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부에서 계속)
2019/06/04
1904 박한식[2] “클린턴 행정부는 내게 자꾸 물었다…영변 폭격하면 어찌될까”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클린턴 행정부는 내게 자꾸 물었다…영변 폭격하면 어찌될까”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클린턴 행정부는 내게 자꾸 물었다…영변 폭격하면 어찌될까”
등록 :2019-04-01 16:06수정 :2019-05-21 14:38
길을 찾아서-2회-카터의 첫 방북 드라마-하
1994년 6월16일 카터 백악관에 ‘통보’
“김일성 ‘북핵동결 합의’ 공개하겠다”
곧바로 CNN 평양 특파원과 인터뷰
‘폭격 대기중’ 클린턴과 한동안 ‘냉랭’
‘북핵 폭격 해결’ 주장은 순진·위험
“북은 반드시 보복 공격 할 것이다”
6·25때 초토화된 북은 ‘전국 땅굴화’
남은 초고밀도·인구집중 ‘살상 막대’
합의 21일뒤 ‘김일성 급서’ 들은 카터
정성어린 조문 편지에 북 관리 ‘눈물’
‘김일성 유훈’ 10월21일 ‘제네바 합의’
미국도 일본도 한국도 ‘지원’ 불이행
“3개월 못버틴다” 전략적 인내 ‘고수’
“북한붕괴론의 5가지 허상 깨달아야”
주체사상·선군정치
길을 찾아서-2회-카터의 첫 방북 드라마-하1994년 6월16일 평양에서 카터가 김일성과 만나서 합의한 ‘북핵 동결’은 먼저 클린턴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워싱턴시각 15일) 카터는 평양에서 백악관의 로버트 갈루치에게 전화를 해서 합의 내용을 전달한 다음, <시엔엔>(CNN) 인터뷰를 통해 그 내용을 미리 공개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그리고 실제로 인터뷰를 진행해버렸다. 카터는 합의 내용이 세상에 빨리 공개되지 않으면, 이미 충분히 준비된 미국의 ‘북한 영변 폭격계획’이 실행에 옮겨질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카터의 조처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한동안 냉랭하게 지냈다.
1994년 6월16일 ‘글린턴의 특사’ 카터가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핵 개발 동결’에 합의한 사실을 <시엔엔>과 현지 생방송 인터뷰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시엔엔 화면 갈무리실제로 그때 카터가 김일성과 만나서 북핵 동결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면 클린턴 행정부는 영변을 폭격할 계획이었다. 그런 와중에 클린턴 정부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여러 차례 했다. “미국이 영변을 폭격했을 때 북한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에서는 요즘도 미국이 그때 영변을 폭격했다면 북핵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발언은 북한의 실상을 전혀 모른 채 오로지 북한에 대한 극단적 증오심에 기초해서 내뱉는 순진하고도 위험천만한 생각의 소산일 뿐이다. 나는 “미국이 영변을 폭격하면 북한은 반드시 보복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면 북한이 어떤 식으로 보복할 것으로 보느냐고 나에게 다시 질문했다. 이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주한 미군기지, 주일 미군기지, 괌 주둔 미군기지 등을 폭격할 것이다”, “미군기지 주변에는 많은 민간인도 살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북한이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폭격하면 수십만명의 인명이 살상될 것이다”, “미국은 반드시 국제사회에서 그 피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1994년 6월16일 미국 워싱턴(현지시각 15일)의 백악관에서 회의중이던 고어 부통령, 윌리엄 페리(맨오른쪽) 국무장관 등 클린턴의 참모들이 <시엔엔>을 통해 카터의 인터뷰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 돈 오버도퍼 <투 코리아> 중에서.한편, 1950년 무렵 평양의 인구는 약 100만명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전쟁 때 미국 공군은 평양에 약 1만개 정도의 폭탄을 투하했다. 100명당 1발꼴로 폭탄비를 쏟아부은 셈이다. 그 시절엔 한 집에 보통 10명 정도의 대가족이 살았다. 따라서 평양에는 약 10만 가구가 있었던 셈인데 미군의 폭격으로 그 모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물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북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바로 이 때문에 북한의 미국에 대한 원초적 적대감이 끊임없이 분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통해 미 공군 폭격의 위력을 목격하면서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땅굴을 파서 방공호를 만드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아마도 북한은 현재 세계에서 땅굴을 가장 잘 팔 수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양의 지하철도 지하 100m 깊이에서 운행된다. 대동강 강바닥 밑으로 지하철이 다니는 것이다. 또한 그 지하철 내부에는 방대한 영역의 대피소가 있다. 지하철이 곧 거대한 방공호인 셈이다. 따라서 유사시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면 평양 시민들은 마치 ‘개미새끼처럼’ 지하의 방공호로 모두 들어가 버린다. 그러면 미국은 폭격할 목표 지점을 확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반면 미국의 우방인 남한의 사정은 어떤가? 남한에서는 모든 것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다. 서울의 자동차만 하더라도 수백만대에 이른다. 그런데 모든 차에는 연료(가솔린, 디젤, 액화천연가스 등) 탱크가 장착되어 있다. 따라서 북한에서 한국을 폭격하면 자동차들이 곧 폭탄이 되어 버린다. 또한 한국에서는 집집마다 도시가스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그 집들도 폭격을 당하면 이내 폭발해버릴 것이다. 자, 미국 당신들 남한과 북한을 비교해 보라. 당신들이 영변을 폭격하면 우방국인 남한 사람들은 수백만명이 죽어 나갈 것이지만, 정작 북한 사람들은 그만큼 죽지 않는다. 이처럼 빤하게 보이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 전쟁이 나면 북한이 남한보다 우세하다. 심지어 미국보다 북한이 우세할 수도 있다.”
나는 이런 식의 얘기를 카터에게도 전하고, <시엔엔> 등 여러 유력 언론에 나가서도 되풀이 경고했다. 그러자 좀 진보적 시각을 지닌 많은 사람들은 나를 찾아와서 더 얘기를 듣고 싶어 했다. 다행히 그들은 대부분 쉽게 내 얘기에 수긍했다.
그러나 한국의 김영삼 정부는 전쟁 방지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전쟁의 파국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해도 모자랄 판이었는데, 오히려 카터의 방북을 반대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미 공군의 집중 폭격으로 초토화된 평양 시내 전경. 박한식 교수는 ‘미제에 대한 북한의 원초적 적대감’의 뿌리이자 트라우마가 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창비 제공카터는 그해 16월15~18일 3박4일간 평양을 다녀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달이 채 되지 않은 7월8일 김일성 주석이 급서했다. 카터는 평양에 다시 들어가 조의를 표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평양에 정성 들여 쓴 편지를 보냈다. 북한에서 영어 잘하기로 손꼽히는 한 참사관이 카터의 그 편지를 읽고서 엉엉 울 정도였다고 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방송을 통해 김일성의 장례식에 ‘외국인 조문 사절 원칙’을 발표했다. 그래서 카터의 조문 방북을 거절했다. 나는 훗날 카터의 편지를 읽고 울었다는 북한 참사관을 카터에게 소개하는 자리를 만들기도 했다. 그 북한 참사관은 카터에게 정중하게 답례 인사를 했다.
1994년 6월15~18일 3박4일간 1차 방북을 통해 ‘1차 북핵 위기’를 해결한 카터는 세계적인 평화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앞서 16일 ‘북핵 동결 합의’를 전격 발표하면서 클린턴과 사이가 불편해진 때문인지 18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환하는 카터의 표정이 밝지 않아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나는 김일성 서거 당일 로마에 있었다. <시엔엔>에서 나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나는 그때 북한 쪽에 “내가 당장 북한에 가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시엔엔>은 북한과 소통할 수 있는 핫라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이 가능했다. 하지만 내게 돌아온 답변은 “북한에 오셔서 통곡하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평양에 가지 않았다.
1994년 6월15~18일 첫 방북한 ‘북핵 특사’ 카터는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만나 전격적인 ‘북핵 동결’ 합의를 끌어냄으로써 한반도 전쟁 시계를 극적으로 멈추게 했다. 그 3주 뒤인 7월8일 김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과 12일간의 국장 소식은 또 한번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한겨레> 자료사진.1994년 카터의 방북으로 전쟁의 고비를 넘긴 ‘1차 북핵 위기’는 10월21일 ‘제네바 합의’로 일단락되었다. 북한이 핵개발을 동결하는 대신, 국제사회에서는 전력난이 심한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제공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의 유훈으로 맺어진 제네바 합의는 사실상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생명력을 잃은 셈이었다. 김영삼 정부는 ‘김일성 없는 북한이 3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붕괴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미국도 제네바 합의 이행을 위한 예산 배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경수로 설비 비용을 모두 한국에 떠넘겨 버렸다. 한국 역시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다. 그 뒤로 미국은 북한이 붕괴되는 날만 기다렸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라는 것도 바로 그런 발상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소비에트연방 붕괴 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연달아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시간은 자기들의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에도 후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통치’에 따라 북미는 ‘제네바 합의’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그해 10월21일 로버트 갈루치(왼쪽) 미 대북 특사와 강석주(오른쪽) 북 외무성 제1부상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북핵동결과 경수로 지원’ 등을 담은 합의문을 교환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그러나 북한은 지금까지 붕괴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안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지금까지 건재하다는 사실은, 수많은 정치인이나 연구 학자의 사유를 강력하게 지배해온 ‘북한붕괴론’이 현실 앞에서 반복적으로 ‘파산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북한이 무너지지 않은 까닭은 대략 5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는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서 소련에 크게 의존해서 유지된 반면, 북한은 주체사상을 표방하면서 소련의 영향력을 자각적으로 배제하는 노선을 걸었다. 따라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는 소련이 붕괴하자 커다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북한은 그런 충격을 피할 수 있었다. 둘째, 일반적으로 정치체제가 붕괴되려면 국민의 지지가 철회되는 이른바 ‘정통성 위기’(legitimacy crisis)가 벌어져야 한다. 그런데 북한체제의 정통성은 경제가 아니라 ‘주체사상’이라는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경제가 어려워도 체제의 정통성 위기가 곧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은 경제가 어려워지자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더욱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 셋째, 정치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쿠데타가 발생하려면 쿠데타 세력끼리 공유할 수 있는 비밀정보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북한은 정보가 철저하게 통제된 나라이고, 또 모든 정보가 투명하게 유통되는 나라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비밀정보를 매개로 쿠데타 활동을 하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넷째, 북한은 남한과 정통성 경쟁을 전개하면서 북한 체제의 정통성을 확보한다. 따라서 만일 남한이 없다면 북한은 정통성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다. 남한을 부정함으로써 정통성을 유지하는 방식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북한 특유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주지하듯 동독은 서독에 흡수통일 되었다. 그러나 북한이 남한에 흡수통일 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동독과 북한의 사정이 판이하게 다르고, 서독과 남한의 사정이 판이하게 다르며, 동서독 관계와 남북한 관계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독과 동독은 모두 독일 민족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강한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반면, 남한은 민족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 내지 적대감을 갖고 있다. 요컨대 위에서 예시한 요건이나 상황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북한의 붕괴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내 판단이다.
1994년 6월18일 귀환한 카터(왼쪽)는 청와대로 김영삼(오른쪽) 대통령을 예방해 ‘김일성의 7월중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전했다. 김 대통령은 조건 없는 수락을 발표했으나 김일성이 사망하자 ‘3개월 이내 북한붕괴론’을 장담했다. <한겨레> 자료사진그러나 북한이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선군정치’(Military-First Politics)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선군정치를 군인이 인민을 착취하는 구조로 이해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만일 선군정치가 그런 시스템이었다면 북한은 벌써 붕괴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군정치는 이른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에, 냉전이 종식되면서 사회주의 우방국의 경제적 지원이 거의 끊어진 시절에, 특히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제재가 북한의 숨통을 강력하게 옥죄던 시절에, 요컨대 북한이 철저하게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더 이상 생사를 기약할 수 없을 때, 오로지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생존전략이었다.
박한식 교수는 1994년 7월 김일성의 사망 이래 지금껏 ‘북핵 문제’ 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북한 붕괴론’은 체제의 근간인 ‘주체사상’과 ‘선군정치’를 무시한 허상이라고 지적한다. 북한 노동당에 ‘주체사상’ 선전 포스터. 연합뉴스북한에서는 인민 생활이 경제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군이 나서서 해결해 주고자 했다. 그래서 농경지에 나가서 일하는 사람의 90%가 군인이었다. 동네마다 군인이 인민을 돕는 사무소도 있다. 인민의 집에서 수도꼭지가 고장 나면 군인 사무소로 전화해 도움을 청한다. 그러면 군인들이 와서 고쳐준다. 군인들은 인민이 봉착하는 각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문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군인이 인민을 도와주면 인민은 자연히 군에 대한 충성심을 갖게 된다. 모든 인민의 아들과 딸은 군에서 10년간 복무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군인이 인민을 돕는 선군정치가 시행될수록 군인과 인민은 자연스럽게 일심단결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과 미국에서는 전쟁이 나면 휴가 나온 군인은 곧바로 군부대로 복귀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전쟁이 나면 군인은 자기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서 가족을 지키는 일을 담당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목적은 전투 고지를 탈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향 동네를 지키고, 그곳에 사는 자기 가족을 지키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 싸운다면 누구나 목숨 걸고 싸우지 않을 수 없다. 심장에서 나오는 충성심이 발휘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김일성의 훈시였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사회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88235.html#csidx269a40fae941b08b7d5a1f48925953d
1903 박한식[1] “한반도 평화해법 제시하겠다”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한반도 평화해법 제시하겠다”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한반도 평화해법 제시하겠다”
등록 :2019-03-18 16:42수정 :2019-06-03 09:45
‘길을 찾아서’ 새 연재 주인공인 박한식 조지아대 석좌교수가 지난해 11월 서울을 방문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통일의 길’ 찾아서 반세기 ‘평화학’ 개척
1981년부터 50여차례 방북 ‘김씨 3대’ 탐구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2번째 주인공은 북한전문가 박한식 미국 조지아대 석좌교수이다. 그는 스스로를 ‘평화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다. 1981년 ‘중공 지도자’ 등소평의 주선으로 첫 방북한 이래 지금까지 50차례 넘게 북한을 다녀온 그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정권을 안팎에서 내내 탐구해온 보기 드문 학자로 꼽힌다.
일제강점기 경북 지역에서 하얼빈으로 이주한 유민집안에서 1939년 태어난 그는 유년기 시절 해방의 혼란과 한국전쟁의 참상과 서울대 정치학과 시절 ‘4·19혁명’을 겪으며 ‘평화’를 인생의 과제로 삼았다. 1965년 미국 유학을 떠난 그는 “통일의 길을 찾을 때까지 귀국하지 말라”는 부친의 유지에 따라 반세기 넘게 한반도 문제 연구에 천착해 독창적인 ‘평화학’을 개척했다. 애초 ‘주체사상’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 그의 북한 연구는 ‘창시자’를 자처한 황장엽은 물론이고 김일성대학 등 북한 학자들을 대상으로 강의와 토론을 할 정도로 객관적인 시각을 인정받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학자를 넘어 남-북-미를 잇는 ‘평화의 중재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를 극적으로 해결한 ‘카터 북한특사’ 제안을 비롯해 그는 국제정치 무대의 막전막후에서 전쟁 위협으로부터 한반도를 지켜내는 ‘평화 수호자’ 노릇을 자임해왔다. 2010년 그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모교인 애틀랜타의 모어하우스대학에서 주는 ‘간디·킹·이케다 커뮤니티빌더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평화운동가로도 인정받았다.
<한겨레>는 지난 수개월에 걸쳐 박 교수와 필자인 이현휘 제주대 사회과학연구소 특별연구원의 인터넷 통신망을 통한 구술 인터뷰를 진행해왔다. 김정은-트럼프의 2차 북미정상회담 중단 이후 북핵 문제는 또다시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 팔순의 원로학자가 열정적으로 풀어놓는 ‘북한 탐구 비사’와 ‘한반도 평화 해법’을 격주로 한 차례씩 소개한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politics/defense/886355.html#csidx791843cce00a91cb860616990873964
1906 박한식 [6]. “어릴 적 만주땅 즐비했던 주검 보면서 ‘평화병’ 걸렸다”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어릴 적 만주땅 즐비했던 주검 보면서 ‘평화병’ 걸렸다” : 국방·북한 : 정치 : 뉴스 : 한겨레
“어릴 적 만주땅 즐비했던 주검 보면서 ‘평화병’ 걸렸다”
등록 :2019-06-03 23:05수정 :2019-06-03 23:11
6회 나는 왜 평화주의자가 됐는가
1981년 냉전 절정기 북한 첫 방문 나서
“북의 시각에서 주체사상 이해 필요”
애틀랜타공항 출발하기 직전 ‘공포’
세자녀 이름으로 생명보험 즉석 가입
딘 러스크 전 미 국무장관에게 ‘부탁’
“북에 있는 동안 내 신변 확인해달라”
‘미친짓’ 알면서도 북행한 이유 ‘평화병’
“유년기 만주에서 겪은 두 가지 체험”
국공내전 학살·아편중독 주검에 ‘충격’
“만주 조선인들 중독자 없어 놀라워”
마오쩌둥 ‘100년 중국병’ 사형으로 근절
“한반도 평화 보장할 안보문화 혁신을”
6회 나는 왜 평화주의자가 됐는가
나는 미국에서 50년 이상 사는 동안 지난 20년 사이 북한을 50회 넘게 다녀왔다. 미국에서 베이징을 거쳐 평양에 갔다가 다시 미국에 돌아오는 거리는 지구를 한바퀴 도는 거리다. 따라서 나는 지구를 50회 이상 돌았다고도 할 수 있다. 관광을 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한국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간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내 대학교수 박봉을 쪼개서 다녀왔다.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81년 여름방학 때였다. 북한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의 시각이 아니라 먼저 북한의 시각에서 주체사상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는 미국에서 카터를 누르고 보수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냉전의 긴장이 크게 고조되고, 또 한국에서는 전두환 군사정권이 출범하면서 남북간의 군사적 대립도 극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북한을 방문한다는 것은 스스로 ‘사지’에 들어가는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실제로 북한을 처음 방문하기 위해 애틀랜타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극심한 공포의 시간이었다. 생각 끝에 나는 그 자리에서 세 자녀 몫으로 300만달러의 생명보험을 들었다. 또한 딘 러스크에게 내가 북한에서 돌아오지 못할 때를 대비해 나의 신변 안전을 계속 확인해달라는 부탁도 해두었다. 러스크는 케네디 행정부와 존슨 행정부에서 9년 동안 국무장관을 역임한 뒤 내가 재직 중이던 조지아대학의 국제법 교수로 와 있었다.
박한식 교수는 조부모가 1910년대 일제 수탈을 피해 경상도 청도에서 만주로 이주해 정착한 하얼빈에서 1939년 태어나 해방 직후까지 유년시절을 보냈다. 1940년대 만주국 시절 일본의 엽서에 실린 하얼빈의 차이나타운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왜 그랬을까? 제정신이었다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진단해보면 ‘평화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언제부터 평화병에 걸렸을까? 시간을 거슬러 생각을 더듬어 보니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만주의 참혹한 풍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경상도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나의 할아버지 3형제는 한일 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 만주로 이민을 떠났다.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의 비옥한 땅은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이 선점했기 때문에 더 북쪽으로 흑룡강성(헤이룽장성)의 하얼빈에 정착했다. 그 뒤 나의 아버지도 할아버지와 합류했고, 1931년쯤 역시 경상도에서 떠나온 어머니와 결혼을 했다. 나는 1939년 3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두 살 아래 여동생보다 늦게 걸을 정도로 몸은 허약했지만, 두상은 상대적으로 커서 ‘가분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할아버지는 집에서 중국어와 일본어를 쓰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조선인 초등학교 국어 교사를 했고, 일본 법정에서 중국어와 일본어 통역도 했다. 내가 다닌 조선인 초등학교는 교실이 딱 하나 있었다. 그래서 맨 앞줄에 1학년 학생이 앉고, 그 뒷줄에 2학년 학생이 앉고, 그 뒷줄에 3학년 학생이 앉는 방식이었다. 나는 입학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셋째 줄에 앉았다. 두 차례 월반했기 때문이다.
1980년 박한식 교수는 북한 첫 방문 때 조지아대 동교 교수로 있던 딘 러스크에게 ‘신변 안전’을 부탁했다. 딘 러스크는 1945년 8월 일제 패망 직후 ‘한반도 38선’을 가장 먼저 제안한 정보장교 출신으로 케네디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을 지냈다. <한국방송> 갈무리나는 유년기 삶의 터전이었던 만주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 두 가지를 반복해서 목격했다. 하나는 ‘국공내전’에서 자행된 원시적 학살 장면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편중독으로 죽은 중국인 주검이 곳곳에 야적된 장면이었다.
국공내전 시기 무기는 변변한 게 없었다. 그래서 칼, 낫, 죽창 등과 같은 원시적 무기로 사람을 난도질해서 죽였다. 참으로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했다. 그 참혹한 광경은 어린 나의 눈으로 도저히 담아낼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광경이 내 삶의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비쳤다.
그 당시 만주 일대 조선인은 대부분 마오쩌둥을 적극 지지했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은 대부분 소작을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애초 중국인 지주의 소작료율은 70%였다. 하지만 일제가 만주국(1932~45년)을 세우면서 등장한 일본인 지주의 소작료율은 85%에 이르렀다. 그처럼 가혹한 수탈을 당한 조선인이 지주를 좋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장제스(장개석)는 기본적으로 중국인 지주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선택한 마오쩌둥은 ‘사유재산 철폐’를 역설했다. 또한 사회주의에서 중시하는 노동자 계급을 중국의 ‘인민’으로 대체시켰다. 즉 마오쩌둥은 서구에서 수입한 사회주의를 중국의 가난한 농민의 현실에 부응하는 ‘중국식 사회주의’로 수정한 것이다. 그러자 중국의 농민은 물론 만주의 조선인도 마오쩌둥을 강력하게 지지하게 되었다. 우리 친척 중에서도 건장한 청년들은 모두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에 가담할 정도였다.
만주에서 조선인이 수행한 임무는 ‘북·중의 특수관계’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만주의 조선인을 우대했다. 또한 한국전쟁 때는 약 10만명의 ‘항미원조 지원군’을 파견했다. 그 지원군에는 만주의 조선인이 다수 포함되었는데, 그들이 참전한 목적은 한반도에서 미국을 몰아냄으로써 조국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장남인 마오안잉도 참전시켰다. 마오안잉은 1950년 11월25일 평안북도 동창군 대유동에서 미국 전투기가 투하한 네이팜탄에 맞아 전사했다. 마오안잉은 평안남도 회창군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에 묻혔다. 요컨대 현재 중국의 유일한 동맹국이 바로 북한이라는 사실은 격동의 중국 현대사에서 형성된 ‘특수관계’를 정확하게 예증한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군과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이 맞서 싸운 ‘국공내전’ 시기 만주 일대에서 정부군이 공산군을 체포해서 끌고 가고 있다. 박한식 교수가 어릴 적 하얼빈을 비롯한 만주 일대에서 일상적으로 보던 장면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트럼프는 2017년 4월7일 시진핑과 미·중 정상회담을 한 뒤 <폭스 비즈니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처음 말을 꺼낸 것은 북한 문제였다. 미국은 북한(핵·미사일)을 용인할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이 미국을 도와야 한다.” 그러자 시 주석은 수천년간 맺어온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는 그렇게 쉽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4월21일 자신의 트위터에 다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중국은 북한의 엄청난 경제적 생명줄(economic lifeline)이다.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중국이 북한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중국은 4월22일 성명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한·미 군대가 38선을 넘어 북한을 지상에서 침략해 북한 정권을 전복시키려 한다면 즉시 군사적 개입에 나서겠다. 중국은 무력 수단을 통한 북한 정권의 전복과 한반도 통일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마지노선은 중국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견지하겠다.”
1949년 10월 중국 인민혁명을 완수한 마오쩌둥(왼쪽)은 불과 몇개월 뒤 한국전쟁이 터지자 장남 마오안잉(오른쪽)을 ‘지원병 1호’로 파견했다. 1950년 11월 미군의 폭격으로 28살에 전사한 마오안잉은 지금껏 북한 평안북도 회창군 열사능원에 묻혀 ‘북-중 혈맹’의 상징으로 남았다. 사진 ‘차이나 워치’박근혜는 2015년 9월3일 중국 전승절에 참석했다. 중국을 통해서 ‘북한의 비핵화’를 압박하려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근혜는 북·중 특수관계를 전면적으로 거스르는 정책을 시진핑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트럼프의 제안조차 거부한 중국이 박근혜의 제안을 수용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박근혜는 중국에 서운해하면서 개성공단을 폐쇄했고, 또 중국이 강력하게 반대했던 미군의 사드 배치까지 받아들였다. 박근혜의 ‘오판’이 낳은 정치적·역사적 유산은 2019년 현재까지 한반도에 가혹한 질곡으로 남아 있다.
어릴 적 만주에 산재된 아편중독자의 주검은 나를 더욱 깊은 고뇌에 빠뜨렸다. 그때는 1840년 아편전쟁이 발생한 이후 약 100년이나 지났을 때였지만, 애초 만주에는 영국군이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아편은 깊이 침투해 있었다. 이런 현상은 아편이 중국 전역에 퍼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중국 성인 남성 약 27%가 아편에 중독된 상태였다. 그때 중국의 인구가 약 6천만명이었으니 약 2천만명이 아편중독자였던 셈이다. 나는 아편도 총칼처럼 살상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더구나 아편은 총칼과 달리 중국의 민족정신까지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야만적인 무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만주의 조선인은 아편에 중독되지 않았다. 아편을 먹지 말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없었고 단속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현재 북한에도 아편이 없다. 이는 우리 민족이 그만큼 깨끗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2017년 4월 미국 플로리다에서 열린 트럼프(왼쪽) 대통령과 시진핑(오른쪽) 주석의 첫번째 미·중 정상회담 때 만찬장에서 나란히 앉아 있다. 이 회담에서 시진핑은 ‘중국과 한반도의 오랜 역사’를 들어 북핵 문제 개입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직후 인터뷰에서 “그리고 한국은 실제로 중국의 일부였다. 이런 말을 10분간 듣고보니 북한 문제를 푸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해 ‘속국 논란’을 빚었다. 사진 연합뉴스그런 중국의 아편중독을 근절시킨 인물이 마오쩌둥이었다. 1912년 청나라가 망한 뒤 등장한 쑨원 정권과 장제스 정권에서도 아편은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중국의 민족정신을 마비시키는 아편이 대단히 심각한 무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편을 팔다가 잡힌 중국인은 무조건 사형에 처했다. 마오쩌둥은 외세와 결탁해서 밥 벌어먹는 중국인을 가장 천한 계급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런 계급의 대안으로 ‘인민’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철저히 반외세 민족주의 정신으로 무장한 인민이 ‘혁명 중국’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연가가 담배를 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마오쩌둥은 약 100년에 걸쳐 아편에 중독된 2천여만명의 중국 인민을 구제하는 ‘위대한’ 일을 성취해낸 것이다.
1981년 처음 북한을 방문한 박한식 교수는 자신이 ‘평화주의자’된 이유로 유년기 겪었던 중국인들의 아편중독 참상 영향을 꼽는다. 청나라 말기 19세기 중반 영국과 두 차례 아편전쟁 이래 100년간 만연했던 ‘아편굴’에서 중국인들이 마약에 취해 쓰러져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주지하듯, 미국은 영국 사람들이 만든 나라다. 현재 미국은 세계 최대 무기 수출국이다. 미국이 무기를 팔아서 천문학적 이득을 취하는 방식은 영국이 아편을 팔아서 부를 쌓았던 방식과 유사하다. 영국과 미국의 타락한 자본주의 정신이 그 객관적 근거가 된다. 아편이 소비국의 민족정신을 타락시켰던 것처럼 무기 또한 수입국의 자체 국방능력을 고갈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이 세계 최대 미국 무기 수입국의 하나라는 데 있다. 2015년 현재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분석을 보면, 한국은 최근 5년간 미국 무기 수입 1위 국가에 올랐다. 미국을 ‘맹종’하고 북한을 ‘주적’으로 삼는 한국의 안보정책 내지 ‘안보병’이 그런 결과를 빚은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방산업체는 절대로 핵심기술을 한국에 이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국은 작금의 안보정책을 근원적으로 혁신하지 않는 한 영원히 미국의 방산업체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국의 방산업체가 주축이 된 ‘딥 스테이트’는 미국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의 근간을 꾸준히 파괴하고 있다. 또한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미국산 무기로 안보를 추구한다면 오히려 안보 그 자체까지 파괴한다는 점을 주목해야만 한다. 미국에서 수입한 무지막지한 무기를 동원해서 핵무기를 가진 북한과 전쟁을 한다고 치자. 그러면 북한만 죽고 남한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현재 미국 무기에 중독된 남한은 영국 아편에 중독되었던 중국과 크게 다를 게 없다. 만주의 조선인은 스스로 아편에 중독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정신력을 지녔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은 미국 무기에 중독된 사실 그 자체를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력이 타락했다.
한국은 중국의 ‘아편중독 100년사’를 혁파한 마오쩌둥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의 안보를 더 이상 보장해주지 않는 안보정책을 버리고, 한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기약할 수 있는 새로운 안보문화를 창조하는 것,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절박한 과제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집필 이현휘 제주대 특별연구원, 구술정리 박연진
연재
16 [책 제국의 위안부][박유하][정연진] 통일운동 <완코리아 (AOK)>대표 정연진 님의 글 비판
(6) Sejin Pak
Sejin Pak
3 June 2016
[책 제국의 위안부][박유하][정연진] 통일운동 <완코리아 (AOK)>대표 정연진 님의 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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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정연진의 글의 요점 3가지를 인용문으로 모으고, 각 인용문 밑에 나의 커멘트를 부친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포인트에 가장 긴 커멘트를 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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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유하라는 지식인이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를 옹호하는 책을 낸 것도 또 그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성명을 낸 것도 한국인 스스로 일제청산이 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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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이 글 만으로 보면 정연진은 <제국의 위안부>를 읽지 않았거나,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유하를 지지하는 지식인들의 존재가 일제청산이 되지않은 것을 증명한다고? (한국 떠난지 52년이 되는) 나도 성명자 중에 하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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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a]
[특히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라는 큰 틀에서 이해해야 한다. 12.28 한일합의의 배경에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작동하고 있다. 특히 미.일.한 군사동맹 강화를 통해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외교정책으로 인해 한일관계에 걸림돌이 되는 위안부 문제를 속히 타결할 것을 미국이 종용했다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한.미.일 군사동맹은 분단체제를 더욱 고착화시키고 있고 한.미.일 군사동맹이 대두되는 것 또한 분단체제 때문이다. 구조적인 악순환이다.
중국의 부상을 좌시할 수 없는 미국 패권주의는 한.미.일 군사공조를 앞으로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결국 남북관계가 개선되어야지만 가능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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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이 미일한 군사동맹을 강화하려는 것 이라는 이해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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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b]
[이러한 미국의 외교정책은 내가 관여했던 2000-2006년도 미국법정에서 일본군성노예들을 위한 배상소송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한국, 중국, 대만, 필리핀의 15명 피해자들의 모든 피해자들을 대표하여 집단소송 형태로 일본국가를 상대로 미국법정에서 소송을 전개했을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일본의 방해도 아니고 미국무부의 개입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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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미국무부가 보는 위안부 문제는 그저 두동맹국 사이에서 빨리 적당히 해결해 주었으면 하는 문제일 것이다. 독도 문제도 마찬가지 이다. 이건 하나도 새로운 이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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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러나 수년에 걸친 미국 소송을 통해 배리 피셔와 같은 홀로코스트 소송을 이끈 세계적 인권변호사, 피해국들 활동가, 단체들과 끈끈한 연대와 일반 미국인들의 인식변화라는 소중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강력한 개입에 대항하여 풀뿌리 시민들이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한가. 아니 분명히 있다. 국제정치 흐름을 잘 들여다보면서, 미-일 공조를 깨뜨릴 수 있는 이슈가 있을 때 시민사회가 국제적으로 연대하여 나서야 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양심에 호소해 변화를 일으켜야한다.
그러한 예가 실제로 있었다. 2005년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좌절시킨 인터넷서명운동이다. 한 달 반만에 애초 목표를 초과달성하는 4천2백만 서명을 받아내어 세계의 여론을 변화시키지 않았는가.
동시에 이 인터넷서명운동이 성공한 이유는 ‘반일’운동의 차원이 아니라 ‘전쟁범죄를 반성하지 않는 국가가 세계지도국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인류의 보편적 원칙과 상식을 문제삼았기에 가능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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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범세계적인 인권문제로 만들고저 하는 사람들이 한국인들 만이 아니라 여러 민족과 국적의 배경의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알고 있다. 그들이 본인들은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고 하는 것 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이해가 간다. 일본인들 안에서도 이 운동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접근 방법으로는 한일관계로서의 위안부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조금 어려운데, 해 보기로 한다.
앞에서 말한데로 위안부문제를 인류보편적인 인권문제로 삼는데 동조하는 일본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동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대부문의 일본인들이 동조하지 않는다면, 이런 운동이 세계의 호응을 얻는다고 해도 한일관계로서의 위안부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면 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동조하지 않을까? 그중에는 소위 극우경향의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들의 숫자는 작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수에 속하던 진보에 속하던 중도 정도에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본다. 결국 일본의 중도가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군사적 성노예"라는 세계적인 인권문제로 생각하질 않는다는 것이다.
정연진은 '내가 강조한 말은 “위안부 문제는 한일관계를 넘어서야 해법이 보인다”라는 것이다'라고 썼다. 한일관계를 한일관계를 넘어서 해법을 찾아서 일본인들에게 압력을 가해서 동의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북한에 그런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은 정연진은 모르는 듯하다. "인류보편적인 인권문제"라는 접근방법을 일본을 상대로 하자면서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하여는 같은 방법을 쓰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북한이라는 특수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일반적인 북한인권문제 비판방법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일본군위안부문제에 대한 "특수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위안부문제에서의 그 특수 상황이라는 것은 식민지-제국 관계였다.
나는 많은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일본인들이 한국 사람들 보다 윤리적으로 모자라는 사람들이라서 그들이 위안부문제를 인류보편적인 인권문제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답하자면 위안부문제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다른가? 시각의 차이도 있겠지만, 이 시각의 상당 부분은 객관적 역사적 사실과 그 이해의 대한 문제이다. 그 역사적 사실과 이해는 어떠한 것 인가. 그것도 한가지가 아니고 여러가지가 있지만, 간단히 이야기를 하자면, <제국의 위안부>가 이용하는 사실 자료와 이해가 중도의 일본인의 이해와 가깝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박유하가 친일을 하는라고 그런 책을 자신의 양심에 반하여 일본에 아부하느라고 썼을까? 책 <제국의 위안부>가 나오기 전 부터 박유하를 알고 있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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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진은 위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며 시작한다.
"어째서 일본군성노예 문제가 20여년 동안 피해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방식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는지, 왜 한일관계는 거꾸로 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필요하다."
정연진은 책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유하도 같은 말을 하면서 시작한다는 것을 모르는 듯하다. <제국의 위안부>는 이 문제에 대한 박유하의 양심선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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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문제와 분단극복을 위한 역사인식<연재> 정연진의 ‘원코리아운동’ 이야기 (60)
정연진 | tongil@tongilnews.com
승인 2016.06.01 11:25:02
거의 1년만에 찾은 고국에서 지역 강연을 앞두고 있다. 6월 1일 성공회대를 시작으로 광주와 대구에서 각기 두 차례, 수원, 전주, 청주, 옥천 등 8개 지역에서 6월 1일부터 14일까지 크고 작은 강연회나 지역모임을 앞두고 있다.
이번 지역일정의 목적은 작년 말 12.28 한일 '위안부'합의로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는 일제과거사문제와 통일이슈를 연결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역사인식을 토대로 분단문제를 생각하고 분단체제를 극복하는데 힘을 모으게 하는 데 있다.
12.28 졸속합의와 정부가 합의에 따른 재단 수립을 강행하면서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한 일본군성노예 문제는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역사문제와 통일문제를 하나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강력한 계기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일본군성노예 문제가 20여년 동안 피해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방식대로 해결되지 않고 있는지, 왜 한일관계는 거꾸로 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필요하다.
그와 동시에 이 문제에 대한 근본 원인을 분단을 마주하는 역사인식에서 찾아야하고 역사인식을 기반으로 통일이라는 미래 비전을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겠다.
민중 시각으로 보는 일제 과거사 청산의 문제
올 초 19명의 필진이 참여한 책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 제국의 거짓말과 ‘위안부’의 진실>(도서출판 말 출간) 기획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이 책이 일제과거사 문제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의미가 크다고 생각해 필진에 동참하게 되었다.
▲ 19명의 공저자가 참여하고 도서출판 말이 펴낸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 책 펼침 이미지. [사진제공 - 도서출판 말]
흔히들 “독일은 나치의 전쟁범죄에 대해 거듭 반복해서 사죄하는데 왜 일본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라고 말하지만 이는 너무나 평면적인 비교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독일은 역사청산을 이루었지만, 일본은 역사청산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독일인은 나치 역사를 부끄러워하고 청산해야 할 과거로 생각하고 있지만 일본의 경우는 전쟁범죄에 책임을 져야하는 세력이 아직까지 집권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 역사 또한 일제청산이 되지 못했다. 일제에 협력하고 치부해 대다수 민중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세력에 대한 단죄가 되지 못했고, 역사책에 제대로 기록되지도 못했다. 역사교과서에 일제에 저항한 많은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은 묻혀버리고 오히려 일제와 같은 편에 섰던 이들의 역사를 더 많이 배우고 있다. 역사학 또한 아직도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에 세뇌되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 스스로 역사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가해국인 일본에게 역사청산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일제과거사 청산 문제를 오랜 기간 고민하고 실천해온 입장에서 너무나도 답답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박유하라는 지식인이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를 옹호하는 책을 낸 것도 또 그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이 성명을 낸 것도 한국인 스스로 일제청산이 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 아니겠는가.
일본의 전쟁범죄를 밝히는 것 못지않게 한국인들은 어째서 나라를 빼앗길 수 밖에 없었는가, 그래서 무고한 백성들이 노예와도 같은 처지가 되어 650만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가 일본의 침략전쟁에 징병, 징용, 근로정신대, 성노예로 동원되지 않을 수 없었는가에 대한 뼈저린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일본군‘위안부’ 희생자들은 대부분 못 배우고 못 사는 집안에서 끌려갔다는 면에서 우리는 결코 민초들이 당한 설움과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지면 안 된다.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째서 이러한 비극이 초래되었는지 우리 역사에 대한 스스로의 뼈저린 성찰이 반드시 있어야겠다.
그러한 인식의 토대 위에서 진정한 광복을 이루지 못한 오늘날의 현실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곱씹어 보아야한다.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했기에 나라는 분단이 되었고 분단체제 하에서 되풀이될 수밖에 없는 이념전쟁과 독재 하에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은 계속되었다.
결국 민초들의 수난사를 온전히 회복하는 길은 우리 스스로의 역사청산과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과제에 마주하게 된다.
▲ 경희대에서 5월 20일 일본군‘위안부’연구회, 포럼 진실과정의 주최로 열린 ‘12.28 합의를 넘어 전정한 해결을 위한’ 좌담회. 왼쪽부터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 이재승 건국대 법대교수, 정연진 AOK 대표, 김창록 경북대 교수, 권명아 동아대 교수, 역사연구자 강정숙 박사, 한혜인 박사. [사진제공 - 정연진]
한일관계는 한일관계를 넘어서야 해법이 보인다
5월 2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와 도서출판 말 주최로 열린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 - 제국의 거짓말과 위안부 문제의 진실> 서평회에서, 그리고 이보다 앞서 5월 20일 경희대학교에서 열린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진단한다’ 전문가 좌담회에서 내가 강조한 말은 “위안부 문제는 한일관계를 넘어서야 해법이 보인다”라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라는 큰 틀에서 이해해야 한다. 12.28 한일합의의 배경에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작동하고 있다. 특히 미.일.한 군사동맹 강화를 통해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외교정책으로 인해 한일관계에 걸림돌이 되는 위안부 문제를 속히 타결할 것을 미국이 종용했다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한.미.일 군사동맹은 분단체제를 더욱 고착화시키고 있고 한.미.일 군사동맹이 대두되는 것 또한 분단체제 때문이다. 구조적인 악순환이다.
중국의 부상을 좌시할 수 없는 미국 패권주의는 한.미.일 군사공조를 앞으로 더욱 가속화시킬 것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결국 남북관계가 개선되어야지만 가능하리라고 본다.
▲ 5월 2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도서출판 말 주최로 열린 <제국의 변호인 박유하에게 묻다> 서평회. 건국대 이재승 교수와 동학다큐소설 작가인 고은광순 평화어머니회 대표가 발제하고 있다. [사진제공 - 정연진]
이러한 미국의 외교정책은 내가 관여했던 2000-2006년도 미국법정에서 일본군성노예들을 위한 배상소송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다.
한국, 중국, 대만, 필리핀의 15명 피해자들의 모든 피해자들을 대표하여 집단소송 형태로 일본국가를 상대로 미국법정에서 소송을 전개했을 때, 가장 큰 걸림돌은 일본의 방해도 아니고 미국무부의 개입이었다는 사실이다.
유태인들이 독일, 오스트리아의 전범기업을 상대로 벌인 ‘홀로코스트’ 소송에서는 피해자편에서 소송이 해결되도록 적극 도왔던 미국 국무부가 소송의 당사자도 아니면서 일본 편에 섰다. “이 소송은 미국의 외교정책에 어긋나므로 미국 법정에서는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재판부를 설득하며 집요하게 개입했다.
결국 미국 소송은 재판이라는 본론에 들어가지 못하고 소송을 할 수 있는가 여부를 따지는 예심에서 법리적 판단에 공방을 계속하다가 연방항소법원, 연방대법원에까지 항소와 항고를 거듭했으나 결국 심리거부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수년에 걸친 미국 소송을 통해 배리 피셔와 같은 홀로코스트 소송을 이끈 세계적 인권변호사, 피해국들 활동가, 단체들과 끈끈한 연대와 일반 미국인들의 인식변화라는 소중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 5월 23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서평회에서 미국의 위안부소송 개입과 국제적으로 연대하는 시민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발제하고 있다. [사진제공 - 정연진]
그렇다면 미국의 강력한 개입에 대항하여 풀뿌리 시민들이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나 한가. 아니 분명히 있다. 국제정치 흐름을 잘 들여다보면서, 미-일 공조를 깨뜨릴 수 있는 이슈가 있을 때 시민사회가 국제적으로 연대하여 나서야 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양심에 호소해 변화를 일으켜야한다.
그러한 예가 실제로 있었다. 2005년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좌절시킨 인터넷서명운동이다. 한 달 반만에 애초 목표를 초과달성하는 4천2백만 서명을 받아내어 세계의 여론을 변화시키지 않았는가.
동시에 이 인터넷서명운동이 성공한 이유는 ‘반일’운동의 차원이 아니라 ‘전쟁범죄를 반성하지 않는 국가가 세계지도국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인류의 보편적 원칙과 상식을 문제삼았기에 가능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 분단한반도와 통일한반도를 암흑의 철조망과 나비가 가득찬 모습으로 대비시킨 이미지를 강연할 때 마다 자주 사용하고 있다. [사진제공 - 정연진; 출처 - 페이스북]
평화나비, 통일로 날아가는 미래를 상상하며
여러 지역에서 평화나비 모임을 만날 예정이다. 나비는 한반도의 평화를 상징하고 여성인권을 상징한다. 나비가 날아드는 평화로운 한반도는 분명 축복의 땅이 될 것이다. 축복의 땅이 되려면, 우리는 무엇을 상상하고 무엇을 실행에 옮겨야하는가.
현재 한반도를 덮고 있는 철조망이 가득찬 암흑의 땅이 어떻게 하면 형형색색의 나비가 가득찬 한반도가 될 수 있는가를, 한반도의 미래를 적극 상상하자고 말할 것이다.
역사문제와 통일문제를 하나로 잇는 역사인식이 그 출발점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평화와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지구촌 시민들은 이미 우리 편이라는 든든한 동지의식을 심어줄 것이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상징하는 나비가 분단이라는 장벽을 넘어 통일이라는 미래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우리들 스스로 상상하고 미래를 개척하자고 이야기할 여러 지역 모임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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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광순 기고 1) 여성동학다큐소설 기획을 소개합니다 – 마고 아카데미 한국
(고은광순 기고 1) 여성동학다큐소설 기획을 소개합니다 – 마고 아카데미 한국
마고 아카데미 한국
(고은광순 기고 1) 여성동학다큐소설 기획을 소개합니다
[고은광순은 주니어 김영사에서 <펄루, 세상을 바꾸다><내일은 희망>등의 역서를 낸 바 있고 웅진 등에서 5권의 청소년을 위한 번역서를 낸 바 있음. 호주제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 함께하는 교육시민 모임 활동 등을 했음. 이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다가 민주화운동으로 투옥, 제적되고 후에 한의학을 전공하여 현재 명상치유 한의사로 활동. <어느 안티미스코리아의 반란>, <한국에는 남자들만 산다> -인물과 사상사. <시골한의사 고은광순의 힐링>-유리창]
15인의 동학언니들이 쓴 13권의 여성동학다큐소설 프로젝트를 소개합니다. 동학언니들은 지난 4월 30일 대학로 벙커1에서 13권 출판을 위한 펀딩 협약식과 기자간담회를 가졌습니다. 13권의 소설은 인터넷을 통해 일부 내용공개와 펀딩이 진행중이며 출판비용이 마련되면 가을에 세상에 나올 예정입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여주어서 감사했습니다. 이것은 동학언니들의 소설쓰기 프로젝트에 궁금증을 가진 분들을 위한 글입니다.
<여성동학다큐소설의 시작 계기와 13권이 된 이유?>
2012년 충북 옥천 청산에 명상공동체를 시작하기 위해 집을 지을 때 도종환 의원이 인편에 청산에 정착하는 것을 축하한다는 덕담을 적어 넣은 ‘정순철 평전’을 보내주셨다. 청산에서 태어났다는 정순철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청산에 숨겨진 엄청난 동학관련 이야기들을 대중들에게 전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동학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원광대학의 박맹수교수를 찾아가 도움을 약속 받았다. 작가를 물색했으나 마땅하지 않아 다큐소설 형식으로 하면 어렵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직접 써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왕 동학에 대한 글을 쓰는 김에 전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동학의 이야기들을 담기 위해 지역을 나누어 십여 권을 쓰기로 하고 인연 닿는 대로 교사, 시민인권활동가, 명상지도사 등 글 쓸 여성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15명의 동학언니들이 탄생했다.
2013년 말 최제우가 살았다는 용담정에서 1주일간 합숙을 하며 박맹수 교수로부터 동학에 대한 전반적인 강의를 들었다. 조선사회 일반에 대해, 소설작법에 대해 공부를 한 뒤 각자 담당지역을 선정했다. 중간에 포기하는 이도 있어 결과적으로 현재 정리된 것이 전라도 2.5권, 경상도 1.5권, 충청도 6권, 강원도 1권, 서울 1권, 북한 1권 총13권이다.
해월이 상제문답을 통해 득도한 1860년부터 해월이 처형당한 1898년까지 동학1세대의 이야기는 38년간이나 이어진다. 우리 역사 중 가장 오랜 기간 수배자였던 해월이 1894년 기포하기 전까지 제일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투쟁을 위한 조직사업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개벽세상을 일구기 위한 조직사업이었다. 수운 처형 후 해월은 강원도, 충청도로 피신하며 동학조직을 일구었고 전라도는 1890년대에 들어서서야 본격적인 포덕을 했다. 1894년 봉기 이전 2년간 공주취회, 보은취회를 비롯해 합법적인 투쟁을 도모한 곳이 충청도였고 단양, 보은 등 충청도에서 오랫동안 거처했으며 혁명 당시의 본부는 옥천의 청산이었다. 대규모의 접전이 이루어진 것도 충청도였다. 전체 13권 중 6권이 충청도에 집중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보통 전라도, 전봉준을 동학의 핵심단어로 생각하지만 전봉준은 해월이 임명한 수천 명의 접주 중 한 사람이었으며 해월이 산맥이라면 전봉준은 그 중 하나의 빼어난 봉우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용담정 합숙 이후 본격적인 답사와 공부가 시작되었고 비공개 게시판을 만들어 수시로 박맹수 교수에게 질문하고 답변을 들었다. 한 달에 한 번 워크숍을 통해 부족한 공부를 채우며 진도를 맞추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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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으로 작가팀을 짜고 박맹수 교수와 작업을 진행하게 된 이유>
‘동학에 미친 교수’라는 이야기를 듣고 박맹수의 책과 동영상을 찾아본 뒤 동학과 관련된 청산의 사연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방법을 상의하기 위해 그를 찾아가 만났다. 처음에는 그가 일본에서 4년간 동학을 연구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동학군의 해골이 그 중간다리역할을 했다고 한다. 1995년 일본의 훗카이도 대학에서 동학지도자 두개골이 발견되어 백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1905년 일본인이 민족적우수성을 비교연구하기 위해 진도에서 채집해 갔던 것으로 박맹수교수는 유골을 한국으로 가져오는 과정에서 일본에 엄청난 양의 동학관련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일본유학을 결심했다. 일본은 조선침략을 위해 오래전부터 세밀하게 한반도 전역지도를 만들어놓고 무기를 연구해서 성능 좋은 총을 생산해놓고 있었다. 텐진조약을 구실로 쳐들어온 일본군은 ‘모두 살육하라’는 명령 하에 두 달간 동학혁명군 3만~5만을 살해하여 동학도들은 거의 전멸하게 되었다. 일본은 아직도 동학군 섬멸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고, 우리는 박맹수교수가 밝혀낸 새로운 많은 사실들을 소설 속에 녹여내고자 했다. 사실들을 많이 녹여내자니 다큐소설의 형식을 띠게 되었다.
호주제폐지운동을 할 때 한국남성들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 남성중심의 가부장제와 문화 속에서 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하도록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상호존중, 배려보다는 우월감, 학연 지연으로 뭉친 패거리의식으로 비민주적이고 상식에 어긋난 언행들을 많이 보였다. 족보, 종중, 가문, 대잇기 등 부계혈통제는 특권의식을 가졌던 소수의 양반들이 고집하던 것인데 일제강점기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김.이.박으로 성씨를 만들거나 바꾸고 가짜족보들이 극성하게 되었다. 비굴한 대중이 역사의 진화를 방해하는 양반흉내놀이를 시작하게 된 것인데 그 너머에 평등세상, 개벽세상을 꿈꾸던 동학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꿈꾸었던 차별 없는 세상은 바로 우리 여성들이 그리던 삶이기도 했다.
동학도들이 얼마나 생명을 존중하며 하늘 닮은 삶을 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는지, 동학혁명의 실패이후 허위적 가부장제가 어떻게 단단해지는지를 드러내고 싶었다. 허위의식을 걷어내고 생명을 사랑하며 가꾸고 살리는 일은 여성들이 언제나 해왔던 일이고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가부장제의 허위의식에 길들여지지 않은 여성들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고등한 철학을 가지고 실천에 옮겼던 그들을 조명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나 독자 모두에게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에피소드와 글을 쓰던 과정에 대하여>
작가들마다 크고 작은 이야깃거리들이 있지만 전체로 보면 진도 유골이 화장될 위기에 처한 것을 막아낸 일이다. 100년 만에 일본에서 돌아온 진도 동학지도자의 유골(두개골)은 화장 아니면 매장이라는 융통성 없는 현행 장례법에 묶여 전시되지 못하고 19년간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를 ‘방치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한 사람이 ‘유골영득및 사체유기’혐의로 고발하겠다고 하자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동학기념사업회는 지난 2월 부랴부랴 화장하기로 결정했다. 화장 예정일 얼마 전에 이 유골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쓴 동학언니가 이 사실을 알려왔고 동학언니들이 동분서주 움직여 결국 화장예정일 나흘 전에 계획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진도에서 발견된 동학지도자 유골은 먹으로 수집자의 글씨가 적혀있고 채집시기, 이유 등 메모가 남아있는 문화재이다. 이것을 단순한 길거리의 유골 정도로 취급하는 관련자들의 안목이 아쉽다. 킬링필드나, 아우슈비츠나 중국 핑딩산 유골전시가 갖는 역사교육의 의미는 대단히 크다. 일본이 동학군 몰살의 혐의를 인정조차 하지 않고 있고, DNA 분석도 제대로 시행되지 않은 이때에 실물을 화장해서 안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다. 진도에서 동학기념사업회를 만들고 유치를 강력히 촉구하고 있으니 진도기념사업회에게 공을 넘기는 것이 맞다고 본다.
전체 답사를 수차례 다녔고 각자 자기지역의 답사들을 수시로 했다. 동학식 심고와 주문기도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간절한 심정들, 절박한 상황들을 이해하고 공유하고자 했다. 답사를 다니거나 글을 쓰며 그들의 당시 상황을 최대한 상상하면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동학언니들은 SNS를 통해 수시로 서로의 느낌을 공유했는데 “함께 동학 이야기를 쓰게 되어 너무 감사하다.”, “운명적인 것 같다.”, “내 삶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들이 가장 많이 오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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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출판에 대하여>
한꺼번에 13권의 책을 출판할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에 없다는 것을 이번 글쓰기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현재 블로그(http://www.donghakstory.net/)를 통해 매주 조금씩 글을 연재하고 있다. 페북으로도 볼 수 있다(페북 검색어: 여성동학다큐소설). 3개월간 전체의 30%정도를 공개할 것이다. 그 동안 펀딩(http://www.ohmycompany.com)을 통해 모금이 완료되면 ‘모시는 사람들’에서 책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고 연말까지 13권이 모두 출간될 예정이다.
왜 120년 전 과거의 이야기를 쓰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지만 동학은 19세기 아시아 최대의 사건이었고 이제부터 그 실천이 시작되어야 하는 역사다. 현 시대에 무너진 개인, 무너진 사회, 무너진 국가를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철학이며 실천방법이다. 한국사회, 통일 한반도를 일으켜 세울 철학으로 이만한 것이 있을까? 젊은이들이 보아주기를 희망한다. 근대사, 현대사의 감추어진 부분이 궁금하신 분들이 보아주기를 바란다. 나 개인뿐 아니라 더불어함께 잘 살기를 희망하는 분들이 읽어주시면 좋겠다. 대부분이 아마추어지만 작가들 솜씨보다도 동학의 본질이 워낙 아름답고 뛰어나기 때문에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책이 되지 않을까 싶다. 후원(펀딩)에 참여하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의 독자들이 모두 동학 접주가 되어 19세기에 못 이루었던 개벽세상을 21세기에 비로소 이루는 주역들이 될 것을 확신한다.
5. 동학언니들
고은광순, 김미경, 김정미서, 김현옥, 명금혜정, 박석흥선, 박이용운, 변김경혜, 유이혜경, 이장상미, 임최소현, 조임정미, 정이춘자, 한박준혜
동학 농민 혁명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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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농민 혁명
최근 수정 시각: 2019-06-04 00:00:26
분류
도 계통의 종교
사회 운동
조선(19세기)
조선의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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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의 대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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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실패한 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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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東學農民革命
시기
1894년
장소
충청도, 전라도
교전국
조선
청나라
동학 농민군
일본 제국
지휘관
조선
고종
이용태
홍계훈
조병갑
이기동
박제순
청나라
광서제
이홍장
정여창†
등세창†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이방언
최시형
손병희
메이지 덴노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토 스케유키
노기 마레스케
결과
혁명 실패, 청일전쟁 발발
1. 개요2. 과정
2.1. 배경부터 1차 봉기까지2.2. 승리, 그리고 확산2.3. 외세의 개입2.4. 일시 해산2.5. 2차 봉기2.6. 농민군과 녹두장군의 산화2.7. 마지막 항전3. 의의4. 후대에 끼친 영향5. 기타
5.1. 명칭 관련 논란5.2. 기념 사업
5.2.1. 관련 단체/기관5.3. 마지막 생존자5.4. 일본의 연구6. 대중매체에서7. 말말말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894년 동학(현 천도교의 전신) 세력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대규모 민란. 초기에는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우세 했으나 결국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이라고 하고 있다.
처음에는 교조 최제우의 신원 운동(伸寃運動)으로 시작되었지만, 운동이 진행되던 과정에서 정치적 운동으로 성장되었고 또한 민란과 결합되어서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기치로 내건 농민 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매천 황현은 이를 “동학이 난민과 합쳐졌다.”라고 표현하였다.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여길 수 있는 보은 집회를 전후한 시기부터 단순한 종교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구호가 외쳐지기 시작하였는데, 보은 집회 이후 동학 지도부는 신원 운동이나 다른 청원 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동학의 역할이 농민의 요구를 횡적으로 연결시킨 조직적 매개체 또는 단순한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지만, 농민 운동의 지도 원리로서의 동학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며 동학 자체가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내면적 구제에서 구하려고 하는 종교적 성격과, 국가의 보위와 농민 구제 활동을 철저화하려는 정치 운동의 성격을 아울러 지닌다고 보기도 한다.# #
조선 말엽의 매우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자, 동아시아사에서도 한반도의 세력 균형이 본격적으로 깨지기 시작한 계기가 된 일대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즉,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사건이다. 게임 마치 오브 워에서는 이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러 들어온 일본군이 한국을 점령하면서 일본이 아시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고 묘사되었다.
이렇듯 동학 농민 운동이 세계사적인 사건이자 국민들의 저항 운동이기 때문인지 동학 농민 운동에 관해 깊게 연구한 일본의 이노우에 가쓰오 교수는 "동학 농민 운동의 게릴라 장기전은 후일 중국에서의 항일이나 베트남 전쟁에서 나타나는 열세에 놓인 아시아 국가가 제국주의에 저항한 방식의 선구를 이룬 셈"이라고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이때 당시 조선 정부가 한 일들을 보면, "무슨 일이든지 뒷수습을 제대로 잘하지 못하면, 더더욱 큰 환란이 닥쳐오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다"라는 교훈을 얻을 수가 있다.
이 민란이 처음 시작될 때는 단순하게 한반도 농민들의 궐기 운동과 내전 등에 그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동학군을 단독으로 제압할 자신이 없던 조선 조정이 청나라의 군대를 불러들여 주둔시켰고, 청군을 핑계로 일본군도 한반도에 기습적으로 침략해서 결국에는 청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나비 효과처럼 동학 농민 운동은 양대 외세가 한반도에서 충돌,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서 청과 조선의 사대 관계를 공식적으로 끊어, 청의 간섭을 차단하고 한반도 침략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에, 조선 조정이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파병을 요청하지 않았고 조선 관군만으로 농민군을 제압하였다면 청일 전쟁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물론, 관군 단독으로는 농민군 제압에 실패했을 가능성도 있고, 이런 가정 하에서도 오래전부터 한반도 지배와 이를 통한 중원을 장악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던 일본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으므로, 어떻게든 이러한 분란에 개입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2. 과정[편집]
2.1. 배경부터 1차 봉기까지[편집]
근원은 1893년 충청북도 보은 집회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1] 남접과 북접 모두가 참가하여 그 규모가 매우 컸으며, 급기야는 보은 출신의 어윤중이 선무사로 파견되어서 말려야 했던 집회였다. 물론 전봉준도 집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보은에서 집회가 끝나고도 정치적으로 좀 더 열성적이었던 이들은 전라도 금구에서 집회를 또 벌였는데, 이는 전라도 지역의 백성들이 수탈로 인하여 큰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 11일자에 나온 보은 집회의 1차 통유문은 교조 신원과 사회 개혁을 위주로 하여 작성되었으나, 3월 16일에 2차로 나온 통유문은 척양척왜(斥洋斥倭)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앞에 내세웠다. 보은 집회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이하 링크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 #
옛부터 전라도는 곡창 지대였는데(특히 고부는 핵심 지대였다), 이러한 지리적 경제적 이점으로 인하여 전라도 민들은 지속적인 수탈의 대상이었다. 당시 전라 고부 군수(지금은 정읍시의 일부) 조병갑은 그 중에서도 악랄한 탐관오리였는데, 그는 만석보라는 대형 저수지를 축조하여 이에 사용료를 부과하였고, 인근 태인 군수를 지냈던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우겠다며 양민들로부터 엄청난 조세와 잡세를 걷고 양민들에게 강제적으로 노역을 부여하는 등 백성들을 괴롭혔으며,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떠밀어 그 사람의 재산을 강탈하는 등 말그대로 가렴주구를 일삼아 조병갑에 대한 전라도 백성들의 증오와 원성이 자자했다.
결국 더이상 견디지 못한 고부군 사람들은 글 깨나 배웠다는 전창혁을 대표로 삼아 탄원서를 제출하게 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곤장뿐이었다. 이로 인해 전창혁은 반 죽은 상태로 돌아왔고 보름이 채 안 되어 장독[2]이 올라 죽고 말았다. 이에 분개한 그의 아들 전봉준은 봉기를 계획하게 되었고[3] 주변 지역에서 가장 세력이 큰 무장 접주[4] 손화중[5]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손화중은 거절하였다. 당시의 봉기군의 계획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조병갑을 처형한다'뿐만 아니라 '전주성을 점령하고 서울로 상경한다' 까지 매우 포괄적인 계획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발통문으로, 1968년 발견되었다. 이 사발통문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 그전까지의 민란은 백성들이 아무리 분해도 수령은 왕의 대리인이라고 여겨 수령에게 모욕을 가해도 수령을 죽이지는 않는 분풀이였으나 동학 농민 운동은 첫 봉기에서부터 수령을 죽이고 전주까지 치고 올라간다고 하는 등 기존의 농민 봉기와 그 시작부터 크게 달랐다.
그러나 조병갑이 익산으로 발령받아 유야무야 되었는데, 1894년 1월 9일 조병갑의 발령이 취소되어 고부로 돌아왔다. 결국 이틀 만인 1894년 1월 11일 전봉준은 사람들을 끌어모아 봉기를 일으켜 만석보를 무너뜨렸고, 고부 관아 창고에 있던 곡식과 재물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6] 사태를 파악한 조정은 신임 군수 박원명을 내려보냈다. 박원명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달래 성공적으로 봉기군을 해산시켰다.
여기까지였다면, 그냥 흔한 동네 소요에 불과했을 것이다.
2.2. 승리, 그리고 확산[편집]
조선 조정은 고부에서 일어난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로 이용태[7]를 파견했으나 이 인선이 대 실패였다. 이용태는 조정에서 백성을 달래고자하여 내려보냈던 안핵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다 난리를 일으키는 동학 놈들의 잘못이다.라는 어이없는 이유를 들어 조정과 동학민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동학 교도들을 체포하거나 재산을 뺴앗고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물론 그냥 데모 수준을 넘어 유혈 사태로 번진 민란이었던 만큼 정부는 슬쩍 넘기기 쉽지 않았던 사태였긴 했지만, 하다못해 일반적인 민란의 뒷처리 수준[8] 정도로만 일을 처리했더라도 대책 없이 사태가 커지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9] 하지만 그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이용태의 행위[10]에 백성들은 크게 분노했다. 전봉준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형인 태인 접주 김개남과 고부 민란 때 포섭에 실패했던 무장 접주 손화중을 포섭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니, 이것이 바로 1차 동학 농민 봉기이다.[11]
다른 지역의 백성들도 여기에 호응하여 합류하자 점차 봉기의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원인 제공자인 이용태는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나자 겁을 먹고 바로 튀었다. 당황한 조정에서는 이용태를 파면하고 귀양보낸후 홍계훈[12]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8백명의 경군을 주어 봉기를 분쇄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때 경군이 소유하던 무기들이 이 당시로선 상당히 고급이었는데, 독일제 마우저 소총과 크루프/티센크루프식 야포와 미국 레밍턴 소총, 그리고 결정적으로 개틀링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듯 대단한 화력을 보유한 경군이었으나 정작 이 무기를 들고 싸워야 할 병사들은 기강이 썩 좋지 못하였다. 홍계훈의 8백 명의 경군이 군산포에 상륙한 직후 800명 중 330명이 탈영해버리는(…) 사태에 직면하였다. 이는 당시 병사들 사이에서 조정에 대한 불만이 큰 데다 조정에서 부상병들을 치료를 해주지 않고 제대시켜 버린다는 소문이 돈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13]
단발 그것도 전장식 소총을 보유한 민병대와 후장식 선진 화기 그리고 개틀링과 같은 자동식 화기를 보유한 군대의 전투력은 이미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자동 화기만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분대 단위의 군대가 자동 화기가 없는 대대 단위의 군대를 격퇴할 수 있다. (막아낼 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는 식민 제국 군대가 피식민지를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단, 어디까지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군대가 근대전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 즉 800명이 제대로 정신 차리고 자동 화기의 재배치와 주둔지 요새화를 강구하였다면[14] 충분히 관군 수준에서 농민군을 막아내고, 경우에 따라선 진압까지 가능했다는 말이다. 즉 이 사태는 그 당시 조선 조정의 능력이 얼마나 떨어졌는지를 보여주는 확연한 사태였다.
한편 전라 감사 김문현은 전주 감영군을 모아놓고 대기 중인 상태였다. 화력이 우수한 경군이 남하하고 있으므로 경군과 합세하여 봉기를 진압하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겠으나, 김문현은 단독으로 공을 세울 욕심으로 무리하게 출병을 결정한다. 김문현은 수령으로써 잘못된 통치로 봉기를 허락한 죄가 있기 때문에 공을 세워서 죄를 갚으려는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훈련 상태도 형편없고 기강도 무너진 상태였던 감영군은, 기세등등한 농민군과 황토현에서 맞붙었다가 대패를 하게 된다. 이때가 4월 7일.
농민군은 전라 감영군을 박살낸 후 북상하지 않고 오히려 남하하며 경군을 유인하기 시작했다. 화력이 강력한 경군과 무리하게 정면 승부를 벌이기보다는 유인하여 기습 공격을 하려는 전략이었다. 농민군은 꼬리에 경군을 달고 고창군, 영광군, 함평군 등 서해를 끼고 남하하다가 나주를 기점으로 급격히 북상하여 장성 황룡촌에서 마침내 경군과 교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경군은 지휘관 이학승이 전사하고 대패하게 되는데, 이것이 장성 황룡촌 전투이다. 이때가 4월 23일.
기세가 잔뜩 오른 동학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주성을 무혈점령한다. 이때가 4월 27일. 전주성은 전라북도와 일대 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왕가인 전주 이씨의 본거지라는 점에서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고부 이외에 황주, 금성, 김해 등에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봉기가 일어났다. 물론 농민군을 싫어하는 동네들도 많았다. 일례로 나주는 민병대까지 동원해서 동학군을 필사적으로 거부했으며 전북은 남원도 거부해보았지만 남원은 김개남에 의해 무력 점령당했다.
도마 안중근 의사도 농민군 진압에 참여한 적이 있다[15] 하지만 동학군이란 이름으로 약탈질을 하던 자들도 있었기에, 농민군을 막은 걸 무작정 뭐라고 비난만 할 수도 없다. 앞서 말했듯, 농민 봉기는 황건적이나 홍건적이 그랬듯, 도적의 성격을 함께 가질 수밖에 없다. [16] 참고로 백백교의 시조 백도교 교주인 전정운은 바로 전봉준의 먼 친척이며 전봉준과 동학 이름으로 온갖 나쁜 짓은 다 저질러서 동학을 오해하고 진압군에 나서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구 또한 인천에 수감되어 복역할 당시 무뢰배에 불과한 사람이 동학의 두령이었다고 자칭하며 약탈, 살인 등 강도 행각을 무용담처럼 자랑하는 모습을 보며 한숨 지은 바 있다.[17]
2.3. 외세의 개입[편집]
전주성이 함락되자 당황한 조정에서는 홍계훈으로 하여금 군사들의 잔여 세력을 수습하고 병력을 보강하여 전주성 함락 다음날부터 맹공격을 가하기 시작했으나 전주성을 탈환하는데는 역부족이었다. 조선 왕조 왕가의 본거지인 전주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에, 조선 조정은 크게 동요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사를 비극적인 방향으로 바꾸게 되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된다. 바로 청나라에게 동학군을 진압할 군대를 파병해달라고 요청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으로 인해 이후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이어지게 되는, 조선에게 있어서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내부의 분란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에 도움을 요청하면 십중팔구 이용만 당한다는 사실. 제국주의 시대이며 특히 일본이 대륙 진출을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였으니 한 마디로 "날 잡아 드십쇼" 꼴이 되어 버렸다.
일단 농민군은 주력이 전주성에 묶인 상태이므로 강력한 청군을 동원할 수만 있다면 단숨에 농민 반란을 진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고종이 직접 청병의 차병안을 제기하였다. 이에 김병시가 톈진 조약[18]에 의거해 일본군이 진입할 빌미를 내줄 수도 있다고 강력 반대하며 경고하였으나 고종과 대부분의 대신들은 "초강력한 청군이 먼저 들어올 텐데 왜놈들이 감히 개길 수가 있겠어?" 하고 상큼하게 무시해버렸다.
게다가 고종은 이미 보은 집회가 열렸던 당시부터 "서울 병력을 빼는 건 힘드니까 외국 군대 동원해서 막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과거에 청나라가 영국군을 빌려서 난을 진압한 적이 있었다 하던데[19] 우리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누구보다도 먼저 말을 꺼낸 것. 그때는 대신들의 반대와 어윤중의 회유가 먹혀서 없던 일이 되었지만 청나라 군대 파병 요청은 이미 예견되어 온 일이였던 것이다.[20]
그리하여 1894년 5월 5일 아산만에 청군이 상륙하게 된다. 하지만 고종과 대신들의 예상과는 달리 바로 다음 날인 5월 6일, 일본군이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톈진 조약을 명분으로 들며 전격적으로 제물포에 상륙한다.
2.4. 일시 해산[편집]
예상과는 다른 흐름이 되자 놀란 조정은 다급히 농민군과 화약을 맺어서 청군과 일본군이 모두 물러가게 할 것을 기도하였다. 청과 일본 양측의 군대 파병이 톈진 조약에 의거한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조선의 변란이 진정됐을 경우 양국 모두 즉시 병력을 철수하여야 하며 잔류하지 못한다는 조항 또한 톈진 조약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농민군은 청군과 일본군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듣자, 1. 지구전은 불리한데다, 2. 모내기도 해야 되고, 3. 무엇보다 이대로면 외세가 개입할 명분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홍계훈이 “조정에서 너네한테 나쁜 짓 한 군수하고 안핵사 등을 다 벌줬으니 이제 적당히 좀 하고 그만 둬라”라고 했다. 농민군은 홍계훈의 제의를 명분으로 받아들어 '전주 화약'을 맺어 전주성에서 해산한 후 동학 세력을 늘리고 자발적 개혁 명분으로 조선 조정은 교정청, 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민들은 전라도 53개 군에 농민 자치 행정 기구인 집강소를 세워 민생 안정에 들어갔다. 동학 지도자였던 오지영의 소설 동학사는 이 때 그 유명한 폐정 개혁안 12조가 실시되었다고 기술한다.
2.5. 2차 봉기[편집]
상황이 안정되자 조선 조정은 청군과 일본군에게 이제 됐으니 철군하라고 요구했으나, 갑신정변 이후 다시 조선에 영향력을 뻗칠 기회만 노리던 일본은 이렇게 하늘이 준 기회[21]를 놓칠 생각 따윈 없었다. 일본은 조선의 철군 요구에 “우리가 알아본 결과 동학난이 진압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철군 요구를 무시하고 조선 주둔을 천명했다.
청군은 의외로 얌전하게 철군을 준비했으나[22], 일본군은 철군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고 러시아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중재도 단칼에 씹어버렸다. 청의 이홍장이 공동 철수를 제안했으나 이 역시 단호하게 거부했고, 오히려 일본은 청에게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하자는 제안을 한다. 이에 청은 “동학의 난은 이미 다 끝난 상태이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사람들의 몫이지 우리들이 이래라 저래라할 권리는 없다.”고 일본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청에 대한 일본군의 도발이 시작된다.
일본군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하는 한편 자주국 선언을 강요했다. 또한 고종의 이름을 빌려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은 모두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러한 사정들로 인해 청일전쟁이 발발한다. 전쟁 와중에 김홍집 내각은 군국 기무처를 설치, 갑오개혁을 진행했으며, 전장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흘러가 내정 간섭의 단계에 들어가자 동학군은 이에 분노해 일본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동학 농민 봉기를 일으킨다.[23] [24]
2.6. 농민군과 녹두장군의 산화[편집]
한편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의 핵심이라 할만한 북접은 이때까지 남접의 전봉준을 부정하고 있었지만[25], 상황이 이렇게 되자 협력을 선언하고 손병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남접에 합세하였다. 이렇게 전봉준이 이끄는 전라도 지방의 남접군[26]과 손병희 등이 이끄는 경기 남부, 충청 지방의 북접군이 논산에서 만나 2만[27]의 동학 농민군이 결집되었고 이들은 한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고 있었다. 이에 조선의 관군과 일본군이 연합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준비를 한다.
이후 공주에서 벌어진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이 대패하고,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 전투에서 전봉준 장군의 주력 부대가 패배하면서 이후 농민군은 각개격파를 당하고 사실상 와해된다. 참고로 당시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 연합의 지휘권을 가지고 전투를 주도한 것은 일본군이었다.[28]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으나 무기 숙련도가 높은 일본군이 돕고 있는 관군에게는 화력에서 열세였기에 밀릴 수 밖에 없었다.[29]
이후 주요 인물 중 하나였던 김개남은 그의 매부 서영기의 집에 숨어있다가 잡힌 후 전주로 압송되었을때 바로 참수되어 그 목이 효수되었으며[30] 금구로 도피한 전봉준은 다시 농민군을 집결하려 했으나 1894년 11월 내부 배신자의 밀고로 순창에서 조정의 군사들에 의해 체포되었고 다른 주모자인 손화중, 최경선, 서장옥 등 도 체포되었다. 재판 공초를 보면 배후, 특히 대원군과의 관계를 캐묻는 심문관과 이에 대해 자신이 주모하였음을 주장하는 전봉준의 모습이 나타난다.[31] 일본군은 전봉준을 포섭하기 위해 최대한 그를 살려보려 하였으나 전봉준은 그럴 마음 따윈 없어서 결국 교수형에 처해진다.[32] 녹두장군은 그렇게 갔다. 봉기가 시작된지 1년 2개월 만인 1895년 음력 3월의 일이었다. 그렇게 1894년 ~ 1895년, 1년 만에 모든 사건은 종료되었다.
2차 봉기는 전국적인 봉기였기에 황해도의 동학도도 봉기하였다. 여기서는 해주성을 공략해보았으나 실패하였는데, 이 동학군의 지도자가 바로 김창수,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김구다! 그리고 이 때 황해도에서 민병대를 조직하여 동학군을 토벌한 유력자가 바로 안태훈인데, 안태훈은 김창수가 아까운 인물이라 생각하여 도움을 주고, 이후 김구와 안태훈은 좋은 친분을 가지게 된다.[33] 그리고 안태훈의 장남이 도마 안중근 의사다.
2.7. 마지막 항전[편집]
우금치 전투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나서 전봉준, 김개남이 체포된 후 더 이상 기반을 잃은 동학 농민군의 잔당은 동학의 접주급 이상 지도자 25명이 마지막 항쟁을 결의하고 대둔산으로 피신하여 산세가 험난한 정상부에 요새를 설치하고 1894년 12월 중순부터 약 석달여간 일본군과 치열한 항전을 벌이다가 1895년 2월 18일 포로로 붙잡힌 어린 소년 1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장렬히 전사한 대둔산 전투가 있었다.
1894년 12월 경, 이곳에 함께 들어간 동학 농민군 지도부는 최학연(崔鶴淵)과 최공우(崔公雨), 김재순(金在醇), 김석순(金石醇), 진수환(陳秀煥), 강태종(姜泰鍾), 김치삼(金致三), 장문화(張文化), 김태경(金台景), 정옥남(鄭玉男), 고판광(高判光), 송인업(宋仁業) 등의 간부급 지도자와 가족들을 포함해서 30여 명이 되어 험난한 대둔산에 조그마한 진지를 짓고 끝까지 최후의 농성을 벌이게 된다. 마침내 1895년 1월 9일(양력 2월 3일)에 충청도 감영은 대둔산에 입산한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관군을 출동시켰다. 지휘관인 양호소모사 문석봉(文錫鳳)은 양총(洋銃)[34]으로 무장한 40여명의 영군을 이끌고 10일에 터골(基洞)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험준한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 진 대둔산 산세를 보고 접근하여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조방장(助防將) 김학립(金鶴立)으로 하여금 미륵 바위 서남쪽 100m 떨어진 계곡 너머 능선에서 몇 차례 사격하는 것을 끝으로 진산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그 당시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에는 "터골(基洞)에 이르자 전주에서 파견된 한병(韓兵)(사관 1명, 병졸 30명)이 대포를 산 위로 끌어올려 적의 소굴을 향해 줄곧 포격하고 있었다. 대포가 1,500m나 떨어져 있는 데다 200~300m 아래쪽에서 포격하니 포탄은 적의 소굴 훨씬 전방에 떨어져 한 발도 명중하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서 쉽사리 동학 농민군 공략이 여의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1월 23일(양 2월 17일)에 신식 무기로 무장한 강화 심영병(沁營兵)과 일본군 3개 분대[35]가 터골에 도착하여 1895년 1월 24일(양력 2월 18일) 아침 공격을 개시하니 상황은 급박해졌다. 이 전투의 기록을 담은 대둔산 부근 전투 상보에 의하면 동학 농민군은 후방에서 기습한 일본군을 막지 못해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 이들을 이끌던 동학의 접주인 김석순은 일본군의 포로가 되는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1세 ~ 2세가 된 그의 갓난아기를 안고 투신하여 자결을 하였고 험난한 산중의 뒤에서 기습을 할줄 모르고 앞을 증심으로 방어하던 농민군들도 우왕좌왕 하다가 결국 전원이 전사하고 말았다.
출처 1 : #
출처 2 : #
3. 의의[편집]
아래의 명칭 논란에서도 언급되지만 동학 운동의 성격에 대해서는 유교적 근왕주의에 바탕을 둔 전통적 민란에서부터 카를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 사관에서 말하는 근대적 계급 투쟁의 시초로 보는 견해까지 다양하다. 특히 농민군에 의해 설치된 집강소는 동아시아판 파리 코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국정 교과서를 비롯, 정설은 반봉건 반외세에 기초해 근대성을 지향한 투쟁이었다는 것이나 뉴라이트의 교과서 포럼은 유교적 근왕주의에 기초한 민란으로 지칭하여 논란이 된 바 있다. 특히 동학 운동의 근대성의 가장 큰 근거였던 폐정 개혁안 12조의 실재에 의문이 제기[36]되었으며, 이후 국사 편찬 위원회는 폐정 개혁안 12조가 동학사에만 출전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실제 전봉준이 작성한 무장 창의문을 보면 근왕주의적 색채가 매우 뚜렷하며, 도리어 신분제적인 색채는 전봉준이 아닌 김개남에게서 나타나는데, 김개남은 철저하게 반봉건 반외세로 일관하여 (단, 김개남이 설계하고자 했던 체제는 근대적 국가가 아닌 또 다른 전근대적 왕조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스스로 왕을 참칭하기도 하였다.
전주 화약에서 보듯 농민군의 주장이 갑오개혁에 반영된 바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시초라 할 수 있으며, 반외세를 내건 최초의 무장 투쟁으로써 그 정신은 이후 의병 운동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다만 향반 지주 계층과 농민군은 완전히 척을 지게 되었고 농민군 진압 후에도 관련자 색출 및 학살은 이어졌다. 의병을 이끈 향반층은 곧 농민군에 대항한 계층이기도 하다. 물론 의병 전쟁기까지 살아남은 농민군도 의병 활동을 벌였지만.
4. 후대에 끼친 영향[편집]
세계사적으로 볼 때 동학 농민 운동은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린 계기가 된 사건으로, 청일전쟁의 결과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함으로써 전통적 중화주의 외교 질서는 완전히 붕괴하였다. 이후 동아시아는 일본 &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로 재편되었고,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류큐, 대만, 조선을 편입하고 일본 제국을 형성하게 된다.
일반 백성의 사관에서 높이 평가받는 동학 농민 운동이기에 북한에서도 그럴 것 같지만 북한은 동학 농민 운동을 복벽 계열의 운동으로 보아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북한에선 북부를 거점으로 봉기한 홍경래와 이괄을 숭상시한다. 북한에서는 홍경래를 인민 해방의 선봉장이자 영웅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월북 소설가 박태원이 말년에 동학 농민 운동을 소재로 한 대하 역사 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집필했으며, 이는 박태원의 마지막 작품이다.
비교적 근세에 일어난 일이라 호남 지역에는 가까운 조상이 동학에 가담했었던 케이스가 매우 많다. 특히 동학 참여 이후 생존자들은 고향에 돌아갈수가 없었는데 그 때문에 당시 고향을 등지고 다른 호남 지역으로 가서 정착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자기 부모님이나 할아버지의 고향이 호남 지역이라면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5. 기타[편집]
5.1. 명칭 관련 논란[편집]
일본에서는 甲午農民戦争(갑오농민전쟁), 중국에서는 东学党起义(동학당기의)[37], 북한에서도 갑오농민전쟁으로 부른다.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비롯되어 동학란[38], 동학 폭동, 동학농민봉기, 동학혁명, 갑오농민전쟁 등 다양한 칭호로 불리기도 하나, 비교적 중립적인 성향을 띤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칭호가 가장 많이 쓰인다. 동학농민운동의 명칭 변화
동학란이나 동학 폭동[39]이라는 칭호는 (동학란이 재평가 이전까지 잘 쓰이긴 했지만) 딱 봐도 비칭의 느낌이 강하니 설명 생략. 동학농민봉기의 경우에는 사건의 중요성을 이전에 소규모로 빈발하던 농민봉기 수준으로 격하시킨다는 비판을 받으며, 동학혁명은 진보나 사회주의 세력 등에서 농민이 주도적으로 국가 정치의 대변혁을 시도했음을 높이 사는 이름이지만, 이들의 활동이 혁명이라기에는 이념의 구심점이 약했다는 비판이나 혁명을 너무 중시하는 사회주의적 평가라는 비판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갑오농민전쟁의 경우에는 16세기 독일의 농민전쟁에 영향을 받은 칭호이나 둘간의 차이가 상당하고 동학군은 조선 왕조 자체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라고 보기 힘들다. 논문에서는 동학농민항쟁이란 용어도 많이 쓴다. 이 경우는 운동이나 봉기 같은 축소 단어가 아니며 격렬한 전투를 나타내면서도 전쟁이 아닌 것은 잘 나타내고 있다.
다만 동학농민운동도 새마을‘운동’과는 전혀 다르지 않냐는 지적도 꽤 된다. 비슷한 경우로 3.1 운동도 '운동'이라는 이름에 많은 비판이 있음에도 지금까지 쓰이는 실정. 사실 성격이 무력 전쟁의 성격이 강한 점에서는 동학은 3·1 운동과도 다르다. 영어로는 비슷한 사건에 규모와 큰 상관 없이 Rebellion(반란, 모반)나 Uprising(봉기)를 많이 붙이는 편이다. 예컨데 의화단의 난은 Boxer Rebellion, 태평천국은 Taiping Rebellion, 더블린 봉기(aka 부활절 봉기)는 Easter Rising, 영문판 위키백과 항목명은 Donghak Peasant Revolution, 즉 동학농민혁명이라고 되어있고, Movement라고 병기되어 있다. # 솔직히 홍경래의 난도 그 혁명적 성격을 모르는 것이 아니듯이, 그냥 동학농민란, 혹은 동학민란이라고 하는게 의미가 있다는 해석도 있다.
비슷한 경우로 황건적의 난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황건기의’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의 명칭을 존중해 동학농민혁명이란 표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대표적이다. (2009년 말일 활동 종료.) 다만 교육부의 검인정을 받아 출판되는 한국사 교과서와 각종 EBS 교재에는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정부에서도 두 명칭을 혼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이 2010년대 중반 현재도 진행중인데, 확정되어 국가 행사가 된다면 명칭이 확립될 것으로 보인다.
5.2. 기념 사업[편집]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정읍 등 관련 지역민들의 주도로 전봉준에 대한 기념 사업을 조촐하게 이어 오다가, 1963년 10월 3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참석한 기념탑 제막식이 열렸다. 탑 이름은 동학혁명 기념탑이다. #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이날에 "동학혁명은 부패와 당파 싸움, 그리고 사대주의에 물든 탐관오리들의 도약에 항거한 최초의 대규모 서민 혁명으로서 정신은 길이 계승되어야한다"고 말하며 "5.16 혁명도 이념 면으로 동학혁명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동학혁명은 비록 성공은 못했지만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봉건 잔재 타파에 커다란 이정표가 됐다", "어떠한 정부도 백성을 잘 살리는데 근본 목표를 삼아야하며 그렇지 못하다면 백성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
1973년 11월 11일엔 우금치 고개에서 위령탑을 제막했는데, 박정희가 탑의 제자에다 "동학혁명군 위령탑"이라고 썼다. #
1980년대 들어 황토현 전적지 등 주요 사적지를 정비하는 사업이 대규모로 행해졌다. 전두환이 전봉준 장군과 같은 전씨라는 이유로 강력하게 추진했다고 한다.[40] 5.18 민주화운동과 같은 항쟁을 탄압하여 집권한 인물이 항쟁을 기념하였으니 대단한 아이러니. 다만 거창한 사업 내용과는 달리 실제로는 고증이 졸속으로 이루어져 엉터리가 된 것들이 많다. 1992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세워지고 1994년 100주년을 기념해 각종 공연, 전시회 등 문화예술 행사들이 열려 주목을 받았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후 국무총리 직속기구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를 출범해 2009년 해산 때까지 유족 10,576명을 등록했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이 2015년 12월 31일 최종 공포되었다. # 이에 따라 '동학농민혁명'이 국가가 공인한 명칭이 되었다.
2018년 9월 초 문화체육관광부 주도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를 재출범하고, 유족 등록 업무를 시작했다. # 유족 등록과 기념관 설립 계획에 관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2019년에 5월 11일을 #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참고로 이날은 동학농민군이 대승을 거둔 최초의 싸움인 황토현 전투가 일어난 날이다. 또한 음력으로는 4월 7일이다.
5.2.1. 관련 단체/기관[편집]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동학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고창 등 지역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들
5.3. 마지막 생존자[편집]
동학농민운동 관련자 중 1985년에 110세의 나이로 사망한 엄이경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스무 살 때인 1895년에 동학에 가담하여 동학혁명 시기 각종 전투에 참가했으며 전봉준 장군의 경호원 겸 연락 담당을 맡았다고 한다. 거기에 그는 혁명의 발단인 만석보 축조 당시에도 같이 돌을 날랐다고 한다.
5.4. 일본의 연구[편집]
일본 학계에서도 동학농민운동을 연구하는 사례도 있는데 몇 부분에선 한국도 놓친 부분을 일구어내는 높은 성과를 보였다. 그 예로 이노우에 가쓰오라는 학자가 있다. 이 학자는 홋카이도대학 연구실에서 우연히 동학농민군의 유골을 발견하고 의문이 들어서 이 부분에 대해 연구를 하였으며, 일본군이 벌인 농민군 제노사이드를 연구하였다. [41] 흔히 제노사이드라 하면 6.25 전쟁을 생각하는데 이 부분으로 성과를 이룬 건 한국에서 보기 드문 업적이다.
일본의 마에다 겐지 다큐멘터리 감독이 동학농민운동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 본 감독의 경우 과거에서 현재까지 우리나라를 향해 벌였던 수많은 잘못을 반성하고 사과할 것이며 제대로 된 역사를 전파할 것을 촉구하는 다큐멘터리를 수 편 제작했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훈장을 받았다. 일단 이 감독의 다큐가 제작이 끝날 때쯤 넷우익부터 야쿠자까지 온갖 협박을 받으면서도 제작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자신의 거의 마지막이 될지 모를 영화로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다큐를 제작하기로 한 것이다.
6. 대중매체에서[편집]
한국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대단한 사건임에도 이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는 거의 없다.
미국의 뉴 아메리칸 시네마 붐에 영향을 받은 천재 감독 하길종이 이 사건을 영화로 내기 위해 각본도 쓰고 준비를 했었으나, 1979년에 갑자기 뇌졸중으로 사망하여 프로젝트가 무산되었다.
최근인 2017년이 되어서야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전봉준(가제)'가 제작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된 소식은 없는 상태. #
1994년 5월 1일 ~ 22일까지 KBS1TV "다큐멘터리극장"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특집이 총4부작으로 방송 되었다 제1부 미명의 왕토, 제2부 일어서는 땅, 제3부 하늘이 열리다, 제4부 녹두꽃은 떨어지고 이상 4편으로 전문 연기자들의 심도있는 연기로 사실성을 더했다
MBC에서는 1994년 3월 7일부터 1994년 3월 29일까지 방영된 동학혁명 10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있다
1991년작 영화 개벽이 있다, 동학 제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작품은 배경은 동학 제 1대 교주 수운 최제우의 죽음 이후부터 1898년까지 묘사되고 있다. 또 1894년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 또한 다루었다. 감독에 임권택, 최시형 역에 이덕화, 전봉준역에 김명곤 등이 출연함.
2012년 5월 ebs의 역사채널e에서 방송되었다.
티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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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9년 SBS에서 동학 농민 운동을 소재로 한 드라마 <녹두꽃>이 전파를 탔다. KBS <정도전>을 집필했던 정현민 작가가 극본을 맡았다.
시인 신동엽은 이 사건을 토대로 한 장편 서사시 「금강」를 썼다. 이 시는 2부작으로 되어 있고 총 30장 4800여 행의 크기를 자랑한다. 내용은 실존 인물인 전봉준과 가상 인물인 '김하늬'가 동학 농민 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하다가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그 특유의 성질인 백성의 세계관과 반외세 성향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시의 묘사도 서정이 느껴지면서 역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가 박태원은 북한에 있으면서 그의 말년에 《갑오농민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대하소설을 썼다. 그는 김일성의 숙청에서 겨우 살아난지라 그 후유증으로 전신불수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1970년대 후반부터 아내가 자신을 보조하는 방식으로 소설 집필을 이어나갔다. 그리하여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총 3부작으로 소설이 간행되었다.
웹툰으로는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발생한 동학 농민군과 진압군 간의 마지막 혈전을 다룬 <갑오>가 있다. 이 웹툰은 전자책 전문 기업 링거스 커뮤니케이션즈의 후원에 이뤄진 것으로서 그림 작가는 웹툰 칼부림을 그리고 있는 고일권이다. 이 웹툰에서는 동학 농민 운동의 여성 접주 '이소사'와 10대 소년 접주 '최동린'이라는 실존 인물을 토대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
일본 만화가 야스히코 요시카즈가 지은 사극물 왕도의 개 에서도 동학 농민 운동이 묘사된다.
연극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권호성은 이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저항가요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제목은 <동학농민가>로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봉기하였던 농민들의 분노와 한을 잘 드러내고 있다.
1절
붉은노을 한울에 퍼져 핍박의 설움이 받쳐
보국안민 기치가 높이 솟았다 한울북 울리며
흙묻은 팔뚝엔 불거진 핏줄 황토벌판에 모여선 그날
유도 불도 누천년의 운이 다했다 농민들의 흐느낌이다
2절
검은 강물 햇살에 잠겨 억눌림의 설움이 받쳐
척양척왜 기치가 높이 솟았다 개벽고 울리며
주린배를 움켜잡고서 죽창들고 일어선 그날
태평곡 격앙가를 볼 것이다 농민들의 아우성이다
3절
한울도 울고 땅도 울었다 가렴주구의 설움이 받쳐
제폭구민 기치가 높이 솟았다 성주소리 드높이며
초근피죽 한사발에 울고 울었다 갈가마귀떼 울부짖던 그날
춘삼월 호시절을 볼 것이다 농민들의 불망기이다
후렴
저 흰 산 위엔 대나무 숲을 이루고 봉황대엔 달이 비춘다
검은 해가 비로서 빛을 내던 날 황토현의 햇불이 탄다
하늘아래 들판의 산 위에 가슴마다 타는 분노는 무엇이었나
갑오년의 핏발어린 외침은 우리 동학 농민피다
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야
7. 말말말[편집]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42]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르니 그 본의가 단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기 위함인데,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한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 수령 밑에 굴욕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다.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를 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1894년 5월 4일, 고부군 백산면에서 봉기 당시 전봉준이 발표한 격문-
진멸권귀(盡滅權貴):
권세 있고 부귀한 무리들을 멸하고,
축멸왜이(逐滅倭夷):
왜적과 양이들을 구축하여 없이하며,
제세안민(濟世安民):
세상을 구원하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
8. 관련 문서[편집]
안중근[43]
갑오군정실기
봉남일기
사발통문
삼정의 문란
영상일기
우금치 전투
장성 황룡촌 전투
전봉준
청일전쟁
파랑새
임오군란
활빈당
개와 공주[44]
왕도의 개
[1] 이때 충청도 관찰사는 조병식이었다. 조병갑의 친척이자 역시 탐관오리로, 방약무인하여 동학도들의 말을 무시하였다.[2] 태형으로 인한 체력 약화와 상처가 감염되어 생기는 병.[3] 전창혁의 사망 경위는 명확치 않다. 대체로 조병갑에 항의하다 장살(杖殺)당했다는 것이 정설이나 그 시기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다만 전봉준이 사발통문을 돌린 1893년 11월 경에는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생각된다.[4] 동학에서 쓰였던 한 지역의 지도자를 일컫는 단어로, 즉 지금의 고창군의 일부인 무장현의 현감.[5] 인망이 있어 그를 따르는 동학도만 약 2천이었다고 기록은 전한다.[6] 조병갑은 급하게 도망가서 조병갑을 처형하는 계획은 실패한다. 조정에서는 사태 수습을 위하여 조병갑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파면하고 제주도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강진군 고금도에서 잠시 근신을 하고 곧 복귀하여 최시형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고등 재판관(오늘날의 고등법원 판사)까지 승진하였다. 그는 1911년에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풍양 조씨 조두순(문신)이 큰아버지라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현실은 조선 왕조 탐관오리들의 영원한 레퍼토리기도 했다.[7] 이용태는 나중에 경술국치 때 궁내부 특진관으로서 협력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친일인명사전 예비 목록에도 올라와 있다.[8] 수괴급은 사형. 그 외 주동자급 및 중죄를 저지른 게 밝혀진 사람은 귀양. 나머지 단순 가담자들은 훈방 또는 무죄. 임술민란 때도 대부분 이 정도로 처리되었다.[9] 당장 임술민란 때도 유계춘 같은 주모자들이 여럿 참수되었지만 그 때문에 사태가 대책없이 커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임술민란 이후에도 민란이 계속 이어진 건 정부에서 삼정의 문란을 고치겠다고 약속 해놓고 입 씻거나 실효성 없는 정책만 내놓았고 수령들과 지방 사족들의 가렴주구가 계속 되었기 때문이다.[10] 이용태는 민란을 우려하여 만류하는 신임 군수 박원명까지 협박해가면서 농민 봉기의 주모자와 참여자를 색출해냈고, 이렇게 그가 색출해내었던 농민은 모두 동학 교도라고 규정한 뒤, 동학 교도들을 모두 역적으로 몰아 집을 불태운 뒤 교도들과 연좌제를 적용하여 교도들의 처자식까지 잡아서 살육하였다. 교도들의 재산 또한 강제로 몰수했다. 아무리 연좌제가 용인되던 당시의 사회풍조라도 이 정도면 고을 하나가 사라질 만한 일가족 몰살에 줄초상까지 벌어질 참담한 만행이었다. 거기에 동학 교도가 아니던 단순 가담자들을 역시 모두 동학 교도로 단정하여 그들 역시 죽였으니,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다.[11] 상이 자생적 고부 민란이 확대되었다는 견해에 입각한 서술이며 또한 정설이나, 전봉준이 흥선대원군의 식객으로 지낸 바가 있어 서로가 안면이 있었고, 1893년 11월 작성된 사발통문에 전주성 점령 및 한양으로의 진격이 명시된 데 비추어 보아 대원군이 발단에 개입한 계획적 거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실제 전봉준은 대원군과의 관계를 모병 과정에서 강조하였으며, 대원군 또한 난 발발 이전부터 동학의 지속적인 청원을 이용해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고, 또 다른 농민군 지도자였던 손화중도 대원군과 그의 사이에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12]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 민씨를 구하고 을미사변 때 시위대로서 근무하여 민씨를 보호하다 살해당한 그 홍계훈 맞다.[13] 물론 가장 크게 기여한 건 바로 봉급 문제. 사실 임오군란 이후에도 조정은 군인들에게 봉급을 제때 주지못했고 조정에게 홀대받은 군인들은 나쁜 처우에 분개하여 제대로 싸울 마음이 없었다. 이때문에 민란을 일으키는 군민들에게 동정심 + 동질감을 느껴버리고 탈영한 뒤, 아예 농민군에 가담하는 경우까지 생기고 말았다.[14] 콘크리트, 하다못해 모래, 더 상황이 안 된다면 단순히 땅을 판 참호를 이용한 요새만 해도 근대의 야포까지 방어할 수 있었다. 괜히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전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요새에 대한 확실한 제압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전차, 지진폭탄, 항공폭탄, 고폭탄, 대전차 화기 등이 개발되면서 가능해졌다. (대전차 화기의 경우 전차의 강철을 뚫을 정도니 경우에 따라선 참호, 요새의 제압에 사용되었다.) 즉 제1차 세계 대전 훨씬 이전의 당시에는 야포도 기관총도 없는 상대이니만큼 이 정도의 요새만 구축해도 충분히 수배, 열 배 이상의 군대를 막아낼 수 있었다는 말이다.[15] 안중근 의사의 부친 안태훈은 이때 동도서기론을 지지하는 온건 개화파이면서 근왕파 유생이었기 때문에 동학 조직이 주도하는 농민군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노선을 취했다.(독실한 천주교 신자여서 그랬다고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이 시기는 아직 안태훈 일가가 천주교에 입교하기 이전이었다. 또 안중근이 사형 직전에 쓴 《안응칠 자서전》을 보면, 안중근은 농민군과 일진회를 동족으로 알고 있었다. 같은 동학 출신인 건 맞지만...[16] 농민이 시초도 아니고 봉기라고 할 수 없던, 양치기로 시작하여 농민도 일부 참여한 양치기 십자군도 도적질을 저질러 결국 프랑스군에게 무수히 참살당하며 진압되었다...[17] 김구의 고향에서는 “창수가 동학하다가 끌려갔다”는 소문이 퍼져있었을 정도. 참고로 창수는 김구의 젊었을 적에 쓰던 이름이다.[18] 청과 일본 사이의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일한 파병권을 갖는다"는 조항이 있어 청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면 마찬가지로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조약이었다.[19] 아마도 태평천국의 난을 말하는 듯 한데, 이는 고종이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애초에 영국이 청을 지원한 것은 청을 짓밟고 불평등 조약 체결을 강요한 1860년 이후이며, 이 때의 청은 외세의 군사력 지원도 없이 회군과 상군을 동원해 내분으로 약해진 태평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은 태평천국의 난 진압을 위해 영국군을 동원하지 않았다.[20] 현대 민족주의 국가관을 가진 사람들 입장에선 외국군대 파병요청은 말도 안되는 짓이지만 전근대 왕조국가의 군주의 입장에선 외국군대를 통해서라도 왕권을 지키는게 군주의 최우선 사항이었다. 여담으로 프랑스 혁명기 루이16세도 이런 생각으로 오스트리아 군대를 이용해 혁명을 진압할려다가 사형당했다. 또한 고종은 근대 제국주의의 위험성에 대해서 무지했다고 봐야할것이다.[21] 이토 히로부미의 말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런 말을 할만했던 게, 당시 일본제국 의회에서 내각 불신임 상주안을 가결시켜버려 당시 총리였던 이토는 물론이고 내각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렸던 시기였다. 그러니까 하늘이 일본제국에게 준 기회라는 뜻도 있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하지만, 따지자면 자기에게 준 기회라는 뜻이 강하다(...)[22] 사실 당시 청 내부에서 조선을 전통적 조공속국 개념을 넘어 근대적 의미의 식민지로 만들자는 의견이 없었던 건 아니었으나, 주류가 아니었다. 당장 청 조정의 수장인 이홍장부터 조선 식민지화는 되도 않은 소리라고 반대했다. 지금처럼 속국 관계나 유지시키자는 게 당시 청의 주류 의견이었으니 무리하게 조약을 어기거나 할 이유가 없었던 셈. 게다가 청은 조선과 나쁜 감정도 없었고 조선이 오랫동안 청을 상국으로 잘 섬겨온 판국에 굳이 식민지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23] 역시 이에 대해서도 대원군의 사주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구한 말 정변에는 모두 대원군 개입설이 있으며 상당히 유력하다. 다만 이 시기에는 일본의 경복궁 침공이 있었으므로 고종이 억류된 상황이었는데,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해서 전봉준에게 봉기를 지시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동학의 2차 봉기가 고종과 연결되어 있는지, 대원군과 연결되어 있느냐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을 수도 있었다. 뭐 결국 실패하면서 크게 영향력이 없어져 버렸지만.[24] 한편 일본군 참모 가와키미 소로쿠와 히라오카 쇼타로가 ‘청국을 토벌한다’는 묵계 아래 우치다 료헤이 등 14명의 낭인들이 천후협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조선으로 가 전봉준을 만나 거사를 촉구하고 무기를 지원하였으며, 홍계훈이 농민군에 보낸 사자를 죽이기까지 했다. 물론 동학군이 승리했다는 둥, 지명이나 인원이 훨씬 적고 쌩뚱맞다는 점에서 신빙성 있는 기록은 아니다, 동학 측 기록인 《천도교 창건사》에도 “일본인 다케다 한지(武田範之) 등 15명이 금시계 1개와 마노(瑪瑙 : 보석의 일종) 하나를 보내어 믿음을 보이고 면회를 청한 즉 전봉준이 거리낌 없이 이들을 면담하고 시국을 서로 논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2차 봉기 이후, 대원군 등에 의해 성격이 청과 (전략적으로) 손잡고 일본과 싸운다는 것으로 바뀌면서 FAIL.[25] 사실 처음에는 부정 수준이 아니라 남접군 몰아내겠다고 출병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북접은 난이 정치성을 띄는 걸 경계하였으며 특히 대원군과의 결탁을 탐탁치 않아 하였다. 이걸 막은 것은 남접이 생각보다 잘 싸웠기 때문이지, 일본과의 문제가 벌어졌기 때문이 아니다.[26] 사실 남접의 주요 인물은 전봉준이 아니라 충청도의 서장옥이라는 사람이다. 허나 이 시점에서 서장옥은 그저 전봉준의 부관 수준이 되어버렸다.[27] 사료상의 숫자는 대체적으로 10만 혹은 20만이라고 하지만, 병량과 수송 문제 등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2만 정도의 숫자인데 엄청나게 뻥튀기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한제국 때 국운을 걸고 필사적으로 개편에 개편을 거듭해 늘린 육군이 간신히 2만명이다![28] 이 때 일본군은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과 자체 개발한 무라타 소총을 썼고 관군 역시 레밍턴과 스나이더 등을 썼다.[29] 일단 개인 화기의 수준 차이, 보유 수량 차이도 컸지만, 관군에게는 야포와 개틀링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기관총이 어떤 역할을 했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포병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안다면 농민군의 운명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30] 이는 전라 감사 이도재의 독단으로 당시 법률로는 불법이었다. 애초에 감사한테는 죄인 그것도 거물급 국사범을 정부의 허락도 없이 처형할 권한이 없는데다 당시에는 갑오개혁으로 인해 참형이 폐지된 상태였다. 나중에 전봉준 등이 반역자로 찍혔음에도 교형 판결을 받은 것도 이 때문... 매천 황현은 김개남을 처형한 후 원한이 있던 자들이 그의 내장을 씹어먹고 인육을 제삿상에 올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도재의 독단으로 인해 조선 정부는 일본과 마찰이 생긴다. 특히 일본 측에서는 공사를 파견하여 이도재의 독단에 대해 조사하고 처벌을 같이 상의하자고 말했다. 이도재는 김개남을 참수하는 불법을 저질렀으나 조선정부가 그를 감싸면서 감봉 3개월의 가벼운 처벌만 받았다.[31] 사실 동학군의 목적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가장 흔한 학설은 대원군과 연계되어서 대원군 복위와 국왕 교체(고종의 큰 형의 아들인 이준용 등극하고 고종을 상왕 옹립)를 노렸다는 것이고, 그 외에 고종과 직접 연결되었다는 설도 있을 정도. 그리고 이후에 등장한 주장이 뭐냐면,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했다는 것. 이 시기는 일본군의 경복궁 침공으로 고종이 일본군의 손에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재봉기 시 고종의 안위가 위태롭다는 이유로 봉기가 미뤄졌는데, 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해서 전봉군에게 궐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대원군의 목적은 당연히 고종을 보위한다…가 아니라 자신의 재집권. 그 과정에서 이재면의 즉위도 실제로 대원군이 수차례 시행한 일이므로 자연스럽게 확률이 높아진다. 전봉준 - 대원군 - 고종을 묶는 가장 설득력 높은 주장이긴 한데, 그런데 이렇게 되면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대원군이 단순히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 고종과 동학을 모두 이용한 혐의가 된다.[32] 바로 이것이 한국 최초의 교수형 집행 사례였다. 교수형은 갑신정변의 주축이었던 서광범이 오랜 미국 생활을 끝내고 주장한 것으로써 사람들에게 보다 경각심을 주고 더 인도적인 대우를 하기 위해서였다. 손화중을 포함한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 등 체포된 농민군의 주요 인사도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다.[33] 백범일지에 따르면 안태훈이 먼저 김구 측에 접근하여 서로 싸우지 말 것을 청하고 후에 동학이 몰락하자 김구를 식객으로 받아들여 잘 대우했다고 한다.[34] 서양에서 들어온 총기를 이르는 말인데 그 당시 사용한 총기는 일본군에게 지급받은 신무기인 영국제 후장식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하였다.[35] 양측 합쳐서 50여명. 이들은 새벽부터 등산용 사다리와 밧줄 등을 이용하여 험난한 산길을 줄에 의지하여 무려 4시간 반동안 등반 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방어가 허술한 뒷쪽 평지에 도착하여 기습에 성공하였다. 당시 일본군 3개 분대는 본국에서 자체 제작한 무라타 소총을 사용하고 심영병들은 1차 공격시 사용한 스나이더를 사용하였다.[36] 이 개혁안은 오지영이 1940년대 쓴 《동학사》에만 등장하는데, 문제는 동학사가 역사 소설이라는 것. 이에 대해 오지영의 ‘소설’이란 표현은 겸양의 표현일 뿐 픽션의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는 반박이 있다.[37] 중국에서는 농민이나 민중의 봉기를 '기의(起義: 의로써 일어남)'라고 칭하는데, 일례로 황건적의 난을 '황건기의'라고 칭하거나, 왕조 교체기나 혼란기의 농민 봉기 세력을 '기의군(起義軍)'이라고 칭하기도 한다.[38] 당시 동학군의 멸칭으로 동비(東匪. 동학+비적)라는 단어도 있었다.[39] 북한에서도 갑오농민폭동이라고 부른다. 다만 북한에서 폭동이란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로 주로 사용되는 편이므로 유의. 일례로 임오군란도 임오군인폭동으로 부르며 '애국적 군인들과 도시 빈민들이 일본 침략자들과 봉건 통치배들을 반대하며 일으킨 대중적 폭동이라 평가한다.[40] 이 둘은 본관부터 다르다(...)[41] http://blog.naver.com/amhbook/220076468100.[42] (농민군들이) 앉으면 죽창이 산을 이루었고, 서면 흰 옷이 산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런 말이 생겼다. 죽산과 백산은 동학운동이 활발했던 김제지역의 면 이름이기도 하다.[43] 동학 농민 봉기를 토벌하였다.[44] 동학 농민 운동이 성공한 후의 이야기를 다룬 대체 역사 라이트 노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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