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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19

한 윤정 [3] 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이재돈 천주교 신부



[3] 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 다른백년




[3] 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이재돈 천주교 신부
한 윤정 2019.11.18 1 COMMENT


생태계 파괴는 산업문명의 후유증이다

현재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산업문명은 인류 역사상 그리 오래된 문명 형태가 아니다. 16세기 유럽에서 근대적 사고방식이 시작된 것을 기점으로, 이후 과학과 기계기술의 발전과 함께 폭발적으로 확산된 삶의 방식이다. 산업문명은 인류에게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 산업문명에도 부작용이 생겼다. 첫째는 구조화된 빈부차이다. 산업혁명에 의해서 가능해진 물질적 풍요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빈부차이가 구조화되었고 그 차이는 더욱더 벌어지고 있다. 특별히 1990년 이후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흐름은 빈부차이를 더욱 심각하게 벌리고 있다. 둘째는 생태계 파괴이다. 모든 사람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원을 자연으로부터 가져와야 하고 자연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되는 과학과 기계기술은 생태계의 흐름을 심각하게 파괴하였다.



한국에서 산업문명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신작로를 만들고, 발전소가 가동되고, 전차로 이동하면서 산업문명의 일부를 미리 체감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제가 한국을 산업화시키려는 목적보다는 착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일제는 실제로 35년 동안 한반도의 생태계와 문화계를 철저히 짓밟았다. 한반도 전체에 대해 체계적인 생태계 조사를 한 다음, 전 국토의 나무를 대대적으로 벌목해 전쟁물자로 사용했다. 한국이 1960년대부터 산업화를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한 일이 ‘나무심기운동’이었다. 북한은 나무심기보다는 식량 증산 운동을 장려하였고, 이 때문에 북한에는 아직도 민둥산이 많이 남아 있다. 한국은 나무심기에 성공함으로써 국토에 물이 충분해지면서 농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후 한국은 경공업, 중공업, 그리고 전자산업까지 발전하였다. 산업문명 역사를 시작한 지 약 60년 만에 한국은 산업화에 성공했다. 이후 한국은 민주화에도 성공함으로써 한 세대 만에 문명의 전환을 이루고 선진국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한국도 심각한 환경파괴와 빈부의 차이로 고통을 겪고 있다.



첨단기술문명이 아닌 생태문명을 선택해야 한다

산업문명 이후의 문명 형태로 인류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앞에 놓여 있다. 하나는 과학과 기계기술을 최첨단으로 발전시켜서 환경파괴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첨단기술문명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상호 공존하는 방향으로 재정립하는 생태문명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첨단기술문명은 지구의 생태적 질서보다는 인간의 산업기술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생태문명은 인간의 기술보다는 지구의 자기조직과정인 지구기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기술은 지구의 자연적 질서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이 생태문명의 입장이다. 첨단기술문명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자연을 착취하고 조작하는 문명이라고 한다면, 생태문명은 인간이 자연과 함께 존재하면서 함께 진화하는 문명이다.

첨단기술문명과 생태문명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관점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두 문명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피할 수 없다. 20세기를 주도했던 갈등이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의 정치, 사회적 갈등이었다면, 21세기를 주도하는 갈등은 자연을 계속적으로 착취하려는 자본주의자들과 자연세계를 보전하려는 생태주의자 사이의 갈등이다.

첨단기술문명은 인류와 생태계를 조작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첨단기술문명의 전망 속에서는 100년이나 500년 후 인류와 지구 생태계가 어떻게 변할지 상상할 수 없다. 생태문명을 미래의 대안문명으로 주창하는 사람들은 인간과 자연과의 원형적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성찰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신석기 시대의 삶의 방식이나 고전문명의 생태적 가르침에서 영감을 얻는다. 특별히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조화를 강조했던 동양종교의 지혜에서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현대과학이 우주에 대해 발견한 새로운 통찰에서 생태문명의 당위성을 찾고 있다. 최첨단 우주과학은 우주가 138억 년 전 빅뱅이라는 같은 기원에서 시작했다는 과학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진화론은 생명 있는 모든 것은 같은 진화의 연속성 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료들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우주의 진화, 지구의 진화, 생명의 진화, 의식의 진화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생태문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과학적 전망 안에서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새롭게 통찰한다. 우주 진화 안에서 인간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지 묻는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를 의식하는 존재이며 경축하는 존재이다. 이런 통찰에 근거할 때 인간은 자연을 파괴해서 안 되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생태문명은 이러한 인간관과 우주관에 근거하고 있다. 생태문명을 우리의 미래전망으로 가질 때 인류와 지구생태계가 미래에도 생존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두 문명 사이의 갈등은 핵발전소에 대처하는 방식, 이산화탄소를 줄이자고 약속한 파리기후정상회의의 합의를 실천해가는 과정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난다. 우리나라도 국가발전 계획에 대한 국론이 서로 다른 의견으로 분열돼 있다. 4대강 사업에 대하여 찬성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이 갈라졌고, 핵발전소를 건설하자고 주장하는 편과 폐기를 주장하는 편이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서로 다른 주장의 근저에는 각자가 생각하는 문명관이 전제돼 있다. 4대강 사업이나 핵발전소 건설을 주장하는 근저에는 산업문명의 세계관이, 4대강 사업이나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근저에는 생태문명의 세계관이 전제돼 있다. 어떤 문명관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찬성과 반대가 갈리며, 환경파괴에 대한 진단과 처방도 달라진다.

인간과 지구생태계가 미래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첨단기술문명이 아니라 생태문명을 선택해야 한다. 인간은 지구 진화의 산물(earthling)이며, 지구를 떠나서는 살 곳도 없고 살 방법도 없다. 지구의 질서를 존중하고 생태계와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생명을 보전하는 길이다. 산업문명을 생태문명으로 전환하고자 할 때 그 변화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기계기술이 제공하는 편리함에 중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업문명이 제공하는 중독을 끊고 생태문명을 선택하는 일은 인류가 이 세상에 존재한 이래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인류와 지구생태계 전체의 생명을 살리는 길이다.



지구는 단 한 번 주어진 것이다

생태문명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생명중심주의’ 또는 ‘지구중심주의’이다. 산업문명이 인간중심주의라고 한다면 생태문명은 인간생명만이 아니라 생태계의 모든 생명, 더 나아가 지구질서를 소중하게 여기는 문명이다. 생태문명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몇 가지 통찰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친교이다. 산업문명의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만이 주체이고 다른 모든 것들은 대상화할 수 있는 객체였다. 그러나 생태문명의 세계관에서는 우주의 모든 것이 같은 근원에서 유래하는 주체적 존재이다. 이런 우주적 공동체적 이해에서 생태계를 보전해야 할 원리가 나온다.

둘째, 지구는 오직 통합적으로 기능할 때에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으며 유지될 수 있다. 산업문명은 지구를 인간의 필요에 의해 분할하고 부분화해 처리했다. 그러나 지구의 운영체계는 인위적으로 분리할 수 없으며, 어떤 생태계도 지구의 운영체계와 분리해서 보존할 수 없다. 지구는 하나의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셋째, 지구는 단 한 번 주어진 것이다. 두 번째 기회는 허락되지 않는다. 산업문명은 지구의 자원이 무한한 것으로 전제한다. 그러나 만약 지구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생물종도 멸종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어떤 것도 멸종한 생물종을 다시 복원시킬 수 없다.

넷째, 지구가 일차적이고 인간은 이차적 존재이다. 산업문명에서는 인간과 국가가 일차적이고 지구는 이차적이었다. 생태문명의 세계관에서는 지구 공동체가 일차적 경제 실체이며, 일차적 교육자이며, 일차적 통치자이며, 일차적 치유자이며, 일차적 도덕적 가치다. 지구의 건강이 우선이다. 지구가 건강하면 지구에 속해 있는 모든 것도 건강할 수 있다. 그러나 지구가 파산하면 지구에 속한 인간과 국가 그리고 모든 생물종도 파멸하고 만다.

다섯째, 현재 지구의 진화과정에서 인간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45억 년의 지구 진화과정에서 인간은 맨 나중에 출현한 존재이다. 그동안 인간은 지구 생태계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지구 생태계가 인간의 판단과 행동에 의존하고 있다. 인간은 지구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 지구의 진화과정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보호하고 돌보는 것이 지구를 살리는 길이고, 인간이 바로 이러한 역할을 도맡아야 한다.

여섯째, 산업문명의 윤리가 인간윤리를 최우선으로 삼았다면, 생태문명의 윤리 원칙은 생태계를 보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법률이 제정돼야 하며, 새로운 종교적 감수성도 개발돼야 한다.



민주주의가 아니라 생명주의다

세계관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인간 문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네 가지 사회 체제, 즉 정치, 경제, 교육, 그리고 종교를 변화시킨다. 근대 산업문명의 인간중심주의적인 세계관이 도입되면서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모두가 인간중심주의적으로 개편하였듯이, 생태문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네 체제가 생태문명의 세계관인 생명중심주의 또는 지구중심주의에 맞춰서 개편돼야 한다. 생태문명시대에 정치, 경제, 교육, 종교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생태문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정치 체제를 민주주의(democracy)에서 생명주의(biocracy)로 전환시켜야 한다. 민주주의는 산업혁명 이후 민족국가 의식이 생긴 다음에 나온 정치체제다. 현재 가장 발전한 정치체제로 간주되고, 모든 나라가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국가나 개인의 권리에만 초점을 맞추고 다른 생물종의 권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권리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민주주의는 생태민주주의 또는 생명주의로 변해야 한다. 그리고 생태문명 시대에는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새로운 정치의식이 필요하다. 지구는 지구 전체 기능 안에서만 존재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는 하나의 실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구를 부분적으로 구원할 수 없다. 따라서 지구적 차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라들의 연합(The United Nations) 정도가 아니라 종들의 연합(The United Species)이 필요하다.

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의 전환기적 상황을 맞아 1982년 유엔 총회에서 통과한 ‘세계자연헌장(World Charter for Nature)’은 새로운 정치적, 법적 체계를 위해 매우 중요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헌장은 모든 형태의 생명은 유일하며, 인간에게 유용한지 여부에 상관없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현재 인간은 지구의 기능을 지배하는 막강한 힘을 지녔기에,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법적 장치가 특별히 필요하다. 현재 법조계에서는 야생 세계에 대해 법적인 지위를 보장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 에콰도르는 2008년 국민투표를 통해 자연에 대해 존재할 권리와 스스로의 순환과 구조, 기능과 과정을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헌법을 채택한 첫 번째 나라이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는 1999년 동물의 복지권을 인정하는 법을 세계 최초로 통과시켰다.

둘째, 생태문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인간과 지구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는 경제체제로 전환시켜야 한다. 산업혁명 이후 시작된 자본주의 경제는 자연 세계가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지 않으며, 이런 사고방식은 자연을 무분별하게 파괴하는 것을 허용해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 세계의 엔트로피는 그 한계에 이를 것이고 현재의 경제 체제는 더 지탱하지 못할 것이다. 지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경제체제의 정립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현재 세계에서 자본주의 경제는 지구 생태계에 어떠한 사회 조직보다도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자본주의 경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본의 힘은 정치, 교육은 물론 종교에까지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류와 지구 생태계의 미래는 다국적기업이 지니는 사회적 책임과 생태적 윤리의식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익추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경제체제가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역할을 자발적으로 수행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가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정치계의 견제와 시민단체들의 압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등과 대안경제공동체를 설립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생명과 창조영성을 가르쳐야 한다

셋째, 생태문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체제를 ‘인간중심 교육’에서 ‘생명중심 교육’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교육은 미래 세대를 준비시키는 과정이기에 중요하다. 현재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지나치게 인간중심주의에 치우쳐 있다. 교육 내용은 학생들에게 자연세계와 친밀히 지내도록 하는 역할이 아니라 자연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확대하는 역할을 하도록 준비시키고 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인문학의 내용은 인간과 자연세계와의 조화와 공존을 가르치기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 사회에 대해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가르치는 반면, 자연세계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방법을 가르치지 못한다. 자연과 대화할 줄 모르는 현대인들의 심리상태는 자기 안에 매몰된 자폐아적 상황과 비슷하다. 또한 산업문명의 교육방식은 지나치게 전문화되어 있다. 전문화는 다른 말로 파편화이기도 하다. 산업문명의 교육방식으로는 실재에 대한 전체적 이해도 부족하고, 따라서 통합적 대책을 마련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생태문명에서는 인간이 지구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전체적 이해를 먼저 가르쳐야 한다. 지구의 진화과정에서 인간이 지니는 위치와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교육이 선행돼야 한다. 인간은 지구 진화의 절정이며 지구 생태계를 보살피고 돌보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전 교육과정에서 가르쳐야 한다.

넷째, 생태문명 시대에는 종교도 그 가르침의 강조점이 변해야 한다. 생태문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연이 단순히 경제적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숨결과 손길이 깃든 신성한 창조세계임을 강조해서 가르쳐야 한다. 그동안 종교들은 자연세계가 인간에게 가장 우선적인 계시적 경험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데 소홀했다. 그리스도교는 그동안 원죄에 근거한 구원영성만을 강조한 면이 없지 않았다. 생태문명을 실현하려면 원죄만이 아니라 원복에 근거한 창조영성도 강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종교는 생태계에 대한 새로운 윤리를 발전시켜야 한다. 현대세계에서 우리는 자살, 살인, 종족살해 등에는 민감하지만, 생태계와 지구를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윤리원칙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생태계 파괴, 지구 파괴를 절대적 악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원칙이 있어야 한다. 지구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닌 인간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책임감과 윤리 의식도 가져야 한다.

현재 생태적 가르침을 정립하고 실천을 권유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중요과제이다. 이를 위해 메리 이블린 터커와 존 그림이 주관해 하버드 대학교에서 개최한 종교와 생태포럼(Forum on Religion and Ecology)은 매우 중요한 시도였다. 1996부터 1998년까지 각 종교와 생태문제를 가지고 토론한 후 그 결과로 각 종교와 생태라는 주제로 총 열 권이 도서가 출판됐다. 이 포럼은 각 종교가 생태문제를 더욱 깊이 성찰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산업문명을 넘어 생태문명을 실현하는 과업은 현재까지 인류가 이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겪은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그리나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생태위기를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생태문명으로 발전시켜 나가야만 한다. 생태문명은 인류와 자연이 공존하면서 양자를 공진화시키는 문명으로 인류를 한 단계 성숙시킬 것이다. 이런 생태문명을 실현시키는 것이 우리 시대에 주어진 ‘위대한 과업(The Great Work)’이다.




이재돈

천주교 신부, 가톨릭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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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태문명이란 무엇인가 – 다른백년

[2] 생태문명이란 무엇인가

앤드류 슈왈츠 교수
한 윤정 2019.11.11 0 COMMENTS


문명은 타인, 환경과 살아가는 방식이다

생태문명’이란 맥락에서 ‘문명’이란 용어는 대개 ‘공유된 가치를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뜻한다. 문명은 농업부터 경제, 거버넌스, 교육, 종교, 교통, 의학, 건축, 예술, 음악 등 모든 것을 포함한다.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이 타인, 그리고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방식이다.



(생태문명이라는 대안이 필요한) 현재 우리의 문명은 ‘현대문명’ 혹은 줄여서 ‘현대성’으로 불린다.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현대문명을 탐구한 뛰어난 학자인데, 그는 주류 제도들이오늘날 사람들에게 얼마나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지 설명한다.

내 가정은 서구 현대성의 핵심이 사회의 새로운 도덕적 질서라는 것이다. 처음에 도덕적 질서는 몇몇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의 정신에 있는 단순한 아이디어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광범위한 사회적 상상력을 형성하며 사회 전체로 퍼진다.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 자명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중 하나의 가능한 개념으로 바라보기 힘들다. 도덕적 질서에 대한 이런 관점의 전환은 서구 근대성을 특징짓는 사회적 형식을 발전시켰다. 시장경제, 공공영역, 자율적인 인간이 그것이다.

테일러는 현대문명의 세 가지 명백한 특성을 강조한다. 1)우리는 상호번영을 증진하기 위해 재화와 서비스를 교환하는 경제로서 사회를 상상하게 됐다. 2)우리는 낯선 사람끼리 상호관심사를 숙고하고 토론하는 은유적 장소로서 공공영역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우리는 초월적 원리에 의지하지 않고 세속에 “기초”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율적 인간이라는 아이디어를 발명했다.

이런 실천과 가치는 현대인에게 너무 자명해서 아예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바꿀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과연 그럴까? 현대성의 개념적 토대를 생각해보자. 이른바 현대사상의 아버지인 르네 데카르트는 인간 주체를 의미와 가치의 유일한 원천으로 삼는 전환을 감행했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단지 기계로, 자연을 정신과 사고의 모험을 위한 배경으로 간주했다. 그럼으로써 세계를 “사고하는 존재”와 “확장된 존재”둘로 나눴다. 데카르트의 인간중심주의는 “자아”를 생각하는 주체로 특권화하는 개인주의와 쌍을 이뤘다.

개인주의는 자연스럽게 경쟁과 지배의 모델로 흘러갔다. 1649년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인간의 조건이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며 따라서 지구상의 생명은 “추잡하고 짐승 같고 단순하다”고 단언했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은 곧바로 그의 동료들에 의해 “이빨과 발톱이 피로 물든”(앨프리드 로드 테니슨)자연으로 해석됐다. 이런 지배의 태도가 인간 존재와 사고의 전 영역에 만연하면서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대국과 소국, 과학과 종교, 인간과 비인간, 부자와 빈자의 위계를 가져왔다. 물론 다양한 형식의 협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함께 일하는 게 성공을 위한 더 근본적 전략이라는 공생(symbiosis)의 아이디어는 대개 배척당했다.

현대문명에서 사회는 개인을 위해 존재하며, 유사하게 국가는 시민을 위해 배타적으로(“아메리카 퍼스트”) 존재한다. 존 로크는 그의 『통치론』 제2논고에서 국가는 재산권을 가진 (남성)시민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지켜주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이 국가의 목표는 각 개인의 자유를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그는 이런 현대적 이상의 대변인이 됐다. 밀은 이 전통을 확장시켜, 한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해로울 때만 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민의 행동은 살인처럼 다른 사람에게 직접 해를 끼쳐 국가가 규제해야 할 때까지는 “사적 영역”에 속한다는 게 밀의 주장이다. 개인은 공공선을 위해 존재한다는 견해인 공동체주의는 현대적 패러다임 안에서 개인주의를 이기지 못한다.

마침내 현대성은 스스로의 옹호자가 됐다. 이전 단계의 역사는 모두 “전(前)과학적’이며 과학시대에 비해 열등한 것이 됐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낡은 정치체제와 철학, 사회적· 정치적 조직의 형식들이 대체됐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이룬 위대한 진보는 현대성의 원리 덕분이며, 사회는 점점 좋아진다는 신념인 사회개량론이 올바른 태도로 여겨진다.



우리는 현대문명의 끄트머리에 있다

당연히 현대문명은 유일한 문명이 아니다. 문명의 등장은 농업 발전과 연결돼 있는데, 기원전 3000년 최초의 문명은 농업이 인간에게 잉여의 음식과 안전을 보장했을 때 등장했다. 식량안전성이 증가하면서 많은 인구가 기본적 생존을 넘어 예술이나 여가 활동 같은 다른 문제들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서 문명은 인구의 집적, 문어(文語), 기념비적 건축물, 고유한 예술양식, 통치체제, 복잡한 분업, 그리고 사회적 계급으로 특징지어진다. 문명들은 농업과 더불어 등장하며 무역, 전쟁, 탐험 등으로 확대된다. 대부분 문명은 다른 확장되는 문명에 합병되거나 붕괴하거나 단순한 형식으로 회귀함으로써 사라진다.

과거 문명의 범위는 산과 대양과 원거리로 인해 제한됐다. 그래서 헬레니즘 문명은 중국문명이나 마야문명과 같은 시대에 공존했다. 오늘날 우리는 최초로 하나의 글로벌 문명 안에서 살고 있다.

교통과 통신기술의 발전은 서로 다른 문명들을 갈라놓았던 지리적 한계를 극복했다. 스마트폰, 할리우드 영화, 인터넷은 군대와 전쟁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냄으로써 공유된 가치, 국가 간의 균형(혹은 불균형), 그리고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 기초한 하나의 글로벌 공동체를 창조했다.

현대인과 현대국가는 이전에 없었던 하나의 글로벌 문명으로 함께 묶여있다. 점점 강력해지는 기술에 매혹됨으로써 소비자들은 전지구적으로 하나의 욕망과 열망 앞에 도열했다. 그 결과 기술력을 가진 기업들은 점점 거대한 부를 축적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어떤 군대와 예술작품, 문화적 성취도 성공하지 못한 곳에서 소비주의를 통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글로벌 시민으로 묶어냈다. 물질적 성취에의 매혹은 거대한 자석이 돼 모든 저항을 물리치고 글로벌 소비자를 “예스맨”으로 만들었다. “세계를 주머니에 넣는” 스마트폰은 전세계의 필수품목 가운데 하나다.

끝없는 진보라는 신화는 유혹적이다. 의약품은 질병을 물리치고 사망률은 떨어졌다. 오늘의 문제는 내일의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 우리는 기술이 소비자들을 위해 준비한 안락과 효율의 초입에 서있을 뿐이다. 더 큰 번영과 즐거움으로의 전진은 무한정 계속될 수 있다. 삶은 점점 더 편안하고 즐거울 것이다. 사람들은 원하는 물건이라면 뭐든지 가질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사기 위해 돈만 있으면 된다. 글로벌 자본주의와 시장의 성공 덕분에 더 많은 부가 창출되고, 사람들의 생활방식은 계속 개선될 것이다.

이런 현대성의 마술은 화석연료 덕분에 가능해졌다. 전례 없이 에너지가 풍부해졌고, 우리가 당연시하는 대부분의 기술은 엄청난 탄소를 배출함으로써 유지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지구의 한계에 이르렀다. 지구인 모두가 이런 문명의 변화를 지지한 건 아니다. 그러나 현대문명은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었고, 최소한 다른 사람들이 가진 물건을 갈망하도록 했다. 인디아의 소농도 스마트폰과 텔레비전을 가졌다. 아주 외딴 마을의 주민도 서구식 티셔츠를 입고 코카콜라를 마신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오래 살수록 더 많이 소비해야 하며 지구에 더 큰 스트레스를 준다. 지구가 우리 욕망보다 먼저 고갈될 것이다. 지구 스스로 현대문명을 끝장낼 것이다. 현대의 막바지인 지금에 와서야 우리는 지난 몇 세기를 돌아보면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뒤늦게야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 문명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됐다.

문명에 대한 짧은 학습의 결론은 분명하다. 앞선 모든 문명들과 마찬가지로 현대문명도 끝날 것이다. 언제 어떤 방식이 될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끄트머리에 서 있는 건 분명하다. 이는 다음의 핵심적 질문을 불러온다. 현대성 뒤에 진정으로 생태적이고 지속 가능한 문명이 올까? 인간은 현재의 문명이 막다른 지점에 이른 뒤 땅, 다른 생명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와 경제, 급진적으로 다른 삶의 방식을 발견함으로써 지구적 붕괴를 막고 문명을 재건할 수 있을까?



생태학에서 상호의존성을 배워야 한다

지난 지난 수십 년 간 우리는 생태과학 분야의 폭발적인 성장을 지켜봤다. 이제 생태적이라는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이 단어는 살아있는 세계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의 사실과 더불어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자연생태계를 보존해야 하는지의 가치를 모두 담고 있다. 우리의 존재자체가 생태계에 기반하기 때문에, 이 경우 사실과 가치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서 생태계없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생태계는 매우 중요하고 가치가 크다. 따라서 생태계와 관련된 사실은 우리가 지구에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홈즈 롤스턴에 따르면, “어원상 ‘생태학(ecology)’이라는 말은 생명체들이 자신의 집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뜻하며, 이는 똑같이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 우리가 사는 세계)란 어원을 가진 ‘보편적(ecumenical)’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생태학은 탹월한 상호의존성의 과학이다. 물론 이를 부정하면서 모든 과학이 보다 근본적인 법칙을 이용해 복잡한 상호작용을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생태과학 역시 다른 과학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이는 과학적 성공이 생태계에서 유기체로, 유전자로, 다시 생화학, 화학, 마지막에는 가장 기초가 되는 물리학으로 이루어진 환원의 사다리를 내려가는 것으로 정의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예일대 삼림과학대학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는 특정 숲에서 전체 나뭇잎의 표면적을 계산한 뒤 나뭇잎들의 생화학적 처리능력의 총량을 이용해 그 숲의 진화를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태계 연구는 이런 식으로 환원적이지 않다.

생태계는 부분의 합보다 크고 복잡한 창발적 실재이며, 그런 복잡하고 통합적인 전체의 견지에서 개별적 유기체가 이해돼야 한다. 높은 수준의 상호의존성 때문에 환원주의적인 설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한 종의 번성은 다른 종들의 번식률과 영양 수요에 달려있으며, 식물과 동물 간의 균형은 양쪽이 생존하는데 필수적이다. 매우 큰 유기체와 아주 작은 유기체가 상호의존의 복잡한 춤에 참여한다. 정교하게 조정된 그들의 공생적 관계는 생존확률을 높이는 협동의 형식을 보여준다. 물론 다윈 식의 경쟁이 여전히 존재하며, 자연에 더 잘 적응한 유기체들이 경쟁자를 압도하고 더 많은 수의 자손들을 생식가능연령에 도달하게 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종 간의 협력이 그들의 생존과 생태계, 그리고 생태계를 이룬 다른 유기체들의 번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연구결과들이 있다. 유기체들은 서로 외향적인 영향만 주고받는 게 아니라 내향적으로도 상대를 변형시킨다. 포유류나 썩은 나무의 배출물이 다른 종들의 먹이가 된다. 생태계 내부의 이런 풍부한 상호의존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안에 사는 생물들의 행동은 이해될 수 없다.

생태문명은 생태과학의 이런 통찰에 따라 만들어진 모델이다. 이것은 경제와 정치, 생산, 소비, 농업 등의 사회 시스템이 지구적 한계 안에서 재설계되는, 완전히 다른 미래를 향한 비전이다. 이러한 비전은 현대의 확장, 정복, 소비 정신의 죽음으로부터 나오며 계약, 협력, 육성 등의 정신에 기초하여 살아있는 지구와의 조화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말한다.



생태문명은 가장 중요한 사고 실험이다

생태문명이 기존 다른 문명들과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점은 자연세계와의 관계이다. 다른 문명 형태들의 가장 큰 특징이 인간을 위한 자연의 조작인 것과 달리, 생태문명은 사람뿐 아니라 자연의 웰빙도 고려하면서 자연환경을 지속 가능하고 공생적인 방법으로 변형시킨다. 이는 원초적인 자연의 순수성으로의 회귀와 같은 낭만적 이상이 아니며, 어쨌든 문명의 한 형식이다. 생태문명은 단순히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번영을 위해 사람들끼리도 서로 평화롭게 살아가자는 것까지 포함한다.

19세기까지는 다른 모든 문명을 정복하고 제거할 수 있는 하나의 문명, 즉 글로벌 문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문명이 지역적 형태를 띨 때는 하나가 사라져도 다른 것들은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었기에 그 위험성은 낮았다. 오늘날 지구는 최초로 과학, 기술, 국가, 전지구적 소비자들에 기반한 현대문명이라는 하나의 글로벌 문명이 지배하고 있다. 과거 다른 문명들이 그랬듯이 이 단일 문명이 사라진다면, 그 결과는 엄청날 것이다. 미국정부는 몇몇 은행이 “파산하기에는 너무 크다”고 믿을지 모르지만, 이 글로벌 문명이 휘청거릴 경우 우리를 구제할 수 있는 힘은 없다. 인류 역사에서 50번째 혹은 100번째로 다시 한번 문명변화의 율동적인 순환과정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 첫 번째 북소리가 지금 들린다.

다음문명, 즉 사회조직의 다음 패턴은,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생태문명이 될 것이다. 여기서 “생태적”이라는 말은 유토피아적 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며, 최소 한도로 우리의 현재 문명 뒤에 올 어떤 것을 뜻할 뿐이다. 어쩌면 다른 문명이 없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나무에서 살거나 모두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문명이 끝난 뒤에도 어떤 종류의 안정된 사회가 지속된다면, 그 사회는 지속가능한 문명이 돼야 한다. 즉 현대문명이 지금 초래하는 종류의 파괴적 손상을 피하거나 되돌릴 수 있을 만큼 환경과 충분히 조화를 이뤄야 한다.

제레미 렌트에 따르면, “생태문명의 배후에 있는 중요한 생각은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사회가 훨씬 더 깊은 수준에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재생 에너지에 투자하고 고기를 덜 먹고 전기 자동차를 운전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전지구적인 사회적, 경제적 조직의 내재적인 틀이 바뀌어야 한다.” 현대성이 (아마 말 그대로)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그 계승자가 등장할 때, 과연 어떤 종류의 문명-어떤 종류의 세계관과 생명관–이 부상할 지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고 실험이다. 생태과학은 우리가 발전시켜야 하는 문명의 종류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우리는 현대의 고통스러운 실수를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일으키고, 과소비 및 자원의 과도한 사용을 초래하고, 공공선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사회구조를 형성했으며,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에너지원에 의존하도록 만든 글로벌 경제 시스템의 결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웠을까? 우리의 생태문명은 어떤 모습일까?

번역: 한윤정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




앤드류 슈왈츠(Andrew Schwartz)

미 생태문명연구소 부대표·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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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윤정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

한 윤정 [1] 현재 우리 문명은 어떤 토대 위에 세워졌을까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의 장을 열면서 – 다른백년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의 장을 열면서

[1] 현재 우리 문명은 어떤 토대 위에 세워졌을까한 윤정 2019.11.04 0 COMMENTS


편집자의 글:

올해도 예외 없이 기후변화에 따른 온갖 재난이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모두를 열거할 수 없는 엄청난 재난현상들이 해가 갈수록 정도를 더하고 있고, 연전(年前)부터 국제회의마다 기후변화를 넘어서 생태위기와 인류세의 멸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사회는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무감하고 무책임으로 일관해 오고 있다. 에너지 과소비의 산업구조, 일인당 폐비닐 배출 세계 1위 국가, 탄소배출량을 감소하기는커녕 화석연료발전소 건설을 금융 지원하는 악당국가, 겨울과 봄철이면 찾아오는 미세먼지의 공습 등이 오늘의 대한민국 자화상이다.

근본적인 성찰과 전환이 요구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개 평범한 시민들은 일상에 빠져있는 가운데 무능한 정부는 성장률과 GDP수치만 타령하고, 무지하고 시대역행적인 의회는 자신들의 정치적 셈법에만 빠져 있다.

<다른백년>은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주제를 연구해온 한윤정 박사와 함께 한국사회의 현실을 돌아보고 깨어있는 시민 여러분들의 연대를 통하여 미래세대를 위한 실천적 좌표를 제시하고자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라는 주제의 글들을 매주 연재하기로 하였다.



[1] 현재 우리 문명은 어떤 토대 위에 세워졌을까

기후변화는 잘못된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전환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이것의 가장 뚜렷한 증상은 만연한 위기와 불안이다.

가장 큰 위기는 기후변화와 환경파괴이다. 이미 지난 세기부터 나온 진부한 이야기, 아직 극단적 상황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있는 이야기로 여기기에는 심각한 상황들이 지구 곳곳에서 벌어진다. 매년 최고기온을 경신하고 대형산불이 나고 경작지가 줄고 수많은 종이 사라진다. 플라스틱이 바다를 뒤덮고 가축전염병이 국경을 넘어 창궐한다. 이른바 인간이 지구의 대기와 지질을 바꿔놓은 ‘인류세’로 접어들었다.

이렇듯 병들어가는 지구 위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힘들고 불안한 삶을 살아간다. 극소수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중산층부터 빈곤층까지 모두 시스템의 노예가 돼서 어디로 향하는지 확실하지 않은, 모호한 미래를 향해 달린다. 불평등은 점점 심화한다. 불안을 가져오는 두려움의 대상은 때로는 기후변화와 환경파괴로, 때로는 인공지능이라는 신기술로, 때로는 무역전쟁과 마이너스 경제로, 나아가서는 계층 갈등과 정치적 혼란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대책 마련에 부심한다. 기후변화를 조금이라도 늦추거나 기후붕괴에 대응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을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을 상상해 거기에 맞게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저성장 나아가 마이너스 성장시대에 맞춰 청년이나 노인 수당을 신설하거나 복지제도를 개편한다. 모든 이해관계가 모이고 조정되는 정치에 관한 한 대안 마련이 더욱 쉽지 않지만, 분권이나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위기는 기회라는 점에서 현재는 대안과 혁신을 모색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런데 우리의 고정관념은 과감한 혁신이나 도전을 어렵게 한다. 고정관념이란 다른 말로 하면 사고의 프레임, 지식의 패러다임,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는 존재론과 우주론, 즉 철학과 과학이다(과학이라고 하면 실험과 수치에 입각한 실증과학을 가리키기 때문에 실재를 질문하는 자연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현재가 어떤 토대 위에 형성됐는지 그 사고의 뿌리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진정한 변화는 불가능하다.



화석연료가 우리 문명의 기반이다

현재 우리 문명은 어떤 생각의 토대 위에 세워졌을까.

경제주의: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소비하는 것,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은 모든 가치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한다. 우리는 돈 없이 절대 살아갈 수 없다고 믿는다. 그 규모와 운영원리가 공공의 통제범위 바깥에 있는 글로벌경제, 특히 금융경제의 시스템 속에서 현상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재앙이 닥치며, 이는 모든 사람에게 해악을 끼친다고 믿는다. 경제주의적 사고방식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미국 민주당이 월 스트리트와 결탁한 것처럼 한국 민주당도 재벌을 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긴다. 생산과 소비인구를 늘리려는 출산장려 정책은 물론, 소득주도성장처럼 진보적으로 보이는 정책의 배경에도 지독한 경제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개인주의: 돈이 절대적인 이유는 남이 나를 돕거나 책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심지어 가족관계에서도 금도가 됐다. 성인이 된 개인은 재정적으로, 정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 전통사회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난 개인의 자유를 다시 반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이란 관계의 구성물이다. 사람은 가족, 친구, 이웃, 타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삶의 의미와 행복은 관계와 인정감에서 나온다. 아무리 복지사회를 위한 재원과 제도를 마련하더라도, 공동체에 대한 관념과 믿음이 없다면 이는 시혜와 수혜의 일방적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분과주의: 오늘날 대학의 전공분야는 놀랍도록 세분화돼 있다. 직업의 세계도 그렇다. 지식인, 전문가는 한 분야를 좁고 깊게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전문분야만 탐구하는 데도 시간과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는 아예 귀를 닫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들은 가치와 당위를 말하는 거대담론에 대해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는 냉소적 반응을 보인다. 학벌주의, 능력주의와 합쳐진 분과주의는 여러 분야를 연결하는 폭넓은 사고를 가로막는다. 학문간 융합은 시장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며, 인간을 연구하는 인문학조차 문화콘텐츠나 테크놀로지를 위한 실용성을 갖추는 수단으로서 스스로의 지위를 유지한다.

실증주의: 실증주의는 이른바 객관적, 과학적 사고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지 않는다. 세속화한 세계에서 종교는 초월적 세계와의 교감이라기보다는 오랜 관습과 제도의 관성으로 남아있다. 때로 자연에서 에너지와 영감을 얻지만, 그것은 지구 자원을 개발과 이용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현대 경제시스템에서 더욱 유능하게 일하기 위한 휴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무관심은 희망과 가치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절실하게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경험을 사람 사이의 에너지나 우주와의 교감으로부터 설명하기보다 심리학과 뇌과학이 발견한 인간 내면의 사건으로 환원시킨다.

서구에서는 이삼백 년, 한국에서는 백 년 이상 사회를 지탱해온 이런 사고들이 합쳐져 현재의 생태위기, 인간의 위기를 초래했다. 경제주의는 화석연료에 기반한 서구 산업문명을 세계화하는 원동력이 됐고, 그 결과는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로 나타났다. 파국적 결과가 눈에 보이는데도 에너지 전환은 여전히 경제적 이익과 연관돼 논의되고, 탈성장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된다. 자연에 대한 외경심은 물론, 자연과의 교감조차 어려운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능과 역할에 충실하며, 넓은 시야를 비전문성의 증거로 간주한다. 사회의 엘리트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며, 경제적 수요에 부응하는 교육이 이를 부추긴다는 것은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다소 위악적으로 서술한 우리 문명의 토대는 그러나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인간의 유전자는 자신의 근시안적 이익만을 위해 행동할 만큼 이기적이지 않다. 이타성이 최고 수준의 이기적 선택임을 밝혀주는 생물학적, 역사적 증거들이 나타나면서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 지식이든 재산이든,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과거의 유산과 동시대인들에게 빚진 것이라는 자각과 함께, 산업문명을 탄생시킨 사유화(인클로저)에 저항하는 공유화(커먼즈)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청년세대는 대학이 가진 권위와 대학 자체의 경제주의에 저항하면서 비제도권에서 폭넓은 지식을 탐구하는가 하면, 유목민적이고 생태적인 삶을 꿈꾸며 실천한다.

그럼에도 이런 경향은 아직 비주류에 머물고 있다. 주류의 사고와 행동은 여전히 과거의 철학적 토대 위에 서 있으며, 그만큼 전면적 변화는 요원하다. 대안을 추구하는 사람들마저 현재 궤도에 결박된 삶과 이를 거부하는 앎 사이에서 자기분열을 겪으며 조금씩 열정을 소진해간다. 문명의 전환은 명백한 시대적 과제이지만, 그것을 분명한 언어와 힘찬 주장으로 제시하고 많은 이들과 공유할 때만효과적으로 이행될 수 있다. 경제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우리의 존재와 관계를 틀 짓는 개인주의와 분과주의, 실증주의를 극복하기는 훨씬 어렵다.



생태문명은 전환의 방향이다

생태문명은 이런 한계를 뛰어넘는 개념으로 제안됐다. 생태는 지구상 모든 존재와 생명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뜻이며, 문명은 사회시스템을 구성하는 모든 분야가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생태문명은 기후변화나 환경파괴의 문제와 연관이 깊지만, 그것을 넘어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지구 전체의 생활양식을 아우르는 말이다. 생태문명은 생태와 문명이 조화를 이루는 전환의 방향을 가리킨다. 경쟁하고 배제하는 게 아니라 협력하고 공유함으로써 적절한 물질적 수준과 최고의 정신적 수준을 가진 문명을 만들자는 이 주장은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유토피아적인 관념인지도 모른다.

생태문명이라는 단어는 여러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했다.

지구헌장: 2000년 유엔총회에서 발표된 지구헌장은 “지구는 우리의 집이며 지상 모든 것의 집이다. 지구는 그 자체로 살아있다. 인간은 훌륭한 삶의 형태와 문화를 가진 지구의 한 부분이다”라고 선언했다. 또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지구를 보호하거나 우리 자신과 다양한 생명을 파괴하는 것, 둘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자신과 지역사회, 소유와 존재, 다양성과 획일성, 단기와 장기, 사용과 육성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산업기술문명사회를 재고찰해야 한다”고 했다. 지구헌장은 1992년에 열린 역사적인 리우 환경회의 이후, 유엔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영성적 지도자와 NGO들이 제시한 환경보존과 지속가능개발 원칙을 바탕으로 1994년 초안을 마련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네덜란드 정부의 지원으로 1995년 30개국 대표와 70개 이상의 단체가 모인 가운데 첫 번째 국제워크숍이 열렸고, 1996년 지구의회가 조직돼 5년간의 검토와 보완과정을 거쳤다. 리우 회의의 성과인 ‘아젠다21’의 점검과 지속가능발전목표의 형성에 깊이 관여해온 지구의회가 발표한 2002년 보고서는 지구헌장의 원리를 “생태문명의 원리”라고 명시했다.

중국정부: 중국은 1997년 제15차 당대회에서 지속가능발전을 국가발전전략으로 채택했다. 지속가능발전은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가 1987년 발표한 ‘우리 공동의 미래’에서 “미래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발전”이라고 정의한 개념이다. 그런데 10년 뒤인 2007년 제17차 당대회에서는 지속가능발전 대신, 생태문명을 건설하자는 제안이 등장한다. 이는 지속가능발전이 제시하는 경제성장과 환경보존의 상호관계를 넘어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생태문명은 2012년 공산당 당헌에 포함돼 정치기본노선이자 국가통치전략으로 격상하며, 이때 권력을 승계한 시진핑 주석은 중국식 사회주의의 목표로 경제, 정치, 문화, 사회, 생태문명 건설이 조화를 이루는 ‘오위일체론’을 제시한다. 2018년 생태문명 건설과 환경권을 담은 헌법 수정안이 통과됐고, 행정부처의 대대적 개편에 따라 기존 환경보호부를 포함한 6개 부처와 기구의 환경오염 관리 기능을 통합한 ‘생태환경부’가 탄생했다.

중국의 생태문명 정책은 세계 여러 나라의 모범이 될 만큼 혁신적이라는 찬사와 함께, 현실이 따르지 않는 이상주의이자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새로 부상하는 녹색경제에서 세계시장 제패를 노리는 ‘시진핑의 세일즈 전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유엔은 중국정부를 지지해왔다. 유엔환경계획은 2013년 중국의 생태문명을 지지하고 확산시키는 결의안(결정 27/8)을 채택했다. 또 2016-2030년을 목표연도로 하는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수립하면서 중국을 적극적인 동반자로 끌어들였다. 2016년 유엔환경계획이 발행한 중국생태문명 홍보책자 『Green is Gold』(“청산녹수가 금산은산”이라는 시진핑 발언을 인용한 제목)는 “중국의 생태문명 건설노력은 2030 아젠다 (17개 지속가능발전목표)의 확산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라며 혁신, 조화, 녹색, 개방, 공유를 원칙으로 내세운 제13차 경제개발계획(2016-2020)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우리의 삶은 생태적 원리로 재조직돼야 한다

2015년은 생태문명 개념 확산에 중요한 전기가 됐다. 그 해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엔기후 환경회의는 지구온도 상승을 산업화 이전에 비해 섭씨 2도 이하로 억제하고, 가능하면 섭씨 1.5도 이하가 되도록 노력하자는 결의안인 파리협약을 채택해 198개국의 서명을 받았다. 각국이 이행계획을 마련해 보고하고 유엔이 이행을 감시하기로 함에 따라 한국도 2030년 이산화탄소 배출추정치의 37%를 감축하겠다는 계획을 제출했다. 그러나 전체 탄소배출량의 12%를 차지하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4월 이 협약을 탈퇴했다. 한국의 에너지 전환 속도 역시 약속이행을 담보하기 어렵다.

파리협약이 체결되기 몇 년 전부터 세계적으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리우 환경회의 이후 50년(2012년)이 되도록 유사한 회의와 결의만 계속됐지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는 것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책 『이것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에 나오는 한 대학생은 2011년 유엔환경회의장에서 각국 대표들을 향해 “당신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회의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근본적인 사고방식의 변화가 없이는 기후변화를 막을 수도, 이를 부추기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자원착취적 경제구조를 억제할 수도 없다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영적, 종교적, 철학적 각성을 촉구하는 선언이 이어졌다.

찬미받으소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6월 자신이 주제 선정부터 집필, 발표에 이르는 전 과정을 주도한 첫 회칙 ‘찬미 받으소서’(Laudato Si’)를 발표했다. 회칙이란 보편교회에 대해 교황이 발표하는 공식 사목교서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늘의 사회윤리적 문제에 비춰 해석하고 적용원리와 방안을 제시한다. 회칙의 핵심은 통합생태론인데, 이는 생태위기가 비단 환경문제가 아니라 경제사회적 조건과 결합돼 있기 때문에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풀어가야 하며, 이를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경제와 발전에 대한 다른 이해방식을 찾으라는 요청, 모든 피조물의 고유한 가치, 생태계의 인간적 의미” 등을 고려할 것을 주문했다. 통합생태론은 생태문명과 동의어이며 유엔과 지구헌장 그룹, 주요 종교지도자들, 과학계의 열광적 지지를 얻었다.

클레어몬트 컨퍼런스: 같은 2015년 6월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에서는 과정신학자(과정신학은 앨프리드 노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응용한 미국의 진보신학운동이다)이자 환경사상가인 존 B. 캅 주니어의 주도로 ‘대안을 잡기: 생태문명을 향하여’라는 주제의 국제 컨퍼런스가 열렸다. 생태문명이라는 주제로 열린 사상 최대의 학술행사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1500여명의 사상가, 작가, 활동가, 신학자, 철학자, 과학자들을 끌어 모았고,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기후변화에 당면한 인류의 미래를 토론했다. 컨퍼런스 이후 주최측은 행사의 취지를 잇기 위해 비영리법인인 ‘생태문명연구소(Institute for Ecological Civilization)’를 만들었다. 이곳은 지속가능하고 생태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학제적인 연구를 수행하며, 지방정부 및 연구기관, NGO와 협력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삶이 어떤 방식으로 재조직돼야 하는지 규명하는데 헌신한다.

세계종교의회: 1893년 창설돼 종파를 초월해 가장 많은 종교인이 모이는 세계종교의회는 2015년 10월 유타주 솔트레이크에서 열린 행사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면서 생태문명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새로운 생태문명이다. 이는 생명의 다양성이 확장되고 평화, 정의, 지속가능성이 보장되는 세계이다. 우리는 지구공동체 안의 인간 가족으로서 생태문명이라는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다.” 이 선언은 지구공동체(지구상 모든 생명의 공동체)라는 상위 시스템에 속한 인간사회의 하위시스템으로 생태문명을 규정한다.

이밖에 생태문명과 유사한 개념은 적지 않다. 문화사학자이자 환경사상가인 토마스 베리는 물리학자 브라이언스 윔과 공저한 『우주이야기』(1997)에서 생태대(Ecozoic Era)라는 조어를 썼다. 지질학 용어를 차용한 생태대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생명중심주의, 지구중심주의로 옮겨간 시대이며, 이를 실현하려면 지구와 적절한 관계를 맺으려는 인간의 결정과 투신이 중요하다. ‘만인과 만물이 하늘(物物天 事事天)’이라며 공경의 대상을 한울과 사람을 넘어 만물(동식물)까지 확대한 최시형의 동학사상, 동학정신을 계승해 산업문명의 위기와 기계론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인간 안의 우주생명’을 도모한‘ 한살림 선언’(1989) 역시 생태문명과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생태문명은 진정한 글로컬 문명이다

생태문명 담론은 여전히 형성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따르면, 생태문명은 실체가 아닌 과정이다. 생태문명을 위해서는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과 단체가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유기적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구상해야 한다. 문명의 토대를 바꾸기 위해 철학, 종교,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문화를 가로지르는 학제적 구상이 필요하며 이론과 실천, 담론과 정책이 만나야 한다. 견고하게 형성된 현재 상황을 개선하는 데서 시작하기보다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미래를 꿈꾸면서 이를 실현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되짚어 내려오는 과감한 혁신의 과정이기도 하다.

생태문명의 시공간은 산업문명의 시공간과 현저히 달라질 것이다. 산업문명에서 미래는 무한히 진보하고 확장되는 시간이다. 과학기술은 발전하고 생산력은 증대하며 경제는 팽창한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구 용량과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생태문명에서 미래는 순환하는 시간이다.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모두 써버리는 자본주의 경제논리가 아니라 가을에 추수를 마친 뒤 이듬해 봄의 파종을 위해 씨앗을 보관하는 것처럼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미래, 즉 자본가와 도시노동자가 아닌 농부의 시간이 될 것이다.

생태문명의 공간은 이중적이다. 산업문명처럼 생태문명은 글로벌 문명이다. 서구 근대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이미 전 세계로 퍼져나간 지금, 지구화 이전 삶의 형태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산업문명이 차등근대화와 분업을 통해 전지구적 착취구조를 형성한 것과 달리, 공동체에 기반한 에너지 자립과 지역순환경제를 추구하는 생태문명은 보다 평등한 세계를 만들 것이다. 모두가 공유하는 단 하나의 지구를 고려하며 살아가는 글로벌 문명인 동시에, 마을 단위로 각자의 삶을 꾸리고 실험하는 커뮤니티 문명이다. “범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에서 실천하라(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구호는 지역의 차이를 활용하는 후기자본주의의 경영전략이 아닌, 생태문명의 구호로 전유돼야 한다.

앞으로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에 연재될 국내외 필자들의 글은 한국생태문명프로젝트가 미국 과정사상연구소와 생태문명연구소, 중국 후현대발전연구원, 한국 지구와 사람 등 국내외 여러 기관과 협력해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 개최한 컨퍼런스의 성과물이다(2017년 11월 클레어몬트에서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국제 컨퍼런스’, 2018년 10월 파주에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생태적 전환’, 2019년 10월 서울에서 ‘생태문명을 향한 전환: 철학부터 정책까지’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생태문명을 향한 담대한 꿈과 실천적 제안들이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앞당기는데 영감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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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윤정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

한 윤정 – 다른백년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 [1-14]

한 윤정 – 다른백년



우리가 생태문명의 비전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반드시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가치도 그 비전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삶의 중심에 있는 가치이며 모든 살아있는 것들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일의 핵심이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아름다움을 자기 철학의 중심에 두었다. 그는 관계적 관점에서 세계를 설명했으며 이런 관계들이 “아름다움의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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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에서 “강도”(intensity)라는 용어가 맡는 역할에 가장 상응하는 용어는 “아름다움의 힘”이다. … 물론 여기서 “아름다움”은 자연의 미적 성질이나 예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보는 사람의 경험이 가지는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은 경험이 갖는 아름다움 그 자체다. 그 주요성분은 감각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다. 비록 감각이 감정의 깊이에 명백하게 관여하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 화이트헤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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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지의 비극”을 넘어 기후변화는 “공유지의 비극”으로 볼 수 있으며 커먼즈 운동은 21세기의 사회적, 생태적 시스템 붕괴에 대한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책을 제공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기후변화는 집단행동에서 비롯된 대표적 문제이며 현재의 정치제도는 사회적, 생태적 문제가 복합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개럿 하딘은 1968년에 쓴 유명한 논문「공유지의 비극」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들은 국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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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경제다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느낄 것인가. 그것은 정보의 문제도,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의 문제이다.” 오래 전 책을 읽다가 메모해둔 구절이다. 작가는 문학작품에 대해서 한 이야기였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에 해당하는 말이고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환경, 생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후변화와 문화적 인식과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미국 예일대의 문화인지 프로젝트) 결과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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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 1972년 로마클럽의 보고서 『성장의 한계』가 발표된 이후, 경제성장 위주로 달려오던 현대 문명이 지속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구환경이 더는 인류문명을 지탱할 수 없다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문명의 방향을 전환하지 못하면 인류가 지속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이러한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의 한 결과로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이 1987년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의 보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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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에 따른 생태교육의 시급성 최근 수년간 급격한 기후변화와 전지구적 생태계 파괴를 경험하고 있는 이 시대의 인류는 불안한 마음으로 디스토피아가 다가옴을 지켜보거나 애써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과학기술 낙관주의에 빠져있다. 현 인류가 처한 이러한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극적인 처방은 과연 있는 것인가? 지구 환경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국제적 노력과 크고 작은 규모의 사회조직체들의 활동으로만 충분한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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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연과 과학의 재정의가 필요한가 나는 자연과 과학이 이해되는 방식의 혁명적인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설명은 역사 혹은 철학 수업이 아니다. 이것은 정책결정, 정책의 프레임 구축, 지구의 미래에 관한 장기적인 비전 마련에 필요한 설명이다. 현대적 가정의 바깥에서 “자연”과 “과학”을 생각하는 방식을 배움으로써만 우리는 문명적 변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통제 아래 놓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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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탄생과 변화 대학은 1000년전 지금과는 매우 다른 환경에서 탄생했다. 그때는 인구가 지금보다 훨씬 적었고, 기술도 거의 발달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어서 지상에서의 존재란 영원한 삶으로 가는 중간단계라는 종교적 사고방식이 지배했다. 그때 이후 많은 것이 변했고 대학도 중세에서 현대, 후현대로의 역사적 변천으로 규정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변화에 대응해 여러 차례의 중요한 변형을 겪었다. 현재 세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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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사고와 화이트헤드 철학 화이트헤드와 생태문명은 내 삶의 심장과 같은 주제이다. 나는 화이트헤드 철학을 만나면서 인생의 무의미함에서 탈출했다. 그의 철학은 근대적 사고를 무조건 규범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켰다. 내 경험상 근대적 사고는 늘 니힐리즘으로 귀착된다. 무엇이 옳은지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근대적 사고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전제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통찰이었다. 나는 화이트헤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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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현대화의 곤경에 직면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국내총생산(GDP)의 빠른 성장이 보여주듯 중국 현대화의 성과는 탁월했으나 그 대가 역시 매우 혹독했다. 그 대가는 환경문제, 점점 커지는 빈부격차, 사람들이 가졌던 믿음의 상실 등이다. 중국 현대화는 무엇이 잘못됐을까? 누가 이런 곤경을 책임져야 할까? 이런 곤경에서 중국이 빠져나올 방법이 있을까? 현재 방식의 현대화에 대한 대안이 있을까? 물론 이런 질문은 대답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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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인류는 자멸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지구헌장(Earth Charter)을 여는 글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지구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서 있다. 지금은 인류가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다. 인류는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도달했다. 지구와 호혜적 균형을 이루면서 평화, 아름다움, 창조력, 물질적 만족, 그리고 영적 풍요라는 오랫동안 부정돼온 인간의 꿈을 이루는 것은 우리 인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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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계 파괴는 산업문명의 후유증이다 현재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산업문명은 인류 역사상 그리 오래된 문명 형태가 아니다. 16세기 유럽에서 근대적 사고방식이 시작된 것을 기점으로, 이후 과학과 기계기술의 발전과 함께 폭발적으로 확산된 삶의 방식이다. 산업문명은 인류에게 유례없는 물질적 풍요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 산업문명에도 부작용이 생겼다. 첫째는 구조화된 빈부차이다. 산업혁명에 의해서 가능해진 물질적 풍요가 모든 사람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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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타인, 환경과 살아가는 방식이다 생태문명’이란 맥락에서 ‘문명’이란 용어는 대개 ‘공유된 가치를 가지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뜻한다. 문명은 농업부터 경제, 거버넌스, 교육, 종교, 교통, 의학, 건축, 예술, 음악 등 모든 것을 포함한다. 기본적으로 우리 인간이 타인, 그리고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방식이다. (생태문명이라는 대안이 필요한) 현재 우리의 문명은 ‘현대문명’ 혹은 줄여서 ‘현대성’으로 불린다.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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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글: 올해도 예외 없이 기후변화에 따른 온갖 재난이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모두를 열거할 수 없는 엄청난 재난현상들이 해가 갈수록 정도를 더하고 있고, 연전(年前)부터 국제회의마다 기후변화를 넘어서 생태위기와 인류세의 멸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사회는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무감하고 무책임으로 일관해 오고 있다. 에너지 과소비의 산업구조, 일인당 폐비닐 배출 세계 1위 국가, 탄소배출량을 감소하기는커녕 화석연료발전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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