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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정경일이 참선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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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 2018. 1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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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정호승 시인의 시구처럼 ‘새길’을 여는 정경일(49) 새길기독사회문화원장을 찾았다. 정원장은 새길교회에서 예배위원장으로서 중심적 역할을 하고있지만 목사가 아닌 평신도신학자다. 새길교회는 길희성, 김창락, 이삼열, 한완상 등이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1987년 설립해 지금도 교회건물이 없이 오산학교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린다. 그래서 새길기독사회문화원이 교회 사무실 구실을 한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 인근 이화사거리의 한 빌딩 7층에 있는 이 사무실엔 ‘세월호’ 리본이 붙어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새길교회 교인들과 안산으로 내려가 유가족들과 매달 예배를 드렸으니 새길교회와 ‘세월호’는 둘이 아니다.
하지만 정 원장은 ‘사회적 이슈’에 나서는 운동가나 목사보다는 수도원의 노동수사나 산중 선방의 선승 같은 인상이 짙다. 실제 그는 내적 영성 수도와 사회적 참여 사이에서 적잖게 고뇌했다고 한다. 정원장은 80년대 후반 대학운동권이었다. 숭실대 총학생회에서 활동을 하느라 학점을 못 받아 6년이나 다녀야 했던 열성 운동권이었다. 그러면서도 태생부터 내향적 성격 때문에 외적인 활동이 마음에 부대꼈다고 한다.
지난 4월 경기도 안산에서 세월호참사 4주기 기억예배에서 기도하는 정경일 원장
김경재 교수가 섬광처럼 빛
“거대한 악과 싸우면서 일어난 분노가 몸과 마음을 덮칠 때면 ‘악과 싸우다 나도 악마가 되어가는 건 아닌가’라는 불안이 엄습하곤 했어요. 성격적으로 보면 조용히 홀로 있는 게 좋았지만, 역사적 현실을 외면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한신대 신학대학원이었다. 그는 군목의 아들이지만 목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내적인 기쁨도 추구하며 사회적 책무를 하려면 ‘종교’분야가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김재준 문익환 문동환 서남동 안병무 등이 키운 한신대도 사회운동 기풍이 강해 뭔가 내적인 기쁨을 얻고 싶은 갈망을 충족시키기 어려웠다. 그의 내면은 침묵수도나 관상기도를 좇고 있었지만, 이성은 대학시절과 다름없이 정의, 평등, 민중신학, 해방신학을 부르짖고 있었다. 내면과 외면의 부조화로 힘들던 시절 지도교수인 김경재 교수가 섬광처럼 빛을 비춰주었다. 신학생 전체 수련회를 갔는데 김 교수가 좌선을 지도했다.
“만약 다른 분이 영적 수행을 언급했으면 의심했을 텐데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분이 좌선을 가르쳐주니 ‘아, 영적 수행과 사회적 실천이 둘이 아닐 수 있겠구나’란 생각으로 너무도 기뻤지요.”
영적 수행의 기회는 뜻밖에도 군대에서 주어졌다. 강원도 양구에서 군종병으로 있으며 영외에 있는 교회에서 새벽마다 눈을 치우고 깊은 침묵기도를 하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군 제대 후 그는 서강대 대학원에서 종교학계의 거목인 길희성 교수의 지도로 종교학을 전공했다. 그때도 마음은 불교를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선택한 것은 불교가 아닌 샤머니즘이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기득권 옹호 구실을 했고 샤머니즘이 오히려 ‘민중적’이었다는, 다분히 운동권적 시각에 따른 결정이었다.
» 정경일 원장이 참선 모임을 이끌던 미국 뉴욕 맨하탄 유니온신학교 채플
세계적 신학자인 스승도 참선 동참
그런데 2005년 신학을 공부하러 간 미국 유니언신학대학교에서 불교 수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채플실에 매일 새벽 6시 반부터 한 시간씩 열리던 참선반이었다. 일본 조동종 계열의 묵조선 수행을 그는 매일 아침 미국인 친구들과 함께 했다. 2년 뒤엔 일요일 저녁 참선모임도 만들었다. 그는 일요일이 되기전 참여자들에게 참선 명상과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될만한 글들과 사진을 이메일로 보내주며 참선모임을 이끌었다. 나중엔 세계적인 신학자인 그의 스승 폴니티 교수도 이 모임에 함께 했다. ‘유니온 참선반’은 코디네이터 구실을 한 그가 유니온신학교를 떠난 2013년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참선은 그에게 빛만이 아니라 어둠도 직시하는 계기를 주었다. 2009년 가을 그는 갑작스런 ‘심리적 공황’을 경험했다. 참선이 잘 되고 있던 시절이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격렬한 불안이 2주 동안 그를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다. 그는 1년 동안 심리적 공황을 겪으며 명상의 평화 속에 방치한 깊은 상처들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평화 속에 억압해 버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귀를 기울이며 그는 영적 평화라는 외피 속에 개인적 상처도, 사회적 아픔도 덮어 버려서는 안된다는 현실을 직시했다.
귀국 뒤 세월호 참사의 아픔이 있었다. 엄청난 트라우마 속에서도 자신의 치유를 제쳐놓고 싸워야 하는 유가족들을 지켜보고, 또 그런 유가족들에게 막말을 퍼붓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그도 긴 우울감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어두운 곳을 외면하지 못하는 그는 세월호 유족들 뿐 아니라 쌍용차노동자와 굴뚝농성노동자, 성주미사일기지반대시위현장 등으로 늘 발길을 돌렸다.
스님-신부-목사 함께하는 모임도
그럼에도 수행을 통해 내적 기쁨에 이르는 갈망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노력, 둘 중 어느 쪽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외향적인 활동에만 치중하면 금세 에너지가 소진되는 태생적 한계를 보충해주고 힘을 준 것은 ‘함께하는 공동체’들이었다고 한다. 그는 새길교회에서 단독 목회를 지양하고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성’을 강화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었다. 또한 스님·신부·목사 등과 함께 공부하는 환희당모임, 관상기도모임인 렉시오 디비나, 신학연구모임인 ‘대구와 카레’등에도 참여하며 영성적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최근엔 남북평화체제에서 신앙과 교회, 신학의 제자리를 찾기 위한 신학자공부모임도 새롭게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런 영성·공부모임이 사회현실에 나아갈 힘을 주었다고 했다. 그는 최근 들어 전에 없던 감흥을 느낀다고 한다. 체질상 고독을 좋아하고 번잡한 곳에 가는 것을 꺼리는 그로선 전에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하면서 마음 깊은 것들을 공유하다 보니 이상한 기쁨이 느껴져요. 슬픔과 함께 하는 기쁨이라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저에겐 영적 스승 만큼이나 큰 스승들이지요.”
지성과 영성과 윤리의 일치라는 멀고도 요원했던 ‘새길’이 그의 오랜 고뇌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열리는 듯 그의 얼굴이 가을 하늘처럼 유난히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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