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27

엔도 슈사쿠의 <침묵> -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 -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침묵(보급판)(믿음의글들9)  상세보기
지은이 엔도 슈사쿠
출판사홍성사
출간일 2005.7.29
----

 이 책은..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를 배경으로 쓰여진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읽었다.  17세기 서양과 무역으로 재미를 본 일본 권력자들이 처음엔 기독교의 선교 자체에 호의적이었으나, 곧 정치적이나 경제적 목적에 휘둘려, 무자비한 기독교 박해를 시행한다.  파송된 신부들을 비롯해 수많은 일본의 카톨릭 신도들이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끝에 처형되고, 남겨진 이들은 배교를 종용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포루투칼에서 파송된 덕망높고 신심깊었던 페레이라 신부가  영광된 순교를 거부하고 고문의 위협에 눌려 배교라는 치욕스런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로마교황청에 접수된다.  결국 그는 교회에서 제명되고, 이런 불명예스런 배교를 저질렀다고 상상할 수 없었던 그의 제자들이 일본으로 비밀리에 입국하여, 그의 행방을 추적하게 된다.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 로드리고는 일본에 입국, 비밀리에 신도들을 만나다 결국 체포되어 투옥되고, 우여곡절끝에 완전한 일본인으로 변신한 스승 페레이라와 옥중에서 재회하게 되는데, 교회와 하나님께 영광인 아름다운 순교를 거부하고,  구차하게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 배교를 선택한 그는, 열심히 자신의 배교 행위를 로드리고 제자에게 설득하려 든다. 강한 신앙심으로 순교를 결심한 로드리고는 흔들리는데.....결국 로드리고 신부도 페레이라의 뒤를 이어, 성화를 밟아 하나님을 모독하고 교회를 배신하는 배교를 결심하게 된다.  그들은 신부로서 명예로운 죽음인 순교를 포기하고,  배교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소설은 이 과정에서 종교와 세속의 권력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부를 통해, 무엇을 보려주려 하는걸까?

그리 긴 분량이 아니지만, 이 소설은 신앙인들에게 던지는 질문 자체의 무게가 어느 작품 못지 않는 문제작이다.  작가는 로드리고 신부를 통해 작품속에서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눈앞에서 일본인 신도들이 권력자들의 잔인한 폭력앞에 쓰러져간다.  이천년전 예수님의 십자가형에 못지 않은 고통을 겪으며 신도들이 죽어간다. 그들은 사실, 신부인 자신들이 가르쳐준 성경과 교리를 지키고자 한 것 밖에 죄가 없다. 자신의 눈앞에서 처형을 기다리고 있는 신도들에게 신부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겨우 짧게 기도해주는 것이 전부다. 그들은 목이 잘리거나 구멍에 거꾸로 매달려 고통스럽게 죽어가거나 바닷가에 매달려 수장되고 있다. 그들의 처형뒤에 무슨일이 있는가?  세상은 파리의 날개짓 조차 들을 수 있을만큼 조용하고, 한가하고, 평화롭다.  그들을 처형한 무사들은 희희낙낙하며, 사람들은 무관심하다. 이 거룩한 순교앞에서 세상은 어찌 이렇게도 거룩하지 못할까?  그리고 대체 하나님은 왜 역사하시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마른 하늘에 벼락이라도 내리지 못하는 걸까?  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며, 왜 `침묵'만을 지키시는가?   이 소설이 묻고 있는 질문이다.

"예루살렘의 밤, 한 사나이의 운명에 아무 관심도 없이 불에 손만 쬐고 있던 몇 사람의 모습. 그들처럼 이 파수꾼들도, 인간이란 이 정도로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있구나 하고 느끼게 하는 그런 소리로 웃기도 하고 지껄이기도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도둑질을 한다거나 거짓말을 하는 그런 것이 죄가 아니었다. 죄란, 인간이 또 한 인간의 인생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거기에 남긴 흔적을 망각하는 데 있었다."- 엔도 슈사쿠,<침묵>,p.136

사실, 신부들은 아름다운 순교로 죽음을 선택했어야 맞을것도 같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가르침을 받은 일본인 신도들은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맞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드리고나 페레이라는 배교하고 만다. 언뜻보기에 이것은 모순같다.  이노우에라는 최고권력자는 로드리고 신부와 옥중에서 일본사회와 신앙에 대한 논쟁을 통해, 일본은 문화적 특수성으로 타종교가 뿌리내릴 수 없는 늪지대와 같다고 비유한다. 어떤 종교건, 일본으로 건너와 자체의 가르침을 그대로 유지한체로 포교될 수 없다. 그들이 믿는것은 신부가 가르쳐준 하나님이 아니라, 일본인의 다신사상속에서 섬김을 받고 있는 수많은 신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신부에게 표면상의 배교를 종용한다. 마음속으로 무엇을 품고 있건 상관없이, 표면상의 배교, 즉 발로 성화를 밟고 지나가고 말로 배교한다고 선포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노우에의 주장은 정치권력자로서 통치의 수단으로 기독교의 사상이 맞지 않기 때문에, 더이상의 포교를 허락하지 못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신부는 자신의 배교가 신도들의 목숨과 연계돼 있다는 현실적 딜레마에 빠져든다.

아름다운 순교는 교회 자체의 명예를 드높이고, 자신의 신부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내는데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서 실제적으로 신도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  만약, 우리가 저 신부의 입장에 놓인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하나님은 또 어떤 모습을 로드리고에게 바랐을까?  하나님의 침묵가운데서 신부는 결국 배교를 선택한다.  성직도, 신앙도, 그리고 그렇게도 사랑했던 하나님의 얼굴조차 밟고 지나간다. 이 처절한 선택의 고뇌와 행위 사이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일본인 특유의 절제된 문장력으로 작가 엔도는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소설의 중심은 지상의 고통과 하나님의 `침묵'이 가리키는 의미를 찾아내는 데 있다. 신부가 계속해서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은 침묵을 깨시고 이 지상에 그 힘으로 역사하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성직자가 품고 있을만한 신앙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아들의 죽음앞에서도 침묵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지상에서 한 인간으로서 감내할 수 있는 모든 심적,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고 마지막을 장엄히 마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 로드리고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무구한 신도들의 죽음앞에 하나님의 침묵을 질타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요구의 부당함을 신학적으로 지적할 수 있을까?  물론 이론적으론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내가 그 박해의 시대를 살았던 신부나 신자였다면, 과연 그 이론이 유용할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신부로서 죽어가는 신도들을 도울 방법은 오직 자신의 배교 행위밖에 없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결국 로드리고 신부는 지금 그 순간 신도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그들을 위한 최후의 기도가 아니라, 바로 성화를 밟고 또 배교행위를 선포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스승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 행위를 이제 제자인 로드리고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파수꾼이 견디다 못해 몽둥이를 쥔 채 밖으로 나오자 기치지로는 도망가면서 계속 소리쳤다. `그렇지만 제게도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말고요." p.177

성직도 잃고 신앙도 잃었지만, 로드리고 신부는 결코 마음속의 하나님은 잃지 않았다. 교황청의 파문조차 이제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신이나 일본인 신도들이나 박해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니 기독교가 공인된 나라에 태어났더라면, 어쩌면 자신이나 배교를 선택한 기지치로라는 사람이나 모두, 아름다운 신앙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로드리고 신부는 교회에서 파문당한것이지만, 하나님께 파문당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은 하나님의 침묵의 바른 뜻을 해명하며 끝을 맺는다.  우리가 힘들때, 우리가 시련에 놓였을때, 가장 먼저 찾는 것이 하나님이다. 우리가 능력있을때, 우리가 행복할때, 우리는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기도 한다. 신앙에 불타다가도 때로 신앙을 잃기도 하며, 다시 하나님앞에 볼낯을 붉히며 되돌아오기도 한다.  우리는 매일 죄짓고, 또 죄를 회개하며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며, 사랑한다 말해놓고 배신하기도 한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으며, 우리는 자신에게조차 정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연약하며, 우리는 비굴하고, 교만하며,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시며,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자신의 얼굴을 밟고 지나가는 순간에도, 그에게 침뱉고 모욕하는 순간에도, 그에게 영광돌린 순간처럼 그와 함께 계셨다.  이것이 하나님이고, 그분의 성품이다. 이 소설은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이며 자비로우심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p.2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