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01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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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아르쥬나의 고민
 
 
드리타라슈트라 말하기를
 
1. 산쟈야여, 올바름의 들, 쿠루 들에 내 사람들과 판두의 아들들은 싸움을 하려고 모였다. 그들은 어찌하고 있느냐?
 
산쟈야(Sanjaya) 드리 타라슈트라(Dhritarashtra) 왕의 마부.
올바름의 들(Dharma-kshetra) 다르마(dharma)는 매우 넓은 뜻을 가지는 말이다. 불법(佛法)이라 할 때의 법(法)은 그것을 뜻으로 옮긴 것이고, 달마대사(達磨大師)라 할 때의 달마(達磨)는 음으로 옮긴 것으로 영어로는 법(Law) 혹은 의무(duty)라 번역한다. 종교, 도덕에서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올바른 일이다.
쿠루 들(Kury-kshetra) 본래 이것이 그 지명, 델히(Deli) 부근의 넓은 평원, 옛날의 하스티나푸라(Hastinapura)이다. 지금 여기서 전쟁을 하게 되는 쿠루족(Kauravas)과 판두족(Pandavas)의 조상인 쿠루가 그곳을 개척하고는 그들을 쿠루 들이라 불렀다. 크쉐트라(Kshetra)는 들이라는 뜻과 행동의 무대, 거룩한 지역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샤타파다 브라마나경」(Shatapatha Brahmana)에는 태고 시대부터 거룩한 희생을 드리던 지역으로 나타나 있고,「마하바라타」 (Mahabharata)에서는 타파크쉐트라(Tapah-Kshetra)라 해서 고행 (苦行)을 하던 곳으로 되어 있다.
인간의 몸은 선과 악의 영원한 대립의 전장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유에의 문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죄에서 났으므로 죄의 밭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쿠루 들이라 한다. 쿠루족은 악의 힘을 나타내는 것이고, 판두 족은 신의 힘을 나타낸다. 어떤 사람이 제 가슴속에 날마다 선악의 두 힘이 싸우고 있는 것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을까? — 간디
이 세계가 곧 올바름의 들, 도덕적 싸움의 전쟁터다. 결정적인 문제는 그 싸움이 날마다 시간마다 되어가고 있는 인간의 가슴속에 있다. 땅에서 하늘로, 고난에서 정신으로 올라가는 길은 다르마의 길에 있다. 이 세계는 다르마의 들이다. 성자의 훈련소다. 거기서는 거룩한 불길이 꺼질 날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업(karma)을 다 치러 우리의 영(靈)을 닦 아낸다. — 라다크리슈난
「기타」는 역사적인 토론이 아니다. 그것은 형제들 사이의 싸움의 기록이 아니라 사람 속에 있는 두 성질, 곧 선과 악 사이의 싸움의 기록이다. 크리슈나는 우리의 안에 계시어서 언제나 맑은 양심에 속삭여주시는 이 이다. 一간디
「기타」의 목적은 이론을 가르치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행의 힘을 주자는 데에 있다. 생활 속에 가를 수 없이 있는 것을 우리는 이론으로써 갈라놓을 수 없다. 정치적 사회적 생활의 여러 가지 의무는 우리의 종교에 대해 일거리와 기회를 마련해준다. 다르마는 세속적인 번영과 정신적인 자유를 다 준다.「기타」는 인간의 내적 생활만을 생각하는 신비주의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의무나 생활 관계를 허망한 것이라고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도리어 정신적 자유를 실현하는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다.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온전히 영화(靈化)시키게 하기 위해서다.
전장을 ‘다르마의 들’ 혹은 ‘올바름의 들’이라고 한 것은, 거기 다마를 지켜주시는 주께서 사실로 와 계시기 때문이다. ‘올바름의 들, 곧 쿠루 들’ 이라는 말은 죽음에 의해서 생명의 법칙을 보여주는 말이다. 아르쥬나가 전장에서 보는 환상의 일면은 두려움의 하나님이다. 생명은 싸움이다. 악령에 대한 싸움이다. 창조의 과정은 서로 적대해서 서는 힘의 영원한 긴장 속에 있다. 그 충돌에 의해서 발전은 이루어지고 우주적 목적이 달성된다. 이 세계에는 불완전한 원소 곧 죄악과 비합리적인 것이 있다. 그것을 우리는 행동 곧 다르마에 의해서 변화시켜 아직은 이성(理性)에 대해 불투명한 그 원소를 뚫어 비치는 사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전쟁은 보응적인 심판인 동시에 또 하나의 훈련이다. 쿠루크쉐트라를 또 타파크쉐트라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쟁은 벌인 동시에 또 인간의 정화이다. 하나님은 심판자요 또 구주다. 그는 파괴하면서 또 창조하신다. 그는 시바(Shiva)요 또 비슈누(Vishnu)다. ᅳ라다크리슈난
내 사람이란 생각은 아함카라(ahamkara) 때문이다. 그것이 악의 근본이다. 바로 그 이기심 때문에 쿠루족들은 권력을 탐하고 또한 지배하기를 좋아한다. — 라다크리슈난
 
 
산자야 말하기를
 
2. 무료다나 왕은 판두족의 무리가 전열(戦列)을 별여섬을 보고 그 스승에게로 나아가 말했습니다.
 
두료다나(Duryodhana) 드리타라슈트라 왕의 맏아들로 판다바스들이 쫓겨나 있는 동안 왕위에 올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들이 돌아오자 본래의 약속대로 영토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왕이 그것을 거절했고 화해시키려는 모든 노력들도 다 헛되이 되었으므로 판다바스들은 부득이 전쟁을 하게 됐다.
스승 아차랴(acarya), 경전의 뜻을 통달해서 남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여기 드로나(Drona) 스승은 양쪽 군대에 전쟁하는 법 특히 활쏘기를 가르쳤다.
 
3. 스승님, 저 판두족의 큰 군대를 보십시오. 당신의 어진 제자 드루파다의 아들이 지휘를 하고 있습니다.
드루파다(Drupada) 드라우파디(Draupadi)의 아버지이므로 판다바스들의 장인이요, 그의 아들 드리슈타줌나(Shrishtadyumna)는 판두군의 총사령이다.
 
4. 거기는 잘난 장수들, 전쟁에서 비마나 아르쥬나와 대등한 자리에 가는 유유다나, 비라타 그리고 큰 전차의 원수인 드루파다가 있습니다.
비마(Bhima) 판두군의 사실상의 총사령이다. 명의는 비록 드리슈타줌나가 가졌지만.
유유다나(Yuyudhana) 크리슈나의 전차를 모는 전사.
비라타(Virata) 마차(Matsya)국의 임금, 판다바스들이 변장하고 떠돌아다닌 때에 그들을 숨겨주고 보호했다.
원수 곧 마하라다(Maharatha)라는 칭호는 군인의 최고 지위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한번 싸움에 10만 활량들을 지휘할 수 있는 사람에게 준다.
 
5. 드리슈타케투, 체키타나, 카쉬라쟈, 준티보쟈, 푸투지트, 그리고 사람 중의 으뜸인 샤이뱌.
드리슈타케투(Shrishtaketu) 체디스(Chedis)의 왕.
체키타나(Chekitana) 판다바스의 위대한 전사.
카쉬라쟈(Kashiraja) 위대한 전사.
쿤티보쟈(Kuntibhoja) 푸투지트의 형. 판다바스의 세 사람, 곧 유디슈트라와 비마, 아르쥬나의 어머니인 준티(Kunti) 부인을 양녀로 삼았다.
푸루지트(Purujit) 푸루지트와 쿤티보쟈는 형제이지만 가끔 푸투지트 쿤티보쟈라 하여 동일인으로 다루기도 한다.
샤이뱌(Shaibya) 시비(Shibi)족의 족장이요 그 나라의 임금.
 
6. 강한 유다마뉴, 용감한 우타마우쟈, 그리고 또 수바드라의 아들, 드라우파디의 아들들, 그들은 다 큰 장수들입니다.
유다마뉴(Yudhamanyu) 위대한 전사.
우타마우쟈(Uttamauja) 위대한 전사.
수바드라(Subhadra) 아르쥬나의 둘째 부인, 아들은 아비마뉴(Abhimanyu)
드라우파디 다섯 판다바스에게서 각각 한 아들을 낳았다.
 
7. 두번 난 이 중의 가장 높으신 이여, 또 내 군대되 우두머리들, 곧 우리 중 가장 잘난 것들도 아셔야 합니다. 내가 그 이름들을 불러드릴 것입니다.
두번 난 이 중의 가장 높으신 이(dvijottama) 사람은 우선 자연의 아들로 나지만 참 사람이 되려면 다시 정신의 아들로 나야 한다. 교육의 목적은 거기 있다. 자라 정신적으로 어른이 됐다 인정되면 그 표적으로 거룩한 실(sacred thread)을 받는다. 그것은 배꼽 줄을 의미한다.
 
8. 어르신부터 시작해서, 비슈마와 카르나와 싸움을 하면 언제나 이기는 크리파, 아슈바타만과 비카르나와 그리고 소마다 타의 아들.
어르신 드로나를 가리킴.
비슈마(Bhishma) 글자 그대로는 무섭다는 뜻. 일생 독신을 지키겠다는 무서운 맹세를 하고 자기의 배 다른 동생의 아들들과 또 그들의 아들을. 곧 판다바스와 카우라바스들을 길러낸 늙은 성자 장수이다.
카르나(Karna) 쿤티 부인이 결혼하기 전에 낳은, 판다바스 중 세 사람 유디슈트라, 비마, 아르쥬나와 배다른 형제가 된 사람.
크리파(Kripa) 드로나의 이종 사촌.
아슈바타만(Ashvattaman) 드로나의 아들.
비카르나(Vikarna) 두료다나의 동생.
소마다타(Somadatta) 바히카스여(Bahikas) 왕. 그 아들 이름은 소마다티(Somadatti)이다.
이 모든 이름들을 부른 것은 이것이 동족 사이의 싸움일 뿐 아니라 또 전인도의 싸움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9. 그리고 그 밖에도 많은 용사들이 가지가지의 무기로 몸을 갖추고 싸움에 능숙한 사람들인데 이제 바야흐로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고 있습니다.
 
10. 비슈마가 이끌고 있는 우리의 이 군대는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마가 이끄는 저들의 저 군대는 한이 있습니다.
‘한이 없다’(aparyaptam)와 절 끝에 오는 ‘한이 있다’(paryaptam)를 라다크리슈난과 간디는 각각 다르게 번역하는데 (라다크리슈난은 unlimited, limited로 간디는 inadequate로 번역한다) 그러면 뜻이 서로 반대가 된다. 그 밖의 번역들도 역자에 따라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로 갈려 있다. 즉 어느 군대를 강하다고 어느 군대를 약하다고 보느냐가 서로 반대가 된다. 라다크리슈난같이 하면 카우라바스가 강하고 판다바스가 약한 것이 되고, 간디같이 하면 판다바스가 강하고 카우라바스가 약한 것이 된다. 그런데 그때의 사실로 하면 두료다나 편이 훨씬 강했으니 라다크리슈난 번역이 옳다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두료다나 왕이 자기 부하들보고 다음 절에서 하는 말, 주의해서 잘 지키라고 하는 말과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여간 뜻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취할 수 있다. 한이 있다 한이 없다로도 할 수 있고, 부족하다 족하다로도, 당해낼 수 없다 당해낼 수 있다로도, 할 수 없다 할 수 있다로도 할 수 있다.
 
11.그러니 너희 모두는 다 제 자리에 굳게 서서 제 직분을 지켜 오직 비슈마를 지키라.
 
12.그의 기분을 돋우기 위해 쿠루족의 늙은이 곧 그의 영웅 적인 할아버지는 사자같이 크게 부르짖고 그의 소라나팔을 불었습니다.
쿠루족의 늙은이 비슈마를 가리킴.
 
13. 그러자 소라나팔과 큰 북과 심벌즈와 트럼펫이 일시에 울려 무서운 소리를 냈습니다.
 
14. 그때에 마다바와 판다바는 흰 말을 메운 큰 전차 위에 서서 그 하늘 나팔을 불었습니다.
마다바(Madhava) 크리 슈나를 가리 키 는 말.
판다바(Pandava) 곧 아르쥬나.
힌두교나 불교문헌에서는 언제나 전차는 정신·물리적 탈 물건을 의미한다. 그 말은 감각이고 고삐는 그것을 부림이지만 차부 곧 그것을 이 끌어가는 이는 영 혹은 자아 곧 아트만(atman)이다. 차부인 크리슈나는 우리 속에 계시는 영이시다. — 라다크리슈난
 
15.크리슈나는 그의 판차야냐를 불고, 아르쥬나는 그의 데바다타를 불고, 승냥의 밥집을 가지는 사나운 비바는 그의 큰 나팔 파운드라를 불었습니다.
판차야냐(panchajanya) 소라나팔의 일종.
데바다타(devadatta) 소라나팔의 일종.
파문드라(paundra) 큰 나팔.
이것은 싸움이 곧 붙을 것을 의미한다.
 
16. 쿤티의 아들 유디슈트라 왕은 그의 아난타비쟈야를 불고 나클라와 사하데바는 그들의 수호샤와 마니 무슈파카를 불고,
아난타비자야(anantavijaya) 소라나팔.
수호샤(sughosha) 소라나팔.
마식푸슈파카(manipushpaka) 소라나팔.
유디슈트라, 비마, 아르쥬나는 판두 왕외 첫째 왕비 준티 부인이 낳 은 아들들이고, 나쿨라(Nakula), 사하데바(Sahadeva)는 둘째 왕비 마드리(Madri)의 소생이다.
 
17. 큰 활을 쏘는 카쉬 왕과 큰 장수 쉬칸디와 드리슈타줌나와 비라타와 이길 자 없는 사차키.
카쉬(Kashi) 바라나시의 왕.
쉬칸디(Shikhandi) 위대한 전사.
사챠키(Satyaki) 유유다나.
 
18. 드라우파디의 아들 드루파다, 그리고 억센 팔 가진 수바드라의 아들, 이 모든 이들이 다 제 나팔을불었습니다. 오, 대왕이시여.
 
19. 그 넋을 잃게 하는 소리가 하늘 땅을 뒤흔들고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의 간담이 떨어지게 했습니다.
 
20. 그러자, 저 잔나비 기를 세우는 판두의 아들은 드리타라 슈트라의 아들들이 싸움의 진을 벌이고 서서 화살이 바야흐로 날려 하는 것을 보자 그 활을 든 다음,
잔나비 기 아르쥬나의 기에는 잔나비 신을 섬기는 하누만(Hanuman)의 형상이 그려 있다. 그것은 몸 바쳐 섬김, 정결, 용맹의 화신이다.
판두의 아들 아르쥬나.
 
21. 오, 대왕이시여, 그는 흐리쉬케샤를 향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아츄타여, 내 차를 두 군대 사이에 세웁소서!”
흐리쉬케샤(Hrishikesha) 머리털 거슬린 주님이란 뜻, 곧 크리슈나.
아츄타(Acyuta) 움직임 없으심의 님이여 하는 뜻, 현재 차부로 있는 크리슈나.
그 밖에 크리슈나에 대한 이름으로 마두수다나(Madhusudana, 악마 마두를 죽 이시는 이), 아리수다나(Arisudana,대적을 죽이시는 이), 고빈다(Govinda, 목자, 혹은 깨달음을 주시는 이), 바수데바(Vasudeva, 바수스의 아들), 야다바(Yadava, 야두의 자손), 케샤바(Keshava, 아름다운 머리털을 가진 이), 마다바(라크슈미의 남편), 흐리쉬케샤(감각의 주), 쟈나르다나(인간 해방자)가 있다.
 
22.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싸움을 하려고 섰는 그 사람들을 볼 수 있게, 이 싸움에서 나는 누구와 싸워야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옵소서!
 
23. 나는 저 모진 마음 먹은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이 바라는 것을 성취해주려고 싸움에 열이 나서 모여 있는 저 사람들을 좀 똑똑히 보고 싶습니다.
싸움이 이제 붙으려는 바로 그날 아침 유디슈트라는 비슈마가 쌓아놓은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진지를 보고 겁이 나서 떨며 아르쥬나를 보고 말했다. “이러한 군대에 맞서서 우리는 어떻게 승리를 얻을 수 있을까?” 아르쥬나는 그 형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옛날 시를 인용해서 대답했다. “승리를 바라는 사람이 대적을 정복하는 것은 힘이나 재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참과 자비와 경건과 덕으로야만 된다. 승리는 크리슈나가 있는 곳에야 있을 수 있다. 승리는 그의 한 속성이다. 또 마찬가지로 겸비도 그렇다.” 크리슈나는 아르쥬나를 보고 재계하고 두르가(Durga) 앞에 승리를 간구하라고 가르쳐주었다. 아르쥬나는 전차에서 내려 노래를 부르면서 여신을 찬양했다. 그 믿음을 가상히 여겨 여신은 아르쥬나를 축복해 주었다. “오, 판두의 아들아, 너는 네 대적을 즉시로 부술 것이다. 너는 나라야나(Narayana) 자신의 도움을 얻을 것이다.” 그렇지만 행동의 사람인 아르쥬나는 자기 할 일의 뜻을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의 스승이 옆에 계심과 그 거룩한 생각이 그를 도와 그로 하여금 자기가 맞서 싸우려는 그 대적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요 거룩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는 정의를 지키고 무법한 포악을 누르기 위해 사회의 유대를 끊어야만 했다. 하나님의 나라를 땅 위에 세우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합작으로야 된다. 인간은 창조의 협력자다. — 라다크리슈난
 
24. 그렇게 구다케샤가 말하는 것을 듣고, 오 바라타시여, 흐리쉬케샤는 이 세상에 그 이상 없는 전차를 두 군대 사이에 세우고,
구다케샤(Gudakesha) 머리카락이 많으신 이. 아르쥬나를 가리킴.
바라타(Bharata) 드리타라슈트라불 가리킴.
 
25. 비슈마와 드로나와 모든 높은 이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파르다여, 쿠루족들이 여기 모여 있습니다.”
파르다(Parth) 프리다 부인의 아들, 곧 아르쥬나.
 
26. 아르쥬나는 거기 양쪽의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과 스승들과 백숙부들과 형제들, 아들들, 손자들, 동무들이 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27. 그리고 장인들과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 이 줄을 지어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때,
 
28. 쿤티의 아들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사로잡혀 슬픔으로 부르짖었습니다.
 
아르쥬나 말하기를
 
내 사람들이 진을 벌이고 서서 서로 싸우려는 것을 보았을 때, 오, 크리슈나여,
 
29. 내 사지는 맥이 풀리고, 입은 타 마르고, 몸서리치고 머리털이 곤두섰습니다.
 
30. 간디바는 내 손에서 떨어지고 내 살갗에는 불이 일고 몸을 버티고 섰을 수 없고, 내 마음은 비틀거렸습니다.
간디바(Gandiva) 인드라 신의 하늘에서 아르쥬나에게 선물로 내려준 활의 이름.
 
31. 불길한 징조가 내다뵈고 오, 케샤바여,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친족과 싸움해 죽이고 좋은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케샤바(Keshava) 크리슈나를 가리킴.
‘징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아르쥬나의 정신이 약해지고 흔들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라다크리슈난
 
32. 크리슈나님, 나는 승리도 왕국도 쾌락도 다 원치 않습니다. 나라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 크리슈나여, 즐거움인들 생명인들 무엇이겠습니까?
 
33. 우리가 권세를 원하는 것도, 향락과 쾌락을 원하는 것도 그들 때문인데, 그 사람들이 여기 생명과 재산을 내던지고 싸움을 하겠다고 섰습니다.
 
34. 스승들, 아버지들, 할아버지들, 아들들, 손자들까지 그리고 백숙부들, 장인들, 내외종형제들, 그 밖의 여러 친척들,
 
35. 그들을 내가 즉일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내가 그들 손에 죽을지언정. 오, 마두를 멸하시는 이여, 삼계의 왕권을 준다해도 나는 못합니다. 하물며 이 티끌 세상의 나라를 위해서겠습니까?
마두를 열하시는 이 크리슈나.
삼계 「베다」에서 말하는 천계(天界), 지계(地界), 기계(氣界), 혹은 천계. 지계, 음부(陰府), 또 혹은 인계(人界), 신계(神界), 반신계(半神界).
 
36. 오, 쟈나르다나, 이들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을 죽이고 무슨 쾌락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비록 흉악범이기는 하더라도 그들을 죽인다면 우리는 오직 죄를 지을 뿐입니다.
쟈나르다나(Janardana) 크리슈나의 명칭의 하나, 사람을 괴롭히시는 이.
아르쥬나는 사회 일반적으로 하는 도덕이나 풍속에 따라 할 뿐이지 자기 개인적인 참에 대한 확신으로 하는 것이 못된다. 그는 이러한 외적도 덕의 상징을 죽이고 내적인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가 혼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이때까지 그의 인생을 지도해주었던 전날의 스승들을 죽여버려야 한다. 아르쥬나는 아직 유식한 이기주의(enlightened selfishness)의 테두리 안에서 말하고 있다.
우리 대적이 아무리 침략자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죽여서는 아니된다. 죄를 앙가품하기 위해 또 하나의 죄를 지어서는 아니된다. “다른 사람의 노(怒)를 노하지 않음으로써 정복하라. 악을 행하는 자를 성스러움으로써 정복하라. 구두쇠를 선물로 정복하라. 그리고 거짓을 참으로 정복 하라.” — 라다크리슈난
 
37. 그러므로 우리의 친족인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 마다바여, 우리가 제 친족들을 죽이면서 참말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38. 비록 그들의 마음이 탐욕에 미치고, 가족을 멸망시키는 것이 잘못인 줄 모르고, 친구를 배반하는 것을 죄로 생각지 않았다 하더라도,
 
39. 어찌 우리가 이 죄에서 돌이킬 줄을 몰라서 되겠습니까? 오, 쟈나르다나, 가족을 파괴하는 것이 잘못임을 아는 이 우리가 말입니다.
아르쥬나가 걱정하는 것은 ‘한 가족’ 혹은 여러 가족의 멸망이 아니라 동족이 서로 죽임으로 인해 오는 ‘가족제도’의 멸망이다. 헨리 드럼먼드(Henry Drummond)는 “생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가족이란 진화의 한 걸작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세계의 도덕과 사회 발달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힘의 발전소요 저장의 보고이다. 가족은 몇 세기만이 아니라 수천 년을 살아온 것이다. 시간이 이것을 퇴색시키지 못했고 최근의 예술이 그 위에 개량을 더한 것도 없다. 그리고 어떤 천재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지 못했고, 어떤 종교도 이보다 더 성스러운 것을 찾아 내지 못했다.”
「기타」의 저자에게도 가족은 분명히 이러한 모든 것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하데브 데자이
 
40. 가족이 파괴되면 예로부터 항상 있어온 가족도덕이 없어지고, 그 도덕이 쇠퇴되면 가족의 전규범이 무법에 빠지게 됩니다.
전쟁은 우리를 가정환경에서 뺏아가버리고, 인간의 성숙된 의지와 경험의 짬인 사회 전통에서 우리를 뿌리뽑아버린다. — 라다크리슈난
 
41. 그리고 무법이 판을 치게 될 때, 오, 크리슈나여, 가족의 여자들은 타락하고, 여자가 타락되면 계급은 혼란에 빠집니다.
계급(varna) 보통 영어로 카스트(caste)라 하는 것. 후대에 와서는 그것이 너무 고정되어 사회 발달을 방해하게 됐고 피해가 많아서 간디도 그 제도 타파에 힘을 썼지만, 본래 그때 사회로서는 안전과 발전을 유지해가기 위한 가장 어진 제도로 알고 그것을 지켰다. 그러므로 지금에 와서 타락된 계급제도와「기타」에서 생각하는 이상적인 계급과의 사이에는 차이가 많다.
 
42. 이 혼란은 그 가족의 파괴자와 가족을 다 같이 지옥에 떨어뜨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조상의 혼은 떡과 물의 제사가 끊어짐으로써 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떡과 물 제사를 말하는 것이다. 옛날 사람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 혼이 살아 있기 위해 먹을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때때로 그것을 바쳤다. 그것이 제사다. 당시에 일반적으로 지켜졌던 의식이다.
 
43. 이 가족 파괴자들의 죄로 인해 바르나가 혼란에 빠져 부족 가족의 영원한 법이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44. 우리는 전해오는 말을 듣습니다. 오, 쟈나르다나, 가족 도덕이 망해버린 집 사람은 지옥에 빠집니다.
 
45. 아, 왕권의 복락을 탐해서 동족을 죽이려고 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큰 죄를 지으려고 결심한 것입니까?
 
46. 차라리 드리타라슈트라의 아들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나를 전쟁마당에서 때려서 내가 아무 반항함도 없이 무기를 든 것도 없이 죽을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더 행복한 일입니까?
 
산쟈야 말하기를
 
47. 그렇게 말하면서 아르쥬나는 전쟁마당에서 활과 살을 손에서 떨어뜨리고 전차 안에 주저앉아 슬픔에 빠졌습니다.
아르쥬나의 말은 고뇌와 사랑에서 나온다. 그의 마음은 두 세계의 경계선에 서 있다. 그는 태고부터 사람이 분투해온 것처럼 자기도 무엇을 해야 한다고 분투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는 아직 자기가 무엇이며 자기 동료는 무엇이며 자기가 놓여 있는 이 우주의 참 성격은 무엇인지를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는 전쟁 때문에 오는 육체적 고통과 물질적 불행을 크게 걱정하고 있다. 인생의 주목적은 물질적 행복의 추구에 있지 않다. 우리는 생애의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거기 일어나는 늙음, 쇠약. 죽음, 이런 것 때문에 그 구경의 목적을 잃어버리기 쉽다. 이상을 위하고 정의와 사랑을 위해서는 우리는 압박자와 고통과 죽음에 직면하여 일어서지 않으면 아니된다. 아르쥬나는 전쟁의 턱 밑에 다가선 때에 용기를 잃고 세속적인 생각에 쓸려 전쟁을 회피 할 생각을 했다. 그는 아직도 제자나 스승, 친척은 그들 자체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니고 자아 때문에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르쥬나는 아직도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는 가르치기를 행동의 뿌리를 욕망에 두지 않는 살림을 해야 한다 하고, 니슈카마 카르마(nishkama-karma) 곧 욕망 없는 행동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
아르쥬나의 어려움은 영원히 반복되는 고난을 연극화해 생각하는 데 있다. 인간은 고상한 생활의 문턱에서 속세의 소란한 소리를 듣고 실망을 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환상이 떠나지 않고 매달려 있어 놓지 못하는 법이다. 그는 자기의 근본이 거룩한 조상에게서 나온 것을 잊고 자기 개체에 집착해서 서로 얼크러지는 세상 힘에 흔들리고 있다. 그는 정신세계에 눈이 뜨여 그로부터 자기에게 주어지는 의무를 받아들이기 전에 이기심, 어리석음의 대적과 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리하여 자기중심의 에고(ego)의 깜깜한 무지를 정복해야 한다. 영성(靈性)을 떠난 인간은 그것을 도로 찾지 않으면 아니된다. 여기 그려진 것은 인간 영혼의 진화 모습이다. 거기는 시간 공간의 제한이 없다. 그 싸움은 인간의 혼속에서 시시각각으로 벌어진다. — 라다크리슈난
 
이것이「바가바드기타」라는「우파니샤드」(Upanishad), 절대의 학문, 요가의 경전, 크리슈나와 아르쥬나 사이의 대화의 제 1장, 아르쥬나의 고민 편이다.
 

함석헌 바가바드 기타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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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작성자 바보새 14-05-27 11:51 조회1,4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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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를 읽는 독자들에게
 
 
「바가바드기타」는 힌두교 경전 중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간디는 그것을 늘 끊지 않고 읽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어떤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 때 마다「기타」를 읽노라고 했습니다. 그는 젊어서 공부할 때 이것을 외기 위해 아침마다 세수할 때는 그 한 절씩을 써 붙여놓고 칫솔질을 하는 동안 그것을 속으로 외었다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글이 우리 사회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참 아쉬운 일입니다. 나는 젊어서 서양 사람의 책을 읽노라면 그 속에「기타」소리가 자주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뭔지 내용은 모르지만 흔히 그것을 소개하기를 “기독교의 신약 같은 지위에 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중요한 글인 것은 분명한데 어디서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 것은 나의 독서 범위가 좁고 열심이 적었던 때문이지만 또 어디서 곧 찾아볼 수 있으리만큼 소개해준 사람이 없던 탓도 있습니다. 불교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데 몇 천 년 불교신앙의 역사를 가지면서 왜 그것을 몰랐는지, 알고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가만 숨겨두었던가? 확실히 그런 점도 있습니다. 하나님 소리를 그렇게 많이 하지 않았던들 사람들이 좀 더 진지하게 그를 찾았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항상 더럽힘을 당해서 하나님입니다. 더럽혀도 더럽혀도, 수정에 흙물을 끼얹은 듯,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는 데 하나님의 하나 된 점이 있습니다. 진리는 귀족적일 수 없습니다. 어떤 천하고 못나고 악한 것도 부르고 들어보고 만져볼 수 있는 것이 진리 아니겠습니까?
 
마음에는 항상 기억하면서도 못 보고 있었는데 6·25전쟁에 쫓겨 부산 가 있는 동안 하루는 헌책 집을 슬슬 돌아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어느 집 책 틈에 에브리맨스 문고판의 「바가바드기타」가 한 권 끼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의 나의 놀람, 기쁨! 주도 설명도 하나 없으니 옳게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읽고 또 읽으니 좋았습니다. 그 이래 오늘까지 놓지 않고 읽습니다. 그런데 그러고도 그 꼴 이냐? 하고 책망하겠지만 그런 줄 스스로도 알면서 나는 이것을 감히 권하고 싶습니다. 성자만 전도하란 법 없습니다, 망나니도 해야지. 그래서 바울이 한숨 쉬며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참으로 전도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더 괴롭히기 위해 하지만 어쨌거나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니 좋다고 그랬습니다. 꿀은 옥단지에 담아도 꿀이요 깨진 바가지 쪽에 담아서 더럽고 다 흘러빠져도, 그래서 단 한 방울이 남아도 꿀이 꿀인 데는 변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둔하고 아무리 악독한 인간이라도 진리의 말씀을 완전히 변질 말살 왜곡 은폐할이만큼 타락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경험해봤으니 설명 없이는 알기 어려울 줄을 압니다. 해제나 서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서툰 내가 하는 것보다는 잘한 이의 것을 비는 것이 옳을 듯해 스와미 프라바바난다(Swami Prabhavananda)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의 공동 번역에 실린「기타와 마하바라타」 「기타의 우주론」두 장을 우선 실어서 앞으로 읽어가는 데 도움이 되게 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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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 바가바드 기타- 책을 읽기 전에
작성자 바보새 14-05-27 12:17 조회1,9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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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기타」와「마하바라타」
 
「마하바라타」(Mahabharata)는 세계에서 가장 긴 시라고 한다. 그 맨 첨의 원형대로는 2만 4천 절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갈수록 차차 늘어서 나중에는 10만 절에 이르게 됐다.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단일한 작품이 아니고 여러 개의 이야기가 모여서 된 것이다. 그 중심 되는 제목은 그 이름이 보여주는 대로, 인도 옛날의 바라타 대왕족의 이야기다. 마하(maha)란 크다는 뜻이다.
「마하바라타」에 의하면 판두(Pandu) 왕이 죽은 다음 그 자리를 그 동생 되는 드리타라슈트라(Dhritarashtra)가 이어 들어서서 판두의 다섯 왕자, 즉 판다바스(Pandavas)들을 거두어 자기의 일백 왕자들과 함께 양육하게 됐다. 그들이 차차 자라 어른이 되자 판다바스들은 그 경건심과 영웅적인 인격에서 두드러져 나타나게 됐다. 그러자 드리타라슈트라의 맏아들 두료다나(Duryodhana)는 샘을 일으켜 그들을 죽일 계획을 하게 됐다.
무료다나는 계책을 꾸며서 한 멀리 있는 성에 궁궐을 짓고는 판다바스들을 초청해서 어떤 종교적 명절 동안을 그 안에서 지내게 했다. 그 궁궐은 아주 불붙기 쉬운 자료로 지어졌으므로 두료다나의 부하들은 손쉽게 거기 불을 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궁궐은 다 타 재가 됐지만 판다바스들과 그들의 어머니 쿤티(Kunti) 왕비는 마침 알려주는 사람이 있어서 무사 히 도망할 수가 있었다. 두료다나는 그들이 다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판다바스들은 산림 속에서 브라만(Brahman)족처럼 변장을 하고 지내는 동안 가지가지의 고난을 겪었고 모험을 했다. 어떤 날 그 근처의 국왕이 자기 딸을 위해 사위를 고르는 식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거기 뽑히려면 굉장히 강한 활을 당기어 밟아서 아주 조그만 과녁을 맞혀야 한다고 했다. 판다바스들은 한번 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변장한 모습으로 그 성에 갔다.
지망자가 전인도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두료다나도 그 속에 있었다. 그 시험에 모든 사람이 하나씩 하나씩 다 떨어져나가고 맨 나중에 판다바스의 셋째인 아르쥬나(Arjuna)가 일어나서 조금도 힘들어하는 기색 없이 그 활을 꾸부려 밟아가지고 그 과녁을 맞혔다. 공주 드라우파디(Draupadi) 는 그에게 승리의 화관을 씌웠다. 그러나 거기 모였던 왕자들은 겉보기 에 미천하고 무사답지 못한 브라만 사람에게 그런 모욕을 당하고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크리슈나(Krishna)가 두 사이에 들어 조정을 하고 아르쥬나가 신부를 차지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설득을 시키지 않았던들, 마치 율리시즈 이야기 모양으로 큰 싸움이 일어날 형세였다. 크리슈나는 판다바스의 사촌이면서도 드리타라슈트라 왕의 아들은 아닌 사람이었다.
5형제는 드라우파디를 데리고 산림 속으로 돌아가 기다리고 있는 쿤티게로 나가서 큰 목소리로 “어머니, 우린 아주 놀라운 보배를 얻어왔어요” 했다. 쿤티는 “얘들아, 부디 똑같이 나눠가져야 해”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한 처녀가 아닌가. 그래 어쩔 줄을 모르며 부르짖었다. “아이구머니나, 내가 무슨 소리를 했지!”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 어머니의 말은 그 아들들에게는 거룩한 것이었다. 그래서 드라우파디는 그 다섯 형제들과 다 같이 결혼을 하게 됐다.
 
드리타라슈트라와 그의 아들들은 이제 판다바스들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결혼을 통해 강한 임금과 결탁을 하게 된 것을 알았다. 두료다나는 그 국토를 다 차지하려고 했지만 드리타라슈트라가 어질게도 그 숙부 비슈마(Bhishma)의 조언을 들어 그 5형제를 오라 청하여 왕국의 절반을 갈라주기로 했다. 그리해서 왕국을 둘로 갈랐는데 판다바스들은 쟈무나(Jamuna) 강 유역에 있는 가장 나쁜 황무지를 가지게 됐다. 그들은 그것을 개척하여 훌륭한 도시를 건설하고 맏형 유디슈트라(Yudhishtra)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제 5형제는 승리와 영광의 시대를 맞게 되는 반면 두료다나는 그들을 점점 더 미워하게 됐다. 그는 샘 끝에 또 다른 흉계를 꾸며 그들을 해하려 했다. 경건하고 점쟎은 유디슈트라 왕이지만 한 가지 위험한 약점이 있었는데, 노름을 좋아했다. 그래 두료다나는 그를 보고 아주 꾀많고 사기꾼인 사쿠니(Sakuni)와 같이 골패를 치자고 도전을 했다. 그러면 왕은 체면에 걸려 승낙 아니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골패를 쳤는데 사쿠니가 협잡을 했기 때문에 왕은 매번 져서, 전재산을 대다가, 왕국을 대다가. 나중엔 자기의 모든 형제, 드라우파디, 자기 자신까지 대서 다 졌다. 마침내 그들은 다 무료다나의 노예가 되어 원수 갚음으로 하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게 됐다. 나중에 드리타라슈트라가 견디다 못해 나서서 중재를 해서 비로소 그들은 자유를 얻고 왕국을 돌려받게 됐다.
그렇지만 무료다나는 끝내 그 아버지에게 졸라서 또다시 골패를 한번 치는 허락을 얻었다. 지는 사람은 제 왕국을 내놓고 산림 속에 은거하여 12년을 지내야하고 그 다음 1년은 성내에서 살되 들키지 않아야 한다. 만일 들키면 그 유배의 기간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그런데 유디슈트라는 이번 내기에도 졌다. 그래서 판다바스들은 산림 속으로 쫓겨났다. 그들은 그 불행을 복으로 살려 그동안에 정신적으로 수련을 하며 많은 영웅적 행동을 쌓았다.
 
한번은 그들이 방랑을 해서 다니는 동안 목이 말라 죽게 되는 지경을 당했다. 막내동생 나클라(Nakula)를 시켜 물을 찾아보라 했다. 그는 찾다가 호수를 하나 발견했는데 맑기가 수정 같았다. 엎드려 마시려 하자 소리가 하나 들려오는데 “가만있어, 얘야. 우선 내 질문에 대답을 해. 그런 다음 마셔라” 했다. 그러나 나쿨라는 너무 목이 타 죽을 지경이므로 그 소리를 들은 척도 않고 물을 마셨다. 그러자 곧 죽어버렸다. 그 손위 형 사하데바(Sahadeva)가 그를 찾으러 나갔다가 역시 그 호수를 발견하고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모양으로 해서 4형제가 다 죽었다.
맨 나중 유디슈트라 차례가 왔다. 그는 그 시체들을 보고 울기 시작했는데 그때에 그 목소리가 말하기를 “얘야, 우선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그러면 내가 네 슬픔과 목마름을 다 고쳐줄 것이다” 했다. 그가 얼굴을 돌이켰을 때 그는 의무와 덕의 화신인 다르마(Dharma)가 한 마리 학의 형상으로 자기 옆에 선 것을 보았다.
그 학은 물었다.
“천당에 올라가는 길은 무엇이냐?”
“진실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을 수 있느냐?”
“올바른 행실로입니다.”
“슬픔을 이기기 위해 무엇을 정복해야 하느냐?”
“자기 마음입니다."
“사람은 언제 사랑을 받을 수 있느냐?”
“허영심이 없을 때입니다.”
“세상에 놀라운 모든 것 중 가장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자기 둘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면서도, 한 사람도 제 죽을 것을 믿는 사람은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참 종교에 이를 수 있느냐?
“토론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경전에 의해서도, 교리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유익이 없습니다. 종교에 이르는 길은 성인들이 밟아간 그 길입니다.”
 
다르마는 흐뭇이 여겨 자신을 유디슈트라에게 나타낸 다음 4형제를 살려주었다.
유배의 기한이 다 된 다음 유디슈트라는 그의 왕국을 돌려달라고 했지만 두료다나는 거절했다. 유디슈트라는 자기를 위해서 다만 한 부락과 자기 형제들을 위해서 각각 한 부락씩이면 만족하겠다고 했지만 탐욕에 정신이 빠진 두료다나는 그것조차도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 왕실의 장로들이 중재에 힘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리하여 전쟁은 불가피하게 됐다. 인근의 왕국들도 그 싸움에 말려들기 시작해 나중에는 전인도에 미치게 되었다. 양쪽이 다 크리슈나의 도움을 원했지만 크리슈나는 양쪽에 대해 꼭 같은 조건을 내놓고 택하라고 했다. “내 친족 브리슈니스(Vrishnis) 사람들 모두의 도움을 받든지 그렇지 않으면 나 하나만이든지. 그러나 나는 싸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두료다나는 브리슈니스를 택했고 아르쥬나는 크리슈나 자신을 자기의 차부로 택했다.
싸움을 하게 된 곳은 유명한 순례지인 쿠루크쉐트라(Kuru-kshetra) 들이었다.「바가바드기타」에 기록되어 있는 크리슈나와 아르쥬나 사이의 대화는 여기서 바로 전쟁이 맞붙기 직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전쟁은 18일 동안 계속됐고, 두료다나가 전사하고 승리가 온전히 판다바스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후 유디슈트라는 인도의 완전한 통치자가 되어 36년간을 다스렸다.
 
이 얘기는 드라우파디와 판다바스가 하나님이 계신 히말라야에 순례를 가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그 도중에서 왕비와 네 형제가 다 죽는다. 그들은 인간의 몸을 가진 채 천당에 올라가기에 넉넉하리만큼 온전히 순결치는 못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자 왕인 유디슈트라만이 자기의 충성스런 개를 데리고 하늘로 올라간다. 그들이 천당에 다다랐을 때 모든 신들의 왕인 인드라(Indra)는 그를 보고 개는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유디슈트라는 대답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자기도 천당 밖에 머무르겠다고 했다. 그 이유는 자기는 자기를 믿어주었고 즐겨 자기를 보호해주었던 어떤 물건이라도 그것을 거친 들에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끈질긴 토론 끝에 마침내 개와 임금이 다 허락되어 함께 들어갔다. 그러자 그 개가 바로 다르마로 나타났다. 이것이 유디슈트라의 정신적 위대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시험이었다. 그 다음 하나 더 있다. 왕이 사방을 돌아보니 하늘에는 그의 죽은 대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그의 형제들과 동무들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인드라는 그를 데리고 한 음산하고 끔찍한 곳으로 갔다. 바로 지옥구덩이다. 유디슈트라는 “저도 여기 있을랍니다. 제게는 그들이 있는 여기가 곧 천당입니다” 했다. 그때에 그 암흑과 끔찍한 것은 사라졌다. 유디슈트라와 다른 판다바스들은 그 나타나 뵈는 지옥과 천당을 지나 참 하나님의 사심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곧 영생이다.
 
「바가바드기타」는 글자대로 하면 신의 노래라는 뜻인데 힌두교에서는 스루티(Sruti) 곧 신이 직접 인간에게 계시해준 경전으로는 알지 않고 스므리티(Smriti) 곧 화신이나 성자, 예언자가 경전에 대해 주를 달아서 한 가르침으로 안다. 그렇지만 이것이 힌두 종교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책이다. 말하자면 인도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예로부터 긴 세월을 두고 인도의 정신적 문화적 지적 정치적 생활에 광범한 영향을 주어왔고 지금도 주고 있다. 인도의 사상가 지도자의 정신적 취사(趣舍)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기타」의 연대는 보통 학자들에 의해 기원전 4세기와 5세기 사이에 놓여 있는데 그들의 대부분의 의견은 이것이 본래는「마하바라타」의 한 부분이 아니었다는 데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반드시 이것이 편집 된 것이 그 서사시보다 후라는 말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이것은 독립적으로 있었던 듯하다.「기타」안의 대화에는 네 사람이 말을 하고 있다. 드리타라슈트라 왕, 산쟈야(Sanjaya), 아르쥬나, 크리슈나다.
 
드리타라슈트라는 소경이었다. 전설로 전해오는 말에 「기타」의 저자라고 하는 성자 브야사(Vyasa)가 왕에게 쿠루크쉐트라의 싸움을 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주마 하는 것을 왕은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친족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서 브야사는 드리타라슈트라의 신하요 마부인 산자야에게 뚫어봄 뚫어들음의 능력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중에 앉아 있으면서 산쟈야가 저 멀리 전장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듣는 대로 왕에게 알려주었다. 그의 입을 통해 크리슈나와 아르쥬나의 말은 영매적(靈媒的)으로 보도가 됐고 이따금씩 끊고 자기 자신의 설명을 첨부하기도 한다.
크리슈나소(Krishna)님은 인도의 그리스도라 부름받는다. 사실「바가바드 기타」와 그 밖에 관계되어 있는 크리슈나의 생애와 나사렛 예수의 생애와의 사이에는 놀랄이만큼 비슷한 점이 있다. 양쪽이 다 전설과 사실이 섞여 있다. 그러나 역사적 문제는「바가바드기타」의 가르침을 맛보는 데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영적 진리를 찾기 위해「기타」나 산상수훈을 읽는 독자에게 역사적인 크리슈나나 역사적인 예수가 정말 존재했든지 말았든지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기타」의 주된 문제는 크리슈나 개인에게는 있지 않다. 그러나 브라만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구경(究竟)의 실재 그것이다. 크리슈나가 아르쥬나에게 말할 때 어떤 때는 하나의 개인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신 자신으로서 말을 한다.
 
나는 브라만이다.
이 몸 안에 있으면서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이니
꺼질 날이 없느니라.
나는 진리요
영원한 즐거움이다.
 
아르쥬나도 크리슈나에 대하는 그의 자세에 있어서 두 가지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크리슈나는 아르쥬나가 택해서 섬기는 비슈누(Vishnu)의 거룩한 화신이다. 아르쥬나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자비로운 무지에 의해 그것을 잊어버린다. 사실 그로 하여금 잊어버리게 한 것은 크리슈나 자신이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으로서는 계속 하나님과 같이 있는 그 긴장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11장에 기록되어 있는 크리슈나의 거룩한 환상을 본 다음 아르쥬나는 우주의 주를 자기가 “친구요 죽을 수밖에 없는 같은 동류로” 대접했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한다. 그는 크리슈나에게 엎디어 용서를 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곧 가셔버린다. 다시 그는 잊어버린다. 우리는 예수의 변화의 환상을 보고 난 다음 예수와 그 제자들 사이에도 같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드리타라슈트라 왕은 오직 한번 말할 뿐이다. 사실로「기타」전편의 이야기는 다 그의 시작하는 한 마디 질문에 대한 산쟈야의 대답이다.
 
「기타」의 우주론
다른 모든 힌두교의 문헌과 마찬가지로「기타」도 분명하게 짜인 체계적인 우주론 위에 서 있다. 이 우주론의 홀로 하나인 중심적인 참 것을 브라만(Brahman)이라 부른다. 곧 실재자이다. 브라만은 총체적인 신성(神性)이다. 그것은 도저히 정의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우파니샤드」(Upanishad)는 브라만을 존재요 지식이요 지극한 즐거움(existence, knowledge, bliss)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속성(屬性)은 아니다. 브라만은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브라만은 존재 그 자체다. 브라만은 어진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보다도 절대적인 지식이요 절대적인 즐거움이다. 아마 우리 인간의 마음에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표현방법은 “브라만은 이런 것도 아니고, 저런 것도 아니다……” 해서 나중에 현상적인 우주 전체가 다 없어지고 오직 브라만이 홀로 남게 되는 일일 것이다.
브라만은 절대적으로 현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생체, 모든 물체 속에 다 있다. 신성은 사람 속에도, 쥐 속에도, 돌 속, 번개 속에도 나타나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의 브라만은 아트만(Atman)이라고 부른다. 다만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조금도 어떤 다름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다.
또 브라만을 이 우주와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는 하나의 인격적인 신, 곧 이슈바라(Ishvara)라고 한다. 이슈바라는 속성을 가진 신이다. 그는 모든 거룩한 성격 곧 사랑, 자비, 정결, 정의, 지식, 참을 가지고 있다.
 
브라만은 절대이기 때문에 모든 행동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브라만이 창조했다거나 파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이 우주를 창조하고 지지하고 무너뜨리는 것은 이슈바라, 곧 브라만이 자기의 능력과 하나가 된 분이다. 이렇게 말함은 반드시 이원론(二元論)은 아니다. 브라만의 능력을 브라만에서 갈라낼 수 없는 것은 마치 불의 열을 불에서 갈라낼 수 없는 것과 한가지다. 그러나 철학적 분석이 우리를 그 놀라운 신비 속에 더 들어가게 하지는 못한다. 이슈바라란 생각은 인간의 지능이 신에 대해 알 수 있는 한계를 나타낼 뿐이다. 브라만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의식적인 마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브라만은 성자들에 의해 도달된 초의식적인 지경에서 체험 될 수 있을 뿐이다. 그 지경을 사마디(samadhi) 혹은 신과의 합일(合ᅳ)이라고 한다.「바가바드기타」안에는 이 지경에 이르는 방법이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다. 식별(識別), 정신적 훈련, 명상에 의해서 바깥 세계와의 감관(感官)의 접촉이 온전히 끊어질 때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그리하여 거기 아트만, 곧 속에 와 계시는 신성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모든 신비로운 수양의 하는 방법이요 이날까지 모든 진실한 종교에 의해 가르쳐져온 것이다.
힌두교는 더 나가서 이슈바라의 세 기능 혹 세 모습을 인격화하여, 브라마(Brahma)와 비슈누(Vishnu)와 시바(Shiva)라 부른다. 브라마는 거룩한 창조의 능력을 표시하고 비슈누는 지지(支持)를, 시바는 분해(分解)를 표시 한다. 시바를 흔히는 파괴자라고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이 우주가 파괴 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우주는 브라만의 영원한 능력 밑에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과정의 한 부분이다. 그 영원한 과정은 가능성과 나타남의 두 시대를 번갈아 되풀이하고 있다. 그 돌아가는 바퀴의 끝, 혹은 칼파(Kalpa)가 오면 우주는 분해되어 풀어져 가능성의 시대, 곧 씨의 상태로 들어가서 다음 창조를 기다리게 된다.「기 타」8장에는 이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크리슈나는 이 나타남의 시대를 ‘브라마의 낮’이라 부르고 가능성의 시대를 ‘브라마의 밤’이라 불렀다. 이 세계에 살면서 이 바퀴에 속해 있는 모든 산 물건들은 다음에 오는 우주 낮, 우주 밤에 따라 끊임없이 다시 나고 또다시 풀어진다. 그러나 이 풀어짐을 결코 신에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아니된다. 그 산 물건은 다만 자기를 내보냈던 브라만의 능력으로 돌아가서 다시 나타나는 때가 올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브라만의 능력은 모든 마음과 물질의 근본이다. 그것을 프라크리티(prakriti) 혹은 마야(Maya)라고 한다. 그 명칭은 서로 왔다갔다한다.「기 타」에 의하면 이슈바라는 언제나 그가 인간 속에 나고 싶을 때는 프라크리티에서 자기를 위한 몸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형상으로 있으면서도 여전히 프라크리티의 주로 남아 있다. 이것이 신의 화신이 보통 인간과 다른 점이다. 사람도 프라크리티와 연합한 아트만이다. 그러나 사람은 프라크리티에 눌려서 미혹(迷惑)되어가지고 자기는 아트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트만과 연합한다는 것은 그 미혹을 벗어버리는 일이며 살고 죽음의 길에서 해방되는 일이다. 해탈한 사람은 다시 날 수가 없다. 그는 벌써 프라크리티의 세력 밑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화신은 절대 그 세력에 속하는 일이 없다. 그는 자유자재로 우주에 들고 난다.
힌두교는 크리슈나, 부처, 예수를 포함해서 ‘많은 화신을 믿는 것을 용납하고 또 앞으로도 많이 있을 것을 예상한다.
 
나는 언제나 다시 돌아온다.
거룩한 자를 건지기 위해
죄인의 죄를 멸하기 위해
정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프라크리티는 구나(gunas)라는 세 가지의 힘(性)으로 구성됐다고 한다. 사트바(sattva, 善性)와 라자스(rajas, 動性)와 타마스(tamas, 暗性)다. ‘브라마’ 의 밤 곧 가능성의 시대 동안은 이들 ‘성’들은 온전히 균형을 이루어 있으므로 프라크리티는 아무 요동이 없이 가만있다. 창조는 이 균형이 깨지는 데서 나온다. 그때에 성들은 가지가지로 서로 다른 마음과 물체에 따라 이루 헬 수 없는 종류의 배합을 이루어 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들의 성격은 심령적 물질적 세계에 나오는 그들의 소산물에 따라 알 수 있을 것이다.
물질계에서는 선성은 모든 순수하고 고운 것을 나타내고, 동성은 날쌘 것을, 암성은 굳고 맞서는 것을 나타낸다. 어떤 것 속에나 세 성은 다 들어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중 하나가 지배적이다. 가령 예 든다면 선성은 햇빛 속에서 우세하고 동성은 폭발하는 화산 속에서, 암성은 화강암덩이 속에서 우세하다.
성은 또 어떤 물건이 진화의 어느 단계에 있는가를 표시하기도 한다. 선성은 실현될 형태의 본질이고, 암성은 그 실현에 대해 속에 들어 있는 장애고, 동성은 그 장애를 물리치고 그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힘이다.
 
사람의 마음에서는 선성은 심리적으로 침착, 정결, 평온을 드러내고, 동성은 열정, 불안정, 도전적 활동을 나타내고, 암성은 우둔, 게으름, 타성적임을 나타낸다. 어떤 때는 이 성이, 어떤 때는 저 성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 사람의 기분과 성격이 달라진다. 그러나 사람은 그 행동, 사상, 생활양식에 따라 그중 어떤 성도 배양해낼 수가 있다. 우리는 동성을 배양함에 따라 암성을 이겨낼 수 있고, 선성을 배양함에 따라 동성을 이겨 낼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는다. 그렇지만 구경의 지경은, 선성까지도 초월해서, 성의 위로 성의 저쪽인 아트만에 이르는 일이다.
프라크리티에서 나와서 천차만별의 만물에 이르는 진화의 과정을 더듬으려면 우리는 개인 지성의 근본이 되는 마하트(mahat)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은 물체를 식별 분류하는 힘인 부디(buddhi), 그 다음은 아함카라(ahamkara), 곧 자기감각이요, 아함카라는 세 가지 기능으로 갈린다. ① 마나스(manas), 이것은 감각에서 오는 인상을 받아 그것을 부디로 보낸다. ② 감각의 5관(五官)인 눈, 귀, 코, 혀, 몸과 행동의 5기(五器)인 손, 발, 혀, 생식기, 배설기, ③ 다섯 탄마트라(tanmatras) 즉 빛, 소리, 냄새, 맛, 촉각의 본질이 되는 것, 이 기묘한 탄마트라들이 서로 얽히고 다시 얽혀서 소위 5 대 (五大)라는 지 (地) 수(水) 화(火) 풍(風) 공(空)을 낳는데 이것으로 이 영원한 우주는 이루어져 있다. 그 체계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표와 같다.
 
                                           프라크리티
 
                                              마하트
 
                                              부디
 
                                            아함카라
 
1.마나스                          2.감각의 5관,행동의 5기                          3. 5탄마트라-5대
 
우리는 물론 현대의 서양 과학의 가설을 인도의 세계 그림에다 억지로 맞추려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러나 또 그 둘 사이에 어떤 서로 합하는 점이 있는 것을 몰라서도 아니될 것이다.
 
현대 과학은 물론 절대적인 실재의 관념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 그것은 브라만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또 신비주의자들의 초의식에 대한 주장을 확인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그 하는 말은 결국 이런 것이다. “어쨌거나 현재로서는 그러한 종류의 체험을 조사해볼 만한 기술을 가진 것이 없다. 당신들이 브라만을 아노라고 할 때는 당신들은 과학 세계 밖의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프라크리티와 성을 생각해본다면 과학과 베단타는 한 가지 말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도 역시 일원론적인 우주를 분명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모든 물질은 화학적인 원소들의 각각 다른 결합으로 되어 있는데 그 원소들은 같은 단원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은 시종일관 이 세계와 하나요 가장 먼 별과도 하나다.
 
과학은 마음과 물질 사이에 근본적인 구별을 하지 않는다. 마음은 어디서나 가능성이 있다. 과학자는 아직은 돌 속에도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지는 못 하더라도 그는 그것은 아직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진화의 어느 섬에서 생명이 들어갔다는, 어느 점에서 인격이 갑자기 태아나 유아 속에 생기게 됐다는, 그 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우리게 말하기를 진화는 완전히 영속적인 것이요 또 일반적인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사람의 이상이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요 끊임없이 변천해 가는 것이다. 목적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방향은 분명하다. 그리고 인간의 진화적 사명은, 마치 콜룸부스가 알 수 없는 서쪽을 향해 항해를 했듯이,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나가는 일이다. 과학적 견지에서 한다면 인간의 사명은 환경과 자기의 관계에 대한 보다 더 큰 지식을 얻어서 그것을 점점 더 잘 통제해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그것은, 사실 그 환경이란 자신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르쥬나와 과학자는 둘 다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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