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7

알라딘: [전자책] 붓다를 죽인 부처



알라딘: [전자책] 붓다를 죽인 부처




붓다를 죽인 부처 - 깨달음의 탄생과 혁명적 지성
박노자 (지은이)인물과사상사2013-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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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인만의 시선에서 벗어나 국제인의 시각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말하지 못했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한국인’ 박노자. 한국에 대한 애정과 약자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더 나은 한국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자 다양한 문제의식이 녹아 있는 저술 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

날카로운 사회 비평으로 그동안 우리가 물들어 있던 현실이나 역사관의 이면을 볼 수 있게 해주었던 그의 사상의 뿌리에는 동양사상, 그중에도 ‘불교’가 있다. 인류의 탈자본주의적 해방의 등불로 마르크스가 있다면 인류의 궁극적 해방을 꿈꾸던 개혁가로는 붓다를 꼽는 그는, 이미 2,500년 전 붓다가 말한 가르침에서 근대 철학으로는 닿을 수 없었던 ‘사상의 영혼’, 즉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진정한 개혁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목차


추천사: 분열의 종교가 아닌 화합의 종교로
서언: ‘해방 불교’를 위하여!

Ⅰ부. 붓다와 나의 시간

1. 욕망의 힘과 지혜의 힘
대담: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보자
2. 여자의 몸으로 부처가 될 수 없다고?
대담: 자기 삶의 주체가 되자
3. ‘기도발’은 약인가, 독인가
대담: 기도는 과연 필요한가
4. 계율을 지키는 일, 혹은 ‘나’를 지키는 일
대담: 병역거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2부. 붓다와 국가의 시간

5. 불상은 과연 신상(神像)이어야 하는가
대담: 선불교의 우상파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6. 모자라면서도 탁월한 초기 불교의 민주주의
대담: 욕구를 정당화시키는 자본주의적 삶은 반불교적
7. 불교와 국가 그리고 국가 폭력
대담: 호국불교를 말한다
8. 대승불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정말 문제없는가
대담: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9. 한국 불교, 전통이 아니라 시대를 만나라

접기


책속에서



보시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분배가 잘되는 사회일수록 안정적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보통 우리가 ‘보시’라 하면 흔히 사찰에 헌금, 즉 불전(佛錢)을 주는 행위를 가리키지만, 초기 불교 경전에서 보시(산스크리트어: dana)는 아주 넓게 ‘나누는 일’, ‘베푸는 일’을 의미한다. 수행자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주는 것도 보시지만 하인이나 고용인, 손님, 친족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재산 가진 사람의 도리다. (p. 35) 접기
붓다의 가르침은 초자연적인 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교주의 권위를 확립시키는 ‘계시’의 성격도 갖지 않는다. 붓다는 누구나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진리를 설함으로써 그 진리의 자율적인 이해를 유도할 뿐 자신에게 어떤 초자연적, 신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다. 붓다는 아무도 ‘구제’하지 못한다. 다만, 스스로 자신을 구제할 수 있게끔 신도에게 업과 연기의 실상을 파헤칠 만한 지혜를 얻도록 도와줄 뿐이다. (p. 187) 접기
일본의 보수적인 주류 사회에서는 ‘갈등’ 자체는 무조건 부정적인 것인 반면 ‘총화·단결·단합’은 무조건 긍정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거의 ‘국민 도덕’처럼 받들었던 이런 의식들은 바로 현실적인 세계(事)와 이상의 세계(理) 사이에 막힘이 없다(無碍)고 주장했던 화엄(華嚴)류의 ‘동아시아적으로 왜곡된 불교 사상’에 의해서 너무나 쉽게 합리화된다. (p. 252~253) 접기
붓다 자신과 일부의 직계 제자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일부 수행자들은 불평등과 폭력이 없는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들은 속인(俗人)들이 불평등과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염원했다. 초기 불교를 보면 그 시대로서는 보기 드문 ‘해방적 색깔’이 뚜렷하다. 바로 이 ‘해방적 색깔’은 불교가 민중들로부터 빠르게 인기를 얻는 기반이 됐다. 그러나 진정한 ‘해방에의 의지’를 갖고 있던 초기 지도자들이 사라진 뒤에는, 현실과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방편론’ 등이 불교가 발 빠르게 ‘국가 종교화’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p. 279) 접기
‘민중 방어적 폭력’도 나쁜 원인을 피하기 위해 출구를 급히 구해야 하는 ‘길이 막힌 골목’이지만, 자본이 부추기는 경쟁이나 국가가 유지하고 훈련시키는 군대와 같은 억압적인 상설 폭력 기구들은 ‘나쁜 원인’ 이외에 아무것도 만들어낼 수 없다. 국가(특히 군대 당국)와 자본 등 사회적 고통을 제공하는 자들과의 유착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교는 죽은 불교다. 그리고 “어머니가 외아들을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는 붓다의 말씀을 실천할 아무런 능력도, 의지도 없는 불교 역시 죽은 불교다. (p. 281)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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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노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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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한국 고대사와 불교사 등을 연구했고 지금은 근대사, 특히 공산주의 운동사에 몰입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당신들의 대한민국』(1·2) 『우승열패의 신화』 『주식회사 대한민국』 등이 있다.


최근작 : <전환의 시대>,<한국지성과의 통일대담>,<러시아 혁명사 강의 (리커버 에디션)> … 총 87종 (모두보기)
인터뷰 : 이중의 타자, 박노자 교수와의 e-만남 - 2002.07.31


출판사 제공 책소개
“박노자가 말하는 시대의 개혁론이자
인류의 궁극적 해방 철학으로서의 불교”

≫ 한국인만의 시선에서 벗어나 국제인의 시각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말하지 못했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한국인’ 박노자. 한국에 대한 애정과 약자에 대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더 나은 한국 사회를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자 다양한 문제의식이 녹아 있는 저술 활동을 통해 한국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다. 날카로운 사회 비평으로 그동안 우리가 물들어 있던 현실이나 역사관의 이면을 볼 수 있게 해주었던 그의 사상의 뿌리에는 동양사상, 그중에도 ‘불교’가 있다. 인류의 탈자본주의적 해방의 등불로 마르크스가 있다면 인류의 궁극적 해방을 꿈꾸던 개혁가로는 붓다를 꼽는 그는, 이미 2,500년 전 붓다가 말한 가르침에서 근대 철학으로는 닿을 수 없었던 ‘사상의 영혼’, 즉 너와 나의 구분이 없는 진정한 개혁의 정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동아시아적으로 왜곡된 ‘불교’는 어떻게 ‘붓다의 가르침’을 배반했는가
저자 박노자는 붓다의 가르침에 깊이 감화를 받은 불자다. 그를 매료시켰던 불교의 상생 논리와 비폭력 주의 등은 그가 평소 추구하는 이상과 철학적 맥락이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불교를 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불교의 철학을 깊이 연구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해나가며 스스로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라고 말하는 그는 그러나 조계종은 물론 현존하는 어떠한 종단에도 가입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대부분의 불교 종단 내지 ‘공식적’ 단체들은 국가와 자본에 종속돼 있거나, 완전히 종속되지 않았다 해도 국가와 자본과의 ‘편안한’ 공존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불교의 정신과 너무나 달랐다. 그는 붓다의 정신을 따르기 위해서라도 불교 종단들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불교 종단은 어떻게 붓다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일까? ‘깨달은 자’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붓다(Buddha)’는 석가족의 왕자로 알려진 ‘고타마 싯다르타’의 다른 명칭이다. 붓다라는 말이 중국에 와서 음역되는 과정에서 한자 ‘불(佛)’이 되었고, 중국의 불교를 받아들인 한국에 와서는 ‘부처’라 불리게 되었다. 단어가 뜻하는 바는 다르지 않지만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해진 붓다의 가르침은 붓다의 초기 가르침과 많은 부분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동아시아에 전래된 불교는 첫 시작부터 일정부분 왜곡된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고 이후 전개된 모습도 수많은 모순을 낳게 되었다.
그 예로 저자는 ‘수능 기도’와 같은 현세 기복적 신앙 행위가 가지는 문제점을 든다. 나와 남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불교의 논리에 의하면 경쟁 사회에서 ‘남’을 누르고 ‘나’만 성공하기 위한 어떠한 기도나 기복 행위도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입시제도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정진대회라도 열어 모든 불자의 지혜와 신앙심을 모아 학력에 매달리지 않는 나라 만들기에 힘을 쏟아부어도 모자른 실정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찰의 돈벌이로 ‘대입 기도’가 최고로 꼽히고, 몇몇 스님들의 고급 승용차 애용이나 고급 호텔 식당 출입 등이 사회문제가 된 지 오래다. 이렇듯 오늘날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 되어버린 우리의 불교문화는 붓다의 가르침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그가 지적하는 그동안 너무도 당연시되어왔던 불교의 모순은 이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불교계에 만연한 ‘여성 차별’, 부처님의 영험을 바라는 ‘뿌리 깊은’ 기복신앙, 대형 불사 추진 등 우리는 그동안 불교의 철학과 사상을 직접 배우기보다는 산속에서 깨달음을 구하거나 절에서 기도하는 모습만을 보아왔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질 기회는 거의 없었다. 우리가 한국의 대표적인 고승으로 꼽는 원효 대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저자는 대승 불교의 너무나 대승적으로 왜곡된 현세 구복적 불교의 논리가 어떻게 현실을 합리화하고 지배자의 폭력과 착취구조를 정당화하는 단서를 제공했는지 파고든다. 이는 어릴적부터 이론의 여지 없이 ‘위대한 고승’으로 주입되어온 우리의 교육 시스템에서는 쉽게 이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문제이기도 하며 어쩌면 이데올로기의 주체 혹은 권력자들이 그들의 입맛에 맞도록 ‘세뇌’시켜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호국불교’다.

‘호국불교’에서 ‘해방 불교’로
저자는 박정희 정권 시절 사격 훈련을 받아야 했던 여승의 일화에서 출발하여 해방 후 불교계가 국가와 결탁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일제 강점기 천황을 위한 정복 전쟁이 불교적 실천이라는 논리 등 현재와 가까운 시점부터 호국불교의 이론적 정당성을 부여한 원광 법사의 ‘세속 오계’ 등에 이르기까지 호국불교라는 ‘형용 모순’이 생기게 된 근원을 치밀하게 파고 들어간다. 호국불교라는 말은 ‘살인을 하는 부처’라는 말과 같이 모순적인 단어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 것을 계율의 첫째로 삼는 종교인 불교에서 오늘날의 왜곡되고 모순된 ‘부처’는 인류의 행복과 편안함을 추구한 최고의 지성인 붓다의 가르침을 ‘죽인’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동안 국가라는 폭력 기구의 살인 교육과 불교계의 묵인 내지는 세속화로 말미암아 너무도 자연스러운 단어로 인식하게 되었다.
호국불교는 하나의 대표 사례에 불과할 뿐 불교계와 국가가 만들어온 ‘형용 모순’은 그 밖에도 많다. 가장 가까운 예로 오태양 씨의 양심적 병역 거부나 2006년의 황우석 사태에 대한 불교계의 태도 등은 모순 그 자체다. 불교의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이런 세속적인 문제를 대처하기 위한 논리가 결국 속류 ‘애국주의’를 동원하는 것이었으니 저자는 이 땅에 진정한 의미의 불교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고 한탄한다. 이는 또한 불교계의 민주적이지 못한 권위적인 서열구조와도 연관된다.
본래 의미의 불교가 이처럼 왜곡된 것은 끊임없이 현실과 타협한 결과다. 과연 그 타협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저자는 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불교의 여명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붓다와 그 제자들이 처한 현실부터 오늘날 국가, 자본주의와 결탁한 현실까지 살펴보며 그 왜곡의 실마리를 찾는다. 그리고 과연 붓다가 원래 말하려 했던 가치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현실적인 권력자들과 가르침을 배반하는 무리들이 이 개혁적이고 인류 해방적인 개혁가의 가르침을 어떤 식으로 왜곡해 왔는지 살펴본다.

초기 불교에 대한 ‘해방적 해석’의 시도
이러한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에 기초한 지적은 그동안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져 왔기에 우리가 놓쳐왔던 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이는 불교계만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하의 과도한 경쟁 시스템 등이 낳은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다. 불교계에 만연한 모순은 결국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모순들이 투영된 집합체일 뿐 실제로는 그 욕망의 진원지인 ‘우리 자신’의 문제이자 ‘우리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가 이 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붓다의 근본 가르침은 우리 시대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근원적인 가르침으로 다시 탄생한다.
저자는 서두에서 이 책을 초기 불교에 대한 ‘해방적 해석’의 시도라고 밝혔다. 우리 불교가 국가 또는 지배계급과 유착한 역사가 이미 2,000년을 훌쩍 넘은 만큼 우리 의식 속에 남아 있는 불교는 현실을 따라가며 인정하는 식이거나 지극히 개인 중심적이고 보수적이지만 붓다의 본래 가르침은 이와는 달랐다.

우선 붓다는 여성 해방을 주장한 양성 평등론자이자 당시의 뿌리 깊은 신분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몸소 평등원칙을 실현한 종교 개혁가였다. “몸을 가지고 태어난 생물 사이에는 각기 구별이 있지만 인간에게는 그런 구별이 없다. 인간 사이에서 구별이 있는 것은 다만 그 이름뿐이다”와 같은 그 당시로서는 혁명에 가까운 주장으로 붓다는 여성 차별을 위시한 인간 세계에 만연한 모든 차별 관행에 철퇴를 가한다. 또 인도 사성(四姓) 계급 중 최하층인 수드라(Sudra, 노예나 천민) 출신으로 석가족의 이발사였던 우바리 존자를 수행자의 일원으로 삼는 등 신분질서를 뛰어넘는 파격을 보였다.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종래의 인도 종교가 극단에 치우쳐 있음을 지적하고 중도를 설함으로써 어느 한 쪽에 치우침이 없는 사상관을 제시하였다.
저자는 마르크스 가르침이 모든 인간들을 자본주의적 소외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다면 붓다의 가르침은 인류의 궁극적인 해방의 길을 여는 것이었다고 해석한다. 이는 오늘날 자본가와 노동자와의 관계나 기부(보시) 문화 등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초기 불교란 일체의 인간들을 해탈을 이룰 수 있고 해방의 가능성이 잠재된 존재라 보는 고차원적인 인간 해방의 철학이며 또 나만의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해탈을 추구하는 나와 남의 경계를 뛰어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사회과학과 불교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각 장의 끝 부분에서는 ‘사회과학자 박노자’와 ‘도법 스님’이 만나 나눈 대담이 이어진다. 현실 속의 문제에 대해 저자와 스님이 진지하게 생각을 나눈다. 과연 오늘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불교의 관점은 무엇인지, 또 오늘날 불교가 사회과학과의 만날 수 있는 지점은 어디인지에 대해 독자 스스로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인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보는 문제나 ‘간화선’에 대한 문제의식에서부터 영험 있는 ‘기도’의 문제나 병역거부, 자본주의적 삶의 문제, 명분 있는 분노와 폭력의 정당성과 같은 사회적 측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저자는 결국 사회과학의 이론과 불교의 논리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또한 불교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도 하지만 사회과학 역시 불교 사상을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불교의 ‘아힘사(비폭력)’은 오늘날 사회과학이 수용해야 할 대원칙 중 하나다. 수탈기구로부터의 민중 방어라는, 특정 상황에서 진보 운동가들이 피하기 어려운 ‘민중 방어적 폭력’이라 하더라도 불가피한 차악일망정 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방어적 폭력’을 행사하는 상황이더라도 그 폭력의 나쁜 결과를 인식하고 이를 중지시켜 비폭력으로 대체할 수 있는 길을 열심히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도법 스님 역시 국가, 민족, 정의, 종교, 이념 등 어떠한 명분으로 폭력을 정당화할지라도 불교 철학으로 보면 어떤 명분을 붙여도 분노는 분노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오늘날 사회과학이 불교로부터 수용해야 할 점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오늘날 우리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사실 종교라고 하면 자본주의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낳는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 인류가 더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기 위해 존재해야 함에도 불교를 비롯한 지금의 종교는 오히려 사회의 짐만 될 뿐 이런 역할을 외면하거나 아예 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 붓다 자신과 수행자 공동체는 철저하게 무소유를 실천하며 원만구족(모든 것을 완전하게 갖춘 깨달음의 상태)한 삶을 살았지만 오늘날 주류 종교계는 재정의 투명한 공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세속화되었으며 이윤을 추구하는 하나의 ‘기업’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또 붓다가 이루었다는 깨달음을 승려가 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이룰 수는 없는 노릇이라면 불교의 목표를 신비주의적이고 초세속적인 ‘깨달음’이 아닌 복지, 평화, 정의, 탈폭력 등의 의미를 담은 ‘심신의 행복’이나 ‘몸과 마음의 안락’ 정도로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제안한다. 실제로 붓다는 무엇보다 중생의 안락과 행복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가 말하는 불교는 무신론적 종교이며 종교보다는 철학에 가깝다. 책에 자세히 설명된 불교 용어는 불교를 잘 모르는 독자라도 불교의 교리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며 붓다의 가르침 역시 ‘상식’에 속하는 문제임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 사회의 짐이 되어가는 종교가 아닌 평화를 지향하고 모든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는 붓다 본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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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과 함께 읽은 이 책. 면밀한 자료분석. 적절한 문제의식. 진정 제행무상이라면 우리에게 남겨진 건 율법으로서, 기복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참의미를 시대적으로 해석하는 것..!
seyul88 2011-11-26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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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는 살아있는 불교로서 거듭나기 위해 마땅히 생각해야 할 문제들에 대해 문제제기.. 가치있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사과나무 2011-11-17 공감 (0) 댓글 (0)






붓다는 어떻게 죽었는가?




원래 붓다와 부처는 사실상 같은 말이다.



이 책 제목에서의 붓다는 초기불교, 훼손되지 않은 석가모니의 원래의 사상과 실천을 의미하고

부처는 그 불교와 현실에 타협하고 순응하면서 변질된 현재의 불교의 모습을 의미한다.



박노자는 원래의 석가모니의 혁명적인 사상과 실천으로 되돌아가자고 이야기하고 있다. 수능백일기도, 자신의 복을 빌기위한 기도, 기도발 잘 드는 절 등으로 이야기되는 불교, 사찰의 조그마한 이권다툼에 폭력도 불사하는 불교의 모습을 버리자고 이야기한다.



불교에 문외한인 사람도 용어를 알아들을 수 있게 중간중간에 삽화와 용어 설명을 해주는 친절을 편집자가 해주어서 박노자의 글 중에서는 비교적 쉽게 읽히는 글이다.

하지만, 박노자 특유의 날카로움은 다른 글들에 비해서 좀 떨어지는...
- 접기
해인이한아빠 2011-12-2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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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만 보면 되는 아쉬움




1.

도법의 추천사

인간과 삶과 수행하는 자의 도리에 대해, 짧지만 논리적이고 명징하다.




서언은 박노자가 생각하는 불교교리에 대한 핵심요약정리다. 해방불교의 관점을 서술하고 있다.

우리 불교가 국가 또는 지배계급과 유착한 역사가 이미 2,000년을 훌쩍 넘은 만큼 우리 의식속에 남아 있는불교는 현실을 따라가며 인정하는 식이거나 지극히 개인 중심적이고 보수적이다. 개인의 문제들을 모조리 개인의 악업으로 설명하는 등 탈 사회화, 개별화되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한 개인적 차원의 '업장의 소멸'에 그친다.




게다가 불교의 대 사회적 측면 역시 현실을 무조건 긍정하고 재확인하는 '국가수호', 즉 소위 '호국'에 국한되고 만다.




불교의 목적은 일체중생의 이고득락인데,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낳은 고통을 영구화한다는 것은 불교의 근원적 목표와 상반된다.




불교적실천이란 국가와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부정, 해체의 작업이다. 이것이야말로 중생이 겪는 수많은 고통의 상당부분을 덜어줄 수 있는 집단 치유의 길이며 집단적 선업을 쌓아가는 길이라 할수 있다. 개인의 해탈과 병행될수 있는 '더불어 하는 수행'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지구와 사회의 세포를 하나하나 갉아먹는 암과 같은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폐해에 대항해 혁명적 투쟁을 벌이는 것고 집단 전체를 위한 해탈의 결험이 될수는 있을 것이다.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연대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집회에 참석한다거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구체화하여 발표하고 읽는 등의 지적 작업 역시 집단적 해탈을 향한 수행의 일종이라 하겠다.




하화중생이 따르지 않으면 그 어떤 깨달음도 이기적인 정신의 유의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중생의 모든 고통이 나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불교의 영혼은 동망가고 없다. '해방불교'에는 사찰도 불상도 기도도 없거나 이차적이다. 해방 불교는 부처님에게 비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되는 것이다.




자아의 경계선을 넘는 자비의 정신은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다.




좀 길어도 맥락을 따라가며 옮겼다.

서언이 가장 좋고, 본문은 서언만 못하다. 반성은 하는대 두리뭉실 술에 물타듯 처리하기 때문이다.







2.

박노자는 석가모니를 고대의 위대한 변증론 철학자라고 소개한다.

법륜스님의 책, 법정 스님의 책도 좋았지만, 답답하던 차에 박노자의 해석이 반갑다.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유마경의 문장이 비수처럼 가슴을 찌르더니

사회주의자의 삶은 대중의 바다, 인민의 고통과 함께 살며 함께 싸우는, 수행자라는 생각을 긍정해주는

박노자의 불교해석이 내 어깨를 두드려준다.




불교의 본질로 따지자면 내 아들이 서울대 입학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는 내 아들, 네 아들 구분없이 입시 지옥헤 시달리는 모든 이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으로 물심양면 학벌 타파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다.

어렵지 않고 보편적인 상식수준의 질문과 답은 명쾌하다기 보다 순하다.







3.

징병제가 승려들에게까지 적용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가끔 중들도 군대가나, 궁금하기는 했지.

왜 중들이 군대가서 뭐하는지에 대한 책은 없을꼬. 총들고 사람죽이는 중이라니, 거시기 하다.

군대에가서 살인을 훈련하는것에 동의하면서 그 얘긴 쏙 빼고, 늘 산사에서 청정하게 사는 척했던 거쟎아. 가증스런 것들.

만일 징병제에 동의하지 않았으면 예로부터 권력과 밀착하지 못했을테니까.

외적의 침입에 승병으로 나선 스님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고, 마치 장수 같았지.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생을 막기위해 노력하는 것과 살인훈련하며 전쟁을 학습하는 징병에 동의하는 것은 다른 문제 같아.

징병제에는 동의해주고, 세금은 안낼뿐 아니라, 사찰마다 절집 구경하는 값을 돈으로 받으시는것에 꼼꼼하시니, 참.




불교가 구가적 살생을 긍정하는 것은 기독교가 십자군전쟁을 중세부터 21세기 오늘까지 수백년 하고 있는것보다 더 이상하다.

기독교의 신 야훼는 애초에 인격신이라 복수의 신이고 적들을 죽이고 벌하는 신이다.

불교는 연기, 공에 대한 깨달음이 논리적인 생활철학인대

중생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명분으로 사람죽이는 것조차 허용하는 것은 과하다.

그때그때 다르다는 융통성을 마구마구 밀어붙여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걸면 귀걸이, 오로지 국가권력을 위해 춤춘다. 더러워.






4.

아쉬운것은 참으로 소심한 해방불교의 실천지침이다.

배타적 학벌집단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명문대중심의 입시제도를 거부하고, 살인을 가리키는 군대를 거부하지는 못해도,

알고는 살아야 하지 않냐고 말한다. 내 참.

그렇게 알거면 아는거랑 모르는 거랑 뭐 다른가.




이천년전에 국가권력과 만나 세속화된 불교가 인민들을 자유롭게 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는 커녕

인민에게 재앙이 되는 것에 대한 분석이 무디다.

이천년전 말고, 오늘현실의 분석은 그나마 없다. 뭐야, 박노자 실망이다.




박노자의 불교성찰과 비판적 고찰도 이미 흐리멍텅한대 불교내부의 쟁점에 대한 도법스님과의 대화는 더하다.

도법은 이도저도 아니다.

불교를 비판하지도 않을뿐 아니라 중립적인입장에서 객관을가장하여,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조심하는 것처럼

두리뭉실, 구렁이 담넘듯이 현실불교를 긍정한다.




불교는 붓다처럼 혁명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서언에서는 큰소리치더니 각론의 본문으로 들어가며 뭐하나 시원한 것이 없다.

한국불교의 문제가 딥다 많고 고질적이고 시스템상 고치기도 어렵다는 거다. 거기서 끝이다.

어려우니 어째, 기양 지배계급에게 봉사하며 인민의 고통을 빌미로 사기치며 중들이나 잘먹고 잘사는 거지.

영혼을 팔아 제 배를 채우는 탐욕스런 것들.

당장 구체적인 실천지침을 내놓지는 못하면 당장 붓다처럼 살자고, 선동이라도 시원하게 하든지. 답답이.




도법은 비폭력을 강조한다.

최소한 양심적병역거부자들을 가두는 것은 옳바르지 고 군대도 총칼도 전쟁도 거부한다는 운동을 하며 비폭력을 말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니 세련되게 파렴치하다.

더 큰 폭력을 용인하기위해 작은 폭력을 참으라는거지. 폭력이란 더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까. 다 폭력이니까.

결국 힘없이 당하며 고통스럽게 살라는 거지. 평화적으로. 죽임당하는 자는 죽고, 아픈사람은 계속 아프라고, 평화적으로.

아, 이런 논리 식상해.

이게 아니라면 도법은 설명을 더 해줘야 한다.

국가폭력에 빌붙어 엄호하며 그 결실을 나눠먹고 살아온 불교의 오랜 탐욕이 인민을 고통스럽게 하는것에 대해,

그 폐해와 극복방법에 대한 언급없이 비폭력을 말하니 인민들의 숨찬 고통을 외면하는 뻔뻔함이다.




불교에서 아힘사는 자본주의적 국가 사회의 제도화된 폭력을 무저항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아힘사는 제도화된 폭력의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투쟁이다.

기껏 어영부영 진빼고 마지막 결론부분에 이렇게 썼다. 면피하자는 거야, 머야.

그리하여 박노자는 초기 불교의 정신에 근거해 재가자 위주의 새로운 민중적 불교를 건설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꼬.

쌍차투쟁에 연대하는 불자들의 모임, 이런것은 아직 못보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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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쥐만세 2012-02-19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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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ck to the Buddha?




불교. 말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뜻이다. 중세의 유럽에서 사람들은 기독교 왕국을 꿈꾸었듯이 이 땅에서는 불국토라 하여 불교의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불교가 외래종교이긴 하지만, 그만큼 한반도에 남긴 흔적들이 적지 않다. 비록 고려대 이후로 교세가 예전만은 못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불교를 어린시절 나는 외면해 왔다. 뭐 특별히 관심이 없었을 따름이지만, 불교를 할머니들이 믿는 그런 종교, 따분한 것 등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종교로서의 접촉이라기 보다는 붓다라는 거대한 사상가(?)의 가르침에 흥미가 느껴져 다가선 것이 불교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는데 큰 기여를 했다. 불교가 생각보다 만만한 종교가 아니였던 것이다. 다만 내가 가지고 있던 불교의 편견이란 것은 비불교적인 한국불교에 기인한게 크다. 그것은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한국불교에는 비불교적인 것이 넘친다!



어떤 것이 비불교적인 것인가?



첫째, 영험한 기도발을 믿고, 아이들이 무한경쟁에서 다른 아이들을 제치고 경쟁에서 이기기를 빌며, 100일 기도를 드리는 기복행위다. 붓다는 방편으로서 신통력을 이용한 바가 있으나, 그렇다고 그런 신통력을 가르침의 핵심으로 삼지 않았다.



둘째, 불자의 대부분이 여성들인 이 상황에서, 아직까지도 변성불성론이니, 여성불성론이니 하는 여성차별주의적 이야기를 하고 있다. 승가는 스스로 경제활동을 할 수가 없으므로, 세속에서의 경제적지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계속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수행 공동체로서의 존경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런탓에 아무리 어느 누구에게도 깨달음의 길이 열려 있다는 혁명적인 가르침을 주는 붓다라도 당시의 시대적 한계에 따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오늘날에서도 계속 그런 가르침을 고수한다면, 승가에 대한 존경은 잃을 수 밖에 없다.



셋째, 한국불교의 주요한 성격으로 거론되는 호국불교 등이다. 부처의 제자들라는 사람들이 살생을 옹호한다? 대승불교의 여섯가지의 실천덕목에 지계란 것이 있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이다. 그런 계율에서 첫번째로 나오는 것이 불살생의 계다.



이렇게 한국불교에는 문제점이 분명히 있다. 저자는 마지막 결론에서 현재의 한국불교, 종단불교에 미래는 없다고 한다. 솔직히 지금의 한국불교 문제점이 많아 보인다. 내부의 일은 알 수 없지만, 겉으로 들어난 것을 봐서는, 2000년 전의 붓다가 힌두교 사이에서 나왔던 것처럼 할 수 없다면 가망이 없다고 하지 않을까... 현재 원전번역이 활발해지고, 붓다의 원음에 가까운 가르침을 읽을 수 있게 되면서, 뭔가 다른 길을 모색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무지한 한 중생의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다. 다만 그래도 혼탁한 세상에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청정한 승가가 있는 것도 좋지 않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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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2-01-18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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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를 죽인 부처





먼저 박노자라는 이름이 내 눈을 붙잡았다. 최근에는 한국 고대사가 그 대상이더니 이번에는 뭘 또 씹으시려고 그러시나... 제목을 보아 하니 불교가 씹힐 차례?

나는 특히 7장 ‘불교와 국가 그리고 국가 폭력’에서 다루는 호국 불교 이야기가 가장 충격이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당연히 살생을 하지요”라니... 불교 신자건 기독교 신자건 군대도 가고 총도 잡을 수 있다 생각한다. 내처 전쟁 중에 누군가 죽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으니까. 단순하게 이해한다. 그런데 ‘당연히’라니... 책에 실린 1968년 3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를 보자.


장삼의 법의를 걸친 송도진 스님(20세)은 사격 자세를 잠시 쉬고 ‘대의를 위해서는 살생할 수 있는 것이 법가의 진리’라고 말하고는 다시 카르빈의 방아쇠를 당겼다. 명중률은 2등 사수 정도. 송 스님은 임진란의 승군 대장 사명 대사의 고사를 펼치며 국토방위에 앞장서겠다고 기염이 대단하다.(208쪽)



진작부터 우리나라 불교를 호국 불교라고 배워 왔기에 별 생각 없었다. 그런데 박노자 같은 근본주의자가 정리해 놓은 글을 보니 제정신이 돌아온 듯하다. 167쪽에 나오는 코끼리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신에게 독화살을 쏜 사냥꾼을 용서하고 상아까지 준 코끼리 왕은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다음 생애에 부처가 된다면 맨 먼저 그대의 삼독을 빼줄 것입니다.” 이것이 초기 불교 정신이라면 어느 누가 ‘당연히’ 살생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이 밖에도 여자는 성불할 수 없다며 남녀를 차별하는 전통, 초기 불교가 구현한 민주주의 이야기에서 오늘날 배울 게 많을 듯하다. 원효를 비판한 내용도 있는데 그 부분은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내가 원효를 좋게만 생각해 왔나 보다. 자료 사진도 많고 낯선 용어에는 각주가 달려 있어 나처럼 불교에 문외한인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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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그냥 2011-10-28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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