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yun Ju Kim
Sp0on7oe3hd ·
로만 가톨릭에 프로테스트하며 출발한 (개신)그리스도교는 성서종교 중에서 헬레니즘식 성서 해석에 대한 의존도가 가장 높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의 기여가 컸음은 신약성서에서 바울 저작의 구성비가 압도적으로 크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바울의 그리스도교’라고 부르고 싶다.
예수는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라는 실체를 현상적으로 보여주고 떠났다.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사건의 흔적을 추슬러 교회 공동체와 그들의 삶으로 구성한 이는 바울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이자 헬라인이었던 바울의 이중적인 정체성은 제국의 시민으로서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복음을 수용하고 체계를 잡고 전달하는 일에 유용했다. 그러나 스스로는 자신이 살아가는 맥락 속에 진리의 내용을 어떻게 담을까 고민하였을 것이고 끝내 균형을 잃을까 두려웠을 것이다. 그가 지울 수 없는 양피지에 편지를 새길 때 얼마나 신중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렇지만 그는 쓰고 또 썼다. 심지어 그의 편지가 아닌 것 같지만 그의 편지라고 여기고 싶은 글들도 성서에 담겨 있을 만큼 그는 편지를 많이 썼다. 나의 어머니가 아닌 것이 확실하지만 무대에 오르는 병정들처럼, 모세가 쓰지 않았음이 분명하여도 모세의 글이라고 불리는 오경처럼, 그리스도를 결코 만난 적이 없는 바울은 독자들의 마음에 쏙 드는 그리스도의 사도였다. 성령께서 하신 일이라고 하자면 성령께서 굳이 바울하고만 소통하실 리는 만무하므로 이는 바울의 작업이라고 일단은 부르고 싶다.
요즘 유행하는 1세기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궁금한 내용은 그레코로만 문명에 토착화된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껍데기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초대교회라고 부르면 우리가 추구하고 돌아가야 할 궁극적인 모습이라는 인상을 받지만, 그 역시 특정 정치사회문화역사적인 맥락 속에 구현된 진리의 여러 모습 중 하나일 뿐이다. 거기서 껍데기를 벗겨 내고 속에 담긴 진리의 본질을 꺼내어 우리가 속한 세계 안에 자리 잡게 하는 것이 말 그대로 선교(宣敎)이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바울의 편지에서 그의 속마음을 읽고 싶다. 까다롭게 챙기는 부분과 너그럽게 놔두는 영역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싶다.
전통적인 로만 가톨릭은 로만 가톨릭의 전통을 정교하게 구축하였고, 개신교도 처음에만 개신(改新)하였지 나중에는 전통과 형식이 숲처럼 빽빽하게 자라나 햇빛이 보이지 않게 된 것 같다. 빌라도는 예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요한복음에 궁극적 실재를 탐구하는 이교도 빌라도의 모습을 기록한 것은 진리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진리는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추구되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더 깊은 진리보다는 수준이 낮은 진리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번 ‘바울과 하나님 나라’ 강의에서 만난 바울은 찾는 사람이었다. 그는 약할 때 강해짐을 말한다. 자신이 어리석을 때 그리스도의 지혜가 드러남을 말한다. 유대인이 낙오될 때 이방인이 복음을 받고, 이방인이 구원을 받으면 낙오자도 마침내 돌이키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이라, 어떠하다고 말하기를 주저하고 ‘깊도다!’라는 감탄사로 입을 닫는다. 말로 담을 수 없는 진리를 말로 표현해야 하는 난처함을 표현한다. 한번은 어떤 이를 제거하고 상종하지 말라고 했다가 다음에는 벌이 충분하니 이제 그이를 위로하라고 했다. 너무나 많은 행위 도덕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하라고 또 얼버무렸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고 실천하라는 말인가.
바울의 많은 편지글은 그렇게 얼버무리는 것이 최선임을 호소한다. ‘모자를 써라.’는 한마디가 이천 년 동안 여자들의 머리에 미사포를 씌울 줄을 바울은 몰랐을 것이다. 만일 알았다면 고린도교회에 수십, 수백 번째 편지를 다시 써서 교회 지도자들을 설득하려고 하였을지 모른다.
나는 오랫동안 바울서신이 불편했다. 구체적인 행위규범으로 가득한 바울서신은 율법보다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가 무엇이냐?”는 빌라도의 질문으로 성서를 다시 읽으면 많은 행위규범 속에 담긴 궁극적인 진리가 어렴풋이 보일 것도 같다. 사도신경에서 예수에게 고통을 준 당사자로 지목된 빌라도는 나다. 그는 손을 씻고 물러났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묻고 또 묻겠다. 빌라도는 군중을 두려워하였지만 나는 제도화된 교회의 권위와 안수받은 목사들과 장로들의 권위에 주눅 들지 않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다시 바울서신을 기꺼이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다. 진리를 찾지는 못하더라도 해야 할 질문을 던지고 답을 기다리며 궁금해하고자 한다. 이것은 ‘바울의 그리스도교(Christianity)’이면서 동시에 ‘바울의 그리스 도교(Greek Taoism)’이래도 좋다.
#느헤미야 #바울과하나님나라 #한수현
1 comment
전남식
잘 읽었습니다.
===
"진리는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추구되는 것 ...
나는 멈추지 않고 묻고 또 묻겠다."
- 저는 기독교인도 아니지만 같이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