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21

구안록 - 참 평안을 얻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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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안록 - 참 평안을 얻기까지

우치무라 간조 (지은이) | 양현혜 (옮긴이) | 포이에마 | 2016-04-07 | 원제 求安錄 (18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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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이자 사회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의 대표작이다. <기독신도의 위안>, <회심기>와 더불어 일반 독자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구안록>은 저자가 저술가로서 애착을 가졌던 대표적인 작품이자 그의 기독교 신앙과 사상의 기초가 되는 속죄론을 자세하게 논한 책이기도 하다.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 길은 어디에 있는가? 우치무라 간조는 극적인 부흥회나 학문, 자연 관찰, 자선사업, 심지어 신학마저 그 해답이 될 수 없으며, 행복한 가정이나 쾌락, 낙관적 세계관 역시 죄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19세기 말, 과도한 합리주의적 시대정신과 미신적이고 맹목적인 신앙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정통적 기독교의 입장을 대변한 그의 속죄론은 지금 읽어도 명쾌하며 여전히 유효하다.



서문을 대신하여



제1부

1. 비탄_ 산다는 것

2. 마음의 분리_ 밝음과 어둠

3. 탈죄술(脫罪術)_ 죄에서 벗어나는 법

4. 신학교_ 악마의 가장 좋은 표적

5. 망죄술(忘罪術)_ 죄를 잊는 법



제2부

6. 죄의 원리_ 하나님을 떠나는 것

7. 기쁜 소식_ 그리스도의 부활

8. 신앙 이해_ 온전한 믿음으로

9. 낙원 회복_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10. 속죄 원리_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11. 최종 문제_ 평안을 얻는 것



해제: 죄의 실재를 극복하는 법_양현혜 교수

우치무라 간조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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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14 : 인간은 저마다 불만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부자가 되면 만족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부유해져도 그는 평안을 얻지 못한다. 착한 아내와 살면 만족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도 그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사람은 내면의 결핍을 인식하지...

P.23 : 나는 위선자다. 살인자다. 간음하는 자다. 도둑질하는 자다. 이렇게 성서라는 전등으로 내 마음을 샅샅이 비춰보면 나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요 사람을 속이는 자다. 아, 차라리 성서의 말씀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라. 나는 그처럼 밝은 빛을 견딜 수가 없다.

P.54 : 선행이 나를 교만하게 만들면 그 선행은 내 원수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다. 자선이라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거의 회복 불가능이다. 근신하라. 너, 고아원을 세워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자여. 세상이 당신의 자애심을 알아주고 사심 없는 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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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한 인간이 절대자 안에서 참 평안을 찾아가는 여정

-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영적 순례기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이자 사회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의 대표작. 《기독신도의 위안》, 《회심기》와 더불어 일반 독자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구안록》은 저자가 저술가로서 애착을 가졌던 대표적인 작품이자 그의 기독교 신앙과 사상의 기초가 되는 속죄론을 자세하게 논한 책이기도 하다.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 길은 어디에 있는가? 우치무라 간조는 극적인 부흥회나 학문, 자연 관찰, 자선사업, 심지어 신학마저 그 해답이 될 수 없으며, 행복한 가정이나 쾌락, 낙관적 세계관 역시 죄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19세기 말, 과도한 합리주의적 시대정신과 미신적이고 맹목적인 신앙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정통적 기독교의 입장을 대변한 그의 속죄론은 지금 읽어도 명쾌하며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 길은 어디에 있는가?

-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영적 순례기

메이지유신 100주년을 맞아 ‘일본 근대화에 기여한 20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된 바 있는 우치무라 간조는 근대 일본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현대 일본 기독교계는 물론이고 일본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나아가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 여러 기독교 지도자를 통해 우리 사회와 교계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무교회 운동과 비전(非戰) 평화 운동이 그러했다. 아직도 종종 그의 교회론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그를 기독교와 교회를 부정한 인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교회라는 외형적 제도 때문에 초래될 수 있는 모순과 반기독교적 요소를 극복하고, 특별히 미국과 유럽 제국주의에 의해 변질된 기독교의 순수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무교회주의는 ‘무교파주의’ 또는 ‘무교단주의’에 가깝다 하겠다.

《구안록》은 《회심기How I Became Christian》(1895)와 더불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우치무라 간조의 대표 저작이자, 회심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초판이 간행된 것은 1893년 8월, 그의 나이 32세 때였다. 나중에 이 책으로 회심한 한 중국인의 이야기와 관련해 우치무라는 집필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고베에 사는 광동 출신 중국인 모모 군은 일어에 능통한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지금부터 3년 전에 헌책방에서 《구안록》을 5전에 사서 읽고 난 후 자신의 죄를 깨닫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후 같은 중국 동포들에게 전도하여 작은 교회를 하나 설립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실험담을 듣고 생각했다. 신앙적 저술을 해야 한다고. 이 중국인과 같은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내가 책을 쓸 때 기울인 노력은 다 보상받은 것이라고. 세상에서 열광적으로 환영받는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이런 사람 하나를 얻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 지금부터 26년 전 구마모토 시 다쿠마바루의 전나무 아래에서 오래된 중국제 가방을 받침대로 하여 쓴 이 책이 오늘날 이러한 열매를 맺게 되니 참으로 은혜이다. 감사, 또 감사!(1919년 1월 14일 일기) " -201쪽, 해제



우치무라 자신의 감회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구안록》은 우치무라가 저술가로서 애착을 가졌던 대표적인 작품일 뿐만 아니라 그의 기독교 신앙과 사상의 기초가 되는 속죄 신앙을 논한 대표적인 신학 저술이다. 《구안록》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죄에서 벗어나 평안을 얻기까지 자기 인생 이야기를 중심으로, 2부는 ‘죄의 원리’, ‘기쁜 소식’, ‘신앙 이해’, ‘낙원 회복’, 속죄 원리’ 등 속죄론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끝으로, 우치무라 개인의 속죄 체험과 《구안록》의 내용, 그의 속죄론의 특징을 고찰한 양현혜 교수의 해제와 저자의 연보를 덧붙였다.



<구안록> 저술 배경

19세기 말 일본은 메이지유신과 함께 ‘기독교 금제(禁制)’가 풀리면서 수많은 해외 선교 단체와 다양한 교파의 기독교가 경쟁적으로 소개되었다. 그중에는 정통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고 성서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도 있었는데, 독일의 합리주의적 해석을 적극 도입한 자유주의 신학과 역사비평학 그리고 미국의 유니테리언교가 그랬다. 이들 신신학(新神學)은 그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 곧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 근거한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구원론에 있어서도 인간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적 초월성을 모두 제거하는 합리주의적 해석이 힘을 얻고 있었다. 이러한 경향에 맞서 정통적인 기독교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것이 초기 일본 개신교사를 달군 ‘신신학 논쟁’이었다. 우치무라 간조 역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의 원죄를 부인하고 정통적인 기독교의 속죄론을 부정하는 이들에 대응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속죄란 무엇인가에 대해 분명히 하고자 했으며, 《구안록》은 그 결과물이다.



참 평안 찾아가는 여정

죄를 지어서는 안 되지만 죄를 짓는, 정결해야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 무한한 영광과 무한한 타락 사이를 오가며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무능함. 과연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그 길은 어디에 있는가? 우치무라 간조는 기적적이고 극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부흥회로부터 시작해 학문에 몰두하거나 자연으로 눈을 돌려보지만 마음의 참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 목사도, 교회도, 학문도, 자연도 마음의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하자 이타적인 사역을 통해 평안을 얻을 수 있는지 실험해보았다. 인간이 죄에 쫓기는 것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성향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선한 일 또한 ‘마음의 평안을 얻는 기술(安心術)’로는 무익할 뿐만 아니라 도덕적 우월감을 갖게 하여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음을 절감한다. 끝까지 내려놓지 못했던 것, 곧 ‘목사만은 되지 않겠다’는 것 때문에 평안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여 신학교에 입학도 해보지만 더 절망하고 만다. 행복한 가정이나 쾌락, 낙관적 세계관 역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 삶을 통해 들려주면서(제1부)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우치무라 간조 속죄론의 특징

《구안록》의 해제를 쓴 양현혜 교수는 우치무라 간조 속죄론의 특징을 네 가지로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나타난 신의 정의와 사랑의 관계를 균형 있게 강조한다는 점, 구원에서 인간의 전적인 무자격성과 신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다는 점, 그의 구원론은 ‘만인 구원론’ 입장에 서 있다는 점(《구안록》에서 이 주제를 다루지는 않았다), 그리고 신의 은총에 의한 구원으로서의 타율과 그 결과로서 도덕적 삶을 사는 자율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우치무라의 속죄론은 과도한 합리주의적 시대정신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맹목적이고 미신적 신앙에 치우치지 않는 정통적 기독교의 속죄론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속죄 없이 그리스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비누 거품만으로 흑인이 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허황된 믿음이라고 주장하며,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강조하는 것도 그의 속죄론이 가진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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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치무라의 속죄신앙이 남긴 결과물을 떠나 그가 그렇게 깊이 묵상하고, 고뇌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새창으로 보기

파워리뷰어 ㅣ 2016-04-30 l 공감(1) ㅣ 댓글(0) Thanksto  공감



총 :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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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 ㅣ 2016-05-03 ㅣ 공감(1) ㅣ 댓글 (0)





연약하기에 인간은 견뎌내기 힘든 고난과 부딪히면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는다. 특정 종교의 신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믿는 신을 찾는 것이 인간이다. 끊임없이 자신안의 번민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이자 사회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는 '구안록'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누구나 살아가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을 곁에 두며 신앙심을 키우고 있는 우치무라 간조도 자신의 목적으로 인해 심적 고통을 겪는다. 평안을 얻고 싶지만 늘 어렵기에 신학교에 들어가며 느끼는 안락함이 얻는다. 허나 하나님의 통해 평안하고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여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마음은 고통스럽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교리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것이란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이 느끼는 고통을 저자는 다른 인물들이 신앙과 선을 통해 변화하는 모습을 알려주며 그 역시도 자신이 행할 길이 선... 자선사업이며 이는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일임을 인식한다. 더불어 교만이 함께한 선은 올바르지 못하며 진정한 선은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잊지 않고 올바른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길이란 것을 알려준다. 하느님의 충실한 일꾼으로 사는 것이 자신의 일이란 것을....



인류의 역사가 욕망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전쟁은 욕망의 충돌이고 정치는 욕망의 절충이다. -토머스 베빙턴 매콜리 p75-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 받는다.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잔인하고 비정한 세상처럼 저자는 늘 고통스런 운명 앞에 좌절한다.

 

세상은 분명 예전보다 풍요롭고 여유로워졌지만 사람들의 삶은 훨씬 더 팍팍하고 이기적으로 변화한다. 정의로운 사회, 정의로운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진정 힘든 것인지... 멸망의 날이 멀지 않았다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 우리들의 모습은 정의롭지 못하다. 한 사람의 뛰어난 책사보다는 다수의 의로움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사람이 가진 속죄의 힘은 그의 품성의 높고 낮음, 그리고 그가 받은 고통의 크기에 비례한다.     -p177-



저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통해 평안을 얻는 길을 얻는다. 자신이 가진 죄의 실재를 인식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질문하고 해결점을 찾아가는 저자를 통해 우리도 자신을 구원할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이 꼭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어도 된다. 자신이 믿는 종교에서 선함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솔직히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 아니 종교 자체를 갖고 있지 않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마음이 어지럽고 힘들 때 누군가를 찾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특정한 대상을 정한 것이 아니라 늘 허공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특정한 대상을 믿고 그 선함에 나를 두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근본적인 죄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이 믿는 신앙 안에서 선을 행할 방법을 찾고 따름을 통해 평온함을 얻을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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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리뷰어 ㅣ 2016-04-30 ㅣ 공감(4) ㅣ 댓글 (0)



쎄인트의 冊이야기 2016-076

   

【 구안록(求安錄) 】    우치무라 간조 / 포이에마



 사람에게 신앙은, 믿음은 평안함을 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제대로 한번 신앙생활을 해보려고 마음먹으면, 평안함보다 갈등이 더 많습니다. 왜 나의 믿음 생활은 나의 일상과 따로 살림인가? 왜 나는 교회 안에서의 나 자신과 교회 밖 나 자신이 전혀 별개의 존재가 되는가? 아니 교회 안에서 조차도 교회 밖 일상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는가? 뒤집어 나타날 바엔 차라리 교회 안의 모습이 세상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나 자신도 때로 어떤 모습이 진짜인지 혼란스러운 때가 매우 자주 있습니다.





“자신의 적이 실은 자기 자신인데. 이를 알지 못하고 내면의 고통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 내 안의 싸움과 갈등은 어디에서 오는가. 내 육신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 우치무라 간조는 참된 믿음의 길을 찾기 위해 그야말로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우치무라 간조는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이자 사회 사상가입니다. 일본에서 메이지유신 100주년을 맞아 ‘일본 근대화에 기여한 20명 중’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생전에는 그의 믿음의 여정만큼이나 삶의 굴곡도 심했군요. 그가 받아들인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거해 예리한 사회 비평 활동과 비전(非戰) 평화 운동을 전개하여 근대 일본의 천황제 중심 군국주의적 제국주의의 흐름을 비판했습니다. 그 여파로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우치무라는 처음 기독교를 접하고 난 후, 그 도덕이 고결하고 위엄 있음에 감복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불결함과 불완전함을 깨닫게 됩니다. “성서의 이상에 내 언행을 비추어보니 참으로 견딜 수 없이 더러웠다. 진흙탕에서 나뒹굴고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전면적인 자신의 개혁을 선언합니다. 혼자 결심하는 것으로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친구들에게 선언하고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회중들에게 약속합니다. 흠 없는 온전한 삶을 살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한두 달간은 그 결심을 잘 지켰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언행을 극도로 줄이면서 그야말로 묵언 수도사의 삶처럼 살아봤으나, 자신의 근신이 친구들의 혐오의 대상이 됩니다. 그 자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자연스럽고 고통스러웠다고 고백합니다. 침묵이 우울증으로 바뀌려 할 무렵, 결단하기 전의 그 자신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약해진 것은 아닙니다. 죄(罪)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죄라는 이 엄청난 문제를 누군가에게 의지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나는 이 문제를 혼자서 풀어보려고 결심했다. 사람은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만일 벗어날 수 있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일단 이 생각이 마음에 들어앉기 시작하자 그는 부흥회에도 참석하고, 학문에도 몰두해보고, 자연의 삶도 생각해보고, 자선사업도 염두에 두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방법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자, 실질적인 전도자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로 결단합니다. 마음에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신학교에 들어갑니다.



 이 책 《구안록》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는 죄에서 벗어나려는 우치무라 본인의 경험을 기록했습니다. 2부는 ‘죄의 원리’, ‘기쁜 소식’, ‘신앙 이해’. ‘낙원 회복’, ‘속죄 원리’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그의 속죄론이 펼쳐집니다. 우치무라가 애쓰며 구하려했던 죄의 관념은 ‘죄 자체’와 ‘죄의 결과’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단계까지 가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은 선(善)자체이고, 악(=죄)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독립하려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살인, 절도, 간음 등 보통 우리가 말하는 ‘죄’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분리 된 죄의 결과라는 것이지요. 그러한 행위 자체가 바로 죄의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우치무라의 속죄신앙에 대해서 함께 깊이 생각하고 고민해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우치무라의 속죄신앙이 남긴 결과물을 떠나 그가 그렇게 깊이 묵상하고, 고뇌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습니다. 어떻게든 하나님께 더 가까이, 하나님 품안에서 그분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애씀의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평안을 얻는 길을 알았다. 그러나 길을 안다고 반드시 그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나를 죄에서 구원한다. 그러나 신앙 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救援)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장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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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안록]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영적 순례기  새창으로 보기

카일라스 ㅣ 2016-04-30 ㅣ 공감(5) ㅣ 댓글 (0)

어느 한 종교에 얽매여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요즘들어 종교 관련 서적에 눈길이 가는 것은 특정 종교를 선택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으로 진리의 길로 안내해주는 신을 만나보기 위함이다. 어떤 신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깨달음을 얻고 마음을 흔들어 놓을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굳이 세속적인 틀로 한정지어놓은 종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번에는 이 책을 읽으며 모르던 사실을 알아가고 싶었다. 무교회주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의《구안록》을 통해 절대자 안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는 여정에 함께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우치무라 간조(1861-1930).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이자 사회 사상가이다. 메이지유신 100주년을 맞아 '일본 근대화에 기여한 20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된 바 있다.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일 뿐이며,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껍데기"라고 보았던 그는 무교회주의 기독교 사상가를 많이 길러내어 현대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고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최태용 등에게도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



《구안록 求安錄》은《기독교 신도의 위안》《회심기》(홍성사)와 더불어 우치무라 간조의 대표 저작이다. 초판이 간행된 것은 1893년 8월이었고, 집필 시기는 1893년 4월에서 6월 하순경이었을 것이다. 그의 나이 32세 때였다. (200쪽_해제 中)

이 책의 17판이 1920년에 발행되었고, 지금껏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며 우치무라 간조의 경험과 속죄론에 공감할 것이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그의 영적 순례에 동참하는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 책은 2부로 구성된다. 제1부에서는 비탄, 마음의 분리, 탈죄술, 신학교, 망죄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제2부에서는 죄의 원리, 기쁜 소식, 신앙 이해, 낙원 회복, 속죄 원리, 최종 문제를 논한다. 1부에서는 죄에서 벗어나려는 본인의 경험을 기술하고 있고, 2부에서는 그의 속죄론을 서술한다. 이 책을 읽다보니 그의 처절한 고민과 방황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우치무라 간조의 영적 순례기에 동참하며, 예전의 시간을 떠올린다. 나는 왜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 누군가의 말도 안되는 이야기에 실망하며 그 종교마저 외면하고 말았을까. 좀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처절하게 방황하며 집요하게 의심의 끈을 놓지 말고 고뇌할 것을. 지금에라도 우치무라 간조의 글을 읽으며 마음의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일단락 짓는다. 그 시절의 나는 누군가에게 질문하고 그 답변에 실망할 것이 아니라, 탐구하는 마음으로 책을 찾아보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후회가 아니라 나의 무지에 대한 반성이다.



인간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저자의 이야기에 함께 고뇌하며 여정에 동참한다. 저자는 탈죄술, 즉 죄에서 벗어나는 법을 찾으며 부흥회, 학문, 자연 연구, 자선사업, 신학연구의 과정을 거쳐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신학교가 '악마의 가장 좋은 표적'이란다. 신성한 신학교의 공기도 죄를 벗어나게 하지는 못했다며, 두 겹 세 겹의 벽도 악마의 침입을 막을 수 없음을 알았다고. 신학교 또한 죄에서 벗어난 장소가 아니다. 밑에 보니 신학교는 애머스트 대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갔으나 한 학기만 공부하고 자퇴했다고 쓰여있다. 그곳또한 죄에서 벗어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한 학기면 충분했던 것이다. 고통을 벗어날 길이 없다면 잊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망죄술로 가정을 이루는 것, 쾌락주의, 낙천주의를 생각해본다. 하지만 모두 그다지 큰 효력은 없었다. 죄의 원리에 대해 생각하고 신앙을 이해하며 끊임없이 사색하는 것으로 평안을 얻는 길까지 이어진다.



《구안록》은 우치무라가 저술가로서 애착을 가지는 대표적인 작품일 뿐 아니라 그의 기독교 신앙과 사상의 기초가 되는 속죄 신앙을 논한 대표적인 신학 저술이다.

_양현혜 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

참 평안을 얻기 까지의 과정을 이 책을 읽으며 함께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을 읽는 사람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면 결론은 그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치열한 과정을 함께 하며 평안을 얻는 길을 찾기 위한 도구로서도 이 책은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영적 순례기에 동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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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렘벨 ㅣ 2016-04-25 ㅣ 공감(1) ㅣ 댓글 (0)

책을 통해 알게된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이자 사회 사상가이다. 일본은 그 어느 나라보다 기독교의 전파가 어려운 나라였다. 선교사님들이 말하는 일본에서의 전도활동은 늘 쉽지 않았고, 교회의 부흥을 꾀하는 일도 어려웠다. 그런 환경을 가진 일본인이 쓴 기독서적이라 궁금했다. 어떤 이야기를 신앙이라는 관점으로 풀어낼까?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는 참 평안을 얻기까지 본인이 겪었던 여러 이야기들을 책을 통해 이야기하며 그럼으로 인해 더욱 더 하나님께 의지하고 만나야만 하며 그때서야 비로소 참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고 신앙으로 바로서고 싶어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바라고 원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삶은 쉽게 그런 자세와 염원하는 마음이 이뤄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무너지고 넘어지며 좌절을 맛본다.



"자신의 적은 실은 자기 자신인데, 이를 알지 못하고 내면의 고통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p14)"

남을 탓하는 태도 역시 인간의 내면의 결핍이라고 말하는 그는 고통의 원인은 결국 나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누구보다 인위적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그러한 과오를 범한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며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헌금하며 선행을 쌓는 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로 여긴다. 물론 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저자가 경험했고 나 역시 경험했듯이 '인위적 거룩함'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으로 바로서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노력을 수반하는 여정이다.

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에서는 너무 많은 죄에 대한 억눌림을 느꼈다. 성경을 보고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 죄가 아닌 것이 없었다.

"하늘이 사람을 심판할 때는 죄의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를 낳은 동기를 본다.(p20)"

기독교는 마음에 품은 죄까지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아도 죄가 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그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고 싶어하는 감정을 품었다면 그 역시 살인죄가 되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어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호구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의 말에 나도 동의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챤은 양보해야 하고, 손해봐야 하며, 늘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고 당연시 여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을 의무로 여기고 행하는 것이 아닌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기를 보고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더욱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우치무라는 그의 속죄 체험을 기반으로 [구안록]을 집필했고, 1부와 2부로 나뉘어  죄에서 벗어났던 본인의 경험과 이론적인 속죄론에 대해 설명한다. 그가 원했던 '완전무결한 생애'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오히려 교만과 자만으로 빠지게 하는 것을 경험했기에 속죄론으로 다시 우리를 깨우치며 하나님께 다가가는 삶을 살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속죄 신앙을 받아들여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누리는 도덕적 삶은 선물과도 같은 것이고 진심으로 다른 이를 포용하고 용서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속죄론은 지나치면 독이 된다. 그러나 그는 선을 잘 그으며 우리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오랜만에 읽었던 종교 서적이라 인상에 많이 남았다. 죄에서 자유롭고 참 평안을 간구하는 크리스챤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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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안록

star4es ㅣ 2016-04-20 ㅣ 공감(2) ㅣ 댓글 (0)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힘겨울 때 마다 나 혼자 스스로 해결하려하고 애쓰다 지치고 결국에는 포기하게 되는 안쓰러운 날들을 살아가고 있는 요즘입니다. 이렇게 힘든 나의 삶에 있어서 곁에서 도와줄 친구를 늘 주변에서 찾곤 하지만 그때마다 제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또한 가까이 있을 가족에게도 눈을 돌려보지만 그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낄때 왜 내가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에 잠겨볼 때마다 그 옆에는 바로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시고, 또한 나에게 위로를 해주고 있는데 내가 자꾸 거부하고 눈을 주변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어리 섞었다는 것을 꺠닫게 되었습니다. 이 도서의 제목 <구안록>을 보자마자 나에게 정말로 곁에 있어 줄 친구이자 동료, 그리고 보호자가 될 하나님을 만나 볼 수 있는 정말로 귀한 시간이 될 꺼 같은 기대감에 일게 되었습니다.

 

"?죄가 심령의 병이라면, 이를 고치는 것은 심령의 힘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



몸이 아프거나 상처가 난다면 자연치유가 되어 건강한 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마련이지만, 생명이 지장을 줄 정도의 상처나 상하게 된다면 자연 치유로는 불가능하여 죽음에 이를 수있음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마음이 병들고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중대한 사항으로 자연스럽게 치유가 되길 기다리는 것은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겠습니다. 이는 치유하기 위해서는 심령의 힘이 절대적으로 도움을 주어야지만 우리의 병든 마음이 치유가 됨을 뜻하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가 내 몸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자들이다.?"



기독교는 애초에 사랑이라는 덕목을 추구하면서 선한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은 혼자서는 할 수있는 일들이 없기에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면서 뭉쳐서 함께 도우면서 살아간다면 그만큼 혼자서 못하는 일들을 해결하고 잘 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래도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헤쳐나가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불완전성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음에 포기하지말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스스로의 변화를 느끼면서 헤쳐나가는 것을 몸소 느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



 인간은 우리가 바라보기에 개미가 엄청나게 작은 존재로 보이듯이 그저 한 우주의 한 작은 존재로 밖에 보이지 않기에 우리는 아직도 엄청나게 많은 부분에 있어서 딱 떨어지는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많은 발전을 이뤘다고 하지만, 그저 우주의 한 작은 존재로 밖에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를 극복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바대로 의롭게 살아가는 것이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도 이 힘든 정욕으로 물든 세상을 이겨나가는 길이라는 것일 깨닫게 됩니다.



무도교로써 그간 자신의 경험과 신념을 확고히 가지고 있었지만, 그동안 자신이 힘들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한 채로 힘겹게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힘들었던 자신이 그 동안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고자 했기에 힘들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그 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들이 그저 허물없었던 일들이었음을 고백하면서 우리가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만 하는 이유들과 동기들을 통해 설득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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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himura Kanzō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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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resentative men of Japan; essays : Uchimura, Kanzo, 1861-1930 : Free Download & Streaming : Internet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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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0

日本人は何を考えてきたのか 第5回「東と西をつなぐ~内村鑑三と新渡戸稲造~」 : 大津留公彦のブログ2

日本人は何を考えてきたのか 第5回「東と西をつなぐ~内村鑑三と新渡戸稲造~」 : 大津留公彦のブログ2



2012年7月 2日 (月)

日本人は何を考えてきたのか 第5回「東と西をつなぐ~内村鑑三と新渡戸稲造~」

日本人は何を考えてきたのか 第5回「東と西をつなぐ~内村鑑三と新渡戸稲造~」 を見た。
札幌農学校で学び、キリスト教に入信した内村鑑三と新渡戸稲造。2人は日本文化を広く西洋に紹介、平和を模索していく。アメリカ人研究者がその軌跡を欧米や韓国に訪ねる。
新渡戸の『武士道』、内村の『代表的日本人』が著された背景をキリスト教世界に飛び込んだパイオニアだからこそ客観的に日本を見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視点から描いた。

内村鑑三は予算の7-8割を投じた日露戦争に反対した。
内村鑑三 非戦論 「麦のかわりに硝煙を食い、稲のかわりにサーベルを獲(か)るであろう」
「余は日露戦争の反対者だけでなく、よは戦争の絶対的反対論者である。戦争は人を殺すことである。人を殺すことは大罪悪である。大罪悪をおかし国家や個人がよくなるはずがない。」
新渡戸稲造は国際連盟事務次長として活躍し平和への貢献をアインシュタインやキューリー夫人にも声をかけ賛同してもらった。
一番びっくりしたのは最後のこの話
内村鑑三は「デンマルク国の話」でエネルギーは太陽の光線にも、海の波濤にも、吹く風にもあるので、これを利用することで小さなデンマークでも十分に国としてやっていけると説いたことであった。
新渡戸稲造やや内村鑑三の読みたいです。
以下つぶやきです。
RT @kiefer0127: 教育テレビでやってる「日本人は何を考えてきたのか」も面白い。今週は新渡戸稲造と内村鑑三。
posted at 22:17:52
RT @TekuradaHazure: 内村鑑三の父上は儒学者だったのかー。それはきついな…そして顔がとても似ている@Eテレ/日本人は何を考えてきたのか⑤
posted at 22:18:03
RT @shoheisato: 日本人は何を考えてきたのか 第5回「東と西をつなぐ~内村鑑三と新渡戸稲造~」 札幌農学校で学び、キリスト教に入信した内村鑑三と新渡戸稲造。2人は日本文化を広く西洋に紹介、平和を模索していく。アメリカ人研究者がその軌跡を欧米や韓国に訪ねる。 http://t.co/M8ZQcTv6
posted at 22:19:12
RT @arg: 見てる。>日本人は何を考えてきたのか 第5回「東と西をつなぐ~内村鑑三と新渡戸稲造~」 http://t.co/zV77mmW3 ちなみに私が大学時代に勉強していたのは、こういうの。思想史ですな。
posted at 22:19:42
RT @nomonomonomonom: 新渡戸稲造と内村鑑三は札幌農学校で同期だったんだぁ!(◎o◎)シラナカッタ
posted at 22:20:07
RT @koto528: へー、内村鑑三と新渡戸稲造って札幌農学校に入っていたんだ。
posted at 22:20:59
RT @chaaa310fkbnb28: 札幌農学校時代の成績は内村鑑三が上だったらしい! けど英語だけは新渡戸稲造がTOPらしい!
posted at 22:21:36
RT @nomerio#ETV 新渡戸稲造 クエーカー
posted at 22:26:17
RT @Hisa_Arakawa: あれ、新渡戸稲造の『武士道』の正義って「righteousness」なんだ、、、「justice」じゃないんだ。
posted at 22:29:50
RT @shonenwho: そしてEテレ「日本人は何を考えてきたのか」の5回目は新渡戸稲造と内村鑑三。近代以降にキリスト教の世界観に触れた日本人。新渡戸の『武士道』、内村の『代表的日本人』が著された背景をキリスト教世界に飛び込んだパイオニアだからこそ客観的に日本を見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視点から。
posted at 22:30:21
RT @delight_bank: とかく物事には明暗の両方面がある。 私は光明の方面から見たい。 そうすれば、自ずから愉快な念が湧いてくる。 by 新渡戸 稲造
posted at 22:30:44
RT @sachicomcom: Eテレを見ながら、内村鑑三と新渡戸稲造…二人の人生をもっと深く知りたくなった。ちょっと見ただけで、なんだか泣きたいような、不思議な気分を味わっている。。
posted at 22:31:04
RT @ishidafine: 新渡戸稲造と内村鑑三をNHKでしている。内村鑑三の息子が日本の精神科の父(東大教授)。
posted at 22:32:07
RT @watanabenaika: <新渡戸稲造『武士道』> 特に大事なものは、義と勇であり、流されずに正義を守る勇気を持つ者こそが、真の武士。http://t.co/nQA63sCQ
posted at 22:43:54
内村鑑三は予算の7-8割を投じた日露戦争に反対した。 #etv
posted at 22:51:51
RT @nomerio: 内村鑑三 非戦論 「麦のかわりに硝煙を食い、稲のかわりにサーベルを獲(か)るであろう」 日清戦争 #ETV
posted at 22:58:10
RT @komakusaryama: 【日本人は何を考えてきたのか】「余は日露戦争の反対者だけでなく、よは戦争の絶対的反対論者である。戦争は人を殺すことである。人を殺すことは大罪悪である。大罪悪をおかし国家や個人がよくなるはずがない。」 #etv
posted at 23:00:08
内村鑑三や新渡戸稲造を読もうよ! RT @natsume_yuuki: 良くある非戦論。こういう問いで反証しよう。太平洋戦争をもし戦わなかったら、今の日本は果たしてあったかな? #etv
posted at 23:02:40
RT @komakusaryama: 【日本人は何を考えてきたのか】内村「小国論。日本の役割は経済でも軍事でもなく、文化と文化をつなくこと」 #etv
posted at 23:03:45
RT @komakusaryama: たぶん「保守」の方がは、「形式的」なんだと思う。。「様式美」というか、内容まで見てないだと思う。。 RT @my_tsurigitsune 所謂、保守と呼ばれる方々は、内村鑑三のことを評価しないであろう。 #etv 
posted at 23:04:24
RT @emico_k: Eテレの、内村鑑三と新渡戸稲造の軌跡が興味深い。そして、彼らが海外から吸収すると同時に、日本文化を丁寧に紹介し続けた事が、文化と理解の融合を生んだ。世界と交流するんだと云いながら、自国の文化一つ語れない人間を、海外エリートは軽蔑するだけだからして。#nhk #Eテレ
posted at 23:06:23
#Eテレ #etv 新渡戸稲造は国際連盟事務次長として活躍し平和への貢献をアインシュタインやキューリー夫人にも声をかけ賛同してもらった。
posted at 23:12:33
#Eテレ #etv 松山でのオフレコ前提の懇談会で「軍閥が一番悪い」と話したのが記事になり軍部に非国民と睨まれる。 アメリカに渡り戦争を阻止するために日本に関する講演会を数多く行った。カナダで71で亡くなった。戦争は起こった。
posted at 23:20:47
RT @stillkakato: 新渡戸稲造のお孫さんが出ています。ご存命です。#NHK #Eテレ
posted at 23:21:03
RT @yukatorawman: 新渡戸稲造のEテレ。戦争に突き進む日本に異議をとなえ、非国民とされる稲造。原発に突き進む今の日本と重なってしまう。
posted at 23:22:02
RT @RealityKicks: 新渡戸稲造、軍閥批判:当時も新聞紙上で炎上があったって事w あんまり今と変わらないんじゃ? #ETV #NHK
posted at 23:23:06
RT @Finsceal_Beo: やはり、教育が大切。新渡戸稲造ってかっこいい。
posted at 23:25:43
RT @maru_eonta: 私の夢のことで私を嘲らないでほしい。夢こそ来たるべき時代のさきがけだからである。 【新渡戸稲造】
posted at 23:26:30
RT @thiougi: 相互理解による世界、新渡戸稲造の理想。女性の教育の重要性。共感するものがある。
posted at 23:26:58
RT @kinntuba61: いかに苦しいことがあってもヤケになるのは短慮の極みである。逆境にある人は常にもう少しだと思って進むがよい。いずれの日か前途に光明を望むことを疑わない / by 新渡戸稲造
posted at 23:27:25
RT @UkeyT: NHKが今、このタイミングで新渡戸稲造と内村鑑三の特集するのは、凄いメッセージ性があると思う。国際関係が相変わらず良くならない現在と、軍国主義に走る昭和の日本をダブらせているんだな。
posted at 23:28:27
RT @LuciusModestos: ユネスコ憲章・・・「心の中に平和のとりでを築かなければならない」。新渡戸稲造のことをEテレで放送中。
posted at 23:28:40
内村鑑三は「デンマルク国の話」でエネルギーは太陽の光線にも、海の波濤にも、吹く風にもあるので、これを利用することで小さなデンマークでも十分に国としてやっていけると説いたことであった。[NHK教育]「東と西をつなぐ~内村鑑三と新渡戸稲造~」]
posted at 23:33:44
 この自然エネルギーの利用は、内村鑑三が「デンマルク国の話」でエネルギーは太陽の光線にも、海の波濤にも、吹く風にもあるので、これを利用することで小さなデンマークでも十分に国としてやっていけると説いたことであった。

「日本社会とクエーカー」について学ぶ会 : 時のしるし会・・・Justice and Peace blog.net.

「日本社会とクエーカー」について学ぶ会 : 時のしるし会・・・Justice and Peace blog.net.



「日本社会とクエーカー」について学ぶ会

e0077133_216245.gif「キリスト者平和ネット」からのメール情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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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社会とクエーカー」について学ぶ会
第1回会合のお知ら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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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時:2005年10月28日(金) 17時30分~19時30分

場所:早稲田奉仕園セミナーハウス 1階 102号室         
  【営団地下鉄東西線 早稲田駅より徒歩5分】         
   東京都新宿区西早稲田2-3-1              

予約・問合せ先(準備の都合上、下記まで必ずご予約下さい):
03-3818-6041 茨木(いばらぎ)

参加費用: 500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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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クエーカー(キリスト友会=Religious Society of Friends)は、17世紀半ばの英国でジョージ・フォックス(1621~1691)により創始されたプロテスタントの一教派ですが、日本には1886年にアメリカ・フイラデルフィア・フレンド婦人外国伝道協会により伝えられました。
 クエーカーの信仰にとって重要なのは、万人に「内なる光」「内なるキリスト」が宿り、神と人との間には何も介在する必要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このことから、形式的な制度を遠ざけた、クエーカー独自の無形式・無牧師の「沈黙の礼拝」が生まれました。こうした「内なる光は全ての人にある」という考え方に基づいて、クエーカーは一切の差別を排除し、非暴力・非戦の平和主義に徹し、良心的兵役拒否でも知られています。
 戦後60年を迎えた今の日本社会は、残念ながら、「平和を望み、平和に備える」社会ではなく、「平和を望むなら戦争に備えよ」とする社会になりつつあります。この「『日本社会とクエーカー』について考える会」は、クエーカー(の存在やその活動・考え方等)について知り学び、それらとの関わりから日本社会を見つめてみようという会です。

 クエーカーに関心がある方、新渡戸稲造に関心がある方、クエーカーの平和主義思想が戦後日本社会にどのように影響を与えたか等に関心がある方には、ぜひご参加頂きたいと思います。また、「平和」をつくる者として共に歩んできた、他のキリスト教派の方々のご参加もお待ちしております。 

美化されすぎている武士道精神(武士道の欠陥): キヴィタス日記

美化されすぎている武士道精神(武士道の欠陥): キヴィタス日記



2014年2月 9日 (日)

美化されすぎている武士道精神(武士道の欠陥)

新渡戸稲造の著書「武士道」によって世界的に有名になったのが日本の武士道精神である。原題は、“Bushido,The Soul of Japan”、副題が「日本の魂」となっている。新渡戸は、自身が家庭で受けた質素で座禅に通じる武士道的な教育がクエーカー教徒(プロテスタントの一宗派)の簡素素朴な生活、瞑想による「内なる光」との対話に通じるということを体感して、自分が受けてきた道徳教育の原点は祖父から受けた武士道であることに気づいたのがきっかけであった。序文に「私が少年時代に学んだ道徳の教えは、学校で教えられたものではなかったから。私は、私の正邪善悪の観念を形成している各種の要素の分析を始めてから、これらの観念を私の鼻腔に吹き込んだものは武士道であることをようやく見出したのである(矢内原忠雄訳)」。
新渡戸は、次のようにいう。「武士道はその表徴たる桜花と同じく、日本の土地に固有の花である。それは古代の徳が乾からびた標本となって、我が国の歴史のさく【月に昔】葉(押し花)集中に保存せられているのではない。それは今なお我々の間における力と美との活ける対象である。・・・・道徳的雰囲気を香らせ、我々をして今なお力強き支配のもとにあると自覚せしめる。それを生みかつ育てた社会状態は消えうせて既に久しい。しかし昔あって今はあらざる遠き星がなお我々の上にその光を投げているように、封建制度の子たる武士道の光はその母たる制度の死にし後にも生き残って、今なお我々の道徳の道を照らしている。(矢内原忠雄訳)。」
ユダヤの民が神から与えられた律法のように、武士道精神は日本人の精神に刷り込まれた歴史的遺産である。自分の生命を投げ打ってでも義と徳に生きようとする精神は、利己的な精神を乗り越える高貴な精神である。
しかし、武士道精神は大きな弱点を持っている。武士道の始まりは、江戸時代の儒教思想に始まるのではない。もともとは、主君に家来が恩賞と引き換えに主君に忠勤することが出発である。典型的な武士道の逸話は、「七生報国」として知られる楠木正成の最期の場面である。
太平記の楠木正成の最期を描いた有名な場面は次のようなものである。
「手の者60余人、六間の客殿に二行に並び居て、念仏十遍ばかり同音に唱へて、一度に腹をぞ切ったりける。正成座上に居つつ、舎弟の正季に向ひて、そもそも最後の一念に依って、善悪の生を引くといへり、九界の間、何か御辺の望みなると問ひければ、正季あらからと打ち笑ひて、七生まで只同じ人間に生まれて、朝敵を滅ぼさばやとこそ存じ候へと申しければ、正成世にうれしげなる気色にて、罪業深き悪念なれども、我も斯様に思ふなり。いざさらば同じく生を替えて、この本懐を達せんと契りて、兄弟とも刺し違へて、同じ枕に伏しにけり。」
湊川の合戦に敗れて追いつめられた正成の一党は、腹を切って自害した。その際、次生にはどの世界に生まれたいかという正成の問いに対して、弟の正季は「七世までただ同じ人間界に生まれて、朝敵を滅ぼしたいものだ」と答える。これに対して正成も、「罪深き悪念」ではあるが、自分もまったく同感だと述べている。
正成一党は、生まれ変わってまでも「罪深き悪念」と知りつつも、忠義に励むという姿勢をとっているのである。主君に忠誠を誓うという姿勢に突出しており、主君が対外的にとった行動については黙している。武士道精神は主君にはつながっているが、絶対善である天には直接はつながっていない。主君が善なる行為をなすときは天とつながり、主君が問題ある行為をなすときは天から離反するという性格を有しているのである。
武士の倫理・道徳として忠義を重んじる儒教思想が江戸時代受容されたのは、それ以前からあった武士道の思想(主君への死すとも恨まぬ献身奉公、身は「恩」のため、「義」のために命をも軽んじるという武士の道義)の影響が大きく、日本独特の儒教精神となった。岡山藩の池田光政候は、儒教を学ぶ中で、「民は天から預かっているものであるから丁重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君主としての心得を書いているが、「君主」、現代でいえば「人の上に立つ人」はこのような姿勢が不可欠である。しかし、君主の姿勢を正した人は名君とされた一部の君主だけで、多くの場合臣下の従属だけが強要された。
日本儒教は、礼を守るという姿勢だけが極端に強調されて国や君主のために死ぬのは当然だという江戸時代の武士道の儒教(武士は君主のためなら自己犠牲をいとわない)とか国粋主義(国のためなら家族を犠牲にすべきだ)という倫理になった。日露戦争時、広瀬中佐は、「七生報国」を最後の言葉にして旅順の閉塞船に上り殉死した。この行為は美化され、第二次世界大戦時軍神として祀られるにいたる。広瀬中佐のように忠義だけが求められる風潮が作られるのである。
最後にもう一度いっておこう。武士道精神は主君にはつながっているが、絶対善である天には直接はつながっていない、と

上代タノー女子高等教育平和運動のパイオニア

mcm-www.jwu.ac.jp/~sogoken/kankojoseimokuji8.html



 上代タノー女子高等教育平和運動のパイオニア-』









まえがき 島田法子
 第一部 上代タノと女子教育者への道                    島田法子 
  
第一章 若き日の上代タノ-出雲の国から日本女子大学校へ
 
 はじめに  p.17
  1 われ故郷を愛す p.17
  2 松江市高等女学校時代-外国との出会い p.23
  3 日本女子大学校時代-英文学とキリスト教受洗 p.29
  4 日本女子大学校の教壇に立つ p.33
  おわりに p.35
  
二章 新渡戸稲造との出会い-新しい世界への歩み  はじめに p.42
  1 新渡戸稲造との出会いとアメリカ留学への道 p.43
  2 ウェルズ女子大学の四年間 p.47
  3 新渡戸稲造と東京女子大学創立 p.51
  4 新渡戸稲造の国際問題研究会と国際連盟事務次長就任 p.53
  5 ミシガン大学とケンブリッジ大学への留学 p.56
  6 世界平和への理解の深まり p.59
  7 新渡戸稲造との別れ p.62
  おわりに p.63
  第三章 アメリカ・イギリスへの留学-教育者としての基礎を築く  はじめに p.67
  1 ウェルズ女子大学への留学 p.68
  2 カリキュラムの変革 p.71
  3 新しい女性像 p.73
  4 日本女子大学校の国際化と姉妹校 p.74
  5 ミシガン大学への留学とバーバー奨学金 p.77
  6 ミシガン大学における研究 p.82
  7 学位より学生、研究より教育の選択 p.84
  8 ケンブリッジ大学留学 p.87
  9 帰国後の上代と日本女子大学校 p.88
  10 『リー・ハント』の出版 p.92
  11 戦火の中での教育者としての上代タノ p.94

  
おわりに p.97

 第二部 上代タノと戦後の日本女子大学時代              中嶌邦
  第一章 師成瀬仁蔵と上代タノ
  1 成瀬仁蔵と日本近代の教育 p.113
  2 上代タノと師成瀬仁蔵との出会い p.116

  第二章 戦後の教育改革と女子大学の成立
  
はじめに p.124
  1 戦後の女性解放と教育 p.125
      戦後の日本と女性
      女子教育政策の変化
  2 戦後の女子高等教育と女子大学の成立 p.127
      戦前の女子高等教育から戦後へ
      女子高等教育機関の活動
      新制女子大学の誕生
  3 学長就任まで p.132
      戦後の上代タノ
      新制日本女子大学の発足と上代

  第三章 日本女子大学学長としての活動
  
はじめに p.137
  
1 学長就任と学内制度の改革 p.137
  
    学長就任
      学園の制度改革
  2 教育改革の取り組み p.141
      女子高等教育をめぐる状況
      学生とともに
  3 創立六〇周年を契機に p.147
      記念式に 
      主な記念事業
  おわりに p.155

 第三部 上代タノと平和運動                        杉森長子

   p.169

  第一章 平和運動のパイオニア、上代タノ-第二次世界大戦前の時期
  はじめに p.173
  1 成瀬仁蔵の理想「世界平和」と女性への期待 p.174
  2 国際問題研究会の創設-新渡戸稲造の成瀬への協力 p.177
  3 「地球世界」の実感-上代タノと「世界平和」への道 p.182
  4 婦人平和協会の結成-上代タノ、女性平和運動への参画 p.186
  5 WILPF国際会長、ジェーン・アダムズと上代タノ p.190
      ジェーン・アダムズの来日
      上代タノとジェーン・アダムズ-初めての対面
      ジェーン・アダムズの訪日効果-WILPFへの加盟
  6 WILPF第五回国際総会と上代タノ p.200
  7 婦人平和協会の活動展開 p.209
      難民、避難民支援活動の展開
      軍縮書名運動の展開
  8 満州事変と上代タノの決断-初めての試練 p.216
  おわりに p.222

  第二章 国際理解を求めて、上代タノの活躍-第二次世界大戦中の時期

  はじめに p.231
  1 上代タノと中国の人々 p.232
  2 盧溝橋事件への対峙 p.234
  3 「時局下、吾等何をなすべきか」-上代タノの英知 p.238
  4 「コンピエーニュの森」-『婦人平和協会会報』最終号巻頭言 p.241
  5 上代タノの回顧「戦時中の婦人平和協会」-ガントレット恒会長と河井道会長の勇気 p.243
  6 戦中期における平和主義者、上代タノの勇気と決断 p245
  おわりに p.248

  第三章 平和運動の新たな地平を拓く上代タノー第二次世界大戦後の時期
  はじめに p.251
  1 上代タノと婦人平和協会の再建 p.252
      「日本婦人平和協会」への改名
     WILPF会員の友情
  2 日本婦人平和協会会長、上代タノの抱負 p.256
  3 戦後の新たな活動展開 p.260
      全面講和を求めて
      平和憲法護持と再軍備回避の努力 p.262
      WILPFへの復帰 p.267
  4 WILPF第一三回国際総会と上代タノ p.269
  5 原水爆禁止運動への参画 p.273
      原水爆実験禁止署名運動
      原水爆禁止世界大会への参画
  6 世界平和アピール七人委員会の結成と上代タノ p.283
  7 WILPF第二〇回国際総会と上代タノ p.286
  8 人権主義とクエーカー主義-上代タノの平和運動を支えた基本思想 p.292
  おわりに p.298

  結語 p.304

  上代タノ略年譜 p.316
  あとがき p.323

机の上の空 大沼安史の個人新聞: 〔いんさいど世界〕 「平和なお盆」をよみがえらせ、「平和な日本」をうみだしたアメリカのボートン博士は、戦前、松島の灯篭流しを観ていた!

机の上の空 大沼安史の個人新聞: 〔いんさいど世界〕 「平和なお盆」をよみがえらせ、「平和な日本」をうみだしたアメリカのボートン博士は、戦前、松島の灯篭流しを観ていた!



2010-08-13

〔いんさいど世界〕 「平和なお盆」をよみがえらせ、「平和な日本」をうみだしたアメリカのボートン博士は、戦前、松島の灯篭流しを観ていた! 

 1945年(昭和20年)8月の「お盆」は、灯火管制の下、迎え火も焚けない状況で、盆の入りを迎えたはずだ。
 戦死者は「軍神・英霊」として、帝都(東京)の「靖国」に収用され、遺族たちは愛する死者たちを親しき「霊」として迎え入れることを憚った。
 けれど、お盆の中日、「15日」の「終戦」が全てを変えた。
 日本の民衆はようやく戻った平和の中で、昔の平和なお盆を思い出し、慌しく迎えれた死者たちの霊と親しみながら、その死を(「喜ぶ」のではなく)悲しみ、平和な日常を噛みしめる中で、死者たちを送り返したはずだ。
 戦争が終結した「8月」は久しぶりに日本にお盆がよみがえった夏だった。
 * * *
  米国のジャパノロジスト(日本研究家)、ヒュー・ボートン(Hugh Borton)博士〔1902~1995年〕をご存知だろうか?
 あのライシャワー博士の友人で、同じ時期、日本研究を始めた、草分けの学者である。
 やがて米国務省の日本部長などの立場で、戦争終結に、戦後日本の設計に主導的な役割を果たすことになるボートンさんがエリザベス夫人と2人の子どもを連れ、東大大学院(文学部)留学のため、日本を訪れたのは、日本敗戦の10年前、1935年(昭和10年)2月のことだった。
 1928年(昭和3年)に初来日し、3年ほど東京で暮らして以来、2度目の来日。
 5月の東大への入学手続きを済ませたボートンさんが蒸し暑い東京を逃れ、家族とともにひと夏を過ごしたのは、宮城県の景勝の地、松島(湾)を一望の下に見下ろす「高山外国人避暑地」だった。
 そこでボートンさんは初めて、松島湾の灯篭流しを観る。
 送り盆の「満月の夜」、「……しばらく地上の家族と過ごしてから天国に戻っていく先祖の霊を表す、明るい蝋燭をのせた小さな舟の大群が松島湾に浮かぶ灯篭流しを、沈黙のうちに見物した」(自伝『戦後日本の設計者 ボートン回想録』より)のだ。
 平和な日本の――松島の盆の灯篭流し。
 * * *
 平和な日本のお盆の夏を松島で過ごしたボートンさん(当時、23歳)は、「すべての人の中に神はいる」と信じる、絶対平和主義のクエーカー教徒(フレンド)だった。奥さんのエリザベスさんもまたクエーカーの信者。
 ボートン夫妻の1928年の初来日も、実はアメリカ・フレンド奉仕団からの派遣。ボートンさんは奉仕団の活動の合間に、東京日本語学校で日本語を勉強、奥さんのエリザベスさんは三田の普連土学園で教壇に立っていた。
 2度目の来日で東大で2年間、勉強し、最初の来日を含め、通算5年の日本滞在を終えたボートンさんは、「徳川時代の農民一揆の研究」でオランダのライデン大学から博士号を取得、米コロンビア大学で研究者生活に入ることになるが、時代は暗転し、世界は一気に「戦争の時代」へと進んで行く。
 クエーカー教徒として「良心的兵役拒否者」の立場を貫くボートンさんに待っていたのは、米国務省で対日政策を立案・勧告する調査アナリストの任務だった。
 * * *
 ルーズベルト・トルーマン政権の国務省で、ボートンさんは実は、大変なことをした!
 日本で暮らし、日本を愛していたボートン博士は、平和を愛するクエーカー教徒としての良心に従い、国務省の日本部長、極東局局長特別補佐などの立場で、戦争を早期に終結させ、平和憲法など戦後日本をつくりあがる仕事に心血を注いだのだ。
 その詳細は、博士の自伝、『戦後日本の設計者 ボートン回想録』(五百旗頭真監修・五味俊樹訳、朝日新聞社)や、五百旗頭真著『米国の日本占領政策  戦後日本の設計図』(上下2巻、中央公論社)に詳しいので、ここでは簡単に紹介するに留めるが、
 戦争早期終結では、「戦争を早期に終結するためには大統領ないし他の政府高官から日本の将来の処遇に関する声明を発表し、無条件降伏は日本民族の絶滅や隷属化を意味するものではないと日本国民に保証すべきである」との「覚書」をまとめ、国務省、およびトルーマン政権内の説得につとめ、
 戦後日本の構想では、後にマッカーサーが、立憲君主制・平和主義を柱とした新憲法の草案づくりをする際、ガイドラインにすることになる、「日本統治制度の改革」なる報告書(SWVCC228)をまとめた。
 そう、日本が世界に誇る「平和憲法」の産みの親は、知日家で絶対平和主義のクエーカー教徒、ボートン博士だった!
 * * *
 早期戦争終結では、残念でたまらない、こんな出来事があった。1945年5月29日のこと、ワシントンの陸軍省のスティムソン長官の執務室で、重要な集まりがあった。
 ボートン博士の勧告に従い、2日後の戦没者追悼記念日(5月31日)に、トルーマン大統領が「対日声明」を発表することを承認する重要会議だった。
 「声明」の草案は「無条件降伏は日本の全ての軍隊の降伏と武装放棄を意味するが、必ずしも天皇と皇室の排除を意味するものではない」というもの。
 会議は、このきわめて重要な「声明」草案をいったんは了承したものの……最後の最後に、マーシャル陸軍参謀総長が「時期尚早」を言い出し、見送られることになった。
 なぜ、マーシャル参謀総長は「声明」つぶしに動いたか?
 たぶん、そこには、日本に早期降伏されてはならない事情があったからだ。
 その事情とは、もちろん、その時点ですでに最終段階にあった、あの「マンハッタン計画」の原爆開発である。
 この時、トルーマンがボートン博士の勧告に従い、「対日声明」を実際に発していたなら、ヒロシマ・ナガサキの悲劇は回避できたかも知れないのに……。
 * * *
 ボートン博士は1948年に国務省を辞し、コロンビア大学の教授を経て、1957年、母校のクエーカーの大学、フィラデルフィア郊外にある、バヴァフォード大学の学長に就任する
 ボートン博士はハヴァフォードでもベトナム反戦運動の学生を守り抜くなど、平和主義を貫き通すが、ここで注目しておかねばならないことは、ボートン博士らクエーカー(フレンド)の人々と日本との、「平和」で結ばれた絆である。
 ボートンさんが初来日した際、東京で食事に呼ばれ、励ましを受けた新渡戸稲造博士のメアリー夫人は、クエーカー教徒。
 ボートン博士がハヴァフォード大学の学長として名誉博士号を授与することになる、あの、現天皇が皇太子だった頃、英語教育に力を注いだヴァイニング夫人もクエーカー教徒。
 帰国したヴァイニング夫人のあとを受け、皇太子の英語教師となったのアスター・B・ローズさん(普連土学園園長)もクエーカー教徒。
 立憲君主制のデモクラシーとして再出発した戦後日本の平和の流れの中で、クエーカーの平和主義が実質的に大きな役割を果たして来たことは、忘れてはならない歴史的な事実である。
 * * *
 さて、この17日は、恒例の「松島灯籠流し花火大会」。
 75年前、若き日のボートン博士が七ヶ浜の高山避暑地で観た、送り盆の行事である。
 そしてことしは、くしくも博士が83歳でお亡くなりになって15年(命日は8月2日)……。日本式に言えば16回忌だ。
 もしかしたら博士の霊も、松島を懐かしがって、高山避暑地あたりに、そろそろもう、いらしているのかも知れない。
 博士のクエーカーの信仰に敬意を表しながら、わたしたちは日本人として作法で、博士のみ霊をお迎えし、お送りすることで、戦後の平和・日本を生み出してくれた博士の功績に感謝することにしよう。   
〔参考〕
 ヒュー・ボートン博士
  Wiki ⇒ http://en.wikipedia.org/wiki/Hugh_Borton
 (このニューヨーク・タイムズ記事を見てもわかる通り、ボートン博士の対日政策づくりにおける重要な役割は、米国でもあまり知られていない。ボートン博士の功績を発掘し、自伝の執筆を励ましたのは、東大の五百旗頭真教授である)
  英文原書 Spanning Japan's Modern Century: The Memoirs of Hugh Borton
  アマゾン(カバーの写真にボートンさんの写真があしらわれています) ⇒ http://www.amazon.co.jp/Spanning-Japans-Modern-Century-Memoirs/dp/073910392X/ref=sr_1_1?ie=UTF8&s=english-books&qid=1281653082&sr=8-1
 「米国の日本占領政策 戦後日本の設計図」(上下2巻、五百旗頭真著、中央公論) 同 
 ⇒ http://www.library.pref.miyagi.jp/wo/opc/srh_detail
   http://www.library.pref.miyagi.jp/wo/opc/srh_detail
 松島灯籠流し花火大会  ⇒ http://www.jalan.net/jalan/doc/theme/hanabi/04_hanabi20.html
 エスター・B・ローズさん〔1893~1979年〕
  写真と言葉 ⇒ http://www.friends.ac.jp/our/our.html
 クエーカー(フレンド)について ⇒ http://www2.gol.com/users/quakers/who_areJ.htm
 フレンド・オブ・ジャパンの紹介 ⇒ http://www2.gol.com/users/quakers/borton.htm
 普連土学園について ⇒ http://www.friends.ac.jp/our/our.html
Posted by 大沼安史 at 08:11 午後 1.いんさいど世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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キリスト友会 東京月会 平和の願い

キリスト友会 東京月会



戦後70年にあたり

平和の願い


 かつて私たちの街は戦火に焼かれ、原爆が落とされ、多くの家族を失いました。戦地に行った父や兄は帰ってきませんでした。戦争が終わったとき、だれもが「もう二度と戦争は嫌だ」という強い思いをもって、平和国家として歩むことを決意して70年が過ぎました。その間、隣国の朝鮮半島をはじめ、ベトナムや中東、アフリカでは絶え間なく紛争や戦争があり、人々は住む場所を追われて難民となり、ミサイルなど高性能の兵器によって兵士だけでなく、子どもや女性を含む多くの人が犠牲になりました。
 一方、私たちは武器ではなく、自動車を作り、ダムを造り、新幹線を走らせ、産業を発展させて、世界の国々との貿易によって豊かな国になりました。
 日本で戦争を記憶している人(75歳以上)はわずか12.5%になりました。今私たちが映画やテレビで見る戦争は、勇ましく戦う戦闘機や、軍人を美化したドラマ、そして遠い国で起こっている紛争のニュースです。自ら銃を持って戦った人はごくわずかになりました。私たちの多くは本当の戦争を知りません。血の臭いも、ウジがわいた死体も、飢えも、弾の音も。しかし、明日からは私たちの子や孫が、あるいは自身が体験することになるかもしれません。


戦争体験のない政治家たちによって、国民の8割が反対しているにもかかわらず、日本は戦争をする国に変わろうとしています。国際貢献とは、ともに銃をとって戦うことでしょうか。国際ボランティア活動をする日本人は、戦わない民族として紛争地でも信頼されてきました。でも、これからはテロの標的になるかもしれません。
私たちキリスト友会は、かつて日本が朝鮮半島や中国、東南アジアで行ったことを忘れてはいません。植民地とした韓国では、名前や言葉を奪い、女性の尊厳を傷つけました。日本軍が侵略した中国や東南アジアでは、残虐な行為を行いました。
 私たちの国から再び戦争で死ぬ人を出してはいけません。私たちの家族を他国の人に残虐なことをする加害者にしてはいけません。


 わたしたちは安全保障関連法案に強く反対します。


2015年8月16日
キリスト友会東京月会

今なぜ新渡戸稲造の武士道なのか | 神田嘉延 研究室

今なぜ新渡戸稲造の武士道なのか | 神田嘉延 研究室

今なぜ新渡戸稲造の武士道なのか

 今なぜ新渡戸稲造の武士道なのか
神田 嘉延
        
 実践的な倫理体系の武士道
 新渡戸は、朱子学的な儒学思想からではなく、陽明学の知行合一の実践的な個人の人格の成長、倫理の形成を武士道の基本原理として重視した。この意味からの西郷隆盛を典型的な武士とみたのである。新渡戸が西郷隆盛を典型的な武士とみたのは興味あることである。西郷は明治維新で活躍し、新政厚生徳の旗を掲げた西南戦争で命を落とした。新渡戸の武士道の理解をしていくうえで、西郷の生き方をみていくことは大切なことである。
 西南戦争では大分からも多くの旧武士が参加している。その典型が、福沢諭吉のふるさとの中津からは、百余名が参戦した増田宋太郎のつくった「共憂社」の存在も大分から武士道を考えていくうえで、必要なことである。共憂社のメンバーを中心にした中津隊は、西郷へと進軍した。この決起に呼応して、県北一帯に約2万人参加の農民一揆が起きる。福沢諭吉は西南戦争の鎮定後に「丁丑公論」で政府の専制をほうっておけば、際限あることなしとして、これを防ぐ術は、抵抗する一法あるのみと、西南戦争に起ち上がった西郷を抵抗の精神と書いたが、厳しい言論統制のなかで、公表されたのは死後である。
 新渡戸の「武士道」は、日本人のもっている精神を国際的に紹介するためであった。このために、キリスト教との比較を含めて欧米人にも理解できるように書かれたものである。新渡戸はアメリカ滞在中に 武士道を英語で書いて出版した。

 新渡戸稲造とはどんな人であったのか。
 陸奥国岩手郡(現在の岩手県盛岡市)に、盛岡藩士新渡戸十次郎の三男として生まれる。13歳になった頃、できたばかりの東京英語学校(後の東京大学)に入学する。そして、その後に、札幌農学校(後の北海道大学)の二期生として入学する
 札幌農学校で教鞭をとっていたクラーク博士の影響のあった4人組と共に入学する。四人組みは、岩崎、内村、宮部であり、東京の英語学校以来の親友である。岩崎は鹿児島大学の前身のひとつになった第7高等学校造士館の初代の館長である。
 新渡戸は札幌農学校でキリスト教の洗礼をうける。農学校卒業後、級友達とともに道庁に就職した。そこで、畑の作物を食い散らすイナゴの大群を退治するために各地の農村を駆け巡る。学問を志して東京帝国大学に進学する。しかし当時の農学校に比べ、東大の研究レベルの低さに失望して退学する。新渡戸は、キリスト教のなかでもクエーカー教徒であった。クエーカーの証言は、平和、男女・民族の平等、質素な生活、個人が誠実であり続けることである。
 1884年(明治17年)、「太平洋の架け橋」になりたいとアメリカに私費留学し、ジョンズ・ホプキンス大学に入学する。この頃に新渡戸稲造は伝統的なキリスト教信仰に懐疑的になっており、クエーカー派の集会に通い始め正式に会員となった。ジョンズ・ホプキンス大学を中途退学して官費でドイツへ留学する。ボン大学などで聴講した後、ハレ大学(現マルティン・ルター大学ハレ・ヴィッテンベルク)より農業経済学の博士号を得る。
 クェーカーたちとの親交を通してメアリー・エルキントンと出会い、1891年(明治24)に、国際結婚をする。日本に帰国して、札幌農学校教授に任命される。
 新渡戸稲造は世界平和のために尽力した人であり、地域振興の発展のために実践的に農学を研究した学者でもあり、青年達に未来を託す教育者でもあった。
 新渡戸は、台湾総督府の民政長官となった同郷の後藤新平より1899年(明治32年)から2年越しの招聘を受け、1901年(明治34年)に農学校を辞職して、台湾総督府の技師に任命される。台湾における糖業発展の基礎を築くことに貢献した。
 1909年(明治42年)、新渡戸の音頭取りで、「郷土会」が発足した。自主的に自由な立場から各地の郷土の制度、慣習、民間伝承などの事象を研究し調査することを狙いとしたものである。
 1911年、1932年と、アメリカと日本の関係悪化のときに、日本政府から正式に派遣される。1919年から日本政府代表として、国際連盟の仕事に7年間就く。1933年2月に日本は国際連盟を脱退する。新渡戸は、国際人として国際連盟事務次長を勤める。1920年(大正9年)の国際連盟設立に際して、教育者で『武士道』の著者として国際的に高名な新渡戸が事務次長に選ばれる。新渡戸は当時、東京帝国大学経済学部で植民政策を担当していたが辞職した。新渡戸の国際連盟の仕事で尽力したことに、国際連盟の規約に人種的差別撤廃提案をして過半数の支持を集めた。しかし、議長を務めたアメリカのウィルソン大統領の意向により否決されている。
 太平洋問題理事長として渡米して、アメリカの各地で講演し、両国の親善に尽くす。しかし、日本政府は国際連盟の脱退により、国際的孤立をする。新渡戸稲造は体調がすぐれないなかで、国際連盟脱退の年、8月にカナダで平和の望みを捨てず日本側代表として演説する。1ケ月後病に倒れてカナダのビクトリアで死亡(71歳)する。
 教育者・社会運動家としての新渡戸稲造の側面は大きい。札幌農学校、第1高等学校、東京大学、京都大学で教授、校長として教育にあたる。札幌農学校では、学校教育を受けられない青年を対象に勤労者の夜間学校を札幌の豊平の貧困地帯につくる。
 東京女子大学の初代の学長として、女子教育に尽力する。郷里岩手の産業組合の指導を引き受ける。また、加川豊彦とともに、医療協同組合運動を若い医師とともにつくる。日本を滅ぼすのは軍閥ということで、軍国主義に警戒する。

 新渡戸稲造の武士道の内容
 義とはなにかー武士道の光
り輝く最高の支柱

 義は勇と並ぶ武士道の双生児である。「義」は、武士道の光輝く最高の支柱である。正義の道理は絶対的な命令である。ここで、正義とはなにかということを深く考えることが必要である。武士が重んじることは節義なりというが、節義は人の体でいえば骨のようなもので、骨なければ首も正しく上にあることができず、手もとることもできず足を立つこともできない。学問ありても節義なければ世にたつことができない。
 義とは人が失われた楽園を再び手中にするためのものである。悪辣な陰謀が軍事的策略として、まっかな嘘が謀略としてまかりとっていた時代に、正義を考えた徳である。それは、素直で、正直な、男らしい徳はもっとも光り輝く宝であり、行動することによって、まさにその精神は認められたのである。
 正義とは人間としてのあたりまえの嘘をつかない、人を騙さない、弱い者をいじめないという人間としての温かい慈愛の精神をもって生きる道である。
 現代は、国際化という名のもとに世界的規模で弱肉強食の競争社会が蔓延しているなかで、人を騙したり、嘘をついたり、相手を蹴落とすために謀略を施したりする社会的風潮が強くなっている。現実は、残酷に人を平気でいためつけたりする世相がみえるなかで、人間としてのあたりまえの節義をもって生きることがどんなに大切な時代であるのか。この時代に生きるなかで日本人としての正義のあり方を考えるうえで武士道から学ぶことは大きい。子どものなかさえもいじめの問題が深刻になり、自殺者がでるほどである。節義を重んじる、正義で生きるという言葉は、教育の世界にとっても重要である。現代の青少年教育のなかで、正義ということは、「ださい」「あほらしい」「くそまじめ」と思われることで、なかなか真剣に考える機会が失われている。これは、現代の世相のなかで、教育者自身が、道徳退廃に犯されている側面をみたときに、若者が発する言葉である。

     礼儀作法は、ある一定の結果を達成するための、もっとも適切な方法を長い年月にわたって実験してきたことの結果である
 何かなすべきことがあるとすれば、それをなすための最善のやり方がきっと存在するはずである。そして最善の方法とは、一番無駄がなく、もっとも奥ゆかしいものである。礼儀を守るための道徳的な訓練が必要である。優雅な作法は、力を内に蓄えさせるというのが新渡戸の主張である。
 奥ゆかしさは、無駄を省いたやり方であるとすれば、優雅な作法を絶えず実践することは余分な力を内に蓄えるにちがいない。立派な作法は、休止状態にある力を意味する。礼法を通じてほんとうに高い精神的な境地に達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あろうかと新渡戸は問い、精神的修養のひとつの大成として、茶の湯の作法をあげる。
 茶の湯の基本である心の静けさ、感情の穏やかさ、落ち着いた立ち振る舞いは、まっとうな思考と率直な感情の第一条件である。礼儀は慈愛と謙遜という動機から生じ、他人の感情に対する優しい気持ちによってものごとを行うので、いつも優美な感受性として表れる。礼の必要条とは、泣いている人とともに泣き、喜びにある人とともに喜ぶことである。このような教訓的必要条件はそれが日常生活の細々とした点に及ぶとき、人の注意をあまりひかない繊細な行為の中に表れる。新渡戸は、以上のように、礼儀は優美な感受性であり、慈愛と謙遜の他人にたいする優しい感情によって行うものであると。
 
  名誉とは、苦痛と試練に耐えうるために存在する
誉という感覚は個人の尊厳とあざやかな価値の意識を含んでいる。

 名誉は武士階級の義務と特権を重んじるように幼児のときから教え込まれたと新渡戸はみる。過ちを犯した少年の振る舞いに「人にわらわれるぞ」「体面を汚すなよ」「恥ずかしくないのか」と言われる。羞恥心は人類の道徳意識の出発点であると新渡戸稲造は考える。名誉の繊細な掟がおちいりがちな馬鹿げた恥を知るという感情、病的な行き過ぎの感情が起きるが、その克服には、寛容と忍耐を説くことによってはっきりと相殺される。
徳川家康の言葉である「人の一生は重荷を負うて行くが如し。急ぐべからず。堪忍は無事長久の基。・・・・。己を責めて人を責むるばからず」と新渡戸は紹介し、この言葉の大切をのべている。さらに、西郷南州の敬天愛人の言葉を引用している。
 名誉はこの世で最高の善であるというのが新渡戸の主張である。名誉は境遇から生じるものではなく、自己の役割をまっとうに努めることにあるのだ。若者に追求しなければならない目標は冨や知識ではなく、名誉である。多くの若者が敷居を超えるとき、世に出て名を成すまでは二度とまたがないと自分自身に誓ったものである。多くの母親は息子達が錦を飾るということばどおりに故郷に帰るまで再会を拒んだ。
 恥となることを避け、名を勝ち取るためにサムライの息子はいかなる貧困も甘受し、肉体的、あるいは精神的苦痛のもとに厳しい試練に耐えたのである。彼らは、若いときに勝ち得た名誉は年がなつにつれて大きく成長することを知っていた。新渡戸は。以上のように名誉を勝ち取っていくことは、若者成長にとって大切なことであるとするのである。
 名誉という言葉は、広く若者が誇りをもつということにみてほしい。名誉の意味を権力志向と結び絶対的な権威による名誉心ではない。若者が成長していくうえで、自己の社会的役割、自己のもっている個性を社会にみつめていくことであり、それは、自我の形成においても大切な課題である。
 JUGEMテーマ:学問・学校

教員紹介(中野 泰治)|教育・研究|同志社大学 神学部/神学研究科

教員紹介(中野 泰治)|教育・研究|同志社大学 神学部/神学研究科

中野 泰治(Nakano Yasuharu)<准教授1973年、淡路島生まれ。同志社大学神学部卒業、同大学院神学研究科博士前期課程修了、バーミンガム大学にてPhDを取得。専門は近現代の英米のキリスト教史、およびクエーカー(フレンド派)の歴史・思想研究。17世紀半ばから現代までのクエーカー神学における「自己」概念の変遷を辿り、20世紀以来の自由主義クエーカーの思想的特性を分析。また現在は、英米を中心とする英語圏のキリスト教における自由主義の歴史的発展と現状、その可能性と限界について「自己」と「共同体」という視点から研究している。論文には、「クエーカーの普遍贖罪論における自由意志の問題―R. バークレーのApology(『弁明』)を中心に―」(『基督教研究』、2005年)、’Elizabeth Bathurst’s Soteriology and a List of Corrections in Several Editions of Her Works’, Quaker Studies, 2008、「クエーカー研究における新ヘーゲル主義的前提について―self概念を巡るBarclay神学の評価―」(『ピューリタニズム研究』、2012年)などがある。


CiNii 論文 -  現代クエーカーの平和思想とその課題

CiNii 論文 -  現代クエーカーの平和思想とその課題



現代クエーカーの平和思想とその課題

Modern Quaker Pacifism and its Problems

中野 泰治



ナカノ ヤスハル

Nakano Yasuh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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抄録



講演(Lecture)本講演では、自由主義神学の影響下にある現代クエーカーの平和思想の特徴を明らかにし、ラインホールド・ニーバーが厳しく批判した平和を巡る神学的な問題点(それは依然としてクエーカーの平和主義者たちが陥っている問題点でもある)について分析する。自由主義クエーカーは、神の働きかけとしての「内なる光」を人間の理性・意識・良心の働きと同一視し、人間の本性を神的なもの、無垢なものと考えることで、神と人間の緊張関係を弱め、人間存在の限界に関する深い洞察を見失ってしまった。結果として、クエーカーの平和主義は、異質性、差異性を前提とする自己-他者関係を単なる計算可能性、操作可能性の領域へと還元してしまい、平和主義の名の下に非暴力を力として利用する(集団)心理学的ストラテジーになってしまっている状況がある。



The aim of this public lecture is to clarify the characteristics of modern Quaker pacifism under the influence of Liberalism and to analyze its theological positions that Reinhold Niebuhr harshly criticized, and which some present-day Quaker pacifists still hold. What I show in the lecture is that liberal Quakers have considered human nature to be divine and innocent, breaking the tension between God and man and ignoring the deep dimensions of human existential limitations. Furthermore, their pacifist stance ends in returning the unbridgeable gap between oneself and others to the mere realm of calculability or controllability. Consequently, Quaker pacifism becomes nothing more than a (group-) psychological strategy to violently use nonviolence.

[ 広井勇&八田與一 ] ボーイズ・ビー・アンビシャ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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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年10月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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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書き(第一集二刷にあたって)
 二刷にあたって、○○所長と○○大学名誉教授に感謝します。第一集の二刷はお二人の励ましと支援により刊行できました。
本集の初版には「第一集」の表示はありません。当初「シリーズ」の構想はなく、札幌農学校第二期生、宮部金吾・内村鑑三・新渡戸稲造・広井勇の四人の交流と成長を手紙や日記など史料で明らかにするため刊行しました。続編「米欧留学篇」を作成し、○○所長に差し上げたところ「続編を期待します」とコメントを頂き、始めてシリーズ化を意識しました。そこで新渡戸稲造の「留学談」「帰雁の蘆」を収録したものを「第三集」として刊行し、「広井勇と青山士」(第四集)、「内村鑑三神と共なる闘い」(第五集)と刊行しました。本シリーズには一般に入手困難または世に知られていない資料を収録しています。第一集に収録の「廣井勇君之小伝」は「札幌同窓会第五十回」(昭和三年十二月)に収録され、「報告別刷」が北海道立図書館に収蔵されています。道立図書館から資料を入手し載録しましたが、第一集作成当時その後半は省略しました。二〇一六年始め○○所長が○○先生に第四集「広井勇と青山士」を渡され、○○先生は廣井博士を尊敬され、広井博士と青山技師の功績を「紳士の工学」として讃えた「第四集」を評価していただき、先生の講義でテキストとして使って頂きました。感謝します。広井博士と青木技師の功績を世に広めたいという思いから第四集「広井勇と青山士」は生れました。そこで第一集二刷を刊行するにあたって「廣井勇君之小伝」について全文を収録した次第です。
二〇一六年四月一五日、○○センターにおいて、お二人の先生と懇談しました。その折、○○先生から「青山技師に注目されたのは、八田與一からですか」と質問を受けました。「内村鑑三からです。内村は『代表的日本人』で、二宮尊徳を取り上げ、農業聖人として世界に紹介し、『後世への最大遺物』においても「報徳記」はキリスト教の『バイブル』を読むような考えがすると評価しています。明治以降、二宮尊徳を正しく理解し、世界に広めたのは内村鑑三です。第一集の資料編冒頭に内村の『予が見たる二宮尊徳翁』を収録したのはこのためです。その後、台湾製糖株式会社初代社長鈴木藤三郎を調べるなかで、台湾の烏山頭ダムを建設した八田與一を知り、八田の恩師が札幌農学校出身の広井博士で、八田はパナマ運河建設に携わった青山士技師を尊敬していたことを知りました」と答えました。第四集は当初、広井勇を主題として作成しました。鈴木藤三郎の曽孫○○氏に序文をお願いしたところ「余談:パナマ運河建設時の、唯一の日本人技師、青山士も廣井勇門下です」と青山士についてコメントをいただきました。そこで「余談 青山士」として関連資料を整理し、登載したところ、全体の三分の一を青山士が占めたため、第四集の副題を「紳士の工学の系譜」としました。青山技師は荒川放水路の建設、信濃川大河津分水路の改修工事で功績があるだけでなく、土木学会の「土木技術者の信条および実践要綱」に「人類の福祉増進に貢献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規定しました。また大河津分水堰の記念碑には「人類ノ為メ國ノ為メ」と刻んであります。そのノーブル(高貴)な精神は広井博士、ひいては札幌農学校精神に由来します。
「ボーイズ・ビー・アンビシャス」を作成した目的は、第一集表紙に掲げた「いかにしてボーイズ・ビー・アンビシャスは現実化されたのか」と「日本の近代化合理化の一源流札幌農学校精神」を解明するためです。第一集の表紙には札幌農学校の生徒時代の宮部金吾・内村鑑三・新渡戸稲造・広井勇の写真を載せました。また裏表紙には五〇年後のそれぞれ思想・教育・学問の世界で「代表的日本人」となった四人の写真を掲げました。彼らはどのようにしてボーイズ・ビー・アンビシャスを現実化できたのかという本シリーズのテーマを表したものです。
マックス・ウェーバーは『プロテスタンティズムの倫理と資本主義の精神』において、近代資本主義の精神は禁欲的プロテスタンティズムの倫理から生れたものであると論証し、それは西欧特有の現象であるとしました。しかし、「プロテスタンティズムの倫理」はクラーク先生を通じて札幌農学校に直接に伝わり、内村鑑三や新渡戸稲造ら札幌農学校出身者によって、日本全国に「ボーイズ・ビー・アンビシャス」と「ビー・ジェントルマン」が広まりした。工学の世界でも「紳士の工学」は継承されました。「札幌農学校精神」は日本の近代化合理化の一源流であるとともに、「人類のため」というノーブル(高貴)な精神を日本にもたらしました。そして戦後日本における民主化の基盤ともなりました。
「ボーイズ・ビー・アンビシャス」とは、高いビジョンを懐き、その実現のため努力し続けることをいいます。内村鑑三は北海道大学における講演で、「エマソンの言葉に'Hitch your wheels to the star' (なんじの車を星につなげ)というのがあるが、これは「望みを高くいだけ」ということで、クラーク先生が「ボーイズ・ビー・アンビシャス」と平易に言ったことを詩的に言い表したのであって、全く同精神に出ている」と説明しました。「諸君よ、諸君もまた今の時代に諸君の車を星につなぐべきである」「私はクラーク先生に代わって、もう一度、諸君に向かって叫ぶ・・・ボーイズ・ビー・アンビシャス!」(一九二三年一月『聖書之研究』)
「ビー・ジェントルマン」は、自らを常にノーブル(高貴)たるように律し続けるところにあります。
 「ボーイズ・ビー・アンビシャス」「ビー・ジェントルマン」という札幌農学校精神が、後の世代に継承されることを願って本集を刊行します。 
平成二八年十月○○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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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終更新日  2016年10月18日 01時09分54秒 



ボーイズ・ビー・アンビシャス第一集 目次
プロローグ                     2
第1編 コラム Ⅰ クラーク精神
1 クラークのBoys be ambitiousの現実化の秘密   4
2 いかにしてピューリタニズムは札幌に伝わりしか  6
3 クラーク先生 2つのB             8
4 佐藤昌介「クラーク先生を語る」         10
5 「イエスを信ずる者の契約」と二期生の信仰    12
6 札幌農学校の「イエスを信ずる者」の3つの特徴  14
7 クラークの手紙-札幌農学校生徒との往復書簡-1  16
8 札幌農学校の功労者佐藤昌介と新渡戸稲造     18
9 クラークの手紙-札幌農学校生徒との往復書簡-2 20
10 内村鑑三「クラーク先生を語る」         22
11 なぜ、第三期生に「信ずる者」は出なかったのか? 24
12 誓約書(pledge)と契約(Covenant)の由来    26
13 「予定の教義」と札幌農学校の精神        28
14 札幌農学校の教育は欧米社会の水準以上だった   30
Ⅱ札幌三人組(宮部・内村・新渡戸)と広井勇(米国留学まで)
1 新渡戸稲造の母の手紙 と 母の死        32
2 新渡戸稲造とカーライルのサーター・レザータス 34
3 宮部金吾による札幌農学校の同級生の思い出 36
4 クラーク先生のピューリタニズムとは何か 38
5 二期生それぞれの親・兄弟へのキリスト教伝道 40
6 新渡戸と内村のそれぞれに対する観察評価 42
7 「札幌独立教会」誕生 独立の叫びが挙った 44
8 「札幌独立教会」と内村の札幌での日々 46
9 自然科学者、偉大な文学者としての内村鑑三 48
10 内村鑑三の文章と新渡戸・宮部の往復書簡 50
11 内村鑑三の演説「空の鳥、野の百合」 52
12 禁酒の誓約と「聖霊に満たされた絶対的禁酒」 54
13 広井勇の手紙とジェントルマンの工学の創造 56
14 札幌三人組の偕楽園の誓いとそのambitious 58
15 広井に続き三人組も渡米し、彼らを世界的にした 60
終りに 街作りには3人以上の仲間が必要です 62
第2編 資料篇 目次 64
後書き   

Ⅱ 資料編
1 予が見たる二宮尊徳翁  65
2 キリスト教の伝道師として見たるクラーク先生 69
3 開校式の黒田・クラークの式辞 74
4 イエスを信ずる者たちの契約 76
5 先師シーリー先生を憶う 78
6 黒田清隆伯逝く 79
7 クラーク先生への手紙 80
8 内村鑑三日記より抜粋 82
9 内村鑑三の手紙(抜粋) 87
10 宮部金吾・新渡戸稲造往復書簡 92
11 広井勇の手紙 114
12 内村鑑三君之小伝(抜粋) 宮部金吾 116
13 新渡戸稲造小伝  宮部金吾 123
14 広井勇君之小伝  宮部金吾   139
15 広井勇君を葬るの辞 内村鑑三 155
16 広井勇の死と内村鑑三-日記と手紙より-      160
「札幌農学校の三人組と広井勇」発刊に寄せて      163

例 言・主な参考文献
1 内村鑑三の引用および参照の原典は次の略記号による。
  日・・・『内村鑑三日記書簡全集』   信・・・同『信仰著作全集』  
2 本書の主な参考文献(宮部金吾の「小伝」のほか)
(1) クラーク・・・「北大百年史」、「札幌農黌年報」、「札幌農学校」蝦名賢造、「クラーク先生詳伝」逢坂信忢、「クラーク先生とその弟子たち」大島正健、クラーク」J.M.マキ、「クラークの手紙」佐藤昌彦他編、「クラークの一年」太田雄三
(2)宮部金吾・・・「宮部金吾(自伝)」、「書簡集より見た宮部金吾」
(3)内村鑑三・・・「内村鑑三全集」、「内村鑑三信仰・生涯・友情」山本泰次郎、
「内村鑑三伝米国留学まで」鈴木俊郎
(4)新渡戸稲造・・・「新渡戸稲造全集」、「新渡戸稲造」松隈俊子
(5)広井勇・・・「工学博士廣井勇伝」、「山に向かいて目を挙ぐ」高崎哲郎
*本書中「札幌農学校三人組と広井勇」は未刊行で、本書はその抜粋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