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1

초기불교 공부 |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대승불교의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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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 대승불교의 정체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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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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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봄 〈법보신문〉의 지면을 통해 전개되었던 ‘초기-대승불교의 정체성 논쟁’은 몇 가지 점에서 매우 유익한 논쟁이었다. 첫째는 불교계 내의 가장 민감한 교리적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공론화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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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이를 계기로 앞으로 불교학계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이를 계기로 진지한 학자들과 일반 불자들이 한국불교의 문제점에 대해 공석과 사석에서 토론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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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무엇이 불교적이고 정법에 근거하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보다 깊게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온갖 비불교적 요소가 판을 치는 불교계 현실을 감안할 때 현재보다는 미래의 성과가 더욱 기대된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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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논쟁은 전개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낸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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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처음에 보여주었던 논점의 진지함이 논쟁이 과열됨에 따라 주제 자체보다는 인신공격으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로 인해 논쟁에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해서 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아쉽게 종결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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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논쟁의 마당을 제공하고 이끌었던 (법보신문〉이 논쟁을 마무리하면서 사설을 통해 마녀 재판식 결론을 내린 것은 매우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과민하게 받아들이는 것인지는 모르나 그 사설은 논쟁이라는 형식을 빌어 〈법보신문〉이 의도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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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논쟁을 주의 깊게 지켜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논쟁은 결코 아직 승패가 가려진 것이 아니다. 이제 겨우 논의의 주제가 설정된 단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지금까지 논의되어 왔던 주제를 하나하나 정리하고 재검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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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정을 통해 어느 쪽의 주장이 옳고 그른지, 그리고 어느 쪽의 주장이 미래의 한국불교 발전에 보다 도움이 되는 견해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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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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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논의된 주요 주제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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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이 문제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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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논쟁은 동국대 불교학과 김용표 교수의 기고문으로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이 즉각 반론을 제기했다.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이번 논쟁의 주된 쟁점은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에 관한 것이었다.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김용표의 지적처럼, 역사적·철학적·해석학적 통찰이 필요한 난제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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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교의 정통성과 정법의 기준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 혹은 초기불교에서 찾으려는 흐름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이유는 불교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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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성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불교의 정신은 행동하는 지성으로서의 역사적인 붓다의 삶 속에서만 드러난다. …… 초기불교라든가 대승불교라든가 하는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적인 붓다의 삶이라는 사건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라고 단정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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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어떤 형태의 불교이든지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석가모니불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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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역사적으로 후대에 성립된 대승불교가 정법의 기준이라도 되는 듯한 기술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정법의 잣대란 원래의 불교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 순리이지, 거꾸로 현재의 잣대로 원래의 불교를 진단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사상사(思想史)의 흐름에도 역행되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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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김성철 교수는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논리적 귀결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속에는 분명 초기불교를 낮추어 보는 대승불교 전통의 편향된 시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답습하고 있다. 즉 초기불교는 불완전하고 미완성이었는데, 대승불교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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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각은 중국에서 고안된 종파적인 교판론(敎判論)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근거가 되는 교판론은 전혀 역사적 사실이 아님이 밝혀진 지 이미 오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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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에도 역사의 개념이 도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스다니 후미오가 지적했듯이, 역사의 개념을 전적으로 무시한 교상판석(敎相判釋)에 근거한 작업은 모두가 그릇된 전제 위에 선 것이다. 그런 전제가 신기루처럼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되었기에 그러한 교상판석에 근거한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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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아직도 인도불교는 서론에, 중국불교는 본론에, 한국불교는 결론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전통을 계승한 상좌불교도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붓다로부터 2,50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단절된 적이 없는 종갓집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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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기들이 신봉하는 불교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기 중심의 호교론적 입장은 두 전통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계속된 충돌만 있을 뿐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준호가 제시한 “초기불교는 초기불교로서 대승불교는 대승불교로서 각각 ‘불교의 귀결’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서로 조정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맥락은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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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바라보는 각도가 다를 뿐 동일한 목적지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주명철의 지적처럼, “오히려 대승불교는 세존의 깨달음과 자비의 가르침의 정신을 더욱 충실히 실천하였지 진리를 부정하거나 존재를 부정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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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도 이 점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대승불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른 초기 불교주의자들도 초기불교만이 진리이고, 대승불교는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계의 모든 불교가 초기불교의 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주장한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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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필자는, 현재의 한국불교가 그 원래의 대승불교에서 많이 일탈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초기불교 지상주의를 건설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점에서 완전히 초기불교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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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주장은, 지금 이 시점에서 부처님의 불교, 즉 붓다의 본래 정신을 가능한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초기불교적 전통과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현재의 상좌불교도 원래의 초기불교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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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필자는 부처님의 불교를 하자는 것이지, 남방 상좌부 불교를 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상좌불교도들도 교단이 어지러울 때에는 언제나 원래의 불교 모습으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한다. 불교의 정통성과 기준은 오직 석가모니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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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 흥기의 배경도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지 않은가! 부파불교가 사회적 실천이라는 붓다의 근본 정신을 외면했기 때문에 원래의 붓다 정신으로 되돌아가자는 외침이 대승불교 운동이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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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현재의 한국불교 현상들은 오히려 그러한 대승불교의 본질 혹은 정신을 크게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붓다의 원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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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를 강조하는 것은 대승불교를 똑바로 잘하기 위함이다.”라고 필자가 주장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그러한 취지에서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를 정법(正法)의 토대로 더욱 굳건히 올려놓기 위해 붓다로 돌아가자고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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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필자가 부처님의 불교를 생각해 보자고 제의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잘못된 것인 양 매도하려는 분위기는 그저 당혹스러울 뿐이다. 붓다로 돌아가자는 것이 과연 큰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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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는 정당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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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제는 대승불교의 경전관(經典觀)에 관한 문제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쟁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떠한 일방적인 입장으로의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그 자체를 논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리고 현재 상황에서 대승경전 전체를 비불설이라고 완전히 배제한다거나 부정하는 것도 편견에 빠질 염려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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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금까지 대승경전의 비불설을 주장한 적이 없다. 그리고 대승경전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도 않는다. 대승경전은 비록 붓다의 친설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상적으로 매우 훌륭한 측면이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을 드러낸 부분도 있는 것이다. 김성철의 주장과 같이 대승불전이 초기불전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도 필자는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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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대승경전과 관련하여 홍사성이 주장한 내용은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는 이 시점에서 새롭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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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이해했다”라고 정직하게 말하지 않고,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고 함으로써 붓다의 친설과 자신의 설을 구별하지 않은 것은 지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대승경전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찬술자들의 부정직한 태도를 지적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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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마치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으로 가탁(假託)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대승불교의 성립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종교사학적으로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그 자체는 한 번도 논의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여러 차례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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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 진현종과 김성철은 크게 반박하고 있다. 진현종은 나의 깨달음과 부처님의 깨달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대승불전 찬술자들의 태도에 오히려 치하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붓다와 그 제자의 관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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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붓다도 아라한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포함시켰다. 즉 불교교단에서 붓다는 첫번째 아라한(阿羅漢)이었다. 그는 어떠한 구별도 없이 다른 아라한들과 같이 한 명의 아라한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이 최초로 고타마의 가르침에 귀의한 다섯 고행자(pan?avaggiya)의 개종 이후, 붓다를 그들 중의 하나로 계산하여 당시 세상에는 여섯 아라한이 있었다고 진술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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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후대에 오면 처음 깨달음을 이룬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의해 나중에 깨달음을 이룬 제자와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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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깨달았다는 점에서는 아라한과 동등하다고 말했다. 단지 다른 점은 붓다는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개척한 선구자인데 반해서, 아라한들은 붓다가 밟았던 길을 따라서 같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아라한들은 붓다누붓다(buddha ubuddha), 즉 완전히 깨달은 자(正等覺者) 다음에 깨달음에 도달했던 사람들이라고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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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 제자가 스승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할지라도 스승과 동등하다고 자만한 흔적은 초기경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깨달음을 이룬 뒤에도 제자들은 한결같이 붓다를 스승으로 모시고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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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상수 제자였던 사리뿟따(Sariputta, 舍利弗)는 “그리고 존자시여, 제자들은 지금 길을 쫓아서 나중에 그 길을 구현하는 자로 살 것입니다”라고 했다. 비록 사리뿟따는 당시에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스승에 대한 존경의 예는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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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후대의 대승경전 찬술자들은 석가모니불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전들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행위와 태도가 진현종의 주장처럼 겸손해서 그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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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이 출현하기 이전에도 논장(論藏, Abhidhamma Pit.aka)은 있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논장은 기원전 3세기경 제3결집 때, 목갈리뿟따-띳사(Moggaliputta-tissa) 장로에 의해 편찬된 《논사(論事, Kathayatthu)》로 알려져 있다. 이때 비로소 경·율·논 삼장이 성립되었다. 그후 부처님의 제자들은 자신이 이해한 견해들을 논서로 저술하여 후세에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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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직 대승경전 찬술자들만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함에 있어서 논서의 저술가로 이름을 남기지 않고,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이라고 가탁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당시의 부파교단에서 강력히 반발하였을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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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부파교도들은 ‘대승은 악마의 설’이라고까지 반박하였다. 이에 대해 대승교도들은 ‘부처님은 한 목소리로 설법하셨는데 대중이 여러 가지로 이해했다(一音異解)’며 대승이 부처님의 말씀임을 논증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설은 《유마경》에서 역설한 것인데, 원래는 대중부(大衆部)에서 부처님의 신통자재한 덕을 찬양하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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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부파교도들이 대승경전 찬술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극심하게 비난했던 증거들이 오히려 대승경전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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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대승의 설이야말로 부처님의 진설(眞說)이므로 부파교도들의 반발과 주장에 동요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이 그대로 대승경전 속에 기록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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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대승경전 찬술자들이 대승경전을 논서로 남겨두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불설·비불설 논쟁은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을 홍사성이 지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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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김성철은 지금도 계속적으로 대승경전을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마스다니 후미오가 그의 저서 《불교개론》에서 현대에서도 새로운 경전이 생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은 위경(僞經)을 계속 생산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불교의 새로운 사상을 끊임없이 전개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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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후대의 불제자들이 더 많은 논소(論疏)와 주석서들을 저술하여 불교사상을 보다 풍부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마스다니 후미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지, 김성철은 대승경전을 2000년 동안 만들지 못한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생각하고 참회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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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의 주장대로 후대의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대승경전을 만들어 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불경의 의미는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이 자칭 깨달았다고 말하고, 궤변을 늘어놓아도 불설이 된다. 이렇게 계속해서 불경을 만들어낸다면 나중에 불설과 비불설을 누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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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경전을 옹호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지금도 논소(論疏)나 주석서가 아닌 대승경전을 계속 만들어내자는 것은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인도와 중국에서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불설을 빙자한 위경(僞經)들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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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역사적 실증주의는 과연 잘못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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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불교학의 연구는 정말 잘못된 것인가? 진현종은, 실증주의와 합리주의는 그 본산지에서조차 이미 박살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실증주의는 사견과 망설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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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친설은 초기불전에서도 신고층(新古層)이 있기 때문에 구분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이미 실증주의와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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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역사적 실증주의를 배제하면 불교학은 물론 학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쟁 자체도 성립되지 않는다. 이러한 논쟁도 어느 쪽의 주장이 더욱 더 역사적 진실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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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서구 불교학의 출발은 호교론적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다. 초기의 서구 불교학자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부이거나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지배를 보다 확대하거나 공고히 하기 위해 인도학 불교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철저한 문헌비평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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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현대의 불교학이다. 초기경전 가운데 신·고층이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연구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초기경전에 신·고층이 있다는 진현종의 주장 자체가 이미 역사적 실증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논리적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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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과학적이라는 것은 학계의 정설이다. 불교의 특질 가운데 하나가 합리성과 미신의 배제이다.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은 “불교에는 불합리한 미신적인 요소는 하나도 없다. 또 수행의 방법도 단계적인 순서를 좇아 합리적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른 종교의 학설에서 그에 비견될 만한 것을 볼 수 없는 바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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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철은 “석존은 합리적이라기보다는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라고 했다. 또한 그는 “대승불교는 석존의 명상적이고 신비적인 면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그는 붓다를 비밀교의를 펼쳤던 신비주의자로, 그리고 대승불교를 신비주의로 이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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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의 불교관은 자칫 불교를 신비주의로 이해하는 부류와 기복신앙을 조장하려는 부류에 편승하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의혹을 배제할 수 없다. 진현종은 부처님 자신도 실증주의적 입장을 거부했다고 했다. 이와 같은 주장을 거리낌없이 내두르고 있는 데에 그저 할 말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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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부처님은 합리주의와 실증주의를 부정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반적으로 부처님은 실증주의에 바탕을 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는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닌 현실주의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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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먼저,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어느 편이냐 하면, 불교는 현실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므로 현실주의적이다. 불교는 사물을 객관적으로 본다(如實知見). 불교는 헛된 기대 속에 살도록 우리들을 거짓으로 달래지도 않고, 온갖 종류의 가상의 공포와 죄책감으로 우리들을 놀라게 하거나 괴롭게 만들지 않는다. 불교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주변 세계는 어떠한지를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주며, 또한 완전한 자유, 평화, 평안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길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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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붓다는 언제나 실증할 수 없는 것, 즉 진위(眞僞) 여부를 가릴 수 없는 사후(死後)에 관한 일이라든가 미래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결코 말한 적이 없다. 붓다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가들의 주장과는 달라서 현실적으로 증명되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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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다. 즉 이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능히 열반에 인도하는 것, 또 지혜 있는 이가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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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용문은 초기경전 여러 곳에서 되풀이되는 정형구로서,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적 성격을 아주 간단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붓다 가르침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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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존귀한 자에 의하여 잘 설해진 가르침(世尊善說法), 즉 ‘표현의 명료성(善說)이다.
- 두번째의 특징은, 경험적인 내용(現見)이라는 점이다.
- 세번째의 특징은, 특정한 시간에 제한되지 않는 것(非時間的)이다.
- 네번째 특징은, 검증 가능성(ehipassika, 來見)이다.
- 다섯번째 특징은,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생활 조건(즉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은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 종교생활의 최종적인 목표나 효과(paramat.t.ha, 勝義)가 된다는 점이다.
- 여섯번째 특징은, 스스로 경험되는 것(paccattam. veditabbo, 自證)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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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둘째, 셋째, 넷째의 세 가지 항목은 붓다의 가르침이 리얼리스트(realist)의 사상이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마스다니 후미오는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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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붓다의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붓다가 설한 것은 모두가 인생의 현실 문제였으므로, 누구라도 편견 없는 눈으로 그 진상을 관찰한다면 그것이 헛되지 않음을 볼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붓다는 결코 환상을 말하지 않았다. 붓다는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또한 붓다의 법은 비밀리에 비밀법을 전한 것도 아니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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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a?arinibba?a-sutta)》에서 그는 상가(Sangha, 僧團)를 통제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고, 상가가 그에게 의지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가르침에는 비전(秘傳)의 교설은 없으며, ‘스승의 꽉 쥔 주먹(Ayariya-mut.t.hi, 師拳)’에 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몰래 준비한 어느 것도 결코 없다고 붓다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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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히 말해서 원래의 불교에는 비밀리에 법을 전해준다는 따위의 신비적인 요소는 전혀 없다. 그러나 후대의 불교에 오면 신비적인 요소가 가미된다. 이에 대해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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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전수되는 것 중에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적인 것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승과 제자간의 관계나 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교육의 본성이 불교에 관한 아주 최근의 설명에서처럼 지나치게 신비화됨으로써, 삭발하고 가사 장삼을 걸친 채 무언의 비전을 전수받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지 않고서는 법의 실천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야말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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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경전에도 신(新)·고층(古層)이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현종은 어느 것도 진짜 불설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무한급수의 불가지론(不可知論)에 빠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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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인 붓다의 말씀을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불교학의 목적이다. 학자들은 지금도 어느 것이 가장 붓다의 친설에 가까운 교설인가를 계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그리고 비록 초기경전 내부에 신·고층이 있다고 할지라도 현재 남아 있는 초기 문헌만으로도 붓다의 근본 교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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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붓다가 설한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연기설·사성제·팔정도·중도 등의 기본 교설은 대·소승에 별로 큰 차이가 없다. 우리는 그러한 교리들을 통해 붓다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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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실증주의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만일 역사적 실증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붓다의 탄생지, 열반지, 초전법륜지 등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인도나 동남아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곳이 역사적으로 부처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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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대승경전들을 직접 설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진실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했다는 것도, 베살리에서 유마거사가 《유마경》을 설했다는 것도 역사적 진실이 아님은 자명하다. 이처럼 비역사적인 사실은 역사라고 믿고, 진짜 역사적 사건은 역사적 실증주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몽롱한 주장은 현기증을 유발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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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모든 학문과 종교현상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실증주의에 그 바탕을 두지 않으면 신뢰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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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다불다보살 신앙에 문제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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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승불교의 신앙관에 관한 문제이다. 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多佛多菩薩) 사상은 사상적으로 위대한 점이 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비불교적인 요소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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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불신관(佛身觀)에 의하면 과거·현재·미래에 수많은 부처님과 보살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나 사상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다불다보살 사상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보다 법신불(法身佛)이나 보신불(報身佛)에 더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일반 불자들은 대부분 대승불교의 보살을 거의 신적(神的)인 존재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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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상은 자칫 잘못하면 범신론적(汎神論的) 유신교(有神敎)로 전락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불다보살 사상은 신앙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통이나 권위 혹은 대승이라는 이름으로 다불다보살 신앙을 포용함으로써 불교의 본질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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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다불다보살 신앙은 절대주의의 경향이 농후하다. 마스다니 후미오는 “불교에서 말하는 ‘붓다’란 기독교인이 말하는 ‘신(神)’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그는 천지와 만물의 창조자가 아니다. 최고의 유일한 존재도 아니다. 인간에게 ‘절대 타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 불교인 중에는 마치 절대자를 대하는 것같이 붓다를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붓다의 성격을 완전히 곡해한 것이며, 또 붓다 그분의 뜻에서도 빗나간 생각임이 명백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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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서 그는 “대승경전이 붓다를 절대화하는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거기에 담긴 많은 진리까지도 부정할 마음은 나에게 없다. 또 과거의 고승 대덕들이 도달한 종교적 경지에 대해서도 나는 겸허하게 고개를 숙일 아량을 갖고 있다.”라고 토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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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좌불교국에서는 교차로나 주택의 입구에 사면불(四面佛)이나 십일면(十一面)관세음보살상등을 수호신(守護神)으로 봉안하고 있다. 인도의 힌두교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매일 그 신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모든 재앙을 소멸하게 해달라고 빈다. 이러한 행위는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난 그릇된 신앙 행위임은 말할 나위 없다. 상좌부의 스님들도 이러한 비불교적 민간신앙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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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현종은 불자들의 신관(神觀)과 외도들의 신관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주명철은 한술 더 떠서 “대승의 붓다관을 유신론이라는 잣대로 폄하하는 점은 인도 종교의 유신론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편견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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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과연 누가 인도 종교의 유신론에 대한 이해 부족과 편견인지 이 부분의 전공자들이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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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의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종의 비불교적인 신앙에 대해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은 그의 저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1910년 저술)에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지면 관계로 여기서는 칠성과 신중에 관한 부분만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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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七星)은 더욱 황당무계해서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다. 별을 상(像)으로 하여 받들 바에는 하늘에 있는 별이 매우 많은 터에 어찌 유독 칠성만을 위하는 것인가. 또 그것이 여래(如來)의 화현(化現)인 때문이라 한다면, 천지·일월과 삼라만상이 똑같이 부처님과 일체(一體)일 터인데, 하필 칠성만이 그렇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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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제자(佛弟子)로서는 여래의 참된 상(像)을 받드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멀리 부처님의 화현(化現)에게까지 숭배의 대상을 확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번거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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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神衆)은 부처님께서 영산(靈山)에 계실 때에 호위하는 임무를 띠고 항상 따르던 신의 무리니, 불법(佛法)을 보호함이 실로 그들의 책임인 터이다. …… 비유컨대 승려는 상관과 같고 신중은 호위 순경과 같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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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여기에 한 상관이 있어서 손을 맞잡고 꿇어앉아 도리어 호위 순경에게 머리를 조아려 애걸한다면 약자에게 쩔쩔매는 그 꼴을 웃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니, 우리 승려들은 어찌 이것만을 보고 자기를 보지 않는 것이랴. 지금 남에게 뒤질세라 신중에게 몸을 굽혀 복을 비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나는 그 가치의 전도(顚倒)를 견디기 어려운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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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한 두 신관의 차이를 비교할 필요도 없이 한국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불교적인 잡다한 신앙들은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할 잘못된 신앙 형태라고 본다. 이런 측면에서도 만해 한용운은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선구자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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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대승불교 흥기와 함께 불교 속에 습합된 다불다보살 신앙은 다분히 유신교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한 신앙이 맹목적으로 강조될 경우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날 염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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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도들이 다불다보살 신앙을 통해 불교의 본질로 돌아온다면 다행이겠지만, 불교 교리에 무지한 일반 대중들이 자칫 잘못하면 미신이나 유신론으로 빠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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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기복을 부추기는 것이 옳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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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논쟁과 아울러 제기되는 문제는 기복신앙이다. 대승불교에서는 기복신앙이 용인되는 것으로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다행히 주명철은 “한국불교의 기복문제는 대승불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단, 교파, 기성체제 속에서 대승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적용한 후학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한국불교의 문제를 오로지 대승불교에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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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주장했던 내용과 동일하다. 필자도 한국불교가 대승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기복 위주의 잘못된 신앙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코 대승불교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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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은 기복(祈福)과 작복(作福)을 혼동하고 있는데, 만약 같다고 하면 이렇게 논쟁할 필요도 없고 기복을 두 손 들고 맞이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필자가 지면을 통해 자세히 언급하였음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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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사실은, 기복의 대안이 작복이다. 조준호의 지적처럼 “작복은 백 번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작복이야말로 대사회적으로 불교의 위치를 당당히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반복적인 외침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한국불교 분위기가 되었으면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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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만해 한용운도 〈조선불교유신론〉에서 “복은 빌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다가 부처님도 원래 화복의 주관자가 아니시니, 빌어 본대도 복을 얻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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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기복신앙을 작복신앙으로 전환하자는 데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기복신앙을 비판·부정하면 마치 한국불교가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몇몇 사람들의 과민한 애종심이 문제이다. 그리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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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리적·이론적으로는 기복신앙이 불교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그 잘못된 신앙을 어떻게 해서든 바른 방향으로 유도해야만 한다. 그리고 기복의 대안인 작복도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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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조준호는 기복신앙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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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예경(禮敬)의 대상이지, 화(禍)는 물론 복을 내리는 기도의 대상이 결코 아니다.나아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이유는 세상 사람들의 물질적인 기대나 세속적인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불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의 기능에 있어 ‘기복’이야말로 더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어느 종교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종교의 중심 경전에 근거한 본연의 입장과 대치되는 대중적 차원의 신앙이 병존(竝存)하는 이중적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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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불교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느 종교나 신행에 있어서 분명히 이중적 구조의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지성인들과 미디어 종사자들이 앞장서서 기복신앙을 옹호하거나 조장 혹은 부추겨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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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미신적·주술적·비밀교적인 그리고 무속적 기복신앙은 불교가 아님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 명백한 사실을 왜 억지로 비호하고 권장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기복신앙을 갑자기 개선하기가 어렵다 할지라도 점차 개선해야 한다는 태도가 불교도의 올바른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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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의 언론은 기복신앙을 권장하거나 부추기기보다는 오히려 출가·재가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잘못된 신앙을 바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기복신앙을 권장하는 것이 옳은가? 어떤 주장이 더 미래의 불교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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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잘못된 전통까지 고수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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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의 사설에서는 “불교의 특성 중의 하나가 전파 당시 그 나라의 고유한 신앙을 습합하며 정착한 데 있다는 것은 재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초기경전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는 원리주의적 주장을 펴는 것은 폭력이다.”라고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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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1910년에 만해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지었다. 만해는 이 〈조선불교유신론〉에서 한국불교 속의 비불교적 신앙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불가(佛家: 조선불교를 말함)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 : 절에 모신 일체의 등상과 그림을 말함)는 가리어 혼란이 없어야 하겠고, 간략하여 번잡하지 않아야 하겠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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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해 이전에 이미 “소회(塑繪)는 미신에서 나온 거짓된 모습이니 전부를 들어 소각함이 상책이다. 그리하여 절을 깨끗이 해서 암흑 시대의 미신을 일소하고 진리를 배양하여 불교의 새 나라를 고쳐 세워야 한다.”는 보다 과격한 주장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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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릇 모든 종교는 어느 지역에 정착하기 위해서 기존의 신앙을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측면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질적인 종교와 사상이 발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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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라는 토양에서 잉태된 불교가 동쪽 끝에 위치한 한반도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재래 민간신앙을 습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민간신앙을 배제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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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전래는 단순히 종교사상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함께 전래된다. 외래문화가 들어오면 처음에는 거부반응을 가지다가 점차 시간이 경과하면서 토착문화와의 습합을 통해 새로운 문화가 탄생되고 그것이 정착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독자적인 한국불교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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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형성된 한국불교 나름의 문화사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문화현상 자체를 좋다 나쁘다고 평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다만 그러한 과정을 거침으로 인해 원래의 불교, 즉 불교의 순수성 혹은 정체성이 희석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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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정당화하거나 찬양하는 듯한 논조는 문화사적인 측면에서는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불교의 정체성 확립이라는 명제에는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흔적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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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백이 넘치던 옛 선사들이 한국불교 속에 남아 있는 산신각, 용왕각, 독성각 등을 철거하기 위해 탱화를 불살랐던 일화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이러한 행위는 한국불교의 문화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만해 한용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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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염불당의 폐지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불가에서 숭배하는 소회(塑繪)의 철거를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주장 가운데 극히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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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치도 않는 신들 앞에 종처럼 무릎 꿇어 아첨하고 있으니, 소회(塑繪)를 받드는 폐단이 이에 이르러 극단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누가 능히 만천하의 이런 소상(塑像)들을 불살라 날려보내고 물에 던져 가라앉혀서, 다시는 세상에 머물지 못하게 하여, 우리 종교의 진리로 돌이켜 흠이 없게 할 것인가. …… 설령 불교를 미신이라고 한다 해도 부처님을 미신하는 것으로 족한 터이다. 어찌 아침에는 부처님을 미신하고, 저녁에는 나한(羅漢)을 미신하고, 또 칠성(七星)을 미신하고, 또 시왕(十王)을 미신하고, 또 신중(神衆)을 미신하고, 또 천왕·조왕·산신·국사(國師) 따위를 미신함으로써 일정한 신앙이 없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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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지금의 필자와 같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불교계 내부에서도 열린 시각으로 일찍부터 한국불교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왔다. 만해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전혀 통용될 가능성이 없는데, 1910년대에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겠는가? 그 장벽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러한 토착화된 문화 혹은 종교현상은 불교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점을 필자는 강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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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잘못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그 잘못된 부분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야만 한국불교가 바르게 되는가? 이를테면 가문의 명예를 빛낸 인물도 있지만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인물도 있을 수 있다. 비록 가문을 더럽혔다고 해서 그 가문의 출신이 아닌가? 그 옳고 그름은 후대에서 판단할 몫이다. 잘못된 부분을 두둔하거나 변명한다고 잘못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부분은 잘못된 부분대로, 잘된 부분은 잘된 부분대로 인정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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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의 역대 조사나 사상가, 그리고 한국의 고승 중에서도 본의 아니게 부처님의 뜻과 반대되는 주장이나 행동을 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그 잘잘못을 따질 수 있어야 한다. 과문의 탓인지는 모르나 부처님께서는 후회할 나쁜 행위가 전혀 없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만일 부처님도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해 비판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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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부처님께서는 안거(安居)가 끝나는 마지막 날의 자자(自恣, pava?an.a?에서 나의 허물을 보거나 발견한 사람은 지적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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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초기불교 교단에서는 붓다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대중 앞에 발로 참회해야 한다. 이것이 불가의 전통이다. 허물은 덮어둔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잘못된 전통을 고수하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인가? 그 잘못을 지적하면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존심을 짓밟는 것인가? 그 잘못을 덮어두면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존심을 세우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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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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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가 〈조선불교유신론〉을 주창할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과 같은 한국불교의 분위기에서도 한국불교의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환영받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현재 초기불교 정신에 따른 한국불교 실태 파악이 수용되기는커녕 오히려 매도하려는 분위기는 더더욱 한국불교의 미래를 생각할 때 참담할 뿐이다.
.
이는 아직까지도 한국불교가 지적으로 성숙해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한국불교를 주도하고 있는 주된 세력들은 여전히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주장들을 외면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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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록 표면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불교를 올바르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어느 쪽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으며 미래 지향적인가를 잘 알고 있다. 이번 지상 논쟁을 지켜 본 많은 사람들은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 없다고 말한다. 잘못된 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올바른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아무리 우겨도 올바른 것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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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대다수의 지식인들은 한국불교 정체성 논쟁에 침묵을 고수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침묵하는 쪽이 오히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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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현실적으로 제도권 불교에 영합하고 편승하여 상대방을 공박하려는 태도 또한 훗날의 비판을 면키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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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새로운 한국불교의 모습은 언젠가는 올 것이고, 그러한 분위기는 굉장한 수준으로 성숙되고 있어 희망적이다. 새살이 돋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불교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더욱 정진해야 할 것이다.
.
끝으로, 한국불교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초기불교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지적하고자 한다. 기복신앙으로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불교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오늘의 문제점들을 진단하고 그 대안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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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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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Bodhi 스님] 불교 입문 동영상 시리즈 (10강)
https://www.youtube.com/play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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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Dhammavuddho 스님] 불교에 대한 잘못된 상식 동영상 시리즈 (5분 x 19강)
https://www.youtube.com/watch?v=-q0ZJu8JZ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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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Dhammavuddho 스님] 디가 니까야, 맛지마 니까야, 상유타 니까야, 앙구타라 니까야 강의 시리즈
https://www.youtube.com/c/EPSuttaVinaya => See the 'PlayL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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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타니사로 스님의 책은 아래 링크에서 무료로 다운 받으실 수 있는데, 보통은 Essays라는 카테고리로 분류된 책을 먼저 읽으시라고 권합니다. "Noble Strategy"와 "Head & Heart Together"를 먼저 읽으시기 바랍니다.
https://www.dhammatalks.org/ebook_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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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타니사로 스님의 가르침 맛보기용 앨범
https://facebook.com/keepsurfinglife/albums/1042727616099321/
.
10. 타니사로 스님의 유툽 채널
https://www.youtube.com/c/Dhammatalk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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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amma Talks by Thanissaro Bhikkhu - YouTube
This is the official youtube channel for Dhamma talks given by Ven. Thanissaro Bhikkhu at Metta Forest Monastery. Ven. Thanissaro and the Monastery are pa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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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이전 내용을 수정하여 다시 올립니다. 불교 역사를 대충이라도 아시면 도움이 되실 것 같아서 한국어로 된 유툽 강의 영상들을 몇 개 추가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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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초기경전이 '무오류'라고 제가 믿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인간들이 하는 일에 비의도적 실수든 정치적 의도에 의한 첨삭이든 없을 수는 없겠죠. 다만, 초기경전이 '완전'해서가 아니라 부처님 말씀에 가장 근접한 '최선'이기에 공부하는 것이고, 집단적 검증의 과정 전혀 없이 개개인의 재해석에 의해 쓰여진 이후 경전들보다는 초기경전에 좀더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는 것 뿐입니다. 아비담마나 청정도론 등의 논서 및 주석서들은 참고서라고 알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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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쪽140*205mm416gISBN : 9791187289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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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분석가이자 치유전문가인 저자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미움으로 바뀌는지, 그리고 바깥으로 투사되어 세상을 향한 혐오를 낳는지를 담담하고도 단단한 어조로 통찰한다. 스스로를 미워함으로써 자신을 희생시키고,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가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이 책은 자기 미움의 교묘하지만 어리석은 구조와 프로세스를 알려준다. 그럼으로써 자기 미움의 정체를 선명히 알아채고, 무의미한 미움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돕는다.
목차
프롤로그 | 자신을 미워하며 살아갈 수는 없다

1장 | 자기 사랑은 어떻게 자기 미움이 되었나
원래 나는 우월하다, 그러므로 나를 미워한다
그들의 비난이 어느새 ‘내 것’으로
자책감과 죄책감,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는 마음
‘부정적 나’에도 의존한다
자학으로 혐오를 방어한다
‘현실정당화’라는 심리적 마취제
이유에는 언제나 ‘희생양’이 필요하다
나도 나에게는 공평하게 잘 대해줘야 할 타인이다

2장 | 자기 미움은 어떻게 그들을 향한 혐오가 되는가
미워할 가치
투사, 그것은 ‘내면의 그림자’도 악마성도 아니다
부러움과 질투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상대를 징벌함으로써 자신을 면죄한다

3장 | ‘나’는 내용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정체성은 내용이 아닌 느낌이다
시나리오대로 사는 존재, 시나리오를 만드는 주체
왜 타인과 세상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가
우리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결정’이 아니라 ‘경험’이다
너무 급하게 ‘최종적으로 옳을’ 필요는 없다
나쁜 성격은 없다, 서툰 주인이 있을 뿐
어느 날 문득 ‘나’를 찾은 소녀 이야기

4장 | 상처, 겪지 않는 게 아니라 별것 아니게 되는 것
상처, 없애는 게 아니라 품고 넘어서는 것
상대방의 말에 상처받지 않는 방법
신경 쓰이는 ‘그 기억’에 무심해지는 법
상처가 아니라 치유의 기회다
부정적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는 법
낯선 것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넘어서는 방법
나는 얼마나 나를 ‘기꺼이’ 경험해주고 있나?

5장 | 관계의 주인공을 꿈꾸는 이들에게
나는 주인공이 아니라는 이들에게
나를 괴롭히는 ‘반대 의견’ 대처법
더 이상 ‘만만한 사람’ 되지 않기
수직적 의존이 아니라 수평적 사랑을
공감을 위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될 필요는 없다
또 다른 나를 통해 나를 다시 만나다
너와 나, 별개인 둘이 아니라 ‘극성이 둘인 하나’다
두 개의 진리

에필로그 | ‘행복’이라는 설정의 주인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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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얻고자 한다. 또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사람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은 무엇이나 그렇지 않은가?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이 원하는 기준이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자, 이때 비교의 원천이 되는 기준과 수준은 누구의 모습인가? 이 또한 자신의 모습이다. 자신이 떠올리는 자신의 모습이다. 스스로를 뛰어나고 우월한 모습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 현실이 어떻든 내면에서는 그게 ‘사실’이다.
그런 나는, 아직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의 내 모습에 실망과 한계, 부족감과 불완전함을 느낀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자신을 보완하고 보호하려 한다. 자신은 그렇게 열등하고 못나면 안 되겠기에.
이제 우리의 마음은 아주 교묘한 전략을 세우고 실행한다. 열등하고 못난 자기를 진짜(?) 자기와 분리시키고, 이제 우월한 자기가 되어 못난 자기를 대상화하고 멸시하는 것이다. 이로써 아주 이상한 자기 구원이 이루어진다.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자기가 구원받는 것이다.
―1장, 자기 사랑은 어떻게 자기 미움이 되었나

드물기는 하지만 외부의 혐오나 비난을 막기 위해 자기 미움이 동원되는 경우도 있다. 말 그대로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타인의 혐오와 미움을 사전에 방어하는 것이다.
어떻게 자학이 타인의 혐오를 사전에 방어한다는 것일까? 여기에는 일종의 심리전략적 착오가 있다. 즉 그런다고 방어되는 게 아닌데도 그렇게 믿는 것이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만약 우리가 뭔가 잘못했을 때 취할 바람직한 행위는 무엇일까?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자기반성을 하거나 상대에게 사과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뭔가 잘못했는데 부모가 그것을 알게 된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때 아이가 먼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부모는 아이를 기특하게 여기며 간단하게 주의를 주고 용서해준다.
자신에 대한 미움의 심리에도 이런 기제가 나타날 때가 있다. 즉 뭔가 내가 부족하고, 모자라고, 불만족스럽다. 그런데 이것을 타인들도 알고 있거나 알게 될 것 같다(물론 이 자체가 과도한 걱정인 경우도 많다). 그들의 부정적 반응을 나는 감당할 수 없다.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 자체를 허락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이 눈치 채기 전에 내가 나를 야단친다. 마치 아이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듯이 말이다. 물론 자기 미움에서는 이 과정이 다분히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문제는, 다른 자기 미움의 기제들처럼 이 또한 ‘효과 없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행하는 나는 효과를 바라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하긴, 이런 방법이 효과 없다는 것을 선명히 알았더라면 미리 자학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효과를 믿는 한 힘들어하면서도 자동으로 반복되게 된다.
사전 자학이 행해지는 또 다른 기제도 있다. 일종의 ‘자기단련’이라 할 수 있는데, 남들이 나를 미워하거나 싫어하게 되기 전에 내가 먼저 스스로를 미워해서 미리 단련시켜 버리는 것이다(물론 이 ‘단련’은 묘하게 뒤틀린 착각이며 무의식적인 측면이 있다). 그래서 후에 남들이 나를 실제 미워하게 되더라도 내가 이미 나를 미워하고 있기 때문에 충격이 줄어든다. 시쳇말로 하면 ‘이미 버린 몸, 이미 포기한 몸’이라고나 할까.
―1장, 자기 사랑은 어떻게 자기 미움이 되었나

우리가 내 잘못, 내 실수, 내 무능, 내 착오라 여기는 많은 부분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실제로 그런 부분이 있다면 나 스스로 외면하거나 피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잘 파악하고 챙겨서 차후에 되풀이되지 않게 하자. 지혜롭게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의외로 많은 일이 ‘그냥’ 일어난다. 즉 ‘내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그 ‘그냥’을 눈치 채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맞지도 않는 이유와 근거를 억지로 만들지 않고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깜깜한 길을 걸어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 이유는 하필 ‘그냥’ 거기에 돌부리가 있어서다. ‘내 잘못’이 아니다. 누구라도 깜깜한 그 구간을 지나가다 그 돌부리에 걸리면 속절없이 넘어질 수밖에 없다. 혹은 버스에 탔는데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심하게 기침을 한다. 결국 나도 감기가 옮았다. ‘내 잘못’이 아니다. ‘그냥’ 감기 걸린 사람이 근처에 있어서 그런 것이다. 낯선 외지 마을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덤불에서 미친개가 뛰쳐나와 내 다리를 물었다. 이 경우도 ‘내 잘못’은 아니다. 알고 보니 그 동네 길을 가던 이들이 여럿 물렸다고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적이거나 복잡한 일들도 엄밀히 보면 돌부리, 감기, 미친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없는 내 잘못’을 만들어내 자책과 죄책감에 스스로 빠져 허우적대곤 한다.
그러니 혹시라도 ‘좌뇌의 강박’에 시달리고 속아왔던 부분이 있다면 앞으로 눈치 채고 그 의미 없는 수다를 멈추자. 내 잘못이 아닌데도 스스로 괴롭히고 힘들게 하지는 말자. 이것이 더 당당하고 떳떳하게 존재하는 방법이다.
―1장, 자기 사랑은 어떻게 자기 미움이 되었나

예를 하나 들어보자. 누가 굉장히 비겁해 보이는데 나는 그 비겁도 싫고 비겁한 그 사람도 싫다. 그러나 (그 사람이 실제 비겁한지 아닌지와 별개로) 사실은 그러한 ‘비겁의 요소’가 내 안에 있고, 나는 그 요소를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어 그것을 억압하거나 회피하는 것이다. 그 요소도 내 내부의 혹은 인간의 정상적인 일부로 엄연히 존재하는데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서 ‘그림자’로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걸 ‘비겁함’이라고 규정한 것은 오해다. 실제로는 비겁함이 아니라 단순한 ‘조심성’일 수도 있다. 아니면 나름의 ‘합리적 반응’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것의 존재를 인정하거나 허용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림자로 여기며 억압, 회피, 무시하는 것이다. 그냥 쿨하게 인정해버리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그런 요소가 보이는 것 같으면, 실제 그 사람이 어떤지와 상관없이 ‘저 사람은 비겁하다. 나는 그게 싫다’고 느끼고 생각해버린다. 물론 그 사람이 실제로 비겁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나와 나의 내면이다.
성적으로 보수적인 사람이 성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에게 거부감이나 혐오감을 느끼는 것도 같은 기제다. 자기 내면에 있는 ‘성적 자유에 대한 추구나 욕망’을 인정하지 못한 채 그러한 내적 긴장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느끼며 살다가 외부에 투사한다. 미움이나 분노 혹은 혐오로 그 대상을 ‘징벌’함으로써 자신을 면죄하는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미봉책일 뿐 해결된 건 전혀 없으며, 차후에도 계속 반복된다.
―2장, 자기 미움은 어떻게 그들을 향한 혐오가 되는가

선택과 결정만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결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결정한 후에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솔직하게 보아야 한다. 우리는 사실 결정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즉 ‘결정장애’가 아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결정 후의 과정이다.
우리는 자꾸만 ‘좋은 결정 후에 있을 좀 더 좋은 과정, 좀 더 편한 과정’ 등을 꿈꾼다. 그러나 어떤 결정을 하든 ‘후 과정’은 동일하다. 모든 내용과 흐름이 똑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체험과 경험으로서 전체적인 흐름이 같다는 말이다. 결정을 망설이거나, 미루거나, 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게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무심할 수 있는 차이다. 그러므로 애초에 ‘결정 후의 과정은 모두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다.
가장 강력한 방법은 바로 ‘기꺼이 경험해주기’다.
즉 A를 선택했을 때의 과정이든 B나 C를 선택했을 때의 과정이든 크게 구분하지 않고 ‘모두 기꺼이 경험해주겠다’는 마음이다. 쉽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 그리고 사실 다른 선택지도 없다. 결정한 후에 ‘경험하기 싫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경험을 망설이는 것도 그렇다. 선택과 결정을 미루거나 망설인다고 해서 특별한 이득도 없고, 오히려 실제로는 겪을 필요가 없는 어려움이나 손해를 겪기도 한다. 그러니 ‘그 순간에 필요한 결정 내리기’를 왜 굳이 피할 것인가.
―3장, ‘나’는 내용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어떤 성격이든 고유하며 저마다 강점이 있으므로, 적어도 성격에 관한 한 약점으로 보고 보완하려 하지 말고 그 자체가 강점이 될 수 있다 여기고 그것을 살리는 쪽으로 가야 한다. 생각부터 그렇게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예민하거나 민감한’ 것이 아니라 ‘섬세한’ 것이다.
‘거친’ 것이 아니라 ‘대범한’ 것이다.
‘허둥대는’ 것이 아니라 ‘민첩한’ 것이다.
‘소심한’ 것이 아니라 ‘신중한’ 것이다.
‘잘난 척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자존감이 높은’ 것이다.
‘따지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인’ 것이다.
‘유약한’ 것이 아니라 ‘우호적이고 따뜻한’ 것이다.
‘까부는’ 것이 아니라 ‘활발하고 표현력이 뛰어난’ 것이다.
‘숫기 없는’ 것이 아니라 ‘사색적인’ 것이다.
‘깐깐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것이다.
‘차가운’ 것이 아니라 ‘평정한’ 것이다.
‘무정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이다.
왜 약점의 보완이 아닌 강점으로의 강화로 가야 하냐면, 본래 성격에는 약점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오직 당사자가 잘 이용하느냐 아니냐만 있을 뿐이다. 어떤 성격이든 그 성격의 요소를 잘 사용하면 강점이 된다. 잘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두고 괜히 약점이니 뭐니 하면서 붙잡을 필요 없다. 그래봐야 시간 낭비다. 그냥 그 특질을 본래의 장점으로 전환시키면 된다.
―3장, ‘나’는 내용으로 결정되는 존재가 아니다

기억하기 싫은 느낌이나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경험은 무척 힘들다. 며칠 전에 재수없게 굴던 누구누구의 말과 행동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때마다 모욕감, 분노가 고스란히 반복된다. ‘아, 그때 내가 이렇게 화내거나 반박해줬어야 했는데…’ 혹은 ‘별것도 아닌 게 나를 무시하다니…’, ‘그때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잊힐 만하면 또 떠오르고, 잊힐 만하면 또 떠오른다. 심지어 어떤 기억은 몇 달이 지나도, 몇 년이 지나도 집요하게 들러붙어 사라지지 않는다.
현재의 문제나 미래에 대한 걱정도 우리를 종종 찾아오지만, 특히 강하게 반복되는 건 아무래도 ‘과거의 것’들이다. 과거의 부정적 경험들, 그때 느꼈던 감정과 생각은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한창 기분 좋다가도 불현듯 떠올라 기분을 망치고, 자신감을 앗아가고,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이미 지나간 것들, 죽은 것들인데도 말이다.
이 느낌과 생각들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듯하다. 내가 느끼거나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마음대로 내 안에서 튀어오르는 것 같다. 이것들에게서 자유로워질 방법은 없을까? 아무 때고 원치 않는 느낌과 생각에 계속 시달리기만 해야 할까?
당연히 아니다. 방법이 있다.
어떤 습관이든 그것을 바꾸려면 두 가지 과정이 필수다. 하나는 ‘눈치 채기(통찰)’이고 또 하나는 ‘구체적 방법’이다. 기존의 잘못된 부분을 눈치 채고, 구체적 방법을 사용해 바꾸는 것이다.
―4장, 상처, 겪지 않는 게 아니라 별것 아니게 되는 것

관계에서 ‘의존’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다. 양쪽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존적 관계를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존하는 측은 주로 심리적 의존과 삶에서의 책임전가, 그리고 의존받는 이는 존재감 인정과 고양되는 자존감 등이 주 이익이다. 즉 진정한 사랑이 ‘상대방이 잘되도록 서로가 서로를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라면, 의존은 ‘나의 잘됨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는 메커니즘’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관계가 지속될수록 서로에게 이익이 되기보다는 양측이 모두 희생되고 고통받게 되는 구조다. 때로 겉으로는 화려하고 멋있는 관계로 보인다 할지라도, 실제 각자의 내면은 그 반대로 가게 된다. 그러다 결국 파국을 맞으면 비극적으로 끝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본래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의존하거나 의존받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 동등하게, 수평적으로, 편안하게 사랑을 나누는 존재이지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높아지거나 낮아지며 그에 수반된 수직적 관계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는 왜곡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선 나의 내부에서, 기존의 의존이 아니라 성숙한 상호 나눔을 시도해보자. 의존을 하든 의존을 받든 ‘의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아직 내가 한 인간으로서 건강하고 성숙하게 홀로 서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외부적으로 떠날지 말지, 헤어질지 말지는 그다음 문제다.
―5장, 관계의 주인공을 꿈꾸는 이들에게

연인이나 부부는 별개인 둘이 아니라 ‘극성이 둘인 새로운 하나’다. 한 가족에 엄마, 아빠, 아이들이 있을 때 그들은 별개인 여럿이 아니라 ‘극성이 여럿인 새로운 하나’다. 여러 사람이 연관된 그룹이 있을 때 그들은 별개의 사람들이 아니라 ‘극성이 그만큼인 새로운 하나’다.
둘이지만 하나이고, 하나이지만 둘이다. 완전히 갈라진 둘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획일화된 하나도 아니다. ‘극성이 여럿인 새로운 하나’다. 연인도, 부부도, 가족도, 그룹도. 그러면 그 관계 혹은 집단의 궁극의 목표는 개별체인 ‘나’의 행복이 아니라 ‘새로운 하나’의 행복이 된다.
이 점을 무시하고 여전히 완전히 분리된 별개로 착각한 채 각각의 입장, 관점, 행복만 고집하면 그 새로운 하나는 고통스러워질 뿐이다. 많은 연인, 부부, 가족이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결국 누구도 행복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다. 엄연히 존재하는 ‘새로운 하나’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따로인 극성만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각 극성(개인)의 입장이나 행복을 고려하지 않고 전체만 생각해도 문제가 발생한다. 전체는 각 극성으로 구성돼 있는데 마치 극성이 없는 양하기 때문이다. ‘극성이 무시된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극성은 엄연히 계속 존재한다. 그러므로 고려해야만 한다.
개인주의도, 전체주의도 결코 답이 되지 못한다. ‘극성이 N개인 새로운 하나’의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만약 연인, 부부, 가족, 구성원 간의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다면 상황과 필요에 따라 때로는 극성을, 때로는 하나를, 때로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는 방법과 해결책을 유동적이고 능동적이고 지혜롭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
―5장, 관계의 주인공을 꿈꾸는 이들에게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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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난히 상처받는 아이였다. 타인의 말과 작은 행동을 지나치게 오래 기억했고, 그것들은 사금파리처럼 내 속을 할퀴고 맴돌았다. 그렇게 몸만 어른이 된 채 잠들지 못하고 바스락바스락 뒤척이던 어느 밤이었다. 아마도 누가 뒤에서 나에 대해 한 말을 전해들어 버렸던. 얼마나 많은 경험과 고민이 녹아 있는지 가늠도 되지 않는 이 글들을 그날 발견한 건 정말 다행이었다. 아주 진한 리큐르 같고 여름 바다의 파도 같은 문장들은 뜨거운 위로를 주었다. 심지어 바로 다음 날 실천해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모든 글들을 차분히 읽고 한 번씩 실천해보며 깨달은 건 누군가의 말은 그 자신의 내면을 나타내주는 것이고, 작은 행동들은 내 시선 속에서 오해를 입은 경우가 많다는 것. 아직은 서툴지만 이제 겨우 성장을 시작한 나의 내면 아이가 이 글들을 오래 곁에 두기 바란다. 좋은 길동무가 될 것이기에.” ―권윤경, 브런치 독자

“저는 열여덟 살에 교통사고로 장애를 얻으면서 많은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처음에는 장애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어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는데, 어느 날 ‘정답이 없는 것에서의 차이는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라는 생각을 하며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작가님의 글 덕분에 저의 믿음이 더욱 힘을 얻었고요. 작가님의 글을 읽다 보면 생각의 범위가 조절되는 기분이 들어요. 모르거나 잊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고요. 다른 누군가의 답이 아닌 스스로의 답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류종환, 브런치 독자

“‘나도 나에게는 공평하게 잘 대해줘야 할 타인이다.’ 공감 가는 글이에요. 실제로 자신을 타인처럼 대할 수 있다면 무한응원과 지지가 가능할 것 같아요. 작가님의 글을 읽고 나도 모르게 질책이 나오는 기제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Arias Kim, 브런치 독자

“여러 면에서 위기가 닥치고 심리적인 붕괴가 있으면 정말 뭐랄까, 30대 중반인데도 여전히 갓난쟁이 같아서 어쩔 줄 모르겠더라고요. 작가님 글 보면서 배우기도 하고 위안도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김태은, 브런치 독자 - 독자 
저자 및 역자소개
이경희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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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이상 센터를 운영해왔다. 전문 활동영역은 명상과 의식, 심리 분야의 교육과 코칭, 컨설팅이다.
인간의 심리와 의식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동서양의 여러 명상기법과 이론 그리고 심리학과 뇌과학 등을 깊이 탐구하고, 이를 교육과 코칭, 컨설팅 프로그램에 적용해왔다.
일반적으로 명상은 인간에 대한 근원적 접근에 강하고, 세밀한 심리적 문제에는 약하다. 한편 심리학은 이와 반대의 경향이 있다. 저자는 두 영역의 강점을 조화시킨 ‘명상적 심리분석’이라는 접근법을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 개인과 집단의 심리분석에 심리학, 뇌과학 등에서의 현대적 성과, 그리고 명상 등에서의 전통적이고 근본적인 지혜와 통찰을 고유하게 접목해 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자신만의 ‘메타 사유적 방법론’을 사용하기도 한다. 메타 사유는 ‘생각에 대한 생각, 생각을 품고 넘어서는 생각’이라 설명할 수 있다. 기존의 모든 생각과 고정관념, 개념 등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완전히 자유로운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어떤 생각도 절대시하지 않으며, 생각 자체를 다루어야 할 하나의 대상으로 파악한다. 즉 생각의 노예가 아니라 생각의 주인이 되는 방법론이다. 기존 생각의 감옥과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유가 가능한 것이다. 이 책 곳곳에는 여러 가지 긍정적, 부정적인 생각과 기억들을 ‘기꺼이 품으며 동시에 넘어서는’ 저자의 메타 사유적 사고법이 소개되고 있다.
또한 저자의 심리분석은 ‘개인과 집단사회의 동시성’을 강조한다. 즉 어떤 현상과 문제든 경중의 차이가 있을 뿐 두 요소가 함께 연결돼 있으며, 순전히 개인적이거나 순전히 집단 사회적인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명상적 심리분석’은 항상 개인과 집단사회 모두를 고려하여 그 대상으로 한다. 접기
최근작 : <자기 미움> … 총 2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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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디지털로 생각하라>,<살면서 한 번은 짠테크>,<2021 트렌드 노트>등 총 52종
대표분야 : 마케팅/브랜드 5위 (브랜드 지수 53,206점), 경영전략/혁신 15위 (브랜드 지수 27,052점), 리더십 19위 (브랜드 지수 11,584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나도 나에게는 공평하게 잘 대해줘야 할 타인이다”
카카오 브런치 화제의 연재작!
자신을 회피하는 대신 마주하기를 선택한 당신에게 드리는
성장과 치유의 심리학

[책 소개]

자기를 진심으로 미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모두 어느 정도씩은 자기를 미워한다.
그 때문에 괴로워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정말로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자기 사랑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마음은 해결책을 찾는다.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마음은 힘든 상황을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이유나 원인을 만들려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자기 미움’이다. 모든 사람은 크든 작든 자기 미움의 심리를 가지고 산다. 그것은 소소한 자기 경계나 자기반성일 수도 있고, 중간 정도의 자기 후회일 때도 있다. 어느 경우에는 심한 자기비하나 혐오, 자책감, 죄책감, 절망감일 때도 있다. 강도가 다를 뿐 모두 자기 미움이다. 즉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다.
자기 미움은 삶을 불행하게 한다.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게 하고 온전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삶의 의욕과 에너지가 낭비되고, 자신과 주위 사람들 모두 힘들어진다.
특히 피로사회와 위험사회, 경쟁사회의 대표주자인 한국은 사회구조상 개인과 집단의 자기 미움 심리가 매우 강하다. ‘자살률 1위’, ‘행복도 최하위’, ‘극심한 빈부격차’ 등 온갖 불명예스러운 수치가 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이들이 스스로의 자기 미움 심리나 경향성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산다. 경쟁과 억압이 심한 사회구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며, 누구나 겪는 일이다 보니 문제로 잘 인식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다 다른 나라와 사회, 그 구성원들과 비교할 때 비로소 우리 내면의 자기 미움이 얼마나 강렬한지 알게 된다.

마냥 사랑할 수만은 없는 나,
기꺼이 품어주며 동시에 넘어서기

이 책은 누구나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겪는 ‘자기 미움’이라는 심리의 정체와 본질을 파헤친다. 자신을 미워하더라도 우선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고 하자는 것이다. 정체를 제대로 아는 것이야말로 해결의 시작이다. 왜냐하면, 자기 미움의 정체는 자기 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기 미움은 ‘자기 사랑’과 ‘자기 우월’에서 온다. 자기 미움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앓고 있는 타인과 사회적 약자를 향한 불합리한 혐오 등도 이 왜곡된 자기 미움의 기제가 비뚤어지게 투사된 측면이 있다.
심리분석가이자 치유전문가인 저자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미움으로 바뀌는지, 그리고 바깥으로 투사되어 세상을 향한 혐오를 낳는지를 담담하고도 단단한 어조로 통찰한다. 스스로를 미워함으로써 자신을 희생시키고,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가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이 책은 자기 미움의 교묘하지만 어리석은 구조와 프로세스를 알려준다. 그럼으로써 자기 미움의 정체를 선명히 알아채고, 무의미한 미움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돕는다.
카카오 브런치에 연재된 ‘자기 미움’ 매거진의 글들은 매 편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함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선사해왔다. 저자가 ‘자기 미움’이라는 화두를 떠올린 것은 약 6년 전의 일이다. 당시 이 주제를 처음 주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때는 대부분 별 흥미를 보이지 않거나 부정적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출간 즈음에는 오히려 반대가 되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이 관심을 보인다. 그사이 우리 사회와 개인들이 그만큼 더 힘들어졌기 때문일 터.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제는 뭔가 대처와 치유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는 점에서는 희망적이고 반가운 현상이기도 하다. 문제가 있음을 알아챈 순간 이미 브레이크는 밟혀졌고 핸들은 돌려진 셈이다. 알아챔으로써 자기 미움의 프로세스는 이미 멈추었고, 방향은 바뀌었다. 그럼으로써 잘난 나, 못난 나, 사람들이 말하는 나… 이 모든 ‘나’의 모습에 매몰되지도, 억압하거나 회피하지도 않는 건강하고 능동적인 삶의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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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자존감 책으로는 채우기 힘든 자기 미움에 대한 집중적이고 자세한 처방! 너무 좋다  구매
anaki 2016-11-27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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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기 위해 미워하는 놀라운 이야기, 그래, 죽이고 싶지만 사랑스럽다, 나.  구매
reddish0123 2016-09-06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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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미움에 숨은 다양한 심리 - 자기 미움 새창으로 보기


 

인간 근원에 대한 근원적 접근에 강한 명상과 세밀한 심리적 문제에 강한 심리학, 두 영역의 강점을 조화한 '명상적 심리분석'이란 걸 이번에 알게 되었네요. 명상적 심리분석가 필로 이경희 저자는 <자기 미움> 책에서 자기 미움, 투사, 정체성, 상처, 관계 등의 문제를 명상적 심리분석으로 해결해 행복한 느낌으로 사는 삶을 꾸려나갈 수 있게 합니다.

 

해결 과정을 살펴보면 생각의 노예가 되지 않고 생각의 주인이 되는 '메타 사유적 사고법'을 통해 기존 생각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유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어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자기 사랑의 증거이지만, 스스로 만든 이유나 원인으로 자기가 자기를 미워하는 '자기 미움'이라는 게 우리에게 있다는 것 놀라웠어요.

 

자기 미움의 심리란 작게는 자기 경계, 자기반성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크게는 자기 비하, 자책감, 죄책감, 절망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니 아하~ 쉽게 이해되네요. 최근 강남 묻지마 사건처럼 타인 혐오 역시 집단의식 내부에서의 자기 미움 현상이라는군요. 강도가 다를 뿐 모두 자기 미움의 모습이라고 해요. 문제는 우리가 어느새 자기 미움을 버리지 못하고 되레 의존하며 지키려 든다는 겁니다. <자기 미움>은 자기 미움의 정체를 이해해 억압, 회피하지 말고 제대로 된 방법으로 걷어내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자기 미움의 본래 심리는 자기 사랑, 자기 우월이라고 해요.

좀 더 나은 자기가 되려고 한 게 오히려 부정 효과만 커진 셈이죠. 언젠가부터 이 사회는 현실의 내 모습에 실망하게 하고, 한계를 느끼게 하고, 불완전함을 느끼게 만들고 있습니다. 못난 나와 잘난 나를 분리해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을 떨쳐내야 할 텐데... "나도 놓고 싶어" 하면서도 놓아지지 않는 건, 결국 스스로 놓지 않는 거라고 단언합니다. 이것을 알아차리고 인정해야 해결의 문에 한 걸음 다가가는 거고요.

자기 미움이란 정체를 그저 머리로, 지식으로, 이론으로 아는 건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네요. 그냥 '하지말자'고 해서 저절로 멈추지도 않고요.  자기 미움의 숨은 기제는 알아채고 눈치채 무의식을 의식화하고, 생각은 생각일 뿐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에게 가장 이익이 되게, 진짜 이기적으로 되어보라고 합니다.

 
도대체 부정적 자아상은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나의 생각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고 부정적 생각과 부정적 자아상이 맞다는 착각. 더불어 나를 지키고 내가 옳다는 본능의 잘못된 적용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자기 미움>에서는 자책감과 죄책감의 본래 모습도 짚어주면서 자기 미움에 숨은 다양한 심리를 통찰하고 있습니다. 거절 못하는 심리까지도 해결되더라고요.


"우리에게는 자기 것이라 착각하는 '남의 목표'가 아니라, 스스로 세우는 '나의 목표'가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환상을 고수하면서 발생하는 불필요한 자책감, 죄책감에서 풀려날 수 있다." - 책 속에서


개인의 노력, 의지, 능력 범위를 넘어서는 사회가 유발하는 원인은 집단 모두의 변화가 필요한 거여서 솔직히 요즘 같은 세상에선 나만 노력한다고 되겠냐는 무력감이 더 커진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개개인의 건강한 심리가 더 중요하게 다가오기도 하네요.

<자기 미움>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타인보다 못하게 대하지 말아야겠다는 걸 다시 한 번 새겼어요.
최근에 읽은 <나에게 고맙다>에서도 정작 나에게는 소홀하게 한다는 걸 일깨워줬고, 요즘 읽고 있는 <나는 왜 싫다는 말을 못할까>에서도 거절을 못해 내가 놓치는 기회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줬습니다. 자기 미움의 정체가 상당히 폭넓고, 내 사고방식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구나 알게 되었네요. 지킬건 지키되 나에게 너무 칭찬에 인색하지 말아야겠습니다. 행복한 느낌이 충만한 삶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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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캣 2016-07-07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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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는 방법 새창으로 보기
다음 사이트 브런치에 연재 된 글을 묶은 책이라고 해서 읽었는데 오랜만에 좋은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힘이 되는 책인거 같다. 모든 사람은 크든 작든 자기에 대한 미움을 간직하며 산다. 100%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개 상대와 비교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 자신에 대한 미움, 열등감,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 일단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하게 되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나는 어떤 사람인지 자꾸 평가하고 불만을 갖는다.

읽다 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개인적인 자기 미움뿐 아니라 사회에 만연한 자기 미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요즘 사회를 보면 하나같이 ‘누가 정해놓았는지도 모르는’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저 사람보다는 내가 잘되어야 하는데’ 하며 나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나를 여러 번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나를 아직도 미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 덜 중요해도 좋다. 조금 덜 빛나도 좋다’는 마음이 생긴 것은 확실하다. 위로가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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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아이 2016-07-03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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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자기 미움 새창으로 보기
책제목이 자극적이여서 들고다니며 읽을때 조금 창피했다.내가 나를 미워한다는게 얼마나 멍청한짓인지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장수를 넘길수록 들고 다니는게 창피하지 않았다. 자기미움을 읽음으로써 ’자기미움’이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나는 20대 내내 아니 평생동안, 아니 어제까지도 가슴과 머리가 뜨거워질 정도로 비교하고 그들을 부러워하며 살았다.내가 안좋은 병에 걸릴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들 정도로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내 가족과 친구들은 이런 나를 안타까워했다. 그걸 아는 내자신은 더 안타깝고 후회되었다. 안쓰러웠다.
부정적 감정들을 바닥끝까지 겪어봤기에, 이 책이 주는 감동이 더한 것 같다. 웃기게도 새사람이 된 기분이다.

내일 또 겪을 감정의 스트레스를 두려워하기 보단,
내 감정을 기꺼이 경험해보면서, 나아가고 싶다. 의연해지고 싶다. 드라이하게 타인을 마주할 것이며, 내 존재자체에 집중할 것이다.


혹시 당신이 자존감이 낮다면,
비교때문에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다면,
부러움때문에 잠못잔다면,
감정에 휘몰아쳐 또 내편 네편 나누며 흑백논리속에 갇혀있다면, 그 누구보다 내 자신이 너무나 안쓰러우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자기미움의 실체를 마주하고 행복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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죤보통 2019-09-2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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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번뇌를 여의'는 걸 두려워할까?


왜 우리는 '번뇌를 여의'는 걸 두려워할까?

'여의다'는 슬픈 이별을 말한다
by무루 MuRuJan 19. 2016

자료를 정리하다 '번뇌를 여의다'라는 표현을 보았다. 그리고 '여의다'의 뜻이 무척 궁금해져서 검색을 하던 중 우연히 아래 칼럼을 보았다. 2015년 1월에 쓰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칼럼을 통해 이별을 뜻하는 '여의다'가 슬픔이 가득한, 공허함과 쓸쓸한 느낌의 말임을 더 선명히 알게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대표적인 표현이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이다. 주로 죽음에 의한 이별과 슬픈 이별의 경우에 쓰인다.(우선 아래 칼럼의 일독을 권한다)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3090360
[이 아침에]여의다의 뜻

'여의다'라는 말은 사용하기가 좀 그렇다. 제일 먼저 생각하는 표현이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여의다'라는 말은 슬픔이 가득한 말이다. 공허한 느낌으로

www.koreadaily.com

그런데 처음의 문장이었던 '번뇌를 여의다'와 연결하여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번뇌'란 결코 헤어지기에 슬프거나 저어되는 대상이 아닌데 왜 '여의다'라는 표현이 쓰였을까? 만약 할 수만 있다면 다들 벗어나고 싶은 게 번뇌인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사실 번뇌와 헤어지기 싫어한다. 번뇌를 놓기 싫어한다. 그래서 슬픈 이별인 '여의다'는 표현이 은연 중에 사용된 것이다.

무슨 말이지? 할 수만 있다면 걱정, 고민, 불안, 불만의 느낌과 생각인 그 번뇌를 다들 놓고 싶어 하는 거 아닌가?

물론 표면적으론 그런다. 그런데 기실 번뇌란 '나쁘고 부정적인 느낌과 생각'들만이 아니다. 번뇌는 우리 인간이 가지는 모든 느낌과 생각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무심한 것이든 모두. 이게 많이 간과되고 있는 부분이다.

말하자면 번뇌는 마치 망나니처럼 행동하는 식구와 같다. 자식이든 형제든 부모든 말이다. 혹은 오래 사귀고 있지만 이제는 서로 괴롭히고 고통만 주는 연인이나 파트너일 수도 있다. 골치 아프지만 우정을 배신할 수 없는 친구도 가능하다. 뭔가 못마땅하고 괴롭지만, 뭔가 이상하지만 그동안의 정과 익숙함 때문에 혹은 인연 때문에 쉽게 갈라지지 못한다. 헤어지지 못한다. 이미 내 가슴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골칫거리라 해도 어떻게 내 가슴의 일부를 떼어낼 수 있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가족, 연인, 친구, 지인 등과 '여의어야' 한다 말은 아니다. 위 말은 그냥 비유상 그렇다는 말이다. 실제 관계에선 대부분의 경우 최대한 지혜를 발휘해서 나와 상대를 개선시키고 관계를 개선시키는 게 가장 좋다. 그렇게 해야 한다. 물론 정 안되면 갈라서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번뇌'는, 간단히 말하면 우리의 생각이다. 우리는 주로 부정적 생각 등만 번뇌라고 여기지만, 위에서도 말했듯이 '모든 생각'이 사실은 번뇌이다. 많이 간과되던 이 부분을 잘 파악해야 비로소 뭔가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그럼 '생각'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하나? 그래야 번뇌를 여의게 되나?

물론 그건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생각을 하지 않을 순 없다. 오히려 생각은 아주아주 잘 하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한다. 좋은 도구이니까.

'번뇌를 여의다'는 표현은 그만큼 우리 인간이 자신의 생각 그 자체와 헤어지기 싫어한다는 뜻이다. 부정적인 생각만이 아니라 생각 그 자체와.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의 생각이 곧 우리 자신인 양 여겨지고 있는 상황에선 말이다.

하지만 '생각과 헤어지기'는 현상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인간의 뇌와 의식의 기능과 구조가 그렇다. 우리는 심지어 설사 그게 가능하다 해도 워낙이 자신의 생각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패턴이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자신을 부정하는 듯 느껴지고 여겨지기에 '생각을 부정하거나 멈추거나 여의는 것'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거부한다.

이것은 우리의 가장 큰 오해, 오류, 착각 중에 하나이다.
'생각을 여의'는 것을 '나를 여의'는 것으로 아는 것.

그런데 여기서 한 층 더 깊이 들어가 볼 수 있다. 사유의 층을 말이다.

사실은 '나'라고 하는 주체 설정도 단지 하나의(a) '생각'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론 생각을 여의는 게 나를 여의는 것이 되는 게 맞다. 아마 '어, 그런가?' 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 그렇다.

아마 그래서 우리 모두는 생각을 여의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 비밀을 은연중에 다들 느끼고 알고 있기에. 그렇지 않은가? 이미 '생각과 나의 동일시'가 단단히 패턴화 되어 있는 우리에겐, 생각(번뇌)을 부정한다는 것은 곧 나를 부정하는 것이 되는 게 당연하다. 비록 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럼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까? 번뇌를 여의곤 싶은데 정작 우리 속마음은 여의치 않으려 함에서 오는 이 미묘한 역설적 상황.

방법은 한 가지인데,
바로 번뇌의 정체를 알아채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생각의 정체이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나라는 주체 설정'의 정체이다.

애초에 그런 인위적인 '주체 설정' 따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래서 그 가상의 주체가 하는 생각을 그 가상의 주체와 동일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래서 그 생각과 동일시가 여러 가지 고통, 고민, 번민, 번뇌로 전변(변성) 되지 않게 되는 것.

(주의할 것은, 그런 주체 설정, 동일시, 생각을 안 해야 하거나 그런 게 떠오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상태는 예를 들어 멍 때릴 때, 잠잘 때, 기절했을 때 등에서도 항싱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깊은 사마타 명상 때도 일어난다. 그게 아니라 그것들의 정체와 본래 기능을 잘 알고, 그래서 본래 기능대로 잘 써주면서 다만 불필요한 대접과 대응, 매몰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의도적으로, 인위적으로, 애써서, 노력해서

번뇌를, 생각을, 나를 여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체가 무언지 알기에

저절로 여의게 되는 흐름.

사실은, 정체를 알면 더 이상 여의고 말 것도 없게 되는 흐름.


[출간 공지] 책 '자기 미움'의 출간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종이책 & 전자책)

- 가장 가깝기에 가장 버거운, 나를 이해하기 위하여

독자 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책 '자기 미움'이 출간되었습니다. 좋은 출판사 '북스톤'에서 종이책과 전자책 모두로 정성 들여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동안 브런치에 연재해 온 '자기 미움' 심리와 일상의 여러 부정적 감정들로부터 자유로게 되는 방법을 한 권의 책으로 묶었습니다. 이 책이 많은 분들에게 '나와 타인을 이해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책에는 또한 정체성 문제, 감정 다루기, 상처 넘어서기, 관계 문제 해결하기에 실제 도움이 되는 내용들과 구체적인 실천법들이 담겨 있습니다.

- 이경희 작가 드림


# <자기 미움> 종이책 링크: 네이버 책 / 교보문고 / 예스 24 / 알라딘

# <자기 미움> 전자책 링크: 리디북스 e-book / 교보문고 e-book

축하해 주세요! 책 <자기 미움>이 2016년 문공부 주최 '세종 문고'에 선정되었습니다. '인문/철학/심리' 영역에서 입니다. 선정 후 정부 지원으로 전국 2700여 도서관, 학교, 기관 등에 배포되었으며 전자책 출간 지원도 받았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지지와 응원 덕분이라 생각되어 깊이 감사드립니다.


<관심 작가 브런치>

이시스 작가의 브런치: 흥미로운 신화 이야기(신화 속에 있는 연인과 부부 유형), 힐링 동화, 시, 자기 치유, 따돌림에 대한 좋은 글들이 있는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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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 MuRu무루센터 출간작가
무루의 깨달음저자

무루 이경희. 저서 <무루의 깨달음> <자기 미움>. 무루센터 원장. 심리상담/트라우마 치료. 명상/깨달음 안내. www.facebook.com/MuRu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