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10

이병철 노겸(勞謙) 김영일(金英一)시인과의 인연에 대한 회고..

이병철 - -생명 위기에 대한 통감(痛感)없이 생명운동 없다/ -노겸(勞謙) 김영일(金英一)시인과의 인연에 대한 회고... | Facebook

이병철

-생명 위기에 대한 통감(痛感)없이 생명운동 없다/
-노겸(勞謙) 김영일(金英一)시인과의 인연에 대한 회고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분들 대부분 김지하시인과 인연 또는 사연이 있는 분이라 싶다.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김시인과의 인연에 대한 회고부터 나누고자 한다.

나는 김시인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지하형’ 또는 ‘김지하선생’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달리 ‘노겸(勞謙)형’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한 나름의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김시인과는 74년,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함께 묶였으나 학연과 지역이 달라 재판과 수감 중에는 직접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에 민청사건으로 수감되었던 우리들 대부분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김시인은 동아일보에 ‘고행(苦行) 1974’의 연재로 다시 재수감되어 옥중에 있을 때였다. 그 무렵이던 78년, 창비 50호 기념좌담회 자리에서 내가 김시인의 시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한 바가 있었는데, 그 뒤에 김시인이 출소한 직후인 81년 정초에 원주에서 무위당선생을 모시고 김시인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을 때, 김시인은 창비 좌담회 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인연을 시작으로 무위당선생과 인농 박재일선배 등과의 인연도 겹쳐 김시인을 자연스레 형님으로 모시게 되었고 특히 ‘한살림공부모임’을 함께 하면서 더 깊게 만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그 뒤에 내가 쓴 책들에 길게, 짧게 발문이나 표사(表辭) 등을 써 주셨는데, 특히 이른바 새천년을 맞이하며 내가 준비했던 책 ‘살아남기, 근원으로 돌아가기(두레, 2000, 01)’에 장문의 발문으로 당신의 이름을 옛 이름 ‘김지하’에서 ‘노겸(勞謙) 김영일(金英一)’로 새롭게 바꾸었다는 것을 밝혀놓고 다음부터 꼭 그렇게 불러달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귀농(歸農)은 율려(律呂)의 각비(覺非)운동’이라는 이 발문(4332년 11월 3일 새벽 3시 30분)은 단지 김시인이 당신의 이름을 새롭게 바꾼 것을 알리는 내용만이 아니라 당신의 생명사상에 대한 주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문건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김시인의 그 당부를 저버릴 수가 없다.

이즈음을 전후해서 김시인이 해남 등지로 피신해 있을 때, 피신 중의 당신의 연락책으로 당시 전국귀농운동본부장을 맡고 있던 나를 공식적으로 지정하여 김시인이 도피 중에 썼던 책, ‘옛 가야에서 띄우는 겨울 편지(2000년 02월)’의 머리글에서 내 이름과 연락처를 명기해 놓아 그 후로 더 자주 만남과 연락을 나누게 되었다.

-시대의 천재이자 광인(狂人), 그리고 큰 무당

저마다 인연에 따라, 또는 이해와 믿음에 따라 김시인에 대한 느낌과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나에게 김시인은 시대를 앞서간 천재이자 경계를 넘어선 사람으로 다가와 있다. 
도인은 여취여광(如醉如狂)하다고 했던가. 범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는 말이겠다. 김시인 또한 세상에 그렇게 보였으리라 싶다.
아마도 해남 피신 시절 즈음이었으리라. 내가 살던 곳과 가까운 통영과 거제를 함께 가게 되었는데, 거제의 시퍼런 남해안 길을 오랫동안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나는 노겸형님께 ‘유랑공동체운동’을 제안했는데,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가 불쑥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형, 나는 저 너머를 본 적이 있소.’  당신은 저세상, 이승 너머를 보았다는 말이었다. 김시인은, 그의 정신세계는 이미 경계를 넘어서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신명은 이승의 세계조차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김시인의 생전에도, 그리고 그의 사후에도 그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조차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이미 경계 너머에 있는 이를 경계에 가려진 눈으로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김시인 사후에 이곳저곳에서 들리는 이렇다 저렇다는 평가는 내겐 휜 소리처럼 들릴 때가 많다.

노겸 김영일 시인, 그는 내가 여태껏 알고 만나본 이들 가운데 가장 감성이 뛰어난 시인이었고, 반독재 민주화 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투사였으며 가장 예민하고 깊은 통찰력을 지닌 사상가이자 몸으로 살아간 운동가였다. 그는 시대의 천재였고 신 지핀 자이자 광인이었으며 동시에 세기의 큰 무당이었고 예지자였다.

그보다 먼저 그는 아픈 사람, 온몸으로 앓는 사람이었다. 온 존재로 앓는 사람, 가족사를, 민족사의 애환을, 세상을 품고 앓았다. 그렇게 시대를, 역사를 혼신으로 앓았다. 그 아픔으로, 그 고통의 예민하고 날카로운 촉수로 그는 생명에 대해 신음하고 노래했다. 그렇게 그는 애초부터 일반인의 잣대로는 계량할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그가 자신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파괴된 사람’이라고 고백했듯이 찢어진 자로써, 그의 온 존재가 자신과 온 생명의 죽임당함에 대한 두려움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죽임의 세력에 맞선 혼신의 저항이었다 싶다. 그는 크게 앓았고, 생의 마지막까지 그렇게 앓았던 사람이었다.

91년 이른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은 죽임당하는 생명의 아픔으로 전율하던 시인의 절규였고 죽임을 부추기는 세력과 세태에 대한 단호한 일갈이었다. 그것은 죽임당하는 고통을 온몸으로 앓는 자만이, 생명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음을 온 존재로 체감한 자만이 외칠 수 있는 벽력같은 죽비였다. 그러나 전도몽상에서 헤어나진 못한 자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던가.

-생명, 생명운동의 키워드

김시인이 생명운동을 제시하며 던진 말들은 여럿이라 싶다. 그 가운데 나에게 화두처럼 다가와 있는 낱말들은 ‘밥, 님, 모심, 호혜, 각비, 개벽, 신명’ 등이다. 이 낱말들 하나하나가 생명과 분리될 수 없는, 예사롭지 않고 깊게 새겨야 할 말들일 터이다.

나는 밥이 하늘이고 밥을 모시는 것은 하늘이 하늘을 모시는 일(以天食天)이라는 해월선사의 말씀을 무위당선생과 김시인을 통해 배웠다. 두 분의 이끄심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밥에 담긴 그 큰 뜻을 알지 못했으리라 싶다. 그렇게 밥은 내게도 생명의 화두로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 오래인데도 나는 과연 제대로 밥을 모시고 있는가 싶을 때가 여전히 많다.
천지만물이 모두 ‘님’이란 것도 김시인에게서 배웠다. 그가 시 ‘님’을 통해 일러준 내용이다.

‘님/
가랑잎 한 잎/ 마루 끝에 굴러들어도/ 님 오신다 하소서
개미 한 마리/ 마루 밑에 기어와도/ 님 오신다 하소서
넓은 세상 드넓은 우주/ 사람 짐승 풀 벌레/ 흙 물 공기 바람 태양과 달과 별이/ 다 함께 지어놓은 밥/ 아침저녁 밥그릇 앞에//’

모심으로써 살아있다는 말이나 호혜나 신명이나 개벽이란 말 또한 그렇다. 우선은 이 말들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는 일이 중요하리라 싶다.

생전에 내가 노겸형께 ‘형님은 민중이나 저잣거리 장바닥 사람들 이야기는 자주 하면서 말은 왜 그렇게 어렵게 합니까. 나도 형님의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겠는데, 형님이 말씀하시는 민초들이 어떻게 그 말을 알아듣겠습니까?’라고 했더니 대뜸 ‘이형, 공부 좀 하소.’라고 하셨다. 이렇듯 생전에도 김시인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형님이 떠나신 지금도 여전히 그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이제 누가 노겸형님의 말씀을 쉽게 풀어낼 수 있기를 기대해볼 뿐이다.

-이후 생명운동의 방향

지금 생명위기, 인류와 지구행성 생명계가 죽음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싶다.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생명감이 마비된 존재일 터이다. 펜데믹과 기후위기는 개체 생명뿐 아니라 인류라는 종 전체의 위기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구 생태계, 생명계의 대멸종이 시작되는 단계가 아니라 이미 막바지에 이른 시점이라는 지적도 깊게 공감된다.

이 땅에 생명운동의 이름을 내건 지도 이미 40여 년에 이르렀는데, 그 반향은 여전히 미약하다. 대 멸절의 시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은 살아남기가 그 핵심일 것이다. 살아남기, 생명은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남고자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첫 번째는 지금 우리가 죽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서로를 죽임 속에 몰아넣고 있음을 자각하는 일이다

열탕 속의 개구리 이야기를 흔히 하면서도 정작 우리 자신이 지금 그 열탕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의식의 마비는 우리의 생명감각이 둔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온 사방에서 죽어가고 있고 죽임당하고 있는 생명들의 비명과 절규가 가득한데도 우리의 생명감각은 이 죽임의 문명에 마취되어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이 둔화되고 마비된 생명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지금 죽음으로 치달으면서 다른 생명들을 또한 그렇게 죽임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감각, 그것은 아픔을 느끼는 것, 생명의 통감(痛感)이다. 자신의 아픔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존재, 다른 생명의 아픔에 공감할 수가 있다. 자신과 타인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이가, 함께 아파할 줄 모르는 이들이 생명을, 생명운동을 이야기한다는 게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두 번째는 앓고 있고, 죽어가고 죽임당하는 존재들과의 연계와 연대이다. 

그것이 함께 살기, 함께 살아남기이다. 생명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생명, 다른 존재와 연계하여, 상호 의지하여 살아있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 모든 존재가 나의 ‘님’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모심으로써 살아간다는 것 또한 이와 같다. 생명은 서로의 밥이 되는 것 그것이 상생(相生)이다. 그것이 생명의 밥으로 살기이다. 지금 죽임의 이 문명이 서로를 자신의 밥으로 삼은 문명이라면 상생의 새 문명은 서로에게 생명의 밥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 생명의 밥으로 살기, 호혜시장의 회복은 생존을 위한 상호의존과 상호 존중에 바탕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다시 개벽(開闢)’이란 생명을 위한 전환이어야 한다.

개벽이란 곧 전환이다. 다시 열리는 새 세상이란 전환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전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방향과 상태를 바꾸는 것이다. 뒤집기와 뒤엎기, 돌파도 전환의 한 방법일 것이다. 일찍이 한살림선언(1989년)에서 천명한 ‘죽임의 문명에서 살림의 문명으로’가 그 한 예일 터이다.

전환은 각비(覺非)로부터 시작된다. 어제까지의 길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통절히 깨달을 때만이, 그 길이 사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죽임으로 내딛는 것이었음을 온몸으로 체감했을 때만이 비로소 존재의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위기의 통감, 그것이 각비일 것이다.
생명운동으로서 전환을 이끄는 열쇠 말 가운데 놓쳐서는 안 될 하나는 ‘영성’이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 안에 우주 생명이 살아 있고 모든 사람 안에 우주 생명이 살아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서로 공경하며 동식물과 무기물도 우주 삼라만상 전체의,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광활한 적막 속에서 끊임없이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하나의 큰 생명의 테두리 속에, 영겁의 한 흐름 속에 일치되고 있다는 이 믿음을 각성하고 실천할 때, 바로 그것이 영성이며 영적 인간이라고 생각한다(김지하, 개벽과 생명운동, 1990년).’ 

천지만물 가운데 하늘을 모시지 않는 것이 없다(天地萬物 莫非侍天主)는 해월선사의 말씀이나 하늘과 사람과 만물을 함께 공경한다는 삼경(三敬) 정신도 이런 영성의 회복과 다름이 아닐 것이다. 개벽, 전환운동에서 영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이 땅의 전환운동에서 시급히 벗어나야 할,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이원론적 인식이다. 그 가운데서도 이른바 우리 사회의 가장 극단적 병폐인 진영논리와 이를 뒷받침하는 확증편향의 사고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것과 저것으로 뚜렷이 경계 지어 나뉘어 있지 않다. 상호 연계되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특히 그렇다. 붉은 생명, 푸른 목숨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저마다 고유 독특하므로 다양하다. 이 모두가 한 생명이다. 한 생명, 한목숨을 둘로 나누고 가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반생명적인 것이고 공멸의 길로 치닫는 미망의 짓이 아닐 수 없다. 하나이면서 고유하고 다양한 생명을 패거리 지어 나누고 가르는 그 틈새에 깃드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연기론이나 불연기연의 인식과 사고가 전환운동의 바탕이 되지 않는 한 생명의 개벽, 그 생명으로의 다시 전환은 불가능해질 것이다.

밥과 영성, 또는 밥과 모심의 영성으로 저마다 선 자리에서 생존을 위한 자발적인 전환, 살아남고 제대로 함께 살기 위한 전환의 몸짓,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삶과 생명을 위한 자발적 공동체들의 연대, 그 호혜상생의 움직임이 생명으로의 새로운 길을 열어가는 핵심이라 싶다. 그것이 우리가 타고 있는 배가 이미 난파 중이라 할지라도 앞으로 살아갈 이들을 위한 구명정을 마련하는 것이라 하겠다.

네 번째는 감사와 신명의 회복과 일상의 성화(聖化)이다,

생명운동, 전환운동에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감사하기와 신명의 회복일상생활을 거룩하게 모시기라 싶다.

감사하기란 이렇게 살아있음을,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감사하는 것이고 살아가게 하는 존재들에게 감사하는 것이다. 삶 자체, 존재 자체에 감사하는 것이 어쩌면 생명운동의 핵심이라 싶기도 하다.

신명의 회복이란 영성의 회복과 같은 말일 것이다. 내 안팎으로 모셔진 님, 그 생명의 신령함을 공경하고 감사하며 즐기는 것이 신명의 회복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 삶을 일상의 성화라 할 수 있으리라. 결국은 자신을 잘 모시는 것, 자기 예배라 하겠다. 여태껏 섬겨온 돈과 물질 등 생명이 아닌 것들의 숭배에서 내 생명 안에, 모든 생명 안에 두루 충만한 님을 모시고 함께 즐기는 것, 그것이 전환이고 개벽이고 생명운동일 것이다.
어쩌면 죽임의 문명에 길들어진 나를 뒤집는 것, 나를 개벽하는 그것이 생명 전환의 그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명의 길로 전환할 때 거기에 이미 다시개벽, 그 생명으로의 전환 세상, 전환문명이 꽃 피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如流 이병철/시인, 생명운동가
(이번 노겸 김지하 시인 1주기 추모 심포지엄 종합토론문으로 쓴 글이다. 참고삼아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