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6

[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3. 개화기 불교-일본의 영향 (박노자 교수) - 중앙일보

[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3. 개화기 불교-일본의 영향 (박노자 교수) - 중앙일보

[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3. 개화기 불교-일본의 영향 (박노자 교수)

[중앙일보] 입력 2003.07.31 17:49 수정 2003.08.01 08:42 | 종합 16면 지면보기PDF인쇄기사 보관함(스크랩)글자 작게글자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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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화기 불교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은 흔히 당시 젊은 승려들이 일본 불교에 대해 호의적 태도를 보이며 대일 협력을 모색한 것을 지적합니다.







천민 수모 승려들 개벽 세상 돌파구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1920~30년대 승려들이 대대적으로 일본에 유학한 점과 대처.육식 풍토 조성 등도 비판의 도마에 오릅니다. 대체로 민족의식의 결여와 불교의 일본화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겨우 형성되기 시작한 민족 관념을 절대적 척도로 삼아 1백년 전 승려들의 '비(非)민족성'을 규탄하기보다, 그들의 행동 논리를 당대의 문맥 속에서 가치 중립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한층 생산적이고 과학적인 태도가 아닐까요?







'민족독립'을 우선하는 오늘의 시각에서 본다면, 1870년대 말부터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벌인 일본 승려들은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유생과 탐관오리, 토호들의 토색(討索)에 시달리며 천민대접을 받아온 조선 승려들에게, 가렴주구를 근절하고 모욕적인 도성 출입 금지법을 해제하도록(1895년) 갑오내각에 압력을 넣어준 일본의 '동류'들은 '밝은 세계'로 인도해주는 '선우(禪友)'로 보였을 것입니다.







물론 개화승으로 잘 알려진 이동인이 이미 1880~81년 사이에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자 단체인 '흥아회'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1842~1917)와 같은 일본 외교관과 접촉하여 '종속발전' 계획안, 곧 조선이 일본의 투자를 받아가면서 일본에 원자재를 공급해야 한다는 등의 안을 내놓은 것은 사실입니다('흥아회보고', 제4권, 1880년).







그러나 현실적으로 일본의 투자에 의존하는 '종속 발전'이 불가피하다고 보기는, 어윤중(魚允中.1848~1896) 등 갑오 내각의 주인공들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윤치호(1865~1945)와 같은 초기 기독교적 근대주의자들은, 아예 '열강'에 대한 의존을 넘어 어떤 한 강대국의 직접적.적극적인 간섭만이 '조선의 개혁'을 촉진할 수 있다는 생각마저 피력하였습니다.('윤치호 일기', 1894년 7월 31일).







즉 세계체제 중심부나 그 중심부의 '대리인'을 자임한 지역적인 '패권국가 후보생' 일본에 의존하려는 경향성은, 불교계뿐 아니라 1880~90년대 개화파 전체에 퍼져 있는 일반적인 흐름이었습니다.







대한제국에서 내셔널리즘이 본격적으로 형성.보급되기 시작한 1900년대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조선의 새 문명이 일본을 통해서 많이 들어오는 때이니까 …새 시대의 기운이 융흥하다 전하는 일본의 상황을 보고 싶던 것이었다. …그래서 동경의 조동종(曹洞宗)대학 (오늘의 구마자와 대학교 전신)에 입학하여 일본어도 배우고 불교도 배웠다"('내가 왜 중이 되었나', '삼천리', 1930년 5월).







이는 한용운이 1908년 자신의 일본 유학 동기에 대해 설명한 글입니다. 이 글이 말해주듯, 당시 개화적인 젊은 조선 승려들에게 일본은 불교 근대화의 방법을 배워야 할 '새 문명의 중심'이었습니다.









물론 후진국 일본이 아닌 선진국 미국 등을 모델로 삼았던 기독교계의 '따라잡기' 프로젝트가 훨씬 더 미래 지향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미 주류사회가 극동의 대승불교를 '미신'이나 '우상 숭배'로밖에 보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불교계의 대미접근이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개화기.식민지 때 불교계가 일본을 '근대에 이르는 이동 경로'로 삼았던 사실은, 그 모든 부정적인 점에도 불구하고 '불교적 근대성'의 발전 가능성 역시 나름대로 열어두었습니다.







예컨대 1930년대 한용운이 심취했던 '불교적 사회주의' 사상 등은 당시 일본 불교의 진보적 승려 운동에서 시사받은 바 컸습니다. 물론 대일 종속적인 불교계의 근대화가 남긴 짐도 여간 무겁지 않습니다.







'호국 불교'가 맹목적인 국가 옹호의 논리로 오해되고, 식민지 당국에 대한 충성심을 '검증'받은 큰 사찰의 주지들이 당국과 유착하여 축재.사치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 모두 그때부터 비롯된 일입니다. 일제 말기부터 굳어진 불교의 국가주의적.군사주의적 왜곡에서 벗어나는 일은 오늘의 한국 불자들에게 결코 쉬운 과제는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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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앙일보] [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3. 개화기 불교-일본의 영향 (박노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