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4

1903 박한식 [1] #길/박한식/1회/카터/상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길/박한식/1회/카터/상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길/박한식/1회/카터/상

등록 :2019-03-18 16:05수정 :2019-05-21 14:35

1970년대 중반 조지대아대 교수 시절
제자인 예비역 해군장교 하워드 버넬
카터와 해군사관학교 같은 반 ‘절친’
대선 나선 카터의 ‘국제정치 고문’으로

1976년 카터에 ‘주한미군 철수’ 제안
대선 공약 내걸자 박정희정권 ‘민감’
애틀란타 총영사에 ‘서울대 선배’ 배치

1994년 ‘전쟁막자’ 카터에 ‘방북’ 강권
‘퇴임 대통령 개입’ 거부하던 빌 클린턴
돌연 갈루치 북핵특사 카터 자택 보내
“클린턴 ‘최후통첩’ 김일성에 전해달라”
북한도 24시간 이내 공식 초청장 ‘화답’

정종욱 수석 전화 “카터 방북 막아달라”
‘불가’ 답하자 “서울 먼저 방문” 재요청


1994년 봄부터 이른바 ‘1차 북핵 위기’가 고조되자 박한식 교수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김일성 주석과 만나 평화 협상을 해달라’고 제안했다. 흔쾌히 수락한 카터는 6월15~18일 ‘첫 방북 드라마’를 펼쳐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해 6월17일 카터(왼쪽)와 김일성(오른쪽)이 대동강 유람선 위에서 두번째 회담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1회-카터의 첫 방북 드라마-상“클린턴 ‘카터 평양행’ 돌연 승락하자 김영삼도 급선회했다”



1994년 봄 한반도는 전쟁 직전의 위기로 치달았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북한의 영변 핵시설 폭격 준비를 거의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처럼 고조되던 위기는 지미 카터의 방북을 계기로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카터는 그해 6월 김일성과 만나서 북한 핵개발 동결 약속을 받아냈고, 그 약속의 내용을 곧바로 <시엔엔>(CNN)을 통해서 세상에 공개했다. 그러면 그때 퇴임한 지 10년도 지난 전 대통령 카터가 갑자기 북핵 위기를 극적으로 해결한 주역으로 등장한 배경은 무엇일까?

카터는 대통령 재선에 실패한 뒤 1982년 ‘인류의 평화를 유지하고, 질병을 퇴치하며, 희망을 북돋는다’(waging peace, fighting disease, building hope)는 목적을 내걸고 카터센터를 설립했다. 그리고 센터의 설립 정신을 충실하게 실천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카터가 대통령 재임 때보다도 퇴임 이후 더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평가한다.

사실 카터는 한반도의 비핵화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북한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체에서 비핵화가 이루어져야만 하고, 미국도 남한의 전술 핵무기를 모두 없애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카터의 그런 성향을 잘 알고 있었기에 북핵 위기 해결을 위한 그의 북한 방문을 적극 권했다. 카터도 나의 제안에 적극 호응해서 북한을 방문했던 것이다.

얘기를 계속하기에 앞서, 내가 카터를 알게 된 배경을 되도록 상세하게 얘기하고자 한다. 카터와 나의 독특한 인연이 1994년 1차 북핵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기여를 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박한식 교수의 조지아대 대학원 제자인 하워드 버넬은 카터와 1944년 미 해군사관학교 동기로, 76년 대선 출마한 카터의 국제정치 담당 고문을 맡아 두 사람을 연결해줬다. <한겨레> 자료사진



조지아주에서 태어난 카터는 1944년 미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46년 장교로 임관했다. 사진은 해사 졸업식에서 예비아내 로잘린(왼쪽)과 함께 한 모습이다. 두 사람은 한 동네 이웃 사이로 만나 46년 결혼했다. <한겨레> 자료사진나와 카터를 이어진 친구는 하워드 버넬이었다. 버넬은 1946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30여년동안 해군으로 복무했다. 그는 제대한 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내가 몸담고 있던 조지아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가 먼저 나를 찾아와 지도 학생이 된 것이다. 버넬은 자신의 부친이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 지역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카터와 버넬이 해군사관학교 재학 시절 같은 반 친구로서 대단히 절친한 사이였던 것이다. 버넬이 나의 지도학생이 된 1970년대 중반, 카터는 조지아주 주지사를 마치고 대통령 선거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터는 국제정치에 대한 식견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버넬을 자신의 국제정치 담당 고문으로 채용했다. 그러니 내가 그 고문의 스승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와 카터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카터에게 많은 국제정치학적 조언을 해주었고, 카터 역시 지금까지 내 얘기를 경청해 주었다. 가장 대표적 사례는 해외주둔 미군철수 문제였다. 나는 논문을 작성해서 해외 미군의 철수 필요성을 역설했다. 무엇보다도 미국을 위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미군이 해외에서 장기간 주둔할수록 반미감정이 전세계로 확산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카터는 나의 의견에 동의했다.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박한식 교수는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선 카터에게 주한미군을 비롯한 해외 미군 철수정책을 조언했고 카터는 공약으로 채택해 당선됐다. 1979년 6월29일 방한한 카터(오른쪽)는 박정희(왼쪽) 대통령에게 실제로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밝혀 파문을 일으켰다. <한겨레> 자료사진그러나 카터의 미군철수 정책은 미국에서 막대한 돈줄을 쥐고 있는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돈이 없으면 정치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돈줄이 차단된 카터는 결국 1980년 대통령 재선에서 실패했다. 나 역시 카터의 재선 실패에 도덕적 책임을 느낀다. 그래서 카터에게 미안하다고 얘기하곤 했다. 그러면 카터는 나의 얘기가 설득력이 있어서 자신이 받아들였으니 미군철수는 자신의 정책이라면서 나에게 미안해하지 말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1976년 첫번째 대통령 선거 출마 때 카터가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걸자 한국 정부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무렵 박정희 대통령의 외교담당 특보로 재직했던 함병춘은 카터와 “딱 붙어있는” 한국인 젊은 교수를 좋게 보지 않는 것 같았다. 카터가 아직 대통령에 당선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76년 12월 애틀랜타에 한국총영사관을 최초로 설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서울대 ‘까마득한’ 선배(오명호?)를 총영사로 보냈다. 아마도 나를 감시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았다.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공약에 놀란 박정희는 1976년 12월 북미에서 가장 먼저 애틀란타에 한국총영사관을 열고 박한식 교수의 서울대 정치학과 선배인 오명호를 초대 총영사로 보냈다. 사진 주애틀란타 총영사관 제공이제 내가 카터와 함께 1994년 북핵문제 해결에 관여한 얘기를 계속해 보기로 한다. 나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북핵 위기를 지켜보면서 기존의 연구 주제를 미뤄둔 채 한반도 전쟁 저지에 온 관심을 기울였다. 내가 일찌기 유년기에 직접 체험했던 한국전쟁의 참상이 한반도에서 또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터에게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을 직접 만나달라고 강권했다. 카터의 방북을 통해서 북미간의 경색된 대화 채널이 재개되고,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마련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카터 역시 나의 제안에 공감하고 방북을 희망했지만 곧바로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카터의 방북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클린턴이 볼 때 북핵문제는 현직인 자신이 해결해야 할 사안이지 퇴임한 카터의 몫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북핵특사가 조지아주 플레인스에 있는 카터의 자택을 방문했다. 플레인스는 공항이 없는 변두리의 작은 시골마을이다. 그곳은 애틀란타에서 자동차 타고 5시간 정도 가야만 겨우 도달할 정도로 외진 곳이다. 그런데도 갈루치가 집까지 직접 방문했다는 사실은 카터에게 전달할 클린턴의 분명한 메시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1994년 6월초 카터의 ‘방북특사’ 제안을 전격 수용한 클린턴 대통령은 로버트 갈루치 북핵특사를 조지아주의 작은 마을 플레인스에 있는 카터의 자택(사진)으로 보냈다. 사진 박한식 교수 제공그뒤 카터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클린턴이 방북을 허락했으니 수속을 좀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카터를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클린턴의 ‘최후통첩’(ultimatum)을 김일성에게 전달하는 것이 방북 목적이라고 했다. 상황이 급하게 돌아갔다. 또한 카터는 북한의 공식 초청장이 필요하다고 그랬다. 나는 영문 초청장 초안을 작성해서 북한에 전달했다. 북한에서는 24시간 내에 내가 잡아준 초안에 따라 초청장을 완성해서 나에게 팩스로 보내주었다. 한밤중이었다. 나는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학교 연구실 팩스가 아니라 우리집 지하실에 있는 팩스로 받았다. 나는 곧바로 카터에게 전달했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카터에게 전화해서 초청장 수령을 확인했다.

카터는 방북 수속을 밟는 와중에서 나에게 북한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했다. 자신은 북한 내부 사정을 잘 모르니까 북한에 함께 가면서 자신이 꼭 알아야 할 사항을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 역시 카터와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내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한국사람이다. 또 미국 시민권자이기도 하다. 그럼 북한에 가서 카터 옆에 앉아야 할까? 그렇게 되면 결국 ‘이완용’처럼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김일성 옆에 앉을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 그런 고민을 밤새도록 하다가 결국 방북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 대신 약 40쪽 분량의 북한 브리핑 자료를 작성해서 카터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나는 워낙 몸이 약해서 밤을 지새우면서 작업하는 일은 평생토록 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터에게 제공할 브리핑 자료만은 밤을 지새우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작성했다. 카터의 치밀한 성격을 고려하면 아마 그 자료를 거의 암기하고서 북한에 들어갔을 것이다.



1994년 6월15일 ‘방북 특사’ 카터는 판문점을 통한 육로 방북으로 또한번 세계적인 화제를 낳았다. 군사분계선을 넘기 전 남쪽 환송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카터(맨왼쪽)를 동행할 보인 로잘린(오른쪽 둘째)과 제임스 레이니(맨오른쪽) 주한 미대사가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카터가 비행기를 타고서 태평양 상공을 날아가고 있을 즈음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종욱과 나는 서울대 정치학과 동창이다. 김영삼 정부에서 카터의 방북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카터와 가까이 지내는 내가 카터의 방북을 막아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나는 카터를 태운 비행기가 이미 떠났다고 답했다.

그러자 청와대는 계획을 수정해서 내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카터가 평양에 앞서 서울을 먼저 방문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울러 카터가 김일성을 만나면 청와대의 ‘남북정상회담’ 제안을 전달해 달라고 그랬다. 나는 청와대의 제안을 카터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카터는 타고간 비행기로 평양에 직행하는 대신, 서울에서 도보로 38선을 건너서 북한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카터는 한국·북한·미국의 양해를 얻어 자기의 뜻을 실현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랄 일이었다.

집필/이현휘 제주대 사회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 구술정리/박연진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86342.html#csidx0cd37006dbd017da96f2a3c3a87c565

1905 박한식[4] ‘칠흑같은 북한’ 한반도 야경 사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칠흑같은 북한’ 한반도 야경 사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칠흑같은 북한’ 한반도 야경 사진의 진실은 무엇인가

등록 :2019-05-05 21:01수정 :2019-06-03 09:56

길을 찾아서-4회 시브이아이디(CVID)가 불가능한 까닭
80·90년대 북에서 겪은 ‘팀스피릿 훈련’
한미 연합군사훈련 때면 ‘전시’ 초비상
농번기 맞물리면 한해 농사에도 악영향

집집마다 미군 공습 대비 ‘야간소등’
나사 위성촬영 사진 ‘남북 대비’ 선전
“북 전력난 극심-남 경제발전” 왜곡

“미군이 돌연 선제공격하면 어쩌나”
학자·고위급 정치지도자들 ‘공포감’

‘완전·검증 가능·불가역적 비핵화’
북-미 서로 불신하는한 실현 불가능



길을 찾아서-4회 시브이아이디(CVID)가 불가능한 까닭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시작된 이른바 `북핵위기'는 그로부터 무려 26년이 지난 2019년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동안 미국, 중국, 북한, 한국 등이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의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예컨대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가 체결되었고, 2005년에는 9·19 공동성명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성과는 이내 와해되고 말았다. 또한 그런 협상이 반복될수록 북핵위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북핵위기는 오히려 악화되는 패턴을 보였다. 북한은 현재 실질적인 핵 보유국가가 되지 않았는가? 도대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기이한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1981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후 지금까지 50회 이상 다녀오면서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북한을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과 북한 사람들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시각으로 북한을 해석하고, 또 심지어 그런 시각을 북한에 강요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시각을 통해서는 북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시각은 오늘도 여전히 북한을 강제하고 있다.

나는 그런 시각으로 북한을 재단하는 행위를 ‘인식론적 제국주의’(epistemic imperialism)란 용어로 개념화했다. 아울러 인식론적 제국주의에 입각해서 입안된 모든 북핵위기 해법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난 26년 동안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궁극적 까닭 역시 인식론적 제국주의에서 찾아야만 한다고 본다.

나는 2002년 <통념을 넘어서 본 북한정치>(North Korea: The Politics of Unconventional Wisdom)(린 리너 출판)를 출간했다. 북한의 정치문화를 직접 관찰하고, 또 북한 내부 학자들과 진지한 토론을 거듭하면서 터득한 주체사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책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2년 나는 또 한 권의 북한 연구서를 동료 학자들과 함께 펴냈는데, <탈신비화시킨 북한>(North Korea Demystified·케임브리지 프레스)이 그것이다. 우리의 통념으로 각색된 북한의 모습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2018년에는 우리말로 된 북한 연구서 <선을 넘어 생각한다>(부키)를 펴냈다. 책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통념의 한계를 넘어서서 북한을 이해하자는 제안을 하고 싶었다.



2014년 1월 미국 항공우주국(나사)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찍은 한반도의 야경 사진으로, 그해 <로이터>에서 ‘올해의 사진’으로 뽑혀 화제를 모았다. 박한식 교수는 흔히 ‘남북한의 경제 발전상 대비 자료’로 널리 쓰이고 있는 이런 사진이 미국의 북한에 대한 ‘인식론적 제국주의’ 시각을 상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2년 펴낸 박한식 교수의 저서 <통념을 넘어서 본 북한정치>(린 리너 출판)그런데 약 10년을 주기로 출간된 나의 책 제목들이 어떤 공통의 명제로 수렴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넘어서서 북한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사람들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담고고 있었다. 그런 나의 연구 태도를 ‘엠퍼시’(empathy)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는데, 우리말로 의역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 정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은 현재 이른바 시브이아이디(CVID), 즉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북한에 요구하고 있다. ‘영구적이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뜻하는 피브이아이디(PVID), ‘최종적으로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를 뜻하는 에프에프브이디(FFVD) 등의 용어도 사용하고 있지만, 시브이아이디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시브이아이디가 미국의 인식론적 제국주의를 전형적으로 반영한 개념이라고 판단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북한의 핵 개발 동기를 전적으로 무시하면서 일방적으로 무조건 핵을 없애라고 강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국제정치의 세계에서 실현 불가능한 비현실적 개념이라는 사실도 주목해야만 한다.

시브이아이디에서 ‘시’(C), 즉 `완전한’(Complete)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은 크게 일반사찰과 특별사찰로 나뉜다. 보통은 일반사찰로 한다. 북한이 자발적으로 핵무기 소재지와 핵무기 수량 등을 신고하면 원자력기구 에서 현지를 방문해서 검증한다. 북한이 신고한 곳의 일부를 샘플로 선별해서 검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사찰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려면 반드시 북한에 대한 `신뢰'를 전제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 원자력기구나 미국은 북한을 극단적으로 불신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아무리 정직하게 신고한다손 치더라도 믿지를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특별사찰은 더더욱 어렵다. 원자력기구에서 북한이 신고한 곳뿐만 아니라, 자체 분석에 따라 핵무기 소재지로 의심되는 곳까지 검증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사실상 북한의 모든 곳을 뒤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는가? 그런데도 원자력기구와 미국이 특별사찰을 강행한다면 북한은 자국의 주권을 유린하는 행위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총격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시브이아이디에서 `브이’(V), 즉 `검증 가능한'(Verifiable) 비핵화는 더욱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핵무기 전문가가 북한이 신고한 지역을 검증해야 한다. 그러나 원자력기구와 미국은 근본적으로 북한을 믿지 않으니 신고 지역만 보고 검증할 생각이 없다.

시브이아이디에서 `아이’(I)', 즉 `불가역적'(Irreversible) 비핵화 역시 사실상 실현 불가능하다.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고, 또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전문가, 핵무기를 만든 경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원료 등도 보유했다. 따라서 북한이 현재 보유한 핵무기를 모두 폐기한다손 치더라도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불가역적' 비핵화가 가능하겠는가?

이런 분석을 종합해보면 시브이아이디는 개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핵위기의 해법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시브이아이디는 이제 그만 얘기해야만 한다.

북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북한의 처지에서 핵을 보유한 까닭을 정확하게 진단할 필요가 있다. 나는 앞에서 얘기한 엠퍼시(역지사지)를 통해서 그런 진단을 해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2012년 나온 박한식 교수의 편저 <탈신비화시킨 북한>(케임브리지 프레스)나는 이른바 남쪽의 `팀스피릿훈련'(1976~93) 기간 중에 북한에 머물며 상황을 지켜본 적이 여러번 있었다. 팀스피릿훈련은 북한 공격을 목적으로 시행된 한미 합동군사훈련이었다. 해마다 두 달 남짓 동안 냉전시대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으로서 참가병력이 20만~30만명에 이르기도 했다. 남쪽에서 팀스피릿훈련이 시작되면 북한은 곧바로 전쟁상태에 돌입한다. 미국은 훈련이라지만, 언제든지 총부리를 북한으로 돌릴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전쟁 상태에서 일상생활은 전면적으로 마비된다. 팀스피릿훈련이 주로 농번기여서 북한은 농사 준비도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악순환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면서 북한은 필사적으로 자구책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내 찾아낸 해법이 바로 `핵무기'였다. 더욱이 북한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핵무기를 포기하면서 이내 죽음을 당하고, 또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미국에 의해 쉽게 살해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핵무기가 정답이라는 판단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1981년부터 최근까지 거의 해마다 북한을 방문해온 박한식 교수는 한미 연합군사훈련인 ‘팀스피릿훈련’ 때마다 전쟁 상황에 휩싸이는 북한 지도자들과 주민들의 공포를 현지에서 여러차례 체험했다. 사진은 1984년 팀스피릿훈련 때 ‘청군’으로 참가한 주한미군의 모습이다. 사진 국방홍보원

나는 팀스피릿훈련 시기에 북한의 교수나 일반 주민의 집을 방문해서 그들의 대처방식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들은 밤이 되면 일제히 소등을 하고 창문에 커튼을 친다.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틀어막는 것이다. 혹시라고 불빛이 새어 나가면 정부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는다. 그러면 북한 전역이 곧바로 칠흑 같은 어두움에 휩싸인다.

그런데 미국 항공우주국(나사)에서 위성으로 촬영한 한반도의 야경 사진을 종종 잡지나 언론을 통해 널리 유포되고 있다. 온통 깜깜한 북한의 모습과 대낮같이 밝은 남한의 모습을 선명하게 대비되는 사진이다. 팀스피릿훈련 같은 때 북한에 머문 적이 있었던 나로서는 실소를 하거나 때로는 화가 날 정도로 북한의 현실을 왜곡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얼마나 전기가 없으면 북한 전역이 저렇게 깜깜할 수 있단 말인가? 전기가 풍족한 남한은 저렇게 대낮처럼 밝은데 말이다. 참으로 지옥과 같은 북한과 비교하니 남한과 같은 천국이 따로 없지 않은가?!' 내가 직접 목격한 북한의 밤이 평상시에는 그 정도로 깜깜한 적은 없었다.



1976년 박정희 정권의 요청으로 시작해 93년까지 해마다 시행된 팀스피릿 훈련은 ‘평화수호를 위한 한미 결속의 훈련’(1990년) 구호처럼 방어작전을 표방했으나 북한이 자구책으로 ‘핵개발’에 나서는 빌미가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5년 3월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을 주도했던 럼스펠드(맨왼쪽) 미 국방장관이 ‘남북 대비 한반도 야경 사진’을 미국 방문중 펜타곤의 집무실을 찾은 박근혜(맨오른쪽) 당시 한나라당 대표 일행에게 보여주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팀스피릿훈련이 진행되는 와중에 북한의 학자나 고위급 정치지도자과 대화를 해본 적도 여러차례인데, 그럴 때면 내겐 북한이 먼저 남한을 공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특히 북한의 고위급 지도자들은 지금까지 미국의 공격에 대비해 막강한 무력을 준비해왔음에도, 자칫 선제공격을 당해 대응조차 못하게 되는 상황을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나는 미국의 공격에 대한 극도의 `공포' 때문에 북한이 먼저 남한을 공격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생각해 보라.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History of the Peloponnesian History)에서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팽창에 `공포'를 느낀 나머지 먼저 공격했다는 사실을 무려 3차례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북-미간 북핵위기가 해결되지 않는 한 북한의 선제공격 가능성은 상존한다고 믿고 있다. 1993년 팀스피릿훈련이 공식적으로 종식된 이후에도 명칭을 달리한 한-미 군사훈련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 내가 직접 확인한 북한의 전시 대비 상황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05년 미 국무장관 럼스펠드가 공개해 화제를 모은 집무실 탁자 위의 한반도 야경 사진. 나사에서 2003년 9월 위성으로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겨레> 자료사진그런데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내가 북한을 거쳐 남한에 와보면 완전히 딴 세상이란 것이다. 남쪽에서는 팀스피릿훈련 중에도 전쟁 가능성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한은 북-미간의 심각한 긴장구조와 그로인해 반복적으로 전쟁 상태에 내몰리는 북한의 실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북한이 미국에 대해서 느끼는 극심한 공포와 그 공포에 따른 선제공격 가능성은 더더욱 모르고 있었다. 단지 그런 실상과 완전히 동떨어진 `색깔론'만 난무하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색깔론 강변이 곧 애국적 행위인 것처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 그처럼 공허한 색깔론으로 한반도의 참혹한 전쟁을 방지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한반도에서 또 다시 전쟁이 터져도 북한이라는 `악마'가 일으켰다고 저주만 할 것인가?

`전쟁은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는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오직 누가 살아 남았는지 만을 결정할 뿐이다.'(War does not determine who is right ― only who is left)

버트런드 러셀의 이 경구를 기억하는 것, 한반도 평화의 길에 첫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92723.html#csidx05c5c30aa68c3f99291d13246edc711

1904 박한식[3] “제재에 굶어 죽는 북한 아이들…관리들 껴안고 울었다”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제재에 굶어 죽는 북한 아이들…관리들 껴안고 울었다”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제재에 굶어 죽는 북한 아이들…관리들 껴안고 울었다”

등록 :2019-04-15 10:00수정 :2019-04-15 10:05


1994년 ‘제네바 합의’ 경수로 지원 약속
미국 불이행에 북 ‘고난의 행군’ 시작
그무렵 방북…탁아소 아사 현장에 충격

1998년 김정일 ‘선군정치’ 본격 나서
미 경제제재 더 강화 국제사회도 가세
“정통성 기반 북체제 이해 못한 실패책”

유니세프 ‘북 아동 6만명 아사 위기’ 보고
핵은 미실행 위협…제재는 생존권 문제
“식량무기가 핵무기보다 더 잔인하다”

북-미 서로 다른 ‘인권 개념’ 이해 필요
2차대전 승전국 잣대인 ‘세계인권헌장’
‘인류 보편적 가치’ 표방하지만 배타적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를 통해 한반도는 전쟁의 위기를 넘겼으나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을 이겨내고자 ‘고난의 행군’에 돌입했다. 90년대 중반 북한의 탁아소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던 박한식 교수는 “북의 인권 문제를 구실로 삼은 미국의 경제제재 탓에 어린이들의 정작 기본 인권인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는 모순”을 지적한다. ‘고난의 행군’ 시기 영양실조 상태로 보이는 북한 탁아소의 아이들 모습. 연합뉴스1994년 10월 체결된 ‘제네바 합의’에서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동결 대가로 북한에 1000MWe급 경수로 2기를 제공하고, 경수로 완공 때까지 연간 중유 50만t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의 약속 불이행은 북한의 에너지 상황을 크게 악화시켰다. 그리고 그 여파는 1990년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로 그대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서 미국의 약속 불이행은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를 악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이 겪은 참상은 약 200만명의 북한 인민이 굶어 죽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다. 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때마다 목에 붉은 띠를 두른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이 군가를 부르며 행군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배고픔을 강인한 정신력으로 견디기 위한 말 그대로 ‘고난의 행군’이었던 것이다.


1998년 김정일은 이른바 ‘선군정치’(Military-First Politics)를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그러자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는 더욱 강화되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많은 나라들도 미국의 정책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의 경제제재에 굴복해서 미국의 뜻에 순순히 따를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북한은 정치체제의 ‘정통성’(legitimacy)의 기반을 경제적 부가 아니라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의 경제제재를 통해서 북한의 경제적 기반이 훼손되더라도 주체사상이라는 정통성의 기반은 거의 훼손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미국이 대북 경제제재를 통해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이 지금까지 실패한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경제제재를 지속적으로 강제하고 있다.



1998년 김정일은 경제난 돌파와 체제 강화를 위해 ‘선군정치’를 본격 시행하고 나섰다. 2010년 8월2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 선군혁명영도 시작 50주년 기념 선군절’도 제정했다. 사진은 2005년 선군정치연구소조의 선전 포스터.그러나 우리는 “식량무기가 핵무기보다 더욱 잔인한 무기”라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국제정치학에서 핵무기는 전쟁 수단이 아니라 외교적 협상 수단으로 이해한다. 핵무기의 엄청난 파괴 능력이 오히려 실제 사용을 제한하는 역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사용하는 식량무기는 매일 먹어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인간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실제로 1990년대 미국이 주도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이라크 경제제재는 13년간 지속되었는데, 그로 인해 5살 미만의 어린이 약 50만명이 굶어 죽었다. 또한 2018년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의 한 조사보고서를 보면 미국 주도의 대북 경제제재로 약 6만명의 어린이가 굶어 죽을 지경에 처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부모는 이미 굶어 죽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실제 희생자는 6만명을 훨씬 넘어설 수밖에 없다.

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의 한 탁아소를 방문했다가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그때 나를 안내하는 북한 관리들에게 이들의 부모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모두 죽었다고 답해 주었다. 생각해 보라. 굶어 죽어가는 자식을 둔 부모는 자신이 굶어 죽는 그 순간까지 마지막 남은 음식을 자식에게 모두 주지 않겠는가? 그때 탁아소에서 굶어 죽어가던 어린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이라고 믿는다. 나는 북한 관리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왔지만 참담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죽어가는 아이들의 처참한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방문을 조용히 걸어 잠갔다. 이어서 나보다 키가 두배 가까이 큰 북한 관리들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키가 작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나보다 키가 작은 사람을 딱 2명 봤는데, 박정희와 덩샤오핑(등소평)이 그들이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그들의 얼굴을 쏘아보면서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쳤다. 그들의 안경이 땅에 떨어졌다. 나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 “너희들 ‘배때기’는 이렇게 멀쩡한데,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탁아소의 아이들이 저렇게 죽어가느냐!” 그러자 북한 관리들이 곧바로 나를 부둥켜안았다. 우리는 다 함께 방바닥에 쓰러져 흐느껴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서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지난 2월 북-미 2차 정상회담에서 트럼프(왼쪽) 대통령은 김정은(오른쪽) 국무위원장의 ‘경제제재 일부 해제’ 요구를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2월28일 하노이의 메트로폴 호텔에서 열린 이틀째 확대회담의 결렬 직전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김정은은 지난 2월28일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미국에 ‘유엔 제재의 일부, 즉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의 해제’를 요구했다. 김정은의 요구는 기아에 허덕이는 북한 인민의 실상을 개선하려는 의지를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김정은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미국 의회에서는 북-미 하노이 정상회담의 결렬을 환영하면서 북한의 인권 탄압 등의 이유로 경제제재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의 경제제재로 6만명에 이르는 북한의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 미국이 그토록 강변하는 ‘인권’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가?

나는 조지아대학에 재직하면서 수십년에 걸쳐 인권 문제를 연구했다. 대학원에 인권 과목을 개설해서 수십년간 강의를 했고, 1995년부터 ‘국제문제연구소’(Center for the Study of Global Issues, GLOBIS)를 만들어 강의실 밖의 인권 문제를 연구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인권을 외교정책의 의제에 포함시킨 지미 카터와 수십년에 걸쳐 인권 문제를 토론하면서 나름의 인권 개념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박한식 교수는 1995년 조지아대학에서 ‘국제문제연구소’(GLOBIS)를 세워 ‘북한 포럼’을 여는 한편 강의실 밖 인권 문제 연구와 해결 방안을 주도적으로 모색해왔다. 조지아대 누리집 갈무리.내가 공부한 시각에서 보면 미국의 ‘인권 개념’에는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국가들의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인류 보편의 가치가 아니라, 미국을 포함한 승전국의 제한된 시각을 반영한 특수한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또한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북한도 북 나름의 인권 개념을 보유하고 있다. 내가 볼 때, 미국과 북한의 인권 개념은 각각 장단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인권은 미국이 독점한 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볼 때 인권은 크게 3가지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있다. 첫째, 천부권(universalism)이다. 세상에 태어난 인간이면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미국에는 인권이 있고, 북한에는 인권이 없다는 식의 얘기는 성립할 수 없다. 둘째, 양도 불가능성(inalienability)이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는 권리로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셋째, 공동 책임성(entitlement)이다. 예컨대 평양에서 아이가 굶고 있으면 아이의 책임이 아니라 나의 책임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또한 나는 천부권, 양도 불가능성, 공동 책임성에 기초를 둔 인권은 크게 6가지 차원으로 구성되었다고 본다. 첫째, 생존권(life right)이다. 인간이 생명을 유지할 권리로서 인권에서 가장 중요한 차원을 차지한다. 둘째, 귀속권(belonging right)이다. 인간이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삶을 영위할 권리다. 셋째, 평등권(equality right)이다. 인간이 어떤 이유로도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다. 넷째, 선택권(choice-making right)이다.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가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다. 다섯째, 사랑권(love right)이다.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예컨대 남자와 여자는 각자의 가정에 소속되어 있다. 가정의 권위를 생각하면 중매결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사랑의 권리는 부모가 결정할 수 없다. 그래서 바로 그 남자와 여자에게 소중한 권리다. 또한 이산가족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권리도 사랑권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섯째, 해방권(liberation right)이다. 인간이 시간과 공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종교적 해방 내지 해탈을 의미한다. 인권은 이상의 6가지 차원을 모두 충족할 때 완전히 실현될 수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의 인권 개념은 1948년 12월10일 유엔에서 발표한 ‘세계인권헌장’에 담겨 있다. 박한식 교수는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잣대를 북한에 적용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유엔의 1950년 세계인권헌장 제정 2돌 기념사진.미국이 인류 보편의 가치로 강변하는 인권 개념의 구체적 모습은 1948년에 제정한 ‘세계인권선언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에서는 모든 인간의 천부적 자유(free)와 평등(equal)을 동시에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는 자본주의의 키워드이고, 평등은 사회주의의 키워드이다. 따라서 양자는 이론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그런데도 세계인권선언문 제1조에서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규정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의 욕망을 동시에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자본주의 국가 미국의 자유와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평등을 단순히 병치시킨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역설하는 인권 개념은 인류 보편의 가치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미국의 인권 개념은 내가 분류한 인권의 6가지 차원 중에서 ‘선택권’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면서 구성되었다. 미국이 중시하는 선택권이란 결국 정치적 자유를 의미하며, 그런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민주주의 체제를 요구한다. 그러나 미국의 인권 개념은 내가 분류한 인권의 6가지 차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권’을 경시하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미국이 자국의 가혹한 경제제재로 수많은 북한 어린이들이 굶어 죽을 처지라는 명백한 사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북한의 인권을 끊임없이 비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요컨대 미국은 경제제재를 통해서 북한 인민의 생존권이라는 인권을 무자비하게 유린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를 선택한 북한은 국가의 주권을 개인의 인권보다 우선시한다. 국가의 주권이 보장되어야만 개인의 인권 또한 보장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의 인권 개념은 미국의 인권 개념에서 강조하는 ‘선택권’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인권 개념은 내가 분류한 인권의 6가지 차원에서 ‘생존권’ ‘귀속권’ ‘평등권’을 대단히 중시하는 방향에서 구성되었는데, 이 3가지 권리는 모두 미국의 인권 개념에서는 취약한 양상을 보인다.

위와 같은 분석에 따른다면, 미국이 신봉하는 인권 개념과 북한이 신봉하는 인권 개념은 모두 상대적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이 신봉하는 인권 개념으로 북한을 아무리 강력하게 비판한다손 치더라도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다. 북한은 미국과 전혀 다른 인권 개념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아랍권의 이슬람교를 비판한다고 해서 그 비판이 아랍권에 먹힐 수 있겠는가?

미국이 북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토록 장기간 노력했는데도 지금까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궁극적 까닭은 미국이 당연시하는 ‘사유양식’(modes of thought)에서 자리하고 있었다. 미국은 자국에 친숙한 인권 개념으로 북한을 규탄하면서 경제제재를 강제하면 북한이 굴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런 기대는 지금까지 실현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을 악마로 간주하면서 끝없이 압박하고 위협하는 대신, 그래서 수없이 많은 북한 인민을 ‘생지옥’으로 몰아넣는 대신, 미국한테 친숙한 사유양식 그 자체를 혁신하는 노력을 경주해야만 한다. 그래서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책을 새롭게 입안해서 실천해야만 할 것이다. 미국이 굶어 죽기 직전에 있는 북한 어린이의 ‘인권’을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말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90021.html#csidx666e75743085ebeb8fa2a2b7babc1d4

1904 박한식[2] “클린턴 행정부는 내게 자꾸 물었다…영변 폭격하면 어찌될까”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클린턴 행정부는 내게 자꾸 물었다…영변 폭격하면 어찌될까”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클린턴 행정부는 내게 자꾸 물었다…영변 폭격하면 어찌될까”

등록 :2019-04-01 16:06수정 :2019-05-21 14:38



길을 찾아서-2회-카터의 첫 방북 드라마-하
1994년 6월16일 카터 백악관에 ‘통보’
“김일성 ‘북핵동결 합의’ 공개하겠다”
곧바로 CNN 평양 특파원과 인터뷰
‘폭격 대기중’ 클린턴과 한동안 ‘냉랭’

‘북핵 폭격 해결’ 주장은 순진·위험
“북은 반드시 보복 공격 할 것이다”
6·25때 초토화된 북은 ‘전국 땅굴화’
남은 초고밀도·인구집중 ‘살상 막대’

합의 21일뒤 ‘김일성 급서’ 들은 카터
정성어린 조문 편지에 북 관리 ‘눈물’

‘김일성 유훈’ 10월21일 ‘제네바 합의’
미국도 일본도 한국도 ‘지원’ 불이행

“3개월 못버틴다” 전략적 인내 ‘고수’
“북한붕괴론의 5가지 허상 깨달아야”
주체사상·선군정치

길을 찾아서-2회-카터의 첫 방북 드라마-하1994년 6월16일 평양에서 카터가 김일성과 만나서 합의한 ‘북핵 동결’은 먼저 클린턴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워싱턴시각 15일) 카터는 평양에서 백악관의 로버트 갈루치에게 전화를 해서 합의 내용을 전달한 다음, <시엔엔>(CNN) 인터뷰를 통해 그 내용을 미리 공개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리고 실제로 인터뷰를 진행해버렸다. 카터는 합의 내용이 세상에 빨리 공개되지 않으면, 이미 충분히 준비된 미국의 ‘북한 영변 폭격계획’이 실행에 옮겨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카터의 조처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한동안 냉랭하게 지냈다.



1994년 6월16일 ‘글린턴의 특사’ 카터가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핵 개발 동결’에 합의한 사실을 <시엔엔>과 현지 생방송 인터뷰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시엔엔 화면 갈무리실제로 그때 카터가 김일성과 만나서 북핵 동결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면 클린턴 행정부는 영변을 폭격할 계획이었다. 그런 와중에 클린턴 정부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여러 차례 했다. “미국이 영변을 폭격했을 때 북한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에서는 요즘도 미국이 그때 영변을 폭격했다면 북핵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발언은 북한의 실상을 전혀 모른 채 오로지 북한에 대한 극단적 증오심에 기초해서 내뱉는 순진하고도 위험천만한 생각의 소산일 뿐이다. 나는 “미국이 영변을 폭격하면 북한은 반드시 보복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면 북한이 어떤 식으로 보복할 것으로 보느냐고 나에게 다시 질문했다. 이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주한 미군기지, 주일 미군기지, 괌 주둔 미군기지 등을 폭격할 것이다”, “미군기지 주변에는 많은 민간인도 살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북한이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폭격하면 수십만명의 인명이 살상될 것이다”, “미국은 반드시 국제사회에서 그 피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1994년 6월16일 미국 워싱턴(현지시각 15일)의 백악관에서 회의중이던 고어 부통령, 윌리엄 페리(맨오른쪽) 국무장관 등 클린턴의 참모들이 <시엔엔>을 통해 카터의 인터뷰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 돈 오버도퍼 <투 코리아> 중에서.한편, 1950년 무렵 평양의 인구는 약 100만명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전쟁 때 미국 공군은 평양에 약 1만개 정도의 폭탄을 투하했다. 100명당 1발꼴로 폭탄비를 쏟아부은 셈이다. 그 시절엔 한 집에 보통 10명 정도의 대가족이 살았다. 따라서 평양에는 약 10만 가구가 있었던 셈인데 미군의 폭격으로 그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물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북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바로 이 때문에 북한의 미국에 대한 원초적 적대감이 끊임없이 분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통해 미 공군 폭격의 위력을 목격하면서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땅굴을 파서 방공호를 만드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아마도 북한은 현재 세계에서 땅굴을 가장 잘 팔 수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양의 지하철도 지하 100m 깊이에서 운행된다. 대동강 강바닥 밑으로 지하철이 다니는 것이다. 또한 그 지하철 내부에는 방대한 영역의 대피소가 있다. 지하철이 곧 거대한 방공호인 셈이다. 따라서 유사시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평양 시민들은 마치 ‘개미새끼처럼’ 지하의 방공호로 모두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 미국은 폭격할 목표 지점을 확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반면 미국의 우방인 남한의 사정은 어떤가? 남한에서는 모든 것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다. 서울의 자동차만 하더라도 수백만대에 이른다. 그런데 모든 차에는 연료(가솔린, 디젤, 액화천연가스 등) 탱크가 장착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에서 한국을 폭격하면 자동차들이 곧 폭탄이 되어 버린다. 또한 한국에서는 집집마다 도시가스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그 집들도 폭격을 당하면 이내 폭발해버릴 것이다. 자, 미국 당신들 남한과 북한을 비교해 보라. 당신들이 영변을 폭격하면 우방국인 남한 사람들은 수백만명이 죽어 나갈 것이지만, 정작 북한 사람들은 그만큼 죽지 않는다. 이처럼 빤하게 보이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 전쟁이 나면 북한이 남한보다 우세하다. 심지어 미국보다 북한이 우세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식의 얘기를 카터에게도 전하고, <시엔엔> 등 여러 유력 언론에 나가서도 되풀이 경고했다. 그러자 좀 진보적 시각을 지닌 많은 사람들은 나를 찾아와서 더 얘기를 듣고 싶어 했다. 다행히 그들은 대부분 쉽게 내 얘기에 수긍했다.

그러나 한국의 김영삼 정부는 전쟁 방지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전쟁의 파국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해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오히려 카터의 방북을 반대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미 공군의 집중 폭격으로 초토화된 평양 시내 전경. 박한식 교수는 ‘미제에 대한 북한의 원초적 적대감’의 뿌리이자 트라우마가 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창비 제공카터는 그해 16월15~18일 3박4일간 평양을 다녀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달이 채 되지 않은 7월8일 김일성 주석이 급서했다. 카터는 평양에 다시 들어가 조의를 표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평양에 정성 들여 쓴 편지를 보냈다. 북한에서 영어 잘하기로 손꼽히는 한 참사관이 카터의 그 편지를 읽고서 엉엉 울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방송을 통해 김일성의 장례식에 ‘외국인 조문 사절 원칙’을 발표했다. 그래서 카터의 조문 방북을 거절했다. 나는 훗날 카터의 편지를 읽고 울었다는 북한 참사관을 카터에게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 북한 참사관은 카터에게 정중하게 답례 인사를 했다.



1994년 6월15~18일 3박4일간 1차 방북을 통해 ‘1차 북핵 위기’를 해결한 카터는 세계적인 평화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앞서 16일 ‘북핵 동결 합의’를 전격 발표하면서 클린턴과 사이가 불편해진 때문인지 18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환하는 카터의 표정이 밝지 않아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나는 김일성 서거 당일 로마에 있었다. <시엔엔>에서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나는 그때 북한 쪽에 “내가 당장 북한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시엔엔>은 북한과 소통할 수 있는 핫라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가능했다. 하지만 내게 돌아온 답변은 “북한에 오셔서 통곡하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평양에 가지 않았다.



1994년 6월15~18일 첫 방북한 ‘북핵 특사’ 카터는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만나 전격적인 ‘북핵 동결’ 합의를 끌어냄으로써 한반도 전쟁 시계를 극적으로 멈추게 했다. 그 3주 뒤인 7월8일 김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과 12일간의 국장 소식은 또 한번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한겨레> 자료사진.1994년 카터의 방북으로 전쟁의 고비를 넘긴 ‘1차 북핵 위기’는 10월21일 ‘제네바 합의’로 일단락되었다. 북한이 핵개발을 동결하는 대신, 국제사회에서는 전력난이 심한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제공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유훈으로 맺어진 제네바 합의는 사실상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생명력을 잃은 셈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김일성 없는 북한이 3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미국도 제네바 합의 이행을 위한 예산 배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경수로 설비 비용을 모두 한국에 떠넘겨 버렸다. 한국 역시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 뒤로 미국은 북한이 붕괴되는 날만 기다렸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라는 것도 바로 그런 발상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소비에트연방 붕괴 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달아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시간은 자기들의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에도 후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통치’에 따라 북미는 ‘제네바 합의’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그해 10월21일 로버트 갈루치(왼쪽) 미 대북 특사와 강석주(오른쪽) 북 외무성 제1부상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핵동결과 경수로 지원’ 등을 담은 합의문을 교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그러나 북한은 지금까지 붕괴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지금까지 건재하다는 사실은, 수많은 정치인이나 연구 학자의 사유를 강력하게 지배해온 ‘북한붕괴론’이 현실 앞에서 반복적으로 ‘파산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북한이 무너지지 않은 까닭은 대략 5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는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소련에 크게 의존해서 유지된 반면, 북한은 주체사상을 표방하면서 소련의 영향력을 자각적으로 배제하는 노선을 걸었다. 따라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는 소련이 붕괴하자 커다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북한은 그런 충격을 피할 수 있었다. 둘째, 일반적으로 정치체제가 붕괴되려면 국민의 지지가 철회되는 이른바 ‘정통성 위기’(legitimacy crisis)가 벌어져야 한다. 그런데 북한체제의 정통성은 경제가 아니라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경제가 어려워도 체제의 정통성 위기가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은 경제가 어려워지자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더욱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 셋째, 정치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쿠데타가 발생하려면 쿠데타 세력끼리 공유할 수 있는 비밀정보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북한은 정보가 철저하게 통제된 나라이고, 또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유통되는 나라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비밀정보를 매개로 쿠데타 활동을 하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넷째, 북한은 남한과 정통성 경쟁을 전개하면서 북한 체제의 정통성을 확보한다. 따라서 만일 남한이 없다면 북한은 정통성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남한을 부정함으로써 정통성을 유지하는 방식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북한 특유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주지하듯 동독은 서독에 흡수통일 되었다. 그러나 북한이 남한에 흡수통일 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동독과 북한의 사정이 판이하게 다르고, 서독과 남한의 사정이 판이하게 다르며, 동서독 관계와 남북한 관계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독과 동독은 모두 독일 민족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강한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반면, 남한은 민족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 내지 적대감을 갖고 있다. 요컨대 위에서 예시한 요건이나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북한의 붕괴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내 판단이다.



1994년 6월18일 귀환한 카터(왼쪽)는 청와대로 김영삼(오른쪽) 대통령을 예방해 ‘김일성의 7월중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전했다. 김 대통령은 조건 없는 수락을 발표했으나 김일성이 사망하자 ‘3개월 이내 북한붕괴론’을 장담했다. <한겨레> 자료사진그러나 북한이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선군정치’(Military-First Politics)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선군정치를 군인이 인민을 착취하는 구조로 이해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만일 선군정치가 그런 시스템이었다면 북한은 벌써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군정치는 이른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에, 냉전이 종식되면서 사회주의 우방국의 경제적 지원이 거의 끊어진 시절에, 특히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제재가 북한의 숨통을 강력하게 옥죄던 시절에, 요컨대 북한이 철저하게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더 이상 생사를 기약할 수 없을 때, 오로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생존전략이었다.



박한식 교수는 1994년 7월 김일성의 사망 이래 지금껏 ‘북핵 문제’ 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북한 붕괴론’은 체제의 근간인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를 무시한 허상이라고 지적한다. 북한 노동당에 ‘주체사상’ 선전 포스터. 연합뉴스북한에서는 인민 생활이 경제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군이 나서서 해결해 주고자 했다. 그래서 농경지에 나가서 일하는 사람의 90%가 군인이었다. 동네마다 군인이 인민을 돕는 사무소도 있다. 인민의 집에서 수도꼭지가 고장 나면 군인 사무소로 전화해 도움을 청한다. 그러면 군인들이 와서 고쳐준다. 군인들은 인민이 봉착하는 각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군인이 인민을 도와주면 인민은 자연히 군에 대한 충성심을 갖게 된다. 모든 인민의 아들과 딸은 군에서 10년간 복무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군인이 인민을 돕는 선군정치가 시행될수록 군인과 인민은 자연스럽게 일심단결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에서는 전쟁이 나면 휴가 나온 군인은 곧바로 군부대로 복귀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전쟁이 나면 군인은 자기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서 가족을 지키는 일을 담당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목적은 전투 고지를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향 동네를 지키고, 그곳에 사는 자기 가족을 지키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 싸운다면 누구나 목숨 걸고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심장에서 나오는 충성심이 발휘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김일성의 훈시였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사회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88235.html#csidx269a40fae941b08b7d5a1f48925953d

1903 박한식[1] “한반도 평화해법 제시하겠다”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한반도 평화해법 제시하겠다”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한반도 평화해법 제시하겠다”

등록 :2019-03-18 16:42수정 :2019-06-03 09:45



‘길을 찾아서’ 새 연재 주인공인 박한식 조지아대 석좌교수가 지난해 11월 서울을 방문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통일의 길’ 찾아서 반세기 ‘평화학’ 개척

1981년부터 50여차례 방북 ‘김씨 3대’ 탐구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2번째 주인공은 북한전문가 박한식 미국 조지아대 석좌교수이다. 그는 스스로를 ‘평화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다. 1981년 ‘중공 지도자’ 등소평의 주선으로 첫 방북한 이래 지금까지 50차례 넘게 북한을 다녀온 그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정권을 안팎에서 내내 탐구해온 보기 드문 학자로 꼽힌다.


일제강점기 경북 지역에서 하얼빈으로 이주한 유민집안에서 1939년 태어난 그는 유년기 시절 해방의 혼란과 한국전쟁의 참상과 서울대 정치학과 시절 ‘4·19혁명’을 겪으며 ‘평화’를 인생의 과제로 삼았다. 1965년 미국 유학을 떠난 그는 “통일의 길을 찾을 때까지 귀국하지 말라”는 부친의 유지에 따라 반세기 넘게 한반도 문제 연구에 천착해 독창적인 ‘평화학’을 개척했다. 애초 ‘주체사상’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그의 북한 연구는 ‘창시자’를 자처한 황장엽은 물론이고 김일성대학 등 북한 학자들을 대상으로 강의와 토론을 할 정도로 객관적인 시각을 인정받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학자를 넘어 남-북-미를 잇는 ‘평화의 중재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를 극적으로 해결한 ‘카터 북한특사’ 제안을 비롯해 그는 국제정치 무대의 막전막후에서 전쟁 위협으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내는 ‘평화 수호자’ 노릇을 자임해왔다. 2010년 그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모교인 애틀랜타의 모어하우스대학에서 주는 ‘간디·킹·이케다 커뮤니티빌더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평화운동가로도 인정받았다.

<한겨레>는 지난 수개월에 걸쳐 박 교수와 필자인 이현휘 제주대 사회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의 인터넷 통신망을 통한 구술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김정은-트럼프의 2차 북미정상회담 중단 이후 북핵 문제는 또다시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 팔순의 원로학자가 열정적으로 풀어놓는 ‘북한 탐구 비사’와 ‘한반도 평화 해법’을 격주로 한 차례씩 소개한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86355.html#csidx791843cce00a91cb860616990873964

1906 박한식 [6]. “어릴 적 만주땅 즐비했던 주검 보면서 ‘평화병’ 걸렸다”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어릴 적 만주땅 즐비했던 주검 보면서 ‘평화병’ 걸렸다”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어릴 적 만주땅 즐비했던 주검 보면서 ‘평화병’ 걸렸다”

등록 :2019-06-03 23:05수정 :2019-06-03 23:11


6회 나는 왜 평화주의자가 됐는가 


1981년 냉전 절정기 북한 첫 방문 나서
“북의 시각에서 주체사상 이해 필요”

애틀랜타공항 출발하기 직전 ‘공포’
세자녀 이름으로 생명보험 즉석 가입
딘 러스크 전 미 국무장관에게 ‘부탁’
“북에 있는 동안 내 신변 확인해달라”

‘미친짓’ 알면서도 북행한 이유 ‘평화병’
“유년기 만주에서 겪은 두 가지 체험”
국공내전 학살·아편중독 주검에 ‘충격’
“만주 조선인들 중독자 없어 놀라워”

마오쩌둥 ‘100년 중국병’ 사형으로 근절
“한반도 평화 보장할 안보문화 혁신을”


6회 나는 왜 평화주의자가 됐는가

나는 미국에서 50년 이상 사는 동안 지난 20년 사이 북한을 50회 넘게 다녀왔다. 미국에서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갔다가 다시 미국에 돌아오는 거리는 지구를 한바퀴 도는 거리다. 따라서 나는 지구를 50회 이상 돌았다고도 할 수 있다. 관광을 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간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내 대학교수 박봉을 쪼개서 다녀왔다.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81년 여름방학 때였다.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시각이 아니라 먼저 북한의 시각에서 주체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는 미국에서 카터를 누르고 보수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냉전의 긴장이 크게 고조되고, 또 한국에서는 전두환 군사정권이 출범하면서 남북간의 군사적 대립도 극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북한을 방문한다는 것은 스스로 ‘사지’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실제로 북한을 처음 방문하기 위해 애틀랜타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극심한 공포의 시간이었다. 생각 끝에 나는 그 자리에서 세 자녀 몫으로 300만달러의 생명보험을 들었다. 또한 딘 러스크에게 내가 북한에서 돌아오지 못할 때를 대비해 나의 신변 안전을 계속 확인해달라는 부탁도 해두었다. 러스크는 케네디 행정부와 존슨 행정부에서 9년 동안 국무장관을 역임한 뒤 내가 재직 중이던 조지아대학의 국제법 교수로 와 있었다.



박한식 교수는 조부모가 1910년대 일제 수탈을 피해 경상도 청도에서 만주로 이주해 정착한 하얼빈에서 1939년 태어나 해방 직후까지 유년시절을 보냈다. 1940년대 만주국 시절 일본의 엽서에 실린 하얼빈의 차이나타운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왜 그랬을까? 제정신이었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진단해보면 ‘평화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평화병에 걸렸을까? 시간을 거슬러 생각을 더듬어 보니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만주의 참혹한 풍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경상도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나의 할아버지 3형제는 한일 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 만주로 이민을 떠났다.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의 비옥한 땅은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선점했기 때문에 더 북쪽으로 흑룡강성(헤이룽장성)의 하얼빈에 정착했다. 그 뒤 나의 아버지도 할아버지와 합류했고, 1931년쯤 역시 경상도에서 떠나온 어머니와 결혼을 했다. 나는 1939년 3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두 살 아래 여동생보다 늦게 걸을 정도로 몸은 허약했지만, 두상은 상대적으로 커서 ‘가분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할아버지는 집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조선인 초등학교 국어 교사를 했고, 일본 법정에서 중국어와 일본어 통역도 했다. 내가 다닌 조선인 초등학교는 교실이 딱 하나 있었다. 그래서 맨 앞줄에 1학년 학생이 앉고, 그 뒷줄에 2학년 학생이 앉고, 그 뒷줄에 3학년 학생이 앉는 방식이었다. 나는 입학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셋째 줄에 앉았다. 두 차례 월반했기 때문이다.



1980년 박한식 교수는 북한 첫 방문 때 조지아대 동교 교수로 있던 딘 러스크에게 ‘신변 안전’을 부탁했다. 딘 러스크는 1945년 8월 일제 패망 직후 ‘한반도 38선’을 가장 먼저 제안한 정보장교 출신으로 케네디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을 지냈다. <한국방송> 갈무리나는 유년기 삶의 터전이었던 만주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 두 가지를 반복해서 목격했다. 하나는 ‘국공내전’에서 자행된 원시적 학살 장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편중독으로 죽은 중국인 주검이 곳곳에 야적된 장면이었다.

국공내전 시기 무기는 변변한 게 없었다. 그래서 칼, 낫, 죽창 등과 같은 원시적 무기로 사람을 난도질해서 죽였다. 참으로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했다. 그 참혹한 광경은 어린 나의 눈으로 도저히 담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광경이 내 삶의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비쳤다.

그 당시 만주 일대 조선인은 대부분 마오쩌둥을 적극 지지했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대부분 소작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애초 중국인 지주의 소작료율은 70%였다. 하지만 일제가 만주국(1932~45년)을 세우면서 등장한 일본인 지주의 소작료율은 85%에 이르렀다. 그처럼 가혹한 수탈을 당한 조선인이 지주를 좋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장제스(장개석)는 기본적으로 중국인 지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선택한 마오쩌둥은 ‘사유재산 철폐’를 역설했다. 또한 사회주의에서 중시하는 노동자 계급을 중국의 ‘인민’으로 대체시켰다. 즉 마오쩌둥은 서구에서 수입한 사회주의를 중국의 가난한 농민의 현실에 부응하는 ‘중국식 사회주의’로 수정한 것이다. 그러자 중국의 농민은 물론 만주의 조선인도 마오쩌둥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되었다. 우리 친척 중에서도 건장한 청년들은 모두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에 가담할 정도였다.

만주에서 조선인이 수행한 임무는 ‘북·중의 특수관계’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만주의 조선인을 우대했다. 또한 한국전쟁 때는 약 10만명의 ‘항미원조 지원군’을 파견했다. 그 지원군에는 만주의 조선인이 다수 포함되었는데, 그들이 참전한 목적은 한반도에서 미국을 몰아냄으로써 조국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장남인 마오안잉도 참전시켰다. 마오안잉은 1950년 11월25일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에서 미국 전투기가 투하한 네이팜탄에 맞아 전사했다. 마오안잉은 평안남도 회창군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에 묻혔다. 요컨대 현재 중국의 유일한 동맹국이 바로 북한이라는 사실은 격동의 중국 현대사에서 형성된 ‘특수관계’를 정확하게 예증한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군과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이 맞서 싸운 ‘국공내전’ 시기 만주 일대에서 정부군이 공산군을 체포해서 끌고 가고 있다. 박한식 교수가 어릴 적 하얼빈을 비롯한 만주 일대에서 일상적으로 보던 장면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트럼프는 2017년 4월7일 시진핑과 미·중 정상회담을 한 뒤 <폭스 비즈니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처음 말을 꺼낸 것은 북한 문제였다. 미국은 북한(핵·미사일)을 용인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이 미국을 도와야 한다.” 그러자 시 주석은 수천년간 맺어온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는 그렇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4월21일 자신의 트위터에 다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중국은 북한의 엄청난 경제적 생명줄(economic lifeline)이다.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중국이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중국은 4월22일 성명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한·미 군대가 38선을 넘어 북한을 지상에서 침략해 북한 정권을 전복시키려 한다면 즉시 군사적 개입에 나서겠다. 중국은 무력 수단을 통한 북한 정권의 전복과 한반도 통일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마지노선은 중국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견지하겠다.”



1949년 10월 중국 인민혁명을 완수한 마오쩌둥(왼쪽)은 불과 몇개월 뒤 한국전쟁이 터지자 장남 마오안잉(오른쪽)을 ‘지원병 1호’로 파견했다. 1950년 11월 미군의 폭격으로 28살에 전사한 마오안잉은 지금껏 북한 평안북도 회창군 열사능원에 묻혀 ‘북-중 혈맹’의 상징으로 남았다. 사진 ‘차이나 워치’박근혜는 2015년 9월3일 중국 전승절에 참석했다. 중국을 통해서 ‘북한의 비핵화’를 압박하려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근혜는 북·중 특수관계를 전면적으로 거스르는 정책을 시진핑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트럼프의 제안조차 거부한 중국이 박근혜의 제안을 수용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박근혜는 중국에 서운해하면서 개성공단을 폐쇄했고, 또 중국이 강력하게 반대했던 미군의 사드 배치까지 받아들였다. 박근혜의 ‘오판’이 낳은 정치적·역사적 유산은 2019년 현재까지 한반도에 가혹한 질곡으로 남아 있다.

어릴 적 만주에 산재된 아편중독자의 주검은 나를 더욱 깊은 고뇌에 빠뜨렸다. 그때는 1840년 아편전쟁이 발생한 이후 약 100년이나 지났을 때였지만, 애초 만주에는 영국군이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아편은 깊이 침투해 있었다. 이런 현상은 아편이 중국 전역에 퍼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중국 성인 남성 약 27%가 아편에 중독된 상태였다. 그때 중국의 인구가 약 6천만명이었으니 약 2천만명이 아편중독자였던 셈이다. 나는 아편도 총칼처럼 살상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더구나 아편은 총칼과 달리 중국의 민족정신까지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야만적인 무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주의 조선인은 아편에 중독되지 않았다. 아편을 먹지 말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없었고 단속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현재 북한에도 아편이 없다. 이는 우리 민족이 그만큼 깨끗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2017년 4월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린 트럼프(왼쪽) 대통령과 시진핑(오른쪽) 주석의 첫번째 미·중 정상회담 때 만찬장에서 나란히 앉아 있다. 이 회담에서 시진핑은 ‘중국과 한반도의 오랜 역사’를 들어 북핵 문제 개입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직후 인터뷰에서 “그리고 한국은 실제로 중국의 일부였다. 이런 말을 10분간 듣고보니 북한 문제를 푸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해 ‘속국 논란’을 빚었다. 사진 연합뉴스그런 중국의 아편중독을 근절시킨 인물이 마오쩌둥이었다. 1912년 청나라가 망한 뒤 등장한 쑨원 정권과 장제스 정권에서도 아편은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중국의 민족정신을 마비시키는 아편이 대단히 심각한 무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편을 팔다가 잡힌 중국인은 무조건 사형에 처했다. 마오쩌둥은 외세와 결탁해서 밥 벌어먹는 중국인을 가장 천한 계급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런 계급의 대안으로 ‘인민’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철저히 반외세 민족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인민이 ‘혁명 중국’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연가가 담배를 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약 100년에 걸쳐 아편에 중독된 2천여만명의 중국 인민을 구제하는 ‘위대한’ 일을 성취해낸 것이다.



1981년 처음 북한을 방문한 박한식 교수는 자신이 ‘평화주의자’된 이유로 유년기 겪었던 중국인들의 아편중독 참상 영향을 꼽는다. 청나라 말기 19세기 중반 영국과 두 차례 아편전쟁 이래 100년간 만연했던 ‘아편굴’에서 중국인들이 마약에 취해 쓰러져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주지하듯, 미국은 영국 사람들이 만든 나라다. 현재 미국은 세계 최대 무기 수출국이다. 미국이 무기를 팔아서 천문학적 이득을 취하는 방식은 영국이 아편을 팔아서 부를 쌓았던 방식과 유사하다. 영국과 미국의 타락한 자본주의 정신이 그 객관적 근거가 된다. 아편이 소비국의 민족정신을 타락시켰던 것처럼 무기 또한 수입국의 자체 국방능력을 고갈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이 세계 최대 미국 무기 수입국의 하나라는 데 있다. 2015년 현재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분석을 보면, 한국은 최근 5년간 미국 무기 수입 1위 국가에 올랐다. 미국을 ‘맹종’하고 북한을 ‘주적’으로 삼는 한국의 안보정책 내지 ‘안보병’이 그런 결과를 빚은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방산업체는 절대로 핵심기술을 한국에 이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은 작금의 안보정책을 근원적으로 혁신하지 않는 한 영원히 미국의 방산업체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의 방산업체가 주축이 된 ‘딥 스테이트’는 미국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의 근간을 꾸준히 파괴하고 있다. 또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미국산 무기로 안보를 추구한다면 오히려 안보 그 자체까지 파괴한다는 점을 주목해야만 한다. 미국에서 수입한 무지막지한 무기를 동원해서 핵무기를 가진 북한과 전쟁을 한다고 치자. 그러면 북한만 죽고 남한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현재 미국 무기에 중독된 남한은 영국 아편에 중독되었던 중국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만주의 조선인은 스스로 아편에 중독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정신력을 지녔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 미국 무기에 중독된 사실 그 자체를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력이 타락했다.

한국은 중국의 ‘아편중독 100년사’를 혁파한 마오쩌둥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의 안보를 더 이상 보장해주지 않는 안보정책을 버리고, 한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기약할 수 있는 새로운 안보문화를 창조하는 것,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절박한 과제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연재

16 [책 제국의 위안부][박유하][정연진] 통일운동 <완코리아 (AOK)>대표 정연진 님의 글 비판



(6) Sejin Pak



Sejin Pak
3 June 2016



[책 제국의 위안부][박유하][정연진] 통일운동 <완코리아 (AOK)>대표 정연진 님의 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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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정연진의 글의 요점 3가지를 인용문으로 모으고, 각 인용문 밑에 나의 커멘트를 부친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포인트에 가장 긴 커멘트를 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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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유하라는 지식인이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를 옹호하는 책을 낸 것도 또 그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성명을 낸 것도 한국인 스스로 일제청산이 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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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이 글 만으로 보면 정연진은 <제국의 위안부>를 읽지 않았거나,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유하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존재가 일제청산이 되지않은 것을 증명한다고? (한국 떠난지 52년이 되는) 나도 성명자 중에 하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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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a]
[특히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라는 큰 틀에서 이해해야 한다. 12.28 한일합의의 배경에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작동하고 있다. 특히 미.일.한 군사동맹 강화를 통해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외교정책으로 인해 한일관계에 걸림돌이 되는 위안부 문제를 속히 타결할 것을 미국이 종용했다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한.미.일 군사동맹은 분단체제를 더욱 고착화시키고 있고 한.미.일 군사동맹이 대두되는 것 또한 분단체제 때문이다. 구조적인 악순환이다.
중국의 부상을 좌시할 수 없는 미국 패권주의는 한.미.일 군사공조를 앞으로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결국 남북관계가 개선되어야지만 가능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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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이 미일한 군사동맹을 강화하려는 것 이라는 이해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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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b]
[이러한 미국의 외교정책은 내가 관여했던 2000-2006년도 미국법정에서 일본군성노예들을 위한 배상소송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한국, 중국, 대만, 필리핀의 15명 피해자들의 모든 피해자들을 대표하여 집단소송 형태로 일본국가를 상대로 미국법정에서 소송을 전개했을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일본의 방해도 아니고 미국무부의 개입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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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미국무부가 보는 위안부 문제는 그저 두동맹국 사이에서 빨리 적당히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문제일 것이다. 독도 문제도 마찬가지 이다. 이건 하나도 새로운 이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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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나 수년에 걸친 미국 소송을 통해 배리 피셔와 같은 홀로코스트 소송을 이끈 세계적 인권변호사, 피해국들 활동가, 단체들과 끈끈한 연대와 일반 미국인들의 인식변화라는 소중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강력한 개입에 대항하여 풀뿌리 시민들이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한가. 아니 분명히 있다. 국제정치 흐름을 잘 들여다보면서, 미-일 공조를 깨뜨릴 수 있는 이슈가 있을 때 시민사회가 국제적으로 연대하여 나서야 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양심에 호소해 변화를 일으켜야한다.
그러한 예가 실제로 있었다. 2005년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좌절시킨 인터넷서명운동이다. 한 달 반만에 애초 목표를 초과달성하는 4천2백만 서명을 받아내어 세계의 여론을 변화시키지 않았는가.
동시에 이 인터넷서명운동이 성공한 이유는 ‘반일’운동의 차원이 아니라 ‘전쟁범죄를 반성하지 않는 국가가 세계지도국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인류의 보편적 원칙과 상식을 문제삼았기에 가능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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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범세계적인 인권문제로 만들고저 하는 사람들이 한국인들 만이 아니라 여러 민족과 국적의 배경의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알고 있다. 그들이 본인들은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하는 것 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이해가 간다. 일본인들 안에서도 이 운동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접근 방법으로는 한일관계로서의 위안부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조금 어려운데, 해 보기로 한다.

앞에서 말한데로 위안부문제를 인류보편적인 인권문제로 삼는데 동조하는 일본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동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대부문의 일본인들이 동조하지 않는다면, 이런 운동이 세계의 호응을 얻는다고 해도 한일관계로서의 위안부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면 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동조하지 않을까? 그중에는 소위 극우경향의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의 숫자는 작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수에 속하던 진보에 속하던 중도 정도에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본다. 결국 일본의 중도가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군사적 성노예"라는 세계적인 인권문제로 생각하질 않는다는 것이다.

정연진은 '내가 강조한 말은 “위안부 문제는 한일관계를 넘어서야 해법이 보인다”라는 것이다'라고 썼다. 한일관계를 한일관계를 넘어서 해법을 찾아서 일본인들에게 압력을 가해서 동의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북한에 그런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은 정연진은 모르는 듯하다. "인류보편적인 인권문제"라는 접근방법을 일본을 상대로 하자면서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하여는 같은 방법을 쓰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북한이라는 특수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일반적인 북한인권문제 비판방법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특수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위안부문제에서의 그 특수 상황이라는 것은 식민지-제국 관계였다.

나는 많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 보다 윤리적으로 모자라는 사람들이라서 그들이 위안부문제를 인류보편적인 인권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답하자면 위안부문제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다른가? 시각의 차이도 있겠지만, 이 시각의 상당 부분은 객관적 역사적 사실과 그 이해의 대한 문제이다. 그 역사적 사실과 이해는 어떠한 것 인가. 그것도 한가지가 아니고 여러가지가 있지만, 간단히 이야기를 하자면, <제국의 위안부>가 이용하는 사실 자료와 이해가 중도의 일본인의 이해와 가깝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박유하가 친일을 하는라고 그런 책을 자신의 양심에 반하여 일본에 아부하느라고 썼을까? 책 <제국의 위안부>가 나오기 전 부터 박유하를 알고 있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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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진은 위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며 시작한다.

"어째서 일본군성노예 문제가 20여년 동안 피해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방식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는지, 왜 한일관계는 거꾸로 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필요하다."

정연진은 책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유하도 같은 말을 하면서 시작한다는 것을 모르는 듯하다. <제국의 위안부>는 이 문제에 대한 박유하의 양심선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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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분단극복을 위한 역사인식<연재> 정연진의 ‘원코리아운동’ 이야기 (60)
정연진 | tongil@tongilnews.com
승인 2016.06.01 11:25:02


거의 1년만에 찾은 고국에서 지역 강연을 앞두고 있다. 6월 1일 성공회대를 시작으로 광주와 대구에서 각기 두 차례, 수원, 전주, 청주, 옥천 등 8개 지역에서 6월 1일부터 14일까지 크고 작은 강연회나 지역모임을 앞두고 있다.

이번 지역일정의 목적은 작년 말 12.28 한일 '위안부'합의로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는 일제과거사문제와 통일이슈를 연결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역사인식을 토대로 분단문제를 생각하고 분단체제를 극복하는데 힘을 모으게 하는 데 있다.

12.28 졸속합의와 정부가 합의에 따른 재단 수립을 강행하면서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한 일본군성노예 문제는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역사문제와 통일문제를 하나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력한 계기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일본군성노예 문제가 20여년 동안 피해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방식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는지, 왜 한일관계는 거꾸로 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이 문제에 대한 근본 원인을 분단을 마주하는 역사인식에서 찾아야하고 역사인식을 기반으로 통일이라는 미래 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겠다.

민중 시각으로 보는 일제 과거사 청산의 문제

올 초 19명의 필진이 참여한 책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 제국의 거짓말과 ‘위안부’의 진실>(도서출판 말 출간) 기획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이 책이 일제과거사 문제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 필진에 동참하게 되었다.

▲ 19명의 공저자가 참여하고 도서출판 말이 펴낸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 책 펼침 이미지. [사진제공 - 도서출판 말]


흔히들 “독일은 나치의 전쟁범죄에 대해 거듭 반복해서 사죄하는데 왜 일본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라고 말하지만 이는 너무나 평면적인 비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독일은 역사청산을 이루었지만, 일본은 역사청산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독일인은 나치 역사를 부끄러워하고 청산해야 할 과거로 생각하고 있지만 일본의 경우는 전쟁범죄에 책임을 져야하는 세력이 아직까지 집권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 역사 또한 일제청산이 되지 못했다. 일제에 협력하고 치부해 대다수 민중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세력에 대한 단죄가 되지 못했고, 역사책에 제대로 기록되지도 못했다. 역사교과서에 일제에 저항한 많은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은 묻혀버리고 오히려 일제와 같은 편에 섰던 이들의 역사를 더 많이 배우고 있다. 역사학 또한 아직도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에 세뇌되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 스스로 역사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가해국인 일본에게 역사청산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일제과거사 청산 문제를 오랜 기간 고민하고 실천해온 입장에서 너무나도 답답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박유하라는 지식인이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를 옹호하는 책을 낸 것도 또 그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성명을 낸 것도 한국인 스스로 일제청산이 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 아니겠는가.

일본의 전쟁범죄를 밝히는 것 못지않게 한국인들은 어째서 나라를 빼앗길 수 밖에 없었는가, 그래서 무고한 백성들이 노예와도 같은 처지가 되어 650만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가 일본의 침략전쟁에 징병, 징용, 근로정신대, 성노예로 동원되지 않을 수 없었는가에 대한 뼈저린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일본군‘위안부’ 희생자들은 대부분 못 배우고 못 사는 집안에서 끌려갔다는 면에서 우리는 결코 민초들이 당한 설움과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지면 안 된다.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째서 이러한 비극이 초래되었는지 우리 역사에 대한 스스로의 뼈저린 성찰이 반드시 있어야겠다.

그러한 인식의 토대 위에서 진정한 광복을 이루지 못한 오늘날의 현실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아야한다.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했기에 나라는 분단이 되었고 분단체제 하에서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이념전쟁과 독재 하에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은 계속되었다.

결국 민초들의 수난사를 온전히 회복하는 길은 우리 스스로의 역사청산과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과제에 마주하게 된다.

▲ 경희대에서 5월 20일 일본군‘위안부’연구회, 포럼 진실과정의 주최로 열린 ‘12.28 합의를 넘어 전정한 해결을 위한’ 좌담회. 왼쪽부터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 이재승 건국대 법대교수, 정연진 AOK 대표, 김창록 경북대 교수, 권명아 동아대 교수, 역사연구자 강정숙 박사, 한혜인 박사. [사진제공 - 정연진]



한일관계는 한일관계를 넘어서야 해법이 보인다

5월 2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도서출판 말 주최로 열린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 - 제국의 거짓말과 위안부 문제의 진실> 서평회에서, 그리고 이보다 앞서 5월 20일 경희대학교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진단한다’ 전문가 좌담회에서 내가 강조한 말은 “위안부 문제는 한일관계를 넘어서야 해법이 보인다”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라는 큰 틀에서 이해해야 한다. 12.28 한일합의의 배경에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작동하고 있다. 특히 미.일.한 군사동맹 강화를 통해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외교정책으로 인해 한일관계에 걸림돌이 되는 위안부 문제를 속히 타결할 것을 미국이 종용했다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한.미.일 군사동맹은 분단체제를 더욱 고착화시키고 있고 한.미.일 군사동맹이 대두되는 것 또한 분단체제 때문이다. 구조적인 악순환이다.

중국의 부상을 좌시할 수 없는 미국 패권주의는 한.미.일 군사공조를 앞으로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결국 남북관계가 개선되어야지만 가능하리라고 본다.

▲ 5월 2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도서출판 말 주최로 열린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 서평회. 건국대 이재승 교수와 동학다큐소설 작가인 고은광순 평화어머니회 대표가 발제하고 있다. [사진제공 - 정연진]


이러한 미국의 외교정책은 내가 관여했던 2000-2006년도 미국법정에서 일본군성노예들을 위한 배상소송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한국, 중국, 대만, 필리핀의 15명 피해자들의 모든 피해자들을 대표하여 집단소송 형태로 일본국가를 상대로 미국법정에서 소송을 전개했을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일본의 방해도 아니고 미국무부의 개입이었다는 사실이다.

유태인들이 독일, 오스트리아의 전범기업을 상대로 벌인 ‘홀로코스트’ 소송에서는 피해자편에서 소송이 해결되도록 적극 도왔던 미국 국무부가 소송의 당사자도 아니면서 일본 편에 섰다. “이 소송은 미국의 외교정책에 어긋나므로 미국 법정에서는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재판부를 설득하며 집요하게 개입했다.

결국 미국 소송은 재판이라는 본론에 들어가지 못하고 소송을 할 수 있는가 여부를 따지는 예심에서 법리적 판단에 공방을 계속하다가 연방항소법원, 연방대법원에까지 항소와 항고를 거듭했으나 결국 심리거부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수년에 걸친 미국 소송을 통해 배리 피셔와 같은 홀로코스트 소송을 이끈 세계적 인권변호사, 피해국들 활동가, 단체들과 끈끈한 연대와 일반 미국인들의 인식변화라는 소중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 5월 2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서평회에서 미국의 위안부소송 개입과 국제적으로 연대하는 시민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발제하고 있다. [사진제공 - 정연진]


그렇다면 미국의 강력한 개입에 대항하여 풀뿌리 시민들이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한가. 아니 분명히 있다. 국제정치 흐름을 잘 들여다보면서, 미-일 공조를 깨뜨릴 수 있는 이슈가 있을 때 시민사회가 국제적으로 연대하여 나서야 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양심에 호소해 변화를 일으켜야한다.

그러한 예가 실제로 있었다. 2005년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좌절시킨 인터넷서명운동이다. 한 달 반만에 애초 목표를 초과달성하는 4천2백만 서명을 받아내어 세계의 여론을 변화시키지 않았는가.

동시에 이 인터넷서명운동이 성공한 이유는 ‘반일’운동의 차원이 아니라 ‘전쟁범죄를 반성하지 않는 국가가 세계지도국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인류의 보편적 원칙과 상식을 문제삼았기에 가능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 분단한반도와 통일한반도를 암흑의 철조망과 나비가 가득찬 모습으로 대비시킨 이미지를 강연할 때 마다 자주 사용하고 있다. [사진제공 - 정연진; 출처 - 페이스북]



평화나비, 통일로 날아가는 미래를 상상하며

여러 지역에서 평화나비 모임을 만날 예정이다. 나비는 한반도의 평화를 상징하고 여성인권을 상징한다. 나비가 날아드는 평화로운 한반도는 분명 축복의 땅이 될 것이다. 축복의 땅이 되려면, 우리는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실행에 옮겨야하는가.

현재 한반도를 덮고 있는 철조망이 가득찬 암흑의 땅이 어떻게 하면 형형색색의 나비가 가득찬 한반도가 될 수 있는가를, 한반도의 미래를 적극 상상하자고 말할 것이다.

역사문제와 통일문제를 하나로 잇는 역사인식이 그 출발점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평화와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지구촌 시민들은 이미 우리 편이라는 든든한 동지의식을 심어줄 것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나비가 분단이라는 장벽을 넘어 통일이라는 미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우리들 스스로 상상하고 미래를 개척하자고 이야기할 여러 지역 모임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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