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2

[162.7] 을묘천서와 천주실의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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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 을묘천서와 천주실의

신인간

2021. 7. 2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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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천서와 천주실의

- 도올 김용옥의 󰡔을묘천서󰡕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박길수 (모시는사람들 대표, 서울교구)







1. 󰡔을묘천서󰡕는 󰡔천주실의󰡕인가?



이 글은 천도교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수운 최제우 대신사의 을묘년 종교체험, 일반적으로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하는 ‘이서(異書)’를 받는 사건에서 ‘을묘천서’가 ‘천주실의(천주실의)’인가를 따져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최근 도올 김용옥 선생(이하 ‘도올’ 또는 ‘도올 선생’으로 씀, 필자의 恩師이시다)이 펴낸 󰡔동경대전 1+2󰡕(통나무, 2021)과 그 해설 동영상인 도올 TV 강의(유튜브)에서 “을묘천서(乙卯天書)란 바로 천주실의(天主實義)이다”라고 주장하는 바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성격을 띤다.

도올 선생이 유튜브 강의나 󰡔동경대전(통나무)󰡕에서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고 주장하는 직접적인 근거는 크게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을묘천서’ 사건을 전하는 천도교 초기 역사서(󰡔대선생주문집󰡕, 󰡔도원기서󰡕)의 내용으로 볼 때 이에 해당하는 책은 󰡔천주실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 선생님께서 그 책을 펼쳐 보시니 유학의 책이라고 할 수도 없고, 불가의 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책이었다. 도무지 문장의 이치가 온당치를 않아 그 진의를 풀어 깨닫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었다.”(先生披覽 於儒於佛之書 文理不當 難爲解覺, 102)라는 구절을 대표적인 근거로 제시한다.

둘째, 이 책(‘을묘천서’)의 “최종적인 성격이 “기도지교(祈禱之敎)”(기도의 가르침)로 규정될 수 있는 책, 그런데 그 책은 한문으로 쓰여진 책, 이 책은 단 하나밖에 없다. 마테오리치가 쓴 󰡔천주실의(天主實義)󰡕(1603년10월~11월에 간행)가 그것이다.”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삽화(揷話)의 마지막 장면인 “‘이 책은 진실로 생원님께서 받으셔야만 할 책이군요. 소승은 그저 이 책을 생원님께 전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원컨대 이 책에 쓰여진 대로 뜻을 이 세상에 펼치소서.’라는 말이 끝나나마자 스님은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몇 발자국 안에 그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우리 선생님은 마음에 신이(神異)함을 느끼었다. 그리고 그 스님이 신인(神人)임을 알아차렸다. 그 후로 우리 선생님은 깊게 그 책을 연구하여 그 이치를 투철하게 깨달았다. 그 책에는 기도하는 바에 관한 가르침이 쓰여져 있었던 것이다(“‘此書眞可謂生員主所受, 小僧只爲傳之而已. 願此書以行之也.’ 辭退下階 數步之內 因忽不見. 先生心常神異 乃知神人也. 其後深察透理, 則書有所(祇)禱之敎, 103)”라는 부분을 근거로 제시한다.



도올 선생은 이에 대한 방증도 몇 가지로 제시한다. (괄호 안은 󰡔동경대전(통나무)󰡕의 쪽)

① 󰡔대선생주문집󰡕에는 ‘금강산유점사(金剛山留漸寺)’라고 표기한 것으로 보아 이 에피소드를 만든 사람은 ‘유점사(楡岾寺)’의 실체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또 󰡔도원기서󰡕에는 금강○사(金剛○寺)라고 하여 그 선사(禪師, 老師)의 소종래(所從來)를 잘 알지 못한 채 썼음을 알 수 있는바, 선사(禪師)를 금강산 유점사의 스님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105쪽)

② 다시 말해, 위의 삽화에서 ‘선사(禪師)’ ‘노사(老師)’ ‘승(僧)’ ‘소승(小僧)’으로 표기된 인물은 “헛되이 불서를 오래 읽었으나 끝내 신령스러운 체험을 얻지 못했다(徒讀佛書 終未神驗)”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신앙을 추구했으나 불교 교리로부터 아무런 감흥을 얻지 못한 이로서, ‘유점사 스님’으로 보이지 않는다. (105쪽)

③ (도올 선생은) 그 사람이 유교나 불교에 대한 소략한 지식을 갖추고 당대 세상에 회의적이던 어떤 지식인이 󰡔천주실의󰡕라는 책을 의도적으로 수운에게 전한 사건으로 보았다. 그리고 수운은 그를 통해 󰡔천주실의󰡕를 처음 접했다고 보았다. “수운은 이미 10년 동안의 장궁귀상(臟弓歸商)의 여로를 통해 천주교를 접했고, 천주교 집회에도 무수히 참관하면서 조선민중의 애타는 열망을 몸소 체험하였다. 따라서 󰡔실의󰡕와의 만남은 그에게 천주교 교리의 핵심을 파악하게 만드는 위대한 도약의 계기를 허락하는 것이었다.” 또 그 “책은 겉장이 뜯겨져 나갔을 것이고(그래서 ‘天主實義’임을 즉각 알지 못하였을 것이고), 천주의 천지창조 그리고 만물을 주재안양(主宰安養)하는 천주에 대한 바른 이해를 촉구하는 중사(中士)와 서사(西士)의 논쟁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을 것”이다. (106쪽)

④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는 본인의 주장에 (생전에) “표영삼 선생님도 충심으로 동의하시었고, 윤석산도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말하였고, “성주현도 󰡔을묘천서󰡕는 󰡔천주실의󰡕임이 분명하다고 말한다.”(106쪽)

⑤ 수운 선생이 󰡔천주실의󰡕를 읽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또 다른 논거로 「포덕문」과 「논학문」에 나오는 ‘상제’나 ‘천주’라는 단어와 수운 선생이 제자들과 나누는 문답의 형식이 󰡔천주실의󰡕의 구성방식을 구대로 따르는 점을 들었다.



또 도올 선생은 󰡔동경대전(통나무)󰡕 주해에서, 󰡔을묘천서󰡕란 곧 󰡔천주실의󰡕라는 전제하에서 수운 대신사가 󰡔을묘천서󰡕(도올로서는 󰡔천주실의󰡕)를 얻어서 본 사건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① “동학의 제1의 원리는 인간의 자율성이요, 인간이라는 존재 내에 이미 모든 천지의 조화가 구비되어 있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수운이 (󰡔을묘천서󰡕=󰡔천주실의󰡕를 읽고 : 필자 주) 내린 최종 결론은 ‘서학(천주교)은 기도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정확한 파악이고 핵심적 요약이다.”(106쪽)

② “기도는 자율의 세계가 아니라 타율의 세계요, 의타적(依他的) 구원을 희구하는 것이다. 수운은 을묘천서, 즉 천주교의 핵심 교리와 본격적으로 해후하면서 타율적 구원과 자율적 구원의 문제를 동시에 삶의 과제상황으로 껴안게 된다.”(106~107쪽)

③ “그래서 그는 ‘하늘님(天主)’(=하느님)과의 만남을 추구하게 되지만, 그는 하늘님을 만나는 순간 이미 그 타자와 인간의 모든 수직적 관계를 부정해 버린다. 천주(天主)에 대한 그의 추구는 초월과 내재, 인격성과 자연성, 자율과 타율, 수직과 수평의 모든 얽힘을 일소타기(一笑打棄)해 버리는, 인류사에 그 유례가 없었던 신성(Divinity)과 인성(Humanity), 그 양방향의 도약이었다.”(106~107쪽)

④ 수운이 을묘년에 󰡔천주실의󰡕(=󰡔을묘천서󰡕: 필자 주)를 읽음으로써, 수운은 아리스토텔레스 - 토마스아퀴나스 - 마테오리치로 이어져 오는 서양의 철학과 단군 이래의 우리 민족의 사상의 맥락을 모두 아우르고, 서학(마테오리치)(과 고유사상?)의 한계를 일거에 혁파하고, 동학을 창도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수운의 동학은 “우주적인, 전 인류사의 지성사가 종합되고 깨져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 󰡔천주실의󰡕(=󰡔을묘천서󰡕)를 만난 사건이다. (도올 선생의 <동경대전> 유튜브 강의, 15, 16, 17, 18화)



도올 선생은 원 사료에 ‘한 권의 책[一卷書]’으로 표기된 󰡔천주실의󰡕를 후대의 천도교 학자나 천도교인들이 ‘乙卯天書)’라고 신비화하고, 또 그것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의 이야기를 신비화하였다고 비판한다. 즉 수운이 ‘선사’를 ‘신비한 효험(神效)’이라거나 ‘신인(神人)인 줄 알았다’‘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因忽不見]’ 등의 표현은 수운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오히려 본지(本旨)를 왜곡하는 후대 ‘천도교인’들의 신비화 작업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도올 선생은 수운 선생의 󰡔동경대전󰡕에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 천도교인들의 ‘수운에 대한 신비화’의 욕구로 말미암은 요소들을 걷어내고 보면, 소위 󰡔을묘천서󰡕라는 것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그것은 󰡔천주실의󰡕임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2. 󰡔천주실의󰡕는 어떤 책인가?





󰡔천주실의󰡕는 1603년에 초판이 출간되었으며, 을묘년(1855)을 기준으로 할 때 이미 250년이나 된 책이다. “모두 8편으로 나누어 174항목에 걸쳐서 서사(西士: 서양학자)와 중사(中士: 중국학자)가 대화를 통하여 토론하는 형식으로 꾸며진 가톨릭 교리서이며 호교서(護敎書)”로서 “(중국학자는) 전통 유학과 불교, 도교를 주로 논하고” “(서양학자는) 스콜라철학과 선진유학(上帝 信仰이 비교적 온존해 있던 유학-필자주)의 고전을 들어 천주교의 교리를 펴고, 그 사상을 이론적으로 옹위(擁衛)하는 형식”으로 “유교적 교양을 바탕으로 천주교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책이다.

제1편은 신의 존재증명을 시도한다. 제2편은 불교와 도교의 공(空) 사상을 논박하고 유교의 태극설(太極說)을 옹호하며, 상제(上帝)의 11가지 성격을 설명한다. 제3편은 천국의 필요성과 식물의 생장력, 동물의 감각력, 인간의 지적 영혼의 특성의 차이를 설명한다. 제4편은 인간의 영혼이 신령하다는 것과 악마의 지옥의 기원에 대한 범신론적 일신론을 논박하였다. 제5편에서는 윤회설을 중심으로 동양(인도, 중국)과 서양의 회통 가능성을 소개하였다. 제6편에서는 지옥, 천국 및 연옥에 대한 교리를 설명하고 그 비판에 대한 재비판을 전개하였다. 제7편에서는 천주와 인간성, 천주의 사랑, 그리스도교설 등을 설명하며 ‘신앙’과 ‘사랑’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제8편에서는 유럽의 문화, 제도 및 천주교의 성직제도(獨身制)를 설명하고, 중국의 종교문화의 잡다함을 비판하였다. 끝으로 원죄(原罪)와 천주강생(天主降生)의 설을 말하고, 천주교에 귀의할 것을 강조한다.

󰡔천주실의󰡕의 핵심 요지는 “첫째, 우주만물에는 창조주와 주재자가 존재하여 끊임없이 만물을 안양(安養)하고 있으며, 둘째, 인간 영혼은 불명한 것으로 후세에 각자의 행실에 따라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응징이 있음을 밝혔다. 셋째, 불교의 윤회설을 배격하고 오로지 사랑의 그리스도교 신앙만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고, 중국 고경(古經)에 이미 이와 같은 가르침이 밝혀져 있으니 공부하고 귀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천주실의󰡕는 유몽인의 󰡔어우야담󰡕(1623년 이전)에 8편의 편목(篇目)이 소개되었고,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 간행)에서도 편목을 열거하고 있다. 이로 보아 중국에서 출간된 지 늦어도 20년쯤 후에는 조선에 그 내용이 소개되고 있었다. 이후 “이익(李瀷)이 「천주실의발(天主實義跋)」을 필두로 신후담(愼後聃)·안정복(安鼎福)·이헌경(李獻慶) 등이 󰡔천주실의󰡕와 그 밖의 서교서(西敎書)를 읽고 각기 󰡔서학변(西學辨)󰡕, 󰡔천학고(天學考)󰡕, 󰡔천학문답(天學問答)󰡕 등을 펴내어 유학적 관점에서 예리하게 논평하였다.

반면 󰡔천주실의󰡕를 기반으로 서학(西學=서양의 종교, 과학 등 학문 전반)에 대한 관심과 연구, 그리고 이를 넘어 ‘천주교 신앙’으로까지 나아간 사람들도 있으니, 이벽,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정약용, 이승훈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노력의 결실로 1784년(정조 8년)에는 이미 ‘조선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천주교가 민중들에게 전파되어 감에 따라 󰡔천주실의󰡕 한글본이 18세기 중엽에 이미 전파되고 있었다.

󰡔천주실의󰡕가 이처럼 이미 조선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점을 들어 󰡔천주실의󰡕를 ‘희한지서(稀罕之書)’로 보고, 수운 선생을 만나기 전까지 전국을 돌며 그 내용을 해독하려 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비판은 이미 여러 사람으로부터 나온바 있다. ‘선사(禪師)’가 오랫동안 유점사에 칩거하며 수행하는 이라 이 책의 실체를 알지 못하였다고 상정하여도 그 결론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도올 선생 또한 이 책이 당대 지식 사회에서 ‘핫 이슈’였지만 “범인(凡人)들이 이 책을 접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하여 ‘선사(禪師)’가 이 책에 유독 무지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도(道)를 구하기 위하여 전국을 두루 돌아다닌 주유천하(1844~1854)를 했던 수운은 이 책을 접하지 못했을 ‘범인’에 속할 가능성보다는 접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수운의 여러 글을 보아, 수운이 서학에 대한 일반적인 소문 정도는 이미 충분히 듣고 있었다는 점도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대선생주문집󰡕의 기사(記事)는 ‘천주실의’의 내용을 두고 선사(禪師)와 토론하는 장면으로 이어지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훗날 수운이 남원 은적암에 은거하면서 선국사의 송월당 스님과 ‘유도, 불도, 선도’를 화제(話題)로 삼아 토론한 기록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수운 선생이 󰡔천주실의󰡕의 소문만 듣고 있다가 그제서야 그 책을 얻게 되어 ‘심찰투리(深察透理)’하는 과정을 거치고 그 내용을 수용하였을 개연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래에서는 이 점에 대하여 주로 󰡔천주실의󰡕의 내용을 중심으로 그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3. 유학의 책인 듯도 하고, 불가의 책인 듯도 하다





도올 선생은,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고 하는 중요한 첫 번째 논거로 그 책이 “유학의 책이라고 할 수도 없고, 불가의 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책”이어서 “도무지 문장의 이치가 온당치를 않아 그 진의를 풀어 깨닫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라고 한 󰡔대선생주문집󰡕의 설명을 들었다. 이는 그 책이 그때까지 한반도 내지 동아시아 전통에서 벗어난 문법 체계나 논리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사상적 근본 체계가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즉 ‘천주교(天主敎)’라고 하는 ‘서양철학’과 ‘서양종교’ 전통에 입각한 내용을 한문으로 쓴 책이므로, ‘한문만 알아서는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천주실의󰡕는 도올 선생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미 ‘사서(四書: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번역을 마칠 만큼 유학에 대한 수련을 거친 마테오리치가, 원시유학의 상제(上帝)가 곧 천주교의 천주(天主)임을 대단히 논리적으로 풀어나간 글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천주실의󰡕의 초판 서문, 첫 문장을 보면 이러한 정황이 분명히 드러난다.



󰡔천주실의󰡕는 대서방국 이마두(利瑪竇, 마테오리치) 및 그의 수도회원들이 우리 중국인들과 문답한 글이다. 천주(天主)란 무엇인가? ‘하느님’[上帝]이다. ‘실(實)’이라 함은 공허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중국-필자 주)의 육경(六經: 시경, 서경, 예기, 악기, 역경, 춘추)과 사서(四書: 논어, 대학, 중용, 맹자)에서 여러 성현(聖賢)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라![畏上帝], 하느님을 도우라![助上帝], 하느님을 받들라![事上帝], 하느님과 교감(交感)하라![格上帝]고 말하였다.



󰡔천주실의󰡕 재판의 서문은 좀더 직접적으로 공자를 언급하고 있다.



옛날 우리 공자님은 수신(修身)을 말하였다. 먼저 어버이를 섬기고 미루어 나가서 하늘[天]을 아는 것이다. 맹자(孟子)의 “[도심(道心)을] 보존하고 [본성을] 길러서 하늘을 섬긴다”[存養事天]는 논의에 이르러 이 뜻이 크게 갖추어졌다. 앎에 있어서나 일을 함에 있어서, 하늘 섬김과 부모 섬김은 같은 한 가지 일이니, 하늘은 이런 섬김들의 대근원이다.



마테오리치 본인의 󰡔천주실의󰡕 서문은 좀 더 은근하지만, 역시 유학적 맥락에서 낯설거나 투박하지 않아서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온 천하를] 화평하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상(日常)의 도리는 궁극적으로 [마음을] 오직 ‘하나로 함’에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현자와 성인들은 신하들에게 충성스런 마음을 권하였습니다. 충성은 두 [마음]이 없음을 말합니다. 오륜(五倫)은 군주(君主)에 관한 것을 첫째로 삼고,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삼강(三綱) 중에서 으뜸입니다. 무릇 바르고 의로운 사람들은 그 점을 분명히 깨닫고 그것을 실천합니다.(󰡔천주실의󰡕, 29쪽)



수운 대신사는 선사(禪師)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책을 ‘펼쳐보자’ 마자 ‘유학의 책이라고 할 수도 없고, 불가의 책이라고도 할 수 없는 책으로서 문리가 타당하지 않아 이해하여 깨닫기가 어렵다’[(於儒於佛之書 文理不當 難爲解覺]고 하였으므로, 책의 전반을 살핀 이후라기보다는 그 초반부만을 살핀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서두만 보았다 하더라도, 이 책이 유학과 관련 지어 말하는 바가 뚜렷하므로) 벌써 󰡔천주실의󰡕와의 연관성은 멀어지고 있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문리가 타당하지 않아 이해하여 깨닫기가 어렵다’라는 대목이다. 오늘날은 󰡔천주실의󰡕의 원문(영인본)과 번역본까지 나와 있으므로, 그 내용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결코 어렵다’고 말할 수 없다. 신(上帝)의 존재 증명이나 성격에 대해서도 최대한 ‘유학적’인 접근을 시도하며, ‘천국-지옥’이란 것도 불교적 천당-지옥을 떠올려서 그 취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다. 인간의 영혼에 대한 것도 허령(虛靈)이나 지각(知覺) 등의 유학적 논리로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 밖에 천주의 인간성, 사랑, 신앙(信仰)을 비롯하여 유럽의 문화와 제도 등에 대해서도 결코 난위해각(難爲解覺)이라고 할 만한 점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그 논리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일찍이 조선의 유학자들이 여러 측면에서 밝혀 두었으므로 재론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수운은 물론이고, 그 책을 가져온 선사(禪師) 정도의 지식 수준(도올의 짐작대로 유교나 불교에 소략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다. 그리고 그 책을 들고 이해할 만한 사람을 찾는다면(앞장이 뜯겨 나가서 ‘천주실의’임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주변의 ‘천주학쟁이’를 찾아가는 길이 훨씬 손쉽고 간명했을 것이다.

그런데, 󰡔천주실의󰡕의 서문으로 볼 때 󰡔대선생주문집󰡕의 어유어불지서(於儒於佛之書)는 “유학의 책이라고 할 수도 없고, 불가의 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책”이라는 뜻이기보다는 어(於)를 ‘기대다, 의지하다’의 뜻으로 보아 “유학에도 의지하고, 불가에도 의지하여 (논리를 전개한) 책”으로 풀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문리부당(文理不當), 즉 “(용어들은 생소하거나 어렵지 않으나) 그 문장의 내용은 타당하지 않다, 마땅하지 않다”는 뜻으로 본다면, 일단은 좀 더 논의를 진행해 볼 수 있다.





4. 그 책의 핵심 가르침은 “기도하라”는 것이다





1) ‘기도’는 곧 천주교, 󰡔천주실의󰡕의 논리인가



도올 선생은 󰡔을묘천서󰡕(도올은 󰡔천주실의󰡕) 사건의 기본 메시지가 “이 책의 내용대로 하옵소서”라는, “천주교 선교사”의 언행과 결부된 것으로 ‘책의 내용’, 즉 핵심적 메시지는 “기도하라는 가르침”이라는 점을 들어 이 책이 󰡔천주실의󰡕라고 말한다. 이 ‘기도지교(祈禱之敎)’에 따라 병진년(1856)과 정사년(1857)에 걸쳐 양산 내원암과 천성산 적멸굴에 들어가 기도를 하게 되었다고 본다.



(을묘-병진-정사) 이 세 해의 (수운의) 삶의 역정을 지배하는 테마는 “기도(祈禱)”이다. 전술하였듯이 기도란 막연하게 절이나 하는 행위가 아니다. 절간에서 기도하는 사람이든, 산천 성황당에서 기도하는 사람이든, 십자가가 꽂힌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사람이든 기도란 어떤 내면의 소망을 비는 것읻. 그 소망을 성취시켜 주는 외재적 타자(the other)가 설정되어 있을 때, 기도의 행위는 리얼한 방향성을 갖는다. 사실 기도라는 측면에서 보면 기독교나, 불교나, 무속이나, 신선사상이나 똑같다. 의타적 성격이 공통되는 것이다. 사실 오직 유교만이 “기도”를 배제하는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수운은 󰡔천주실의󰡕를 만난 후부터 “천주(天主)”(하늘님)의 의미를 리얼하게 느끼기 시작했고, “기도”를 삶의 주제로서 새롭게 발견하였다. 그것은 그가 이미 10년(1844~1854) 동안의 주류팔로에서, 기독교(천주교)야말로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장차 이 민족의 최대 과제 상황이 될 것이라는 주제를 심각히 각성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동경대전󰡕(통나무), 110쪽)



그런데 ‘기도’라는 말을 가지고 이것이 천주교와 관련된 서적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계속할 수는 없다. 오늘날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도(祈禱)’라는 말을 검색하면 총 751건의 용례가 검색된다. 태조 때에 2회를 비롯하여 세종 27회, 세조 23회, 성종 34회, 숙종 22회 등이이며 그 밖에도 1회에서 8회 정도의 용례가 나타난다. 최초의 용례인 태조 7년 3월 3일의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한글 번역본을 필자가 요약적으로 정리)



환관인 조순이 (태조의) 어머니의 병환이 급한 때를 당하여 (중략) 임금께서 깊이 염려하시어 기도(祈禱)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그 제기(祭器)들을 몰래 제 집으로 들여갔으니, 하늘을 속이고 임금을 속이어 죄가 목을 베임에서 용서될 수가 없는데도….(󰡔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 7년, 3월 3일자) (강조 밑줄 필자)



세종 임금대의 첫 기사는 세종 3년 6월 14일자에 보인다.



(전략) 무릇 장마가 그치지 않으면, 서울의 여러 문(門)에 영제(禜祭)를 올리되, 각 문마다 3일 동안 매일 하고, 한 번 영제를 지내도 장마가 그치지 않으면, 이에 산천(山川)·악진(岳鎭)·해독(海瀆)에 3일 동안 기도(祈禱)하며, 그래도 그치지 않으면, 사직(社稷)과 종묘(宗廟)에 기도하며, 주현(州縣)에서는 성문(城門)에 영제를 지내고, 경내(境內)의 산천에 기도(祈禱)한다.(󰡔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3년, 6월 14일자) (강조 밑줄 필자)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식의 기사가 무려 750여회나 보인다는 말이다. 조선 초기 세조 대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예종 이후 이 실록의 기자(記者, 史官)들은 ‘유교적 사고방식’에 투철한 소장 관리들이 맡았을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따라서 도올 선생이 “오직 유교만이 ‘기도’를 배제하는 종교”라고 한 말은 재고의 여지가 많다. 다시 말하면, ‘기도(祈禱)’라는 말로써 ‘천주교의 영향’을 말하는 것은 다른 수많은 방증 자료를 필요로 하는 논리라는 말이다.

도올 선생의 말 대로 수운이 천주교의 핵심 교의를 기도(祈禱)라는 것으로 (해석적인 견지에서)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수운 대신사는 오히려 서학(천주교)의 기도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서양 사람은 말에 차례가 없고 글에 순서가 없으며 도무지 한울님을 위하는 단서가 없고 다만 제 몸만을 위하여 빌 따름이라. 몸에는 기화지신이 없고 학에는 한울님의 가르침이 없으니 형식은 있으나 자취가 없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주문이 없는지라, 도는 허무한데 가깝고 학은 한울님 위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다름이 없다고 하겠는가.」(西人 言無次第 書無皂白而 頓無爲天主之端 只祝自爲身之謀 身無氣化之神 學無天主之敎 有形無迹 如思無呪 道近虛無 學非天主 豈可謂無異者乎)(󰡔동경대전󰡕「논학문」)



여기서 서양 사람을 ‘서학-천주교’인으로 볼 수 있다면, 수운은 그들의 기도는 (1) 한울님을 위하기보다 제 몸만을 위하여 빌고 (2) 기화지신이 없다고 비판한다. 이 또한 󰡔천주실의󰡕의 내용을 보고 비판한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천주교인들의 신앙 행태에 대한 전언을 기반으로 한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다.



2) 󰡔천주실의󰡕의 핵심은 ‘기도’인가?



좀 더 심각한 쟁점은 과연 󰡔천주실의󰡕의 내용의 핵심을 ‘기도지교(祈禱之敎)’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앞에서 󰡔천주실의󰡕의 핵심은 첫째, 상제, 즉 천주가 우주만물을 주재한다는 것, 둘째, 상제(천주)가 이승에서의 행실의 선악에 따라 후세에 상벌(賞罰)을 가한다는 것, 셋째, 오직 ‘사랑의 그리스도 신앙’으로 귀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라 하였다.

수운 대신사가 이러한 내용을 ‘깊이 살피고 그 이치를 헤아려본’ 끝에, 우주를 주재하고 선악을 상벌하며, 신앙의 대상이 되는 천주와 직접 상면(相面)하거나 소통(疏通)하기를 원하여 ‘기도(祈禱)’하기로 결심하였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는 수운 선생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지 “󰡔천주실의󰡕에 ‘기도하라는 가르침이 있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면, 다시 말해 수운 대신사가 을묘년에 받아 본 책이 󰡔천주실의󰡕라면 가장 중점적으로 들여다볼 핵심 관건은 ‘주재자로서의 천주’의 존재에 대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이 ‘천주실의’인 점을 보아도 그러하고, 마테오리치가 핵심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동양의 전통적인 ‘상제’가 곧 ‘(천주교의) 천주’라고 말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도올 선생은 선사(禪師)가 가져 온 책의 ‘앞부분 몇 장이 찢겨져 나갔을 것’이며 그 때문에 선사(禪師)나 수운 선생이 ‘천주실의(天主實義)’라는 책의 제목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는 논리적으로 군색(窘塞)해 보인다. 도올 선생은 이 책(󰡔천주실의󰡕 또는 󰡔을묘천서󰡕)을 가져다 준 선사가 ‘천주교 선교사’일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런 인물이라면 더욱이 ‘앞 장이 뜯겨져 나간 책’을 들고 다니며 천주교를 포교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이 ‘천주’ 한 글자를 지향하고 (그 천주가 곧 상제임을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천주’라는 말을 건너뛰어서 ‘기도’로 바로 나아가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도올 선생 역시 󰡔을묘천서󰡕(도올은 󰡔천주실의󰡕)의 내용에 따라 진행한 내원암과 적멸굴의 기도에서 ‘천주강령(天主降靈)’을 기원하였다는 사실로써, 수운이 󰡔천주실의󰡕를 통해 “천주(天主)(하늘님)의 의미를 리얼하게 느끼기 시작했”다는 점을 논증하고, “‘기도’를 삶의 주제로서 새롭게 발견하였다.”고 논리를 전개한다.(󰡔동경대전󰡕(통나무), 110쪽)



천상산(天上山: 千聖山의 오식이다. 천성산에 있는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을 목표로 기도하였다)에서 삼층의 지성단을 결축하고[結築三層壇], 49일기도를 완성하리라 미음의 설계를 굳게 하였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항상 염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하느님[天主]께서 자기에게 영(靈)을 내려주실 것을 축원하였다. 단지 하느님의 명교(命敎)가 있으리라는 것을 대망할 뿐이었다.(󰡔동경대전󰡕(통나무), 107~108쪽)



여기서 도올은 “결축삼층단” 등의 구절을 들어 “우리 민족의 전통적 민속신앙의 분위기를 따른 것”으로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광신적 접신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하였고, ‘천주강령’이라는 말은 “천주가 하늘 꼭대기에 있고 영을 내려 보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천주 그 자신이 강림한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서 수운의 기도의 주제는 '천주와의 만남(Encounter with God)'이었던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실제의 󰡔천주실의󰡕가 결론적으로 강조하는 바는, 첫째, 이전의 허물을 뉘우치고 진실한 마음으로 ‘선’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 둘째, 한결같이 천주의 성스러운 교회로 인도하여 [교회를] 세우려는 것이라고 하였다.(󰡔천주실의󰡕, 429쪽) 그러나 수운은 천도교를 창도할 당시에 ‘천주교’에 대하여 이와는 전혀 다른 인상(印象)을 가지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글로 써서 반포하였다.



경신년에 와서 전해 듣건대 서양 사람들은 천주의 뜻이라 하여 부귀는 취하지 않는다 하면서 천하를 쳐서 빼앗아 그 교당을 세우고 그 도를 행한다고 하므로 내 또한 그것이 그럴까 어찌 그것이 그럴까 하는 의심이 있었더니….(󰡔동경대전󰡕「포덕문」)



경신년 사월에 천하가 분란하고 민심이 효박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즈음에 또한 괴상하고 어긋나는 말이 있어 세간에 떠들썩하되, 「서양 사람은 도성입덕하여 그 조화에 미치어 일을 이루지 못함이 없고 무기로 침공함에 당할 사람이 없다 하니 중국이 소멸하면 어찌 가히 순망의 환이 없겠는가.」 「도무지 다른 연고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도를 서도라 하고 학을 천주학이라 하고 교는 성교라 하니, 이것이 천시를 알고 천명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동경대전󰡕「논학문」)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수운이 ‘천주교’의 행태에 대한 ‘풍문’ 수준의 상식만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교당을 세우고 그 도를 행한다’는 말은 󰡔천주실의󰡕에도 자세히 나오는 내용이지만, 이에 대해서도 ‘경신년’의 시점에도 여전히 ‘의심이 있었다’고 하였므로, 을묘년에 󰡔천주실의󰡕를 접하여 그 구체적인 주장을 파악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유학적 소양에 깊이 침윤되어 있었던 수운 대신사의 눈으로 볼 때 (18세기 조선의 많은 유학자들이 그러했듯이) 󰡔천주실의󰡕를 보았다면, 그에 대해 부정적, 비판적인 논평이든, 또는 긍정적인 입장이든 훨씬 더 풍부한 에피소드가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의 에피소드로서 전해져 왔을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기록에는 󰡔천주실의󰡕의 풍부한 논변에 관해서는 극히 간접적인, 최소한의 연계성을 짐작할 만한 에피소드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을묘천서󰡕는 바로 󰡔천주실의󰡕’라는 직접적인 주장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과 달리, ‘수운 선생이 󰡔천주실의󰡕를 읽었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견해도 많은 편이다. 이런 관점으로 󰡔천주실의󰡕를 읽어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여기저기에 눈에 띈다. 그러나 이 또한 󰡔천주실의󰡕가 주로 상제(천주)의 존재증명이나 그것이 동아시아의 상제와 동일한 존재임을 논증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천주실의󰡕에 등장하는 상제는 매우 최대한 ‘동양화된’ 특징을 띤다는 점 때문에 생기는 착시현상일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천주실의󰡕의 신관을 좀더 면밀히 검토해 보는 별도의 논의(글)에서 새롭게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본다.)





5. 사제(師弟) 문답과 중사(中士)-서사(西士) 문답





도올 선생은 󰡔동경대전(통나무)󰡕 2권의 「포덕문」과 「논학문」을 주해하면서, 거기에 등장하는 ‘상제’나 ‘천주’의 용어와 그 함의로 볼 때 수운이 󰡔천주실의󰡕를 통독하였음을 보여준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특히 「논학문」에서 수운이 (용담정으로 수운을 찾아온) 선비들과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동학의 핵심 교의(敎義)을 해설해 나가는 장면은 󰡔천주실의󰡕가 중사(中士), 즉 중국의 지식인과 서사(西士), 즉 서양의 지식인 사이의 문답으로 천주교의 교의를 해설하고 설득해 나가는 구성양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수운이 󰡔천주실의󰡕를 통독했다는 점을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한다.(󰡔동경대전(통나무)󰡕 2권, 135쪽)

필자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에서 나타나는‘천사문답(天師問答: 한울님과 수운 최제우의 문답)’과 ‘사제문답(師弟問答: 수운과 제자/선비들 사이의 문답-이것은 필자가 命名한 것이다)’이 동학의 중요한 ‘공부방법’이라는 점을 주목하여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답’ 형식은 동학이나 󰡔천주실의󰡕만의 특징이라고 말하기에는 󰡔논어󰡕를 비롯한 동양의 고전들이 이미 익숙하게 취하고 있는 경전의 구성방식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점을 근거로 수운이 󰡔천주실의󰡕에 깊이 감명을 받았고, 나아가 특히 󰡔을묘천서󰡕가 바로 󰡔천주실의󰡕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몇 단계의 비약이 필요한, 무리수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6. 동학과 신비주의, 그리고 천도





󰡔을묘천서󰡕가 󰡔천주실의󰡕가 아니라면, 󰡔을묘천서󰡕는 도대체 무슨 책일까?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의 장이 필요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필자의 견해(결론)만을 밝히는 것으로 갈음한다. 󰡔을묘천서󰡕는 ‘천도교’의 지식인들이 일찍부터 이해한 바대로,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동학 연구자나 천도교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대로 ‘수운의 신비체험’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경신년(1860) 4월 5일의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기 전에 그 징후(徵候) 또는 전(前) 단계로서 수운 대신사의 간절한 구도(求道: 나아갈 길)의 물음에 대하여, ‘기도를 해 보자’는 홀연한 몽득(夢得-如夢如覺之間의 得道)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홀연한, 비몽사몽간의 각성과 득도’는 일종의 ‘강화(講話)’ 체험으로서 많은 천도교인 또는 수도인(修道人)들이 경험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수운 대신사도 󰡔용담유사󰡕 곳곳에서 ‘만고 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받아내어(「안심가」)’ ‘꿈일런가 잠일런가 무극대도 받아내어(「교훈가」)’와 같은 노래를 남긴 것이다.

먼저 짚어 볼 것은 도올 선생이 어떤 맥락에서 “󰡔동경대전󰡕에는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그 논거를 찾기가 어려우므로(󰡔동경대전(통나무)󰡕 2권의 주해 부분에서도 ‘종교 체험’이라는 객관적인 용어로만 쓸 뿐 그 성격이 ‘신비체험’이라는 점은 언급하지 않고 수운의 합리적인 사고 과정인 것으로 풀어나간다), 대부분의 동학 연구자나 천도교인들이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그리고 󰡔동경대전󰡕 본문을 읽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동경대전󰡕은 시종일관 신비체험을 관통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동학은 일반적으로 신비체험, 또는 종교체험이라고 부르는 ‘한울님과 수운 대신사의 대화’ 즉 ‘천사문답(天師問答)’라는 ‘신비한 현상에 대한 경험’ 즉 신비체험 과정을 통해서 동학의 창도와 교리의 체계화 과정이 전개된다.

「포덕문」에서는 스스로를 ‘상제라고 불리는 존재’라고 밝히고, 서도(西道)가 아닌 ‘영부’와 ‘주문’으로서 세상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세상 사람들을 가르쳐서 나[한울님, 또는 한울님을 모신 모든 존재]를 위하게 하라고 한다. 「논학문」에서는 역시 천사문답 경험을 통해 ‘한울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 그리고 수련하고 글을 정리하여 사람들을 가르라는 천명(天命)을 받는다. 여기서 수운이 마주한 ‘한울님’(上帝, 天主)는 ‘기도지교’보다는 ‘영부’와 ‘주문’을 통해 ‘수이련지(修而煉之)’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는 수운은 ‘수행’과 ‘수양’의 도로서 동학을 창도한다. 이는 󰡔천주실의󰡕의 요지(要旨)와는 그 결이 완전히 다르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도올 선생이 이번에 󰡔동경대전󰡕을 동학경전의 ‘일지(一指)’로 꼽으며 거의 도외시하는 󰡔용담유사󰡕에서는 󰡔동경대전󰡕보다 훨씬 더 생생한 ‘신비체험’‘종교체험’의 장면이 등장한다. 이 모든 것은 도올 선생이 찬양하는 “천주 그 자신이 강림하는 체험”을 수운이 직접 증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용담유사󰡕의 「몽중노소문답가」는 이 󰡔을묘천서󰡕 이야기를 수운 자신이 직접 가사(歌詞)로 창작해 낸 것이라는 점에서 앞서 말한 몽득(夢得)과 신비한 체험의 정황이 후세 사람들이 수운을 신비화하거나 신격화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노래는 수운 선생이 당신의 생애를 상징적인 이야기로 구성하여 노래한 것으로 두 부부(근암 최옥 부부)가 금강산에서 빌어서 낳은 자식(수운 대신사)이 어려서부터 비범하였으나 이 세상이 혼탁(君不君臣不臣父不父子不子)한 것을 밤낮으로 걱정하다가 “처자 산업 다 버리고 팔도강산 다 밟아서 인심 풍속을 살피다가(=周遊八路, 이 과정에 ‘西學’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흉중에 가득한 회포를 일거에 타파하고 집으로 돌아가 백가시서나 외워 보자고 다짐하며 돌아오는 길에 금강산에 들러 잠깐 잠이 들었다가 ‘우의편천일도사(깃털로 된 옷을 입고 나타난 한 도사)’로부터 무극대도의 창도에 대한 계시를 받는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 결론 부분은 다음과 같다.

金剛山 上上峯에 잠간 앉아 쉬오다가 홀연히 잠이 드니 夢에 羽衣褊褼一道士가 曉諭해서 하는 말이 (중략) 天運이 둘렀으니 근심 말고 돌아가서 輪廻時運 구경하소 十二諸國 怪疾運數 다시 開闢 아닐런가 太平聖世 다시 정해 國泰民安 할 것이니 慨歎之心 두지 말고 차차차차 지냈어라 下元甲 지내거든 上元甲 好時節에 萬古 없는 無極大道 이 세상에 날 것이니 너는 또한 年淺해서 億兆蒼生 많은 백성 太平曲 擊壤歌를 不久에 볼 것이니 이 세상 無極大道 傳之無窮 아닐런가 天意人心 네가 알까 한울님이 뜻을 두면 禽獸 같은 세상사람 얼풋이 알아내네 나는 또한 神仙이라 이제 보고 언제 볼꼬 너는 또한 仙分 있어 아니 잊고 찾아올까 잠을 놀라 살펴보니 不見其處 되었더라.



이 「몽중노소문답가」와 󰡔을묘천서󰡕 사건 이야기를 조동일은 같은 이야기의 변형형으로 보았다.




노래(몽중노소문답가)


이야기(󰡔을묘천서󰡕)



세상 근심으로 고민하다가


잠이 들어서


금강산 상상봉에 올라가서


신선의 옷을 입은 노승을 만나


하는 말을 듣고서


그 말을 알아듣고


이치를 깨달아


잠을 깨서 살펴보니


보이지 않았다.


세상 근심으로 고민하다가


잠이 들어서


금강산에서 왔다고 하는


늙은 선승을 만나


주는 천서를 받아서


그 말을 해독하고


이치를 깨달아


(선승은) 계단을 몇 발자국 내려가더니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을묘천서󰡕 이야기는 수운 스스로도 감추지 않았던 이야기(경험)였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 󰡔을묘천서󰡕 이야기는 역대 동학-천도교의 사서(史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또 수운 선생 당대에도 이 이야기가 동학과 수운의 포덕 행위에서 중요한 이야깃거리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즉 수운을 체포하기 위하여 어명을 받고 경주에 도착한 정운구가 수집한 이야기를 보고한 내용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정운구가 탐문한 바에 따르면 수운은) 대여섯 해 전에 울산에 이사를 가서 살면서 무명을 팔아 생계를 삼는다 하더니, 홀연 근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다음에, 사람들에게 도를 펴면서 말하기를, “나는 정성을 다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왔는데, 하늘에서 책 한 권이 내려온 것을 다른 이들은 무슨 글자인지도 몰랐으나, 나만 홀로 알아서 도를 닦았다. 그것을 공부해 익혔으므로 이제 사람들에게 가르치노라.”고 했다.

수운 선생의 ‘신비체험’(주로 한울님의 降話의 가르침)은 최소한 1863년 10월 28일(수운 선생의 탄신일)까지는 계속되었다. 이 날의 상황을 󰡔도원기서󰡕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10월 28일은 선생의 생신이다. (중략) 선생이 수저를 들면서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세상이 나를 천황씨(天皇氏)라고 일컬을 것이다.” (중략)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전에 한 꿈을 꾸었는데 태양의 살기(殺氣)가 왼쪽 넓적다리에 닿자 불로 변하여 밤새도록 타며 사람 인(人)자를 그렸다. 깨어서 넓적다리를 보니 한 점 붉은 흔적이 생겨 사흘을 남아 있었다. 이로써 항상 근심이 되었고 마음속으로 장차 화(禍)가 이를 것을 알고 있었다.” 하였다. 이때부터 상제(上帝)께서 강화(降話)의 가르침을 거둬들이고, 다만 시석(矢石)을 피하는 법만 가르치셨다. 이후로 강화(降話)가 끊어졌다. (밑줄 필자, 밑줄 친 부분은 󰡔대선생주문집󰡕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기사가 나오던 1863년 10월 전후로 수운 대신사는 「흥비가」, 「불연기연」, 「전팔절.후팔절」 등을 ‘교리 완숙기(完熟期)’의 경편(經篇)들을 집중적으로 집필하였다. 이 완숙기 경편들의 특징은 일체의 신비적 요소가 배제되고 ‘무궁한 이 울 속의 무궁한 나’를 향한 ‘무궁한 사색과 명상’ 그리고 ‘한울님과 나’ 사이에 사이가 없는[無間] 경지, 현상과 실재[한울]가 표리부동[不然其然]한 시정지(侍定知)을 완전히 구현하였다는 데 있다.



도올 선생의 주장을 선의로 해석할 때, 필자가 보기로 빈약한 논리적 근거에도 불구하고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는 점을 애써서 주장하는 중요한 이유는 수운이 󰡔천주실의󰡕를 깊이 읽고 그 핵심을 기도(祈禱)와 천주강령(天主降靈)으로 파지(把持)하였다는 것으로써, 수운이 동양과 서양 즉 전 지구를 아울러서 “우주적인, 전 인류사의 지성사가 종합되고 깨져 들어가는”(유튜브 강의) 깨달음으로서 동학을 창도하였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하는 것으로 본다.

사실 대중들이 도올 선생의 󰡔동경대전󰡕을 널리 읽고, 또 유튜브 강의에 열중하는 까닭은 도올 선생이 기존의 동학-천도교의 학설을 비판을 하면서 󰡔동경대전󰡕에 대한 해석적 쟁점들을 부각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도올 선생이 󰡔동경대전󰡕에 대한 독자적인 이해를 시도하면서도 궁극적으로 그 참된 의의이 “우주적인, 전 인류사의 지성사가 종합되고 깨져 들어가는” 것임을 종합적으로 밝히고, 그것을 역사기록(󰡔대선생사적󰡕)과 핵심 경전(󰡔동경대전󰡕)을 통해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풀어주는 데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의 목적도, 도올 선생의 세세한 의견의 오류를 지적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올 선생의 진정성을 함께 읽고 공감하는 자세를 기본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고 하는 도올 선생의 주장이 동학에서 신비체험이나 ‘종교적’ 요소를 제거하는 데에 중요한 목적이 있다거나, 결과적으로 ‘수운 선생이 󰡔천주실의󰡕을 읽었다’는 사실을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간에) 감추었다는 식으로 비쳐지게 되는 것은 유념하고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이기에 이 점을 집중적으로 논의하는 것이다.

“우주적인, 전 인류사의 지성사가 종합되고 깨져 들어가는” 깨달음, 또는 그러한 지향으로서의 동학의 창도를 다른 말로 하면 ‘다시개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수운이 천도교(동학)을 창도한 것은 ‘다시개벽’을 선언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운은 한울님을 만나는 종교체험, 신비체험을 통해 천도(동학)를 받는 상황이 곧 개벽적 사건이라는 점, 그리고 자신이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바로 또 십이제국 괴질운수를 ‘개벽’하는 것 점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개벽시(開闢時) 국초(國初) 일을 만지장서(滿紙長書) 나리시고 십이제국(十二諸國) 다 버리고 아국운수(我國運數) 먼저 하네 (중략) 한울님 하신 말씀 개벽(開闢) 후 오만년(五萬年)에 네가 또한 첨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이후 노이무공(勞而無功) 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成功)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得意) 너희 집안 운수(運數)로다. (󰡔용담유사󰡕「安心歌」)



가련(可憐)하다 가련하다 아국운수(我國運數) 가련하다 전세임진(前世壬辰) 몇 해런고 이백사십 아닐런가 십이제국(十二諸國) 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 개벽(開闢) 아닐런가. (󰡔용담유사󰡕「安心歌」)



십이제국(十二諸國) 괴질운수(怪疾運數) 다시 개벽(開闢) 아닐런가 태평성세(太平聖世) 다시 정(定)해 국태민안(國泰民安) 할 것이니 개탄지심(慨歎之心) 두지 말고 차차차차 지냈어라 하원갑(下元甲) 지내거든 상원갑(上元甲) 호시절(好時節)에 만고(萬古)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 이 세상에 날 것이니…. (󰡔용담유사󰡕「夢中老少問答歌」)



이상에서 수운 대신사의 개벽에 대한 담론은 한마디로 ‘다시개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운 대신사는 ‘선천’과 ‘후천’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다시’라는 말로써 개벽의 의미가 ‘새로움을 가져오는 것’[開闢時 國初日, 네가 또한 처음]이 ‘실패를 딛고 다시 하는 것’[勞而無功 遇汝成功]이며 ‘낡은 세상이(/을) 변혁되어(/하여) 이상적인 세상이 오(/만드)는 것’[괴질운수 다시개벽, 상원갑-하원갑]이라는 의미를 이야기한다.

이처럼 도올 선생이 강조하고자 하는 “우주적인, 전 인류사의 지성사가 종합되고 깨져 들어가는” 동학의 의의는 ‘다시개벽’ 이하의 개벽사상을 더 강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올 선생이 ‘󰡔을묘천서󰡕=󰡔천주실의󰡕’에 깊숙이 매달리는 까닭은 ‘다시개벽’애 대해 더 풍부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용담유사󰡕를 (적어도 󰡔동경대전󰡕(통나무)를 집필하고 전파하는 데 집중하는 현시점에서는) 의도적으로 도외시하는 데서 비롯된 상황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7. 나가는 말



본문에서도 밝혔듯이 필자는 도올 선생이 동학과 천도교를 위하고자 하는 선의를 기반으로 천도교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비판의 끝자락이 항상 ‘내 설만이 옳다’는 것을 강조하는 쪽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마음과, 무엇보다 우리 천도교인들은 고명한 학자들의 고견을 익히 듣되 이를 천도교인의 주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필자에게 도올 선생은 은사(대학 시절 철학 수업을 수강하였다)이시고, 이번 󰡔동경대전󰡕(통나무)을 간행하기 전후로 필자의 사무실을 방문하여 필요한 서적을 구입하시면서 필자의 동학-천도교 출판 사업을 격려해 주셨으며, 그리고 친필 사인을 하셔서 󰡔동경대전󰡕을 증정해 주시기까지 하셨다. 바로 그 책을 보며 이 글을 썼다.

도올 선생은 “󰡔을묘천서󰡕는 󰡔천주실의󰡕이다”라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천도교인(/단)’이 ‘종교적 편향성’이나 무지함 때문에 수운 이야기의 진실을 왜곡했다’고 이야기하거나, 또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일부 천도교인들의 뜻을 부정확하게 인용(‘수운이 󰡔천주실의󰡕를 보았을 것’이라는 소극적 동의를 ‘󰡔을묘천서󰡕가 󰡔천주실의󰡕라고 하는 내 주장에 동의하였’다고 하는 등)하는 사례가 나타난다. 우리로서 우려가 되는 대목은 도올 선생의 의도와 상관없이, 세상 사람들이 그러한 말을 듣고 천도교를 더욱 벽안시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며, 특히 일부 천도교인들까지 그 주장에 귀를 솔깃하며 마음을 빼앗기는 현상이다. 그 밖의 도올 선생의 많은 ‘천도교인(/단) 비판’ 중에는 천도교인(/단)이 뼈아프게 들어서 새기고 또 스스로 가다듬어 가야 할 대목도 있지만, 참고로만 할 뿐 동의할 수 없는 대목도 적지 않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현재로서는 “타인세과(他人細過) 물론아심(勿論我心), 아심소혜(我心小慧) 이시어인(以施於人)”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한다.

여러 교서들을 참고할 때 당대 민중이나 동학도인들이 수운 대신사의 󰡔을묘천서󰡕 사건을 ‘신비한 일’로 수용하고 또 그것이 동학 포덕에 일정 부분 역할을 하였음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을묘천서󰡕 사건이 후대의 천도교인들에 의해 특별히 더 신비화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앞에서 살펴보았다. 당대의 민중들과 달리 천도교 시대 이후의 ‘천도교인’들은 보편적으로 ‘󰡔을묘천서󰡕 사건’을 무조건 신비화하지도 않으며, 그 이야기를 액면(신비한 상황으로 표현된) 그대로 맹신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선사(禪師)’가 기도를 하면 ‘하늘에서 책이 뚝 떨어진다’고 이해하거나 ‘(천상의 상제 즉) 한울님이 선사(禪師)로 화생하여 비서(祕書)를 내려주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을묘천서’ 즉 을묘년에 ‘천서(天書)’를 받았다는 말 역시, 이 세상 만물, 만사를 ‘천주조화지적(天主造化之迹)’으로 보는 관점에서 명명한 것으로 이해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도올 선생이 동학을 “우주적인, 전 인류사의 종합”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합리적’으로 그것이 종교적 수행, 수련, 수양의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신비체험’이라는 데에 대체로 동의한다. 수운 대신사의 수제자인 해월도 당시의 동학 교단의 분위기에 따라 한울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기를 원하여 강행 수련을 하였으며, 1910년대의 󰡔천도교회월보󰡕에도 다수의 영적(영적) 사례가 보고-수록되기도 하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천도교인들은 수련 과정에서 눈을 감은 채로 글씨(주로 경전의 일부 구절)를 보기도 하고, 또 강화(降話)의 일종으로 강필(降筆) 또는 영부(靈符)를 받는 체험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신비체험마저 최근 들어서는 자제(自制)하거나,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시행하지 않는’ 것이 교단의 일반적인 분위기이다.

천도교를 신앙하는 것은 “나(수운)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는”, 즉 ‘한울님과 나(개인)의 일대일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지마는 현숙한 모든 군자 동귀일체”하며 살아가는, 즉 신앙공동체, 군자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의 공동체, 즉 천도교 교단과 같은 조직을 형성하고 유지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일부 집단에서 교리 해석의 과정을 독점하거나 또는 더 나은 교리 해석으로 나아가는 데에 지체(遲滯) 현상을 보일 수도 있다. 아마도 표영삼 종법사(상주선도사)가 도올 선생에게 ‘천도교인(/단)의 답답함’을 토로한 바가 있다면, 바로 그러한 측면에 대한 호소였을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천도교단 내에서 표영삼 상주선도사로부터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은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표영삼 종법사(상주선도사)의 입장 또한 천도교단의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천도교인(/단)의 입장은 (긍정적인 현상이든 부정적인 현상이든 간에) 한 기관(중앙총부)이 독점하거나 일군의 사람들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교리, 교사 해석의 체계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도교인이 준수해야 할 중요한 규율 중에 “신앙통일(信仰統一)과 규모일치(規模一致)”의 관점에서 보면 교리나 교사 해석에 이견(異見)이 좁혀지지 않고, 특히 ‘교단 밖으로 노출’된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천도교는 천도교인의 사유물이 아니요 세계 인류의 공유물”이며, “천도교는 문호적 종교가 아니요 개방적 종교이며, 천도교는 계급적 종교가 아니요 평등적 종교이며, 구역적 종교가 아니요 세계적 종교이며, 편파적 종교가 아니요 광박적 종교이며, 인위적 종교가 아니요 천연적 종교로서, 지금에도 듣지 못하고 옛적에도 듣지 못하였으며, 지금에도 비할 수 없고 옛적에도 비할 수 없는 새로운 종교”라는 말씀을 잊지 않는다면, 도올 선생과 같은 견해조차도 받아 안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오히려 그 기운을 타고[乘氣運]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또 개벽의 사도(師徒)이자 동덕(同德), 동사(同事)로서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교단을 새롭게 하고, 마침내 세상천지를 새롭게 하는 다시개벽의 기회로 삼음직도 하다. 고아심주(固我心柱)하면, 내지도미(乃知道味)하고, 일념재자(一念在玆)하면 만사여의(萬事如意)라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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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신인간>은 천도교의 기관지. 1926년 4월 창간된 월간잡지로 천도교의 교리와 역사 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적 담론들이 수록됨. 최신호부터 창간호까지 차근차근 소개하여, 동학과 천도교 공부에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개벽하는 사람들 | 강주영 도올의 이 대목을 읽으면 심지어는 불쾌해지기까지 한다.

개벽하는 사람들 | Facebook

강주영 shared a post.
3tm0 StnphgoJdnuly igatotsforegd 21:S0d6mSmh ·



도올의 이 글을 하경숙 님은 동덕님들과 토론을 위해 소개한 것이라 여긴다.
도올의 이 대목을 읽으면 심지어는 불쾌해지기까지 한다.
도올이 수운을 말하면서 수운의 아버지인 근암공뿐 아니라 거슬러 올라 최진립 장군까지 언급하거나, 조선역사의 총체를 언급하는 지경에 이르서는 우생학 혐의마저도 일어난다.
우생학을 나타내는 영어 eugenics는 well(잘난, 좋은, 우월한)의 뜻을 가진 그리스어의 eu와 born(태생)의 의미를 지닌 genos의 합성어였으며, 따라서 eugenics는 글자 그대로 '잘난 태생에 대한 학문'(wellborn science)을 의미했다. 우생학은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종자나 인종 문명에 대한 인위적 소멸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도올의 수운가계 언급 태도는 훌륭한 가계에서 태어난 훌륭한 동학의 냄새가 짙은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학들이나 동학에 대한 다른 해설을 '개똥', '개똥'하는 것을 보면 참을 수가 없다. 수운을 우수한 종자로 만들려는 시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수운이 위대한 것은 우부우민의 주유팔로를 겪으며, 우부우민의 아픔에서 치열하게 사유했던 것이다. 이는 예수가 목수의 아들이며, 말구유에서 난 것과 같은 일이다.
수운이 하늘을 인간화, 만물화한 것처럼 수운 역시 영웅이어서는 안 되며, 우부우민으로 노이무공한 어리숙한 스승님으로 우리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도올 동경대전의 수운에 대한 문장들은 신비화, 성인화로 가득하여서 품에 안을 수가 없다. 예수가 거룩한 성령이 아니라 피를 흘리는 예수이어야 하는 것처럼 수운 역시 우부우민이어야 하는 것이다.
"총기((聰氣)"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무기(巫氣)는 하찮은 광기일 뿐이다. 그러한 자들이 하나의 종교를 창도할 때 그것은 사회적 광란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 대목은 천도교와 의암에 대한 비난으로까지 읽혀지기까지 한다. 동학과 천도교 역사의 아픔과 좌절까지 껴안아야 하는 것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에 도올의 발언은 천도교를 깡그리 무시하는 독단이 아닐 수 없다.
도올은 자기 학문의 에고이즘에서 수운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하경숙
2tm3 StnphgoJdnuly igatotsforegd 11:S3d8mSmh ·

"총기((聰氣)"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무기(巫氣)는
하찮은 광기일 뿐이다. 그러한 자들이 하나의
종교를 창도할 때 그것은 사회적 광란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ㅡ본문에서

우리는 수운과 수운의 아버지 근암공 최옥과의 관계를 다음의 세 측면에서 고찰해볼 필요를 느낀다. 하나는 유전적 성품이며, 하나는 가학(家學)의 연원이며, 하나는 수운의 일생을 지배한 사상적 기저에 관한 것이다.
첫째, 수운은 아버지 근암공으로부터 매우 영민한 지력을 물려받았다. 한마디로, 수운의 아버지 최옥은 머리가 비상하게 좋은 사람이었다. 이종상이 쓴 최옥의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 "타고난 자질이 영민하고 쉽게 깨우쳐, 이미 아동시절에 중국의 『십구사(十九史)를 배웠다. 눈이 한번 스치기만 하면 외워버렸고, 그 대의를 파악해버렸다. 여덟살 때 이미 『봉덕종부(鳳德鍾賦)를 지어 세인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봉덕종부에 관해서는 상고할 길이 없으나 어려서부터 시부(詩賦)에 능하였고, 고찰컨대 뛰어난 암기력과 이해력의 소유자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뛰어난 부친, 최옥의 머리를 수운은 이어받았다. 수운이 결코 머리가 아둔한 사람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매우 총명한 사람이라는 이 단순한 사실은 수운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종교체험이 평소 뛰어난 지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아둔한 인간이 도를 한번하고 싶어서 무리한 발심을 한 사태가 아니라는 이 사실이 명료하게 반추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견딜 수 없는 어떤 도약에 대한 몸부림," "정신적 비상에 대한 갈망", 그의 삶의 저변을 흐르는 이러한 용솟음이 범용한 인간의 구도가 아니라, 비상한 이해력과 암기력의 발군의 총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는 것이다. 총기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무기(巫氣)는 하찮은 광기일 뿐이다. 그러한 자들이 하나의 종교를 창도할 때 그것은 사회적 광란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근암은 노경에 예기치 못했던 삼취(三娶)에서 평생 얻으려다 못얻은 아들을 얻게 된다. 그가 복슬(福述)이 수운이었다. 복슬이는 서자도 아니요, 상처 후에 정식으로 결혼한 부인에게서 낲은 소생이지만, 재가녀의 소생인지라, 『경국대전』의 규정상 과거에 응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과거도 못볼 자식 공부 가르쳐 무엇할 까? 보통 같으면 농사나 짓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암은 이미 성숙한 노경의 대석학이었다. 수운이 가정리에서 고고지성을 울렸을 때 그는 이미 63세였다.
근암(謹庵)에서 근암(近庵)으로 바꾼 최옥(崔鋈)! 그는 말년에 아들을 얻었을 때, 아들의 출세여부는 관심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학문이란 오로지 "사람되기 위한 배움"이었고 "자기를 위한 배움"이었다. 그는 말년에 얻은 자식을 애지중지 키우면서 무엇보다도 학업에 열중케 하였다. 11조로 된 그의 가훈 제22조에 정이천의 말을 빌어, 자녀교육에 관하여 간곡히 타이르는 말이 있다.
아! 한심하도다! 요즈음 자식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입학 후에도 마소에 꼴먹이게 하거나, 들판에 나가 물대게 하거나 하는 등
글 공부에만 전념치 못하게 하니, 이래 가지고
서야 어찌 자식이 재목이 되기를 바랄 수
있으리오! 엷살 때부터 열다섯살 때까지는 무조건 공부를 시켜보면 재목이 될지 안될지, 성공을 할지 못할지 판가름이 나게 될 것이다.
만약 머리가 아둔하여 잘될 가망이 없거나, 도무지 타고나기를 교육이 안 먹힐 수준이라고 한다면, 그때 가서 농사일을 배우고 꼴맥이고 물대게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근암공의 이념에 따라 수운은 17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죽으라고 공부만 했다. 수운이 부모를 다 여의고 19세 때 결혼한 후 살길이 막막했던 것도 농사일 을 전혀 못배운 서생이라는 처지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장사길을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수운은 어디까지나 아버지 근암공의 가학을 이은 선비로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학을 후대의 갑오동학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그 원인제공의 남상(濫觴)으로서 거슬러 올라가 인식하는 데만 익숙해 있다. 그리고 후대에 성립한 천도교라고 하는 종교사의 틀 속에서 그 시조로서의 수운을 이해하는 데만 익숙해 있다. 그러나 모든 시발역은 종착역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수운이 혁명이나 종교의 창시자로서가 아니라, 평범한 선비로서 가학을 잇고 성장한, 기나긴 조선 사상사의 종착역으로서의 중요한 한 측면을 완벽하게 망각해왔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37세 득도 이전의 최수운은 평범한 조선의 선비였으며, 그에게는 중요한 학통이 있었다. 이 학통을 여태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 학통은 영남 퇴도(退陶)의 학통이었다. 그의 아버지 근암공은 최진립 장군 가문을 빛낸, 우리의 상식적 기대를 뛰어넘은 당대의 대유(大儒)였다.
곧 제2탄이 이어집니다! 도올의 『동경대전』



8Yuik Kim, 유상용 and 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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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1

지구와사람-토마스베리강좌

지구와사람-토마스베리강좌

토마스베리강좌


토마스베리강좌는 지구법학(Earth Jurisprudence)과 생태대(ecozoic era)의 비전을 제안한 생태사상가 토마스 베리를 중심으로 생태문명론의 연구와 교육사업을 진행합니다. 토마스 베리는 지구의 운명을 위협하고 있는 생태 파괴의 원인을 인간의 자연 착취를 조장하는 세계관과 우주관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 문명이 지금과 같은 파괴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과정을 규명하고, 생태적 회복을 위해서 인류가 취해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토마스베리강좌는 토마스 베리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전통과 현대의 생태학과 우주론(Ecology &Cosmology)에 관한 심화학습을 진행합니다. 기술대를 넘어 생태대로 나아가는 올바른 세계의 비전을 세우고 교육하는 아카데미를 지향합니다.토마스 베리
Thomas Berry, 1914~2009

토마스 베리는 자연 세계와 인간 간의 관계에 관한 세계의 주요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수도승이자 철학자이며 문화사학자면서 작가이기도 한 그는 스스로를 신학자라기보다 ‘지구신학자’(Geologian) 내지 ‘지구학자’(Earth scholar)로 여겼다. 유창하면서도 정열적인 지구의 대변인으로,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문화사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는 그를 뉴스위크지는 새로운 유(類)의 생태신학자 중 사고를 가장 자극하는 인물로 기술한 바 있다. 1934년 가톨릭 예수 수난회에 입회했고, 연구하고 성찰하며 가르치는 데 자신의 생애를 바쳤다. 역사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40년 후반 중국에서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공부했고, 1950년 유럽에서 군목으로 종사했다. 이후 시톤 홀과 포드햄 대학에서 인도와 중국 문화사를 가르쳤다. 포드햄 대학과 뉴욕 그리고 리버델 종교연구센터에서 종교사 프로그램을 개설하기도 했다. 작품으로는 <지구의 꿈(The Dream of the Earth)>, <우주 이야기(The Universe Story)>(과학자 브라이안 스윔과 공저), <위대한 과업(The Great Work)>, <황혼의 사색(Evening Thoughts)>(메리 이블린 터커 편집)이 있다. 향년 94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미국 노스 캐롤리나의 남부 애팔래치아의 언덕 마을에서 살았다.약력1934수도원 입회(예수고난회)1948Catholic University of America, 서구문명사 전공, 박사
(The Historical Theory of Giambattista Vico)1948중국과 미국에서 중국학 연구,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와 종교적 전통 연구
Seton Hall University 아시아학센터
Saint John's University 아시아학센터1966-1979Fordham University 종교사 대학원 프로그램 소장1970-1995Riverdale Center of Religeous Reserch 창립 소장1975-1987American Teiihard de Chardin Association 회장1995Greensboro North Carolina한국어 번역 출간서신생대를 넘어 생태대로 – 인간과 지구의 화해를 위한 대화토마스 베리, 토마스 클락 공저, 김준우 옮김, 에코조익, 2006토마스 베리의 위대한 과업 - 미래로 향한 우리의 길토마스 베리 지음, 이영숙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 2009우주 이야기 – 태초의 찬란한 불꽃으로부터 생태대까지토마스 베리, 브라이언 스윔 공저, 맹영선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 2010그리스도교의 미래와 지구의 운명토마스 베리 지음, 황종렬 옮김, 비오로딸, 2011지구의 꿈토마스 베리 지음, 맹영선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 2013황혼의 사색 – 성스러운 공동체인 지구에 대한 성찰토마스 베리 지음, 메리 에블린 터커 편저, 박 만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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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토마스베리강좌 개최2019년 3월 16일(토)부터 시작된 제 4차 토마스베리강좌가 11월 25일(토)까지 7회에 걸쳐 열린다. 토마스베리강좌는 맹영선 선생의 지도와 최선호 변호사의 진행으로 더욱 탄탄한 교육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이번 강좌는 생태사상가 토마스 베리의 〈지구의 꿈〉과 〈위대한 과업〉을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갖는다. 11월까지 월 1회 토요일 유재에서 오후 2~5시에 진행된다. 첨부 파일을 통해 자세한 강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2019/04/11
2018 토마스베리강좌 개최세 번째 토마스베리강좌가 2018년 3월 24일부터 시작됐다. 지난 해에 이어 이번 강의 역시 토마스 베리 저서를 번역한 바 있는 맹영선 강사가 맡았다. 강좌에서 함께 공부할 책은 토마스 베리와 브라이언 스윔이 1992년에 쓴 〈우주 이야기 : 태초의 찬란한 불꽃으로부터 생태대까지〉(The Universe Story: From the Primordial Flaring Forth to the Ecozoic Era – A Celebration of...2018/05/14
2017 토마스베리강좌 개최창립 이래 두 번째로 열리는 토마스베리강좌가 2017년 8월 19일부터 시작됐다. 서울시 NPO 지원센터 2층 받다홀에서 진행하는 이 강좌는 2018년 1월까지 총 8회 열린다. 강의를 맡은 맹영선 강사는 토마스 베리의 저서 〈지구의 꿈〉, 브라이언 스윔과 함께 쓴 〈우주 이야기〉를 옮긴 번역가로, 식품 화확과 환경 신학을 공부한 후 지구와 우리 자신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계속 공부하고 있다.이번 강의에서는 토마스 베리...2017/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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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31

Venus Pluto is with Jane Moon and 이백순.2015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그리고 한일관계

Venus Pluto is with Jane Moon and 이백순.2015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그리고 한일관계 















Venus Pluto is with Jane Moon and 이백순.
2t SSrSAtpoprinsnorSledhr ·

2015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그리고 한일관계
이번 주 델타 월딩 메인 이슈는 ‘위안부 협상’이다 일요일엔 이백순 전 호주・미얀마 대사, 문재연 헤럴드경제 기자와 함께 클럽하우스에서 포럼도 진행한다
3월 초에 관련 기사가 나오며 짧게라도 언급할까 하다 (기약없이) 미뤘었다 지난 해 총선 당시 뜨거운 감자였고 본질과 주변을 가려 볼 만큼 아직 그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는 인상이다
그러나 리프레쉬 기간 동안 외교안보 전문 뉴스레터로서 델타 월딩의 본질이 뭔지를 다같이 점검했다 그리고 발발한 현상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는 일만큼 비겁한 일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우리의 미션은 우리의 관점을 주입하는 게 결코 아니다 대화의 장을 만들고 함께 대화를 나누며 차이는 좁히고 지적 영감의 차원은 높이는 거 아니었나?
화요일에 나간 뉴스레터는 사실 평소보다 힘들게 만들어졌다 매일 회의를 했음에도,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주목하는 지점이 달랐고 온도차가 꽤 컸다 뉴스레터 발송 직전까지도 문장 하나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만장일치제를 채택하는 우리로서는 한 사람이라도 석연치 않아 하는 구석이 있으면 무조건 고친다(만장일치제는 한 사람의 주장이 과도하게 반영되는 걸 막고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필수 장치다)
쉽지 않은 주제다 기획기사만으로도 수십 페이지에 논문 또한 수백, 수천 개가 쏟아져 나온다 이를 하나의 뉴스레터에 담는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시도.
그럼에도 합의된 건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시계열로 늘어 놓아 보자는 것. 늘 그렇듯 개인의 관점은 제거하고 드라이하게
<연도-협약 및 선언-주요 내용-쟁점>
만을 정리하자. 또한 2015 협상안을 둘러싼 한일 양국의 여론을 스케치하자
봄, 꽃, 미사일 말고 부동산
https://stib.ee/B7D3
어제는 도서관에 가 박유하 교수의 책도 몇 권 빌려 왔다 기사를 통해 메타적으로는 접해 왔지만 나 역시 직접 읽어보진 않았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참여자들에게 어떤 경험을 제공할 것인가의 고민, 논의의 폭을 어디까지 넓히고, 동시에 집중하게 할 것인지로 머리 속이 여전히 복잡하다
막연히 잘 되겠지, 라는 희망적 사고를 하기보다 일요일까지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겠다 아무쪼록 이번 주 일요일 오후 3시, 클럽하우스 선데이시소에서 만나요~
클럽하우스 선데이시소 바로 바기
https://www.joinclubhouse.com/event/M621VKXX

Venus Pluto
5mftSp oAhponsrcilnornedc ·

2015 일본군 위안부 협상 포럼 간단 후기
후기를 길게 썼다가, 조금 더 묵혀 둬야겠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메이징한 시간이었다 아니, 체험이었다”
3시간 30분. 이런 주제로 이런 분위기가 가능하단 말이야? 그저 놀라울 뿐이다
많이 염려했었다 (지난 해 모 시민단체 사건까지 맞물리며) 2015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어느 지평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논의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내겐 이를 유려하게 콘트롤할 의무가 있다
한편, 욕심이라면 욕심을 부렸다 ‘일본은 가해자이므로 무조건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한 문장으로만 수렴해 버리는 담론이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늘 의문이 일었다 공정은 아름다운 단어지만 국제사회에선 무용한 어휘다 실현불가능한 미래를 꿈꾸는 건 이상이 아니라 무모함이다
그래서 이를 위해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 한일 양국 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톺아 보려 했다 일본이 왜 통상국가에서 보통국가로 넘어가려 하는지의 역사적 맥락을 살펴 보려 했다 일본군 위안부 협상이 한일 간의 1:1 함수가 아니라 국제질서의 변화와 맞물려 돌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코자 했다 보통의 일본 국민들이 일본군 위안부와 2015년도 협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등을 공유하려 했다 (극단적으로 튀는 일본인들 말고.)
모든 문제의 해법은 정의를 주장하는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상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한 시간은 5파트로 나눠 내달리듯이 진행했다 유기적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진 못하더라도 사전 정보를 주루룩 나열한다면 이러한 지평 위에서 논의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나의 설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은 가해자이므로 사과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으니까. 피해자가 가해자를 이해하고 설득해야 하는 건 공정하지 않다는 의견도 개진됐다 해법은 결국 한국이 강해지는 것 뿐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겉보기엔 같은 결론이라 할지라도 오늘 포럼에서 형성된 분위기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계속해서 뜯어 보게 된다
정말 많은 이들이 논의에 참여했다 그런데 인터넷에 보아 왔던 것처럼 racism으로 해석될 수 있는 직접적인 어휘를 사용하거나, 격한 감정을 토로하는 이가 없었다
한 방향의 의견만 쏟아져 나와 모두가 평화로왔다는 동화책같은 풍경은 아니었다 의견을 개진하는 이들 간에도 미묘한 온도차가 있었다 특정 쟁점에 대해선 뜨겁게 달아 오르기도 했는데 누구도 이러한 다름을 틀림이나 부정의로 몰아가지 않았다 제시되는 의견에 공감과 이해를 먼저 표한 후 다만, 이런이런 이유 등으로 인해 다르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러움이 곳곳에서 묻어 나온다
가장 강력한 힘은 ‘전문가’들에 있었다 이백순 전 대사님과 문재연 헤럴드경제 기자님이 시작부터 함께 했다 중간에 조병제 전 국립외교원장님도 방문했다 그리고 이들 덕분에 어떤 애기가 나와도 사변적으로 흐르는 걸 방지할 수 있었고 오히려 논의는 딥다이브로 흘러갔는데 전문 어휘가 언급된다고 해서 지루하거나 어렵게 여겨지는 게 아니라 사태를 다면적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며 지적 영감을 한 차원 더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어려운 쟁점을 알기 쉽게 전달한다는 건 표현을 재밌게 하거나 쉬운 단어를 사용하는 데에 있지 않다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한계란 없다는 마인드로 바닥을 뚫고 가야 한다 그리고 결정적 순간에 발견하는 한 단어를 길어 올려 이를 구조적으로 잘 정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애정. 즉 나는 너의 이야기를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며 어떤 순간에도 너와의 대화를 중단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
오늘 포럼이 밀도 있게 진행될 수 있었던 건 3명의 전문가 때문만은 아니다 포럼에 참석한 이들 전체가 만들어 간 것인데 나를 가장 매료시킨 건 누구도 주눅들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이 많은’ ’전문가’들이라고 해서 쭈뼛쭈뼛 말을 꺼내는 게 아니라 수평적 관계였다 자칫 일방의 강의로 흘러갈 수도 있는 분위기였겠지만 아니다 그것은 분명 대화였다
내가 그 모든 의견에 동의하는 게 아니더라도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차분하면서도 진지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태도 그 자체에 나는 숙연한 감정이 일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좀 내려 놓게 된달까? 혹은 현재 한국에 형성되어 있는 어떤 여론에 대해 무게를 싣지 않게 된달까?
희망있음/없음의 뭉툭한 결말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양국 모두 시간이 더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오늘 상당히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내게 바라는 내 역할은 내 주장이 옳으니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 가 아니라 공론의 장을 만드는 거니까. 어쨌든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 피하면 안 된다
+. 진짜 후기는 따로 다시-

Jane Moon
5mftSp oAhponsrcilnornedc ·

Venus Pluto 별샛별님의 초대로 위안부 문제와 한일관계를 주제로 한 클럽하우스 포럼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유익하고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규범적인 접근과 현실적 접근, 그리고 일본의 시각에 대한 회의론이 공존하는 토론장에서 기자인 제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많이 돌아보게 됐습니다. 또, 제 기자생활 6년 동안 이 이슈를 꾸준히 다뤄왔음에도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해하기 쉽게 정보를 전달하지 못한 건 아닌가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토론에 참여한 분들이 제기한 질문들과 소개/조언 등을 듣고 어떤 얘기들인지 바로 캐치한 저 스스로를 보고.. 내가 헛으로 그동안 취재활동과 연구를 한 게 아니었구나... 하고 뿌듯하기도 했고요(ㅎㅎ)...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시각을 충분히 얘기하지 못한 거 같아 아쉬웠습니다.
사실 위안부 문제나 과거사 문제를 한국과 국제사회에 계속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본 행정부 관계자들도 꽤 많습니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정책 결정자들과 그 결정자들이 주도하는 파벌의 정치력으로 인해 그런 의견들이 힘을 얻지 못하고 있죠. 승진 인사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고요.
이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하게 되면 제가 취재원들과 접촉하면서 얻은 오프더레코드 정보까지 공유를 하게 될 것 같아 하지를 못했습니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 관계를 대표하는 문제라고 하지만, 사실 한일관계의 전부도 아니고 일부분이죠. 그 피해에 대한 치유문제는 여성학적, 인류학적, 역사학적, 그리고 외교적, 국제인권적인 측면에서 복합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일관계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가 부각되는 이유는, 일본이 바라보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인식 때문일테지요. 이 인식에 위안부 문제가 차지하는 가중치를 어떻게 줄여나갈 지는 사실 일본의 내부정세와 역학관계를 이해하지 않는 이상 생각해내기 어렵습니다. 단기간에 풀리는 문제도 아니고요.
그럼에도, 토론을 하면서도 얘기했지만, 위안부 문제는 현재 생존해 있는 등록위안부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당장의 외교적 해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복합적인 파편들을 깔끔하고 단순하게 그려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어려운 문제이고, 잘 풀어내야 하는 문제인 만큼 우리는 디테일을 자세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때일 수록, 기자인 제가 져야 할 책임과 역할이 참으로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더 최선을 다하는 기자가 될 수 있도록 성찰하고 또 성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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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신학자 박순경 통일신학과 聖 · 性 · 誠의 여성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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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eBook] 중심 - 극단의 세상에서 나를 바로 세우다 법인

알라딘: [전자책] 중심

[eBook] 중심 - 극단의 세상에서 나를 바로 세우다 
법인 (지은이)김영사2021-03-29 


책소개

흔들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키워드, 중심. 주식 시장은 연일 급등과 폭락을 반복하며 출렁이고, 국민의 보루가 되어야 할 정치는 대립과 분열로 휘청인다. 코로나19가 방호복 속까지 침투해 일상을 마비시켜버린 시대. 법인 스님은 고집불통 같은 중심이 아닌, 사유하고 받아들이며 단단해지는 중심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움켜쥔 손을 다시 털어버리”고 힘든 이들과 나누며 살 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만날 수 있다고 전한다. 농사를 짓는 농민, 귀촌한 가족, 위안부 할머니, 청년, 석학, 시인, 기업인 등 수많은 사람의 절절한 사연을 듣고 보고 느낀 바를 글로 남겨야 한다고 느낄 때마다 펜대를 움켜쥐었다.

오랜 시간 우리는 이런 스님, 이런 어른의 책을 기다려왔다. 법인 스님은 산중 수행자로서 문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공부를 멈추지 않았고,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공동대표로서 낮고 연약한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며 법석이는 현장에서 중심을 지켰다. 《중심》은 46년간 뚜벅뚜벅 수행길을 걸어온 법인 스님이 산문山門을 열고 온몸으로 세상과 호흡하며 얻은 배움의 기록이다. 세월호 참사, 촛불시민혁명, 전 대통령 탄핵,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격랑의 현대사를 오롯이 살피며 참혹한 어둠 속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넌지시 일러준다. 부당한 세계에 맞서는 가운데 “나를 올곧게 지켜내라”고 조언하며, 내뱉은 말이 활이 되고 내면에 도사린 화가 독이 될 때 잠시 “멈추고 살피고 결단”하면 평온이 찾아온다고 이야기한다. 균형이 무너진 사회와 일상을 일으켜 세워줄 해법을 제시하는 명징한 책, 《중심》이 드디어 독자를 만난다.

목차
추천의 글 가운데 있는 마음
책을 펴내며

1부. 사는 일
움켜쥔 손 털어버리는 일
무어 그리 어려울까
인생을 망치지 않는 법
주마간화
보람이네가 행복한 이유
재미의 판
밥 이야기
낯선 규칙이 나를 바꾼다
솔바람과 풀꽃 시계의 값
실사구시의 배움터
‘본다’에서 ‘보인다’로
사는 즐거움, 죽는 즐거움
다른 길, 여러 길, 나만의 길
시간의 회복, 소소한 행복
참회하는 용기, 용서하는 용기
물도 부처, 나무도 부처
똑같은 길, 많이 같은 길
나에게 이런 사람 있는가
그 많은 고무신을 누가 빛나게 닦았을까
노래 못해도 충분히 멋진 사람
땅끝마을 명랑 남매
술맛과 차 맛의 차이
스님이 이렇게 웃길 수가
아이들도 은근 내공이 있다
내가 참 중요하다
짝을 짓는 즐거움

2부. 세상일
사람과 사람이 손을 잡으면
사람 사는 세상이 된다
회장님, 반성문 다시 쓰세요
존귀한 존재
혼자서 행복하다면 부끄러울 수 있다
참다운 나눔이란 무엇인가
열린 귀는 들으리라
상식의 교집합
두 노인과 코로나19
견딜 수 없어야 한다
공점엽 할머니
꽃들에게 미안하지 않으려면
두 번째 화살
21세기 〈애절양〉
똑똑하고 잘난 자식
지리산, 큰 상징성이 두렵다
집은 집集이지, 집執이 아니다
내 몸이 사회를 말해준다
21세기형 아큐와 리플리 씨
촛불의 또 다른 화두
헌 부대에 새 술을 담아보니
단군 할아버지가 좋아하실 일
슬픔에 유효기간이 있을까
저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3부. 닦는 일
그릇에 더러움이 가득하면
맑은 물을 담을 수 없는 법
목탁이 귀중할까, 걸레가 귀중할까
상상, 질문, 대화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가
잠시 멈추면 내 안의 어둠은 사라진다
붙잡거나 붙들리거나
정녕 그것이 괴로움일까
도망가도 따라온다면
붙잡으면 휘둘린다
사랑이 덫이었네
말은 나에게로 돌아온다
내가 말하고 내가 듣는다
명사가 위험하다
사소한 말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언어
옳은 것은 좋은 것일까
자기 말을 하는 사람
낭독의 기쁨
거짓말의 피해자는 누구인가
3천 권 읽고 음미하기
실시간 행복의 실종
고사성어와 도토리묵
생각에 힘을 빼야 하는 이유
불리한가? 부끄러운가!
적명 스님과 배움
시민이 수행해야 하는 이유
장가도 안 간 스님이 어떻게 알아요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패가망신이라는 말이 있다.
P. 21~22 ‘적정 기술’이 있듯이 ‘적정 속도’가 필요하다. 삶이 헐떡거리지 않는 그런 속도 말이다. 적정한 속도를 유지하려면 성장과 독점이라는 미혹의 문명에 대한 큰 전환이 있어야 하겠다. 멈춰 서서 오래 골똘히 보아야 사랑스러워 보인다. 빨리 달리는 말 위에서 어찌 예쁘고 사랑스러운 꽃을 보고 느낄 수 있겠는가.
P. 24~25 보람이 부모는 왜 분수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을까? 분수를 지킬 때 곧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분수라는 말은 신분 사회에서 계급 상승의 욕구를 억누르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본래 사람으로서 일정하게 이를 수 있는 자신만의 몫을 의미한다.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기질과 취향, 능력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남이 좋다고 하고 내 눈에도 좋아 보여서, 다른 이의 삶을 훔쳐보고 넘보는 일은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이를 매우 잘 알고 있는 보람이 부모는 가끔 농담조로 말하곤 한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오르지 않는다.” 분수 밖의 삶에 의미를 두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지혜와 용기가 엿보인다.  접기
P. 59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공간을 빼앗기는 것이다. 공간을 빼앗기는 것은 개인과 가족의 삶을 빼앗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집은 웃음과 대화가 넘치는 화목한 가정이 아니라 각자 피곤한 몸을 누이고 출근하는 숙소로 바뀐다. 재화의 총량을 늘리는 일을 멈출 줄 모르는 사회 구조가 개인 시간의 절대 빈곤을 만들어낸다. 생각해보자. 개개인이 쓸 수 있고 써야만 하는 저녁과 주말의 시간은 소중한 사유재산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유재산을 허락 없이 무단으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빼앗는 행위는 탈법을 저지르는 일이며 반칙이다.  접기
P. 64 올여름은 청소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쁨을 누렸다. (…)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무엇 덕분에 기분이 좋고 행복할까?” 한 아이가 답했다. “나무와 꽃과 시원한 바람이 있어서 행복해요.” 이어 내가 물었다. “이것들이 곁에 없거나 아프면 어떻게 될까?” 그러자 아이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마음에 작은 파문이 인 듯했다. 낱낱이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은 만물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사람만 살려고 다른 것들을 따돌리고 함부로 대하면 사람도 결코 건강하게 살 수 없음을 느꼈을 것이다.  접기
P. 138~139 가장 쉬운 일이 가장 어렵고,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가장 쉽다.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참회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처럼 보이지만, 진실과 용기만 있으면 즉시 할 수 있다. 화해와 상생의 미래는 견딜 수 없는 가슴을 열어 보일 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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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인 (지은이) 

1976년 중학교 3학년 때 광주 향림사에서 출가했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의 한복판에서 인간과 종교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 20대 초반 계룡산 신원사에서 경전보다 문학에 심취하여 지내던 중 “스님은 왜 공부하지 않으세요. 공부해서 깨달음을 이루고 중생을 제도할 스님이 왜 이리 한가하게 사나요?”라는 말을 듣고, 부끄러움과 자괴감에 반도를 떠돌며 방황했다. 1985년 어느 문예지에 시인으로 등단했지만 미련 없이 문학을 접고, 경전 공부와 수행에 몰입했다. 1994년 조계종 개혁 불사에 참여한 이후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을 지냈다. 2000년 해남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이라는 프로그램을 열어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고, 2009년부터 4년간 조계종 교육부장을 맡아 ‘100년 만의 변화’라는 승가교육개혁을 이끌었다. 2014년 일지암 청년암자학교에서 청년들의 고민에 날카로운 진단과 따스한 처방을 내려 ‘병 주고 약 주는 스님’으로 불렸다. 2015년부터 4년간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공동대표로 우리 사회를 맑고 밝게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2019년부터 현재까지 지리산 실상사에서 대안학교인 작은학교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면서 공부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월간 〈참여사회〉 편집위원장으로 일상에서 깨달음이 빛나는 삶을 추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중심>,<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 총 4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본디 정해진 길, 그런 길은 없다.
가면 열리는 길, 그런 길은 있다.”

이런 스님, 이런 어른을 기다렸다!
지식인이 사랑하는 문장가 법인 스님,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을 되돌아본다

역병 재난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온갖 폭력이 도사린 사회를 밝게 만들 해결책은 없을까. 왜 괴롭고 외롭고 화가 나는 것일까. 주어진 길을 따라가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이런 물음에 답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전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 중심.
《중심》의 저자 법인 스님은 중학교 3학년이던 1976년 출가하여 46년간 수행길을 걸으며 농사를 짓는 농민, 귀촌한 가족, 위안부 할머니 등 여러 사람을 두루 만나며 “세상사에 무관심”(294쪽)하지 않고, 승속을 넘어선 혜안을 키웠다. 산중 수행자로서 문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공부를 멈추지 않았고,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공동대표로서 낮고 연약한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며 법석이는 현장에서 중심을 지켰다. 그래서 황지우 시인은 “이 책의 제목 《중심》은 어쩌면 당신의 위치이기도 하다”(5쪽)라고 말했다.
법인 스님은 말한다. 꿈쩍 않는 고집불통 같은 중심이 아닌, 사유하고 받아들이며 단단해지는 중심이 필요하다고.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움켜쥔 손 다시 털어버리”(52쪽)고 힘든 이들과 나누며 살 때 세상의 중심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스님이 맑은 글들을 죽 따라 읽다보면 망망대해 같은 인생길의 방향이 잡히고, 어느새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에 당도한다.
감은 눈을 뜨게 하는 글이 절실할 때마다 여러 매체에서 법인 스님을 찾았다. 지식인들 사이에서 소위 ‘글 잘 쓰는 스님’으로 불리는 문장가 법인 스님. 때로는 흐트러진 일상을 바로 잡는 죽비 같은 글, 때로는 가슴 먹먹하게 심금을 울리는 글을 써온 스님이 오랜 수행과 만남에서 길어올린 사유를 만나보자.

구심점을 잃은 환난의 시대에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사는 일, 세상일, 닦는 일

이 책 《중심》은 2015년 5월부터 2021년 1월까지 법인 스님이 일간지와 월간지에 연재한 칼럼 그리고 미발표 원고를 모아 엮은 산문집이다. 지난 6년여간 수행자의 소임을 다하면서 혼란의 연속인 우리 사회의 면면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1부 ‘사는 일’은 삶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행복에 이를 수 있는가에 대해 법인 스님이 사유한 글들을 모았다. 산중 템플스테이에서 나눈 대화부터 산문山門을 열고 세상 사람들과 호흡하며 나눈 이야기까지 가득하다. 고 정주영 회장에게 들은 절밥에 얽힌 이야기가 구의역에서 사고를 당한 청년이 남긴 갈색 가방 속 컵라면에 대한 단상으로 이어지며, 밥이란 무엇이고 인간은 어떻게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가를 되새겨본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아빠가 아들과 딸의 손목에 풀꽃 시계를 만들어준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는 소중한 것들이 참 많다”(39쪽)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특히 스님은 벗들과 차담을 나누기를 좋아하는데, 차를 앞에 두고 지인들과 나눈 담소는 옹글어 인생의 시선을 넓혀준다.

우리에게 행복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행복은 거창하거나 멀리 있지 않다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돈을 많이 벌고 호화로운 집을 소유하고 명품을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복이 아니라 스스로 가슴으로 느끼는 행복이 진짜다. _58쪽

2부 ‘세상일’은 요동치는 세상에서 중심을 잡고자 고군분투했던 참여적 주제의 글들을 모았다.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등 뼈아픈 슬픔을 직시하고 어루만지며, 세월호 참사, 촛불시민혁명 등 정의가 바로 서지 못한 사회 풍경을 조명하고 공생의 길에 주목한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 속 상황을 비추어 팬데믹 시대에 잠복한 부조리를 성찰한다. 또 고용 불안, 청년 실업 등 입에 풀칠도 못 하고 사는 사람에 대한 연민과 애정 어린 시선도 잊지 않는다.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슬픔에 가까이 다가가는 법인 스님의 성정은, 청년 시절 5․18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인간과 종교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고, 이순에 가까워지기까지 시를 비롯한 문학을 사랑한 데에서 비롯한 것일 터이다.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사유를 드러내 우리를 반성하게 하는 스님의 글은 품격 있다. 갑질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대기업 회장님에게 보내는 편지는 학교 폭력, 가정 폭력, 성폭력 등으로 파문을 일으킨 사람들뿐만 아니라 잘못을 저지른 뒤 회피하기에 바쁜 이들에게 진정한 반성의 의미를 되짚게 한다.

회장님! (…) 불가에서는 자신의 행위를 진심으로 뉘우치는 ‘이참理懺’과 피해를 준 사람들에게 정직한 고백을 하고 보상을 해주는 ‘사참事懺’이라는 참회의 방식이 있습니다. 사참이 없는 참회는 이참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묻습니다. 당신은 왜 지금 진정한 사참을 하지 않습니까? _108~109쪽

3부 ‘닦는 일’은 ‘괴로움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고통을 다스려야 하는가’ ‘말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말그릇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가’ ‘공부란 무엇이며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하는가’ 등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수행’에 관한 글들을 모았다. 법인 스님은 “책을 읽고 틈틈이 농사일을 돕고”(116쪽), 노스님과 밤샘 토론을 하는 등 온몸으로 수행하면서, “세간에 살아가는 시민의 수행은 특별한 명상과 기도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생각과 언행을 바꾸고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도 수행”(293쪽)이라고 전한다.

고요한 시간에 정직하게 자신을 응시해본다면 자기 내면에 도사린 화를 알 수 있다. (…) 화가 나고 불안하고 고립감을 느낄 때는 멈춰야 한다. 왜 멈추는지 묻는다면, 살피기 위해 멈춰야 한다고 답하겠다. 그리고 내면에 깃든 어둠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어두운 여러 모습이 나에게 깃들어 있음을 고백해야 한다. 멈추면 보이고 바라보면 사라진다. 어두운 모습이 사라진 자리에 평온과 기쁨이 찾아온다. 그래서 ‘텅 빈 충만’이라고 하지 않는가. _210~211쪽

화려한 꽃이 소박한 야생화를
깔보지 않는 세상을 위하여
나를 올곧게 지켜내며 참여하고 연대한다

법인 스님의 글은 불교라는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주눅 들지 않는 꽃들이 어우러진 꽃밭“(295쪽), 즉 화엄華嚴을 보여준다. 신부님, 목사님 등 여타 종교인과 경계를 두지 않고 소통하며 청년들, 농민들, 노동자들과 더불어 살고 있으니 글의 품이 넉넉한 건 당연한 이치겠다. 소위 “장가도 안 간 스님이 어떻게 세상일을 속속들이 아느냐고”(294쪽) 묻곤 하는데, 이에 대해 법인 스님은 “산과 강에서 흘러나오는 온갖 백천 지류의 물들이 바다에 모이듯, 여러 사람과 사연이 모여드는 곳이 절집이다. (…) 여러 사연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절집엔 늘 잡설의 꽃이 핀다. 잡설이 모이면 경전이 된다”라고 답하며, 사람 사는 내음을 품되 강골 있는 언어로 참여와 연대의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가 참여하고 연대할 때 소홀해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 부당한 세상에 맞서면서도 ‘나’를 올곧게 지켜내는 일이다. 왜냐면 저마다의 ‘나’가 확장하여 관계를 맺으면서 세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_100쪽

법인 스님은 잠깐 편해지는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오래 곱씹게 되는 일침을 전한다. 어쩌면 이 책 《중심》은 스님의 반성문이자 소리 없는 분투기에 가깝다. 무균실과 같은 세상은 없다.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물이 조금만 탁해져도 물고기는 아가미를 여닫을 수 없다. 물이 오염되면 물고기는 숨을 거두게 된다. 물이 세상이라면 물고기는 사람이다. 티끌 하나 없는 물은 있을 수 없지만, 오염물이 넘쳐 흐르는 세상을 정화할 필요는 있다. 이런 세상에서 새삼 다시 《중심》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내가 서 있어야 할 ‘바탕’에 내가 서 있고/ 내가 가야 할 ‘방향’으로 내가 길을 가면/ 그곳이 바로 ‘중심’이다.// 천길 벼랑 끝의 나뭇가지 붙잡고 있는 그대, 당장 그 손을 놓으시라./ 천길 벼랑 끝에 서 있는 그대, 당장 한 걸음 내딛어라.// 지금 여기, 머뭇거릴 이유 없네. _9쪽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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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답답한 세상인데, 잠시나마 절에 와서 스님과 얘기한 기분이 드른 책 입니다.
점심 먹고 쉴때 한 챕터씩 읽기 좋아요 
gisuis 2021-04-0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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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세상에서 나를 바로 세우다 새창으로 보기








흔들리는 세상에서 우리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키워드 '중심'



법정 스님, 김수환 추기경님, 이해인 수녀님 등 세상이 혼란하고 어지러울 때마다 우리를 든든히 붙잡아주시는 어른들이 계셨다.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그분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세상을 달리 바라보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지금도 세상은 다양한 문제들이 얽혀 괴롭고, 외로운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다독여줄 누군가가 그리워진다.





"본디 정해진 길, 그런 길은 없다.

가면 열리는 길, 그런 길은 있다."





참 오랜만에 스님이 쓰신 책을 만났다.

법인 스님은 산중 수행자로 문학과 인문학을 넘나들며 공부를 멈추지 않았고,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공동대표로서 낮고 연약한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며 법석이는 현장에서 세상과 호흡하며 얻은 배움의 기록이 정리되어 있다.





"머뭇거림 없이 중심을 지키면서 

가고 싶은 길을 가고, 가야 할 길을 가고,

가고 싶지 않은 길도 가기 위해

왜 나는 나와 정직하게 마주하지 않는가.



나를 힘들게 하고 혼란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왜 나는 정직하게 질문하지 않는가."





"우리가 참여하고 연대할 때 소홀해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 부당한 세상에 맞서면서도 '나'를 올곧게 지켜내는 일이다. 왜냐면 저마다의 '나'가 확장하여 관계를 맺으면서 세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단단히 중심을 잡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한 문장씩 읽다 보면 스님의 지혜가 전해지고 마음에 쌓여 세상살이에 조금은 유연해진 나를 발견하길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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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jyj0702 2021-04-1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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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 존재하기. 새창으로 보기
본디 정해진 길, 그런 길은 없다. 가면 열리는 길, 그런 길은 있다. 



요즘 책과 친해져서 쉬는 시간마다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읽는 책들마다 한결같이 나에게 전달해주는 메시지가 있다. 바로 내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라는 것. 그것이 옳은 길이라는 것. 사람은 하루에 3-4만 개의 선택을 한다고 하는데, 수만 가지의 선택지 속에서 '대체 내가 제대로 선택하고 있기는 한 건가'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온전한 나의 선택으로 가꾸어지는 나의 삶 역시 잘 가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 때도 물론 있다. 그런 나에게 의심을 거두라고 말해주는 책들이 있어서 내심 감사한 밤이다. 



오늘 읽은 책, <중심: 극단의 세상에서 나를 바로 세우다>는 휘몰아치는 세상 속에서 나만의 중심을 세우는 것의 특별함을 선사한다. 얼핏 보면 중심 잡는 게 꽤 쉬워 보이지만, 생각보다 그렇지 않다는 것. 그래서 중심이 흔들릴 땐 꼭 이 책 앞으로 가야 한다. 






"영혼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고, 그 어느 것보다 영혼의 일이 먼저 질서가 잡혀야 마음이 편하다." (P.134) 

- 영혼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말이 마음속에 콕 박힌다. 살면서 나의 '영혼'을 생각하는 나날들이 얼마나 있을까. 나의 몸과 마음은 생각하지만, 정작 영혼을 돌아보지 못했던 것 같아 <영혼>이라는 단어가 내심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유한다. 영혼의 일이 따라야 하는 질서가 무엇일까. 모든 일을 잠깐 멈추고 내 몸과 마음을 되돌이켜 봄으로써 답을 찾길 고대한다. 그렇다. 명상이 답이다. 



"노래를 못해도 감흥에 젖어 흥겨울 수 있고, 글을 못 써도 책을 읽고 내용과 의미에 공감할 수 있다. 누구든지 마음을 다해 눈을 뜨고 귀를 열면 온갖 아름다움과 사랑을 누릴 수 있는 감수성이라는 특별한 재능이 보일 것이다. 감성 지수를 높이는 일이 최고의 재능이고 복락이겠다. '창에 스미는 달빛을 볼 줄 아는 이는 공부를 잠시 쉬어도 좋겠다.' (P.80)

-<감수성이라는 특별한 재능> 이란 말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움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느릴 수 있는 특권인데, 나에게는 그런 특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잊고 사는 건 아닌가 싶다. 길을 가다 잠시 멈춰 서서 아름 다운 것들을 바라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삶 속 작은 여유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 즐길 줄 아는 사람. 감수성이라는 특별한 재능을 똑 부러지게 잘 쓰는 사람이 돼야지.




이 책은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꼭 필요한 <중심>을 제대로 잡아주는 책이다. 따라서, 삶의 <중심> 이 흔들린다고 느끼시는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다. 그리고 말씀드리고 싶다. 중심이 흔들려도 괜찮다고. 흔들리니까 사람이고, 그깟 중심, 마음 단단히 먹고 세우면 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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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yeiseul 2021-04-2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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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새창으로 보기
#중심 #법인
극단의 세상을 바라보는 스님의 눈
🏷 어떤 세상에서도 자신의 중심을 바로잡기
모든 세계는 연결되어 있다. 혼자만 살고자 하면 혼자도 살 수 없다. 재난은 우리 곁에 늘 숨어 있다. 인간이 마음을 모으면 희망의 빛을 부를 수 있다. (118쪽)
스님이 쓰신 글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닥 세상을 알지 못한 채로
편한 소리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랄까.
라떼는 말이야같은 느낌일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요지경의 세상 이슈들을 말했다.
스님은 세상의 요지들에 딴지를 걸고 답을 청했다.
뻔한 소리가 아니여서 좋았다.
그러한 세상일수록 우리는 중심을 세우고
오히려 자신을 더 돌아봐야 한다는 것.
🏷 다른 종교인들과 모임도 하시는 스님
주체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내가 반드시 옳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입장을 바꿔 바라보고, 사적 이해득실을 떠나 상생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내 생각을 바꾸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180쪽)
신부님, 목사님, 스님들과도
모임을 하신다는 사실이 이색적이었다.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본질적인 뜻을 가지고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
종교가 다른 사람과는 결혼도 못한다고 하는데,
성직자들의 본질은 같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종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중심이 갖춰져야 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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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운 2021-04-2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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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충만 새창으로 보기
수행자 법인 스님이 5~6년 전 발표하신 글 부터 아직 발표하지 않은 글 까지 짧은 글을 모아놓은 산문집이다. 출가 수행자가 쓴 글인만큼 불교 교리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읽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불교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쉽게 읽을 수 있다. 물론 기존에 아는 것이 있다면 그 뜻을 더 깊게 알 수 있다. 책을 읽으며 40년 이상을 수행자로 살아오신 분도 일상에서 늘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깨달음을서 얻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1부 '사는 일'은 주로 저자 본인과 타인의 일상 속 깨달음 이야기다. 찻잎을 따고 감자를 캐는 노동에서도 의미를 찾고 아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존경스럽다. 또 나의 삶, 이야기, 감정만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이를 확장하여 사회 곳곳에 일어나는 부조리하고 안타까운 일에 대한 의견도 제시하신다. 이는 2부 '세상 일'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수행자의 마음으로 진단한다. 최근 이슈 뿐만 아니라 2021년에 점점 잊혀가는 일들을 종교적 성찰의 말씀과 함께 돌아볼 수 있는 챕터다.

 

3부가 가장 '불교스러운' 챕터였는데, 그만큼 읽는 동안 잡념이 조금이나마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부처님의 말씀이 가장 많이 수록된 챕터이다. 지금까지는 학교에서 배우는 사상으로서의 불교만 접할 수 있어 '출가'나 '수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세속과의 거리감이 불교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마지막 챕터를 읽으면서 불교나 불교 수행자들이 세간 일에 가지는 관심과 진단, 지혜 등이 생각보다 더 깊고 본질을 꿰뚫는다는 생각을 했다. 책의 제목 '중심'은 지금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시민 수행자'로서 '분노하되 증오하지 않으며, 그름을 배격하되 끝내 함께 가겠다는 애정을 포기하지 않는 삶(p193)'을 흔들림 없이 지향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싶다. 

 

시험기간에 읽어서 그런진 몰라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템플스테이를 꼭 해보겠다고 한 번 더 다짐했다. 차담을 나누며 '보는 풍경'이 아닌 '보이는 풍경'을 발견하는 기쁨을 경험해보고 싶어지는 책이다.

 

'보는 풍경'은 그저 똑같은 사진으로 남고, '보이는 풍경'은 저마다 가슴 속 깊은 곳에 다다른다. (P49)

슬픔과 아픔은 당사자가 감내하는 무게다. 위로와 사랑은 오직 곁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P191)

 

*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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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dls9955xp 2021-04-1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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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새창으로 보기
“본디 정해진 길, 그런 길은 없다.
가면 열리는 길, 그런 길은 있다.”


혼란과 격동의 세월을 겪고 있는 우리들은 모두들 말도 할 수 없이 불안하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환경의 변화에 의해 흔들리고, 남들의 이야기에 갈등하며,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불안정한 사회가 지금의 현실이다.


이 책은 이런 우리들에게 흔들리지 말고 자신을 지켜라고 말씀해 주시는 법인 스님의 산문집이다. 2015년부터 2021년까지 연재한 칼럼과 원고를 엮은 이 책은 혼돈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잘 담고 있다.


'가장 쉬운 일이 가장 어렵고,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가장 쉽다.'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행복에 이를 수 있는가. 우리가 대체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초등생 자녀들에게 풀꽃 시계를 선물로 준 아버지의 진심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을 것인데 우리는 그런 것들을 잊어버리고 명품시계를 밝히며 겉치레만 가득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삶의 중심을 내가 아니라 남들에게 옮겨 생각하고 있는 주체 없는 삶이 문제가 아닐까.


'아무리 편하고 빨라도, 내 정신과 감성의 생기와 울림을 억압하고 지배하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일 수 없다.'


지금껏 불안해하던 나를 돌아본다. 스님의 말처럼 내 중심을 찾아보고자 한다. 나의 중심은 대체 어디에 있는걸까? 혹시나 남들보다 뒤쳐질까, 창피한 삶을 살게 될까 주저하며 불안해하며 남의 시선만 좇던 나를 말이다. 스님의 꾸짖음이 나를 때린다. 정신 차리고 살라고. 니 욕심으로 화를 부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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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dugi 2021-04-2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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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로운 사람들을 위한 마을공동체 탐사기 조현

알라딘: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 -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로운 사람들을 위한 마을공동체 탐사기   
조현 (지은이)휴(休)2018-08-17

432쪽

책소개

동서양 문화는 물론 인도와 이집트, 이스라엘과 티베트, 중국과 우리나라의 오지 등을 순례하며 ‘정신의 원형’을 탐구해온 종교전문기자 조현이 자본주의 방식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한 삶과 그 비결을 담아낸 책으로 돌아왔다.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는 혼자는 외롭고 더불어 살아가자니 괴로운 사람들에게 함께하는 삶의 가치와 행복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 저자는 1999년 대안문명 시리즈로 영국 브루더호프공동체를 신문에 소개하면서부터 최근까지 대안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만든 마을과 공동체를 탐사 취재해왔다. 특히 이 책을 집필하려고 최근 3년간 국내 마을과 공동체를 재방문하여 함께 어울려 살아보았고, 외국 언론들조차도 접근이 어려운 해외 공동체만을 찾아 순례했다.

농사도 짓고, 밥도 해 먹고, 공동체 일자리에서 직접 일도 해보면서 그들의 행복감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비결을 하나하나 파헤쳤다. 재산과 학력 수준, 능력, 체력, 사회성이 달라도, 서로 의지하고 돌보고 협조하고 힘이 되어주고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면서 행복해지고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남녀노소 3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과의 깊이 있는 인터뷰로 담아낸 생생한 사례와 명쾌한 분석, 시원한 통찰은 힘겨운 시대를 견뎌내는 우리들에게 삶의 가치와 방향, 행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목차
프롤로그_왜 지금 마을과 공동체를 이야기하는가

| 1부 | 함께하니 인생이 바뀌었다

1. 함께 어울려 사는 재미
헌 탁구대 하나의 기적
해외여행보다 더 재미있는 마을살이
같이 살면서도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공유 주택

2. 엄마를 해방시킨 품앗이 육아
아이 보느니 힘든 직장인이 낫다
독박 육아가 없는 곳
공동 육아를 하면서부터 내 삶이 생겼다

3. 아이도 어른도 모두 행복한 공동체 교육
실제 삶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교육의 추억
온 마을이 아이들을 키운다
삶과 무관한 무기력한 교육이여, 안녕!

4. 주경야독,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시골살이
동아리만 50개, 귀촌자들이 만든 별난 시골 마을
문화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마을
주경야독으로 새로운 농부의 길을 찾다

5. 돈으로부터의 자유
가진 게 없을수록 함께 살 길을 찾아야
욕망에 사로잡히면 자유로울 수 없다
천혜의 길지에 저비용의 마을을 조성하다

| 2부 | 실낙원을 낙원으로 만든 사람들

1. 달동네에 먼저 달이 뜬다
‘논골마을만들기 추진위원회’ 결성
‘떴다 홍반장’ 마을 프로그램
사랑방이 되는 교회

2. 혁명이 시작된 변방
느린 사람의 속도로 맞추어 사는 곳
대안적인 삶을 실천하다
무소유, 산 위의 삶

3. 우리 마을 희망의 일자리
공동체 안에서 일자리를 찾다
사람이 우선인 일자리

4. 어울려야 치유되는 상처
공감 속에서 살아갈 힘을 얻다
춤, 명상으로 분노를 버리다
심리 문제가 해결되면 유토피아가 열린다

| 3부 | 혼자 살아도 행복해야 한다

1.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로운 이유
맬서스와 도킨스의 인구팽창론은 허구가 되어버렸다
또 하나의 혁명, 포유류에서의 이탈이 시작되었다
외로움은 흡연과 알코올중독만큼 해롭다
고독할 수는 있지만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2. 싱글의 공동체살이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혼삶족들
함께 살면서 배운 것들

| 4부 | 해외 공동체를 가다

1. 병든 개인과 세상의 치유자들
50대 중반, 몸의 반란이 시작되었다
‘컬트’로 비난할 수 없는 공동체 선구자들

2. 환희의 비결은 타인을 위한 삶: 태국 아속
아속의 여러 모습
나누고, 비우고, 실천하는 승려들
포틸락이 선택한 삶
진정한 베풂으로 명소가 된 시사아속

3. ‘나’로 살면 누구나 천재: 인도 오로빌
세계에서 가장 큰 공동체 마을
돈 없이도 배울 수 있다

4. 지상에 만들어가는 천국: 미국 브루더호프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들
사랑과 헌신, 노동이 함께하는 천국
독재의 아픈 역사

5. 불통의 아픈 역사를 딛고 다시 소통하는 사람들: 일본 야마기시
고정관념 없이 열린 자세로 최상의 것을 실현하라
진정한 소통으로 삶을 엮어나가는 사람들

6. 눈치 보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는 꿈: 일본 애즈원
그들은 왜 부유한 공동체를 떠났을까
명령도 강요도 없는 회사, 어머니 도시락
걱정이 없는 애즈원 사람들

에필로그_서로 의지하고 돕고 사랑하기를
부록_‘마을공동체가 궁금해요’ 일문일답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마당은 대저택에만 있는 게 아니다. 진짜 마당은 사람 속에 있다.
P. 14 마을과 공동체가 주는 최대 장점은 노예살이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자본가들의 사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히말라야의 산양들은 설표에게 사냥 당하지 않으려고 천 길 낭떠러지 위만 돌아다니며 생명을 유지한다. 마을이나 공동체는 벼랑 끝은커녕 가장 좋은 환경, 친절한 동지들이 모여 있는,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곳이니 피난처도 그런 피난처가 없다. 마을공동체살이란 부익부 빈익빈과 지구 황폐화를 가속화하는 소비와 환경 파괴에 맞서는 혁명에 가담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만난 마을과 공동체 사람들은 이웃과 어울리느라 인터넷이나 게임이나 텔레비전에 빠져 있을 틈이 없었다. 남한테 으스댈 필요도 없고 사치를 부추기는 마케팅에도 동요되지 않으니 돈을 지출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_ <프롤로그> 중에서  접기
P. 24 두렵고 험난한 세상의 모든 파고를 홀로 넘어야 하는 것만큼 큰 재난은 없다. 개인을 옥죄는 게 자본만은 아니다. 누구나 살면서 몇 번쯤은 사기를 당할 수도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 이럴 때 하소연하고, 도움받을 사람 한 명 없는 세상이 지옥이 아니겠는가. 힘든 일이 있을 때 함께 걱정하고 내 일처럼 나서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 즉 힘겨운 세상에서 내 편인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천국이고 극락이 아니겠는가. 진짜 재난은 쓰나미나 지진이 아니라 몸이 아플 때, 혼자 죽어갈 때조차 모든 고통을 온전히 홀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목숨을 다하는 순간 누군가 곁에 있고, 함께 아파하는 이가 있다는 것만큼 큰 위로가 있겠는가. _ <프롤로그> 중에서  접기
P. 67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연구팀이 13년 동안 영국 등 유럽 10개 국가에 사는 여성 32만여 명의 건강 기록을 분석한 결과, 자녀가 있는 부모가 암 등 중증질환으로 사망할 위험이 20퍼센트나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특히 2~3명 이상의 자녀를 둔 여성의 사망 확률이 더욱 줄었다. 연구팀은 자녀로 인해 호르몬이 변화돼 심장 건강이 좋아지고 암 위험이 낮아지는 것으로 보았다. 연구팀은 자녀를 낳고 행복감이 늘어 이런 결과가 나온 것으로 설명했다. 아이가 주는 행복감이야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도 출산율은 줄고만 있다. 젊은이들은 당장 죽겠는데 미래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먹고사니즘 전쟁의 와중에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젊은이들이 육아까지 감당해야 하는 게 너무도 버겁다. _ <독박 육아가 없는 곳> 중에서  접기
P. 88 공동체는 아이들을 온 마을이 함께 키우기에 얘기가 달라진다. 일단 부모의 욕망으로 자식을 괴롭히는 일이 거의 없다. 아이의 불안은 일차적으로 부모의 불안이 원인이다. 부모의 불행도 아이에게 전가된다. 특히 부모가 불행해서 현재에 살지 못하고, 불안 때문에 미래만을 위해 현재를 희생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자식에게도 ‘그렇게... 더보기
P. 127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쳐서 같은 쪽으로만 끌고 가면 그건 종교 집단이지 공동체라고 볼 수 없어요. 공동체란 생각이 다른 사람들조차도 함께하는 것이지요. 같은 종교끼리만 모이는 것보다 다른 종교인들이 어우러져 서로 좋은 것을 끌어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더 공동체적이지요. 다양한 사람이 모여 의견을 모은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나도 다수에게 부정당할 때가 있어요. 너무 억울해 나무를 주먹으로 친 적도 있지요. 그러면서 ‘나무야, 나무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저 숲을 보라’는 답이 들리는 듯하데요. 숲은 멀리서 보면 평화로워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서로 뒤엉켜 있고, 어떤 것은 웃자라지만 어떤 것은 옹색하게 땅에 붙어 있지요. 숲엔 다양한 식물이 어우러져 있더라고요. 인간 사회인들 어찌 그렇지 않겠어요.” _ <주경야독으로 새로운 농부의 길을 찾다>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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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조현 (지은이)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 및 논설위원이다. 때론 그 굴레조차 벗고 떠도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주로 찾는 곳은 히말라야 설산이나 동굴, 외딴섬…. 벗들과 어울리는 술자리도 좋아한다. 은둔 수도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다른 한쪽으로 마을공동체 사람들과 교유하고 지지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그들 속에 들어가 같이 지낸다. 세상에서 가장 기운이 좋은 수도 터와 성지들을 다니고 최고의 영성가들을 만나 수행하면서 이를 선(禪)적인 글로 풀어내 ‘선사’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2002년엔 휴직한 뒤 1년간 인도 순례를 감행했고, 2016년에도 1년간 히말라야를 트레킹하거나 해외 공동체에서 보냈다.
한겨레신문 사회부, 정치부를 거쳐 1999년부터 영성·치유·깨달음·공동체·대안적 삶에 대한 글을 주로 쓰면서 웰빙과 힐링, 공동체 바람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저서로 데뷔작인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으로 개정)은 2001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책의 날’ 직원들에게 선물한 책으로, 누리꾼들이 뽑은 ‘인문교양도서’ 1위에 선정되었다. 이어 세계 공동체 순례기인 《세계 어디에도 내 집이 있다》를 기획해 펴냈으며, 인도 여행을 다녀와 《영혼의 순례자》(《인도 오지 기행》으로 개정)를 냈다. 숨은 선사들의 발자취를 발굴한 《은둔》이 ‘불교출판문화상’과 ‘올해의 불서상’을, 오지 암자 기행인 《하늘이 감춘 땅》은 ‘불교언론문화상’을 수상했다. 한국 기독교의 숨은 영성가를 발굴한 《울림》은 감신대·서울신학대·장신대·한신대 등 주요 신학대에서 ‘100대 인문교양도서’로 선정되었으며, 역사와 신화의 땅, 그리스를 다녀와서 펴낸 《그리스 인생 학교》는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여름 휴가에 읽을 책’으로 선정했다. 한국출판인회의에서 선정한 ‘우리 시대 대표작가 300인’에 뽑히기도 했다.
2001년 EBS에서 ‘조현 스페셜’이란 제목으로 일주일간 특별 강연을 한 이래 YMCA영성분과위원회, 정신과의사모임, 종교발전포럼, 서울대학병원, 서울시민청, 전주전통문화연수원 등에서 강연을 했다. 영성가·수도자·인문학자 등과 함께 지친 마음을 쉬며 치유할 수 있는 수행·치유 웹진 휴심정(well.hani.co.kr) 운영자이자 함석헌이 창간한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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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사랑하며 춤추라>,<울림> … 총 11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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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노후 수업>,<인생수업 (큰활자본)>,<매일매일 유해화학물질>등 총 47종
대표분야 : 불교 3위 (브랜드 지수 262,960점), 집/인테리어 12위 (브랜드 지수 4,624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대한민국 공동체 18곳, 세계적인 공동체 5곳을
총망라한 단 한 권의 책!!

세상에서 가장 기운이 좋은 수도 터와 성지들을 다니고
최고의 영성가들을 만나 수행하면서 선(禪)적인 글을 써온 종교전문기자 조현!!
3년에 걸친 공동체 탐사 취재와 3백여 명의 깊이 있는 인터뷰로
함께하는 삶의 가치와 행복의 의미를 짚어보다.

자살률, 세계 최고인 나라에서 죽지 못해 산다는 사람들,
금수저의 갑질에 분노하면서도 빈곤층 대우를 받기 싫어하는 사람들,
임대주택 사람들과 한 동네에서 살거나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도 거부하는 사람들,
자신이 약자일 때는 정의의 투사이지만 개인으로 돌아와서는
자신도 모르게 차별하고 박해에 가담해버리는 사람들,
혹 당신도 자본주의에 얽매여 반공동체적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동서양 문화는 물론 인도와 이집트, 이스라엘과 티베트, 중국과 우리나라의 오지 등을 순례하며 ‘정신의 원형’을 탐구해온 종교전문기자 조현이 자본주의 방식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한 삶과 그 비결을 담아낸 책으로 돌아왔다. 신간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는 혼자는 외롭고 더불어 살아가자니 괴로운 사람들에게 함께하는 삶의 가치와 행복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한다. 저자는 1999년 대안문명 시리즈로 영국 브루더호프공동체를 신문에 소개하면서부터 최근까지 대안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만든 마을과 공동체를 탐사 취재해왔다. 특히 이 책을 집필하려고 최근 3년간 국내 마을과 공동체를 재방문하여 함께 어울려 살아보았고, 외국 언론들조차도 접근이 어려운 해외 공동체만을 찾아 순례했다. 농사도 짓고, 밥도 해 먹고, 공동체 일자리에서 직접 일도 해보면서 그들의 행복감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지 그 비결을 하나하나 파헤쳤다. 재산과 학력 수준, 능력, 체력, 사회성이 달라도, 서로 의지하고 돌보고 협조하고 힘이 되어주고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면서 행복해지고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남녀노소 3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과의 깊이 있는 인터뷰로 담아낸 생생한 사례와 명쾌한 분석, 시원한 통찰은 힘겨운 시대를 견뎌내는 우리들에게 삶의 가치와 방향, 행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마을이나 공동체를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서로 의지하고 돌보고 협조하고 힘이 되어주고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면서 행복해지고 강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출세하고 부자 되지 않아도 행복한 마을,
힘겨운 세상에서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

보통 공동체라고 하면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대안적 삶을 실천하기 위해 만든 마을을 말한다. 그런데 요즘은 땅 값이 비싼 현실을 고려해 새로운 형태의 마을이 생겨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국내의 마을과 공동체 18곳부터 소개했다. 기존 마을을 좀 더 사이좋고 재미있는 마을로 변화시킨 ‘전환 마을’과 도시에서 열 집 정도가 함께 집을 지어 사는 ‘공유 주택’, 그리고 뜻 맞는 사람들이 시골로 내려가 만든 공동체를 두루 살펴본다. 서울의 ‘은혜공동체’ ‘소행주 1호’ ‘은평 전환마을’ ‘밝은누리공동체’, 경기의 ‘마을 카페 다락’ ‘논골마을’ ‘공방골목’ ‘더불어숲동산교회’, 경남의 ‘민들레공동체’ ‘성모울타리공동체’ ‘오두막공동체’, 충남의 ‘시온교회’ ‘갓골’, 충북의 ‘산 위의 마을’ ‘선애빌’, 인천의 ‘창문카페’, 광주의 ‘신흥마을’, 전북의 ‘실상사’ 등 공동체의 삶과 특징,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냈다.
이어 실험적인 해외 공동체 5곳, 즉 태국의 5개 아속, 인도의 오로빌, 미국의 브루더호프 4곳, 일본의 야마기시 2곳과 애즈원을 순례하면서 그들이 행복한 이유와 함께하는 삶의 가치를 추적해보았다. 특히 아속은 저자가 자신의 지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하고자 떠난 곳이기도 하다. 아속에서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아유르베딕 자연 치유법으로 유명한 인도 오로빌까지 방문했다. 치유 순례가 공동체 순례로 이어진 것이다. 이 책에서 언급한 해외 대안 공동체 대부분이 새로운 가치와 삶을 추구하면서 인간?사회 실험을 하고 있기에 자칫 이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그들 덕분에 우리가 시행착오를 덜 겪으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욕망과 집착을 놓아버리고 삶의 가치관을 달리한 그들의 삶에서 우리는 물질의 힘이 아닌 마음의 힘을 엿볼 수 있다.
공동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함께 산다는 것’은 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삶의 여유와 재미를 주고, 실직이나 힘든 일을 당했을 때도 내 일처럼 해결해주며, 적게 쓰면서도 몇 배의 효과를 누리는 경제적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 만족도가 높다고. 무엇보다 어디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치유와 살맛을 줘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의 행복도를 경험케 한다고 말이다.
앞으로 수십 년의 노년을 홀로 살아가고, 고독사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질 것이다. 이 책은 고립되어 살아가는 게 얼마나 위태로운지, 함께하는 삶이 얼마나 많은 이로움이 있고 행복해지는 길인지, 얼마나 세상에 도움이 되는 길인지 깨닫게 한다. 출세하고 부자 되지 않아도 행복한 마을(공동체), 힘겨운 세상에서 언제나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을 통해 한 번쯤 ‘다른 삶’을 꿈꾸게 한다. 또 우리는 주거, 비혼, 출산, 육아, 교육 등 우리 사회의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의 실마리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간디는 ‘마을공동체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했다.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마을공동체의 생생한 모습과 증언이 이 난제 해결에 영감을 줄 것이다.

“이 책은 혼자나 둘, 혹은 가족들끼리만의 울타리를 낮추고
이웃과 함께 어울려 사는 이야기다.
행복의 길은 ‘돌봄’과 ‘친밀’에 있었다.”

■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로운 사람들을 위한 마을공동체

우리나라에서 도시 지역 거주 비율은 1960년대엔 40퍼센트 미만이었으나 1990년에는 81.95퍼센트, 2017년엔 91.82퍼센트로 늘었다. 농촌 마을에서는 부모가 농사일이나 다른 일을 하더라도 많은 형제자매와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고모, 친척,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 형, 누나 등 제2, 제3의 안전망이 있었다. 엄마가 아니더라도 아이를 지켜보는 대가족과 마당이라는 천연의 안전망이 있었다. 이 안전망이 엄마의 육아 부담을 덜게 했다. 그러나 엄마와 대가족을 빼앗긴 채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한 이들은 분리공포를 느끼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 관계를 회피하고, 이로 인해 타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도 힘들어한다. 그래서 홀로 있어도, 함께 있어도 괴로워지는 것이다. 저자는 만약 어른이 되어서라도 엄마를 대신할 수 있는 공동체를 안전기지 삼는다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충분히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마음을 열고 관계 맺기에 나설 수 있고, 결혼과 출산할 용기 및 자신감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가 사는 것이 국가가 사는 길인 셈이다. 직장맘과 아이를 위해서라도 사회적 엄마인 마을공동체가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 늘 함께하니 외롭지 않은 ‘혼삶족’

서울시가 1인 가구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대체로 혼삶에 만족하지만, 10명 가운데 6명이 경제적 문제로 고민했다. 26.2퍼센트는 건강을, 25.8퍼센트는 노후 생활을 걱정했다. 젊은 시절엔 건강하고 활동력이 있어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아도 어느 정도 화려한 싱글로 살아갈 수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꿈과는 멀어져가는 게 싱글의 현실이다.
요새 싱글과 돌싱 등 이른바 다양한 사람을 껴안는 공동체가 생겨나고 있다. 혼삶족도 친구나 이웃의 필요가 절실한 만큼 공유 주택에도 관심이 커지고 있다. 싱글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왕따를 당해서도, 공동체에서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소행주에는 여자 싱글들끼리 모여 사는 집이 있는가 하면, 성소수자들끼리 살아가는 집도 있다. 요즘은 이혼율이 높아 한부모가정도 많다. 은혜공동체는 남성 싱글 넷, 여성 싱글 넷, 돌싱 가족 등 15명이 집 세 채를 얻어 공동체 가정을 꾸렸다. 이후 도봉동 은혜공동체 공유 주택에 2017년 입주하여 50명가량의 대식구와 한 집에서 공동체살이를 한다. 다수의 싱글과 동거 커플, 이혼 가정 등 다양한 사람이 공동체 품에서 함께한다. 밝은누리공동체는 멤버 150명 가운데 35명이 싱글이다. 싱글 서너 명이 한 방에서 한몸살이한다. 남은 방은 서재나 휴식 방, 옷 방으로 공유한다. 거실과 부엌은 말할 것도 없다.

■ 독박 육아가 없고
삶의 여백을 가르치는 공동체 교육

공동체는 온 마을이 아이들을 키운다. 부모의 욕망으로 자식을 괴롭히지 않는다. 삶을 즐길 줄 알고, 사람들과 어울릴 줄 알고, 일상생활을 스스로 해나가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은혜공동체는 아이들의 천국이다. 부모들이 당번제로 공동 육아를 하면서부터 자신의 삶을 즐기게 되었다. 아이들은 홈스쿨로 공부하고 스스로 많은 것을 결정한다. 누구에게나 ‘삶의 멘토’인 목자가 있어 든든함도 더한다. 밝은누리공동체엔 독박 육아가 없다. 아빠도 엄마와 동등한 부모로서 육아의 주체자다. 당번이 아닌 부모는 산책을 하거나 차를 마시거나 독서, 음악을 즐긴다. 모두 육아 품앗이 덕분이다. 조금 더 큰 아이들은 살구나무배움터, 감나무배움터, 생동중학교, 삼일학림 등 비인가학교에서 배운다. 이곳 학생들에게 학문과 삶은 별개가 아니다. 집짓기, 농사, 태극권, 철학과 수신, 마음 닦기 등 실제적이다. 소행주는 ‘우리어린이집’을 만들어 공동 육아를 시작했고, 아이들을 거의 학원에 보내지 않는다. 배울수록 오히려 불안은 증폭될 뿐이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할 필요가 없다는 가치관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 문화가 살아 숨 쉬고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골살이

전북 산내면은 귀촌자들이 만든 별난 시골 마을이다. 공부와 책읽기, 명상과 요리, 여러 운동, 술 만들기, 목공 등 모임이 50여 개나 있다. 모든 것이 그물방처럼 연결돼 있다는 ‘인드라망’ 사상에 따라 움직이는 공동체다. 충남 천북면에는 폐교될 뻔한 낙동초등학교 어린이 26명 전원이 오케스트라 단원이 됐고, 어부와 할머니들이 바리스타가 되었다. 먹거리를 퍼주는 축제가 열리며, 이 희한한 마을들을 돌아보려는 여행객이 생겨났다. 충남 홍성 갓골에선 사람들이 서넛만 모여도 우리 마을에서 ‘이게 필요하지 않을까’라며 협동조합을 만들어낸다. 흙건축얼렁뚱땅조합, 목공실, 빵집 등 협동조합만 30여 개다. 이곳은 친환경농업의 메카로 자리 잡은 풀무학교 덕에 귀촌자들이 늘었고, 사시사철 좋은 강좌와 공연 프로그램이 끊이지 않는 밝맑도서관 덕분에 시골에 살아도 문화적 갈증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시골로 가면 돈벌이는 줄지만 소비에서 벗어나 적은 돈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타인과 살아낼 품성과 태도만 갖추고 적절한 노동력이 있다면 어디서든 환영받는다. 선애빌은 별로 가진 게 없더라도 뜻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가는 곳이다. 생태적인 삶으로 비용을 아낄 뿐 아니라 공동체원들 모두 함께 식사하여 생활비도 줄이고 즐거움은 더한다.

■ 노후 불안이 없고
상처마저 치유되는 마음의 유토피아

노후 준비에 목매다가 현재를 살아보지 못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공동체가 주는 큰 혜택이다. 2010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은 미국인 45만 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연봉 7만 5000달러(약 8천만 원)까지는 소득 증가만큼 행복도도 증가하지만, 그 이상은 연봉이 높아진다고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인간의 행복엔 돈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얘기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제시하지 못했지만 공동체의 삶은 좀 더 분명히 이를 실증한다. ‘늘 함께 공유하며 산다면’ 7만 5천 달러의 절반이나 3분의 1로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공동체원들은 말한다.
공동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공동체의 주요 기능의 하나로 치유를 꼽는다. 자신을 꽁꽁 닫아둔 채로는 공동체에서 살아갈 수 없기에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해결된 거나 다름없다. 또 자기 역할과 쓰임새를 찾을 수 있다. 공동체가 치유력을 지니는 것은 사랑이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공동체 자체가 소통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누군가 힘든 속내를 꺼내놓으면 서로 공감하고 지지하며 조언도 해주고, 소그룹 토론과 심리 상담을 통해 관계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나 갈등을 해결한다. 개인은 타인과 관계를 어렵게 하는 심리 문제들을 안고 있게 마련이고, 이를 넘어서야 유토피아가 가능해진다고 믿는다.

■ ‘컬트’로 비난할 수 없는 세상의 치유자들

외국에서 공동체라고 할 때는 자연 마을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함께 모여 사는 마을을 말한다.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자본주의 삶의 잔인성과 파괴성을 보고 대안을 선택해 사는 마을이다. 대부분 남다른 가치하에 모여 사유재산도 가지지 않은 채 한 가족처럼 살아간다. 특히 이 책에서 소개한 태국의 아속이나 미국의 브루더호프 같은 공동체는 매우 이상적일 수 있다. 하지만 공동체를 시작한 이들은 우리가 결단하지 못할 때 결단했고, 인간?사회 실험을 앞장서 행한 선구자이므로 ‘컬트’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경애의 마음으로 배워야 한다.
아무 대가 없이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태국의 아속, 세계에서 가장 큰 공동체 마을 인도의 오로빌, 사랑과 헌신 그리고 노동이 함께하는 천국 미국의 브루더호프, 진정한 소통으로 삶을 엮어나가는 일본의 야마기시, 눈치 보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는 일본의 애즈원까지 그들의 혁명적이 삶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외 공동체들은 정서적 좌절감을 채워줄 만큼 화려해 이상향이 아니라, 그런 욕망과 집착조차 놓아버리고 삶의 가치관을 달리 했기에 이상향이 되었다. 이상향은 장소라기보다 ‘삶의 목표를 어디다 두느냐’ 그 가치관에 있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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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밉다면 읽어야할 책. 자신이 밉다면 더욱 읽어야할 책. 고립이 두렵지만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하는것이 더욱 두렵다면 더더욱...  구매
조아조아 2018-08-18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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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살기로 했는가? 새창으로 보기 구매
 

저는 소설보다는 위인전을, 드라마보다는 다큐나 강좌프로그램을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리고, 글도 어떤 스토리 라인이 있는 글보다는 묵직한 깨우침을 주는 고전에 더 큰 매력들을 느끼는 편입니다. 어떻게 보면, 깊은 잠언의 글들 속에서 희열을 누리고자 하는 것의 현재의 저의 성향인 듯 합니다.

 

그런데 이런 저의 성향과 달리,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에서 보여지는 내용들은 어떻게 보면 기행답사글 같기도 해서, 쭉 책페이지를 훑어서 보는 처음엔, 저에게 그렇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어 나가면서, 생각이 달라짐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책이 전하는 문제의식과 질문들은 오늘 2018년,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살아가는 ‘저’ 개인의 삶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고, ‘나’라면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 책은 그러한 부분들을 간파한 것 마냥 이런 문제의식들을 담은 해법의 주제들을 장(chapter)별로 나누어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그 안에서 단순한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이라는 가설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렇게 하고 있어’, ‘...저렇게 하고 있어!’ 라고 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그들, 즉, ‘다른’ 대안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의 ‘실제’를 담아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인상적인 것은 처음엔 ‘기행’의 글처럼 읽히던 이 책이, 어느새 ‘잠언’과 같은 깨달음의 언어들로 다가온다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사건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그동안 저자의 기행이 단순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여겨집니다. 이 책을 쓴 저자의 기행은 단순한 물리적인 여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삶을 향한 여정이고, 그 삶의 대안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삶의 길과 깨우침의 길로 안내하고 있는 여정인지라, 읽는 이로 하여금 이러한 독특한 감흥을 주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다른 분들의 생각까지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책을 대하는 저에겐 그렇습니다.

 

특히 책의 뒷부분에 1나오는 내용중, 많은 이 땅의 성공했다고 하는 대기업출신의 임원들도 혹은 세상에서 내노라 했던 이들 역시 자신들의 삶의 구조적 한계를 느끼면서도 어떻게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그 안타까움에 대한 폭로는(pp.294~297) 젊은 우리에게 삶의 대안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호소하는 웅변처럼 들려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왜 책의 제목이,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인지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살기로 했다.’라는 결단의 문장으로, 책의 제목이 지어졌는지를... .

 

대안은 머리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이뤄진다는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그 진실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알리면서 동시에, 당신도 삶으로 그 첫발을 떼라고 독촉하고 있는 독촉장으로 오늘 우리의 두 손에 이 책이 쥐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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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호 2018-08-30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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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불안한 싱글에게 새로운 삶의 힌트를 새창으로 보기 구매
싱글이라, 한번씩, 나이 들어서도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혼자 살자니 외롭고 고독사가 두렵고, 함께 살자니 피곤한 사람...이라는 부제가 끌려 책을 샀다. 싱글들이나 돌싱들이 마을공동체에 합류해 고립되지 않고 어울리며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어울리는 새로운 삶을 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공동체라는 것이 좀 유별나고 무슨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런 거창하거나 유별난 것이 아니라 독박육아에 지치지 않고, 자유를 포기하지 않고, 노후 걱정도 크지 않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원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이 와 닿았다. 노인인구도 많아지고, 1인가구도 많아지고, 아이를 키우기도 어려운 시대에 삶에 중요한 힌트가 될 것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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쮸쮸바 2018-08-15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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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살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새창으로 보기 구매
프롤로그를 읽던 중 이 시대 한국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를 묘사한 부분이 인상 깊었습니다. 마치 저의 이야기를 보는 듯 했습니다.
'1층부터 10층까지 욕망을 켜켜이 쌓고 옥상 위에 천국조차 얹고 싶어 하는, 참 못 말리는 한국인'

하지만 그 욕망 조차도 자기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조작된 것임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자본은 대가족과 마을공동체를 적극적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해체시켜왔습니다. 흩어져야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더 팔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목은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이지만, 공동체로 사는 것, 마을로 모여서 사는 것은 인간이 가장 잘 살 수 있는 본래부터 그러했던 방법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생각듭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불안이 조장된 사회에서는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조현 기자님은 독자의 입장에서 30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지만 기자님은 전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공동체로 마을로 살고 있고, 잠시가 아니라 계속 이어지고 있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기자님께서 많은 내용 담으려 노력하셨다는 것이 보입니다. 이만한 사례를 이렇게 담았던 책은 아직까지는 없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책으로 담기에 공동체의 삶은 너무 풍성합니다. 책을 읽은 분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공동체를 찾아가서 실제로 확인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르게 살겠다는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다른 삶은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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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 고레스 2018-08-3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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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의 필독서 (손나 간지데스) 새창으로 보기 구매
알고도 바꿀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 중 끝판왕이 아닐까 싶다.
자본주의, 개인주의, 이기주의.
너머로 삶을 이끈다는 것 말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 그 윗세대까지는 그래도 똥꼬 찢어지게 가난해도 마을공동체가 기반이 되어 안정망이 되어주는 경우가 꽤나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지방에 놀러갔을 때 그 곳 사는 어르신들로부터 예상하지 않았던 인심과 순박한 정서에 내내 가슴이 따뜻했던 경험이 있다.
우리도 공동체가 있었다. 한 마을이 아이를 키우고, 스펙이 중요하지 않고 왕따가 없으며 친구들과 학창시절 우정을 나누고, 이웃간 품앗이를 하고 음식을 나누며 함께 살았던 마을.
지금은 내가 제일 중요하고, 남들과 경쟁해서 이겨야하고, 남들보다 더 잘살아야 하며 스펙을 쌓고 노후를 대비해야한다는 관념 속에 산다. 삶은 피폐해지고, 공허할 수밖에 없다. 나만 잘되길 바라며 남을 짓밝고 올라가는 삶 속에서 내 편이 있을 수 없다. 우리 가족만 잘살면 된다는 이기적인 가족공동체는 결코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가 될 수 없다.
조현 기자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러한 덫에서 벗어나 행복으로 삶을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하여 여러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공동체가 살아가는 모습이 다채롭고 평화로워 절로 웃음이 지어진다.
고정관념을 깨버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은 분에게 강추 강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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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이 2018-08-2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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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늦기 전에 새창으로 보기 구매
 누군가. 내일이면 늦으리라고 했다던가. 누군가는 묘비명에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지'라고 썼다고. 내 꼴이 그렇겠지. 이렇게 인간들을 두려워하고만 있다가, 사람들에게 염증만 내다가, 그냥 딱 골방에서 홀로 고독사 당하기 십상이지.

 거봐.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 나보다 하나도 나을 게 없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 그들도 부모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상처 받은 영혼이긴 마찬가지. 다만 나처럼 숨어들지 않고, 쪼금의 용기를 내어 사람들과 좀 더 어울리기 시작했을 뿐.

그런데 이렇게 삶이 달려져버렸다니. 돈 못벌면 그냥 죽은 목숨인줄 알았는데, 마을공동체가 살아있는 곳으로 들어가니, 돈이 없어도, 실직했어도, 혼자 살아도, 이혼했어도, 늙어도, 병들어도, 꼭 유럽같은 최고수준의 복지국가가 아니어도 서로 서로 보듬고 위로하고 도우며 살아갈 길이 있다는 것을...

 

 감동이다. 우리의 상처 트라우마도 사람에게서 온 것이지만, 결국 사람, 이웃이 희망임을. 조금 용기를 내어 함께 해보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이 부익부빈익빈, 불안을 조장하는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함께 하면 좀 벌어도, 좀 쳐저도, 병들어도, 노후가 와도 얼마나 안심할수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들, 마을들, 사람들의 수많은 실제 실명 증언들. 나도 더 늦기 전에 뭔가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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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조아 2018-08-18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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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30

Biocracy: Public Policy and the life Sciences Caldwell, Lynton Keith: Books

Amazon.com: Biocracy: Public Policy and the life Sciences (9780367013844): Caldwell, Lynton Keith: Books

Biocracy, a term invented by physiologist Walter Bradford Cannon, refers to the influence of biological science on society and its public policies. 

Beginning with the prophetic essay “Biopolitics: Science, Ethics, and Public Policy,†this book addresses various aspects of the relationships among the life sciences, society, and government. 

Included in the topics considered are some of the more critical issues of our time: 
the social responses to life science innovations; 
health and homeostasis as social concepts; 
the relationship between history and biology and that between the life sciences and the law; 
biocratic interpretations of ethical behavior and biopolitical conflicts; 
and the options, risks, and international consequences of biotechnology. 

Caldwell’s book is a collection of articles that he wrote on this subject over a period of twenty-five years. Of the ten chapters, four have previously appeared in scholarly journals but have undergone extensive editorial revisions appropriate to this publication. The remaining six chapters have been presented at various professional meetings but have not hitherto been available in print.

[Sejin님의 서재] 이은선

[Sejin님의 서재] "책과 통하는 블로그, 알라딘 서재!"

선생님의 책 두권은 가지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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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생물권 정치학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 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대화 속에서
이은선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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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 한국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이은선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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