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발단(원인) 논쟁에서 본 통일과 그의 신학적 함의,이정배 다비드
한국전쟁 발단(원인) 논쟁에서 본 통일과 그의 신학적 함의1)
-통일신학은 뭇 통일담론과 어디서 다른가?-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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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앞서
1. 한국전쟁의 발단과 기원의 논쟁(史)- 목하 통일논의의 새(?)시각을 위하여
2. 3.1 정신과 그 누적적 전통- 촛불혁명과 4.27 판문점 선언에 이르기까지
3. 촛불혁명과 4.27 판문점 선언의 실행방식들에 대한 논쟁- ‘남북연합’과 ‘양국체제론’간의 토론을 중심으로
4. 개신교 신학(자)의 통일 담론들- 통일신학의 전거로서의 ‘민족’의 재발견
5. 민족과 세계분단의 극복을 위한 ‘민족신학’으로서의 ‘통일신학’- 메시아적 미래의 시각에서 본 통일의 세계사적 의미
5-1. 통일신학의 성서(신학)적 토대-복음의 정치 신학적 함의
5-2. 통일신학의 한국적 토대- 민족(종교)사의 재발견
5-3. 통일신학의 세계사적 차원- 반(反)제국적 생명 연대의 길
짧은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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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앞서
2018년에 있었던 4.27 판문점 소식을 접한 영국 거주 한 교포의 이야기이다. 남북 정상이 분단의 선을 오가며 함께 손잡은 모습을 봤던 그녀는 이 소식을 주변 이웃들에게 알렸고 기쁨을 나눴다. 집으로 영국 사람들을 초대해서 작은 축제를 행할 만큼 달라진 한국이 좋았다. 긴 세월 외지에서 남/북 어느 쪽 사람인지 질문 받고 살았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는 조국이 될 것이라 믿은 것이다. 이를 공감한 고등학교 다니는 딸 또한 다음 글을 새긴 졸업기념 티셔츠를 만들어 입고 다녔다. “머지않아 사라질 질문, North or South”2).
지난 해 기독교내부에서 관련된 두 책이 출판되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들이었으나 책자로 엮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접한 순서로 말하자면 고인 되신 김흥호의 저서<<계시의 한국>>3)과 구순을 목전에 둔 서광선의 <<기차 길, 나그네 길, 평화의 길>>4)이 그것이다. 이 두 책은 나름 통일을 위한 염원을 담았다. 하지만 그 방식은 양자가 전혀 달랐다. 앞의 분은 북쪽 공산주의 멸망을 신적 계시로 여겼고 나중 분은 원수 사랑의 길을 제시했다. 물론 두 방식 모두 구체적이지 않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사실 이들은 누구보다 공통점이 많은 분들이었다. 이들은 북에서 내려왔고 신학을 공부했으며 선친이 북에서 목사로 활동했고 희생당한 아픈 경험을 갖고 있다. 70년을 맞는 한국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들일 것이다. 같은 대학에서 얼굴 맞대며 긴 세월 함께 가르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사라질 질문’에 대한 이들 답은 크게 달랐다. 이분들 생각 차가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반복, 확대, 재생산되고 있기에 걱정이다. 4.27 선언으로 크게 흔들렸던 분단체제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는 추세가 된 것이다. 저마다 자기 방식으로 통일을 말했지만, 말할수록 남남갈등이 깊어지는 이 역설을 기독교, 오늘의 교회가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 우리가 통일 신학을 말하는 것도 이런 절실함의 한 표현이겠다. 그래서 묻는다. 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이를 위해 필자는 특별히 감리교적 시각을 요청받았다. 하지만 교파 색을 들어 낼 만큼 협소하게 접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분단 70년 세월을 살면서 감리교단은 상대적으로 통일주제에 대한 역사적 책임에 소홀했다.5) 크게 반성할 일이다. 본래 감리교 정신은 1천년 나눠진 동/서방 기독교 전통의 창조적 종합에서 비롯했다. 상이한 두 전통을 결합시켜 기독교 전통을 재창조한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를 성령의 역사로 여겼다. 이후 종교개혁자(루터)의 칭의 신학과 경건주의 전통(중생)을 연결시켜 원죄교리를 넘어 ‘기독자의 완전’을 강조했으며 이를 근거로 몇 해 전 감리교회는 가톨릭 (자연)신학 전통과도 일치를 일궈냈다. 어거스틴의 은총론과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을 통섭시킨 감리교적 에토스가 그 배경이었다. 달리 보면 이것은 감리교 신학이 영국의 경험론에 근거한 결과이기도 했다. 대륙의 연역적 진리보다 ‘경험적 사실’(bottom up experience)을 소중히 여긴 탓에 감리교 신학은 항시 개방적이었다. 도그마에 갇혀있지 않고 이를 경험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신학의 골자로 여긴 것이다. 자신이 세운 감리교(제도)보다 그 정신을 더욱 소중히 여겼던 창시자 웨슬리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이렇듯 감리교 신학은 성령론과 경험론 그리고 세계개방성에 기초하여 포괄적인 지평을 지녔다. 그렇기에 150년 역사를 지닌 한국 개신교 역사 속에서, 물론 소수였지만 감리교는 사회주의를 수용했고 토착화론을 전개했으며 기독교의 원형에 이르고자 뭇 도그마와 싸울 수 있었다. 그렇기에 탈(脫)민족, 탈(脫)근대 시대에 이르렀으나 감리교 신학은 ‘민족’ 개념을 버리지 않았다. 민중, 여성을 포함한 열린 민족주의시각을 갖고 3.1정신을 생산, 주도했던 기억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 전쟁이 초래한 정신적 트라우마로 분단 망령이 영토를 넘어 의식까지 지배하는 현실에서 향후 이를 치유, 회복하는 역할이 가능할 지를 묻고자 한다. 과연 감리교 신학은 조선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통일신학’을 정초할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 1919년 이후 촛불혁명을 거쳐 4.27 판문점 선언에 이르기까지 조선반도에서 일어났던 우리 역사를 세밀하게 살펴보는 일이 우선 중요할 것이다. ‘예수가 답이라면 우리들 문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 하듯이 ‘사라질 질문’을 위해서, 나아가 ‘통일신학’을 위해서 우리들 역사에 대한 정확한 사실(현실)공부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런 방식 자체가 감리교적으로 통일신학을 논하는 첩경이겠다. 이 작업을 위해 도올 김용옥이 최근 통일에 무감각해진 청년을 깨우기 위해 유시민과 함께 썼던 책 <<통일, 청춘을 말하다>>6)의 관점이 도움 되었음을 밝힌다.
몸 글로 들어가기 전에 본고의 전개 방식을 언급해야겠다. 우선 첫장에서 한국 전쟁 70주년을 맞는 2020년에 이르러 전쟁 발단 원인에 대한 학계 논쟁을 살펴 볼 것이다. 주지하듯 한국전쟁이 야기한 분단체제는 한국사회와 교회 모두에게 난제이자 트라우마가 되었다. 본 사안의 극복 없이 이 땅은 정상국가는 물론 독립국가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외세의 원심력 탓에 국가주권이 여러 면에서 한정된 탓이다. 한국전쟁의 성격을 냉전담론, 즉 북(北)이 시작한 이념적 내전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다. 이후 미중(美中)간의 국제전으로 확전되었지만 말이다. 반(승)공을 국시로 한 국가 권력이 이를 부각시켰고 사상적으로 주입시킨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전쟁 원인을 친일/항일의 구조에서 보는 시각도 있다. 해방이후 일본을 전범국 오명에서 벗겨낸 미국이 그를 앞세워 남(南)을 통치했던 까닭이다. 심지어 패전을 앞둔 상황에서 일본의 간계로 38선이 그어졌다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다.7) 어느 한 쪽 견해가 전리(全理)일 수 없겠으나 ‘자주성’을 잃은 오늘의 시각에서 후자의 시각에서 한국전쟁을 살필 이유도 충분하다. 이를 위해 첫장에서는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세 개의 다른 시각들- 브루스 커밍스(美)8), 한국의 박명림9) 그리고 와다 하루키(日)10)-를 상호 논쟁시켜 새로운 관점을 얻고자 한다.
이어 두 번째 장에서는 앞선 잠정적 결론을 3.1 정신의 차원에서 재론할 것이다. 제국을 무너트리고 국민주권을 소환한 100년 전, 3.1 정신으로 한국전쟁의 상흔을 치유, 회복시킬 목적에서이다. 사회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기독교성을 아우르며 ‘새 하늘과 새 땅’, 개벽을 선언했던 선혈들의 자주적 독립의지 속에 세계사적 동시성을 엿보고자 함이다. 민족의 구심력과 외세의 원심력을 창조적으로 수렴시킨 지혜가 이속에 담겼음을 누구도 부정치 못할 것이다. 이런 3.1 정신이 누적되어 4.19 혁명을 낳았고 촛불혁명으로 이어졌으며 이 결과가 4.27 판문점 선언에 까지 닿았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앞선 수차례의 남북선언과 변별된 4.27 선언의 핵심을 분석,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이를 기념하는 민(民) 주도의 1주기 행사, 30만이 참여한 ‘DMZ 민+평화 손잡기11)‘ 행사가 열렸던 것도 주목할 일이다. 여하튼 본장에서는 4.27선언에 이르는 3.1 정신의 누적적 성취에 초점을 둘 것이다.
다음 3장에서는 4.27 선언을 실현시킬 통일 담론들을 소개하고 토론할 것이다. 작금에 이르러 통일보다는 평화체제에 무게중심을 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물론 통일을 목적하나 그 방식 차(差)가 너무 커 수렴 불가능한 탓에 소위 양국체제론12)까지 언급된다. 노태우 정권 이래로 UN 동시 가입국이 되었으니 남북이 각기 두 나라가 되자는 말이겠다. 이 과정에서 불거진 백낙청을 중심한 ’창비 그룹‘과의 ’영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하지만 상호 비판적인 두 집단에게 분단의 죄성에 대한 논의의 결핍이 유감이다.
이어지는 4장에서는 위 논쟁들과의 연속선상에서 몇몇 주요한 개신교 신학들의 통일담론을 소개, 참여 시켰다. ’88선언‘(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을 주도한 이삼렬의 <<평화체제를 향하여>>와 기독교 윤리학자 손규태의 <<한반도의 그리스도교 평화윤리>>13)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평화체제(이념)에만 관심하며 민족과 통일을 후순위로 여기는 이들 논의의 한계를 적시하는 것이 본 장의 주안점이 되겠다. 단지 민족주의자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신학적 차원에서 이런 주장을 펼칠 생각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5장에서는 이념의 문제로서만이 아니라 ’민족‘을 앞세워 통일 논의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극단적 민족주의자들 경우처럼 민족을 본질(원초)적으로 접근, 이해하는 것도 문제겠으나 이를 서구 근대성의 산물로 여겨 허구적 개념이라 폄하하는 탈(脫)근대주의시각도 옳은 것만이 아닐 것이다. ’원초적 유대(성)‘를 지닌 민족개념14)을 긍정하는 것이 향후 평화와 통일을 함께 논의함에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제 이념을 아울렀던 3.1 정신을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과 유관하다. 지속 가능한 생태문명을 위해서도 민족 개념은 반듯이 요청된다. 생명의 다양성은 문화(민족)의 다양성과 맞물려 있는 까닭이다. 이런 시각에서 필자는 본 장을 통해 ’민족‘을 화두로 삼은 두 여성 신학자, 박순경과 이은선의 시각15)을 드러낼 것이며 이를 김용옥의 통일 담론과 연결시켜 평가할 것이다. 주지하듯 지금껏 희년 사상에 근거한 통일신학 논의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필자에게 주어진 ’감리교적 입장‘이란 한정사를 생각하며 조금은 달리 구성할 생각이다. 우선 필자는 기존 교회 틀을 넘어 하늘나라(메시아)의 시각에서 ’통일 담론‘을 논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실현된 종말‘대신 메시아적 미래이다. 기독교의 배타(절대)성을 벗겨내기 위함이다.16) 하느님 미래를 위해서 어떤 종교의 이념들도 함께 참여(공헌)할 수 있다는 뜻이겠다. 그럼에도 ’하늘나라가 임했다‘는 선언을 민족의 실존(신앙)적 고백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속적 난관에도 불구하고-현실은 그때와 달라졌으나- 4.27 선언 전후 이 땅에 드리운 평화기운이 메시아적 미래의 징조라 보는 까닭이다. 한국 전쟁의 종언을 뜻하는 ’통일‘은 제국주의의 끝이자 이념 논쟁의 마침이며 3.1 정신의 실현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1990년 서울에서 개최된 JPIC 신학이다. 분단의 결과물이자 세계사적 악의 집적(集積)으로서 JPIC 주제-분배의 불균형, 핵무기 과다보유, 창조질서 파괴-를 풀어내는 것을 분단체제의 종식이라 믿고 싶다. 이것이 통일신학의 과제이자 관건이고 마침일 것이다. 끝으로 유대주의와 갈라섰으나 자기 동족 유대인과 바울 간의 불이(不二)적 관계(롬9:1-5) 또한 주목할 주제이다.17) 이방인을 향(위)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유대민족과의 동질성을 토로하며 양자를 회통하는 바울사상에게서 통일신학의 새 길을 기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민족 담론에 기초한 통일신학이 항차 이념(계급)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1. 한국전쟁의 발단과 기원의 논쟁(사)-목하 통일논의의 새(?)시각을 위하여
지난 정권까지 우리는 ’북한 붕괴설‘ 내지 ’통일 대박론‘에 영혼을 빼앗기며 살아왔다. 이점에서 재미 역사학자는 북맹(北盲)이란 말로 경종을 울렸다.18) 이런 표현들은 북에 대한 무지의 결과일 것이다. 아마도 친일극복 없이 반공을 넘어 승공을 국시(國是)로 삼았던 지난 역사의 결과라 하겠다.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시절은 조금 달랐으나 이들 역시 분단체제를 친일/반일 프레임을 갖고 설명함에 있어 많이 부족했다. 남북 간 갈등과 대립을 오로지 이념 차(差)로 환원시켜 이해했을 뿐이다. 이는 틀린 말은 아니겠으나 충분할 수 없었다. 친일세력들이 자유주의 이념의 신봉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권에 이르러 사회주의란 말이 용인, 회자되기 시작했으나 반공기독교(인)의 공격에서 자유롭지 않다. 70년 역사가 된 한국전쟁의 부정적 경험이 북에서 온 기독교인들 중심으로 남한 사회에 깊게 뿌리 내린 탓이었다. 주지하듯 영락교회, 서북 청년단 그리고 제주 4.3 사건 등이 반공 이념의 기독교적 상징 체였다.19) 사실 한국전쟁은 해방(1945년) 후 갈라진 땅을 남북 서로 한번 씩 넘나들며 점령할 기회를 주었었다.20) 이 과정에서 남에 의해 희생된 북쪽 사람들 수가 그 반대의 경우에 견줘 결코 적지 않았다. 남쪽의 희생자들 상당수는 사실 남쪽 이승만 정부에게 책임을 물어야 옳다. 갑작스런 서울 포기로 부역자 된 사람들 다수가 수복이후 우익들 손에 처형된 까닭이다. 피난 온 기독교인들 중 토지를 몰수당한 지주 계급들이 많았다는 사실도 반공 기독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적시한다. 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낸 한국전쟁의 비참함은 남북에게 역지사지(易地思之)할 여력을 주지 못했다. 남북은 각기 자기 경험의 절대화로 상대를 외부화, 타자화시켜 닫힌 체제로서 독재정치의 풍토를 조성했고 분단체제를 고착화시킨 것이다. ’북맹(北盲)‘이란 말로 표현되듯이 외부를 폐쇄시키면 서로 이질적 집단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정황에서 경제적 우위를 점한 남쪽의 경우 한국전쟁에 대한 북의 시각을 청취할 필요가 있다. 신(神)이 인간되어 인간을 구원했듯이 남/북 모두 자기 밖 타자에 개방될 때 스스로를 달리 만들 수 있는 여지가 생길 것이다. 21) 이것을 종교적으로 구원이라 할 것인바, 이런 역지사지의 용기는 성육신의 신비를 빼닮았다. 이런 관점을 갖고 이하 내용에서 한국전쟁의 발단과 기원을 살필 것이다.
우선 한국전쟁에 있어 북침/남침의 논쟁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 1950년 6월 25일 당일 북의 남침이 사실일지라도 황해도 옹진반도를 중심한 크고 작은 전쟁이 이전부터 수차례 있어 왔다. 한마디로 남침과 북침이 이 시점을 전후하여 공존하던 상황이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도 김일성의 남침 이상으로 북침을 열망하고 있었던 까닭이다.22) 중국혁명에서 모택동의 공산주의가 승리하자 유럽지역에 머물던 미소가 조선반도에 관심을 갖고 냉전체제를 주도했다. 일제의 계략대로 조선반도 내 38선이 냉전체제의 최전선이 된 것이다. 미국으로선 조선반도마저 공산주의에게 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른 철수 탓에 소련이 한국전쟁에 적극적 역할을 못한 것은 조선반도를 위해 큰 다행이었다.23) 물론 전쟁을 최종 승인한 것은 스탈린이었으나 소련으로선 중국을 앞세울 수밖에 없었다. 공산혁명이후 힘든 상황이었으나 모택동은 일본 제국주의와 맞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함께 싸운 역사를 기억하여 전쟁참여를 결정했다.24)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민족 독립의 길이 열릴 것을 믿고 함께 싸웠던 조선인들에 대한 일종의 보은(報恩)차원에서였다. 중국군이 개입하게 되자 당시 미국은 북쪽에 핵무기를 투하할 계획까지 갖고 있었다.25) 이것은 북쪽 사람들에게 엄청난 두려움을 안겼다. 앞서 일본 경우를 학습했던 터라 온갖 상당수가 희생을 감내하며 남으로 피난(避難)을 떠났고 이로써 민족을 대이동시켰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38 이남의 국토를 거지반 내준 것도 미국의 전쟁 참여를 의도한 이승만의 작전이었다는 설(說) 또한 한국 전쟁이 내전(內戰) 곧 제한전쟁(limited war) 이상임을 보여 주었다.26) 이점에서 한국전쟁을 세계사의 질고를 걸머진 민족고난이라 여긴 함석헌의 혜안에 공감할 수 있다. 사실 해방 후 분단은 패전국 일본에서 이뤄질 일이었다. 38선 분단이 없었더라면 이후 한국전쟁도 없었을 것이다.27) 본래 이런 분단은 패망을 예견한 일본이 자신들 항복전술로 (1943년부터) 향후 미국 영향력을 제한코자 소련과 손잡고 도모한 결과였다.28) 분할을 결정한 얄타회담은 이런 간계의 결과였을 뿐이다. 이후 일본은 소련과 결별, 미국과 재 결탁했던 바, 조선반도 분할은 애시 당초 일본이 유도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후 미국의 도움으로 전범국 지위를 벗겨냈고 한국 전쟁으로 경제적 도약까지 이뤘으니 이들의 간사한 이중태도가 참으로 경이롭다. 이보다 훨씬 앞서 카츠라-태프트 밀약 당시 미국이 일본에게 막대한 합방비용을 지원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로 밝혀졌으니 조선반도에 대한 미일(美日) 밀착관계의 역사는 모질고도 길다. 그 모진 역사가 과거는 물론 작금의 상황, 그리고 조선반도의 미래를 거듭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있다.29)
바로 이 지점에서 필자는 한국전쟁 기원에 대한 논쟁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앞서 우리는 남쪽의 외부(밖)이자 타자인 북에 열린 자세를 요구했다. 남쪽의 구원, 곧 우리들 내부의 변화를 위해서이다. 지금껏 말한 내전, 국제전의 시각은 모두 한국전쟁을 이념의 문제, 체제 간 갈등자원에서 본 것이다. 북한 공산체제 확산을 목적한 전쟁이라 여겼고 냉전의 산물, 곧 자본주의와 시회주의 이념체제 간의 투쟁의 결과물로 이해한 것이다. 물론 이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지만 이것만을 전리(全理)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지하듯 친일 척결의 문제가 남은 탓이다. 해방 후 북은 친일파를 척결했으나 미 군정체제하에서 남쪽은 친일파를 앞세웠고 정부수립 이후 이들이 대세를 이뤘다. 일본을 군사적 전략 가치로 높게 평가한 탓에 미국이 일본 편이 된 결과였다. 전범의 수장인 ’천황‘을 폐위 시키지 않고 그대로 둔 미국의 결정이 그 실상이자 반증이다. 북의 입장에선 이점이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독립했으나 미국과 결탁한 일본이 다시 조선반도를 넘보는 상황이 된 까닭이다. 미국의 공공연한 지원 하에 평화헌법 폐기 시켜 전쟁 할 수 있는 ’보통국가‘ 되는 것이 시종일관 일본의 염원이었다. 그렇기에 오늘의 ’아베‘는 지금만이 아니라 과거부터 존재해 왔다. 미국을 앞세워 자신의 과거를 재현하려는 일본, 그 일본과 짝하여 북을 정복하려는30) 이승만 정권을 당시 북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을 브루스 커밍스가 옳게 포착하여 지적했다. 한국 전쟁의 기원과 발단에 대해 기존 통설을 뒤집고 친일/반일의 관점에서 재 서술한 것이다. 이후 본 논쟁은 한국과 일본에서 확대 재생산 되었고 그 결과로 박명림과 와다 하루기 등의 명저들을 세상에 출현 시켰다. 이하 내용에서는 이들 간의 논쟁을 소개하되 브루스 커밍스의 시각에서 살피겠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3.1 정신을 토대로 남북이 하나 될 길, 통일 논의의 온전한 지평을 찾기 위함이다. 남북 간의 하나 됨에 있어 이념과 체제 그 이상으로 3.1 정신에서 드러난 민족의 열린 꿈과 상상력이 중요한 까닭이다. 남남 갈등을 풀 수 있는 실마리도 여기서 찾을 수도 있겠다.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은 전쟁’이자 ‘잊혀 진 전쟁’이다. 평화(종전)체제를 이루지 못한 채 휴전상태에 머물러 있고 북쪽 점령을 실패한 탓에 잊고 싶은 전쟁이 된 것이다. 이런 한국전쟁을 보는 브루스 커밍스의 시각은 다음 몇 가지 점에서 독특하다. 본 전쟁을 내전(內戰)으로 규정했으나 1930년대로 그 기원을 소급시킨 까닭이다. 누차 언급했듯이 일본이 세운 만주국을 위해 부역한 조선인과 항일운동에 참여한 한국인 간의 투쟁을 한국전쟁의 발단 원인으로 본 것이다.31) 해방 후 북쪽은 항일 유격대의 전통을 이어 받았고 남쪽은 일본 부역자들의 세상을 만들었기에 북의 입장에선 한국전쟁을 일종의 독립, 해방전쟁으로 성격 지웠을 수 있다. 이 경우 내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은 일차적으로 좌우 이념 논쟁을 빗겨나 있고 국제전으로의 확장 역시 훨씬 나중의 문제가 된다. 이렇듯 1930년 경 생겨난 친일/반일 입장 차의 확대, 재생산을 한국 전쟁의 기원이란 것이 커밍스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당시 일본 식민주의 사상을 체현한 경제인들32) 중에는 한국, 일본 그리고 만주의 유기적 통일론을 주장한 이도 있었다. 이어서 커밍스는 한국을 중국과 다른 독자적 문명권으로 인정했던 이 땅을 둘로 나눈 전쟁의 죄과를 지적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터무니없다 여길 정도로 한국 민족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친일 부역자들의 흔적이 사라진 것을 불행이라 여겼다.33) 마지막으로 한국전쟁 탓에 정작 미국은 군산복합체제 국가로 발전했고 냉전체제를 더욱 공고히 했다고 평가했다. 세계적 차원의 이념 대립(냉전)을 역으로(시차적으로) 한국 전쟁의 결과로 본 것이다. 이와 함께 부언할 것은 앞서 말했듯 커밍스에게 북침/남침의 구별이 무의미 했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 이전에 수없는 국지전이 앞서 발생했고 남쪽 역시 북을 점령코자(이승만의 승공의식) 했으며 미국 또한 전쟁을 예감, 준비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 대한 한국전쟁 연구가 박명림은 비판적이었다. 커밍스를 수정주의자라 여기며 그의 논지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우선 저자는 커밍스와는 반대로 북에 의한 남침을 당연시 했고 한국전쟁을 오로지 냉전담론의 산물로 보았다. 전쟁의 발발 그 순간부터 국제화되었다는 것이다. 서울/동경/워싱턴과 평양/북경/모스크바 양대 이념 집단들 간의 싸움이라 했다.34) 이승만 스스로도 이 전쟁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세계적 대립으로 몰아갔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국내적으로는 한국 현대사의 모든 것을 흡입한 블랙홀이라 여겼다.35) 이 과정에서 식민주의 잔재마저 청산, 소멸되었을 것이다. 여하튼 민족의 분단선과 세계 냉전의 분계선이 처음부터 함께 존재했다는 것이 박명림의 시종일관된 확신이다. 저자는 한국전쟁, 즉 남침의 이유를 북쪽에서 행했던 탈(脫)식민 급진혁명의 영토적 확대로 이해했다. 북의 통치를 받았던 짧은 기간 동안(6.25로부터 9.28까지)의 급진적(사회주의) 경험 탓에 남쪽 사람들에게 반공의식이 강화되었고 지금껏 그 폐해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36) 그는 또한 혈통, 언어, 문화, 인종이 같은 한 민족을 졸지에 무력화시킨 이념의 힘을 인정했다. 단일민족을 하나의 허구적 관념으로 만든 이념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적시한 것이다. 그 또한 커밍스가 언급했듯이 민족을 인종주의로 멸시, 하대한 이념의 폐해를 모르지 않았다.37) 이런 바탕에서 남과 북 수많은 인민들이 미군에 의해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전후 체제 회복의 걸림돌인 남남갈등을 초래했다. 국제관계, 남북 관계 그리고 남의 내부가 필연적으로 상호 엮어진 결과이다.38) 분단체제론에 기생했던 70년 역사가 이렇듯 존속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박명림의 해결책은 의외로 종교(기독교)적이다.39) 종교가 이념을 극복해야 된다는 충고를 반복했고 그것이 한국전쟁을 극복하는 길인 것을 강변했다. 하지만 이 역시 이념갈등을 앞세워 한국전이 내전임을 강변한 결과이겠다. 민족담론을 허구로 여길 만큼 냉전이념을 한국전쟁의 원인이자 기원으로 본 탓이다. 하지만 종교가 제 이념을 초월해야겠으나 때론 민족개념과 함께 갈 수도 있고 가야함을40) 오늘의 역사가 보여준다.
와다 하루끼의 <<한국전쟁>>은 러시아 자료를 섭렵했고 당시 일본의 입장을 드러냈기에 의미가 깊다. 앞선 두 관점을 숙지한 상황에서 썼던 책이라 균형감각도 엿볼 수 있었다.41) 브루스 커밍스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비판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브루스처럼 그 역시 한국전쟁을 식민지로부터 해방의 시각에서 독해했다. 동시에 하루끼는 해방전쟁을 미소 분할에 의한 분단체제와의 연관 속에서도 파악하였다. 해방전쟁과 이념전쟁을 구조적으로 연관 지은 것이다. 무엇보다 내전이 미중(중미)간 전쟁으로 확전된 것이라 보았다. 식민지 해방 전쟁이 이념전쟁으로 발전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로써 저자는 한국전쟁을 이념적 침략전쟁(남침)으로만 보는 박명림과 달랐고 북쪽의 선제공격을 부정하지 않았기에 커밍스를 비판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이란 만주 항일 투쟁에 기원한 것으로서 공산주의적 민족주의와 비공산주의적 민족주의간의 분열의 산물이란 것이다.42) 전자는 일제와 맞섰던 중국 공산당과 사상적으로 엮여 있고 후자는 일본을 비호하는 미국 우호적 체제와 무관할 수 없다. 동일한 민족이 사상으로 갈려진 것은 ‘독립’에 대한 이해 차(差)에서 비롯한 것이다. 해방전쟁이 이념전쟁으로 비화, 확전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1945년)에서 신탁통치 안이 가결된 이후 이 두 세력 간의 갈등은 봉합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찍 단절을 선언한 북쪽이 먼저 정부를 수립했고 이어 남쪽 역시 비 공산세력을 축출한 가운데 독자적 국가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남쪽 곳곳에서 내전이 벌어졌고 제주 4.3 사건이 그 구체적 사례일 것이다. 3.1절 기념행사에서 제주사건(내전)이 발발했기에 그 뜻하는 바가 크다.43) 결국 하루끼는 한국전쟁을 이렇듯 축적된 갈등의 산물로 여겼다. 동시에 그는 세계대전의 조짐도 부정하지 않았다. 비록 한국 내부의 전쟁이었으나 미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의 역할 역시 컸다고 본 탓이다. 중국대륙의 공산화를 목도한 상황에서 일본은 이승만의 전쟁 요구에 응했고 한국전쟁을 자신들 경제부흥의 호기로 여겼기에 미국을 적극 도왔던 반면44) 중국의 경우 한국전쟁을 자신들의 항일전쟁과 혁명전쟁의 연장이라 여겼다는 것이다. 중국 내전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전쟁을 이해한 하루끼의 생각이 흥미롭다.45) 중국에게 있어 미국은 한국의 자주성을 빼앗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해치는 방해꾼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한국전쟁에 미친 일본의 역할 및 영향에 대한 논의를 많이 누락시켰다.46) 일본 내 양심 있는 지성인이라 일컬어졌기에 일본 정부에 대한 치열한 비판을 기대했으나 부응하지 못했다고 판단된다.
앞서 보앗듯이 박명림은 한국전쟁을 미국 동아시아 정책 변화의 차원에서 국제전으로 성격 지웠다.47) 이념 차(差)에 근거한 미소 간 대립, 그 최전선인 조선반도에서 미국은 군사적 우위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한국전쟁을 야기 시켰다고 본 것이다. 이에 비해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국제전 성격을 덜 강조했다. 계급갈등에 근거한 내전의 성격을 오히려 앞세운 것이다. 본래 동서 이념 전쟁이 아니란 것이다. 나아가 이것이 항일운동에 뿌리를 두었다 여겼기에 수정주의자란 비판도 감내해야 했다.48) 나아가 한국전쟁을 미국 안보에 도움 되는 일본 수호 전쟁이었다고까지 여겼다. 그렇기에 커밍스는 전쟁발단에 있어 미국정부와 이승만의 책임을 오히려 크게 보았다.49) 형평성을 잃었다는 평가50)를 받아 커밍스의 책은 한동안 남쪽에서 금서가 되었으나 ‘외부(北)’를 달리 보게 했고 ‘내부’를 변화시켰다. 그가 이 책을 햇볕 정책을 폈던 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헌사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실 한국 전쟁의 기원과 발단에 대한 논의는 더 많은 지면과 정교한 토론을 요구한다. 앞서 전제했듯이 필자는 여기서 커밍스의 시각을 선호했다. 다른 학자들 의견을 경시해서가 아니라 역지사지의 마음 때문이었다. 한국 전쟁을 바라보는 북의 시각을 배워 아는 것이 민족 미래에 도움 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한국전쟁으로 ‘민족’(주의)은 파괴되고 반공(反共)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반공을 국시로 건설된 근대화가 조선반도를 이념 투쟁의 장(場)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개발독재로 이룬 경제성장은 단일 ‘민족’을 희생시킨 대가였다. 친일과 반공이 동전의 양면 되어 해방이후를 지배했다. 따라서 필자가 커밍스의 시각을 존중한 것은 오로지 ‘민족’을 복원하기 위함이다.51) 이를 위해 제 이념(종교. 계급)을 품되 넘어섰던 3.1 정신과 맞닥트려야 옳다. 그 속에 북이 원하는 자주성은 물론 평화와 세계주의가 담긴 까닭이다. 이제 한국전쟁의 폐해를 3.1 정신의 시각에서 치유할 때가 되었다. 이에 필자는 민족정신을 일깨운 3.1 정신을 살피되 촛불혁명 및 4.27 판문점 선언에 이르기까지 누적된 그 사상적 흐름을 적시할 것이다. 한국 전쟁으로 야기된 반공주의의 극복, 민족의 복원 그리고 세계사적 책임을 논하기 위함이다.
2. 3.1 정신과 그 누적적 전통- 촛불혁명과 4.27 판문점 선언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 이후 70년의 역사가 흐른 2020년을 살고 있다.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으나 그 폐해는 아직까지 치유되지 않았다. 민족을 파괴했고 반공주의 국가를 세웠으며 식민지적 자본주의 체제를 일궜던 까닭이다. 지독한 전쟁 경험 탓에 우리 역사는 늘 상 그 때에 머물러 있다. 국가 보안법이 여전히 살아있고 종북/좌빨 이데올로기로 사상의 자유를 묶어 놓기 일 수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미래가 좀처럼 열리지 못하고 잇었다. 상대부정을 자기 존립근거로 삼는 반공, 분단체제가 남쪽마저 분열(남남갈등)시켰던 탓이다. 이로써 한국 전쟁은 조선반도에서 아직도 진행 중이다. 한국전쟁을 과거와 미래의 연결고리라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겠다.52) 소설 <<광장>>53) 은 남북이 추구했던 이념 모두에 좌절하여 삶을 포기한 젊은이(이명훈)의 삶을 그렸다. 소설<<탐루>>54)는 지리적 경계를 무시한 채 남북을 오가며 평화체제를 원했던 역사적(실존하는) 인물 김낙중의 일대기를 소개했다. 이념적 존재가 되려 했으나 결국 그의 희생자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한국전쟁 이후 이 땅의 사람들 대다수는 소설 인물처럼 그렇게 살아왔다. 이제 우리에겐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념을 초월할 수 있는 사상적 얼개가 절실한 시점이 된 것이다. 주지하듯 2019년은 3.1 선언 100주년을 맞는 해였다. 남북이 공유할 수 있는 사실적 역사공간으로서 3.1선언 만한 것이 없다. 일체 이념을 통섭시켜 전혀 다른 미래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기독교)의 현실이었고 ‘개벽’(천도교)으로 불려졌다.55) 공히 이 지점에 함께 서서 3.1정신을 냉철히 인식하여 보편(세계)성을 구할 때 남북의 미래는 한국전쟁의 족쇄로부터 자유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한국전쟁을 이념(체제)간 투쟁 이전에 우선 민족 간의 내전으로 봤던 커밍스의 입장에 동조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한국전쟁의 극복이란 좁게는 분단체제를 단(斷)하는 것이자 민족을 복원하는 것이며 나아가 이데올로기의 종언이고 제국주의를 폐하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제국을 민국(民國)으로 바꾼 3.1정신은 이념으로 나눠진 이 땅에 그 하나 됨을 위한 총체적인 혁명 기운을 선사할 것이다.56)
100년 전 3.1선언은 근대를 열어젖혀 민족의식을 전환시켰다. 민(民)주도의 공화국을 선포했기에 한국 근대의 출발점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 된 것이다. 1945년 이래 좌우갈등 탓에 그 뜻이 확장될 수 없었지만 최근 촛불혁명으로 재현의 단초를 가늠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비록 북의 경우 만주 항일투쟁에 무게중심을 두었으나 3.1정신은 남북 차(差)를 횡단하는 보편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3.1 정신은 피압박 식민지 국가에서 발현된 자주성(독립)의 선언이었다. 서구 제국주의가 용 트는 시점에서 민족의 자주를 말한 이 정신은 중국,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비폭력적 평화운동으로 전개되었기에 서구는 물론 탈아입구(脫亞入口)를 꿈꾸던 일본에게 수치심을 안긴 사건이 되었다. 이점에서 우리는 3.1 정신의 혁명적 성격을 논할 수밖에 없다. 안으로는 제국을 민국으로 변화시켰고 밖에서 유입된 좌우대립을 품고 넘어섰던 까닭이다.57) 후자의 경우는 3.1 정신에 입각한 상해 임정의 출현을 통해서 입증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을 경험한 연해주 이민자(이동녕)들의 사회주의 이념을 임정이 수용했던 까닭이다. 이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비판과 견제의 지난한 과정을 겪으며 일정부분 동화되어갔다.58) 익히 알려진 대로 신간회(1927년)는 일본이 조작한 105인 사건을 통해 사멸되기까지 좌우이념을 아우르며 활동했던 독립단체였다. 이런 신간회의 방향성을 목하 사람들이 ‘좌편향’되었다 하겠으나 당시 이것은 ‘중간 길’로 일컬어졌다.59) 이 경우 ‘중간길’, 그것의 참된 의미를 모르겠으나 험난한 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민(民)에 기초하여 사회주의 이념과 민족이념을 통섭한 민주 공화국을 염두에 두고 활동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처럼 3.1 정신은 우리 역사를 질적으로 혁명코자 했다. 새 하늘과 새 땅, 곧 개벽이 이를 뜻하는 말이겠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분단체제가 생겼고 이것이 역사의 기운을 억압하여 민족의 미래를 망가트렸다. 그렇기에 작금의 좌우이념대립은 3.1 정신의 배반이자 동시에 갚아야 할 채무가 되었다.60) 이 빛을 감는 것이 곧 우리들 미래를 여는 일이다. 다행히도 3.1 정신은 역사의 고비마다 누적되어 4.19를 거쳐 촛불혁명으로 재 점화되었고 그 힘이 4.27 판문점 선언을 낳았으니 목사 어려운 현실임에도 하늘에 크게 감사한다. 본 선언에 근거하여 남북 간 평화 공존을 모색하되 궁극적으로 ‘개벽(신천지)’이란 말에 합당한 새로운 국가체제를 꿈꿔 이룰 일이다. 다시금 신간회 출범 시 언급된 ‘중간길’이 무엇인지 그 실상을 고뇌해야 옳다. 그럴수록 3.1 선언에 담긴 함의된 민족정신(혼)을 깨쳐 아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이는 마지막 장에서 다룰 내용이 되겠다.
여기서 3.1정신의 세계사적 의미를 좀 더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 촛불혁명과의 연결고리가 더 잘 해명될 수 있겠기에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자주성, 평화, 세계주의를 표방한 3.1 정신은 아시아 각국에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 강제합병 된지 10년도 되지 않아 민주도의 거국적 저항운동을 일으킨 것은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다. 그래서 학자들은 1919년을 인류의 신기원이자 해방의 원년‘으로 보고자 했다.61) 주지하듯 당시 민족자결론(윌슨)이 널리 회자되었으나 이를 신뢰하는 풍토가 아니었다. 실제로 이것은 지배했던 식민지 국가들을 다른 열강이 지배하지 못하도록 기존 지배국을 이롭게 하는 것이엇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을 위한 저항적 주체가 생긴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62) 3.1 선언의 주체가 된 이들이 바로 종교(인)들이었다.63) 국가 없는 식민지 현실에서 종교가 민족을 대변한 결과였다. 당시로서는 이천만 인구중 300만 교도를 지닌 천도교가 앞장 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학(西學)에 대한 주체적 자각으로 생겼고 농민혁명을 주도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들은 자신들의 물적 토대, 정신적 이상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따라서 독립을 ’청원‘키로 했던 당시 기독교에 견줄 때 천도교는 처음부터 자주적 독립을 강하게 ’선언‘할 수 있었다. 선언서에 담긴 ’신천지의 도래‘란 말은 바로 이런 현실을 언표 한 것이겠다. 이처럼 주체적 저항의 뿌리가 당대 종교에 기초했으나64) 의병(지식인), 동학(농민)에까지 이르렀고 일체 계급, 성차, 좌우 이념을 아울렀다는 사실은 3.1정신이 근대극복을 위한 세계사적 촉매가 되었음을 반증한다.65) 이것이 제국(諸國) 대신 민국(民國)을 출현시켰고 민(民)이 주체인 공화주의를 헌법(정치)의 기초로 삼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제도를 너머선 종교적 열망의 표출이기도 했다. ’하늘‘을 본 사람만이 꿈꿀 수 있는 세상이었다. 그렇기에 역사를 ’기미(己未) 이전과 이후로 나눠도 좋을 만큼 시기구분의 기준점이 되었다.66) 부정된 민족(주체)성을 맘껏 긍정했고 서구 세계와도 사상적 소통을 이뤘으며 이후 국가들이 이룰 대안 문명을 제시한 까닭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한국전쟁으로 민족을 분단시켰기에 3.1 정신에 진 빛이 참으로 크고 많다. 그럼에도 3.1 정신은 결코 실패했거나 소멸되지 않았다. 지난 100년 역사 속에 누적적으로 싸였고 순간순간 그 미완의 꽃망울을 터트렸던 것이다. 그렇기에3.1 정신의 적공 없이는 4.19 혁명, 5.18 항쟁 그리고 근자의 촛불 혁명 또한 설명할 수 없다.67) 이점에서 3.1 정신을 매순간 역사를 소환하는 우리 식(式) ‘진리 사건(A.바디유)’이라 말해도 좋겠다.68) 실패했던 과거를 거듭 구원하고 있기 때문이다.69) 이로써 항차 세계와 공조했던 3.1정신은 민족분단을 야기한 이데올로기뿐 아니라 이 시대의 제국인 ‘자본주의 체제’마저 넘는 (대안적)문명비판의 동력이 될 것이다. 3.1 정신이 목하 우리들에게 이전(舊) 세계와 단절하는 ‘전(全)지구적 자각’70), 곧 평화를 사건으로 요청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혁명적 인식이 촛불혁명에서 잘 드러났고 그것이 4.27판문점 선언에서 획기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하 내용에서는 이들 상관성을 살펴 볼 것이다.
주지하듯 촛불혁명은 한국시민에게 ‘에버트’ 인권 상(償)을 안길만큼 세계를 놀라게 했다. 무혈로 정권을 바꿨고 나라 근간을 바로 세운 결과였다. 사람(民)을 버린 국가71), 법을 조롱한 정부에 대한 항거, 그것이 촛불형명의 도화선이었고 3.1 정신을 소환한 계기가 되었다. 하여 촛불혁명을 민(民)의 주권, 자주성에 대한 공적 선언으로서 3.1 정신의 재 표출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촛불 혁명은 아마도 북의 민(民)에게도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국가권력의 무능과 범죄를 꾸짖는 촛불민심이 무섭게 각인되지 않았겠는가? 북이 4.27 판문점 선언에 마음을 열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듯 싶다. 우선 촛불혁명은 국민과 헌법의 이름으로 반공 수구세력을 권좌에서 내쳤고 옥조이던 분단이념을 적폐로 규정했다. 국민주권(민주공화제)을 해방 후 최초로 반공/반북 이념에 앞선 가치로 만든 것이다.72) 향후 남북관계의 전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또한 이 역량으로 이룰 과제가 되었다. 그럴수록 촛불혁명의 종지(宗志)를 굳게 잡고 문명의 대전환을 위한 긴 호흡, 큰 판단력이 필요하다. 주변국들 방해와 야당의 공세에도 신년사에서 역설한 대통령의 ‘운전자론’이 그래서 중요하다. 북미관계의 불통을 남북경협으로 풀겠고, 김정은 답방을 재추진하겠다고 했다. 아무리 악재가 생겨도 이내하며 이 길을 가겠다는 것이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이다. 이렇듯 촛불혁명은 민족 구심력을 위해 북의 체제를 사유지평 안으로 견인했고 더욱 가열 차게 그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혁명은 어느 경우에도 현재 삶에 대한 불만, 요구를 단숨에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국사건 이후 전광훈 사태에서 보듯 오히려 반공의 역풍을 맞아 혁명 의지 자체를 거세당할 수도 있다.73) 현 정권하에서 작은 비리라도 터지면 과거체제로의 복귀가 순식간의 이뤄 질 것이다. 사실 촛불혁명은 세계적으로 극우 포플리즘 세력들이 득세하는 중에 이 땅에서 발생한 예외적 사건이었다.74) 그로써 촛불 민주화가 난공불략의 성(城)같은 70년 분단 체제와 맞서는 상황이 되었다. 이는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일로서 우선 미/중/일 모두가 원치 않을 것이다. 핵무기와 체제보장을 맞바꾸려는 북 또한 설득하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촛불혁명은 이 길로 정부를 나서게 했다. 4.27 판문점 선언은 바로 그 실상이다, 향후 분단체제 극복 및 남북관계의 재정립이 남/북 이익을 넘어 문명(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것도 그 이유다. 기후붕괴 시대를 마주했기에 근대의 극복, 자본주의 체제 이후를 상상하는 일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동족 5-6백 만 명을 살해한 비극적 한국전쟁 속에 담긴 뜻을 찾을 일이다. 몽양(夢陽)이 독립(스스로 섬)을 민족의 주체(구심)적 각성, 외교(원심)력만 아니라 하늘 뜻에서 구했듯이 말이다.75) 이는 모두 국민주권이 헌법대로 지켜질 때 비로소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역사는 처음이 있어 마지막이 있지 않고 마지막 있어 처음이 있다’는 함석헌의 말을 좋아한다. 그렇기에 4.27판문점이 선언이 친일의 청산이자 분단역사의 끝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3.1 정신을 누적한 촛불 민주화, 그것이 낳은 4.27 선언이 새 역사의 첫걸음이 될 것을 말이다. 이런 열망으로 4.27 선언 1주기(2019년)를 맞아 DMZ 500킬로를 민(民)이 손잡고 인간 띠를 만들었다. 70년 냉전의 상징이었던 판문점 그곳이 남북정상이 오갔고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넘나든 공간 곧 화해와 소통의 장(場)이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체적으로 평화를 만드는 능력을 세계에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76) 조선반도가 오랜만에 한 몸 유기체로 살아 움직이는 듯싶었다. 이런 차원에서 한 북한 전문가의 분석을 기초로 4.27 선언이 지닌 전대 미문적 특성을 살펴보겠다.77)
본 선언서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첫 의제가 앞선 선언과 달리 ‘한반도 비핵화’가 아니라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이란 점에 있다. 비핵화를 후순위로 놓은 것에 대한 비판도 컸으나 남북의 자주성(당사자주의)과 상호 실용적 소통을 우선시 한 것은 대단한 진척이다. 원심력에 대한 구심력(자주성)의 강화를 우선시 했던 까닭이다. 이로써 남측 주장인 선(先)비핵화론과 북의 입장인 선(瑄)평화체제론 간의 우선다툼이 사라질 수 있었다. 최초로 양자 병진(竝進)론을 공식화 시켜 냈던 것이다.78) 하지만 명분(선비핵화)이 후퇴했기에 실제로 미국으로선 더 큰 부담(평화체제보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외교적 진정성을 보여야 할 책무가 발생한 탓이다. 이는 향후 북미 대화를 위해 되돌릴 수 없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또한 본 선언서는 비핵화의 수준과 목표를 ‘완전’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해체 의지를 표명했다. 북쪽에 현존하는 핵시설 일체가 이 말속에 포함되었다.79) 패전국에나 요청할 수 있는 일방적 ‘CVID’ 대신 ‘완전’이란 말에 상호 동의한 것이다. 그렇기에 상기 학자는 이를 북한의 양보이자 한반도의 위기 임계점을 되돌린 사건이라 평가했다.80) 본 선언서 말미에 이런 북(北) 조치를 존중하며 남북이 각기 자기 역할과 책임을 다할 것이란 규정을 삽입했다. 핵미사일 발사중단(북)을 선언하되 한미군사훈련 자체는 양해한다는 북의 전향적 입장이 그 단적인 예(例)가 되겠다. 양자 모두를 동시에 중단하라는 중국의 ‘쌍(雙)잠정중단’안을 진일보 시켰고 이를 불법과 합법의 교환이라 여겼던 미국 측 안을 무력화시킨 것이다.81) 주지하듯 이런 합의 탓에 싱가포르 북미대화가 열릴 수 있었다.82) 북측의 이런 조치에 견줄 때 남 또한 상응하는 노력이 있어야 옳다. 무엇보다 그것은 조선반도에서 미 핵전략자산을 철수 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83) 안타깝지만 한국전쟁에 대한 부정적 기억과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 상호 맞물리며 한반도비핵화는 난제가 되었고 북으로부터 신뢰를 잃는 결과를 낳았다. 남이 북의 진정성을 믿지 못하듯이 북 또한 남의 자주성을 의심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병행은 본래 미국도 원했으며84) 중국의 제안과도 흡사하고 한국정부 역시 동의 한 것임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를 어깃장 놓고 파괴시키는 나라가 평화체제를 반대하는 악의 축(軸)이 될 것이다. 설령 그 나라가 남쪽이든 미국일지라도 말이다. 그럴수록 3.1 정신의 누적적 경험이 남북 간 신뢰 구축을 통해 공동안보의 길로 나가도록 민족을 추동할 것을 믿는다. 몽양(夢陽)의 말대로 민족이 각성하고 미국 포함 아시아 4국 외교를 살려내면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 대북억제를 위한 협소한 한미동맹의 시대는 지나갔다. 70년 지속된 ‘안보담론’을 ‘평화 및 통일 담론’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다. 조선반도 비핵화를 통해 남북은 물론 주변국들의 군사력 과잉을 억지시켜 동북아 평화체제를 이뤄야 할 시점인 것이다. 그렇기에 3.1 정신에 잇댄 4.27 판문점 선언은 끊어진 허리를 잇고 고추 세워 한 몸 공동체를 이루라는 성서의 본뜻과도 여실히 합치될 수밖에 없다. 이런 연유로 4.27 선언 1주기를 맞아 인간 띠잇기 현장에서 선포했던 “평화선언문‘85)을 소개하며 본 장을 마감한다.
”오늘 우리는 70년 세월동안 민족과 국토를 나눈 슬픈 역사의 현장, DMZ를 마주하고 있다. 잘린 허리 탓에 아직도 ’스스로 서(獨立)‘지 못한 나라가 되었으니 안타깝고 원통하다. 분단체제에 안주했던 정치 세력들로 인해 이 땅, 남북의 민초들이 당하 고통이 그 얼마였던가? 허나 자주와 평화를 내걸고 이 땅 독립을 선포했고 민(民)주도의 새 정부를 세웠던 100년 전 그날을 기억하며 그 뜻을 다시 부활시킬 것이다. 4.27 판문점 선언 1주기를 맞아 민(民)의 염원이 표출했다. 죽음과 전쟁의 땅 DMZ를 평화와 생명의 새 땅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이 마음 하나로 우리는 지금껏 낯설었던 이웃들 손을 힘껏 잡았다. 언젠가 한라에서 백두까지 남북의 손을 함께 잡을 날을 기약하면서 말이다. 먼저 우리는 DMZ를 비롯한 이 땅 전역에서 전쟁의 희생양 된 뭇 영혼의 넋을 위로하고 사죄했다. 앞선 비극을 이곳서 재현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무언(無言)으로 외치는 이들 영혼의 소리를 DMZ 곳곳을 생명과 평화의 공간으로 만들라는 하늘 뜻으로 받을 것이다. 분단 70년 지난한 삶을 통해 평화가 우리들 민(民)의 몫이란 것을 학습했다. 그럴수록 주변국들에 휘둘리지 않을 우리들 자주성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우리가 지켜 회복한 평화가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70년 분단의 고통이 세계진보를 위한 밑거름이자 자산 될 것을 의심치 않는다. 그렇기에 세계는 우리를 믿고 끊어진 허리를 잇는 일에 협조할 일이다. 분단체제가 평화체제로 전환되면 이곳은 의당 핵 없는 공간이 되지 않겠는가? 민족을 가르는 장벽을 허물고 이 땅을 자유케 하라. 이곳 DMZ를 평화와 생명의 보고(寶庫), 전쟁 없는 미래의 배움터로 만들 것이다. 70년 각기 다른 체제로 살았으나 창조적으로 수렵되는 민족의 미래, 세계가 놀랄 이 땅의 평화를 펼쳐낼 것이다. 이제 DMZ를 눈앞에 두고 우리 현실을 다시 생각한다. 과거에 얽매어 미래를 옳게 희망하지 못할 경우 3.1 정신이 바랐던 독립국가, 민주 공화국은 우리 것 될 수 없다. 자신들 잘못 덮고 기득권 유지위해 민(民)을 추동하는 거짓 세력에 저항 할 것이다. 남남갈등이야말로 세계평화를 해치는 적폐이기에 민(民)의 각성으로 청산할 것을 선언한다. 종교, 이념, 성별, 신분 차를 넘어 함께 손잡는 4.27 사람 띠잇기 행사가 사람을 편 가르는 일체 분단체제를 불사를 단초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이 땅의 평화가 ’세계의 대세이자, 하늘 뜻이며 민족의 염원‘인 것을 세계를 향해 외치자. 우리들 일상이 남북정상이 오갔던 2018년 4.27 그날의 그 모습처럼 되기를 바라면서 ’우리가 한 몸‘인 것을 소리쳐보자. 이 땅의 평화가 세상의 평화 될 것을 믿으며 이를 분단 70년 고통을 겪은 남북 민(民)의 이름으로 힘껏 선포한다.“
3. 촛불혁명과 4,27 판문점 선언의 실현방식들에 대한 논쟁-’남북연합‘과 ’양국체제론’의 토론을 중심으로
주지하듯 한국전쟁이 가져온 반공 이데올로기 탓에 민족(개념)은 파괴되었고 두 개의 전혀 다른 이념을 내세운 분단국가가 되었다. 한마디로 ‘결손국가’가 된 것이다. 70년 역사가 흐르면서 소통할 수 없는 언어가 생겼고 핏줄의 인연도 옅어지고 사라져 가장 먼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이 교회의 상투어가 되었듯이 분단극복, 하나의 민족이란 말도 남북 정치인들에게 그런 뜻 이상일수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분단체제가 각기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는 수단이 되었을 뿐이다. 물론 잎선 4.27 판문점 선언 이전에도 분단체제를 흔들어 보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다. 7.4 공동성명서(1972년)를 비롯하여 6.15선언(2000)이 대표적 경우이다.86) 하지만 전자는 독재정권 유지의 발판 되었고 후자는 바뀐 정권이 도루묵을 만들어 버렸다. 그렇기에 4.27 판문점 선언 또한 그런 운명에 처하지 않기를 소망할 뿐이다. 촛불혁명으로 구심력이 생겼고 3.1정신을 ’진리사건‘으로 소환했기에 다를 수 있기를 소망한다. 민족 자주성을 해치는 분단을 3.1정신의 채무로 느껴(感) 아는(知) 이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수구세력들 공세와 촛불혁명에 대한 섣부른 확신 탓에 우리들 내부에 틈새를 만들었다. 반공이념 신봉자들이 4.27 선언 무효를 강변하기에 이르렀고 촛불 세력이 세대갈등으로 분열되는 조짐을 드러냈다. 한편에서는 주한미군이 철수할 때가 되었다고 말하며87) 다른 쪽에서는 성조기를 들고 광화문 광장을 소란케 한다. 그럴수록 틈새를 메우려는 소위 ’깨(悟)시민‘, ’생각하는 백성‘(씨ᄋᆞᆯ)이 필요하다. 촛불 혁명을 지속적인 화두(話頭)로 삼자는 제안(백낙청)을 경청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88) 정전협정을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먼저 남남갈등을 가능한 작게 만들 목적에서이다. 해방 후 좌우합작 안(몽양)이 세(勢)를 얻었으면 민족 미래도 달라질 수 있었다는 역사적 반성도 되새김질 하면 좋겠다. 사실 ’공정(세대갈등)‘의 문제와 이념갈등, 남북문제는 서로 얽혀져 있다. 더 큰 실마리를 풀 때 다른 것도 함께 해결될 여지가 크고 많다. 남북문제가 한국전쟁 70년을 맞는 2020년, 다시 핵심의제가 되어야 할 까닭과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한국전쟁은 민족을 파괴시켜 그 복원을 불가능하게 만들만큼 반공이념을 남쪽에 이식시켰다. 탈(脫)이념을 통해 민족89)을 ’경제공동체‘로 재통합시킨 유럽과 달리 조선반도는 오히려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는 이념대결의 전장 터가 된 것이다. 동족 간 전쟁 경험이 조선반도를 독일과 다른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필자가 한국전쟁의 기원과 발단을 친일/항일의 틀에서 봤고 3.1 정신으로 해원(解冤)시켜 상생을 도모 한 것도 결국 이념을 해체시킬 목적에서였다. 기독교 역시 1919년 기미년의 기독교로 되돌아 갈 때 ’민족‘ 미래에 나름 역할이 있을 것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듯 이하 내용에서 필자는 일차적으로 분단체제의 해체, 즉 한반도 평화(통일)체제를 위한 두 담론을 3.1 정신과 4.27선언의 시각에서 논쟁적으로 소개하고 이후 한국 개신교 내부에서 생성된 통일 담론과의 관계성을 살필 생각이다. 우선 <창비>를 중심한 백낙청 계보의 ’흔들리는 분단체제론(남북연합)‘과 김상준의 ’한 민족 두국가설(양국체제론)‘을 상호 비판적으로 성찰할 것이다. 통일을 끝까지 붙들려는 전자, 평화체제를 앞세우며 이를 비판하는 후자를 이해하되 재(再) 비판하는 것이 필자의 첫 과제이며 이 결과를 기존 개신교 통일담론과 견줘보며 결론 장에 담을 내용을 추론할 것이다. 본 과정에서 필자가 지속적으로 관심하는 주제는 ’민족‘이다. 비록 ’-Post(脫)민족‘ 시대에 이르렀지만 ’민족‘에 대한 새 이해를 토대로 조선반도 통일 논의(신학)를 위한 전거(典據)로 적극 활용할 생각이다.
여기서 논쟁의 핵심은 지금껏 서로의 통일 열망이 오히려 독재체제를 강화시켰다는 역사적 모순이다.90) 분단체제를 비판할수록 통일이 난제(難題)가 되는 모순이 지난 70년 역사에서 반복되었다. 남북이 저마다 ’당위‘로서 통일을 주창했지만 UN동시 가입(1992년)되었음에도 상호 국가체제를 인정치 않은 것이 그 원인이자 화근이었다. 그렇기에 통일논의에 앞서 한민족 두 나라의 공존, 소위 양국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분단체제 극복의 첩경이란 의견이 제시되었다.91) 이럴 기회가 몇 차례 있었으나- 노태우 정권과 1987년 체제에서92)- 북한 붕괴론, 북핵 위기론 그리고 통일 대박론(흡수통일) 망상으로 기회를 놓쳤지만 이제 촛불혁명과 4.27선언으로 양국체제론을 과감히 실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촛불혁명을 통해 남쪽이 자신감을 얻었듯이 북 또한 핵무기 완성으로 국가의 자주성을 강조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93) 미국 중심의 일극(一極)체제가 문명권의 공존체제 형식으로 바뀐 것도 때가 이르렀다는 반증일 수 있다. 물론 4.27선언 이래로 적대 청산 프로세스에 불안을 느낀 일본의 방해가 도를 넘어섰고 남쪽의 친일, 반공 세력들의 이념공세 또한 강해졌다. 본래 반공(승공)주의를 자신의 정체성94) 삼은 남쪽의 기독교 또한 자신(복음)을 이념으로 축소시켜 이에 동조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촛불혁명과 4.27선언은 종래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만들었다. 북을 독자 국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한 것이다. 앞으로도 뭇 반발이 예상되나 ’때가 이르렀다‘고 믿고 밀고 나갈 과제가 되었다. 남북 7.4선언 이후 고려연방제를 주장했던 북 역시 오래전에 단일국가로서의 통일을 포기한 것도 고려할 사안이다. 여하튼 분단이념은 남북이 실제로 독립국가로 인정 될 때 비로소 그 생명을 마칠 수 있을 뿐이다. 제재와 압박대신 협력과 공존의 가치로 서로 살 길을 평화적으로 찾아야 하겠으니 말이다. 여기서 통일은 훨씬 이후의 문제가 된다. 평화적 공존이 우선이며 그 방식은 양국체제뿐이라 역설했다. 사실 한국전쟁 이면에서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 결코 두 나라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95) 서로 자기 식대로 하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싸웠던 까닭이다. 이로써 남쪽은 반(승)공의식을, 북은 적화통일을 각기 국시(國是)로 삼게 되었다. 양국체제론의 시각에서 볼 때 이런 식(式) 통일 논의는 독재를 강화시켰던 빌미이자 원인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민족 혹은 ’하나‘의 국가란 말이 앞설 경우 정작 통일은 실종되고 분단체제의 고착화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국체제론은 촛불혁명의 힘으로 상호 주권과 영토를 인정하라 거듭 주장한다. 한마디로 남북은 결코 하나(一)가 아니라 둘(二)이란 것이다.
말했듯이 <<코리아 양국체제>>란 책은 지금껏 분단체제를 흔들며 통일담론을 주도했던 백낙청 생각에 대한 반론에 기초했다. 여기에는 기존 통일 담론들 모두가 실상 체제전환(평화)의 방해꾼이었다는 비판이 깔려있다. 본래 백낙청의 기본 입장은 ’남북 연합‘이었다.96) 물론 그 역시 자신의 ’남북연합‘이 촛불혁명에 부응하는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양국체제의 시각에선 이것은 ’하나‘를 지향하는 강박의 표현으로 보였다. 이에 대한 판단은 후술하겠고 우선 ’남북연합‘에 대한 간략한 이해가 필요하겠다. 중재자 론에 힘입어 몇 차례 회담 결과 아직 낮은 단계이지만 ’남북연합97)‘이란 제도를 논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 백낙청의 생각이다. 이것은 주변국들과는 무관하게 북에 대한 적대가 곧 남에 대한 침공으로 여겨질 수 있는 현실에서 상호 안전장치를 위한 초보적 단계라 할 것이다.98) 당장 통일국가를 이룰 수 없는 상황에서 전쟁억지를 위한 현실적 방책인 셈이다. 이를 최종목표로 삼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다음 단계로의 진척을 서둘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남북연합‘의 단계와 수준을 조금씩 높여 가면 될 일이라 했다. 이 과정에서 북은 남의 경제체제를 추종할 이유가 없다. 전쟁억지, 곧 평화 체제하에서 남북은 각기 자기 식의 경제발전을 도모하면 그뿐이다. 기후붕괴를 초래한 남한 식 자본주의 체제를 북에 이식시킬 이유가 없다. 이에 준하는 정치적 장치가 필요할 것인바, ’남북연합‘이 이룰 과제라 할 것이다. 그러나 ’남북연합‘은 통일자체를 배제한 평화공존을 말하지 않는다.99) 통일과 평화를 이분법적 잣대로 가르며 전자 없는 후자만 말하는 것을 무모하다 여겼다. 통일(하나)집념을 버려야 평화가 솟구칠 수 있다는 이런 주장은 사실 ’양국체제’논쟁 이전부터 존재했었다.100) 아직 ‘양국체제’란 말을 사용치 않았을 뿐 실상 양분법을 공유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연합’은 이점을 용인할 수 없었고 이를 4.27 판문점 선언(정신)과 어긋날 뿐 아니라 무책임하다고 평가했다.101) 물론 양국체제론을 통해 종북 몰이가 다소 줄어드는 효과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북을 타자화(외부화)시키는 고질병이 쉽게 치유될 리 없다. 역으로 통일배제는 현 노동당규(북)나 헌법(남)자체를 부정하는 일로서 분단체제를 넘어 항구적 분단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별 국가로서 남북이 오히려 주변국에 휘둘려 경쟁의 희생양 될 개연성 또한 클 것이다. 물론 백낙청 역시도 기존 민족주의에 터한 단일 국민국가를 강제하지 않았다. 단지 자의적으로 만든 양분성이 벗겨 질 때 어떤 식이든지 통일을 위한 새 길이 열 릴 수 있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상준은 4.27 판문점 선언이 ‘양국체제론’을 지향한다고 피력했다. 두 정상의 종전선언이 남북의 법 그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기회라 본 것이다.102) 북이 원하는 것도 실은 통일이 아니라 생존(체제)보장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하나(통일)’에로의 열망과 그것이 초래한 악순환을 촛불혁명의 힘으로 끊어내자고 한 것이다. 오히려 백낙청이 원하는 진정한 ‘남북연합’은 양국체제로부터 비롯할 수 있다고 믿었다.103) 상호 독립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한 ‘남북연합’ 역시 그 실현이 어렵다는 것이다. ‘양국체제’의 시각에서 이것은 오히려 ‘분단체제를 상정한 개념일 뿐이었다. 북을 국가로 인정 않는 보수 강경론과 결국 구조적으로 같아진다는 것이다.104) 남북을 정상국가들의 관계가 아니라 지금껏 그랬듯이 예외적인 특수 관계로 봤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남북이 ’둘이 아닌 하나의 체제‘라는 사실로서 말이다.105) 현재로선 두 체제이지만 본래 하나였고 최종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여전히 살아 있다. 여기에는 같은 민족이 두 국가를 이룬 탓에 외국과 같을 수 없다는 전제가 있다. 남북이 애시당초 ’통일‘을 지향하는 두 국가라는 뜻이겠다. 이처럼 ’하나‘(통일)를 강조하면서 분단체제가 허물어 질 수 있다는 논리적 신념을 존속시켰다. 하지만 분단체제의 장기화로 비정상적인 체제가 도래했고 이를 삶의 조건으로 수용한 비정상의 정상화가 우리들 일상이 되었다.106) 70년 지속된 이런 일상과의 단절은 남북 어느 쪽에도 결코 쉽지 않다. 그렇기에 ’양국체제‘ 주창자들은 분단체제의 극복을 통한 ’남북연합‘을 연목구어이자 사상누각이라 봤다. 오히려 남북연합이 분단체제를 지속시키는 자기모순에 빠질 수 있다고 염려했다. 이에 더해 어떤 형태로든 남북 현존체제(국가)의 붕괴를 통해 이룰 수 있는 통일(하나)은 환상일 뿐인 것을 역설했다.107) 남북체제(이념) 모두가 ’거짓‘이라는 냉전적 사고가 더 이상 유효한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진짜(참)는 탈현대시대 속에서 찾을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점에서 ’남북연합‘은 냉전(분단)적 사유에 기초한 퇴물로 여겨졌고 양국체제를 그 가치 실현을 위한 담론으로 재차 부상시켰다. ’양국체제‘의 입장에서 백낙청의 ’국가연합‘는 물론 북의 ’연방제’ 또한 통일로 직행하는 계기를 차단, 부정하는 방해물로 간주한 것이다.
이상에서 ‘남북연합’과 ‘양국체제’의 두 담론 간의 입장 차를 가능한 약술, 소개했다. 본 장을 마무리하며 이들 논쟁에 대한 필자의 평가를 덧붙여야 하겠다. 이와 연결시킬 기존 개신교 통일 담론 서술은 별도 장에서 다뤄 질 것이다.108) 우선 이들 모두 촛불혁명과 4,27 선언을 바르게 잇고자 애쓴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더욱 이 정신이 3.1 운동(혁명)에까지 소급되기에 더더욱 중요하다. 저마다 70년 한국전쟁의 영향 사(史), 곧 분단체제로부터의 탈피를 목적했고 그로써 ‘스스로 서’는 길을 찾고자 했다. 3.1정신이 제국이 아니라 민국을 선포했듯이 4.27선언 또한 종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꿀 책무가 큰 탓이다. 내전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의 확전 탓에 민족의 힘만으로 통일을 이룰 수 없는 것이 애석하나 70년 지속된 분단체제는 뜻 모아 종식 시켜야만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분단체제론에 터한 ‘남북연합’과 남북을 두 국가로 보자는 ‘양국체제론’이 맞서게 되었다. 짧게 재정리하자면 전자는 후자에게서 남북 간 영구분단의 위험 및 주변강대국들로 인한 주권 침해의 여지를 보았다. 서로 다른 두 이념 국가가 공식화될 경우 조선반도는 주변국들에 의해 더 큰 휘둘림을 당할 여지가 커질 수도 있겠다. 조선반도내의 역학관계가 실종되고 이념에 따른 개별국가로서 자주성이 축소될 수 있는 까닭이다. 상호 UN가입국이라 해도 ‘하나이면서 둘’이라는 특수 관계에 방점을 찍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럴수록 이를 부정하는 양국체제를 현실을 무시한 무책임한 처사라 비판했다. 반면 후자는 전자를 분단체제를 강화하는 자기 모순적 담론이라 일갈했다. 지속(궁극)적으로 일국(一國)을 전제했기에 오히려 분단을 고착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분단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통일은 아주 먼 미래이거나 이룰 수 없는 과제란 인식도 배제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북연합’에도 수많은 높낮이의 과정과 단계가 있다는 합리적 사실조차 주목하지 않았다. ‘양국체제’만이 ‘남북연합’의(을 위한) 필요/충분한 조건인 것을 오로지 강변했다.
이상의 논의는 한국전쟁 70년을 맞는 2020년 곳곳에서 회자되는 중이다. 초기, 학계에서 학파들 간의 논쟁이었으나 <<코리아 양국체제>>의 출간으로 대중에게까지 그 토론을 확산시켰다. 저마다 일리(一理)있기에 이런 담론투쟁으로 ‘깨시민’의 양산을 기대할 수 있겠다. 모든 토론이 그렇듯이 양편을 모두 지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한편에 서서 논쟁을 바라보고 지지하되 이 과정에서 자기입장 또한 보완하면 될 일이다. 여기서 필자는 일단 ‘남북연합’을 기독교(신학)적 관점에서 지지할 생각이다. 통일보다 평화를 앞세우는 의견이 대세인 상황에서 3.1정신을 소환하고 싶은 것이다. 우선 평화와 통일을 나누는 시각에 이의를 제기한다. 양자를 ‘동시적 비동시성’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 평화체제가 곧 통일로 가는 길인 까닭이다. 분단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통일로 볼 이유는 없다. 그럴수록 새로운 대안체제가 논의되어야 옳다. 서로를 인정하는 ‘양국체제’도 옳겠으나 서로를 버려 얻을 새(新) 체제로서의 통일논의109) 또한 중단될 수 없는 소중한 작업이다. 통일구상 없이 평화체제를 논하는 것은 조선반도의 미래를 축소시킬 수 밖에 없다. 이렇듯 선후를 나눠 우선성을 강변할 때 분단 70년과의 온전히 해원(解冤) 역시 어려울 것이다. 내전의 확대로 세계사적 죄악들이 조선반도에 집적된 까닭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전쟁의 고난은 ‘양국체제’로 청산되기 어렵다. 세계체제 모순110)과 엮인 고리를 풀어낼 과제가 분단극복과 결코 무관치 않은 까닭이다. 전범국가인 일본 대신 겪어야 했던 분단의 고통이었기에 그 뜻 역시 물어 찾아야만 한다. ‘양국체제론’은 이런 지적들을 ‘이념의 과잉화’111)라 역 비판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비판을 ‘이념(상상력)의 단순화’란 말로 재(再) 반박하고 싶다. 결국 ‘양국체제론’은 현실적이란 이유로 상대적 ‘쉬운 길’을 택한 듯 보인다. 종교와 계급, 이념 차(差)까지 아울렀던 3,1 정신과 결을 크게 달리한 것이다. 하지만 촛불혁명과 4.27 선언은 우리에게 보다 더 큰 상상력을 실험하라 명한다. 역사적 공간이었던 만주(滿洲)도 우리들 의식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곳이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남북 모두에게 소중한 정신적 원류인 까닭이다. 이점에서 ‘양국체제론’의 또 다른 허약성, 민족개념의 부재를 지적해야겠다. 양국체제론은 근대 서구적 국가 개념에 충실한 나머지 민족개념을 처음부터 고려치 않았다. 이 담론 속에서 국가는 늘 상 민(民)보다 가치론적으로 앞섰고 우선적 개념이었다. 본 담론은 한국전쟁의 발단과 기원이 친일/항일의 틀과 무관치 않았고 민족분단 역시 이에 뿌리를 두었으며 친일잔재를 청산 못한 남쪽 현실을 온전히 반영할 수 없었다. 이점을 염두에 둔 채로 필자는 다음 장에서 평화와 통일을 동시적 비동시성(不二)으로 봤으며 민족개념을 중시했던 기독교 신학자들의 통일논의들을 살펴 볼 것이다.
4. 개신교 신학(자)의 통일 담론들-통일 신학의 전거로서 ‘민족’의 재발견
4.27 판문점 선언이후 기독교 차원에서 새롭게 쓰여 진 통일 관련 논문이 아직까지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차에 한국전쟁 70년 시점에서 NCCK가 민족 희년을 다시 선포한 것은 시의적절한 일이었다.112) 그럼에도 이전에 발표된 몇 몇 통일담론들이 다시 엮어지면서 토론에 열기를 주고 있으니 다행스럽다. 쓰인 시점은 4.27 선언 훨씬 이전이었지만 이삼열, 손규태와 같은- 비록 감리교에 뿌리를 두지 않았으나- 기독교 학자들의 책들이 앞선 주제였던 ‘남북연합’과 ‘양국체제론’의 토론에 신학적으로 참여할 근거를 제공한 것이다. 이는 민족분단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오래되었고 고민이 깊었음을 반증한다. 신학의 속성 상 더 본질적이며 당위(가치)적인 것을 추구했던 결과일 것이다. 사실 신학자들은 군부 독재 시절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 선언’, 소위 ‘88선언’을 통해 통일에 대한 염원을 세상에 펼쳤다. 필자는 어느 한 글에서 이를 기초한 9명의 신학자들을 3,1 선언 대표자 반열로 격상시킬 것을 주장했다.113) 1995년을 1차 통일 희년의 해로 선포한 것도 본 선언에 따른 후속조치였다. 위 두 학자의 통일 서적들도 이런 정신에 기초하여 서술된 것이다. ‘88선언‘자 중 한 사람이었던 기독교 철학자 이삼열은 평화와 통일을 분리시키는 시각에 강한 이의를 제기했고 윤리학자 손규태는 간과된 민족의 문제를 통일논의를 위해 복원(복권)시켰다. 통일을 이념너머의 민족 문제로 소환한 것이다. 이 책 출판 후 곧 운명을 달리 했으니 그의 책은 유작(遺作) 되어 민족 자주의 평화통일을 호소하고 있다. 비록 쓰인 시점의 선후가 바뀌었으나 이들 논지는 ‘양국체제론’과 ‘남북연합’에서 불거진 갈등에 대한 신학적 답이자 견해였다. 평화와 통일이 비동시적 동시적(不二) 과제라는 것과 통일 담론에 있어 민족이 계급, 이념 그리고 경제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이들 신학적 판단이 참으로 귀(貴)하고 중(重)하다. 필자 역시 이들 견해를 힘껏 수용하여 펼쳐낼 생각이다. 본래 이 내용을 지난 장과 연결 짓고자 했으나 논의가 길어져 이처럼 별도(4장)로 다루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 장 내용을 가능한 한 짧게 정리하고 마지막 결론 장에서 골자이자 핵심인 통일 신학에 긴 지면을 할애할 생각이다.
이삼열은 <평화체제를 향하여>>에서 ‘88선언’의 의미를 분단체제보다 통일우선의 원칙을 갖고 5가지의 실천과제를 제시한 데서 찾았다.114) 통일은 민족 스스로 이룬다는 ‘자주의 원칙’, 폭력이 아니라 평화로 이룬다는 ‘평화의 원칙, 민족동질성에 근거한 ’신뢰와 교류 우선의 원칙‘, 각 주체들의 ’민주적 참여의 원칙‘ 그리고 체제보다 민(民)을 우선하는 ’인도(주의)우선 원칙‘이 그것이다. 1995년을 통일 희년(禧年)으로 선포한 것도 이 다섯 원칙에 기초해서였다.115) 희년선포가 하느님 일방적 행위(명령)였듯이 ’통일‘을 신학적 당위, 곧 ’하느님 뜻‘으로 여긴 것이다. 이처럼 신학자들은 통일 자체를 목표로 여겼다. ’분단(체제)을 민족의 원죄라고 믿은 결과였다. 그럴수록 통일은 민족의 구원일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가 민족에게 줄 선물(복음)이 된 것이다.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할 이유도 여기서 찾았다. 바로 이것이 ‘88선언’이후 곳곳- 스위스, 일본) 등- 에서 모였던 남북기독교 대표자들의 공통 인식이자 고백이었다.116) ‘통일’을 당위, 곧 신의 뜻으로 믿었기에 남북 지도자들은 오로지 통일의 방식만을 논의했다. 함께 사는 ‘공생적 통일’, 닮아가는 ‘수렴적 통일’, 한 체제를 고집 않는 ‘창조적 통일’ 등이 바로 그것이다.117) 여기서는 흡수통일이나 통일대박이란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남과 북을 양국 체제로 인정하려는 발상 자체도 없다. 통일이 곧 평화였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남북은 ‘하나의 민족교회’를 상상할 수 있었다. 공생, 수렴, 창조란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함께 사는 것(공생)이 우선이 된다. 어느 편이 다른 쪽을 압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수렴은 다름을 전제로 한 개념이다. 다르지만 서로 닮아갈 여지가 있다는 말뜻을 담았다. 다른 것 자체를 기정사실(절대)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란 말과 자연스레 연계된다. 수렴 과정에서 새로운 체제(창조)를 기대하란 의미이다. 상호 간 차이를 세 체제를 위한 토대라 믿은 까닭이다. 이점에서 기독교 통일논의는 ‘양국체제론’보다 ‘남북연합’ 쪽에 근접한다. ‘다름’ 자체보다 과정적 수렴을 중시했고 창조로서의 새 체제(통일)를 명확히 언표 했던 때문이다. 기독교계의 이런 변화를 저자는 1980년 5,18 광주혁명의 교훈에서 찾았다. 외세가 개입된 분단체제 하에서 평화가 희생될 수밖에 없음을 자각한 것이다. 그래서 정부주도의 先민주(경제) 後통일의 당시 기저를 뒤 없고 통일을 앞세울 수 있었다.118) 저자는 이것을 ‘88선언’의 열매로서 통일담론을 위한 기독교(신학)의 가장 큰 공헌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반대급부도 생겨났다. ‘양국체제론’이 염려했듯이 기독교계 또한 통일 논의로 분열된 것이다. 先통일의 진보적 생각이 보수기독교인들의 반공의식을 집약시키는 계기로 작동했다. 그럴수록 저자는 사회 철학적 배경을 갖고서 통일을 위한 기독교 역할을 더욱 강조했다. 이런 갈등을 더한층 극복할 과제로서 수용한 것이다. 평신도 철학자 였으나 그는 신학자 이상으로 다음 장의 주제가 될 통일신학 정립을 호소했고 스스로를 채근했다.119) 그에게 있어 통일신학은 (외세로부터의) 민족해방의 신학이자 동시에 기독교 본질을 드러내는 화해의 신학이었다. 그렇기에 인류 화합을 위해 신(神)이 인간 되었듯이 남북 민족을 결합시키는 성육신 신비가 조선반도에서 재현되길 소망했다. 이는 저자에게 있어 통일이 정치, 경제, 외교적 차원 그 이상이었음을 적시한다. 神과의 화해 없이 민족 해방(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럴수록 분단에 대한 철저한 죄책고백을 자신이 속한 남쪽의 기독교인(교회)들에게 역설했다. 그들에게 오히려 자신들 반공의식을 회개하라 명한 것이다. 저자가 보안법 철폐를 비롯하여 군비축소를 누구보다 강력하게 주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남북 간 상호 주체성(신뢰성)의 확산이야말로 성육신의 토양이라 믿은 결과였다. 神과의 화해(통일)가 인간과의 화해(평화)와 동시적 사건이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를 은총과 자유의지의 통섭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독일교회의 경우가 이를 정확히 예시한다.120) 당시 독일 주변국들은 통독조건으로 숫한 전쟁으로 빼앗긴 자신들 땅의 반환을 요청했다. 통일된 독일의 미래가 두려웠던 것이다. 영토반환에 대한 찬반으로 독일 내부에서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식으로 남남갈등이 극에 이른 상황이었다. 당시 교회는 빼앗은 땅 일체를 돌려주고 통일을 이루자는 의견을 피력했다, 정부는 이 제안을 따랐고 주변국을 안심시켰다. 통독과정 속에 있었던 독일교회의 이런 역할이 한국교회에게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통일보다 앞선 가치는 없을 것이다. 통일이 곧 평화였으니 말이다.
이처럼 이삼열은 ‘통일’을 우선시했다. 정확히는 이것을 평화와 동시적 사건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에게 평화는 항시 통일 지향적 평화여야만 했다. 이로써 그는 사회과학자들에 대한 기독교(신학)적 소임을 다한 것이다. 이제 민족에 대한 이야기로 방향을 틀어야 할 시점이다. 기독교 윤리학자 손규태의 통일담론을 말할 차례가 된 것이다.121) 말했듯이 손규태는 민족개념을 통일논의를 위해 다시 불러냈다. 이것은 다수 신학자들이 민족개념을 도외시 한 것과 크게 변별된다. 민중 신학자 였으나 그가 한국 신학자 중 유독 김재준과 변선환을 주목한 것도 민족개념에 대한 선호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122) 사실 북쪽 학자들과 자주 만나 통일을 논했던 이삼렬에게도 민족은 중요했다. 그 역시 민족의식을 분단극복의 주체로 봤기 때문이다.123) 그러나 그의 민족개념은 북쪽 학자들의 견해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서술되었다. 반면 이하에서 다룰 손규태는 ‘민족’ 그 자체를 신학 화시켰다. 민족신학으로서 통일신학을 펼친 박순경을 중요하게 다룰 만큼 말이다. 충분하게 전개되지 못했으나 마지막 장에서 다룰 논지와 연결되기에 필자에게 중요한 글감이 되었다.
본회퍼를 전공한 윤리학자 손규태에게 있어 통일은 기독교적 평화의 다른 말이었다. 이 때 평화는 정의를 동반한 개념이었고 정의란 빼앗긴 권리를 되찾는 일로서 조선 반도에 있어 통일과 등치된다.124) 더구나 남북분단이 동북아 평화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통일이 평화의 선(先)조건이 된 것이다. 하지만 본회퍼의 말대로 그는 ‘궁극적인 것’과 ‘궁극 이전의 것’을 혼동치 않았다. 앞의 것이 하느님 나라의 평화라면 후자는 조선반도 통일 현실을 적시했다. 차원은 달랐지만 양자의 관계는 나뉠 수 없을 만큼 밀접했다. 궁극이전을 통해 궁극에 이를 수 있는 까닭이다. 이렇듯 통일이 하느님나라와 상응하기에 손규태는 평화를 단지 안보와 동일시하며 미국 군사력에 의존하는 보수 신앙인을 반(反)그리스도적이라 일컬었다.125) 따라서 북쪽 핵이 두려운 만큼 남쪽에 배치된 미국 핵 또한 폐기시키라 말했다.126) 핵 그 자체가 빈(反)신학적, 반(反)기독교적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반공은 안보의 다른 이름이자 복음이었기에 공산주의(北)를 늘 상 멸절(정복) 대상으로 삼았다. 선악(善惡) 이분법적인 기독교 이념이 이를 거듭 추동했고 그 실상이 지금 전광훈 류(類)의 교회집단에게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와중에서 절대 군사력을 앞세운 미(美)제국주의는 마치 기독교의 속성처럼 그렇게 자신에게 귀속(歸屬)만을 원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정치, 군사적 주권을 예속 당했고 더더욱 정신적인 식민지로 전락해 버렸다.127) 그럴수록 손규태는 남(南)의 비(非)자주적, 비(非)민족적 행태를 비판했다.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중첩상황을 꿰뚫어 보았으나 후자를 전자보다 앞세울 수는 없다고 여겼다.128) 따라서 계급모순에 치중하여 ‘민족 자주성’을 간과한 민중 신학과도 일정거리를 두었다. 이들에겐 민중만이 실재였던 까닭이다.129) 반면 민족은 과거 지향적 개념으로서 개인을 부정하는 쇼비니즘으로 평가절하 되었다. 하지만 손규태는 민중과 민족을 연결시키는 여성 통일신학자 박순경을 주목했다. 그 역시 박순경이 그랬듯이 민중(계급)우선성을 비판한 것이다. 오히려 민족과 민중을 상호 분리되거나 서로 해소될 수 없는 개념으로 보았다. 오히려 이하 내용처럼 민중을 곧 민족이라 여겼다. ”민중은 좁은 의미에서는 민족의 일부분을 지칭하나 넓은 의미에서 그것은 민족이다. 민족, 민중을 연결해서 말하는 이유는 한 민족사 전체가 민중현실의 자각에서부터 새롭게 창출되어야하기 때문이다.“130) 민족사를 민중현실의 자각에서 봤기에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두 개념이었다. 단지 외세로 인한 피압박 상황 탓에 민족을 정치적 주체로 삼을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여기서 손규태는 민족모순의 극복, 즉 민족 자주화를 통일을 위한 우선적 주제로 여겼던 감리교 여성 신학자 박순경을 지지했다. 그럼에도 박순경의 ‘민족’ 개념 속에는 손규태가 숙고치 못한 종교(문화)적 차원이 담겼다. 박순경이 민중 신학 이상으로 토착화 신학 사조를 비판했으나 그의 민족 신학은 조선반도의 종교(문화)사를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었고 그녀의 통일신학 역시 ‘오래된 미래’처럼 옛 것이지만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새롭다. 평생 감리교와 관계 맺지 않았으나 분명 감리교적 유산일 것이다. 바로 이점을 여성 토착화 신학자 이은선이 밝혔고 그로써 박순경의 통일신학의 시공간적 지평을 넓혀 주었다. 결론 장에서 좀 더 세밀하게 밝힐 내용으로 남겨 둔다.
5. 민족과 세계분단의 극복을 위한 민족 신학으로서의 통일 신학- 메시아적 미래의 시각에서
지금껏 긴 지면을 메웠으나 정작 ‘민족’과 ‘통일’이라는 두 개념을 건져냈을 뿐이다. 너무나 당연한 두 단어이지만 늘 상 오해를 불러 일으켰고 논점이 다양했기에 쉽게 가져다 쓸 수는 없었다. 본 장을 시작하기 전, 이 두 개념에 대한 필자의 시각을 재차 정리해 두어야 할 것 같다. 본장에서 다룰 통일신학을 논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겠다. 앞서 필자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1930년대까지 소급했다. 항일/친일로 양분된 민족경험이 한국전쟁의 내적원인일 수 있다는 견해를 따른 것이다. 이런 한국전쟁으로 오천년 지속된 민족이 영구분단의 위기에 처했다. 국제전(이념 전쟁)으로 확대된 탓에 지금껏 간과되었으나 민족파괴를 초래한 한국전쟁을 동서이념에 앞서 ‘친/항일 구조에서 찾는 것이 작금의 현실에서 유효하다. 3.1 선언 이후 백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핵무기를 빌미삼아 통일을 부정하는 친일세력들이 항존 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국전쟁을 조선반도 역사 이래 최대 비극이라 일컫는다. 따라서 민족 해체의 비극을 극복, 치유하는 것이 오늘 이 땅에 사는 민족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민족이 친/항일의 대립이전 그리고 일체 이념을 초극하여 선포된 3.1 선언에 주목했다. 자주성, 평화 그리고 세계주의를 표방한 3.1 정신으로부터 작금의 지리적, 정신적 분단을 치유코자 한 것이다. 3.1 정신이 제국을 ’민국‘(民國)으로 바꿨듯이 그렇게 분단체제를 종식시켜 새 미래를 열 수 있는 토대라 생각했다. 실제로 기독교 세력, 민족주의자 또한 사회주의 이념이 힘 합쳐 신간회(新幹會)를 조직, 일(日)제국과 맞섰던 것은 3.1 정신의 DNA가 우리 속에서 작동된 결과였을 것이다. 이후 숱한 단계를 거쳐 3.1 정신이 촛불 혁명으로 재(再)표출 되었다는 것이 우리들 확신이다.131) 민(民)의 힘으로 새 정부를 세웠고 3.1 정신의 꿈을 다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원심력이 여전한 족쇄였으나 남북이 가야할 새 길을 4,27 판문점 선언을 통해 열어젖힌 것이다. 앞서 필자는 본 선언이 이전과 다른 점을 세밀히 적시했다. 자주성과 평화 그리고 세계주의를 담았던 3.1 정신의 새 버전이라 여긴 것이다. 말했듯이 본 선언 1주기를 기념하며 DMZ 인근에서 50만의 민(民)이 함께 손잡은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4.27 선언으로 민(民) 속에 담긴 3.1 정신의 DNA가 재 활성화 된 결과였다. 외세의 방해 탓에 남북이 함께 손잡는 일이 힘겹겠으나 ’민‘(民)의 각성(깨침)은 이후 통일여정에 큰 자산이 될 것이다.
촛불혁명과 4.27 정신을 소환한 두개의 통일담론이 서로논쟁 중인 것을 지난 장에서 살펴보았다. 저마다 분단체제의 극복을 말했으나 그 방식은 달랐다. 주지하듯 분단체제는 남북을 아우르는 상위체제이다. 분단체제에 기생하며 적대적 의존관계로 존속했던 것이 지난 70년 역사였다. 안보가 우선하는 국가폭력의 시대를 살아왔고, 기독교 역시 분단(반공)신학132)으로 이에 크게 일조했다. 남북연합(백낙청)과 양국체제(김상준) 모두는 실상 분단체제와의 싸움이었다. 이보다 이른 시기에 있었던 기독교계 ’88선언‘처럼 말이다. 하지만 전자는 통일을 목적했고 후자는 두 국가론을 지향했다. 나중 것이 통일을 말할수록 분단체제가 강화되곤 했던 현실적 모순을 극복하는 방책일 수도 있다. 통일보다 평화가 우선이며 통일 또한 평화를 위해 존재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국체제론은 평화를 내세워 이념의 공존, 경제적 실리를 중시했기에 한국전쟁으로 야기된 민족해체를 아프게 고민하지 못했다. ’민족‘이야말로 한국전쟁을 거쳐 3.1정신으로 소급될 핵심개념이자 가치임에도 말이다. 이점에서 양국체제론은 탈(脫)민족주의적 시각의 산물일 것이다. 민족을 임의적, 허구적 개념이라 본 탓에 양국체제가 쉽게 발설된 것이리라. 이울러 ’양국체제론‘ 속에 통일열망(지향성)이 담기지 못한 것도 지적될 사안이다. 필자가 백낙청의 입장을 기독교적으로 수용했던 것은 다음 몇 가지 이유에서였다. 무엇보다 분단체제를 세계체제와의 연계 속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북 상위체제로서뿐 아니라 세계의 현실이기도 했다. 조선반도내의 분단극복이 세계사적 과제라는 뜻이다. 이로써 세계시민들과의 연대를 맺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고난에도 뜻이 있다‘는 민족 수난사 또한 적극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그의 ’분단체제론‘은 지리적, 정치/경제적인 물적 토대에서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 영역에서도 유효한 개념이었다. 인문학자로서 정신적 분단이 초래할 위험성에 대한 성찰을 깊게 했다.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자신이 귀의한 원불교의 영향력일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남북연합‘론은 민족에 의한 통일을 백사천난(白死千難)의 과정을 통해서도 이룰 과제라고 여겼다. 높낮이를 지닌 ’남북연합‘의 각 단계가 궁극적으로 통일을 지향, 목적해야 한다고 믿은 것이다. 주지하듯 두 신학자들, 이삼열과 손규태가 필자의 이런 생각을 적극 지지해 주었다. ’88선언‘을 통해 분단체제의 적폐를 고발하며 ’선(先)통일‘을 말했고 통일을 위해 ’민족‘개념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까닭이다. 평생 경계인으로 살았던 재독 철학자 송두율의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133) 이제 한국전쟁 70년을 맞는 시점에서 민족을 해체, 붕괴시킨 지난 역사-실패한 역사-를 구원할 기독교적 답을 말할 지면에 이르렀다. 앞선 통일담론들과 토론 속에서 분단신학 대신 통일신학이란 말이 널리 회자되었으니 그 구체성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이제 다시 묻는다. 기독교 통일신학, 과연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먼저 5장의 제목부터 설명해야 될 듯싶다. 필자는 본고의 결론으로서 ’민족과 세계분단의 극복을 위한 민족 신학으로서의 통일신학-메시아적 미래의 시각에서‘란 제목을 내걸었다. 여기서 민족과 세계분단이란 말은 분단체제가 조선반도 내 현실이지만 그 현상이 세계적 공간에서 확대 재생산되며 단지 물적 토대만이 아니라 정신적 차원까지 해당되는 개념임을 적시한다. 또한 통일신학이 조선반도의 통일 뿐 아니라 세계체제의 변화까지 목적하는, 한 마디로 ’실패한 과거 자체‘를 구원하는 신학인 것을 강조할 생각이다. 통일을 궁극(하느님나라) 이(직)전의 상태로 보고자 한 것이다. 민족 신학이란 말 역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란 차원에서 긍정성을 함의한다. 박순경의 신학적 작업을 염두에 둔 발상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메시아적 미래‘란 말이다. 기독교적 구원을 미정고(未定稿)로 봤다는 의미이다. JPIC의 주창자 폰 봐이젝커가 말했듯 ’기독교 구원이 아직 실현되지 못한 상태란 것이다.134) 지금껏 기독교는 실현된 종말(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자신의 절대화를 강변했다. 그로써 유대교 신학의 핵심인 ‘미래’를 빼앗고 그들과 갈등했으며 결국 분리되었다.135) 반유대주의의 신학적 뿌리가 되었고 이웃 종교를 하대(下待),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본장에서 필자는 기독교 구원의 미래적 차원에 방점을 찍을 것이다. 기독교의 자기 정체성을 확대 시킬 목적에서다. 기독교의 부활을 유대교 출애굽의 재현으로 볼 여지도 있어야 할 것이다.136) 이 과정에서 조선반도 내 뭇 종교가 통일여정에 있어 파트너가 될 수 있고 되어야함을 강조 할 것이다. 앞선 책에서 이삼열은 다음 세 차원에서 포괄적인 통일신학을 요청했다.137) 정치문제만이 아니라 성서(선교)적 과제로서 통일,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을 비롯한 여타 이념들(종교들)과의 대화 및 성찰로서의 통일 그리고 평화와 통일 관계의 역사(신학)적 조명 등을 통일신학의 요체로 삼았다. 필자는 이와 연계시켜 통일신학의 세 차원을 다음처럼 달리 언표 하겠다. 통일신학의 성서적 측면, 한국적 측면 그리고 생명(문명사적)적 측면이 그것이다. 이것은 조선반도에 유입된 초기 개신교의 선한 뜻을 재구성한 것이다.138) 따라서 앞선 논의를 근거로 통일신학을 성서(복음)적이고, 한국적이며 생명적인 차원에서 서술코자 한다. 종래 및 작금의 분단신학이 비성서적이고 비한국적이며 반생명적인 것을 적시하면서 말이다.
5-1 통일신학의 성서(신학)적 토대- 복음의 정치 신학적 함의
기독교 윤리학자 손규태는 자주적 통일을 위한 신학(성서)적 근거로 다음 세 개념을 예시했다. 회개와 화해 그리고 새로운 인간이 그것이다.139) 독일의 흡수통일, 물론 베트남의 적화통일 그리고 난민(難民)을 양산 중인 예멘의 통일과 변별된 평화통일을 위한 신학적, 성서적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하느님 나라에 맞춰 재정위하는 것이고 화해는 원수된 것을 품는 일이며 그로써 민족자체가 새롭게 되는 것을 그리스도안의 존재(Sein in christo), 곧 구원받은 새(新)피조물의 실존이라 했다.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가 외친 것이 회개였고 이 땅에 오선(성육신) 이유 자체가 신/인(神/人)간의 화해를 위해서였으며 이 사실을 수용하여 새 삶을 사는 것이 구원이기에 본 성서적 근거들은 통일신학의 정립을 온전히 도울 수 있다. 더구나 다르다는 이유로 파당(분파)만들어 적대하는 일을 성서가 이단(異端)으로 규정했던 것을 기억할 일이다.140) 이는 종래의 분단신학이 곧 이단적이었음을 반증하는 바, 회개란 이로부터의 돌이킴이라 말해도 좋겠다. 교리, 이념을 비롯한 이해관계(지연, 학연)등으로 나눠진 목하 기독교 존재양식을 벗는 것 자체가 회개의 첩경이자 본질일 것이다. 이하에서 필자는 이상의 세 근거를 갖고 로마서를 풀어내어 통일신학의 전거(全擧)로 삼고자한다. 이로써 분단신학이 아니라 통일신학이 무엇보다 복음적인 이유를 제시할 것이다. 성서신학자 M. 보그와 J. 크로산의 저서에서 배운 바 컸음을 밝힌다.141)
주지하듯 로마서는 일체의 생득적 특권을 부정하는 언사로 시작했다. 그것이 이념이든 종교이든 그리고 유대인의 자랑거리 율법일지라도 일체를 무효화시켰다. 그것들이 존재했으나 세상이 한 치도 나아지지 못했던 까닭이다. 하느님의 의로움(義)을 드러내지 못했기에 의로운 자는 세상천지에 없다는 것이 바울서신의 첫 언사이다. 마치 예수가 임박한 하느님 나라를 전하며 회개를 요청했던 것과 맥락이 같다. 이처럼 로마서는 철저한 자기 부정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의(義)가 새롭게 나타났음을 믿으라 하면서 말이다. 하느님 의(義)는 십자가, 곧 예수 죽음의 케리그마일 것이다. 신심(信心)의 표현으로 예수는 하느님과 세상, 세상과 세상의 화해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했다. 이 사실을 믿고 사는 이가 바로 새 피조물이자 그리스도안의 존재일 것이다. 로마서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바로 ‘엔 크리스토’(En Christo)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종교적 언사만이 아니었다. 구체적인 역사적 삶의 현장에서 이룰 과제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아는 대로 바울은 제국 로마와 맞설 목적으로 교회공동체를 일군 사도였다. 교회를 통해 당시 제국을 정신적으로 능가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제국은 ‘분리하여 통치하는 일에 익숙했다. 하지만 바울의 공동체는 달랐다. 하느님 의(義)로 나뉜 것들을 통합하는 것이 존재 이유였던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는 것은 본래 하나이어야 할 이들이 나뉘어 있는 까닭이다(롬 8:1-8)142) 그렇기에 이방인 사도였으나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가 되기를 원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 아들들, 곧 그리스도 안의 존재들로 재탄생될 때 나타날 때 가능하다. 유대인 역시 율법이란 특권을 포기해야만 되었다. 이는 북의 경우 주체사상을 포기하는 일만큼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제국 로마와 변별된 새로운 방식의 세계를 상상했다. 당시로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통일은 공히 코스모 폴리탄적 차원과 의미를 지녔다. 이렇듯 전 피조물로 일컬어지는 세계차원의 통일을 전제로 바울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의 하나 됨을 열망했다. 성서는 자기 동족 유대인을 향한 바울의 처절한 연민을 가감 없이 전했다(롬9:1-5), 정작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질지라도 동족, 유대인과 하나 되고 싶다는 절규를 말이다. 당시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지금 기독교인과 사회주의자 관계 이상으로 적대적이었다. 유대인 회당을 불살랐고 혹은 빼앗아 자신들 교회로 탈바꿈시키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 간 화해를 실현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안의 존재가 감당할 몫이었다. 이런 열매 없이 구원을 말할 수 없다는 수행적 진리(performative truth)를 성령이 요구하고 있다. 마지막 하위의 단계로 바울은 자기 공동체 내부를 들여 다 보았다. 이방인으로서 기독교인들 된 자들과 유대인으로서 복음에 접한 자들이 갈등했고 부유한 자(강한 기독교인)들과 가난한 자들(약한 기독교인)이 다투는 상황을 목도한 것이다.144) 제국 로마와 다른 공동체를 위해 바울은 다르지만 서로를 받아들일 것(롬15:7)을 누차 권고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라 한 것이다. 외부적 평화만큼이나 내부적 평화의 소중함을 강변했다. 나뉘고 분열하는 밖(로마)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한마음 될 것(롬12:16)을 거듭 가르쳐 지키게 한 것이다. 이렇듯 좁은 하위의 차원에서 하나가 될 때 상위, 세계적 차원까지 구원의 영향력이 미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앞서 논의한 통일담론의 신학화의 단서를 포착할 수 있겠다. 우선 새롭게 나타난 하느님의 의(義), 그 한국적 실상을 3.1정신이자 촛불혁명이라 생각해 보고 싶다. 앞서 본대로 궁극과 궁극이전의 변별을 갖고서 말이다. 그럴 경우 하느님 의(義)가 남북 이념은 물론 일체 분단을 극복하는 종교적 ’에토스‘인 것을 적극 수용해야 옳다. 성령의 시대, 수행적 진리가 우선하는 현실에서 기독교는 이유 불문하고 자기 안팎을 하나 만들어 자기 구원을 증명할 책임이 있다. 분단체제가 안에서부터 밖으로, 하위에서 상위로, 지역에서 세계로까지 얽혀 있다는 사실도 성서가 보여주었다. 이는 조선반도의 분단이 전 세계는 물론 심지어 우주 자연 생태계의 고통과 유관함을 적시한다. 이 땅과 민족 고통의 세계사적 의미도 이런 차원에서 밝혀 질 수 있을 것이다. 분단 탓에 피조물도 바울도 그리고 교회 공동체 또한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음을 감지(感知)할 일이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통일 전망을 후퇴시킨 ’양국체제론‘을 단차원적 해결책으로 여겼고 그 상상력의 빈곤을 비판했던 것이다.
이어서 바울의 첫 번째 서신중 하나인 고린도전서 속 한 본문(고전9:19-23)을 택해 상호 이질적인 것을 소통시켜 화해하는 방식, 곧 수행적 진리의 성서적 차원을 설명했다. 로마서가 지향한 통일신학의 실천방식이라 말해도 좋을 둣 싶다. ’그리스도 안의 존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말로 바꿔 말해도 잘못이 없다. 자유가 바로 구원의 본질이자 실상인 까닭이다. 이 경우 자유는 곧 주체성일 것이나 독아(獨我)적 주체성을 뜻하지 않고 상호(서로)주체성을 적시한다. 3.1 정신이 말하듯 ‘자주’가 평화와 세계성과 불이(不二)적 관계에 있다는 의미겠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이의 종이 되었습니다. 유대사람에게는 유대사람을 얻으려고 유대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느님의 율법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율법 안에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복음의 복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것이 일체 분(체제)단을 극복하려는 바울의 실천 전략이었다. 분리하여 지배하는 제국로마와 달리 애시 당초 이질적인 존재조차 하나 되는 새로운 제국, 교회공동체를 상상한 결과였다. 이를 위해 바울은 복음의 힘으로 일체 실체론적 사유를 거부했다. 교리도 뛰어 넘었고 신분, 이념, 종교 일체를 초극했던 것이다. 하나 될 목적으로 언제든 상대의 자리로 자신을 내 몰았다. 필자는 이것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신비, 곧 예수 성육신의 재현이라 생각한다. 프랑스 철학자 A. 바디유는 바울의 이런 태도를 일컬어 ‘차이를 가로지르는 보편적 진리’145)라 칭송했고 이것이 우리 시대에 사건화 되기를 바랐다. 이를 차용하여 앞선 장에서 ‘3.1 정신의 사건화’란 말도 언급하였다.146) 진리가 탈각된 탈(脫)현대 시대, 진리 자체가 실종된 탈(脫)진리 시대에 이런 바울에게서 인류구원의 보편진리를 봤던 것이다. 인종, 이념, 종교로 나눠진 사람들을 하나로 엮어 줄 매듭, 그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리일 것이다. 그에게는 이것이 곧 부활이기도 했다. 필자는 본 성서에서 불교의 즉비(卽非) 논리를 찾아 읽었다. 자신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모두와 같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자유 한 자의 모습이고 자신의 구원실상이자 세상을 구원하는 방식이다. 이런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증거이겠다. 필자는 이런 사건을 감리교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주지하듯 일제에 맞서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기독교가 갈등한 적이 있었다. 기독교가 점차 교리를 화석화시켜 우익적 모습을 띄었을 때 그 틀을 깨고 나온 사람들이 유독 감리교 목사들이었다. 사회주의자가 된 손정도, 김창준 그리고 전덕기가 바로 그들이다.147) 서로가 반목, 대립할 때 이들은 기독교인이면서 사회주의자로서 민족을 구하고자 했다. 이들 속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기독교가 함께 용해, 통섭(通涉)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하여 이들 삶의 궤적을 바울의 실존과 중첩시키는 것이 결코 무리가 아닐 듯싶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모두에게 모두처럼’ 되었듯이 이들 역시 민족독립을 위해 사회주의자도 될 수 있었다. 대의(大義)가 같을 시 방법론상 차이는 얼마든지 품고 넘어설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148) 이들을 일컬어 3.1정신을 사건 화시킨 사람들이라 말해도 좋겠다. 이런 사건은 오로지 성령의 역사일 뿐이다. 이질적인 것을 수용(包),소통(接)시켜 하나(진리)의 길로 이끄는 것을 성서(요16:13)는 성령의 역할이라 가르쳐 왔다.
5-2 통일신학의 한국적 토대- 민족(종교)사의 재발견
사실 감리교는 ‘토착화’신학의 길을 개척했다. 사회주의와 만났을 뿐 아니라 이웃종교들과도 만났던 것이다. 그렇기에 감리교는 이념이상으로 민족의 문제, 우리들 종교사에서 하늘 뜻을 찾고자 했다. 탁사 최병헌이 그 출발이었고 윤성범, 변선환으로 그 종지(宗旨)가 이어졌다. 그럴수록 한국전쟁이 민족을 파괴시켰고 결손국가로서 70년 이상을 그렇게 지내온 것에 여타 교단과 달리 반응해야 옳다. 사회과학적 통일 담론들 혹은 민중 신학이 이념과 계급적분 단에 무게중심을 두었다면 토착화 신학은 민족분단과 힘써 마주할 일이다. 앞서 본대로 신학자들 중에서 평화통일을 위해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니 다행스럽다. 이 땅에 들어온 기독교가 한국적이길 바랐다면 그것은 필히 민족 신학 나아가 통일신학이어야 할 것이다. 그 핵심에 민족(통일)신학자 박순경이 있었다. 향후 통일신학이 기존 통일담론과 달라질 여지도 이로부터 비롯할 일이다. 하지만 목하 탈(脫)민족주의 시조가 대세이다. 세계화 과정에서 민족이 잊혀 진 탓이다. 젊은이들 역시 민족이란 대의(大意)보다 계급차별에 훨씬 민감하다. 통일 자체에 무관심한 비율이 다른 연령층에 비해 높은 것도 사실이다. 이에 반론을 제시하는 의미 깊은 책 한권이 출판되었다. 청년들과 통일의 당위를 논하는 도올 김용옥의 책 <<통일, 청춘을 말하다>>가 그것이다.149) 기성세대로부터 보고 배운 것 없기에 무관심할 뿐 제대로 가르쳐 알게 하면 누구보다 통일에 앞장 설 층이 바로 청년인 것을 강변했다. 따라서 도올은 위 책에서 무엇보다 민족의 역량에 무게를 실었다. 삼국을 통일했던 원효의 통일 비전(一心二門)을 멋지게 설명했고 남북 민족사에 있어 동학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다.150) 원효로부터 동학, 천도교 속에 흐르는 현묘지도(玄妙之道)를 민족의 공통기저라 여겼다.151) 현실(역사)적으로 동학은 그 시작이래로 남북의 공통분모로 존재했었다.152) 이점에서 3.1 정신을 동학의 ‘개벽’(開闢)선언이라 보는 시각에 동의할 여지가 많다.153) 그럼에도 동학 천도교 역시 원효를 거쳐 더 근원적인 민족 종교사에 이르러야 온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154) 도올 역시도 조선반도의 통일을 고조선 문명의 재건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155) 그래서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여전히 유효하다. 이점에서 필자는 민족/탈(脫)민족의주의의 논쟁을 명쾌하게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156) 그 바탕에서 박순경의 민족(통일)신학을 살펴 의미화 해야 할 것이다.
민족/탈(脫)민족 논쟁은 민족을 근대의 산물, 곧 허구적 상상의 공동체157)로 보는가 여부에 있다. 지금껏 탈(脫)민족주의는 이를 긍정했고 민족주의자의 경우는 부정했었다. 하지만 <<민족의 인종적 기원>>에서 저자 스미스는 인종적 민족주의란 개념으로 양자 간 대립을 너머섰다. 역사를 경과하며 사라진 근대이전의 인종도 있었지만 그것이 근대적 민족으로 부활한 경우도 많았던 까닭이다. 앞의 입장에서는 탈(脫)민족담론이 옳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민족주의 시각도 정당하다. 조선반도의 입장은 이점에서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기에 저자는 원초(본질)주의 시각과 함께 구성주의 입장도 비판하였고 대신 민족의 인종적 배경을 강조했다.158) 민족 속에 원초적 유대(공동체성)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표현 양식이 거의 항구적인 민족 신화는 이런 공동체성을 드러내는 기억물이라 했다. 이처럼 저자는 근대 민족 형성에 있어서 ‘인종적 민족’의 근원성을 강조했다. 조선반도의 경우 일제에 의해 이런 역사가 부정당했을 뿐 결코 부재하지 않았다.159) 하지만 민족정체성은 돌덩이처럼 불변적 동일성을 고집할 수 없다. 역사 속 제(諸) 요소와 통섭되어 확대 재생산 되어온 까닭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단연코 기원신화와 관련된 종교이겠다. 민족에게 특별한 상상력을 부여했기에 여타 공동체와 변별력을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인종적 민족의 영향력이 근대까지 이르렀고 지금도 작동 중이라는 것이 저자의 확신이다. 신화(종교)와 역사적 기억이 민족의 변별력을 추동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인종적 민족이 지녔던 종교적 시각들, 공통된 기원과 신화로 인해 통일된 기억을 만들고 민족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고 강변했다.160) 따라서 허구로서의 민족이란 말은 결코 가당치 않다. 자기 정체성을 망각하여 주변 문화에 흡수, 해체된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비록 주변국 되었으나 인종을 토대로 민족을 유지시킨 조선반도의 역사는 결코 가볍지 않다. 우리들 ‘민족’ 개념이 이처럼 종교적 토대를 갖고 근대이전에 발아(發芽)했으며 근대적 차원으로 발전되었다. 문화적 과거가 오히려 근대 민족주의의 튼튼한 발판이 된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 근대이전의 역사는 보존, 재구성 될 가치가 충분히 있다. 운명 공동체 의식의 보고(寶庫)인 까닭이다. ‘민족의 계보학’이란 말도 이런 맥락에서 강조되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이 땅의 신화-상징체계를 홀(박)대하고 있으니 걱정이다. 향후 기독교는 조선반도 신화체계, 역사적 기억을 옳게 해석, 의미 화시켜 남북 연합과 통일에 일조해야 옳다. 이것이 기독교가 한국적이길 바랐던 선혈들의 본뜻이었고 토착화 신학이 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족 신학으로서 통일을 말한 박순경의 중요성 또한 여기서 찾을 일이다. 사족(蛇足) 한마디를 덧붙이자면 탈(脫)근대, 탈(脫)민족 시대라 하나 아직 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인종적 민족으로 머무르는 쿠르드 족의 입장에서도 탈(脫)민족주의를 수용할 수 없을 것이란 사실이다.
주지하듯 박순경은 숫한 세월 공들여 연구했던 서구신학과 단절하고 민족(종교)사로 연구방향을 돌렸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조선반도의 문제를 우리 식대로 해결해야 한다는 각성 탓이 컸다. 분단체제 하에서 좌우 합작론을 주창한 몽양 여운형을 추종했던 청년시절의 경험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 과정을 역시 감리교 배경의 이은선 교수가 비판적으로 재구성했고 재의미화 시켰다. ‘처음 꽃’(元草) 박순경의 생각을 한국적으로 더욱 밀고 나간 것이다.161) 이은선은 박순경 통일신학을 한마디로 ‘통전적’이라 정의했다. 민족사와 사회주의(마르크스사상) 그리고 기독교 구원사(출애굽)를-나중에는 여성신학까지- 연계시켰던 까닭이다.162) 민족(통일)신학 속에 토착화신학과 민중 신학이 합류된 것도 밝혀냈다.163) 이것은 한국 역사 전체를 하느님의 구원(속)사 지평으로 보았던 결과였다. 우선 일제하 항일운동과 한국전쟁이후의 분단체제 그리고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남(南)의 현실 이 모두를 신적 구속의 지평에서 살폈다.164) 이런 역사를 지닌 한민족이 신학의 주제이자 주체란 것을 역설한 것이다.165) 특별히 박순경은 민족 주체성이 항일운동에서 표출되었음을 강조했다. 나아가 박순경은 민족 신학의 이름으로 한(韓)민족 시원(始原)이야기에 지극한 관심을 보였다. 특별히 구약성서 배경이 된 수메르 문명을 동이족(東夷族)의 지류로 봤다는 점에서 신학의 주체로서 민족의 중요성을 맘껏 강조한 것이다.166) 당시 동이족의 지경(地境)이 만주에 까지 이르렀음에 주목해야겠다. 한민족 원류성에 대한 민족주의적 해석을 과감히 수용한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단군신화를 삼위일체의 흔적으로 보았던 기존 (보수적) 토착화 입장(윤성범)을 전도(顚倒)시킨 파격성도 보였다. 이런 역전을 일컬어 이은선은 서구 독점적인 창조설화 위상을 뒤 흔든 획기적 사건이라 칭(稱)했다.167) 하지만 이와 동시에 칼 바르트 신학의 영향사로 인해 박순경은 동이족의 경우 신적 초월(타자)성이 부재했음을 적시했다. 하느님과 세계간의 본질적 이원성이 결여된 탓에 세계 내 악(惡)의 해결(심판)능력이 부족했다고 본 것이다.168) 이런 반립(反立)에도 박순경의 근본 뜻은 성서적 계약(출애급)신앙과 민족 간의 불이(不二)성을 강조했고 그 토대에서 민족 신학을 입론(立論)코자 했다.169) 그로써 반공기독교와 단절하고 분단 해체를 위한 통일신학의 길을 열어젖힌 것이다. 1980년대 마르크스 사상을 접한 이후 그의 민족 신학은 통일신학의 이름으로 더욱 본격화 되었다. 분단 요인에 대한 분석도 점차 깊어졌다. 분단을 일제는 물론 미국 제국주의적 식민세력의 침략의 결과로 본 것이다. 1945년을 해방의 원년이 아니라 또 다른 예속의 시작이라 여겼다. 따라서 친일청산의 부재, 미소 간 이념대립 그리고 자본주의적 미국에 편승한 우익(친일) 기독교가 분단발단 및 분단 고착화의 원인으로 지적되었다.170) 박순경이 민족 분단의 시작을 1920-30년대로 소급시킨 것은 커밍스의 견해와 일치하는 것으로 사려 깊은 판단이다. 여기서 핵심은 저항의 주체가 민중과 여성을 포함한 민족이란 사실이었다. 민중, 여성, 민족을 민족 주체성의 세 구성요소로 본 것이다. 박순경은 이런 민족 주체성의 시작을 3.1 정신에서 찾았다. 계급, 이념, 성별, 종교와 상관없이 독립을 외쳤던 항일민족운동이 그 기원이란 것이다. 이은선은 이런 통합적 민족 주체성을 세계사적 차원에서 볼 때 가히 ‘혁명적인 것’으로 평가했다.171) 부르주아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었던 까닭이다. 그럴수록 박순경은 3.1운동의 한계, 곧 신간회 해체 이후 사회주의(형명)와의 통합이 성사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좌우합작의 좌절이 결국 오늘의 분단을 야기 시켰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좌우합작의 의지 자체가 결코 실종되지는 않았다고 믿었다. 앞서 보았듯이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고 여전히 우리들 과제로 인식되고 있는 까닭이다. 자신이 좋아했던 몽양 여운형의 꿈, 하느님의 구속사를 끝까지 이루려 한 것이다. 그렇기에 ‘민족 동질성에 기초한 민족 내 사회평등’, 달리 말하면 민족운동과 민중운동의 불이(不二)적 통합성을 거듭 강조했고 바로 이를 남북이 함께 사는 통일 여정이라 믿었다.172) 박순경은 바로 여기서 분단고통의 세계사적 의미를 찾았다. 박순경 식(式)의 ‘뜻으로 본 분단역사’라 하겠다. 이를 위해 기독교가 민족과 사회주의- 이후에는 주체사상 까지173)–를 연결 짖는 통일신학의 여정에 발 벗고 나설 것을 호소한 것이다.
이렇듯 이은선은 박순경의 통합적인 민족적 주체의식, 기독교와 민족 간의 불이(不二)적 통일신학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그를 적극 재조명했다. 민족 주체(자주)성의 회복 곧 통일의 세계사적 의미를 말함에 있어 두 학자의 생각은 정확히 중첩되었다. 더구나 통일신학을 여성 신학적으로 재구성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이들 모두는 여성적 시각으로 신학의 통일(통합)성을 이루려 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174) 하지만 감리교를 배경했고 여성신학자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차이점 역시 존재했다. 통일신학 구현을 위해 박순경이 유일회적 기독론을 필히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는 신적 초월성과 세계의 타락을 전제한 박순경 식(式) 세계관의 결론이었다. 좌우 합작의 제 3의 길, 자본주의는 물론 공산주의를 초극하는 자유, 곧 새 인간 탄생을 기독론 지평으로 한정시킨 것이다. 이는 하느님 영의 보편성을 그리스도 영의 특수성으로 환원시킨 결과였다. 여기서 필자는 ‘실현된 종말론’의 재현 및 그 배타성을 다시 읽을 수 있었다. R. 류터가 적시했듯 메시아적 미래의 차원에서 세계사적 과제를 걸머진 민족통일의 여정에 다양한 민족 주체성의 참여가 보장되어야만 했다. 민족 개념 속에 문화적 다양(원)성이 깃들어 있고 그들도 주체적 행위자인 것을 인정하는 통일 신학이 필요한 이유이다. 실현된 종말론이 유대교와 갈등한 것처럼 그렇게 박순경 통일(민족)신학 또한 민족과 갈등하는 누(累)를 단(斷)해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도올 김용옥은 통일을 위해 원효의 통일의식, 곧 화쟁(和諍)사상은 물론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의 상상력을 중시했고 이은선 또한 ‘다른’ 구원론의 가종(加宗)을 요구했던 것이다.175) 이는 향후 박순경이 원했던 주체사상과의 대화를 위해서도 적극 필요한 과제라 생각한다. 통일신학이 민족 신학을 넘어 종교 신학 차원에서 토론될 이유도 여기서 찾을 일이다. 평소 박순경이 종교 신학, 토착화 신학의 정행(正行) 부재를 비판했던 의도를 십분 이해해야 옳다.176) 하지만 현실이 의식을 지배하지만 의식(상상력)또한 현실을 이끌 수 있는 동력이 될 것인바 단정과 속단은 금물이다. 통일 불가 현실주의자들이 대세인 상황에서 문화(종교)적 이상주의자들의 반론이 더 없이 필요한 시점이다.177) 이 지점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통일신학의 한국적 토대가 재건될 수 있겠고 세계사적 의미 또한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5-3 통일신학의 세계사적 차원-반(反)제국적 생명연대의 길
이제 본론의 마지막 지점에 이르렀다. 여기서는 양국체제 비판 그 이상의 대안적 논거가 구체적으로 서술되어야 할 것이다. 70년 넘는 분단고통의 민족사적 함의와 더불어 이제 미래 세계를 위한 통일의 의미와 가치를 서술할 지면에 이른 것이다. 보았듯이 분단은 본래 조선반도의 운명이 아니었다. 패전국 일본이 감당할 몫이었으나 그들 간계로 식민지배에 이어 분단고통까지 대신 감내해야만 했다. 우리 민족의 못남 탓만이 아니었기에 선열들은 고난의 뜻을 거듭 물었다. 말했듯이 한국전쟁은 일제침략과 이념 갈등 등의 세계적 모순이 집적된 결과였다. 조선반도를 지리적, 사상적으로 나눠 민족을 파괴시킨 비극적 사건이었던 것이다. 조선반도 내 민족모순, 계급모순은 분단체제의 산물로서 이것은 세계모순에서 비롯했다. 그럴수록 주체적 평화통일의 본뜻과 방향 또한 역시 세계사적 차원에서 논할 필요가 있다. 평화통일이 민족통일 수준을 넘어 세계사의 궤적과 향방을 바꾸는 대사건이 되어야 하겠기에 말이다. 이점에서 필자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90년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JPIC) 대회가 기독교 공의회(Council) 성격으로 이 땅 서울에서 열렸다는 사실에 주목한다.178) 더구나 한국전쟁 70년 역사와 맞물린 2020년에 말이다. 이는 분단 탓에 자본주의, 군사주의, 기후붕괴(반생태주의)라는 지구적 차원의 모순이 조선반도에 집적되었다는 세계교회의 분석과 판단의 결과였다. 정작 남북 교회들 모두가 JPIC의 본뜻을 느껴 알지 못했으나 분단이 야기한 조선반도 내 총체적 모순을 살필 기회가 되었다. 중층으로 쌓여진 지구적 난제(難題)의 실마리를 분단의 땅, 이곳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이 사실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고난의 신학적 뜻을 묻고 찾을 수 있는 기회였던 까닭이다. 세계적으로 창궐하는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를 접하면서 본 난제와 덩욱 여실이 만나야만 한다.
흔히들 아우슈비츠 경험과 JPIC 대회를 신학을 변화시킨 20세기의 두 축으로 여겨왔다. 그만큼 JPIC주제는 기독교의 미래, 곧 생명적, 세계사적 구원을 위한 척도가 되었다. 본 공의회를 발의했던 봐이젝커는 ‘JPIC 문제가 항존 하는 한 기독교적 구원(정신)은 아직 이뤄지지 못했다’179)고 말하였다. 정의, 평화 그리고 창조의 보전을 메시아적 미래로 여긴 것이다. 이를 위해 시간의 촉박함을 말하며 모든 이념, 종교, 가치들의 협력을 요청했다. 지구적 차원의 난제인 JPIC, 말을 바꾸면 분배문제의 불균형, 핵무기의 과다 보유 그리고 자연 생태계가 붕괴하는 속도와 정도가 빠르고 심각한 곳이 조선반도라는 세계인들의 인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세계교회는 이런 심각성을 분단 상황과 관계 지어 생각했다. 실제로 분단체제 하에서 지난 70여 년간 남북이 모든 영역에서 경쟁하며 살았던 삶의 결과일 것이다. 특별히 북의 핵무기로 인해 세계가 놀라고 있다. 그럴수록 지구적 차원의 모순을 담은 JPIC의 세 주제가 통일신학의 핵심 내용이자 과제가 되어야겠다. 이것을 필자는 통일신학의 반(反)제국적인 생명연대의 책무라 생각한다. 일전 한 논문에서 필자는 JPIC신학을 신학의 한류(韓流) 차원에서 수용, 발전시킬 것을 제안했었다.180) 이 땅의 통일신학이 세계를 구원하길 바랐던 까닭이다.
무엇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취한 남과 북 두 체제는 저마다 많은 문제를 낳았다. 현재로선 남북 간 경제 차(差) 이상으로 남쪽의 빈부격차 역시 걱정스럽다. 남의 경우 자유주의 시장경제로 상대적 빈곤은 해결했으나 자본, 곧 부(富)의 독점으로 심각한 수위의 계급모순을 야기 시켰다. 계급갈등이 세대로 이어진 가난의 대물림이 한국 사회의 큰 걱정거리가 된 것이다. 즉 기회를 박탈당한 젊은 층의 분노, 죽음을 외주 화시킨 천민자본주의, 외부적 타자의 악마화 등이 통일여정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어머니들조차 비정규직 이름으로 값싼 노동력으로 내몰리는 현실에서 ‘민족’에 대한 관심이 애틋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수록 사회주의란 오해를 무릅쓴 정부의 정책들이 긍정적으로 실험되어야 옳다. 예컨대 기본소득은 물론 기본자산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불평등의 골을 메우는 정부주도의 과제가 필요한 시점이다.181) 이것은 지금 한국 뿐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실현될 숙제가 되었다. 지금처럼 자산이 편중되어 재분배되지 못할 시 T. 피케티가 말하듯 자본주의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여기서 핵심은 자유주의 이념이 신봉했던 ‘사유재산의 신성성’ 자체를 부정하는 데 있다. 물론 이것은 공산주의로의 회귀를 뜻하지 않는다. 지구적 체제 유지를 위한 자발적 세금제도-예컨대 세계 내 1% 해당되는 자본가들에게서 90% 환수–하에서 자산을 환수하는 일이다.182) 급격한 아파트 값 상승으로 보유세율 높이는 일이 부정되는 상황에서 연목구어(緣木求魚)겠으나 통일신학의 이름으로 거듭 시도, 실현될 과제여야만 한다. 따라서 피케티는 ‘사유공유재산’이란 말을 사용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의 것(시편 24:1)이란 말의 경제적 용어일 것이다. 향후 기독교 신학 역시 이를 위해 기여해야 옳다. 통일비용으로 일정 비율183)을 공적 자산으로 내놓을 수도 있어야겠다. 우리가 한국전쟁 70년 되는 2020년을 희년(禧年)으로 선포한 것도 이런 차원에서였다. 하느님의 희년선포가 민족을 새롭게 하고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신적 폭력(?)184)인 것을 깨우쳐 배울 일이다. 하지만 그 폭력은 모든 이를 품는 세상 사랑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하느님 의(義)의 실현을 위한 희년선포가 통일신학의 출발점인 이유가 여기에 있을 듯싶다.
민족분단으로 조선반도가 무기경쟁의 장(場)이 된 것이 참으로 애석하다. 북의 경우 체제안보를 위해 민(民)을 희생시켜 핵무기를 개발했고 남 또한 군산복합체 국가, 미국 무기수입에 있어 최우수 고객 되었으니 비극적이다. JPIC 서울대회는 조선반도 양쪽에 개발, 배치된 핵무기의 위험성을 고지했다. 미국제 핵이 남쪽에 존재하는 한 북의 핵개발 역시 지속될 것이다. 그로부터 30년 세월이 흘렀기에 핵무기 발전 상태역시 가늠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동시적 해체만이 답이겠으나 상호 불신 탓에 해결이 요원하다. 본래 핵이란 반(反)신학적, 반(反)삼위일체 적 속성을 지녔다. 세계적 규모의 파괴를 초래하기에 세상을 다시 멸망치 않겠다는 하느님 계획에 반(反)하고, 민초들의 생존을 희생시켜 만들었기에 예수 정신에 맞서며 사람을 불안케 하는 탓에 용기를 주는 하느님 영을 거역하는 까닭이다.185) 이점에서 핵무기는 물론 그의 평화적 사용이란 말 역시 신학적으로 어불성설이다. 남북한이 동시적으로 탈핵을 이뤄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반도의 탈(脫)핵화는 핵무기를 안보수단 삼는 제(諸)국가를 다른 체제로 추동할 여지가 될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미군철수 문제를 조심스럽게 거론해 본다.186) 주지하듯 미국은 한일합방과 식민지배 나아가 분단체제에 기여가 컸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전범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어 오늘의 일본을 만들었다. 이후 남쪽을 일본 경제권에 포함시켜 미일동맹 체제의 하부구조로 역할하게 구조화 시켰다. 무엇보다 50억 달러 방위비를 요구하는 트럼프의 작태에 환멸을 느낄 정도에 이르렀다. 남쪽 안보를 구실삼아 미국이 얻는 군사적 이익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식민지적 친미종속국가로 조롱받을 만큼 대미 의존도를 높여왔고 이에 기독교가 앞장섰다. 하지만 미군주둔으로 아시아 지역이 불안정해졌다는 견해가 세(勢)를 얻는 중이다. 미군 탓에 이 지역에 평화가 아니라 분쟁과 대립을 만들고 있는 까닭이다. 미국 식(式)평화가 있다한들 그것은 성서가 거부했던 로마 식 평화일 뿐이다. 따라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서 미군철수 문제를 거론할 시점이 되었다는 것이 진보적 식자(識者)들의 중론이다. 이것이 전제될 때, 혹은 동시적 차원에서 남북은 평화적 중립국가로의 도약을 이를 수도 있겠다. 3.1 정신이 제국에서 민(民)의 공화국을 선포했듯이 조선반도의 통일은 ‘평화(비무장) 중립국’을 지향해도 좋을 것이다.187) 이것이 ‘차이를 횡단하는 보편성’에 부합된 정치적 담론일 수 있겠다.
본 주제는 자연스럽게 마지막 사안과 연결된다. 기후붕괴 속도가 가장 빠른 지역이 조선반도라는 것은 널리 알려졌다. 특별히 남쪽은 슬프게도 기후악당국가란 불명예를 걸머진 것이다. 목하 세계는 기후비상 상태를 선포 중이다. 지속가능한 지구회복을 위한 시간이 10년 남았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JPIC 서울 모임은 1990년을 기점삼아 이산화탄소 발생량을 30% 줄일 것을 권고했었다. 하지만 남의 경우 그 시점과 견줄 때 오히려 배출량이 40% 늘었으니 기후악당국가로 불릴 이유가 충족하다. 그레타 툰베리의 호소 덕분에 이 땅에도 기후비상 공동대책모임이 생겼으니 다행스럽다. 북을 남처럼 만드는 일이 우리들 목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북의 사람들마저 생태맹(盲)으로 만든다면 그보다 큰 죄악은 없다. 해서 통일신학은 남북 경계를 허물고 심지어 만주까지를 포함하여 생명권 정치학(Biosophere politics)188)을 지향해야 옳겠다. 코로나 위기를 실감하며 사는 이 시점에 생명체의 분포에 따라 지역을 분류하여 새롭게 정치지도를 그리자는 말이다. 이로써 개별 로칼(지역성)은 생명다양성을 존속시키는 문화적 가치로 재(再)활성화될 수 있겠다.189) 이것은 GNP위주의 경제성장, 즉 생산총량 및 에너지 사용량의 증가가 아니라 생명(체)의 총량이 많아지는 생태국가의 복원을 목적한다. 이를 위해 먼저 DMZ의 생태적 활용방안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190). 향후 DMZ 공간을 전 지구의 생태적 보전을 위한 상상력의 보고(寶庫)로 만들기 위함이다. DMZ란 말이 ‘무기 없는 지역’을 뜻하듯이 앞서 말한 비무장 중립국 또한 이런 생태적 함의를 지녀야 옳다. 이렇듯 전 국토의 생명자원화를 통해 미래를 달리 만드는 일에 기독교는 일조해야 옳다. 이것이 통일신학의 세계사적 의미이자 탈(脫)제국적 생명연대의 방식이겠다. 16개국 이상의 젊은이들의 미(未)발굴 된 주검이 아직도 산재한 곳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이곳의 영령들이 남북 산하가 탈(脫)이념화된 생태적 평화 공간되기를 힘써 바랄 것을 유념할 일이다.
짧은 마무리
처음 계획보다 긴 글이 되었다. 한국 전쟁의 발단 및 기원에 대한 토론에서 시작하여 3.1 정신, 촛불혁명 그리고 4.27 판문점 선언을 다뤘다. 남북연합 론과 양국체제론간의 논쟁점을 살폈고 주요 신학자들이 제시한 통일신학의 터하여 전자(남북연합론)를 적극 수용하였다. 남북 간 통일(민족)보다 평화(국가)를 앞세우는 일에 대한 우려에서였다. 분단체제가 종전(終戰)체제로 바뀌어 평화를 구축하는 일이 당면과제이겠으나 통일을 여전히 목표 삼았기 때문이다. 그간의 통일노력이 분단체제를 강화시킨 현실을 긍정할지라도 양국체제가 결코 답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여러 시각에서 적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민족’ 개념을 다시 부각시켰다. 한국전쟁이 파괴시킨 민족을 다시 복원시킬 목적에서이다. 베트남의 이념통일, 독일의 경제통일과 달리 조선반도의 경우 평화적 민족통일을 포기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궁극적으로는 진리사건이었던 3.1 정신을 구현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을 ‘하느님의 義’ 차원에서 2020년에 사건으로 다시 소환했다. 그렇기에 필자는 서구가 시작한 민족/탈(脫)민족 논쟁을 반복하지 않았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통일신학으로 발전시킨 박순경의 민족 신학을 길게 서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통일신학의 한국적, 세계사적 의미를 찾기 위해 종교(토착화)신학과 JPIC 신학을 연계시켰다. 한국전쟁이 야기한 70년 분단 역사 속에서 민족적 고난의 뜻을 찾고 싶어서였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 세계를 구원할 책임을 통일신학의 몫이라 여긴 것이다. 탈(脫)자본주의, 곧 계급차별의 극복을 위한 일정비율의 사유재의 공유화, 비무장(평화생태) 중립국 재건 그리고 미군철수(군비축소)등이 그것이다. 가시적 성과여부에 관계없이 JPIC주제와 연관된 이 세 과제는 통일여정에 있어 씨름할 주제가 틀림없다. 이런 상상을 하며 성서를 읽고 마음 벽을 조금씩 무너트리면 도둑같이 임한 해방처럼 그렇게 통일 또한 우리들 현실 될 수 있겠다. 그것은 우리에게 메시아적 미래가 될 것이다.
앞서 필자는 민족분단 상황을 ‘샴쌍둥이’로 비유했었다.191) 즉 머리는 둘이되 몸이 하나인 상태로 태어난 아기의 모습으로 민족모순을 묘사한 것이다. 이 땅의 분단과 통일 양면을 이 모습으로 그려낸 것에 찬사를 보낸다. 각기 화해(통약)불가능한 정치체제를 지녔으나 역사적 운명공동체인 탓에 분리될 수 없는 조선반도가 바로 ‘샴쌍둥이’ 모습이겠다. 여기서 핵심은 마주하는 상대가 외부적 타자가 아니라 자신의 비체적(abjective)일부란 사실이다. ‘비체’란 주체와 인접하나 그와 동화될 수 없는 존재를 뜻한다. 각자는 자신들 몸의 절반만을 통제할 수 있다. 양자 간 분리는 곧 죽음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렇기에 비체(非體)화는 일시적일뿐 언젠가는 하나의 실체가 될 수밖에 없다. 상호 조율, 적응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재통합을 위해 개체(독립)성은 감소되어야 옳다. 상호간 차이로 자신들 정체성을 규정했던 과거와 단절해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한쪽의 변화는 다른 쪽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남이 변하면 북도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겠다. 남과 북은 지금껏 자신이 배제한 타자에 의해서만 새롭게 재(再)주체화될 수 있다. 이점에서 한국전쟁 트라우마로 고통 받은 남북 민(民) 모두의 치유, 곧 재주체화를 위해서 제인 진 카이젠의 말을 결론으로 소개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
“경계에 서서 경계의 양측에서 공명하는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것은 아물지 않은 상처를 마주하는 감각인 동시에 내 주체성의 조건이다...”192)
각주) -----------------------------
1) 이 논문은 2020년 1월 말, 코로나 사태가 확산되기 이전에 완료된 글이다. 최근 남북 간 대치 상황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에 쓰여 졌다. 본래 이글은 감리교 세계감리교 대회(8월)를 앞두고 이 땅의 통일논의를 세계 교회에게 알릴 목적으로 감리교 선교 국으로부터 의뢰받아 작성된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세계대회조차 무기한 연기되었고 본 논문의 발표 또한 미뤄졌다. 이 논문은 수정 보완되어 한국전쟁 70년의 해인 2020년 12월에 <<한국전쟁과 이후 교회(현장아카데미 엮음)>>에 한 부분으로 실리게 될 것이다.
2) 이항규, ‘코끼리를 이야기할 시간-먼 곳에서 느끼는 남북정상회담’, <창작과 비평>,180(2018 여름), 263-273.
3) 김흥호, <<계시의 한국-자유, 독립, 통일>>, 사색인 서고문집 2019.
4) 서광선, <<기차 길, 나그네 길, 평화의 길>>, 한울 21019
5) 그럼에도 감리교 통일운동이 없지 않았음을 다음 글이 밝혀주었다. 하희정, “기독교통일운동과 감리교회가 걸어온 길”, 제 1차 김리교 평화통일 정책 심포지엄자료집, 2020년 1월 14일, 5-24. 하지만 여기에 재미 감리교 통일운동가들, 예컨대 정기열, 한호석 같은 이들의 족적이 언급되지 못했다 필자 역시 이들 업적을 아직까지 연구하지 못했다.
6) 김용옥, <<유시민과 도올 통일, 청춘을 말하다>>, 통나무 2019.
7) <시사저널>. 2020년 1월 18일(1580호) 참조.
8) 부르스 커밍스, <<한국전쟁-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조행복 역, 현실문학 2010
9)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나남신서 2003
10) 와다 하루끼, <<한국전쟁>>, 서동만 역, 창비 2009
11) 이에 대한 한글, 영문 백서가 출판되었다. DMZ 평화 인간 띠 운동 본부, <<4.27 DMZ 민(民)+ 평화 손잡기 백서- 꽃피는 봄 날 DMZ로 소풍가자>>, 종이 디자인 2019.
12) 김상준, <<코리아 양국체제-촛불을 평화적 혁명으로 완성하는 길>>, 아카넷 2019.
10) 이삼렬, <<평화체제를 향하여>>, 동연 2018. 손규태, <<한반도의 그리스도 평화윤리>>, 동연 2018.
13) 로즈마리 류터, <<신앙과 형제살인- 반유대주의의 신학적 뿌리>>, 장춘식 역, 기독교서회 2018, 342 이하 내용 참조.
14) 여기서 필자는 머리는 하나지만 몸은 둘인 ‘샴쌍둥이’를 떠올려 본다. 신한대학교 탈 분단 경계문화 연구원 편, <<경계에서 분단을 다시보다>>, 울력 2018.
15) 박한식, 강국진, <<선(線)을 넘어 생각 한다>>, 부키 2018.
16) 윤정란, <<한국전쟁과 기독교>>, 한울 2015, 217 이하 내용 참조.
17) 박명림, 앞의 책, 4장, 5장 내용.
18) 이진경, <<외부, 사유의 정치학>>, 그린비 2017.
19)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36.
20) 당시 소련은 공군기를 지원하여 전쟁 후방을 지원하는 수준이었다. 그것도 자기 국적을 지워 중국기로 변장시킨 상태로 말이다.
21)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59.
22) 그 때 미국은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했다고 판단했었다. 하지만 소련은 핵무기 개발을 완성한 상태에서 미국을 속이고 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여하튼 트루먼 대통령이 원폭 투하에 서명까지 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23)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108. 한국 전쟁은 내전일 뿐 아니라 상반되는 두 세계체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정치, 경제적 두 체제간의 전쟁, 곧 세계대전이었다. 박명림, 앞의 책, 76-77 참조 와다 하루끼, 앞의 책, 서론 참조, 156-7. 이점에서 하루끼는 한국전쟁을 중미전쟁이라 칭한다.
24) 이점에서 커밍스는 미소에 의한 38선 분할이 한국전쟁의 초대장이라고 말했다.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107.
25) <시사저널> 1576호(2019 12.28)에 실린 재미 일본사학자 고시로 유키코 교수의 논문 “범태평양 인종주의와 미국의 일본 점령” 논문을 참조할 것.
26) 최근 볼턴의 자서전에서 밝혀진 바이지만 성사단계에 이르렀던 북/미간 정전선언을 일본 아베정권이 방해했다.
27) 한국 전쟁 당시 일체 전쟁 무기가 일본서 생산 된 것을 기억할 일이다. 와다 하루끼, 앞의 책,
28)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10-11, 82-83. 당시 이 지역에서 일본과 싸웠던 조선인들 다수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상태였다. 이 지역 소속 중국 공산당원의 7-80%가 조선인들이었다.
29) 박흥식이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만주국을 세운 기시노브스키가 현재 일본 수상 아베의 조부라는 것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그는 전쟁 후 1급 전범이 되었다.
30)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36-37
31) 박명림, 앞의 책, 74-75
32) 박명림, 앞의 책, 23
33) 박명림, 앞의 책 196.
34) 박명림, 앞의 책, 296.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131. 당시 미군은 한국인 민간인을 ‘이름 없는 찌꺼기들’ 혹은 ‘아메리칸 인디언 종족’ 부류라고 천하게 여겼다. 차상철, <<해방 전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 지식산업사 1991, 125.
35) 박명림, 앞의 책 784-785.
36) 박명림, 앞의 책, 789-790.
37) 이후 더 서술하겠으나 여기서 협소한 민족주의를 뜻하지 않는다. 이념이 해체된 후 종교가 민족(국가)의 근간을 이룬 실상을 베를린 장벽 붕괴 이래로 경험하고 있다. 물론 그 폐해도 있겠지만 긍정적 요소도 찾을 수 있다. ‘유럽 통합’체제가 본래 종교(기독교)적 이념의 세속적 표현인 것도 생각할 일이다. 신학자 에른스트 트뢸치의 ‘문화통합’(Kultursynthese)이념에서 비롯했다.
38) 이것은 와다 하루끼의 제자로서 그의 책 <<한국전쟁>.을 번역한 한국인 제자 서동만의 평가이기도 하다. 본 책 후기를 보라. 와다 하루끼, 앞의 책, 417.
39) 와다 하루끼, 앞의 책, 342-343
40)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2003
41) 와다 하루끼, 앞의 책, 344
42) 와다 하루끼, 앞의 책, 39
43) 일본 공산당의 역할에는 많은 지면을 할애했으나 정작 일본 정부의 입장은 간과했다. 와다 하루끼, 앞의 책, 107-142 참조
44) 미 군부와 외무성간의 갈등에서 외무성(국무부)의 판단이 승리한 결과이다. 군부는 조선반도에서 철군을 원했다고 한다. 임혁백, <<비동시성과 동시성: 한국 근대 정치의 다중적 시간>>, 고려대학교 출판문화원 2016, 7장(243-282)참조.
45) 임혁백, 위의 책, 295-299
46) 임혁백, 위의 책, 280-281
47) 임혁백, 위의 책, 250-251
48) 임혁백, 위의 책, 299-301, 브루스 커밍스, 앞의 책, 32
49) 박명림, 앞의 책, 41-50.
50) 최인훈, <<광장>>, 민음사 1976
51) 김선주, <<탐루>>, 한울, 2005
52) 조성환, ‘개벽종교의 평화사상- 삼일 독립선언서에 나타난 개벽사상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종교-3.1 독립운동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2018, 11.23, 서강대학교 발표논문
53) 임형택, “3.1운동, 한국 근현대에서 묻는다”, <창비> 183(2019 봄), 36. 이하 내용은 본고를 창조적으로 재 서술하는 방식으로 기술되었다.
54) 임형택, 위의 글, 24-34 참조.
55) 여기서 임형택은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와 삼균주의를 펼친 조소앙을 예로 들었다. 전자는 좌파에 방점을 둔 민족주의자로서 후자는 민족주의 색체를 강하게 지닌 좌파 사상가라 칭했다. 위의 글, 29.
56) 이 말은 신간회를 제안했던 벽초 홍명희의 지론이었다. 홍명희, ‘신간회의 사명’, <현대평론> 1927년 1월호를 보라.
57) 임형택, 앞의 글, 35.
58) 백영서, ‘연동하는 동아시아와 3.1운동’, <창비>183(2019 봄), 41
59) 백영서 위의 글, 43
60) 3.1운동 백주년 종교개혈연대, <<3.1 운동 백주년과 한국종교개혁>>, 모시는 사람들 2019 참조.
61) 사실 종교 차(差)를 넘어 함께 뜻을 합친 것도 당시로선 예사롭지 않다. 서구서 유입된 기독교의 힘이 당시로서 크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당시 기독교가 민족주의를 표방한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남강 이승훈 같은 기독교계 큰 지도자들의 영향 탓일 수도 있다. 기독교 대한 감리회 서울연회 본부, <<3.1운동, 그날의 기록>>, 도서출판 탁사 1998 참조.
62) 백영서, 앞의 글, 45 저자는 3.1 운동이 중국 5.4 혁명(공산당혁명)과 변별된 점을 여기서 찾았다.
63) 백영서, 앞의 글, 49.
64) 이것은 특별히 <창비>를 이끌었던 백낙청 교수의 지론이다. 백영서, 위의 글, 51.
65) 이남주, ‘3.1운동, 촛불혁명 그리고 진리사건’, <창비>183(2019 봄), 68
66) 이정배, ‘촛불혁명과 인간혁명’, <씨ᄋᆞᆯ의 소리> 255(2018 5.6월), 46-53
67) 백영서, 앞의 글, 52 참조
68) 이점에서 촛불혁명에 미친 세월호 사건의 영향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9) 이남주, 앞의 글, 70.
70) 김상준, 앞의 책, 174.
71) 백낙청, ‘촛불혁명이라는 화두’, <한겨례 신문> 2019, 12.30일
72) 당시 몽양의 말 그대로를 옮겨본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며 한 민족의 각성이다.” 몽양은 이 말을 일본 의회에서 선포했다. 여기서 핵심은 신의 뜻을 원심력과 구심력사이에 위치 시켰다는 사실이다. 변선환 아키브 편, <<3.1 정신과 ‘以後’ 기독교>>, 모시는 사람들 2019, 116. 이 책에 실린 이정배의 글 “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론 속의 토착적 기독교성-독립과 해방 그리고 통일여정에 이르기까지의 사상적 여정”(115-148)을 보라.
73) 이은선, “4;27 판문점 선언의 의의”, <씨ᄋᆞᆯ의 소리>, 256(2018, 7-8), 27-28
74) 이정철, “흔들리는 판문점 그리고 평화로의 병진‘, <창비> 180(2018 여름), 249-262 참조.
75) 이정철, 위의 글, 251.
76) 이정철, 위의 글, 252, 이 선언 속에 평화적 핵시설의 해체까지도 포함된다. 대신 미국은 기존 약속대로 비핵화 대가로 핵발전소(경수로)를 지어주면 될 것이다.
77) 이정철, 위의 글, 252 하지만 이은선은 ‘완전’이란 단어 속에 함의된 북에 대한 불신, 남성주의 시각을 적시했다. ‘완전’이란 대화와 협력 그리고 신뢰의 과정(process)속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일 뿐 식체적 상태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타당성 있는 지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CVID’와 변별된 ‘완전’을 말했기에 이은서의 비판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은선, 앞의 글, 34-35
78) 이정철, 위의 글, 283.
79) 이제 막 출가된 볼턴의 회고록이 이와 다른 증언을 하고 있으나 그 역시 의심할 여지가 많다. 좀 더 두고 평가할 일이다.
80) 이정철, 위의 글, 254
81) 저자는 미국이 몇 년 전 이 안을 박근혜 정부에게 전달했으나 당시 정부가 사력을 다해 반대했다는 내용을 인용문을 통해 밝혔다. <중앙일보> (2016년 2월 26일) 에 실린 ‘빅터 최’의 기사- “대북 외교의 판이 바뀌고 있다”-를 보라.
82) DMZ 평화인간 띠잇기 운동본부, 앞의 책, 68-69 이 선언문을 필자가 썼던 이유로 글을 옮기면서 다소 표현을 달리 한 부분이 있음을 밝힌다.
83) 이외에도 노태우 정권 시절(1992)의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협정, 노무현 정권(2007) 에서의 남북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협정이 있었다. 노태우 정권은 남북한 동시 UN가입을 승인했고 노무현의 경우 김대중의 햇볕 정책을 낳은 6.15 선언의 기조를 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 할 것은 88년 올림픽 분위기에 편승하여 남북관계를 풀어보려는 노력을 김대중과 경쟁 관계에 있던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시절 중앙정보부를 이용하여 방해를 놓았다는 사실이다.
84) 김경재, “평화협정체결과 주한미군 철수의 때가 찼다”, <씨ᄋᆞᆯ의 소리>. 265(2020,1.2), 8-14
85) 각주 72번 참조.
86) 이 경우 ‘민족’은 탈(脫)민족적 민족의 차원에서 이해될 개념이다. 비록 유럽 단일 체제를 이뤘으나 그 속에서 민족 개념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다. 이정배, <<한국 신학의 두 과제-탈민족적 민족, 탈기독교적 기독교>>, 도서출판 한들 2010 참조.
87) 김상준, 앞의 책, 7-9. 45 이하 내용 참조. 일차적으로 본 책의 내용을 요약 발췌한 것이다. 본 저자의 시각에서 논지를 전개하되 백낙청의 시각으로 비판적으로 재 서술 하겠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악순환의 도표를 소개한다. “분단부정의 당위-남북 적대의 심화- 분단 독재체재의 강화- 분단 독재체재에 대한 비판 강화-분단 부정의 당위성 강화.”
88) 김상준, 앞의 책, 9. 33.
89) 김상준, 앞의 책, 10-11
90) 김상준, 앞의 책, 11.
91) 윤정란, 앞의 책, 3장(115-164)과 6장(259-298) 참고
92) 김상준, 앞의 글, 42.
93) 백낙청, “어떤 남북 연합을 만들 것인가?”, <창비>181(2018 가을), 17-34.
94) 백낙청, 앞의 글, 19.
95) 백낙청, 앞의 글, 21.
96) 백낙청, 앞의 글, 25.
97) 최장집, 박명림을 비롯한 고려대 학파들이 먼저 이 점을 강조해왔다. 평화를 통일을 위한 수단이나 과정이 아니라 목표 그 자체라 본 것이다. “백낙청-최장집 한반도 평화체제 논쟁”, <프레시안> 2018 7.16. 박명림, “패러다임 대 전환: 통일에서 평화로(1)”, 중앙일보 2018, 7.18. 백낙청, “촛불의 새 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 <창비> 175(2017 봄), 29
98) 백낙청, 앞의 글, 26
99) 김상준, 앞의 책, 213.
100) 김상준, 앞의 책, 222.
101) 김상준, 앞의 책, 155-156
102) 김상준, 앞의 책, 236-237, 263.
103) 여기서 김상준은 백낙청이 분단체제를 부정했음에도 그것이 오히려 전쟁을 억제시켜 상대적으로 안정된 행복한 국가를 이루게 했다고 긍정하는 그의 자기모순을 적시한다. 김상준, 앞의 책 241.
104) 김상준, 앞의 책, 245.
105) 이로써 본래 4장으로 구성된 논문이 5장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본 장의 내용이 길어진 결과이다. 본 글 서문 후반부에 실린 전개방식을 참조하라.
106) 예컨대 남북 중립화 방안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기독교 내부에서는 소수 단체들을 통해 중립국 통일안을 토론하고 있다.
107) 여기서 세계체제 라 함은 세계지배를 위한 천민자본주의, 기후위기, 제국적 군산 문화 복합체 그리고 뭇 전쟁을 위한 조직 일체를 적시한다. 백낙청, <창비> 181(2018. 가을), 30-33 김상준, 잎의 책, 251-252
108) 김상준, 앞의 책, 251
109) 1995년 해방 50년을 맞는 시점에서도 기독교는 희년의 해를 선포했었다. 분단 상태로 맞았던 해방을 진정한 독립이라 여기지 않았던 까닭이다. 한국 전쟁 70년을 맞는 올해를 다시 희년으로 선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110) 이정배 외, <<3.1 정신과 한반도 평화>>, NCCK 북시리즈 12, 동연 출판사 2018, 304-316. 본 선언 기초자는 다음 9분이다. 오재식, 이삼렬, 서광선, 김용복, 민영진, 홍근수, 강문구, 김창락, 노정선.
111) 이삼열, 앞의 책, 90-98, 137-154. 이하 내용은 필자가 정리한 본 책의 내용을 근거로 재정리한 것이다. 이정배, <<세상 밖에서 세상을 걱정하다-이정배의 수도원 독서>>, 신앙과 지성사 2019, 101-111 참조.
112) 이삼열, 앞의 책, 175-200
113) 이삼열, 앞의 책, 98-104
114) 이삼열, 앞의 책, 71-97 이정배, 위의 책, 105.
115) 이삼열, 앞의 책, 313-332.
116) 이삼열, 앞의 책, 158-160, 201 이하 내용
117) 이삼열, 앞의 책, 447이하 내용.
118) 손규태. 앞의 책, 표지 글. 부제가 본 책의 성격을 잘 드러내 준다. ‘기독교 사회윤리를 전공한 필자의 눈으로 본 통일과 평화에 대하여’가 그것이다. 역시 여기에도 통일이 앞서 언급되었다.
119) 손규태, <<한국 개신교의 신학적, 교회적 실존>>, 대한기독교서회 2014. 참조
120) 이삼열, 앞의 책, 227-234. 이삼열은 이런 민족의식이 문화적 정체성, 정치적 자주성 그리고 내부적 공복성(Common welfare)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이점에서 주체사상과의 대화도 인정했다.
121) 손규태, <<<한반도의 그리스도교 평화윤리>>,83
122) 손규태, 위의 책, 84-85
123) 손규태, 위의 책, 136-137.
124) 손규태, 위의 책, 98-104
125) 손규태, 위의 책, 160
126) 손규태, 위의 책, 160-161. 안병무, <<민중 신학 이야기>>, 한국 신학연구소 1987, 37-38. 서남동 또한 이스라엘에게는 본래 민족적 기원이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필자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마지막 결론 장에서 반론을 제기하겠다.
127) 손규태, 위의 책, 161. 박순경, “민족통일과 여성신학의 과제”, <기독교사상> 1988년 8월, 120
128) 백낙청외, <<백년의 약속>>, 2019 창비.
129) 이계준 엮음, <<현대 선교신학:한국적 성찰>>, 전망사 1994, 458-459. 분단신학이란 개념을 가장 활발하게 사용한 학자는 노정선이다. 이 책에 실린 노정선의 글 “남북통일과 선교”를 참조하라. 노정선, <<지속가능한 평화와 통일전략>>, 한울 2016, 이 책 4장, 5장 그리고 9장 참조.
130) 송두율,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겨레신문사 2000 참조.
131) JPIC를 발의한 공로로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폰 봐이젝커가 했던 말이다. 분배문제의 불균형, 핵무기의 과다보유 그리고 생태계의 붕괴의 현실을 기독교정신이 아직 실현되지 못한 반증으로 여긴 것이다. 칼 F. 폰 봐이젝커, <<시간이 촉박하다>>, 이정배 역, 기독교서회 1988 참조.
132) 로즈마리 류터, 앞의 책, 342-348.
133) 로즈마리 류터, 앞의 책, 355-356.
134) 이삼열, 앞의 책, 160-161.
135) ‘복음적’, ‘한국적’, ‘생명적’이란 말은 최태용이 시작한 복음교회(단)의 표제어였다. 하지만 필자는 감리교의 사회신경 속에서도 이런 세 차원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136) 손규태, 앞의 책, 198-211 본래 손규태는 화해와 원수사랑 그리고 새로운 인간(새 피조물)을 적시했으나 필자는 화해와 사랑의 동질성 탓에 둘을 하나로 묶고 대신 회개를 말했다.
137) 이신, <<슐리얼리즘과 영의 신학>>, 동연 2011, 328-340 참조 이신에 따르면 성서에 이단(異端)이란 말이 14번 나오는데 4번을 제외하곤 모두 당파, 파벌, 분당의 의미로 쓰였다고 했다.
138) M. 보그& J. 도미닠 크로산, <<첫 번째 바울의 복음>>, 김준우역, 한국 기독교연구소 2010. 이하 내용은 이 책을 나름대로 풀어 재정리한 것이다.
139) M.보그 & J. 크로산, 위의 책, 237-238
140) M.보그 & J. 크로산, 위의 책, 238-244
141) M.보그 & j. 크로산, 위의 책, 244-249.
142) 알랑 바디유,<<사도바울>>, 현성환역, 새물결 2008.
143) 본 논문 13쪽을 보라.
144) 안세진, “한국 기독교 사회주의의 형성과 분류”, <통일이후 신학연구> 4(2012) 감신대 한반도 통일신학연구소, 218-226
145) 특별히 월북한 김창준의 경우 이런 확신이 지대했다. 사회주의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고 사회주의가 일굴 가치가 중요했기에 이질적인 이념을 품을 수가 있었다. 안세진, 위의 글, 222.
146) 이 책의 아쉬운 점은 노무현 재단 유시민 이사장과의 대담 내용을 풀어 정리한 것이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10.4 선언’에만 초점을 맞췄다는 사실이다. 물론 본 선언도 중요하겠으나 진일보된 ‘4.37선언’을 다뤘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도올 김용옥, 앞의 책, 116-121.
147) 도올 김용옥, 앞의 책, 173-178,
148) 도올 김용옥, 앞의 책, 191.
149) 도올 김용옥, 앞의 책, 189-190. 그럼에도 도올은 근본에 있어 동학 역시도 유교적 가치관을 떠나서 말할 수는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유교적 자본주의와 유교적 수령주의 체제에서 효(孝)를 중시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150) 조성환/이병한, <<개벽파 선언>>, 모시는 사람들 2019, 151-162.
151) 이찬구, <<천부경과 동학>>, 모시는 사람들 2007.
152) 도올 김용옥, 앞의 책, 186.
153) 이하 내용은 런던대학교 정경대학 교수인 앤서니 D, 스미스 교수의 <<민족의 인종적 기원>>(그린비 2018)을 정리하여 재 서술한 것이다. 필자의 <<세상 밖에서 세상을 걱정하다-이정배의 수도원 독서>>, 139-151 참조.
154) 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민족주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윤정숙역, 나남 2002. 이에 대한 토론을 한국철학자대회에서 시도했다. 한국철학회편, <<탈민족주의 시대의 민족담론>>, 16회 한국철학자 대회, 서강대학교 2003, 10.10
155) 앤서니 D. 스미스, <<민족의 인종적 기원>>, 31-55 참조
156) 한국철학회편, 위의 책, 이곳에 실린 이삼열의 글(29-39)와 송두율의 글(57-63) 참조.
157) 앤서니 D, 수미스, <<민족의 인종적 기원>>, 323-362
158) 여기서 필자는 박순경을 재조명한 이은선교수의 논문을 재정리하는 선에서 그의 통일신학을 조명해 나갈 것이다. 박순경에 대한 1차 자료들은 이은선의 글에서 간접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특별히 본 장에서 두 학자간의 차이점에 더욱 주목할 생각이다. 원초(元草)에 대한 이은선의 비판이 본 장 마지막에서 다룰 통일신학의 생명적, 세계사적 차원과 더 잘 연계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은선, “한국 여성 신학자 박순경 통일신학의 세계문명사적 함의와 聖.性.誠 의 여성신학‘, 37-64.
159) 이은선, 위의 글, 37-38.
160) 이은선, 위의 글, 38-39.
161) 박순경의 이런 삶의 흔적을 담은 책으로 <<통일신학의 고통과 승리>>,(한울 1992)가 있다.
162) 이은선, 앞의 글, 40. 이점에서 박순경 역시 <<천부경>>을 비롯한 <<환단고기>>, <<삼일신고>>. 등의 엣 서적을 대단히 중시했다. 바르트적 신학의 추종자로서 놀라운 전회라 할 것이다.
163) 이은선, 앞의 글, 41 박순경, <<통일신학의 여정>>, 한울 1992, 40.
164) 이은선, 앞의 글, 41. 이은선의 논문 각주 17번 참조.
165) 이은선, 앞의 글, 40, 42, 박순경의 최근저서 <<삼위일체 하느님과 시간-구약편>>(신앙과 지성사, 2014)에 이런 논거가 잘 제시되어 있다.
166) 이은선, 앞의 글, 42-43.
167) 이은선, 앞의 글, 43. 48. 박순경, “한국 민족과 기독교의 문제”, <<민족통일과 기독교>>, 한길사 1986, 45-46. 박순경, “민주통일운동의 역사적 조명-1945년부터 1980년 까지를 중심으로”, <<통일신학의 여정>>, 104-105.
168) 이은선, 앞의 글, 43. 박순경, “통일신학의 정초를 위하여‘, <<통일신학의 여정>>, 79
169) 이은선, 앞의 글, 44. 46-47. 박순경, “한국민족과 기독교의 문제”, <<민족통일과기독교>>, 51-52
박순경에게 5.18항쟁은 민족/민중/민주항쟁이었다. 이것이 한미 연합군의 군사행동에서 비롯했기 때 문이다.
170) 향후 통일신학의 과제로서 주체사상에 대한 연구를 필히 요청하는 박순경의 생각에 동의한다. 본 논문에서는 다룰 여백이 없어 아쉬울 뿐이다. 참고로 최근 <에큐메니안>에 정대일이 주체사상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있음을 알린다. 장로교 신학대학에서 출판된 그의 박사논문 <<주체사상의 영생론에 대한 신학적 고찰>>(2011)도 참고할 것. 아울러 신은희의 “기독교와 주체사상과의 대화-생명주의 다문화 통일론”, <민족 사상연구> 1993. 이정배, “주체사상-남북대화를 위한 기독교의 과제”, <<3.1정신과 한반도의 평화>>, 276-283 참조.
171) 이은선, 앞의 글 51. 박순경, “한국민족과 여성신학의 과제”, <<민족통일과 기독교>>, 218. 이은선, <<포스트 모던 시대의 한국 여성신학>>, 분도 출판사 1997, 157-182.
172) 도올 김용옥, 앞의 책, 170-173. 170-178, 190-192. 이은선, 앞의 글, 58. 여기서 이은선의 ‘다른’ 기독론을 논할 여백이 부족하다. 자신의 논문 제목에서 밝혔듯이 유교와의 대화를 통해 3개의 성(聖.性.誠) 개념을 갖고 ‘다른’ 기독론의 의미를 설명했다. 앞의 글, 54-61. 이은선, <<한국여성 조직신학 탐구-聖.性.誠의 여성신학>>, 대한 기독교서회 2004. 참조
173) 이은선, 앞의 글, 53-54. 박순경, “통일신학의 정립과정에서”, <<통일신학의 여정>>, 154
174) 도올 김용옥, 앞의 책, 195-201.
175) 각주 132번 참조. 폰 봐이젝커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책을 통하여 JPIC대회를 발의했다.
176) JPIC 발의 공로로 바젤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는 자리에서 행한 수상소감의 일부이다.
177) 이정배외, <<한류로 신학하기-한류와 K-Christianty>>, 동연 2013, 25-73 특히 67-71 참조
178) 이정배, “생태신학적 관점에서 본 ‘기본소득’, 그 올바른 방향성을 위해”, NCCK 신학위원회 연속강연, 감리교 신학대학교 2019. 10.29, 1-9. 특별히 여기서 ‘기본자산’이란 말은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2014, 글 항아리)에 이어서 자신의 신간 <<자본과 이데올로기>>(쇠이은, 2019)에서 언급한 새 개념이다.
175) 피케티가 <<자본과 이데올로기>에서 특히 새롭게 주장한 핵심개념이다.
179) 필자는 이를 위해 유산의 1/10를 기부하는 제안을 한 바 있다. 물론 교회에 내는 십일조외의 십일조 차원에서다. 최소한의 제안이었으나 아직까지 이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가 없다.
180) 필자는 최근 코로나 관련 글을 쓰면서 금번 사태가 신적 폭력성, 곧 인류 미래를 희년 법으로 재 탄생 시킬 수 있는 사건으로 해석한 바 있다. 나아가 예수 탄생의 사건처럼 그 의미를 살릴 것을 주장했다. 이정배, “문명 비판적 시각에서 본 코로나 바이러스, 그 신학적 의미와 평가 그리고 이후 교회”, 2020, 미간행 논문. 1-12.
181) ‘다른 백년’의 열린 광장 아고라에 기고한 <한겨례 신문>기자 한승동의 글(2019. 12.24) 제목을 참고하라. “왜 우리는 주한 미군 철수얘기를 하지 않는가?”가 글 제목이다. 이하 내용은 여기서 발췌 정리한 것이다.
182) 이것은 <녹색평론> 편집자 김종철의 지론이다. <창비>의 백낙청도 이점에서 동의할 것이다. <경향신문>(2018, 3.20)에 의하면 김일성 역시 고르바초프를 통해 레이건 미대통령에게 ‘통일 중립국’ 창설을 제안했다고 하다. 미국에 의해 거절되었지만 말이다.
183) 제레미 리프킨, <<생명권 정치학>>, 이정배 역, 대화출판사 1996. 참조
184) 헬레나 노르베리, <<로칼의 미래>>, 남해의 봄날 2019. 자본주의의 착취적 경제 대신 순환경제란 대안적 체제가 여기서 비롯할 수 있다.
185) 통일 연구원 편, <DMZ 의 평화적 이용>, 2019년 학술회의 프레지던트 호텔, 2019. 1.22, 이곳에 실린 녹색연합 소속 서재철의 두 번째 발표 글 “DMZ의 평화적 이용과 생태환경보전대책”참조.
186) 이정배, <<세상 밖에서 세상을 걱정하다-이정배의 수도원 독서>>, 54-56. 사실 이 비유는 프랑크 비애의 논문에서 언급되었다. 그의 논문 “샴 쌍둥이 국가 –경계상 분리와 합체성에 관한 문제” <<경계에서 분단을 다시보다>>, 신한대학교 탈(脫)분단경계연구원(편), 율력 2018. 참조.
187) 이정배, <<수도원 독서-세상 밖에서 세상을 걱정하다>>, 56. <<경계에서 분단을 다시보다>> 120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