원파에서 탈출한 정동섭·이영애 씨 부부의 증언을 듣고 ‘구원파 왕국의 지존’, ‘종교천국의 이단 논란’, ‘왜 이단이라 하는가’ 등으로 보도한 바 있다.(2014.6~7월호)
때마침 관악구에 거주하시는 분이 보내온 문선명 총재의 자서전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2009.3 김영사 발행) 383쪽에 달하는 고인의 진솔한 일생의 회고이다.


이 책에서 고인이 스스로 이단과 사이비로부터 자신을 소개한 대목이 너무나 가슴에 닿는다.
“문선명, 이름 석자만 말해도 세상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지는 세상의 ‘문제인물’”, “이단과 사이비는 내 이름 앞에 붙는 고유명사”, “문선명은 곧 이단과 사이비” 등등.
고인 스스로 이단·사이비 비판을 인식하고 세상의 문제인물로 살면서 세계평화를 이야기해온 일생을 어떻게 해석할까. 아마도 통일교가 이단과 사이비와는 거리가 멀다고 강조한 가장 강력한 반론이 아닐까 싶은 느낌이다.

‘욕으로 채운 배가 몇 배나 크다’

고인은 자서전 제1장에서 ‘밥이 사랑이다’라고 했고 제3장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 문선명 총재의 자서전 ‘ 평화를사랑하는 세계인으로’

세상에는 “욕먹으면 오래 산다”는 속설이 있다. 고인은 “밥으로 채운 배가 아니라 욕으로 채운 배가 남들보다 몇 배나 크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사람이란 “이단과 사이비라는 욕으로 배를 채웠다”는 말이다.
왜 고인이 이렇게 말 했을까. 고인은 세상이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반대부터 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고인은 평생 돈과 명예를 탐하지 않고 오직 평화만을 이야기하며 살아왔노라고 스스로 확신하고 행동해 왔다는 뜻이다.

고인은 통일교가 ‘교파 없는 교회’, ‘교회 아닌 교회’를 추구해 왔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 이단이라는 모진 핍박을 받았지만 억울하지 않고 아플 것도 없고 참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평화와 사랑으로 이를 수용했다는 뜻이다. 고인은 이 대목에서 “예수님도 이단이란 죄를 뒤집어쓰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또한 통일교는 독창적, 체계적인 새로운 신학으로 ‘우리식구’(신도)들은 대부분 기성교회에서 떠나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꼽았다.

세계기독교, 통일, 신령의 정신

고인은 부산 피난시절 통일교 창시 때부터 모진 핍박을 견디다 못해 1954년 부산 초막집 교회를 접고 대구를 거쳐 서울로 올라와 장충단공원 인근 북학동 판잣집을 전세 내어 ‘세계 기독교 통일신령협회’라는 간판으로 시작했다고 통일교 인생의 과정을 소개했다.

왜 이 같은 간판을 내세웠는가를 자서전에서 설명했다. ‘세계 기독교’는 동서고금에 걸친 모든 기독교를 포용하고 ‘통일’은 앞으로 나아 갈 목적성을 제시하고 ‘신령’은 하나님 중심의 영육의 조화를 목표한다는 해설이다.
고인은 어떤 교파에 속하고 싶지 않고 새로운 교파를 만들 생각은 더더욱 없기에 ‘세계 기독교…’ 라는 용어로 차별화 했다는 뜻이다. 또한 ‘교파 없는 교회’란 자기의 교단을 희생해서라도 나라를 구하고 나라를 희생해서라도 세계를 구하고 세계를 희생해서라도 인류를 구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고인의 삶이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라는 확신이었음이 여기에 확연히 드러난다고 믿어진다.


‘귀하게 벌어 귀하게 쓴다’는 정신

고인은 통일교 사업에 관한 대목에서 ‘귀하게 벌어 귀하게 쓴다’고 강조했다. 우리사회에 전승돼온 ‘개처럼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속담을 달리 인용했다고 본다.
최근 구원파의 유병언 씨 일가가 신도들의 거액헌금을 빼돌려 호화생활한 대목이 여론의 지탄을 받는다. 반면에 고 문선명 총재는 통일교가 사업을 통해 번 돈을 거룩했고 귀하게 사용했다고 인식한다
.▲ 1990년 모스크바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만난 문선명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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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장사 과정에 거짓말을 하지 말고 폭리를 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전제이다. 
이익은 3할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고인이 장사를 통해 돈을 번 것은 ‘식구들’(신도)의 호주머니 돈으로 선교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고인의 이 같은 원칙에도 불구하고 통일교 사업이 귀하게 벌어 귀하게만 썼는지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다른 항목이다. 최근 말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구원파의 유벙언 씨 일가 행태를 지켜본 국민들은 종교활동의 연장이라고 포장된 기업활동에 부조리와 불법이 너무 많이 작용하지 않았느냐고 의심하기 때문이다.
고인은 스스로 이단과 사이비에 대한 혹독한 비판을 의식하면서 종교인들에 대한 3가지를 부탁하고 싶다고 적었다.
  • 첫째, 다른 종교의 전통을 존중하고 종교가 분쟁과 충돌을 막아야 한다. 
  • 둘째, 모든 종교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며 세계에 봉사해야 한다. 
  • 셋째, 세계평화를 위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조직을 발전시켜 나가자.
고인이 이 같은 당부를 하고 싶은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비 종교인의 눈으로 보면 종교간 분쟁과 충돌이란 종교를 빙자한 사욕과 탐욕의 표현이다. 이단과 사이비 논쟁을 넘어 비 종교인이 종교세계의 배타성이나 분열과 갈등을 비판하게 된 오늘의 현실을 기독교인 스스로 하나님께 고해바쳐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고난 겪었으나 마음속 상처는 없다

▲ 1976년 6월 뉴욕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린 미국 독립 200주년 기념예배 참가자들이 문선명 총재사진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문 총재는 그해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뽑은 ‘ 올해의 인물’ 로 선정됐다.


고인이 창시한 통일교가 이단과 사이비 논란 속에서 막강한 위세를 떨치고 많은 경제적 성취를 남기고 간 업적은 분명 평가의 대상이다. 더구나 고인의 삶이 결코
평화롭지 않고 온갖 고난과 상처를 극복해 왔다는 사실도 평가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자서전 속에도 고인은 일제 식민시대에 태어나 북한 공산정권을 체험하고 눈 내리는 흥남감옥에 갇혔다가 유엔군의 도움으로 풀려나와
이승만 대통령 정권과 미국에서 6차례의 옥고를 치렀다고 적었다. 

이 과정 속에 고인은 미국에 건너가 청교도 정신을 일깨워 세계분쟁을 막고자 노력하고 
구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 북한의 김일성 및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이 피 흘려 싸우는 팔레스타인도 기꺼이 방문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 같은 기록은 객관적인 사실로 우리네가 거의 알고 있는 고인의 삶이다. 그렇지만 고인은 가난과 시련에 따른 어떤 마음속의 상처도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의 참사랑 앞에는 오직 세계평화가 남아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고인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를 감명 깊게 읽을 수 있었다는 소감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0호(2014년 8월호) 기사입니다

‘평화를 사랑한 세계인’ 문선명 탄생 100年이 남긴 것 : 신동아

‘평화를 사랑한 세계인’ 문선명 탄생 100年이 남긴 것 : 신동아

‘평화를 사랑한 세계인’ 문선명 탄생 100年이 남긴 것

“오직 평화만을 이야기한 종교지도자”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20-01-29 

2020년은 고(故)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 탄생 100주년(1월 30일·음력 1월 6일)이다. 논쟁적 종교지도자이자, 평화운동가로 활동한 93세 삶은 파란만장했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통일원리를 설파했으며 특유의 카리스마적 설득력으로 세계인을 사로잡았다. 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화해를 시도했고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만나 한반도의 평화를 놓고 담판했다. 사상적 혼란기에 세계질서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사상으로 통일원리 통일사상 두익사상을 주창했다.


문선명, 한학자 총재.“나는 이름 석 자만 말해도 세상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지는 문제 인물입니다. 돈도 명예도 탐하지 않고 오직 평화만을 이야기하며 살아왔을 뿐인데 세상은 내 이름자 앞에 수많은 별명을 덧붙이고 거부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반대부터 했습니다.”

탄생 100년을 맞은 고(故) 문선명(1920~2012)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는 2009년 출간한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의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논쟁적 종교지도자이자, 평화운동가로 활동한 93세 삶은 파란만장했다. ‘떠들썩한 인물’이라는 말마따나 엇갈린 평가가 따라붙었다. 종교, 인종, 나라가 하나 되는 평화세계를 강론했다.

문선명 총재는 1920년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다.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를 설립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52년 완성한 교리서 ‘원리원본’을 통해 종교관을 구체화했다. 각국에 흩어진 교회를 신령과 진리로 통일해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개신교계는 우상화, 현세주의 등을 문제 삼아 통일교를 이단(異端)으로 몰아세웠다.

교리와 관련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는데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20세기 한국에서 탄생한 종교 중 가장 성공했다. 66년이 지난 현재 세계 194개국에 1000여만 명(통일교 추산)의 신도를 둔 종교로 급성장했다.

문선명 총재는 20세기 한반도가 배출한 몇 안 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메시아라 했던 한국인 종교 운동가’(뉴욕타임스), ‘1970년대를 휩쓴 논쟁적 종교의 지도자’(LA타임스), ‘수천 쌍 합동결혼식의 주재자’(영국 가디언), ‘거대 기업제국의 창시자’(타임)라는 평가가 해외에서 나왔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 통일원리 설파


1992년 8월 25일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3만 쌍 국제합동축복식.1954년 창설 이후 “한국이 세계의 중심 국가이며 하나님의 뜻이 한국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원리는 1950~70년대 한국 청년들의 가슴을 간질였다.

문선명 총재는 1958년 일본, 1959년 미국에서 각각 포교에 나서면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1960년 이후 축복결혼을 통해 일본인 1만여 명이 한국인과 결혼했다. 워싱턴포스트는 2012년 문 총재 타계 직후 “아직도 워싱턴에서 그의 영향력은 상당하다”고 보도했다.

1976년 9월 워싱턴광장에서 열린 문 총재 강연에 30만 명 가까운 인파가 몰려 미국 종교계에 충격을 줬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문 총재를 ‘197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미국에서 신도 수가 빠르게 늘어난 것은 개인주의화한 미국인에게 가정과 공동체의 가치를 제공한 덕분이라는 평가가 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교육, 언론, 학술, 스포츠, 예술, 산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벌이면서 영향력을 키웠다. 세계일보, 용평리조트, 일화, 성남일화천마축구단, 선원건설, 세일여행사 등이 속한 통일그룹도 운영한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타임스, 일본 일간지 세카이닛포, 유니버설발레단, 리틀엔젤스예술단이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계열이다. 선문대, 청심국제중고교, 선화예술중고교, 경복초교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문선명 총재는 타 종교를 아우르는 평화운동에도 나섰다. 1966년 초교파협의회를 창립하고 세계종교회의를 개최했다. 1985~87년에는 미국 목사 5000여 명을 한국으로 초청해 초(超)종교 활동을 전개했다. 2001년 9·11사태 이후에는 중동평화를 위한 초종교 세미나와 평화행진을 개최했다.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경기 가평군 HJ천주천보수련원에 청심탑(높이 33m, 폭 11m)이 우뚝 서 있다. 탑에는 아홉 개 장면으로 나뉜 고(故) 문선명 통일교 총재의 일대기가 돋을새김으로 꾸며져 있다. HJ천주천보수련원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신도에게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한 일본인 신도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 17일 문선명 총재의 생애를 추모하는 7주기 행사가 가평의 청심평화월드센터에서 열렸다. 굿럭 조너선 전 나이지리아 대통령, 하이메 파스 사모라 전 볼리비아 대통령, 각국 전·현직 국회의장·장관 12명, 국회의원 12명 등 정치·경제·종교지도자를 비롯한 3만여 명이 자리를 메운 가운데 7주기 행사가 거행됐다. 문 총재의 아내인 한학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총재의 서신도 낭독됐다.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저는 미친 듯이 세상을 품으려 다녔습니다. 입안이 헐고, 다리가 붓고,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저는 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님과의 약속, 아무리 뜻이 힘들어도 내 대에서 끝을 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기필코 제가 이뤄드리겠다. 그것을 위해서 저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수없이 다짐하며 살아왔습니다. 당신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달을 벗 삼아 대화하며 아버님의 성체를 앞에 두고 제가 했던 약속 ‘생이 다하는 날까지 천일국을 이 땅에 정착시키겠다’는 그 결의를 되뇌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벌써 성화 7주년이 됐습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2020년 1월 30일(음력 1월 6일) 문선명 총재 탄생 100주년과 한학자 총재 탄생 77주년을 맞아 성대한 기념행사를 개최한다. 4월 8일(음력 3월 16일)은 문선명, 한학자 총재의 성혼 60주년 기념일이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다채로운 ‘탄신 100주년’ 기념행사를 마련했다.


‘월드서밋 2020’ 2월 2~7일 킨텍스서 개최2월 2~7일 ‘월드서밋 2020’이라는 명칭으로 △월드서밋 2020 총회 △세계평화정상연합(ISCP) 총회 △세계평화종교인연합(IAPD) 총회 △제4회 선학평화상 시상식 △공생·공영·공의를 위한 세계평화컨퍼런스 △세계평화언론인대회 △세계평화경제인대회 △세계평화학술대회 등이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다.

공생·공영·공의를 위한 세계평화컨퍼런스에는 전·현직 정상과 부통령, 총리, 장관, 국회의원, 종단 지도자, 학자, 언론인, 경제인 등 120개국에서 각계 지도자 6000여 명이 참석해 세계평화를 논의한다. 월드서밋 2020 총회와 세계평화정상연합 총회에는 6000여 명의 각계 지도자가 참가해 문선명 총재의 사상을 재조명한다. 청심평화월드센터에서 64개국 3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인터넷 생중계를 통해 194개국에서 참여하는 ‘2020 천지인참부모 효정 천주축복식’도 예정돼 있다.

문선명 총재만큼이나 짧은 기간에 인류 문화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세계인이 그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한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문 총재의 생애를 이렇게 설명한다.

“성인(聖人) 대부분이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몰림을 당한 것처럼 문선명 총재도 박해를 받았다. 문 총재가 자신들이 가진 지위를 내놓지 않으려는 기득권층이 아닌 소외층의 편에 서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다 보니 박해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예수나 소크라테스가 동족의 고소와 재판에 의해 사형을 당한 것처럼 조국은 문선명 총재를 멀리했다. 특히 예수가 유대교로부터 ‘이단자’로 취급받고, 반체제 인사로 몰려 죽음의 길을 간 것처럼 기독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몰리면서 수난을 겪었다. 그렇다면 문 총재는 왜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서서 앞을 보고만 달려간 것인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일찍이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 하나님의 한이 무엇인지를 절절히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한을 대신 짊어지게 됐고, 하나님을 모든 판단 기준으로 삼으면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에 미쳐 살 수밖에 없었고, 그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선명 총재는 하나님이 ‘영광의 하나님’이 아니라 ‘한과 슬픔의 하나님’이라고 봤으며 하나님 해방을 화두로 삼고 한평생 전력투구했다. “세상에 기적은 없다. 기적은 만드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동시에 인간이 해야 할 책임을 강조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철두철미 믿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특유의 설득력으로 세계인을 사로잡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문선명 총재는 종교지도자면서 평화운동가였다.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이라는 대전제 아래 평화운동을 이끌었다. 1965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제34대 미국 대통령을 만나 세계정세와 종교 문제를 놓고 요담한 것을 시작으로 타계할 때까지 세계를 누비면서 평화운동을 이어갔다. 문 총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만났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아이젠하워에게 3대 조건을 실천하라고 말했습니다. 역사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 사상적인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물었습니다. 면담이 끝난 후 내가 가겠다고 하니까 그는 아쉬워하면서 2층으로 다시 데리고 가서 자기의 생활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자기 일생일대에 잊지 못할 기념품을 내게 주었습니다. 또한 처칠, 스탈린 같은 사람들과 어떻게 했다는 것 등을 자랑하기도 했습니다.”

문선명 총재는 1971년 12월 18일 미국 워싱턴에 도착해 7대 도시 강연에 나섰다. 하나님의 섭리국가로서 미국의 각성과 공산주의의 위협을 논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워싱턴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했다가 발각되면서 사임 압력이 커지자 1973년 11월 30일 ‘사랑하고 용서하고 하나 되라’는 요지의 ‘워터게이트 선언’을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에 발표했다. “미국이 세계적 영도력을 상실할 경우 국제공산주의가 득세할 수 있기 때문에 지혜롭게 이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문 총재는 1974년 2월 1일 백악관 대통령집무실에서 닉슨 대통령과 요담했다. 훗날 문 총재는 이렇게 회고했다.


김일성과 담판 남북 화해 물꼬 터


1991년 김일성 북한 주석과의 회담.“내가 닉슨을 지지한 것은 닉슨 개인을 지지한 것이 아닙니다. 닉슨 대통령의 직(職)을 지지했습니다. 이것은 미국 국민이 앞으로 알아야 할 문제입니다. 나라의 주권자가 새로운 정책을 세우고 그 나라의 운명을 정할 때는 특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지했습니다. 닉슨이 있었으면 월남과 크메르가 저렇게 안 됐습니다. 내가 예상한 그대로 됐습니다.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무기를 전부 다 공산 세계에 몽땅 넘겨주는, 이런 국가적 수치가 되는 놀음을 했다는 것은 민주 세계를 지도하는 국가로서 참패라는 것입니다.”

평화운동가로서 문선명 총재의 삶에서 하이라이트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 김일성 북한 주석과 요담한 것이다. 문 총재는 평화세계 실현을 위해서는 무신론을 앞세우는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고 봤다. 국제승공연합,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등의 기구를 세워 남북 통일운동에 매진했고, 미국을 중심으로 남북미통일연합(CAUSA)과 중남미통일연합(AULA) 등을 창설해 국제적인 공산주의 방어 전선을 펼쳤다. 이 연장선상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을 만난 것이다.

문선명 총재는 1990년 4월 11일 소련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만나 한국과의 수교, 한반도 통일, 소련 내에서의 종교자유 확대 문제 등을 논의했다. 문 총재는 이 자리에서 무신론적 유물론의 미래는 멸망밖에 없으므로 유물론을 폐기하고 종교를 중심한 영적 가치관의 부활을 시도하라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에게 권고했다.

문선명 총재는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 화해의 물고를 텄다. 북한을 떠난 지 40년 11개월 만에 북한 당국의 공식 초청을 받아 1991년 11월 30일 북한 땅을 다시 밟았다. 문 총재에게 김 주석은 원수 중의 원수라고 할 수 있었으나 잃어버린 형제를 찾아가는 마음으로 방문길에 올랐다.

문선명 총재는 방북 첫날 환영 만찬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노동신문은 문 총재의 거동을 대서특필했다. 만수대의사당 연설 때는 땀을 흘리고 책상을 치면서 호령하듯 주체사상의 한계를 지적하는 등 열변을 토했다. 평양 한복판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보희 전 세계일보 사장은 “손에 땀을 쥐고 온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문 총재는 “주체사상을 버리고 하나님주의를 중심 삼고 내 말만 들으면 통일이 될 수 있다”고 김 주석을 설득하기도 했다.

문선명-김일성 회담 이후 남북 당국 간 대화가 급물살을 탔다. ‘남북 간 화해와 불가침, 그리고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남북이 서명했으며, 현안이던 핵 문제와 관련해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이 이뤄졌다.


사상적 혼란기에 주목받는 두익사상


1990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과의 회담.공산주의가 붕괴했으나 세계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문선명 총재는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아우르는 ‘통일사상’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특히 두익사상(頭翼思想), 즉 하나님주의는 하나님 중심의 진리와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데, 우익(右翼)이나 좌익(左翼)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에서 양자를 포용하는 머리사상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가치관에 의해 좌익사상인 공산주의로부터는 증오심, 투쟁심 및 물질주의를 제거하고, 우익사상인 민주주의로부터는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를 제거함으로써 양자를 화해시키고, 공동으로 하나님과 인류의 숙원인 이상세계의 실현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자는 것이다. 인류의 부모이자 모든 종교의 최고 중심인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갈등을 겪는 국가와 민족, 종교를 화해시켜 인류 한 가족의 이상을 실현하자는 게 두익사상의 근본 취지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문선명 총재의 삶을 이렇게 설명한다.

“문선명 총재가 인류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소명의식과 집념, 그리고 누구도 뒤따를 수 없는 초인적 능력 덕분으로 볼 수 있다. 문 총재가 어느 한 분야에도 시선을 뗄 수 없었던 것은 인류 구원과 세계평화 실현이라는 짐을 양어깨에 스스로 졌기 때문이다. 문 총재는 자신이 말한 것은 몸소 실천했다. 그래서 수많은 업적을 거둘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문 총재가 인류에게 남긴 업적이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은 말과 행동이 동반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문 총재는 언제나 섭리의 최전선에 섰다.

문 총재는 평화세계를 이루기 위해 평생 세상의 낮고 구석진 곳을 찾아다녔다. 세계 기아(飢餓) 문제를 해결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웃을 돕기 위해 남미의 오지와 춥디추운 알래스카에서 고깃가루(피시파우더) 공장을 세우고 학교를 만들었다. 그들에게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학업의 기회를 제공했다.


“행동하는 선각자”소련의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화해를 시도했고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만나 한반도의 평화를 담판했다. 또 도덕적으로 무너져가는 미국에 가서 청교도 정신을 일깨우는 소방수 노릇을 하며 세계의 분쟁을 막는 일에 골몰했다.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의 화합을 위해 테러가 난무하는 팔레스타인에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인 수천 명을 한자리에 모아 화해의 광장을 마련하고 평화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문 총재만큼 세계평화를 위해 광폭행보를 보여준 성직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문 총재는 그야말로 행동하는 선각자였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은 “문선명 총재가 주창해 온 ‘통일원리’ ‘통일사상’ ‘두익사상’이 문명사적 대전환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기존의 세계질서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사상으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빛을 밝혀온 문 총재의 생애를 알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은 인류의 몫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신동아 2020년 2월호

2022/07/30

PART II PHILOSOPHIES OF JAPANESE BUDDHISM

 The Oxford Handbook of JAPANESE PHILOSOPHY


Edited by BRET W. DAVIS, © Oxford University Press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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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PART I SHINTŌ AND THE SYNTHETIC NATURE OF JAPANESE PHILOSOPHICAL THOUGHT

1 Prince Shōtoku’s Constitution and the Synthetic Nature of Japanese Thought -- Thomas P. Kasulis

2 Philosophical Implications of Shintō -- Iwasawa Tomoko

3 National Learning: Poetic Emotionalism and Nostalgic Nationalism Peter Flueckiger


PART II PHILOSOPHIES OF JAPANESE BUDDHISM

4 Saichō’s Tendai: In the Middle of Form and Emptiness -- Paul L. Swanson and Brook Ziporyn

5 Kūkai’s Shingon: Embodiment of Emptiness -- John W. M. Krummel

6 Philosophical Dimensions of Shinran’s Pure Land Buddhist Path Dennis Hirota

7 Modern Pure Land Thinkers: Kiyozawa Manshi and Soga Ryōjin Mark Unno 83

8 The Philosophy of Zen Master Dōgen: Egoless Perspectivism Bret W. Davis 201

9 Dōgen on the Language of Creative Textual Hermeneutics Steven Heine

10 Rinzai Zen Kōan Training: Philosophical Intersections -- Victor Sōgen Hori

11 Modern Zen Thinkers: D. T. Suzuki, Hisamatsu Shin’ichi, and Masao Abe

Mori Tetsurō (trans. Bret W. Davis), Minobe Hitoshi (trans. Bret W. Davis), and Steven Heine





PART III PHILOSOPHIES OF JAPANESE CONFUCIANISM AND BUSHIDŌ

12 Japanese Neo-C onfucian Philosophy -- John A. Tucker

13 Ancient Learning: The Japanese Revival of Classical Confucianism John A. Tucker

14 Bushidō and Philosophy: Parting the Clouds, Seeking the Way Chris Goto- Jones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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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IV MODERN JAPANESE PHILOSOPHIES


15 The Japanese Encounter with and Appropriation of Western

Philosophy 333

John C. Maraldo

THE KYOTO SCHOOL

16 The Kyoto School: Transformations Over Three Generations 367 Ōhashi Ryōsuke and Akitomi Katsuya (trans. Bret W. Davis)

17 The Development of Nishida Kitarō’s Philosophy: Pure Experience, 
Place, Action- Intuition 389
Fujita Masakatsu (trans. Bret W. Davis)

18 Nishida Kitarō’s Philosophy: Self, World, and the Nothingness Underlying Distinctions 417
John C. Maraldo

19 The Place of God in the Philosophy of Tanabe Hajime 431
 James W. Heisig

20 Miki Kiyoshi: Marxism, Humanism, and the Power of Imagination 447 Melissa Anne-M arie Curley

21 Nishitani Keiji: Practicing Philosophy as a Matter of Life and Death 465 Graham Parkes

22 Ueda Shizuteru: The Self That Is Not a Self in a Twofold World 485 Steffen Döll

26 Japanese Christian Philosophies, Terao Kazuyoshi

27 Yuasa Yasuo’s Philosophy of Self-C ultivation: A Theory of Embodiment,  Shigenori Nagatomo 563 575

OTHER MODERN JAPANESE PHILOSOPHIES

23 Watsuji Tetsurō: The Mutuality of Climate and Culture and an Ethics of Betweenness -- Erin McCarthy

24 Kuki Shūzō: A Phenomenology of Fate and Chance and an Aesthetics of the Floating World -- Graham Mayeda

25 Comparative Philosophy in Japan: Nakamura Hajime and Izutsu Toshihiko - John W. M. Krummel

26 Japanese Christian Philosophies Terao Kazuyoshi

27 Yuasa Yasuo’s Philosophy of Self-C ultivation: A Theory of Embodiment - Shigenori Nagatomo 563 575
28 Postwar Japanese Political Philosophy: Marxism, Liberalism, and the Quest for Autonomy -- Rikki Kersten

29 Raichō: Zen and the Female Body in the Development of Japanese Feminist Philosophy -- Michiko Yusa and Leah Kalmanson

30 Japanese Phenomenology -- Tani Tōru

31 The Komaba Quartet: A Landscape of Japanese Philosophy in the Thought -- Bret W. Davis 685




PART V PERVASIVE TOPICS IN JAPANESE PHILOSOPHICAL THOUGHT

32 Philosophical Implications of the Japanese Language 665

Rolf Elberfeld (trans. Bret W. Davis)

33 Natural Freedom: Human/N ature Nondualism in Zen and Japanese  

34 Japanese Ethics Robert E. Carter

35 Japanese (and Ainu) Aesthetics and Philosophy of Art
Mara Miller and Yamasaki Kōji

36 The Controversial Cultural Identity of Japanese Philosophy Yoko Arisaka

Index

연기와 희론(1) - 불교신문

연기와 희론(1) - 불교신문

연기와 희론(1)

승인 2003.04.09 

“연기(緣起)는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는 접근할 수 없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송(中論頌)〉 귀경게에 나오는 이 구절은 대승불교(大乘佛敎) 사상의 핵심을 건드리는 말입니다. 
‘세간(世間)의 무수한 속설로는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은 한역(漢譯)에서는 흔히 ‘희론적멸(戱論寂滅)’이라는 멋들어진 말로 옮기고 있습니다.

 ‘적멸(寂滅)’이야 ‘소멸된다’ ‘없어진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좀 복잡한 문제는 제가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 풀이한 ‘희론(戱論)’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이 말은 대승불교 사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아주 중요한 용어이기 때문에 2회에 걸쳐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희론’은 범어 ‘쁘라빤짜(prapaa)’의 한역인데, 이는 어근 pra-pa 또는 pra-pac (상세히 설명하다;흩뜨리다)에서 나온 명사형입니다. 원래는 현시, 전개, 확장, 확산, 확대, 다양화, 상세한 설명을 뜻하는 말인데, ‘흩뜨리다’는 뜻이 우세했는지 점차로 철학적 영역에서는 ‘현상’ ‘현상계’ ‘환상’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희곡에서는 ‘어리석은 말’을 뜻하게 됩니다. 대승불교를 주요한 모태(母胎)로 삼은 한역에서는 ‘희론(戱論), 허위(虛僞), 망상(妄想)’과 같이 좋지 않은 뜻으로만 쓰입니다. 

한역만 보아도 대승불교에서 ‘쁘라빤짜’를 상당히 안 좋게 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아마도 ‘흩뜨리다’라는, 어근의 뜻을 살려서, 무언가 진상을 꿰뚫지 못하고 언저리로만 얼쩡거리는, 알갱이를 꿰차지 못하고 모호하게 흩뜨리는 말이라는 뜻으로, ‘희론’이라 옮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연기를 왜 ‘희론적멸’로 표현했는지 〈중론송〉의 다음 게송(偈頌)을 대비시켜 생각해보면 그 의의가 좀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업(業)과 번뇌(煩惱)가 소멸함으로써 해탈(解脫)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심(分別心, vikalpa)에서 생기고 분별심은 희론(戱論, prapaa)에서 생기지만, 희론은 공성(空性)에서 소멸한다.“(18-5)이 게송에서 공성(空性)은 연기(緣起)와 같은 말입니다. 〈중론송〉에서는 “‘연기’ 바로 그것을 우리는 ‘공성(空性)’이라 말한다. 〈중략〉”(24-1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업이나 번뇌는 생사윤회(生死輪廻) 세계를 가리키기 때문에, ‘희론’은 생사윤회의 원인(原因)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되고, 연기(緣起)와 대극적(對極的)인 자리에 놓입니다. ‘분별심(分別心)’이란 말이 나왔으니 유식사상(唯識思想)에 빗대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유식사상에서는 우리 마음을 표층적(表層的) 영역과 심층적(深層的) 영역으로 나눕니다. 심층 영역에 해당하는 마음이 소위 ‘알라야식’이지요. 

그런데 유식사상의 용어법을 보면, 표층마음과 심층마음을 같이 싸잡아서 곧 우리의 오감각(五感覺)과 의식(意識), 마나식, 알라야식을 전부 ‘위깔빠(vikalpa)’ 곧 ‘분별심’이라고 부릅니다. ‘분별심’은 생사윤회의 대해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 중생(衆生)의 마음을 뜻합니다. 흥미로운 일은 ‘분별(分別)’이란 말로 중생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 마음의 현 상태까지 그려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분별’이라 하면 여자-남자의 분별, 적-친구의 분별 등 수많은 차별상(差別相)이 언급되겠지만 이 모든 분별은 나와 대상의 분별 곧 주관(主觀)-객관(客觀)의 분별(分別)로 통합될 수 있습니다. 유식사상에서는 이 분별심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지 못하는 한, 주관과 객관으로 경계선이 그어진 분별심이 있는 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고 이 때문에 업과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가르주나는 이 분별심이 희론에서 생긴다고 하는군요. 왜 그럴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것이 바로 짠드라끼르띠입니다. 그는 ‘희론은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희론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무언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말하고 있지요? 이 즈음에서 언어의 어떤 점이 생사윤회와 관련되는지 캐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희론戱論, 산스크리트어 prapanca쁘라빤짜

amisan511

<희론戱論, 산스크리트어 prapanca쁘라빤짜>

여기서 희戱는 진실이 모자란다는 뜻이고 론論은 사물에 대한 생각이 진리에 맞지 않는
언론을 말한다 따라서 희론이란 허망한 언어 무의미한 말 부질없는 말 헛소리에 가까운 쓸데
없는 말장난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희론戱論은 잘못되고 무의미한 말로서 다듬어지지 않은 생
각이며 진리에 어긋나고 그릇된 집착과 차별에서 비롯돼 사람들을 망상의 세계 속에 빠뜨리는
것이다
탐ㆍ진ㆍ치 삼독심에 오염된 마음작용이 희론이다
주객전도된 전도몽상 번뇌 망상이 희론이다
사실본래성품 그대로 자각 인식하지 못하고 알음알이로 사유하고 고집하는 것이 희론이다 희론은 나는 존재한다라는 자아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일상적 지각의 확산 즉 망상을
의미한다 세상사람 가운데는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정론正論보다도 「닭이 먼저
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결론이 나지 않는 끝없는 쟁론만을 생산해내는 희론戱論에 빠져
허송세월하는 안타까운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따라서 무익한 희론戱論을 일삼는다면 마음
만 산란해진다 이러한 망상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모든 질병의 근원이다 이것이 개인
적으로 나타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수반하고 사회적으로 나타나면 싸움 논쟁 언쟁 교만
중상 질투 인색을 수반한다
희론은 산스크리트어 쁘라빤짜prapanca의 한역인데 이는 어근 prapa 또는 prapac
- 상세히 설명하다 흩뜨리다에서 나온 명사형이다 원래는 현상 확장 다양화 상세한 설명
발산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율배반적인 사유의 개념적 확장 등의 의미를 가졌다
이 말이 점차로 철학적 영역에서는 현상 환상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희곡에서는 어리석은
말을 뜻하게 된다 한역에서는 희론을 허위虛僞), 망상妄想과 같이 좋지 않은 뜻으로만 쓰
인다
이는 희론이 무언가 진상을 꿰뚫지 못하고 언저리로만 얼쩡거리는 알갱이를 꿰차지 못하고
모호하게 흩뜨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행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면서 말로만 떠드는 것



경전經典에 어떤 구절을 기억해 가지고 어떤 경전에 이런 말이 있다느니 해서 자기를 과시하
는 것이 희론이다 그래서 희론은 진정한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용수龍樹는 <중론中論>에 희론戱論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용수는 희론을 무대 위에서
춤추는 광대 같은 것이라 했다 허구적인 관념을 실재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마음작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희론에는 어디까지나 전도된 인식이 전제된다 예컨대 우리가 나라는 표현을
할 때 마치 그 말에 따라 어떤 영속적인 나라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선입견을 갖게 되는 것과 같다

〈중론송〉의 다음 게송을 대비시켜 생각해보면 그 의의가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업과 번뇌가 소멸함으로써 해탈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심에서 생기고 분별심은 희론에서
생기지만 희론은 공성空性에서 소멸한다185고 했다
이 말을 중국에서 희론적멸戱論寂滅이라 멋지게 한역했다 참된 궁극적 실재에서는 희론
이 절멸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용수는 공성空性은 연기와 같은 말인데 연기緣起는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써는
접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연기는 바로 공성空性이라고 했다 그리고 희론은 생사윤
회의 원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하고 연기와 대극적對極的인 자리에 놓았다

그리하여 중도中道나 중관中觀은 바로 이런 망상희론을 없애고 세상을 똑바로 보는 방법
을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망상의 소멸 번뇌의 소멸이 바로 깨달음이고 해탈이라고 했다
부파불교 당시 무성했던 아비담마abhidhamma에는 희론이 너무 많았다 이를 공격하기
위해 등장한 대승불교였기에 용수는 <중론中論>에서 심도 있게 희론을 다룬 듯하다
허긴 침체한 우리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는 남방불교의 아비담마 중에도 이해하지
못할 허황된 희론이 많이 보인다 사몰심死沒心), 그리고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니 존재지
속식存在持續識이니 결생심結生心이니 하는 바왕가찌따bhavanga citta 등은 언뜻 보기
엔 제법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깊이 사유해보면 완전히 무대 위에서 춤추는 광대 같은 소리다
때문에 오늘날 남방 상좌부불교 이론에 열광하는 범부들을 위해 마구 퍼다 옮기는 식의 행태는
곤란하다
희론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간화선看話禪이라는 기제에 맞서려는 듯한 아비담마가 오히려
희론에 가까운 것은 아닌지 냉정히 검토해봐야 한다 숭고한 부처님 법을 다룸에는 조심스러워
야 하는데 얼마간의 알음알이로 신중하지 못하고 종횡무진 하는 일부 남방 아비담마 전공자들
의 태도에는 문제가 있다

[3분 양심] 공空의 체험 - 지금 이 순간 _홍익학당.윤홍식


[3분 양심] 공空의 체험 - 지금 이 순간 _홍익학당.윤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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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30 일요대담) 
그냥 이미 부처인 줄 아셔야 해요.

그냥 참나 상태라는 걸 아셔야 해요.
여러분이 "공부가 되네, 안 되네." 
뭐라고 해도 참나 상태입니다.

공부 안된다는 말이 어디서 나오는데요?
참나 자리에서 나와요.
죽겠다는 말도 참나 자리에서 나와요.
슬플 때 슬퍼서 미쳐버릴 것 같은 상태,
그것도 참나 자리에서 나옵니다, 다.

이걸 아는 게 법공(法空)이거든요.

만법이 다 이렇게 결국 이게, 여기가 공(空)자리고요.
이걸 이론으로 설명하는 분들은 
이 공에 대해서 온갖 얘기를 하시는데,
이론으로 말하면 끝도 없이 설명할 수 있죠.
그런데 여러분이 딱 체험하셔야 해요.

공 자리는 과거, 아까 하셨죠?
제가 보니까 아까 하신 것 같은데,
과거에 대한 집착, 내려놓고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시고.

그러면 뭡니까? 
과거는 사라지고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존재하시죠?
"그런가?" 하시면 과거입니다, 지금.
지금 이 순간 존재하시면 돼요.

이 순간 존재하기가 깨어있는 상태고, 
이게 가능한 이유는
여러분이 원래 공에 바탕을 두고 법(法)을 굴리세요.
이 법이라는 건 오온(五蘊)이죠, 육근(六根).
보고 듣고 하는, 오감하고 생각, 감정입니다.

그래서 이게 오감하고 생각, 감정을 하나로 쳐서 
이건 의근(意根), 이건 오근(五根) (합)해서 육근입니다.
여러분이 법이라고 하는 게 
여러분이 경험하는 게 생각, 감정, 오감밖에 없어요.
죽을 때까지 경험하는 게.

다음 생에 또 오셔도 그거밖에 경험할 게 없잖아요.
지금 경험할 수 있는 건 다 오감 아니면 
생각, 감정이에요.
생각에도 더 미세한 생각, 거친 생각이 있지만
결국은 어떤 분별입니다. 
따지는 거죠, 따지는 거.

에고도 생각이에요. 
'남하고 나는 다르다.'라는 생각하고,
'나의 동일성은 계속 유지된다.'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게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서 
여러분이 에고 의식을 무의식, 7식이다 이렇게 해서
유식학에서 더 깊이 심층 의식으로 보는데,
결국 그것도 미세한 생각이에요.
내가 저 속으로 따지고 있는 거예요.

'나와 남은 다르다.' 
명심하고 계신 거예요, 늘.
'나는 늘 이렇게 유지되어야 한다.'
'내가 가장 중(요)하다.' 이 생각을 계속하고 계세요, 
무의식 상에서.
그게 7식이라고 하는 게 하는 짓입니다.

에고도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생각, 감정, 오감 빼고는 참나 밖에 없죠.
이런 모든 법들이 본래 공에서 나왔다 하는데,
그러면 둘이 "여기서 이게 나왔다는 말이냐?"라고 
이해하시면 안 되는 게 
차원이 다른 세계입니다.

이건 시공이 있는 세계이고, 
이건 시공 없는 세계예요.
지금, 이 순간에 딱 집중하시면 
거기는 시간도 공간도 안 느껴지고,
존재만 있습니다. 
차원이 달라요.

거기서 생각이 하나가 굴러가면, 시공 안에 들어와요.
생각이 하나가 굴러가면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고,
공간, 여기저기, 동서남북이 느껴지고,
나와 남이 찢어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법이 공에서 나왔으니까 법공이다.' 
이렇게 아는 거죠.
그런데 이 공이 여러분이 노력해서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명상을 해서 만들어내는 게 아닙니다. 
원래 있는 거예요.

원래 여러분은 무슨 짓을 해도,
이 육근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해도
공에서 다 나퉈서 이게 일어나는 일이지,
여러분이 뭘 만들어내는 게 아니에요.
공에 터전을 두고 펼쳐지는 거죠.

여러분이 방향을 이쪽 방향, 이쪽 방향, 
에고가 거들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에고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원래 있는 걸 에고가 굴리는 거고,
원래 있는 거는 뭐가 원래 있는 거냐?
공(空)만 있습니다, 사실.

없는 게 원래 있어요. 
텅 빈 게 원래 있어서 거기서 뭐가 나오기 때문에
애초부터 여러분 참나 상태예요, 지금.
여러분 마음의 뿌리가 참나예요.

여러분이 “참나를 안다, 모른다.” 뭐라고 하시건 간에.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그냥 쉬시면 참나가 드러나요.
참나를 안 찾으면 참나가 드러나죠, 오히려.

참나를 안 찾는다는 게 
망상을 부린다는 게 아니고요,
참나 조차도 안 찾고 계시면
그 상태가 제일 깨끗하게 참나가 드러난다고요.
드러나는 상태라는 거죠.

[3분 법문] 대승불교의 법공사상 _홍익선원.윤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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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법문] 대승불교의 법공사상 _홍익선원.윤홍식
2,499 viewsJul 23, 2017


(170521 일요대담)  대승불교의 법공사상은, 
이거 헷갈리세요, 많은 분들이.
“법이 무아(無我)라고 했잖아! 
소승도, 초기불교도, 소승불교도.
그런데 대승에서 법공이 결국 오온(五蘊)이 공(空)하다인데, 
뭐 비슷한 거 아닌가?”

그래서 또 어떤 학자 분은, 
그 분도 또 유명한 분인데 논문을 써서 
“초기불교에 이미 대승사상이 보인다.”해서 
“법공사상이 부처님의 제법무아(諸法無我)에 이미 나타나 있다.”
라고 주장해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 텍스트에서 읽어 주셔야 되는데 막 섞어버려요, 지금.
반야심경에 법공사상은 뭐죠?
색(色)이 공(空)이고, 공(空)이 색色)이라는 거. 
다른 느낌입니다.

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오온(五蘊)이, 색수상행식이 오온이죠.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반야심경에서 이러죠. 
색(色)이 공(空)이요, 공(空)이 색色)이요. 
수상행식 역부여시(受相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도 똑같다.

즉, 내가 말을 더 안하겠는데 
수(受)도 공(空)이요, 공(空)도 수(受)고, 
상(想)도 공(空)이고, 공(空)도 상(想)이고, 
행(行)도 공(空)이요, 공(空)도 행(行)이고, 
식(識)도 공(空)이요, 공(空)도 식(識)이다.
이 말을 더 해야 되는데 말을 줄인다. 이 뜻이에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수상행식 역부여시(受相行識 亦復如是)  
또한 그것들도 똑같다, 사정은. 
이해되시죠, 이제?  

반야심경이 얘기하고 싶은 게, 
법무아(法無我)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색수상행식이 내뜻대로 안 된다, 무상해서. 
이 얘길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 관세음보살이 깨달았던 오온이 공한 줄 알고 
일체의 고행을 넘어가셨다는 반야심경의 주장이, 
그 대승경전의 주장이,
초기불교의 제법무아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그 다음 뭔 얘기를 하죠, 반야심경에?
오온이 공하다고 해놓고, 그 다음 뭔 얘기를 해요?
공(空)이 또 오온이라고 했다가, 
공(空)은 불생불멸이라고 그래요.
이게 이야기가 전혀 달라지는 겁니다,

즉, 오온도 불생불멸이에요, 따라서. 
반야심경 논리상 오온이 본래 공(空)이라고 했죠?
공이 색이라고 했죠. 색이 공이고.
따라서 “공(空)은 불생불멸이다!”라고 한 얘기는, 
오온자체두요, 생멸이 없다.
오온도 생겨난 적이 없고, 멸할 일도 없다는 거예요.

그럼 불생불멸 해석만 해도 여러 가지가 있겠죠.
“생겨난 적이 없고 멸한 적도 없다? 없다는 거 아닐까?”
또 이런 학자가 있습니다. 이런 논문을 써요.

정말 많은 학자들이 있죠. 
함정 같은 함정에 다 빠져들고 계십니다. 제가 볼 때는. 
함정 비슷한 것만 보여도 다 뛰어드세요.
빠져들지 마시고 중도로 중도로만 가셔야 이해가 됩니다.
어떤 함정에 빠지시느냐?
불생불멸이라 그러면 없는 거래요. 
“생겨난 적이 없다잖아!” 
그게 아니에요. 
불생불멸이라는 거는 늘 있다는 거예요. 

자, 이게 언제부터 이 펜이 있었는지 몰라요. 
생겨난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죽을 일도 없죠. 그 뜻 입니다.

따라서 오온은, 자! 수신호로, 수화로 제가 해볼게요. 
공(空)입니다. 공(空)에서 오온이 나왔어요. 
근데 자, 이게 다른 손인가요? 
요렇게 하며 손 아니고, 요렇게 하면 손인가요?
이해되시죠?

어떤 선사가 이렇게 하면~ 
이게 우주 천지창조에요. 
이건 다시 천지 소멸이죠.
근데 이게 창조하고 소멸하는 생멸상이 있으니까,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 같죠?
이 자체는 영원한 거예요.

그러니까 펼쳐졌다 갈무리됐다, 펼쳐졌다 갈무리됐다 한들, 
그게 사실은 그 자체로 영원한 공(空)의 작용이에요.
생겨난 적도 없고 소멸될 일도 없는
그 공(空)이 우주에서 끝없이 작용을 펼치고 있는 것 뿐이에요.

따라서 여러분의 추잡스러운 생각, 이기적인 탐진치의 마음,
아니면 어떨 때는 또 고귀한 마음,
그 모든 마음 작용이, 여러분 영혼의 작용이요, 
결국 본질이 공(空)이고 생겨난 적이 없는 거예요.

공(空)이 생겨난 적이 없듯이
여러분 마음도 영원하다는 거예요. 
변화할 뿐, 영원하다는 거예요.
여기까지 이해되세요?

내 영혼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하신다는 것도 
반야심경에 맞지 않아요. 
색(色)이 공(空)이고 공(空)이 색(色)이라는 걸 모르시는 거예요.
공(空)은 반드시 색(色)으로 나타나요. 
이렇게 계속 쥐고 있는 게 아니라 
반드시 색(色)으로 나타나요. 

불교의 공(空)사상과 노자사상의 비교 / 이병욱 불교평론

불교의 공(空)사상과 노자사상의 비교 / 이병욱 < 논단 < 기사본문 - 불교평론

불교의 공(空)사상과 노자사상의 비교 / 이병욱
기자명 이병욱   입력 2008.07.15

이병욱 lbw33@hanmail.net


 1. 서론

세계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서로 가까이 있는 두 나라 사이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차라리 거리가 먼 나라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가까이 있는 나라와는 감정의 골이 깊은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일본에 대해 국민감정이 좋지 않다. 서양인의 눈으로 보자면, 우리나라나 일본은 동아시아 문화에 속해 있고 상당부분에서 공통점도 있건만, 그러나 우리나라와 일본은 좋게 말해서 가깝고도 먼 사이이고, 달리 말하자면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일상사에서도 발견된다. 이해관계도 없고 서로 만날 일도 없는 사람과는 원수 맺을 일도 없다. 그에 비해 자주 만나는 사람과는 친해질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다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가깝고도 먼 사이는 철학이나 사상분야에서도 적용된다. 불교와 노자사상은 동양사상으로서 서로 닮은 점이 많다. 그래서 중국철학의 흐름에서 보자면 노자를 포함한 노장(老莊)사상과 불교사상이 동일하다고 말하는 주장도 적지 않게 있지만, 그에 비해 상대편의 사상에 대해 서로 비판한 일도 적지 않다.

나는 이렇게 서로 공격을 했다는 점이 불교와 노자사상이 서로 다르다는 증거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동아시아문화에 속해 있고 그에 따라 서로 공통점이 많이 있는데도 서로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것처럼, 불교와 노자사상도 공통점이 많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관계에서는 차이점이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불교와 노자사상이 공통점은 무엇이고,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이 분야의 선행연구가 상당히 있지만 자세한 소개는 생략하고, 다만 필자의 견해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2. 불교의 공(空)사상

불교사상의 흐름은 커다란 물줄기에 비유할 수 있다. 인도불교의 흐름은 크게 4단계로 나누어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초기불교, 부파불교, 대승불교, 밀교로 나누어진다. 그 가운데 부파불교에 속하는 상좌부가 동남아시아로 전해져서 동남아시아 불교의 중심이 되었고, 대승불교는 중국문화권에 전해져서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에서 꽃을 피웠다. 밀교는 티베트에 전해졌다. 현재 서구에서는 이 3가지의 불교가 서로 경합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불교의 전개과정은 복잡하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을 잡아서 불교를 대표한다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노자와 불교를 비교하기 위해서는 중국문화권에 속하는 대승불교와 비교하는 것이 더 편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대승불교라고 해도 그 경전이 많다. 어떤 경전을 기준으로 해서 노자와 비교할 것인지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을 대표할 수 있고, 노자사상과 친연성이 있는 《금강경(金剛經)》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선택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1) 공(空)사상의 대한 설명

바둑을 둘 때 옆에서 훈수를 두면 그 때는 자신의 실력보다 더 수가 잘 보인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기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승부에 대한 욕심이 없으므로 평소보다 수가 더 잘 보이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공(空)사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공(空)은 집착의 마음을 비우고 본래의 청정한 마음을 되찾는 것이고, 그 마음상태에서 윤리적 행위를 한다면, 헤아릴 수 없는 복덕(福德)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는 공(空)사상에 대해 3단락을 나누어서 접근하고자 한다.

(1) 공(空)의 의미
공(空)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님을 꿰뚫어 보았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점을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5온(五蘊)이 모두 공(空)한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재앙을 건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반야심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5온은 다섯 가지 쌓임이라는 의미이고, 5온은 세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5온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다. ‘색’은 물질과 육체를 가리키는 것이고, 수·상·행·식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4가지를 더 자세히 구분하면, 수(受)는 고통과 즐거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작용이고, 상(想)은 사물의 이미지를 받아들여 그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기능이며, 행(行)은 마음이 가는 길이라는 의미로서 의지작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識)은 수·상·행의 기초가 되어주는 마음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수·상·행이 일어날 수 있도록 근거가 되어주는 마음의 터전이 식(識)이다. 따라서 5온이 공(空)하다는 것은 세상만물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님을 직관(直觀)하였다는 의미이다.

(2) 중도(中道)로 표현된 공(空)
앞에서 말한 공(空)은 중도(中道)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중도는 일반적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非無〕라고 표현되는데, 《반야심경》에서는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不生不滅〕,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不垢不淨〕,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不增不減〕라고 한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공(空)이란 모든 개념과 분별을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판단을 단순화하면, ~이다·~아니다라고 할 수 있고 공(空)은 이 두 가지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중도로 표현된 공(空)은 모든 개념과 분별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지에서 보자면, 불교에 집착해서도 곤란하다. 물론 처음에는 불교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라야 하겠지만, 불교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서는 불교의 가르침조차 집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도 부처님의 경지에서 보자면 어쨌든 분별이고 집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야심경》에서는 초기불교의 기본적 개념인 5온·12처(十二處)·18계(十八界)·12연기(十二緣起)·사성제(四聖諦)·성인(聖人)의 지혜도 부정된다. 그리고 부정하는 이유는 이러한 개념이 의미가 없어서가 아니고, 불교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다 보면 마지막에는 불교의 가르침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3) 공(空)의 다른 표현: 청정한 마음을 일으키는 도리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사상은 《금강경》에서는 청정한 마음을 낸다는 것으로 바뀌어서 표현된다. 여기서 말하는 ‘청정한 마음’이란 빛깔〔色〕에 집착해서 생겨난 마음도 아니고, 소리·향기·맛·촉각·법(法: 관념의 대상)에 집착해서 생겨난 마음도 아니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생겨난 마음이 바로 청정한 마음이고 이것이 바로 공(空)이다. 그리고 이러한 청정한 마음을 얻었을 때, 언어에 대한 집착이 사라진다.
일반적으로 범부는 언어와 실제가 서로 대응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의자’ 같은 단어는 언어와 그 실제가 일치한다. 그러나 ‘황금의 산’이란 말은 개념으로는 존재하지만, 그 개념에 상응하는 실제의 사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범부는 ‘황금의 산’이란 말을 들으면, 그 말에 상응하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그것에 집착하여 그것을 구하기 위해 애쓴다. 만약 황금의 산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해도 그러한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사람들이 황금을 얻기 위해서 황금의 산에 몰려들 것이기 때문에 순식간에 황금의 산은 없어질 것이다.

따라서 중생이냐 부처냐 하는 차이는 언어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부처는 언어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 다만 언어란 사물의 실제를 왜곡하는 것이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는 진리를 전달할 수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에서 말하는 즉비(卽非)의 논리이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A는 A가 아니다. 그러므로 A라고 한다”라고 표현한다. 이 말을 다시 풀이해보자. A라는 단어는 중생이 집착하는 것과 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A는 A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 진리를 전달할 수는 없으므로 일단 부정해서 집착심을 없앤 다음, 그 단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그러므로 A라고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대목을 《금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莊嚴)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인가 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니, 이것을 장엄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내야 할 것이다. 곧, 빛깔〔色〕에 집착해서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소리·향기·맛·촉각·법(法: 관념의 대상)에 집착해서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다만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켜라!(應無所住 而生其心)” (《금강경》〈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2) 공(空)사상의 활용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덤비는 병사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 그저 오로지 마음속에서 죽어도 좋으니 무조건 전쟁에서 이기겠다고 한다면 어느 누가 이 병사를 감당하겠는가? 그래서 옛말에 살려고 하면 죽고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오히려 산다고 하였으리라. 이 말은 공(空)사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공(空)을 자각하고 그것에 의지해서 윤리적 행위를 할 때 윤리의 극치를 이룰 수 있다. 모든 사심(私心)을 이기고 순수하게 윤리적 행위를 실천할 때 그 행위는 더욱 빛나는 법이다.

이러한 점에서 《금강경》에서는 위에서 말한 청정한 마음, 곧 공(空)에 기초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착한 행동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예를 들면, 보시는 남에게 자신의 재산을 주는 착한 행동이지만, 단순히 보시만을 행하지 말고, 이러한 착한 행동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한다. 이는 윤리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 《금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시 수보리야! 보살은 법(法 : 대상)에 대해 머문 바〔집착하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 말하자면, 빛깔〔色〕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하고, 소리·향기·맛·촉각·법(法:관념의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해야 하니, 상(相: 모습)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금강경》〈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그러면, 왜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보시를 행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그렇게 보시를 행하면, 그 결과 얻는 복덕(福德)이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허공을 헤아릴 수 없듯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 보시)의 복덕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주상보시의 복덕이 헤아릴 수 없는 정도로 많은 이유는 이러한 보시를 행하면 보시를 행하는 사람이 복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복덕을 받지 않는다〔不受福德〕”라고 말한다.

3. 노자(老子)의 사상

노자의 생애에 대해서는 《사기열전》에서 소개하고 있다.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苦縣) 여향(?鄕) 곡인(曲仁) 마을〔里〕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이(耳)이다. 자(字)는 백양(伯陽)이고, 시호는 담(聃)이다. 주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禮)를 물었다고 한다. 노자는 도덕을 닦고 그 학문은 스스로 몸을 숨기고 이름 내지 않는 것〔無名〕에 힘썼다. 주나라에 거주한 지 오래되었는데, 주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마침내 주나라를 떠났다.

국경의 관문〔關〕에 이르자 관령(關領)인 윤희(尹喜)가 말하기를 “선생님은 숨어 버리려고 하시니, 저를 위해서 억지로라도 책을 저술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노자는 상·하편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것은 도덕의 의미를 말한 5천여 언(言)의 분량이었다. 그리고 나서 떠나 버렸는데, 아무도 그가 죽은 곳〔所終〕을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사마천이《사기열전》을 쓸 때에도 노자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說)이 있었다.

그래서 초나라 사람인 노래자(老萊子)가 노자라고 하기도 하고, 주나라 사람인 태사담(太史?)이 노자라고 《사기열전》에서 소개하기도 한다. 이처럼 여러 사람이 노자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노자》라는 저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노자》라는 책이 여러 사람에 의해서 작성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단일 관점이 유지된 것으로 간주하고자 한다. 그래야 철학적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선, 노자사상은 도(道)의 체(體)와 용(用)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도(道)의 체(體)는 불교의 공사상과 공통점이 있지만, 도(道)의 용(用)은 불교의 공사상과 관련이 적으므로 이 점에서 보자면 불교의 공사상과 노자사상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1) 노자사상의 근본 : 도(道)의 체(體)와 용(用)

《노자》에서 말하는 도(道)의 체(體)는 고요하고 고요한 것이어서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도(道)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도(道)의 용(用)은 일반적으로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는 모든 변화는 극단에 이르면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계절의 변화를 보자. 봄에서 여름으로 진행되면서 무척 더워지지만 이 무더위가 계속되진 않는다.

더위가 한창이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이제 점점 날씨는 서늘해진다. 또한 가을에서 겨울로 진행되면서 무척 추워지지만 이 추위가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에서 정점을 찍고 나서 이제 봄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처럼 날씨는 극단에 이르면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다시 돌아온다. 이러한 것을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곧 모든 변화는 극단에 이르면 결국에는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 된다. 이러한 도(道)의 체(體)와 용(用)은 《노자》 25장에서 잘 나타난다.

어떤 물건이 혼연히 이루어져 천지보다 먼저 생기었다. 고요하고 고요해서 홀로 서서 고쳐지지 않고 두루 다니지만 위태하지 않으니 천하의 어머니라 할 만하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이름하여 도(道)라 하고 억지로 그것을 이름하여 대(大)라 한다. 대(大)는 가는 것이고, 가는 것은 멀어지고, 멀어지는 것은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道)는 위대하고, 하늘은 위대하며, 땅은 위대하고 왕(王)도 위대하다. 이 땅에 네 가지 위대한 것이 있는데 왕(王)은 한 가지에 속할 뿐이다. 따라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道)를 본받고, 도(道)는 자연(自然)을 본받는다.1)

위 인용문에서는 도(道)의 체(體)와 용(用)을 모두 말했다. 도(道)는 천지보다 먼저 생긴 것이고, 고요하고 고요한 것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體〕, 만물에 두루 작용하는 것이다〔用〕. 따라서 천하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의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도(道)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위대한 것이라고 억지로 이름한다. 이 위대한 것은 작용하고, 작용해서 움직이는 것은 계속 움직여서 멀리까지 활동하고, 그러다가 너무 멀어지면 다시 돌아온다. 이것이 도(道)의 작용이다. 이 세상에 네 가지 위대한 것이 있는데, 왕(王)은 그 한 가지일 뿐이다. 따라서 왕(王)도 자연(自然)의 법칙에 따라 처신하고 정치에 임해야 한다. 여기에 노자의 인생관과 정치사상도 아울러 함축되어 있다.

그러면 초점을 도(道)의 체(體)에 맞추어 보자. 《노자》 1장에서 도(道)의 체(體)에 대해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언어로 도(道)를 표현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고 나아가 유(有)와 무(無)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도(道)를 도(道)라 말할 수 있으면 항상한 도〔常道〕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할 수 있으면 항상한 이름이 아니다. 무(無)를 천지의 처음이라 이름하고, 유(有)를 만물의 어머니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항상 무(無)에서 그 묘함을 관찰하고자 하며, 항상 유(有)에서 그 가장자리를 관찰하고자 한다. 이 두 가지〔有·無〕는 같은 것이지만, 〔세상에〕 나와서는 이름을 달리하였다. 〔有와 無가〕 같은 경지를 현(玄)이라 하는데, 현묘하고 또한 현묘하니 〔이것이〕많은 묘(妙)의 문이다.2)

위 인용문에 따르면, 도(道)는 무(無)와 유(有)가 같은 경지를 말하는 것이고, 이것이 현(玄)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도(道)는 유(有)와 무(無)를 벗어난 자리이다. 이 자리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자리이다. 그런데 무엇 무엇이라고 이름한다면, 그것은 유(有)와 무(無)의 어느 한쪽에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도(道)를 도(道)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도〔常道〕가 아닌 것이고, 어떠한 이름도 그것을 이름할 수 있으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이름〔常名〕이 아닌 것이다. 필자는 이 대목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즉비(卽非)의 논리 곧 “A는 A가 아니므로 A라고 이름한다”고 하는 것과 통하고, 또한 《노자》 1장에서 도(道)는 유(有)와 무(無)가 같은 경지라고 말한 것은 《반야심경》의 중도(中道)의 표현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도는 비유비무(非有非無)인데 이는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는 말이고, 이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자면, 이미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므로 유(有)와 무(無)는 서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유(有)에도 벗어나고 무(無)에도 벗어났으므로 이제는 거꾸로 유(有)와 무(無)에 걸리지 않고 유(有)와 무(無)가 대립되지 않는 광활한 정신적 경지에 이른다는 말이다. 이러한 《노자》 1장의 내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또한 《노자》 1장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노자》의 다른 부분에서도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노자》 56장에서는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도(道)를 도(道)라고 하면 이미 진정한 도〔常道〕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셈이고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노자》 56장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 입을 막고〔塞其兌〕 그 눈과 귀를 닫고〔閉其門〕,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어지러움을 풀고, 그 빛과 화합하고〔和其光〕 그 티끌과 함께 한다〔同其塵〕. 이것을 현동(玄同)이라 한다. 그러므로 친(親)하게도 할 수 없고 소원〔疏〕하게도 할 수 없으며,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칠 수도 없으며, 귀(貴)하게도 할 수 없고 천(賤)하게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천하의 귀함〔貴〕이 된다. (《노자》 56장)

위 인용문에 따르면, 도(道)를 체득한 사람은 인식기관을 단속하고 자신의 날카로움을 뽐내지 않고 자신의 혼미함을 잘 풀어버리며, 자기 내부에 있는 광명과 화합하여 중생과 같은 모습을 취한다. 따라서 도(道)를 체득한 사람은 친하게도 할 수 없고 소원하게도 할 수 없으며, 이롭게 할 수 없고 해롭게도 할 수 없으며, 귀하게도 할 수 없고 천하게도 할 수 없는 경지가 펼쳐진다.3)

한편, 《노자》에서는 도(道)를 닦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그 단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공부를 하면 지식이 쌓인다. 매일 영어단어를 10개씩 외운다면 일년이면 상당한 단어를 암기할 것이다. 하지만 도(道)를 닦는다는 것은 이처럼 쌓아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비워서 완전히 비우면 그 때에는 모든 활용이 텅 빈 마음에서 나온다. 예를 들면, 야구경기에서 투수가 공을 잘 던지겠다고 어깨에 너무 힘을 주면 자기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평상의 마음을 되찾으면 자기 컨디션을 회복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내용을 《노자》 48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문을 하면 날로 늘어나고 도(道)를 행하면 날로 줄어든다. 줄어들고 줄어들어 무위(無爲)에 이르러 함이 없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無爲而無不爲〕. 그러므로 천하를 취함에 항상 일 없음으로 하니, 일 있음에 미치면 천하를 취할 수 없다.4)

위 인용문에 따르면, 도(道)를 닦는 방법은 비우는 것이다. 그래서 도(道)를 닦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덜고 또 덜어서 어떠한 인위적 조작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 그리고 이 경지에서는 인위적 조작을 없애어서 모든 것이 순전히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2) 노자의 인생관

앞에서 말한 도(道)의 체(體)와 용(用)은 노자의 인생관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앞에서 도(道)의 체(體)는 현묘하고 현묘한 것이어서 유(有)와 무(無)가 서로 같은 경지라고 했는데, 노자의 인생관에서는 이 관점을 받아들여 유(有)와 무(無)에 구애되지 않고 이 둘을 넘어설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도의 용(用)은 모든 변화는 극단에 이르면 처음의 상태로 돌아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인생사에 적용해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의 논리를 편다.

(1) 대립되는 관념을 넘어선다.
《노자》 2장에서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을 넘어설 것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 추함이 있을 것이고, 이렇게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 2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천하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 알지만, 이는 추악한 것이고〔惡〕, 모두 착한 것이 착한 것인 줄 알지만, 이는 불선(不善)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유(有)와 무(無)는 서로 생기는 것이고, 어려움〔難〕과 쉬움〔易〕은 서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길음〔長〕과 짧음〔短〕은 서로 나타내는 것이고, 높음〔高〕과 낮음〔下〕은 서로 의지하는 것이고, 음성(音聲)은 서로 화답하고, 앞〔前〕과 뒤〔後〕는 서로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무위(無爲)의 사(事)에 처하고 말 없음〔不言〕의 가르침을 행한다. 그 결과 만물이 일어나더라도 말하지 않고〔萬物作焉而不辭〕, 생기더라도 소유하지 않으며〔生而不有〕, 행위하였지만 믿고 의지하지 않으며〔爲而不侍〕, 공(功)이 이루어지더라도 머물지 않는다〔功成而不居〕. 오직 머물지 않았으므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노자》 2장)

위 인용문에서 말하고 있는 대립된 개념, 곧 유(有)와 무(無), 어려움〔難〕과 쉬움〔易〕, 길음〔長〕과 짧음〔短〕, 높음〔高〕과 낮음〔下〕, 앞〔前〕과 뒤〔後〕는 서로 관계 맺어진 존재이다. 하지만 진정 가치 있는 것은 이런 상대적인 것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는 성인(聖人)은 상대적인 세계인 유(有)와 무(無)를 넘어서는 무위(無爲)의 사(事)에 처하고, 말 없는〔不言〕 가르침을 행한다. 그래서 성인의 공덕은 사라지지 않는다.

《노자》 2장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노자》의 다른 부분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노자》 11장에서는 유(有)와 무(無)가 서로 짝하고 있음을 예를 들어 밝히고 있다.

30개의 바퀴살〔輻〕은 하나의 바퀴통〔퇶〕과 함께 한다. 그 무(無)에 짝해서 수레의 용(用)이 있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들 경우, 그 무(無)에 짝해서 그릇의 용(用)이 있다. 문과 창을 뚫어서 방을 만들 경우 그 무(無)에 짝해서 방의 용(用)이 있다. 그러므로 유(有)로써 이익을 삼는 것은 무(無)로써 용(用)을 삼았기 때문이다. (《노자》 11장)

위 인용문에서는 어느 하나의 사물이 이루어질 때, 그 무(無)에 기초해서 그 용(用)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처럼 《노자》에서는 무(無)와 유(有)가 서로 짝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노자》 27장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는 착한 사람은 착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고, 착하지 못한 사람은 착한 사람의 바탕이 된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어느 한쪽도 소홀하게 할 수 없다.

잘 가는 것〔善行〕은 수레바퀴 자국이 없고, 잘 말하는 것〔善言〕은 허물이 없고, 잘 헤아리는 것〔善計〕은 계책을 쓰지 않고, 잘 닫음〔善閉〕은 문빗장이나 열쇠가 없어도 열 수 없는 것이요, 잘 맺음〔善結〕은 밧줄로 묶지 않아도 풀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항상 사람을 잘 구하므로 사람을 버리지 않으며, 항상 사물을 잘 구하므로 사물을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습명(襲明 : 밝음을 계승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善人〕은 착하지 못한 사람〔不善人〕의 스승이요, 착하지 못한 사람〔不善人〕은 착한 사람〔善人〕의 바탕〔資〕이다.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바탕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비록 지혜롭다 하더라도 크게 미혹한 것이다. 이것을 요묘(要妙)라고 한다. (《노자》 27장)

위 인용문에서는 착한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착한 사람의 바탕〔資〕이라고 한다. 따라서 착한 사람은 물론이고 착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여기서 자(慈)가 나온다. 그래서 성인(聖人)은 항상 사람과 사물을 잘 구한다. 이 경지에서 잘 가는 것〔善行〕, 잘 말하는 것〔善言〕, 잘 헤아리는 것〔善計〕, 잘 닫는 것〔善閉〕이 펼쳐진다.

(2) 돌아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다〔反者道之動〕
앞에서 모든 변화는 극단에 이르면 되돌아오는 경향이 있는 것이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이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의 이치를 인생사에 적용한다. 인생사에 적용되면 이 때는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이라고 한다. 이는 모든 변화는 극단에 이르면 되돌아오는 경향이 있으므로 강한 것은 이미 극단에 이른 것이어서 이내 멸망할 것이고, 약한 것은 아직 발전할 조짐이 있는 것이므로 궁극에는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의미이다. 《노자》 22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굽으면 온전하고, 굽히면 바르게 되고, 오목하면 가득 차고, 더러워야 새롭게 되고, 적어야 얻을 수 있고, 많으면 미혹된다. 따라서 성인(聖人)은 하나〔一〕를 안아서 천하의 모범이 된다. 스스로 나타내지 않으므로 밝고〔明〕, 스스로 옳다 하지 않으므로 드러나고〔彰〕,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功)이 있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므로 길게 된다〔長〕. 다만 싸우지 않으므로 천하에서 함께 싸울 수 있는 존재가 없다. 옛사람이 “굽으면 온전해진다”고 말한 것이 어찌 빈 말이겠는가? 진실로 온전해진다면 만물이 돌아올 것이다. (《노자》 22장)

위 인용문에서 “굽으면 온전하다”고 한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이러한 역설이 가능한 것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과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굽은 것과 곧은 것을 비교하면 당연히 곧은 것이 좋은 것이다. 하지만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의 입장에서 보자면, 곧은 것은 이미 변화가 상당히 진행된 것이고, 굽은 것은 이제 변화가 시작되려는 것이다.

따라서 곧은 것은 이내 변화가 극단에 이르러 퇴보할 것이지만 굽은 것은 아직도 발전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굽으면 온전할 수 있는 것이고, 곧은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모난 돌이 정맞는다”는 말과 통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오목하면 가득하고, 더러워야 새롭게 되고, 적어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노자의 특유의 논법이다.

우선,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이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노자의 주장에 주목해 보자. 강한 것은 오래가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회오리바람은 강력한 바람이지만 아침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나기도 거친 빗줄기이지만 하루 종일 내리지는 못한다. 그에 비해 보슬비는 가는 빗줄기이지만 오랫동안 내릴 수 있다. 이 점을 《노자》 23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희언(希言: 적은 말)이 자연스럽다.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나기는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이것은 누가 하는가? 천지(天地)이다. 천지도 오래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그러므로 도(道)에 종사하는 사람은 도(道)에서는 도(道)와 함께 하고, 덕(德)에서는 덕(德)과 함께 하고, 잃음〔失〕에서는 그 잃음〔失〕과 함께 한다. 도(道)와 함께 한다는 것은 도를 즐기고 얻는다는 것이고, 덕(德)을 함께 한다는 것은 덕을 즐기고 얻는다는 것이고, 잃음〔失〕을 함께 한다는 것은 잃음을 즐기고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하면 〔이러한 이치를〕 믿지 않는다. (《노자》 23장)

위 인용문 내용처럼 회오리바람은 아침 내내 불지 못하고, 소나기도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이것은 천지(天地)가 주관하는 것인데, 천지도 오래하질 못한다. 하물며 인간이겠는가? 그래서 도(道)에 종사하는 사람은 도(道)에서는 도(道)와 함께 하고, 덕(德)에서는 덕(德)과 함께 하고, 잃음〔失〕에서는 잃음과 함께 한다. 그래서 도(道)·덕(德)·잃음〔失〕을 즐기고 얻는다. 이처럼 도(道)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연스런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의 이치에서 배운 교훈을 인간사(人間事)에 적용해 보자. 우리는 스스로 자랑하고 내세우기 좋아한다. 또 자기의 말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회오리바람이 오래가지 못하고 소나기가 잠깐 동안에 지나가듯이, 자신을 강하게 내세우는 것은 결국 오래 가지 못한다. 강한 것은 이미 극단에 이른 것이다. 이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곧 몰락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노자》 24장에 소개되어 있다.

발끝으로 서면 오래 서지 못하고, 큰 걸음으로 활보하면 오래 걷지 못한다. 스스로 드러내면 밝지 못하고, 스스로 옳다 하면 드러내지 못하고, 스스로 자랑하면〔伐〕 공(功)이 없고, 스스로 내세우면〔矜〕 오래가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은〕 도(道)에서는 남은 음식이요, 군더더기 행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만물〔物〕은 〔이러한 것들을〕 혹 싫어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도(道)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드러내고, 스스로 옳다 하고, 스스로 자랑하고, 스스로 내세우는 것에〕 처하지 않는다. (《노자》 24장)

또한 이번에는 자연에서 배운 이치를 상대방을 다루는 전술에 응용해보자. 바둑에서 먼저 큰집을 만들면 반드시 승부에서 진다고 한다. 왜냐하면, 중간에 만족하고 더 이상 노력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내용을 《노자》에서는 말하는 것이다. 또 《노자》에서는 상대방을 망하게 하려면, 먼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어서 상대방을 만족하게 한다는 전술을 편다. 그러면 상대방은 만족해서 더 이상 노력하지 않을 것이고, 그 때는 가만 두어도 스스로 멸망할 것이다. 《노자》 36장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장차 거두어들이려고 한다면 반드시 억지로 펴게 해주고, 장차 약하게 하려면 반드시 억지로 강하게 해주어야 한다. 장차 없애려고 한다면 반드시 억지로 흥하게 해주고, 장차 뺏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억지로 주어야 한다. 이것이 미묘한 밝음〔微明〕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기니, 마치 고기가 연못을 벗어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국가를 통치할 때〕 국가의 이로운 기구〔利器〕는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 (《노자》 36장)

위 인용문의 내용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과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의 응용이다. 그래서 거두어들이고 약하게 하고 없애려고 하고 뺏으려고 한다면, 정반대로 펼치게 하고 강하게 해주고 흥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관점을 국가통치에도 응용하고 있다. 국가의 이로운 기구는 사람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정치사상에까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과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을 확대하겠다는 말이다.

이제 노자는 정치의 영역까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의 논리를 구사한다.5) 천하에서 가장 강한 것과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충돌하면 어느 것이 이길까? 상식적으로 보자면, 당연히 강한 것이 이기겠지만, 노자의 논법에 따르면 정반대의 결론이 나온다. 가장 강한 것은 이미 충분히 변화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발전할 가능성이 없는 것이고, 가장 부드러운 것은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딛은 것이기 때문에 발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래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강한 것을 이긴다고 노자는 주장한다. 이 내용을 《노자》 43장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천하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지극히 견고한 것을 몰아내고, 형상 없는 것이 틈 없는 데 들어간다. 그래서 내가 무위(無爲)의 이익됨을 안다. 말 없는 가르침〔不言之敎〕과 무위(無爲)의 이익을 천하에서 당할 수 있는 것이 드물다〔天下希及之〕. (《노자》 43장)

4. 결론: 불교와 노자사상의 비교

이 글에서는 불교의 공(空)사상과 노자사상을 비교하였다. 불교의 공사상과 노자사상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우선, 노자가 말하는 도의 체(體)와 불교의 공사상에는 공통점이 있다. 불교의 공사상은 세상만물과 우리의 몸과 마음, 그 어느 것도 집착할 만한 것이 없음을 통찰하는 것이고,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 안에 있는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것을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는 중도(中道)로 표현할 수 있다. 중도는 논리와 언어를 벗어났다는 의미이고,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면 논리와 언어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노자의 도(道)의 체(體)는 이름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억지로 이름한 것이고, 또한 도(道)의 체(體)는 유(有)와 무(無)가 같은 경지인 것이다.

이 유(有)와 무(無)가 같은 경지라는 말은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필자는 이 말을 불교의 중도의 의미로 파악하고자 한다. 불교의 중도는 무(無)와 유(有)의 극단을 부정하는 것인데, 만약 이 부정의 정신에서 현실세계로 내려온다면, 그 때는 무(無)이면서 유(有)인 경지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유(有)와 무(無),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정신적 경지이므로 이번에는 무(無)도 좋고 유(有)도 좋다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정신적 경지를 《노자》에서는 유(有)와 무(無)가 같다고 말했다. 또한, 《노자》 1장에서 도(道)를 도(道)라고 말할 수 있으면 항상한 도가 아니라는 표현은 《금강경》의 즉비(卽非)의 논리와 연결점이 있다.

또한 노자의 인생관에서도 도의 체(體)에 근거한 대목은 불교의 공사상과 공통점이 있다. 《노자》 2장에서는 세상 사람이 모두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추악한 것이라고 한다.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이미 추악한 것을 상대로 펼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면, 아름다움과 추악함이라는 2원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는 상대적 2원관에서 벗어나서 자유롭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의 《금강경》에서도 공(空)을 자각하고 그것에 의지해서 윤리적 행위를 하면 그 때 최고의 복덕이 생긴다고 말한다. 이 말을 《노자》에 맞추어서 보자면, 2원성을 넘어서서 윤리적 행위를 실천하면 엄청난 복덕이 생긴다고 할 수 있고, 《노자》 2장의 표현으로 바꾸어서 말한다면 “머물지 않으므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이 공통점이었다면 차이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불교사상의 전반을 통틀어본다고 해도 《노자》의 도(道)의 용(用)을 말하고 있지 않다. 도의 용(用)은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약자도지용(弱者道之用)을 내용으로 하는 것인데, 이는 사물의 변화가 극단에 이르면 처음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강한 것은 이미 발전한 것이므로 이내 쇠퇴하고, 약한 것은 더 발전할 여지가 있으므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불교사상에서 발견할 수 없다.

불교와 노자사상을 비교하면, 공사상이라는 점에 일정 부분 공통점이 있다고 해도 불교사상에서는 이 공사상이 중관학파, 유식학파, 여래장사상, 천태종, 화엄종, 선종에서 더욱 활짝 꽃을 피우고 있다. 이 점에서 노자사상보다 불교사상이 더 깊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노자사상에서는 도의 용(用)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구체적 지침을 제시해준다.

이 점에서 보자면 노자사상이 불교사상보다 더 삶에 밀착한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노자사상은 불교사상에 비해서 현실적 응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불교와 노자사상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이 두 사상은 거의 2000년 이상을 서로 교섭해 왔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 이 두 사상의 우열을 따지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불교사상의 장점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한편으론 노자의 지혜를 수용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

이병욱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졸. 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ㆍ박사 과정(동양철학). 박사학위 논문으로는 〈천태지의 철학사상논구〉(고려대 대학원 철학과, 1995년)가 있으며, 저서로는 《천태사상연구》(경서원, 2000년), 《고려시대의 불교사상》(혜안, 2002년), 《에세이 불교철학》(운주사, 2003년), 《인도철학사》(운주사, 2004년), 《천태사상》(태학사, 2005년) 등이 있다. 현재 고려대, 강원대, 중앙승가대 강사로 있다.

 이병욱 lbw33@hanmail.net

[[공(空) 의미의 세 차원 - 3 무명과 번뇌를 타파하고 희론을 적멸케하는 수행 방법

공(空) 의미의 세 차원 - 불교신문

공(空) 의미의 세 차원
 승인 2003.02.19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절대자유

공사상(空思想)은 초기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을 재해석하여, 
붓다의 기본 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밝힌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종교철학 사상이다.‘

공(空)’이라는 용어는 ‘sunya’(텅 빈)라는 형용사나 ‘sunyata’(공한 것, 空性)이라는 명사의 번역어이다. 

초기경전(初期經典)에는 ‘공’이라는 용어가 
주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통찰한 결과 얻어지는 삼매(三昧)의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대승불교에서 공의 개념은 보다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대승경전의 모체인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과 그 주석서인 〈대지도론(大智度論)〉에는 공의 의미를 다음과 같은 여덟 차원(十八空)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 내공(內空): 인식의 주관인 몸과 마음의 요소, 즉 감각 지각 사고 인식의 작용을 일으키는 요소가 다 공함을 말한다. 
2. 외공(外空): 인식의 대상이 되는 외적 객관이 공함을 말한다. 
3. 내외공(內外空): 이것은 앞의 두 가지를 함께 부정한 것이다. 
4. 공공(空空): 공도 또한 공함을 말한다. 
5. 대공(大空): 시방(十方)과 허공 등의 공간이라는 관념을 부정하는 것이다. 
6. 제일의공(第一義空): 제일의는 궁극적 진리의 본체인 진여(眞如)나 열반 등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진리상도 사실은 공하다는 의미이다. 
7. 유위공(有爲空): 인연에 의해 생성된 모든 현상의 존재들은 변화하고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다. 
8. 무위공(無爲空): 인연에 의해 생기지 않는 허공, 열반 등과 같은 무위법도 공하다. 

9. 필경공(畢竟空): 불교 외의 사상에서 말하는 실유관(實有觀)이나 불교의 나와 법에 집착하는 실유관 등을 모두 부정한다. 
10. 무시공(無始空): 시간적으로 세간이나 중생, 모든 사물에 어떤 시작이 있다는 관념을 부정함이다. 
11. 산공(散空): 현상계는 인연에 의해 생성되므로 인연의 화합이 없어지면 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12. 성공(性空): 일체 존재 요소의 자성(自性)이 공이라는 의미이다. 인연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본래의 실체가 공하다는 것이다. 
13. 자상공(自相空): 성공(性空)은 불성과 진여는 본체가 그대로 공함을 말하는 총상(總相)이라면 자상공은 온갖 만물의 개별적인 존재성인 별상(別相)을 부정함이다. 
14. 일체법공(一切法空 ): 앞에 말한 일체 제법의 공함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15. 불가득공(不可得空): 인식론적으로 무엇을 알고 얻을 것이 있다는 관념조차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16. 무법공(無法空) : 현상의 모든 법이 이미 없어진 상태를 말한다. 
17. 유법공(有法空): 현상은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가유(假有)일 뿐 그 본질은 공하다는 것이다. 
18. 유법·무법공(有法·無法空): 시간적 존재뿐만 아니라 공간적 존재까지도 모두 공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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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공의 교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세 차원으로 나누어 해명해 볼 수 있다. 

첫째, 존재론적으로 
공은 모든 실체의 무자성성연기성을 의미한다. 
인연에 의해 생성된 모든 현상의 존재들은 변화하고 언젠가 사라지는 것이다. 
제법은 인연에 의해 존재하는 가유(假有)일 뿐 그 실체(substance)는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시방(十方)과 허공 등의 공간 관념이나, 중생이나 모든 사물에 어떤 시작이 있다는 시간관념도 공하다고 한다. 이러한 공의 연기론적 의미를 공의(空義)라고도 한다. 

둘째, 인식론적 차원에서 볼 때 
공은 얻을 것도 없고 얻어야 할 진리(法, Dharma)라는 관념도 없다. 
무엇을 알고 얻을 것이 있다는 관념조차 있을 수 없다. 
이를 무소득공(無所得空) 또는 불가득공(不可得空)이라고도 한다. 
깨달을 법이 없기 때문에 진리를 구하고 얻고 깨달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도 또한 공하다(空空)고 한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요소가 다 공하다고 하면 공이라는 것은 존재할 것이라는 공의 실재화와 관념화의 오류를 논파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평등일미(平等一味)한 제법의 진실상을 공성(空性)이라고도 한다. 

셋째, 종교적으로 
공의 진리는 
무명과 번뇌를 타파하고 희론을 적멸케하는 수행 방법이다.
이러한 공의 목적과 효용을 공용(空用)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공의 체득에 의해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절대 자유와 테두리 없는 마음을 얻는 것이다. 

여기에서 대승 보살 윤리의 근본이 되는 
자타불이(自他不二)동체자비(同體慈悲)와 무연자비(無緣慈悲)의 실천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된다. 

동국대 불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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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불이
[自他不二, Jatabuli]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것. 이것은 또 궁극적으로는 공 (空)인 인연법을 뜻하며, 여기에서 동체대비 (同體大悲)라는 불교 특유의 자비관이 나오는 동시에 일반적인 개념의 사랑과 구별된다. 다시 말해 자타불이 (自他不二)는 곧 자타불이 (自他不異) 또는 주객불이 (主客不二)인 동시에 우주의 법칙을 말함. 일반적인 개념의 사랑은 대개 인본주의 사상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덕행 (德行)으로, 불교의 동체대비 사상이 뜻하는 우주적 개념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Non-duality or non-discrimination of the I and the not-I, this and that, you and me, the view that sees the whole universe as One: Hence the great compassion of One-root or One-body, not just humanitarian love or compassion. Cf. (Bulibeop) Non-duality, (Yeon-gi) Dependent origination or ari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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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자비(慈悲)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
.법현스님-열린선원원장

온누리 2007. 12. 
자비(慈悲)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불교에 자비가 없으면 어떤 느낌일까?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니까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 와는 사뭇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교리 비슷한 자비가 없어도
뭐 그리 달라질 것이 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뜻밖에도 적은 숫자가 아님을 보고 놀란다.

싯다르타가 삶의 변화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내 인생의 전부나 다를 것이 없는 숨(呼吸) 살피는 공부를 했다.
그 결과 안정과 평화와 통찰지(洞察智)를 얻었고
존재와 발생의 원리라 할 수 있는 연기(緣起)의 묘리를 알게 된 것을 깨달음이라 부르고
그 때 부처님이 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기만 하면 부처가 되고
깨달음을 얻는 데는 자비가 충분조건일지언정
필요조건은 아니라는 생각들을 많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랄 수 있는 연기(緣起)는
어떤 것도 홀로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물질과 인연을 맺는 마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부처님이 수행자이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자타카(본생 이야기)에 도도히 흐르는 정신은 바로
나와 직,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는 모든 존재를 향한 사랑이다.
그것을 우리는 자비라 부르고 있으며
그것이 깨달음을 이루는 필수 요인이며
피안(彼岸) 즉 깨달음에 이르는 바라밀(婆羅蜜)이라 한다.

한편 자긍심에 가득한 불자들은
불교의 자비는 사랑함(慈),연민함(悲),기뻐함(喜),평화로움(捨)의 준말이므로
기독교의 사랑보다는 네 배나 가치가 있는 덕목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그 말을 쓰는 동네가 달라서 약간의 뉘앙스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보아도 그것은 최고의 가치이며
무게 차이가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홀로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연기의 가르침을
윤리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때
다른 존재가 바로 나임을 아는 동체자비(同體慈悲)임을 확인할 때 더욱 그렇다.

우리는 요즈음 매우 많은 사건들을 만나고 있다.
신 정아-변 양균씨 이야기,버마의 민주화이야기와 스님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남북정상 이야기와 서해 그리고 납북자 이야기,
두타스님 이야기,조계종 스님들 이야기,
조계-태고의 다툼 속에 헐리는 천년고찰 안정사이야기 등이
눈과 귀를 통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다.

그 어느 하나를 보아도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은 것들이다.
따라서 적당히 모른 체하고 넘어가면 될 것이다.
나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므로.

하지만 우리는 아니 나는 부처님의 길을 충실하게 따르고 제대로 가고자 서원한 수행자로서
뚜렷이 살펴보고 엄밀히 반성할 때
어느 한 곳에도 나의 마음이나
몸의 힘이 가 닿지 않은 곳이 없음을 느끼고 전율할 때가 많다.

한 번도 만나 본 적도 없는 분들도 있지만
신문이나 방송 또는 행사장이나 그 어떤 곳에서
스치고 지나간 인연이라도
나와는 오랜 인연이 있음을 생각할 때 소홀히 생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설사 나쁜 일을 한 사람이라고 밝혀졌다 할지라도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나무랄 수가 없다.
특히 약자의 입장이 되어버린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든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마음을 기울여서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 때문이든지 헤아려주고
보살펴 주며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두타스님만 해도 그렇다.
그렇게 성자인 것처럼 추켜세울 때는 우리 사람 같고
문제가 있다니까 본래 우리가 아니었다는 식은 곤란하다.

우리 불교의 지도자들이 중국이나 태국, 미얀마나 스리랑카 등에 가서 한
수행자답지 못한 무자비한 이야기는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이다.

그것이 계율(戒律)을 입에 담지 않아도
‘인연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라!’ 하신
아니 인연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깨달음 속에서
‘인연 없는 중생마저 사랑하라!’ 하신
무연자비(無緣慈悲)를 떠올릴 때
‘나는 그런 적이 없는가? 그럴 가능성은 없는가?’ 반성하게 된다.

자비(사랑)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다.
사랑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
부처님의 깨달음도 중생을 향한 자비가 없다면 빛이 바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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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공’이란 무엇입니까 - 불교신문

[청년을 위한 불교기초강의] 쉽게 말해 ‘공’이란 무엇입니까 - 불교신문


[청년을 위한 불교기초강의] <33> 쉽게 말해 ‘공’이란 무엇입니까
이정우 군법사ㆍ육군 대령
승인 2019.09.27 
이정우

Q 부처님은 모든 것은 다 ‘공(空)’이라 말씀하셨는데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 설명을 들어도 너무 어렵다. 쉽게 설명해 줄 수 없는가?


무엇이 있다가 비워졌을까?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


A 불교의 교리 가운데 ‘공(空)사상’은 부처님 가르침의 근간이기도 하고, 특히 대승불교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사상입니다. 공이라고 하는 단어는 인도 고어 산스크리트어의 순야타(nyat)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으로, 우리말로는 ‘비어있음·텅 빔’, 영어로는 ‘Emptiness’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순야타의 어근은 슈비(vi)라고 하는데 이는 ‘부풀다’는 뜻이고, 동시에 가운데가 ‘텅 비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즉 외견상으로는 사물이 부풀어 올라와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비어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토대로 공을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공은 ‘비어있음’이라고 했는데 ‘무엇이 비어있다’고 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비어있음은 무엇이 있다가 ‘비워져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컵에 들어있는 커피를 다 마셨다면 컵이 비어있다고 말합니다. 컵이 없다(無, 무)는 말은 아닙니다. 컵 안에 있던 커피가 비워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색이 공이라는 말은 색이 없다(無)라는 말이 아니라, 방금까지 색을 채우고 있던 그 무엇이 비워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비었다는 것은 이전에 무엇이 있었던 것인가를 알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 컵에 더 이상 커피가 없지만 공기까지 비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비워졌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비어있음인 공은 무엇이 비워졌는가하면 그 무엇이든 ‘홀로 영원히 존재함(自性)’이 비워졌습니다. 이 세상에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하나 없고, 서로 상호연관성 없이 홀로 존재함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몸이 공이라고 하면 내 몸이 없다(無)는 말이 아니라 내 몸 속에 채워져 있는 것들이 ‘홀로 영원히 존재함’의 성질이 비워졌다는 것입니다. 몸은 심장과 폐와 위와 신장과 같은 장기와 뼈와 살과 근육, 피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폐는 산소를 공급해 피를 맑게 하고 피는 폐에 영양을 공급합니다. 피 없이 폐가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몸(오온)은 홀로 영원히 존재함(自性)이 불가능하므로 ‘비었다(空)’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확대해 보면 우주만물이 모두 ‘홀로 영원히 존재함(自性)이 비어있음(空)’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공은 비어있음이고 무엇이 비워졌냐면, 다름 아닌 홀로 영원히 존재함(自性)이 비워진 것이다’라는 것을 이해하시면 여러분도 일체개공(一切皆空)의 도리를 쉽게 깨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Śūnyatā - Wikipedia 공(空) emptiness

Śūnyatā - Wikipedia

Śūnyat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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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ions of
Śūnyatā
Englishemptiness, voidness, vacuity, openness, thusness
SanskritŚūnyatā
(Dev: शून्यता)
PaliSuññatā
(Dev: सुञ्ञता)
Bengaliশূন্যতা
(Shunnôta)
Burmesethone nya ta, သုညတ
Chinese
(PinyinKōng)
Japanese
(Rōmaji)
Khmerសុញ្ញតា
(UNGEGNSŏnhnhôta)
Korean공성(空性)
(RRgong-seong)
Mongolianхоосон
Tibetanསྟོང་པ་ཉིད་
(Wylie: stong-pa nyid
THL: tongpa nyi
)
Thaiสุญตา
VietnameseKhông ̣(空)
Glossary of Buddhism

Śūnyatā (Sanskritशून्यताromanizedśūnyatāPalisuññatāEnglish: /ʃnˈjɑː.tɑː/ shoon-YAH-tah), translated most often as emptiness,[1] vacuity, and sometimes voidness,[2] is an Indian philosophical and mathematical construct. Within HinduismJainismBuddhism and other philosophical strands, the concept has multiple meanings depending on its doctrinal context. It is either an ontological feature of reality, a meditative state, or a phenomenological analysis of experience.

In the Chandah-sutra of Pingala, dating perhaps the third or second century BC, Pingala's use of a zero symbol, śūnya, as a marker seems to be the first known explicit reference to zero.[3]

In Theravāda BuddhismSuññatā often refers to the non-self (Pāli: anattā, Sanskrit: anātman)[note 1] nature of the five aggregates of experience and the six sense spheresSuññatā is also often used to refer to a meditative state or experience.

In Mahāyāna Buddhismśūnyatā refers to the tenet that "all things are empty of intrinsic existence and nature (svabhava)",[5][6] but may also refer to the Buddha-nature teachings and primordial or empty awareness, as in DzogchenShentong, or Chan.

Etymology[edit]

"Śūnyatā" (Sanskrit) is usually translated as "devoidness", "emptiness", "hollow", "hollowness", "voidness". It is the noun form of the adjective śūnya, plus -tā:

  • śūnya, in the context of buddha dharma, primarily means "empty", or "void," but also means "zero," and "nothing,"[7] and derives from the root śvi, meaning "hollow"
  • -tā is a suffix denoting a quality or state of being, equivalent to English "-ness"

Development of the concept[edit]

The concept of śūnyatā as "emptiness" is related to the concept of anatta in early Buddhism.[8] Over time, many different philosophical schools or tenet-systems (Sanskrit: siddhānta)[9] have developed within Buddhism in an effort to explain the exact philosophical meaning of emptiness.

After the Buddha, emptiness was further developed by the Abhidharma schools, Nāgārjuna and the Mādhyamaka school, an early Mahāyāna school. Emptiness ("positively" interpreted) is also an important element of the Buddha-nature literature, which played a formative role in the evolution of subsequent Mahāyāna doctrine and practice.

Early Buddhism[edit]

Pāli Nikāyas[edit]

A simile from the Pali scriptures (SN 22.95) compares form and feelings with foam and bubbles.

The Pāli Canon uses the term śūnyatā ("emptiness") in three ways: "(1) as a meditative dwelling, (2) as an attribute of objects, and (3) as a type of awareness-release."[10]

According to Bhikkhu Analayo, in the Pāli Canon "the adjective suñña occurs with a much higher frequency than the corresponding noun suññatā" and emphasizes seeing phenomena as 'being empty' instead of an abstract idea of "emptiness."[11]

One example of this usage is in the Pheṇapiṇḍūpama Sutta (SN 22:95), which states that on close inspection, each of the five aggregates are seen as being void (rittaka), hollow (tucchaka), coreless (asāraka). In the text a series of contemplations is given for each aggregate: form is like "a lump of foam" (pheṇapiṇḍa); sensation like "a water bubble" (bubbuḷa); perception like "a mirage" (marici); formations like "a plantain tree" (kadalik-khandha); and cognition is like "a magical illusion" (māyā).[12]

According to Shi Huifeng, the terms "void" (rittaka), "hollow" (tucchaka), and "coreless" (asāraka) are also used in the early texts to refer to words and things which are deceptive, false, vain, and worthless.[12] This sense of worthlessness and vacuousness is also found in other uses of the term māyā, such as the following:

"Monks, sensual pleasures are impermanent, hollow, false, deceptive; they are illusory (māyākatame), the prattle of fools."[12]

The Suñña Sutta,[13] part of the Pāli Canon, relates that the monk ĀnandaBuddha's attendant asked,

It is said that the world is empty, the world is empty, lord. In what respect is it said that the world is empty?" The Buddha replied, "Insofar as it is empty of a self or of anything pertaining to a self: Thus it is said, Ānanda, that the world is empty.

According to the American monastic Thanissaro Bhikku:

Emptiness as a quality of dharmas, in the early canons, means simply that one cannot identify them as one's own self or having anything pertaining to one's own self ... Emptiness as a mental state, in the early canons, means a mode of perception in which one neither adds anything to nor takes anything away from what is present, noting simply, "There is this." This mode is achieved through a process of intense concentration, coupled with the insight that notes more and more subtle levels of the presence and absence of disturbance (see MN 121).[14]

Meditative state[edit]

Emptiness as a meditative state is said to be reached when "not attending to any themes, he [the bhikku] enters & remains in internal emptiness" (MN 122). This meditative dwelling is developed through the "four formless states" of meditation or Arūpajhānas and then through "themeless concentration of awareness."[10]

The Cūlasuññata-sutta (MN III 104) and the Mahāsuññata-sutta (MN III 109) outline how a monk can "dwell in emptiness" through a gradual step-by-step mental cultivation process, they both stress the importance of the impermanence of mental states and the absence of a self.

In the Kāmabhu Sutta S IV.293, it is explained that a bhikkhu can experience a trancelike contemplation in which perception and feeling cease. When he emerges from this state, he recounts three types of "contact" (phasso):

  1. "emptiness" (suññato),
  2. "signless" (animitto),
  3. "undirected" (appaihito).[15]

The meaning of emptiness as contemplated here is explained at M I.297 and S IV.296-97 as the "emancipation of the mind by emptiness" (suññatā cetovimutti) being consequent upon the realization that "this world is empty of self or anything pertaining to self" (suññam ida attena vā attaniyena vā).[16][17]

The term "emptiness" (suññatā) is also used in two suttas in the Majjhima Nikāya, in the context of a progression of mental states. The texts refer to each state's emptiness of the one below.[18]

Chinese Āgamas[edit]

The Chinese Āgamas contain various parallels to the Pheṇapiṇḍūpama Sutta. One partial parallel from the Ekottara Āgama describes the body with different metaphors: "a ball of snow", "a heap of dirt", "a mirage", "an illusion" (māyā), or "an empty fist used to fool a child".[12] In a similar vein, the Mūla-Sarvāstivādin Māyājāla Sūtra, gives two sets of metaphors for each of the sensory consciousnesses to illustrate their vain, illusory character.[12]

Other Sarvāstivādin Āgama sutras (extant in Chinese) which have emptiness as a theme include Samyukta Āgama 335 - Paramārtha-śunyatā-sūtra ("Sutra on ultimate emptiness") and Samyukta Āgama 297 - Mahā-śunyatā-dharma-paryāya ("Greater discourse on emptiness"). These sutras have no parallel Pāli suttas.[19] These sutras associate emptiness with dependent origination, which shows that this relation of the two terms was already established in pre-Nagarjuna sources. The sutra on great emptiness states:

"What is the Dharma Discourse on Great Emptiness? It is this— 'When this exists, that exists; when this arises, that arises.'"[20]

The phrase "when this exists..." is a common gloss on dependent origination. Sarvāstivādin Āgamas also speak of a certain "emptiness samadhi" (śūnyatāsamādhi) as well as stating that all dharmas are "classified as conventional".[21]

Mun-Keat Choong and Yin Shun have both published studies on the various uses of emptiness in the Early Buddhist texts (Pāli Canon and Chinese Āgamas).[22][23] Choong has also published a collection of translations of Āgama sutras from the Chinese on the topic of emptiness.[24]

Early Buddhist schools and Abhidharma[edit]

Many of the early Buddhist schools featured śūnyatā as an important part of their teachings.

The Sarvastivadin school's Abhidharma texts like the Dharmaskandhapāda Śāstra, and the later Mahāvibhāṣa, also take up the theme of emptiness vis-a-vis dependent origination as found in the Agamas.[25]

Schools such as the Mahāsāṃghika Prajñaptivādins as well as many of the Sthavira schools (except the Pudgalavada) held that all dharmas were empty (dharma śūnyatā).[25] This can be seen in the early Theravada Abhidhamma texts such as the Patisambhidamagga, which also speak of the emptiness of the five aggregates and of svabhava as being "empty of essential nature".[26] The Theravada Kathavatthu also argues against the idea that emptiness is unconditioned.[27] The Mahāvastu, an influential Mahāsāṃghika work, states that the Buddha

"has shown that the aggregates are like a lightning flash, as a bubble, or as the white foam on a wave."[28]

One of the main themes of Harivarman's Tattvasiddhi-Śāstra (3rd-4th century) is dharma-śūnyatā, the emptiness of phenomena.[28]

Theravāda[edit]

Sea froth at sunset

Theravāda Buddhists generally take the view that emptiness is merely the not-self nature of the five aggregates. Emptiness is an important door to liberation in the Theravāda tradition just as it is in Mahayana, according to Insight meditation teacher Gil Fronsdal.[29] The classic Theravāda text known as the Patisambhidamagga (c. 3rd century BCE) describes the five aggregates as being empty (suññam) of essence or intrinsic nature (sabhava).[30] The Patisambhidamagga also equates not-self with the emptiness liberation in a passage also cited by Buddhaghosa in the Visuddhimagga (Vism XXI 70):

"When one who has great wisdom brings [volitional formations] to mind as not-self, he acquires the emptiness liberation" -Patis. II 58.[31]

The Visuddhimagga (c. 5th century CE), the most influential classical Theravāda treatise, states that not-self does not become apparent because it is concealed by "compactness" when one does not give attention to the various elements which make up the person.[32] The Paramatthamañjusa Visuddhimaggatika of Acariya Dhammapala, a 5th-century Theravāda commentary on the Visuddhimagga, comments on this passage by referring to the fact that we often assume unity and compactness regarding phenomena or functions which are instead made up of various elements, but when one sees that these are merely empty dhammas, one can understand the not-self characteristic:

"when they are seen after resolving them by means of knowledge into these elements, they disintegrate like froth subjected to compression by the hand. They are mere states (dhamma) occurring due to conditions and void. In this way the characteristic of not-self becomes more evident."[32]

The modern Thai teacher Buddhadasa referred to emptiness as the "innermost heart" of the Buddhist teachings and the cure for the disease of suffering. He stated that emptiness, as it relates to the practice of Dhamma, can be seen both "as the absence of Dukkha and the defilements that are the cause of Dukkha and as the absence of the feeling that there is a self or that there are things which are the possessions of a self."[33] He also equated nibbana with emptiness, writing that "Nibbana, the remainderless extinction of Dukkha, means the same as supreme emptiness."[33] Emptiness is also seen as a mode of perception which lacks all the usual conceptual elaborations we usually add on top of our experiences, such as the sense of "I" and "Mine". According to Thanissaro Bhikku, emptiness is not so much a metaphysical view, as it is a strategic mode of acting and of seeing the world which leads to liberation:[34]

Emptiness is a mode of perception, a way of looking at experience. It adds nothing to and takes nothing away from the raw data of physical and mental events. You look at events in the mind and the senses with no thought of whether there's anything lying behind them. This mode is called emptiness because it's empty of the presuppositions we usually add to experience to make sense of it: the stories and world-views we fashion to explain who we are and the world we live in. Although these stories and views have their uses, the Buddha found that some of the more abstract questions they raise — of our true identity and the reality of the world outside — pull attention away from a direct experience of how events influence one another in the immediate present. Thus they get in the way when we try to understand and solve the problem of suffering.

Some Theravādins, such as David Kalupahana, see Nagarjuna's view of emptiness as compatible with the Pali Canon. In his analysis of the Mulamadhyamikakarika, Kalupahana sees Nagarjuna's argument as rooted in the Kaccānagotta Sutta (which Nagarjuna cites by name). Kalupahana states that Nagarjuna's major goal was to discredit heterodox views of Svabhava (own-nature) held by the Sarvastivadins and establish the non-substantiality of all dharmas.[31] According to Peter Harvey, the Theravāda view of dhammas and sabhava is not one of essences, but merely descriptive characteristics and hence is not the subject of Madhyamaka critique developed by Nagarjuna (see below).[35]

In Theravāda, emptiness as an approach to meditation is also seen as a state in which one is "empty of disturbance." This form of meditation is one in which meditators become concentrated and focus on the absence or presence of disturbances in their minds; if they find a disturbance they notice it and allow it to drop away; this leads to deeper states of calmness.[34] Emptiness is also seen as a way to look at sense-experience that does not identify with the "I-making" and "my-making" process of the mind. As a form of meditation, this is developed by perceiving the six sense-spheres and their objects as empty of any self, this leads to a formless jhana of nothingness and a state of equanimity.[34]

Mathew Kosuta sees the Abhidhamma teachings of the modern Thai teacher Ajaan Sujin Boriharnwanaket as being very similar to the Mahayana emptiness view.[36]

Mahayana Buddhism[edit]

There are two main sources of Indian Buddhist discussions of emptiness: the Mahayana sutra literature, which is traditionally believed to be the word of the Buddha in Mahayana Buddhism, and the shastra literature, which was composed by Buddhist scholars and philosophers.

Prajñāpāramitā sūtras[edit]

In the Prajñaparamita sutras, the emptiness of phenomena is often illustrated by metaphors like drops of dew.

The Prajñāpāramitā (Perfection of Wisdom) Sutras taught that all entities, including dharmas, are empty of self, essential core, or intrinsic nature (svabhava), being only conceptual existents or constructs.[37][38] The notion of prajña (wisdom, knowledge) presented in these sutras is a deep non-conceptual understanding of emptiness.[39] The Prajñāpāramitā sutras also use various metaphors to explain the nature of things as emptiness, stating that things are like "illusions" (māyā) and "dreams" (svapna). The Astasahasrika Prajñaparamita, possibly the earliest of these sutras, states:

If he knows the five aggregates as like an illusion, But makes not illusion one thing, and the aggregates another; If, freed from the notion of multiple things, he courses in peace— Then that is his practice of wisdom, the highest perfection.[12]

Perceiving dharmas and beings like an illusion (māyādharmatām) is termed the "great armor" (mahāsaṃnaha) of the Bodhisattva, who is also termed the 'illusory man' (māyāpuruṣa).[40] The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 adds the following similes to describe how all conditioned things are to be contemplated: like a bubble, a shadow, like dew or a flash of lightning.[41] In the worldview of these sutras, though we perceive a world of concrete and discrete objects, these objects are "empty" of the identity imputed by their designated labels.[42] In that sense, they are deceptive and like an illusion. The Perfection of Wisdom texts constantly repeat that nothing can be found to ultimately exist in some fundamental way. This applies even to the highest Buddhist concepts (bodhisattvasbodhicitta, and even prajña itself).[43] Even nirvana itself is said to be empty and like a dream or magical illusion.[44] In a famous passage, the Heart sutra, a later but influential Prajñāpāramitā text, directly states that the five skandhas (along with the five senses, the mind, and the four noble truths) are said to be "empty" (sunya):

Form is emptiness, emptiness is form
Emptiness is not separate from form, form is not separate from emptiness
Whatever is form is emptiness, whatever is emptiness is form.[45][note 2][note 3]

In the Prajñāpāramitā sutras the knowledge of emptiness, i.e. prajñāpāramitā is said to be the fundamental virtue of the bodhisattva, who is said to stand on emptiness by not standing (-stha) on any other dharma (phenomena). Bodhisattvas who practice this perfection of wisdom are said to have several qualities such as the "not taking up" (aparigṛhīta) and non-apprehension (anupalabdhi) of anything, non-attainment (aprapti), not-settling down (anabhinivesa) and not relying on any signs (nimitta, mental impressions).[46][47] Bodhisattvas are also said to be free of fear in the face of the ontological groundlessness of the emptiness doctrine which can easily shock others.[48]

Mādhyamaka school[edit]

Nāgārjuna and Āryadeva, two classic Indian philosophers of the Buddhist emptiness doctrine.

Mādhyamaka is a Mahāyāna Buddhist school of philosophy which focuses on the analysis of emptiness, and was thus also known as śūnyatavāda. The school is traditionally seen as being founded by the Indian Buddhist philosopher Nāgārjuna.[49][50] Nāgārjuna's goal was to refute the essentialism of certain Abhidharma schools and the Hindu Nyaya school.[51] His best-known work is the Mūlamadhyamakakārikā (MMK), in which he used reductio arguments (Sktprasanga) to show the non-substantiality of everything. Nāgārjuna equated the emptiness of dharmas with their dependent origination, and thus with their being devoid any permanent substance or primary, substantial existence (svabhava).[52][53][54][note 4] Nāgārjuna writes in the MMK:

We state that conditioned origination is emptiness. It is mere designation depending on something, and it is the middle path. (24.18)

Since nothing has arisen without depending on something, there is nothing that is not empty. (24.19) [55]

Nāgārjuna's Mādhyamaka states that since things have the nature of lacking true existence or own being (niḥsvabhāva), all things are mere conceptual constructs (prajñaptimatra) because they are just impermanent collections of causes and conditions.[56] Because of this, Mādhyamaka is also known as Niḥsvabhāvavāda. This also applies to the principle of causality itself, since everything is dependently originated.[57] If one is unaware of this, things may seem to arise as existents, remain for a time and then subsequently perish. In reality, dependently originated phenomena do not arise or remain as inherently existent phenomena and yet they still appear as a flow of conceptual constructs.[58][59][note 5] Thus both existence and nihilism are ruled out.[60][61] Any enduring essential nature would prevent the process of dependent origination, or any kind of origination at all. For things would simply always have been, and will always continue to be, without any change.[62][note 6] For Nāgārjuna, the realization of emptiness is a key understanding which allows one to reach liberation because it is nothing but the elimination of ignorance.

There has been significant debate, both in ancient India and in modern scholarship, as to how to interpret Mādhyamaka and whether it is nihilistic (a claim that Mādhyamaka thinkers vehemently denied).[63][64][65] Some scholars like F. Shcherbatskoy have also interpreted emptiness as described by Nāgārjuna as a Buddhist transcendental absolute, while other scholars such as David Kalupahana consider this interpretation to be a mistake.[66][67] According to Paul Williams, Nāgārjuna associates emptiness with the ultimate truth but his conception of emptiness is not some kind of Absolute, but rather it is the very absence of true existence with regards to the conventional reality of things and events in the world.[68]

For Nāgārjuna the phenomenal world is the limited truth (samvrtisatya) and does not really exist in the highest reality (paramarthasatya) and yet it has a kind of conventional reality which has its uses for reaching liberation. This limited truth includes everything, including the Buddha himself, the teachings (Dharma), liberation and even Nāgārjuna's own arguments.[69] This two-truth schema which did not deny the importance of convention allowed him to defend himself against charges of nihilism. Because of his philosophical work, Nāgārjuna is seen by some modern interpreters as restoring the Middle way of the Buddha, which had become influenced by absolutist metaphysical tendencies of schools like the Vaibhasika.[70][52]

Nāgārjuna is also famous for arguing that his philosophy of emptiness was not a view, and that he in fact did not take any position or thesis whatsoever since this would just be another form of clinging. In his Vigrahavyavartani Nāgārjuna outright states that he has no thesis (pratijña) to prove.[71] This idea would become a central point of debate for later Mādhyamaka philosophers. After Nāgārjuna, his pupil Āryadeva (3rd century CE) commented on and expanded Nāgārjuna's system. An influential commentator on Nāgārjuna was Buddhapālita (470–550) who has been interpreted as developing the 'prāsaṅgika' approach to Nāgārjuna's works, which argues that Madhyamaka critiques of essentialism are done only through reductio ad absurdum arguments. Like Nāgārjuna, instead of putting forth any positive position of his own, Buddhapālita merely seeks to show how all philosophical positions are untenable and self contradictory without putting forth a positive thesis.[72]

Buddhapālita is often contrasted with the works of Bhāvaviveka (c. 500 – c. 578), who argued for the use of logical arguments using the pramana-based epistemology of Indian logicians like DignāgaBhāvaviveka argued that Madhyamika's could put forth positive arguments of one's own, instead of just criticizing others' arguments, a tactic called vitaṇḍā (attacking) which was seen in bad form in Indian philosophical circles. He argued that the position of a Mādhyamaka was simply that phenomena are devoid of inherent nature.[72] This approach has been labeled the svātantrika style of Madhyamaka by Tibetan philosophers and commentators. Another influential commentator, Candrakīrti (c. 600–650), critiqued Bhāvaviveka's adoption of the pramana tradition on the grounds that it contained a subtle essentialism and argued that Mādhyamikas must make no positive assertions and need not construct formal arguments.[73]

Yogācāra school[edit]

The central text of the Yogācāra school, the Saṃdhinirmocana-sūtra, explains emptiness in terms of the three natures theory, stating that its purpose is to "establish the doctrine of the three-own-beings (trisvabhāva) in terms of their lack of own-nature (niḥsvabhāvatā)."[74] According to Andrew Skilton, in Yogācāra, emptiness is the "absence of duality between perceiving subject (lit. "grasper", Sktgrāhaka, Tib'dzin-pa) and the perceived object ("grasped", Skt: grāhya, Tib: bzhung-ba)."[75] This is seen in the following quote from the Madhyāntavibhāga:

There exists the imagination of the unreal, there is no duality, but there is emptiness, even in this there is that.[74]

In his commentary, the Indian Yogācāra philosopher Vasubandhu explains that imagination of the unreal (abhūta-parikalpa) is the "discrimination between the duality of grasped and grasper." Emptiness is said to be "the imagination of the unreal that is lacking in the form of being graspable or grasper." Thus in Yogacara, it can be said that emptiness is mainly that subject and object and all experiences which are seen in the subject–object modality are empty.[74]

According to Yogācāra thought, everything we conceive of is the result of the working of the Eight Consciousnesses.[note 7] The "things" we are conscious of are "mere concepts" (vijñapti), not 'the thing in itself'.[76] In this sense, our experiences are empty and false, they do not reveal the true nature of things as an enlightened person would see them, which would be non-dual, without the imputed subject object distinction.

The Yogācāra school philosophers Asaṅga and Vasubandhu criticized those in the Madhymamika school who "adhere to non-existence" (nāstikas, vaināśkas) and sought to move away from their negative interpretation of emptiness because they feared any philosophy of 'universal denial' (sarva-vaināśika) would stray into 'nihilism' (ucchedavāda), an extreme which was not the middle way.[74] Yogacarins differed from Madhyamikas in positing that there really was something which could be said to 'exist' in experience, namely some kind of nonobjective and empty perception. This Yogacara conception of emptiness, which states that there is something that exists (mainly, vijñapti, mental construction), and that it is empty, can be seen in the following statement of Vasubandhu:

Thus, when something is absent [in a receptacle], then one, seeing that [receptacle] as devoid of that thing, perceives that [receptacle] as it is, and recognises that [receptacle], which is left over, as it is, namely as something truly existing there.[74]

This tendency can also be seen in Asaṅga, who argues in his Bodhisattvabhūmi that there must be something that exists which is described as empty:

Emptiness is logical when one thing is devoid of another because of that [other's] absence and because of the presence of the empty thing itself.[74]

Asaṅga also states:

The nonexistence of duality is indeed the existence of nonexistence; this is the definition of emptiness. It is neither existence, nor nonexistence, neither different nor identical.[74]

This "existence of nonexistence" definition of emptiness can also be seen in Asaṅga's Abhidharmasamuccaya where he states that emptiness is "the non-existence of the self, and the existence of the no-self."[74]

In the sixth century, scholarly debates between Yogacarins and Madhyamikas centered on the status and reality of the paratantra-svabhāva (the "dependent nature"), with Madhyamika's like Bhāvaviveka criticizing the views of Yogacarins like Dharmapāla of Nalanda as reifying dependent origination.[74]

Buddha-nature[edit]

An influential division of 1st-millennium CE Buddhist texts develop the notion of Tathāgatagarbha or Buddha-nature.[77][78] The Tathāgatagarbha doctrine, at its earliest, probably appeared about the later part of the 3rd century CE, and is verifiable in Chinese translations of 1st millennium CE.[79]

The Tathāgatagarbha is the topic of the Tathāgatagarbha sūtras, where the title itself means a garbha (womb, matrix, seed) containing Tathāgata (Buddha). In the Tathāgatagarbha sūtras the perfection of the wisdom of not-self is stated to be the true self. The ultimate goal of the path is characterized using a range of positive language that had been used in Indian philosophy previously by essentialist philosophers, but which was now transmuted into a new Buddhist vocabulary to describe a being who has successfully completed the Buddhist path.[80]

These Sutras suggest, states Paul Williams, that 'all sentient beings contain a Tathāgata as their 'essence, core or essential inner nature'.[79] They also present a further developed understanding of emptiness, wherein the Buddha-nature, the Buddha and Liberation are seen as transcending the realm of emptiness, i.e. of the conditioned and dependently originated phenomena.[81]

One of these texts, the Angulimaliya Sutra, contrasts between empty phenomena such as the moral and emotional afflictions (kleshas), which are like ephemeral hailstones, and the enduring, eternal Buddha, which is like a precious gem:

The tens of millions of afflictive emotions like hail-stones are empty. The phenomena in the class of non-virtues, like hail-stones, quickly disintegrate. Buddha, like a vaidurya jewel, is permanent ... The liberation of a buddha also is form ... do not make a discrimination of non-division, saying, "The character of liberation is empty".'[82]

The Śrīmālā Sūtra is one of the earliest texts on Tathāgatagarbha thought, composed in the 3rd century in south India, according to Brian Brown. It asserted that everyone can potentially attain Buddhahood, and warns against the doctrine of Śūnyatā.[83] The Śrīmālā Sūtra posits that the Buddha-nature is ultimately identifiable as the supramundane nature of the Buddha, the garbha is the ground for Buddha-nature, this nature is unborn and undying, has ultimate existence, has no beginning nor end, is nondual, and permanent.[84] The text also adds that the garbha has "no self, soul or personality" and "incomprehensible to anyone distracted by sunyata (voidness)"; rather it is the support for phenomenal existence.[85]

The notion of Buddha-nature and its interpretation was and continues to be widely debated in all schools of Mahayana Buddhism. Some traditions interpret the doctrine to be equivalent to emptiness (like the Tibetan Gelug school); the positive language of the texts Tathāgatagarbha sutras are then interpreted as being of provisional meaning, and not ultimately true. Other schools, however (mainly the Jonang school), see Tathāgatagarbha as being an ultimate teaching and see it as an eternal, true self, while Śūnyatā is seen as a provisional, lower teaching.[86]

Likewise, western scholars have been divided in their interpretation of the Tathāgatagarbha, since the doctrine of an 'essential nature' in every living being appears to be confusing, since it seems to be equivalent to a 'Self',[note 8][88] which seems to contradict the doctrines in a vast majority of Buddhist texts. Some scholars, however, view such teachings as metaphorical, not to be taken literally.[81]

According to some scholars, the Buddha-nature which these sutras discuss does not represent a substantial self (ātman). Rather, it is a positive expression of emptiness, and represents the potentiality to realize Buddhahood through Buddhist practices. In this view, the intention of the teaching of Buddha-nature is soteriological rather than theoretical.[89][90] According to others, the potential of salvation depends on the ontological reality of a salvific, abiding core reality – the Buddha-nature, empty of all mutability and error, fully present within all beings.[91] Japanese scholars of the "Critical Buddhism" movement meanwhile see Buddha-nature as an essentialist and thus an un-Buddhist idea.[90]

Tibetan Buddhism[edit]

In Tibetan Buddhism, emptiness is often symbolized by and compared to the open sky[92] which is associated with openness and freedom.[93]

In Tibetan Buddhism, emptiness (Wyliestong-pa nyid) is mainly interpreted through the lens of Mādhyamaka philosophy, though the Yogacara- and Tathāgatagarbha-influenced interpretations are also influential. The interpretations of the Indian Mādhyamaka philosopher Candrakīrti are the dominant views on emptiness in Tibetan Buddhist philosophy.[94]

In Tibet, a distinction also began to be made between the autonomist (svātantrika, rang rgyud pa) and consequentialist (prāsaṅgika, thal 'gyur pa) approaches to Mādhyamaka reasoning about emptiness. The distinction was invented by Tibetan scholarship, and not one made by classical Indian Madhyamikas.[95]

Further Tibetan philosophical developments began in response to the works of the influential scholar Dolpopa (1292–1361) and led to two distinctly opposed Tibetan Mādhyamaka views on the nature of emptiness and ultimate reality.[96][97]

One of these is the view termed shentong (Wyliegzhan stong, 'other empty'), which is a further development of Indian Yogacara-Madhyamaka and the Buddha-nature teachings by Dolpopa, and is primarily promoted in the Jonang school but also by some Kagyu figures like Jamgon Kongtrul. This view states that ultimate reality is empty of the conventional, but it is itself not empty of being ultimate Buddhahood and the luminous nature of mind.[98] Dolpopa considered his view a form of Mādhyamaka, and called his system "Great Mādhyamaka".[99] In Jonang, this ultimate reality is a "ground or substratum" which is "uncreated and indestructible, noncomposite and beyond the chain of dependent origination."[100]

Dolpopa was roundly critiqued for his claims about emptiness and his view that they were a kind of Mādhyamaka. His critics include Tibetan philosophers such as the founder of the Gelug school Je Tsongkhapa (1357–1419) and Mikyö Dorje, the 8th Karmapa of the Karma Kagyu (1507–1554).[101]

Rangtong (Wylierang stong; 'self-empty') refers to views which oppose shentong and state that ultimate reality is that which is empty of self-nature in a relative and absolute sense; that is to say ultimate reality is empty of everything, including itself. It is thus not a transcendental ground or metaphysical absolute, but just the absence of true existence (svabhava). This view has sometimes been applied to the Gelug school because they tend to hold that emptiness is "an absolute negation" (med dgag).

However, many Tibetan philosophers reject these terms as descriptions of their views on emptiness. The Sakya thinker Gorampa Sonam Senge (1429-1489), for example, called his version of Mādhyamaka, "freedom from extremes" or "freedom from proliferations" (spros bral) and claimed that the ultimate truth was ineffable, beyond predication or concept.[102] For Gorampa, emptiness is not just the absence of inherent existence, but it is the absence of the four extremes in all phenomena i.e. existence, nonexistence, both and neither (see: catuskoti).[103]

The 14th Dalai Lama, who generally speaks from the Gelug perspective, states:

According to the theory of emptiness, any belief in an objective reality grounded in the assumption of intrinsic, independent existence is simply untenable.
All things and events, whether 'material', mental or even abstract concepts like time, are devoid of objective, independent existence ... [T]hings and events are 'empty' in that they can never possess any immutable essence, intrinsic reality or absolute 'being' that affords independence.[104]

Chinese Buddhism[edit]

Sānlùn school[edit]

When Buddhism was introduced in China it was initially understood in terms of indigenous Chinese philosophical culture. Because of this, emptiness (Ch.kong, 空;) was at first understood as pointing to a kind of transcendental reality similar to the Tao.[105] It took several centuries to realize that śūnyatā does not refer to an essential transcendental reality underneath or behind the world of appearances.[105]

Chinese Mādhyamaka (known as Sānlùn, or the "three treatise school") began with the work of Kumārajīva (344–413 CE) who translated the works of Nāgārjuna into Chinese. Sānlùn figures like Kumārajīva's pupil Sengzhao (384–414), and the later Jizang (549–623) were influential in introducing a more orthodox and non-essentialist interpretation of emptiness to Chinese Buddhism. Sengzhao argues, for example, that the nature of phenomena could not be said to be either existent or non-existent and that it was necessary to go beyond conceptual proliferation to realize emptiness. Jizang (549–623) was another central figure in Chinese Madhyamaka who wrote numerous commentaries on Nāgārjuna and Aryadeva and is considered to be the leading representative of the school.[106] Jizang called his method "deconstructing what is misleading and revealing what is corrective". He insisted that one must never settle on any particular viewpoint or perspective but constantly reexamine one's formulations to avoid reifications of thought and behavior.[106]

In the modern era, one major Chinese figure who has written on Mādhyamaka is the scholar monk Yin Shun (1906–2005).[107]

Tiantai and Huayan[edit]

Later Chinese philosophers developed their own unique interpretations of emptiness. One of these was Zhiyi, the intellectual founder of the Tiantai school, who was strongly influenced by the Lotus sutra. The Tiantai view of emptiness and dependent origination is inseparable from their view of the "interfusion of phenomena" and the idea that the ultimate reality is an absolute totality of all particular things which are "Neither-Same-Nor-Different" from each other.[108]

In Tiantai metaphysics, every event, function, or characteristic is the product of the interfusion of all others, the whole is in the particular and every particular event/function is also in every other particular. This also leads to the conclusion that all phenomena are "findable" in each and every other phenomena, even seemingly conflicting phenomena such as good and evil or delusion and enlightenment are interfused with each other.[109]

The Huayan school understood emptiness and ultimate reality through the similar idea of interpenetration or "coalescence" (Wylie: zung-'jug; Sanskrit: yuganaddha), using the concept of Indra's net to illustrate this.[110]

Chán[edit]

Chan Buddhism was influenced by all the previous Chinese Buddhist currents. The Mādhyamaka of Sengzhao, for example, influenced the views of the Chan patriarch Shen Hui (670-762), a critical figure in the development of Chan, as can be seen by his "Illuminating the Essential Doctrine" (Hsie Tsung Chi). This text emphasizes that true emptiness or Suchness cannot be known through thought since it is free from thought (wu-nien).[111] Shen Hui also states that true emptiness is not nothing, but it is a "Subtle Existence" (miao-yu), which is just "Great Prajña."[111]

The Chinese Chan presentation of emptiness, influenced by Yogacara and the Tathāgatagarbha sutras, also used more positive language and poetic metaphors to describe the nature of emptiness. For example, Hongzhi Zhengjue (1091–1157), a key figure in the Caodong lineage, wrote:

"The field of boundless emptiness is what exists from the very beginning. You must purify, cure, grind down, or brush away all the tendencies you have fabricated into apparent habits. [Those tendencies are the clouds in our eyes.] Then you can reside in a clear circle of brightness. Utter emptiness has no image. Upright independence does not rely on anything. Just expand and illuminate the original truth unconcerned by external conditions. Accordingly, we are told to realize that not a single thing exists. In this field birth and death do not appear. The deep source, transparent down to the bottom, can radiantly shine and can respond unencumbered to each speck of dust [each object] without becoming its partner. The subtlety of seeing and hearing transcends mere colors and sounds. The whole affair functions without leaving traces and mirrors without obscurations. Very naturally, mind and Dharmas emerge and harmonize."[112]

Western Buddhism[edit]

Various western Buddhists note that Śūnyatā refers to the emptiness of inherent existence, as in Madhyamaka; but also to the emptiness of mind or awareness, as open space and the "ground of being," as in meditation-orientated traditions and approaches such as Dzogchen and Shentong.[113][114][web 1][note 9]

Hinduism[edit]

Influence on Advaita Vedanta[edit]

Gaudapada has developed his concept of "ajāta"[115][116] which uses the term "anutpāda":[117]

  • "An" means "not", or "non"
  • "Utpāda" means "genesis", "coming forth", "birth"[118]

Taken together "anutpāda" means "having no origin", "not coming into existence", "not taking effect", "non-production".[118]

According to Gaudapada, the Absolute is not subject to birth, change and death. The Absolute is aja, the unborn eternal.[119] The empirical world of appearances is considered Maya (unreal as it is transitory), and not absolutely existent.[119] Thus, Gaudapada's concept of ajativada is similar to Buddhist term "anutpāda" for the absence of an origin[115][117] or śūnyatā.[120][note 10]

But Gaudapada's perspective is quite different from Nagarjuna.[124] Gaudapada's perspective found in Mandukya Karika is based on the Mandukya Upanishad.[124] According to Gaudapada, the metaphysical absolute called Brahman never changes, while the phenomenal world changes continuously, so the phenomenal world cannot arise independently from Brahman. If the world cannot arise, yet is an empirical fact, then the perceived world has to be a transitory (unreal) appearance of Brahman. And if the phenomenal world is a transitory appearance, then there is no real origination or destruction, only apparent origination or destruction. From the level of ultimate truth (paramārthatā) the phenomenal world is māyā, "illusion",[124] apparently existing but ultimately not metaphysically real.[125]

In Gaudapada-Karika, chapter III, verses 46–48, he states that Brahman never arises, is never born, is never unborn, it rests in itself:

When the mind does not lie low, and is not again tossed about, then that being without movement, and not presenting any appearance, culminates into Brahman. Resting in itself, calm, with Nirvana, indescribable, highest happiness, unborn and one with the unborn knowable, omniscient they say. No creature whatever is born, no origination of it exists or takes place. This is that highest truth where nothing whatever is born.

— Gaudapada Karika, 3.46-48, Translated by RD Karmarkar[126]

In contrast to Renard's view,[115] Karmarkar states the Ajativada of Gaudapada has nothing in common with the Śūnyatā concept in Buddhism.[127] While the language of Gaudapada is undeniably similar to those found in Mahayana Buddhism, states Comans, their perspective is different because unlike Buddhism, Gaudapada is relying on the premise of "Brahman, Atman or Turiya" exist and are the nature of absolute reality.[124]

In Shaivism[edit]

Sunya and sunyatisunya are concepts which appear in some Shaiva texts, such as the Vijñāna Bhairava Tantra, which contains several verses mentioning voidness as a feature of ultimate reality - Shiva:

"The Absolute void is Bhairava who is beyond the senses and the mind, beyond all the categories of these instruments.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human mind, He is most void. from the point of view of Reality, He is most full, for He is the source of all manifestation."[128]

"The yogi should concentrate intensely on the idea (and also feel) that this universe is totally void. In that void, his mind would become absorbed. Then he becomes highly qualified for absorption i.e. his mind is absorbed in the absolute void (sunyatisunya)."[129]

In a series of Kannada language texts of Lingayatism, a Shaivism tradition, shunya is equated to the concept of the supreme. In particular, the Shunya Sampadane texts present the ideas of Allama Prabhu in a form of dialogue, where shunya is that void and distinctions which a spiritual journey seeks to fill and eliminate. It is the described as a state of union of one's soul with the infinite Shiva, the state of blissful moksha.[130][131]

In Vaishnavism[edit]

Shunya Brahma is a concept found in certain texts of Vaishnavism, particularly in Odiya, such as the poetic Panchasakhas. It explains the Nirguna Brahman idea of Vedanta, that is the eternal unchanging metaphysical reality as "personified void". Alternative names for this concept of Hinduism, include shunya purusha and Jagannatha (Vishnu) in certain text.[130][132] However, both in Lingayatism and various flavors of Vaishnavism such as Mahima Dharma, the idea of Shunya is closer to the Hindu concept of metaphysical Brahman, rather than to the Śūnyatā concept of Buddhism.[130] However, there is some overlap, such as in the works of Bhima Bhoi.[130][133]

In the Vaishnavism of Orissa, the idea of shunya brahman or shunya purusha is found in the poetry of the Orissan Panchasakhas (Five Friends), such as in the compositions of 16th-century Acyutananda. Acyutananda's Shunya Samhita extols the nature of shunya brahman:

nāhi tāhāra rūpa varṇa, adṛsha avarṇa tā cinha.
tāhāku brahmā boli kahi, śūnya brahmhati se bolāi.

It has no shape, no colour,
It is invisible and without a name
This Brahman is called Shunya Brahman.[134][full citation needed]

The Panchasakhas practiced a form of Bhakti called Jnana-mishrita Bhakti-marga, which saw the necessity of knowledge (Jnana) and devotion - Bhakti.[citation needed]

Alternative translations[edit]

See also[edit]

Notes[edit]

  1. ^ A common translation is "no-self", without a self, but the Pāli Canon uses anattā as a singular substantive, meaning "not-self".[4]
  2. ^ Original: "Rupan śūnyatā śūnyatāiva rupan. Rupan na prithak śūnyatā śūnyatā na prithag rupan. Yad rupan sa śūnyatā ya śūnyatā tad rupan."
  3. ^ The Five Skandhas are: Form, Feeling, Perceptions, Mental Formations and Consciousness.
  4. ^ Mūlamadhyamakakārikā 24:18
  5. ^ Chapter 21 of the Mūlamadhyamakakārikā goes into the reasoning behind this.[58]
  6. ^ Nāgārjuna equates svabhāva (essence) with bhāva (existence) in Chapter 15 of the Mūlamadhyamakakārikā
  7. ^ Translations do differ, which makes a difference. Vijñāna can be translated as "consciousness", but also as "discernement".[76]
  8. ^ Paul Williams: "Some texts of the tathagatagarbha literature, such as the Mahaparinirvana Sutra actually refer to an atman, though other texts are careful to avoid the term. This would be in direct opposition to the general teachings of Buddhism on anatta. Indeed, the distinctions between the general Indian concept of atman and the popular Buddhist concept of Buddha-nature are often blurred to the point that writers consider them to be synonymous."[87]
  9. '^ Quotes:
    * John Snelling: "At the core of Mahayana philosophy lies the notion of Emptiness: 
    Shunyata. This is very much in the spirit of anatta (Skt. anatman) as first taught by the Buddha. It is often used to imply, not mere or sheer nothingness (that would be the nihilistic view), but 'emptiness of inherent existence; that is, the absence of any kind of enduring or self-sustaining essence. There is also a sense in which it has connotations of 'conceptual emptiness': absence of thoughts. It could be regarded too as a non-term signifying the ineffable understanding arising within the practice of meditation. Although seemingly negative, it also has its positive uses - and of course ultimately points beyond the positive negative dichotomy."[113]
    * Hans Knibbe: "There are at least to important meanings of this concept of emptiness, namely:
    - empty of independent existence;
    - openness and space as grounf of being.[114]
    * Nigel Wellings:[web 1] "Thus we have two types of emptiness, the emptiness of self in the skandhas that reveals the absence of an empirical and metaphysical self. And the emptiness of the self in Nirvâ.na that reveals nothing of the empirical self existing within the Nirvâ.na consciousness.
    Harvey seems to confirm this view when he tells us that all conditioned dharmas are empty of self because they are impermanent and a source of suffering, while the unconditioned dharma, Nirvâ.na, is empty because it does not "support the feeling of 'I-ness'", that is, the impermanent skandhas. (1990:52). This is very similar to the teaching of the modern Kagyu Nyingma Lama, Tulku Urgyen Rinpoche, a Shentong exponent:

    All appearances are empty, in that they can be destroyed or extinguished in some way [...] The whole universe vanishes at some point, destroyed by the seven fires and one immense deluge. In this way, all appearances are empty.
    Mind is also ultimately empty, but its way of being empty is not the same as appearances. [My italics] Mind can experience anything but it cannot be destroyed. Its original nature is the dharmakaya of all Buddhas. You cannot actually do anything to mind – you can't change it, wash it away, bury it or burn it. What is truly empty, though, is all the appearances that appear in the mind. (Tulku Urgyen (1999), As It Is vol.1 Rangjang Yeshe, Boudhanath, Hong Kong & Nasby. p.53)

  10. ^ The term is also used in the Laṅkāvatāra Sūtra.[121] According to D.T Suzuki, "anutpada" is not the opposite of "utpada", but transcends opposites. It is kenshō, seeing into the true nature of existence,[122] the seeing that "all objects are without self-substance Śūnyatā".[123]

References[edit]

  1. ^ Dale Mathers; Melvin E. Miller; Osamu Ando (2013). Self and No-Self: Continuing the Dialogue Between Buddhism and Psychotherapy. Routledge. p. 81. ISBN 978-1-317-72386-8.
  2. ^ Suñña – Palikanon.com
  3. ^ Plofker, Kim (2009). Mathematics in India. Princeton University Press. pp. 54–56. ISBN 978-0-691-120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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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ernal links[ed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