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30

崔明淑 - [메모: 이븐 알라비] 12세기 이슬람 신비주의 철학자 이븐 알라비의 존재 일성론 ”모든 존재가 하나이다“

(1) 崔明淑 - [메모: 이븐 알라비] 12세기 이슬람 신비주의 철학자 이븐 알라비의 존재 일성론 ”모든 존재가 하나이다“... | Facebook

[메모: 이븐 알라비]
12세기 이슬람 신비주의 철학자

이븐 알라비의 존재 일성론 ”모든 존재가 하나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 전 우주가 존재, 신, 알라이다. 그런데 이즈츠 도시히코는 이것이 이슬람 철학의 세계관만이 아니고 동양철학의 바탕에 흐르는 것이라고 한다. 
1장:
이븐 알라비:
  • 현실은 꿈에 지나지 않지만 단순한 환상이 아니다. 
  • 절대적 실재가 개별적으로 나타난 것, 자기현현한 절대적 실재의 특수형태이다. 
  • 현실은 형이상에 기반을 둔 꿈이다.
  • 무언가이고 무언가가되는 세계는 상상이지만 실제로는 “실재”그 자체이다. 
  • (현실은 환상이지만 주관적 환상이 아니고 객관적인 환상, 존재론적으로 견고한 기반을 가진 비현실이다. 즉 현실은 환상이 아니다.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환상은 아니다.)

이븐알라비제자 카샤니의 5 지평..
수피의 세계관에서 5가지 세계로 구별됨
 
  • 1. 본질그자체 절대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세계 
  • 2. 속성과 이름의 세계, 신성의 현전
  •  3 행위의 지평, 주성의 현전 
  • 4 이미지와 상상의 지평 
  • 5 감각과 현실 경험
 
보다 낮은 지평의 것이 보다 높은 지평의 이마주로서 기능.

이븐 알라비의 존재론은 신비주의에 근거한 존재론. 
개시라는 신비체험에 의해서 드러난 무언가에 인도된 존재론. 이븐 알리비는 5지평의 각각 “있다” 지평을 현전(하드라)로 표현. 
각각의 하드라(현전)는 각각의 “있다”가 자기를 드러내는 특정의 존재론적 측면.
학크(절대자) 는 다음의 상태에 있다.
 
  • 비 타자리-제 1하드라-절대성의 상태에 있는 절대자
  • (타자리:현실적 구체적 차원으로 절대자가 자기를 드러낸 것)

  • 타자리-제2 하드라-스스로를 신으로 나타난 절대자
  • 타자리-제3하드라-스스로 주로 나타나는 절대자
  • 타자리-제4하드라-반은 영적, 반은 물질적으로 나타나는 절대자
  • 제5하드라-스스로를 감각세계로 나타나는 절대자
 
이븐 알라비에 의하면 2-4하드라,,가시적 불가시적이든 절대자가 자신을 드러낸 것이다.

 
나의 텍스트 이해:

  • 절대자는 하나로 “있다”인데 그것이 분절되어 언어와 속성으로 나뉘어 행위로 드러나는 세계로 
  • 성서의 천지창조나 예수나 모하메드의 세계가 2,3의 지평 하드라이고 
  • 우리가 사는 감각의 세계나 명상과 정진,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특별한 체험을 하기도하며 
  • 또한 물질적이기도 한 현실 세계가 4,5인 것으로 읽었다. 

  • 이븐 알라비의 신비체험의 논리적 구축인데 
  • 그때 무언가 체험이 있었다면 지금도 있는 것이고 
  • 신비체험의 분석은 현대라면 다른 식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뇌과학, 인지 심리학…생물학, 화학 등등.) 
  • 무언가 실재한다는 각성을 하는 또는 하고자하는 사람들이 있다.
  •  
  • 모든 종교에서 공통으로 말하는 그것이 무언지 
  • 나같은 사람은 공부로서 접근할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 독서모임에서 읽자고 하니까 읽는 책이지 자발적으로 읽게 되는 책은 아니다.
 =====  
2장: 절대성 상태에 있는 절대자

  • 절대자를 알라로 말하지만 이븐 알라비에게 알라는 한정된 상태의 절대자이다. 
  • 진정한 절대자를 신이라고 부르지도 않는 무언가인데 학크라고 하는데 진리, 리얼리티를 말한다. 학크는 절대성 상태에 있어 알려지지 않고 알 수도 없는 무언가이다.

  • 무조건적으로 초월한 상태의 절대자는 순수 일성 단계에 있다. 
  • 하지만 거기는 타자리가 일어나지 않아 인식할 그 무엇이 없다. 
  • 절대자는 일인데 일은 다수를 묶는 것도 대립되는 것도 아닌 “있다”가 본질적으로 갖는 원초적 단순성, 
  • 영원한 정적, 절대자의 타자리가 시작되는 것은 다음 단계.
  •  
  • 이븐 알라비는 현상계에 일어나는 여러 인식 경험, 신비경험에서 조차 
  • 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이 있다. 이것이 순수 일성을 방해한다. 
  • 신비가가 나에의해 나를 보았다고해도 마찬가지. 
  • 순수일성 단계의 절대자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채이다.
  •  
  • 그럼 절대자에대해 한마디도 못하나? 
  • 엄밀히는 아무 술어도 붙이지 못하지만 “있다”라는 술어가 최고도의 무조건성을 가지는 표현. 
  • 이 입장에서 본 절대자를 이븐 알라비는 “본질”이라고 부른다.
 
(이부분은 스승 대신에 카샤니가 스콜라 철학풍으로 해석. 
순수일성차원의 본질의 본래적 존재)카샤니는 “있다”를 세가지 범주로 언급 
  • 1.절대적 있다 
  • 2.원형 
  • 3.감각세계의 구체적 존재자.
 
이분알라비의 있다의 세계의 층차..
  • 1.절대적 있다 
  • 2한정된 있다 
  • 3 있다도 없다도 술어적으로 붙일 수 없는 무언가. 

2번이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세계.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3번 세계는 원형의 세계. 
이븐 알라비는 절대적 있다와 알라를 동일시한다. 
  • 존재론에서 시작해 결론은 거기에서 벗어나 믿는 사람의 종교적 차원으로 이행. 
  • 알라로 명명되는 차원은 신비가 자기현현(타자리)하는 최초단계. 
  • 알라비는 무사의 대답을 인용, 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 ”하늘과 땅의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의 주인이다, 
  • 당신들이 확고한 신앙이 있다면“이라고 대답했다고 
  • 이븐 알라비는 평범한 문구 뒤에 큰 비밀이 있다고 진리를 본다. 

  • 즉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형태의 스스로 그 안에서 출현되는 것이 신
  • 혹은 여러 형태속에서 현현하는 것이 신(예지의 대좌)

문구: 'non-tajalli tajalli tajalli Haqq (Absolute) tajalli the first hadrah (the Absolute in its absoluteness) the second hadrah (the Absolute mani- festing itself as God) the third hadrah (the Absolute mani- festing itself as Lord) the fourth hadrah (the Absolute mani- festing itself as half-spiritual and half-material things) the fifth hadrah (the Absolute mani- festing itself as the sensible world) tajalli'의 이미지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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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의 전개 주요섭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의 전개

-‘생명운동가’ 김지하를 기리며



주요섭(생명운동가)



1. 다시, 왜 김지하와 생명운동인가?


2. [1980년대]생명사상의 구성 생명운동의 태동 

1)로터스상 수상 연설과 원주보고서

2)생명사상의 구성과 정립: : 이변비중의 차원변화

3)생명운동의 근거지 만들기


3. [1990년대]생명운동의 양 날개 

1)개벽과 생명운동

2)생명정치운동의 실험

3)생명문화운동의 전개


4. [2000년대]생명운동의 차원변화

1)생명과 평화의 길 

2)세계생명문화포럼과 생명사상·생명운동의 전지구적 확장

3)촛불과 화엄개벽의 꿈


5. 생태파국시대의 생명운동과 흰 그늘의 길




1. 다시, 왜 김지하와 생명운동인가?


새삼스러울 수도 있다. 김지하(1941-2022)의 생애 후반 40년은 의문의 여지없이 심원한 생명시인이자 생명사상가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오늘날 김지하의 감각과 사유는 한국  생명운동 , 나아가 한국사회의 일부가 되었다.

  그렇다면, 왜 다시, ‘김지하와 생명운동’인가? 왜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의 관계를 다시 질문하려 하는가? 오늘의 초점은 ‘생명운동가’ 김지하이다. 김지하는 분명 시인이었고 생명사상가였지만, 또한 김지하는 ‘생명운동가’였다. 스스로 그것을 자임했거니와 그의 폭넓은 활동은 생명운동가라는 말에 부족함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말이다. 김지하는 이미 “감옥 안에서 생명운동을 결심했다”고 말하고 있다(『흰 그늘의 길3』). 그의 생명사상은 생명운동의 실천과정에서 더욱 깊고 넓어졌으며, 또한 섬세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부가 필화(筆禍)나 설화(舌禍)로 격발되기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거슬러 올라가면, 김지하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 서있을 때에도 생명사상을 품고 있었고, 생명운동의 감각으로 행동했다. 예컨대, 그는 1975년 양심선언에서 “동학의 속삭임”을 언급했고, 1976년 최후진술에서 “시천주/양천주/체천주” 등 동학의 언어를 빌어 그의 민주화운동이 ‘천주(天主)운동’이었음을 밝힌다.

  이 글의 목적은 ‘생명운동가’로서의 김지하를 조명하는 것이다. 시인이나 사상가로 설명할 수 없는 ‘생명운동가’ 김지하의 면모를 관찰한다. 한국 생명운동 40년 역사에서 김지하는 간과되었다. 감옥에서의 극적인 생명체험 끝 생명사상을 태동시킨 것은 물론 인정되고 있지만, 대체로는 1991년 ‘죽음의 굿판’으로 기억되고, 여성 대통령 지지자로 언급된다. 김지하에게서 열정적이고 치밀한 사회운동가를 상상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이변비중(離邊非中)의 차원변화’ 와 ‘초월적 돌파’ 를 위해 용맹정진한 ‘생명운동의 전사’였는지도 모른다. 환경부 직원들 앞에서 ‘생명운동’을 ‘환경운동’과 구별했고, 서유럽의 근본 생태주의운동과도 다르다며 각을 세웠다.  


“나는 환경운동과도 다르고, 근본 생태주의운동과도 또 다른, 생명운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글에서는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처음으로 문자화된 1981년 로터스상 수상 연설문으로부터 시작해 생명운동가로서 절정의 활동력을 보여준 2000년대까지 생명운동 및 사회적 활동 연대기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이 작업을 통해 한국 생명운동사에서 ‘생명운동가’ 김지하가 재조명되고, 나아가 한국 생명운동의 잠재력이 재평가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단, 이번 작업은 ‘김지하와 한국 생명운동’의 전반적인 흐름을 살펴보는 시론적인 작업에 머물 수밖에 없다. 구체적인 활동과정과 활동내용에 관한 연구는 향후의 과제로 남길 수밖에 없다. 특히 이글에서 ‘율려학회’와 ‘세계생명문화포럼’ 등 김지하의 생명문화운동 부분은 스케치 머물고 있음을 밝힌다.


2. [1980년대]생명사상의 구성 생명운동의 태동


생명운동은 물론 사회운동으로서 ‘집합적 행동’이고 사회적 소통의 형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 생명운동의 태동에는 가톨릭과 원주라는 종교적·지역적 배경이 엄존했다. 그러나, 그것을 담론으로 구성하고 서사를 창조해낸 것은 분명 김지하라는 ‘인물’ 이었다. 1980년대 한국 생명운동의 태동기, 김지하는 고유의 생명사상을 주창·구성·정립하고, 생명운동의 근거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1)로터스상 수상 연설문과 원주보고서


”나의 생명운동 제안은 사실상 그날의 원주 가톨릭센터 이층 수상식장에서였다. 명시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그 내적 흐름은 그러했다.“(『흰그늘의 길3』, 41)


김지하는 광주학살의 ”비참과 죽음의 공포“가 사람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1980년 12월 석방됐다. 6년여만이었다. 그리고, 1년 후 1981년 12월 김지하는 로터스상 수상 연설을 통해 ‘생명의 세계관’을 제안한다. 이 상은 1975년 김지하의 감옥 시절에 이미 수상이 결정된,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 수여하는 문학상이었다. 김지하의 고백에서 보았듯이, 이 연설문 안에 생명사상의 핵심이 다 들어있었다. ‘생명의 세계관’과 ‘생명의 존재양식’이 명시되고, 생명의 존재양식, 즉 생존양식은 ‘공동체’적이면서도 ‘영성’적이라는 점이 적시된다. 그리고, 후천개벽과 음(陰)개벽을 천명한다.  


“우리는 이 비참과 죽음의 암흑 한복판에서 그 암흑이 지닌 양면성(兩面性), 암흑의 의미, 그 모순의 신비를 발견함으로써 비참과 죽음의 암흑 그 자체를 그대로 뒤집어 유럽인과 모든 형태의 민중의 적(敵)마저도 포함한 전 인류와 전 생명계에 찬란한 부활을 가져다 줄 세계사적 대전환을 이루어야 할 역사적 책임을 걸머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존엄한 생명의 존중과 사랑’이라는 보편 진리를 생활적으로 구체화시키고 새롭고도 폭 넓은 세계관을 창출해내야 하며 영성적(靈性的)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새로운 생존양식을 창조해내야 합니다. 인간과 자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결정적인 친교와 평화를 성취시킬 생명의 세계관, 생명의 존재양식을 출현시켜야 합니다.”(강조는 필자)


이뿐만이 아니다. 놀랍게도 김지하의 ‘개벽사상’과 ‘전환담론’이 이미 로터스상 수상 연설문에는 내장되어 있었다. 나아가 강증산의 ‘음개벽’을 빌어, 여성의 시대를 선포한다. 


“현대는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시대이며 음개벽(陰開闢)의 때입니다. 이제까지의 인류문명사는 선천(先天)시대였고 음과 양이 갈등하는 시대, 즉 양이 지배하는 시대였습니다. (중략)  이 전환이 곧 부활이요, 이 전환이 곧 단(斷)이며, 이 전환이 바로 오늘날 우리 한국 민중을 포함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전체 민중이 수행해야 할 세계사적 책임의 내용입니다. 이 대전환은 무엇보다도 먼저 정신개벽, 즉 문화적 대변혁을 전제로 합니다. 전환과 변혁의 주체는 물론 민중입니다.  (중략)  오늘날 후천개벽의 시대에는 음과 양이 조화하는 시대, 즉 음이 지배하기 시작하는 시대입니다. 여성과 남성이 평등대동을 이루는 것, 즉 '여성적인 것'이 그 지배를 넓혀가는 역사이며 새로운 형태의 모권(母權)이 중심으로 되어가는 문화의 때요, 해원과 상생의 때입니다.“(강조는 필자)


  그리고, 이듬해인 1982년 봄, 드디어 ‘생명운동’이라는 말이 적시된 문서가 발표된다.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이하 ‘원주보고서’)이란 문서가 그것이다. 이 문서는 ‘생명운동에 관한 원주보고서’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197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으며 지역협동운동의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던 원주의 사회운동가들이 이 문서를 통해 사회운동의 방향전환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원주보고서」는 개요, 본문, 각론의 3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개요’가 1985년 출간된 『남녘땅 뱃노래』에 「삶의 새로운 이해와 협동적 삶의 실천」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으로 보아 이 부분은 순수하게 김지하의 글로 보인다. 본문과 각론은 원주캠프의 좌장이었던 장일순을 비롯한 원주의 활동가들에 의해 보완되거나 공동으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문서 앞의 로터스상 연설문과 달리 가톨릭적 언어로 쓰여있는데, 이 문서가 공식적으로는 가톨릭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회의 활동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문서에서 김지하는 당대를 ‘생명위기시대’로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협동적 삶으로의 전환’과 산업문명의 쌍생아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넘어서는 ‘문명의 전환’이 요청된다고 밝힌다. 그리고, 유물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전통적인 사회운동 노선에서 ‘생명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으로의 전환을 선언한다. 

  물론 키워드는 ‘생명’이었다. 이때 생명은 ‘이념’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와 같은 이념의 환상을 깨뜨리며, 고통과 죽음의 생명세계를 알아차리게 했다. 기존의 사회운동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차원의 사회운동의 길을 제안했다. 그리고, ‘생명운동이라는 희망’을 선언한다.


“제3세계 민중자신을 비롯한 전 인류와 전 생명계, 전 우주적인 생명의 부활, 해방, 완성을 향한 세계사적 대전환에 대해 제3세계 민중운동이 짊어진 역사적 책임의 내용이 그 확실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광활한 대륙에서, 수십억 민중의 일상적인 영성과 생존 속에서 생명운동이라는 대전변이 일어나야 하고 또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야말로 죽음에 직면한 전 인류 전 중생의 유일한 희망이다”.(강조는 필자)


  「원주보고서」 이후 생명운동은 스스로를 다른 사회운동들과 구별하면서 자신을 생성해갔다. 조선 말 동학이 서학 및 성리학과 싸우면서 자신을 정립했듯이, 생명운동은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진보와 보수 양쪽과 거리를 두면서 자신만의 사회운동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그것은 이변비중(離邊非中), ‘양끝’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었다. 새로운 범주, 도식, 패러다임으로의 ‘차원변화’였다.


2)생명사상의 구성과 정립: 이변비중의 차원변화


김지하의 관점에서 생명운동으로의 ‘전환’은, (생명체험에 의거한 생명사상의 통찰이 그렇듯이), 단순히 ‘방향바꾸기’가 아니었다. ‘차원변화’였다. 그리고 그 설명의 논리가 원효의 화쟁사상으로부터 얻은 ‘이변비중(離邊非中)’ 개념이다. 이는 「원주보고서」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 내내 결정적인 화두가 된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동시에 넘어서기라는 실천적인 과제이기도 했다. 


“생명의 진리는 중도다. 그것은 양쪽 가장자리를 떠나면서도 가운데가 아니다(離邊非中). 그것은 모두(全)이며, 모든 것이 생명의 씨앗임(處處皆佛)을 믿는 것이며 이 믿음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실천(慈悲行)이다. 제3세계 민중운동으로서의 생명운동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다같이 떠나면서도 그 중간길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것, 어떤 사람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모든 사람 속에 활동하는 반생명적 경향을 반대하고 모든 것, 모든 사람 속에 숨은 채 드러나는 생명의 씨앗을 현실적으로 꽃피우는 일이다. (중략) 스스로 창조하고 스스로 해방하고 반생명에 저항하다 죽고 다시 부활하여 스스로 확장함으로써 자신을 변화시키고 체제 자체의 역사적 한계를 근본적으로, 근원적으로 철저히 소멸시킬 전면적인 부활과 해방과 개벽을 가져오는 변혁운동이며 동시에 자비와 사랑의 운동인 것이다.”(강조는 필자)


로터스상 수상 연설문과 「원주보고서」를 통해 ‘생명의 세계관’이 제안되고 생명운동으로의 차원변화가 이루어진 후, 김지하는 『대설 남』을 통해 생명사상의 한국적 원형을 판소리 형식을 빌려 형상화한다. 그리고 1984년 출간된 이야기 모음집 『밥』과 1985년 출간된 『남녘땅 뱃노래』(특히 2부)를 통해 그의 생명사상과 생명운동론의 핵심내용이 구성되고 정립된다. 1989년 「한살림선언」을 포함해, 이후의 논의는 이들의 변주, 혹은 심화·확장이라고 말해도 아주 잘못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아래 『밥』과 『남녘땅 뱃노래』(2부)의 목차가 이를 증거한다. 


『밥』의 목차


창조적인 통일을 위하여; 〈로터스상〉수상연설, 

인간 해방의 열쇠인 생명

일하는 한울님

나는 밥이다

천지굿

똥 또는 광대

생명의 담지자인 민중


『남녘땅 뱃노래』(2부)의 목차


삶의 새로운 이해와 협동적 삶의 실천 

인간의 사회적 성화(聖化)

은적암기행

구릿골에서

남녘땅 뱃노래

앵산기행

민중문학의 형식문제


그리고, 1985년 「민중문학의 형식문제」를 통해 ‘신명’의 예술론을 펼친 김지하는 1986년 발행된, 한국전쟁 당시 죽임당한 원혼들의 해원을 노래한 시집 ‘검은 산 하얀 방’ 서문에서 ‘신명의 생명사상’을 대답한다. 김지하는 스스로 묻는다. “그 소리, 속으로부터 울려나오던 그 소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도대체 그 무엇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조짐인가? 이런 일은 무슨 힘에 의해 일어나는 것인가?” 그리고, 김지하는 스스로 답한다. 


“이 물음에 대답할 자는 오직 하나─

모든 것을 아우르며 모든 것을 놓아주며 모든 것을 살아 뜀뛰게 하는 활동하는 무(無), 신명─

지금 여기 죽임당하는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솟구쳐 출렁거리며 모든 존재를 죽임에서부터 살려내고 인간의 사회적 삶과 내적인 삶,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 무생물, 물질과 기계까지도 거룩하게 드높이고 서로 친교하고 공생하고 해방하고 통일하여 ‘한울’로 살게 하는 가없는 저 화엄의 바다, 그 약동하는 생명의 물결뿐이리라.”


3)생명운동의 근거지 만들기


신명은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어떤 힘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지하의 생명사상은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게 하는 힘‘에 대한 체험적 통찰이며, 그러므로 김지하의 생명사상은 ‘신명’의 생명사상이다. 그렇다. ‘신명 없는 노래’는 ‘죽은 노래’가 되고, ‘신명 없는 노동’은 ‘죽은 노동’이 된다. 생명운동은 곧 ‘신명 살림 운동’이고, ‘신명 나는 세상’이 ‘생명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신명 나는 세상’은 저절로 이루지지 않는다. 김지하에게 생명운동은 “인위적이고 자각적이며 조직적인 것”이다. 생명운동은 ‘인위적 무위’일 수밖에 없다. 생명운동의 역설이다.


“생명운동은 인위적이며 자각적이며 조직적인 것입니다. 생명운동에 인간의 역사적 사회적 생명, 즉 민중생명의 인위적이고 능동적인 자기회복운동 속에서 자각적으로 진행됩니다. 전 우주중생의 생명운동이란 현실적으로는 인간의 인위적인 죽임, 즉 억압과 분단과 왜곡 소모 파괴 약탈 오염 변질 멸종 등에 대한 저항을 민중생명의 인위적인 자기회복운동 속에서 진행한다는 이야기입니다.”(『김지하전집1』, 「인간의 사회적 성화」)


생명운동은 신명나는 활동이고 생명의 결대로 사는 삶과 사회를 지향하지만, 그 역시 사회운동인 이상 하나의 인위적 사회기획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지하는 끊임없이 조직을 시도했다. 특히 생명운동의 초창기 ‘생명운동의 근거지’ 만들기가 절실했다. 전국 곳곳에서 실현지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했다. 


“나는 전부터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고, 이제는 낙향하여 생명과 영성과 지역공동체운동을 새로운 시작하려는 높은 뜻이 있었다.”(『흰그늘의 길3』, 137)


김지하는 1985년 여름 전라도 해남으로 이사했다. 원주에서 빚어진 여러 가지 “불화와 집안의 내적 갈등에서 벗어나고 악화되는 신병치료와 생명사상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원주를 떠나면서 가톨릭과도 거리를 두게 되었다.

  땅끝 해남은 김지하 생명사상의 또 다른 계기이기도 했지만, 김지하 생명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애린』 연작에서 보여지듯, 새로운 것은 항상 끝에서 시작된다. 수운 최제우가 ‘하늘님체험’을 체험하고 자신의 깨달음을 펼치다 눈을 피해 전라도 남원에 갔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남접의 씨앗을 뿌려졌듯이 김지하는 해남의 아우들에게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의 씨앗을 뿌린다. 그리고 이는 훗날 광주한살림과 전북한살림을 포함해 호남지역 생명운동의 뿌리가 된다. 김지하도 그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해남의 아우들)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사상과 지역공동체운동에 관한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흰그늘의 길3』, 144)


김지하가 해남에 머물던 시절 인연을 맺었던 지역의 후배들, 김성종, 천용식, 박순태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1987년 여름부터 광주 무등산에서 감잎차를 공동 제다(製茶)하며 ‘광주한살림공동체’를 준비했다(모심과살림연구소, 2007: 106-107).


“광주는 처음부터 유기농산물직거래보다 문화운동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이들은 1988년 봄, 광주 주월동에 한 살림농장을 세워 젊은이 30여명이 공동체생활을 하며 녹차와 감잎차를 생산하고 달과 장승, 종이공예, 전통염색 공예품 들을 공동생산하는 등 생명문화에 기초한 생활문화운동을 전개하며 생산과 배움 그리고 치유를 통합하는 한살림 실현지를 꿈꾸었다. 이때 한광석이 시도했던 전통염색은 이후 우리 사회에 전통염색이 널리 퍼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88년 여름부터 유기농산물 공급 사업을 시작한 뒤, 1990년에 광천동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출판, 교육, 도농직거래, 녹색환경운동, 주민자치운동, 의료공동체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내부 구심력을 잃고 직거래 사업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키지 못해 1992년에 활동을 중단하고, 2003년 다시 유기농산물 직거래 논의가 시작될 때까지 긴 휴면 상태로 접어든다. 하지만 초창기 광주한살림은 생명사상에 기반을 둔 생명문화운동의 폭과 가능성을 확인시켜주고, 배움과 치유의 터전 그리고 생산이 결합된 한살림마을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모자람이 없는 실험이었다.” 


한편, 1988년 4월 김지하는 원주의 동지들과 함께 <한살림모임>의 준비에 착수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 생명운동의 근거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6년 12월 <한살림농산>의 설립으로 본격화된 유기농 생산소비운동과 더불어 생명운동의 또 하나의 수레바퀴인 생명문화운동을 시작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개벽적 문명전환 운동을 펼칠 수 있는 큰 틀의 생명운동에 대한 열망이 컸기 때문이다. 김지하는 “그늘로부터 새 빛이 돋으리라”고 믿으며 <한살림모임>에 큰 기대를 가졌다. 1년여간의 연구와 토론 끝 최혜성의 대표 집필로 선언문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89년 9월 29일, <한살림모임> 창립식과 함께 「한살림선언」이 발표된다. 

  한국 생명운동사에서 「한살림선언」은 서구의 공산당선언에 버금간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역사적인 문건으로 이후 한국 생명-생태-환경운동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살림모임>은 창립 후 생명사상과 관련된 대중강좌를 개설하고 『한살림』(1990)이라는 무크지를 발행하기도 하고, 『공생의 사회 생명의 경제』(1990) 등 생명운동 관련된 책들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살림모임>의 활동은 재정적인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오래지 않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계기로 김지하는 박재일의 한살림과도 멀어지게 된다. 김지하는 훗날 “한살림 문화운동의 중지는 ‘운동’의 정지”였다고 회고한다(『흰그늘의 길3』, 244).  그만큼 아쉬움이 컸다는 말이다. 


3. [1990년대]생명운동의 양 날개 


세인들에게 1990년대의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지만 , 김지하에게 1990년대는 생명운동의 양 날개를 펼치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양 날개는 ‘생명정치’와 ‘생명문화’였다. <생명민회>가 만들어지고 경기도 부천과 전북 부안 등에서 ‘생명과 자치’의 실험이 이루어진다. 다른 한편, <율려학회> 등 생명문화운동단체들이 창립되고 새 담론이 제시되었으며, 서울과 지방을 넘나들면서 생명문화의 개화를 꿈꾸었다.


1)개벽과 생명운동


「한살림선언」이 발표된 1년 후 1990년 8월 김지하는 수운회관에서 「개벽과 생명운동」이라는 제목으로 긴 강연을 한다. 김지하는 이 강연을 통해 ‘생활협동운동’과 구분되는 ‘생명문화운동’으로서의 생명운동을 강조하며 「한살림선언」에 버금가는 강령적 비전을 제시한다. 「개벽과 생명운동」은 김지하 개인의 것이었지만, 1981년 로터스상 수상 연설 이후 10여년 간 심화·확장된 생명운동론의 결정판이었다. 특히 개벽운동으로서의 생명운동, 문명전환운동으로서의 생명운동의 비전과 전략이 담대하게 펼쳐진다. 김지하에게 개벽이 천도(天道)라면, 인사(人事)는 생명운동이다. 


“개벽은 천도요, 인사는 생명운동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인간, 사회, 자연생태계의 파괴와 근원적 우주 생명의 질서로부터의 이탈이 극에 달한 현실 속에서 그 생명의 본성을 인식하고 그 생명의 본성과 질서에 따라서 살려고 하는 생명운동을 통해서만이 개벽을 실천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강조는 필자)


강연은 놀랍게도 “나는 찢어진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어서 강연은 현 시대를 ‘만연된 병적 현상’과 ‘생명의 상실’으로 진단하고, 개벽의 전망을 제시한다. 김지하에게 개벽은 “한 마디로 우주질서 전체가 바뀐다는 뜻이며, 우주질서의 변화 속에서 인간의 질서, 인간의 역사적인 모든 조건도 또한 변한다는 뜻이며 5만 년의 인류문명사 전체가 대전환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개벽의 관점에서 생명운동의 철학과 비전을 밝힌다. 세계관과 생활양식의 대전환, 사회와 문명의 대전환을 선포한다. 김지하가 제안하는 ‘생명문화운동의 6대 방향’은 어마어마한 스케일과 함께 탁월한 시대적 적실성으로 30년이 훨씬 지난 오늘에도 큰 영감을 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간의 자기실현 

생명공동체 건설 

생태계의 균형 회복 

중도적 민족통일 

새로운 문명의 창조 

우주와 인간 간의 관계 정립 


2)생명정치운동의 실험


그리고 김지하는 한편으로 <한살림모임>과 함께, 다른 한편 개인적으로 다양한 생명운동들을 펼쳐나간다. 1990년 4월 21일 <한살림모임> 등 여러 단체가 함께 마련한 ‘지구의 날’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고, 1991년엔 ‘지구의 날’ 행사와 이른바 ‘은행나무 살리기’ 운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또한 1993년 4월 환경운동연합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김지하가 ‘생명’이라는 술을 부어준” 최열을 위해 축사를 하기도 한다(신동호, 2007).

  특히 ‘은행나무 살리기운동은 기존의 환경운동과 구분되는 김지하의 생명론적 환경운동을 잘 보여준다.  1991년 4월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던 높이 25m, 둘레 10.7m에 달하는 거대한 은행나무 앞에 김지하과 풍수지리 전문가 최창조, 단식농성을 하던 환경운동가 차준엽 등이 모였다. 인근의 아파트 신축으로 수령이 500여년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이 나무가 고사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준엽 대표의 단식 8일째 되던 4월 22일 제2회 지구의 '지구의 날'에 김지하는 차준엽과 함께 환경선언문을 읽었다. 제목은 ’환경에서 생명으로!‘였다. 

  

”시민 각자 각자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커다란 생명의 그물임을 깨우치고 생명의 원리를 공부하며, 그 원리에 따라 총체적 오염에 스스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 모든 환경운동은 이제 포괄적 생명운동으로 크게 차원변화를 해야 한다.

  생명의 또 하나의 원리는 창조적 영성이다. 방앗골 은행나무 주변토박이 주민들은 요즘 매일밤 산신령과 큰 호랑이 꿈을 꾸고 있다. 생명은 그렇게 신령한 것이다.“(강조는 필자)


다시 ’차원변화‘다. 주민과 함께 하는 생명운동은 이제 ’주민자치‘, ’생명정치‘로 비약한다. 김지하는 1992년 지방자치선거가 부활한 것을 계기로 시민 참여와 풀뿌리 민주주의를 내건 ‘참여와 자치를 위한 시민연대회의’에 참여한 바 있는데 , 이제 본격적인 생명정치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때를 전후해 생명운동과 주민자치에 관한 담론을 모은 책들을 연이어 펴낸다. 『뭉치면 죽고 헤치면 산다』(1991), 『옹치격』(1993), 『틈』(1995), 『생명과 자치』(1995)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1994년 <생명가치를 찾는 민초들의 모임(이하 생명민회)>의 창립 제안으로 구체화된다.


“이에 대안운동으로서의 새로운 사회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환경, 자치, 문화 등을 한 고리안에 통합시킬 생명운동을 제창하며 생명가치, 곧 보편적 삶의 통합을 추구하는 민초들의 모임인 생명민회 운동을 제안하는 바이다.”


  김지하에게 주민자치는 ‘생명운동의 정치형식’이었다.  김지하에게 ‘지역은 생명운동의 틈’이었다. 틈을 통해 기존의 질서와 다른 새로운 시공간이 태동한다. 김지하는 <생명민회>를 통해 생명운동의 조직화를 시도한다. <생명민회>는 생명운동단체들 중 유일하게 ‘정치(자치)’를 표방한 단체로써, 1995년 전면 실시 예정인 지방선거를 앞두고 설립되었다. 김지하는 생명운동의 ‘정치형식’으로서 주민자치와 민회운동을 내걸고, 이창식(YMCA) , 강대인(대화문화아카데) 등과 함께 <생명민회> 활동을 이끌었다. 특히 생태정치학자 문순홍(1957-2005) 등 소장학자들과 함께 공동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때 발표된 「생명민회를 제안한다」 는 한국형 ‘생명정치’의 원형을 보여주었다. 이 문서는 김지하와 문순홍의 공동작업의 결과로 명시되어 있다. <생명민회>는 먼저, “현재의 세계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으로서 ‘인식의 전환’을 촉구한다. 특히 「생명민회를 제안한다」의 ‘생성적’ 시공간관은 2023년 오늘의 생명운동에도 통찰의 원천이 된다. 


① 열려있는 선형이 아니라 ‘닫혀있는’ 그물망의 원으로

② 단선형 절대시간에서 복선형 상대시간으로

③ 절대공간에서 상대공간으로 : 다층의 동위상화


그리고, 미래세계는 현 세계 속에 만들어진 ‘틈’으로 엿보인다. ‘틈’으로부터 생성된다. 


“현재의 세계는 자신의 모습으로 실체적인 외형과 가치내재적 내용이란 양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반면, 바라직한 사회는 구체적 외형을 가지지 못하고 오직 의식속에 이미지로만 낡은 삶의 틀속에 존재한다. 즉, 이 세계에서는 그 가치체계가 구체적인 제도/법률/학문체계 속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무의식속에 숨어서 보편화되어 있다. 반면 바람직한 세계는 현실세계를 위태롭게하는 문제군들이 만들어낸 의식의 “틈” 속에 과거의 구체적 경험과 더불어 이미지로서 엿보인다. 그러나 현 체제의 보편적 의식과 무의식은 상식의 세계를 이루고 있어, 이 “틈” 속에 살아 숨쉬는 과거와 미래를 보지 못하도록 막거나, 보더라도 곧 부인토록 만든다. 따라서 미래의 세계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틈”을 확장시키기 위해 제도와 삶의 방식 속에 감추어져 있는 상식을 걷어내고, 이를 새로운 가치체계로 전치시킬 필요가 있다.“(「생명민회를 제안한다」)


<생명민회>는 구상에 머물지 않았다. <생명민회>를 통한 생명-자치운동의 전국적 네트워크를 기대했고, 청년들의 조직화를 도모했다. 실제로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생명사상 및 생명운동 강좌를 통해 청년모임이 만들어지고, 전북 부안 등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생명가치’가 실현되는 주민자치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또한 ‘그물코’라는 매체를 중심으로 생명문화운동과 생명자치운동의 연결고리를 꾀했다. 

  그러나 <생명민회>의 활동은 문순홍의 투병과 이른 죽음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정으로 활동이 중단된다. 훗날 김지하는 이 시기의 활동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물코는 간행물의 제목이기도 했는데, ”생명문화운동과 지역의 풀뿌리 정치 등을 연결하고 동북아와 세계의 환경, 생활협동, 유기농 등 시민생명운동을 네트워킹하는 그야말로 ‘그물코’가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세한 형태로마나 경기도 부천과 전라북도 부안에 근거지를 만들고자 몇 년간 노력했다.(흰그늘의 길3, 240) 특히 부안 변산반도에 전남 전북 충남 경기를 잇는 풀뿌리 생명운동의 근거지를 장만하는 것. 부안에 자주 갔다. 김지하에게 그것은 ”작지만 큰일이었고 오래됐지만 새길이었다.“(『흰 그늘의 길3』, 240) 


3)생명문화운동의 전개


환경-생명운동과 자치-생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김지하는 선택과 집중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생명운동의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날 수는 없었다. 1990년 후반 김지하는 역량을 생명문화운동에 집중하기로 결심한다. 자치-생명운동을 위해 자주 방문하던 전북 부안 변산의 바닷가에서였다. ‘변산의 밤’에 김지하는 ‘시인’과 ‘문화’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생명운동, 풀뿌리지역운동, 사회변혁운동도 중요하지만, 시인이 노력해야 할 것은 ‘마음보’를 바꾸는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생명문화운동이요, 영성운동이었다(『흰그늘의 길3』, 252). 이때 문화운동이란 “문학과 예술, 역사, 철학 세 방면의 통합된 큰 틀의 문화를 바꾸고 새로운 창조하는 운동”이다(『흰그늘의 길3』, 253).

  김지하는 생명운동의 핵심은 ‘접화군생(接化群生)’ 네 글자라고 누차 강조한 바 있다.  ‘접화군생’은 최치원의 그 유명한 난랑비서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결국 생명운동이란 뭇 생명과 모시고 어울리는 ‘풍류’ 세상인 것이다.  

  이런 감각은 1996년 7월 ‘신풍류회의’의 발족으로 이어졌다. 김지하를 비롯해 미술과 국악, 문학을 아우르는 문화예술인 6명이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모임을 갖고 <신풍류회의(新風流會議)>를 발족한다. <신풍류회의>는 “본디 우리 스스로가 갖고 있던 풍류사상의 큰 회복을 통해 오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그리고, 1998년 생명문화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위해 <율려학회>가 조직된다(『흰그늘의 길3』, 264~268). ‘율려’는 생명문화운동의 새로운 키워드이다. 김지하를 비롯해 강준혁·김영동·김정헌·임진택·채희완·정희섭 등은 1998년 8월부터 9회에 걸친 준비모임을 갖고 새로운 인간상과 우주질서를 우리의 고대로부터 공부한다. 그리고, 1999년 8월 4일 공식적으로 창립대회를 개최한다. 

  김지하에 의하면, “율려는 우주만물의 생명질서에 알맞은 음악”이다. 율려는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동양의 음악의 이름이다. 율(律)은 양(陽)이고 려(呂)는 음(陰)이다. 우주의 12계절에 비유하면, 6개월은 따뜻한 계절인 양(陽)이고 나머지 6개월은 추운 계절인 음(陰)인데, 바로 이 음양(陰陽)의 음률을 '12율려(律呂)'라고 한다. 동아시아 사상에서 율려는 음악적 척도이지만, 삶과 세계의 준거가 된다.  

  한편, 김지하는 <율려학회>와 별도로 지역의 영호남의 지역활동가들과 문화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삼남민족 네트워크>를 결성한다(『흰그늘의 길』, 273-276). 1999년 개천절에 남원 교룡산성 선국사 은적암터에서 2박 3일의 판이 열렸다. “동학사 속의 동이사상 문화사를 공부하는 삼남민족 네트워크 구성”했다. 김지하는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아! 그날을 어찌 잊겠는가! 그날에 푸르른 하늘이 그토록 활짝 열렸으며...“


4. [2000년대]생명담론의 확장과 차원변화


2000년대 들어서며 김지하의 생명운동은 더욱 활발해진다. 삼보일보와 오체투지와 같은 생명운동의 현장에 참여하고, 세계생명문화포럼을 개최하여 생명사상의 지평은 전지구적인 차원으로 개방된다. 아울러 <생명과 평화의 길>이라는 단체를 창립하고 같은 제목의 책을 펴내며, 김지하 고유의 ‘생명평화운동’을 펼쳐나간다. 그리고, 다시 이변비중의 차원변화. 화엄개벽의 촛불을 켠다.


1)생명과 평화의 길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2000년대의 첫 10년은 한국 생명운동의 절정기였다.  지리산 생명평화결사와 삼보일배, 그리고 오체투지를 거치면서 생명평화운동으로 확장되고, ‘생명평화’ 가치는 전 사회적으로 확산된다. ‘생명과 평화의 길’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생명운동가 김지하도 함께 했다. 

  김지하는 2001년 4월 지리산 실상사에서 도법 스님과 등과 함께 젊은 학자·학승들이 참여한 가운데 ‘지리산’을 주제로 공부를 시작한다. 김지하는 지리산 공부모임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지리산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좌우익 대립이 가장 치열했던 곳입니다. 민간인과 군경을 합쳐 1만명이 죽어나갔어요. 그러나 그곳은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이 몸을 숨기는 곳이었고 혁명투사들이 정기를 받은 장소입니다. 삶과 죽음, 투쟁과 화해가 함께 숨쉬는 산이지요. 전쟁·배제·대립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극복하고 화해·사랑·모성·자비를 철학화, 사상화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김지하는 같은 해 5월 26일 열린 ‘생명평화 민족화해 지리산 위령제’의 공동봉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003년은 한국 생명운동의 신기원이 열린 해였다. 2003년 3월 25일에서 5월 31일까지 불교의 수경스님과 가톨릭의 문규현 신부가 중심이 되어 전북 서해안의 대규모 간척사업 저지를 위해 ‘삼보일배(三步一拜)’가 진행됐다. 삼보일배는 한국 사회운동의 새 지평을 여는 대사건이었다. “환경에서 생명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선언되고, 운동방식에 있어서도 간디의 비폭력 투쟁에 비견되는 ‘거룩한 사회운동’의 모델이 만들어졌다(주요섭, 2023).

  김지하에게 삼보일배는 ”이 세대의 징표“였다. 김지하(『생명학1』, 5)에 따르면, ”이제까지의 시민운동에서 생명운동은 그 차원이 변했다. 형식은 시민운동이지만, 내실에서는 사회적 공공성을 넘어서 우주사회적 공공성, 생태적 연쇄저항, 생명학의 영역으로 성큼 들어왔다. 새만금 간척 중단을 요구하며 삼보일배 55일째를 맞이한 순례단에게 김지하는 헌시를 보내기도 했다.  제목은 ‘三步一拜(삼보일배)’다. 

  그리고 5년 후 2008년, 김지하는 이명박 정부의 한반도대운하에 반대하는 투쟁의 현장에 다시 함께 한다. 그해 4월에는 종교환경회의가 개최한 ‘문명전환기 생명평화운동의 방향과 역할'이라는 주제의 대화마당에서 김지하는 '생명과 평화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 강의를 통해 김지하는 “역사상 사회공공성을 지닌 현안이 시민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고 말하며 "한반도 대운하 정책 논란이 새로운 차원의 사회적ㆍ문화적 운동의 시초가 될 것"이라고 예감했다.

  5년 전 삼보일배로 새만금을 살리기 위한 거룩한 투쟁에 나섰던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는 2008년 9월 4일 4대강으로 상징되는 “개발과 파괴, 생명의 죽음과 약자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참회하는” 오체투지(五體投地)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지리산 노고단 천고제가 참석한 김지하는 “광장의 촛불. 이제 산에 오릅니다.”로 시작되는 고천문을 짓기도 했다. 

  김지하의 ’생명과 평화의 길‘은 대안적 경제시스템의 제시로 이어지기도 했다. 2008년 11월 일본의 후쿠오카에서 열린 ‘호혜를 위한 아시아 민중기금’의 아시아 확대회의에 제안자로 참석하여 기념 강연을 한다. 일본의 생협 및 환경운동단체들과 한국의 일부 생협과 필리핀, 인도네시아, 동티모르, 팔레스타인,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에서 온 민중단체들이 참가한 가운데, 김지하는 칼 폴라니의 ‘호혜’, ‘교환’, ‘재분배’ 개념을 빌려 ”호혜를 전면(前面)에, 교환을 일상으로, 획기적 재분배를“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한다. 호혜와 교환이 융합된 ‘호혜시장’ 개념을 제안한다. 사실 이 슬로건은 한살림운동에서 상품을 파는 동시에 선물을 나누는 ‘매장/나눔터’의 이중구조를 통해 나름대로 구현되어왔다. 

  한편, 김지하는 2004년에는 ‘생명과 평화의 길’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위해 직접 <생명과 평화의 길>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조직한다.  2004년 8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활동을 시작했다. 창립준비위원장을 맡은 정성헌을 비롯해, 삼남민회·율려학회·생화생명공부모임·지리산공부모임 등의 형태로 10여 년 동안 함께 활동한 인물들이 참여했다. 김지하는 ‘생명과 평화의 시대’를 열어나갈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하는 화두로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 를 제시한다. 이후 <생명과 평화의 길>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세계생명문화포럼을 주관하고, 2007년 <생명학회>를 창립을 주도하는 등 생명학을 체계화하고 생명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김지하는 2005년에 같은 제목의 『생명과 평화의 길』이라는 펴내기도 했다.

 

2)세계생명문화포럼과 생명사상·생명운동의 전지구적 확장


이제 생명평화의 지평은 동아시아와 전 세계로 확장된다. 생명문화의 확산과 생명학의 정립을 중심으로 고유의 생명문화운동을 계속 이어오던 김지하는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세계생명문화포럼>(2003~2006년) 개최한다. 이를 통해 국내외의 생명담론 집대성하고, 생명운동의 지평을 지구로 확장하고자 했다. 세계생명문화포럼은 그 규모에 맞게 국내외 성과를 집대성했다. 


“아름다운 모심 힘찬 살림” 


2003년 12월 18일 경기도 수원에 있는 경기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에서 '세계생명문화포럼-경기 2003' 개막식이 열리고 3박 4일이 포럼이 시작됐다. “21세기 문명의 전환과 생명문화”를 주제를 논의하기 위해 한국과 해외 15개국 108명의 학자와 문화예술인, 시민사회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생명과 관계된 문화적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면서 옛 아시아의 문예와 지혜들을 전면적으로 탐색·재조명하고, 세계 곳곳에서 논의되고 실천된 생명문화 등 동서양의 여러 사상과 그 사례들을 나누고자” 했다. 

  ‘생태주의와 생명사상’, ‘생명의 문화적 통로’, ‘공생의 삶과 생명의 경제’, ‘동아시아의 역사와 상생’로 구성된 4개의 주제마당과 ‘생명문화와 지역발전계획-‘살림’의 경기도 만들기‘를 주제로 하는 특별마당이 열렸고, 국내외의 저명한 환경운동가와 지식인이 초대되었다. 반다나 쉬바(인도 환경운동가), 리카르도 나바로(‘지구의 벗’ 의장), 수잔 레이시(예술가), 발 플럼우드(호주 국립대학 연구원), 미조구찌 유조(동경대 명예교수) 등이 그들이다. 

  3박4일의 포럼을 마친 참가자들은 「수원 세계생명문화 선언문」을 발표한다. 선언은 “개개 인간의 삶이 소중하게 여겨지며, 생명을 지속하게 하는 인간의 활동과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하는 ‘생명문화의 원칙’을 따랐음을 확인하고, 1)전체마당 선언과 2)주제마당 선언 3)‘행동 추천’으로 구성된 선언문을 발표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호주의 생태여성주의자인 발 플럼무드(Val Plumwood)가 제안한 “생명권에 대한 존중”은 큰 주목을 받았다. 김지하는 이후 여러 차례 플럼우드를 언급하며, 파국적 생태위기의 유일한 해결책은 (플럼우드와 합의한) '인격-비인격, 생명-무생명 모두를 우주의 공동주체로 다 함께 모시는 문화와 생활의 대변혁'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전하고 있다.  플럼우드의 ‘비인간 생명권’ 개념은 ‘선언문 1-4’에 반영되었다. 선언문의 ‘주권국가’처럼이란 표현은 ‘비인간-비생명’에 대한 ‘윤리적’ 고려만이 아니라 ‘정치적’ 행동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져 있다.


“1.4 인간을 넘어선 세계(다른 생명 존재)에 관해서, 우리의 삶이 다른 생명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 우리의 철학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행동도 중요하다. 모든 문화와 전통은 반드시 자신의 관행과 전통을 주의 깊게 비판적으로 검토해서, 인간을 제외한 생명계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바꾸어야 한다. 만일 이러한 영향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면, 이제 그 영향을 우리 자신이 깨닫고, 그에 따른 책임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곧 우리의 의무이다. 인간을 제외한 종들은 고유한 권리와 영토를 가지고 있는 “주권국가”처럼 인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 국가들뿐만 아니라, 이 “주권국가”들과 평화적인 공존과 상호존중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강조는 필자)“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진행된 세계생명문화포럼의 주제를 일별한다. 

  2003년에는 ”21세기 문명의 전환과 생명문화“를 주제로 ”여러 생명담론들과 실천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정리“했다. 

 2004년에는 ”한국의 생명담론과 실천운동“을 주제로, 한국 생명사상의 조명을 통해 생명운동의 대중화 촉발을 기대했다. 

  2005년에는 ”동아시아 문예부흥과 생명평화“를 주제로 ‘동아시아 사상 문화의 르네상스 탐색과 호혜망 구축을 모색’했다. 

  4년째 2006년에는 ‘생명사상과 전 지구적 살림운동’을 주제로 3년 동안 진행된 세계생명문화포럼의 사상을 통합적으로 회고하여, 21세기 새로운 학문이자 실천사상으로서의 ‘생명학’을 정립하며, 전 지구적으로 ‘살림운동’을 확산하는 메시지의 전 세계로 발신하는 것을 기대했다.  


3)촛불과 화엄개벽의 꿈


‘후천개벽’은 김지하 생명사상이 처음으로 문자화되었던 1981년 로터스 수상 연설에서부터 김지하 생명사상의 열쇠말이었다. 김지하의 시대인식이자, 문명사적 대전환의 비전을 제시하는 핵심 개념이었다. 그것은 우주론적이면서도 사회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2008년을 전후해 드디어 ‘화엄개벽’으로 종합된다. ‘화엄개벽의 길’(법보신문) , ‘화엄개벽의 모심’(대화문화아카데) 으로 선포된다.

 

“이 지구와 전 인류의 오늘의 삶과 의식 안에 모심의 화엄개벽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지금의 대혼돈은 내일 없는 대붕괴로 귀일하고 말 것이다.”(「화엄개벽의 모심」) 


그런데, 김지하에게 화엄개벽은 관념의 산물이 아니었다. ”촛불을 켜라, 모셔야겠다.“(흰그늘의 길3, 426)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김지하는 이미 화엄개벽을 예감했고, 또 체험했다. 2008년 이른바 광우병 촛불 현장이 그곳이다. 김지하는 촛불에 ‘진심’이었다. 그의 촛불에 대한 관심은 2002년 6월 서울 월드컵 당시 출현한 '붉은악마'에 대한 경탄과 재해석에서 시작되었다. 2002년 6월 ‘유월개벽’ 이라는 김지하의 기고글은 이를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이다(『흰그늘의길3』, 351-369).


  김지하에게 촛불은 “우리 시대의 4.19”였다. 김지하에게 촛불은 “68혁명보다 훨씬 더 깊고 더 넓고 더 거창한 문명사 전체의 근본적 대전환과 직결돼 있다.”(2009a: 44) 그리고, 김지하에게 촛불은 ‘숯불’과 ‘횃불’과 구별되어야 한다.  “지난해 시청 앞에 켜진 촛불은 바로 이 돌아옴이었다. 네페쉬하야의 예루살렘 입성소식이었으니 이 소식을 모심이 다름아닌 촛불이다. 촛불은 횃불이 아니다. 숯불도 아니다.”(화엄개벽의 모심) 

  김지하에게 촛불은 ‘하아얀 어둠’, ‘흰 그늘’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원형은 김지하 생명사상의 태동기에 한 편의 시로 출현한 바 있다. ‘촛불’이라는 제목의 시가 그것이다.


촛불


나뭇잎 휩쓰는

바람 소리냐 비냐

전기는 가 버리고 

어둠 속으로 그애도 가버리고 

금세 세상이 온통 뒤집힐 듯 

눈에 핏발 세우던 그 애도 가버리고 

촛불 

홀로 타는 촛불 

내 마음 휩쓰는 것은

바람 소리냐 비냐. 

(『검은산 하얀방』, 1986: 21)  


그렇다면, 김지하의 화엄개벽의 실체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만물해방’이다. ‘인간해방’이 아니다.  김지하는 신유물론에 버금가는 통찰력과 실질적 탐색을 진행한다. 그의 슬로건은 ‘물질이 메시아다’이다.


“나는 지난 촛불의 '온라인, 오프라인 화백'의 저 시끄러운 쌍방향 통행들과 광장의 직접민주주의에서 희미하게 화엄경을 느꼈다. 또한 그때 동시에 느꼈다. '우주만물이 물질의 굴레에 갇힌 채 자기들을 해방해줄 메시아가 올 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성경 구절이다.

메시아는 누굴까?

물질 자신이다.

물질 자신이 물질 자신을 인식하고 해방한다.

사실은 물질 안에 있는 신과 영과 생명이 그 주체로서 물질 자신을 자기조직화하여 해방하는 것이겠다. 이것이 곧 창조적 진화다. 화엄경의 진리와 근본에서는 같다.”(『촛불, 횃불 숯불』, 92, 강조는 필자)


일찍이 김지하는 돌멩이의 생명성을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물질이 메시아다. 21세기 첫 번째 바이러스인 ‘사스’가 유행했을 때, 김지하는 경북의 산간을 헤메인다. 치유물질을 찾기 위해서였다(『초미』). 4대강의 반대운동을 펼칠 때에도 김지하는 ‘죽임당하는 강’과 동시에 그 강의 재생능력에 주목했다(「변혁적 생명학」). 

  김지하는 화엄개벽을 통해 ‘차원변화의 차원변화’를 보여준다. 김지하의 촛불과 화엄개벽론은 2009년 출간된 ‘소근소근 김지하의 세상이야기 인생이야기’ 4권에 풍부하게 결집되어 있다. 


1권 『방콕의 네트워크』. / 서문: 모심, 화엄개벽의 길

2권 『촛불, 횃불, 숯불』. / 서문: 촛불, 횃불, 숯불

3권 『새 시대의 율려, 품바품바 들어간다』. / 서문: 사타구니 대해탈의 첫 샘물

4권 『디지털 생태학』 / 서문: 붉은악마에서 이미 촛불을 보다


5. 생태파국시대의 생명운동과 흰 그늘의 길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동아시아는 향후 2~3년 안에 정치, 경제, 사회, 사상, 문화적 대변동을, 향후 7~8년, 또는 13년 안에 온 세계와 연계되어 생명, 생태, 생활, 물, 식량, 건강, 에너지 등등에서 생태적, 기후적, 우주적 대변동, 악질만세(惡疾滿世)의 대병겁(大病劫)을 맞이하게 된다. 불가피하다. 시간이 많지 않다.“ 


김지하는 꼭 집어서 ‘13년’이라고 적시한다. 2008년에 쓴 글이니 13년을 더하면 2021년인 셈이다. 코로나19가 전세계를 휩쓸던 시기다. 물론 우연이겠지만, 예사롭지가 않다. 김지하의 생명운동은 처음부터 개벽운동이었다. 

  파국의 위기가 운위되는 오늘 김지하의 개벽담론은 서유럽의 ‘파국담론’과는 결이 다른, 또 다른 전환담론의 가능성을 예감케 한다.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생명운동은 한국 생명운동의 잠재력이다. 전지구적 생명운동이 미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과학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브뤼노 라투르는 묻는다. “근대화할 것인가? 생태화할 것인가?” 그리고 그는 물론 방향으로 ‘생태화’를 지시한다. 그리고 전략으로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를 제시한다. 수많은 동서의 지식인들이 그를 인용해 “인간과 비인간의 집합체를 하나의 세계”로 여기는 코스모폴리틱스를 논했고, 국내의 적지 않은 학자들이 그를 소개하고 논문을 썼다(김환석, 2017). 그러나, 김지하의 ‘우주생명학’에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다. 

  최근 서유럽의 생태철학에서 이른바 ‘어둠의 생태학(dark ecoloyg)(티머시 모턴, 2022)‘이 주목을 받고 있다. 서유럽에 ‘어둠의 생태학’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어둠보다 깊은 ‘심연의 생명사상’이 있다. 김지하의 ‘명(冥)의 생명사상’(『아우라지 미학』)이 그것이다. 그리고, ‘심연’의 어둠은 ‘희망’의 어둠이기도 하다. 김지하는 말한다.


 “이 어둠. 이 절망을 우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길을 찾아야 한다.” 


희망은 ‘명(冥)’에 있다. 김지하가 「화엄개벽의 모심」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종말이 개벽”이기 때문이다. ‘지구적 비상사태와 새로운 생태신학의 전환점”을 탐색하는 여성신학자 캐서린 켈리는 『지구정치신학(2022)』에서 “시작에서 종말로 가는 시간이 아니라 종말에서 새로운 시작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그렇다. ‘시종(始終)’과 ‘종시(終始)’는 구별되어야 한다. ‘종시의 시간’을 구성해야 한다.

  ‘생명운동가’ 김지하를 일별해보았다. 그는 시인이고 사상가였지만, 분명 그는 생명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시인의 감수성과 사상적 깊이로, 김지하는 한국 생명운동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있다. (물론 수많은 다른 감각과 사유와 사건들이 한국 생명운동사에 스며들어 있다.) 

  김지하 평생의 화두는 ‘모심’이었다. “내 생애를 통틀어 더듬어 찾아온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줄여 말하면, ‘모심’ 즉 ‘侍’ 한글자라고 즉 대답하겠다.”(『흰그늘의 길3』, 424) 그런데, 이때 모심은 ‘허공에의 모심’이다(『김지하전집』, 11). 비약을 위해서는 허공에 발을 내딛어야 한다. 화엄개벽의 ‘풍요로움’의 원천은 ‘허공에의 모심’에 있었던 것이다. 1976년 김지하가 ‘최후진술’에서 언급한 ‘천주운동’도 어쩌면 ‘허공에의 모심’이었을 것이다. ‘활동하는 무’를 모심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흰 그늘의 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김지하의 생명운동의 길이었을 것이다.


“흰 그늘은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희망, 그러나 현실적인 치유에 대한 희망이다.”(『흰그늘의 길』, 415)





참고문헌


김소남. 2017. “1970~80년대 원주그룹의 생명운동 연구”. 동방학지 제178집. 171∼211쪽

김소남. 2017. 『협동조합과 생명운동의 역사』. 소명출판.

김지하. 1984. 『밥』. 분도출판사.

김지하. 1985. 『남녂땅 뱃노래』. 두레.

김지하. 1986. 『검은 산 하얀 방』. 분도출판사.

김지하. 1996. 『생명과 자치』. 솔

김지하. 2002. 『김지하 전집2(사회사상)』. 실천문학사

김지하. 2005. 『생명과 평화의 길』. 문학과 지성사.

김지하. 2008.  『흰 그늘의 길 3』. 학고재.

김지하. 2009a. 『소근소근 김지하의 세상이야기 인생이야기1-방콕의 네트워크』. 이룸. 

김지하. 2009b. 『소근소근 김지하의 세상이야기 인생이야기2-촛불, 횃불, 숯불』. 이룸. 

김지하. 2009c. 『소근소근 김지하의 세상이야기 인생이야기3-새 시대의 율려, 품바 품바 들어간다』. 이룸. 

김지하. 2009d. 『소근소근 김지하의 세상이야기 인생이야기4-디지털 생태학』. 이룸. 

김지하. 2013. 『수왕사』. 올리브앰앤비

김지하. 2014a. 『아우라지 미학』. 다락방.

김지하. 2014b. 『초미 첫 이마』. 다락방.

김지하. 2018. 『우주생명학』. 작가.

김환석. 2017.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와 기술사회의 민주주의”. 사회과학연구, 30(1), pp.1-18.

김희정. 2010. “감응과 척도 그 현대적 의미”. 東亞硏究 제59집(2010년 8월), 163-186.

모심과살림연구소 편. 2012. 『생명운동자료모음』. 모심과살림연구소.

모심과살림연구소. 『스무살 한 살림 세상을 껴안다』. 도서출판 한 살림. 

문순홍. 2006. 『생태학의 담론(문순홍유고선집1)』. 아르케

신동호. 2007. 『자연의 친구들(환경운동 25년사)1, 2』. 도요새.

윤형근. 2003. “한국의 생태담론과 생명운동”. 계간 사상 2003년 겨울호 96-126.

임나영. 2022. 동시대 미술에 나타나는 파라픽션(Parafiction) 연구: C.램버트비티의 이론을 중심으로. 이화여대 예술조형학부 석사 논문.

장일순, 『나락 한알 속의 우주』. 녹색평론사.

제인 배넷. 2020. 『생동하는 물질 사물에 대한 정치생태학』. 문성재 역. 현실문화.

주요섭. 2015. 『전환이야기』. 모시는 사람들.

주요섭. 2023. 『한국 생명운동과 문명전환』. 풀씨.

캐서린 켈러. 2022. 『지구정치신학-지구적 비상사태와 새로운 생태신학의 전환점을 위한 투쟁』.  박일준 번역. 대장간.

티머시 모턴. 2022. 『인류-비인간적 존재들과의 연대』. 김용규 번역.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김지하 시인 1주기 추모 문화제

 





오구라 기조 小倉紀藏 -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 '조선사상전사' , '새로 읽는 논어 ' ,

Ogura Kizo오구라 기조 小倉紀藏 -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 '조선사상전사' , '새로 읽는 논어 ' , +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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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30.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리와 기로 해석한 한국사회)



별점8.0점 | 네티즌리뷰 7건 (동작,영등포,마포아현,강남,강서,양천,고척,용산,동대문,개포,종로,정독,
저자 오구라 기조|역자 조성환|모시는사람들 |2017.12.20
원제 韓國は一個の哲學である <理>と<氣>の社會システム
페이지 272|ISBN 9791188765003|판형 규격외 변형


韓國は一個の哲學である 〈理〉と〈氣〉の社會システム (講談社學術文庫 2052) (文庫)


韓國は一個の哲學である (<理>と<氣>の社會システム)
小倉紀藏 저 | 講談社 | 1998

별점0.0점 | 네티즌리뷰 0건
저자 오구라 키조|講談社 |2011.05.12 재발간
페이지 264|ISBN 9784062920520

목차
0 韓國.道德志向的な國
1 上昇への切望――<理>志向性のしくみ
2 <理>と<氣>の生活空間
3 <理>と<氣>の文化體系
4 <理>と<氣>の社會構造
5 <理氣>の經濟.政治.歷史
6 <理氣>と世界.日本



한국 사회는 사람들이 화려한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하나의 거대한 극장이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1998)의 후기에서 “이 책은 무엇보다도 한국에 대한 찬탄과 비판의 책이다. 이 책의 제목에 두 가지가 모두 들어 있다. 찬탄은 ‘철학’이라는 말에, 비판은 ‘하나’라는 말에 담겨 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2150600075&code=910100&sat_menu=A074#csidxb20f4e03b85726fa1f7f1c20a52f04b




문고판 후기
p.258-259

... 이로 인해 일본과 한국의 아카데미즘은 점점 더 서구의 세계관으로 도배질되게 되었다.

대학이라는 장은 서구적 세계관의 대리인들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지배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한국 연구라는 분야에 과거에는 없었던 '우등생'이라는 사람들이 대거 가담하게 되어, 이 식민지화는 점점 더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본이나 한국의 시험 우등생 같은 이들이 어찌 한국을 인식할 수나 있겠는가? 권위를 인정받은 저명한 서구적 세계관(방법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한국을 인식했다는 흉내를 내고, 적당한 논문을 써서 대학에서 자리를 얻고, 대량의 예산(세금)을 확보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려고 하는 주구( )들을 나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한국 인식 같은 것은 못하고 있다. 내 인식의 성장은 이 책과 그 후에 쓴 한 두 권의 책으로 멈추고 말았다. 그 외에는 의미 있는 글은 없다.

그래도 다시 한번 내가 한국에 접근하는 일이 있을까? 한국이 나에게 접근하는 일이 있을까?

모른다.


2011년 3월

교토 후카쿠사에서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_




3장

'리'와 '기'의 생활공간




2. 리기의 생활학




2) '리'의 위광( )과 '리'의 상품




p.68

...

<제일의 리 = 달>은 근원적인 단지 하나의 '리'이다.

<제이의 리 = 달>은 만물에 동등하게 분배된 '리'로, 이것을 '분수리(分殊理 )'라고 한다.

단지 만물은 '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드러난 '리'도 각각 다른 것이다.







3.'리'와 '기'의 방법론




1)이분법의 극복




p.77




아니 그런데 이 책의 방법론 자체가 '리'와 '기'의 이분법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두 세계를 분리하기만 하는 분석은 오류이기 때문이다.

'리'의 세계와 '기'의 세계를 단지 나누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두 세계는 분리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붙어 있다. 두 세계는 서로 뒤섞여 있으면서 떨어져 있다. 이것을 주자학의 용어로는 '리'와 '기'는 '불상잡( ) 불상리( )' (서로 뒤섞여 있지도 않고 서로 떨어져 있지도 않다) 라고 한다.







2) '리'와 '기'의 상호 관계




...

'리'와 '기'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 관계에 있다. 주자가 말하듯이 '리'와 '기'는 불상리(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리'와 '기'는 불상잡( )이기 때문에 서로 완전히 붙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둘은 어디까지나 별개의 것으로, '기'가 '리'를 가리고 있다. 그리고 '기'의 맑고 탁한 정도에 따라 '리'를 드러나는 정도도 달라진다.







4장

'리'와 '기'의 문화 체계




14)




15) 의상의 리리무애법계 理理無碍法界




p.101

...

그런데 의상은 이 네 개 법계의 사상이 성립되기 이전에 '리리무애법계'라는 신기한 개념을 주장했다. 이것은 '리'에 어긋난 듯한 기묘한 생각이다.

즉 유일절ᆞ평등무차별ᆞ융통편재( )한 '리' (이것은 물론 주자학의 '리'가 아니라 화엄의 '리')들이 서로 무애하다(=장애가 없다) 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에 대해서는 이즈쓰 도시히코( )가 이슬람 철학자 Ibn al-'Arabi 이븐 아라비(1165-1240)의 사상을 빌려 설명한 것이 참고할 만하다.

이즈쓰는 '리리무애법계'의 '리'란 유일하고 절대적인 '리'가 개별적인 '리'로 자기분절(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리고 이것은 주자학에서 말하는 '분수리(分殊理 )'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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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종법계(四種法界),四法界사법계 four realms of reality




사종법계(四種法界),四法界 four realm..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t/l/s/t/j/s/0/1/2/5님의 블로그 : 네이버 블로그
자기소개가없습니다. ............................ 연구 목적,정보 블로그 (상업목적 이웃 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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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理)[8]와 리(理)의 의존관계(상즉相卽)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8] 이때 리(理)는 사(事)와 일체로서의 리(理)이며, 개체적 리(理)를 인정하기에 가능한 교설이다.




의상(신라) - 나무위키 (namu.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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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理一分殊(이일분수) : 우주의 근원은 하나이지만, 이것이 나뉘어지면 각각 다른 형태와 성질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理壹分殊(이일분수) 이치는 하나이나 나뉘어 다르니




* 리일분수(理一分殊); 세계 보편적 진리인 리일(理一: 하나의 리)이 각 개체에 부여된 것이 분수리(分殊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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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범신론은 만물이 개별의 이(理)를 구유하고 있지만 그 개별의 ‘이’는 보편적인 하나의 ‘이’와 동일하다는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명제와 일맥상통한다. 또한 이일(理一)과 분수(分殊)를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과 각일기성(各一其性)으로 명쾌하게 설명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슈가 되고 있는 보편성과 특수성, 전체성과 개체성의 합일을 표징하는 것이다. 스피노자 사상의 현대적 부활은 그의 철학체계 속에 나타난 신, 자연, 인간 그리고 자유와 행복에 대한 그의 주장이 지속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들이며, 그의 사상으로부터 오늘날에도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 대안문명 건설의 단초가 거기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 최민자 , ' 스피노자의 사상과 그 현대적 부활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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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思想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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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小倉 紀藏|筑摩書房新書 |2017.11.01
ISBN 9784480071040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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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읽는 논어



별점7.0점 | 네티즌리뷰 2건 (동작,영등포,구로,강서,양천,개포,정독,
저자 오구라 기조|역자 조영렬|교유서가 |2016.05.09
원제 新しい論語
페이지 268|ISBN 9788954640435|판형 규격외 변형


‘애니미즘’적 세계관이란 삼라만상에 생명이 깃든다는 세계관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 ‘생명’이 드러난다는 사상이다. 저자는 이러한 해석을 통해 이제까지 인류가 확실히 인식하지 못했던 생명관을 명확히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공자라는 사람의 생명철학이라고 강조하며, 공자의 세계관에 다가서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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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논어』의 세계관에는 〈애니미즘〉의 색채가 짙다고 본다. 그러나 주자학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애니미즘〉을 부정하고, 『논어』와 유교 전반을 〈범령론汎靈論〉적으로 해석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범령론〉이 〈애니미즘〉을 몰아낸 최종단계였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논어』 텍스트를 통해 밝히면서, 동아시아 〈애니미즘〉의 복권에 관해 철학적으로 논의한다. 그 과정에서 이제까지 인류가 확실히 인식하지 못했던 생명관을 명확히 포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공자라는 사람의 생명철학이라는 것이 저자의 기본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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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생명〉에 대한 동아시아의 두 가지 해석, 즉 〈애니미즘〉과 〈범령론〉에서 〈애니미즘〉을 대표하는 사상가였다. 〈범령론〉을 ‘범신론’이라 해도 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신神’이라는 글자가 일신교적 신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범령론〉이라 부른다. 〈범령론〉이란, 세계 혹은 우주가 하나의 ‘영靈(spirit)’ 혹은 영적인 것으로 가득차 있다고 보는 세계관이다. 스피노자의 범신론도 큰 의미에서는 〈범령론〉인데, 동양에서는 ‘기氣 사상’이 대표적인 〈범령론〉이다. 왜냐하면 ‘기’라는 것은 순수한 물질이 아니라, 생명이나 넋을 포함한 ‘영적인 물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 전체가 하나의 기로 되어 있다고 보는 도가나 유가 등의 기 사상은 〈범령론〉이라 할 수 있다고 저자는 전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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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외친 ‘인仁’이라는 개념도 흔히 ‘도덕’이나 ‘사랑’으로 이해하지만, 좀더 정확하게는 인간이 둘 이상 있을 때 그 관계성 〈사이〉에서 문득 드러나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파악한다. 즉 공자의 ‘인’은 〈사이의 생명〉이라는 의미였다는 것이다. 이런 공자적 〈애니미즘〉 역시 〈제3의 생명〉의 세계관이다. 이에 비해, 〈범령론〉은 〈제2의 생명〉의 세계관이다. 이 책에서 〈범령론〉은 세계(우주)에 하나의 보편적이고 비육체적인 생명이 가득하다고 보는 사상 일반을 가리킨다.

애니미즘이라는 단어는 흔히 삼라만상에 생명이나 아니마가 깃들어 있다고 보는 세계관을 가리키는데, 저자는 이 책에서 ‘삼라만상에 생명이나 아니마가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주관共同主觀에 의해 〈생명〉을 문득 드러내는’ 세계관을 괄호를 붙여 〈애니미즘〉이라 일컫는다. 그러면서 이런 〈애니미즘〉을 보통의 애니미즘과 구별하기 위해 〈소울리즘soulism〉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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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3.<제3의 생명>의 부활을 향하여




p.249

<생명>은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갑자기, 우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똑같은 하늘을 보아도 <생명>을 느끼는 사람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제3의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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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지금, 영적이고 보편적인 <생명>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물( ) <사이>, 물과 물 <사이>에서 우발적으로 드러나는 <생명>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실은 많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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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사이의 생명>, <제3의 생명>적인 세계관은 공자적 애니미즘 (명료하게 표현해서 soulism)인데 이를 이어받은 후대는 범령론(통상적인 범신론)으로 오인하고 곡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주자학 이후에는 애니미즘 (공자적 애니미즘인 소울리즘 마저도)이 동아시아에서도 배격되어졌다고 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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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마 츠요시(小島毅) 일본 도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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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61) /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 ‘조선사상전사’ 등 서평 (1)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동양일보가 연중 펼치고 있는 ‘동양포럼’으로 한국의 독자들과 만나온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가 최근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와 ‘조선사상전사(朝鮮思想全史)’ 책 두 권을 펴냈다.‘한국은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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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 원불교사상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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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포럼(61) / 오구라 기조 교토대 교수 ‘조선사상전사’ 등 서평 (2)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내가 생각하기에 이 땅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대략 1940년생 세대로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김형효나 김경재 세대). 그 이후의 세대들은 이른바 ‘전문화’의 길로 들어서거나 ‘근대화’의 세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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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9일 이화여대에서 강연

오구라 기조 일본 교토대 교수

출처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http://www.dynews.co.kr)

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5860

동양포럼(62) / 동양포럼 ‘한·중·일 회의’ 참가자 기고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새해에, 한국어의 탁월함을 생각한다 저는 일찍이 한국을 알게 되고, 한국말의 특출한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해 왔습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저 자신이 느낀 한국어의 탁월함을 다시금 확인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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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생명 즉 ‘제3의 생명’은 ‘문득 나타나는 생명’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에 우발적으로 나타나는 생명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그것을 ‘미(美)’라든가 ‘아우라’라든가 ‘모노노 아와레 (일본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지만 실은 그것들은 ‘생명’인 것입니다. 다만 그것들은 육체적인 생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에 생명과는 다른 이름으로 표현되어 왔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이 그림에는 생명이 있다’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라 진짜 생명을 정확히 이야기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겠는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육체적인 ‘제1의 생명’도 아니고 영적인 ‘제2의 생명’도 아니기 때문에 ‘제3의 생명’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제3의 생명’은 간주관적(間主觀的) 생명, 우발적 생명, 미적(美的) 생명이며, 다른 말로 하면 ‘사이의 생명’, ‘나타나는 생명’입니다. 생명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길어지면서 원래 주제인 한국어의 미의식이라는 내용에서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원래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 ‘생각’, ‘한’, ‘멋’ ... 한국어의 미의식과 생명

저는 ‘생각’, ‘한’, ‘멋’이라는 한국어에 ‘제3의 생명’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에 관해서는 동양포럼주간이신 김태창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 말의 본래 문자는 ‘생각’이며 이는 글자 그대로 ‘생명의 각성’을 나타내는 것이겠습니다.
즉 한국어의 ‘생각하다’는 합리적인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약동(Elan Vital)을 수반하는 행위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생각하다’에 관한 김태창 선생님의 이러한 해석을 따르고자 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생각하다’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 번째는 ‘생각’의 ‘생’을 육체적인 ‘제1의 생명’이라고 파악하여 ‘생각하다’란 육체적 생명이 각성하는 작용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생각’의 ‘생’을 영적인 ‘제2의 생명’이라고 파악하여 ‘생각하다’ 란 우주의 보편적인 섭리를 각성하는 작용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生覺)하다’에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의 ‘생’을 육체적인 ‘제1의 생명’과 보편적인 ‘제2의 생명’이 아니라 우발적인 ‘제3의 생명’이라고 해석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생각하다’는 일상의 한 순간 한 순간에 불꽃처럼 번쩍이는 미적인 감동과 정감을 지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다’라는 아주 평범한 행위 자체가 한국어의 세계에서는 개개의 육체적 생명의 각성과 우주의 보편적 생명의 각성, 그리고 일상에서의 미적 순간의 지각이라는 다양한 층위를 포함한 생명적 행위인 것입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까요? 다음은 ‘한’입니다. ‘한’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부정적인 감정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미의식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이란 동경이다’라고 해석합니다. 한국어의 고유어에 동경에 해당하는 어휘가 없고 한자어를 사용하는 것은 어째서일까요? 저는 ‘한’이라는 말이 애초에 ‘동경’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은 이상적인 상태 즉 ‘아름답다’에 대한 동경과, 그 이상적인 상태와 주체가 합치되어 있지 않은 것에 따른 슬픔과 원통함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제가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 ‘한’이라는 말의 뜻이 한일사전에는 ‘うらみ(원망)’라고 나와 있는데, TV 방송에서 한국인이 ‘공부가 한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이해하지 못 했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집이 가난하여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공부가 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한’은 ‘원망’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부에 대한 동경과 그것이 실현되지 못한 원통함’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 아닐까요? 이 ‘한’이야말로 한국인의 일상 세계에서 지속과 순간이라는 상반되는 시간성을 응축시킨 미적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속되는 것은 ‘아름답다’라는 보편성에 대한 동경과 원통함입니다. 한국인의 마음을 늘 강한 동경과 원통함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동경을 정적으로 내성화시키면 ‘곱다’라는 미(美)가 됩니다만, 때때로 동경은 고통스러운 원통함과 합체되여 ‘한’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한’이 언젠가는 풀리기를 늘 기원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어느 순간에 기적처럼 ‘한’이 풀리는 일도 있습니다. 이 순간 동경과 원통함은 동시에 해방되어 ‘아름다운 세계’가 개벽합니다. ‘한을 풀다’란 보편적인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는 동경과 그 세계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는 슬픔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생각되다가 어느 순간 단숨에 작열하듯이 풀리는 순간의 절대적인 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에너지가 강한 ‘제3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멋’입니다. ‘멋’은 한국어에 나타난 ‘제3의 생명’의 미의식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낸 말일 것입니다. ‘멋’은 우주적인 범위를 지닌 말처럼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정신 세계에서는 ‘아름답다’ 같은 보편적인 미의식 즉 ‘제2의 생명’에 의한 세계관이 일본보다 더욱 강하기 때문에, 이 우주적인 보편성에 바람구멍을 내어 우발적인 생명을 나타내려면 그를 위해 필요한 자유의 힘도 강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멋’에 해당되는 일본어 ‘이키’는 지극히 인공적이며 섬세한 정감의 미묘한 작용에 관한 개념입니다만 한국의 ‘멋’은 인간관계 및 사회뿐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자유자재로 발휘됩니다. 보편성의 규범이 지나치게 강하면 ‘멋’은 그곳에 자유를 위한 바람구멍을 냅니다. ‘아름답다’는 보편적인 미이지만, 이 보편성이 틀에 박히면 억압이 되고 맙니다. 그때 ‘멋’은 미의 헤게모니를 해체시키거나 흐트러트립니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미가 ‘제2의 생명’관에 기초하고 있다면 ‘멋’은 ‘제3의 생명’에 기초한 미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은 저자가 2016년 1월 9일 이화여대에서 강연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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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는 앞으로도 오구라 교수의 한국학 저서를 지속적으로 번역 출간할 예정이다”고 덧붙였다.



오구라 기조 교수는 현대일본에서 한국철학이나 한국사상을 연구하는 학회 또는 연구회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이상(異常)한 상태’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일본 사회에서 한국철학을 비롯한 한국학(韓國學) 연구 및 활성화를 견인하는 대표적인 지한파(知韓派) 학자로 유명하다.

http://news1.kr/articles/?3201023

일본 오구라 교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한글판 출간
(익산=뉴스1) 박슬용 기자 | 원광대학교(총장 김도종) 원불교사상연구원 조성환 박사가 지난 20년간 일본에서 한류 관련 인문학 분야 베스트셀러였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한글판을 출간했다고 8일 밝혔다.이 책은 일본 교토대학 대학원 인간환경학연구과에서 한국철학을 강의하는 오구라 기조(小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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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을 비롯한 현대문명은 어떤 의미에서 앞길이 막힌 궁경에 빠졌기에 어떻게 해서 현대문명을 구해낼 수 있는 새로운 철학을 구축하고자 철학자들은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동양적인 가치와 세계관을 재평가함으로써 새로운 철학과 사상을 만들어내고 인류사회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학자는 적지 않습니다. 김태창 주간도 그러한 한 분입니다. 김 주간은 끈질기게 동아시아의 영성을 탐구하고 계십니다. 저는 그 노력에 감복하고 있습니다.

출처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http://www.dynews.co.kr)

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64795

동양포럼(60) / 국제포럼 ‘한·중·일 회의’ 소감문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지난해 8월 저는 교토대학 오구라 연구실의 일원으로 한국에서 세 개의 포럼에 참가했습니다. ● 국제영성포럼-공공하는 영성지난해 8월 4~6일 꽃동네대학교의 주최로 국제 영성(靈性) 포럼이 개최됐습니다.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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群島の文明と大陸の文明




별점0.0점 | 네티즌리뷰 0건
저자 小倉 紀藏|PHP硏究所 |2020.10.28
페이지 254|ISBN 9784569847542










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8942

139. 군도의 문명과 대륙의 문명 을 읽고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
[동양일보 동양포럼 기자]오오하시 켄지(大橋健二) 스즈카의료과학대학 강사와 야규 마코토(柳生眞)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이 오구라 기조(小倉紀藏) 일본 교토대 교수가 지난해 10월 발간한 의 서평을 동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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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도의 문명과 대륙의 문명>의 서평






‘대륙의 문명’과 ‘군도(群島)의 문명’은 비교문명학의 기본 틀인 ‘중심-주변’이라는 ‘수직적인 축’을 답습한다. 한편으로 과거에는 중국문명, 오늘날은 미국발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름의 서양문명에 흠뻑 빠진 일본과 한국이라는 ‘주변문명’ 즉 일본-한국이라는 ‘수평적인 축’에서 일본문명을 비춰보고 고찰한다. 이와 같은 고찰에 있어서 현대 일본에서는 저자를 따라잡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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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의 생명: 생물학적· 육체적 생명=개별적· 객관적· 상대적· 물질적 생명.

제2의 생명: 영적 생명=보편적· 절대적· 종교(정신)적· 비물질적· 집단적 생명

제3의 생명: 미적 생명=간주관적· 우발적· <사이>적 생명, ‘지금· 여기’에 밖에 존재하지 않는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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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머니 자본주의에 의한 세계 지배 아래, 격차사회에 따른 분단과 이질적인 타인에 대한 불관용이 만연하는 현대 세계에서, 군도적(群島的)인 ‘제3의 생명적’, ‘사이적’ 문명을 일본이 앞장서서 세계에 제창하는 것이다. 이것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고 하면서, ‘공창(共創)하는 동아시아로’라고 호소한 것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신형코로나바이러스로 가로막히고 먹구름이 드리우는 나날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속에 사는 세계 사람들, 거대한 재앙에 신음하는 현대문명에 대해 한 가닥의 밝은 빛을 비춰주는 것 같다.

:
오오하시 켄지(大橋健二) 스즈카의료과학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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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자가 보기에 ‘제2의 생명’과 ‘제3의 생명’은 원래 그 원천이 다르다. 저자가 밝혔듯이 덧없이 살다 죽는 한계(제1의 생명)를 가진 인간이 영원하고 보편적인 ‘하나(1)’라는 관념을 극도로 추구한 결과 도달하게 된 것이 ‘제2의 생명’이다. 이에 대해 ‘제3의 생명’은 개별성, 순간성, 감각성을 지닌 것이고, 또한 어린 아이가 철들기 전에 많이 느끼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어린 아이를 잘 살펴보면 그들은 이미 나날을 그렇게 살고 있다. 어른에는 생명이 없어 보이는 물건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말을 걸어주고 다루는 것을 보게 된다. 어린 아이가 아끼는 인형과 말하고 역을 떠나는 열차에게 손을 흔드는 것은 흔한 광경이다. 바로 그때 그(녀)와 인형이나 열차 사이에는 ‘제3의 생명’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국학자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도 ‘다오야메부리(たおやめぶり)’ 즉 “덧없고 아녀자(兒女子)같은 것”이며 여성적이고 유약하고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것이 인정(人情)의 본래 모습이고, 이것이 곧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라고 말했다. 노리나가에 의하면 무사적인 “올곧고 씩씩한” 마음가짐은 오히려 ‘가라고코로(漢意)’ 즉 불교・ 유교와 같은 외래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꾸며진 정신이라는 것이다. (유약함이 곧 일본의 원래 정신이라는 노리나가의 주장은 무사사회 일본에서는 아주 이색적이고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오구라의 절묘한 균형 감각이 가장 잘 드러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민주주의 등의 정치, 새로운 복지와 교육, 리얼리즘도 설계주의도 아닌 외교 방식 등 사회의 여러 가지 분야에서 저자가 ‘아니미즘’이라고 부르는 세계관에 의해 변혁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오구라 생명론과 문명론이 장차 더욱 발전하기를 기대하면서 졸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

야규 마코토(柳生眞) 원광대 원불교사상연구원

출처 : 동양일보 '이땅의 푸른 깃발'(http://www.dynews.co.kr)






선천선先天仙에서 후천선後天仙으로(1) 김태창-수피즘

선천선先天仙에서 후천선後天仙으로(1)

M 선천선先天仙에서 후천선後天仙으로(1)
https://victoria1.tistory.com/2002 1/30
선천선先天仙에서 후천선後天
仙으로1
도기 152. 5. 19(목),
후천 선문화 국제학술대회, 태을궁
서론 오늘의 지구촌 병란 대세의 향방
결론은 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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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도사님 말씀
선천선先天仙에서
후천선後天仙으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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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23, 3:10 PM 선천선先天仙에서 후천선後天仙으로(1)
https://victoria1.tistory.com/2002 2/30


지난해에 열린 증산도 문화 국제학술대회에 이어서 올해에는 후천 선仙문화 국제학술
대회를 4일 동안 열고 있습니다. 후천선과 수부首婦 문화에 대해서 소중한 논문 발표
해 주신 많은 학자와 교수님들에게 감사합니다.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모든 연구원
들과 해외에서 참여하시는 학자분들에게도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볼 때 증산도에서 말하는 후천 문명, 인류의 미래 문명의 그 웅대
한 세계관을 단순히 책을 들여다보고 학문의 경계에서 제대로 안다는 것은 사실 큰 어
려움이 있습니다. 강증산 상제님이 열어 놓으신 새 우주의 도통 조화 세계를 우리가
어느 정도 감이라도 잡아야, 『도전道典』을 제대로 읽고 증산도 문화의 사상 체계를
어느 정도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선천의 동서 문화를 보면 나름대로 통하신 여러 영역의 대가들이 있고, 유불선과 서
교, 이슬람 문화에도 영적으로 통하신 위대한 성자, 부처, 현인이 많이 계신데요. 우리
가 그분들을 인류의 스승으로 잘 받들면서도 한편으로 이 병란 개벽에서 문화의 한계
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구촌에 병란이 지속되는 이 고난을 다 함께 넘을 수
있을까요? 결론은 우리가 열심히 배워야 되고 자신의 몸을 강건하게 세울 수 있는 건
강한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증산도 후천 선문화 국제학술대회의 주제인 ‘후천선과 수부’에 걸맞는 무병장수
문화를 동양에서는 대표적으로 도교의 장수 문화, 신선 문화로 알고 있습니다. 그 신
선 문화의 원류는 무엇일까요? 중국 문헌 도장경道藏經을 보면, 주요 대신선들의 스
승님으로 받들어지는 황제黃帝가 동방에 와서 저 요동반도 서쪽에 있는 공동산에서
자부선사紫府仙師에게 도를, 신선의 도법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어요. 중국 신선 문화
전적에 남아 있는 이런 기록을 근거로 중국에서 선의 원류를 황제, 노자라 합니다. 황
제가 자부선사에게 도를 배웠기 때문에 중국의 신선 문화의 뿌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4,700년 전 우리 동방 배달국 후기에서 찾아야 마땅합니다.

대자연의 이법을 드러낸 정신문화의 진정한 원형은 무병장수 선문화입니다. 동서의
황금시절 문명을 태고 문명이라 하는데, 지금부터 5천 년, 1만 년 이전 사람들은 백
년, 2백 년 정도 살다 가는 게 아니라 5백 살 넘어 천 년 이상도 살았다는 기록이 있습
니다. 구약에도 그런 기록이 있어요. 지금도 한 150살까지 장수하는 나라가 있어요.
러시아 서쪽에 있는 아르메니아 쪽에 그런 장수 마을이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 곁을 떠난 이들이 있잖아요. 우리가 잘 아는 이어령 선생이라든지, 김지
하 선생이라든지 또 주옥같은 문학 작품을 쓴 이외수도 친근한 사람인데 가 버렸습니
다. 또 최근에 강수연이라는 여배우가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심정지로 세상을 떠나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어요. 문화적으로 큰 공덕을 쌓으신 분들이 이처럼 50대, 70대,
80대에 떠났습니다.
4/30/23, 3:10 PM 선천선先天仙에서 후천선後天仙으로(1)
https://victoria1.tistory.com/2002 3/30

그런데 100살이 넘게 현역으로 뛰는 분도 있습니다. 연세대 김형석 명예교수님이 그
런 분입니다. 최근에 나온 그분의 자전적인 책을 보면, ‘나는 무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한 구절이 정말로 소중한 교훈이에요. 한국 철학의 대가로 유명한 박종
홍朴鍾鴻(1903∼1976) 서울대 교수가 한번은 김형석 교수를 찾아와서 ‘내가 특별한
글을 쓰느라고 며칠 밤을 샜다.’고 했답니다. 그분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자세히 모르지
만 70대에 돌아가셨어요. 한국 지성의 표본이라는 박종홍 교수가 대철인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1889~1976)를 만났을 때, 하이데거가 「천부경」을 내놓으면서
당신이 한국 철학의 대가라 하니 이것 좀 해석해 달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무無 사상
의 원형이 들어 있는 「천부경」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일화는 하나의 비하인드
스토리인데 충북대 김태창 교수가 전한 바도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전해진
이야기지만 아무튼 근거는 있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우리는 병란의 실제 시간대에서 좀 더 강건하고 크게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
다. 우리가 병들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제대로 인간 노릇을 하면서 강건하게 살 수 있
는 진정한 한 소식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바로 이것을 알고 싶어
합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개벽’입니다. 천지의 계절이 바뀌는 대개벽입니다. 우주 1년 사계
절에서 봄여름 세상, 선천 시간대가 끝나고 우주의 가을 겨울, 후천 세상이 닥쳐오
는 가을개벽, 가을 천지개벽입니다. 후천개벽입니다.
개벽이 무엇인지 알면 우리는 지금 인류가 맞고 있는 변혁의 진정한 참모습, 그 실상
을 누구나 쉽게, 총체적으로 깨칠 수가 있습니다. 개벽을 알면, ‘지구촌을 넘어서 대자
연계, 우주 만유가 이제 가을 세상으로 들어가는구나, 이것은 대자연의 법도구나.’ 하
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종말론이 아니라, 종말론을 넘어 새로운 생명
세계를 전해 주는 가을개벽, 후천개벽입니다.

『도전道典』은 병란개벽을 알 수 있는 문화 원전

오늘날 우리는 실제 병란 개벽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병란의 대세는 어떤가요?
잘 알고 계시듯이 우리 한국에서 약 1,800만 명이 코비를 체험했습니다. 네 사람 가운
데 한 명은 코비에 걸린 셈입니다. 지구 전체로 보면 감염된 사람이 5천만에서 6천만
을 향해서 가고 있어요.
이 코비 사태가 3년째 이어지고 있는데요, 병란 개벽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문화 원전은
『도전』입니다. 지구촌 문명사에서 병란에 대한 총체적이고 체계적인 진리 원전은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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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밖에 없어요. 그래서 도전을 들여다봐야 병란이 왜 일어나고, 앞으로 병란이 어떤
방향으로 새롭게 트일 것인지, 나아가서 어떻게 종식될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모든
병란을 진정 근원적으로 이겨낼 수 있는 참된 지혜, 생명의 도는 무엇인지 깨달으려면
『도전』을 읽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불교를 믿든, 기독교 성직자가 됐든, 신앙인
이든 무신론자, 과학자, 예술인이든 도전은 한 권씩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도전은 우
리 한국인의 문화 원전입니다. 그렇잖아요?
저는 동서양을 다니면서 기독교의 성서를 보면 주석이 좋고 편집이 잘된 것을 사 와서
봅니다. 제가 한국에서, 해외에서 구입한 기독교 서적이 아마 한 트럭은 넘을 것입니
다. 저는 공부하기를 권합니다. 예컨대 불교인은 기독교를 공부하고, 기독교인은 불교
를 공부하면 좋지 않겠어요? 또 한국의 문화 역사, 우리의 영성 세계, 한국인의 진정한
도의 세계에 대해서도 공부하기를 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宗敎’라는 말을 많이 쓰지만 사실 ‘종교’라는 것은 원래 없었던 용어입니
다. ‘릴리전religion’이라는 말은 서양의 학문 세계에서 ‘조작’한 언어예요. ‘떨어진 걸
결합한다.’는 것은 안 맞는 소리거든요. 본래부터 하나이고 하나로 사는데, 무엇이 떨
어지고 무엇을 결합하느냐 말입니다. 어둠에 싸여서 못 보고, 영적으로 좀 어둡다는 것
이지 사실 ‘뜬 사람’이나 ‘못 뜬 사람’이나 똑같이 천지 속에서 사는 거예요.
동양에는 종교라는 언어가 없었습니다. 영명연수永明延壽(904~975) 선사禪師가
‘부처님의 도가 가장 높은 멋진 가르침’이라며 마루 종宗 자와 가르칠 교敎 자를 썼는
데, 일본 학자들이 서양의 릴리전을 번역할 때 그것을 갖다가 썼어요. 그래서 세계 종
교가 있고 원시 종교가 있고 유사 종교가 있고 또 민족 종교가 있다고 하며 경계를 나
눠 놓았습니다. 종교학자들이 ‘신종교’를 떠들기도 합니다. ‘새로 나온 종교’라고 신종
교, 신흥 종교라는 말을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동양에는 본래부터, 아득한 태고로부터
‘영원한 도’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궁극의 길을 향해서 가는데 거기에 대한 가
르침이 있고, 그 가르침이 다를 뿐입니다. 그 가르침을 자신이 취사선택하는 것입니다.
유불선, 기독교는 2천 년, 3천 년 역사인데 우리는 한 천 년 이상 동안 불교를 받아들
이고, 유교도 받아들이고, 도교와 신선도도 받아들이고 또 근래 가톨릭과 기독교도 받
아들이면서 다 해 봤잖아요. 우리가 한국인으로 살면서 지구촌을 다니며 다양한 문화
를 보는데 그러면 과연 우리 것은 무엇인가? 지금 이게 문제예요. 우리 것을 스스로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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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고, 파괴하고, 부정하고 사이비라 하고 있습니다.

동학과 새로운 후천선

일본 신흥 제국주의가 들어와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군사 작전으로 한국의
서적을 불 지르고 역사, 문화를 말살하려 한 것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하고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1852~1919) 초대 총독이 조선 왕조의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에 쳐들어가서 거기에 있던 책을 몽땅 제 집에 갖다 놨어요. 약 만 8천 권을 가
져갔는데 지금도 그 책을 보관한 문고가 일본에 있습니다. 그런데 경남에 있는 무슨 대
학에 책 몇 권 기증했다고 생색을 냈어요. 우리가 일본에 답사를 갔는데 길거리 옆에
그 문고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당했는데 대한민국 정부는 그것을 찾아올 궁리를 하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우리는 스스로 문화의 영혼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부정하고 있어요. 이제는
이것을 제대로 각성해서 봐야 합니다. 여기에 진정한 인류 문화의 원형, 인류 역사의
원형적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에 그동안 공부하고 기도하고 신앙해 오면
서 절규한 진리의 진정한 주제, 그 원형이 우리 한국 문화의 가슴 속에 있어요. 이 잠들
어 있는 한국 문화의 진정한 영혼의 목소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근대 문명사의 새벽을 연 동학東學입니다. 당시 동학을 믿은 사람이 3백
만에 이르렀습니다. 인구가 천만도 안 될 때였으니까 ‘동학을 하지 않는 자는 조선 사
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 그중 10분의 1인 30만이 동학 혁명군이었
습니다. 그런데 일본 제국에 의해서 철저하게 무너지고 참혹하게 죽어 갔어요. 정읍井
邑 대흥리大興里에 본소가 있었던 참동학이 동학을 다시 일으켜 세웠는데 그 신도가
무려 7백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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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 대흥리에서 나오는 것을 알고, 총독부에 종교 등록을 하게 했습니다. 등록하면 적극
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실체를 알아내어서 파괴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결국
일본 제국의 꾐에 빠져서 1922년에 ‘보천교普天敎’라는 이름으로 등록을 했습니다.
등록 이전에는 교명을 ‘보화普化’라 했습니다. 보화는 저 우주 궁극까지 조화를 확장한
다는 뜻입니다.
보천교의 뿌리는 1911년에 시작된 태모님의 교단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강증산 상
제님을 대행하여 후천 5만 년 가을 우주의 신선 문화를 낳아 주신, 진리의 진정한 근원
이 되는 큰 어머니, 태모님이 1911년에 교명을 ‘선仙’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선은
중국 도교의 선이 아니에요. 환국, 배달, 조선은 물론 그 이전부터 있었던 원형 선을 이
은 것입니다. 1만 년을 지속해 온 이것을 우리가 완성해서 앞으로 가을 우주, 상생의
새 우주를 엽니다. 이 새로운 선은 후천선後天仙입니다. 선천의 선을 완성한 후천선입
니다. 좀 추상적이고 이해하기 어렵죠? 그렇지만 오늘 말씀을 들어 보면 ‘내가 여태까
지 무지몽매하게 살았구나.’ 하는 것을 절감하실 것입니다.

병란의 원인과 배경

3년 전에 우리 상제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지금 왜 병란이 시작이 됐는지, 왜 병
란이 일어나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봐라.’ 그런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병란의 대세는 어떻게 될까요?
지금 감염자가 6억을 넘어 10억을 향해 가는데 앞으로 지구촌에서 몇 십억을 떨궈 내
는 그런 병란으로 갈 것입니다. 이 병란의 대세에 관한 상제님의 말씀은 제가 답사를
해서 현장에서 들은 것입니다. ‘병란은 삼삼三三 도수로 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크
게 보면 세 번의 병란을 거치는데 마지막에 개벽의 실제 상황을 일으키는 병란이 옵니
다.
지금 그 1단계에 해당하는 코비(COVID-19)가 3년에 걸쳐서 위세를 떨치다가 이제
어느 정도 소강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이제 시작되어 초비상 사
태로 들어갔다가 조금 덜해졌다고 합니다. 중국도 상해는 좀 풀렸지만 북경이 초비상
이고, 대만은 방역의 모델 국가이지만 감염이 5만 명씩 생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
직은 진정을 장담할 수 없고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되는 때입니다. 우리나라도 3~4
만 명을 왔다 갔다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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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번에 문경聞慶에 가서 전통문화를 견학을 했습니다. 문경에 사는 어떤 사람은,
자기 아들이 감염되자 아내도 걸리고 자신도 걸렸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기력이 많이
달리고 면역력이 떨어졌고 머리털도 빠진다고 했어요.
이렇게 후유증이 이어지기 때문에 ‘롱코비드Long Covid’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감염
된 1,800만 명 가운데 약 2백만 명이 후유증에 시달리고 예전에 비해 기력이 많이 떨
어졌다는 거예요. 그중에서도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는 사람은 28만~30만 명 정도
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코비 감염 사태에서 치유 명상(meditation)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게 됩
니다. 이런 병란에 대해서 우리가 여러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정리하면서 그 배경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병란의 원인을 일반적으로 생태계 파괴, 기후변화 등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런데 실제적으로 병란이 일어나는 근원적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을 말씀하신 분은
152년 전에 우리 한국에 오신 강증산姜甑山 상제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 병란은,
선천 봄여름 세상에 상극相克의 우주 질서에 의해서 생겨나 인간의 역사 속에 누적된
원寃과 한恨, 그 기운이 뭉치고 커져서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 폭발하는 것입니
다.
“한 사람의 원한寃恨이 능히 천지기운을 막느니라.”(도전 2:68:1)라는 상제님 말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낙태아의 원한이 있습니다. 낙태는 유산과 다르잖아요. 인공유산,
낙태라는 것은 태아를 살해하는 것입니다. 낙태아가 수억조인데 몸이 망가져서 울부
짖는 그 신명들의 원한은 너무도 큽니다.
또 제국 시대 때 유럽의 어떤 왕이 아프리카의 콩고 지역을 지배했는데, 콩고 사람이
고무 농사일을 하다가 말 안 듣고 도망가면 잡아다가 손목을 잘랐습니다. 그렇게 죽은
신명들이 그 원한을 잊을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천만 명이 그렇게 죽은 아프
리카의 기나긴 어둠과 고난의 역사, 그 노예 역사를 적은 책을 제가 예전에 영국의 서
점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때 제가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신발을 깔고 앉아서 그 아프
리카의 노예 역사를 정직하게 써 놓은 유럽 지성인의 책을 읽으면서 크게 각성한 적이
있어요.
역사에는 반드시 정의가 살아 있어서 원과 한이 크게 정리되는 계기가 있습니다.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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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시간대에 닥치는 병란 개벽입니다. 원과 한이라는 것은 여름에서 가을로 바
뀔 때, 가을의 숙살肅殺 기운이 터질 때 대병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경 재난도 벌써 10여 년 전에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를 향한 위험선을
넘었다고 전문가들이 진단했습니다. 환경 재난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라고 했어요. 심
지어 서구 지성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제6의 멸종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수많은 생명의 종이 하루에 수백 개씩 없어져 가는데 그 중심에 인간이 있습니다.

시두 발병과 병란에 대한 마음가짐

병란이 오는 것을 정리한 도표에서 보듯이 제2기에는 제1기보다 더 ‘깊은 병’이 옵니
다. 이 ‘깊은 병’은 상제님이 쓰신 말씀이에요. 훨씬 더 아픈 새로운 병이 나오고 그것이
넘어가면서 시두가 나오는 것입니다.
지구의 1등 부자 빌 게이츠Bill Gates (1955 ~ )가 최근에 책을 냈는데, 그 원서를 한
번 직접 봤어요. 책에서는 앞으로 새로운 병란 가운데 스몰팍스smallpox(시두, 천연
두)를 대비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대학원생도 실험실에서 유전자를 조작해서
생물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생물 무기를 쓰지 않기로 국제 협약을 한 지 한 세
대가 넘었지만 러시아, 북한도 시두 바이러스 관련 실험을 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시두가 터지면 10억 이상이 사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시두에 걸린 사람은 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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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1 정도가 사망합니다. 시두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내장이 파열되는 참으로 무서운
병입니다. 지난 세기에 5억 이상이 시두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두를 극
복을 해야 인간이 된다.’는 말이 있었어요.
“앞으로 시두가 없다가 때가 되면 대발할 참이니 앞으로 시두가 대발하면 내 세상이 온
줄 알아라.”라는 강증산 상제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후천개벽, 우주 1년
이야기, 선후천’이라든가 ‘상제님은 우주의 통치자’라는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
이라는 말씀입니다. 시두가 발병해도 초기에는 백신 맞고 좀 여유를 부릴 수도 있겠지
만 나중에는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이 시두의 발병은 개벽 실제 상황 카운트다운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나는 시두 때가
되면 찾아오겠다. 그때부터 수행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나는 기회주의자’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때 찾아오지도 못할 것입니다. 오고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에요. 국
가에서 당연히 비상경계령을 내리지 않겠어요? 지금 중국 북경을 보면 어떤가요? 길
거리에 사람도 없잖아요. 우리가 그걸 다 겪어 봤는데 100명, 200명이 감염되었을 때
도 어디 갔다 왔는지 동선을 밝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미크론이 퍼지자 병을 막을 대책이 없어서 통제를 포기하는 나라도 생겼습니
다. 각자도생各自圖生하라는 것입니다. 집에서 앓으면서 스스로 치유하다가, 죽으면
무덤으로 간다는 거예요. 지금 초기 병란 1단계도 이랬는데 앞으로 2단계로 갑니다. 2
단계로 넘어가면서 휴지기가 잠깐 있든지 없든지 간에 병란은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양식 있는 이들은 모이면 ‘이거 사실은 개벽이나 다름없네요.’라고 합니다. 개벽을 앞
둔 지구촌 삶의 현실을 요모조모 살펴보면 돈이 많다고, 권력이 있다고, 많이 배웠다고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땅덩어리를 서울 여의도만큼 가졌다고 한들 자신
의 건강이 무너져서 대자연 허공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말입니다.
상제님 말씀 가운데 아주 소중한 성구가 있습니다. 어제도 제가 창문을 열어 놓고 시원
하게 맑은 공기를 쏘이면서 『도전』을 쭉 봤는데 『도전』 8편 5장 2절에 “일신수습중천
금(一身收拾重千金)이니 경각안위재처심(頃刻安危在處心)이라.”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일신一身, 내 한 몸을 잘 수습收拾하는 것이 중천금重千金, 천금보다
소중하다는 말씀이에요. 경각頃刻, 한순간의 평안함과 위태로움이 재처심在處心, 마
음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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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8편 5장 3절에 “반장지간反掌之間에 병법재언兵法在焉이라.” 이런 말씀이 있
어요. 반장反掌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인데 그 사이에도 병법兵法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손바닥을 뒤집는 짧은 순간에도 승리냐 패배냐,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
이 결정된다, 생사가 왔다 갔다 한다는 말씀입니다.
미국에 사는 강건하게 생긴 젊은이가 지구촌에 커다란 충격을 준 코비에 걸려 죽음을
맞은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가 트위터에 글을 올렸어요. 파티에서 친구들과 함
께 술 마시고 어깨동무하고 춤추다가 코비에 걸렸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의 가족도
다 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제 죽지만 나와 같은 어리석은 인간이 되지 말
라.’는 거예요. 단 한 번의 실수로 자신은 물론이고 아이들마저 꽃도 못 피우고 다시 올
수 없는 죽음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을 후회했습니다. 지구촌 사람들이 저 미국의 젊은
이를 하나의 거울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병란이 강해지면 우리가 눈 한 번 뜨고, 오가고, 눕고 일어나고 하는 이런 짧은 순간에
도, 우리의 한 걸음 한 걸음에도 이처럼 인생의 성패, 생사가 결정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몸에 병이 들어와서 통증을 느끼면 치유 메디테이션을 하기에는 이미 늦습니다.
그리고 면역력이 더 떨어져서 한계를 넘으면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거예요. 지금 밥이
라도 잘 먹고 거동에 지장이 없다면 나이가 70, 80이 됐어도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무병장수를 누릴 진정한 생명의 조화 세계가 어떻게 열리는지 신선 문화,
그 조화 세계로 인도해 드리겠습니다.

선천 선문화의 완성과 후천 선문화의 근원

오늘 학술대회의 주제는 후천선과 수부 문화입니다. 수부首婦는 모든 인간과 천지신
명의 큰 어머니, 태모님입니다. 강증산 상제님께서 후천 5만 년, 우주의 가을철 지상
선경낙원에 대한 천지공사를 보셨습니다. 그것은 상제님의 천상 신도적인 기획입니
다. 태모님께서도 상제님의 이 기획을 바탕으로 하여 천지공사를 보셨어요.
상제님이 “내가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쳐 물샐틈없이 도수를 굳게 짜 놓았다
(도전 5:416:1). 모사재천謀事在天이요, 성사재인成事在人이다(8:1:2).”라고 하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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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상제님이 ‘내가 우주의 주권자, 통치자로서 후천 5만 년 세상이 나아갈 가장
이상적인 이정표, 설계도를 짰다. 세상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너희들의 일심에 달렸
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내 밥을 먹는 자라야 내 일을 해 주리라.(8:21:1)”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이 ‘모사재천, 성사재인’이라는 말씀을 통일교에서 옛날에 미국에서
멋지게 써먹었어요. 박보희 총재가 이것을 ‘God propose, Man dispose’라고 약간
우습게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도전』을 제대로 공부하면 남북통일이 세계 정치학자들, 군사 전략가들이 말
하는 방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개벽이 되는 과정에서 통일이 이루진다는 것을 깨닫
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환국, 배달, 조선 이래 지난 1만 년 역사에서 그 뿌리를 거세당해
서 일제 식민사학자, 대한민국 강단사학자들이 조작한 역사를 그대로 앵무새처럼 되
뇌고 있습니다. 배달, 조선 그런 것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어요. 삼국 시대도 그 초기 역
사는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전국 박물관에 가 보세요. 고주몽, 박혁거세도 빼 버리고
연대만 넣었습니다. 제가 가 보니까 서울에 있는 박물관도 그렇고 제주시에 있는 박물
관도 그랬습니다.
우리가 환국, 배달 이래 1만 년 동안 모셔 왔던 천제 문화의 주인공이신 삼신일체 상제
님과 그 반려자이신 천지의 어머니가 마침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이때는 원시반본原
始返本하는 때다. 뿌리를 찾아야 산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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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와 문명을 만든 문화의 유전자가 있습니다. 그것을 원형 문화라 합니다. 이
원형 문화라는 틀은 백 년, 천 년, 만 년이 가도 바뀌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대우주의
진리의 주제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우주의 생명의 근원에서 오는 문화 요소들이
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로마 뒷골목에도 용龍과 봉鳳의 문양이나 형상이 남아 있습니
다. 인도는 말할 것도 없고, 로마의 뒷골목에 있는 가정집 문고리에도 도깨비 문양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도깨비 문화는 어디서 온 것인가? 그런 용과 봉의 문화는 다 동방
에서 건너간 것입니다. 바티칸 시티Vatican City에 가서 베드로 성당을 보면 거기에도
용과 봉 문양이 꽉 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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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문명의 중심지, 태전

앞으로 후천 상생의 가을철에 자연도, 인간도, 천상에 있는 모든 신들도 진정으로 하나
가 되는 조화롭고 영원한 평화의 새 세상, 상생의 조화 세계가 열리게 되는데 그 중심
지는 어디인가? 증산 상제님의 도법이 온 천하에 선언되는 가을 문명의 중심지는 어디
인가?
상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도전』 5편을 보면 “큰 서울이 작은 서울 되고, 작
은 서울이 큰 서울이 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새 세상이 오면 서울이 바뀌게
되느니라. 큰 서울이 작은 서울 되고, 작은 서울이 큰 서울이 되리니 서울은 서운해지
느니라. 내가 후천선경 건설의 푯대를 태전太田에 꽂았느니라.”(도전 5:136) 이것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여러 성도의 후예와 가족이 이구동성으로 증언을 하는데
요. 지구촌의 문명의 중심지, 지구의 큰 수도는 바로 태전이라는 것입니다.
이곳은 원래 대전大田이 아니라 태전太田입니다. 순종純宗 황제 때도 여기가 태전이
었는데,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순종 황제를 모시고 여기를 지나면서 산천 경계가 너무
좋으니까 저 태太 자에서 점을 떼라는 말을 해서 그 뒤로 대전이 되어 버렸어요.
“장차 여기에서 전무지후무지법前無知後無知法이 나온다.”(도전 5:306:2) 이 ‘전무
지후무지법前無知後無知法’은 상제님이 인류 역사상 처음 선언하신 것입니다. 전무
지후무지법은 가을 우주의 조화 세계를 직접 들여다볼 수 있는 후천 조화 선문화의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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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법, 조화 신선 도통법입니다.

동서 4대 문명권의 영성 문화로는, 유불선과 기독교 또는 힌두교의 수행 문화라든지
이슬람의 신비주의 수피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월등히 뛰어넘는, 모든 이들
이 쉽게 생활 속에서 체험할 수 있고 몸을 강건하게 만들고 가을철 신선 문명의 주인공
이 될 수 있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이제 가을철의 조화 신선 도통법을 다 함께 공유해
야 될 것이라 봅니다. ‘장차 천지에서 십리에 사람 하나 볼 듯 말 듯하게 다 죽일 때에도
씨종자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다 죽고 너희만 살면 무슨 낙이 있겠느냐.’(도전
8:21:2.4)라는 상제님 말씀도 있습니다.
지난 5월 1일에 가칭 ‘세계 상생 역사문화 교육원’의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이 교육원
은 환국, 배달, 이후 장구한 역사와 문화의 원형 정신을 복원하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한국인과 전 세계인들이 와서 가을철 신선 문화를 여는 수행을 같이 하고, 1만 년 문화
원형 정신과 그 역사를 배울 수 있는 수련과 교육의 세계 센터가 한국에 서는 것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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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조화 명상 수행
인간과 만물이 성숙하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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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진정으로 건강한 몸을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은 하늘과 땅 온 우주가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천지병天
地病을 고쳐야 됩니다.
제가 오래전에 인도에 가서 강연회를 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차를 몰고 달동네를 한번
가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도로변에 텐트를 치고 살아가는 것을 보았어요. 그분들에게
는 좀 안 된 말이지만, 마치 인간이 사는 지옥 세계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미국에
갔을 때 마야 문명 피라미드를 답사하기 위해 멕시코를 지나갔습니다. 그때 멕시코 달
동네도 한번 봤어요. 가진 자는 너무너무 많이 가지고 있지만 없는 사람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불쌍했습니다. 지구촌을 다녀 보면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의 극단적인
갈등과 고통의 문제를 실감합니다. 사실 이 세계는 불평등하고, 외롭게 사는 영혼과 불
쌍한 이웃이 너무 많아요.
오늘날 모든 인간, 모든 생명은 병들어서 죽을 수밖에 없는, 멸절되지 않을 수 없는 한
계 상황을 향해서 멈추지 않는 탄환 열차처럼 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내가 살고 있
는 땅, 우리 동네, 우리 가정만 아직 상황이 낫다고 해서 과연 무심할 수 있을까요?
여기 ‘우주 1년 도표’가 있는데요, 저는 우주 1년에 대해서 5백 번 이상을 듣고 천 번
이상 전해 보라고 강조합니다. 그래야 우주 1년의 시간대와 우주 이법에 대해서 관통
합니다. 이 우주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습니다. 이것은 12만 9,600년을 한 주
기로 합니다. 전반기인 봄여름은 선천 6만 4,800년입니다. 그중에서 인간이 태어나서
문명을 여는 시간은 5만 년입니다. 그리고 후반기인 가을과 겨울은 후천 6만 4,800년
입니다. 인간이 겨울철 대빙하기가 오기 전까지, 지구가 얼어붙어서 생명이 살 수 없는
경계까지 앞으로 5만 년이 남았습니다. 지금은 이번 우주 1년에서 봄여름 세상이 끝나
고 여름에서 가을로 가는 때입니다. 기후변화라는 것은 천지 계절의 변화인데 이 우주
시간대 법칙을 사람들이 잘 알 수가 없는 거예요.
동양에서는 「천부경天符經」, 하도낙서河圖洛書를 거치고 소강절邵康節
(1011~1077)을 거치며 1만 년 정도 걸려서, 동학에서 비슷한 메시지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증산도에서 우주 일년도가 완성된 것입니다.
가을철에는 숙살肅殺 기운이 내리쳐서 생장을 끝내면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초목도
가을 서리를 맞으면 이파리가 다 떨어지면서 거기서 크게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 여
름에서 가을로 바뀔 때 이 우주는 어떻게 바뀌는가? 이것은 가을철에 인간과 만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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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成熟하는 진리의 1급 비밀인데요. 상제님의 말씀으로 보면 ‘춘지기방야요春之氣
放也요’, 봄은 천지에서 생명을 내쳐서 낳고, ‘하지기탕야夏之氣蕩也요’, 여름에는 전
부 끌어내어 분열시킵니다.
그렇다면 가을은 무엇인가? ‘추지기秋之氣는 신야神也라’, 가을의 기운이라는 것은
신神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를 닦아서 맑히
지 않으면 그 변화가 어떻게 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1976년에 중국 당산시에 지진이 터졌을 때 불과 몇 분 사이에 70만이 죽었다, 50만
이 죽었다, 20만이 죽었다 그래요. 거기 박물관에 가서 당시의 기록 자료를 보면 참 엄
청납니다. 1995년 일본 고베 지진 때도 고베가 불타는 모습을 뉴스로, 영상으로 보았
습니다. 그 아름다운, 동양의 베니스라는 항구 도시에서 지진과 함께 불이 나서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어요. 동경대 물리학과를 다니던 학생은 가족이 불에 타 죽었는데,
그 학생은 학교에서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박사 과정을 다니던 우리
동경도장 책임자에게 그 얘기를 들었거든요. 고베시에서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정서를
치유한다고 꽃 박람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쉽게 치유되는 게 아닙니다.
명상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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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런 어려움을 이겨 내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누구나 생활 속에서 그냥 따라 하
면 됩니다. 상제님께서 두 개의 여의주如意呪, 바로 시천주주侍天主呪와 태을주太乙
呪라는 주문을 내려 주셨습니다. 이 주문은 우주 음악입니다.
지금부터 우주 음악 시대입니다. 병란이 깊어지면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세속의 노
래를 듣고 불러도 흥이 안 납니다. 병에 걸려서 신음하다가 저승길로 가는 사람이 지구
촌에 많아지면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새삼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하늘
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해서 태어난 천지의 아들과 딸입니다. 「천부경」을 읽어서
우리 문화의 근본정신을 통하면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태모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한테 내가 있다, 나를 찾아라. 내가 나를 못 찾으면
이 천지를 못 찾느니라.”(도전 11:69:6~7) 제 속에 있는 것도 못 찾고 무슨 천하사와
세상일을 걱정하고 개벽을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나를 찾아야
된다, 내 속에 진짜 내가 있다, 영원한 내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를 찾는, 나를 바
로 세우는, 내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찾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지금 전 세계에
서 메디테이션meditation을 흔히 ‘명상冥想’이라 번역하는데 명상이란 무엇인가?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1879~1955)은, 종교나 과학이나 그 궁극에 들어가 보면
미스테리어스mysterious, 어떤 신비로운 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예술과 과학 나
아가서 모든 것의 어떤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오프라 윈프리Oprah Gail
Winfrey(1954~ )는 이런 얘기를 했어요. “명상을 하면 1,000% 이득이 있다.”
1,000%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매디테이션meditation의 어원은 ‘메디medi’입니다. 이것은 ‘치유한다.’는 뜻이 있습
니다. 우리 몸에 있는 모든 어둠, 병을 근원적으로 치유해서 건강하게 하는 것을 힐링
healing이라 하잖아요. 그다음에 메디는 ‘명상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생각을 깊이 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측정하다.’라는 뜻입니다. 과학의 근본정신은 측
정입니다. 온도를 재고, 혈압을 재고, 몸무게를 잽니다. 측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을 번역할 때 어두울 명冥 자를 써서 명상冥想이라 하는데 사실 이 글자
를 쓴 것은 잘못입니다. 명상은 내 몸의 어둠, 고통, 염증, 암 덩어리 이런 것을 씻어 내
고 본래의 밝은 내 생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메디테이션에 그런 의미가 있잖아요. 그
렇게 해서 내가 성숙했는지, 건강해졌는지, 단단해졌는지, 얼굴에 광이 나는지 측정한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두울 명冥이 아니라 밝을 명明 자를 써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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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明想의 문자적 뜻은, 내가 나의 밝은 모습을 생각하고, 그 밝은 모습을 그려 보는
것입니다. 우주와 인간과 만물은 그 본성이 빛입니다. 인간은 우주의 빛의 섭리를 완성
하려는, 성취하려는 궁극의 실현자입니다.
이 명상에 대해 동양에서는 대표적으로 선가禪家에서 ‘수진修眞의 도’라 했습니다. ‘참
을 닦는 도’, 이것이 가장 대응이 잘 되는 말이에요. 그 외에 ‘수행’, ‘수도’ 또는 여러 가
지 언어를 쓰는데 가장 멋진 언어는 수진입니다. 여기에 대한 만고의 명언이 있습니다.
선인仙人 광성자光成子가 전해 주신 말씀인데 ‘참이 아니면 선仙이 아니라는 것’입니
다. 그래서 내 몸을 건강하고 빛의 몸으로 만드는 것은 단 한 글자, 참 진眞 자입니다.
중국에서는 광성자를 넓을 광廣 자로 썼어요. 그러나 ‘광성자廣成子’는 말이 안 됩니
다. ‘치우蚩尤’를 보면 글자에 벌레 충虫 자를 넣어 놨잖아요. 원래는 온 천하를 다스린
다는 뜻으로 다스릴 치治 자를 썼는데, 중국에서 동방의 천자를 가리키는 말에 벌레 충
자를 넣은 것입니다. 광성자는 ‘나는 원래 빛이다, 나는 우주의 빛이 됐다.’는 뜻에서
‘광성자光成子’입니다. 광성자에 대한 이야기는 동양 도가에서 공부한 사람들 세계에
서 은밀하게 전해 내려왔습니다. 광성자는 저렇게 못생기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천하
의 미남자인데 잘못 그린 것입니다.

우리 몸에 있는 빛의 통로

이 대우주 만유의 본성은 빛입니다. 데이비드 봄David Bohm은 ‘만물은 빛이 굳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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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All matter is frozen light.)’이라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라든지, 나
무라든지, 시멘트, 모래알이든지 다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문명을 연
것은 우주 속에 있는 요소의 4%를 안 데에 근거한 것이라 했습니다. 과학자들은 우주
에 암흑 물질(Dark matter)이 있고 암흑 에너지(Dark energy)가 있다고 합니다. 이
것은 어둡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다크dark라는 말을 붙
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크 메터, 다크 에너지가 95% 전후라는 거예요. 이건 전혀 알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데이비드 봄은 이것도 빛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우
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빛이 유형과 무형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정의했어요.
우리 몸에는 ‘빛의 통로’가 있습니다. 우주의 빛이 드나드는 세 통로가 있습니다. 얼굴
속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을 상단上丹이라 합니다. 상원上元이라고도 합니다. 그다음
가슴 사이에 있고, 배꼽 아래에도 있어요. 그래서 상단과 중단과 하단이 있는 것입니
다.
이 삼단에 대한 정의가 시원스럽게 된 동양 문건을 보지 못했습니다. ‘상단上丹, 중단
中丹, 하단下丹을 한번 정의해 보라.’ 하고 그 대답을 들어 보면 그 사람의 공부 수준을
압니다. 단전호흡을 한다는 사람들이나 이 세상에서 수행을 수십 년 한 사람들에게 물
어보면 그 사람이 성취한 공부의 경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작년에 여기에서 중국
학자에게 ‘상단과 하단이 뭡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그분이 나름대로 답변을 했습니다.
우리 몸의 빛의 통로는 세 개 중에서 상단과 하단이 매우 역설적으로 존재합니다. 상단
은 머리뼈로 둘러싸여 있는데 상단에 들어가는 통로는 상단 중심의 뒤쪽에 물질화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상단은 그 포탈 입구가 무형의 추상 공간이고, 하단은 그것이 유형화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단은 유형화되어 있고 상단은 무형화되어 있어서 음양적이
고 태극적인 특성을 갖습니다.
그다음에 여기 가슴에 있는 것을 중단, 명단命丹이라 합니다. 우리의 수명, 목숨, 생명
섭리와 연관되고 자연을 진정으로 감성적으로 느끼는 것도 이 명단과 관련이 있습니
다. 상단과 하단의 빛의 통로 공부를 융합하면, 최종적으로 명단에서 공부의 열매를 크
게 맺습니다. 그리하여 무병장수할 뿐 아니라 인생에 대한 진정한 기쁨의 정서를 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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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을 알아야 산다

우리가 궁금히 여기는 근본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주란 왜 존재하며 인간은 왜 태어나
는가? 삶의 진정한 참된 목적은, 잊어서는 안 될 진정한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 또 인
간은 태어나기 전에 어떤 존재였으며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사후 세계는 있는가? 이
런 것을 ‘큰 질문’이라 하는데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어디에서도 만족할 만한
진리적 답변을 쉽게 듣지 못합니다. 이런 문제를 풀려면 우선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거듭 강조하건대 ‘개벽’을 알아야 합니다. 동서양의 성자, 현인, 영이 크게 열린 사람들
이 이구동성으로 말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앞으로 개벽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학에서 개벽을 경고했습니다.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증산도에서는
무슨 말을 하는가? 세 벌 개벽이 온다는 것입니다. 세 벌 개벽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온
다는 거예요. 세 벌 개벽은 자연개벽, 문명개벽, 인간개벽을 함께 이르는 말입니다.
이제는 개벽을 알아야 새 세상 소식을 알고, 개벽을 알아야 살 수 있습니다. 개벽을 알
아야 병란 개벽의 대세에서 생존할 준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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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산에 살던 이갑룡 처사의 손자가 지금 살아 살아 계시는데 제가 그분을 여러 번 만
났습니다. 상제님이 마리산 봉우리에서 보신 천지공사가 있어요. 그때 하신 상제님 말
씀이 『도전』에 실려 있거든요. 『도전』 10편 112장 6절, 7절을 보면 ‘앞으로 어마어마
하게 큰 변화가 오는데, 난리·재앙이 오는데 선仙의 씨앗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가을
철의 신선 종자, 신선이 될 수 있는 종자만 남고 이번에 지구촌 80억 인류가 가을 낙엽
이 된다는 말씀이에요.
조선 시대의 남사고南師古(1509~1571) 같은 분은 돌림병이 세계 만국에 퍼질 때 백
조일손百祖一孫, 백 명 조상에 자손 하나가 살아남는다고 했습니다. 『격암유록格庵
遺錄』에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상제님의 이 말씀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학생學生이라 부르지 마라. 죽은 사
람을 학생이라 하지 않느냐. 도생道生이라 불러라.’는 말씀입니다.
사실은 어린이, 청소년을 도생이라 해야 우리 문화의 품격에 맞습니다. 도생이란 자신
의 앞길, 나라가 나아갈 길, 인류가 나아갈 길, 온 우주와 내가 하나 되는 길을 닦는 사
람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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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팬데믹을 대비하는 법』(빌 게이츠)의 <제7장 전 세계가 함께 대비하라〉 중에
“지금까지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병원체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 하지만 질병 모의
훈련을 함에 있어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하는, 더 불안한 시나리오가 있다.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병원체를 퍼뜨리는 생물학 테러다. 바이
러스와 박테리아를 무기로 사용한 것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다. (중략) 오늘날 가장 무
시무시한 무기가 될 수 있는 천연 병원체는 천연두다. 천연두가 특별히 무서운 것은 공
기 중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사망률이 극히 높아서 감염된 사람 세 명 중 한 명은 사망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1980년, 천연두가 퇴치된 후 대부분의 백신 프로그램이 중단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천연두에 면역을 가진 사람이 없다.”

인간이 호모엠파티쿠스인 이유 : 신은미 김태창

인간이 호모엠파티쿠스인 이유 : 네이버 블로그



인간이 호모엠파티쿠스인 이유
RecycledStardust
2019. 1. 7.

인간이 호모엠파티쿠스인 이유 - 르몽드디플로마티크
호모엠파티쿠스는 ‘공감적 인간’을 의미한다. 경제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인간 본성의 특징을 ‘공감하는 종(種)’으로 이해한다. 호모엠파티쿠스는 인간 의식의 변화와 인류문명의 우주적 공감을 예견한다. 호...
www.ilemonde.com
4 0
The Coloured Universe
4/30/23,

https://m.blog.naver.com/kiyukk/221435965598 2/5


샤먼은 태고시대부터 동·식물과 함께 뭇 생명과 공감함으로 자연과 공생하는 원리를 터득해 온 자다. 샤먼은 고대 접신술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의 영
혼과 소통하고, 시공을 초월하는 공감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또한 천체의 움직임과 우주의 근원적 이치를 체득해 순환적 삶의 지혜를 추구한다. 샤먼
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수용하고 치유하는 ‘상처받은 치유자’다. 고통의 공감과 공명 의식을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킨 존재다.
인간의 공감 능력은 인간 내면에 잠재된 원초적인 무의식의 본능이다. 분석심리학자 칼 G. 융(Carl G. Jung)은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에는 고태적인 형
태의 심층인 ‘집단무의식’이 있다고 말한다. 집단무의식은 오랜 기간 인간 내면의 깊은 곳에 축적돼온 ‘신화적 마음’이다. 집단 무의식은 인류의 시초부
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달된 인류 공동체의 ‘원형적 심성’이다.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종교적 유전자가 존재한다. 이는 영적 본능으로 무의식의 창조적 능력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은 이념과 가치를 초월해서 태초의
시간과 순환의 근원적 원인을 추구하는 신비적 마음을 지닌다. 원초적 공감을 회복하는 것은 이처럼 내면의 ‘숨겨진 신성’을 만나는 과정이다. 신성을
만나고, 신성이 돼가는 영적 여정은 개인마다 다양하게 나타난다.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은 인간을 부분적인 삶에서 전체의 삶으로 변화시킨다.
무의식의 세계를 공감의 전체성으로 확장시킨 샤머니즘의 정신은 호모엠파티쿠스의 영성적 뿌리가 된다. 샤머니즘의 영성이란 인간 의식과 무의식의
변형을 다양한 문화적 상징으로 연결함으로 개인의 영적 각성을 고양시키고, 의식변형을 통한 사회변혁을 승화시키는 인간 고유의 내면적 심혼(心魂)
과 영기(靈氣)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개인 수행의 지평을 확대하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사회 변혁을 가능케 하는 미래지향적 시민의식의 바탕이 된다.
호모엠파티쿠스는 개인적 수행을 통한 인격적 성화와 사회적 차원으로의 승화 기제를 융합함으로써 현대사회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증오, 대립, 갈
등의 문명을 화해, 치유, 통합의 문명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공감적 인간의 원형을 제시한다.
네오샤머니즘: 내면의 신성화
한국의 샤머니즘은 고대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시대마다 불교, 유교, 기독교 등의 종교적 외피를 입고 습합돼 왔다. 변천과정에서도 샤머
니즘의 역할과 기능은 각 시대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예를 들면, 고대시대(신석기-삼국시대)의 샤머니즘은 정치, 사회, 개인을 포괄하는 공적 문화였으
나, 중세시대(통일신라-조선중기)의 샤머니즘은 사회, 개인의 범주로 축소돼 기능했다. 근대·현대시대(조선중기-현대)의 샤머니즘은 주로 개인의 길흉
화복에 초점을 맞추는 기복신앙으로 변화해 왔다. 현재 남아있는 샤머니즘은 지극히 축소된 형태로 점복문화와 강신무(降神巫)의 무업이 전수되고 있
을 뿐이다.
네오샤머니즘은 고전샤머니즘과 공통의 종교적 유산을 공유하면서 현대인의 진화된 종교문화적 세계관과 인간의 다양한 의식변형의 경험을 적극적
으로 수용하는 영성운동이다. 네오샤머니즘은 기존의 고전 샤머니즘으로 분류되는 샤먼적 종교경험과 무술(巫術)의 전통을 응용하고 다양한 종교문화
적 요소들을 융합시킨다. 고등 종교의 조직적인 구조가 아니라, 각각의 다양한 영성경험들을 토대로 유연한 영성협의체를 자발적으로 구성한다. 네오
샤머니즘은 마음 치유, 트라우마 극복, 영적 수행의 대중적 필요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는 종교적 교리나 사회적 통념보다는 만물과의 공감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통해 온전한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는 생태적 영성이다.
네오샤머니즘의 사상적 흐름은 과거 고등종교로부터 소외되었던 샤머니즘, 영성주의, 동양철학, 연금술, 신화 등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네오
샤머니즘은 종교 창시자 혹은 교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신학과 의례보다는, 수행자들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회합과 자율적 의례를 강조한다. 공동체
의 운영은 샤먼적 의식과 경험을 지닌 수행자를 중심으로, 자발적 참여에 따라 응집과 해산을 취하는 ‘영적 협의체’ 형식을 가진다. 이런 과정에서 다
양한 경험들이 새롭게 연결되면서 ‘영적 하이브리디티(Hybridity)’와 종교적 ‘절충주의(Eclecticism)’ 현상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즉, 네오샤머니즘은
특정 종교에 속해있지 않으면서도, 내면의 신성함을 복원시키는 수행적 영성운동이다.
네오샤머니즘은 인간 의식변형을 통한 고차원적 인식의 지평을 강조한다. 고전샤머니즘이 ‘신내림’ 현상과 같은 강신무의 전통을 강조한다면, 네오샤
머니즘은 인간 내면세계의 탐색과 성찰을 통한 성스러움의 경험을 강조한다. 신학자 루돌프 옷토는 인간 내면의 성스러운 마음을 ‘누미노제(Numinos
e)’로 표현한다. 누미노제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성스러움의 감정과 공감의 마음이다. 이는 인간의 신화적 마음인 집단무의식에
서부터 출현한 거대한 영적 울림이다. 성스러움의 감정은 일상의 희로애락의 감정과는 구별된다. 누미노제는 우주만물의 원초적 공감을 상호 연결시
키는 본질적인 신비의 감정을 의미한다.
네오샤머니즘은 고대시대부터 내려온 내면의 성스러움을 찾아 인간의 고통을 스스로 치유하고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배양시킨다. 네오샤머니즘은
샤먼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정한 샤먼이 되는 것’이다. 진정한 샤먼은 두 가지 의식체계를 지닌다. 하나는 ‘의식의 일상의식’이고, 다른 하
나는 ‘의식의 통합의식’이다. 통합의식은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을 의미한다. 융은 인간이 의식 에너지로만 인생을 산다면, 삶의 극히 일부만 사는 것이
라고 지적한다. 융은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다’라고 고백한다.
사실 인간은 이성, 논리, 의식 외에도 감정, 직관, 무의식의 심리적 기제에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무의식의 소외와 억압은 마음의 그림자를 창
출한다. 심리적 그림자는 내 안의 악과 어둠을 타자에게 투사하면서 기생하는 특징이 있다. 타인을 향한 과도한 공격성과 증오는 궁극적으로 내 안의
병든 무의식의 투사일 수 있다. 이런 투사도 자신의 마음의 일부인데 그것을 모르고 밖에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무의식의 그림자는 소수집단이나
개성강한 개인에게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특정 인종, 성(性), 종교 등에 대한 극단적 혐오현상은 집단적 투사의 결과다. 고대종교에서는 동물을 ‘속죄
양’의 제물로 바침으로 집단적 그림자의 투사를 종교의례로 전향시켜왔다.
집단적 투사는 개인과 사회의 선입견과 편견을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공포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무의식의 병든 마음에는 성스러움의 누미노제가 결
코 출현할 수 없다. 마음의 통합의식은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의 승화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영성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진정한 누
미노제의 경험은 개인을 ‘성인다운 성품’으로 변화시킬 뿐 아니라, 고통 받는 이웃과 세상을 향한 봉사와 연민의 감정을 성숙시킨다고 강조한다. 이런
자아변형의 진위여부는 자연스럽게 ‘이웃에 의해’ 알아차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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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내면수행이 부재된 샤먼적 누미노제는 신성과 자아를 동일시하는 ‘자아팽창(Self-inflation)’의 영적 도취에 빠져 스스로를 ‘영웅적 착각’에 빠지
게 한다. 이는 샤먼적 인물 뿐 아니라 역사상 다양한 종교집단의 타락한 종교지도자와 정치인, 시민운동가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자아절대화의
병적 현상이다. 누미노제의 진정성은 개인적 수행이 뒷받침되는 초월적 겸애와 이타적 사랑이 수반돼 맺어지는 사회정치적 열매여야 한다. 이는 누미
노제의 내면적 개인 수행이 외면적 사회적 수행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 원리이기도 하다. 누미노제의 매혹성은 개인적 누미노제의 경험이 사회정치적
공공성과 결별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우주적 미소를 보내는 신성한 유혹인 것이다.
네오샤머니즘은 현대인의 공허감과 소외감을 영적 위기로 진단하며 누미노제의 자아 초월적 경험을 통한 영성의 진보가 일상의 삶 속에서 지속될 것
을 강조한다. 원초적 공감의 회복은 호모엠파티쿠스가 추구하는 치유의 시작이고 과정이며, 또한 완성이다. 존재의 근원과 의식·무의식의 변형을 통한
궁극의 존재 체험은 삶의 고통을 신성화할 수 있는 영성세계를 열어주는 치유의 의식변형이다.

호모엠파티쿠스와 ‘공공 영성’

네오샤머니즘의 원초적 공감은 ‘공공영성’으로 이어진다. 김태창에 의하면 공공영성의 ‘공공’ 개념은 공공철학(Public philosophy)의 번역어가 아니라
‘매개’와 ‘연결’을 의미하는 용어다. 그는 ‘공’과 ‘사’ 사이에 ‘공공’을 매개로 연결해야 한다고 본다. 이때, 연결과 매개는 일회성이 아니라 반복성을 요구
하기에 ‘공공한다’라는 동사형으로 표현된다. 김태창의 공공 개념은 구체적인 실천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삶과 제도 사이의 연결과 매개를 통한 세계의
활성화를 추구한다.
네오샤머니즘의 의식변형과 영적 각성은 궁극적으로 운둔적인 자아소외의 체험이 아니라, 자아, 타자, 공동체의 연결과 공감 확대로 귀결된다. 네오샤
머니즘의 자아치유 개념처럼 인간의 영성적 주체성의 회복은 새로운 인간 주체의 탄생을 가능하게 만든다. 사회구조적 문제와 관련해서 네오샤머니즘
은 인간의 영성적 유산이 문명의 기계적인 성격 때문에 상실돼 버린 사실을 상기시킨다. 인간의 의식변형을 통한 영적 각성은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영적 지성과 야수적 감정을 모두 수용하며 존재의 비극성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네오샤머니즘은 비극성이 없는 인간과 이상사회의 존립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 비극성을 승화시켜 자연과 우주만물의 모든 존재와 공감하는 호모엠파티쿠스의 원형을 회복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인간형이 사회적 변혁을 주도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확산 기제가 마련돼야 한다.
인류의 미래는 현재 살고 있는 어떤 인간 집단의 투쟁에 달려 있기보다는 그들 개개인의 책무에 달려있다. 인류의 미래는 급진적인 집단적 변화보다
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깨달음과 실천을 통해 지속 가능한 문명의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네오샤머니즘에서 강조하는 개인성이란 분절적 개인이
아닌 ‘공화(空化)적 개인’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적 영위를 위한 사회적 변화와 변혁의 첫 시작은 바로 인간의 자기 비움을 통한 초극적 상태임을 의미
한다. 이를 위해 인간은 지속적으로 자아변혁을 시도해야만 하는 영적 각성의 주체자로서 호모엠파티쿠스의 개별성을 지닌다.
궁극적으로 호모엠파티쿠스의 존재론적인 힘은 인위적 학습이 아니라, 주체적 경험에 기인한 의식변형의 주체적 확장에 있다. 네오샤머니즘의 시작이
개인영성과 생태영성의 공감과 연대를 통한 생명운동에서 출발한 것이기에, 개인의 영적각성과 영성 경험은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공공영성으로 확대
될 수밖에 없다. 공감의 공공영성은 인간을 속박하고 타인을 억압하는 자기중심성을 억제하는 관용과 ‘거중(居中)의 미덕’을 배양한다. 또한 공감의 공
공영성은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타인의 경험을 내재화하고 주체의 확장을 통해 타인을 수용하고 타인의 고통에 참예(參預)하는 치유의 윤리적 덕성을
가지게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은 내면의 무한성을 신성으로 승화시켜가는 ‘신성화(神性化)’의 과정을 경험한다. 이는 상호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공감의 그물
망으로 인간, 사회, 자연의 관계를 유기적인 통합사회로 완성해 나간다. 호모엠파티쿠스의 공공영성은 ‘마음의 정화-누미노제의 출현-공감의 연결-세
계의 신성화’라는 영적 각성의 단계를 거쳐 발전해간다. 인간은 공생의 필연성에 따라 ‘공유된 가치’를 인지하게 되고, 개인성과 공공성이 만나게 되는
지점을 함께 발견함으로써 공감의 과정 자체가 인간 사회의 치유와 통합의 시작이 될 수 있게 한다.

‘페르헤지아’(Parrhesia): 진실의 공수

공수란 신이 샤먼을 통해 내리는 신성한 메시지다. 내면의 신성이 부활한 호모엠파티쿠스는 오직 진실만 내리는 공수를 전한다. 네오샤머니즘은 개인
의 신성화 없이 사회의 신성화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네오샤머니즘은 신성의 주체화와 인식 에너지의 재구성을 통해 자아의 영적 진보와 사회적 진보
를 동시에 추구한다. 사회적 통합의 근본에는 인간의 내면적 통합이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 오늘날 개혁과 진보를 부르짖는 많은 이들의 혁명적 구호
속에는 성스러움이 결여돼 있다. 외적 인격인 페르소나와 자신을 동일시해 정의에 대한 독점의식과 근거 없는 특권의식, 자아 팽창의 콤플렉스에 사로
잡혀 있다. 불안한 인격성으로 사회개혁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거기에는 연민의 공감과 감동의 신비로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정한 샤먼은 누구인가? 그는 더 이상 영적 능력을 부여받은 소수의 선택받은 자가 아니라, 일상의 삶을 오직 진실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수많은 ‘상처받은 치유자’들이다. 호모엠파티쿠스는 인간이 신의 은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신성한 공감을 회복하는 네오샤먼이 되는
것이다. 사회변혁으로 연결되는 영성 체험은 더 이상 개인의 복을 비는 기복이나 축신 행위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우주
사이의 영적 통일성을 회복해 좀 더 숭고한 영성 세계로의 전이와 고양된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호모엠파티쿠스의 네오샤머니즘 영성은 문명의 과정에서 상실한 원초적 공감을 회복해 자아와 타자, 동식물, 우주만물의 모든 존재들과 소통하며 공
감하는 유기적인 통합의 공수를 전하는 존재다. 진정한 공수란 신과 인간이 영적 공감을 나눈 통합주체로서 모든 것을 솔직하게 비판해 말하는 ‘페르
헤지아’의 의례인 것이다. 이는 단순히 거짓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뿐 아니라, 어떤 위험 앞에서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신성한 공수의 윤리다.
호모엠파티쿠스는 종래의 신을 믿고 의지하는 호모렐리기우스에서 진화해 신과 동등한 관계에서 상호 공감하고 소통하는 신인간의 공명상태를 추구
한다. 또한 공감할 수 없는 신적 개념들을 소멸시키고, 신과 인간 사이의 신성의 공감대를 재창조한다. 신과 인간은 공동의 창조자다. 호모엠파티쿠스
의 치유란 고통을 제거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고통의 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서 고통이 전제된 근원적 깨달음을 얻는 ‘통각’(痛 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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覺)의 영성을 의미한다. 호모엠파티쿠스는 개인의 영적 수행을 통한 원초적 공감의 회복은 무한한 우주의 사랑 에너지를 빛의 인식으로 확산하며 생과
생을 통합시키려는 도덕적 요구를 수용한다.
이는 라인홀드 니버의 표현처럼 진정한 자아는 내적 통합을 이루기 위해 전념해야 하며, 스스로 다른 자아들과의 통합을 위해 그들과 조화를 이뤄야
만 한다. 인격의 조화는 ‘완벽함’이 아니라, ‘원만함’이다. 호모엠파티쿠스의 네오샤머니즘 영성은 누미노제의 복원, 원만한 인격성, 공감적 연대를 통해
개인과 사회 속에 구현될 수 있는 주체적 각성을 강조한다. 고통의 해석학으로 통각의 치유와 비판, 과정적 통합을 수용하고, 상호적 공명 관계를 통해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페르헤지아’의 공공영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당신 내면의 신’께 인사드립니다

누미노제의 감정은 개별적인 신비성과 주술성으로만 기능할 수 없다. 인간은 직관적 공감을 통해 신과 인간이 궁극적으로 합일되는 원초적 공감을 회
복함으로, 인간의 역사 속에 새롭게 개입하는 성스러움의 역사성을 구현해야 한다. 원초적 공감의 회복이란 문명화 이전의 상황으로 회귀하는 것을 의
미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문명화된 현재의 삶 안에서 원초적 영성을 회복하는 관계적 공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감의 누미노제는 한 개인이 어떤 신비적 경험을 했는가의 경중보다, 얼마만큼 개인이 우주적인 신성의 세계로 변화하고 승화했는가에 관한 자기 수
양적 ‘무위(無爲)의 공감’을 강조한다. 이는 개인의 에고가 신비로운 전율과 성스러움의 감정 속에 스며들어 동거하는 ‘케노시스(kenosis)의 공감’이기
도 하다. 자기 비움의 공감은 삶의 억압적인 가치들을 전도시키는 사회개혁정신과 신성한 인연을 맺는다. 신학자 도로테 죌레는 ‘신비주의는 저항이
다’라고 말한다. 공감의 누미노제는 저항정신을 내포하고 있고, 저항정신은 누미노제의 신비성에 기초하고 있다.
개인의 영성이 체험되고, 깊어지고, 승화되면, 그 깨달음의 절정은 개별적 자아추구를 넘어, 공동체가 함께 참여하는 세계의 지속적 창조로 나아가게
된다. 이는 지배문화의 폭력을 제어하고 생명의 힘을 복원시켜 내적인 저항과 사회적 저항을 연결시키는 누미노제의 전일성을 의미한다. 누미노제의
전일성은 개인의 직접적인 참여방식 외에도 영향력 있는 이들에 대해 더 깊은 영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비폭력적 저항을 포함한다. 각각의 수행
자는 ‘정치적 신비가’로서 신성한 저항에 참예하는 성례전의 삶에 동참해야 하는 성스러운 책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새로운 공감적 인간상이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릴 때, 갈등과 감정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가 진정한 화해와 치유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향해 진실한 ‘나마스테’를 고백할 수 있다. ‘당신의 내면의 신께 인사합니다.’


글·신은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수피즘: 신의 유혹』(2016) 등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수행과 마음치유 워크숍 <누미노제>를 운영하고 있다.
출처 : 르몽드디플로마티크(http://www.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