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8

“최초의 여성출가가 이루어진 곳” - 스님의하루

“최초의 여성출가가 이루어진 곳” - 스님의하루


스님의하루
2020.1.9. 인도성지순례 7일째 (바이샬리)
“최초의 여성출가가 이루어진 곳”
20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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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성지순례를 떠난 지 7일째 되는 날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기 전 마지막 여정은 영축산에서 시작해 바이샬리를 거쳐 쿠시나가르에서 끝이 납니다. 순례자들도 어제 영축산에 이어 오늘은 바이샬리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봅니다.

새벽 5시, 바이샬리로 출발했습니다. 인도성지순례를 할 때마다 짙은 안개 때문에 새벽에 이동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번 순례기간에는 안개가 짙지 않아서 비교적 순조롭게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캄캄한 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순례자들은 새벽 예불을 드렸습니다.

오전 7시쯤, 파트나를 지났습니다. 파트나는 야무나, 강가, 고그라, 간다키, 숀 이렇게 다섯 개의 강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너른 강의 이쪽과 저쪽은 마하트마 간디 다리로 이어져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 브릿지에 도착했습니다. 다리 길이가 11km 정도 됩니다. 인도에서 제일 긴 다리입니다. ”

바다 같은 강 위로 붉은 해가 떠올랐습니다. 순례자들은 고요히 일출을 맞이했습니다.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린 곳, 원후봉밀터

예상보다 이른 9시에 바이샬리 원후봉밀터에 도착했습니다. 이 곳에도 아쇼카왕이 석주를 세웠는데, 아쇼카 석주가 그대로 보존된 유일한 곳이기도 합니다. 원후봉밀터로 들어가는 길에도 구걸하는 아이들이 손을 내밀고 따라왔습니다.





순례자들은 가사를 입고 합장하고 석가모니불을 외며 탑을 돌았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한 줄로 탑을 돈 후 탑을 바라보며 예불 공양을 올렸습니다.













예불 끝에 스님은 세계 평화를 발원했습니다.






“오늘날 세계는 각자도생의 길을 가며 갈등이 증폭되고 전쟁의 위험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세계 모든 인류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이해하며 화해하고 협력하여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인류가 더 많이 생산해서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 좋다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결과 자연이 파괴되고 이상고온현상으로 지구 곳곳에서 갖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호주에 이상고온으로 산불이 여기저기 일어나 많은 생명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이 어리석음을 깊이 참회하오니 하루 속히 산불이 진화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발원하옵니다.”





순례자들도 함께 마음을 모아 발원했습니다. 발원을 하며 다른 이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부처님의 마음을 따라봅니다. 예불을 드린 후 자리에 앉아 명상을 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긴장하지 말고 편안하게 합니다. 편안하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코 끝에 집중해서 숨을 쉬나 안 쉬나 확인을 해봅니다. 숨이 들어올 때는 들어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갈 때는 나가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가만히 있어도 호흡은 알아서 들쑥날쑥 하니까 다만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면 밀려 오구나 알아차리듯이.


자꾸 이 생각 저 생각이 떠올라서 호흡을 놓치기 쉬워요. 몸뚱이는 인도에 있는데 생각은 한국에 있는 집 생각, 남편 생각, 자식 생각, 애인 생각, 커피 생각이 떠오를 겁니다. 생각이 안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생각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가지 말고 다만 호흡을 알아차리고, 또 알아차리면 됩니다. 편안하게 합니다.”





속사정은 몰라도 원후봉밀터를 바라보며 명상하는 순례자들의 모습은 그림처럼 고요했습니다. 이렇게 정진을 마친 후 스님은 바이샬리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부처님이 가장 사랑하셨던 도시, 바이샬리 Vaisali






“바이샬리는 8대 성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이샬리를 상징하는 조각은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 올리는 장면입니다.






바이샬리에 남은 유적은 많지 않지만, 부처님과 관련된 이야깃거리가 무척 많습니다. 아무리 못해도 7가지는 알아야 해요. 밥 먹고 할까요?”

“네.” (모두 웃음)

새벽 5시에 출발해 10시가 되도록 아직 식사를 안했습니다. 스님이 묻자 순례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슬쩍 이리 건드리고 저리 건드려보면 맨날 넘어가요.(모두 웃음) 제가 밥 먹고 공부하게 생겼어요, 공부하고 밥 먹게 생겼어요?”(모두 웃음)





스님은 바로 바이샬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공화정을 구성해 나라를 운영했던 민주적인 바이샬리를 무척 좋아하셨답니다. 바이샬리는 여성이 처음 출가한 곳,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공양올린 곳입니다. 또 부처님이 열반을 선언하신 곳, 자등명 법등명의 법문을 설해주신 곳, 암나팔리의 공양을 받은 곳,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세운 곳,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100년 후에 제2결집이 이뤄진 곳, 또 불멸 후 500년 경 대승불교가 일어날 때 유마경이 설해진 곳이기도 합니다.






“바이샬리(Vaishali, 毗舍離)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곳이 최초의 여성 출가가 이루어진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바라나시(Varanasi)에서 설법하실 때 최초로 다섯 비구(比丘, bhikkhu)가 출가했고 곧이어 야사(耶舍, Yasa)도 출가했지만, 이는 모두 남자 출가수행자입니다. 그리고 야사의 아버지 구리가 장자(俱梨迦長者)가 교화를 받고 재가수행자, 다시 말해 세상에 있으면서 수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출가수행자도 재가수행자도 남자가 먼저 나왔어요. 그 다음에 구리가 장자의 부인과 며느리, 즉 야사의 어머니와 아내가 재가수행자가 되면서 여자 재가수행자가 나왔습니다.
여성 해방의 효시, 오백 여인의 출가


그런데 여자 출가수행자는 아직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여자 출가수행자라는 시스템 자체가 없었어요. 마치 조선 시대에는 공주라 하더라도 과거 시험을 치를 자격이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남자는 천민이라도 간혹이긴 하지만 출가수행자가 나왔습니다. 우파리(德波羅, 우바리) 같은 경우가 그래요. 우파리는 부처님이 성도(成道) 후 6년째 되던 해에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迦毘羅衛城)에 오셨을 때, 자기가 모시는 왕자들이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따라서 출가했습니다. 그렇게 남자의 경우는 천민이라도 출가할 수 있었어요. 조선 시대에도 남자는 천민이라 해도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거나 임금에게 잘 보이든지 하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럴 수 없었어요.


역사 속에서 최대의 차별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신분 차별이고, 다른 하나는 성 차별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흑인 차별과 같은 인종 차별은 없었지만, 종을 두는 신분 차별이 있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신분 차별과 성 차별이 제도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여자 수행자는 나올 수가 없었어요. 사회 시스템 자체가 여자 수행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淨飯王, Suddhodana)이 돌아가신 후에 부처님의 어머니가 혼자 되셨어요. 당시 관습에 따르면 그런 경우 해당 여성의 주인은 당연히 아들이 되는데, 아들도 출가해 버리고 없으니 어머니는 혼자가 되신 거예요.


그런데 이분은 부처님의 새어머니예요. 부처님의 생모인 마야부인(摩耶夫人, Mahamaya)은 부처님을 낳고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고, 마야부인의 막내 동생이자 부처님의 이모인 마하프라자파티(Mahaprajapati) 부인이 와서 새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낳은 부처님의 동생 난다(Nanda, 難陀)도 출가를 했습니다. 그러니 이 집안은 남자가 모두 없어진 거예요. 부처님의 아내도 마찬가지 처지였습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남편은 출가했고, 아들인 라훌라(Rahula, 羅喉羅)도 출가해 버리니 집안에 남자가 없어졌어요.


당시 인도에서는 남자가 없는 여자는 주인이 없다고 해서 누구든지 잡아갈 수 있었어요. 조선시대에도 여자는 아무리 똑똑해도 주인이 있었습니다. 삼종지도라고 해서 어릴 때는 아버지가 주인이고, 결혼하면 남편이 주인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이 주인이었어요. 호주제는 집안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제도잖아요. 우리나라에서도 이 호주제가 2005년에 폐지됐으니 없어진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서양 결혼식에서 아버지가 딸의 손을 잡고 가서 사위에게 딸을 넘겨주는 것도 주인을 바꾸는 의식입니다. 쇠전에 가서 소 사면서 돈 주고 쇠고삐 받아오는 것과 똑같은 시스템이에요. (모두 웃음) 이걸 좋다고 서양식 결혼식을 자꾸 흉내 내는데, 적어도 우리나라 전통 혼례에서는 그렇게 안 해요. 마주 보고 절을 합니다. 어쨌든 그런 시스템에서는 여성에게 반드시 주인이 있어야 했어요. 여성이 출가하면 주인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 당시에 여성의 출가는 거의 이루어질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제일 큰 문제는 이처럼 주인이 없어진 여성이 다름 아닌 부처님의 어머니와 부인 등 석가족 내에 이런 분들이 500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남편은 죽고 아들은 출가한 집들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이 500명의 여인들이 출가하겠다고 부처님께 찾아왔지만 부처님이 모두 거절하셨어요. 여인들을 대표해서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이 세 번이나 찾아와서 청을 하였지만 부처님은 모두 거절하셨어요. 보통 세 번 부탁하면 들어주는 게 당시의 문화인데, 부처님이 세 번 다 거절하신 경우는 아주 드물어요


그리고는 부처님은 이곳 바이샬리로 와버렸어요. 그런데 여자들도 대단했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모두 바이샬리까지 따라왔어요. 여자들이 유행(遊行)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여기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 몰골이 형편없었어요. 그렇게 해서 또 부처님께 청을 했지만 부처님은 이번에도 다 거절하셨어요.


거절당한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이 울고 나가는 모습을 아난다가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나아가 여쭈었습니다.






‘여자는 수행 정진하면 해탈할 수 없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니 부처님이 대답하셨어요.


‘여자도 해탈할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성 차별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난다는 ‘그런데 왜 출가를 허락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면서 부처님 어머니의 공덕을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의 어떤 남자도 엄마 젖을 안 먹고 자란 사람이 없듯이 어머니의 공덕을 쭉 이야기하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이 맞다. 어린 나를 키우느라고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이 정말 수고가 많았다.’


그리고 나서 그 여인들에게 출가를 허락하셨습니다. 출가는 허락하셨지만 거기에 여덟 가지 조건을 붙이셨어요. 이것을 팔경법(八敬法)이라고 합니다. 그 여덟 가지 조건을 지킨다면 출가를 허락하겠다는 부처님 말씀을 아난다가 전했더니 마하프라자파티 부인이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성의 출가가 이루어집니다.


당시 여성의 출가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여자가 최초로 남자 없이 자기 이름을 갖게 됐다는 뜻입니다. 비구니(比丘尼, bhikkhuni)가 된다는 것은 ‘아무개의 소유’라는 말이 없어지고 그냥 자기의 이름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의미해요. 여성의 출가는 단순히 ‘비구니가 됐다’는 뜻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남자 없이 여자가 자기 이름을 갖게 됐다는 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것은 성 해방의 효시, 첫 번째 여성 해방입니다. 그래서 이곳 바이샬리에는 여성 해방의 첫출발을 기념하는 탑을 세워야 해요.




남방불교에 비구니 제도가 없는 이유


남방불교에서는 그로부터 500년이 지났을 때 비구니 제도를 없애버렸습니다. 없앨 때 아난존자를 핑계 삼았습니다. 결정은 부처님이 하셨는데 아난존자 핑계를 댔어요. 인도의 전통에는 여자는 다섯 가지가 될 수 없다는 오불가설(五不可說)이 있었는데, 이 세속의 오불가설에 따라 비구니제도를 폐지한 거예요. 그러면서 아난존자에게 허물을 덮어씌운 겁니다.


‘부처님이 분명히 안 된다고 했는데, 아난존자가 눈물을 흘리고 애걸복걸해서 법이 아닌데도 허용이 된 것이다. 원래 부처님 가르침대로 하면 허용이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아난존자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비구니 제도를 폐지해 버렸어요. 그래서 현재 남방불교에는 비구니 제도가 없습니다. ‘넌(Nun)’이라고 해서 머리 깎고 하얀 옷을 입고 다니며 수행하는 여성들이 있지만, 이 여성들은 가사를 수할 권리가 없어서 비구들 앞에서 강의도 못해요. 재가신자인 여교수가 불교를 전공하면 강의를 할 수 있지만, 오히려 넌(Nun)이 되면 강의를 못하니까 모순이죠. IT든 역사학이든, 어제까지 비구들 앞에서 강의하던 전문 학자라도 넌(Nun)이 되면 팔경법에 따라 그 순간부터 강의를 못하는 거예요.






최초로 여성의 출가가 이뤄진 바이샬리는 참으로 성스러운 곳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의 비구니 스님들에게 이것은 단순히 비구니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상 엄청난 의미를 지닌 사건이라고 얘기하면서 바이샬리에 비구니 절을 하나 지으라고 권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비구니 스님들이 여기에 절을 지어서 남방불교권에 있는 여성들에게 비구니 수계를 한다면, 거부반응이 좀 적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부처님이 여성 출가를 허락하신 곳이니까요. 그런데 다들 자기 살기 바빠서 어렵다는 반응이었어요.


설령 부처님 당시에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지 안 했다 하더라도 지금은 허용을 해야 할 텐데, 부처님 당시에 허용했던 것을 오히려 지금은 허용하지 않으니까 더 문제입니다. 제가 예전에 스리랑카 원로 스님에게 세 가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스리랑카 불교가 한국 불교처럼 되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세 가지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첫째, 불교가 환경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
둘째, 불교가 평화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
셋째, 여성 출가를 허용해야 한다.






그랬더니 환경 문제는 수용하고, 평화 문제는 거부 반응을 보였습니다. 스리랑카는 민족주의로 인해 타밀족(Tamils)과 전쟁 중인 상황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여성 출가 문제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한국과 다르다. 우리의 전통 안에서도 여성들이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


현재 동남아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처럼 교육을 받고 중요한 역할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만약 불교의 이런 성 차별적인 면모가 계속 유지되면, 이처럼 교육받은 여성들이 YMCA 같은 기독교 계열 기관으로 가서 활동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요.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올바른 시각을 갖기가 참 어렵습니다. 밖에서 보면 문제가 보이지만 그 안에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니까요.


저는 출가를 강조하는 편은 아닙니다. 지금 정토회는 승려가 되고 안 되고를 넘어서서 누구나 다 수행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고 안 하고는 논쟁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다만 차별이 있으니 없애라는 거예요. 그러나 현재 남방불교에서는 여성의 출가 문제가 아직도 큰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바이샬리에서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 이유






부처님이 이곳 바이샬리에서 여성의 출가를 허용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여성이라고 해서 육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오랫동안 남자에 의지해 살아온 습관이 있기 때문에 까르마(Karma, 業)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출가를 허용한다고 해서 까르마가 바뀌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들이 바이샬리까지 스스로 결단을 하고 왔다는 게 출가를 허용하는 하나의 큰 동기가 됐습니다. 즉 자기 스스로 준비를 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어요.


둘째, 바이샬리라는 도시가 당시 인도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였다는 겁니다. 요즘에 비유하자면, 보수적인 텍사스(Texas)주의 댈러스(Dallas)에서 동성애를 인정하면 저항이 거세겠지만, 미국 안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도시인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동성애를 인정하면 저항이 덜한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한 나라 안에서도 그것이 수용될만한 진보적인 도시가 있고, 그렇지 않은 보수적인 도시가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가장 진보적인 도시가 바이샬리였기 때문에 이곳에서 여성의 출가를 허용하셨으리라 추측합니다.


그런데 여성의 출가 생활에는 부작용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몸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는데 여성들은 그러기가 어려웠어요. 남자는 혼자서 벌거벗다시피 하고 나무 밑에 앉아있어도 늑대한테 물려죽을 염려는 있을지언정 사람한테 잡혀갈 일은 없잖아요. 그런데 여성들은 벌거벗고 나무 밑에 앉아 있으면 주인이 없는 여자라고 해서 다른 남자들이 잡아가거나 성폭행을 했습니다. 이런 부작용 때문에 여성들이 수행하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실제로 지금 여러분도 그래요. 해탈을 하려면 수행정진을 할 때 일체의 두려움이 없어야 하는데 여성들은 성적인 문제에 늘 두려움을 갖고 있다 보니 해탈의 길에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초기 비구니들의 성폭행 사건이 굉장히 많았어요. 기록에 보면 초기 비구니들이 그런 어려움을 얼마나 장하게 극복했는지가 나옵니다. 어떤 비구니가 앉아서 정진하는데 웬 남자가 와서 유혹을 했어요. ‘당신의 눈이 너무 아름답소’라고 말을 붙이니 손가락을 넣어 자기 눈을 빼서는 ‘가져가세요’ 하고 줬다는 기록이 있어요. 눈을 빼서 피가 줄줄 흐르는데 성적인 흥분이 생길 리가 없죠. 이처럼 하나의 눈을 잃으면서까지 자기정진을 밀고 나간 기록이 있습니다.






또 어떤 기록에 보면 여자가 혼자서 정진하는데 그 여자를 사모했던 남자가 밤에 찾아와 성폭행을 해서 소문이 났어요. 그런데 비구들끼리 둘러앉아 성폭행 사건에 대해 얘기하면서 ‘성폭행이라 해도 성관계를 했으니 쾌감을 느꼈을까, 안 느꼈을까?’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니 성폭행을 당한 비구니가 얼마나 상처가 컸겠어요.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강제로 성폭행을 당했다 하더라도 결국 계율을 어긴 게 아니냐’ 하는 게 비구들의 생각이었어요.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계율을 어기지 않았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러자 비구들도 잠잠해졌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당시에는 출가한 비구니들이라 해도 사회적 통념에 따른 ‘주인’이 있다고 내세워야 현실적으로 보호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구니를 비구 교단에 예속시킬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런 조건이 있었다 하더라도 비구니 제도가 허용됐다는 사실 자체의 중요성을 봐야 해요. 물론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자체가 여성에 대한 성 차별에 들어가긴 합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기준에서 보지 말고 그것이 발생할 당시의 사회적 조건에서 문제를 살펴봐야 합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출가는 여성 해방의 효시라고 할 만한 대사건이었어요. 우리 순례단에는 특히 여성 불자들이 많으니까 이런 불법의 위대함을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경전을 독송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미리 듣고 경전을 읽으니 더 생생하며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경전 독송까지 마치고 오전 12시가 다 되어서야 아침 공양을 했습니다. 앉은 그 자리에서 조용히 도시락으로 공양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비슷한 반찬이지만 허기까지 보태어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30분 동안 자유롭게 원후봉밀터를 둘러보았습니다. 순례자들은 조별로, 혹은 혼자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자유시간을 마치고 다시 자리에 모이자 스님은 인도에서 순례를 할 때 가져야할 마음가짐에 대해 설명해주었습니다.






“여행을 다니면 온갖 일이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불평은 그만하시고 이런저런 일들에 웃으면서 다닐 줄 알아야 합니다. 혹시 사고가 나거나 무슨 일이 생겨도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토회 인도성지순례는 뷔페식 여행이거든요. 배고프면 먹고, 배가 안 고프면 그냥 가고, 중간 중간에 꼭 봐야 할 것은 무조건 가되 나머지는 일정에 차질이 없으면 가고, 차질이 있으면 안 가는 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예를 들어, 제띠안(Jethian, 杖林)에서 도보 순례를 하면 한나절이 없어지잖아요. 원래는 어제 제띠안에서 도보 순례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저께 보드가야에서 너무 많이 걸었기 때문에 제띠안까지 걷기는 좀 힘들 것 같았어요. 제띠안을 걷게 되면 칠엽굴(七葉窟, Sattapanni) 가는 일정이 오늘 아침으로 바뀌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오늘 일정이 여유가 없어지게 되거든요.
인도에서 재미있게 지내는 방법


인도 성지순례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이곳 바이샬리에 숙박 시설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지역 전체에 숙소가 하나뿐이었는데 그나마도 방이 6개인가 7개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어느 날은 한 침대에 두세 명이 올라가서 함께 자다가 침대가 무너지기도 했어요. (모두 웃음)






차량 두 대로 순례를 왔는데, 한 차의 사람들은 숙소 안에서 자고, 다른 한 차의 사람들은 처마 밑에서 잔 적도 있습니다. 동네에서 멍석을 빌려와서 깔고 잔 적도 있어요. 지금은 숙소가 많이 생겨서 450여 명이 모두 잘 수 있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지만, 30년 동안 엄청나게 깨끗해지고 변화한 겁니다. 처음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그거 같지만, 30년 동안 성지순례를 진행한 제가 볼 때는 천지개벽한 수준이에요. 여러분은 ’개벽한 수준이 이 정도면 그전에는 어땠을까‘ 할 텐데, 사실 그전에도 사람 사는 것은 비슷했어요. (모두 웃음)






제가 이렇게 우스갯소리를 하는 이유는 먹는 것, 입는 것, 일정을 일일이 따지다 보면 인도 여행을 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저 안 굶고 먹기만 하면 된다. 그저 눈만 붙이면 된다. 그저 가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여행을 하면 인도만큼 편안하고 재미있는 곳이 없습니다. 어디에 가서 여러분을 그렇게 환영해 주는 사람을 만나겠어요? (모두 웃음)


이곳 인도는 어디를 가도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릭샤 가져와서 타라고 하죠, 물건 가져와서 사라고 하죠, 여러분을 왕처럼 대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은 배짱 튕기면서 ‘안 사!’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한국 사람들이 ‘안 사!’ 하는 말을 자주 하니까 어느 날은 장사꾼 한 명이 염주를 가져와서 저한테 대놓고 ‘안 사? 안 사?’ 이래요. (모두 웃음)






인도에 와서 여러분 모두 환영을 많이 받았잖아요. 어디를 가도 아이들이 환영해주죠. 환영비로 10루피만 줘도 엄청나게 좋아합니다. 손도 잡아주고, 산에 올라갈 때도 옆에서 잡아주고, 여왕처럼 대우해줍니다. 어디에서 여러분이 그런 환영을 받겠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귀찮아해요. 그러지 말고 환영을 마음껏 받으세요.”

“네!”


“마음을 즐겁게 가지고 여행을 하세요. 스님도 처음부터 즐겁게 여행하지는 않았어요. 저도 처음 인도에 왔을 때는 저도 ‘아이고!’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성지라는 것에 좀 집착했던 것 같아요. 저는 성지에서 엄청난 마음을 내서 절을 하려고 하는데, 인도 사람들이 옆에 와서 계속 돈을 달라는 거예요. 절을 할 여유도 없이 옆에서 계속 ‘박시시(Baksheesh)’하고 졸라댑니다. (모두 웃음)






그리고 향냄새가 얼마나 고약합니까? 가뜩이나 독한 향을 한 움큼씩 불을 붙여서 옆에 갖다 놓으니 숨도 못 쉬겠더라고요.


이것은 문화가 달라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처음엔 짜증도 내고 귀찮게도 생각했는데, 매년 오다 보면 이곳은 우리 성질대로 한다고 되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냥 현지에 맞추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질 내봐야 아무런 이득이 없어요


그렇다고 현지 사정에 전적으로 맞추면 여행이 뒤죽박죽됩니다. 개인 여행은 괜찮지만 단체 여행에서는 문제가 돼요. 그래서 우리는 스케줄을 한국식으로 정확하게 세우고 한국식으로 진행해요. 그러는 한편, 현지에서 차가 고장 나거나 오지 않는 일이 발생하면 최선을 다해서 해결하되 그것을 문제 삼고 성질내지 않습니다. 성질내봐야 득 될 것이 없거든요.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하면서 일정을 조절해보니까, 돌발 상황이 발생해도 일정을 하루만 더 늘리면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운전기사에게 빨리 가자는 독촉을 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시간이 늦어지면 운전기사 옆에 붙어서 계속 ‘빨리 가자’ 했는데, 제가 인도에서 교통사고를 한 번 당하고 나서는 빨리 가자는 소리를 안 합니다.


한 번은 사람들을 델리로 보내 놓고 빈 버스를 타고 밤에 돌아왔어요. 차 안에서 자고 있었는데 앞차와 충돌 사고가 났어요. 앞좌석 손잡이에 머리를 부딪쳐서 머리가 깨지고 피가 줄줄 났습니다. 그때는 밤이라 깜깜하니까 피인 줄 모르고 ‘왜 얼굴에 땀이 나나’ 하면서 닦았는데, 나중에 불을 켜고 보니까 피였습니다. 그 경험을 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서두르면 교통사고가 날 확률이 굉장히 높아지는구나. 그러니 기사에게 독촉해서는 안 되겠다. 기사 본인의 수준대로 운전하는 게 제일 안전하다.’






그래서 전체 일정을 원래 일정에서 하루 더 늘린 거예요. 처음에는 13박 14일로 다니다가 나중에 15박 16일로 늘렸다가, 지금은 16박 17일로 다닙니다. 일정을 하루 늦추는 대신 운전 기사를 독촉하지 않고 그냥 운전기사가 가는 대로 갑니다. 안전이 중요하니까요.


그렇게 이런저런 노하우가 많이 쌓여 있는 여행이 인도 성지순례입니다. 이제 절반 정도 여행을 했으니까, 나머지 절반은 앞의 경험을 살려서 조금 더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이어가보시면 좋겠습니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원후봉밀터를 나서는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바이샬리 진신사리탑터

진신사리탑터 앞에 도착한 순례단은 세 걸음을 걷고 반 배하며 탑으로 나아갔습니다. 430여명이 모두 탑을 에워쌀 때까지 정근이 계속 되었습니다.













탑을 참배한 후 한쪽 잔디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한 이곳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화장하고 남은 유골인 사리를 모신 탑터입니다. 부처님의 육신에서 나온 사리는 여덟 몫으로 나뉘어져 모셔졌습니다. 그 중에 이 곳은 바이샬리의 릿챠비족이 세운 사리탑의 터입니다. 사리 용기는 파트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이 곳은 탑 터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떠올리며 예불 공양을 드린 후 바이샬리에서의 부처님의 행적을 마음에 새기며 고요히 명상에 들었습니다.





원후봉밀터와 진신사리탑터 두 곳을 둘러보고 바이샬리 왕궁터로 향했습니다. 옛 영화는 온데간데 없는 너른 공터에 다함께 둘러앉았습니다.






“오늘은 보름이에요. 왕궁터에서 달밤을 보내려고 계획했는데 구름이 꽉 끼어서 달은 보기 어렵겠어요. 그래서 지금 한 시간 정도 여유를 즐기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서 저녁식사를 하겠습니다. 누가 나와서 대중을 즐겁게 해보세요.”





사람들은 지체없이 나와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을에 사는 인도인들이 하나둘 모여 순례자들을 구경했습니다.





인도인 활동가들도 인도 노래를 부르고 방송인 김병조님은 왕궁터에 꼭 알맞은 노래 ‘황성옛터’를 한자락 불러주었습니다.









구름 속에서 점차 날이 저물고 있었습니다. 숙소로 돌아가 순례자들은 저녁을 먹고 내일 아침 도시락을 준비했습니다. 조별로 나누기를 하며 오늘 하루도 돌아보았습니다.





내일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는 여정을 따라가봅니다. 바이샬리 사람들이 부처님과의 마지막 이별을 기념하여 세운 케사리아 탑, 춘다가 마지막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터를 참배하고, 부처님께서 목욕하셨다는 카쿠타 강에 내려 강물에 손을 담궈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쿠시나가르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